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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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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admin | 월, 2021/04/12- 03:16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①

봄기운이 벼락처럼 내달려 북한산 일대를 에워싸더니 만경대에서 멈칫하며 숨을 고른다. 이도 잠시 기운을 되찾은 봄장군은 사방에 꽃사태를 일으키며 수유리 벌판을 향해 진군했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은 날 김주는 우이동 솔밭공원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 심산 김창숙(아래 심산)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한번 다녀오면 만보나 되는 거리를 일주일에 두 번씩 거르지 않는다.

심산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다. 그는 3·1 운동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민족대표로 모두 참여했건만 유림이 빠진 것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리고 기개를 잃지 않고 있는 선비들을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유림(儒林)의 독립청원서를 만든다. 이를 지니고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번역한 후 강화회의에는 물론 중국 내 각국 대사관에 발송하고 해외동포들에게도 보냈다.

그 후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심산은 1927년 치질 치료차 입원했던 병원에서 밀정의 신고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나가사키를 거쳐 대구경찰서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랜 징역 생활을 겪으며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 심산의 손녀딸, 김주. ⓒ 민병래

1941년생인 김주는 심산의 무릎 밑에서 컸다. 1934년 일제는 심산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줬다. 고향인 경북 성주로 돌아왔지만 감시망은 여전히 촘촘했고 그런 심산에게 손녀딸은 말벗이고 위로였다.

곰방대를 가져오고 고물대는 손가락으로 할아버지의 뼈만 남은 다리를 주무르며 김주는 “아파? 아파?” 하고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심산은 그런 김주를 품에 끌어안고 지긋한 수염으로 볼을 비비곤 했다. 김주가 중학교 때는 성균관대 담벼락에 늘어섰던 순댓국 집에서 막걸리를 함께 홀짝이던 술 친구이기도 했다.

김주는 4·19 민주묘지를 지나 백련사 표지를 보고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심산 묘지까지는 300여 미터 남짓,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다. 김주도 이제 팔순이 넘은 몸, 숨이 가빠진다. 이 길을 넘어설 때마다 두 다리를 못 쓰면서도 항일투쟁과 민주화운동에 한결같았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김구와 평생 동지였던 심산

▲ 심산의 초상 꼿꼿한 지사의 기개가 느껴진다. ⓒ 김주제공

1953년 휴전 후,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치가 더욱 심해질 때 이승만을 꾸짖으며 대항할 수 있는 인물로 심산만한 사람도 없었다. 1960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열린 신채호 24주년 추도식에서 심산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독단으로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해서 탄핵재판에 회부되었고 매국행위를 했다고 제명되었던 인물이요”라고 연설해 자유당 관계자들과 관료들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이승만 하야 촉구 성명을 세 번이나 냈던 심산이고 그의 손주 김위는 성명서 원본을 찾으려는 경찰에게 서대문로터리에서 몸 뒤짐을 당해 벌거숭이 처지가 되기도 했다. 심산은 누구보다 김구와 가까웠고 평생의 동지였다. 심산이 나석주 의사를 파견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하도록 의거를 일으켰고, 김구는 이봉창 의사를 도쿄에 보내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도모했다. 해방 후에 환국한 김구를 가장 뜨겁게 맞이했던 사람도 심산이다.

김주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녀가 곰보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김구와 심산은 각자 손주들을 데리고 종로의 어떤 극장에서 만났다. 그날 남인수의 노래공연이 있었다. 김주는 김구의 손녀딸과 객석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곰보할아버지와 심산은 무언가 귀엣말을 끝없이 나누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녀딸을 데리고 극장나들이를 하는 모양새로 비밀회담을 한 것이다.

백범이 총에 맞은 날, 사람들이 허겁지겁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심산은 비명을 지르더니 청년들 등에 업혀 어디론가 가셨고 다음 날 새벽 돌아오셨다.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백범’을 불렀고 “그놈 짓이야, 그놈 짓이야”를 끝없이 외치셨다. 심산이 밥숟갈을 다시 든 게 어린 김주가 헤아려봐도 열흘이 넘은 때였다.

▲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서 절 드리는 김주 선생은 거르지 않고 일주일 두 번 찾아뵌다. ⓒ 민병래

김주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묘소에 다다르니 4월의 아침볕은 정갈하게 내려왔다. 잔디는 파릇하게 올라왔고 간밤에 내린 비로 흙더미는 촉촉했다. 김주는 깊게 절을 올렸다. 무릎에선 오래 전부터 뚝뚝 소리가 났다.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교육을 받았다.

엄마 손응교는 1933년 열일곱 나이에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례를 올렸다. 시집왔을 때 남편은 진주고보에서 동맹휴학을 주도, 5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고 시아버지 심산은 대전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면회를 가서 첫인사를 올렸는데 간수에게 업혀나온 심산은 “구국운동으로 집안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집안은 네게 달렸으니 원대한 희망을 가져라”라고 말을 했다.

새댁은 면회실에서 울고 형무소 담장 밖에서도 울었다. 엄마는 시집오자마자 졸지에 종부 신세까지 되었다. 시아주버니인 김환기, 심산의 첫째 아들이 집 마당에서 일본경찰에게 매타작을 당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그 부인도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심산이 출옥해서는 대소변을 받아냈고 1962년 심산이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모시며 아침저녁으로 절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니 김주는 엄마 손응교와 자신이 심산의 묘소를 돌보고 절을 올리는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멀리 진달래 능선은 백련사 계곡쪽으로 분홍빛 꽃비를 내려 뿜었고 그 향기는 심산의 묘소에서 해적이면서 돌아나갔다. 김주는 절을 마치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이 켠 저 켠에 뿌려드리고 잠시 햇빛바라기를 했다.

눈을 감으면 되살아오는 기억은 끝이 없다. 딸이어서일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끝도 없이 얘기하지만, 엄마 손응교가 없는 심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들 있을까?

심산과 한 몸이었던 엄마 손응교

▲ 김주의 어머니이자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그는 며느리이자 심산의 평생 동지였다. ⓒ 경북경북여성쟁책개발원 제공

김주의 아버지 김찬기가 투옥과 감시 속에서 중국 망명을 결심한 게 김주가 세 살 때인 1943년이다. 그때 심산은 여전히 일본 경찰의 감시에 꼼짝을 못했다. 엄마는 왜관역에서 몰래 떠나는 남편을 어린 김주를 안은 채 눈물로 전송했다.

남편은 “나중에 빌어먹을 형편이 돼도 애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이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 되면 2년 반이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하고 떠나갔다. 뒤늦게 김찬기가 사라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남편이 간 곳을 대라”고 수시로 손응교를 잡아다가 매타작을 하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너처럼 간이 배 밖에 나온 여자는 처음 봤다”는 일본 경찰의 악다구니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 심산은 배를 쫄쫄 굶고 있었다.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밥부터 지어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조국 독립과 심산 선생을 위해 종처럼 살았고 내 인생은 없었다고. 심산 선생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심산 선생이 있다고.

한때는 대구에서 ‘요미우리’라는 위장서점까지 했던 엄마, 심산의 쪽지를 들고 중국 봉천까지 다녀왔고 남편 김찬기의 체포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오자 연변의 도문까지 다녀왔던 엄마, 심산의 손발을 넘어 심산과 한 몸이었건만 세상은 잘 모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주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아침 해는 백련사 계곡을 넘어서 북한산성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김주는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모레 또 올게요”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김주는 늘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읆조린다. 지금도 그날은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할아버지랑 성균관 동재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서너 명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더니 할아버지를 끌어내 명륜 1가에 있던 집에 내동댕이쳤다. 몇 년 몇 일인지는 아득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네 이놈들’ 소리치며 발버둥쳤고 김주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심산은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장악한 유림(儒林)을 혁신하고 성균관을 민족대학으로 재건코자했다. 이를 위해 1945년 11월 30일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 유림대회를 열었다. 유도회총본부가 결성되었고 심산은 위원장이 되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모아 성균관재단을 만들었고 성균관대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물론 심산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몰려 있던 자유당은 유도회총본부를 외곽조직으로 삼으려 했다. 국민을 백성이라 부르고 자기 말을 유시라 하며 봉건군주 행세를 하던 이승만은 유도회를 집어삼켜 그 충효 이데올로기와 전국조직망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 문제는 심산이라는 걸림돌이었다.

자유당은 황도유학파와 정부조직을 앞세웠다. 황도유학파는 유교의 충효사상을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이데올로기로 둔갑시켰던 세력이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자 화려하게 부활해 자유당의 뒷배를 업고 심산과 정통파를 공격하며 성균관재단을 장악했다. 결국 심산은 1956년 2월 2일자로 총장직에서 쫒겨났다.

심산이 물러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거침이 없었다. 내무부장관은 1956년 11월 15일을 기해 전국 각지의 유도회 지부를 개편하라고 경찰에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심산을 따르던 정통파는 무너져버렸고 심산은 어느 날 성균관에서 들려나가고 말았다. 그 아픈 현장에 있었던 김주는 그때부터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관방을 떠돌았던 불쌍한 할아버지 심산

심산은 그 후 명륜동 1가 집에서도 쫒겨났다. 가족의 은행대출을 보증해 준 탓에 집이 압류되고 만 것이다. 심산과 손응교, 김주는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때부터 심산은 여기저기를 떠돌게 되었고 합정동 어떤 셋방을 거쳐 여관살이로 내몰렸다.

중앙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심산의 병실은 셋째 아들과 심산의 명망을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통제되었다. 박정희가 심산의 병실을 찾은 게 이때였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친구로서 함께 항일투쟁을 했었다. 그런 아들 친구의 동생이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병문안을 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심산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김주가 병실 출입 저지를 뚫고 심산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1962년 5월 10일 돌아가시기 삼일 전이었다. 심산은 거죽만 남은 상태에서 21살 김주의 손을 잡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를 세 번이나 되뇌였다. 김주는 그날 눈물을 흘리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말년에 대해 세간에 떠돌던 이런 저런 얘기들이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에서 심산은 김주를 보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김주는 자식에게까지 상처를 받아야 했던, 죽는 날까지 마음 고생을 했던 심산을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게 되었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구의 평생 동지였지만 여관방을 떠돌던 독립운동가의 80대 손녀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심산의 손녀딸, 김주입니다 ②

▲ 심산의 둘째 아들 김찬기 김주의 부친으로 해방되는 해 중국 중경에서 숨을 거뒀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김주는 심산 묘소에서 남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4·19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년 결혼한 남편은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회장이다. 2013년에 숨을 거뒀으니 그래도 오래 동고동락을 했다.

엄마 손응교는 아버지 김찬기가 일본에 쫒겨 다니는 통에 불과 1년이나 같이 살았을려나?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엄마에게 셋째를 남겨 주었다. 해방되는 해 세 살이 된 김주의 남동생은 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 지사가 김찬기의 유해를 안고 귀국했다.

해방되는 해가 엄마 손응교에게는 지옥이었다. 아들의 주검과 남편의 주검을 동시에 맞았으니 오죽했을까. 엄마는 이때 목이 잠겨 말을 못했다. 5개월이나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담배도 늘어 혓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폈다. 할아버지 심산은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기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툇마루에 며느리가 필 연초를 슬그머니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엄마였기에 김주가 신랑과 오랫동안 해로하는 것을 부러워도 하시고 대견해 하시기도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엄마에게 살가운 사위노릇도 했다.

남편 묘소까지 돌아보고 나니 김주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늘 하루 일과를 충만하게 마친 느낌이다. 김주가 동국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할 때 남편은 동국대 법대 3학년생이었다. 4·19가 일어났을 때 행정실 캐비닛을 부수고 교기를 꺼내 거리로 나섰던 남편이다. 김주가 남편에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상해 임시정부청사 보존을 위해 1990년 중국에 갈 때 방문단의 경비를 선뜻 내준 일이다.

당시 조경한 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 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때 김주는 어머니 손응교를 모시고 동행했다.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미수교국 비자를 신청해서 홍콩을 경유, 북경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뜻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주선기란 사람은 중국 총리였던 주룽지의 친척으로 자기 집을 놔두고 임시정부 터에 살면서 청사 보존을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심산이 상해에서 살던 집까지 기억하고 그 사진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 북경대 조선문화연구소장인 최응국, 조선족 총회장 문정일 등은 “임시정부청사를 중국내 항일유적지로 보존”하자는 학술세미나를 같이하며 중국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여정에 김주 자신이 엄마와 동행했고 남편은 방문단 18명의 여비와 현지 경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호암관에서 심산관 다시 호암관으로

집으로 가는 길, 4·19 민주묘지에서 집까지는 한달음 길이다. 그래도 만보되는 걸음에 김주는 땀도 나고, 지친 터라 솔밭공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길 한 켠에 패랭이꽃과 돌나물이 소북하게 올라온 게 정겨웠다. “어머나 씀바귀도 있네” 하며 김주는 쪼그려 앉았다. 씀바귀나물은 할아버지 심산이 두릅과 함께 좋아하셨던 술안주다. 엄마 손응교는 종가집 음식인 육회를 곁들여 상차림을 올리곤 했다.

▲ 청천서원의 모습 손응교는 심산의 평생 소원, 문중의 청천서원을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 경북여성쟁책개발원

엄마 손응교는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남은 여생을 심산이 평생 소원하던 ‘청천서원’ 복원에 바치겠다고 했다. 성주의 생가를 지키며 엄마는 문중의 힘을 모아 기어이 92년에 이 일을 이루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 노릇을 의젓하게 마감한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김주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은 여생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묘소만이라도 거르지 않고 돌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마음 같아서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성균관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기에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 성대총장시절의 심산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사진으로 알려져있다. ⓒ 심산기념관제공

심산이 쫒겨난 후 성균관재단은 1957년 10월 21일 이선근을 총장으로 선출했다. 문교부는 그의 취임을 즉시 승인했다. 그는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창설된 만주제국협화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협회는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 등 5족의 협화를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왕도낙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그는 해방 후에는 서울대 학생처장을 하며 ‘국대안 파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1954년 문교부 장관까지 했던 인물이다.

한편 삼성은 1965년 성균관대를 인수하였고 이병철이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향교 재산을 바탕으로 민족의 영재를 키우려던 심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선 후 금잔디 광장 뒤에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1977년 성균관대 학생들과 유림의 재벌퇴진 운동으로 삼성은 재단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1980년 3월 민주화의 봄을 타고 호암관을 심산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삼성병원을 거점삼아 생명공학을 주력사업으로 키우려던 삼성은 당시 의대 신설이 유력시되던 성균관대를 인수하고자 했고 학생들 또한 열렬히 이를 반겼다. 결국 삼성은 1996년 20년 만에 다시 성균관대에 입성했다. 당연히 심산관은 호암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심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손녀 김주가 할아버지 상해집 사진을 안고서. ⓒ 민병래

2022년이면 심산이 돌아가신 지 60년,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심산의 이름은 김주의 소원대로 되살려질 수 있을까? 씀바귀 나물을 손에 담고 일어선 김주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달래 능선에서 내리던 꽃비는 어느 새 그녀의 굽은 어깨를 지나 우이암과 도봉 주능선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도 수유리 산 127-4,
심산의 묘소에, 불쌍한 할아버지 묘소에도 봄은 무심코 찾아오겠지.
다녀갈 때 잊지 말고
고향 성주의 솜털씨앗은 상처나지 않게 고이 감싸서
명륜동 은행나무의 새순은 연노랑 빛으로 물들여
북한산의 진달래 꽃비는 눈이 시리도록 듬뿍
할아버지의 무덤가에 내려주고 가길 바랄 뿐이다.

<못다한 이야기>

① 심산이 다리를 못써 벽옹이라고 불리우고 업혀서 다닌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후 사진을 보면 서서 연설하는 사진이 있다. 이에 대해 김주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2020년도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에서 아래처럼 밝혔다.

“해방이 되자 김창숙 지사의 건강을 염려한 동료들이 솜씨 좋은 안마사를 동원해 석 달을 안마로 다리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김창숙 지사는 혼자 온전히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서거나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에 성균관대 교직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동래온천에 머물 때 2층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심하게 다쳐 다시는 못 움직이게 되셨다.”

② 김주의 어머니 손응교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후손으로 자신의 가문도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손응교는 손후익의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손응교의 증조할아버지 손최수가 신돌석 의병장을 도왔고, 할아버지 손진수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나섰다고 전한다. 또한 종조부 손진형과 삼촌 손학익 모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손후익 또한 1905년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김창숙 지사를 만났다. 아버지 손후익은 경북 유림계를 결속시켜 김창숙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처남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의 전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12월 김창숙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이때 할아버지 손진수와 아버지 손후익이 김창숙을 간호했다. 이일이 인연이 되어 손응교는 당시 동덕여고 재학중이었지만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와 혼인하였다. 최근에 와서 그의 삶 또한 울산의 독립운동가로서 조명받고 있다. 손응교는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 남편이 죽고(1945), 시어머니가 죽고(1951) 친정아버지가 죽고(1953) 심산이 죽고(1962) 줄 초상을 당하여 평생 상복을 벗을 날이 없었다. – 참고도서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

③ 김찬기 선생의 사진은 극적으로 남아있다. 이 사진이 남은 배경을 <경북여성생애 구술사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경북여성쟁책개발원 2014년간)에 기록된 손응교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면 이렇다.

“방에 우리 남편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왜관에서 비밀 지하 운동하다가 체포된 왜관 사건으로 징역 살고 나올 때 찍은 것이라. 이때가 스물일곱 살 때라. 성주에서 사진관 하던 이명동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찍었어. 후에 이 양반이 동아일보 사진기자도 하고 했어. 이명동씨가 자기 묵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있더래요. 그래서 똑같은 걸 다섯 장을 뽑아서 보내왔어.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라.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은 편지나 사진은 안 남겨. 사진 있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고 잡을 수 있잖아요. 우리 집에도 편지 오면 심산 어른이 좀 문제 있다 싶은 거는 다 하나 둘이 몇 번 읽어본 후 불태웠어. 심산 선생도 사진 때문에 잡혔거든.”

④ 김주의 큰 고모, 즉 심산의 첫째 딸인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심산의 장남 김환기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경에게 집 마당에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환기의 죽음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때 국가보훈처 공훈록 자료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⑤ 이 글에서 다룬 황도유학회와 자유당의 유도회 장악과정은 아래 논문을 참조했다. – <성균관대학교 2002년 석사학위 논문 ‘1950년대 중후반기 유도회사건연구’,조한성>

⑥ 임시정부 터를 지키기 위한 중국방문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통일기원대제를 지냈다. 그때 김주와 손응교는 유림의 대표격으로 국조단군칙어를 낭독했다. 중국사람들은 백두산 천지에는 새가 날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고 김주는 회고한다.

<2021-04-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성균관대에서 잊혀져 가는 이름, 80대 손녀의 간절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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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리즈: 민병래의 사수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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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9/12/2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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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주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② 그가 민주주의 위기를 주장하는 이유

염치.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주로 ‘없다’와 만나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염치’란 단어가 원래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친일 세력, 민족 정기라는 걸 우리가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거든요? 거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우리 자신이 친일파나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되어 버렸어요. 자손들한테 ‘민족 정기다, 애국해라’, 무슨 얼굴을 갖고 그런 얘기하겠어요? 친일파를 처벌하지도 못했고, 그 사람들이 날뛰는 꼴을 그대로 봐놨고, 그들에 대한 단죄가 없는 그 세대로서…”

부끄러워하는 그 마음이 느껴졌다. 평생을 친일반민족 행위 연구에 헌신했던 임종국 선생이 1988년 CBS 라디오 대담에서 했던 말이다. “무슨 얼굴로 애국을 얘기하겠냐”는 그 말을 당시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이가 바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다.

그로부터 23년 후, 임 소장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일제 식민통치는 염치없는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러니 일제 잔재 청산이란 것도 단순히 인적 청산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염치없는 인간 대량 생산’이라는 식민통치 이데올로기를 청산하는 일이기도 하다”며 이렇게 확언했었다.

“이걸 못하면 민주주의도 허상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주도하는 등 역시 친일 청산에 힘을 썼던 그였기에, ‘일제시대 염치없는 인간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염치와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지난 12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와 마주 앉았던 이유다. 먼저 염치의 정의에 대해 물었다.

인간다움, 그리고 부끄러움과 참회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 이정환

– 염치없다는 말이 인간의 기본을 버렸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그들의 이야기를 다 합치면 그겁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다움.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염치가 있어요. 예의가 됐든 사회규범이 됐든 그 기본이 되는 게 염치입니다.”

임 소장은 “지구상에 인간을 공존하게 만드는 모든 질서 자체가 예의에서 비롯된다”며 “인사를 잘 하거나 어르신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그런 게 아니다, 사회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와 같은 예의를 어겼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인간답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염치없음은 “수치를 모르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반대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은 참회로 이어질 수 있다. 임 소장은 이렇게 예를 들었다.

“굴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갇혔어요. ‘누구 하나 때려잡아 먹자’, 그런 상황에서 사람 고기가 아니라고 하면서 주워먹었던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 후 그 사람이 참회를 하느냐 마느냐, 이런 차이인 거죠.”

– 인간다움을 잃어버렸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염치다?
“그렇죠.”

“염치없는 친일파 가면 미국이 더 예쁘게 만들어 줘”

▲ 1966년 9월 10일 <동아일보>에 실린 “친일문학론” 광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임종국 선생이 당시 유명 작가들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와 반대로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한 사람, 철면피란 말의 사전적 정의다. 임 소장의 말이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철면피가 양산되는 건 전쟁이 끝난 다음입니다. 전쟁으로 윤리 의식이 허물어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제시대부터 생겨요.”

임 소장에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철면피는 당연히 이완용이었다. 그는 “법이 규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죄가 민족 배반 아니냐”며 “그런 큰 죄를 저지르고 나면 다른 건 우습게 보인다, 이완용은 나라만 팔아먹은 게 아니라 불법적인 재산 탈취까지 다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는 “친일파들의 본질은 ‘염치없음'”이라고 강조했다. “잘못을 알고도 행한 사람들”이며 또한 그래서 “자기가 잘했다고 우겨요”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임 소장은 “식민지 시대가 염치없는 사람들을 만들었고, 우리나라에 내려오던 염치의 근본이 그 때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도 이어진 뒤틀림을 임 소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광복이 된 후에도 친일파들은 가면을 바꿀 필요가 없었어요. 그 가면 그대로 쓰고 일본으로 향했던 눈을 미국에 돌리면 다 예쁘게 봐줬어. 그대로 이승만 독재에 핵심 인사들이 됐죠. 염치없는 친일파들의 가면을 미국이 더 예쁘게 만들어줬거든.”

그러면서 임 소장은 친일파들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민주주의와 안 맞는다고 강조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파시즘”이며, 그렇기에 “노동자들이 배부르고 잘 사는 거 못 보고, 인권이나 여성 인권 등에 체질 자체가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자기 머슴이어야 하며, 그래서 독재를 찬양하는 것”이란 주장도 잇따랐다. 그를 만나게 만든 질문으로 이어졌다.

“염치는 전염된다”… 친일인명사전 또한 그랬다

▲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임종국 선생의 유고. 친일반민족행위 연구에 헌신한 그의 아버지는 친일부역자였다. <친일문학론>을 쓰던 아들에게 “내 이름이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넣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임종국 선생이 평생을 바쳐 기록한 “친일인명카드”는 훗날 친일인명사전의 밑거름이 됐으며, 그의 뜻을 담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졌다. ⓒ 이정환

– ‘염치없는 인간들이 지금도, 미래에도 나오는 한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하셨습니다.
“투표의 자유가 있다고 자유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정치적 자유 뿐 아니라 사상의 자유, 경제적 자유, 생존의 자유도 보장되는 게 올바른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몰염치가 많으면 사회가 불안해지는 건 당연하죠. 특히 파시즘적인, 극우 이데올로기에 심취해 있는 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불안해집니다. 올바른 민주주의가 그냥 선거하는 것만이 아니잖아요.”

다수결의 논리에 따라 염치없음이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고가 서늘하게 들렸다.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 염치, 전염성이 있나요?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도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동지’, 임종국 선생의 경우가 그랬다.

“1966년 1월쯤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빠가 그때 코트를 입고 있었으니까.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면서 헌 신문을 뒤지다보니 학병 지원 연설을 나간 아버지의 기사가 났습니다. 오빠는 그 글을 쓰다 말고 집에 와서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친일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학병 지원 연설한 게 나왔는데,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은데…’ 하자 아버지께서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고 하셨습니다.” (정운현, 임종국 선생 평전 중에서)

그리고 임종국 선생은 평생을 바쳐 친일인명카드를 기록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염치가 훗날 친일인명사전으로 옮아왔던 셈이다.

염치 없음도 전염되지만 염치 있음도 전염된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방문자들의 관람 소감. 2019년 12월 7일 방문자의 글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는 “나라에 부끄러운 짓을 한 친일파들은 저리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자들은 항상 탄압 받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건 잘못되었다. 바로 잡아야 한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2018년 8월 개관했다. ⓒ 이정환

글: 이정환(bangzza) 이주연 (ld84)

<2019-12-1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염치는 전염된다… 친일인명사전으로 옮아간 부자의 염치

목, 2019/12/19-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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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12.24) ‘내역사’ 시즌 4: 김좌진 “항일무장투쟁의 신화_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 (12.17) ‘내역사’ 시즌 4: 홍범도 ” 100주년을 앞둔 봉오동 전투,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 (12.10) ‘내역사’ 시즌 4: 최남선 “천재라 불리던 신지식인, 그는 왜 변절을 했을까?”

☞ (12.03) ‘내역사’ 시즌 4: 백년전쟁 대법원 판결과 강제동원 ‘문희상 안’ 무엇이 잘못되었나?

☞ (11.27) ‘내역사’ 시즌 4: 이광수2편_그가 주장한 민족개조론 ‘반일종족주의’혐한론과 매우 닮았다

☞ (11.26) ‘내역사’ 시즌 4: 이광수1편_당대 최고의 지식인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 (11.19)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3편 2부_한일협정 “애당초 받을 게 없다”라는 주장을 비판

☞ (11.12)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3편 1부_강제동원 부정론 비판

☞ (11.05)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2편 2부_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 (10.29)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2편 1부_뉴라이트의 역사수정주의의 논리와 희망

☞ (10.22)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1편_식민지근대화론과 친일청산 부정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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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4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수, 2019/12/2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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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내일을여는역사재단·민족문제연구소ㅣ출판사: 민연ㅣ값 15,000원ㅣ366pageㅣ발행일: 2019.12.1.ㅣISSN 1228-8802ㅣ9771228880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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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2020년 새해에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기대하며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2019년 역시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 해일 것이다. 연초에 비하면 남북 간 관계 개선의 전망은 어두워졌고, 북미 간의 교섭은 퇴보를 거듭하는 상황이다. 식민지 시기 일본 전범 기업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상식적인 보복 대응은 동아시아 외교환경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게다 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몰상식한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면서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촛불의 힘으로 수립되었던 문재인 정부의 내치 성과도 그다지 신통치 않아 보인다. 지난 8월 이래 조국 사태가 부각되면서 검찰 개혁의 시대적 소명보다도 공정 가치의 실현이 더 근원적인 사회 이슈로 떠오른 상황이다. 다만 새로운 법무부 수장 임명을 계기로 검찰 개혁의 동력이 다시 탄력을 받기를 기대한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반환점을 돈 지금 시점에서 민생문제 역시 시급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가시적으로 내세울 만한 경제적 성과가 별로 없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재인 정부의 노동 개혁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어 실망감을 주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한두 달 새 에는 수도권 집값이 급등 양상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이 절망과 허탈감에 빠져 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의 보수세력은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례성을 강화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 개편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보수 야당의 행태에서, 지역주의의 기득권에 집착하는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와 같은 보수세력의 모습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공정 가치의 실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19년의 마지막 호인 이번 77호에서도 다양한 내용을 구성하였다. ‘통일에세이’에서는 김오석이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가치와 활용에 대하여 다루었다. 비무장지대를 여러 차례 답사한 환경지리학자의 입장에서 비무장지대 경관 보존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현재의 군사시설 또한 미래의 역사유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번 호의 특집은 ‘한국과 일본,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제목 아래 네 편의 글로 구성하였다. 석주희는 일본 우경화의 핵심 조직으로 일본회의라는 비정당 우익세력에 주목하고 아베 내각과의 관련성을 살폈다. 아울러 일본 우익의 역사 수정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민간차원에서 한일 간 상호이해를 위한 시민연대를 지속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진우는 오늘날 일본의 상징 천황제가 과거와 같이 군국주의와 결부하여 부활할 가능성은 작으나, 아베 내각의 우경화 행보 속에서 천황제가 일본 우익 내셔널리즘의 중추로 떠오를 수 있음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하였다.

양기호는 해방 이전 일본 전범 기업 강제동원 피해 보상에 대한 해법으로, 한국 정부는 피해자와 원고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반성이 담긴 기금의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영채는 일본군 위안부합의 문제와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를 계기로 한일시민사회가 문화교류와 상호 네트워크 형성을 활성화하여, 한일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획들을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박상수가 동아시아론의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제기되었던 다양한 동아시아 담론들이 그 자체에 담긴 인식론적 한계들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동아시아를 ‘트랜스 내셔널리즘’의 공간으로 사유 한다면 동아시아가 서구 근대의 성취까지 왜곡 없이 온전히 포용하는 더 큰 보편성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지금 우리는?’ 코너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미동맹의 미래, 용산 미군기지의 공원 조성 문제, 그리고 홍콩의 송환법 반대 투쟁 등 세 개의 주제를 다뤘다. 오혜란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촉진하고 평화번영통일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한미동맹에의 지나친 의존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염복규는 용산이라는 장소가 지녀왔던 역사적 시간대의 기억을 최대한 남겨, 그 역사성을 후대에 전승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용산공원이 조성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강인화는 2019년을 뜨겁게 달궜던 홍콩시위를 다각적으로 분석하면서, 기존 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은 홍콩 주민들이 스스로 신뢰를 회복하며 새로운 사회와 정치를 만들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인물로 보는 역사에서는 임경석이 지난 호에 이어 이탈리아어판 『코 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 관련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남만춘, 장건상, 이동휘, 김규식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사실 체크에서는 두 편의 글이 기획되었다. 이정희는 식민지 시기 조선 거주 화교가 한국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음을 실증적으로 살펴보았다. 김용흠은 전근대 우리 역사 속에 존재했던 유교 문화를 대상화하여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유교 문화에 가졌던 문제의식과 고민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내일을 여는 책에서는 두 권의 책을 다뤘다. 정명현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임원경제지의 재해석을 통해, 조선 후기의 문명을 창조적으로 되살려 활용하는 실용적 복고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정대성은 독일 태생의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인간의 조건』을 다루면서, 그의 연구가 신자유주의 적폐해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21세기에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음을 살펴보았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서민교가 3·1운동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 관이었던 우츠노미야 타로의 일기를 소개하였다. 북한의 이해에서는 정우영이 북한에서 대집단체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고 대집단체조로 대표되는 북한 공연예술의 특징을 검토하였다.

예인열전에서는 최열이 겸재 정선의 작품들에 대한 글을 실었다. 겸재의 작품 전반을 싣기에는 이번 호의 지면이 넉넉지 않아, 이 글은 다음 호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호에서는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 그리고 한양과 그 주변 지역을 소재로 한 겸재의 실경산수화를 다루었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이나바 마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 예술제인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평화의 소녀상>이라는 작품이 전시 중단되는 사태를 조명하였다. 한진금은 2019년 한해 전국 각지의 박물관과 전시관에서 기획, 진행되었던 3·1운동 100주년 기념 전시를 검토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3·1운동 서사의 주체가 되는 경향성에 주목하였다.

역사와 공간에서는 꾸준히 좋은 글을 연재하는 김창회가 충남 홍성의 조선 시대 읍치 유적에 관한 내용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이번 호의 서평에서는, 『3월 1일의 밤–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권보드래 저, 돌베개, 2019)에 대한 이찬수의 글을 실었다. 그는 이 책이 향후 근현대 문학과 한국사는 물론, 한반도 평화사 분야에서도 스테디셀러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이번 호에는 자유 기고의 형태로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최병택은 친일 청산의 문제는 권선징악의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 자리 잡은 국가주의와 비민주성의 잔재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사 람들을 미화하는 책인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엄중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양조훈은 제주 4·3의 비극에, 이승만 정권뿐만 아니라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책임과 역할이 작지 않았음을 장문의 글을 통해 강조하였다.

2020년 새해 벽두부터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총선 정국이 시작될 것 이다. 하지만 총선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풀어야 할 산적한 과제들이 잊히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의 개선, 검찰 개혁 등도 시급히 성과를 거두어야 할 사안이지만, 정부의 각종 정책을 비웃는 듯한 수도권 집값의 급등은 다주 택자들에 대한 더욱 강력한 징세 정책을 요청하는 형국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 시에 내세웠던 각종 노동공약의 실천은 매우 저조한 상황이다. 전교조는 여전히 법외노조의 상태에 있고, 최저임금 1만원 시대의 도래도 언제 실현될지 기약하기 힘들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역시 너무나 미진하며, 주 52시간 노동 상한제 적용 역시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김용균법의 국회 통과에도 불구하고 ‘위험의 외주화 금지’ 문제는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저무는 해를 아쉬워하면서도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년 연말에는 올 연말에 가졌던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내일을 여는 역사』 현 편집위원들의 역할도 2019년을 끝으로 종료된다. 2020년 새해에는 새로운 편집위원들과 함께 『내일을 여는 역사』 역시 더 나은 책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편집위원 정요근


<내일을 여는 역사> 77호 겨울호 목차

04 여는 글
○ 2020년 새해에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기대하며 / 정요근

11 통일에세이
○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 김오석

19 특집 : 한국과 일본, 어디로 갈 것인가?
○ 일본 우익에 대한 소고 – 아베내각과 일본회의 / 석주희
○ 현대 일본인의 천황관과 역사인식 / 박진우
○ 1965년 체제의 한계, 극복은 가능한가 / 양기호
○ 아베정권의 대한국 무역보복조치이후 한일시민연대운동의 현황과 과제 / 이영채

81 쟁점으로 보는 역사
○ 한국의 ‘동아시아’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 / 박상수

95 지금 우리는?
○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미동맹의 장래: 주한미군 철수는 가능한가? / 오혜란
○ 용산공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염복규
○ 2019년 홍콩시위와 민주주의, 그리고 ‘탈식민’ / 강인화

131 인물로 보는 역사
[코민테른인명사전]
○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2) – 남만춘, 장건상, 이동휘, 김규식 / 임경석

149 사실 체크
○ 조선화교가 우리 근대사에 던지는 문제 제기 / 이정희
○ 유교 문화에 대한 오해와 이해 / 김용흠

173 내일을 여는 책
○ 조선의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에서 구하는 실용적 복고 / 정명현
○ ‘인간의 조건’의 상실과 정치 –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 정대성

193 예인열전
○ 동방산수의 화종(畵宗) 겸재 정선 – 정선, 실경산수화의 동국제일명가 3 작품사 (상) / 최열

229 사료의 재발견
○ 3.1운동 100주년에 다시 보는 당시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일기 / 서민교

239 북한의 이해
○ 북한의 대집단체조와 공연예술의 특징 / 이우영

249 예술과 현실의 소통
○ 침해된 표현의 자유 –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 / 이나바 마이
○ 기미 이후 백년,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2019년 3·1운동 기념 전시를 돌아보며 / 한진금

271 역사와 공간
○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충청도의 대읍이자 내포(內浦)의 중심, 홍주목 / 김창회

299 서평
○ 선언, 미래를 당긴 가상적 독립 –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2019 / 이찬수

311 기고
○ 제주4․3 학살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책임 / 양조훈
○ 친일 잔재 청산과 민주화 / 최병택

토, 2019/12/28-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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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각하 결정 이유

“공식적 약속이지만 구두로 이뤄져…구체적 권리·의무의 창설 불분명”
헌법소원의 대상은 되지 않지만, 피해자의 청구권은 남아있다고 판단
위안부 합의 근거로 손배 청구에 응하지 않은 일본 정부, 정당성 잃어

헌법재판소는 2015년 박근혜 정부와 일본 정부가 발표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내용들뿐이라서 정치적·외교적 행위 이상의 의미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시민 기본권을 침해한 국가권력의 행사가 아니면 헌법소원 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헌재는 사건 결론을 ‘각하’로 내렸다.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이번 헌재 결정에 의미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헌재는 27일 각하 결정문에서 이 합의를 두고 “양국 외교장관의 공동 발표와 정상의 추인을 거친 공식적인 약속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면서도 구속력이 없다고 했다. 서면이 아닌 구두로 이뤄졌고, 구속력이 있는 조약에 부여되는 명칭이나 조문의 형식도 갖추지 않은 채 ‘기자회견’(일본은 ‘기자발표’) 형태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헌재는 “구두 발표의 표현과 (양국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발표문의 표현조차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했다”며 “국제법상 구속적 의도를 추단할 수 있을 만한 표현 역시 사용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모호하거나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돼 있다”고 했다.

헌재는 “무엇보다 합의의 내용상, 한·일 양국의 구체적인 권리·의무의 창설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했다.

헌재는 합의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시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그게 피해자의 권리구제를 목적으로 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헌재는 “합의에 피해자가 입은 피해 원인이나 국제법 위반에 관한 국가책임이 적시돼 있지 않다”며 “일본군 관여의 강제성·불법성 역시 명시돼 있지 않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합의 이후에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해결돼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한 점은 이 합의가 법적 효력이 없는 선언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판단의 근거가 됐다.

합의의 또 다른 주요 내용인 재단 설립과 일본 정부 출연을 두고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의무 이행의 시기·방법, 불이행의 책임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헌재는 봤다. 헌재는 “이 합의에는 ‘해야 한다’라는 법적 의무를 지시하는 표현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며 “대략 10억엔 정도의 일본 정부 출연금 규모가 언급됐다고는 하나, 정확한 출연금액과 시기, 방법은 언급되지 않았고 이 같은 출연금 규모의 언급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게재 발표문에는 표시조차 되지 않았다”고 했다. 헌재는 “국가 간 정치적 합의에 따른 협력조치의 시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일본 정부가 과거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을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의료·복지 용도로 사용하도록 한 사례를 들었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부족했다면서 피해자 중심의 조치를 모색하겠다고 발표한 상황도 고려했다. 헌재는 “피청구인(외교부 장관)은 이 사건 합의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일본이 진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명예·존엄 회복과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줄 것을 기대하며 미래지향적 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며 “(한국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한의 행사를 포기했다고 단정할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번 결정에서 중요한 부분은 피해자 권리를 확인한 것”이라며 “각하라고 결정은 했지만, 헌재가 피해자 권리의 실현을 정부의 할 일이라고 주문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결정이라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조 연구위원은 “위안부 합의는 법적 책임에 대한 게 아니기 때문에 향후 이런 부분을 정부가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헌재가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피해자와 가족들 개인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헌재는 이날 결정에서 “합의에 구체적인 청구권의 포기 및 재판 절차나 법적 조치의 면제 보증 등이 전혀 규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의 포기나 처분을 다뤘다고 볼 사정이 없다”고 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해결됐다면서 피해자들 소송에 응하지 않는 일본 정부 주장에 정당성이 없어진 셈이다.

이혜리 기자 [email protected]

<2019-12-27>경향신문 

☞기사원문: ‘위안부 합의’ 헌법소원 각하…“추상적·선언적 내용들뿐…이에 대한 평가는 정치의 영역”

※관련기사 

☞한겨레: 일본의 왜곡·혐한…할머니들 소송 투쟁만 빛나다 

☞SBS: 헌재, 朴 정부 ‘한일 위안부 합의’ 헌법소원 각하 

☞MBC: ‘위안부 합의’ 위헌소송 각하…”심판 대상 아니다” 

☞한국일보: [사설] 위안부 합의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 재확인한 헌재

☞한겨레: 헌재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정치적 합의” 헌소 각하

☞경향신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잘못된 합의인데 기가 막히고 서운하다”

일, 2019/12/29-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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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이제 본격적인 겨울방학을 맞는데요.

아이들과 함께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부모님들 많을 겁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역사 공부도 할 수 있는 실내 나들이 어떠신가요.

박소정 기자가 소개해 드립니다.

[기자]

“집마다 군인들 먹어야 한다면서 쌀을 공출해갔어요. 빼앗아 갔어요.”

쌀 한 톨, 숟가락 하나까지 빼앗아갔던 수탈의 역사에 학생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독립선언문 원본에, 오롯이 시민의 힘으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뒷이야기까지!

아픈 역사를 들려주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올해까지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임소리 / 소하중학교 3학년 : 친일파에 대해서 더 자세히 배웠고, 나중에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성하 / 소하중학교 3학년 : 이제 그분들이 했던 독립운동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지난 2017년부터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옮겨가면서 공원으로 탈바꿈할 채비를 하는 용산 기지!

미군이 쓰던 나지막한 건물 하나가 갤러리로 변신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육군 창고로 활용되다 미군이 들어선 뒤에는 미군위문협회로 쓰인 이곳에는 110년이 넘는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성지은 / 용산공원갤러리 전시안내 : 용산 공원으로 돌아올 텐데요.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 그런 의견을 들어보는 시민소통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열대우림의 후텁지근한 기운이 거대한 실내 공간에 가득합니다.

한겨울, 3천 가지가 넘는 이색 나무와 꽃을 즐길 수 있는 도심 식물원입니다.

동화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 석가모니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 등 나무들이 품은 이야기도 풍성합니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도심 속 숨은 관광지들이 곳곳에서 겨울 손님들에 손짓하고 있습니다.

YTN 박소정[[email protected]]입니다.

<2019-12-29> YTN 

☞기사원문: “추위 피하고 역사도 공부해요” 도심 속 숨은 관광지

화, 2019/12/31-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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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178]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보내며

역사 교사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2019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아이들과 관련 유적지를 무던히도 찾아다녔다. 한두 시간 거리인 개항장 군산과 목포의 근대문화유적을 비롯해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숱한 인물들의 자취를 찾아 1년 내내 주말을 반납하다시피 했다.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관심이 부족해서 그렇지 지역에도 기억하고 답사할 만한 곳이 적지 않다. 이곳 호남에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 백범 김구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지역민들조차 놀라워한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과 대종교의 창시자 홍암 나철,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일강 김철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백용성 조사 등 호남 출신 독립운동가의 면면이 화려하다.

그런가 하면 반면교사 삼을 만한 인물도 있다.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탓에 당연히 만석꾼 지주가 많았고, 그들 중 다수는 자산을 보전하기 위해 기꺼이 친일의 대열에 섰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대표적이다. 그들의 땅을 밟지 않고는 호남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일제에 부역한 대가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영화를 누렸다. (관련 기사: “역사왜곡은 맞지만…” 친일파 생가 못 건드린다는 고창군 http://omn.kr/1m2xq)

비록 주어진 교육과정에 따라 진도에 연연해야 했지만, 내심 올해 한국사 수업은 ‘현실에 안주 말고 역사에 살라’는 글귀를 주제로 삼았다. 아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삶을 대조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계기수업은 물론 과제와 수행평가도 의도에 맞춰 재구성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를 살다간 인물의 행적을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고 신념을 다듬는 것이야말로 역사 공부의 고갱이다. 수험용 지식으로만 여겨 머리에 욱여넣을 뿐 가슴으로 전달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지식이란 그저 허세의 수단일 뿐이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 같은 공간에서 잠들다.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 행사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이번엔 아이들과 조금 먼 길을 나섰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 자발적 참가 신청을 받아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고등학교 1, 2학년 아이들과 함께 ‘백범 로드의 끝에서 만난 친일파들’이라는 주제로 충남 공주의 마곡사와 국립 대전 현충원을 찾았다. 고작 두 곳이지만, 광주에서 오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다.

▲ 마곡사 백범당에서 함께한 고등학생들이 문화해설사로부터 백범 김구와 마곡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서부원

알다시피 마곡사는 김구가 20대 청년 시절 신분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깎고 잠시 승려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일제를 향한 적개심으로 일본 군인을 처단한 후 잡혀 감옥에 갇힌 뒤 탈옥하여 삼남 지방을 떠돌던 시기다. 당시 김창수(김구의 본명)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숨어다닌 길을 ‘백범 로드’라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

마곡사에는 그의 호를 딴 백범당이 새뜻하게 복원되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김구가 실제 머물던 곳으로 건물 벽에는 당시의 사진과 휘호 등이 걸려 있고, 곁에는 해방 직후 그가 이곳을 찾아와 심었다는 향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내로라는 사찰이지만, 백범당으로 인해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지만 마곡사는 경유지일 뿐,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국립 대전 현충원’이다. 그곳에 가야 비로소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함께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색이 국가 현충 시설인데도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김창룡을 비롯한 악질 친일파들이 수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묻힌 자리 위에 군림하듯 장군 묘역에 잠들어 있다.

우선, 장군 묘역으로 가는 도중 대통령 묘역에 잠깐 들렀다. 위치상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바로 앞에 울창한 숲이 없다면 현충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다. 그곳엔 최규하 전 대통령 내외가 묻힌 큼지막한 합장묘만 덩그러니 조성되어 있다. 그 옆으로 넓은 묫자리가 빈터로 남아있는데, 앞으로 세상을 떠날 대통령이 묻힐 곳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언에 따라 고향에 잠들어 있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해는 국립 서울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이후 세상을 떠난 대통령이 없기에 꽤 오랫동안 빈터로 남을 듯하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미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고, 이명박과 박근혜 역시 구속되어 죗값을 치르고 있으니 현충원에 안장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이들은 최규하라는 이름을 낯설어했다. 대개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제19대 문재인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을 순서대로 잘 알고 있지만, 최규하는 십중팔구 빠뜨리고 만다. 사실상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축출된 대통령이라고 설명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은 워낙 존재감이 없는 분이라 왕따당하듯 홀로 여기에 묻혀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 무덤에 분노하다

대통령 묘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문제의 장군 묘역이 있다. 주차장에서 중앙 계단을 따라 올려다보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권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피라미드를 살짝 눕혀놓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기엔 6.25 전쟁 이후 순직한 육해공군 출신 장성들의 묘가 계급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그 사이에 친일파의 무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끼어있다.

▲ 김창룡 무덤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는 아이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악질 친일파 김창룡의 무덤이 국립 대전 현충원 장군 묘역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서부원

이곳에 묻힌 친일파의 대표 격인 김창룡의 무덤 앞에 아이들과 함께 섰다. 곁에 세워진 묘비의 내용만 보면, 존경할 만한 순국선열이요 호국영령이다. 김창룡의 묘비명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친일 사학자 이병도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이들은 미리 조사해온 자료를 읽으며 그의 친일 행적에 분노했고, 그런 자를 현충원에 안장한 이들의 생각 없음을 질타했다.

서른여섯의 나이에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를, 아이들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 표현했다. 그렇듯 비참하게 죽었으나 아직 죗값을 다 치르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미 역사적인 평가가 내려진 마당에 그의 극악무도한 친일 행위에 대해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묘비 옆에 그가 악질 친일파였음을 알리는 별도의 팻말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즉석에서 아이들에게 과제를 내주었다. 이곳 장군 묘역에 숨어있는 친일파의 무덤을 찾아 인증 샷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친일파의 기준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로 한정했고, 묘비의 앞뒷면에 적힌 글귀도 꼼꼼하게 읽을 것을 주문했다. 스마트폰을 몸의 일부처럼 여기고 다루는 아이들에게 친일파 무덤 찾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묘비에는 죄다 6.25 전쟁의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더군요. 그 어디에도 친일 행적은 적혀있지 않았어요. 어디선가 읽었는데, 6.25 전쟁을 왜 친일파들의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한 아이는 친일파 무덤의 묘비명에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북한의 남침을 가장 반겼을 이들은 다름 아닌 친일파들이었다. 일제의 주구로서, 관동군 장교로, 간도 특설대의 일원으로 독립군을 때려잡던 그들에게 전쟁은 ‘실력’을 발휘하고 범죄를 세탁할 절호의 기회였다. 6.25 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친일파보다 빨갱이가 더 나쁘다’는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그들은 전쟁 영웅으로 거듭났고 현충원에 당당히 묻힌 것이다.

▲ 친일파 김석범의 묘 김석범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간도 특설대에 복무했고, 만주국 창춘 보안사령부의 사령관까지 역임한 악질 친일파다. ⓒ 서부원
▲ 친일파 백홍석의 묘 백홍석은 일본군에 배속되어 중좌의 직위까지 오른 친일파다. ⓒ 서부원

불과 10여 분만에 아이들 모두 과제를 완수했다. 스마트폰으로 무덤마다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친일파의 무덤을 속속 카메라에 담았다. 한 아이는 이곳에 묻힌 친일파 김창룡, 김석범, 신현준, 송석하, 백홍석 등을 을사오적에 빗대 ‘현충원 5적’이라고 부르며,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정부의 무지와 무책임을 탓하다

친일파들이 묻힌 국립 대전 현충원도 넓게 보면 ‘백범 로드’에 포함할 수 있다. 왜냐면 김구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 함께 잠들어 있어서다. 바로 김구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와 큰아들인 김인 열사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서울 효창공원에 묻힌 김구의 유해가 이곳에 이장된다면, 국립 대전 현충원은 3대가 함께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될 것이다.

두 분의 묘소 앞에서 아이들끼리 논쟁이 붙었다. 친일파 무덤 옆에 별도의 팻말을 세우자는 기존의 주장과 친일파 무덤을 파묘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충돌했다. 곧장 파묘해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김구 암살의 배후인 김창룡과 김구의 어머니와 아들이 같은 곳에 묻혀있다는 게 당최 사리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무지와 무책임을 탓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함께 묻힌 곳이라면, 국립 현충원이라는 위상과 권위가 실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생존해 계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죽어서 현충원으로 가기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분노한 아이들도 국립 현충원이라는 이름이 아깝다며 혀를 끌끌 찼다.

광주로 돌아오는 길, 열심히 과제를 수행하고 즉석 토론을 벌인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해 간 선물을 건넸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가 저문다고 해도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다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문하며, 정운현 선생이 쓴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를 선물했다. 비록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함께한 아이들은 분명히 완독해낼 것이라 확신한다.

아이들로부터 희망을 발견한 한 해였으니, 역사 교사로서 저물어 가는 2019년이 조금도 아쉽지 않다. 낼모레면 2020년 경자년 새해다. 새해는 무엇을 주제 삼아 아이들과 만날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순간 괜찮은 주제 하나가 머리를 스친다. 내년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아울러 친일 행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살이 된다. 2020년 새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해가 될 것 같다.

서부원 기자

<2019-12-3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현충원에 묻힌 친일파 묘비 문구에 경악… 아이들의 분노

화, 2019/12/31-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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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계승 국군 군가에 여전히 ‘친일’ 흔적
육해공군·해병대가 4곡 중 2곡은 친일 인사 작곡
작사는 독립군·작곡은 친일…기념식 때 제창
국방부 총록집 298곡 중 35곡 친일 인사가 작곡

[앵커]

올해는 일제강점기 독립군 역사에 큰 승리로 기록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이자 광복군 창설 80주년입니다.

최근 우리 국군의 뿌리를 광복군에서 찾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지만, 군인 정신을 북돋는 군가에는 여전히 친일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나혜인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관객 470만 명을 모은 영화 ‘봉오동 전투’입니다.

지난 1920년, 열악한 환경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독립군은 20년 뒤 광복군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80년이 지난 지금, 광복군을 계승했다는 국군 군가에는 친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등 4대 공식 군가 가운데 절반은 친일 인사가 만들었습니다.

육군가를 작곡한 김동진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대표적 친일 음악가입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 김동진은 만주국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수많은 행사에 연주 활동을 하면서 만주국 찬양,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는…]

공군가의 노랫말은 독립전쟁에 헌신했던 최용덕 장군이 썼는데, 작곡자는 친일 인사 김성태입니다.

이렇게 친일과 항일의 흔적이 뒤섞여 있는 4대 군가가 매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불리고 있습니다.

[육군가 / 지난해 국군의 날 기념식 : 그 이름 용감하다 대한 육군 앞으로 앞으로 용진 또 용진…]

이 밖에도 ‘진짜 사나이’를 비롯해 국방부 총록집에 실린 군가 298곡 가운데 35곡을 친일 인사가 작곡했습니다.

독립군가는 지난해 처음으로 육군 군가수첩에 실렸지만, 병영에서 얼마나 보급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독립군가 / 작사 미상 헨리 워크 작곡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현역 군인 : (군에서 독립군가 들어본 적 있어요?) 아뇨. 못 들어봤어요.]

[예비역 : 불러보긴 했어요. 기억은 아예 안 나요.]

각 군 홈페이지의 군가 게시판에는 해군만 지난 2013년부터 독립군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 광복군의 후예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군에서 광복군이 불렀던 노래, 독립군이 불렀던 노래를 교육하지 않는다는 건 대단히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초, 친일 군가 문제가 불거지자 점검을 약속했던 국방부는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나 계획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광복군 창설 80년을 맞아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군의 정신을 계승하고, 우리 국군에 남은 친일 잔재를 걷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YTN 나혜인[[email protected]]입니다.

YTN

☞기사원문: 봉오동 100년·광복군 80년…4대 군가 중 2개 ‘친일 작곡가’

수, 2020/01/08-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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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4

[바로듣기]

☞ (01.07) ‘내역사’ 시즌 4: 김갑순 ” 망국을 기회로 삼은 탐욕스런 땅투기꾼”

☞ (12.24) ‘내역사’ 시즌 4: 김좌진 “항일무장투쟁의 신화_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 (12.17) ‘내역사’ 시즌 4: 홍범도 ” 100주년을 앞둔 봉오동 전투,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 (12.10) ‘내역사’ 시즌 4: 최남선 “천재라 불리던 신지식인, 그는 왜 변절을 했을까?”

☞ (12.03) ‘내역사’ 시즌 4: 백년전쟁 대법원 판결과 강제동원 ‘문희상 안’ 무엇이 잘못되었나?

☞ (11.27) ‘내역사’ 시즌 4: 이광수2편_그가 주장한 민족개조론 ‘반일종족주의’혐한론과 매우 닮았다

☞ (11.26) ‘내역사’ 시즌 4: 이광수1편_당대 최고의 지식인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 (11.19)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3편 2부_한일협정 “애당초 받을 게 없다”라는 주장을 비판

☞ (11.12)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3편 1부_강제동원 부정론 비판

☞ (11.05)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2편 2부_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 (10.29)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2편 1부_뉴라이트의 역사수정주의의 논리와 희망

☞ (10.22)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1편_식민지근대화론과 친일청산 부정론 비판


0523-1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4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목, 2020/01/09-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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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0대 경기도지사 친일행적 기록
이재명 지사 “기록 지우는 게 사실 왜곡”
친일잔재 청산·도민 알권리 충족 방침

[수원=뉴시스] 박다예 기자 = 구자옥 제1대 경기도지사. 친일인명사전 등재 사실이 13일 새롭게 추가됐다. 2020.01.13 (사진 = 경기도 홈페이지 캡처)[email protected]

[수원=뉴시스] 박다예 기자 = 친일 잔재 청산을 추진하는 경기도가 13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역대 도지사의 친일 행적을 홈페이지에 명시했다.

이날 도에 따르면 도는 이달 9일 도청 홈페이지에서 역대 도지사의 약력과 친일 행적을 병기하기로 결정했다.

대상은 구자옥(具滋玉) 1대 도지사, 이해익(李海翼) 2대 도지사, 최문경(崔文卿) 6대 도지사, 이흥배(李興培) 10대 도지사 등 4명이다. 이들은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도의 기록에 따르면 구자옥 전 도지사(1946년2월~1950년7월 재임)는 일제를 찬양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논설을 발표하는 등 행위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됐다.

내무부 지방국장과 농림부 장관 이력이 있는 이해익 전 도지사(1950년10월~1952년9월)는 중일전쟁 전시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 ‘지나사변(중일전쟁) 공적조서’에 등재됐다.


최문경 전 도지사(1960년5월~1960년10월)는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2600년 축전기념장’을 받았다. 도지사를 지낸 이후 외무부 대기대사, 국민대 명예교수, 부산유엔묘지관리소 소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흥배 전 도지사(1963년12월~1964년7월)는 이해익 전 도지사와 마찬가지로 중일전쟁 전시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는 이유로 ‘지나사변(중일전쟁) 공적조서’에 등재된 사실이 있다.

일부 지자체가 친일 행적을 한 역대 지자체장의 사진을 홈페이지에서 삭제하거나 회의실 액자에서 내렸지만, 도는 사진 등 기록을 삭제하지 않고 친일 행적 병기를 택했다.

역대 도지사 기록을 지우는 것은 일종의 사실 왜곡이고, 기록 삭제 없이 친일 행적을 병기하는 것이 친일잔재 청산과 도민의 알권리를 위하는 길이라는 이재명 지사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도는 이번 주 도청 신관4층 대회의실에 걸린 역대 도지사 액자에도 친일 사실을 부기(附記)로 달 계획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친일 행적을 했다고 해서 역대 도지사의 사진을 떼내는 것은 도지사를 지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내용을 요약해 인물 설명으로 달았다”고 말했다.

현재 도는 올해 친일을 목적으로 제작된 유·무형 문화 잔재와 활용 현황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결과를 토대로 내년부터 본격적인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020-01-13> 뉴시스 

☞기사원문: [단독]경기도, ‘역대 도지사 친일 행적’ 홈페이지에 표시

화, 2020/01/14-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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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개 언론·시민사회단체,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 맞아 과거 반성 촉구
15일부터 조선-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 시작

(사진=전국언론노조 제공)

언론·시민사회단체가 올해 창간 100주년을 맞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향해 반민족적인 과거부터 반성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57개 언론·시민사회단체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하 시민행동)을 꾸리고 15일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두 언론사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민참여 릴레이 1인 시위를 시작한다. 조선일보는 오는 3월 5일, 동아일보 4월 1일 각각 창간 100년을 맞는다.

시민행동은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언론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은 과거의 범죄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이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양심적인 언론인들과 언론개혁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힘밖에 없다. 이 운동에 국민들이 적극 참여해 달라”고 밝혔다.

시민행동은 두 언론사가 일제강점기, 유신정권 등 민족과 민주주의의 위기 때마다 ‘반민족적’, ‘반민주적’ 보도 태도를 취해왔다고 설명하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100년은 자랑스러운 100년이 아니라 부끄러운 100년”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전국언론노조 제공)

이어 “조선·동아의 부끄러운 100년 역사는 오늘의 언론 종사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언론사와 언론인들은 언제나 ‘역사’를 의식하면서 기사를 쓰며 주장을 펴야 한다는 것”이라며 “언론의 기록들은 그대로 역사로 남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민행동은 “기자는 엄중한 책임감을 갖고 기사를 써야 한다. 언론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줘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때때로 국민과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며 “‘어제의 범죄를 묵인하는 것은 내일의 범죄를 조장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100년의 부끄러운 언론 역사를 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민행동에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자유언론실천재단, 전국언론노조, 한국인터넷기자협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등 언론단체를 비롯해 종교·시민사회 단체가 참여했다.

<2020-01-15> 노컷뉴스 

☞기사원문: “조선·동아일보의 부끄러운 100년, 되풀이해선 안 돼”

목, 2020/01/16-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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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노동자의 기본권을 무시하고 최소한의 윤리와 사회적 책무를 저버린 삼성을 규탄한다.

임직원의 연말정산 자료를 불법 사찰하고, 후원하는 시민단체를 불온단체로 규정한 삼성.

삼성의 반인권적인 행태에 강력 규탄한다.

*일시: 1월 16일(목) 오전10시30분
*장소: 삼성본사 (강남역 8번출구 앞)
*문의: 한국여성민우회 02)737-5763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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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NGO신문: 삼성의 ‘불온 시민단체’ 후원 임직원 사찰은 ‘민주주의에 중대한 위협’

목, 2020/01/16-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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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청 전경

[이뉴스투데이 경인취재본부 김승희 기자] 경기도가 도내 398개 읍·면·동을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명칭 변경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이 중 40%인 160곳이 당시 고유의 명칭을 잃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는 우리 고유의 정서와 의식을 말살하고자 창씨개명 뿐만 아니라 창지개명(創地改名)도 했던 것이다.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식민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1914년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우리나라 지명을 변경했다. 이 시기 전국 330여개 군이 220개 군으로 통합됐고 경기도는 36개에서 20개 군으로 축소됐다.

도는 이번 조사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역사연구소에서 2011년 발간한 ‘경기도 역사 지명사전(京畿道 歷史 地名事典)’에 수록된 읍·면·동 지명 변천사를 분석대상으로 정의하고, 관련 정보를 범주형 자료로 처리한 후 계량적 분포를 살폈다. 분석에는 전문여론조사 기관인 ㈜케이스탯리서치가 협조했다.

그 결과 과거 지명이 현재까지 유지된 읍·면․동은 137곳(35%)이고, 해방 전이나 해방 후를 포함해 지명이 변경된 읍·면·동은 228곳으로 분석됐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제가 변경한 읍·면·동 지명은 160곳으로 전체의 40%나 됐다. 그 외에 일제강점기 이전 또는 해방이후 행정구역 통합·분리 조정으로 변경된 읍·면·동은 68곳(17%)이었고, 33곳(8%)은 신규 행정구역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경기도 전체 지명의 절반에 가까운 우리 고유의 읍·면·동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유형별로 살펴보면 두 지명에서 한 자씩 선택해 합친 ‘합성지명’이 121곳으로 가장 많았다. 대표적인 ‘합성지명’ 사례로 성남시 서현동이 해당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일제는 둔서촌, 양현리, 통로동 등을 병합하면서 한 글자씩 따 서현동으로 변경했다. 수원시 구운동, 성남시 분당동, 용인시 신갈동, 화성시 매송면 등도 두 곳 이상의 지명을 합성해 만든 지명이다.

일제가 식민 통치의 편리성을 위해 숫자나 방위, 위치 등을 사용해 변경한 사례도 29곳이나 됐다. 광주시 중부면과 연천군 중면이 이에 해당되는데, 광주시 중부면은 1914년 군내면과 세촌면을 통합하면서 방위에 따른 명칭인 중부면으로 개칭됐고, 연천군 중면은 연천읍치의 북쪽이었던 북면을 ‘연천군의 중앙에 위치한다’해 중면으로 개칭됐다.

일제가 기존 지명을 삭제한 후 한자화 한 지명은 3곳이었다. 부천시 심곡동이 대표적으로, 일제는 1914년 조선시대 고유지명인 먹적골, 벌말, 진말을 병합하면서 심곡동(深谷洞)으로 변경했다. 심곡은 원래 토박이말로 ‘깊은 구지’라는 뜻이다.

지명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향토 정서가 왜곡된 사례도 있었다. 안성시 일죽면이 대표적인데, 일제는 1914년 죽산군을 폐지하며 남일면, 남이면, 북일면, 북이면, 제촌면을 안성군의 죽일면으로 만들었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욕이었기 때문에 죽일면은 결국 이듬해 일죽면으로 변경됐다.

이 외에도 현재는 문제없으나 일제 당시 일본식으로 개칭됐던 사례도 있다. 일본이 시가지 지명에 일본 도시에 붙이는 ‘정(町 마치)’을 붙였던 것인데, 수원시에 11곳이 있다.

그 예로 조선시대 고등촌이었던 수원시 고등동은 1914년 고등리가 되었다가 1936년 일본식 명칭인 고등정(高等町)으로 개칭됐다. 수원시 매교동, 매산동, 영화동, 우만동, 인계동, 지동 등도 모두 일제강점기에 ‘정(町 마치)’을 붙였다.

‘경기도 역사 지명사전’ 발간에 참여한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우리 조상들은 골짜기를 가장 이상적인 마을의 입지로 생각해서 마을 이름에 골짜기를 의미하는 ○○골, ○○곡(谷), ○○동(洞), ○○실 등을 많이 붙였으나, 이런 고유 지명들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며 “앞으로 지명(地名) 행정에 우리의 역사지명이 연구되고 반영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곽윤석 도 홍보기획관은 “반도체 수출규제 문제로 한일관계가 갈등국면에 놓인 이 시점에서 고유 지명이 사라졌던 역사적 치욕을 바라보며 진정한 민족의 독립과 문화 창달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끼게 된다”며 “향후 경기도는 시․군과 긴밀히 협력해 사라지거나 왜곡된 우리의 고유 지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경기도는 일제잔재 청산과 지역의 역사성·정체성 회복을 위해 현재 31개 시·군을 대상으로 행정구역 명칭 변경 의사 여부를 수렴중이며, 향후 대상지가 확정되면 행정구역 명칭 변경을 통해 고유한 행정지명 복원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2020-01-16> 이뉴스투데이 

☞기사원문: 경기도, 일본의 ‘창지개명’ 바로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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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투데이: 일본의 창지개명(創地改名), “경기도가 바로 잡아가겠습니다” 

☞위클리오늘: 일본의 창지개명, “경기도가 바로 잡아가겠습니다” 

☞엔디엔뉴스: 경기도, “일본의 창지개명(創地改名) 바로 잡는다”

금, 2020/01/17-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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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16일 삼성 규탄 기자회견
“경찰·법원에도 책임 있어… 수사 계속 진행돼야”

한국여성민우회 등 시민단체는 16일 오전 서울 강남 삼성본사 앞에서 삼성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단체가 직원들을 불법사찰한 삼성을 규탄하고 나섰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시민단체는 16일 서울 강남 삼성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민, 종교단체, 정당 등 11곳을 불온단체로 규정하고 임직원의 후원이력을 불법 사찰한 삼성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손팻말을 들고 “노동탄압 악질삼성 불법사찰 중단하라”, “반인권 반노농 끝판왕 삼성 규탄한다” 등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삼성은 반헙법적, 초법적 행위로 생각과 종교까지 통제하려 한다. 이는 헌법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라며 “삼성은 헌법농단 관행이 우리 사회에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노조를 하는 사람을 불법 미행하고 도청한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런 행위들이 근절돼야 한다”며 “경찰과 법원의 책임도 있다. 법원은 단 한 번도 삼성 앞에서 정의로운 잣대를 들이댄 적이 없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수사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발언자로 나선 윤택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위원장은 “삼성은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몰았지만 검찰과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며 “정의와 인권을 말하는 시민단체에게 빨간 딱지를 붙이는 현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의 삼성공화국”이라고 꼬집었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삼성의 연말정산 사찰이 언론에 나오기 전에 우리 사회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었다”며 “삼성은 사회적 책임을 다 한다는 의미를 다시 알아야 한다. 또한 이런 행위를 중단하겠다는 명시적인 약속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5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삼성은 진보성향 시민단체를 ‘불온단체’로 분류하고 계열사 임직원들이 연말정산 때 제출하는 ‘기부금 공제 내역’을 통해 후원 여부를 파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내용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재판 과정에서 알려졌다. 검찰은 법정에서 노조원뿐 아니라 일반 직원들의 개인정보도 불법적으로 수집했다며 ‘불온단체 기부금 공제 내역 결과’ 등의 문건을 공개했다. 2013년 작성된 문건에는 20여 개 계열사 직원 가운데 270명이 불온단체를 후원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2020-01-16> 뉴스클레임

☞기사원문: “노동자 기본권 무시한 삼성 규탄”

※관련기사 

☞YTN: 시민단체 “삼성, 직원 불법사찰…반인권적” 

[보도자료] 노동자 기본권 무시 삼성 규탄 “기업윤리와 사회적 책무를 저버린 삼성을 규탄한다!”

※지난기사 

한겨레: [단독]삼성, 직원 연말정산 정보 뒤져 ‘진보단체 후원’ 수백명 색출 

시사IN: 삼성은 어떻게 노조를 와해했나 

미디어오늘: 따뜻한 크리스마스는 없었다 

☞일요주간: 삼성, 직원사찰 ‘파문’… 진보단체 후원한 직원 ‘블랙리스트’ 

고발뉴스: 삼성, 연말정산 내역 뒤져 ‘진보단체’ 후원 임직원 색출 

한국NGO신문: 삼성의 ‘불온 시민단체’ 후원 임직원 사찰은 ‘민주주의에 중대한 위협’

금, 2020/01/17-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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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취소 항소심서 日변호사 주장
유족 “아버지 이름 야스쿠니서 반드시 빼내고 말 것”

도쿄고등재판소
[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적(敵)과의 합사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20일 도쿄고등재판소(법원)에서 열린 야스쿠니(靖國)신사 한반도 출신 군인 및 군속(군무원) 합사 취소 항소심 첫 공판에서 원고측 아사노 후미오 변호사는 논개를 왜장과 같이 모시는 형태의 사당을 가정해 야스쿠니 합사의 부당성을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을 고려할 때 한국인을 야스쿠니에 합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앞서 도쿄지방재판소는 지난해 5월 28일 야스쿠니 합사자 유족 27명이 지난 2013년 10월 제기한 제2차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합사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원고 측의 주장을 “합사 사실이 공표되지 않기 때문에 (합사됐다는 것이) 불특정 다수에 알려질 가능성이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유족들은 항소했고, 이날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열린 첫 항소심 공판에서 원고 측 일본인 변호인단이 구두변론을 했다.

구두변론에 앞서 야스쿠니 합사 한국인 유족 대표로 박남순 씨가 법정 진술을 했다. 박 씨의 아버지인 고(故) 박만수 씨는 1942년 11월 22일 남원 우체국에서 근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군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1944년 2월 24일 전사했다.

박 씨는 “저는 2005년 국가기록원을 통해 아버지 기록을 받고서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며 “왜 희생자인 아버지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가해자, 전쟁범죄자들과 같이 합사돼 있어야 하냐”고 지적했다.

도쿄고등재판소서 진술한 박남순 씨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야스쿠니 합사 한국인 유족 대표로 박남순 씨가 20일 도쿄고등재판소에서 법정 진술을 했다. 박 씨의 아버지인 고(故) 박만수 씨는 1942년 11월 22일 남원 우체국에서 근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군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1944년 2월 24일 전사했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아버지 유골을 찾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아버지 묘소는 텅 빈 채로 있다”며 “일본 정부는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할 때는 일본 사람이었다며 무단으로 합사해 놓고, 유골 조사를 할 때는 한국 사람이라며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죄에 대해 반성과 사죄는커녕 이렇게 무책임하고 반인도적인 일본 정부의 태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는 머나먼 이국땅 브라운(섬)에 묻혀 있는 내 아버지의 유골을 당장 찾아서 저에게 돌려주고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는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반드시 빼내고 말 것”이라며 “그것만이 침략전쟁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email protected]

<2020-01-21> 연합뉴스 

☞기사원문: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는 논개와 왜장을 사당에 같이 모신 격”

화, 2020/01/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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