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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日역사부정 실체]①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 램지어 주장, 어디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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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日역사부정 실체]①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 램지어 주장, 어디서 왔나?

admin | 화, 2021/04/13- 01:53

위안부를 ‘자발적 계약 매춘부’라 규정한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국제학술지 논문이 국내외에서 파문을 일으킨 지 두 달여가 지났다.

많은 연구자들이 램지어 교수의 심각한 연구윤리 위반과 왜곡된 역사인식을 비판하며 논문 철회를 요구했지만, 출판사 측은 논문 출간 방침을 아직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학문적 진실성 측면에서뿐 아니라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기존 역사부정주의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KBS는 국내외 일본군 위안부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일본과 한국의 역사부정주의자들의 논법과 주장이 어떻게 하버드대와 국제학술지의 형식으로 출현할 수 있었는지 집중 추적하는 기사를 4월 12일부터사흘에 걸쳐 연재한다.

이를 통해 램지어 교수 뒤에 숨어 있는 한미일 역사부정·혐오 네트워크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 램지어의 역사부정주의적 시각, 어디서 왔나?

‘태평양 전쟁에서 성을 위한 계약’. 지난해 12월 1일 ‘국제 법경제학 리뷰’ 온라인판에 실린 램지어 교수의 논문 제목이다.

논문의 2개 키워드인 ‘매춘’ ‘노역 계약’이 분명히 가리키듯 램지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노역 계약을 맺은 매춘부였다는 주장에 논의를 집중한다. 자발적 계약에 따라 성매매 여성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강제 동원은 없었고 성노예도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KBS는 이 같은 주장이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램지어 교수 논문을 일본과 한국의 대표적 우파 학자의 저서와 비교해 보았다. 비교 대상은 일본 역사부정주의 대부라 불리는 하타 이쿠히코 전 니혼대학 교수의 1999년 학술서 ‘위안부와 전장의 성’, 그리고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2019년 저서 ‘반일 종족주의’이다.

특히 하타 교수의 저서는 우파 위안부론의 대표적인 참고문헌으로, 한일 우파 논객들이 즐겨 읽고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연장”

램지어 교수는 위안소를 “해외 군사용 성매매 업소”로 설명한다. 이 점에 대해선 하타 교수가 이미 “종군 위안부 시스템은 전쟁 전 일본 공창제의 전쟁지역 버전”이라고 규정했고, 이영훈 교수도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편성된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다.

세 사람 모두 “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연장이었다, 당시 공창제는 합법이었다, 따라서 위안부제 또한 합법이었다”라는 억지 삼단논법을 사용한다.

2. “자유의사에 따른 합법적 계약”

“‘신뢰가능한 약속’에 따라 여성과 성매매 업소가 노역 계약을 체결했다”는 램지어 교수 논문의 핵심 주장은 “고용주와 위안부 사이의 계약”이라는 하타 교수, “주선업자들이 취업승낙서를 받아 딸을 데려갔다”는 이영훈 교수 주장과 맞닿아 있다.

3. “민간업자가 모집…일본군 책임 없어”

위안부 모집에 대해 램지어 교수는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강제로 성매매시키지 않았다”면서 “모집업자들이 거짓말을 했을 수 있다”는 말로 책임을 민간업자에게 돌린다.

하타 교수의 “업자의 악덕함이 심했다”는 주장, 이영훈 교수의 “(주선업자에 의해) 좋은 곳에 취직시킨다는 감언이설의 속임수가 동원”되었다는 표현과 겹친다.

세 사람 모두 일본군의 역할은 업주의 착취와 성병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이른바 ‘좋은 관여’였다고 강조한다.

4. “위안부는 고수익 업종”

“전시에 위안부가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3국 학자의 공통된 주장이다.

5. “자유 폐업·귀향 가능”

세 교수는 성매매는 자유 계약이었기에 여성들이 선불금을 갚으면 자유롭게 폐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도 주장한다.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의 저자인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역사부정주의자들이 계약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계약을 강조하면, 문제가 생기더라도 실제 계약 당사자인 업자와 군 위안부로 동원되는 여성의 호주 사이의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위안부를 모집하라고 지시하고 심지어 돈까지 댄 일본군의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업자의 착취를 막기 위해 관여한 좋은 일본군으로 남게 되는 효과까지 생긴다”라고 설명한다.

사실 램지어 교수는 이미 1991년 논문 ‘제국 일본의 계약 매춘: 상업적 성 산업에서 신뢰가능한 책임’에서 20세기 초 매춘을 자율 계약으로 파악했다. 전쟁 전 성매매 여성의 자율 계약 개념을 전시 위안부와 연결시킨 건 하타 이쿠히코였고, 램지어 교수가 다시 이를 받아 위안부는 공창제의 연장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한미일 역사부정 네트워크를 분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램지어 교수가 논문마다 감사를 표하는 인물, 제이슨 모건 레이타쿠 대학 교수다.

미국인인 그는 일본 우파 싱크탱크인 일본전략연구포럼의 지원을 받아 2018년 하타 이쿠히코의 ‘위안부와 전장의 성’을 영어로 번역했다. 역사인식문제연구회 부회장이기도 한 모건 교수는 수시로 램지어 교수와 교류하며, 경제법학자인 램지어가 역사와 위안부 관련 논문을 쓰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日 역사부정 실체’ 기획 보도 협업 참여진
–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군위안부연구회장
– 김창록: 경북대 로스쿨 교수, 전 일본군위안부연구회장
–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
–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일본군위안부연구회 학술이사
–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김창호: 일본 변호사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2012-04-12> KBS NEWS

☞기사원문: [日역사부정 실체]①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 램지어 주장, 어디서 왔나?


“일본에선 역사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제는 주 전쟁터 미국, 그리고 한국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지난 3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발언이다.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선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을 처음 언급한 고노 담화, 종전 50주년을 즈음해 일어났던 성찰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현 스가 요시히데 내각 역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일본-미국-한국의 역사수정주의 단체는 어떻게 협력할까?

■ 日-韓 ‘역사 교과서 흔들기’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에도 꿈틀거리지 않던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한 역사 교과서가 발단됐다.

19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출범한다. 의회에도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이 설립됐다. 그 중심에 아베 신조가 있었다. <새역모>가 만든 교과서는 일제 식민지시기를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 또는 ‘자위전쟁’으로 미화하거나 왜곡한다.

일본 고등학생이 배우게 될 역사교과서 12종 중 ‘위안부 강제성’을 언급한 책은 단 1종뿐이다.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자신감이 헛된 과장이 아니다.

‘교과서 흔들기’는 8년 뒤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교수 등이 2005년 1월 참여한 ‘교과서 포럼’을 잇는 뉴라이트 학자들이 2013년에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교학사)>가 국사편찬위원회(유영익 위원장) 검정을 통과하며 절정에 달한다.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는 “한국과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삼은 목표는 반일”이라고 평가했다. 이영훈은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으로 ‘종북’에 더해 ‘반일’, 그것도 ‘우리 안의 반일’을 종족주의라고 비난한다.

강 교수는 “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신념이나 감정으로 여론을 만드는, 무기화된 그들의 거짓말은 탈진실(post truth)”이라고 평가했다.

■ 日-美-韓 역사수정주의 단체 ‘밀어주고, 끌어주고’

일본을 평정한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몰려간 곳은 주 전쟁터 미국이다. 소녀상 철거 운동을 본격화했고, UN 등 국제무대로 전쟁터를 확장했다.

<위안부의 진실 국민운동(2013년)>, 미국에서 출범한 <역사의 진실을 묻는 세계연합회(GAHT, 2014년)> <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 부회장 야마모토 유미코가 주도한 <나데시코 액션(2011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단체는 미국에서 소녀상 철거 소송을 벌이고, UN에서 반대 집회를 여는 등 세력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미국 유력인사들에게 영어 번역판 역사수정주의 책을 발송하는 것도 주요 활동이다.

2019년 <반일 종족주의>가 출판되면서 한국 단체들과 협력도 활발하다.

<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 낙성대 경제연구소 이우연 연구원은 2019년 7월 2일 UN 인권이사회에서 ‘일제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 이 자리를 주선하고 금전적으로 지원한 인물이 역사 부정론자 미국인 유튜버 ‘텍사스 대디’의 <일본 사무국> 국장 후지키 슌이치다.

<반일 종족주의>는 일본에서 출판돼 40만 권 넘게 팔렸다. 마찬가지로 일본 역사수정주의 책도 한국에서 출판됐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비판한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니시오카 쓰토무, 2020)>라는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이우연이다. 그리고 책을 낸 출판사는 우파 미디어를 표방하는 ‘미디어 워치’ 계열 ‘미디어 실크’다. 이 책 광고는 지금도 ‘미디어 워치’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이 책도 한국의 연구자, 기자 등에게 사유 없이 대량 발송됐다고 한다.

■ 日-韓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램지어’ 구하기

램지어 논문이 알려지자 일본에서 첫 지지 성명을 낸 사람이 이 책 저자인 니시오카 쓰토무다. 논문 출간에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니시오카 성명이 나오고 사흘 뒤인 2월 9일, 이영훈, 류석춘, 이우연 등 한국 측 인사들도 공동 성명을 낸다. 램지어 논문이 독창성을 인정받았다는 주장이었다. 국제학계, 특히 일본사 연구자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한국의 역사수정주의 단체는 본격적인 램지어 구하기에 나선다.

이우연은 일본 산케이 신문사 계열 <재팬 포워드>에 램지어 논문 옹호 글을 기고한다.

<이승만 TV>의 주익종은 유튜브에 ‘고명하신 미국 교수님들의 램지어 비판을 살펴보니’ 등의 강의 영상을 올린다. 공교롭게도 이 유튜브 영상은 일본어 자막을 단 것이 한국어 영상보다 최고 4배 정도 조회 수가 많다. 아시다시피 조회 수는 유튜버 수익과 비례한다.

■ 역사수정주의 이념적 동일성…. 반일(反日)은 곧 ‘좌파, 종북, 친중’

‘자학사관’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단체 <새역모>가 중학교 역사교과서 7종 모두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술한 것을 비난하면서 만든 개념이다. 아베는 근현대 교육에서 일본인은 자자손손 사죄하는 것이 운명이 된 죄인처럼 다루어진다고 비판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정통한 일본 전문가인 일본계 호주인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저서 <바다를 건너간 위안부>에서 일본의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행해온 여러 악행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답하면서도 “그 악행을 은폐하고, 풍화시키고, 날조하는 과정에 관여하거나 혹은 그 과정을 묵인한다면 거기에 책임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이것을 ‘연루(連累, implic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본 극우가 쓰는 용어인 ‘자학사관’은 한국에서도 등장한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박정희를 부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 한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2004년 당시 노무현 정부의 ‘자학사관’과 전쟁을 선포한다며 실체를 드러냈다.

강성현 교수는 “韓日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각각 근현대사에서 극우/파시즘/독재정치로 인한 잘못을 반성하는 역사인식을 ‘자학사관’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또 “반일(反日)은 곧 ‘좌파’ ‘종북’ ‘친중’이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역사수정주의자들에게는 혐한, 혐북, 혐중 감정이 공통으로 깊이 배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역사수정주의 핵심 단체 <역사인식문제연구회> 부회장인 미국인 제이슨 모건 교수(레이타쿠 대학)는 미국 학계가 좌파에 장악돼 있다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정의의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제이슨 모건의 이 주장이 과연 그 혼자만의 목소리일까?

<2012-04-12> KBS NEWS

☞기사원문: [日역사부정 실체]② 日-美-韓 역사수정주의 단체…‘밀어주고 끌어주고’


일본에서 시작된 위안부 역사부정은 한국, 미국으로 확산했다. 그들의 주장은 마치 복사해 붙인 것처럼 똑같다. “위안부는 성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 “위안소는 공창제라는 매춘 역사의 일부다” “위안부는 높은 수익을 올렸다.”

역사부정주의자들은 위안부 증언을 “구름 잡는 이야기”라며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논리를 풀어갈 때는 증언을 ‘대목, 대목’ 잘라 인용한다. 증언의 전체 맥락을 왜곡하는 절취다.

일본, 한국, 미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왜곡하는 대표적 증언이 고 문옥주 할머니 이야기다. 일본 하타 이쿠히코 <위안부와 전장의 성, 1999년>을 시작으로, 한국 이영훈 전 교수 <반일 종족주의, 2019년>, 미국 램지어의 이번 논문 <태평양 전쟁 중 성을 위한 계약, 2021년>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할머니 증언을 어떻게 왜곡했을까? 그리고 문옥주가 실제 전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 “문옥주는 자유인이었다”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는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본인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는 문옥주와 3년간의 인터뷰를 토대로 <문옥주, 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발간됐다. 16살이던 1940년, 문옥주는 귀가 중 헌병대에게 붙잡혀 위안부로 끌려간다. 중국과 미얀마에서 성 노예 생활을 하던 그녀는 전쟁이 끝난 1946년 귀환했다. 그녀의 귀환을 두고 하타 이쿠히코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얀마의 문옥주도 동료와 귀향하기 위해 사이공까지 갔다가, 항해가 위험한 것 같다고 판단, 중지하고 돌아갔다는 것에서 전쟁 중에 일을 그만두고 고국에 돌아간 위안부는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위안부와 전장의 성, 395쪽, 1999년)

이영훈은 여기에 더해 문옥주가 성 노예는 커녕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무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옥주와 위안부 일동은 “우리도 일본인이다. 창녀가 아니다. 일본군을 위안하는 신성한 책무를 부여받은 제국의 위안부다”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반일 종족주의 326쪽, 2019)

두 사람은 문옥주가 증언한 미얀마 탈출기, 그리고 군사 법정 진술을 가져와 마치 위안부가 언제든 귀환할 수 있었던 자유인, 또 위안부를 신성한 책무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옥주는 돈을 많이 벌었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빼놓지 않는 주장 중의 하나가 위안부는 ‘돈을 많이 벌었던 자발적 매춘부’라는 주장이다.

하타 이쿠히코는 위안부가 일본 공창 수입의 5배 이상, 평양 유곽 여성보다 10배 이상 많은 돈을 벌었다며 그 사례로 문옥주 증언을 든다.

“문옥주의 경우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는 것만으로 3년이 안 되어 2만 5천 엔을 저금하고, 그 가운데 5천 엔을 가족에게 송금했다. 지금이라면 1억 엔 전후의 큰돈이다.” (위안부와 전장의 성, 392쪽)

램지어도 “계좌를 둔 한국인 위안부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게 잘했던 이는 문옥주 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문옥주 원본 증언집이 아닌 역사수정주의적 글만 게재하는 익명의 일베 같은 블로그에서 선별적으로 짜깁기되고 왜곡된 문옥주 증언을 든다.

“어머니에게 안락한 삶을 살게 해드릴 수 있을 거 같다. 나는 매우 행복하고 뿌듯했다. 저금통장은 나의 보물이 되었다.”(태평양 전쟁 중 성을 위한 계약, 6쪽, 2021년)

일본군 위안부 故 문옥주 할머니

■ 문옥주가 실제 전한 말은?

먼저 문옥주가 미얀마 위안소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손님으로 오는 군의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다. “귀국하기 위한 증명서가 필요한데요. 손에 넣을 수 없을까요?”라고, 그러자 그 군의관은 “내가 폐병이 났다는 진단서를 써주겠다. 건강해 보이면 거짓 진단서가 들통 나서 내 목이 날아가니 꼭 병자처럼 행동해요.”라고 당부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폐병에 걸려 군인들에게 병이나 옮기는 쓸모없는 몸을 만들지 않고서는 문옥주는 위안부 생활을 끝낼 수 없었다. 이것이 문옥주가 전하는 진심 아닐까?

그럼 문옥주는 “우리도 일본인이다. 창녀가 아니다” 이런 말은 군사 법정에서 또 왜 했을까? 문옥주는 위안소에서 칼을 빼 들고 행패를 부린 군인과 승강이를 벌이다 살해한다.

“조선인인 내가 일본 군인을 죽였으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되지 ~~~~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였고,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싹 변했다. 뭔가 좋은 느낌이 들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문옥주가 ‘일본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우리는 일본인이다.”라고 발언했다고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그렇게 믿는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또 위안부 수입을 ‘오늘날의 가치’ 운운하면서 ‘거액’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역시 위안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재론의 여지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평가된다. KBS와 공동연구를 진행한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는 당시 일본군 점령지에서 급격하게 치솟은 전시 초인플레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옥주의 군사우편저금 원부 조서

강 교수는 “1944년 4월과 5월 문옥주 저금액 20,560엔을 당시 도쿄의 엔화 가치로 환산해 보면 도쿄 물가지수는 152, 양곤은 30,629이어서, 문옥주 저금액이 도쿄에서는 102엔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오늘날의 가치’라는 분석 자체가 의미 없는 숫자 놀음이라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옥주는 이 돈마저 돌려받지 못했다.

“역사부정주의자들이야말로 1944-45년에 업자들이 아닌 일본군 ‘위안부’가 한 강제저축을 돌려받거나 집(조선)으로 송금했던 돈을 본가에서 인출한 사례를, 그것도 오늘날의 가치 운운할 만큼 ‘거액’의 사례를 근거로 들어 입증해야 한다.”고 강 교수는 반론했다.

■ 위안부 증언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일상이 전장이었으니 전쟁 또한 삶이었다. 살아남았으니 살고자 했다.”는 말은 일본군 ‘위안부’ 증언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문옥주 할머니 회고록 작가 모리카와는 1982년 8월 문옥주가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하였다고 했다. 모리카와는 “”당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은 당신 개인의 수치도, 당신 집안의 수치도, 동네의 수치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였습니다.”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문옥주 할머니는 1996년 10월 26일 생을 달리했다. 영면에 든 할머니는 본인의 증언이 ‘대목, 대목’ 잘려 찬탈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2012-04-12> KBS NEWS

☞기사원문: [日역사부정 실체]③ 日-美-韓 역사수정주의 ‘문옥주 왜곡’…“이쯤 되면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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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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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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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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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단체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 유족 모임’은 오늘(7일) 일본 방위성과 후생노동성을 찾아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서명 용지를 전달했습니다.

서명에는 일본 전역에서 1만 1천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유골이라도 돌아와 달라는 유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絲滿)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 등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대표는 최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그간 수습된 희생자 7백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7> KBS NEWS

☞기사원문: “조선인 등 묻힌 토사 채취 반대”…日시민단체, 1만여 명 서명 제출

※관련기사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한겨레: “희생자 유골 섞인 흙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인도적 행위”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연합뉴스: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목, 2021/07/08-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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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세계유산위, ‘일본에 유감 표명’ 결정문 채택해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故) 서정우씨 등의 영상은 최초로 공개됐다. 2021.7.16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는가’ 혼잣말을 하면서 매일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너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군함도(하시마·端島) 강제동원 피해자 서정우 씨)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 산업시설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최근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다루는 자리가 마련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 주최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11월 7일까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연다고 16일 밝혔다.

전시 영상들은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열네 살에 하시마 탄광에 동원됐다가 이후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겪은 고(故) 서정우(1928∼2001) 씨의 영상이 국내에서 공개되는 건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사복형사에게 연행돼 다카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던 손용암(78)씨,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제련소로 강제동원된 류기동(79)·손성춘(76)·이영주(77)씨 영상은 올봄 촬영돼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다.

징용 경험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군수시설에서 탈출하려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잇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모습에선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가 가늠될 정도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보통 강제동원을 떠올리면 ‘배고프다’ ‘아프다’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처럼 단편적으로만 안다”며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과정으로 가게 됐는지, 현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언어 소통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느낄 수 있게 증언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시민단체가 제공한 영상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이 제공한 중국인 포로, POW연구회가 제공한 연합군 포로의 증언 영상을 함께 전시해 강제노동이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연구소 관계자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2021.7.16 [email protected]

한편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은 일본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 센터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 12일 공개했다. 지난해 6월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군함도 등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조사단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일본의 관점뿐 아니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등 피해자의 시각까지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조사를 토대로 일본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이르면 이달 21일 열리는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공식 채택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세계유산위원회가 공개한 권고를 지지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권고를 채택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7-16> 연합뉴스

☞ 기사원문: 피해자 육성 담은 ‘일제 강제동원’ 전시회 서울서 개막

※관련기사

☞뉴스토마토: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등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 증언 공개

☞이투데이: ‘군함도 강제노동의 역사’,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의 증언

금, 2021/07/1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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