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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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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admin | 월, 2021/04/12- 03:16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①

봄기운이 벼락처럼 내달려 북한산 일대를 에워싸더니 만경대에서 멈칫하며 숨을 고른다. 이도 잠시 기운을 되찾은 봄장군은 사방에 꽃사태를 일으키며 수유리 벌판을 향해 진군했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은 날 김주는 우이동 솔밭공원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 심산 김창숙(아래 심산)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한번 다녀오면 만보나 되는 거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거르지 않는다.

심산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다. 그는 3·1 운동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민족대표로 모두 참여했건만 유림이 빠진 것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리고 기개를 잃지 않고 있는 선비들을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유림(儒林)의 독립청원서를 만든다. 이를 지니고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번역한 후 강화회의에는 물론 중국 내 각국 대사관에 발송하고 해외동포들에게도 보냈다.

그 후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심산은 1927년 치질 치료차 입원했던 병원에서 밀정의 신고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나가사키를 거쳐 대구경찰서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랜 징역 생활을 겪으며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 심산의 손녀딸, 김주. ⓒ 민병래

1941년생인 김주는 심산의 무릎 밑에서 컸다. 1934년 일제는 심산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줬다. 고향인 경북 성주로 돌아왔지만 감시망은 여전히 촘촘했고 그런 심산에게 손녀딸은 말벗이고 위로였다.

곰방대를 가져오고 고물대는 손가락으로 할아버지의 뼈만 남은 다리를 주무르며 김주는 “아파? 아파?” 하고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심산은 그런 김주를 품에 끌어안고 지긋한 수염으로 볼을 비비곤 했다. 김주가 중학교 때는 성균관대 담벼락에 늘어섰던 순댓국 집에서 막걸리를 함께 홀짝이던 술 친구이기도 했다.

김주는 4·19 민주묘지를 지나 백련사 표지를 보고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심산 묘지까지는 300여 미터 남짓,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다. 김주도 이제 팔순이 넘은 몸, 숨이 가빠진다. 이 길을 넘어설 때마다 두 다리를 못 쓰면서도 항일투쟁과 민주화운동에 한결같았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김구와 평생 동지였던 심산

▲ 심산의 초상 꼿꼿한 지사의 기개가 느껴진다. ⓒ 김주제공

1953년 휴전 후,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치가 더욱 심해질 때 이승만을 꾸짖으며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심산만한 사람도 없었다. 1960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열린 신채호 24주년 추도식에서 심산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독단으로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해서 탄핵재판에 회부되었고 매국행위를 했다고 제명되었던 인물이요”라고 연설해 자유당 관계자들과 관료들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세 번이나 냈던 심산이고 그의 손주 김위는 성명서 원본을 찾으려는 경찰에게 서대문로터리에서 몸 뒤짐을 당해 벌거숭이 처지가 되기도 했다. 심산은 누구보다 김구와 가까웠고 평생의 동지였다. 심산이 나석주 의사를 파견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하도록 의거를 일으켰고, 김구는 이봉창 의사를 도쿄에 보내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도모했다. 해방 후에 환국한 김구를 가장 뜨겁게 맞이했던 사람도 심산이다.

김주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녀가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김구와 심산은 각자 손주들을 데리고 종로의 어떤 극장에서 만났다. 그날 남인수의 노래공연이 있었다. 김주는 김구의 손녀딸과 객석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곰보할아버지와 심산은 무언가 귀엣말을 끝없이 나누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녀딸을 데리고 극장나들이를 하는 모양새로 비밀회담을 한 것이다.

백범이 총에 맞은 날, 사람들이 허겁지겁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심산은 비명을 지르더니 청년들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셨고 다음 날 새벽 돌아오셨다.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백범’을 불렀고 “그놈 짓이야, 그놈 짓이야”를 끝없이 외치셨다. 심산이 밥숟갈을 다시 든 게 어린 김주가 헤아려봐도 열흘이 넘은 때였다.

▲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서 절 드리는 김주 선생은 거르지 않고 일주일 두 번 찾아뵌다. ⓒ 민병래

김주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묘소에 다다르니 4월의 아침볕은 정갈하게 내려왔다. 잔디는 파릇하게 올라왔고 간밤에 내린 비로 흙더미는 촉촉했다. 김주는 깊게 절을 올렸다. 무릎에선 오래 전부터 뚝뚝 소리가 났다.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교육을 받았다.

엄마 손응교는 1933년 열일곱 나이에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례를 올렸다. 시집왔을 때 남편은 진주고보에서 동맹휴학을 주도, 5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고 시아버지 심산은 대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면회를 가서 첫인사를 올렸는데 간수에게 업혀나온 심산은 “구국운동으로 집안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집안은 네게 달렸으니 원대한 희망을 가져라”라고 말을 했다.

새댁은 면회실에서 울고 형무소 담장 밖에서도 울었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졸지에 종부 신세까지 되었다. 시아주버니인 김환기, 심산의 첫째 아들이 집 마당에서 일본경찰에게 매타작을 당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그 부인도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심산이 출옥해서는 대소변을 받아냈고 1962년 심산이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절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김주는 엄마 손응교와 자신이 심산의 묘소를 돌보고 절을 올리는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멀리 진달래 능선은 백련사 계곡쪽으로 분홍빛 꽃비를 내려 뿜었고 그 향기는 심산의 묘소에서 해적이면서 돌아나갔다. 김주는 절을 마치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이 켠 저 켠에 뿌려드리고 잠시 햇빛바라기를 했다.

눈을 감으면 되살아오는 기억은 끝이 없다. 딸이어서일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끝도 없이 얘기하지만, 엄마 손응교가 없는 심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들 있을까?

심산과 한 몸이었던 엄마 손응교

▲ 김주의 어머니이자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그는 며느리이자 심산의 평생 동지였다. ⓒ 경북경북여성쟁책개발원 제공

김주의 아버지 김찬기가 투옥과 감시 속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한 게 김주가 세 살 때인 1943년이다. 그때 심산은 여전히 일본 경찰의 감시에 꼼짝을 못했다. 엄마는 왜관역에서 몰래 떠나는 남편을 어린 김주를 안은 채 눈물로 전송했다.

남편은 “나중에 빌어먹을 형편이 돼도 애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이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 되면 2년 반이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하고 떠나갔다. 뒤늦게 김찬기가 사라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남편이 간 곳을 대라”고 수시로 손응교를 잡아다가 매타작을 하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너처럼 간이 배 밖에 나온 여자는 처음 봤다”는 일본 경찰의 악다구니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심산은 배를 쫄쫄 굶고 있었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밥부터 지어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조국 독립과 심산 선생을 위해 종처럼 살았고 내 인생은 없었다고. 심산 선생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심산 선생이 있다고.

한때는 대구에서 ‘요미우리’라는 위장서점까지 했던 엄마, 심산의 쪽지를 들고 중국 봉천까지 다녀왔고 남편 김찬기의 체포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오자 연변의 도문까지 다녀왔던 엄마, 심산의 손발을 넘어 심산과 한 몸이었건만 세상은 잘 모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주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아침 해는 백련사 계곡을 넘어서 북한산성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김주는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모레 또 올게요”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김주는 늘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읆조린다. 지금도 그날은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할아버지랑 성균관 동재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서너 명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더니 할아버지를 끌어내 명륜 1가에 있던 집에 내동댕이쳤다. 몇 년 몇 일인지는 아득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네 이놈들’ 소리치며 발버둥쳤고 김주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심산은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장악한 유림(儒林)을 혁신하고 성균관을 민족대학으로 재건코자했다. 이를 위해 1945년 11월 30일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 유림대회를 열었다. 유도회총본부가 결성되었고 심산은 위원장이 되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모아 성균관재단을 만들었고 성균관대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물론 심산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몰려 있던 자유당은 유도회총본부를 외곽조직으로 삼으려 했다. 국민을 백성이라 부르고 자기 말을 유시라 하며 봉건군주 행세를 하던 이승만은 유도회를 집어삼켜 그 충효 이데올로기와 전국조직망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문제는 심산이라는 걸림돌이었다.

자유당은 황도유학파와 정부조직을 앞세웠다. 황도유학파는 유교의 충효사상을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이데올로기로 둔갑시켰던 세력이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자 화려하게 부활해 자유당의 뒷배를 업고 심산과 정통파를 공격하며 성균관재단을 장악했다. 결국 심산은 1956년 2월 2일자로 총장직에서 쫒겨났다.

심산이 물러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거침이 없었다. 내무부장관은 1956년 11월 15일을 기해 전국 각지의 유도회 지부를 개편하라고 경찰에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심산을 따르던 정통파는 무너져버렸고 심산은 어느 날 성균관에서 들려나가고 말았다. 그 아픈 현장에 있었던 김주는 그때부터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관방을 떠돌았던 불쌍한 할아버지 심산

심산은 그 후 명륜동 1가 집에서도 쫒겨났다. 가족의 은행대출을 보증해 준 탓에 집이 압류되고 만 것이다. 심산과 손응교, 김주는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때부터 심산은 여기저기를 떠돌게 되었고 합정동 어떤 셋방을 거쳐 여관살이로 내몰렸다.

중앙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심산의 병실은 셋째 아들과 심산의 명망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통제되었다. 박정희가 심산의 병실을 찾은 게 이때였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친구로서 함께 항일투쟁을 했었다. 그런 아들 친구의 동생이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병문안을 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심산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김주가 병실 출입 저지를 뚫고 심산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1962년 5월 10일 돌아가시기 삼일 전이었다. 심산은 거죽만 남은 상태에서 21살 김주의 손을 잡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를 세 번이나 되뇌였다. 김주는 그날 눈물을 흘리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말년에 대해 세간에 떠돌던 이런 저런 얘기들이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에서 심산은 김주를 보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김주는 자식에게까지 상처를 받아야 했던, 죽는 날까지 마음 고생을 했던 심산을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게 되었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②

▲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 김주의 부친으로 해방되는 해 중국 중경에서 숨을 거뒀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김주는 심산 묘소에서 남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4·19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년 결혼한 남편은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회장이다. 2013년에 숨을 거뒀으니 그래도 오래 동고동락을 했다.

엄마 손응교는 아버지 김찬기가 일본에 쫒겨 다니는 통에 불과 1년이나 같이 살았을려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에게 셋째를 남겨 주었다. 해방되는 해 세 살이 된 김주의 남동생은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 지사가 김찬기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해방되는 해가 엄마 손응교에게는 지옥이었다. 아들의 주검과 남편의 주검을 동시에 맞았으니 오죽했을까. 엄마는 이때 목이 잠겨 말을 못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담배도 늘어 혓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폈다. 할아버지 심산은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툇마루에 며느리가 필 연초를 슬그머니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엄마였기에 김주가 신랑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것을 부러워도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살가운 사위노릇도 했다.

남편 묘소까지 돌아보고 나니 김주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늘 하루 일과를 충만하게 마친 느낌이다. 김주가 동국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할 때 남편은 동국대 법대 3학년생이었다. 4·19가 일어났을 때 행정실 캐비닛을 부수고 교기를 꺼내 거리로 나섰던 남편이다. 김주가 남편에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상해 임시정부청사 보존을 위해 1990년 중국에 갈 때 방문단의 경비를 선뜻 내준 일이다.

당시 조경한 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 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때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를 모시고 동행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미수교국 비자를 신청해서 홍콩을 경유, 북경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주선기란 사람은 중국 총리였던 주룽지의 친척으로 자기 집을 놔두고 임시정부 터에 살면서 청사 보존을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심산이 상해에서 살던 집까지 기억하고 그 사진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북경대 조선문화연구소장인 최응국, 조선족 총회장 문정일 등은 “임시정부청사를 중국내 항일유적지로 보존”하자는 학술세미나를 같이하며 중국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여정에 김주 자신이 엄마와 동행했고 남편은 방문단 18명의 여비와 현지 경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호암관에서 심산관 다시 호암관으로

집으로 가는 길, 4·19 민주묘지에서 집까지는 한달음 길이다. 그래도 만보되는 걸음에 김주는 땀도 나고, 지친 터라 솔밭공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길 한 켠에 패랭이꽃과 돌나물이 소북하게 올라온 게 정겨웠다. “어머나 씀바귀도 있네” 하며 김주는 쪼그려 앉았다. 씀바귀나물은 할아버지 심산이 두릅과 함께 좋아하셨던 술안주다. 엄마 손응교는 종가집 음식인 육회를 곁들여 상차림을 올리곤 했다.

▲ 청천서원의 모습 손응교는 심산의 평생 소원, 문중의 청천서원을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엄마 손응교는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남은 여생을 심산이 평생 소원하던 ‘청천서원’ 복원에 바치겠다고 했다. 성주의 생가를 지키며 엄마는 문중의 힘을 모아 기어이 92년에 이 일을 이루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 노릇을 의젓하게 마감한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김주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은 여생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묘소만이라도 거르지 않고 돌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성균관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기에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 성대총장시절의 심산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 심산기념관제공

심산이 쫒겨난 후 성균관재단은 1957년 10월 21일 이선근을 총장으로 선출했다. 문교부는 그의 취임을 즉시 승인했다. 그는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창설된 만주제국협화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협회는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 등 5족의 협화를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왕도낙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서울대 학생처장을 하며 ‘국대안 파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54년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편 삼성은 1965년 성균관대를 인수하였고 이병철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바탕으로 민족의 영재를 키우려던 심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선 후 금잔디 광장 뒤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1977년 성균관대 학생들과 유림의 재벌퇴진 운동으로 삼성은 재단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1980년 3월 민주화의 봄을 타고 호암관을 심산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삼성병원을 거점삼아 생명공학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던 삼성은 당시 의대 신설이 유력시되던 성균관대를 인수하고자 했고 학생들 또한 열렬히 이를 반겼다. 결국 삼성은 1996년 20년 만에 다시 성균관대에 입성했다. 당연히 심산관은 호암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심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손녀 김주가 할아버지 상해집 사진을 안고서. ⓒ 민병래

2022년이면 심산이 돌아가신 지 60년,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심산의 이름은 김주의 소원대로 되살려질 수 있을까? 씀바귀 나물을 손에 담고 일어선 김주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능선에서 내리던 꽃비는 어느 새 그녀의 굽은 어깨를 지나 우이암과 도봉 주능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도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 불쌍한 할아버지 묘소에도 봄은 무심코 찾아오겠지.
다녀갈 때 잊지 말고
고향 성주의 솜털씨앗은 상처나지 않게 고이 감싸서
명륜동 은행나무의 새순은 연노랑 빛으로 물들여
북한산의 진달래 꽃비는 눈이 시리도록 듬뿍
할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주고 가길 바랄 뿐이다.

<못다한 이야기>

① 심산이 다리를 못써 벽옹이라고 불리우고 업혀서 다닌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후 사진을 보면 서서 연설하는 사진이 있다. 이에 대해 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2020년도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에서 아래처럼 밝혔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 지사의 건강을 염려한 동료들이 솜씨 좋은 안마사를 동원해 석 달을 안마로 다리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김창숙 지사는 혼자 온전히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에 성균관대 교직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동래온천에 머물 때 2층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하게 다쳐 다시는 못 움직이게 되셨다.”

② 김주의 어머니 손응교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후손으로 자신의 가문도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손응교는 손후익의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손응교의 증조할아버지 손최수가 신돌석 의병장을 도왔고, 할아버지 손진수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전한다. 또한 종조부 손진형과 삼촌 손학익 모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손후익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김창숙 지사를 만났다. 아버지 손후익은 경북 유림계를 결속시켜 김창숙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처남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의 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김창숙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때 할아버지 손진수와 아버지 손후익이 김창숙을 간호했다. 이일이 인연이 되어 손응교는 당시 동덕여고 재학중이었지만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인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의 삶 또한 울산의 독립운동가로서 조명받고 있다. 손응교는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 남편이 죽고(1945), 시어머니가 죽고(1951) 친정아버지가 죽고(1953) 심산이 죽고(1962) 줄 초상을 당하여 평생 상복을 벗을 날이 없었다. – 참고도서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

③ 김찬기 선생의 사진은 극적으로 남아있다. 이 사진이 남은 배경을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에 기록된 손응교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면 이렇다.

“방에 우리 남편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왜관에서 비밀 지하 운동하다가 체포된 왜관 사건으로 징역 살고 나올 때 찍은 것이라.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라. 성주에서 사진관 하던 이명동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찍었어. 후에 이 양반이 동아일보 사진기자도 하고 했어. 이명동씨가 자기 묵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있더래요. 그래서 똑같은 걸 다섯 장을 뽑아서 보내왔어.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은 편지나 사진은 안 남겨. 사진 있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잡을 수 있잖아요. 우리 집에도 편지 오면 심산 어른이 좀 문제 있다 싶은 거는 다 하나 둘이 몇 번 읽어본 후 불태웠어. 심산 선생도 사진 때문에 잡혔거든.”

④ 김주의 큰 고모, 즉 심산의 첫째 딸인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심산의 장남 김환기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경에게 집 마당에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환기의 죽음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때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료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⑤ 이 글에서 다룬 황도유학회와 자유당의 유도회 장악과정은 아래 논문을 참조했다. – <성균관대학교 2002년 석사학위 논문 ‘1950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연구’,조한성>

⑥ 임시정부 터를 지키기 위한 중국방문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통일기원대제를 지냈다. 그때 김주와 손응교는 유림의 대표격으로 국조단군칙어를 낭독했다. 중국사람들은 백두산 천지에는 새가 날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고 김주는 회고한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이름, 80대 손녀의 간절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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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리즈: 민병래의 사수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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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침탈 이후부터
학교 고유 교육이념 없애고
제국주의 주입하며 지배화

민족성 담긴 ‘교표’ 사라지고
친일파 만든 ‘교가’ 아직 불려

배화학원 태극문양→ 난초로
중동학원 무궁화 도상 사라져
대부분 사립학교 교표 바뀌어

민족정체성 없애기 교묘히 시도
친일잔재 은연 중 한국사회 잠식

937년 배화학당 졸업생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출처=배화고등학교 홈페이지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가 자행한 민족말살 정책은 전통 문화를 훼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민족말살 정책은 유·무형의 잔재로 해방이후에도 존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학교 상징물이다. 초창기 민족성을 담은 학교 교표는 일제 상징물을 형상화하는 문양으로 교체됐다. 이런 일제 잔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교표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친일 작사·작곡가들이 제작한 교가는 지금도 어김 없이 학교내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8·15 광복 76주년을 맞아 경기도내 학교에 남은 일제 잔재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또한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있는 학교도 소개한다.

지난 9일 평택시 한 고등학교 교문은 돌로 된 기둥 둘 사이에 있었다. 기둥에는 날개 형상 위에 둥근 원이 그려진 모양이 있었다. 색깔을 더한 모양을 보자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문양은 청색 바탕에 황금색의 날개가 새빨간 반원을 떠받치고 있었다. 한국식이라기 보다는 일본식에 가깝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문양은 학교를 상징하는 교표다. 교표에 대한 설명을 봐도 한국식과는 달라 보였다. 붉은색 반원은 아침을 여는 태양의 의미, 날개는 비상하는 독수리의 날개라고 했다.

이미지를 검색하다 보니 비슷한 모양이 검색됐다. 바로 독수리 날개를 단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이었다.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 뒤에 일장기를 그리면 학교의 교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실시한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 조사 보고서’에서도 해당 교표를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학교 교화 역시 일본 철쭉인 영산홍이다.

l 일제에 의해 사라진 전통 교표

일제강점기 시절 경신학교의 모습. /출처=위키백과

학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부착하기 시작한 것은 100여년보다 그 이전으로 흘러간다. 1885년 반포된 교육입국조서와 소학교령은 조선 고종이 공교육의 기능을 국가의 부강과 독립, 생활상 필요한 보통 지식과 기능을 익히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학교에 제국주의 이념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제한하는 학교령을 통해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교표는 학교의 교육철학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일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기존 태극문양과 무궁화 등 한국 전통의 문양을 교표로 택하고 있던 학교들은 일제시절 교표개정의 아픔을 겪었다.

1885년 원두우 학당으로 개교한 경신학교는 1905년 십자가 중앙에 태극을 넣고 ‘경신학원’ 네 글자의 한자를 태극기의 4괘와 같이 배치했다. 이 태극교표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교표 중앙의 태극 도상(圖像)이 삭제당했다.

l ‘민족말살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된 학교 교표

배화여학원의 교표 변화. 왼쪽은 1908년 배화학당이 사용한 것으로 태극 도상이 가운데 들어있다. 중앙은 1923년부터 1937년까지 사용한 배화여학원의 교표로 교화인 난초가 그려져 있다. 반면, 교표 개정령 시행 후 1938년 사용된 교표(사진 오른쪽)는 태극도상이 삭제됐다. /‘한국교표 디자인의 역사와 문화적 변용 연구(정선아, 2021)’

<송도학원 100년사>, 한국 교표 디자인의 역사와 문화적 변용 연구(정선아) 등에 따르면 교표 개정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 극에 달했다. 당시는 만주를 침공한 일제가 대공황 등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으며 소위 ‘문화통치’에서 ‘민족말살통치’로 노선을 전환하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사립학교에 교표개정령을 전달해 민족정신의 말살을 시도했다. 이는 경기도 내무부가 경찰에서 보낸 ‘사립학교 교표개정령’에서 확인됐다.

당시 일제의 통치에도 한민족의 얼을 기리는 내용의 교표를 가진 다수의 사립학교들의 교표가 바꿨다.

배화학원의 경우 배화학당 시절 도장과 고등과의 졸업장 등에 태극문양을 사용했다. 1923년 교표를 만들 당시에도 태극 도안을 주 도상으로 썼다. 그러나 1937년 교표개정령과 함께 난초를 모티브로 한 일본 가문과 유사한 교표를 사용하게 됐다.

송도학원은 당초 무궁화 잎에 펜을 그린 교표(사진 왼쪽)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1937년 조선총독부에 교표를 빼앗긴 후 일본 한 가문의 문장과 유사한 솔방울 도안이 들어간 교표(사진 오른쪽)를 해방 전까지 사용했다. /송도중학교 홈페이지
중동학원 교표 변화. 왼쪽은 1919년부터 1937년까지 사용해온 교표이며, 오른쪽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교표.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 조사 보고서(2021)

송도학원도 1937년 교표를 일제 경찰에게 압수당했다. 송도학원은 무궁화 사이에 펜을 그려넣은 교표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를 압수당한 후 독수리 날개에 ‘중’자를 세긴 교표를 사용했다.

중동학원은 무궁화 사이에 떠오르는 태양의 도안으로 이뤄진 교표를 1929년부터 제정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1937년 교표를 압수당하고 교표 개정을 받자 문제가 된 무궁화 도상을 삭제하고 중동이란 교명만 표시하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정체성을 담고 있던 교표의 수난사였다. 교표는 제작 주체의 의도와 그 전달 방식이 함축된 상징물이란 점을 고려해 일제는 민족성 말살 정책에 교표 개정을 철저히 이용했던 것이다.

l 친일행적자 작곡·작사 교가의 탄생

교가 편찬은 1945년에서 1950년대에 집중돼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교가보다 일본 국왕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주로 불렀다. 그러다 보니 개별 학교를 상징하는 교가가 없었고, 해방 후 학교들은 교가를 제정하게 됐다.

문제는 당시 교가를 제정할 수 있는 음악가들 다수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경기도내 39곳의 학교 교가를 작곡한 이흥렬(李興烈, 1909~1980)은 1938년 7월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애국행진곡> 등을 반주하고 ‘음악으로 내선일체를 실현하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경성음악협회 제1회 연주회에 출연했다. 1943년 7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조선에서 악단의 식민통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데 역할을 한 히라마 분주의 고별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음악계 명사로 역할을 바꿔 가장 많은 교가를 작곡했다. 이 때문에 이흥렬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됐다.

도내 22곳의 교가를 작곡한 김동진(金東振, 1913~2009)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1942년 ‘대동아전쟁의 의의를 철저하게 관철시킬 가요 등을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만주작곡연구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했다. 일제를 찬양하는 ‘조국찬가’를 김대현, 윤용하 등과 함께 창작하고 1943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국, 양산가와 합창곡 건국 10주년 찬가 등을 작곡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 음악가로 변신해 1961년 조국광복, 조국수난, 조건재건 3부를 작곡하고 지휘하는 등의 행적을 보였다. 김동진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도 친일 행적이 뚜렷한 김성태(金聖泰, 1910~2012), 현제명(玄濟明, 1903~1960)이 작곡한 교가가 각각 18개교, 7개교 사용되고 있다.

작사가로는 친일 행적을 남긴 백낙준(白樂濬, 1896~1985), 이광수(李光洙, 1892~1950) 등이 있다.

해방 후 음악계 명사로 탈바꿈한 친일 행적 작곡·작사가는 한국 사회 음악계를 이끄는 주역으로 부상한다. 교가에 직접적인 친일용어를 담지 않았지만 근면과 애국, 조국 등 일제가 강조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은연중에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의 잔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며 “친일파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부르고, 일제를 상징하는 문양이 담긴 교표를 쓰는 등 배움의 장인 학교에 침투한 일제 잔재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라고 말했다.

/김중래 기자·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인터뷰/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l “학교 안 일제 잔재 수두룩 국민이 나서 뿌리 뽑아야”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일제 잔재가 학교에 남아있는 것은 친일파가 아닌 대한민국 역사 교육이 만든 상황입니다”

방학진(사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10일 인터뷰에서 “해방 후 청산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지적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80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학교 현장에서는 일제 잔재가 남은 교표와 친일 행적 작사·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부르고 있다. 방 실장은 교육적인 목표에서도 이러한 잔재를 해소해 가야 한다고 했다.

방 실장은 “친일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학생들이 만들고 듣는다고 해서 친일파는 아니다”면서도 “그러나 학생 개개인의 집에서 부르는 것도 아니고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 이를 부르는 건 대단히 모순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현장에 남은 일제 잔재의 이유로 친일 잔재 청산의 부재를 꼽았다. 특히 친일 행적 작사·작곡가의 교가 탄생 배경에 해방 후 음악계의 구조를 지적했다.

방 실장은 “해방 이후 한국 음악계는 친일 행적자에 의해 정리됐다”며 “이흥렬, 현제명 등은 서울대와 숙대, 경희대 등 유명한 음악대학의 초대 학장이 됐고, 교가를 음악계 권위자에게 맡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일 행적자들이 많은 교가를 만들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사회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처럼 학교에서도 교육부분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도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지목했다. 여자와 소수자, 장애인 등을 차별했던 제국주의 파시즘의 영향은 지역 차별, 인종차별, 성별차별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일제 잔재를 청산해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 실장은 “과거 ‘시대에 맞게 친일파는 열심히 살았고 독립운동가는 게을렀다’는 헛된 소리가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여준다”며 “이러다가는 이완용이 열심히 산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에 따라 친일파 청산을 내걸었지만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 청산, 토지개혁 등을 실시하지 못했다”며 “국가는 친일파 청산을 안 했으니, 이제는 국민이 나서 일제 잔재를 청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중래 기자·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전세계 여성 인권문제로 봐야”

오는 14일 제9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앞두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한일 양국간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세계 여성의 인권문제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관련기사 10면>

이은희 독일 풍경세계문화협의회 대표는 10일 수원시 매원감리교회에서 열린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의 활용 방안 모색을 위한 비대면 의정토론회에서 국제사회와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일본군 성노예제로 인해 35개국에서 피해자가 발생했다”면서 “사안 그 자체로 초국가적인 주제”라면서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동안 한국은 대규모 반 인륜범죄 7가지를 해결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다. ‘전쟁범죄 인정’, ‘정부 차원의 공식사죄’, ‘법적 배상’,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역사교육 실시 등 피해자 명예 회복에 초점을 맞춘 해결’ 등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외면해 왔다.

김현정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 대표는 “위안부는 전시상황에서 국가가 여성에게 얼마나 조직적으로 장기간 인권 탄압을 했는가에 대한 문제”라면서 “한일간의 역사 갈등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최대 성노예제도로 보고 해결해야한다”고 했다.

이어 “한국정부는 2015 구두선언은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이고 원칙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7가지 원칙에 기반한 해결을 위해 일본과 포괄적인 재협상을 요구해야한다”면서 “그동안 한국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면서 일본을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0> 인천일보

☞기사원문: [8·15 기획-배움터에 남은 일제 잔재] (상) 친일의 이름으로 말살된 ‘교육철학’

수, 2021/08/11-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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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교육청 전수조사…21개교 교표엔 친일 잔재 확인

(수원=연합뉴스) 이영주 기자 = 경기도교육청은 학교 내 유·무형으로 남아있는 일제 잔재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청산하는 방법을 제안한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고 10일 밝혔다.

도교육청은 일제 잔재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도내 2천500여개 학교를 대상으로 동상, 비석, 교표, 교화 및 교목 등 유형요소와 교훈 및 교가 등 무형 요소를 조사했다.

도교육청 차원의 일제 잔재 전수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내용 중 발췌.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이번 조사 결과 도내 12개 공립학교에 친일 인사의 비석이 설치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 결과보고서’에서 확인된 6개 비석 외에 남양주 한 초등학교의 이상옥(친일인명사전 등재) 기념비 등 6개가 추가로 확인됐다.

이들 비석은 대부분 학교 운영과 발전에 관한 공덕비 형태로, 해당 인물의 친일 행적은 안내되지 않았다.

도내 21개 학교 교표에서도 욱일문, 일장기, 일본 군경이나 기업의 심벌마크와 유사한 표식 등 일제 잔재가 확인됐다.

특히 한 초등학교의 교표는 전범 기업으로 분류된 ‘미쓰이 그룹’의 로고와 색깔만 빼고 거의 유사하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내용 중 발췌.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보고서는 일제 잔재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

교표에 자주 쓰이는 월계수 도안이 대표적이다.

보고서는 “월계수는 흔히 서양에서 승리, 평화, 정화 등을 상징하며 전투와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영예의 관으로 동양 전통에선 발견되지 않던 도상”이라며 “월계수를 일제 잔재로 보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도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정을 보면 러일전쟁의 승전을 축하하는 개선문 장식에 월계수를 사용한 일제를 통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월계수 도상은 도내 112개 학교 교표에서 활용된 것으로 파악됐다.

48개 학교에 비치된 ‘책 읽는 소녀상’에 대해서도 “일제강점기에 소학교 도덕(수신)교육의 하나로 ‘모범적인 국민상’을 주입하는 의도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표지.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연구보고서는 일제 잔재 청산은 상급 기관의 획일화된 명령이나 무조건적인 청산이 아닌 각 학교 구성원의 문제의식 공유, 토론, 대안 도출 등 민주적 과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일제 잔재는 일본 군국주의의 산물이고 당시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의 소산이므로 이에 대한 정리와 역사적 책임을 묻는 활동은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을 세우는 일”이라며 “역사교육은 식민지 사회가 과연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었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비민주성을 철저히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번 연구보고서는 경기도교육청이 기획하고 총신대 허은철 교수가 책임연구자로 나섰으며, 각급 학교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 현장에 안내됐다.

이영주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0> 연합뉴스

☞기사원문: “경기 12개 공립학교에 친일인사 공덕비 남아 있어”

수, 2021/08/11-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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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대전MBC ‘항일음악 6천곡 대발굴’ 다큐 방송

항일음악 ‘거국행’ 악보. ‘거국행’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20년 4월 미국에 독립군 진영을 만들기 위해 조국을 떠나면서 지은 노래다. 악보는 1910년 5월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대전엠비시 제공

대전문화방송(MBC)은 오는 14일 묻혔던 항일음악을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 ‘노래하라! 저항하라! 항일음악 6000곡 대발굴’을 방송한다고 9일 밝혔다.

항일음악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며 독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로, 군가·혁명가·투쟁가·애국가·계몽가·망향가·추도가 등 여러 형태로 불렸다. 항일음악 발굴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고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자료집 <항일 음악 330곡집>에서 시작됐다. 2017년 발간된 유일한 항일음악 자료집으로, 1910년 항일투쟁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들이 시대별로 정리돼 있다.

현재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항일 음악 330곡집>를 뒤잇는 항일음악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항일운동 발자취를 따라 베이징과 톈진, 옌볜, 선양, 다롄 등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족들과 알마티, 크즐오르다, 타슈켄트 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만났다. 4년에 걸쳐 항일음악과 관련된 악보 , 서지 , 기사 , 잡지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6000곡을 발굴해 정리했다.

지난달 13일 대전엠비시(MBC) 공개홀에서 대전시민천문대어린이합창단이 항일음악 ‘그리운 강남’을 부르고 있다. ‘그리운 강남’은 일제강점기 조선 민요 운동을 한 충남 청양 출신의 안기영 선생이 1929년 만든 곡이다. 대전엠비시 제공

대전엠비시는 이번 다큐멘터리에 단국대 연구팀의 ‘항일음악의 보급과 연구를 위한 국내·외 자료 수집·해제 및 디비(DB) 구축’ 프로젝트의 발자취와 의미를 담았다. 발굴된 항일음악을 대전시립교향악단과 대전시민천문대어린이합창단, 뮤지컬배우 고은성, 아카펠라 그룹 ‘나린’, 밴드 ‘오빠딸’ 등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도 다큐멘터리를 통해 방송된다.

이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김지훈 대전엠비시 기자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발굴한 항일음악 중 1000곡은 악보로 표준화했고, 그 중 의미 있는 곡을 골라 음원으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앞서 대전엠비시는 7 ∼8곡을 골라 지역의 예술가들을 참여시켜 편곡하고 연주 ·녹음했다 ” 며 “ 항일 음악 음원화는 우리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 교육청 등과 협의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항일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다 ”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오는 14일 밤 8시50분 방송된다.

최예린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09> 한겨레

☞기사원문: 항일음악을 아시나요?

화, 2021/08/1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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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1/08/1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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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특강
1강 –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의열투쟁의 선구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삶과 사상
강사 : 박중훈 (박상진 의사 증손)
* 2강은 15일, 광복절에 업로드 됩니다!

주최 : 근현대사기념관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 강북구

목, 2021/08/1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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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토, 2021/08/1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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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독립운동가로 홍보되고 있는, 최재형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조부와 증조부와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돼 논란입니다.

최 후보 측은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은 명백하다고 주장하는데요.

과연 그런지, 뉴있저가 자세히 취재했습니다.

이 문제 취재한 양시창 기자 나와 있습니다.

자, 먼저 최재형 후보 부친이 독립운동가로 알려졌는데 이건 캠프 쪽에서 나온 얘기인 거죠?

[기자]
확인해 보니까, 최재형 후보 본인 입에서 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등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습니다.

다만 후보 캠프에서는 미담 사례의 하나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최재형 후보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링크된 영상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최재형 TV : 독립운동가 최병규의 손자입니다. 최병규 선생은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고 전달하는 일을 맡으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정부에서 표창장을 수여하려 했지만,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거부했다고 합니다.]

캠프에서 직접 제작한 영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후보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고요.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도 지난달, 최 전 원장의 입당을 환영하는 논평에서 최 씨의 조부가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다.

[정경희 / 국민의힘 의원 :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 독립운동가입니다. 춘천고보 3학년 재학 중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상장 달기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했습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거류민단 대표를 맡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앵커]
이 정도면 캠프와 당에서도 최 후보 선친의 독립운동에 대해 충분히 홍보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군요.

대선 예비후보와 관련된 문제이니 검증해 봐야 할 텐데, 양 기자가 취재해 보니 어떻던가요?

[기자]
네, 최 후보 증조부와 조부가 일제 치하에서 면장과 면협의회 회원을 한 전력이 자료에 남아 있는데요.

먼저 증조부부터 보겠습니다.

최 후보 증조부 최승현 씨는 191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죠. 매일신보의 평강분국 분국장을 지낸 전력이 있습니다.

분국장을 지내다가 1918년에 평강군 유진면 면장에 오르는데요.

3.1운동 당시에도 면장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인근 고삽면장까지 포함해 이 지역에서 면장직을 1936년까지 지냈습니다.

18년 넘게 면장을 지낸 것이죠.

전부 친일 기관지, 매일신보에 소개된 내용이고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증조부의 이름은 여러 차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조부인데요.

증조부의 면장 임기 마지막에 조부도 매일신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바로 1935년, 아버지가 면장으로 있는 유진면의 면협 의회원으로 당선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지자체 의원 정도로 볼 수 있는데요.

참고로, 최 후보의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조부의 형, 그러니까 최 후보의 큰할아버지도 함께 면협 의회원을 지냈습니다.

최 후보 조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년 뒤에는 강원도 도회의원에 입후보합니다.

하지만 낙선했고요.

이후 다시 면협 회원에 당선됩니다.

정리하면 증조부는 평강군에서 면장을 20년 가까이 지냈고, 아들인 조부는 면협 의회원을 2차례 역임했고, 도회 의원까지 도전했다, 이 점이 사료에 남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 면장과 면협 회원을 지낸 전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중요한 부분인데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의 설명을 들어보시겠습니다.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최승현이라고 하는 인물이 평강 지역에 오랫동안 면장을 했어요. 대단한 거죠. 지역의 유력자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그 아들인 최병규 최병열. 이 두 사람은 면협회 회원까지 됐단 말이에요. 이 면협회 회원이라는 건 뭐냐 하면 면장의 자문 기구인데 일제 협력 기구라고도 볼 수가 있는 거죠.]

[앵커]
면장과 면협 회원은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인데요.

단순히 직책뿐 아니라 친일에 가까운 행적도 기록에 남았다고요?

[기자]
네, 앞서 정 의원의 언급에서도 나왔지만, 만주에서 조선 거류민 단장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는 게 최 후보 캠프의 주장입니다.

최 후보 부친 회고록에도 나오는 내용인데요.

하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최 후보 조부는 오히려 독립운동이 아닌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해석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요.

먼저, 1938년 매일신보를 보면, 최 후보 조부의 미담 기사가 하나 소개됩니다.

부친의 회갑축하 연회비를 절약해 20원을 일제 국방비로 헌납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군수 월급이 130원 정도라고 하거든요.

20원이니까, 고위직 공무원 월급의 6분의 1 정도.

중요한 부분은 일본이 이를 미담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소개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전쟁비용이 필요했던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국방헌금을 강요했는데요.

아버지 회갑 비용을 아껴, 앞장서서 국방비를 낸, 훌륭한 헌금 사례로 소개한 것이죠.

또 하나는, 최 후보 조부는 만주국 해림촌으로 넘어가서 조리원이라는 직책을 맡습니다.

이 역시 일제 치하에서 촌장을 돕는, 부촌장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 부촌장을 지내는 동안 최 씨의 이름이 만선일보에 여러 차례 거론됩니다.

만선일보는 매일신보처럼, 만주지역 대표적인 친일 신문인데요.

최 씨가 만선일보 해림지국 개소에 축하 광고를 띄웠고요.

또 조리원, 즉 부촌장에 취임한 뒤 인사차 만선일보를 방문했다는 것도 기사에 소개돼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 설명 이어서 들어보시죠.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만선일보라고 하는 것은 만주지역 최대의 친일 신문입니다. 한글 신문이기도 하고. 거기에 만선일보 해림천 지국 해림 지국 발전을 축하하는 광고를 내요. 최대 친일 신문인 만선일보의 기사 내용을 보면 부친이 부친의 회고록에 주장하는 그런 만주 지역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그런 얘기다.]

[앵커]
이에 대한 최 후보 캠프의 해명이 나왔나요?

[기자]
네, 최 후보 측은 조부와 증조부의 이 같은 행적에 대해 대부분 몰랐던 사실이라고 답했는데요.

해명을 정리해봤습니다.

조부의 면협 의회원 역임 사실과 도의회 의원 출마 사실, 또 국방헌금 20원 납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할 수 있는 보관 자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조부의 독립운동은 부친에게 들은 내용이고, 할아버지께서 동맹휴학을 주도해 제적당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만 당시 면협 의회원 역임이나 도의회 출마, 또 국방헌금 납부자를 모두 친일파로 여기는 건 무리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습니다.

최 후보 캠프 쪽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의 근거로 주장하는 게 조부의 동맹휴학 부분인데요.

확인해보니, 당시 춘천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조부가 ‘맹휴’를 주도해 제적당한 건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맹휴가 일제에 대한 저항인지, 단순히 구타를 일삼은 교사에 대한 저항인지는 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점은, 고교 시절 맹휴 이후의 행적이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입니다.

들어보시겠습니다.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독립운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행적이고 그리고 평범하게 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면협 의회원 그다음에 도의원 출마했고, 국방헌금 냈고 이거는 일제의 협력행위거든요. 이런 걸 가지고 독립운동했다, 이렇게 부르지는 않죠. 그런 주장대로라면 한때 독립운동을 했던 이광수, 최린, 김활란 이런 사람들도 독립운동가가 되는 거죠. 우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친일파라고 부르죠.]

네, 오늘은 국민의힘 최재형 후보 가문의 친일 논란을 다뤘는데요. 앞으로도 뉴스가 있는 저녁 ‘가보니’에서는 여·야 대선 주자들에 대한 검증 보도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앵커]
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양 기자, 고생했습니다.

YTN 양시창 ([email protected])

<2021-08-12> YTN

☞기사원문: [뉴있저] 최재형 조부 독립운동?…”친일 행적” 논란

※관련기사

☞JTBC뉴스: [단독]민족문제연구소 “최재형 증조부 조선총독부 표창 받았다”

금, 2021/08/1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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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광주] [앵커]

이틀 뒤면 제76주년 광복절인데요,

여전히 우리 주변 곳곳에는 일제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친일의 흔적을 미래세대가 기억할 수 있도록 일제 잔재에 단죄문과 안내문을 설치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김정대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광주천 건너에 자리잡은 낡은 방직공장.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여공들의 애환이 서린 이곳은 일제 강점기 어린 여공 수 천명이 저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착취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김순흥/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근로정신대처럼) 국내에서도 이렇게 강제동원했던 역사가 많이 있어요. 이 안에서 여공들이 기숙사라는 것도 거의 감옥 형태로 자유 행동을 할 수가 없었고…”]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이 있었던 광주공원.

일제 천황을 참배하던 신사가 세워진 민족의 아픔이 서린 공간입니다.

광복 이후 일본 신사는 시민들에 의해 헐렸지만, 일제가 만든 이 계단과 중앙광장은 아직 남아있는데요.

이 같은 역사를 잊지 않도록 계단 옆에 ‘단죄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광주시가 3년째 ‘단죄문’ 설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일제 잔재 시설에 대한 역사적 사실, 친일 인사의 행적 등을 소상히 적었습니다.

그동안 세운 단죄문은 17개에 달합니다.

[정전국/광주시 민주정신선양팀장 : “현재 광주 시내 현존하는 잔재물이 뭐고, 또 친일 인사의 행적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을 모두 조사해서… 올해 6곳을 대상으로 설치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목표로 3년치 사업이 마무리가 됐습니다.”]

광주시는 더 많은 시민들이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할 수 있도록 그동안 세운 단죄문을 소개하는 온라인 공간을 만들 계획입니다.

KBS 뉴스 김정대입니다.

촬영기자:조민웅

김정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3> KBS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단죄문 세워 역사 알린다

토, 2021/08/14-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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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앞두고 전북 일제잔재 현황보고회 개최
“청산도 중요하지만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 필요”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이날 포럼은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렸다.(전북교육청 제공)© 뉴스1

76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학교에 존재하고 있는 일제잔재 실태를 공유하고 향후 대책을 고민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는 도내 일선학교 교장과 교감, 교사, 각 교육지원청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석했다.포럼은 권익산(원광여중), 오경택(성심여고), 채창수(완산고), 권혜수(영생고), 문선빈(송북초), 라민아(익산가온초), 권민지(종정초), 손형태(부안고) 교사의 주제발표로 시작됐다. 이들 모두 일제 잔재 조사에 참여했던 교사들이다.

실제 전북교육정책연구소(소장 최은경)는 지난 1월 6명의 초·중고등교사와 정책연구소 파견교사 2명, 담당 연구사 등 9명으로 구성된 TF를 구성한 뒤 일선 학교 내 일제 잔재 현황파악에 나서왔다. 그리고 6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최근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일제잔재 조사에 나선 것은 도내에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8명의 교사들은 각자 자기가 담당했던 조사했던 내용을 발표했다.

발제 내용을 종합해보면 우선 일제잔재가 확인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총 15곳으로 집계됐다. 대부분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에 의해 친일 인물로 분류된 작곡가가 작곡하거나 군가풍·엔카풍 멜로디가 포함된 교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국에 바쳐’, ‘00학도’, ‘이 목숨 다하도록’ 같은 일제 군국주의 동원 체제에서 비롯한 비교육적인 표현을 포함한 교가도 있었다.

교표(학교를 상징하는 휘장)의 경우, 조사를 실시한 761개교 가운데 21.8%에 해당하는 166개교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전통문양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욱일문·일장기·국화문·벚꽃문양을 교표로 사용하는 학교도 무려 21개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 모양’을 사용한 학교도 75개에 달했다.

일제 잔재로 규정된 가이즈카 향나무, 히말라야시다, 금송을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도 91개교로 집계됐다.

일제 강점기 석물이나 건축물 역시 학교 부지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군산 발산초의 옛 일본인 농장 창고, 전주 풍남초와 전주초의 봉안전 기단 양식, 일부 학교의 충혼탑 등이 대표적이다.

학교 현장·행정분야 용어와 학교문화도 개선돼야할 부분으로 지적됐다. 개선대상 용어로는 시정표, 시건장치, 납기, 신입생, 절취선, 졸업사정회, 내교 등 학교 현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이 포함됐다.

또 역대 학교장이나 기관장 사진을 외부공간에 게시하거나 차렷·경례 같은 군대식 인사 표현도 바꿔나가야 할 일제 잔재로 꼽혔다.

순결을 강조하거나 부지런한 일꾼이 되자 등 순종하는 노동자가 되기를 강제하는 의미를 가진 교훈을 사용하는 학교도 11곳이나 됐다.

발제에 나선 교사들은 “조례 제정과 교육청 차원의 행·재정적 지원을 통해 일제 잔재 인식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지원단 운영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는 도내 일선학교 교장과 교감, 교사, 각 교육지원청 관계자 40여명이 참석했다.사진은 윤상원 전북대교수를 좌장으로 한 자유토론 모습.(전북교육청 제공)© 뉴스1

주제 발제에 이어 윤상원 전북대교수를 좌장으로 한 자유토론이 진행됐다.

권민지 교사는 “일제잔재를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살아있는 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경택 교사는 “학교에 남아있는 일제잔재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위해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학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학생까지 공감할 수 있도록 많은 학교장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중과의 질의 응답시간에서 김진 김제봉남초 교장은 “일재잔재 조사과정 자체가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의미가 있다. 아이들이 생각하고 인식을 바꿔가는 큰 동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제에 부역했던 사학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북지역 사립학교에 대한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승환 교육감은 “교목과 교표, 교가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무심코 쓰는 언어에도 그 나라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서 “불행하게도 우리 학교 곳곳에서는 여전히 일제잔재가 남아있다. 교육감이 되고 나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일제잔재 실태파악에 자발적으로 나서 준 교사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면서 “앞으로 교사들의 이러한 노력에 도교육청이 전폭적인 지원으로 호응할 것이다. 일제잔재 청산에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임충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3> 뉴스1

☞기사원문: ‘학교에 존재하는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토, 2021/08/14-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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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지원 단체 중심 구술 채록·녹화 작업
“생존자들 떠나도 문제의식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민간사업… “정부가 지원 역할 해줘야”

“옛날에 당꼬바지 있잖아요? 형사들은 벌써 표가 났어요, 그때는. ‘뭐하러 왔느냐’ 그래서 ‘배에 쓸 물건 좀 사러 왔다’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잠깐 좀 오라’더라고요. 가니까 웬 여관으로 들어가래요. 들어가니까 여섯, 일곱 명인가 와 있더라고요. 그걸로 문을 잠그고 내놓지를 않는 거예요. 자고 나니까 이튿날 아침에 속초역으로 나가자더니 그냥 기차를 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 가는 사람들 전부 다 납치예요, 납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제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중

1944년 일본 다카시마 탄광에 배치돼 노역했던 강제동원 피해자 손용암(93)씨의 육성 증언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한순간에 탄광으로 끌려간 기막힌 사연이 강제동원 역사의 실상을 선명히 드러낸다.

일제강점기 생존 피해자의 증언을 채록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 현재화하려는 노력이다. 벌써 광복 76주년, 생존자들의 기억과 육체가 빠르게 소멸해가는 사정을 감안하면 한시가 급한 일이기도 하다. 채록 작업을 진행 중인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정부가 속히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영원히 남는 증언’ 채록 작업 활발

11일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9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 1,50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13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올해부터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단으로부터 사업 수행을 의뢰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말까지 손용암씨를 포함해 24명의 생존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감탄사 하나까지도 빼놓지 않고 피해자 증언을 생생하게 채록하는 것이 원칙이다.

영상 채록 작업도 활발하다. 증언 내용뿐 아니라 구술 당시 감정과 표정까지 재연할 수 있다는 게 영상 채록의 장점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군함도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 시설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 영상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은 “관람객들이 ‘생존 피해자 목소리를 들으니 역사 교과서 속 얘기가 아니라 지금의 역사처럼 느껴진다’는 소감을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 30주년(8월 14일)을 기념해 김 할머니의 첫 증언 집회 영상과 활동 초기 사진 자료를 공개하는 전시회를 17일 연다.


피해자 떠나도 ‘당사자성’ 유지하려면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전시회에서 피해자의 영상이 나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이 공개됐다. 뉴스1

이런 구술 채록 작업은 일차적으로 일제강점기 미시사(微視史) 사료를 확보한다는 의미가 있다. 식민지 정책, 전쟁 등 거시적 관점에서 포착하기 힘든 역사적 실상을, 개인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입체적으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당사자 증언을 통해 일제강점기 역사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자는 의도도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고 박대하씨의 아들 박영만(78)씨는 “주권 상실로 입은 피해의 역사를 국민 전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가해자 일본이 극우세력 장기 집권으로 과거사 부정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어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승은 실장은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면 개인적 경험으로 파편화될 수 있다”며 “이미 피해 사실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여론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라고 우려했다.

생존 피해자가 세상을 뜨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기반도 필요하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지금 세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남은 생존자 수가 아니라 생존자가 모두 돌아가신 이후”라면서 “당사자성을 갖는 것, 다시 말해 피해 당사자들이 떠난 뒤에도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단체들은 ‘선대의 피해가 나와 무관치 않다’는 의식이 필요하며,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이 여기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이 이사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식민 시대의 불운한 여성들이 겪은 일 정도로 여기면 위험하다”며 “이 문제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시 성폭력은 물론이고 오늘날 여성 혐오와도 연결돼 있다는 걸 실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떠안은 부담… “국가 나서야”

광복절을 닷새 앞둔 10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생존 애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소개하는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작업은 이들을 지원하는 민간단체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단체들은 사안의 의미와 시급성을 감안할 때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이사장은 “피해자 단체가 서로 다른 자료를 갖고 있을 때 정부가 현황을 파악하고 단체 간 연계를 도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전시관이 없는 단체는 생존 피해자 흔적을 보존하기가 더 어려운 만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정부 쪽에서 ‘다 지나간 일이고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말도 들려서 씁쓸하다”면서 “정부가 생존 피해자의 구체적 기억과 경험을 계속 역사화하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익법인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는 “생존 피해자 수가 급감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구술채록 사업을 정규화해 예산과 인력을 안정적으로 지원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email protected]
오지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4> 한국일보

☞기사원문: “더 늦기 전에…” 진정한 광복 위한 ‘기억 투쟁’은 계속된다

토, 2021/08/1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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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해설] 시간에 김환주 해설위원은 다시 확인된 군함도 ‘역사 왜곡’과 일본 정부가 국제기구의 시정 요구 조치에도 외면한다는 내용을 방영했다. 또 다른 매체는 일본 입장에서 반박하는 내용을 보도했다. 군함도 관련 유네스코 지적은 트집이라며 오히려 일본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려는 한국의 정치공작이라는 것이다. 광복 76주년이다. 아직 식민통치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피해자와 유족들이 많다. 일본군 위안부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강제동원의 역사가 바로 ‘군함도’이다.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 서울시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관련 브리핑을 하고있다.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영상 공개전시에 몰린 취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일본 근대 산업시설 등재 결정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은 철강·조선·석탄산업

세계유산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으며 10가지 등재기준에 따라 인류가 공유할 만한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평가한다. 1~6까지는 문화유산, 7~10까지는 자연유산에 관한 기준인데 그 가운데 1가지 이상 부합하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다만, 모든 문화유산은 재질이나 기법 등에서 유산이 원래의 가치를 보유해야 하는 ‘진정성’, 유산의 가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제반요소를 보유한 ‘완전성’, 법적·행정적 보호제도와 완충지역 설정 등의 ‘보호 및 관리체계’를 갖추어야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기준 가운데 인간 가치의 중요한 전환점 기준 2, 문화적 전통 및 문명의 독보적 유산 기준 3, 역사의 중요한 단계 예증 기준 4를 들어 등재 신청을 했다. 그러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이코모스(ICOMOS)는 기준 3을 기각하고 기준 2와 기준 4만 유산 가치를 평가했다.

일본의 근대 산업시설들이 명백히 군사적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음에도 일본 정부의 신청서에는 이런 사실들을 강조하지 않았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정문에 각 시설의 역사 전체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이코모스의 권고 사항을 각주에 부기하는 형식으로 명시했다. 일본은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노역을 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 또한 일본은 정보센터 설립 등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이코모스가 권고한 해석전략에 포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일본정부가 후속 조치와 관련해 2017년 12월 1일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문화유산 등재 이후 2년마다 제출하는 이행 경과 보고서에서도 약속을 저버려 경고를 받았다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이 지난달 7~9일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1940년대 해당 시설에서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을 했다는 등의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또한 미흡했다고 밝혔다.

군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군함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을 했던 슬픈 역사가 간직된 섬, 군함도의 공식 이름은 ‘하시마’다. 1974년 1월 탄광이 문을 닫아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이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TV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소개되고 영화 <군함도>를 통해 이 섬에 관한 관심도 커졌다. 위치는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졌으며 동서 160미터, 남북 480미터, 둘레 1.2킬로미터, 면적 0,063제곱킬로미터로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그런데 1960년에는 이 작은 섬에 5,267명이 살았다고 한다. 인구밀도가 도쿄보다 9배 높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기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유는 석탄 때문이었다. 1810년 근처에 살던 어부가 우연히 석탄을 발견한 뒤 1890년대부터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본격적으로 바다 밑에 묻혀 있던 석탄을 캐내기 시작했다. 석탄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1941년에는 41만 1,10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쓰비시는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를 세웠다. 그 후 10층 아파트를 비롯하여 고층 건물들을 계속 지었고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렀다. “도쿄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은 모두 하시마로 모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쓰비시는 해저탄광을 개발하기 위해 최신 기술을 개발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하시마는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 서정우씨의 영상이 최초로 공개되고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

군함도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500~800명의 조선인들이 하시마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설 『군함도』 의 한수산 작가가 실제로 만난 고 서정우 할아버지는 1944년에 16세였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해저탄광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탄광 바닥에 찬 물 때문에 습하고 후끈후끈한 공기를 마시며, 낮은 막장에서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하루 10시간 이상씩 석탄을 캐냈다. 강제로 끌려와 강제노동을 하다가 병이 들어서야 그는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바다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희생된 조선인들이 40~50명에 이르렀다는 증언도 있다.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서 군함도는 세계유산일 수 없다

오늘날 군함도는 연간 1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세계유산의 공식 명칭은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철강·조선·석탄산업’이다. 군함도를 홍보하는 메시지 속에는 침략전쟁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정당화하고 식민지의 희생을 감추고자 하는 일본정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 등 그들이 환호하는 군함도 건축물의 대부분은 메이지시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더구나 일본정부는 세계유산의 범위를 1910년으로 한정하였으므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섬을 둘러싼 호안의 일부와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 갱도 입구뿐이다. 일본정부는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가리기 위해 1910년으로 그 시기를 한정하는 꼼수를 부리고는 군함도 전체가 세계유산인 양 선전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모습이다. 또한 역사를 왜곡하는 현장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기억될 수는 없다.

유네스코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는 1945년 설립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다. 유엔의 전문기구로서 전 세계의 교육과 과학, 문화의 보급을 통해 빈곤국에서 문맹 퇴치 및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고 국제 교류 증진을 통한 국제간의 이해와 세계 평화를 추구한다. 무엇보다 인류가 창조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다양한 유형의 문화적 아이템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알리고 있다. 프랑스의 에펠탑과 같은 건축물, 앙코르와트 같은 신전,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유적, 오만의 관개수로와 같은 구조물까지 실로 방대한 영역의 인류유산이 포함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을 지정하는 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의 관리, 보호와 보존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위험에 처한 곳이나 위협을 받고 있는 곳도 알리고 있다. 그래서 일부 세계유산 중에는 관리나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아 리스트에서 제외되는 곳도 여럿 있다.

박혜숙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4> 대한뉴스

☞기사원문: 군함도가 왜 세계문화유산인가! 잘못된 것은 시정돼야 마땅

※관련영상

일, 2021/08/1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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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전] [앵커]

교육당국도 일제 잔재 청산을 추진하고 있지만, 친일 인사가 작곡한 교가는 좀처럼 교체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문들의 반대가 크다는 게 이유인데 교육청에서도 강제할 방법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황정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이 초등학교는 최근 학교를 상징하는 나무를 고유 수종인 소나무로 교체했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가 일제 강점기 때 보급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학교 곳곳에 심겨진 가이즈카 향나무는 예산을 마련해 모두 제거할 예정입니다.

[박재관/대전 옥계초 교사 : “학생·학부모 의견 수렴을 거쳤는데 다행히도 모두 동의해 주셔서 한국 고유 수종인 소나무로 변경하게 됐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를 학교 상징으로 삼았던 대전지역 20개 학교, 충남지역 120개 학교가 수종을 교체했거나 교체를 추진 중입니다.

문제는 교가입니다.

충남의 이 고등학교 교가의 작곡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흥렬입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입해 일제의 징병과 징용을 찬양하는 노래를 다수 만들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습니다.

학교에서 교가 교체를 추진했지만 동문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성원기/충남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장학사 : “어린 시절의 추억 공유와 또 현재 재학생과의 연결 고리가 아무래도 교가이다 보니까 졸업생들의 반대가 좀 큰 편입니다.”]

친일 인사가 작곡한 교가는 대전에 9개, 충남에 24개 학교에서 불리고 있지만 대부분 학교가 비슷한 핑계를 대며 교체를 미뤄 지금까지 교체된 건 7곳에 불과합니다.

[홍경표/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 : “하루 빨리 미래 지향적인 내용으로 교가를 다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지역사회와 학교 동문들도 이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76주년을 맞았지만 교육계의 일제 흔적 지우기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KBS 뉴스 황정환입니다.

촬영기자:신유상

황정환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KBS

☞기사원문: 동문회가 반대해서?..일제 잔재 청산 지지부진

월, 2021/08/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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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멘트 】

오늘은 76번 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광주시는 지난 2019년부터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친일 잔재물을 찾아 단죄문을 설치하고 있는데요.

친일파 선정비부터 친일 시인의 시비, 착취 유적 등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37건에 달할 정도로 우리 주변에 친일 잔재가 여전히 많습니다.

박성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기자 】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는 광주공원 비석군에 비석 3개가 눕혀져 있습니다.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

전남 관찰사와 광주 군수 등을 지내며 한일강제합병에 도움을 주거나 의병을 탄압해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와 상 등을 받은 친일파 3명의 선정비입니다.

이들의 친일행적은 쓰러진 비석 옆에 단죄문으로 남았습니다.

친일 시인 서정주가 쓴 허백련 화백의 동상 비문과 너릿재 ‘무등을 보며’ 시비 옆에도 단죄문이 세워졌습니다.

지난 2019년부터 광주에서 발견된 일제 잔재물은 모두 37개.

친일파의 단죄문 뿐만 아니라 어린 여공들을 착취했던 전남도시제사 옛터 등 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 건물에도 안내문이 세워졌습니다.

▶ 인터뷰 : 김순흥 /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조선의 많은 여공들이 장시간, 저임금, 강제노동을 당하다시피 해왔거든요. 노동착취를 통해 부를 착취해갔던 것이죠.”

광주시는 그동안 확인된 일제 잔재물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웹페이지를 올해 하반기 내에 구축하기로 했습니다.

▶ 인터뷰 : 정전국 / 광주시 민주인권과
– “지금까지 (단죄문을) 설치했던 현황에 대해서 웹자보를 구축해서 시민들께 홍보할 예정입니다. 또한 이 자료를 가지고 각급 학교, 교육청에도 배포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광주 전남 출신 인물은 모두 156명.

광주시는 시민들의 제보 등을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제 잔재물을 찾아나갈 계획입니다.

kbc 박성호입니다.

<2021-08-15> kbc광주방송

☞기사원문: 친일파 부터 착취 유적까지..3년간 37곳에 단죄문

월, 2021/08/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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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배상 촉구 기자회견…고령 피해자들 온라인 참석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궁금해요. 일본 기업은,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이런 분(강제동원 피해자)이 있다고 하면 자기들이 사과해야지. 죄송하다고 빌어야지. 사과를 해야지. 그놈들 그렇게 무관심하게 있으면 일본이 나쁘지.”

1943년 1월 고등학교에 다니다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가마이시제철소에 징용된 이춘식(97) 할아버지는 광복절 76주년을 맞은 15일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서 이 할아버지 등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2018년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국내 법원에서만 13년이 걸린 노력이 무색하게 일본 측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올해 6월에는 피해자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다른 소송이 한국 1심에서 각하되는 등 피해자들의 숙원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일본 정부와 기업의 반성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4년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미쓰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간 양금덕(92) 할머니는 “오래됐고, 나이도 많이 먹었다. 달래줄 마음이 조금 있을까 생각했는데 서운하다”며 한숨지었다.

“나 혼자 눈물 흘리고 ‘내 죄다, 내가 복이 없응게 이렇게 했지’ 하면서도, 참 그냥 내가 이제 죽으려나벼.”

교사의 말을 믿고 12살에 일본 도야마(富山)현 후지코시 공장에 근로정신대원으로 동원된 김정주(90) 할머니는 “우리 정부나 국회의원이 힘을 써서 우리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에 간 모든 사람이 보상을 받을 수 있게끔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젊은 사람들도 우리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에 가서 고생했는지 알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김정주 할머니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강제 동원된 분들은 ‘일본의 사죄를 받고 후세에는 (이런 상황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일관되게 말씀하신다”며 “사죄를 못 받고 돌아가실까 봐 걱정하는 말씀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일본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인 야노 히데키 씨는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며 “일본 스가 정권은 정권 말기의 위기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강제동원 기업들이 그런 정권에 자신들의 판단을 맡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강제동원 판결대로 배상하라”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온라인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1.8.15 [email protected]

정성조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광복 76년 지나도 사죄 없는 日…피해자에겐 시간 없다”

※관련기사

☞한겨레: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도 효력 없나 싶어 마음이 안 좋아”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 2021.8.15/뉴스1
광복절인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주, 이춘식, 양금덕 어르신이 온라인으로 참석한 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서울=뉴스1) 이성철 기자 =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 2021.8.15/뉴스1

월, 2021/08/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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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 작곡 교가·일본신사 잔재 등…교육청 “후속 조치는 자율”

친일 인사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 [학교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인천 지역 학교에 대한 일제 잔재 조사가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행됐지만 별다른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5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4∼12월 지역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52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모두 81건의 일제 잔재 사례가 파악됐다.

이 중 22건은 친일 작사가나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 사례였다.

특히 ‘섬집 아기’와 ‘봄이 오면’의 작곡가로 유명한 이흥렬이 만든 교가도 7개 학교에서 사용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음악의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대화악단 지휘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또 다른 친일 인사인 김동진이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도 6곳에 달했다. 김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음악 활동을 했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 인사의 동상이나 일본 신사 잔재 등 일제 관련 기념물이 교정에 남아 있는 학교는 3곳으로 파악됐다.

나머지는 서운, 송월, 백마, 작약도 등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된 지명이 교명과 교가 가사에 남은 사례였다.

시교육청은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각 학교에 알렸으나 개선은 권고 사항에 그쳐 눈에 띄는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학교 동문회와 학교운영위원회 등 내부 협의가 필수적인 만큼 교내 일제 잔재를 없애기까지는 시일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천황을 섬기던 신사의 돌기둥과 석등이 교정에 남아 있는 인천 중구 모 고교의 경우 별도의 시설물 철거 계획을 논의하지는 않은 상태다.

인천 연수구 모 중학교에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윤치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나쁜 역사도 역사로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철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동창회 차원에서 재원을 마련해 학교 설립자 동상을 세운 것이라 학교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며 “내부 검토를 여러 차례 했지만 역사를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동상을 남겨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들도 대부분 즉각적인 개선 조치에는 나서지 못했다.

친일파가 교가를 작곡한 인천 연수구 모 고교는 추후 학생, 학부모, 동문회와의 협의를 거쳐 교가 일부를 개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인천 동구 모 고교도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에 대해 별다른 개선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일선 학교에 일제 잔재 조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알리기는 했지만 후속 조치는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다”며 “이후 각 학교의 개선 여부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은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인천 학교들, 일제 잔재 남아 있어도 개선은 ‘거북이걸음’

※관련기사

☞서울신문: 친일파가 만든 교가…인천 각급 학교 일제 잔재 파악하고도 ‘개선‘ 소극적

화, 2021/08/1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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