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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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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admin | 월, 2021/04/12- 03:16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①

봄기운이 벼락처럼 내달려 북한산 일대를 에워싸더니 만경대에서 멈칫하며 숨을 고른다. 이도 잠시 기운을 되찾은 봄장군은 사방에 꽃사태를 일으키며 수유리 벌판을 향해 진군했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은 날 김주는 우이동 솔밭공원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 심산 김창숙(아래 심산)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한번 다녀오면 만보나 되는 거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거르지 않는다.

심산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다. 그는 3·1 운동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민족대표로 모두 참여했건만 유림이 빠진 것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리고 기개를 잃지 않고 있는 선비들을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유림(儒林)의 독립청원서를 만든다. 이를 지니고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번역한 후 강화회의에는 물론 중국 내 각국 대사관에 발송하고 해외동포들에게도 보냈다.

그 후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심산은 1927년 치질 치료차 입원했던 병원에서 밀정의 신고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나가사키를 거쳐 대구경찰서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랜 징역 생활을 겪으며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 심산의 손녀딸, 김주. ⓒ 민병래

1941년생인 김주는 심산의 무릎 밑에서 컸다. 1934년 일제는 심산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줬다. 고향인 경북 성주로 돌아왔지만 감시망은 여전히 촘촘했고 그런 심산에게 손녀딸은 말벗이고 위로였다.

곰방대를 가져오고 고물대는 손가락으로 할아버지의 뼈만 남은 다리를 주무르며 김주는 “아파? 아파?” 하고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심산은 그런 김주를 품에 끌어안고 지긋한 수염으로 볼을 비비곤 했다. 김주가 중학교 때는 성균관대 담벼락에 늘어섰던 순댓국 집에서 막걸리를 함께 홀짝이던 술 친구이기도 했다.

김주는 4·19 민주묘지를 지나 백련사 표지를 보고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심산 묘지까지는 300여 미터 남짓,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다. 김주도 이제 팔순이 넘은 몸, 숨이 가빠진다. 이 길을 넘어설 때마다 두 다리를 못 쓰면서도 항일투쟁과 민주화운동에 한결같았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김구와 평생 동지였던 심산

▲ 심산의 초상 꼿꼿한 지사의 기개가 느껴진다. ⓒ 김주제공

1953년 휴전 후,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치가 더욱 심해질 때 이승만을 꾸짖으며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심산만한 사람도 없었다. 1960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열린 신채호 24주년 추도식에서 심산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독단으로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해서 탄핵재판에 회부되었고 매국행위를 했다고 제명되었던 인물이요”라고 연설해 자유당 관계자들과 관료들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세 번이나 냈던 심산이고 그의 손주 김위는 성명서 원본을 찾으려는 경찰에게 서대문로터리에서 몸 뒤짐을 당해 벌거숭이 처지가 되기도 했다. 심산은 누구보다 김구와 가까웠고 평생의 동지였다. 심산이 나석주 의사를 파견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하도록 의거를 일으켰고, 김구는 이봉창 의사를 도쿄에 보내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도모했다. 해방 후에 환국한 김구를 가장 뜨겁게 맞이했던 사람도 심산이다.

김주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녀가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김구와 심산은 각자 손주들을 데리고 종로의 어떤 극장에서 만났다. 그날 남인수의 노래공연이 있었다. 김주는 김구의 손녀딸과 객석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곰보할아버지와 심산은 무언가 귀엣말을 끝없이 나누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녀딸을 데리고 극장나들이를 하는 모양새로 비밀회담을 한 것이다.

백범이 총에 맞은 날, 사람들이 허겁지겁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심산은 비명을 지르더니 청년들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셨고 다음 날 새벽 돌아오셨다.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백범’을 불렀고 “그놈 짓이야, 그놈 짓이야”를 끝없이 외치셨다. 심산이 밥숟갈을 다시 든 게 어린 김주가 헤아려봐도 열흘이 넘은 때였다.

▲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서 절 드리는 김주 선생은 거르지 않고 일주일 두 번 찾아뵌다. ⓒ 민병래

김주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묘소에 다다르니 4월의 아침볕은 정갈하게 내려왔다. 잔디는 파릇하게 올라왔고 간밤에 내린 비로 흙더미는 촉촉했다. 김주는 깊게 절을 올렸다. 무릎에선 오래 전부터 뚝뚝 소리가 났다.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교육을 받았다.

엄마 손응교는 1933년 열일곱 나이에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례를 올렸다. 시집왔을 때 남편은 진주고보에서 동맹휴학을 주도, 5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고 시아버지 심산은 대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면회를 가서 첫인사를 올렸는데 간수에게 업혀나온 심산은 “구국운동으로 집안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집안은 네게 달렸으니 원대한 희망을 가져라”라고 말을 했다.

새댁은 면회실에서 울고 형무소 담장 밖에서도 울었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졸지에 종부 신세까지 되었다. 시아주버니인 김환기, 심산의 첫째 아들이 집 마당에서 일본경찰에게 매타작을 당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그 부인도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심산이 출옥해서는 대소변을 받아냈고 1962년 심산이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절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김주는 엄마 손응교와 자신이 심산의 묘소를 돌보고 절을 올리는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멀리 진달래 능선은 백련사 계곡쪽으로 분홍빛 꽃비를 내려 뿜었고 그 향기는 심산의 묘소에서 해적이면서 돌아나갔다. 김주는 절을 마치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이 켠 저 켠에 뿌려드리고 잠시 햇빛바라기를 했다.

눈을 감으면 되살아오는 기억은 끝이 없다. 딸이어서일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끝도 없이 얘기하지만, 엄마 손응교가 없는 심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들 있을까?

심산과 한 몸이었던 엄마 손응교

▲ 김주의 어머니이자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그는 며느리이자 심산의 평생 동지였다. ⓒ 경북경북여성쟁책개발원 제공

김주의 아버지 김찬기가 투옥과 감시 속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한 게 김주가 세 살 때인 1943년이다. 그때 심산은 여전히 일본 경찰의 감시에 꼼짝을 못했다. 엄마는 왜관역에서 몰래 떠나는 남편을 어린 김주를 안은 채 눈물로 전송했다.

남편은 “나중에 빌어먹을 형편이 돼도 애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이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 되면 2년 반이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하고 떠나갔다. 뒤늦게 김찬기가 사라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남편이 간 곳을 대라”고 수시로 손응교를 잡아다가 매타작을 하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너처럼 간이 배 밖에 나온 여자는 처음 봤다”는 일본 경찰의 악다구니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심산은 배를 쫄쫄 굶고 있었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밥부터 지어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조국 독립과 심산 선생을 위해 종처럼 살았고 내 인생은 없었다고. 심산 선생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심산 선생이 있다고.

한때는 대구에서 ‘요미우리’라는 위장서점까지 했던 엄마, 심산의 쪽지를 들고 중국 봉천까지 다녀왔고 남편 김찬기의 체포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오자 연변의 도문까지 다녀왔던 엄마, 심산의 손발을 넘어 심산과 한 몸이었건만 세상은 잘 모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주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아침 해는 백련사 계곡을 넘어서 북한산성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김주는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모레 또 올게요”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김주는 늘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읆조린다. 지금도 그날은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할아버지랑 성균관 동재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서너 명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더니 할아버지를 끌어내 명륜 1가에 있던 집에 내동댕이쳤다. 몇 년 몇 일인지는 아득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네 이놈들’ 소리치며 발버둥쳤고 김주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심산은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장악한 유림(儒林)을 혁신하고 성균관을 민족대학으로 재건코자했다. 이를 위해 1945년 11월 30일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 유림대회를 열었다. 유도회총본부가 결성되었고 심산은 위원장이 되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모아 성균관재단을 만들었고 성균관대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물론 심산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몰려 있던 자유당은 유도회총본부를 외곽조직으로 삼으려 했다. 국민을 백성이라 부르고 자기 말을 유시라 하며 봉건군주 행세를 하던 이승만은 유도회를 집어삼켜 그 충효 이데올로기와 전국조직망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문제는 심산이라는 걸림돌이었다.

자유당은 황도유학파와 정부조직을 앞세웠다. 황도유학파는 유교의 충효사상을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이데올로기로 둔갑시켰던 세력이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자 화려하게 부활해 자유당의 뒷배를 업고 심산과 정통파를 공격하며 성균관재단을 장악했다. 결국 심산은 1956년 2월 2일자로 총장직에서 쫒겨났다.

심산이 물러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거침이 없었다. 내무부장관은 1956년 11월 15일을 기해 전국 각지의 유도회 지부를 개편하라고 경찰에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심산을 따르던 정통파는 무너져버렸고 심산은 어느 날 성균관에서 들려나가고 말았다. 그 아픈 현장에 있었던 김주는 그때부터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관방을 떠돌았던 불쌍한 할아버지 심산

심산은 그 후 명륜동 1가 집에서도 쫒겨났다. 가족의 은행대출을 보증해 준 탓에 집이 압류되고 만 것이다. 심산과 손응교, 김주는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때부터 심산은 여기저기를 떠돌게 되었고 합정동 어떤 셋방을 거쳐 여관살이로 내몰렸다.

중앙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심산의 병실은 셋째 아들과 심산의 명망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통제되었다. 박정희가 심산의 병실을 찾은 게 이때였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친구로서 함께 항일투쟁을 했었다. 그런 아들 친구의 동생이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병문안을 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심산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김주가 병실 출입 저지를 뚫고 심산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1962년 5월 10일 돌아가시기 삼일 전이었다. 심산은 거죽만 남은 상태에서 21살 김주의 손을 잡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를 세 번이나 되뇌였다. 김주는 그날 눈물을 흘리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말년에 대해 세간에 떠돌던 이런 저런 얘기들이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에서 심산은 김주를 보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김주는 자식에게까지 상처를 받아야 했던, 죽는 날까지 마음 고생을 했던 심산을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게 되었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②

▲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 김주의 부친으로 해방되는 해 중국 중경에서 숨을 거뒀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김주는 심산 묘소에서 남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4·19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년 결혼한 남편은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회장이다. 2013년에 숨을 거뒀으니 그래도 오래 동고동락을 했다.

엄마 손응교는 아버지 김찬기가 일본에 쫒겨 다니는 통에 불과 1년이나 같이 살았을려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에게 셋째를 남겨 주었다. 해방되는 해 세 살이 된 김주의 남동생은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 지사가 김찬기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해방되는 해가 엄마 손응교에게는 지옥이었다. 아들의 주검과 남편의 주검을 동시에 맞았으니 오죽했을까. 엄마는 이때 목이 잠겨 말을 못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담배도 늘어 혓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폈다. 할아버지 심산은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툇마루에 며느리가 필 연초를 슬그머니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엄마였기에 김주가 신랑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것을 부러워도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살가운 사위노릇도 했다.

남편 묘소까지 돌아보고 나니 김주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늘 하루 일과를 충만하게 마친 느낌이다. 김주가 동국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할 때 남편은 동국대 법대 3학년생이었다. 4·19가 일어났을 때 행정실 캐비닛을 부수고 교기를 꺼내 거리로 나섰던 남편이다. 김주가 남편에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상해 임시정부청사 보존을 위해 1990년 중국에 갈 때 방문단의 경비를 선뜻 내준 일이다.

당시 조경한 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 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때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를 모시고 동행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미수교국 비자를 신청해서 홍콩을 경유, 북경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주선기란 사람은 중국 총리였던 주룽지의 친척으로 자기 집을 놔두고 임시정부 터에 살면서 청사 보존을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심산이 상해에서 살던 집까지 기억하고 그 사진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북경대 조선문화연구소장인 최응국, 조선족 총회장 문정일 등은 “임시정부청사를 중국내 항일유적지로 보존”하자는 학술세미나를 같이하며 중국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여정에 김주 자신이 엄마와 동행했고 남편은 방문단 18명의 여비와 현지 경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호암관에서 심산관 다시 호암관으로

집으로 가는 길, 4·19 민주묘지에서 집까지는 한달음 길이다. 그래도 만보되는 걸음에 김주는 땀도 나고, 지친 터라 솔밭공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길 한 켠에 패랭이꽃과 돌나물이 소북하게 올라온 게 정겨웠다. “어머나 씀바귀도 있네” 하며 김주는 쪼그려 앉았다. 씀바귀나물은 할아버지 심산이 두릅과 함께 좋아하셨던 술안주다. 엄마 손응교는 종가집 음식인 육회를 곁들여 상차림을 올리곤 했다.

▲ 청천서원의 모습 손응교는 심산의 평생 소원, 문중의 청천서원을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엄마 손응교는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남은 여생을 심산이 평생 소원하던 ‘청천서원’ 복원에 바치겠다고 했다. 성주의 생가를 지키며 엄마는 문중의 힘을 모아 기어이 92년에 이 일을 이루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 노릇을 의젓하게 마감한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김주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은 여생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묘소만이라도 거르지 않고 돌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성균관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기에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 성대총장시절의 심산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 심산기념관제공

심산이 쫒겨난 후 성균관재단은 1957년 10월 21일 이선근을 총장으로 선출했다. 문교부는 그의 취임을 즉시 승인했다. 그는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창설된 만주제국협화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협회는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 등 5족의 협화를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왕도낙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서울대 학생처장을 하며 ‘국대안 파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54년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편 삼성은 1965년 성균관대를 인수하였고 이병철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바탕으로 민족의 영재를 키우려던 심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선 후 금잔디 광장 뒤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1977년 성균관대 학생들과 유림의 재벌퇴진 운동으로 삼성은 재단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1980년 3월 민주화의 봄을 타고 호암관을 심산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삼성병원을 거점삼아 생명공학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던 삼성은 당시 의대 신설이 유력시되던 성균관대를 인수하고자 했고 학생들 또한 열렬히 이를 반겼다. 결국 삼성은 1996년 20년 만에 다시 성균관대에 입성했다. 당연히 심산관은 호암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심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손녀 김주가 할아버지 상해집 사진을 안고서. ⓒ 민병래

2022년이면 심산이 돌아가신 지 60년,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심산의 이름은 김주의 소원대로 되살려질 수 있을까? 씀바귀 나물을 손에 담고 일어선 김주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능선에서 내리던 꽃비는 어느 새 그녀의 굽은 어깨를 지나 우이암과 도봉 주능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도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 불쌍한 할아버지 묘소에도 봄은 무심코 찾아오겠지.
다녀갈 때 잊지 말고
고향 성주의 솜털씨앗은 상처나지 않게 고이 감싸서
명륜동 은행나무의 새순은 연노랑 빛으로 물들여
북한산의 진달래 꽃비는 눈이 시리도록 듬뿍
할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주고 가길 바랄 뿐이다.

<못다한 이야기>

① 심산이 다리를 못써 벽옹이라고 불리우고 업혀서 다닌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후 사진을 보면 서서 연설하는 사진이 있다. 이에 대해 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2020년도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에서 아래처럼 밝혔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 지사의 건강을 염려한 동료들이 솜씨 좋은 안마사를 동원해 석 달을 안마로 다리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김창숙 지사는 혼자 온전히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에 성균관대 교직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동래온천에 머물 때 2층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하게 다쳐 다시는 못 움직이게 되셨다.”

② 김주의 어머니 손응교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후손으로 자신의 가문도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손응교는 손후익의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손응교의 증조할아버지 손최수가 신돌석 의병장을 도왔고, 할아버지 손진수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전한다. 또한 종조부 손진형과 삼촌 손학익 모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손후익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김창숙 지사를 만났다. 아버지 손후익은 경북 유림계를 결속시켜 김창숙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처남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의 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김창숙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때 할아버지 손진수와 아버지 손후익이 김창숙을 간호했다. 이일이 인연이 되어 손응교는 당시 동덕여고 재학중이었지만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인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의 삶 또한 울산의 독립운동가로서 조명받고 있다. 손응교는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 남편이 죽고(1945), 시어머니가 죽고(1951) 친정아버지가 죽고(1953) 심산이 죽고(1962) 줄 초상을 당하여 평생 상복을 벗을 날이 없었다. – 참고도서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

③ 김찬기 선생의 사진은 극적으로 남아있다. 이 사진이 남은 배경을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에 기록된 손응교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면 이렇다.

“방에 우리 남편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왜관에서 비밀 지하 운동하다가 체포된 왜관 사건으로 징역 살고 나올 때 찍은 것이라.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라. 성주에서 사진관 하던 이명동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찍었어. 후에 이 양반이 동아일보 사진기자도 하고 했어. 이명동씨가 자기 묵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있더래요. 그래서 똑같은 걸 다섯 장을 뽑아서 보내왔어.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은 편지나 사진은 안 남겨. 사진 있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잡을 수 있잖아요. 우리 집에도 편지 오면 심산 어른이 좀 문제 있다 싶은 거는 다 하나 둘이 몇 번 읽어본 후 불태웠어. 심산 선생도 사진 때문에 잡혔거든.”

④ 김주의 큰 고모, 즉 심산의 첫째 딸인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심산의 장남 김환기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경에게 집 마당에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환기의 죽음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때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료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⑤ 이 글에서 다룬 황도유학회와 자유당의 유도회 장악과정은 아래 논문을 참조했다. – <성균관대학교 2002년 석사학위 논문 ‘1950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연구’,조한성>

⑥ 임시정부 터를 지키기 위한 중국방문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통일기원대제를 지냈다. 그때 김주와 손응교는 유림의 대표격으로 국조단군칙어를 낭독했다. 중국사람들은 백두산 천지에는 새가 날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고 김주는 회고한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이름, 80대 손녀의 간절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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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리즈: 민병래의 사수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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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신사 잔재 송정공원 금선사 등 7곳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송정신사 건물을 활용해 건립된 광주 광산구 금선사 대웅전. 광주시는 13일 친일 잔재물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광주시가 광복 75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선다.

광주시는 오는 13일 오전 10시30분 광산구 송정공원 내 금선사 입구에서 ‘광주 친일잔재청산 단죄문 제막식’을 연다고 4일 밝혔다.

금선사 대웅전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목조 신사 건물이다. 일제는 1922년 일본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신명신사를 세웠고 1941년 격을 높여 같은 자리에 송정신사를 창건했다. 해방 후인 1948년 한국 스님들이 세운 정광학원은 송정신사 배전(참배객들이 손뼉을 치며 기원하는 건물)을 활용해 대웅전을 만들었고 신주사무소는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또 인근에 있는 ‘나무아미타불’ 탑에는 원래 ‘황국신민서사’가 새겨져 있는 등 일제 잔존물 8개가 확인됐다.

광주시는 금선사 입구에 옛 일제 신사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제막식에는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와 유족, 민족문제연구소, 광복회 회원 등이 참석해 친일 논란이 있는 안익태 애국가가 아닌 독립군 애국가를 부르며 일제 잔재 청산 의지를 다진다.

광주시는 또 일제 군용비행기 연료 저장소인 화정동 지하동굴에도 친일잔재 안내판을 설치한다. 친일인사 4명(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이 쓴 현판과 시문이 있는 양파정(남구 사동), 친일인사 송화식의 공적비가 있는 원효사(북구 금곡동), 신철균 남계룡이 쓴 시문이 있는 습향각(남구 세하동),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시비(동구 선교동)에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라고 적힌 단죄문을 배치할 계획이다.

앞서 광주시는 지난해 1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친일잔재 조사보고서’를 만들었다. 같은 해 8월 철거 민원이 있었던 광주공원 내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 선정비를 뽑아 눕혀놓은 후 단죄문을 설치하는 등 단죄·안내문 설치를 친일잔재 청산 방향으로 정하고 추진하고 있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친일 잔재물을 철거해버리면 후대에 잊힐 수 있기 때문에 단죄문을 통해 기억해야 한다. 남아 있는 잔재물도 조만간 처리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04> 한겨레 

☞기사원문: 광주시, 광복 75주년 맞아 친일 잔재물에 ‘단죄문’ 설치

목, 2020/08/0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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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동아’ 창간 100돌 ‘고발’ 전시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내일부터 개막… ‘언론 개혁’ 특강도

올해 창간 100돌을 맞이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일제 부역 행위를 고발하는 기획 전시가 열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부역 언론의 민낯’ 기획 전시를 오는 11일~10월25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연다고 9일 밝혔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일제가 신문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여년 사이 두 신문의 부일 협력 행위를 집중적으로 추적한다.

전시는 ‘조선의 ‘입’을 열다’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 ‘조선·동사 사주의 진면목’ 4부로 구성돼 있다. 특히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부역자 숙정과 비교해 해방 뒤 단죄를 피한 한국언론의 실상이 에필로그로 소개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전시를 통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설립이 일제에 의해 허용된 배경 등 두 신문의 뿌리를 파헤치고 1937년 중일전쟁 개전을 계기로 침략 전쟁 미화에 나선 두 신문의 보도 실태를 조명한다”며 “두 신문이 1938년 시행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 등을 어떻게 선전했는지와, 두 신문 사주의 친일 행적도 다룰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전시와 연계해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는 제목의 특강도 진행된다. 전시 개막일인 11일 김종철 <뉴스타파> 자문위원회 위원장이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을 청산하자’는 이름으로 강의를 진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언론, 시민사회 전문가들이 두 신문을 분석하고 언론개혁의 방향을 진단한다.

송경화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09> 한겨레 

☞기사원문: ‘100년 지나도 지울 수 없는 일제 부역 언론의 민낯’

※관련기사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조선·동아 100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기획전 열려 

☞오마이뉴스: 최초 공개되는 재일 유학생들의 ‘친일언론 성토문’

화, 2020/08/11-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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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민족문제연구소 김재호 전북지부장

김재호 지부장이 김해강 시비를 가리키고 있다. 박임근 기자

“시민들이 그의 친일행적을 제대로 알도록 김해강 시비(詩碑) 옆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국치일인 오는 29일 전북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시인 김해강의 시비 바로 옆에 시인의 친일행적을 담은 단죄비를 세우는 김재호(55)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의 다짐이다.

김 지부장은 내년 3·1절 즈음에 김해강 시비를 철거하는 방향으로 전주시 등과 협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비를 세운 사람들 쪽에서는 소극적이어서 상황에 따라 1993년 세워진 이 시비의 철거가 늦춰질 수도 있다고 전했다. 철거 여부를 따지기 위한 여론조사를 하려면 일제를 칭송한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하기에 그는 단죄비 설치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2011년에 지부장을 맡은 그는 2012년과 2016년에도 단죄비를 세웠다. 단죄비는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안내 현판 모습이다. 8년 전에는 전북 진안군 부귀면에 있는 반민족행위자 윤치호 시혜불망비 옆에 그의 친일행적을 알리기 위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안내현판을 세웠다. 윤치호가 한때 지식인으로 독립협회 등 애국계몽활동을 지도하고 투옥되기도 했지만 1915년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특사로 석방돼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내용 등이 새겨있다. 4년 전인 2016년에는 항일의병을 초토화하고 명성황후 시해를 도운 이두황의 단죄비를 세웠다. 그의 묘지가 있는 전주시 중노송동 기린봉 초입 주변에 설치했다. 2016년은 이두황이 숨진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백년만의 단죄,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두황’이라는 제목으로 친일행적을 낱낱이 기록했다.

“덕진공원은 전주시민의 허파와 같은 곳입니다. 공공재인 이 공원에 공동체를 파괴한 사람은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특히 여기에는 ‘척양척왜’를 외친 동학농민혁명 3대 지도자인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장군의 동상 또는 추모비가 주변 100m 안에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신석정 시인의 시비가 있는데 그가 친일시를 썼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신석정 시비가 김해강 시비보다도 크기가 많이 작습니다.”

국치일 29일에 김해강 시인 단죄비
전주 덕진공원 시비 옆 세우기로
윤치호 이두황 이어 세번째 설치
“자살특공대 칭송 등 친일시 여럿
시비 철거도 전주시와 협의 중” 

월 10만원 컨테이너가 지부 사무실

김재호 지부장. 박임근 기자

김해강 시인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명 ‘가미카제’로 불렸던 자살특공대를 칭송한 시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를 남겼다. 진주만에서 전사한 일본군 9명의 죽음을 칭송해 1942년 <매일신보>에 실렸다. ‘특별공격대원의 위훈을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가 쓴 ‘아름다운 태양’, ‘호주여’, ‘인도 민중에게’ 등도 일제의 황국신민화와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고 있다. 1962년에 만들어진 ‘전북도민의 노래’도 작사했다. 김 시인은 2002년 발표된 친일문학인 42인 명단에 선정됐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그의 제자 등은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가지 않은 점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전 발간 때 우여곡절이 많았고 사전 편찬위에서 개정증보판을 준비 중입니다. 사전에 없다고 친일행위가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시를 보면 일제를 노골적으로 찬양한 표현이 많습니다. 일제가 중일전쟁 등에서 계속 승리하니까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고 판단하고 돌아선 것이죠.”

그는 단죄비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 파고든 일제잔재 청산에도 주력했다. 전주시는 지난해 덕진구 ‘동산동’ 이름을 105년 만에 ‘여의동’으로 바꿨다. 동산동은 1907년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기업 창업자의 장남이 자신의 아버지 호인 ‘동산’(東山)을 따 창설한 동산농사주식회사 전주지점이 위치했던 데서 유래했다. 김 지부장의 이런 문제 제기에 시가 화답한 것이다.

그가 사명감으로 맡았다는 지부의 사무실은 월세 10만원인 컨테이너다. 회원이 500~600명이지만 급여를 줘야 하는 상근자가 없다. 지부장인 그가 무보수로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과거에는 강연 요청 등도 있었지만,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그마저도 없단다. 그러나 역사 정의를 위해 이 시대의 제2독립군이라는 결기로 임하는 그는 “친일청산의 끝은 민족의 통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인 김해강을 아낀다면 그의 시비를 더는 여기에 놔두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은 누군가에 의해 드러납니다. 친일파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행적에 대해 통렬한 반성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의 시비를 반드시 철거해야 합니다.”

박임근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06>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행적 대대로 알리려 시비 옆에 ‘단죄비’ 세웁니다”

화, 2020/08/1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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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 범시민 규탄대회 열어

의정부시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는 8월8일 오전 10시 의정부시 녹양동 엄복동 동상 앞에서 ‘방씨일가 불법행위 범시민 규탄대회’를 열고 “의정부시는 그린벨트에 호화 가족묘를 조성한 조선일보 방씨일가에 대해 즉각 법적 조치하라”고 촉구했다.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는 이날 광복 75주년과 봉오동 전투 승리 10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태평양 전쟁에 동원하는데 앞장서며 해방 후에는 친일 독재정권에 아부를 일삼아온 조선일보 9대 사장 친일파 방응모의 가묘가 의정부시 가능동 산32-13번지에 버젓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2016년에도 방우영 회장이 사망하자 장사법상 가족묘지 설치 허가 신청도 없이 호화묘지를 조성했고, 개발구역제한법을 여전히 위반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의정부시는 소정의 이행강제금만을 부과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는 “방씨일가는 호화묘지를 원상 복구하고 의정부시민과 국민 앞에 사죄하라”면서 “불이행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조치할 것이며 나아가 깨어있는 국민들과 함께 절독운동을 넘어 폐간운동까지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규탄대회에는 광복회 김정륙 사무총장, 광복회 의정부시지회 남주우 회장,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 조선동아 폐간을 위한 무기한 단식농성단 김병관 단장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2020-08-10> 경기북부시민신문 

☞기사원문: “의정부시는 방씨일가 불법 가족묘 조치하라” 

※관련기사 

☞고발뉴스: “조선일보 방씨일가 그린벨트 불법묘지 엄중 처벌하라” 규탄대회

☞천지일보: [천지일보 이슈]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 “방씨 일가 호화묘지 원상 복구시켜라” 

☞의양신문: 조선일보 방씨일가 가족묘지 불법조성 규탄대회

☞의정부뉴스: 의정부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준), 방씨일가 가족묘 규탄대회

화, 2020/08/1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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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언론노조, 한국PD연합회, 한국방송기자연합회, 한국인터넷기자협회 등 언론단체 및 ‘민언련’ 등 시민단체는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조선일보사 방상훈 사장 아들인 방정오 (주)하이그라운드 전 대표 고발사건과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일보 방상훈·방정오 사주 일가를 철저히 수사하라”고 요구했다.

▲ 조선일보를 규탄하는 현수막과 손팻말을 들고 기자회견에 나선 시민들 ©인터넷언론인연대

이날 기자회견에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미디어기독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새언론포럼, 언론소비자주권행동, 자유언론실천재단, 전국언론노동조합, 조선동아폐간을위한무기한시민 실천단, 표현의자유와언론탄압공동대책위원회, 한국PD연합회, 한국방송기자연합회, 한국인터넷기자협회 등 언론단체 및 언론관련 시민단체와 민생경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사월혁명회, 세금도둑잡아라, 시민연대함께, 아웃사이트,한국진보연대(이상 모두 가나다순) 등이 함께 했다.


이날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조선일보와 TV조선을 포함한 조선미디어그룹의 부당거래, 일감몰아주기, 횡령, 배임, 불공정행위 강요 등의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면서 최근 세금도둑잡아라, 민생경제연구소, 시민연대함께 등이 고발한 방정오 씨 관련 하이그라운드 배임사건 수사를 촉구했다.

이들은 또 “민주언론시민연합은 7월 28일 조선일보가 방상훈 대표이사를 비롯한 사주 일가의 이익을 위해 관계사인 조선IS에 부당거래를 강요하고 이에 불응하는 임·직원에 인사이동, 경질시도, 퇴사강요 등 ‘갑질’을 해왔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고 밝히고 공정위도 이에 대한 신속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언련은 내부 고발자인 조선IS 전직 임원이 “조선일보는 특수관계사인 조광프린팅이 또 다른 특수관계사 조광출판인쇄에 지급하는 임차료 등으로 방상훈 대표이사가 얻는 개인수입이 월 4,000만 원임을 내세워 조선IS가 조광프린팅 과 현저히 부당한 거래를 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앞서 8월 3일 민생경제연구소, 시민연대함께, 세금도둑잡아라 등은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이사가 회사자금 19억을 회수 가능성이 의심스럽고 업무 연관성도 없는 영어유치원 ‘컵스빌리지’에 대여했다며 업무상 배임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회장이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인터넷언론인인연대

이런 가운데 최근 윤석열 검찰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독대로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따라서 이날 집회에서 이들의 만남이 혹여 검언유착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지적했다.

즉 “윤 총장과 방 사장이 만났을 때는 방 사장과 관련된 여러 건의 고소, 고발이 서울중앙지검에 접수돼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수사무마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면서 “언론사의 불법경영은 미디어 시장을 어지럽히고 언론 신뢰를 떨어뜨리며, 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와 국민의 피해로 이어짐에도 수사당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 손수 적은 손팻말로 의지를 보인 시민들 ©인터넷언론인연대

따라서 이들은 “공정거래위원회와 검·경찰은 지금이라도 총체적인 조사 및 수사를 진행하여 다시는 거대 족벌언론사가 우리 사회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고 직접적으로 중대한 범죄행위의 가해자·가담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래는 이날 이들 단체가 밝힌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기자회견문]

조선미디어그룹 불법경영 의혹 전면조사촉구 언론·시민단체 기자회견 부당거래·일감몰아주기·횡령·배임·불공정행위 강요 의혹

조선일보 방상훈·방정오 사주 일가를 철저히 수사하라

조선일보, TV조선을 포함한 조선미디어그룹의 부당거래, 일감몰아주기, 횡령, 배임, 불공정행위 강요 등의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시민단체 세금도둑잡아라는 7월 10일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이사가 최대 주주로 있는 ‘하이그라운드’에 TV조선이 300억 원 가량의 일감몰아주기를 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TV조선이 2018년부터 드라마 외주제작을 주면서 ‘하이그라운드’를 공동제작사로 끼워 넣는 방식으로 일감몰아주기를 했다는 것이다.

하이그라운드 매출액의 98%가 TV조선과 거래에서 발생하고 있다.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의 차남인 방정오 전 대표이사는 현 TV조선 및 디지틀조선일보 사내이사를 각각 맡고 있기도 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7월 28일 조선일보가 방상훈 대표이사를 비롯한 사주 일가의 이익을 위해 관계사인 조선IS에 부당거래를 강요하고 이에 불응하는 임·직원에 인사이동, 경질시도, 퇴사강요 등 ‘갑질’을 해왔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내부 고발자인 조선IS 전직 임원은 “조선일보는 특수관계사인 조광프린팅이 또 다른 특수관계사 조광출판인쇄에 지급하는 임차료 등으로 방상훈 대표이사가 얻는 개인수입이 월 4,000만 원임을 내세워 조선IS가 조광프린팅 과 현저히 부당한 거래를 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8월 3일 민생경제연구소, 시민연대함께, 세금도둑잡아라 등은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이사가 회사자금 19억 원을 회수 가능성이 의심스럽고 업무 연관성도 없는 영어유치원 ‘컵스빌리지’에 대여했다며 업무상 배임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방상훈·방정오 사주 일가와 조선미디어그룹의 불법 행위는 이뿐만이 아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개혁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민생경제연구소 등 언론·시민단체는 2018년부터 최근까지 조선미디어그룹과 관련하여 최소 여덟 차례에 걸쳐 불법·비리 혐의를 고발해왔다.

앞서 언급한 세 건 이외에도 2018년 9월 TV조선 간부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수석의 국정농단 사태 무마를 위한 불법거래 의혹 등 언론농단 사건, 2019년 2월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이사와 그 가족들에 의한 운전기사 갑질 및 업무상 배임·횡령 의혹, 2019년 3월 로비스트 박수환 씨와 조선일보의 기사거래 의혹, 2019년 6월 조선미디어그룹과 방상훈 사장 사돈인 수원대 이인수 전 총장의 불법적 주식거래 의혹, 2020년 6월 조선일보의 정의기억연대 관련 가짜뉴스 불법행위 등에 대한 고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고발인 조사만 하고 이후 제대로 된 수사도, 기소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불법과 비리를 철저히 조사하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수사기관이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윤석열 검찰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비밀회동을 했다는 사실이 뉴스타파를 통해 드러나 파장이 일었다. 윤 총장이 방 사장과 만났을 때는 방 사장과 관련된 여러 건의 고소, 고발이 서울중앙지검에 접수돼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수사무마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조선미디어그룹이 이렇게 법 위에서 군림하는 동안 조선일보는 2019년 한해 2,999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2011년 이명박 정권의 위헌적인 ‘미디어법 날치기’로 탄생한 TV조선은 지난해 1,881억의 매출을 기록하며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올해로 창간 100년을 맞은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로, 군사정권 시절엔 독재에 굴복하며 그 불의한 권력에 기생해 사세와 영향력을 키워왔다. 2020년 한국 사회에서 조선일보의 대중적 영향력은 나날이 하락하고 있으나, 사회 기득권층과 긴밀히 연결되어 여전히 특혜를 누리고 있다. 언론은 공익과 정의의 편에 서서 진실을 추구해야 하지만 조선일보는 공익을 사익에 종속시키며, 자신의 기득권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언론을 악용하고 있다.

더 이상 방상훈·방정오 사주 일가와 조선미디어그룹의 불법 행위를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 르렀다. 언론사의 불법경영은 미디어 시장을 어지럽히고 언론 신뢰를 떨어뜨리며, 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와 국민의 피해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정부와 수사당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검·경찰은 지금이라도 총체적인 조사 및 수사를 진행하여 다시는 거대 족벌언론사가 우리 사회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고 직접적으로 중대한 범죄행위의 가해자·가담 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엄벌에 처해야 한다. 특히, TV조선의 일감몰아주기가 사실로 드러나거나 수원대 법인과의 불법적 주식거래 의혹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방송통신위원회는 TV조선의 재승인을 당장 취소해야 한다.

조선미디어그룹의 다양한 불법 행위가 오랜 시간 횡행할 수 있는 배경에는 정기적인 세무조사 등을 받는 일반기업과 달리 언론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기본적인 법·제도의 관리 감독조차 받지 않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데 있다. 2001년 이후 언론사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세무 조사가 시행되지 않았다. ‘신문대란’으로 불리며 과다경품 제공 등 불법 신문판촉 경쟁으로 신문시장 질서를 혼탁하게 했던 시절조차 언론사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전면조사를 받지 않았다.

언론이 남의 잘못은 추상 같이 지적하면서 자신의 비리는 감추고, 불법 행위를 계속한다면 우리 사회에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겠는가. 언론도 잘못을 했으면 조사받고 처벌받아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 경찰은 이제라도 조선미디어그룹과 사주 일가의 불법 행위에 대하여 전면적인 조사 및 철저한 수사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언론·시민단체들은 공정거래위 원회와 검찰, 경찰이 제 역할을 다하는지 엄중히 지켜볼 것이다.

2020년 8월 7일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미디어기독연대, 민생경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언론시민연합, 사월혁명회, 새언론포럼, 세금도둑잡아라, 시민연대함께, 아웃사 이트, 언론소비자주권행동, 자유언론실천재단, 전국언론노동조합, 조선동아폐간을위한무기한시민 실천단, 표현의자유와언론탄압공동대책위원회, 한국PD연합회, 한국방송기자연합회, 한국인터넷기 자협회, 한국진보연대(가나다순)

[참조] 최근 3년간 조선미디어그룹 관련 고발

1. TV조선 일부 간부와 박근혜 정부 청와대 안종범 정책수석의 언론농단 사건(2018.09.03)
2. 방정오 TV조선 대표이사 일가의 운전기사 갑질과 업무상 배임·횡령 의혹 사건(2019.02.24)
3. 조선일보와 로비스트 박수환의 기사거래 의혹 사건(2019.03.18)
4. TV조선 출범 당시 조선일보 사주 방상훈 대표이사 사돈인 이인수 총장 소속 수원대학교 법인과 조선미디 어그룹의 불법적 주식거래 의혹 사건(2019.06.04)
5. 조선일보의 정의기억연대 관련 가짜뉴스 불법행위 고발 사건(2020.06.11)
6. TV조선의 ‘하이그라운드’에 대한 300억대 일감몰아주기 및 부당거래 의혹 사건(2020.07.10)
7. 조선일보의 조선IS, 조광프린팅, 조광출판인쇄 등 관계사에 대한 부당거래 강요·사주 이익편취 및 보 복인사 갑질 의혹 사건(2020.07.28.)
8.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이사의 영어유치원 부당대여에 대한 배임혐의 사건(2020.08.03)

<2020-08-11> 신문고뉴스 

☞기사원문: 언론노조, 민언련 등 “조선일보 사주일가 비리 즉각 수사하라” 

관련기사 

☞한겨레: “불법경영 의혹 조선미디어그룹과 방씨 일가 철저 수사하라”
 

SBS: 언론·시민단체 “조선미디어그룹 불법 경영 의혹 전면 수사 촉구” 

오마이뉴스:TV조선 이어 조선일보도 ‘불공정거래’ 의혹, 공정위 조사하나 

프레시안:윤석열, 중앙지검장 시절 조선일보 사주 방상훈과 비밀회동 

뉴스타파: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조선일보 방상훈과 ‘비밀 회동’ 

YTN: 시민단체 “조선미디어그룹 불법경영 의혹 전면 수사해야”

화, 2020/08/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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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 창간 100년 맞아 11일부터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기획전

▲ 이광수가 쓴 “민족적 경륜” 제하의 사설을 게재한 <동아일보>를 규탄하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성토문 전단(1924년). . ⓒ 민족문제연구소

<조선일보>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두 언론사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기획전시회가 11일부터 진행된다.

민족문제연구소(아래 민문연)는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여 년간에 걸친 두 신문의 부일협력 행위를 추적한다”며 8월 1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진행되는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기획전을 소개했다.

민문연이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전시회는 총 4부(▲ 조선의 입을 열다 ▲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 ▲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 ▲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로 구성돼 있다.

민문연은 “1부에선 일제가 민간신문의 설립을 허용한 배경과 두 신문을 창간한 주도세력의 성격, 발행 초기의 논조 등을 다룬다. 2부에선 1937년 중일전쟁 개전을 계기로 경쟁적으로 침략전쟁 미화에 나선 두 신문의 보도 실태를 조명한다”라며 “3부는 두 신문이 1938년 시행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와 전쟁동원을 어떻게 선전·선동했는지를 고발한다. 4부에선 방응모가 고사기관총을 국방헌납하고 김성수가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달라’며 철대문을 뜯어다 바친 엽기적인 반민족범죄도 소개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동아일보>가 정간 해제를 목적으로 총독부에 복종을 서약한 ‘발행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와 <조선일보> 폐간 당시 사주 방응모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밀약을 담은 ‘언문신문 통제에 관한 건’ 등 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와 보고서, 사진화보 실물자료는 전시를 한층 알차게 한다”라며 “특히 민문연이 최근입수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 원본도 처음 일반에 공개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에필로그에선 프랑스의 신나치 언론 숙정과 우리의 반복되고 있는 부역의 역사를 비교한다”라며 “드골이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에 올려 가차 없이 처단했다’고 말했듯 프랑스는 부역언론 청산에 단호한 입장을 취한 반면 단죄를 피한 한국의 부역언론은 현대사의 질곡이 되어 또 다른 형태의 부역을 자행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전시회와 함께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를 주제로 한 연속 특강도 진행된다.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교육장에서 진행되는 특강에는 김종철 <뉴스타파> 자문위원장(1강, 8월 11일)을 시작으로 장신 교원대 교수(2강, 8월 13일), 박용규 상지대 교수(3강, 8월 18일), 정준희 한양대 교수(4강, 8월 20일),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5강, 8월 25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6강, 8월 27일)이 강사로 나설 예정이다.

<2020-08-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최초 공개되는 재일 유학생들의 ‘친일언론 성토문’

수, 2020/08/12-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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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창간 100년 맞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기획전 시작

▲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두 신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기획전시회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1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시작했다.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의 첫 전사자(이인석)가 나오자 “영웅만들기”에 나선 두 언론사의 기사. ⓒ 소중한

1939년 6월,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1938~1944년 시행) 이인석이 전사했다. 첫 조선인 지원병 전사자였다. 민족정론지를 자처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앞다퉈 ‘이인석 영웅만들기’에 나섰다. 아래는 이들이 쓴 기사다.

적진에 돌입, 역습 적을 분쇄 – 1939년 9월 6일 <조선일보>
영예의 전사한 이인석 가정방문기 – 1939년 7월 9일 <동아일보>
신질서의 ‘초석’ – 1939년 10월 1일 <조선일보>
고마운 주검 – 1939년 10월 3일 <동아일보>
제일선에 세운 무훈 – 1940년 1월 3일 <조선일보>
성전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우는 지원병 – 1939년 7월 23일 <소년 조선일보>
고 이인석 상등병에 금치훈장을 하사 – 1940년 7월 16일 <동아일보>
은막(영화)에 나타날 지원병 생활 – 1939년 12월 16일 <동아일보>

두 언론은 이들 기사를 통해 “현지로부터의 보고에 따르면 이(인석) 일등병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와중에도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동료들에게 성전의 완수를 부탁했다”라며 “각지에서는 이인석 군의 명예로운 죽음을 본받아 ‘나도 일본 군인으로 전장에 나가겠다’는 지원의 열기가 더해지고 있다. 이처럼 전사의 드높은 명예를 지킨 죽음에 조선 사람들은 고마움과 경의를 표하고 있다”라고 썼다.

또 “고 이인석 일등병은 전사 보도 직후 상등병으로 승급했고 군인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금치 훈장을 받았다”라며 “이처럼 지원병 제도는 내선일체의 구현, 황국신민에의 출발이 되고 있으며 그 성과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나가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원병의 성장과 멜로 등을 테마로 한 영화 ‘지원병’이 제작된다”라며 “이 밖에 나니와부시(일본 정통음악)로 각색되는 ‘오호 이인석 상등병’은 그의 행적과 황국신민다운 일화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이 같은 시도와 성과에 거는 기대가 크다”라고 소개했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두 신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기획전시회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1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시작했다. 이날 오전 현장을 찾은 시민들과 민족문제연구소 직원들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다. ⓒ 소중한

총독부가 언론을 “굴뚝”이라 칭한 이유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두 신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기획전시회가 11일 시작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여 년간에 걸친 두 신문의 부일 협력 행위를 추적한다”라며 10월 25일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기획전을 진행한다. 전시회가 시작된 8월 11일은 80년 전 두 언론사가 폐간된 날이기도 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전시회는 총 4부(▲ 조선의 입을 열다 ▲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 ▲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 ▲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로 구성돼 있다.

‘1부 조선의 입을 열다’에선 <조선독립신문> 등 항일 지하신문과 이에 맞서 일본의 ‘문화통치’ 하에서 만들어진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굴뚝이 있어 연기가 잘 배출되면 그 파열을 막을 수 있는 겁니다. 총독부가 조선어신문을 허용했던 것은 바로 굴뚝을 만들어준 것과 같은 격이고, 조선의 긴장된 공기를 완화하는 데 아주 좋은 분출구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 조선총독부 미즈노 렌타로 정무총감, <조선통치비화>(1937)

이러한 기조에 따라 1924년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논설 ‘민족적 경륜’을 썼다. 당시 재일 조선일 유학생 단체들은 이광수와 동아일보를 비판하는 성토문을 내는데, 민족문제연구소는 전시회를 통해 최초로 이 성토문을 일반에 공개했다. 성토문에는 “동아일보사를 중심하여 조직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자본벌의 전위대는 조선 독립운동의 본질을 거세하고 있다. (중략) 조선의 민중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의 제국주의 자본벌의 굴레 밑에서 굴종하게 만들려고 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 이광수가 쓴 “민족적 경륜” 제하의 사설을 게재한 <동아일보>를 규탄하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성토문 전단(1924년). . ⓒ 민족문제연구소

‘2부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에선 손기정 마라톤 선수(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사진에서 일장기를 없앤 사건 이후 <동아일보>의 입장을 담은 여러 글이 전시돼 있다.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 사건을 일으킨 것은 참으로 공구함을 금할 수 없던 차에 새 사장을 발행인으로 허가받고 발행정지 처분 해제의 은혜로운 명을 받았으므로 (중략) 황실국가에 충근을 다하여 성의로써 조선통치에 익찬할 것을 방침으로 별지 항목에 따라 서약합니다.” – 1937년 6월 1일 주식회사 동아일보 대표 백관수

“금후부터 한층 더 근신하여 다시는 이러한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하옵니다.” – 동아일보사 사고

‘3부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에선 기사 초반에 소개한 ‘이인석 영웅만들기’와 같은 일제 침략전쟁 미화 행위를 담고 있다. ‘4부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에선 방응모·김성수의 친일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두 신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기획전시회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1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시작했다.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이 1933년 기관총을 일제에 헌납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 ⓒ 소중한

서로 친일신문이라 비방한 조선·동아

1985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서로를 친일 신문이라고 비방했던 내용도 전시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민족혼을 일깨운 탄생,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 – 1985년 4월 1일 <동아일보> 조용만 칼럼 (동아일보, 민족혼 일깨운 탄생)

“김(성열) 사장, 제정신으로 하시는 일입니까. 반일, 친일 논쟁에 에스컬레이트 하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상상도 안 하십니까.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김성수)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두 신문사가 서로 상처를 입을 때, 이 사회에 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 1985년 4월 14일 <조선일보> 선우휘 논설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

“<조선일보>가 친일 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 – 1985년 4월 17일 <동아일보> 보도 (애독자 제현에게 알려드립니다)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 초대 사장. 친일 계보가 속속들이 파헤쳐져야 한다.” – 1985년 4월 19일 <조선일보> 보도 (우리의 입장 : 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

전시 첫날임에도 11일 오전 찾은 현장에선 여러 관람객을 만날 수 있었다. 김상일(62, 서울 중구)씨는 “어제 이러한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 첫날 오전부터 찾았다”라며 “국민들 마음속에 언론인은 그대로 지식인이 아닌가. 이 사회를 잘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불의에 야합하고 놀아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이어 “힘이 없는 약소국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라며 “예나 지금이나 일부 언론의 모습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전시를 통해 국민들이 자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두 신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기획전시회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1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시작했다. 이날 오후 2시 김종철 뉴스타파 자문위원회 위원장이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을 청산하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소중한

함세웅 신부는 “민족을 배반한 불의한 무리가 많이 있는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를 대표하는, 100년 전 태어나면 안 됐을 언론이었다”이라며 “민중의 혼을 썩게 만든 두 언론은 지금도 건재하다. 당사자들의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며 전시회에 왔다”라고 말했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두 언론사가 민족지의 이름으로 존재할만한 신문인지 그들이 써놓은 기사로 그 민낯을 드러내는 전시회”라며 “전시회를 통해 부역 언론을 청산하지 못한 후과를 뼈저리게 되새겼으면 한다”라고 설명했다.

전시회와 함께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를 주제로 한 연속 특강도 진행된다. 이날 김종철 <뉴스타파> 자문위원장(1강, 8월 11일)을 시작으로 장신 교원대 교수(2강, 8월 13일), 박용규 상지대 교수(3강, 8월 18일), 정준희 한양대 교수(4강, 8월 20일),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5강, 8월 25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6강, 8월 27일)이 강사로 나설 예정이다.

<2020-08-1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군 지원한 조선인 죽자, “성전에 참가” 극찬한 조선·동아

수, 2020/08/12-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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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통치에 활용된 시설물이다.(중략)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역사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한 친일잔재 청산 활동의 결과로 이 송정신사가 일제 식민지 잔재물임을 밝힌다”

광주시는 13일 일제 신사인 광산구 송정공원 금선사에서 일제 식민통치 잔재물에 대한 단죄문 제막식을 개최했다.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이번 단죄문 제막식은 지난해 8월 광주공원 사적비군에 이어 두 번째다.

이번 제막식이 열린 송정공원 금선사는 일제 식민지 시대 당시 내선일체 강조 등 조선인의 정신개조를 위해 일본이 1941년 조성한 신사로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목조건물이다.

이번에 설치된 단죄문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친일 인사의 행적 등이 기록됐다.

시는 올해 △원효사 송화식 부도비ㆍ부도탑 △너릿재 유아숲 공원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시비 △사직공원 인근 양파정에 걸린 정봉현ㆍ여규형ㆍ남기윤ㆍ정윤수 현판 △세하동 습향각에 설치된 신철균ㆍ남계룡 현판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회관 지하동굴 △송정공원 내에 잔존하고 있는 참계 신목 참도 석등룡기단, 대옹전 앞 계단, 신주사무소, 배전, 나무아미타불 등 6곳 21개 잔재물에 단죄문을 설치했다.

시는 단죄문 설치를 계기로 과거 대한민국 100년을 돌이켜 보고, 미래 대한민국 100년을 준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사 건물인 송정공원 금선사 등의 잔재물에 단죄문을 설치한 데 이어 내년부터는 사유지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물에 대해 소유주와 협의를 거쳐 청산작업을 이어가겠다”며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의롭고 풍요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위대한 여정에 150만 광주시민이 함께 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종구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13> 한국일보 

☞기사원문: 광주 송정공원 금선사에 단죄문 설치 

※관련기사 

연합뉴스: 광주 송정공원 일제 신사 ‘금선사’에 단죄문 설치 

뉴시스: 광주 송정공원 친일 잔재물에 ‘단죄문 제막’ 

국민일보: 광주 송정공원 금선사에 친일 잔재 청산 단죄문

목, 2020/08/13-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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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교육청의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올해 89개 학교 참여

(수원=연합뉴스) 이영주 기자 = 욱일기가 연상되는 교표(학교를 상징하는 그림)를 개교 90년 만에 바꾸는 등 광복절을 앞두고 경기도 내 학교들의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눈길을 끈다.

경기도교육청은 13일 도내 89개 학교가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는 학생, 교직원, 학부모가 함께 학교 안 일제 잔재를 찾아보고 개선 방법 등을 논의해 새로운 학교 문화를 만들어가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작곡가, 작사가가 만든 교가나, 교표, 교목 등이 청산 대상이 된다.

구령대나 조회대와 같은 구조물, 반장·부반장, 명찰, 선도부, 수학여행과 같은 일본식 용어들도 변경이나 순화 대상이다.

프로젝트 첫해인 작년엔 20여개의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가 바로 잡혔다.

올해엔 89개 학교가 참여해 청산 대상을 검토 중이다.

특히, 1930년 개교한 화성 정남초등학교는 지난 1년간의 내부 논의 과정을 거쳐 올 3월 1일 자로 교표를 새롭게 바꿨다.

정남초의 과거 교표는 욱일기(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범기로 사용한 깃발)가 연상되는 그림이 그려진 부채모양이었는데, 한 학부모의 문제 제기로 논의가 시작됐다.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 동문은 교표 변경 필요성에 공감했고, 교표에 담을 가치와 디자인 등을 다 함께 고민했다.

화성 정남초의 과거 교표(좌)와 새롭게 바뀐 교표(우)[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 결과 새롭게 탄생한 교표는 푸른 지구본 모양을 배경으로 우정과 사랑, 열정과 협력을 흰색과 붉은색이 합쳐진 하트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개교 90년 만의 변화였다.

정남초 우자영 교무부장은 “교표는 학교 홈페이지, 안내장 등 곳곳에서 사용하는 학교의 상징 중 하나인데, 전범기가 연상되는 그림이어서 교육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스스로 교표를 바꿨다는 점에서 학교 구성원 모두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김포대명초등학교도 벚꽃 안에 욱일기가 연상되는 그림이 그려진 교표를 교화인 개나리꽃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김포대명초의 과거 교포(좌)와 새롭게 바뀐 교포(우)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안성 공도중과 수원 삼일공업고는 친일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공도중은 학생과 학부모, 교직원, 동문 및 지역 주민들에게 가사 공모를 내 학교 공동체가 참여하는 교가를 만들 계획이다.

도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박태준 사무관은 “일제 잔재를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학생들이 잔재를 찾아내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숙의하는 과정 자체가 역사교육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일제 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사 이해를 통해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도교육청은 도내 7개 교육지원청의 독립운동사교육지원협의회를 중심으로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 지원, 지역에 특화한 교육자료 개발 등 생활 속 역사교육을 강화할 계획이다.

[email protected]

<2020-08-13> 연합뉴스 

☞기사원문: “이거 욱일기 아냐?”…교표·교가 바꾸는 학교들

금, 2020/08/14-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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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용서받지 못할 자, ‘밀정’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조세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던 2019년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주의의 새 장을 연 역사적 사변을 기념하는 열기가 한 해 내내 지속되었다. 학계는 물론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에서도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관점의 수많은 성과를 내놓았다.

이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았던 노작이 KBS 탐사보도부가 제작 방영한 〈밀정〉 2부작 다큐멘터리였다.

제작팀은 1년 여간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적’ 밀정을 추적했다. 8개월간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의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을 입수해 분석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밀정 혐의자 895명을 특정했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상상조차 힘든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밀정〉 2부작은 새롭게 찾아낸 밀정 혐의자 가운데 현재 독립유공자로 분류되어 있는 사람들을 집중 추적해 그들의 이상행적을 고발했다. 안중근 의사의 동지 중 한 명이었던 우덕순, 김좌진 장군의 최측근 참모 이정,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던 김규흥,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김재영 등이 그들이었다. 제작팀은 새롭게 찾아낸 밀정 관계 자료들을 학계 전문가들을 통해 검증하여 공신력을 확보했다. 이와 함께 역사 다큐멘터리의 전형성을 탈피해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완성도를 높여, 이른바 2040 젊은 시청자들에게도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밀정이라는 생소하고도 무거운 소재를 대중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학계에서도 그동안 연구자들의 심층 탐구가 부족했던 밀정이라는 주제를 공영방송이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한 데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전문가를 방불케 하는 방대한 사료조사와 치밀한 검증, 여기에 추적보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겠다는 열정이 결합해 근래 보기 힘들었던 수작을 탄생시켰다. 탐사저널리즘의 전범을 개척한 제작진에 각계는 ‘임종국상’을 비롯한 무려 10여개가 넘는 상을 수여함으로써 이들의 노고에 응답하였다.

▲ 지은이: 이재석, 이세중, 강민아 외 |출판사: 지식너머 |값 16,000원 |260쪽 |신국판(142×220mm) |ISBN 9791165791667

충격적인 내용으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다큐멘터리 〈밀정〉이 1년간의 준비를 거쳐 책으로 거듭났다. 다큐멘터리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대중적인 역사 읽기를 지향하고 있다. 취재 이면의 비화가 흥미로우면서도 정교한 추적과정이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한다.

밀정! 이들은 단순한 매국노나 부역자가 아니었다. 항일 대오 속에 잠입해 독립운동을 내부로부터 파탄시키려 한 가장 악질적인 민족반역자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최일선에서 보위하고 있던 경무국에까지 밀정이 침투하고 있었으며,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일제에 보고되는 형편이었다. 책을 읽노라면 독립투사들의 ‘동가숙 서가식’하는 신산한 삶이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책에는 〈밀정〉 2부작뿐만 아니라, 제작진이 발굴하여 ‘KBS 뉴스9’ 톱뉴스로 보도해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을 집중 조명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3·1운동 계보도〉 취재기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경주 최부잣집’에서 발굴된 사료를 분석하여 경주 지역 국채보상운동과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심층 보도한 사례 등 지난 한 해 KBS 탐사보도부의 빛나는 활약상도 소개하고 있다.

무릇 역사에는 빛과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감추고 싶은 치부일수도 있지만 밀정이라는 ‘어둠의 자식’들이 있었기에 독립투사들의 헌신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책이 그동안 은폐되어 왔던 오욕의 역사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한편으로, 일제의 간교한 분열 책동 속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대다수 독립투사들을 다시 기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밀정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변신해 갔는지 밝히는 후속작업도 기대해 본다.


[책소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 한 편의 탐사보도가 언론과 학계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바로 KBS 탐사보도부의 다큐멘터리 〈밀정〉이다. 2부작으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은 그간 학계에서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항일운동의 가장 어두운 지점, ‘밀정(密偵)’의 실체를 규명했고, 같은 해 친일청산과 관련해 가장 권위 있는 상이라고 할 〈임종국상〉을 비롯해 〈한국기자상〉 〈방송기자대상〉 등 10여 개의 관련 상을 수상하며 탐사보도의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호의 저변에는 ‘밀정’이란 단어가 가진 어두운 무게가 자리한다. 밀정은 단순히 동족을 배신한 ‘괘씸한 사람들’이 아니다. 일제의 피라미드식 지휘체계 맨 아랫단에서 실핏줄처럼 곳곳에 뻗어나가 작동하며 일제국주의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존재들이다. 이들의 암약 속에 거사는 실패하고 독립운동가들은 체포되었으며 독립군은 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일본군 100명보다 밀정 하나가 더 무섭다.’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 말은 그들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짧고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일본외무성과 방위성의 자료실에 보관된 기밀보고서와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밀정〉 취재진이 입수한 5만 장의 문서들에 남겨진 밀고의 기록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100주년을 넘긴 지금도 우리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한 임시정부 초창기 멤버들의 사진, 3ㆍ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의 계보도(밀정에 의해 작성되어 일제의 수배명단으로 쓰였을 이 체계적이고 상세한 명단에는 각계의 항일운동 핵심인물과 그 관계도는 물론 아직도 우리가 찾지 못한 숨은 영웅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도 이번 밀정 추적을 통해 발견되었다. 또, 안중근의 동지, 김좌진의 측근, 김구의 부하 등 그 손길이 미치는 범위 또한 실로 두려울 정도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밀정은 20여 명, 취재를 통해 밝혀진 밀정 혐의자는 895명
기억해야 할 역사에 대한 기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밀정은 친일파와 다르다. 대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했으며 지금까지 어느 정도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진 친일파들과 달리 암약했던 밀정들은 그들이 항일운동에 미친 그 치명적인 여파에도 불구하고 해방과 더불어 거의 아무런 청산의 과정 없이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밀정은 20여 명. 하지만 KBS 탐사보도부가 취재를 통해 추적한 밀정 혐의자는 895에 달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독립을 향한 염원이 동지의 얼굴을 한, 혹은 자신이 지켜야 할 민족의 얼굴을 한 밀정들의 손으로 일제에 넘겨졌는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남긴 배신의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숨은 주역들이다.

다큐멘터리 〈밀정〉이 그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을 발굴해내는 작업이었다고 한다면 이 책은 그 발굴의 기록이다. 제한된 방송시간에 미처 담지 못했던 자세한 자료 분석, 역사적 사건의 전후 맥락, 생생한 취재 과정과 적들의 기록으로부터 우리 내부의 적을 추적해야 했던 기자들의 소회가 더해져 있어 단순한 문자화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차례

1장 축제의 시간에 돌아본 우리의 그늘
2장 임시정부의 얼굴 누가 빼돌렸나
3장 항일운동의 또 다른 서술자 밀정
4장 안중근의 동지, 그가 걸어간 다른 길
5장 김좌진 최측근이 밀고한 배신의 기록
6장 얼굴 없는 밀정이 기록한 만주벌 호랑이
7장 김원봉을 밀고한 부하, 그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8장 임시정부의 비자금줄 경주 최부잣집
9장 식민지 권력자가 내린 지령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10장 김구를 잡아라, 특종공작에 동원된 밀정들
11장 3·1운동 계보도, 휘발된 사람들을 찾아서
12장 해방과 동시에 사라진 이름 밀정

이 책의 저자

이재석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KBS 보도본부에 입사, <군 댓글공작 최초 실명 폭로>, <국정원 4대강 반대 민간인 불법 사찰> 등 다양한 주제의 탐사보도를 해왔다. 다수의 특종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박정희, 독도를 덮다》(2016)가 있다.

이세중
2014년 KBS 보도본부에 입사해 주로 사회부와 탐사보도부에서 취재했다. <삼성물산 국가 상대 100억 사기 의혹>, <교도소 독방 거래> 등 다수의 고발 보도를 선보였다. <밀정 2부작>으로 <한국기자상> 등을 수상했다.

강민아
1990년생. 2014년 KBS <시사기획 창> 취재작가로 방송계에 발을 들였다. EBS 다큐프라임 <대학입시의 진실 6부작>(삼성언론상)에 참여했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를 제작했다. TBS 제작본부 PD로 재직 중이다.

목, 2020/08/13-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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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송영길,안민석,이상민 의원실 등 공동주최로 열린 ‘상훈법·국립묘지법 개정을 위한 국회 공청회’에 고 백선엽 장군 등 친일파 묘비 모형들이 전시돼 있다.|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 친일 인사를 국립묘지에서 강제 이장할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을 준비하는 한편, 오는 15일 75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여론 띄우기에도 돌입했다. 송영길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이 주최해 13일 국회에서 열린 ‘상훈법·국립묘지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참석자들은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페탱 장군,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 등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박탈당한 해외 인사들의 사례를 들며 친일파 ‘파묘(강제이장)’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지난달 김홍걸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 일부개정안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친일 행위자 등을 국립현충원 등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하도록 하는 조항을 담고 있다. 이에 더해 지난달 타계한 고 백선엽 장군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여당 일각에서 ‘친일파 파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제강점기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던 백 장군은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다. 반면 미래통합당 등 보수 야당은 “백 장군은 6·25 전쟁의 영웅”이라며 “여권에서 국론 분열에 앞장선다”라며 파묘에 반대한다.

이날 공청회를 주최한 송영길 민주당 의원은 “(친일 인사 강제이장을 위한)국립묘지법 개정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이라며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의 정신적 가치를 재확립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발제자로 나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국립묘지 안장을 엄격히 심사하고 사후에도 재평가를 통해 안장 자격을 박탈하는 해외 사례들을 소개했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전 총통이 대표적이다. 1975년 사망한 프랑코는 마드리드의 국립묘지인 ‘전몰자의 계곡’에 묻혔다. 34년이 지난 지난해 스페인 정부는 프랑코의 시신을 파내 가족묘지로 옮겨 묻었다. 시신 이장을 주도한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이번 결정으로 국가의 공적인 장소에 독재자를 찬양하는 도덕적 모욕에 종말을 고했다”라고 자평했다.

프랑스는 사회 유명 인사를 국립묘지인 ‘팡테온’에 안장하기 전 엄격한 검증을 거친다. 최소 10년 이상 유예기간을 두고 사망자의 정치적 공과를 검증한다. 프랑스 혁명가 미라보가 ‘배신 행위’가 드러나 안장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는 미라보가 사망한 뒤 그를 팡테온에 안장했다. 하지만 훗날 공개된 자료에서 미라보가 혁명 중에 루이 16세 측과 밀통한 사실이 드러났고 프랑스 정부는 그의 유해를 팡테온에서 끌어낸 바 있다.

한때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았던 앙리 필리프 페텡 원수는 안장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페텡 원수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공로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1940년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군에 항복하고 이후 괴뢰정부인 ‘비시 내각’ 수반으로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레지스탕스 명단을 나치에 제공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2차대전이 끝난 뒤 부역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고 대서양의 외딴 섬에서 복역하다가 사망한다. 프랑스군 최고 계급인 원수까지 지냈으나 팡테온은 물론이고 유명 장군들이 묻히는 ‘앵발리드 묘역’에도 안장되지 못한다.

김 전 관장은 “더 이상 독립운동가와 일본군 출신들이 같은 장소에 잠들게 해서는 안 된다”라며 “국가의 상징적인 추모 위령시설에 부역 인사들을 안치하는 비정의가 지속되지 않도록 국회가 국립묘지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13> 경향신문 

☞기사원문: “나치 부역자는 국립묘지 얼씬도 못 해” 여당, 백선엽 등 ‘친일 파묘법’ 박차

금, 2020/08/1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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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중, 친일인명사전 등재 작곡가 만든 교가 바꿔
“유치원 명칭도 일제 잔재 유아학교로 바꿔야”

제75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태극기 마당에 게양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뉴스1 © News1

“여기 구로에서 우리는 꿈을 꾸네. 여기 구로에서 우리는 빛을 비추네. 우리가 꿈꿀 때 세상은 변해가네. 우리의 희망은 영원히 빛나리”

15일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서울 구로구 구로중학교는 지난해 서울에서 처음으로 교가를 바꿨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교내 일제 잔재 청산을 논의하면서 내려진 결정이다.

이전 교가는 동요 ‘섬집 아기’와 군가 ‘진짜 사나이’ 등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이흥렬이 썼다.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음악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친일행적을 보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일제 잔재 청산뿐 아니라 이전 교가가 현재 학생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점도 교가 변경 이유로 꼽혔다. 1978년도 개교 당시 제작된 교가가 ‘요즘 세대’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가를 바꾸고 1년여가 지난 가운데 김삼현 구로중 교장은 “교가를 바꾼 뒤 학생들도 신선하고 새롭다고 얘기를 했다”면서 “자연스럽게 친일 잔재를 청산하면서 아이들 정서에 맞게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교가 제작에는 학생·학부모·교직원 등 학교구성원 모두가 참여했다. 김 교장은 “학생들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서 가사를 만들고 학부모도 참여하는 등 동문을 포함해 모두가 동의해 개정에 무리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졸업식이 취소되면서 올해 졸업생들이 새로운 교가를 부르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1학년 학생들도 아직 새 교가를 같이 부르지 못하고 있다.

김 교장은 “친일 잔재 청산 차원에서 서울 소재 다른 학교도 교가를 바꾸려는 곳이 많은 걸로 아는데 추진이 안 되는 거 같다”면서 “학교구성원 간 이해관계도 걸려 있어서 교가 교체가 쉽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교가 교체 이외에 교육계에서는 올해도 교내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을 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일제 잔재인 유치원을 유아학교로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전국국공립유치원교사노동조합은 지난 13일 성명을 내고 “유치원은 독일어 ‘kindergarten’을 일본식으로 번역한 표현이다”면서 “일제강점기 명칭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교육기본법과 유아교육법에서도 유치원이 학교임을 규정하고 있다”면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유아교육을 책임질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 설 수 있도록 유치원을 유아학교로 명칭을 개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치권에서도 한때 학교현장에서 사용되는 언어 순화를 위해 입법활동에 나선 바 있다. 지난 2018년에는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의원 11명이 나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해당 개정안에는 초·중·고교에서 사용되는 ‘교감’이라는 명칭을 ‘부교장’으로 변경하는 내용이 담겼다. 교장 명칭 자체가 일제 잔재이고 교장 못지않은 역할을 하는 교감이라는 직위를 좁게 보도록 한다는 것이다.

신현욱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정책본부장은 “교감은 교장이 없을 때 학교 업무 전체를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부교장으로 확실히 명칭을 변경해 책임과 권한도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직 단위 학교에서 잘못된 관행이나 교내 상징, 언어 등이 남아 있는 곳이 적지 않다”면서 “그런 것들을 순화하는 작업을 수년째 해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는 지난해 ‘서울학교 내 친일잔재 1차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서울시교육청에 친일 잔재와 관련된 전수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전교조 서울지부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 작사나 작곡한 교가를 부르는 학교가 113개교라고 밝혔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7명의 동상·기념관이 있는 학교(대학 포함)도 적지 않았다.

김홍태 전교조 서울지부 대변인은 “단순히 교가만이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정이나 학사운영상에서 여러 일제 잔재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면서 “이것과 관련해 더 많은 공론화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육당국에서도 교실 내 일제 잔재를 청산하려는 정책 의지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email protected]

<2020-08-15> 뉴스1 

☞기사원문: 구로중이 교가 바꾼 이유는?…여전한 학교 일제 잔재 ‘청산’ 가속

월, 2020/08/17-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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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잡던 이와 독립운동가가 같은 묘역에?
친일파 묘, 최소한 친일 행적 푯말이라도 세워야
친일귀족 이해승 변호사, 사법농단 주역 대법관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MHz (18:25~20:00)
■ 방송일 : 2020년 8월 14일 (금요일)
■ 진 행 : 정관용(국민대 특임교수)
■ 출연자 : 이준식(독립기념관장)

◇ 정관용> 내일이 15일 광복 75주년 되는 날입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 심각한 상황이죠. 그래서 이 광복절 맞아 특별한 분을 모셨어요. 친일파 재산 환수에서도 활약을 하셨고 지금 독립기념관장을 맡고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이준식> 네.

◇ 정관용> 관람객들 코로나 때문에 혹시 차단된 거 아닌가요, 독립기념관.

◆ 이준식> 저희도 한참 코로나19가 극성일 때는 한 70일 동안 휴가냈다가요. 6월 초부터 다시 문을 열었고 지금 현재로는 예년의 날짜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한 70~80%에서 아니면 40~50% 이렇게 예년의 관람객을 회복한 상태입니다.

◇ 정관용> 물론 인원 제한은 하겠죠.

◆ 이준식> 전시관은 인원 제한을 합니다.

◇ 정관용> 거리두기도 하고. 내일 광복절 기념식 혹시 여기서 여기세 하나요.

◆ 이준식> 충청남도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경축식을 갖습니다.

◇ 정관용> 정부기념식을 지난해에는 독립기념관이.

◆ 이준식> 지난해에는 정부 경축식을 가졌는데 올해는 정부 경축식을 서울에서 갖는 걸로 알고 있고요.

◇ 정관용> 다 축소해야 되니까 그렇죠.

◆ 이준식> 그래도 이번 경축식은 독립기념관하고 충청남도도 규모를 200명 정도로 할 예정입니다.

◇ 정관용> 그래야죠. 독립기념관으로서 75주년의 광복절 어떤 의미가 제일 크다고 보십니까?

◆ 이준식> 해마다 광복절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데요. 특히 5월 광복절은 우리가 의미가 더 각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작년 광복절만 하더라도 일본의 경제침략 때문에 굉장히 좀 시끌시끌했는데 그때 일부에서는 우리가 일본한테 무릎을 꿇는 게 차라리 낫다 그게 우리가 살길이다. 우리는 일본하고 맞서서 이길 방법이 없다.

◇ 정관용> 일부 언론에서 그런 목소리를.

◆ 이준식> 그런 목소리를 냈죠. 거기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1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보면 그런 얘기가 모두 헛소리가 됐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위기가, 경제위기도 잘 극복하고. 특히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한국과 일본의 국격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게 입증이 됐습니다. 저희 세대나 아니면 저희 윗세대만 하더라도 일본을 따라잡아야 된다 또는 일본을 이겨야 된다는 것이 일종의 꿈 같은 얘기였는데 지금은 그 꿈이 현실이 돼서 사실상 일본을 따라잡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을 뛰어 넘었다. 그 길이라는 말이 정말 통하는 그런 2020년이 됐다 그래서 올 광복절은 특히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우리가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일본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어떤 해보다 의미 있는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일본의 경제보복, 경제침략 그로 인한 우리 경제의 피해 별로 없다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 경제의 소재 부품 장비 산업에 있어서의 경쟁력은 더 커졌다는 겁니다.

◆ 이준식>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됐다라고 이렇게 평가를 하더라고요.

◇ 정관용> 반면 일본 경제에 미친 악영향은 더 크다.

◆ 이준식> 일본은 오히려 관련 산업 분야가 오히려 침체되고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고요.

◇ 정관용> 그리고 지금 현재도 현안이 있지 않습니까? 대법원 판결에 따라서 우리가 지금 이제 일본 측 자산에 대한 압류 이런 것들을 가고 있고 공시송달 좀 어려운 얘기입니다마는 거기까지 이루어졌단 말이에요. 공시송달이 이뤄졌다는 얘기는 상대 측이 서류를 수령하지 않더라도 법률상.

◆ 이준식> 효력을 갖는 거죠.

◇ 정관용> 서류를 받은 걸로 간주하겠다. 이제부터는 시기적으로 그쪽에서 다시 항소를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현금화할 수 있는 과정이 다 담겨지고 있는 거잖아요.

◆ 이준식> 그러니까 강제집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거죠.◇ 정관용> 그렇죠. 그런데 그거를 하게 되면 일본 정부는 가만히 안 있겠다는 상황인데 이준식 관장 보시기에 어떻게 합니까? 법대로 그냥 가야 돼요? 아니면 뭔가 지금 협상을 통해서 풀어보려고 했는데 협상이 안 되죠, 지금.

◆ 이준식> 제일 좋은 건 협상을 통해서 푸는 거죠. 그런데 워낙 일본 측의 태도가 완강하기 때문에 지금 일본 측이 협상을 안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고 사실상 선언을 한 셈이어서 지금 협상이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는 그런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이후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배 하거나 점령했을 때 그리고 식민지배나 점령이 끝났을 때 그런 잘못된 과거 역사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죄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 정관용> 당연하죠.

◆ 이준식> 그런데 일본은.

◇ 정관용> 독일이 대표적이고요.

◆ 이준식> 일본은 유일하게 반성하지도 않고 사죄하지도 않은 나라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반성하고 사죄하라고 하라면 우리가 뭐를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사죄하라고 하느냐. 우리는 반성할 것도 없고 사죄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끊임없이 노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거죠.

◇ 정관용>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있지만 일본은 응하지 않고 그러면 법률적으로 강제집행 단계로 가야 되는 게 옳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준식> 원칙적으로는 이게 결국 어쨌거나 삼권분립이 이뤄진 나라인데요. 법원에서 그렇게 판단했는데 정부나 또는 시민사회가 그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건 또 이것도 이상합니다.

◇ 정관용> 말이 안 되죠.

◆ 이준식>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사법부의 판단은 아무 의미는 없는 걸로 되는데 적어도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는 나라라고 한다면 사법부의 판단은 또 사법부의 판단대로 존중을 해야 되지 않을까. 그런 극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가 잘 타협점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굳이 타협점을 찾기가 힘들다면 한국으로서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어찌 보면.

◆ 이준식> 달리 방법이 없는 거죠.

◇ 정관용> 지금 일본 내에서는 아베 정권은 이제 곧 무너진다, 정권이 바뀔 거다. 이런 얘기가 많잖아요.

◆ 이준식> 지금 아마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렇게 되면 혹시 새로운 어떤 계기를 맞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점은 어떻게 보세요?

◆ 이준식> 지금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 중의 1명은 한국과 대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의원이라 그러니까 만약 그 사람이 차기 총리가 된다면 대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거겠죠.

◇ 정관용> 대화를 통한 해법. 한번 미리 가상적으로 해 본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 이준식> 저는 가장 중요한 게 기본적인 출발점은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진솔하게 사죄하고 우리가 그다음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책임을 지겠다라는 입장을 보이는 게 한국과 일본 사이의 실타래처럼 꼬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거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그걸 안 하니까.

◆ 이준식> 그거를 안 해서 문제인 거죠.

◇ 정관용> 인졍, 사죄, 반성 이걸 안 하니까 다른 편법들이 거론되는 거 아니에요.

◆ 이준식> 우리가 거창한 걸 요구하는 게 아니거든요. 기본은 반성하라. 반성의 바탕에서 사죄하라. 그리고 사죄한 다음에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라. 그거인데 일단 반성을 안 하니까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일본, 지금 아베 정부가 있는 한은 그냥 냉각기가 계속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도. 일본 내부의 정권의 변화 이런 것들과 맞물려서 조금 새로운 대화의 물꼬를 터야 되겠다 그 정도 말씀 듣고. 우리 내부에서의 친일청산 관련돼서는 지금 두 가지의 화두가 떠올라 있습니다. 하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재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돼 있는지 그 문제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이제 국립묘지법 개정 관련된 논란이 또 하나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짧게짧게 하나하나 짚어보면 우리 이준식 관장께서 바로 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하셨잖아요. 어디까지 활동이 됐었죠, 그때. 2006년에 출범해서 2010년에 문을 닫았는데요. 4년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자 법에 정한 특별법에 정한 친일반민족행위가 남긴 재산. 그 후손이 상속한 재산을 찾아서 재산이라고 그러면 주로 부동산입니다.

◇ 정관용> 토지죠, 토지.

◆ 이준식> 토지하고 임야입니다. 토지하고 임야를 찾아서 국가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취했고요.

◇ 정관용> 몇 권이나 했습니까, 그때.

◆ 이준식> 당시에 시가로 한 3000억 원 정도 했습니다.

◇ 정관용> 모두 합해서 3000억 원?

◆ 이준식> 시가로요.

◇ 정관용> 생각보다 많지 않네요.

◆ 이준식> 많지 않죠. 왜냐하면 해방 직후에 했으면 그 규모가 덕 컸을 텐데 해방되고 난 다음에 거의 60년 이상 지난 시점에 했기 때문에. 그리고 특별법을 만들면서 국회에서 친일파가 남긴 재산을 국가 귀속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거래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도 중요하다. 했습니다. 거래 안정이 뭐냐 하면 지난 시간 동안 이미 거래가 이루어진 친일파는 친일재산이 아닌 거라고 본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친일파의 후손이 그 재산을 처분해서 다른 형태로 재산을 변화시켰다고 하더라도 그 변형 재산에 대해서는 친일재산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특별법에 규정을 해 놨기 때문에 거기 친일파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 3000억 원 정도 규모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친일 후손 명의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런 거죠.

◆ 이준식> 네.

◇ 정관용> 그런데 국가귀속 조치에 불복해서 소송들을 하더라고요.

◆ 이준식> 거의 대부분 소송을 했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 소송에서의 정부가 대부분 이기죠? 이기기는.

◆ 이준식> 거의 대부분 이겼습니다.

◇ 정관용> 이 특별법에 의해서 우리가 되니까. 법적 근거가 있으니까. 그런데 지난해인가 친일파 이해승 유산반환소송은 정부가 패소했다면서요?

◆ 이준식> 원래 친일재산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당시 1심에서는 국가가 승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친일재산이 맞다. 국가 귀속이 옳은 결정이다라고 했는데 친일재산조사위원회 활동이 끝난 다음에 2심에서 이게 뒤집어졌습니다. 뒤집어진 이유는 이해승이 친일파라고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이해승이 소유한 재산도 친일 재산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게 뭐냐 하면 특별법에 병합의 공으로 귀속 작위를 받은 자를 친일파로 규정한다고 돼 있었습니다. 한일 병합의 공을 세워서 귀족 작위를 받은 자는.

◇ 정관용>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 이준식> 귀족 작위를 받은 자는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친일파다 이렇게 규정을 해 놨는데. 2심 재판부가 그걸 교묘하게 비틀어서 해석을 했습니다.

◇ 정관용> 어떻게요?

◆ 이준식> 귀족 중에는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작위를 받은 자도 있다. 그러니까.

◇ 정관용> 그냥 작위를 왜 줘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사진=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유튜브 라이브 캡쳐)

◆ 이준식> 그러니까요. 그래서 이걸 나중에 이제 입법 부. 전문 법조계에서는 입법 부작위라고 하더라고요. 국회에서 법을 만들 때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으로 귀족 작위를 받은 자는 다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거라는 의미로 집어넣었는데 법원에서 그거를 그러면 작위를 받은 자 중에는 병합의 은공으로 받은 자도 있고 그렇지 않게 작위를 받은 자도 있다. 그리고 이해승은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본 겁니다.◇ 정관용> 그쪽 변호인이 제출한 무슨 근거가 있을 거 아니에요?

◆ 이준식> 그런 논리를 편 거죠.

◇ 정관용> 병합에 공 세운 바 없다. 그냥 작위를 주더라.

◆ 이준식> 그냥. 그러니까 그냥 작위를 받은 거다.

◇ 정관용> 왜요? 그냥 왜요?

◆ 이준식> 그러니까 전주 이씨 종친이라고 그냥 작위를 받은 거다.

◇ 정관용> 그냥 그 논리를.

◆ 이준식> 그 논리를 법원이 그냥 받아들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중에 국회에서 문제가 되니까.

◇ 정관용> 법 개정했죠, 그래서?

◆ 이준식> 법을 개정했죠. 그래서 병합의 공이라는 표현을 삭제했습니다. 그러면 개정된 법에 의해서 다시 국가 귀속 조치를 하기 위해서 다시 소송을 제기했는데 국회에서의 법을 개정하면서 이상한 부칙 조항을 집어넣었습니다.

◇ 정관용> 또 뭐예요?

◆ 이준식> 확정 판결이 난 건에 대해서는 이 특별법의 개정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

◇ 정관용> 그거 뭐 딱 이해승 소송을 염두에 둔.

◆ 이준식> 봐주기, 봐주기, 봐주기 부칙조항이죠.

◇ 정관용> 그런 부칙이네요.

◆ 이준식> 그러니까 다른 건은 거의 다 국가가 승소했고요. 이해승 건만 패배했는데 결국은 이해승 건을 봐주기 위해서 그걸 집어넣은 거로밖에 해석이 안 되는 거죠.

◇ 정관용> 어떤 사람이에요, 이해승?

◆ 이준식> 이해승은 전주 이씨 종친이고요. 후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귀족 가운데서도 굉장히 높은 작위를 받았고요. 상당히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조선귀족회라고 귀족들의 단체 회장도 하고. 친일 행적을 한 건 맞습니다. 법원이 뭐라고 변명을 했느냐 하면 귀족 작위를 받고 난 다음에 친일행위를 한 것은 맞지만 공으로 귀족 작위를 받은 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취득한 게 친일의 대가로 받았다고는 볼 수 없다.

◇ 정관용> 이제 그런데 그 논리를 대법원도 인정했어요?

◆ 이준식> 대법원에서는 이상한 결정을 했습니다. 1심에서는 국가 결정이 맞고 2심에서는 국가 결정이 잘못됐다고 하면 판결이 엇갈린 거 아닙니까? 그럼 대법원에서 판단을 해야 되는데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위라는 거를 결정했습니다.

◇ 정관용> 무슨 말이죠?

◆ 이준식> 심리불속행위라는 건 뭐냐 하면 쉽게 얘기해서 2심 판결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굳이 대법원에서 따질 필요도 없다. 그래서 저희는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래서 몇몇 법조계분들한테 물어봤더니 말이 안 된다. 1심하고 2심 판결이 엇갈리면 대법원에서 판단을 해야지. 2심 결정이 났다고 해서 2심 결정이 났다고 해서 2심 결정이 맞다고 하면 대법원이 왜 존재하느냐, 이런.

◇ 정관용> 대부분의 소송에서는 국가 정부가 이겼는데 유독 이 재판만 이렇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세요?

◆ 이준식> 저는 그 이해승 후손이 아주 좋은 변호사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제일 실력 있는 변호사들을 써서. 2심 재판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2심 재판부의 재판장이 나중에 사법비리.

◇ 정관용> 사법농단.

◆ 이준식> 사법농단의 주역으로 꼽힌 박병대 대법관입니다. 그러니까 2심 판결에서 이해승 후손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한 다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법관이 됐죠.

◇ 정관용> 변호인들은 어디 어느 로펌이었어요.

◆ 이준식>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로펌입니다.

◇ 정관용> 김앤장. 심지어는 일본 기업까지 대리하시는 데니까 뭐. 이제 이해승의 후손이 무슨 호텔을 갖고 있다.

◆ 이준식> 예전에 스위스 그랜드호텔이라고 불렀던. 상당히 큰 호텔이죠. 이해승 후손은 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미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고요. 그 토지를 처분해서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었습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다음 국립묘지법 개정 논의가 지금 나오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부 공식기구에서 친일 행적 조사가 다 끝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립묘지에 묘역 옆에 친일 행적을 푯말이든 뭐든 이렇게 표시하든지 그게 싫으면 파가든지. 이렇게 하자라는 법 개정안이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준식> 예전에는 파묘를 주장했죠. 그러다가 요즘은 파묘도 한 방법이지만 정 후손들이 파묘를 못하겠다고 하면 그 옆에다가 친일행적을 적어놓는 판을 따로 세우자. 부끄러워서라도 이장을 하지 않겠느냐. 그러던 이 문제가 이제 국회에서 법 개정 논의로 막 불붙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제 사망을 했고 그러면서 백선엽 장군을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이 맞느냐.

◇ 정관용> 논란이 퍼졌죠.

◆ 이준식> 커졌죠. 그런데 동작동 현충원도 그렇고 대전현충원도 그렇고 장군 묘역과 애국지사 묘역이 같이 있습니다. 현충원에는 장군 묘역만 있는 게 아니라 애국지사 묘역도 있습니다. 적어도 애국지사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국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결정한 사람과 같이 묻히는 게 굉장히 억울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외할아버지는 동작동 현충원에 어머니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계시는데요. 후손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가슴이 아픕니다. 독립운동 하신 분들이 하늘나라에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내가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 같이 같은 곳에 묻혀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 한번 그런 고민을 하면 답은 쉽게 나올 것 같은데요.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 그런 얘기까지 했습니다. 정 백선엽을 현충원에 모시려면 애국지사 묘역을 차라리 옮겨라.

◇ 정관용> 네, 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독립운동 하다 돌아가신 분하고 그 독립하던 분을 잡으러 다니던 분하고 같은 묘역에 있다는.

◆ 이준식> 적대 세력을 같은 곳에 모신 겁니다.

◇ 정관용> 최소한 친일 행적 푯말이라도 세워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런 거죠?

◆ 이준식> 그런 거죠.

◇ 정관용> 법 개정 될까요? 이번 국회에서는.

◆ 이준식> 저는 돼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준식> 고맙습니다.

[email protected]

<2020-08-14> 노컷뉴스 

☞기사원문: 이준식 “친일파 묘 그대로? 애국지사 묘역을 차라리 옮겨라”

※관련기사 

☞한국일보: 독립기념관장 “애국지사, 친일파와 같이 묻힌 사실 하늘서 아신다면…”

☞머니투데이: 독립운동가 잠든 현충원, 친일파 12명이 묻혀있다

☞시사뉴스: 독립운동가 옆에 친일파가?’ 힘 실리는 ‘친일파 파묘법’

월, 2020/08/17-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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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 못 맺은 일본인 명의 토지환수 문제의 역사
역대 정부 과거사 문제 무관심과 행정력 부족도 한몫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원남동 종묘 담장 옆에 위치한 일본인 토지 일부. 해당 토지는 현재 국유화 작업을 거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일제에 침탈됐던 국권을 되찾은 지 75년이 흐른 2020년.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은 이 강토에 36년 일제강점기가 남긴 토지수탈의 흔적들을 완벽하게 털어내지 못했다.

광복 75주년을 맞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영토 곳곳의 등기부등본이나 토지대장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땅을 보유했던 일본인들이 버젓이 소유주로 기재돼 있다. 광복 이후 토지 문제를 정리할 때 국유화됐어야 마땅했던 ‘일본인 명의 토지’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14일 조달청과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해방 후 수백만㎡에 달하는 일본인 명의 토지가 대한민국 정부의 재산으로 환수되지 못했다. 2012년부터 조달청이 이 작업을 전담하면서 8년간 본격적인 국유화 작업이 진행됐음에도, 현재까지 환수되지 못한 일본인 명의 토지는 총 3,052필지에 달한다.

역대 정부 일본인 토지환수에 무관심

전문가들은 일본인 명의 토지를 75년 동안이나 제대로 환수하지 못한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대대적으로 이뤄진 창씨개명 때문에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분하기 어려웠고 △해방 직후에도 이런 정교한 작업을 추진할 행정력이 부족했으며 △역대 정부가 일제 잔재 청산 등 과거사 정리 문제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인 토지 환수 작업을 근본적으로 꼬이게 만든 배경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모든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려 한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1940년부터 시행된 창씨개명의 결과, 1941년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 호적 428만 2,754호 중 322만 694호(81.5%)가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이 결과 부동산 공적 장부에도 일본 이름이 쓰이게 돼, 광복 이후에도 장부만 봐서는 토지의 소유주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를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군정과 초기 한국 정부는 일본식 이름으로 된 공적장부상 실소유주를 추적해 한국인과 일본인을 분리해야 했다. 한국인의 것은 한국인에게 돌려주고, 창씨개명하기 전의 이름으로 대장에 기록해야 했다. 일본인의 것은 국가에 귀속시켜야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좌우대립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정치적 환경에서 이런 세밀한 작업은 불가능했고, 역대 정부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었다.

친일행위에 대한 청산이 부진했던 것도 이유가 됐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연구한 조미은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승만 정부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 탓에 친일재산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일본인 명의 재산은 관심사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돈 문제도 있었다. 조달청 관계자는 “정부 수립 초기 국가가 재정마련을 목적으로 공적장부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하게 귀속 재산을 처분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 일본기업, 일본기관이 소유한 토지들은 광복 후 미군정법 등에 따라 한국에 귀속됐는데, 이 때 귀속 재산은 남한 국가 재산의 80%를 차지했다. 이 귀속 재산의 일부는 농지 개혁에 분배되거나 기업에 판매됐다.

친일재산조사위 해체되며 동력 떨어져

물론 이후 정부에서도 일본인 명의 재산을 국유화하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정부는 1985년 ‘1차 국유재산 권리보전조치’를 시작으로 누락된 일본인 명의 재산을 추적해 국유화했지만, 당시 조치는 일본인 명의 재산만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 아니어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2006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는 이전 정부 조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과거 조사에서는 일본에서 많이 쓰이는 4글자 이름만이 포함됐는데, 재산조사위는 3글자 이름 중 일부도 조사 대상에 포함했다.

여기에 더해 재산조사위는 ‘일제강점기 재조선 일본인명 데이터베이스(DB)’를 만들며, 일본인 재산 조사를 위한 핵심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일제시대 자료 1,028건을 통해 일본인 이름 26만9,595개를 파악함에 따라, 이전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확인 절차가 명확한 근거에 따라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재산조사위는 활동기간 연장이 불허되면서, 이 조사는 4년 만에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홍경선 전 재산조사위 전문위원은 “아직 일본인명 DB 제작을 위해 확인해야 했던 자료가 남아있는 등 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활동이 중단돼 아쉬움이 컸다”고 말했다. 이후 일본인 명의 재산 추적은 2012년부터 기획재정부의 위임을 받은 조달청이 전담하게 되면서 다시 시작됐다.

전문가들 “범정부차원 조사기구 필요”

현재 조사에도 한계는 있다. 지난해 5월 감사원은 특별감사를 통해 조달청이 △일본인명DB 검색프로그램을 활용하지 않았고 △과거 재산조사위가 일본인 명의 재산으로 확정한 3,520필지를 조사하지 않고 방치했으며 △소유권 반환소송이 필요한 은닉의심재산 34필지에 대해 검토조차 하지 않고 소송을 보류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 일을 특정 정부기관에만 맡길 게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포함된 범정부 차원의 조사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위원은 “법률적 기술적 문제들이 많은데 이번 기회에 체계적으로 팀을 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연구원도 “공적장부 일본 이름 지우기 사업을 하기 위해서도 일제강점기 당시 자료를 분석하는 등 전문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며 “과거사 문제는 정권을 떠나 국가적으로 관리해야 할 문제인 만큼 민관이 합동으로 구성된 상설 기구가 필수”라고 말했다.

김현종 기자 [email protected]
신지후 기자 [email protected]
임수빈 인턴기자 [email protected]

<2020-08-15> 한국일보 

☞기사원문: 창씨개명 탓 한국ㆍ일본인 구분 안 돼… 일제 토지 환수 첫발부터 꼬였다

일, 2020/08/1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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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75주년 기획 – 공유지 위에 선 친일파 ②] 서정주 집과 시비, 관악구 예산으로 관리

김성수, 서정주, 조택원, 김기수, 함화진, 주요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및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동상 및 시비, 기념관 등이 공유지에 수십 년째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광복 75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현장에서 이를 직접 확인했다. [편집자말]

▲ 사당역 6번 출구 뒤쪽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미당이 살던 집이 있다. ⓒ 김종훈
▲ 사당역 6번 출구 뒤쪽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미당이 살던 집이 관광명소가 돼 운영 중이다. ⓒ 김종훈
▲ 사당역 6번 출구 뒤쪽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미당이 살던 집이 관광명소가 돼 운영 중이다. ⓒ 김종훈

“서울미래유산 서정주 가옥”

서울지하철 사당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서정주의 집’ 대문 옆쪽에 붙은 표지석 내용이다. 2013년 서울시는 서정주의 집을 “시작(詩作)의 산실로 시인의 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장소”라면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해 발표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서울을 대표하는 유산 중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은 유무형 자산을 보전하기 위해 서울시가 마련한 프로젝트다.

관악구 역시 이에 발맞춰 서정주의 집을 “시인의 숨결과 생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미당의 주요 유품들과 저서들을 전시하고 있다”면서 관악구 홈페이지에 ‘인기명소’로 소개했다. 현재 이곳은 관악구청 재산으로 등록돼 관리 운영되고 있다.

2003년 서울시는 서정주의 집을 매입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미당 서정주의 집이 한 건축업자에 매각될 상황에 놓이자 시비 7억 5000만 원을 들여 매입했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매입은 했지만 공사비를 확보하지 못해 서정주 집은 빈집으로 방치됐다. 2009년 오세훈 서울시장 재임 당시 서울시는 시비 10억 원, 구비 2억 5000만 원을 추가로 투입해 서정주의 집에 대한 개보수를 진행했다. 대문 우측 마당에 ‘미당 서정주의 집’이라는 파란색 간판까지 올려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서정주의 집’은 2011년 정식 개관했다. 이후 기념관 형태로 서정주의 유품과 시집, 사진 등이 전시돼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앞서 서정주는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시를 통해 학병과 지원병, 징병을 선전하고 선동했고, 산문을 통해 문인으로서의 ‘문필보국’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바 있다.

관악구 곳곳에 남은 서정주 흔적

▲ 사당역 6번 출구에 세워진 미당 서정주의 시비 ⓒ 김종훈

서정주는 2000년 사망할 때까지 말년 30년을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관악구에는 ‘서정주의 집’을 포함해 서정주와 관련된 기념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서울 지하철 사당역 6번 출구 남현예술정원 입구에 세워진 서정주의 시비도 이 중 하나다. 지난해 1월 기존의 수경공원을 철거하고 새롭게 개장한 남현예술정원에는 서정주의 시 <신부>가 시비로 설치돼 있다. 미당의 시비 맞은편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원수의 시비 <겨울나무> 역시 설치돼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정주의 집과 더불어 관악구 인기명소로 등재된 관악산호수공원에도 서정주의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1997년 12월에 조성된 관악산호수공원은 서울대학교 정문 우측, 관악산 진입로에 자리한 도시자연공원이다. 관악구는 시비 앞쪽 안내판에 “우리구에 거주하며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미당 서정주님의 관악사랑 정신을 담은 시비를 세워 애향심을 표상으로 했다”라는 설명을 기재했다.

‘서정주의 집’을 포함해 시비 등을 직접 관리하는 관악구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서정주 시인에 대한 시민들의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면서 “서울시에서 (서정주의) 집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고 이에 따라 (관악)구에서는 최소한의 예산을 투입해 운영·관리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관악구는 “절충안을 찾고 있다”면서 “협의를 거쳐 서정주의 (친일 관련 내용을 포함하는) 안내판 등을 설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정주의 집 등 기념물을 폐기하거나 용도변경을 할 계획이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서 “민원 역시 상대적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서정주가 친일파인데 친일행위를 한 사람을 기릴 필요가 무엇이냐’라고 말하지만, 다른 쪽에선 ‘시인을 시인으로 평가해야 한다’면서 미당 서정주라는 사람의 업적에 대해 말한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안내판에 미당의 친일행적 부분을 기록하면 열람하는 시민들이 판단하지 않겠냐”라고 밝혔다.

미온적인 관악구… 춘천·부천 등 2019년 서정주 시비 철거

▲ 서정주의 집에 전시된 미당 서정주 생전 모습. 전시물을 재촬영했다. ⓒ 김종훈

관악구는 서정주의 기념물 철거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서정주의 시비 등을 보유했던 일부 지자체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19년 5월 춘천시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춘천문학공원 내 자리한 서정주, 최남선 등의 시비를 철거해 땅에 묻었다. 춘천시는 시비가 있던 자리에 “이곳, 춘천문학공원에 불손하게 들어앉은 일제강점기 친일 문인들의 흔적을 이곳에 묻는다. 슬픈 역사도 버릴 수 없는 우리의 것이나 민족의 아픔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까닭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석을 세웠다.

사례는 또 있다. 2019년 8월 부천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관내 서정주의 시비 3개를 포함해 주요한, 노천명 등 국가공인 친일파로 등재된 인물들의 시비를 철거했다. 당시 부천시는 “시민들로부터 친일파의 시비를 철거해 달라는 민원이 꾸준히 제기됐다”면서 “문화예술분야에서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친일파 시비를 철거했다”라고 밝혔다. 철거된 빈자리에는 정지용의 시 ‘향수’를 담은 시비를 설치했다.

2019년 11월, 충남 태안군 주민들은 서정주의 시비를 세우려던 군의 건립계획을 집단적으로 반대해 취소시켰다. 당시 건립추진위원회는 서정주가 1956년 학암포를 찾아 ‘학’이란 시를 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군비 2000만 원을 들여 학암포해수욕장 인근에 높이 2m, 폭 1m 크기의 서정주 시비 건립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태안참여연대 등 지역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돼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진행했고, 그 결과 시비 건립은 전면적으로 취소됐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은 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서정주 기념물 철거는 결국 단체장의 의지 문제”라면서 “이미 서정주의 시비를 철거한 지자체가 존재한다, 당장의 철거 등이 제한된다면 객관적인 사실을 담은 안내판이라도 바로 설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관악구에 자리한 서정주의 집을 비롯해 사당역과 관악산에 세워진 시비에는 그의 친일행적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2020-08-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세금 20억 들어간 친일파의 집… 친일 안내조차 없고

수, 2020/08/19-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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