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지역

[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admin | 월, 2021/04/12- 03:16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①

봄기운이 벼락처럼 내달려 북한산 일대를 에워싸더니 만경대에서 멈칫하며 숨을 고른다. 이도 잠시 기운을 되찾은 봄장군은 사방에 꽃사태를 일으키며 수유리 벌판을 향해 진군했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은 날 김주는 우이동 솔밭공원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 심산 김창숙(아래 심산)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한번 다녀오면 만보나 되는 거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거르지 않는다.

심산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다. 그는 3·1 운동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민족대표로 모두 참여했건만 유림이 빠진 것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리고 기개를 잃지 않고 있는 선비들을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유림(儒林)의 독립청원서를 만든다. 이를 지니고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번역한 후 강화회의에는 물론 중국 내 각국 대사관에 발송하고 해외동포들에게도 보냈다.

그 후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심산은 1927년 치질 치료차 입원했던 병원에서 밀정의 신고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나가사키를 거쳐 대구경찰서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랜 징역 생활을 겪으며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 심산의 손녀딸, 김주. ⓒ 민병래

1941년생인 김주는 심산의 무릎 밑에서 컸다. 1934년 일제는 심산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줬다. 고향인 경북 성주로 돌아왔지만 감시망은 여전히 촘촘했고 그런 심산에게 손녀딸은 말벗이고 위로였다.

곰방대를 가져오고 고물대는 손가락으로 할아버지의 뼈만 남은 다리를 주무르며 김주는 “아파? 아파?” 하고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심산은 그런 김주를 품에 끌어안고 지긋한 수염으로 볼을 비비곤 했다. 김주가 중학교 때는 성균관대 담벼락에 늘어섰던 순댓국 집에서 막걸리를 함께 홀짝이던 술 친구이기도 했다.

김주는 4·19 민주묘지를 지나 백련사 표지를 보고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심산 묘지까지는 300여 미터 남짓,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다. 김주도 이제 팔순이 넘은 몸, 숨이 가빠진다. 이 길을 넘어설 때마다 두 다리를 못 쓰면서도 항일투쟁과 민주화운동에 한결같았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김구와 평생 동지였던 심산

▲ 심산의 초상 꼿꼿한 지사의 기개가 느껴진다. ⓒ 김주제공

1953년 휴전 후,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치가 더욱 심해질 때 이승만을 꾸짖으며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심산만한 사람도 없었다. 1960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열린 신채호 24주년 추도식에서 심산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독단으로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해서 탄핵재판에 회부되었고 매국행위를 했다고 제명되었던 인물이요”라고 연설해 자유당 관계자들과 관료들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세 번이나 냈던 심산이고 그의 손주 김위는 성명서 원본을 찾으려는 경찰에게 서대문로터리에서 몸 뒤짐을 당해 벌거숭이 처지가 되기도 했다. 심산은 누구보다 김구와 가까웠고 평생의 동지였다. 심산이 나석주 의사를 파견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하도록 의거를 일으켰고, 김구는 이봉창 의사를 도쿄에 보내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도모했다. 해방 후에 환국한 김구를 가장 뜨겁게 맞이했던 사람도 심산이다.

김주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녀가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김구와 심산은 각자 손주들을 데리고 종로의 어떤 극장에서 만났다. 그날 남인수의 노래공연이 있었다. 김주는 김구의 손녀딸과 객석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곰보할아버지와 심산은 무언가 귀엣말을 끝없이 나누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녀딸을 데리고 극장나들이를 하는 모양새로 비밀회담을 한 것이다.

백범이 총에 맞은 날, 사람들이 허겁지겁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심산은 비명을 지르더니 청년들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셨고 다음 날 새벽 돌아오셨다.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백범’을 불렀고 “그놈 짓이야, 그놈 짓이야”를 끝없이 외치셨다. 심산이 밥숟갈을 다시 든 게 어린 김주가 헤아려봐도 열흘이 넘은 때였다.

▲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서 절 드리는 김주 선생은 거르지 않고 일주일 두 번 찾아뵌다. ⓒ 민병래

김주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묘소에 다다르니 4월의 아침볕은 정갈하게 내려왔다. 잔디는 파릇하게 올라왔고 간밤에 내린 비로 흙더미는 촉촉했다. 김주는 깊게 절을 올렸다. 무릎에선 오래 전부터 뚝뚝 소리가 났다.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교육을 받았다.

엄마 손응교는 1933년 열일곱 나이에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례를 올렸다. 시집왔을 때 남편은 진주고보에서 동맹휴학을 주도, 5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고 시아버지 심산은 대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면회를 가서 첫인사를 올렸는데 간수에게 업혀나온 심산은 “구국운동으로 집안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집안은 네게 달렸으니 원대한 희망을 가져라”라고 말을 했다.

새댁은 면회실에서 울고 형무소 담장 밖에서도 울었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졸지에 종부 신세까지 되었다. 시아주버니인 김환기, 심산의 첫째 아들이 집 마당에서 일본경찰에게 매타작을 당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그 부인도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심산이 출옥해서는 대소변을 받아냈고 1962년 심산이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절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김주는 엄마 손응교와 자신이 심산의 묘소를 돌보고 절을 올리는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멀리 진달래 능선은 백련사 계곡쪽으로 분홍빛 꽃비를 내려 뿜었고 그 향기는 심산의 묘소에서 해적이면서 돌아나갔다. 김주는 절을 마치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이 켠 저 켠에 뿌려드리고 잠시 햇빛바라기를 했다.

눈을 감으면 되살아오는 기억은 끝이 없다. 딸이어서일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끝도 없이 얘기하지만, 엄마 손응교가 없는 심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들 있을까?

심산과 한 몸이었던 엄마 손응교

▲ 김주의 어머니이자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그는 며느리이자 심산의 평생 동지였다. ⓒ 경북경북여성쟁책개발원 제공

김주의 아버지 김찬기가 투옥과 감시 속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한 게 김주가 세 살 때인 1943년이다. 그때 심산은 여전히 일본 경찰의 감시에 꼼짝을 못했다. 엄마는 왜관역에서 몰래 떠나는 남편을 어린 김주를 안은 채 눈물로 전송했다.

남편은 “나중에 빌어먹을 형편이 돼도 애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이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 되면 2년 반이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하고 떠나갔다. 뒤늦게 김찬기가 사라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남편이 간 곳을 대라”고 수시로 손응교를 잡아다가 매타작을 하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너처럼 간이 배 밖에 나온 여자는 처음 봤다”는 일본 경찰의 악다구니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심산은 배를 쫄쫄 굶고 있었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밥부터 지어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조국 독립과 심산 선생을 위해 종처럼 살았고 내 인생은 없었다고. 심산 선생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심산 선생이 있다고.

한때는 대구에서 ‘요미우리’라는 위장서점까지 했던 엄마, 심산의 쪽지를 들고 중국 봉천까지 다녀왔고 남편 김찬기의 체포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오자 연변의 도문까지 다녀왔던 엄마, 심산의 손발을 넘어 심산과 한 몸이었건만 세상은 잘 모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주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아침 해는 백련사 계곡을 넘어서 북한산성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김주는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모레 또 올게요”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김주는 늘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읆조린다. 지금도 그날은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할아버지랑 성균관 동재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서너 명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더니 할아버지를 끌어내 명륜 1가에 있던 집에 내동댕이쳤다. 몇 년 몇 일인지는 아득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네 이놈들’ 소리치며 발버둥쳤고 김주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심산은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장악한 유림(儒林)을 혁신하고 성균관을 민족대학으로 재건코자했다. 이를 위해 1945년 11월 30일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 유림대회를 열었다. 유도회총본부가 결성되었고 심산은 위원장이 되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모아 성균관재단을 만들었고 성균관대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물론 심산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몰려 있던 자유당은 유도회총본부를 외곽조직으로 삼으려 했다. 국민을 백성이라 부르고 자기 말을 유시라 하며 봉건군주 행세를 하던 이승만은 유도회를 집어삼켜 그 충효 이데올로기와 전국조직망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문제는 심산이라는 걸림돌이었다.

자유당은 황도유학파와 정부조직을 앞세웠다. 황도유학파는 유교의 충효사상을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이데올로기로 둔갑시켰던 세력이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자 화려하게 부활해 자유당의 뒷배를 업고 심산과 정통파를 공격하며 성균관재단을 장악했다. 결국 심산은 1956년 2월 2일자로 총장직에서 쫒겨났다.

심산이 물러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거침이 없었다. 내무부장관은 1956년 11월 15일을 기해 전국 각지의 유도회 지부를 개편하라고 경찰에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심산을 따르던 정통파는 무너져버렸고 심산은 어느 날 성균관에서 들려나가고 말았다. 그 아픈 현장에 있었던 김주는 그때부터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관방을 떠돌았던 불쌍한 할아버지 심산

심산은 그 후 명륜동 1가 집에서도 쫒겨났다. 가족의 은행대출을 보증해 준 탓에 집이 압류되고 만 것이다. 심산과 손응교, 김주는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때부터 심산은 여기저기를 떠돌게 되었고 합정동 어떤 셋방을 거쳐 여관살이로 내몰렸다.

중앙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심산의 병실은 셋째 아들과 심산의 명망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통제되었다. 박정희가 심산의 병실을 찾은 게 이때였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친구로서 함께 항일투쟁을 했었다. 그런 아들 친구의 동생이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병문안을 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심산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김주가 병실 출입 저지를 뚫고 심산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1962년 5월 10일 돌아가시기 삼일 전이었다. 심산은 거죽만 남은 상태에서 21살 김주의 손을 잡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를 세 번이나 되뇌였다. 김주는 그날 눈물을 흘리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말년에 대해 세간에 떠돌던 이런 저런 얘기들이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에서 심산은 김주를 보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김주는 자식에게까지 상처를 받아야 했던, 죽는 날까지 마음 고생을 했던 심산을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게 되었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②

▲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 김주의 부친으로 해방되는 해 중국 중경에서 숨을 거뒀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김주는 심산 묘소에서 남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4·19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년 결혼한 남편은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회장이다. 2013년에 숨을 거뒀으니 그래도 오래 동고동락을 했다.

엄마 손응교는 아버지 김찬기가 일본에 쫒겨 다니는 통에 불과 1년이나 같이 살았을려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에게 셋째를 남겨 주었다. 해방되는 해 세 살이 된 김주의 남동생은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 지사가 김찬기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해방되는 해가 엄마 손응교에게는 지옥이었다. 아들의 주검과 남편의 주검을 동시에 맞았으니 오죽했을까. 엄마는 이때 목이 잠겨 말을 못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담배도 늘어 혓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폈다. 할아버지 심산은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툇마루에 며느리가 필 연초를 슬그머니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엄마였기에 김주가 신랑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것을 부러워도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살가운 사위노릇도 했다.

남편 묘소까지 돌아보고 나니 김주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늘 하루 일과를 충만하게 마친 느낌이다. 김주가 동국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할 때 남편은 동국대 법대 3학년생이었다. 4·19가 일어났을 때 행정실 캐비닛을 부수고 교기를 꺼내 거리로 나섰던 남편이다. 김주가 남편에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상해 임시정부청사 보존을 위해 1990년 중국에 갈 때 방문단의 경비를 선뜻 내준 일이다.

당시 조경한 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 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때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를 모시고 동행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미수교국 비자를 신청해서 홍콩을 경유, 북경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주선기란 사람은 중국 총리였던 주룽지의 친척으로 자기 집을 놔두고 임시정부 터에 살면서 청사 보존을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심산이 상해에서 살던 집까지 기억하고 그 사진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북경대 조선문화연구소장인 최응국, 조선족 총회장 문정일 등은 “임시정부청사를 중국내 항일유적지로 보존”하자는 학술세미나를 같이하며 중국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여정에 김주 자신이 엄마와 동행했고 남편은 방문단 18명의 여비와 현지 경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호암관에서 심산관 다시 호암관으로

집으로 가는 길, 4·19 민주묘지에서 집까지는 한달음 길이다. 그래도 만보되는 걸음에 김주는 땀도 나고, 지친 터라 솔밭공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길 한 켠에 패랭이꽃과 돌나물이 소북하게 올라온 게 정겨웠다. “어머나 씀바귀도 있네” 하며 김주는 쪼그려 앉았다. 씀바귀나물은 할아버지 심산이 두릅과 함께 좋아하셨던 술안주다. 엄마 손응교는 종가집 음식인 육회를 곁들여 상차림을 올리곤 했다.

▲ 청천서원의 모습 손응교는 심산의 평생 소원, 문중의 청천서원을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엄마 손응교는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남은 여생을 심산이 평생 소원하던 ‘청천서원’ 복원에 바치겠다고 했다. 성주의 생가를 지키며 엄마는 문중의 힘을 모아 기어이 92년에 이 일을 이루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 노릇을 의젓하게 마감한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김주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은 여생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묘소만이라도 거르지 않고 돌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성균관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기에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 성대총장시절의 심산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 심산기념관제공

심산이 쫒겨난 후 성균관재단은 1957년 10월 21일 이선근을 총장으로 선출했다. 문교부는 그의 취임을 즉시 승인했다. 그는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창설된 만주제국협화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협회는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 등 5족의 협화를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왕도낙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서울대 학생처장을 하며 ‘국대안 파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54년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편 삼성은 1965년 성균관대를 인수하였고 이병철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바탕으로 민족의 영재를 키우려던 심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선 후 금잔디 광장 뒤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1977년 성균관대 학생들과 유림의 재벌퇴진 운동으로 삼성은 재단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1980년 3월 민주화의 봄을 타고 호암관을 심산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삼성병원을 거점삼아 생명공학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던 삼성은 당시 의대 신설이 유력시되던 성균관대를 인수하고자 했고 학생들 또한 열렬히 이를 반겼다. 결국 삼성은 1996년 20년 만에 다시 성균관대에 입성했다. 당연히 심산관은 호암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심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손녀 김주가 할아버지 상해집 사진을 안고서. ⓒ 민병래

2022년이면 심산이 돌아가신 지 60년,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심산의 이름은 김주의 소원대로 되살려질 수 있을까? 씀바귀 나물을 손에 담고 일어선 김주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능선에서 내리던 꽃비는 어느 새 그녀의 굽은 어깨를 지나 우이암과 도봉 주능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도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 불쌍한 할아버지 묘소에도 봄은 무심코 찾아오겠지.
다녀갈 때 잊지 말고
고향 성주의 솜털씨앗은 상처나지 않게 고이 감싸서
명륜동 은행나무의 새순은 연노랑 빛으로 물들여
북한산의 진달래 꽃비는 눈이 시리도록 듬뿍
할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주고 가길 바랄 뿐이다.

<못다한 이야기>

① 심산이 다리를 못써 벽옹이라고 불리우고 업혀서 다닌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후 사진을 보면 서서 연설하는 사진이 있다. 이에 대해 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2020년도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에서 아래처럼 밝혔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 지사의 건강을 염려한 동료들이 솜씨 좋은 안마사를 동원해 석 달을 안마로 다리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김창숙 지사는 혼자 온전히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에 성균관대 교직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동래온천에 머물 때 2층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하게 다쳐 다시는 못 움직이게 되셨다.”

② 김주의 어머니 손응교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후손으로 자신의 가문도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손응교는 손후익의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손응교의 증조할아버지 손최수가 신돌석 의병장을 도왔고, 할아버지 손진수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전한다. 또한 종조부 손진형과 삼촌 손학익 모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손후익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김창숙 지사를 만났다. 아버지 손후익은 경북 유림계를 결속시켜 김창숙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처남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의 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김창숙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때 할아버지 손진수와 아버지 손후익이 김창숙을 간호했다. 이일이 인연이 되어 손응교는 당시 동덕여고 재학중이었지만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인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의 삶 또한 울산의 독립운동가로서 조명받고 있다. 손응교는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 남편이 죽고(1945), 시어머니가 죽고(1951) 친정아버지가 죽고(1953) 심산이 죽고(1962) 줄 초상을 당하여 평생 상복을 벗을 날이 없었다. – 참고도서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

③ 김찬기 선생의 사진은 극적으로 남아있다. 이 사진이 남은 배경을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에 기록된 손응교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면 이렇다.

“방에 우리 남편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왜관에서 비밀 지하 운동하다가 체포된 왜관 사건으로 징역 살고 나올 때 찍은 것이라.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라. 성주에서 사진관 하던 이명동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찍었어. 후에 이 양반이 동아일보 사진기자도 하고 했어. 이명동씨가 자기 묵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있더래요. 그래서 똑같은 걸 다섯 장을 뽑아서 보내왔어.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은 편지나 사진은 안 남겨. 사진 있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잡을 수 있잖아요. 우리 집에도 편지 오면 심산 어른이 좀 문제 있다 싶은 거는 다 하나 둘이 몇 번 읽어본 후 불태웠어. 심산 선생도 사진 때문에 잡혔거든.”

④ 김주의 큰 고모, 즉 심산의 첫째 딸인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심산의 장남 김환기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경에게 집 마당에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환기의 죽음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때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료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⑤ 이 글에서 다룬 황도유학회와 자유당의 유도회 장악과정은 아래 논문을 참조했다. – <성균관대학교 2002년 석사학위 논문 ‘1950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연구’,조한성>

⑥ 임시정부 터를 지키기 위한 중국방문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통일기원대제를 지냈다. 그때 김주와 손응교는 유림의 대표격으로 국조단군칙어를 낭독했다. 중국사람들은 백두산 천지에는 새가 날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고 김주는 회고한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이름, 80대 손녀의 간절한 바람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시리즈: 민병래의 사수만보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생활 깊숙이 뿌리박힌 ‘일제 그림자’ 이젠 걷어내자
상명하복·서열주의 등 일본제국주의 관행 영향
일제강점기 역사관 ‘식민사관’ 대표적 무형잔재
항일지사들 국학연구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워

올림픽을 앞둔 일본이 독도문제로 우리를 또 도발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반발을 알면서도 계획적으로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지도상에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의도는 명백히 자국내의 혐한 분위기 조성과 극우파들을 준동시켜 이미 실패한 올림픽을 면피하려는 속셈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분노를 삭일 수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도발하는 일본에 대한 응징의 소리는 온 국민을 일치단결시키는데 왜 그럴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의사 출신의 지식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백인보다 더 백인인 척하고자 노력했던 흑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식민지배를 경험한 자들의 폭력 사용과 함께 문화적 지배를 폭로하여 자아를 회복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은 자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가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무형의 친일잔재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친일잔재는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ㆍ무형의 유산’으로 정의하고 있다. 건축물이나 조형물, 친일파 등과 같은 ‘유형의 친일잔재’와 달리 정신과 의식에 남아있는 ‘무형의 친일잔재’는 그 범위가 엄청나고 일상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무형의 친일잔재는 군국주의로, 때로는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로 그리고 패배주의 문화로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며 해독을 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형의 친일잔재는 생활문화 속에서 용어로 가장 흔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화나 언어 그리고 전문용어들에도 친일잔재는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익숙한 ‘묵찌빠’, ‘무궁화 꽂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문화 속에 남아있는 왜색은 성인이 된 뒤의 화투 놀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친일잔재다. 의식과 관행적인 문화 속에도 친일문화는 강하게 남아있다. 흔히 군사문화로 알려진 상명하복의 전통, 기합과 구타 그리고 서열주의 등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표적인 일본제국주의의 관행으로 학습된 친일잔재다. 또한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국민교육헌장’은 일본의 군국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칙어에서 따온 것으로 오랜 기간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암송해야 했다. 아직도 그 흔적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로 남아있다.

법과 제도 속의 친일잔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치안유지법의 이름만 바꾼 국가보안법으로, 그리고 어려운 한자 말투성이인 재판의 판결문도 역시 친일잔재이다. 행정 서식과 지명들 그리고 교육계의 만연한 친일잔재들. 각종 문화예술 분야의 문투나 음계, 화풍 등도 역시 대표적인 무형의 친일잔재들이다. 아직도 친일작가들의 문학상과 친일음악가를 기리는 상장이 버젓이 수여되는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역사관에 관한 논쟁과 교육계의 친일잔재

무형의 친일잔재로 대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인 식민사관 문제이다.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의 다툼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지만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입장이 식민지 시절을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연구(식민사관)의 의도를 담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더욱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상존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전쟁 속에서 역사를 그대로 순수한 학문의 영역으로 국한한다는 것은 순진함을 넘어 아둔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항일지사들은 대부분 국학연구를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를 필두로 백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안재홍 그리고 조소앙까지 모두 한 손에는 일제와 싸우는 총을 들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식민사관과 싸운 펜을 들었다. 정신사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그들의 충심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해방 이후 신채호의 역사학을 계승한 학교나 학자가 없었음을 역사학계는 자문해 봐야 한다. 어쩌면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보다 이병도의 실증주의 역사학이 강하게 지배한다면 이 역시 정신적으로 강하게 남아있는 친일잔재이다.

교육계에 만연한 친일잔재는 그 영향성과 파급성 때문에 무엇보다도 앞장서서 해소해야 할 부분이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경기도 내 2천400여 학교 중 친일인물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89개교로 파악되고 있다.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현제명, 백남준, 이광수 등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에 의해 작사 작곡된 교가를 오늘도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무비판적으로 부르고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친일파들이 만든 교가를 부르는 학생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참상과 독립운동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 밖에도 반장, 부반장이라는 호칭이나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군사용어인 훈화(訓話) 등도 여전히 아무런 생각없이 사용되는 무형의 친일잔재이다.

또한 아침 조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궁성요배(宮城遙拜)라고 매일 아침 등교해서 교장부터 전 교생이 모두 일왕이 있는 동경 쪽을 향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행위에서 출발했다. 학교행사마다 으레 행하는 차렷이나 경례 등의 용어 역시 일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일제의 잔재이다.

■용어로 남아있는 친일잔재

일상용어에 남아있는 친일잔재 역시 무형의 일제유산이다. 그동안 꾸준히 순화의 과정을 거쳐 많은 일본식 용어가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용어가 1천171개(국립어학원, 2005년 조사)나 된다고 한다. 특히 음식과 행정분야가 가장 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우동(가락국수), 다데기(양념장), 덴뿌라(튀김), 오뎅(어묵), 고로케(크로켓), 소보로빵(곰보빵), 돈가스(돼지고기 너비), 모찌(찹쌀떡) 등 음식에는 여전히 순화의 대상이 되는 용어들이 넘친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심각한 영역은 행정용어이다. 지금도 일선 행정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공람(돌려봄)과 결재(재가), 견학(보고 배우기), 감봉(봉급 깎기), 과세(세금), 가건물(임시건물), 나대지(빈 집터), 나염(무늬들임), 납득(이해), 납입(납부), 내역(명세), 가계약(임시계약), 견적서(추산서), 마대(포대 자루), 명찰(이름표) 등 부지기수로 많다. 산업 현장에서의 친일잔재는 용어로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특히 건설분야와 인쇄분야가 심한데 모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공구리(콘크리트), 노가다(공사판 노동자), 가쿠목(각목), 단도리(채비), 찌라시(전단지) 등 한 둘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는 거짓말의 비속어인 ‘구라(くら)’였다는 조사가 있다. ‘거짓말하다’ 보다 ‘구라친다’라는 말이 익숙하다면 그만큼 우리는 무형의 친일잔재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순화시켜야 할 언어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왜색 용어를 남발하는 것인지를 반성해야 한다.

무형의 친일잔재 중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역명도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1914년부터 일제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강제로 통ㆍ폐합시켜 오랫동안 생활해 오면서 붙여진 정겨운 지명들을 마음대로 변경해 지역 정체성에 혼동을 주었다. 2020년 경기도 조사에 의하면 도내 398개 읍·면·동에서 약 40%인 160곳이 일제에 의하여 지명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모두 행정편의주의로 지명의 유래나 정체성은 무시되고 일방적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하여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공교롭게도 1990년대 신도시 개발할 때의 분당(盆唐), 일산(一山), 평촌(坪村), 산본(山本) 등이 대표적이고 수원의 영동시장의 경우는 원래 성외시장이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영정(榮町)으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영동(榮洞)이라고 정이 동으로만 바뀐 채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두 옛 정취를 버린 지명들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치 치하에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던 까뮈(Albert Camus)는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며 식민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오늘 우리가 친일잔재를 성토하고 청산을 외치는 이유도 명확하다. 더 맑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를 그대로 덮어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형의 친일잔재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청산하기가 쉽지만, 무형의 친일잔재는 독버섯처럼 숨어서 지금도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갉아먹으며 과거 그시절이 좋았다고 세뇌시키고 있다.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의 영역은 치유하고 복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서둘러야 한다. 법과 제도로 고칠 수 있는 분야는 시급히 시행하고, 자각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언행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일선 교육계의 선생님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모두의 노력은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1-06-10>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무형 친일잔재와 청산, 현황과 과제

※관련기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05.6.2): “무형으로 의식 지배, 해독주는 것이 일제문화잔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기획연재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수, 2021/06/16- 02:30
0
0

[안성 양성중학교]

도교육청 주관 탐구활동 목적 진행
‘친일파’ 김성태 곡 “개정해야” 92%
학내공모 실시 3학년생 작품 당선
작곡과정 거쳐 1학기내 완성 예정

▲ 학생들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학교구성원의 ‘교가 개정’의견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제공=양성중학교

안성 양성중학교 학생들이 일제 잔재 청산으로 교가 개정을 추진한다.

학생 등의 교가 개정은 경기도교육청이 주관하는 ‘일제 잔재발굴 탐구활동’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양성중학교의 교가는 김성태(1910-2012) 작곡가의 곡으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김성태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음악단체인 경성후생 실내악단 등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학교측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교육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가 개정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또 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도 들었다. 교가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교육공동체(학생·학부모·교사)와 양성중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을 1차로 수렴했다.

나아가 학급자치회와 교육공동체 대토론회에서 ‘교가를 개정해야 한다’는 찬성의견 92%를 바탕으로 개정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교가 개정 TF팀’을 중심으로 교가 개정을 위한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가 가사를 공모해 학생들의 정서를 담은 긍정적인 내용,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빛낼 수 있는 내용 등을 학생들이 직접 작사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 결과 공모전에 참여한 17명의 학생 작품 중 심사를 거쳐 3학년생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를 토대로 작곡 과정을 거쳐 1학기 내로 교가를 완성할 예정이다.

안준기 교장은 “이번 교가 개정 프로젝트는 양성중학교 교육공동체가 다 함께 교가 개정에 참여해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애교심을 고취하는 기회가 됐다”면서 “무엇보다도 독립을 향한 애국심이 3.1만세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양성지역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장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안성=이명종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6>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학생들이 교가 바꾼다

목, 2021/06/17- 11:16
0
0

[성명서][다운로드]

부천시민단체 연대 

< 성 명 서 >

제목 : 국회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반역사적, 반헌법적 판결을 한 김양호 판사를 탄핵하라!

지난 6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하였다. 이번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철저히 외면하고, 역사적 사실과 헌법을 무시한 판결이기에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하며 국회가 김양호 판사를 탄핵할 것을 촉구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시키고 35년간 우리 강산과 민족을 억압·수탈·살상하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강제로 전쟁에 동원하였으며, 부족한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발표하여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강제동원에 의해 우리의 수많은 국민들은 목숨을 잃거나 다쳤으며, 생존자들은 급여와 식사도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반인권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강제동원피해자분들의 이러한 참혹한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1965년 한국과 일본이 맺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묻히게 되었다. 청구권협정 당시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 민사적 채권과 채무관계만을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과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관여한 강제동원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받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해왔고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김양호재판부는 일제침략과 점령은 정당했다는 일본의 극우세력의 논리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 소송의 투쟁 끝에 대법원 판결을 쟁취한 피해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한순간에 짓밟아 버렸다.

한일협정으로 들여온 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느니, 국내 최고재판소인 대법원의 판결을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느니, 대법원의 판결이 국재 중재 또는 국제재판소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법신뢰를 손상시킨다느니,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로 칭찬하는 일본과의 관계를 훼손하고 한미관계에도 훼손이 된다느니 대한민국 판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막말을 한 것이다. 판사의 본분을 망각한 채 극우 정치적으로 판결을 해버렸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헌법에 기반하여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법권에 항상 조심하고 겸손해야 하며 잘못된 판결로 인하여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김양호재판부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사법 역사에 남을만한 굴욕적 판결을 하였으며, 오랜 세월 소송을 통해 이루어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무력화시켜버리고 가슴에는 커다란 상처를 남기게 하였다.

우리 부천시민단체 연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가해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연대하여 투쟁할 것이며 인권회복과 역사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잘못된 재판을 한 김양호재판부를 규탄하며 우리 부천시민단체 연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구한다.

1.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잘못된 판결을 한 김양호 판사는 즉각 사죄하라!
2. 국회는 즉각 김양호 판사를 탄핵하라!
3. 반역사적, 반인권적, 반헌법적 판결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사법부는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라!

2021. 6. 16. 부천시민단체 연대

더부천포럼, 부천시민연합, 평화미래플랫폼 파란, 국민TV 부천시협의회, (사)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부천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남북평화재단 부천본부, 지평교회, 부천민중연대,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부천시흥김포지부, 부천평화와통일을여는 사람들, 부천새시대여성회, 진보당 부천시위원회, 노동당 부천시흥당원협의회, 부천노동문제연구소, 정의당 부천 병 지역위원회,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 부천시흥김포, 한국노총 부천김포지부, 콩나물신문 협동조합, 부천민예총, 평화와 자치를 열어가는 부천연대

※관련기사

☞ 부천타임즈 : 부천시민연대, 서울중앙지법 김양호 판사 규탄 성명

목, 2021/06/17- 19:31
2
0

시청 앞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연일 경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가 펼치고 있는 ‘역곡 고택 단죄비’ 1인 릴레이 시위가 지난달 18일부터 오늘(17일 사진)까지 무려 22차례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1인 시위는 휴일을 제외했지만 단일사안에 대한 평화시위로, 무려 1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역 내 1인 시위를 펼친 최장 기록을 연일 경신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릴레이 1인 시위 첫 주자인 박 지부장은 “역곡동 고택은 친일파가 살았던 집으로 일제잔재다”며 “부천시는 단죄비를 세우고 일제잔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앞서 부천지부는 역곡고택에 대한 향토문화재 지정여부가 경기도 내 친일역사 청산작업에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2차례나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1인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박 지부장을 포함해 이동호 부지부장, 김병구(15회차), 박창길(13회차), 정한교(8회차 등), 최재숙(5회차)씨 등이다. 회차 별로 부천시 역사 기록 현장을 살펴본다. <사진은 박종선 지부장 제공>

21회차
20회차
19회차
18회차
17회차
16회차
14회차
13회차
12회차
11회차
9회차
8회차
7회차
6회차
5회차
4회차
3회차
2회차
1회차

이하영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7> 부천일보

☞기사원문: 역곡고택 ‘단죄비’ 1인시위 대기록

※관련기사 

☞ 부천일보: 역곡 고택, 친일청산 릴레이 1인 시위로 비화

☞ 부천일보: 역곡 고택 관련 ‘왜곡 보도’ 규탄

목, 2021/06/17- 21:38
2
0

문재인 대통령이 스페인 상원 도서관에 보관된 ‘조선왕국전도’를 보고 있다.ⓒ청와대 제공

스페인을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스페인 상원 도서관에 보관된 17세기 조선 지도를 보고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스페인 상·하원 합동연설 직후 상원 도서관을 찾아 ‘조선왕국전도’를 본 뒤 이같이 말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일본이 도쿄올림픽 지도와 자위대 홍보 영상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문 대통령이 유럽 순방 과정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스페인 상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국전도’는 18세기 프랑스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 장 밥티스트 부르기뇽 당빌이 발간한 ‘신중국지도첩’에 포함돼 있다. 신중국지도첩은 당시 중국의 실측지도인 ‘황여전람도’를 참고해 중국과 주변지역을 나타낸 지도다.

스페인 상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7세기 지도 ‘조선왕국전도’.ⓒ청와대 제공

이 지도에는 독도가 당시 조선 영토라는 점이 드러나 있다.

>지도에는 당시 독도를 지칭하던 우산도(于山島)를 천산도(千山島)로 혼동해 ‘챤찬타오’(Tchian Chan Tao)로 표기돼 있다. 이는 중국어식 발음 표기다.

안헬 곤잘레스 도서관장은 문 대통령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1730년대 대한민국 한반도의 지도인데, 한국인들에게 가장 와닿는 기록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설명을 들은 문 대통령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며 “아주 소중한 자료를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사의를 표했다.

<2021-06-17>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스페인서 ‘독도 조선 땅’ 17세기 지도 본 문 대통령 “아주 소중한 사료”

※관련기사

☞KBS: 한-스페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독도 표시 古지도 관람

☞SBS: 文 “아주 소중한 사료”…스페인서 찾은 ‘한국 땅 독도’

☞노컷뉴스: 스페인이 보여준 독도 표기 고지도…문대통령 “한국영토 재확인”

☞더팩트: 스페인에서 ‘독도와 울릉도’ 기록 만난 문재인 대통령 [TF사진관]

☞JTBC: 한·스페인 정상회담…’전략적 동반자 관계’ 격상

☞한국일보: 스페인서 조선 古지도 본 문 대통령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소중한 자료”

☞연합뉴스: [영상] 조선왕국전도에 ‘독도는 조선땅’…문대통령 “아주 소중한 자료”

☞광주일등뉴스: [영상] 스페인에 ‘독도’ 그려져 있는 ‘조선왕국전도’…문재인 대통령 스페인 국빈방문

금, 2021/06/18- 01:28
1
0

‘이승만·트루먼 동상건립추진 모임’ 칠곡에 건립 추진

이승만 동상(왼쪽)·트루먼 동상. 경북도 제공

민간단체에 의해 제작된 뒤 수 년째 설치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트루먼 미국 전 대통령의 동상을 경북 칠곡에 세우는 방안이 추진되면서 논란이 다시 불붙을 조짐이다.

17일 경북도 등에 따르면 ‘이승만·트루먼 동상건립추진 모임’(이하 동추모) 측은 최근 이철우 도지사를 만나 이승만·트루먼 동상 설치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이 도지사는 공감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설치 장소로는 6·25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전투를 기리는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이 물망에 올랐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월 5만 명, 연 60만여 명이 찾는 지역의 대표적인 호국기념시설이다.

이에 따라 경북도는 칠곡군과 협의 등을 통해 후속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제막에 반대 입장을 보여온 4·19민주혁명회와 4·19혁명희생자유족회 등 4·19단체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들의 움직임에 귀추가 주목된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 건립은 헌법정신 뿐만 아니라 4.19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절대 반대한다”면서 “공공부지에 독재자의 동상을 함부로 세워서는 안된다” 고 강조했다.

동추모는 그동안 서울 등 유명 거리 중 한 곳에 두 동상을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이들 단체의 반대 여론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동추모는 2017년 이승만·트루먼 두 전직 대통령의 정신을 바르게 평가하고 후손에게 계승하기 위해 동상을 제작했다.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가 동추모의 대표 직책을 맡고 있으며,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위원으로 참여 중인 조각가 김영원(전 홍익대 교수)씨가 높이 4m 20㎝, 중량 약 3t인 청동 조형물 2개를 제작했다.

김 전 교수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조각한 인물로 유명하다.

경북도 관계자는 “6·25전쟁 ‘낙동강·다부동 지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대표적 호국의 고장인 칠곡에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이 건립되면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상징성이 배가될 것”이라며 “훌륭한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트루먼 제33대 미국 대통령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참전을 결정한 인물이다.

안동 김상화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7> 서울신문

☞기사원문: 이승만·트루먼 동상 설치 논란 다시 불붙을 듯

금, 2021/06/18- 02:29
1
0

[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0
0

■ 프로그램명 : 다큐인사이트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 방송일시 : 2021년 6월 17일 (목) 22:00~22:50 KBS 1TV
■ 연출 : 임청조
■ 글,구성 : 신지현

죽음을 죽음으로 덮은 골짜기 1km,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전쟁이 낳은 비극과 드러나지 않은 진실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에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학살지로 알려진 곳이 있다. 뼈와 영혼이 산처럼 쌓여 골령골이라 이름 붙은 곳.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끌어안고 있는 골령골에는 총 8개 학살지가 있다. 길이 30m에서 180m에 이르는 구덩이 여러 곳에서 최대 7천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된다. 각각의 구덩이를 연결한 길이가 무려 1km에 달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되었다.

1950년 대전 골령골에서 벌어진 역사적 비극을 실제 자료와 증언에 기반한 재연과 관련자 인터뷰 등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죽음의 블랙박스, 기밀 해제 문건과 18장의 사진

골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1999년 미국의 기밀 문건이 해제되면서다. 1950년 9월, 미군 중령 에드워드는 ‘한국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와 18장의 사진을 본국으로 전송했다. 미군이 촬영한 사진에는 골령골에서 사람들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총살, 구덩이에 파묻힌 모습이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또한 에드워드 중령의 보고서는 이 처형이 한국 최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기록해 충격을 던졌다.

▶그해 여름의 비밀,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7월 1일 새벽, 대전형무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해서 대규모 적의 공습이 예상…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전국에서 모인 정치범들이 대거 수감돼 있었다.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대표적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아군의 위협이자 처단 대상으로 분류됐다. 좌익으로 분류된 재소자들은 대한민국 헌병에 의해 골령골 숲속으로 끌려갔다. 형기를 거의 마친 이들까지도 헌병의 총구에 희생, 구덩이에 묻히고 말았다.

골령골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대전형무소 재소자들만은 아니었다. 사전 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도 골령골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전향자들로 구성된 반공단체다. 하지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 가세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세우며 체포를 명령하고, 정당한 재판과정 없이 골령골에서 처형했다.

골령골에서의 죽음의 행렬은 그해 여름 약 한 달 동안 계속됐다.

▶남겨진 자들, 치유되지 못한 아픔

골령골 사건이 발생한 지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오랫동안 골령골 사건은 터부시됐고, 유가족들조차 숨죽이며 상처를 쉬이 드러내지 못했다. 좌익의 집안이라는 세상의 오해와 차별이 원인이었다.

골령골에서 큰 오빠를 잃은 열네 살 소녀 신순란은 어느덧 여든다섯 살의 노인이 되었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오빠의 일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71년 전 골령골에서 상부 명령으로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젊은 교도관은 평생을 죄책감과 트라우마 속에서 보내야 했다.

이 잔혹한 비극의 책임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푸른 눈의 안내자, 데이비드 밀러

대전광역시 동구청에서 국제특보로 일하고 있는 영국인 ‘데이비드 밀러’는 골령골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푸른 눈의 이방인이 머나먼 한국 땅에서 벌어진 비극을 주목하고 연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밀러의 눈에 비친 골령골 사건은 이념이 아닌 인권과 인간성의 문제다. 밀러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골령골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만나게 된다.

“저에게는 이곳이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아직 조각의 일부만을 알 뿐이죠.
모자이크 전체가 드러나는 그 날을 저는 고대하고 있습니다”

KBS 다큐 인사이트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은
2021년 6월 17일 (목) 밤 10시 KBS 1TV에서 방송됩니다.

<2021-06-11> KBS 다큐인사이트

☞기사원문: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 2021년 6월 17일 22:00 방송

금, 2021/06/18- 05:24
2
0

김해의 한 현충시설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진 모윤숙 시인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는 모습. 이현동 기자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모윤숙 시인 시 새겨져 있어
활동 작품 중 12편이 친일작
과거 육군본부서 철거되기도
“관련 조례 통과 시 존폐 논의”

조국을 구한 영웅들의 희생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김해의 한 현충시설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진 시인이 쓴 시가 적힌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파장이 예상된다.

논란이 된 시비는 모윤숙(1910~1990)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시를 새긴 것으로 김해 삼계동 김해시민체육공원에 마련된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뒤편에 세워져 있다.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는 2003년 6월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에서 건립했으며, 이 때 시비(詩碑)도 함께 세워졌다. 이런 내용은 시가 운영하는 문화관광사업소 블로그에도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를 소개하는 코너에 모 시인의 시비가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기도 하다.

모윤숙은 대표적 친일파 문학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로 2002년 8월 ‘친일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됐으며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했다.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모 시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함경남도 원산 태생인 모 시인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교사·기자·시인으로 활동하는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화여전 재학 당시만 해도 애국시를 발표했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등 민족의식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1940년을 기점으로 각종 친일단체에 가담해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1941~1945) 중 여러 친일단체에 가입해 일본에 협력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 논설을 기고하거나 ‘호산나 소남도'(1942)라는 전쟁찬양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1943),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아'(1943), ‘내 어머니 한 말씀에'(1943) 등의 친일시를 연달아 같은 해에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 시인의 작품 중 총 12편이 친일 작품으로 밝혀졌다.

모 시인의 작품이 다른 곳도 아닌 애국심을 함양·고취해야 하는 장소에 버젓이 설치돼 논란이 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5년 9월 말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던 임종인 국회의원은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며 육군본부 1층 명예의 전당에 모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임 의원은 이 시가 친일 작품인 ‘어린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와 매우 흡사하다며 “군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이를 철거할 의사가 없느냐”고 육군에 따지기도 했다.

당시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은 “친일 행적보다는 업적 중심으로 기록했다. 이 시 역시 친일사상보다는 문학사상을 고려했다”고 답했으며 당시 한나라당 황진하 의원 역시 “모 시인이 친일행적을 했다고 하더라도 시의 내용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듬해 7월 말 해당 시비는 결국 철거됐다. 당시 육군본부는 “명예의 전당에는 안중근 의사·김좌진 장군 등 의병활동을 했던 분들도 헌액돼 있어 친일행적을 가진 시인의 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전경. 이현동 기자

16년 전 논란을 불렀던 친일파의 시(詩)가 2003년부터 김해 현충시설에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철거 등의 조처가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년 전 본지 특별기고(2019년 5월 29일자 11면)를 통해 모윤숙 시인이 6·25전쟁 당시 세웠던 업적을 재조명한 바 있는 김해시의회 하성자 시의원은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모 시인의 친일행적은 변명의 여지없이 잘못된 행동이다. 당대 저항시인들이 겪었던 숱한 고충에 빗대어보면 더욱 그렇다. 현충시설에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며 “오는 24일 ‘김해시 일제잔재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조례안’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당 시비(詩碑)의 존폐 여부도 함께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해시 현충시설 담당과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본지 취재가 시작되면서 파악해보겠다고 했다.

보훈단체 관리를 담당하는 김해시 시민복지과 관계자는 “전공비가 설치됐던 2003년 당시에는 모 시인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 이전이라 이 같은 지적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며 “현재로서는 충분한 협의나 검토가 이뤄지지 않아 철거하겠다거나 유지하겠다는 등 특정 입장을 표명하기 곤란하다. 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와의 협의를 통해 결정할 사안”이라고 했다.

김해뉴스 이현동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22> 김해뉴스

☞기사원문: [단독] 김해 현충시설에 친일행적 시인의 시비(詩碑) 버젓이

수, 2021/06/23- 11:18
2
0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④
뉴욕 이길주 교수 “日은 美에게 만병통치약”
中 핵실험 성공하자, 日을 통해 中 팽창 저지
한일협정, 日 정치적·경제적 욕구 충족시켜

65년 5월 17일 정상회담 이후 린든 존슨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과 사교춤을 추고 있다.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한일협정 조기 체결을 강하게 요구하며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했다. 출처:LBJ도서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 까지 미국은 노심초사했다.

미국이 국민여론 등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피하려했던 박정희 정권을 때로는 겁박하고 때로는 회유하며 협상을 부추겼던 사실이 백악관과 국무부 비밀문서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국 기밀문서 다운로드]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 글 싣는 순서
한일협정은 美작품…미군감축카드로 朴압박
美 한일협정 회유…韓여론용 차관 미끼 고안
한일협정은 2:1싸움…日총리 “생큐 미국”
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해당 비밀문서들은 미국 뉴욕의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역사학과)가 텍사스 오스틴의 린든 B 존슨 라이브러리(LBJ 도서관)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이 교수는 존슨 대통령 시기 한미일 관계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는 존슨 대통령 시기 일본은 미국에게 ‘만병통치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만큼 일본은 미국에게 쓰임새가 많은 나라였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뉴욕에서 진행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일본이 미국의 ‘만병통치약’이었던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당시 존슨 대통령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표방하며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가하는데 경주했다고 한다. 특히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의 아시아 팽창을 막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중국발 공산화의 도미노를 막기 위해 베트남전쟁에 화력을 본격적으로 투입한 것도 존슨 대통령이었다.

미국으로선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대리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일본이었다.

이 교수는 “일본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기 때문에 여차하면 중국과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일본은 미국보다는 중국에 경도될 수 있는 나라였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을 흔들림 없는 반공산주의 국가로 다져 중국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을 보루로 삼기위한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권민철 특파원

일본이 아시아에서 중국을 방어하는 첨병 역할을 떠맡기 위해서는 먼저 아시아에서 존경받는 나라로 입지를 다녀야했다. 그러나 일본의 과거사가 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이 과거사를 청산하고 일본제국주의 피해 국가들과 관계도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바로 그 상징적인 대상 국가가 한국이었다. 한일간 국교 정상화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정치적 위상을 세우는 목표를 위해 반드시 탈환해야할 고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교수는 당시 일본이 “울타리 위에 앉아있는(sitting on the fence) 형국”이었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1965년 1월 7일 NSC의 내부 기밀보고서를 보면, 일본 사토 총리는 13일 예정된 존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자신의 의중을 미국측에 전달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은 미국에 영국과 같은 동맹국이 될 수 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허심탄회하게 공유하지 않으면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에서 발을 뺄 수 도 있다.'(체스터 쿠퍼, 제임스 토마스가 맥조지 번디 NSC특보에게 올린 보고서)

일본이 경제적으로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도 미국은 경계했다.

이 교수는 “일본의 경제가 팽창함에 따라 더 큰 시장이 필요했다. 중공은 일본에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목적에 따라 일본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일본을 중국에서 떼어내야 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따라서 일본이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도 경제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특히 경제력이 커진 일본이 미국시장까지도 침공해올 수 있는 불안감도 해소해야 했다.

1964년 6월 미국 국무부가 마련한 ‘일본의 미래에 대한 국무부의 정책 보고서’는 이 같은 일본의 경제적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방안을 담고 있다.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권민철 특파원

그 방안의 핵심 논리는 원기왕성해지고 있는 일본의 공급력을 받아 줄 시장은 동아시아이며, 그 같은 시장을 마련하기위해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이 필요하고, 다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대외 원조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서 일본의 이 같은 경제적, 정치적 욕구를 동시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첫 단추가 바로 한일간의 관계정상화였다.

이 교수는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확실히 자유진영 속에 머물게 하려면, 일본에게 역할 줘야했다. 남한과 일본이 손을 잡으면 일본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 주면서 동아시아 자유진영의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역에서 한미일 삼각편대가 확실해지는 것이었다”며 “중국과 일본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일협정이었다”고 말했다.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2021-06-22> 노컷뉴스

☞기사원문: [인터뷰]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관련기사

☞노컷뉴스: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

수, 2021/06/23- 05:45
1
0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현지 시민단체가 22일 이 운동에 한국이 연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유골 수습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는 이날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가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전몰자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를 멈추게 하는 일에 한국과 미국, 대만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달라고 말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이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쿄=연합뉴스) 오키나와전(戰) 희생자 유골 수습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 대표가 22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가 새 미군 기지 부지인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지역에서 채취하려 한다며 이를 막는 운동에 한국이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絲滿) 등에서 채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구시켄 대표는 “지금 오키나와에서는 전몰자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주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오키나와 미군 후텐마 비행장이 이전될 예정인 헤노코 연안 매립지 전경.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서 오키나와 전투 지역에서의 토사 채취에 반대하는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구시켄 대표는 그간 수습된 희생자 700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며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말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에서 구시켄 다카마쓰 ‘가마후야’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email protected]

<2021-06-22> 연합뉴스

☞기사원문: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관련기사

☞한겨레: “희생자 유골 섞인 흙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인도적 행위”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연합뉴스: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수, 2021/06/23- 05:31
1
0

정윤선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회장은 “올해는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 소몽 채기중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대한광복단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겠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 무장 투쟁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단의 10년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하신 고귀한 대한광복단 단원 한 분 한 분을 재조명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제66회 현충일인 지난 6일 오후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대한광복단기념공원 내의 사무실에서 만난 정윤선(여·68) <사>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회장은 이같이 말했다. 충북 영동에 거주하는 그녀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이학박사를 수료했다. 또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한국건설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해 왔다. 오랜 독일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큰오빠를 통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존재를 알게 된 정 회장은 이 연구소의 제천단양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측으로 사업회의 요청으로 이사직을 맡았다. 그녀는 사업회가 후손이 없는 독립운동가의 묘소를 관리하며 제(祭)를 지내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10년 가까이 이사직을 맡았던 그녀는 2019년 6월10일에 회장에 취임했다.

광복단, 채기중 선생 중심 10년간 활동
일본군과 전투·광복군 창설 등 큰 영향
기념사업회, 독립운동가 묘소 관리 맡아

올해 초대 지도부 처형 당한 지 100년
광복절 300여 순국선열 추모제 계획
역사 반추 ‘약사비’ 제막식도 열 예정

▶올해 8월은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다.

“취임 후 처음으로 한 일은 ‘대한광복단 약사비’를 새로 세운 일이다. 지난 3월 영주시의 지원을 받아 약사비 설치를 완료했고, 오는 광복절에 제막식을 열 예정이다. 약사비 제작이 대한광복단의 역사에 대해 반추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대한광복단의 역사가 어떻게 발굴됐던 가를 알게 된 것이다. 1910년대 국내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연구 초기 대한광복단은 풍기광복단으로 불리며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광복회의 지역적 전신 정도로만 간주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자료발굴과 연구를 통해 대한광복단이 1913년 창립 당시부터 전국적이었고 국제적인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대한광복단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겠다. 초대 단장이신 채기중 선생 등 지도부가 서대문감옥·대구형무소 등에서 처형당한 지 100년이 되는 올해 광복절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대한광복단 소속 300여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를 계획하고 있다.”

▶대한광복단이 광복회·의열단·한인애국단·광복군 등의 수많은 무장 항일 투쟁 단체 중 최초라고 하는데.

“대한광복단은 1913년 정월, 경북 풍기에서 결성된 자칭 ‘비밀결사 혁명기관’이다. 초대 단장인 소몽 채기중 선생을 중심으로 구한말 의병 장군들을 포함해서 8도의 동지들이 모여 만든 국내 최초의 무장 독립운동단체다. 대한광복단은 투쟁상황에 따라 1915년 광복회, 1916년 다시 대한광복단, 1918년 지도부가 체포된 뒤에는 남은 단원들에 의해 광복단결사대·암살단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약 10년간 국내에 존재했다. 이후 남은 단원들은 만주나 상하이 등지로 옮겨갔다. 이들은 의열단, 만주에서의 일본군과의 전투, 광복군 창설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광복단의 창설과 역사적 의미는.

“1913년 대한광복단의 창설은 초대 단장인 채기중과 동지들의 1년여 집중적인 조직사업의 결과였다. 이로써 민국을 지향하며 무장투쟁을 통한 항일과 독립전쟁을 준비·이행하는 혁명기관이 처음으로 광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국내에 탄생한 것이다. 대한광복단은 처음부터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조직이었으며,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국내의 강점세력에 대해 정면투쟁을 선포하며, 거의 10년간 그 세력을 유지했다는 의미에서도 대한광복단은 독립전쟁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대한광복단 초기 결성 과정은.

“채기중은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해 갔다. 만주를 여러 번 드나들던 그가 1912년 봄에 서간도에서 조성호에게 거액 500원을 건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부터 동지규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극적인 조직사업은 1912년 봄 이후다. 의병장 출신 지사들, 젊은 용사들, 풍기 주변의 지인들이 참여했다. 채기중은 모험용사대의 양성에 특히 큰 노력을 기울여 80여 명의 인원이 확보됐다. 이는 양한위 선생의 ‘양벽도공제안실기’라는 책에 기록돼 있다.”

▶당시 재정기반과 동지규합은 어떻게.

“채기중·김원식·정성산 세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고, 팔도에서 모인 유창순·장두환·유장렬·김병렬·한훈·정운기·정진화·강순필·김상옥·정만교 등이 창립 단원으로 참여했다. 양제안·양한기·양한위 삼부자와 예산의 김한종 등은 이름을 알리지 않은 채로 협조했고, 충청·전라·평안도의 지사들이 지속해서 영입됐다. 1914년에는 밀양의 황상규·김대지 등이 합류했고 단원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풍기학교훈도인 박제선, 춘양교원 류명식·박계양·정의극·이교덕·권영목 등을 통해 재산이 있는 이들을 망라해 영주 읍내에 ‘대동상점’을 차렸고 이를 통해 모은 자금 수만원으로 만주를 통해 무기를 사들였다.”

▶대한광복단이 1915년 광복회로, 1916년 다시 대한광복단으로 개칭됐다는데.

“대한광복단 단장이던 채기중과 박상진의 1915년 만남은 조직의 새로운 전기를 이뤘다. 양제안의 조언으로 박상진은 이복우와 함께 풍기의 채기중을 방문했고, 이들의 의기투합으로 대한광복단은 군대식으로 재편성되며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로 거듭난다. 박상진을 총사령, 이석대를 부사령으로 하고 각 지역의 지부가 결성됐다. 지부장은 경기 김선호·황해 이관구·강원 김동호·평안 조현균·함경 최봉주·경상 채기중·충청 김한종·전라 이병찬 등이 맡았다. 12월에는 만주 본부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가 설립됐다.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이 부사령을 맡았다. 채기중과 박상진은 수시로 연락하며 모험용사대와 연결했다. 하지만 박상진 등 대구 조직원들이 6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조직의 정체기가 오자 채기중·한훈·노백린·김좌진 등이 조직을 재정비해 다시 대한광복단으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해방 후 몇 안 되는 생존 창립단원 중 한 분인 한훈 선생이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 단원들에 의해서도, 일본 경찰의 기록에도 광복단과 광복회라는 명칭이 혼용돼 쓰였다.”

▶대표적 무장 항일 투쟁 활동은.

“이들의 목표는 무기 구입과 훈련으로 독립전사를 양성하여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섬멸전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자금 확보를 위해서는 주로 일본인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거나, 부호에게 의연금을 요청하고 거절 시 탈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보면 △제천 근북면사무소 습격(강순필) △충남 직산 금광잠입, 군자금모집 시도(김대지) △영주 대동상회 개설(박제선·권영목) △경주 광명리 세금마차 습격(우재룡·권영만) △보성과 벌교의 양재학, 서도현 처단 및 보성 헌병대 습격(한훈·김상옥·유장렬) △조선총독 데라우치 암살 시도(이관구·성낙규·조선환) △평북 영변에서 동양금광회사 수송마차 습격 (이석대·조맹선) △칠곡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채기중·유창순·강순필·임세규) △아산 도고 친일 면장 박용하 처단(김한종·김경태) △암살단 조직,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 암살 등 시도(한훈·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김상옥) 등 1913년에서 1923년까지 약 10년간 활발한 무장 투쟁활동을 진행했다.”

▶올해가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인 채기중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라는데.

“채기중 선생은 1873년 경북도 함창 소암1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그가 34세가 되든 해, 봄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풍기면 서부리 한림동으로 이사를 했다. 선생은 1907년 8월의 풍기·순흥전투를 경험했고, 또 11월에는 민긍호 부대의 치열한 죽령전투도 경험했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선생이 1913년에 비밀결사 혁명기관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해 단장을 맡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한위의 기록을 보면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의병잔당과 모험용사를 불러 대사를 도모하는 의기충천한 문사’라고 했다. 선생은 1918년 7월14일에 전라도 목포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이후 1919년 2월28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20년 3월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사형이 확정됐다. 1921년 음력 7월8일에 선생은 동지 강순필·임세규 등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올해가 선생의 순국 100주년으로 특히 선생이 숨을 거둔 음력 7월8일이 오는 8월15일 광복절이다.”

▶대한광복단 10년사와 대한광복단 소속 단원들의 업적 기록 계획은.

“당시 비밀결사 조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단원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917~1918년 많은 단원이 투옥되면서 일본 경찰과 검찰에 의해 남겨진 자료가 거의 유일할 정도다. 경찰에 쫓기던 단원들과 가족들은 보유하고 있던 자료를 아궁이에 넣고 태우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료는 지금도 꾸준히 조금씩 발견되고 있다. 발굴된 자료를 해석하는 것도 큰일이다.

현재까지 기념사업회는 세 차례의 학술회의를 통해 대한광복단의 역사에 대한 가치 진작에 힘써 왔다. 그러나 대한광복단 활동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올 하반기부터는 ‘대한광복단-광복회-광복단결사대-암살단-의열단’에 이르기까지 대일독립전쟁의 서막인 ‘대한광복단 10년사’를 찾아내고 정리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이다.”

글·시진=손병현기자 [email protected]

<2021-06-23> 영남일보

☞기사원문: [토크 人사이드]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정윤선 회장 “국내 첫 무장항일 단체 대한광복단 역사 재조명 목표”

목, 2021/06/24- 06:00
2
0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6/24- 02:12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