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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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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admin | 월, 2021/04/12- 03:16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①

봄기운이 벼락처럼 내달려 북한산 일대를 에워싸더니 만경대에서 멈칫하며 숨을 고른다. 이도 잠시 기운을 되찾은 봄장군은 사방에 꽃사태를 일으키며 수유리 벌판을 향해 진군했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은 날 김주는 우이동 솔밭공원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 심산 김창숙(아래 심산)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한번 다녀오면 만보나 되는 거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거르지 않는다.

심산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다. 그는 3·1 운동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민족대표로 모두 참여했건만 유림이 빠진 것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리고 기개를 잃지 않고 있는 선비들을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유림(儒林)의 독립청원서를 만든다. 이를 지니고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번역한 후 강화회의에는 물론 중국 내 각국 대사관에 발송하고 해외동포들에게도 보냈다.

그 후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심산은 1927년 치질 치료차 입원했던 병원에서 밀정의 신고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나가사키를 거쳐 대구경찰서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랜 징역 생활을 겪으며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 심산의 손녀딸, 김주. ⓒ 민병래

1941년생인 김주는 심산의 무릎 밑에서 컸다. 1934년 일제는 심산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줬다. 고향인 경북 성주로 돌아왔지만 감시망은 여전히 촘촘했고 그런 심산에게 손녀딸은 말벗이고 위로였다.

곰방대를 가져오고 고물대는 손가락으로 할아버지의 뼈만 남은 다리를 주무르며 김주는 “아파? 아파?” 하고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심산은 그런 김주를 품에 끌어안고 지긋한 수염으로 볼을 비비곤 했다. 김주가 중학교 때는 성균관대 담벼락에 늘어섰던 순댓국 집에서 막걸리를 함께 홀짝이던 술 친구이기도 했다.

김주는 4·19 민주묘지를 지나 백련사 표지를 보고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심산 묘지까지는 300여 미터 남짓,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다. 김주도 이제 팔순이 넘은 몸, 숨이 가빠진다. 이 길을 넘어설 때마다 두 다리를 못 쓰면서도 항일투쟁과 민주화운동에 한결같았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김구와 평생 동지였던 심산

▲ 심산의 초상 꼿꼿한 지사의 기개가 느껴진다. ⓒ 김주제공

1953년 휴전 후,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치가 더욱 심해질 때 이승만을 꾸짖으며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심산만한 사람도 없었다. 1960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열린 신채호 24주년 추도식에서 심산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독단으로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해서 탄핵재판에 회부되었고 매국행위를 했다고 제명되었던 인물이요”라고 연설해 자유당 관계자들과 관료들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세 번이나 냈던 심산이고 그의 손주 김위는 성명서 원본을 찾으려는 경찰에게 서대문로터리에서 몸 뒤짐을 당해 벌거숭이 처지가 되기도 했다. 심산은 누구보다 김구와 가까웠고 평생의 동지였다. 심산이 나석주 의사를 파견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하도록 의거를 일으켰고, 김구는 이봉창 의사를 도쿄에 보내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도모했다. 해방 후에 환국한 김구를 가장 뜨겁게 맞이했던 사람도 심산이다.

김주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녀가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김구와 심산은 각자 손주들을 데리고 종로의 어떤 극장에서 만났다. 그날 남인수의 노래공연이 있었다. 김주는 김구의 손녀딸과 객석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곰보할아버지와 심산은 무언가 귀엣말을 끝없이 나누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녀딸을 데리고 극장나들이를 하는 모양새로 비밀회담을 한 것이다.

백범이 총에 맞은 날, 사람들이 허겁지겁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심산은 비명을 지르더니 청년들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셨고 다음 날 새벽 돌아오셨다.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백범’을 불렀고 “그놈 짓이야, 그놈 짓이야”를 끝없이 외치셨다. 심산이 밥숟갈을 다시 든 게 어린 김주가 헤아려봐도 열흘이 넘은 때였다.

▲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서 절 드리는 김주 선생은 거르지 않고 일주일 두 번 찾아뵌다. ⓒ 민병래

김주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묘소에 다다르니 4월의 아침볕은 정갈하게 내려왔다. 잔디는 파릇하게 올라왔고 간밤에 내린 비로 흙더미는 촉촉했다. 김주는 깊게 절을 올렸다. 무릎에선 오래 전부터 뚝뚝 소리가 났다.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교육을 받았다.

엄마 손응교는 1933년 열일곱 나이에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례를 올렸다. 시집왔을 때 남편은 진주고보에서 동맹휴학을 주도, 5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고 시아버지 심산은 대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면회를 가서 첫인사를 올렸는데 간수에게 업혀나온 심산은 “구국운동으로 집안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집안은 네게 달렸으니 원대한 희망을 가져라”라고 말을 했다.

새댁은 면회실에서 울고 형무소 담장 밖에서도 울었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졸지에 종부 신세까지 되었다. 시아주버니인 김환기, 심산의 첫째 아들이 집 마당에서 일본경찰에게 매타작을 당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그 부인도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심산이 출옥해서는 대소변을 받아냈고 1962년 심산이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절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김주는 엄마 손응교와 자신이 심산의 묘소를 돌보고 절을 올리는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멀리 진달래 능선은 백련사 계곡쪽으로 분홍빛 꽃비를 내려 뿜었고 그 향기는 심산의 묘소에서 해적이면서 돌아나갔다. 김주는 절을 마치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이 켠 저 켠에 뿌려드리고 잠시 햇빛바라기를 했다.

눈을 감으면 되살아오는 기억은 끝이 없다. 딸이어서일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끝도 없이 얘기하지만, 엄마 손응교가 없는 심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들 있을까?

심산과 한 몸이었던 엄마 손응교

▲ 김주의 어머니이자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그는 며느리이자 심산의 평생 동지였다. ⓒ 경북경북여성쟁책개발원 제공

김주의 아버지 김찬기가 투옥과 감시 속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한 게 김주가 세 살 때인 1943년이다. 그때 심산은 여전히 일본 경찰의 감시에 꼼짝을 못했다. 엄마는 왜관역에서 몰래 떠나는 남편을 어린 김주를 안은 채 눈물로 전송했다.

남편은 “나중에 빌어먹을 형편이 돼도 애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이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 되면 2년 반이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하고 떠나갔다. 뒤늦게 김찬기가 사라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남편이 간 곳을 대라”고 수시로 손응교를 잡아다가 매타작을 하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너처럼 간이 배 밖에 나온 여자는 처음 봤다”는 일본 경찰의 악다구니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심산은 배를 쫄쫄 굶고 있었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밥부터 지어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조국 독립과 심산 선생을 위해 종처럼 살았고 내 인생은 없었다고. 심산 선생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심산 선생이 있다고.

한때는 대구에서 ‘요미우리’라는 위장서점까지 했던 엄마, 심산의 쪽지를 들고 중국 봉천까지 다녀왔고 남편 김찬기의 체포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오자 연변의 도문까지 다녀왔던 엄마, 심산의 손발을 넘어 심산과 한 몸이었건만 세상은 잘 모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주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아침 해는 백련사 계곡을 넘어서 북한산성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김주는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모레 또 올게요”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김주는 늘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읆조린다. 지금도 그날은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할아버지랑 성균관 동재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서너 명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더니 할아버지를 끌어내 명륜 1가에 있던 집에 내동댕이쳤다. 몇 년 몇 일인지는 아득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네 이놈들’ 소리치며 발버둥쳤고 김주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심산은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장악한 유림(儒林)을 혁신하고 성균관을 민족대학으로 재건코자했다. 이를 위해 1945년 11월 30일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 유림대회를 열었다. 유도회총본부가 결성되었고 심산은 위원장이 되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모아 성균관재단을 만들었고 성균관대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물론 심산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몰려 있던 자유당은 유도회총본부를 외곽조직으로 삼으려 했다. 국민을 백성이라 부르고 자기 말을 유시라 하며 봉건군주 행세를 하던 이승만은 유도회를 집어삼켜 그 충효 이데올로기와 전국조직망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문제는 심산이라는 걸림돌이었다.

자유당은 황도유학파와 정부조직을 앞세웠다. 황도유학파는 유교의 충효사상을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이데올로기로 둔갑시켰던 세력이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자 화려하게 부활해 자유당의 뒷배를 업고 심산과 정통파를 공격하며 성균관재단을 장악했다. 결국 심산은 1956년 2월 2일자로 총장직에서 쫒겨났다.

심산이 물러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거침이 없었다. 내무부장관은 1956년 11월 15일을 기해 전국 각지의 유도회 지부를 개편하라고 경찰에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심산을 따르던 정통파는 무너져버렸고 심산은 어느 날 성균관에서 들려나가고 말았다. 그 아픈 현장에 있었던 김주는 그때부터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관방을 떠돌았던 불쌍한 할아버지 심산

심산은 그 후 명륜동 1가 집에서도 쫒겨났다. 가족의 은행대출을 보증해 준 탓에 집이 압류되고 만 것이다. 심산과 손응교, 김주는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때부터 심산은 여기저기를 떠돌게 되었고 합정동 어떤 셋방을 거쳐 여관살이로 내몰렸다.

중앙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심산의 병실은 셋째 아들과 심산의 명망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통제되었다. 박정희가 심산의 병실을 찾은 게 이때였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친구로서 함께 항일투쟁을 했었다. 그런 아들 친구의 동생이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병문안을 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심산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김주가 병실 출입 저지를 뚫고 심산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1962년 5월 10일 돌아가시기 삼일 전이었다. 심산은 거죽만 남은 상태에서 21살 김주의 손을 잡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를 세 번이나 되뇌였다. 김주는 그날 눈물을 흘리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말년에 대해 세간에 떠돌던 이런 저런 얘기들이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에서 심산은 김주를 보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김주는 자식에게까지 상처를 받아야 했던, 죽는 날까지 마음 고생을 했던 심산을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게 되었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②

▲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 김주의 부친으로 해방되는 해 중국 중경에서 숨을 거뒀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김주는 심산 묘소에서 남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4·19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년 결혼한 남편은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회장이다. 2013년에 숨을 거뒀으니 그래도 오래 동고동락을 했다.

엄마 손응교는 아버지 김찬기가 일본에 쫒겨 다니는 통에 불과 1년이나 같이 살았을려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에게 셋째를 남겨 주었다. 해방되는 해 세 살이 된 김주의 남동생은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 지사가 김찬기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해방되는 해가 엄마 손응교에게는 지옥이었다. 아들의 주검과 남편의 주검을 동시에 맞았으니 오죽했을까. 엄마는 이때 목이 잠겨 말을 못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담배도 늘어 혓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폈다. 할아버지 심산은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툇마루에 며느리가 필 연초를 슬그머니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엄마였기에 김주가 신랑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것을 부러워도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살가운 사위노릇도 했다.

남편 묘소까지 돌아보고 나니 김주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늘 하루 일과를 충만하게 마친 느낌이다. 김주가 동국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할 때 남편은 동국대 법대 3학년생이었다. 4·19가 일어났을 때 행정실 캐비닛을 부수고 교기를 꺼내 거리로 나섰던 남편이다. 김주가 남편에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상해 임시정부청사 보존을 위해 1990년 중국에 갈 때 방문단의 경비를 선뜻 내준 일이다.

당시 조경한 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 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때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를 모시고 동행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미수교국 비자를 신청해서 홍콩을 경유, 북경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주선기란 사람은 중국 총리였던 주룽지의 친척으로 자기 집을 놔두고 임시정부 터에 살면서 청사 보존을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심산이 상해에서 살던 집까지 기억하고 그 사진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북경대 조선문화연구소장인 최응국, 조선족 총회장 문정일 등은 “임시정부청사를 중국내 항일유적지로 보존”하자는 학술세미나를 같이하며 중국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여정에 김주 자신이 엄마와 동행했고 남편은 방문단 18명의 여비와 현지 경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호암관에서 심산관 다시 호암관으로

집으로 가는 길, 4·19 민주묘지에서 집까지는 한달음 길이다. 그래도 만보되는 걸음에 김주는 땀도 나고, 지친 터라 솔밭공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길 한 켠에 패랭이꽃과 돌나물이 소북하게 올라온 게 정겨웠다. “어머나 씀바귀도 있네” 하며 김주는 쪼그려 앉았다. 씀바귀나물은 할아버지 심산이 두릅과 함께 좋아하셨던 술안주다. 엄마 손응교는 종가집 음식인 육회를 곁들여 상차림을 올리곤 했다.

▲ 청천서원의 모습 손응교는 심산의 평생 소원, 문중의 청천서원을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엄마 손응교는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남은 여생을 심산이 평생 소원하던 ‘청천서원’ 복원에 바치겠다고 했다. 성주의 생가를 지키며 엄마는 문중의 힘을 모아 기어이 92년에 이 일을 이루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 노릇을 의젓하게 마감한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김주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은 여생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묘소만이라도 거르지 않고 돌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성균관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기에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 성대총장시절의 심산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 심산기념관제공

심산이 쫒겨난 후 성균관재단은 1957년 10월 21일 이선근을 총장으로 선출했다. 문교부는 그의 취임을 즉시 승인했다. 그는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창설된 만주제국협화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협회는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 등 5족의 협화를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왕도낙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서울대 학생처장을 하며 ‘국대안 파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54년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편 삼성은 1965년 성균관대를 인수하였고 이병철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바탕으로 민족의 영재를 키우려던 심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선 후 금잔디 광장 뒤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1977년 성균관대 학생들과 유림의 재벌퇴진 운동으로 삼성은 재단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1980년 3월 민주화의 봄을 타고 호암관을 심산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삼성병원을 거점삼아 생명공학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던 삼성은 당시 의대 신설이 유력시되던 성균관대를 인수하고자 했고 학생들 또한 열렬히 이를 반겼다. 결국 삼성은 1996년 20년 만에 다시 성균관대에 입성했다. 당연히 심산관은 호암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심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손녀 김주가 할아버지 상해집 사진을 안고서. ⓒ 민병래

2022년이면 심산이 돌아가신 지 60년,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심산의 이름은 김주의 소원대로 되살려질 수 있을까? 씀바귀 나물을 손에 담고 일어선 김주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능선에서 내리던 꽃비는 어느 새 그녀의 굽은 어깨를 지나 우이암과 도봉 주능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도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 불쌍한 할아버지 묘소에도 봄은 무심코 찾아오겠지.
다녀갈 때 잊지 말고
고향 성주의 솜털씨앗은 상처나지 않게 고이 감싸서
명륜동 은행나무의 새순은 연노랑 빛으로 물들여
북한산의 진달래 꽃비는 눈이 시리도록 듬뿍
할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주고 가길 바랄 뿐이다.

<못다한 이야기>

① 심산이 다리를 못써 벽옹이라고 불리우고 업혀서 다닌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후 사진을 보면 서서 연설하는 사진이 있다. 이에 대해 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2020년도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에서 아래처럼 밝혔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 지사의 건강을 염려한 동료들이 솜씨 좋은 안마사를 동원해 석 달을 안마로 다리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김창숙 지사는 혼자 온전히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에 성균관대 교직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동래온천에 머물 때 2층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하게 다쳐 다시는 못 움직이게 되셨다.”

② 김주의 어머니 손응교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후손으로 자신의 가문도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손응교는 손후익의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손응교의 증조할아버지 손최수가 신돌석 의병장을 도왔고, 할아버지 손진수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전한다. 또한 종조부 손진형과 삼촌 손학익 모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손후익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김창숙 지사를 만났다. 아버지 손후익은 경북 유림계를 결속시켜 김창숙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처남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의 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김창숙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때 할아버지 손진수와 아버지 손후익이 김창숙을 간호했다. 이일이 인연이 되어 손응교는 당시 동덕여고 재학중이었지만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인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의 삶 또한 울산의 독립운동가로서 조명받고 있다. 손응교는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 남편이 죽고(1945), 시어머니가 죽고(1951) 친정아버지가 죽고(1953) 심산이 죽고(1962) 줄 초상을 당하여 평생 상복을 벗을 날이 없었다. – 참고도서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

③ 김찬기 선생의 사진은 극적으로 남아있다. 이 사진이 남은 배경을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에 기록된 손응교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면 이렇다.

“방에 우리 남편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왜관에서 비밀 지하 운동하다가 체포된 왜관 사건으로 징역 살고 나올 때 찍은 것이라.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라. 성주에서 사진관 하던 이명동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찍었어. 후에 이 양반이 동아일보 사진기자도 하고 했어. 이명동씨가 자기 묵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있더래요. 그래서 똑같은 걸 다섯 장을 뽑아서 보내왔어.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은 편지나 사진은 안 남겨. 사진 있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잡을 수 있잖아요. 우리 집에도 편지 오면 심산 어른이 좀 문제 있다 싶은 거는 다 하나 둘이 몇 번 읽어본 후 불태웠어. 심산 선생도 사진 때문에 잡혔거든.”

④ 김주의 큰 고모, 즉 심산의 첫째 딸인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심산의 장남 김환기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경에게 집 마당에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환기의 죽음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때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료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⑤ 이 글에서 다룬 황도유학회와 자유당의 유도회 장악과정은 아래 논문을 참조했다. – <성균관대학교 2002년 석사학위 논문 ‘1950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연구’,조한성>

⑥ 임시정부 터를 지키기 위한 중국방문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통일기원대제를 지냈다. 그때 김주와 손응교는 유림의 대표격으로 국조단군칙어를 낭독했다. 중국사람들은 백두산 천지에는 새가 날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고 김주는 회고한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이름, 80대 손녀의 간절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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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리즈: 민병래의 사수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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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차별 없었다”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95세 강제징용 피해자의 남은 소망은

▲ 군함도, 또는 지옥섬으로 불리기도 한 하시마(端島). 미쓰비시가 운영한 이 해저탄광의 일부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지만, 일본은 여기서 이루어진 강제동원과 희생을 지워버렸다. ⓒ 위키백과

조선인 강제 노동의 역사적 현장인 군함도(하시마)가 다시 뉴스에 불려 나왔다. 일본이 이 섬에 대한 ‘역사 왜곡’을 시도하자 외교부에서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하면서다. 외교부의 항의는 일본이 2015년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할 때 한국인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알리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것이었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동원

당시 일본은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서양의 기술이 일본 문화와 융합해 급속한 산업국가가 형성된 과정을 시계열적(視系列的)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보편적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본이 등재 신청한 규슈(九州)와 야마구치(山口)현에 있는 중화학 산업 시설 23곳 가운데 최소 7곳은 조선인 강제 노동 피해가 발생한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하시마 등 일부 산업 시설에서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했던 일이 있었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정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라고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약속을 받아들여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산업유산 정보센터 정식 개관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일본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인이 섬에서 좋은 환경에서 살았다’라는 왜곡된 내용으로 전시물을 구성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현지 언론인 <아사히신문>조차 “한반도 출신 징용공과 관련해 학대와 차별이 없었다는 섬 주민의 인터뷰가 소개돼 있어 한국이 문제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 학대와 차별가 없었다’는 일본의 역사 왜곡

그러나 한국 항의로 일본이 전시 내용을 바꿀 가능성은 없다. 정보센터장은 문제 전시 내용과 관련해 “정치적 의도는 없다, 섬 주민 70여 명을 인터뷰했지만 학대 증언은 없었다”라고 말했고, 오카다 나오키 관방부 장관도 “전시 내용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 권고를 고려해 전문가 조언을 받아 가며 적절히 판단한 것”이라며 논란을 일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등재된 시설 가운데 조선인 강제동원, 강제노동의 현장은 미쓰비시 다카시마(高島)탄광(다카시마·하시마) 외에도 일본제철 야하타(八幡)제철소, 미쓰이 미이케(三池)탄광, 미씨비시중공업 나가사키(長崎)조선소, 가마이시(釜石)광산과 제철소 등 7곳이다.

하시마(端島)는 나가사키 항구에서 약 18km 떨어져 있는데 군함처럼 생겨 일명 ‘군칸지마(軍艦島)’라고 불렸다. 섬 전체가 탄광인 하시마는 바닷속 곳곳으로 갱도를 파내어 수백 미터씩 내려간 해저 탄광이다. 1890년, 하시마 옆에 있던 다카시마(高島) 탄광을 운영하던 미쓰비시가 이곳을 인수해 확장했다. 하시마의 석탄은 야하타제철소의 제철용 원료탄으로 사용됐다.

▲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분포. 2015년 일본은 이 가운데 23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외

총면적 6.3ha의 작은 섬 하시마에 무려 53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살았다. 1916년에 건립된 콘크리트 아파트에는 일본인 광부와 직원이 살았고, 쇠창살이 쳐진 허름한 건물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수용됐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10m 높이 탑도 있었다.

하시마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가장 끔찍한 작업장이었다. 육지와 철저하게 고립된 이 섬에서 징용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함께 일본인 사용자의 잔인한 폭력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높다란 제방이 섬을 둘러싸고 있어 도주를 막았지만, 조선인들의 탈출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탈출하려다 바다에 수장되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진 하시마는 ‘지옥’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지옥 섬, 군함도

해저 탄광의 갱 속은 섭씨 40도가 넘는 고온인 데다 막장 바닥에 물이 질퍽거렸다. 규슈(九州) 지역 탄광은 막장 높이가 아주 낮아 거의 눕다시피 해 탄을 파야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이런 자세로 탄을 파야 했던 노무자들 고통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시마가 자유로운 곳이고 강제 노동이 아니었다면, 조선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할 이유가 없었다. 죽지 못해 노동에 내몰렸던 일부 생존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라고 증언했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시내 복구 작업에 투입되어 피폭되는 일까지 있었다.

1943년에서 45년 사이 조선인 500~800명 정도가 하시마 탄광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인근 나카노시마(中ノ島) 화장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도 5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기업도 하시마에 동원된 조선인이 몇 명인지, 몇 명이나 사망했는지에 대해선 침묵한다. 화장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하시마 탄광 사망자 가운데 사고사가 절반을 넘으며, 나머지 사망원인은 질식, 외상, 압사, 익사, 변사 등이다.

▲ 하시마의 탄광시설. 1943년에서 45년 사이 조선인 500~800명 정도가 이 탄광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 위키백과

병원 뒤 건물에 배치되었다. 임금의 1/3은 강제 저금됐고, 1/3은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지만, 귀국해 보니 송금이 전혀 안 돼있었다. 식사는 외국 쌀로 지은 밥과 국뿐이었다. 밥에 주먹 정도 크기의 감자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3은 겨우 세 숟가락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낮은 천장 아래에서 1일 3교대로 일했고, 하루에 탄차 10대 이상을 캐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후 징용자들끼리 돈을 모아 배를 얻어 타고 마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윤춘기(1943년 전북 김제에서 하시마로 끌려감), <백만 명의 신세타령(1999)>(민족문제연구소·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 노동>에서 재인용, 아래 같음.)

1943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하시마로 강제동원되었다. 군수가 ‘왜 이런 어린아이를 데려온 것인가’라고 호되게 야단쳤지만,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서’라며 다음 날 기차로 부산까지 끌고 갔다. 하시마가 어떤 곳인지 설명도 없었고, 단지 좋은 곳으로 간다고 속이는 등 갖은 수단으로 도망을 막으며 연행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9층 건물 지하에 배치되었다. 하라다 부대 제2중대에 소속되어 채탄 현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집단 저항을 일으킬 만한 여유도 없었고,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폭 투하 후 8월 18일경에 청소를 하러 나가사키 시내에 갔을 때, ‘인간 지옥이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
–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개정증보판, 2016) 이상,

일본 패전 후, 미쓰비시는 하시마 탄광의 설비를 복구해 석탄 생산을 계속했으나, 1955년 이후 사양길로 접어들어 1974년에 폐쇄됐다. 무인도가 된 하시마는 2009년부터 일반에 공개되면서 근대산업 유산 등재 뒤 대표적 관광지가 됐다.

일제가 자행한 강제동원은 비단 하시마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일본의 탄광, 토목공사 현장, 공장 등에서 저임금으로 일해야 했다. 침략전쟁이 확대되자 청년뿐 아니라 여성과 미성년 아동까지 강제동원되기에 이르렀다.

그 강제 노동의 중심 기업이 미쓰비시광업, 미쓰이광산,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이다. 이들 기업이 운영한 일본 각지의 탄광과 광산에 연행된 조선인은 15만 명이 넘는다. 현지에 방치돼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도 적지 않다. 이들 유품 중 저금통장(급여) 3만 8000건도 은행에 보관된 채 유족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해방 75년이 가까워지지만, 강제동원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인 현안이다.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 등 전범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2018년, 한국 대법원은 일본 기업에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이 있다고 확정판결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물론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원고의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어 일본 기업을 상대로 현금화(매각) 조처가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두 번째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어 새겨진 역사”를 부정하지 말라

아베가 자랑해 마지않는 “해외의 과학 기술과 자국의 전통기술을 융합하여 불과 50년 만에 산업화를 이룬”(메이지 산업 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2년을 맞아 발표한 한일시민단체 공동성명 ‘강제 노동 현장에 스며 있는 피해자들의 피와 땀, 눈물의 역사를 기록하라!’, 아래 같음) ‘위대한 일본’이, 지옥 섬을 비롯한 강제동원 현장에서 강요된 ‘죽음의 노동’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따라서 강제 노동 실태가 빠져 버린 산업유산 정보센터 전시 내용은 산업유산에 담긴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어 새겨진 역사”를 부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2017년, 한일시민단체는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네스코 현장 전문을 환기하면서 일본에 요구했다.

진실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을 아시아인들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기리고자 한다면 “강제 노동 현장에 스며 있는 피해자들의 피와 땀, 눈물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것이다.

▲ 일본 훗카이도 샤쿠베츠(尺別)탄광 오쿠사와갱(奧澤坑) 노동자 단체 사진.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지난 15일, 일제 포로감시원으로 강제 징용됐던 이학래(95) 선생이 일본 중의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에 사과와 함께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1년 동안 복역했던 그는 전범으로 처벌받은 148명 한국인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같은 B, C급 전범인데도 일본인에게는 보상금과 조의금을 지급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일본 법원은 이들의 사과와 배상 요구를 기각했다. 대신 이들을 구제할 법률 제정을 권고했지만, 이번엔 국회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65년 동안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온 그의 소망은 소박하다.

“죽은 동료를 생각하면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습니다. 명예를 꼭 회복해 주고 싶습니다.”

광복 75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강제동원 문제 앞에서 세계 경제 대국 일본은 날이 갈수록 작아져 간다. 강제동원과 위안부 문제 등으로 꼬인 한일 현안과 이로 말미암은 일본의 헛발질 경제 보복 탓에 막힌 양국 관계의 활로는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에서 비롯하리라는 걸 아베 정부는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2020-06-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다시 불려나온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 왜곡하는 일본

목, 2020/06/18-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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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 ‘내역사’ 시즌 5: 11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의 진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되었다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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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목, 2020/06/18-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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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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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해당 도서는 제목과 같이 정치 권력을 ‘몹시 꾸짖는’ 주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작가들은 한국사회의 질곡을 그들의 글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일제 식민지와 6·25동란, 분단 현실과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우리 시대 문학은 무엇을 보고 어디에 펜촉을 향하고 있는가 저자는 준엄하게 묻는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토, 2020/06/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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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표적인 문인 단체인 민족문학연구회,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팔봉비평문학상 폐지와 수상 거부를 촉구했습니다.

이들 3개 단체는 오늘(19일) 시상식이 열리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 북앤빌딩 앞에서 집회를 열고 “한국일보사는 친일 문인 김기진을 기념하는 팔봉비평문학상을 즉각 폐지하고, 올해 수상자인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수상을 거부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팔봉 김기진은 해방 뒤 대표적인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하며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조직한 재건국민운동중앙회장을 지내기도 했다”며 “생애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당성을 부단히 강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친일 문인 김팔봉을 기리는 문학상을 공공선과 사회정의를 추구해야 할 언론사가 제정해서 박수칠 일인가”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올해 수상자인 구모룡 평론가를 겨냥해 “한국작가회의 회원일 뿐 아니라 부산작가회의 회장도 역임했고, 지성인의 사표가 되는 대학교수”라면서 “이와 같은 신분으로 볼 때 친일 문인을 기리는 팔봉비평문학상 수상을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팔봉비평문학상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팔봉 김기진을 기리기 위해 1989년 한국일보사 주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990년부터 해마다 비평문학 분야를 대상으로 시상하고 있으며, 올해 제31회 수상자는 구모룡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가 선정됐습니다.

팔봉 김기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로,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을 역임하며 총독의 호남과 남해안 시찰을 수행했고, 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청년들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나도 가겠습니다’ ‘가라! 군기(軍旗)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 등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2020-06-19> KBS 

☞기사원문: 문인단체 “친일 문인 기리는 팔봉비평문학상 폐지해야” 

※관련기사 

☞이데일리: “친일 문인 기리는 ‘팔봉문학상’ 폐지하라”

토, 2020/06/20-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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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2017 유네스코 가이드북
[한글] [영문] [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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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9) ‘내역사’ 시즌 5: 긴급편성 최근 개관한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왜곡하다”

☞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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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5일 일본정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소개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관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세계유산 각 시설의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 전략을 마련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무시하고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의 역사를 구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증언과 논리로 전시관을 채웠다고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긴급하게 이 문제에 관한 방송을 준비했습니다. 그 동안 유네스코의 권고사항을 지속적으로 감시 관찰해온 연구소는 이 문제가 왜 중요한지 방송을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 주요내용
1.2015년 메이지 산업시설이 유네스코 산업유산으로 등재될 때 일본정부는 어떤 약속을 했나요?
2.그 뒤로 지금까지 약 5년동안 일본은 무엇을 했나?
3.일본의 경과보고와 문제가 되는 도쿄산업유산정보센터를 주도한 국민회의는 누구인가?
4.그들이 주장하는 강제동원를 부정하는 논리와 주장은?
5.도쿄 센터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은?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토, 2020/06/2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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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전문가, 화상 세미나 열고 대응방안 모색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내용 검토 및 대응방안 세미나
(서울=연합뉴스) 천경환 기자 =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가 1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이 담긴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 내용을 검토하는 화상 세미나를 열고 있다. 2020.6.19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군함도 역사 왜곡’ 논란이 제기된 일본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와 관련해 일제강점기 강제노동에 관한 한일 전문가들이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를 가졌다.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는 19일 서울 미근동 재단 대회의실에서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 내용 검토 및 대응 방안 모색’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일본 측에서는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Zoom)을 통해 참가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우선 “현재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일협정으로 (강제노역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기존 주장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으며, 일본 정부와 우익 단체는 국제사회에 강제노동과 민족차별을 부정하는 여론을 지속해서 확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일 공동으로 대응 논리를 만들고, 지속적인 국제 여론전을 펼치며, 정보센터의 전시물을 한일 공동으로 만들자고 제안하는 등 ‘역사왜곡센터’를 공동의 기억센터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시민단체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의 고바야시 히사토모(小林久公) 감사는 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에 대해 “일본 정부를 대변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조사를 실행하고 보고서를 작성해온 곳”이라고 지적하고 “‘산업을 지탱한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귀한 문명의 일을 다음 세대에게 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설립 취지와 달리 당시 노동자와 이들의 노동 실태를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 산업유산정보센터 센터장은 산업유산국민회의 가토 고코(加藤康子) 전문이사가 맡고 있다.

고바야시 감사는 또 “산업유산의 가치는 구조물뿐만 아니라 그 구조물에서 일한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이며, 그 사업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성과가 올바르게 평가되어야만 메이지의 산업혁명 유산으로서의 의의가 있다”며 “앞으로 열릴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일본 정부가 정보센터를 제대로 운영하도록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카타 미쓰노부(中田光信)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장은 “2018년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는 ‘관계자와의 대화를 계속할 것을 촉구한다’고 권고했지만, 일본 정부는 전문가나 시민단체와의 대화 없이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도 무시한 채 정보센터의 설치를 강행했다”고 비판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는 도쿄도(東京都) 신주쿠(新宿)구 소재 총무성 제2청사 별관 1층에 1천78㎡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전시장은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업유산 23개소 소개, 일본 산업발전의 역사, 강제노역 피해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자료를 전시하는 자료실로 구성돼 있다. 당초 3월 31일 개관했으나 코로나19 확산 영향으로 지난 15일 일반에 공개됐다.

[email protected]

<2020-06-19> 연합뉴스 

☞기사원문: “역사왜곡하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공동 기억센터로 바꿔야”

토, 2020/06/20-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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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6/23-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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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를 이유로 지난 1월 이후 열리지 않고 있다던 문화체육관광부 영정동상심의위원회(표준영정 지정과 지정해제를 심의하는 기구). 하지만 이달 초 영정심의위 회의가 열린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영정심의위에는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해제 안건이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죠.

지난해 국정감사 때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해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던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실과 함께 영정 해제 논의가 어디까지 이뤄졌는지 알아봤습니다. 이달 초 열린 영정심의위 회의에서 이순신 표준영정 관련 논의가 있었고, 복식 고증 오류 등 명확한 문제가 있다는 데 심의위원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던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어 현충소관리소가 문체부에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해제를 신청한 공문을 확보했고, 문체부가 광복절 전 현충사에 봉안된 이순신 영정을 철거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웠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현충사관리소가 문체부에 제출한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해제 신청’ 공문

■ 10년도 더 된 논란

이순신 표준영정 논란의 시작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한국화가 장우성 화백 이름이 등재됩니다. 대한민국 표준영정 1호인 이순신 표준영정은 바로 장우성 화백 작품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그린 사람이 친일 행적이 드러난 화가라는 사실에 지정 해제 촉구가 잇따랐습니다.

이듬해 2010년 문화재청은 문체부 영정심의위에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 해제를 신청하지만, 반려됐습니다. 작가의 친일 논란은 지정 해제 사유로 보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당시 영정 심의규정에는 ‘멸실, 도난, 훼손 등의 경우’에만 영정을 교체할 수 있다고 돼 있었습니다.

이대로 흐지부지되는 듯했던 이순신 표준영정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오른 건 2017년. KBS는 보도를 통해 작가 친일 논란과 함께, 이순신 표준영정 속 복식 고증 오류를 처음으로 제기합니다.

[연관기사] 충무공 탄신 472주년…이상한 현충사

문화재청은 전문가 자문 회의를 통해 복식 고증 오류 검증에 들어갔고, 상당 부분이 엉터리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리고 문체부 영정심의위에 2차 해제 신청을 하지만, 이번에도 반려. 당시 반려 사유는 이렇습니다.

“충무공은 국민적 영웅으로서 표준영정 지정 해제에 따른 혼란과 갈등이 야기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은 국가사적지인 현충사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현상변경의 필요성에 대해 문화재위원회 사전심의 검토가 선행돼야 함.”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엉뚱하게 문화재위원회로 떠넘긴 겁니다.

[연관기사] [단독] 문체부, 이순신 영정 교체 신청 계속 반려…왜?

■ 문제 인정한다면서 왜 안 됐나?

그런데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을 해제하면 어떤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 생긴다는 걸까?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친일 청산’이라는, 우리 사회 뇌관을 건드리는 데 대한 부담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방 실장은 “친일 행위가 명백하더라도 이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는 건 한마디로 거론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독립운동가나 위인들을 친일파가 그렸다는 점이 논란의 핵심인데, 친일 청산 과정에서의 진통을 이유로 적당히 덮고 넘어가자는 건 비겁한 변명이라는 겁니다.

2017년 문체부 영정심의위가 사회적 혼란 야기를 이유로 문화재청의 해제 신청을 반려한 이후, 정작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순신 표준영정 논란은 다시 잊혀 갔습니다.

그러던 중 이번엔 국회가 나섰습니다. 지난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김영주 의원은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며, 표준영정 지정해제와 영정심의위원회 규정 등의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작가의 친일행적이 영정 심의규정에 없어 심사하지 못하는 거라면 심의규정을 개정하란 취지였습니다.

심의위원 구성도 지적했습니다. 당시 영정 심의위원 11명 가운데 역사학자는 단 2명뿐, 나머지 9명은 모두 미술계 쪽 인사였습니다. 일각에선 영정 심의 과정에 미술계의 영향력이 과도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나왔는데요. 영정 제작 화가의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이후에도 해당 화가가 미술계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보니, 표준영정 해제가 되지 않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지적에 따라 문체부는 지난해 12월 영정 심의규정을 개정하고, 역사 분야 전문가 5명을 심의위원으로 확대 위촉하는 등의 후속 조치를 취했습니다. 특히 심의규정에 ‘사회통념’을 추가해 화가의 친일행적을 심사대상으로 삼을 명확한 근거를 마련한 겁니다. 동시에 문화재청은 복식 오류에 대한 2차 심층 검증을 벌였고, 2017년 1차 검증 결과와 같은 오류를 재확인했습니다.

문화재청의 ‘이순신 영정 복식 오류’ 2차 검증 결과

10여 년을 끌어온 해묵은 논란이 이제야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입니다. 남은 건 영정심의위원회 심의와 문화재위원회 현상 변경 절차입니다. 문체부가 오는 7월 중 영정심의위를 열어 이순신 표준영정을 지정 해제하고, 광복절 전 현충사에 봉안된 영정을 철거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운 만큼 이제 영정 교체는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문체부는 충무공 영정 지정해제 이후 내년 1월 표준영정 재제작 연구용역을 거쳐 2023년까지 새로운 충무공 표준영정 제작과 지정 절차를 마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은 “늦었지만 이제라도 친일 작가가 그린 충무공의 표준영정이 지정해제 절차를 밟게 된 것은 다행”이라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 문제를 10여 년 전부터 지적했던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은 이순신 표준영정 철거는 표준영정 문제 공론화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방 실장은 “이순신 표준영정을 시작으로 친일 화가들이 그린 다른 영정에 대한 지정해제 논의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 표준영정 제도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잇따를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현재 정부표준영정을 그린 화가들 가운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은 김은호, 김기창, 장우성 화백 등 3명입니다. 정부가 지정한 표준영정 98점 가운데 이들이 그린 작품은 모두 14점. 청와대 국민청원에 지정해제 촉구 청원이 올라왔던 윤봉길 의사 표준영정을 비롯해 정몽주, 강감찬, 김유신, 정약용 표준영정 등이 포함됩니다.

<2020-06-25> KBS 

☞기사원문: [취재후] 친일 작가의 ‘이순신 표준영정’ 철거 결정, 왜 10년이나 걸렸나? 

※관련기사 

☞뉴시스: ‘친일화가 논란’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해제 내달 논의 

☞국제뉴스: 친일화가가 그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지정해제

금, 2020/06/26-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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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주년 기획]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2006년 진실화해위, 전국 168곳 집단매장추정
실제 발굴은 13곳 불과…유해는 1617구 수습
2014∼2020 민간단체가 8곳 380구 추가발굴
대부분 사유지·도로·택지 등으로 접근에 난항
현재 정부 대신 지자체 나서 유해 발굴 지원
올해말 재가동 예정인 2기 과거사위에 기대
정권따라 활동 제약…발굴상설기구 설립해야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보도연맹 희생자 발굴을 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지는 전국 곳곳에 산재돼 있다. 학살 추정지만 170곳에 이른다.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2010년까지 유해발굴을 벌인 민간인 학살 현장은 전국 13곳밖에 안 된다. 진실화해위 해산 이후 유해발굴은 지방정부의 지원 아래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어렵게 이어오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유해발굴 현황과 과제를 짚어봤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숨진 가족의 유골만이라도 수습할 수 있기를 70년 동안 기다리고 있다.

‘골로 간다.’

이 말의 유래는 민간인 학살과 관련이 있다. 학살터가 대부분 골(계곡)에 위치해 있던 까닭에 골로 간다는 말은 죽으러 간다는 뜻이 됐다. 민간단체인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조사단)은 그 죽음의 시원을 찾아 ‘골로 가는’ 이들이다.

지난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는 유해발굴이 한창이었다. 지난달 26일부터 유해발굴이 시작된 여우굴은 한국전쟁 초기 주민들이 임시피난처로 판 굴이었다. 지금은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단원 10여명은 30℃가 넘는 더위 속에서 차양막과 얼음물에 의지한 채 길이 50m, 너비 5~10m인 발굴터 바닥을 호미로 1㎝씩 조심스레 긁어내고 있었다. 여우굴 희생자들은 가매장이 됐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50㎝ 아래까지 확인해야 했다. 단원들은 가끔 특이한 물체가 나오면 물로 세척해 유해 여부를 가렸다.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판명되면 다시 호미를 들었다.

발굴은 원래 땅인 생토층이 나올 때까지 중장비를 동원해 표토층을 걷어낸 뒤 10여개 구획으로 나눠 진행된다. 이날 위령제를 끝으로 종료된 이번 조사에서 모두 8구의 유해(허벅지뼈 기준)가 발견됐다.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 육군방첩대(CIC), 경찰 등이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예비검속자 1200~1500명을 학살한 이른바 청원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중 일부로 추정됐다. 함께 출토된 엠(M)1 소총 탄피 1점, 카빈 소총 탄피 1점은 가해 무기와 주체를, 여름옷용 흰색 단추 1점은 매장 시기를 가늠하게 했다. 조사단은 정밀감식을 거쳐 유해와 유품 등을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장할 계획이다.

9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에서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보도연맹 희생자를 찾기 위해 호미로 땅바닥을 긁어내고 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여우굴 희생자들은 하마터면 영원히 잊혔을 수도 있었다. 여우굴은 2007~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유해 336구를 발굴한 분터골에서 500여m 떨어져 있다. 유족들은 당시 진실화해위에 “여우굴에도 20여명이 묻혀 있다”고 증언했지만 진실화해위 활동이 2010년 종료되며 조사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이후 고은리 일대에 전원주택 건설 열풍이 불며 경사진 땅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여우굴은 조사단이 올해 3월 진행한 시굴조사에서 유골 64점을 발견했지만 정식 조사를 준비하는 사이 토지 소유주가 브이(V)자 형태 골짜기를 높이 5m 이상 흙으로 메워 주택공사를 시작했다. 문화재와 달리 유해는 공사 중단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조사단은 ‘공사기간에 지장을 주지 않고 조사 종료 뒤 원상복구’를 조건으로 토지 소유주의 동의를 얻은 끝에 발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발굴 조사를 총괄 진행하는 안경호(54)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한국전쟁 70년이 지나며 대부분 지형이 바뀌고 사유지이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다. 여우굴은 다행히 주택공사를 시작하기 전 조사를 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는 학살지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경작지로 쓰이거나 택지가 들어선 곳이 많다. 어쩌면 우리 발밑에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2015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출토한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조사단 제공

2006년 진실화해위가 접수한 한국전쟁 전후(1948~1953)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신청 건수는 집단희생 사건 7922건, 적대세력 관련 사건 1687건 등 9609건에 이른다. 진실화해위는 신청기간이 1년으로 한정됐고 피해자와 유족들이 신청을 꺼려 포기한 경우도 있어 실제 희생 건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봤다. 학계나 민간단체들은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보도연맹, 부역 혐의 희생자 등을 모두 더하면 최소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목격자·유족 증언과 경찰기록 등 문헌, 지표조사 등을 통해 모두 168곳을 집단희생사건 관련 유해매장 추정 장소로 파악했다. △경남 41곳 △전남 35곳 △경북 28곳 △수도권 25곳 △충북 22곳 △충남 9곳 △전북 4곳 △강원 2곳 △제주 2곳이다. 대부분 산이나 골짜기, 바닷가지만 광산, 굴, 공동묘지 등 외진 장소와 심지어 양곡창고, 우물도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이 중 59곳에서 유해발굴이 가능하다고 파악하고 시급성, 현장 특정 여부 등을 고려해 39곳을 우선 발굴 대상지로 선정해, 2009년까지 13곳(중복 포함)을 발굴했다.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수습 유해 370구), 충남 공주시 상왕동(317구), 충북 청원 분터골(336구), 경남 산청 원리와 외공리(257구), 대전 동구 낭월동(34구), 전남 구례 봉성산(14구), 진도 갈매기섬(19구), 전남 순천 매곡동(유해 미발견) 등에서 총 1617구, 유품 5600여점을 수습했다.

1950년 7월 촬영된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학살 현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진실화해위는 2010년 4월 활동기간이 종료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에서는 활동기간을 2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지만, 보수정권의 압박으로 두달 연장에 그쳤다. 진실화해위는 훗날을 기약하며 전국 10개 시·도, 32개 시·군·구 64곳에 한국전쟁 희생자 매장 추정지임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또 조사보고서를 통해 유해발굴을 이어갈 수 있는 정부기구 설립 등을 권고했으나, 추가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유해발굴 재개 가능성이 작아지자 민간단체가 나섰다. 2014년 2월18일 한국전쟁유족회의 요청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등 단체들이 모여 조사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진실화해위 조사를 주도했던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맡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팀장을 지낸 안경호 사무국장이 조사단을 이끌었다.

민간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이 이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여우굴 터에서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발굴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조사단 제공

조사단은 같은 달 24일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718명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에 들어가 유해 39구를 수습했다. 이듬해 2월에는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추정 희생자 1800~7000명)에서 유해 20구를, 2016년 2월에는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36명)에서 유해 21구를 찾았다. 2017년 2월에는 진주 용산고개 1차 발굴지에서 100m 떨어진 곳을 조사해 유해 38구를 수습했고 2018년 2월에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150~300명)에서 208구를 찾았다. 지난해 3월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150명)에서는 40구를, 같은 해 5~9월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수십명)에서는 6구를 수습하는 등 조사단은 이달 청주 여우굴까지 8차례에 걸친 조사를 진행해 희생자 380명의 넋을 달랬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경북 경산시 폐코발트광산에서 수습한 유해에 조화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3500여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한달 1억원가량이 드는 발굴조사를 8차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기초자치단체들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 조사단이 활동에 들어가자 2013년부터 최근까지 제주를 제외한 16개 광역시·도와 60개 기초자치단체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조례를 제정하며 유골발굴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안경호 사무국장은 “2017년 4차까지는 후원금으로 발굴비용을 충당했지만 2018년부터는 아산시와 충북도 등에서 지방보조금사업으로 비용을 지원받았다. 중앙정부가 해야 될 일을 안 하니까 지방정부가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2014년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에서 발굴한 희생자 유해. 조사단 제공

유족들과 전문가들은 지난달 20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올해 말 재가동 예정인 2기 진실화해위에 기대를 걸고 있다. 2기는 1기보다 활동기간(최대 4년)이 짧고 위원 규모(9명)도 적지만 정부 유해발굴 전문기구 설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박선주 교수는 “발굴된 유해와 유족의 유전자 일치 검사를 한번 하는 데 100만원 상당이 든다. 전체 규모로 봤을 때 한국전쟁 유해발굴은 자치단체나 한시 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부 상설기구를 만들고 유해 전문가를 양성해 연구자료를 꾸준히 축적해야 한다. 분열된 한국 사회를 통합하려면 지난 70년간 빨갱이로 몰려 땅속에 잠자고 있는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야 한다”고 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민간인 매장 추정지를 보존하기 위해 설치한 안내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갈무리

<2020-06-25> 한겨레 

☞기사원문: 우리는 무덤 위에 살고 있다…유해로도 돌아오지 못한 99만8000명

금, 2020/06/26-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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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영상] [조정래 2부] [조정래 1부]

[책소개]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해당 도서는 제목과 같이 정치 권력을 ‘몹시 꾸짖는’ 주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작가들은 한국사회의 질곡을 그들의 글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일제 식민지와 6·25동란, 분단 현실과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우리 시대 문학은 무엇을 보고 어디에 펜촉을 향하고 있는가 저자는 준엄하게 묻는다.

5편_조정래 <민족사 1백여 년의 족보를 작성한 작가>
작가 조정래를 직접 스튜디오 초대해 그의 삶과 문학 그리고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부는 성장기 시절 그의 문학적 원천이 되었던 삶을 다뤘으며, 2부는 태백산백부터 최근 천년의 질문까지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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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빵-바로듣기] [다운로드] 

☞ (6.25)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Ⅱ

☞ (6.23) ‘내역사’ 시즌 5: 12화: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옹진의 민간인 학살과 동키부대”

☞ (6.19) ‘내역사’ 시즌 5: 긴급편성 최근 개관한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왜곡하다”

☞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Ⅰ

☞ (6.16) ‘내역사’ 시즌 5: 11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의 진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되었다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토, 2020/06/27-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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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가 제정한 후광학술상 제13대 수상자로 고(故) 이이화 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선정됐다고 대학측이 7일 밝혔다. (사진=전남대 제공) 2020.06.07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임종명 기자 = ‘동학농민혁명은 3·1혁명, 4·19혁명, 반독재·반군부 민주항쟁, 촛불혁명의 근원이다. 오늘날 시대정신에 맞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분단 구조 등 민족 모순을 청산하는 동력이 되고, 진정한 평등과 자주를 실현하는 과제를 안고 인권을 보장하는 학습장 또는 토론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 조국의 통일을 위해 그 정신을 올곧게 계승해야 할 것이다.’

‘분단시대의 인문주의자’, ‘사학계의 녹두장군’으로 불리는 고(故) 이이화 선생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내린 정의다.

이이화 선생은 생전 50여년 간, 평생을 걸쳐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매진했다. 이 연구의 결실이 담긴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시리즈가 오는 6일 출간된다. 이이화 선생의 유작인 셈이다.

저자는 동학농민혁명을 한국 근대사를 밝히는 상징으로 여겼다. 19세기 민란의 시대라 부를 만큼 끊임없이 이어진 민중 봉기는 인간 평등을 추구하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초들의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3·1혁명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촛불혁명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책은 동학농민혁명의 민족사적 의의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뒀다.

단순히 사료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동학농민군이 치열하게 싸웠던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그 후손들과 현지인들의 증언도 수집해 고증한다. 조선 관료들의 기록과 일본의 기록물까지 샅샅이 훑었다.

여기에 더해진 200여 컷의 자료 사진과 현장 사진이 동학농민혁명의 이해를 돕는다.

[서울=뉴시스]고(故) 이이화 선생의 유작 ‘동학농민혁명사’. (사진 = 교유서가 제공) [email protected]

‘역사는 기억해야 살아있는 유산이 된다.’ –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서문에서

책은 총 3권이다. 민란이 일어난 배경, 동학의 전파, 농민과의 결합, 일본이 농민군 섬멸작전에 나선 과정, 전봉준 등 혁명 지도자들이 처형 과정, 그들의 죽음과 항일의병이나 3·1혁명 가담과정 등이 고루 담겼다. 부록으로 동학농민군이 직접 작성해 발표하고 전달한 문서도 포함했다.

이화 선생은 1937년 한학자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부터 한문 공부를 했고 부산, 여수, 광주 등지에서 학교를 다녔다. 문학에 관심을 갖고 서울로 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한국학 및 한국사 탐구에 열중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한국 고전을 번역, 편찬했고 역사문제연구소장, 계간 ‘역사비평’ 편집인, 서원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타계한 뒤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허균의 생각 ▲위대한 봄을 만났다 ▲이이화의 한 권으로 읽는 한국사 ▲한국의 파벌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국사 이야기 ▲역사 속의 한국불교 ▲인물로 읽는 한국사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이 있다.

교유서가, 1권/264쪽·1만5000원, 2권/312쪽·1만6000원, 3권/292쪽·1만6000원.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020-07-01> 뉴시스

☞기사원문: ‘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출간

목, 2020/07/0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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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0) ‘내역사’ 시즌 5: 13화: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대표적인 7곡을 소개합니다”

☞ (6.25)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2부

☞ (6.23) ‘내역사’ 시즌 5: 12화: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옹진의 민간인 학살과 동키부대”

☞ (6.19) ‘내역사’ 시즌 5: 긴급편성 최근 개관한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왜곡하다”

☞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1부

☞ (6.16) ‘내역사’ 시즌 5: 11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의 진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되었다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목, 2020/07/0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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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노예상인 동상들… 한국은 어떤가

당신은 인종주의자입니까?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피부색이나 외모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은 거의 격언이 되었고 이를 따르는 다양한 캠페인들이 우리 저변에 축적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언론은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엄히 비판하고 있으며, 정치인들도 틈만 나면 차별의 철폐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도 인종차별 문제는 여전히 우리 곁에 상존한다. 지난 5월 25일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과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차별 반대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 추세에 있는 현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일까? 가해자는 ‘백인’, 피해자는 ‘흑인’이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현상들일까?

▲ 지난 6월 30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강좌에서 발언하고 있는 염운옥 고려대 교수 ⓒ 식민지역사박물관

고려대 염운옥 교수는 인종주의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핵심 논리”라고 지적한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아가 그는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의 역사, 16세기 이래 40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대서양 노예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역사 등이 총체적으로 분석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총체적인 역사들은 대체 어떤 도식으로 2020년의 인종차별 문제와 연결되는 것일까? 지난 6월 30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염 교수의 강연 “제국주의의 인종차별, 낙인과 폭력의 역사”에서는 인종주의와 차별에 대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

문제는 시선

그날 강연이 진행된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여타 박물관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조금 특별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바로 ‘니시키에(錦絵)’라 불리는 에도 시대의 판화다. 니시키에는 정한론이 대두하기 시작한 에도막부 말기부터 잇따라 제작돼 일본의 침략과 전쟁을 선전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되었다. 특히 일본군에 대한 미화와 함께 상대방(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경멸, 악의적 시선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 자료다.

▲ 니시키에 <조선전보실기>(1894). 청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을 묘사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 위 그림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확대해 나란히 붙인 그림 ⓒ 식민지역사박물관

위 그림에서 일본군은 큰 덩치와 분명한 동작, 단정하고 세련된 군복과 장비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 상대방(조선인)은 어떠한가? 아마 이 그림을 본 수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작고 왜소하며 봉두난발을 한, 전근대적인 민족으로 ‘시각화’했을 것이다.

인종주의의 시작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염 교수는 외모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상상하고 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인종주의가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행위를 하고 이런 판단이 아니라, 눈으로 딱 봤을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속성으로 그 사람을 분류하는 거죠. 굉장히 시각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거든요. 이런 시각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는 미적인 감각,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추한가 라는 가치와 연결되기 쉬워요.”

*염운옥 교수 강연 <제국주의의 인종차별, 낙인과 폭력의 역사>(‘20.6.30), 식민지역사박물관

백인우월주의 역시 이렇게 ‘시각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가 극대화된 것이다. 흰색에 순수함, 순혈, 아름다움의 의미를 담으면서 백인 신체에 대한 미적 가치를 상승시켜 온 것. 여기서 염 교수는 ‘흰색(白色)’에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 18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미학을 주목했다.

빙켈만은 서구 문명의 고향이자 원류인 고대 그리스를 동경해 왔는데, 특히 그들이 남겨놓은 ‘하얀 조각상’에 미적 가치를 부여했다. 즉, 흰색으로 갈수록 형태가 뚜렷해지고 아름다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빙켈만의 미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흰색을 중심으로 하는 미적 기준을 형성한다.

반면 화려한 색채를 가진 문명은 부족하고 낮은 수준으로 위치 지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서구문화가 가진 ‘색채공포증(chromophobia)’과 연결된다고 염 교수는 분석한다.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으로 인종을 나눈 것 또한 서구 문명이다. 18세기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카를 폰 린네는 생물학적 인간(호모 사피엔스) 아래 피부색이 다른 4개의 인종을 하위 분류로서 이름 붙였다. ‘유럽인 백색(Europaeus albescens), 아메리카인 홍색(Americanus rubescens), 아시아인 갈색(Asiaticus fuscus), 아프리카인 흑색(Africanus niger)’이라는 분류 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종은 그 실체가 없다. 앞서 말한 빙켈만이나 린네의 분류는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 그 근거를 상실했다. 염 교수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는 생물학적 차이가 인종과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에 비해 크다는 과학적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 피부색에 따른 인종 분류 따위로는 인간이라는 종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너지는 동상들

이처럼 인종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확증편향’들을 이해했다면 다음은 인종주의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비극들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유럽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상 철거’ 운동과도 밀접히 연결되는 부분이다. 최근에는 서구에서 일어나는 ‘역사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 영국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의 17세기 노예 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 동상 철거를 보도하는 BBC 뉴스 갈무리 ⓒ 오마이뉴스

한 예로 지난 6월 7일, 영국 브리스틀 시에서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진 ‘에드워드 콜스톤’의 동상을 들 수 있다. 에드워드 콜스톤은 17세기, 8만 명에 달하는 흑인 남녀와 아동들을 ‘노예’로 끌어다 팔았던 노예 상인으로, 자메이카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노예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1895년 세워진 콜스턴의 동상은 무려 125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와 브리스틀 시가의 밑바닥을 나뒹굴었고 밧줄에 꽁꽁 묶여 에이본 강 밑바닥에 수장됐다.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수백 개가 넘는 동상에 대한 철거 움직임, 요구가 있다고 한다. 이에 혹자는 운동과 시위의 과격성에 우려를 표하면서 법의 잣대로 이를 비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동상의 주인공들이 노예무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했고 활발한 자선사업을 벌인 경우도 있다며, ‘공(功)’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견 수용할 부분도 있는 우려일 것이다. 하지만 염 교수는 그 같은 판단에 앞서 동상 철거, 파괴의 본질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당부한다.

앞서 언급한 에드워드 콜스톤도 그러했지만 철거의 대상이 되는 동상의 주인공들은 영국,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미국에서 노예제를 이용하고 지지,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또 동상 철거 요구가 나오는 도시들은 상당수가 과거 노예무역으로 번성했던 도시들이다. 따라서 그 도시의 역사는 노예들의 삶과 역경, 수난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 도시에 정착한 노예들의 후손들에게는 노예 제도와 노예무역을 비판할 수 있는 타당한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염 교수는 동상의 주인공들이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하지 않았느냐’는 논리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단적으로 “노예무역과 노예 농장의 역사가 없었다면 동상이 그곳에 세워질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도시의 엘리트, 유지로서 올라서고 품위를 가질 수 있는 기반에 있는 노예무역의 존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노예무역은 얼마만큼의 폐해를 역사에 새겼을까? 염운옥 교수는 16~19세기 약 400년에 걸쳐 이루어진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이 1200만 명의 피해자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강제 이주이기도하다.

그 시기 노예선이 대륙과 대륙의 사이를 오간 건수는 약 3만 6000건이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부족과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라는 터전 자체를 떠나야만 했다. 지금도 노예제로 피해를 본 국가들의 배상 요구가 이어지고 있지만 노예제는 그 어떤 국가에서도 “한 번도 반성해본 적 없고 청산된 적도 없고 배상해본 적도 없”는 역사다. 여기에 바로 ‘역사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 존재한다.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도 물론 규명해야 하고 반성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지만, 이 대서양 노예무역은 한 번도 반성해본 적도 없고 청산된 적도 없고 배상해 본 적도 없어요.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문제제기들을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런 이야기들이 오늘날의 BLM 운동과 동상에 대한 훼손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배상의 형태로 갈 것인지 아닌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왜 동상이 훼손되는가? 왜 노예 소유주의 동상을 훼손하는가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염 교수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흑인이라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노예가 됐기 때문에 흑인의 검은 피부가 열등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백인이 노예가 됐다면 백색 피부가 열등의 표지가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흑인이 대서양 노예제의 피해자가 되었다.”

우리 안의 인종주의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은 “인종은 없다. 인종주의가 있을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짧은 일갈에는 우리가 가진 인종주의의 오류가 명확히 지적되고 있다. 인종이란 그 실체가 없으며, 사람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인종주의는 ‘차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다.

한국인으로 표상되는 우리는 어떤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을까? 사실 한국도 심각한 인종 차별이 존재하는 나라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에 인종 차별이 존재한다는 말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다문화가정이 확산되고 이주노동자들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흔히 조선족이라고 표현되는 재중동포들도 우리 주위에 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130여 년 전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경멸적 시선을 투사하여 그들을 바라보고 있진 않은가. 스스로가 인종주의자인지 아닌지를 자기 검열하고 판단하는 것은 어쩌면 제법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 1911년 1월 1일, 일출신문이 새해를 맞이하여 발행한 놀이판 <일출신문조선쌍육>. 이 놀이판은 조선인을 게으르고 나태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오른쪽 그림은 술에서 막 깨어난 조선인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인을 변발을 한 중국 복색으로 등장시켜 중국과 조선의 민족성을 한꺼번에 비하하려는 저의가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물론 스스로를 자책하고 검열하라는 말은 아니다. 염운옥 교수는 “내가 타인을 차별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면서, 반대로 “내가 차별받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의식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듣는 귀를 열고 말하는 입을 갖는 것”으로 귀결된다.

*염운옥 고려대 교수는 인종주의 역사, 영국 이민사, 서양 여성사 등에 대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남겨온 전문가다. 대표 저서로는『낙인찍힌 몸: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된 몸의 역사』 (돌베개, 2019.7),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유전자 정치와 영국의 우생학-』 (책세상, 2009.12) 등이 있으며 영국 노예제와 식민지 폭력 피해 배상 등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현) 여성 사학회 학술이사 직위도 겸하고 있다.

*해당 염운옥 교수의 강연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온라인 강연신청을 통해 들어볼 수 있다.

<2020-07-0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아니라겠지만, 당신도 인종차별주의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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