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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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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admin | 목, 2021/04/29- 01:19

[소장자료 톺아보기 25]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 강동민 자료팀장

 

 

<애국 제10 조선호> 엽서, 14.1×9.1 식민지 조선에서 ‘국방헌납운동’으로 전개한 모금으로 일본에 최초로 헌납한 비행기. 기종은 주로 사격관측과 연락에 사용하는 정찰기(偵察機)다.

 

‘애국 제10 [조선]호’ 명명식 장면, 매일신보 1932년 4월 18일자 2면 1932년 4월 17일 오전 11시, 애국기 헌납식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우가키 조선총독을 비롯해 총독부 주요 관료, 군사령부 수뇌부와 함께 한상룡, 윤치호 등 친일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애국기와 보국기 목록, <방공독본>, 1933 ‘제10호 조선’과 ‘제20, 21호 조선’이 표기되어 있는 <방공독본>. 번호와 기종, 헌납자(지역)가 기재되어 있다. 일본은 물론 조선과 타이완 등 식민지에서 비행기가 헌납될 때마다 순서대로 호수와 이름을 붙였다.

‘애국 제10 조선호’, <한국백년>, 동아일보사
‘1936년 5월 15일’은 오기다. 다만 1932년 5월 15일 오전 10시, ‘제20, 21호 조선호’의 명명식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거행되었고 기념엽서에도 이 날짜의 엽서인(印)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참고하여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애국 제10 조선호’, <한국사>,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에 잘못 기재된 사례. ‘애국 헌납기 1444호’는 지역명이 붙여진 ‘경기시흥’호이다.

‘애국 제1444(경기시흥)호’ 전투기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왼쪽) ‘애국 제133(경성제1)호’ 소형연락기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오른쪽)

‘애국 제10, 제20, 제21 조선호’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

‘보국 제73(문명기)호’(文明琦號), <시정25년사>, 1935 일본인 유력자들과 행정기관장을 중심으로 시작된 애국기 헌납운동은 문명기가 ‘1군郡 1기機 헌납운동’을 주도하면서 조선인의 애국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는 1934년 자신이 경영하던 금광을 일제의 주선으로 미쓰코시三越 재벌에게 12만 엔에 인계하는 대신 1935년에 육군기(애국기)와 해군기(보국기) 각각 한 대씩을 헌납하는 비용인 10만 엔의 국방헌금을 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친일 부호들이 경쟁적으로 국방 헌납에 참여했다.

(광고)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조일신문(남선판)>, 1944년 7월 9일 4면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와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이 비행기 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당시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와 사업부장,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과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로 재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사히신문에 기명 광고를 게재해 비행기 헌납을 선동하기도 했다.

 

“여러분의 적성으로 된 애국 제10호기 조선호가 도착하였습니다. 아울러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여러
분께 깊이 감사를 올립니다.”
– <매일신보>, 1932년 4월 15일자 2면

1932년 4월 14일 정오 무렵, 경성 하늘에 이와 같은 오색(五色) 선전문을 뿌리는 비행기 한 대
가 나타났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헌납기’ 조선호가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호는 경성 상
공을 한 번 돌더니 조선군사령부 수뇌부와 체신국 간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여의도 비행장에 곧
착륙을 하였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하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한편, 부
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방헌납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가
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애국기 헌납’이다.
‘애국기’는 지역민이나 기업, 단체 그리고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를 일컫
는데 육군용은 애국기(愛國機), 해군용은 보국기(報國機)라 불렀다.
‘애국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는 기종에 따라 1대에 최저 6만 원(현재 약 6억 원)에서 2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이 필요했다. 따
라서 부호 몇 명의 힘으로 충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 조직과 단체를 동원한 모금운동
이 조선 전 지역에 벌어졌다.
일본인 유력자와 행정기관장이 나서서 ‘애국기 헌납 운동’을 시작한 후 ‘1군(郡) 1기(機) 헌납
운동’을 주도한 문명기를 필두로 조선인 헌납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애국기 헌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연수, 문명기, 최창학, 김용주 등 조선인 부호들을
비롯해 부·도·군민 등의 지방단위, 학교나 종교단체, 전쟁협력을 위해 조직된 관변·동원단체 등
다양한 개인과 단체가 애국기 헌납운동에 참여했다.
전쟁이 확대될수록 일제는 물자공급과 항공전 수행을 위해 더 많은 비행기 헌납을 요구했다.
일반인은 물론 초·중등학생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애국부인회를 이용하여 국방헌금을 위한 바자
회를 개최했으며 심지어 기생들의 화대까지 ‘애국기 헌금’에 동원되었다. 일제는 연일 ‘미담사례’
를 홍보하고 헌금액과 헌금자의 명단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일본의 패배로 끝난 1945년까지 식민
지 조선인의 피와 땀의 강요로 헌납한 ‘애국기’는 수백 대에 달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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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22]

명치신궁 성덕기념 회화관에 걸린 ‘한국병합’ 벽화그림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에 걸려 있는 77번 벽화 「일한합방」의 내용을 담은 그림엽서이다. 이 그림은 츠지 히사시(辻永)가 그렸으며, 조선총독부가 헌납하는 형태로 1927년에 제작 완성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도쿄부 양정관 국사회화관에 걸려 있는 70번 벽화 「한국병합」의 내용을 담은 그림도판이다. 이 그림은 나가토치 히데타(永地秀太)가 그렸으며, 1942년에 제작 완성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경술국치와 관련한 전시도록에 곧잘 등장하는 것으로 ‘경성 남대문’의 모습을 그려놓은 한장의 그림엽서가 있다. 여기에는 석축(石築)에 담쟁이덩굴이 제법 달라붙어 있는 남대문의 전경과 그 뒤로 흘러내리는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여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린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천황의 은덕이 가져다 준 평화를 기뻐하고 있는 양 거리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 엽서의 위쪽에는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 벽화(明治神宮 外苑 聖德記念繪畫館壁畫)”라는 표시가 있고, 아래쪽에는 다시 “[77] 일한합방(日韓合邦), 츠지 히사시 필(辻永 筆), 조선각도 봉납(朝鮮各道 奉納), 명치(明治) 43년 8월 29일, 경성 남대문”이라는 구절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제목으로만 본다면 필시 1910년 8월 29일의 상황인 듯이 오해하기 십상이나 그 시절에는 담쟁이덩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야 맞고, 실제로 이 그림의 초안이 그려진 것은 1925년의 일로 확인된다.
성덕기념회화관(1919.3.5일 착공, 1926.10.22일 준공)은 1912년 명치천황의 장례가 치러진 일본 도쿄 아오야마연병장(靑山練兵場) 장장전(葬場殿)이 있던 자리에 건설된 미술관으로, 죽은 천황과 황후의 유덕(遺德)을 연대순으로 묘사한 그림 80점(일본화 40점, 서양화 40점)이 이곳에 전시되었다. 그림의 제작은 당시의 화족(華族), 국가기관, 지방공공단체, 민간기업 등이 봉납하는 형태로 이뤄졌으며, 이 가운데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 1882~1946)가 그린 ‘66번 서양화’ 「일영동맹(日英同盟, 1932년 완성)」은 조선은행(朝鮮銀行)이, 츠지 히사시(辻永, 1884~1974)가 그린 ‘77번 서양화’ 「일한합방(日韓合邦, 1927년 완성)」은 조선총독부가 각각 헌납한 것이었다.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일한병합(日韓倂合)의 대벽화(大壁畫)를 그리다, 총독부(總督府)로부터의 위촉(委囑)으로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 어젯밤 입성(入城)」 제하의 기사에는 이 그림의 제작과정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그가 사방 9척(尺)에 달하는 벽화의 화재(畵材)를 찾기 위해 평양, 인천, 기타 지방에 돌아다녔으며, 파성관(巴城館, 본정 2정목 93번지)에 터를 잡고 이곳에 화실(畵室)을 꾸민 다음 약 1개월가량 머물며 타카기 하이스이(高木背水, 1877~1943)의 도움을 받아 하도(下圖, 밑그림)를 완성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채록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 그림의 초안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는지 ????조선신문???? 1925년 5월 20일자에 수록된 「남대문(南大門) 앞에서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벽화(壁畫)를 찾아서,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의 분투, 쉽지 않습니다 …… 라고」 제하의 기사는 작품의 제작 상황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명치신궁의 대벽화의 화제(畵題)를 구하기 위해 체경중(滯京中)인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은 파성관(巴城館, 하죠칸)에 투숙하고 이에 10일 정도는 매일 오전 5시경부터 본사(本社, 조선신문사) 앞의 그린에 캔버스를 세우고 파레트를 한 팔에 열심히 브러쉬를 잡고 있었는데, 벌써 19일의 아침에는 캔버스의 한 면에 남대문을 전경(前景)으로 하여 짙푸른 남산(南山)이 등장하고 있었다. 츠지 히사시 화백은 브러쉬를 놓고 말한다. 
“벽화는 바야흐로 남대문 이것으로 결정하고, 10일 남짓 매일 오전 5시부터 스케치를 나와 있습니다만 이 원화(原畵)의 50배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일단 완성되었지만 그 위에 부분 부분의 스케치를 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깐 한숨 돌리고 20일부터 4일간 정도는 미나미 군(南君)과 함께 평양에 다녀옵니다. 평소는 늦잠꾸러기라서 5시부터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소이다.…….”

 

여기에 나오는 ‘미나미 군’은 나중에 도쿄미술학교의 교수를 지내는 미나미 쿤조(南薰造, 1883~1950)를 가리킨다. 미나미는 이 당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선전) 심사원(제2부 서양화 및 조각)으로 초빙되어 경성에 체류하던 상태였으며, 때마침 츠지도 경성에 머무는 김에 선전의 심사원으로 함께 위촉되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일한병합’의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츠지 히사시가 경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의 보도 내용이다.

 

츠지 히사시가 한 달 가량을 체류하면서 ‘일한병합’의 벽화 원도를 구상할 때에 자신의 화실로 사용했던 ‘파성관(巴城館) 호텔’의 광고문안이다.

 

그런데 명치천황의 위업으로 치장된 ‘한국병합’ 관련 벽화그림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도쿄부 양정관(東京府 養正館)에 설치된 국사회화(國史繪畵)에도 이와 동일한 종류의 벽화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3년 12월 23일에 황태자(皇太子, 나중의 아키히토 천황)가 탄생하자 이를 기리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일본 도쿄부에서는 “국사(國史)를 통해 웅대한 조국정신(肇國精神)을 체득하고 일본정신(日本精神)을 연성시키고자” 청소년수양도장의 창건을 기획하였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1937년 12월에 준공된 ‘도쿄부 양정관’이었다. 이곳의 본관에는 회화진열실이 마련되어 일본사에서 77개의 화제(畵題)를 선정하여 이를 일본화 45점과 서양화 32점으로 제작한 벽화가 상설 전시되었다.
이 가운데 70번째 그림이 바로 나가토치 히데타(永地秀太, 1873~1942)가 그린 「한국병합(韓國倂合)」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전경과 저 너머로 백악산과 북한산 자락에 그려져 있고, 시가지에 그득한 기와집들마다 일장기가 나부끼는 광경이 담겨 있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갓 쓴 조선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과 함께 조선인 소녀와 일본인 소년이 나란히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일장기를 잡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1942년 12월에 벽화가 완성되자 ????도쿄부 양정관 국사벽화집(東京府 養正館 國史壁畵集)????에도 수록되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더구나 1943년 5월 29일에는 자신의 탄생 기념공간으로 만들어진 이곳 양정관에 일본 황태자가 직접 들러 벽화를 하나씩 세세히 관람하고 간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듣자 하니 양정관에 걸려 있는 벽화 그림들은 1955년에 이르러 이세신궁 징고관(伊勢神宮徵古館)으로 이관되어 이곳에서 관리 진열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래저래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서는 영광스런 역사의 한 장면으로 치장이 되어 반영구적으로 그 흔적을 남기게 될 모양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수, 2020/12/3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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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를 빛낸 사람들

– 이상호 화백이 들려주는 작품 해설

인터뷰 : 이지훈
광주지부 사무국장

전남 영암 출신인 이상호 화백은 조선대학교 서양학과 4학년이던 1987년, 조선대학교 미술패 후배들과의 공동 작품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를 제작해 미술인 최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악명 높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이상호 화백은 불교를 주제로 한 그림에 몰입하면서도 동학혁명, 4·19, 5·18, 통일 등 역사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당초 작년에 개최 예정이던 제13회 광주비엔날레는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4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다.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받은 이상호 화백은 친일파를 주제로 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대작을 출품해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은 연구소와 광주지부 회원들과 광주시민들의 후원으로 완성되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상호 화백과의 인터뷰를 광주지부에 부탁하였다. 인터뷰를 기꺼이 맡아준 이지훈 사무국장과 인터뷰에 응한 이상호 화백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편집자주

 

이상호 화백

이지훈 광주지부 사무국장

 

●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 잘못된 역사가 시작된 곳이 궁금했어요. 부정한 권력 앞에 왜 다수의 민중들이 희생되는 시대가 계속되는지. 저는 그 잘못된 역사의 뿌리에는 ‘친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친일의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니까 계속해서 굴절된 역사가 이어온 것입니다. 저는 이 잘못된 역사가 후세까지는 연결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 그림 그리는 데에는 얼마나 걸렸나요?
● 작품에 대한 구상은 2019년도에 처음 했구요. 본격적으로 붓을 든 것은 2020년 1월부터였습니다.

● 혼자서 작업하셨나요?
● 아닙니다. 자료를 모을 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많이 도와줬습니다. 민족미술인협회 가족들도 많이 도와주고 주변 예술인들도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광주지부 김홍길 회원님이 만든 영상을 보니 미리 소식을 들은 많은 시민들이 응원해 주셨더라구요. 시민들의 응원 소리를 들으면 힘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죠.

● 인물 선정 작업이 꽤 어려웠을 텐데요.
● 맞습니다. 개인, 가문, 단체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 참 민감했어요. 더군다나 친일전력을 가진 인물들의 후손들이 대부분 현재까지도 권력의 일선에 계신 분들이거든요. 그래서 공정성, 객관성을 더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수록된 인물들, 그리고 각종 역사 서적에 올라있는 친일인물들 중 친일 전력이 뚜렷한 인물들만 골라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 빠진 인물들도 언젠가 제가 그림으로 소환할 예정입니다.

● 그리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 친일파들 얼굴을 1년 내내 들여다보며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엔 정이 들더군요.(웃음) 얼굴을 그리고 옷을 입히고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우는 동안 제 마음 한켠에선 묘한 연민 같은 게 들었습니다.
당신들도 처음에 태어났을 땐 부모님께 사랑받는 총명한 아이였을 테고 배울 만큼 배운 수재였을텐데 어떻게 잘못된 선택을 해서 후세에게 영원히 지탄받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는 동정심이 일었어요. 실제로 그림을 보면 느끼시겠지만 하나하나 다 말끔한 용모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후세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남겨진단 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측은지심이 들지만 그들이 지은 죄는 역사적 단죄를 받아야 합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1995)

 

이상호 제1회 개인전-역사의 길목에 서서 2015.9.10~16

 

● ‘일제를 빛낸 사람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네, 총 92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이 그림 속에 들어있습니다. 가운데에 위치한 크게 그려진 인물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반민족 행적이 이어지는 적극 친일파 19명입니다. 그리고 이들 주위를 73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에 경중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친일의 뿌리이자 주축 역할을 한 인물들을 중앙에 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분야별, 시대별로 인물들을 모아놨습니다.
참고로 분야별 인물은 관료 22명, 경제·언론 14명, 군인·경찰 16명, 교육·예술 27명, 친일단체·종교·밀정 13명입니다. 시대별은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을사오적을 시작으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흘러갑니다. 을사오적을 중심으로는 대부분 왕족, 관료 출신 매국노들입니다. 을사오적 밑으로는 이용구 송병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병준은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보다 더한 조건을 일왕에게 내걸었던 일급 매국노입니다. 한때 동학농민혁명에도 참가했던 이용구 또한 나라 팔아먹는 데 앞장섰습니다. 정미칠적, 경술국적 밑으로는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았던 매국노들과 경제·금융계에서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던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시 친일파들은 혈연적으로 많이 엮여 있었는데요.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사위)지만 친일로 돌아서 부를 축적한 친일파의 표본인 자입니다. 우리 지역 화순의 농선이라는 기생과의 일화도 있죠. 박기순 박영철 부자는 곡창지대인 전북지역의 대지주 출신으로 일제에 적극 부역해 부를 축적합니다. 깡말라가는 농민들과는 대조적으로 비만한 체격으로 유명합니다. 한상룡은 이완용의 외조카로 속칭 우봉 이씨은행으로 불렸던 한성은행 전무로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북촌에 가면 백인제 가옥이라는 고택이 있는데 그 집의 원래 주인이 한상룡입니다. 그 옆 민영휘는 친일전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입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친일전력이 많이 드러나 있는 인물입니다. 나라를 팔아 재산을 늘렸던 친일파들은 나중에 반민특위 1호 검거자인 박흥식이 있습니다. 그 외에 실업계 김성수, 김연수, 금융계 현준호, 김용주, 대지주로는 박기순, 박영철 등 친일 경제인들입니다. 김성수 김연수는 형제지간이고, 현준호와 김용주는 사돈지간이며, 박기순 박영철은 부자지간입니다. 태창직물로 당대 재벌인 백낙승은 일제강점기 때 아들(백남준)을 차에 태워 등교를 시킬 정도로 재산이 많았는데요 당시 차를 총 7대나 가진 거부였습니다. 막대한 재산은 사실 방직공장에서 착취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고혈을 뽑아 만든 재산입니다.

이상호 전정호 공동전시회-응답하라 1987, 2017.4.25~7.30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부터는 3·1만세의거 이후 다른 형태의 친일파들이 등장하는데 주로 교육 언론 문화계 출신,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친일파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특히 신교육을 받았던 여성 교육계가 대표적이었는데요. 그 인물들을 이곳에 모아 그렸습니다. 김활란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여성계의 대표적 지도인사로 자리 잡지만 나중엔 제자들을 전장으로 내보내는 등 자진해서 일제에 적극 협력합니다. 나중엔 이승만 독재에 부역하고 박정희 독재에도 부역하면서 권력의 해바라기를 자처했습니다. 아직도 이화여대엔 김활란 동상이 서있어요. 다른 여성 친일파들(황신덕, 박인덕, 노천명, 모윤숙 등)도 사학재단의 설립자로, 대표적인 여류 문인으로 아직까지 존경받고 있습니다. 
언론계의 대표적 친일파는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가 대표적입니다. 친일 사설로 일제에 아첨했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어린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프랑스는 해방 후 나치에 부역하지 않았던 신문이라도 나치 치하에서 15일 이상 간행했던 신문사라면 모조리 폐간시켰습니다. 국민의 여론과 사상을 바르게 이끌고 나가야 할 언론이 나치 치하 식민지 상황인데도 정상적으로 발행됐다는 것 자체가 반민족행위라는 뜻이었습니다.
프랑스가 언론·문화계 인사들에게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에 비해 대한민국 두 신문사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론사들입니다. 너무도 상반된 현실입니다. 우리 문학계를 대표했던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등등은 정말 글 잘 쓰는 천재들입니다만 그 좋은 머리를 일왕의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썼습니다. 2·8 독립선언문을 쓴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써 한민족을 비하했고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대표적 어용 문인이 됩니다. 더욱 슬픈 일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이들이 독립운동가인 줄 알고 배워왔으며 이들의 작품을 줄줄 외워야만 진학할 수 있었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들 이후로 문학계에는 수많은 친일파가 양산되는데 김억, 김동환, 주요한, 이무영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술계 또한 대단한 친일파들이 많습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일본 국적을 원했으니 그의 바람대로 ‘에키타이 안’으로 불러야 맞습니다. 유럽 체류 당시에는 친나치 부역 혐의까지 있는 그가 1942년 만주국의 건국 10주년을 축하하여 만든 연주곡이 바로 <만주환상곡>입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만주환상곡>은 <한국환상곡>으로 이름을 바꿔 우리 애국가의 모태가 됩니다.
일본군 찬양 노래인 <선구자>를 독립군 찬양 노래로 둔갑시킨 조두남. <혈서지원> 등 수많은 징병 권유 노래로 수많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몬 박시춘, 남인수. 희망의 나라의 실체가 의문인 <희망의 나라>를 만든 현제명. 친일파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며 부를 축적한 조선 마지막 어용화사 김은호. 매년 전시체제 영화를 보급하며 나운규의 <아리랑>에 먹칠한 영화인 최인규.

 

이상호 제2회 개인전 – 연필로 그린 부처님(2018.5.2~31)에 출품한 녹원전법

 

일제강점 말기가 되어갈수록 신성해야 될 종교계 또한 친일파들이 장악합니다.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일본신도 침례의식과 궁성요배를 강요했던 불교계 이종욱, 권상로. 개신교의 정춘수, 백낙준, 전필순 그리고 대동아성전을 부르짖은 천주교의 장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휘말리면서 많은 청년들이 출세를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혈서지원을 쓰고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제 황군이 되는 것이었죠. 바로 친일군인들의 등장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멸사봉공’ ‘견마지로’의 혈서를 쓰고 만주군 장교가 되었던 박정희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만주군벌들이 박정희의
지원 전후로 군국주의 전사가 되기 위해 일제 황군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선택을 하기까진 일본 육사 출신 이응준과 김석원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응준(일본육사 26기. 장인 이갑 독립지사 / 사위 이형근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은 일본육사 시절 독립군이 되기 위해 탈출한 지청천과 동기였으나 빼앗긴 조선을 되찾는 독립군보다 일본군이 되기로 작정하고 일본군 대좌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김석원은 일본 육사 27기로 일본군보다 더 일본군 같은 맹렬함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인물입니다. 역시 대좌까지 진급했어요. 이응준과 김석원은 해방 이후에도 친일전력을 가진 군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일제를 빛낸 사람들’

 

두 일본 육사 군벌 외에 1940년을 전후해 만주군벌들의 전성시대가 열립니다. 김백일, 백선엽등 대표적인 친일군인 외에도 화폭이 모자랄 정도로 많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독립군에게 총칼을 들이대던 자들이었습니다. 친일군인들은 박정희 독재를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이들이 독립지사들과 함께 대한민국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것이 참 슬픈 현실입니다.
군인 못지않게 경찰 중에도 무수한 친일 악질 경찰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친일경찰로는 노덕술과 하판락이 있습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친일행적으로 굳이 따로 해설이 필요 없는 인물들입니다. 다음 작품이 그려진다면 친일경찰을 더 많이 그려넣을 작정입니다. 
마지막으로 해설하고픈 인물은 바로 우봉 이씨로서 제2공화국 때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이병도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뛰어난 역사학자였던 그는 일제 사학자들 밑에서 식민사관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근무했으며 청구학회, 진단학회 등 학술단체에 관여하면서 수많은 식민사학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이자가 해방 이후에도 심판받지 않고 오히려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서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하였고 사학계의 식민유제를 잔존시켰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병도를 그릴 때 너무도 분했고 한편으론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자가 사학계 거두로서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에…

● 이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 불의는 언젠간 벌을 받게 되어있으며 정의는 언젠가 다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청산되지 않은 불의의 역사라 할지라도 끝내는 바르게 고쳐지는 것이 인간의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입니다. 불의는 정의에 의해 반드시 청산된다는 것을 그림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어요.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 많은 시민들이 응원해주셨습니다. 힘들 때마다 제겐 큰 힘이 되었구요. 제 그림을 위해 열심히 응원해주신 시민들에게 모든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목, 2021/03/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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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조선총독부의 모범생
– 김성수(金性洙) 장례식 풍경

강동민 자료팀장

동아일보에 실린 인촌 김성수 부고와 장례 안내

해방공간을 거세게 휘몰아치던 ‘친일파 청산’ 구호는 친일세력과 손잡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키자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친일파는 오히려 ‘건국의 주역’, ‘반공투사’로 둔갑하여 한국 사회의 지배층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제 부역
언론인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다.
김성수는 중일전쟁(1937년) 직후 전국시국강연회의 강사로 나선 것을 시작으로,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전쟁협력을 독려하는 수많은 기고문과 연설을 남겼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다’면서 ‘천황’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라고 몰아세웠다. 그의 친일활동은 전시체제기 내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방 후,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과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하고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51년 6월에 대한민국 부통령이 되었다.

 


김성수는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에 사망했다(①). 빈소는 서울시 계동 132번지 김성수자택에 마련되었는데(②) 김성수가 전시물자 부족현상을 메꾸기 위한 ‘금속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자택 철문 등 약 2백관(750kg)을 떼어 해군무관부에 헌납한 바로 그 집이다(③). 김성수 사망 바로 다음 날인 2월 19일 오전, 빈소에 이승만이 방문(④)하고 이날 국무회의에서 김성수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결정되었다. 동아일보는 2월 20일자 지면을 통해 ‘일생을 국가, 민족을 위해 바친 인촌 선생이 「펭끼」(페인트)조차 벗겨진 초라한 자택에서 만민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고 김성수의 사망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육당 최남선은 김성수를 애도하는 시를 동아일보에 게재하였다(⑤).

2월 24일 오전 8시에 명동성당에서 연미사(위령미사) 거행(⑥)후 서울운동장에서 장례식을 진행하였는데(⑦) 이때 김성수의 약력보고를 이화여대 총장인 김활란이 맡았다(⑧). 서울운동장에서 장례식 후 장의 행렬은 동아일보 사옥을 지나(⑨) 이화여대 부속병원 앞을 통해서(⑩) 장지인 안암동의 고려대 뒷산에 도착하여 하관하였다(⑪). 김성수의 묘는 1987년 남양주로 이장하였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거두 김성수는 이렇게 땅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후손과 추종자들은 무덤에서 그를 살려냈다. 식민지조선의 청년 학생들을 침략전쟁으로 내몰아 처단해야 할 친일파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까지 하던 김성수가 반공을 내세운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채 말이다

목, 2021/03/2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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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개혁은 파고(波高)가 높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아버지는 어부였다. 소년시절부터 중선中船을 타고 먼 바다를 항해했다. 과거 어업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고 통신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자칫 폭풍우라도 만나면 난파당하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소형어선을 구입해 선주가 된 뒤로는 나도 가끔 어선을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1톤 미만의 소형어선은 3~4m의 파고 앞에선 강물 위에 뜬 가랑잎과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천당과 지
옥을 오갔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배를 운전했다. 큰 파고를 넘는 것은 정면승부로는 안 된다. 옆으로 항해하면 뒤집힌다. 정면과 옆면 사이의 빈틈을 정교하게 가로지를 줄 알아야 무사히 항구에 당도할 수 있다.
‘역사는 피를 먹고 진보한다’고 말한다. 개혁의 피, 혁명의 피가 역사를 진보시킨다는 말이다. 혁명은 한 번 성공했다 할지라도 곧 반혁명의 파고가 덮치며 위기를 맞곤 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앙시앵레짐 다시 말해서 구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됐다. 자본주의 발달로 상공시민계급인 ‘부르주아지’가 성장해서 나라의 중추를 이뤘지만, 권력과 특권은 여전히 구체제의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갖고 있었다. 부의
편중도 극심했으며 민중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했다. 민중들은 불만이 컸지만, 혁명의 주체가 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은 지식과 경제력을 갖춘 부르주아지가 시 작했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불만해소, 다시 말해서 귀족과 성직자가 독점한 권력과 특권을 나눠 갖고 신분제 타파와 입헌군주정을 수립하는 수준에서 혁명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혁명을 전개하면서 각성한 민중과 급진파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이 진실이고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깨닫기 시작한 민중들은 부르주아지의 목적과 한계도 파악했다. 프랑스혁명의 유럽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침략한 대프랑스동맹연합군을 저지했던 민중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진보주의자였던 부르주아지들은 보수파로 규정되었고 부르주아지 정권의 급진파 자코뱅당이 정권을 잡았다. 자코뱅당의 과감한 정책은 일시적으로 민중들을 환호하게 했지만 몇 년간 계속된 대립과 혼란은 피로감을 주었다. 더욱 선명한 의식과 행동이 요구되면서 혁명세력도 분열됐다. 권력은 잃었지만,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에서 앞선 부르주아지들의 획책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 뒤의 상황은 우리가 잘 안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급진파가 몰락한 상태에서 정권을 잡은 부르주아
지들은 갈피를 못 잡았고 대프랑스동맹군을 격파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한 나폴레옹이정권을 잡았다. 나폴레옹 몰락 뒤에는 절대왕정이 부활했다. 혁명과 반혁명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비록 시간은 걸렸지만, 역사는 진보했고 정의는 승리했다는 것을.
촛불혁명은 문재인 정권을 낳았다. 우리 국민들은 문재인 정권이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냉전적 사고에서 탈피해 평화통일의 교두보를 마련해달라는 주문도 했다. 지난 총선에서는 민주당에 몰표를 주면서까지 염원을 표현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우리는 정말 다사다난을 경험했다. 역사적 과제에 집중하기에는 코로나19가 너무 강했고 정치·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오랫동안 국민의 염원이었던 검찰개혁은 좌초된 듯 보이며 언론개혁은 칼집에서 칼을 빼내지도 못했다. 검찰과 언론, 보수정치권이 일치단결해 구체제의 특권을 지켜내려는 분투도 지켜봤다. 개혁 뒤의 반개혁을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실망하기는 이르다. 우리에게는 촛불혁명을 달성했던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좀 더 정의롭고 평등하며 살맛나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열망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해 소처럼 느리더라도 꾸준히, 반개혁의 파고 사이로 정교하게 개혁이 추진되기를 소망한다. 개혁은 파고가 높다. <평택시사신문> 2021.1.13

화, 2021/03/0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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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18]

‘한국병합’을 기념한 침략의 주범들
– 「한국병합기념화보」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오사카신보大阪新報>가 제7666호 부록으로 제작한 「한국병합기념화보」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한 달 후인 1910년 9월 28일에 발행된 화보로 일본 내각의 주요 인물과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 메이지‘천황’ 무쓰히토의 사진을 중앙 상단에 배치하였는데 ‘메이지明治’의 이름을 생략하였다.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성스러운 천황의 이름’이라 표기하지 않고 비워 둔 것이다. 바로 밑에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다. 태황제인 고종을 ‘이태왕’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표기했다. 이는 일본이 병합과 동시에 한국의 황제·황족을 왕족·공족으로 전락시키고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이어온 조선왕조를 패망시켰음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표기한 것이다.
메이지 사진 양측에는 조선침략에 앞장선 주요 인물들과 병합의 공로가 있는 조선의 인물을 배치하였다. 우측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필두로 ‘소야만국小野蠻國’이라며 조선을 멸시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정한론의 중심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명성황후를 살해하고도 무죄를 확신한 극악무도한 범죄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의병 대탄압을 지휘하고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등 32명의 인물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좌측에는 을사늑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이익선 보호’라며 조선 침략을 주창한 일본 군부 세력의 거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강제병합을 자랑하고 무단통치를 감행한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금융지배를 확립하고 ‘한국병합기념장’ 수여받은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와 ‘일본의 보호정치는 한국의 이권’이라고 주장한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가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실려 있다.
이들 사진 밑에 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조선왕실 종친들, 개화파 김옥균과 박영효,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을 주도한 이완용, 이지용 등 주요 관리들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렇게 하여 강제병합과 관련된 일본의 주요 인물 57명, 유일한 외국인 스티븐스, 조선인 주요인물 17명 등 총 75명의 강제병합 주역들이 화보 상단을 채우고 있다. 화보의 하단에는 조선 13도를 그린 지도를 싣고 있는데 금, 은, 동, 철 등 조선의 지하자원 분포와 담배, 면화, 목화 등 재배 식물과 철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의 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와 함께 ‘일한연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내용이 기가 막히다. 한일관계를 ‘숭신천황 65년 7월, 임나국任那國의 소나카시치蘇那曷叱知가 조공을 받치면서 시작되었다.
’고 하면서 ‘신공황후가 여러 제국에 명하여 배를 타고 삼한 정벌’을 감행한 결과로 기술하고 있다. 주
로 일본이 한반도를 정벌하거나 조공을 바쳐온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데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고 강화도 개항의 시초인 운요호 사건, 청일·러일전쟁으로 맺은 각종 조약의 과정들을 기술하였다. 연표의 마지막은 ‘명치 43년 8월 29일 한국병합을 달성하여 관보 호외에 발표’한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는데 연표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에 1909년 12월 말 통계조사에 따른 ‘조선국세일람’으로 조선의 면적, 인구, 재정 현황, 중요 생산액 등의 정보를 실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를 발행한 <오사카신보>는 오사카에서 발행된 3대 신문 중 하나로 1900년 9월 15일에 결성된 입헌정우회의 기관지이다. 입헌정우회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재를 맡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당으로 한때 3·1운동 탄압을 총지휘한 하라 타카시原敬가 사장이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에도 등장하는 하라 타카시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이번 사건을 국내외에 극히 가벼운 문제로 알리되 실제로는 엄중한 처치를 취하고 재발방지를 기하라’는 훈령을 내린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었다.
202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지 11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강점기 징용문제, 일본군 성노예문제 등 아베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은 「한국병합기념화보」에 실려 있는 침략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파렴치한 저들의 행보를 끝까지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해방 후 75년이 지나도 지속되고 있는 저들의 가해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1910년 8월 29일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 강동민 자료팀장

수, 2020/08/2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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