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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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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admin | 월, 2021/04/12- 03:16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①

봄기운이 벼락처럼 내달려 북한산 일대를 에워싸더니 만경대에서 멈칫하며 숨을 고른다. 이도 잠시 기운을 되찾은 봄장군은 사방에 꽃사태를 일으키며 수유리 벌판을 향해 진군했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은 날 김주는 우이동 솔밭공원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 심산 김창숙(아래 심산)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한번 다녀오면 만보나 되는 거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거르지 않는다.

심산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다. 그는 3·1 운동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민족대표로 모두 참여했건만 유림이 빠진 것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리고 기개를 잃지 않고 있는 선비들을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유림(儒林)의 독립청원서를 만든다. 이를 지니고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번역한 후 강화회의에는 물론 중국 내 각국 대사관에 발송하고 해외동포들에게도 보냈다.

그 후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심산은 1927년 치질 치료차 입원했던 병원에서 밀정의 신고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나가사키를 거쳐 대구경찰서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랜 징역 생활을 겪으며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 심산의 손녀딸, 김주. ⓒ 민병래

1941년생인 김주는 심산의 무릎 밑에서 컸다. 1934년 일제는 심산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줬다. 고향인 경북 성주로 돌아왔지만 감시망은 여전히 촘촘했고 그런 심산에게 손녀딸은 말벗이고 위로였다.

곰방대를 가져오고 고물대는 손가락으로 할아버지의 뼈만 남은 다리를 주무르며 김주는 “아파? 아파?” 하고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심산은 그런 김주를 품에 끌어안고 지긋한 수염으로 볼을 비비곤 했다. 김주가 중학교 때는 성균관대 담벼락에 늘어섰던 순댓국 집에서 막걸리를 함께 홀짝이던 술 친구이기도 했다.

김주는 4·19 민주묘지를 지나 백련사 표지를 보고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심산 묘지까지는 300여 미터 남짓,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다. 김주도 이제 팔순이 넘은 몸, 숨이 가빠진다. 이 길을 넘어설 때마다 두 다리를 못 쓰면서도 항일투쟁과 민주화운동에 한결같았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김구와 평생 동지였던 심산

▲ 심산의 초상 꼿꼿한 지사의 기개가 느껴진다. ⓒ 김주제공

1953년 휴전 후,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치가 더욱 심해질 때 이승만을 꾸짖으며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심산만한 사람도 없었다. 1960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열린 신채호 24주년 추도식에서 심산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독단으로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해서 탄핵재판에 회부되었고 매국행위를 했다고 제명되었던 인물이요”라고 연설해 자유당 관계자들과 관료들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세 번이나 냈던 심산이고 그의 손주 김위는 성명서 원본을 찾으려는 경찰에게 서대문로터리에서 몸 뒤짐을 당해 벌거숭이 처지가 되기도 했다. 심산은 누구보다 김구와 가까웠고 평생의 동지였다. 심산이 나석주 의사를 파견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하도록 의거를 일으켰고, 김구는 이봉창 의사를 도쿄에 보내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도모했다. 해방 후에 환국한 김구를 가장 뜨겁게 맞이했던 사람도 심산이다.

김주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녀가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김구와 심산은 각자 손주들을 데리고 종로의 어떤 극장에서 만났다. 그날 남인수의 노래공연이 있었다. 김주는 김구의 손녀딸과 객석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곰보할아버지와 심산은 무언가 귀엣말을 끝없이 나누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녀딸을 데리고 극장나들이를 하는 모양새로 비밀회담을 한 것이다.

백범이 총에 맞은 날, 사람들이 허겁지겁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심산은 비명을 지르더니 청년들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셨고 다음 날 새벽 돌아오셨다.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백범’을 불렀고 “그놈 짓이야, 그놈 짓이야”를 끝없이 외치셨다. 심산이 밥숟갈을 다시 든 게 어린 김주가 헤아려봐도 열흘이 넘은 때였다.

▲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서 절 드리는 김주 선생은 거르지 않고 일주일 두 번 찾아뵌다. ⓒ 민병래

김주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묘소에 다다르니 4월의 아침볕은 정갈하게 내려왔다. 잔디는 파릇하게 올라왔고 간밤에 내린 비로 흙더미는 촉촉했다. 김주는 깊게 절을 올렸다. 무릎에선 오래 전부터 뚝뚝 소리가 났다.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교육을 받았다.

엄마 손응교는 1933년 열일곱 나이에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례를 올렸다. 시집왔을 때 남편은 진주고보에서 동맹휴학을 주도, 5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고 시아버지 심산은 대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면회를 가서 첫인사를 올렸는데 간수에게 업혀나온 심산은 “구국운동으로 집안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집안은 네게 달렸으니 원대한 희망을 가져라”라고 말을 했다.

새댁은 면회실에서 울고 형무소 담장 밖에서도 울었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졸지에 종부 신세까지 되었다. 시아주버니인 김환기, 심산의 첫째 아들이 집 마당에서 일본경찰에게 매타작을 당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그 부인도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심산이 출옥해서는 대소변을 받아냈고 1962년 심산이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절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김주는 엄마 손응교와 자신이 심산의 묘소를 돌보고 절을 올리는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멀리 진달래 능선은 백련사 계곡쪽으로 분홍빛 꽃비를 내려 뿜었고 그 향기는 심산의 묘소에서 해적이면서 돌아나갔다. 김주는 절을 마치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이 켠 저 켠에 뿌려드리고 잠시 햇빛바라기를 했다.

눈을 감으면 되살아오는 기억은 끝이 없다. 딸이어서일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끝도 없이 얘기하지만, 엄마 손응교가 없는 심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들 있을까?

심산과 한 몸이었던 엄마 손응교

▲ 김주의 어머니이자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그는 며느리이자 심산의 평생 동지였다. ⓒ 경북경북여성쟁책개발원 제공

김주의 아버지 김찬기가 투옥과 감시 속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한 게 김주가 세 살 때인 1943년이다. 그때 심산은 여전히 일본 경찰의 감시에 꼼짝을 못했다. 엄마는 왜관역에서 몰래 떠나는 남편을 어린 김주를 안은 채 눈물로 전송했다.

남편은 “나중에 빌어먹을 형편이 돼도 애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이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 되면 2년 반이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하고 떠나갔다. 뒤늦게 김찬기가 사라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남편이 간 곳을 대라”고 수시로 손응교를 잡아다가 매타작을 하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너처럼 간이 배 밖에 나온 여자는 처음 봤다”는 일본 경찰의 악다구니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심산은 배를 쫄쫄 굶고 있었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밥부터 지어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조국 독립과 심산 선생을 위해 종처럼 살았고 내 인생은 없었다고. 심산 선생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심산 선생이 있다고.

한때는 대구에서 ‘요미우리’라는 위장서점까지 했던 엄마, 심산의 쪽지를 들고 중국 봉천까지 다녀왔고 남편 김찬기의 체포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오자 연변의 도문까지 다녀왔던 엄마, 심산의 손발을 넘어 심산과 한 몸이었건만 세상은 잘 모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주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아침 해는 백련사 계곡을 넘어서 북한산성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김주는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모레 또 올게요”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김주는 늘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읆조린다. 지금도 그날은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할아버지랑 성균관 동재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서너 명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더니 할아버지를 끌어내 명륜 1가에 있던 집에 내동댕이쳤다. 몇 년 몇 일인지는 아득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네 이놈들’ 소리치며 발버둥쳤고 김주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심산은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장악한 유림(儒林)을 혁신하고 성균관을 민족대학으로 재건코자했다. 이를 위해 1945년 11월 30일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 유림대회를 열었다. 유도회총본부가 결성되었고 심산은 위원장이 되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모아 성균관재단을 만들었고 성균관대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물론 심산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몰려 있던 자유당은 유도회총본부를 외곽조직으로 삼으려 했다. 국민을 백성이라 부르고 자기 말을 유시라 하며 봉건군주 행세를 하던 이승만은 유도회를 집어삼켜 그 충효 이데올로기와 전국조직망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문제는 심산이라는 걸림돌이었다.

자유당은 황도유학파와 정부조직을 앞세웠다. 황도유학파는 유교의 충효사상을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이데올로기로 둔갑시켰던 세력이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자 화려하게 부활해 자유당의 뒷배를 업고 심산과 정통파를 공격하며 성균관재단을 장악했다. 결국 심산은 1956년 2월 2일자로 총장직에서 쫒겨났다.

심산이 물러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거침이 없었다. 내무부장관은 1956년 11월 15일을 기해 전국 각지의 유도회 지부를 개편하라고 경찰에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심산을 따르던 정통파는 무너져버렸고 심산은 어느 날 성균관에서 들려나가고 말았다. 그 아픈 현장에 있었던 김주는 그때부터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관방을 떠돌았던 불쌍한 할아버지 심산

심산은 그 후 명륜동 1가 집에서도 쫒겨났다. 가족의 은행대출을 보증해 준 탓에 집이 압류되고 만 것이다. 심산과 손응교, 김주는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때부터 심산은 여기저기를 떠돌게 되었고 합정동 어떤 셋방을 거쳐 여관살이로 내몰렸다.

중앙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심산의 병실은 셋째 아들과 심산의 명망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통제되었다. 박정희가 심산의 병실을 찾은 게 이때였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친구로서 함께 항일투쟁을 했었다. 그런 아들 친구의 동생이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병문안을 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심산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김주가 병실 출입 저지를 뚫고 심산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1962년 5월 10일 돌아가시기 삼일 전이었다. 심산은 거죽만 남은 상태에서 21살 김주의 손을 잡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를 세 번이나 되뇌였다. 김주는 그날 눈물을 흘리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말년에 대해 세간에 떠돌던 이런 저런 얘기들이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에서 심산은 김주를 보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김주는 자식에게까지 상처를 받아야 했던, 죽는 날까지 마음 고생을 했던 심산을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게 되었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②

▲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 김주의 부친으로 해방되는 해 중국 중경에서 숨을 거뒀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김주는 심산 묘소에서 남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4·19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년 결혼한 남편은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회장이다. 2013년에 숨을 거뒀으니 그래도 오래 동고동락을 했다.

엄마 손응교는 아버지 김찬기가 일본에 쫒겨 다니는 통에 불과 1년이나 같이 살았을려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에게 셋째를 남겨 주었다. 해방되는 해 세 살이 된 김주의 남동생은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 지사가 김찬기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해방되는 해가 엄마 손응교에게는 지옥이었다. 아들의 주검과 남편의 주검을 동시에 맞았으니 오죽했을까. 엄마는 이때 목이 잠겨 말을 못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담배도 늘어 혓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폈다. 할아버지 심산은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툇마루에 며느리가 필 연초를 슬그머니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엄마였기에 김주가 신랑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것을 부러워도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살가운 사위노릇도 했다.

남편 묘소까지 돌아보고 나니 김주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늘 하루 일과를 충만하게 마친 느낌이다. 김주가 동국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할 때 남편은 동국대 법대 3학년생이었다. 4·19가 일어났을 때 행정실 캐비닛을 부수고 교기를 꺼내 거리로 나섰던 남편이다. 김주가 남편에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상해 임시정부청사 보존을 위해 1990년 중국에 갈 때 방문단의 경비를 선뜻 내준 일이다.

당시 조경한 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 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때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를 모시고 동행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미수교국 비자를 신청해서 홍콩을 경유, 북경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주선기란 사람은 중국 총리였던 주룽지의 친척으로 자기 집을 놔두고 임시정부 터에 살면서 청사 보존을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심산이 상해에서 살던 집까지 기억하고 그 사진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북경대 조선문화연구소장인 최응국, 조선족 총회장 문정일 등은 “임시정부청사를 중국내 항일유적지로 보존”하자는 학술세미나를 같이하며 중국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여정에 김주 자신이 엄마와 동행했고 남편은 방문단 18명의 여비와 현지 경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호암관에서 심산관 다시 호암관으로

집으로 가는 길, 4·19 민주묘지에서 집까지는 한달음 길이다. 그래도 만보되는 걸음에 김주는 땀도 나고, 지친 터라 솔밭공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길 한 켠에 패랭이꽃과 돌나물이 소북하게 올라온 게 정겨웠다. “어머나 씀바귀도 있네” 하며 김주는 쪼그려 앉았다. 씀바귀나물은 할아버지 심산이 두릅과 함께 좋아하셨던 술안주다. 엄마 손응교는 종가집 음식인 육회를 곁들여 상차림을 올리곤 했다.

▲ 청천서원의 모습 손응교는 심산의 평생 소원, 문중의 청천서원을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엄마 손응교는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남은 여생을 심산이 평생 소원하던 ‘청천서원’ 복원에 바치겠다고 했다. 성주의 생가를 지키며 엄마는 문중의 힘을 모아 기어이 92년에 이 일을 이루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 노릇을 의젓하게 마감한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김주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은 여생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묘소만이라도 거르지 않고 돌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성균관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기에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 성대총장시절의 심산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 심산기념관제공

심산이 쫒겨난 후 성균관재단은 1957년 10월 21일 이선근을 총장으로 선출했다. 문교부는 그의 취임을 즉시 승인했다. 그는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창설된 만주제국협화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협회는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 등 5족의 협화를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왕도낙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서울대 학생처장을 하며 ‘국대안 파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54년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편 삼성은 1965년 성균관대를 인수하였고 이병철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바탕으로 민족의 영재를 키우려던 심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선 후 금잔디 광장 뒤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1977년 성균관대 학생들과 유림의 재벌퇴진 운동으로 삼성은 재단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1980년 3월 민주화의 봄을 타고 호암관을 심산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삼성병원을 거점삼아 생명공학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던 삼성은 당시 의대 신설이 유력시되던 성균관대를 인수하고자 했고 학생들 또한 열렬히 이를 반겼다. 결국 삼성은 1996년 20년 만에 다시 성균관대에 입성했다. 당연히 심산관은 호암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심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손녀 김주가 할아버지 상해집 사진을 안고서. ⓒ 민병래

2022년이면 심산이 돌아가신 지 60년,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심산의 이름은 김주의 소원대로 되살려질 수 있을까? 씀바귀 나물을 손에 담고 일어선 김주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능선에서 내리던 꽃비는 어느 새 그녀의 굽은 어깨를 지나 우이암과 도봉 주능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도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 불쌍한 할아버지 묘소에도 봄은 무심코 찾아오겠지.
다녀갈 때 잊지 말고
고향 성주의 솜털씨앗은 상처나지 않게 고이 감싸서
명륜동 은행나무의 새순은 연노랑 빛으로 물들여
북한산의 진달래 꽃비는 눈이 시리도록 듬뿍
할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주고 가길 바랄 뿐이다.

<못다한 이야기>

① 심산이 다리를 못써 벽옹이라고 불리우고 업혀서 다닌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후 사진을 보면 서서 연설하는 사진이 있다. 이에 대해 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2020년도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에서 아래처럼 밝혔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 지사의 건강을 염려한 동료들이 솜씨 좋은 안마사를 동원해 석 달을 안마로 다리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김창숙 지사는 혼자 온전히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에 성균관대 교직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동래온천에 머물 때 2층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하게 다쳐 다시는 못 움직이게 되셨다.”

② 김주의 어머니 손응교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후손으로 자신의 가문도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손응교는 손후익의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손응교의 증조할아버지 손최수가 신돌석 의병장을 도왔고, 할아버지 손진수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전한다. 또한 종조부 손진형과 삼촌 손학익 모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손후익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김창숙 지사를 만났다. 아버지 손후익은 경북 유림계를 결속시켜 김창숙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처남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의 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김창숙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때 할아버지 손진수와 아버지 손후익이 김창숙을 간호했다. 이일이 인연이 되어 손응교는 당시 동덕여고 재학중이었지만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인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의 삶 또한 울산의 독립운동가로서 조명받고 있다. 손응교는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 남편이 죽고(1945), 시어머니가 죽고(1951) 친정아버지가 죽고(1953) 심산이 죽고(1962) 줄 초상을 당하여 평생 상복을 벗을 날이 없었다. – 참고도서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

③ 김찬기 선생의 사진은 극적으로 남아있다. 이 사진이 남은 배경을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에 기록된 손응교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면 이렇다.

“방에 우리 남편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왜관에서 비밀 지하 운동하다가 체포된 왜관 사건으로 징역 살고 나올 때 찍은 것이라.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라. 성주에서 사진관 하던 이명동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찍었어. 후에 이 양반이 동아일보 사진기자도 하고 했어. 이명동씨가 자기 묵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있더래요. 그래서 똑같은 걸 다섯 장을 뽑아서 보내왔어.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은 편지나 사진은 안 남겨. 사진 있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잡을 수 있잖아요. 우리 집에도 편지 오면 심산 어른이 좀 문제 있다 싶은 거는 다 하나 둘이 몇 번 읽어본 후 불태웠어. 심산 선생도 사진 때문에 잡혔거든.”

④ 김주의 큰 고모, 즉 심산의 첫째 딸인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심산의 장남 김환기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경에게 집 마당에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환기의 죽음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때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료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⑤ 이 글에서 다룬 황도유학회와 자유당의 유도회 장악과정은 아래 논문을 참조했다. – <성균관대학교 2002년 석사학위 논문 ‘1950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연구’,조한성>

⑥ 임시정부 터를 지키기 위한 중국방문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통일기원대제를 지냈다. 그때 김주와 손응교는 유림의 대표격으로 국조단군칙어를 낭독했다. 중국사람들은 백두산 천지에는 새가 날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고 김주는 회고한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이름, 80대 손녀의 간절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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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리즈: 민병래의 사수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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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선정비군·양파정·습향각·원효사 부도전에 숨겨진 ‘어둠의 역사’

▲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입구에 있는 만귀정. 시지정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된 곳으로 서구 8경 중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습향각에 친일파들의 시문이 걸려 있다 ⓒ 임영열

먼 옛날부터 의향·예향·미향으로 불렸던 빛고을 광주에는 수많은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국가사적 제375호로 지정된 ‘광주 신창동 유적’은 2000년 전 선사시대 때부터 광주 사람들이 비단옷에 고급 수레를 타고, 현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문서로 기록된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던 선사 시대를 지나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선조들은 곳곳에 많은 삶의 흔적들을 남겨 놓았다.

광주 사람들에게 단순히 자연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무등산 기슭에는 시대를 아우르는 문화유산들이 즐비하고, 광주의 근대 100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양림동은 문화재의 ‘보고(寶庫)’와도 같은 곳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제일 먼저 일어섰던 광주 사람들은 임진왜란, 동학농민운동, 3·1 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의거, 5·18 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의향 광주’의 정체성이 담긴 문화유산들을 남겼다.

▲ 광주공원에 있는 구 한말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 임영열

의향 광주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문화유산 중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치면서 항일의 역사와 함께 ‘친일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는 것도 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2017년 3월부터 운영한 ‘친일 잔재 조사 T/F팀’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시내에 비석, 누정 현판, 교가, 군사시설 등 총 65건(유형 47, 무형 18)의 친일 잔재물이 있음을 밝혀냈다.

이를 근거로 2019년부터 친일 잔재물로 확인된 문화유산 중 10여 곳에 ‘단죄문’을 설치했다. 단죄문(斷罪文)은 친일 인사의 친일 행적과 범죄 사실을 검증된 기록으로 적시하고, 일제 잔재 시설물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과 함께 친일 잔재물로 분류한 이유 등을 적어놓은 글이다. 불행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리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제102주년 3·1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3·1절에는 ‘친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문화재를 둘러보며 ‘어두운 역사’를 되새겨 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 친일 단죄문이 설치된 문화재 몇 곳을 둘러봤다.

▲ 광주공원 선정비군. 광주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훼손되어 가고 있던 선조들의 선정비 27기를 한 곳에 모아 비군을 조성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도원수를 지낸 권율 장군의 창의비도 있다. ⓒ 임영열

친일파들의 선정비가 뽑힌 채 누워있는 ‘광주공원 선정비군’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자리하고 있는 광주공원은 광주에서 최초로 조성된 광주광역시 제1호 공원이다. 1913년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신사를 짓기 위해 조성됐다. 광주천을 사이에 두고 도심과 가까이 있어 시민들이 휴식 공간으로 즐겨 찾고 있다.

1980년 5·18 때 시민군들이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했던 5·18 사적지와 4·19 희생자를 기리는 ‘희생영령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 시문학파의 창시자,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의 ‘쌍시비’도 사이좋게 나란히 서있다. 구 한말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가 유독 우뚝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이 고스란히 담긴 공원 동쪽 끝에는 각양각색의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이 있다. ‘광주공원 선정비군(善政碑群)’이다. 광주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훼손되어 가고 있던 선조들의 선정비 27기를 한 곳에 모아 비군을 조성했다.

2019년 광주광역시에서는 이들 비석 중에서 대표적 친일파 3인방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의 선정비를 뽑아서 한 곳으로 모으고 그 앞에 단죄문을 세웠다.

▲ 광주공원 선정비군에는 대표적 친일파 3인방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의 선정비가 뽑힌 채 누워있다. 그 앞에 단죄문을 세웠다 ⓒ 임영열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한 윤웅렬(1840~1911)은 일본인들이 광주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근호(1861~1923)는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이다. 윤웅렬의 뒤를 이어 제5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친일 집안 출신으로, 이근호를 포함해 세 형제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홍난유(1856~1913)는 1905년부터 1913년까지 광주 군수로 재임하면서 의병 진압과 강제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친일 인사다.

항일과 친일의 흔적이 공존하는 ‘양파정(楊波亭)’

광주공원에 이어 광주광역시 2호 공원으로 지정된 광주 남구 사동 사직공원에는 광주천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양파정이 있다. 광주천의 물결이 ‘버드나무(楊)처럼 파도(波)를 친다’는 양파정은 1914년 광주의 갑부 정낙교가 지은 정자다.

▲ 광주 남구 사동 사직공원에는 광주천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양파정이 있다 ⓒ 임영열
▲ 양파정에 걸려 있는 친일파 남기윤의 현판 ⓒ 임영열

정자의 주인 정낙교는 풍류를 좋아하여 매년 전국 한시 백일장을 개최하였고 소리꾼들을 초정하여 잔치를 열었다. 이때 정낙교의 손자였던 정추와 정준채는 어린 시절 한동네에 살았던 정율성과 양파정에 자주 놀러 가 소리꾼들의 창을 감상하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훗날 정율성은 중국으로 건너가 ‘연안송’과 ‘팔로군가’를 작곡하며 중국 3대 혁명 음악가로 추앙받는다. 항일 음악가 정율성의 흔적이 서린 양파정에도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 등 4명의 친일인사들이 쓴 시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어린 시절 양파정에서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던 정율성(1914~1976).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과 팔로군가를 작곡한 광주 출신 항일 혁명 음악가다 ⓒ 광주광역시 남구청

정봉현(1851-1918)은 전남 곡성 출생으로 일본 다이쇼 천황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바치고, 일본 황태자 즉위 축송문을 지어 바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여규형(1848-1921)은 경기 양평 출생이다. 다이쇼 천황 즉위를 찬양하는 글을 바치고, 황태자 즉위를 축하하는 시를 지어 ‘경학원잡지’에 게재했다.

남기윤(1879-?)은 경남 출생으로 경무총감부 경관연습소 경부, 조선총독부 경찰관 강습소 조교수 등을 지내고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정윤수(1871-01921)는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사성에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경학원잡지’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꽃향기가 엄습해 온다는 ‘습향각’에도 친일의 냄새가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입구에는 만귀정(晩歸亭)이 있다. 만귀정은 효우당 장창우가 후학을 가르치고 만년을 보내기 위해 세운 정자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된 곳으로 서구 8경 중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연못을 가로지르며 세 개의 정자가 일렬로 나란히 서있다. 이 중 가운데 자리한 ‘습향각’은 효우당의 후손 장안섭이 지은 정자로 연못 주위에서 ‘꽃향기가 엄습해 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만귀정 내에 있는 습향각. 습향각은 연못 주위에서 ‘꽃 향기가 엄습해 온다’는 의미다 ⓒ 임영열
▲ 습향각에 걸려 있는 신철균과 남계룡의 현판. 신철균의 시 마지막 연에 “나라의 민생을 걱정하여 풍년 가을이 오기를 원하네”라는 대목이 있다 ⓒ 임영열

습향각에는 신철균과 남계룡의 현판이 걸려있다. 두 사람은 일제 침략 전쟁 협력자로 알려져 단죄문이 설치됐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은 중일전쟁 당시 국방헌금 모금 등 전시업무를 수행한 공로로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이다.

원효사 부도전에 떡하니 서 있는 ‘송화식 공적비’

무등산 북쪽 기슭에는 천년 고찰 원효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시사철 무등산의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 광주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 사람들도 많이 찾는 광주의 대표 사찰 중의 한 곳이다.

일주문을 지나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그리 넓지 않은 부도전이 나온다. 부도전에는 원효사를 창건한 원효대사를 기리는 원효국사탑과 원효사를 중건한 원담화상탑 등 고승들의 부도와 탑들이 즐비하다.

역대 고승들을 기리는 부도탑 사이에 유난히 크게 세워진 비석과 부도탑 하나가 눈에 띈다. 비석에 큼지막하게 ‘춘곡거사송화식부도비’라고 새겨져 있다.

▲ 원효사를 창건한 원효국사탑과 원효사를 중건한 원담화상탑 등 고승들의 부도가 즐비한 원효사 부도전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송화식의 부도비가 떡하니 서 있다 ⓒ 임영열

송화식(1898~1961)은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와 광주고검장을 지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하며 사상범 전향 기관인 ‘광주보호관찰소’와 ‘광주대화숙’ 간부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전시동원 기구인 ‘국민동원총진회’ 이사를 지내는 등 다양한 친일 기관에서 요직을 역임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올해 3·1절은 월요일과 겹치면서 3일 연휴가 됐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 가까이 있는 ‘항일’이나 ‘친일’ 관련 문화유산에서 그날의 의미를 새겨 보는 건 어떨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잊히기 때문에.

임영열 기자

<2021-02-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의향 광주의 문화유산에 어른거리는 ‘친일의 그림자’

목, 2021/02/25-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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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2/25-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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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시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운동지를 항일독립운동지로 알리는 안내판. 경기도 제공

경기도가 3·1운동 102돌을 맞아 ‘친일기념물’ 161건에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에 나섰으나, 친일 인물의 후손 등은 “후손이 무슨 책임이 있냐”며 반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는 “2019년부터 지난해 4월까지 경기도 친일문화 잔재 조사 연구에서 친일기념물로 확인된 161건의 기념비와 송덕비에 친일 행적을 기록한 안내판을 설치하기로 했다”고 25일 밝혔다. 도는 이들 기념비 외에 친일 인물과 관련된 동상 등이 75건, 건축물 46건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덧붙였다. 경기도의 한 절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문학가로 확인된 이광수의 추모비가 있고, 도내 한 대학에는 친일 작곡가로 분류된 홍난파의 흉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경기도는 우선 친일 인물의 기념비와 송덕비에 친일 행적 안내판을 세우기로 하고 해당 시·군에 설치 가능 여부를 문의했으나, 후손들의 반발 우려 등을 이유로 ‘설치 가능하다’고 한 곳은 16곳에 불과했다. 실제로 안내판 설치 추진이 알려지자, 친일 인물의 후손들은 ‘그분들 때문에 왜 후손이 고통을 받냐’, ‘후손들이 무슨 책임이 있느냐’는 등의 항의를 경기도에 쏟아냈다.

김도형 경기도 문화정책팀장은 “안내판 설치는 교육적으로 후세들에게 역사적 공과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며 “올해 10개를 시범 설치하고 추가로 나머지 친일기념물로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경기도는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120곳에는 항일독립유적지 안내판을 세우기로 했다. 앞서 경기도는 친일 작곡가 이흥렬이 작곡한 <경기도가>를 폐지하고, 도민 참여로 새 경기도 노래를 만들어 지난 1월부터 쓰고 있다.

홍용덕 기자 [email protected]

<2021-02-25> 한겨레

☞기사원문: 경기도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에 후손들 “우리 책임이냐” 반발

금, 2021/02/2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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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중 여성비율 3% 안 돼
“입증자료 부족” 공훈 심사 탈락 일쑤
남편 공적 인정 못 받으면 더 힘들어
옥바라지·경제활동·양육까지 병행
항일 투쟁서 여성 희생 재조명 필요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와 그가 남긴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우당기념관 제공

“나날을 굶으며 지내는데, 생불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지할까. 고국에 다시 돌아가서 생활비라도
마련해볼까 하고 떠나서 왔다.”
이은숙, 서간도 시종기

56년.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이 곧 독립운동가의 삶이었단 사실을 확인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지난 2018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인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1962년 남편 이회영에게 ‘독립장’이 추서된 지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당시 서훈에는 이은숙 여사가 1966년 완성했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가 큰 역할을 했다. 만주와 북경을 넘나들며 일가의 독립운동을 힘겹게 지탱했던 그의 삶이 회고록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2018년부터 보훈처의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이 본격화됐지만, 총 1만6,000여명의 전체 독립유공자 중 여성 비율은 여전히 3%를 밑돈다.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공적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시되기 일쑤다. 옥바라지와 경제 활동, 자녀 양육을 병행해야 했던 사정이 ‘형무소 수감’이나 ‘독립군 참여’ 등의 기준 앞에선 넉넉히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3·1절을 맞아 한국일보가 만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망명과 도피를 거듭해야 했던 항일 투쟁이 당시 부인들과 며느리들의 뼈를 깎는 희생 없이 가능했을까”라고 반문한다. 당시 독립 운동은 ‘가족 단위’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남편을 따라 중국과 만주 등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 부인들은 독립운동단체 연락책부터 시작해 임시정부 산하 학교 선생님 등으로 일하며 해방에 기여했다.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수입이 없어 홀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심지어 일제에 붙잡혀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유족들이 “포상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노력을 없던 셈 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년 옥바라지와 17년의 망명 생활

동암 차이석 선생의 외손주 유기방(66), 유기수(64) 형제가 25일 인천 서구 자택에서 외할머니 강리성 여사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 맨 왼쪽은 유기방씨의 부인 권기선(68)씨. 이정원 기자

임시정부 파수꾼이자 백범 김구 측근으로 알려진 동암 차이석 선생에겐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중국 충칭 망명 시절 만나 혼인한 홍매영 여사는 뒤늦게 서훈을 받았지만, 그 전까지 상하이 망명을 함께 했던 첫째 부인 강리성 여사는 남편의 삶을 다룬 평전에 이름 한 번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 존재가 가려져 있다. 차 선생의 외손주들이 지난 2019년 강 여사에 대한 공훈 심사를 요청했으나 보훈처가 내놓은 답은 ‘입증 자료 미흡’이었다.

차 선생은 1910년 ‘105인 사건’으로 처음 투옥됐다. 그 손주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강리성 여사는 삯바느질로 감옥 안팎의 생계를 꾸려나가며 3년간 고된 옥바라지를 버텼다. 출소 후인 1919년 남편이 임시정부를 따라 상하이로 떠나자, 강 여사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섰다.

강리성 여사가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때의 모습. 유기방씨 제공

첫째 손자 유기방(66)씨는 당시 외할머니의 삶에 대해 “청사 인근에서 밥집을 하며 임시정부 인사들을 먹이고,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습격과 고문도 홀로 감당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1939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가자 강 여사는 둘째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 여사는 1961년 사망 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남편이 묻힌 서울 효창원에 합장됐지만, 무덤 앞엔 아직까지 이를 표시한 비문조차 없다.

임정 교사 이모, 사망 전 “쓸쓸한 노인”

차영애 여사와 진장권 선생의 1935년 결혼식 사진. 가장 위쪽에 서 있는 두 명이 강리성 여사와 차이석 선생. 유기방씨 제공

차영애 여사는 지난 1987년 3·1절 기념식에 병든 몸을 이끌고 행사장을 찾았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자리에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문전박대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자신을 도와달라며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다. “해방날이나 3·1절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마음이 아팠다”는 탄원서에 답은 오지 않았다. 그는 사망 1년 전 한 지역구 소식지를 통해서야 “독립운동가 차이석의 딸이지만 평생을 홀로 살아온” 노인, “뜻있는 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한 문장으로 기록됐다.

1986년 효창원추모제에 참석한 차영애 여사와 1987년 작성한 탄원서 일부. 유기방씨 제공

강리성과 차이석의 첫째 딸인 차영애 여사 역시 해방 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홀로 삶을 마무리했다. 차 여사는 1934년부터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고 그 기록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후손들의 서훈 신청에 보훈처는 “적극적 활동 여부 불분명”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반면 차 여사와 함께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남편 진장권 선생은 독립군 활동 등의 이력이 있어 1990년 애국장 서훈을 받았다.

차 여사는 생전 독립유공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결혼 당시 찍은 사진도 남아 있었지만, 당시 시댁의 반대로 남편 진장권의 호적엔 올라가지 못했다. 아버지 차이석 선생의 남은 보훈 연금은 이복동생인 차영조씨 앞으로 돌아갔다. 유기방씨의 동생 기수(64)씨는 이모의 삶을 두고 “기록 외의 활동은 무시당했고, 결혼하고도 호적에 올라가지 못했으며, 아들을 우선시하는 과거 보훈 제도 탓에 가난한 생애를 보냈다”며 “가부장적 관습의 총체적 피해자가 우리 이모”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도 번번이 탈락하는데 부인은…”

박애신 여사(의열단원 김태규 선생 부인)의 손자 김명곤(64)씨와 그의 부인 김정숙(60)씨가 25일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박애신 여사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 배우한 기자

별도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은 이상, 독립운동가 부인의 공적서는 남편의 행적을 바탕으로 작성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남편의 공적이 인정 받지 못하면 부인의 서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의열단 김태규 선생의 손자 김명곤(59)씨는 “사망연도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 차례 연속 할아버지 김태규의 서훈 신청을 거절당한 후, 할머니 박애신여사의 서훈까지 거절당했다.

김씨 부부에 따르면, 박애신 여사는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와 남편 김태규의 옥바라지를 연이어 했다. 파리평화회의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에 관여하다가 체포된 김 목사가 1년 형기를 거의 다 채웠을 때쯤 무렵 아들 김태규의 1년형이 확정됐다. 감옥으로 사식과 솜옷을 들이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은 스무살을 갓 넘긴 박 여사의 몫이었다.

“서훈 기준 바뀌어야”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25일 본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래 놓인 자료들은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배화여고 학생들의 형무소 기록. 배우한 기자

김씨는 “증조부 김병농 목사는 서훈을 받았지만, 할아버지의 경우 마지막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단 이유로 본인은 물론 할머니 박애신의 서훈도 반려됐다”며 “일반 시민인 후손들이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조상 자료를 다 찾아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김씨는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의 자료 수집과 독해가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독립운동가 부인에 대한 서훈 기준이 지금보다 확대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투쟁’ 전선에 뛰어든 기록을 중심으로 평가하다 보면 서훈을 받을 수 있는 여성들은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가정’을 지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들 가운데 이은숙 여사처럼 일생을 회고록으로 남긴 경우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대 부인들의 폭넓은 지원 활동 역시 사실상의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단순히 피해자 보상 차원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차원에서도 독립운동가 부인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독립운동가 부인들은 남편의 생애에 가려 역사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머물러왔다. 하지만 실제 치열했던 항일투쟁 뒤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희생이 있었다.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당시 시대상에 비춰봤을 때, 남성 독립유공자가 1만6,000명이라면 그에 딸린 최소 1만명 이상의 부인들도 독립유공자여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남편 옥바라지에 자식들 교육,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경찰들까지 한꺼번에 감내하는 것이 당시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삶이었다”며 “무장 투쟁이나 감옥살이와 비교해 이들의 삶을 ‘당연한 내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동등한 독립운동가로 대우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01> 한국일보 

☞기사원문: 가려진 독립운동가 부인들 “내조 아닌 동등한 투쟁”

월, 2021/03/0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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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 161건에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억…더 강력한 역사 청산 방식”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경기 수원시 권선구 88올림픽공원에 있는 난파 홍영후 동상 안내판. 홍영후의 업적과 친일 행적이 같이 적혀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봉숭아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100곡을 남기신 작곡가 난파 홍영후 선생은 우리나라 맨 처음 바이올리니스트이시다…2009년 대통령 소속기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

경기 수원시 권선구 88올림픽공원에 있는 난파 홍영후(1898~1941) 동상 앞에는 ‘음악계의 선구자’라는 홍난파의 업적과 함께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된 사실이 적혀 있다.

안내판에 홍난파의 업적만 쓰여 있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지적에 지난 2019년 9월 권선구가 친일 행적을 함께 적은 것이다.

친일 인물의 업적과 친일 행적, 즉 ‘공'(公)과 ‘과'(課)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가운데 88올림픽공원의 홍난파 동상처럼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알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친일 관련 행적을 없애버리는 ‘청산’ 작업을 넘어 공과를 같이 기억해 교훈 삼는 방식이 추진되는 것이다.

102주년 3·1절인 1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는 지난해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 결과 확인된 도내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의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다.

도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해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통해 일제강점기(1905년~1945년 8월)에 형성된 생활 문화 속 친일 잔재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 결과 ▲친일인물 257명 ▲친일기념물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의 도내 일제잔재를 확인했다.

이 가운데 친일 기념물 161건에 해당 기념물이 친일 행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는 안내판을 설치한다.

지역별로는 안성 57건, 화성 18건, 평택 13건, 용인 10건, 양주 9건, 이천 9건, 광주 8건, 여주 7건, 시흥 4건, 포천 4건, 의정부 3건, 수원 3건, 구리 2건, 파주 2건, 양평 2건, 연천 2건, 남양주 2건, 안산 1건, 과천 1건, 안양 1건, 고양 1건, 하남 1건, 부천 1건 등이다.

친일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비’, ‘거사비’, ‘시혜기념비’, ‘기념비’ 등이 도내 곳곳에 퍼져 있다.

도는 오는 4월 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우선 선정된 10곳에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다. 역사적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은 바로잡고, 친일 행적 등 역사적 기록을 명확히 알린다는 취지다.

이와 함께 용역 결과 확인된 친일문화잔재를 디지털자료로 기록·보존·관리하는 아카이브 포털사이트를 이달 도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시스템 개발을 비롯해 데이터베이스나 전시·홍보·교육·참여 관련 콘텐츠 구축을 마친 상태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과거에는 역사적 사실을 무작정 허물고 없애는 방식으로 친일 잔재 청산이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아픈 역사든 잘못된 역사든 역사이기 때문에 공이 있으면 공대로, 과가 있으면 과대로 같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없애버린다고 역사적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록하는 것이 더 강력한 역사 청산의 방식”이라며 “있는 그대로 기록해 과거와 직접 대면해 교훈을 얻을 수 있어 더 의미가 있다”라고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021-03-01> 뉴시스 

☞기사원문: “친일 기념물에 친일 행적 기록”…공과 함께 알린다

월, 2021/03/0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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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절 맞아 “선조 희생” 강조해
與 서울시장 후보들도 막판 ‘총력’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이준 열사의 집터를 찾아 표석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유오상 기자] 3·1절을 맞아 이준 열사의 집터를 방문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선조의 희생과 헌신의 기록을 찾고 유지하고 전승하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대표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이 열사의 집터 표석 앞에서 “표지석을 설치하고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이어진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한 도리지만, 그런 일을 해주신 유지들께 감사를 드린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부가 찾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민간 지사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도 후손으로서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한 이 대표는 “앞으로라도 우리는 어려운 시절에 독립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셨던 선조들의 발자취,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의 기록을 찾고 유지하고 전승하는 노력을 강화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준 열사님은 헤이그특사, 그 일 자체 만국평화회의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셨던 분”이라며 “가셔서 끝내 돌아오시지 못했는데, 그런 비장한 생각과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분의 확고한 사생관(死生観)은 후대에게 깊은 깨우침을 주신다”고 언급했다

또 “이준 열사님은 돌아오시지 못하고 그 분의 마지막 사셨던 집터만 저희들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도 참 우리의 슬픈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후대의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장소”라고 방문 소회를 밝혔다.

이날 서울시장 보궐선거 최종 후보 확정을 앞두고 있는 민주당 소속 예비후보들도 각자 3.1절 일정을 소화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역임한 박영선 예비후보는 이날 “우리는 선열의 뜻을 받들어 일본의 수출 규제 위기를 기술 경제 독립의 계기로 삼았다”고 강조하며 “이제 우리는 ‘소재부품장비’ 기술 독립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상호 예비후보도 이날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기억을 언급한 우 후보는 “저는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많이 죽였다고 한 외신과의 인터뷰 발언을 빌미로 국가모독죄로 구속당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며 “참혹한 시절이었지만, 지금의 우상호를 있게 한 시절이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email protected]

<2021-03-01>헤럴드경제 

☞기사원문: 이준 열사 집터 찾은 이낙연 “정부 대신 민간이 발견…후손으로서 송구” 

※관련기사 

☞뉴시스: 이낙연, 이준 열사 집터 찾아 “선조의 희생 전승해야”(종합)

화, 2021/03/0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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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일)은 3.1운동 102주년이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그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듬해인 1920년 간도 지역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섰다. 간도 지역 독립군을 말살한다는 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벌어진 ‘간도참변’이다.KBS는 오늘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 일본총영사가 결재한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오늘 밤 9시 뉴스에서 집중 보도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간도참변에 참가했던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일제에게는 유능한 친일 한국인 경찰, 우리에게는 동족학살에 가담한 민족의 반역자들이다.

■ KBS, 간도참변 참가 한국인 경찰관 48명 공적서 최초 발굴

KBS는 일본 외교사료관 ‘서훈 및 행상’ 분류 자료 가운데 1921년 작성된 ‘간도 사건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의 구체적인 반민족 행위가 밝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 한국인 경찰관, 독립운동가 체포·민간인 학살에 가담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훗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金剛) 선생. 선생은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다.

KBS가 찾은 공적서에는 한국인 순사 김학원이 “김강 체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민간인 부락에 침입해 학살에 가담한 정황도 확인된다. 순사 백원장은 한인 마을 5곳을 급습하는 데 가담했고, 독립운동가 체포에도 앞장섰다.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를 보면, 간도참변의 많은 사건 가운데 가장 끔찍한 학살로 기록되는 ‘장암동 학살 사건’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도 확인된다. 당시 일본군과 경찰은 4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신을 모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순사 박원식에 대한 공적서를 보면, 일본군이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와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다. 장암동 사건의 가담자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 한국인 경찰관, 독립운동가 체포·민간인 학살에 가담

한국인 경찰관은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역할도 맡았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보병총 35자루를 압수한 공로”가 인정받는가 하면, “왕복 8리(3km)를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을 노획”해 오기도 했다.

김광만 KBS 객원연구원은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들이 간도 토벌에 참여했던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공적서로 써주고, 간도총영사관이 공적서를 취합한 다음에 외무성에 보고했다”며 “우리나라 동포를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학살자들의 고백록이자 죄상 기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등 전국 각지에서 파견된 친일 한국인 경찰관들이었다.

만주 지역 항일운동 연구의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간도대학살 때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일제가 조선인 경찰을 간도 현지에 있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최초의 발굴 자료”라고 강조한다.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증보판>에 등재 예정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증보판에 KBS가 발굴한 친일 경찰관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 일제로부터 종군기장을 실제로 수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 다른 과제도 남아있다. 공적서에는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 17명의 실명이 등장한다. KBS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했을지도 모르는 이들에 대한 보훈처의 공적 발굴 노력이 필요하다.


KBS 사회부는 정확히 100년 전 오늘(1921년 3월 1일) 작성된 600쪽 가량의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을 일제 입장에서 적은 문서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곧바로 간도참변이라는 끔찍한 보복에 나선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여 명. 일제는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일제가 작성한 공적서에 이름을 올린 경찰들은 일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이들이지만, 우리에게는 같은 민족을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들의 구체적 행위가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발굴 문서를 보면 이들이 ‘동족학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히 기록돼 있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공동 취재로,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에 기재된 해당 경찰관들의 소속과 계급, 주요 공적 내용을 토대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봤다.

■ 일제로부터 상훈 받은 9명…연금 받고 진급까지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이다. 단서는 1928년 8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의 부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인 경찰관 9명이 1920년 12월 25일 ‘종군기장’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이다.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 각각의 전쟁마다 종군기장의 종류도 달랐는데,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다.

충북 청주경찰서 순사 백창돈(白昌敦)은 1920년 5월 17일 간도 지역에 파견됐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 당시 적을 경계하고 재류민을 보호한 것(2) 토벌대에 배속돼 귀순자 처리 및 선전 업무 종사 등이다. 물론 이때의 ‘적’은 우리에겐 독립운동가를 뜻한다.

간도참변 이후 그의 행적을 따라가봤다. 조선총독부 연금자료에서 추가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간도참변 이듬해인 1921년 본래 소속돼 있던 충북 청주경찰서로 귀환한다. 이후 1930년 제천경찰서로 근무지를 옮긴 뒤 퇴직했다.

재간도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한 경부보 최태욱(崔泰郁).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밀정 사용 및 은닉 총기의 소재지에 관해 내사, 독립운동가 행동 조사에 관한 사무에 복무해 그 공적이 현저(2) 1920년 10월 5일~7일 출동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총영사관 경찰관과 재향군인으로 경비대를 조직해 임무를 완수 등이다. 공적서는 그가 1920년 10월부터 시작된 간도참변 당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가리킨다.

그의 추가 행적은 1926년 1월 16이 경성일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간도총영사관 소속 다른 경찰관들과 함께 승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의 계급은 경부보가 아닌 경부로 기재돼 있다. 간도참변 가담 당시 경부보였던 최태욱이 참변 이후 불과 5년 사이 경부로 진급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찰 계급 체계는 위로부터 경무총장-경무부장-경무관-경시-경부-경부보-순사 순으로 정비돼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출신 경찰들은 순사 계급에 머물렀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경시나 경부급 인사가 되기는 어려웠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경부보 최태욱의 공적서. 일제는 그를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했다.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당시 조선인이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라며 ” 1920년대 당시 조선인 경부는 각 도에 한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태욱이 어떤 연유로 경부로 승급했는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간도참변에 가담함으로써 얻은 공적이 직간접적으로 진급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KBS는 간도참변에 차출된 한국인 경찰관 48명 가운데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공주경찰서 등 소속 경찰서가 기재된 이들의 추가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공식 질의했다. 경찰은 ” 인사관리시스템에서 연관성이 있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정경찰서(현재:서울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1920년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張國煥).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국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을 찾을 수 있었다. 한자까지 일치하고 계급 승급 가능성이 있어 동일인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간도참변에 가담했다가 일제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은 순사 장국환(위)과 해방 후인 1952년 경기도 경찰국 소속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아래). 경찰은 두 인물 모두 인사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경찰은 두 인물의 연관성을 확인해줄 수가 없었다. 장국환에 대한 인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1952년 경기도 경찰국에 재직한 장국환은 정부 기록물에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정작 경찰청이 보유한 인사기록에는 빠져 있었다. 경찰은 인사기록을 기준으로 인사관리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에 일부 누락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구 동상 세운 경찰, 친일 잔재 청산은 사실상 ‘전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이 2019년 경찰청에 들어섰다.

경찰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본청 청사 안에 세웠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다. 경무국장은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이다.

2년여가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지 따져봤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조사했다. 이 가운데 70여 명(중복 포함)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는데, 각 경찰청·경찰서 홈페이지에는 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 김상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지만, 영동경찰서 대회의실에 별도의 친일 이력 표기 없이 이름이 걸려 있다.

심지어 일부 경찰서 건물 안엔 여전히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이었던 김상규도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 형사로 근무하며 사상범과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경찰은 이에 대해 “재직 이력을 있는 그대로 표기했을 뿐 선양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친일 이력을 함께 또렷하게 적고 있다. 경기도는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표기하고 있다.

경기도 김홍국 대변인은 “친일 이력이 있는 인사의 재직 이력을 지우는 것도 사실 왜곡인 만큼, 기록 삭제 없이 친일 행적을 병기했다”라며 “친일 잔재 청산과 도민의 알 권리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반민특위’ 습격한 경찰…사과 요구에도 여전히 묵묵부답

경찰은 2019년 이른바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려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뚜렷한 성과를 내지 않고 있다. 경찰은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고자 편찬위원회까지 꾸렸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빛’만 드러내고 ‘그늘’은 외면하는 꼴이다.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구성한 헌법기구였지만, 경찰은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 위원과 직원, 특경대원 등 35명을 연행했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 기한은 본래 임기보다 10개월 축소됐고 같은 해 8월 31일 특위 활동은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 과제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6월 6일을 ‘국치일’로 보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역사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2005년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관련해 경찰에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경찰의 공식 입장은 나온 바 없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경찰 지도부에게 과오를 과감하게 덜어내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반민특위 와해에 대한 진정한 사죄라든지 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상 노력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KBS 사회부는 삼일절을 맞은 오늘밤 [9시 뉴스]에서 이번에 단독 발굴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는 한편, 취재진의 추적 경위도 생생한 영상으로 전할 예정이다.<

<2020-03-01> KBS 

☞기사원문: [발굴]① ‘동족학살’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확인 

☞기사원문: [발굴]② 경찰 48인 추적..친일의 그림자 청산되었나?

화, 2021/03/0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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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기념 헌정곡
노관우밴드가 부르는 ‘장타령’♬

민족문제연구소는 30주년을 기념하여 온라인 기념식을 진행하였습니다
https://youtu.be/QEDikInS_CY

수, 2021/03/03-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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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하다 붙잡힌 동포는 숨이 붙은 채 땅에 묻혔다

1945년 3월 남태평양 밀리환초에서 일본에 반란을 일으킨 후 미군에 구조돼 구명보트로 이동 중인 한국인 징용자들이 안도하듯 웃음을 짓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태평양전쟁에서 열세에 몰린 일제는 1944~1945년 조선인 군속(인부, 군부) 1만여명을 오키나와에 급히 배치했다. 당시 미군은 오키나와의 조선인 군속 포로를 ‘노예노동자(slave laborers)’라고 표기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사·발표한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책임연구원 김민영 군산대 교수) 자료에 따르면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의 일본군 특설수상근무대에서는 1945년 3월 탈주 또는 식량을 훔쳤다는 이유로 13명의 조선인을 처형했다. 처형 지휘자인 오노다 조장은 “1926년식 권총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죽였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이같은 실상을 알리기 위해 인천일보는 3월4일자 지면부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김용덕)과 함께 오키나와에 ‘강제동원’ 되었던 경북 상주 출신 장윤만(1917~1963)씨의 수기 ‘태평양전쟁 실기집’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오키나와 게라마의 자마미지마에 상륙하는 미군(HyperWar US Army in WWII Okinawa The Last Battle에서)
태평양전쟁 실기집 원본 첫페이지.
장윤만님의 미군포로 기록.

이와 함께 김영선, 이인신, 이공석씨 등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구술자료 등을 토대로 일본 북해도 탄광 감금생활, 남태평양 미래도의 조선인 살해 및 식인사건 전모, 남태평양 밀리환초의 조선인 반란사건 등도 잇달아 7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지원도 받을 예정이다.

장윤만님 생전사진. /사진제공=장현자씨

장윤만씨는 1944년 6월10일 경북 상주군 공성면에서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1년 동안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군속으로 동원됐다. 1945년 6월8일 미군에 체포됐고, 오키나와 포로수용소를 거쳐 1946년 11월20일 집으로 귀환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감금·학대·살육의 현장을 몰래 메모해 왔다. 그리고 귀향 후 병석에서 친동생인 장재달(당시 중학생)씨에게 자신이 두루마리에 적어온 수기를 일기와 3.4조 형식으로 정서하도록 했고, 1948년 2월 완성했다.

이 수기집은 딸 장현자(70·전 반도상사 노조위원장)씨 부부가 보관 중인 것을 국립민속박물관 안정윤 학예사가 발견,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다음은 장윤만씨의 ‘태평양 전쟁 실기집’ 본문의 주요 부분이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email protected]

너희들은 오늘 총으로 죽일 것이니(‘태평양 전쟁 실기집’ 본문 68~70페이지)

<2021-03-03>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1

목, 2021/03/0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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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확인된 위안소만 1000곳 넘어
대만까지 1200곳 이상…”추가 발견 계속”
중 전문가 “역사상 유례없는 부끄러운 사건”

일본군에 점령된 중국 상하이(上海) 거리의 전쟁 폐허 속에서 일본군 위안소를 가리키는 ‘황군위안소’ 안내 표지가 붙어 있다. 이 사진은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쑤즈량 상하이사범대 교수 제공=연합뉴스

중국 상하이(上海)시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에는 전면에 아치 모양 창문이 나란히 박힌 오랜 2층 서양식 벽돌 건물이 서 있다.

이 건물에는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가 바로 이 건물에 있던 것이다.

일본군은 1931년 11월부터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이곳에서 일본군 장교를 위한 위안소인 ‘다이살롱'(大一沙龍)을 운영했다.

다이살롱은 세계 최초로 들어선 일본군 위안소였다. 또 가장 오래 운영된 일본군 위안소이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 ‘다이살롱’이 있던 건물. 지난달 28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의 옛 ‘다이살롱’ 건물 앞을 한 행인이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성을 부정하는 취지의 논문을 써 거센 비판에 직면한 가운데 중국 지역에서만 다이살롱처럼 실제 존재한 것으로 확인된 일본군 위안소만 해도 1천 곳을 훌쩍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는 28일 연합뉴스에 지금까지 중국에서 각종 사료를 통해 실재한 것으로 확인한 일본군 위안소가 최소 1천127곳에 달한다고 밝혔다.

현행 성(省)·직할시별로 보면 후베이성이 295곳으로 가장 많았고 산둥성(208곳), 저장성(183곳), 상하이시(172곳), 장쑤성(70곳), 안후이성(70곳), 후난성(50곳), 광둥성(42곳), 윈난성(37곳) 등이다.

당시 한국처럼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최소 137곳의 위안소가 운영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센터 측은 설명했다.

대만까지 합쳤을 때 중국어권 지역에서 발견된 일본군 위안소는 ‘1천264곳 이상’이다.

센터 측은 1천여 곳에 달하는 일본군 위안소가 각종 사료를 통해 철저히 확인된 곳만 추려낸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동북3성, 베이징시, 톈진시, 허난성, 허베이성, 푸젠성, 하이난성 등 일본군 위안소가 다수 존재했던 다른 지역의 경우 일본군 위안소의 전체적 규모를 산정하는 작업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어 향후 존재가 확인된 일본군 위안소 규모가 수천 곳으로 급증할 것으로 센터 측은 전망했다.

나아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중국 외에도 동남아시아 각국 등 각지에서 다수의 위안소를 운영한 사실까지 고려하면 전체 일본군 위안소 운영 규모는 훨씬 클 수밖에 없다고 센터 측은 설명한다.

이번에 1차 규모가 드러난 중국 내 위안소는 한반도 출신 위안부들이 큰 고통을 받던 장소다.

센터 소장인 쑤즈량(蘇智良) 상하이사범대 교수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사실 한국 출신 위안부 여성들이 주로 피해를 본 곳이 중국”이라며 “일본이 중국에 주둔하면서 북쪽의 헤이룽장에서 남쪽의 하이난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든 한국 위안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에서 확인된 것만 해도 1천 곳이 넘는 방대한 규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지적한다.

중국 위안부 문제 전문가 쑤즈량 교수. 연합뉴스

쑤 교수는 “많은 사료가 위안부가 자유를 잃고 일본군의 통제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하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위안소의 규모에 관한 것”이라며 “인류 문명사상 이런 시설이 이렇게 많이 설치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군이 상하이 한 도시에서만 해도 최소 172개의 위안소를 뒀는데 이는 매우 부끄러운 것”이라며 “우리는 중국의 10여개 성과 직할시에서 (위안소 분포를) 조사하고 있지만 계속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쑤 교수는 연합뉴스에 과거 위안소가 운영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찍힌 사진을 제공했다.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폐허가 된 상하이의 도시 한복판에 ‘황군위안소'(皇軍慰安所)라는 안내판이 걸린 모습이 나와 있다.

쑤 교수는 “이 사진은 일본군 점령 하의 상하이에서 촬영된 것으로서 주변이 대부분 폐허로 변한 전장 한복판에서도 일본군이 위안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쑤 교수는 “과거 위안소가 있던 건물들이 도시 개발로 대량으로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전력을 다해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며 “우리 대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젊은이들이 계속 이어 연구를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2021-02-28> 한겨레

☞기사원문: 쑥대밭 위 ‘황군 위안소’ 공개…“문명사상 이런 대규모는 없다”

목, 2021/03/04-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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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유족회 등이 지난 2일 경기도의회 소녀상 앞에서 램자이어 하버드 로스쿨 교수의 논문 폐기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홍용덕 기자 [email protected]
정병호 | 교수

정병호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미국 하버드대의 램자이어가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라고 주장해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후원으로 석좌교수가 된 그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 논문을 반박하느라 애쓰고 있는 해외 학자들이 있다. 군사독재 시대부터 촛불혁명까지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지원하며 국제사회의 병풍이 되어준 70~80대 원로 교수들도 참여했다.

그런 해외 학자들에게 “외부인은 논할 자격이 없다”고 경고한 이른바 ‘친일’ 한국 학자들이 있다. 도대체 누가 ‘외부인’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나치의 강제노동 같은 인류에 대한 범죄는 시효도 국경도 없는 것이다. 인류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편과 가해자 편이 있을 뿐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가해권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다. 수많은 희생 위에 겨우 자리 잡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모독이다. “권력에 맞서서 싸워보지도 못한 것들이!” 돌아가신 리영희 교수의 추상같은 일갈이 그립다.

국적을 가지고 자격을 논하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1910년 ‘한일합방’에 앞장서서 일제의 귀족 작위와 토지를 받은 ‘매국노’를 완곡하게 표현해서 ‘친일파’라고 했다. 1965년 ‘한일협정’도 대한민국 정부가 한 일이다. 일본군 출신 독재자가 시민들의 반대를 군사계엄령으로 누르고 조약을 체결하면서 받은 돈을 피해자들 모르게 돌려썼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도 그의 딸이 대통령이었던 대한민국 정부가 했다. 10만명 이상의 피해 여성의 피눈물을 단돈 백억원으로 갈음하고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친일’의 면면한 계보는 이어져왔다. 제국주의 권력과 그 조력자들이 맺은 사기성 농후한 협약도 국제간의 약속이라고 존중해야 하나?

‘친일’은 역사가 아니라 늘 현실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유린하며 시위를 하는 그들에게서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 앞에서 피자를 먹으며 야유하던 모습과 비슷한 역겨운 가학성이 보인다. 미국과 일본으로 다니며 ‘위안부는 가짜다, 강제노동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그들. 왜 그렇게 집요하게 피해자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가?

최근 나는 해방 후 스스로 가해권력이 된 ‘친일파’ 역사의 한 단면을 되짚어볼 기회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오키나와 전투를 준비하면서 무기를 나르고 참호를 파는 인력으로 긴급하게 조선의 장정들을 끌고 갔다. 주로 경상북도 각 마을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동원됐다. 일본인 대신 조선인 순사와 면서기, 군청 직원, 지역 유지들이 이들을 잡아서 훈시하고 격려하면서 전장으로 보냈다. 도망치고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은 가족들 때문에 억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군부들은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며 전장에 내몰려 죽고 처형까지 당했다. 패전 후 일본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일본 군인의 이름을 마지막 한명까지 찾아 기리면서 희생된 조선인은 몇천, 몇만명인지 규모조차 밝히지 않았다. 어느 마을 누구까지 지목해서 끌고 갔던 일본은 조선인 강제연행 기록을 은폐하고 피해자들의 진술은 부정하고 있다.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해방된 지 1년이 지나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참혹한 전장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친일 경찰과 관리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행동에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 편에 서서 새로운 권력이 된 그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강제연행 피해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탄압했다.

일제의 반인도적 범죄 피해자들을 숨죽이고 살게 했던 대한민국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처세와 출세를 위해 ‘친일’했던 사람들은 해방 후 보신을 위해 ‘반공’에 앞장서며 가해 행위를 정당화했다. 냉전 대립과 전쟁을 겪으며 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군사독재 권력이 됐다. 국가를 대표해서 식민피해 보상금을 협상하고 그 돈을 전용한 그들은 또다시 피해자들을 침묵시키는 가해자가 됐다.

일제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친일’은 냉전 이념의 그늘에 가려진 회복되지 않은 정의의 문제다. 수십년 전 역사상 저질러진 폭력에 직접 책임이 없다고 해도 그 행위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누리는 경우 간접적으로 과거 범죄에 연루된 ‘사후종범’이다.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와 눈물 위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와 특권의 근원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가해 역사를 덮기 위해 지금도 가학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는 친일파는 현재진행형 가해자다. 죄과를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2021-03-03> 한겨레

☞기사원문: [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친일파, 현재진행형 가해자

목, 2021/03/0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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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1/03/0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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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가 발간한 가볍고도 무거운 역사책 ‘한 시대 다른 삶’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이 두 권의 책에 등장하는 스무 명의 인물 중에 태어나 처음 들어본 이름이 무려 네 명이나 된다. 명색이 20년 넘게 아이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온 현직 교사로서 면구하기 짝이 없다.

학교에서도 근현대사를 주로 가르쳐왔고, ‘현대사 전문가’라는 상찬까지 들으며 십수 년 동안 여기저기 대중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도 수강생들도 그런 나를 현대사와 관련된 박사 학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줄로 안다.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가령, 신석구와 한형석. 신석구 선생은 3.1 운동 당시 기독교를 대표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시고, 한형석 선생은 1940년대 광복군 선전대에서 활약한 항일 음악가다. 해방 후 친일 청산 노력이 물거품 되면서 지금껏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친일파들이야 그렇다 해도, 독립운동가의 생애는커녕 이름조차 낯설어하는 내가 과연 한국사 교사 맞나 반성하게 된다.

솔직히 일독을 권유받았을 때, 마치 감수자라도 되는 양 스스로 거들먹거렸다. 수업 교재나 교양 도서로서 어디 하자는 없는지 찾아 훈수를 두려는 거만한 태도로 책을 폈다. 내용을 살펴보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권한 것도 그래서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다 아는 내용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거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두툼한 세 권의 <친일인명사전>보다 불과 두세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이 두 권의 책이 친일 청산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우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친일인명사전>을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이 책을 먼저 읽은 한 아이의 소감이다. 이심전심. 스스로 박학다식하다고 능력 있는 교사는 아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동기부여하는 데 능숙한 이라야 제대로 된 교사다. 책이라고 다를까.

언제까지 친일청산 타령? 이 책으로 답합니다

▲ <한 시대 다른 삶> 1, 2권의 표지와 목차 ⓒ 서부원

이 책은 ‘웹툰 북’, 곧 만화책이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얹자면, 만화책이라고 우습게 보다간 큰코다칠 수도 있다. 앞서 고백한 대로, 한국사 교사조차 부끄럽게 만든 책이다. 형식은 가볍지만 내용은 묵직하다. 가독성이 뛰어난 데다 교훈적이기까지 하단 이야기다.

말 그대로 술술 읽힌다. 역사 공부에 젬병인 아이들조차 단숨에 읽어낼 만큼 쉽고 재미있다. 한 아이는 주말 아침 식사 후 읽기 시작해 점심 먹기 전에 두 권을 다 읽었단다. 시험에 출제된다면야 이름과 생몰년, 업적, 저서 등을 암기하느라 페이지를 넘기는 게 만만치 않겠지만, 그럴 부담이 없어 다 읽고 나면 고스란히 ‘엑기스’가 남는 책이다.

역사에 흥미가 없는 이라도 일단 첫 장을 넘기게 되면 끝까지 읽게 되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내용이야 일관된 주제지만, 만화를 그린 화가가 여럿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곧, 만화를 감상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이 책은 두 권이 아니라 열 권을 읽는 셈이 된다.

그림도, 글씨체도, 배치도 각각 다르다 보니, 읽는 데 지루할 틈이 없다. 만화와 캐리커처에 관심이 많다는 한 아이는 책을 읽다가 메모장을 꺼내 그림을 따라 그려봤다고 했다. 그는 이 두 권의 책이 ‘만화의 교본’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책의 미덕은 단연 ‘대조’에 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면면을 시대순이나 가나다순으로 단순히 나열한 책은 이미 차고도 넘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런 책들은 독서를 통한 교육적 효과도 미미할 뿐더러 굳이 따로 공들여 제작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한 시대 다른 삶,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 이 책의 표제다. 동시대를 살았고, 같은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서로 가는 길이 극명하게 달랐던 두 인물의 생애를 넘나들며 비교하려는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책의 제목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학교의 수업에서든, 학교 밖 대중 강연에서든, 인물의 ‘대조’는 일제강점기를 설명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이다. 친일파의 행적만 나열하게 되면, 설령 천인공노할 만행일지라도 이내 지루해 한다. 그러고는 몇몇은 심드렁한 얼굴로 전가의 보도처럼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먹고 살려면 친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위대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건 맞지만, 당시 친일 행위를 두고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단죄와 응징 운운하는 건 지나치다고 봐요.”

거칠게 말해서, 이 질문의 요지는 두 가지다. 당시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굴복한 이들은 친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과, 대체 언제까지 친일을 우려먹을 것이냐는 비판이다. 전형적인 물타기이자 ‘물귀신’ 전략이지만, 일일이 대응하기가 여간 힘든 지점이기도 하다.

반론하다 보면 자칫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정부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고 하면, 당장 선정 기준을 문제 삼거나 좌우 이념 대립의 결과물이라며 논점을 흐리고, 정치적 흥정의 산물로 폄훼하기 일쑤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김일성과 박정희, 현재 북한과 남한의 경제력 등을 비교하는 지경에 이르고, ‘빨갱이’와 친일파 중에 누가 더 나쁘냐는 황당무계한 질문에 답하라며 생떼를 쓴다. 이는 비단 어르신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요즘엔 친일파보다 ‘빨갱이’가 더 싫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알다시피, 해방 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6.25 전쟁을 겪었으며, 친일파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수십 년 동안 친일 청산은 입에 담지조차 못했다. 이는 나 몰라라 하고 아직도 친일 청산 타령이냐고 묻는 건 파렴치한 짓이다. 그들은 입만 열면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떠들어댄다.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어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사건 직후 유가족과 시민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수년 동안 묵살해놓고선, 언제까지 세월호 타령이냐며 욕지거리해대는 이들과 친일파들의 행태는 빼다 박은 듯 닮았다. 그들을 상대하노라면,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이럴 때 들어맞는 표현인 듯싶을 때가 많다.

친일파의 후손들이나 그들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이 이 책을 읽을 리는 만무하다. 다만,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포획된 청소년들과 장삼이사들에겐 이 책이 그들의 물타기식 질문에 대한 가장 적확한 답변이 될 것이다. 일일이 반론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 책을 소개하기만 하면 된다.

두루 읽히고 싶은 책

▲ 2권 말미, 독립운동가 한형석과 친일 음악가 현제명의 삶을 대조한 부분. ⓒ 서부원

책의 구성을 잠깐 소개한다. 각 권당 220여 쪽 분량으로, 본문 뒤에 책에 등장하는 친일파들이 참여한 일제 협력단체들을 덧붙여놓은 것이 독특하다. 이는 그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공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

본문은 두 권을 합해 열 꼭지다. 종교와 교육, 역사, 언론, 군사, 문학, 음악 등 분야별로 엇갈린 삶을 산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그려내고 있다. 친일파의 비루한 삶이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삶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대조’의 힘이다.

가장 인상적인 두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독자라면 대부분 공감할 테지만, 2권의 ‘광야의 지사’ 이육사와 ‘해바라기 시인’ 서정주를 비교하는 꼭지일 것이다. 30쪽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인 데다 역사적 사실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울림은 자못 크다.

이내 울림은 분노로, 분노는 다짐으로 승화된다. 11년 터울인 두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거물’이다. 시 <청포도>와 <국화 옆에서>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의 생애는 위대함과 비루함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서정주는 채 마흔 해를 넘기지 못한 이육사의 두 배도 넘게 살았다. 그것도 여든다섯의 삶 내내 부와 권력, 명예를 누렸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권력자가 숱하게 바뀌는 와중에도 그는 권력의 주변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굴종과 아부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에 대한 비난을 이렇게 다섯 글자로 반박했다. 시대에 무모하게 맞서기보다 현실에 체념하며 살아간 것일 뿐이라는 의미다. 달리 말한다면, 비록 존경받을 깜냥은 못 돼도 그렇다고 민족반역자라며 치도곤당할 일도 아니라는 변명이다.

그렇게 그는 <이승만 전기>를 썼고, 베트남 파병을 옹호하는 시를 박정희 정권에 상납했으며, 광주 학살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에 빌붙어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인물’이라며 그의 ’56회 탄신일’에 축시를 바쳤다. 그런데도 그가 사망했을 때, 유력 정치인과 문화계 인사 등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친일 청산이 백년하청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육사의 위대한 삶은 말하기 전에 옷깃부터 여미게 만든다. 불세출의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으로서 그의 삶은 서정주와 함께 거론되는 것 자체가 송구할 따름이다. 그의 시신과 유품을 거둔 아내 이병희 지사와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의 신산했던 삶은, 친일 청산은커녕 망각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서운 죽비다.

이육사가 딸의 이름을 옥비(沃非)로 지은 연유는 슬프다 못해 서럽다. 부귀영화를 꿈꾸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는 것.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현실에서 그의 아내도 딸도 이육사의 이름을 함부로 내세울 수 없었으니, 이름은 그대로 예언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서정주의 두 아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현재 미국에서 의사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지난 겨울방학 때 올해 수업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역사 달력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서둘다 보니 오탈자와 잘못된 내용이 많았는데, 이 책이 모자란 부분을 훌륭히 메워줄 듯하다.

일단 도서관에 비치해 돌려 읽게 할 계획이다. 아울러, 원작이 웹툰이니만큼 주소를 링크해 수시로 읽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코로나가 물러난다면, 국립 현충원과 독립운동가의 생가, 유적지 등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답사하고 싶다.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일 성싶다.

끝으로, 책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와 전국시사만화협회 회원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온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비매품이지만 어떻게든 보급이 되어, 특히 청소년들에게 두루 읽혔으면 좋겠다. 단언컨대, 지금껏 이렇게 ‘가볍고도 무거운’ 역사책은 보질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https://minjok21.kr)

사족. 기획부터 출판까지 짧은 시간에 해낸 탓인지, 오타가 몇 개 보이는 게 ‘옥에 티’다. 대개 맞춤법이 틀렸거나 한자의 음이 잘못된 것이다. 1권의 38쪽과 127쪽에 각각 하나씩 있고, 2권의 72쪽에도 보인다. 또, 웹툰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군데군데 글씨가 작아 어르신들의 경우라면 돋보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민족문제연구소의 정기 간행물인 <민족사랑>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서부원(ernesto)

<2021-03-09>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한국사 교사조차 부끄럽게 만든 책, 추천합니다

수, 2021/03/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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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전주]

[앵커]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기획보도, 세 번째 순서입니다.

친일인사의 부끄러운 행적을 사실대로 밝히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인데요.

여전히 그들을 미화하거나 역사를 왜곡한 사례가 적지 않아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안승길 기자입니다.

[리포트]

일등비행사로 이름을 떨치고, 조선 최초 항공사와 해방 후 첫 민간항공사를 세운 신용욱.

일본군에 비행기를 납품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두 차례나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고향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고, 고창군 블로그에는 찬양 일색의 글이 실렸는데, 이번 친일잔재 보고서에 역사 왜곡 사례로 지적되자 해당 글은 삭제됐습니다.

명실을 다 같이 추호도 다름이 없는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일제의 기세가 치솟던 1942년, 채만식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은 글입니다.

해방 후 소설 ‘민족의 죄인’을 통한 참회에도 씻을 수 없는 친일 행적.

보고서는 지난해 군산시가 블로그에 실은 채만식 관련 글은 역사 왜곡과 축소 사례로 지적했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과 도서관, 또 다른 친일 작가인 서정주의 호를 딴 고창의 미당시문학관 등의 이름을 바꿀 것을 제안했습니다.

[군산시 관계자/음성변조 : “이 자료를 받은지 얼마 안 되서요. 구체적 논의는 아직 안 된 상태인데. 포럼이나 워크샵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려 노력하고 있었고요.”]

보고서에 미처 실리지 않은 친일인사도 적지 않습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로 제헌의회 국회의원까지 지낸 배헌 선생.

윤치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친일단체 배영동지회 이리 부회장을 맡았고, 전쟁 협력 조직인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했으며, 일제의 식민통치 하부 조직으로 운영된 이리 읍회의원을 10년 넘게 지낸 사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재호/민족문제연구소 : “있는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 해방 이후 친일과 독재로 점철되며 그들이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했잖아요.”]

왜곡과 미화를 걷어내고 부끄러운 역사의 민낯을 마주하는 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첫걸음입니다.

KBS 뉴스 안승길입니다.

촬영기자:신재복

<2021-03-10> KBS 

☞기사원문: [친일잔재 청산 기획]③ 왜곡과 미화로…숨겨진 부역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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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3/11-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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