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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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핵발전소유치찬반주민투표 논평 제 1보 (1쪽) |
11월 11일과 12일 양일에 걸쳐 실시된 영덕핵발전소유치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투표인명부 18,581명 중 11,201명이 투표하여 투표율 60.3%로 나타났으며, 이번에 투표를 실시하지 못한 부재자를 제외한 총유권자 대비 약 41%에 해당한다. 여러 차례의 보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장이 총력을 기울여 추진했던 주민투표의 투표율이 20% 전후였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이 투표율은 중앙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의 갖은 협박과 무차별적 방해공작을 뚫고 나온 것이라 더욱 값진 것이다. 투표결과는 12일 자정 현재 최종 집계되지 않았지만 유치반대가 압도적일 것으로 예측된다. 영덕군민은 청정 고향에 핵발전소를 유치할 수 없다는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영덕군민들의 압도적 반대의견은 지방자치단체장의 핵발전소 유치신청과 정부의 예정지 고시가 주민의견을 무시한 일방적 결정임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헌법과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추진되는 주민투표를 정부가 거부하고, 심지어 주민들이 군의회와 함께 자치적으로 실시하는 정당한 주민투표를 불법 운운하며 불온시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높은 투표율과 압도적 유치반대로 정부의 반민주주의적 태도와 주민의견을 배제하는 행정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영덕군민이 거둔 선거의 결과는 민주주의와 주민자치의 승리다.
이제 정부는 영덕군민의 핵발전소 유치반대 의견을 받아들여 영덕핵발전소 예정지 고시를 백지화해야 한다. 만약 정부가 앞으로도 영덕군에 핵발전소 건설을 강행하려고 한다면 영덕군민은 물론 시민사회 전체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영덕주민들의 주민투표 활동 지원을 위해 전국에서 영덕으로 몰려든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성금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성숙한 시민들은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핵발전소가 유치되는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닌, 우리 세대 나아가 미래세대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있다. 탈핵을 바라는 시민들의 의지가 이번 영덕군 주민투표 승리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정부는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지 말고 핵의존 정책을 중단하고 에너지정책을 근본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문의 : 염형철 010-3333-3436 [email protected]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삽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서 일합니까?
일자리와 일의 관계는 나뭇잎과 나무의 관계라는 진리를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나무가 병들면 잎사귀도 떨어집니다. 잎사귀를 고친다고 법석을 떨어도 나무가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든 나무를 고치기 위해서는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잘 치료해야 하듯이, 노동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노동의 근본 의미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하고 활동하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때 많은 일자리가 생겨날 것입니다. 노동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합니다. 그러나 노동의 영성이라는 근간이 없다면 일자리는 죽어가는 나무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거룩한 노동을 하는 땅의 사람들 Copyrightⓒ 밀레, 이삭줍기[/caption]
세계적으로 높은 아랍지역 청년실업률 Copyrightⓒ. 2013 AL ARABIYA NEWS[/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63826" align="aligncenter" width="530"]
중국의 청년구직자들 Copyrightⓒ. 2014 CNBC[/caption]
모든 생명은 이 지구를 떠나기 전에 생명을 위해 뭔가 공헌하고 싶어합니다. 스스로 행복한 삶, 그리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노동은 대량실업 시대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노동을 통해 행복과 의욕을 경험하는 사람은 일의 성과가 월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취미활동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취미활동에서 소명을 체험한 것입니다. 직업은 돈을 벌게 해주지만 그들은 취미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줄 수 있을 때 기쁨과 의욕을 느끼시지요?
2015 백두대간생태문화탐사가 아무 사고 없이 마쳤습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다들 인생의 한가지 맛을 얻어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번은 추풍령~덕유산까지 충북구간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갔었습니다
충북구간에는 속리산국립공원, 월악산국립공원, 소백산국립공원 등 세군데 국립공원이 백두대간 줄기에 있습니다
백두대간의 허리 지역으로 그 가치가 남다름을 일찍 인식하여 지금과 같은 조사활동과 보전활동을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2015 백두대간생태문화탐사가 진행됐던 6월26일 부터 7월3일 까지 7박8일간의 일정으로 시간을 돌려보겠습니다
- 6월26일 전날부터 시작된 비는 탐사 당일 오전까지 촉촉하게 대지를 적셔주었습니다
모두 봄 가뭄으로 힘들어하는 시기였기에 탐사를 시작하는 우리 또한 많이 반가웠고 좋은 징조라 생각하며 발대식을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허석렬 탐사단장님의 인사말씀으로 2015 백두대간생태탐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 이어서 이재은 청주충북환경연합 공동대표님의 무사히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격려사를 들었습니다
▼ 이사업을 후원해주는 충청북도 산림과에서도 응원해주기위해 오셨습니다
▼ 2009년도 부터 시간나실때마다 참석해주시고 있는 이광희도의원께서도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자! 이제 힘찬구호와 함께 출발입니다
이번 백두대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런지… 모두 기대반 걱정반이었겠죠!!!
▼첫날 산행이 없어 발대식도 오후에 했었고 도착하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습니다
첫날 숙소는 추풍령 바로 아래 있는 은편리 마을회관입니다
저녁 먹고 늦게 방문해주신 청주충북환경연합 연방희 대표님으로 부터 인사말씀 들었습니다
- 둘째날 6.27(토) 모든 아침은 식사로 시작하지요
▼점심에 먹을 간식과 주먹밥을 챙기고 있습니다
▼8일동안 우리들의 짐을 다음 숙소까지 그리고 대원들을 산행지까지 태우고 다닐 트럭입니다
▼몸을 풀지 않으면 산행하다 사고가 발생할수도 있습니다 매번 산행의 시작은 몸풀기 체조부터…
이번구간은 은편마을회관에서 괘방령까지 10.4km 거리를 걷게됩니다
▼화이팅도 외치고… 출발~~
▼ 산행에 앞서 이번 탐사대장이자 인솔을 해주실 박연수 대장님으로 부터 주의사항을 듣고 있습니다
▼ 마을 밭을 지나 이제 백두대간의 줄기로 진입합니다
▼ 본격적으로 탐사구간 조사를 합니다. 1구간은 추풍령에서 장군봉을 지난 안부까지 입니다
이 구간에 있는 식물군락을 조사하고 있는 초본팀입니다
▼ 능선에 올라서니 이렇게 온 몸이 시원해지는 바람과 함께 풍경도 펼쳐집니다
이 맛에 산을 오르겠지요^^
▼ 눌의산에서 단체사진 한컷
처음 시작하는날이 가장 힘들지요 그래도 표정이 아직까지는 좋으네요
▼ 백두대간 구간들이 비슷하겠지만 이번 구간은 워낙 유명한 산들이 많다보니
표식 리본이 나뭇가지에 지저분하게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참 쓸데없는 리본까지~~~
▼ 다들 이 한 여름에 더워서 산에 어떻게 가냐 합니다 그러나 산은 도시의 온도보다 많이 낮습니다 그래서 시원하답니다
초록이 싱그럽지요
▼ 이 무슨 호사일까요 산행중 점심을 먹고 가볍게 한숨 낮잠도 잡니다
새소리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들으면서 말이죠~~~
▼ 탐사중 가장 힘든 팀은??? 바로 관리실태팀 관리실태팀은 매번 이렇게 등산로 구간을 자로 재고 다녀야 합니다
관리실태 홧팅!
▼ 산행중 5 ~ 10분정도 생태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이종범 선생님이 해주시고 있습니다
▼ 드디어 첫날 구간이 끝났습니다 시작하면서 설레었고 끝나면서 시원한~~~
▼ 숙소는 마을회관이나 야영이 기본입니다 아무래도 집과 비교할수는 없겠지요
땀 흘리고 내려와 계곡물에 씻고 다들 편안해 보입니다 두번째 숙소인 용촌리마을회관입니다
▼ 이날은 에너지충전팀이라고 말씀하시던데 짐을 옮기는 지원팀 말고 이렇게 방문하셔서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첫날 발대식이 시작되기 전 이근호 회원님은 맥주를 후원해 주셨습니다
둘째날 방문해주신 조용숙회원이 아들 재후와 함께 와서 시원한 맥주, 수박, 통닭, 과일등을 가지고 왔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충북지속가능발전협의회의 김대광 국장과 정태영 팀장이 또 방문하며 ……

▼ 청주충북환경연합 이재은 대표님은 시원한 맥주를 아이스박스에 담아 오셨습니다 수박도 함께
사) 풀꿈환경재단 상임이사님은 쐬주를~~~
▼ 하루 일과 마무리 시간입니다 각 팀별 조사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입니다
▼ 좀 피곤하기도 하지요^^
▼ 청주충북환경연합 영동지부 지부장님도 막걸리와 수박을… 모두 고맙습니다
▼ 염우 이사님의 백두대간에 대해 ’7인7색’ 이야기 시간입니다
▼ – 6.28(일)둘째날입니다
기상 5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가벼운 체조로 시작합니다 서로 안마도 해주면서요
▼ 이번 구간은 괘방령~우두령까지 12.4km 거리 입니다
산행 전 몸풀기 체조가 날도 진화하는것 같습니다
▼ 계단이 이렇게 무너져 있어 보수가 필요한 구간도 있었습니다
▼ 2012년 같은구간 똑 같은 장소에 사람만 다른 사진이 있습니다
▼ 드디어 우두령^^
▼ 하루의 마무리시간 팀별 조사내용 발표시간
이날은 흥덕리경로당에서 하루를 신세졌습니다
- 이날은 박연수 탐사대장이 나가시고 김동화 인솔대장이 들어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이 끝나는 날이다보니 많이 분들이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 그리고 다시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박설아대원이 들어오며 아버님께서 또 아이스박스에 맥주를 한가득,
이수현이 합류하며 이광희 도의원께서 과자를 또 한가득… 모두 고맙습니다^^
▼ – 6.29(월) 우두령~ 삼도봉주차장 까지 10.8km 길이입니다
시작은 항상 몸풀기 체조로
▼ 이 구간은 건강한 숲이 참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 몇일이 지나다 보니 이제 양발도 부족 옷도 부족해 이렇게 배낭에 걸고 다니는 풍경도 있네요
▼ 나뭇잎으로 사랑을 전하세요^^
▼ 어김없이 식사후 오수를 즐기는 시간, 무리한 발도 쉬어야겠죠!!
▼ 드디어 삼도봉입니다
이곳은 충북, 전북, 경남이 만나는 지점으로 매년 10월경 이곳에서 삼도가 함께 행사를 연다고 합니다
▼ 가야 할 능선이 웅장하게 펼쳐 있네요
▼ 처음 야영하는날 이었습니다
사람의 불빛하나 없어 반딧불이가 저녁하늘을 수놓는 곳, 물이 어름같이 차가워 땀에 찌든 몸도 담그기 힘들었던 곳,
오직 우리들의 소리와 나뭇잎 부딪는 소리만 들려오는 곳, 보름에 가까운 달빛이 서럽도록 맑았던 곳
다들 기억하시죠^^
▼ -6.30(화) 삼도봉주차장~덕산재구간 13.1km입니다
이곳부터는 우리가 처음 조사하는 구간입니다
2012년도에는 삼도봉까지만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 안개 자욱한 숲이 신비합니다
▼ 7박8일중 유일하게 비가 온 날입니다 오후부터 시작된 비는 그날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 저녁에도 계속 비가 내려 부득이하게 야영을 접고 아랫마을 민박집을 빌렸습니다
이곳에서 저녁식사도 주문해서 먹고 하루 마무리 시간도 가졌습니다
▼ – 7.1(수) 덕산재~빼재 구간 14.3km로 이번 탐사중 가장 긴 구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구간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산 두개를 넘어야 했거든요
▼ 탐사 내내 어려움이 많았는데 힘들어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소 같은 웃음을 선사한 대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세안 대원~~~ 모두들 고마워 하더라는…………??
▼ 이번 탐사에서 이 멋진 사진들 찍느라 수고한 김다솜 대원 또 이성우 대원
멋진 풍경 눈과 마음으로만 남을뻔했는데 사진으로도 남겼네요 본인도 이렇게 사진찍는 자세가 멋진줄 몰랐겠죠!!!
▼ 숲으로만 다니던 마룻금이 이제 시원해졌습니다 많이 내려왔고 다시 올라가야 하지만 풍경은 굿~~~
▼ 이날 산행인솔 마지막날 이었던 김동화 대장님이 끝나고 내려오는 대원들을 한명한명 수고했다고 안아주시는데 울컥했습니다
정말 따스해서요^^
▼ 그리고 허석렬 단장님이 피자를 사오셔서 내려오는 대원들의 입을 호강시켰답니다
피자뿐아니라 곱창전골도 사오셔서 푸짐한 저녁을 먹었습니다
▼ 오늘의 숙박지는 덕유산자연휴양림입니다 탐사 시작한 이래 가장 좋은 숙소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3일동안 수고해주신 김동화 인솔대장님이 개인사정으로 나가야 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모두 감사하다고~~~~
▼ 드디어 백두대간의밤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초본팀부터 시작합니다
그 동안 조용조용하기만했던 황연주 대원의 ‘마리아’ 열창 배꼽 빠지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 오세안 대원의 이번 탐사대원들 흉내는 ~~~~ ㅎㅎㅎㅎㅎ
▼ 목본팀은 노래를~~~~
▼ 그동안 가장 고생했던 관리실태팀은 팀원들이 총 출동해 대원들의 흉내를내고 문제를 맞추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네요
그런데 지영이는 선물을 뭘 받았나???
▼ 심사위원으로 수고해주신 4분 많이 고민되실듯하네요^^
▼ 그래서 받은곳은 대원들이 함께 몸으로 표현했던관리실태팀입니다
축하해요^^
이날 들어와 저녁을 맛나게 해준 박종순 회원, 정진 회원, 신희주 회원, 정란희 회원 모두 고맙습니다
녹색청주협의회에서는 시원한 맥주를 후원해주셨어요
박연수대장님 후원도 함께…
▼ 7.2(목) 자! 이제 덕유산 빼재~향적봉대피소까지 10.6km구간입니다
좀 힘들기도하고 기대도 되는 구간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인솔대장으로 강성구 대장이 함께 했습니다
2009년 백두대간탐사에서 인연이되어 2012년 백두대간보전시민연대 활동가로 일했고
지금은 ‘월간 마운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간 내줘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 7박8일동안 산행총괄을 해준 김경중 대원입니다
▼ 이제 이곳에 있는 벌레들과도 많이 친해진듯
▼ 1500미터 고지에 이르니 산길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네요^^
▼ 덕유산에 왔으면 향적봉은 올라야죠
곤돌라타고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지만~~~ 우리는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기념사진 한컷
▼ 정말 하루면 끝나는 탐사입니다
이제 이 멋진 풍경도 내년을 기약해야겠죠~~~ 시원 섭섭할듯
▼ 마지막날 숙소는 향적봉대피소 입니다 우리 외에 2명만 있어 완전 전세냈습니다
1500 고지 숙소에서 하룻밤이라 기대가 많이 됐는데……
▼ 역시 삼대가 잘한거로는 별빛 쏟아지는 하늘은 볼수 없었습니다
자욱한 안개와 밤을 같이 했는데 나름 멋있었다는
▼ 7.3(금) 이제 마지막날 아침입니다 이곳에서도 체조는 뺄수 없죠
- 향적봉대패소~삿갓재구간까지 10km가 조금 넘는 구간인데요
원래는 남덕유까지 갈 예정이었지만 마지막날 너무 늦게 끝나면 안될것 같아 구간을 좀 줄이고….
빠른 시간안에 삿갓재에서 남덕유까지는 별도로 산행예정입니다
▼ 마지막날 몸은 무거운데 맘은 날개같은 날~~~
풍경은 눈도 시원하고 바람도 시원하고~~~
▼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는데 뭔가 자꾸 뒤에서 땡기는것 같죠!!!
▼ 7박8일 열씨미 걸었는데 이곳을 보니 다리가 풀렸다는 대원이 있었습니다
피곤해 보이지만 행복해 보이기도 합니다
▼ 마을에 내려와 계곡에서 발을 담그기도 하고요
▼ 마지막 기념촬영^^
▼ 청주로 올라와 해단식을 가졌습니다 해단식에서 우수대원을 뽑게되는데
우리에게 큰 웃음을 준 오세안 대원이 뽑혔습니다 받을만 하죠~~~
▼ 그동안 수고했던 2015 백두대간생태탐사 대원들입니다
먼저 윗사진에 있는 허석렬 탐사 단장님
아래 사진에 있는 박연수 탐사 대장님

▼ 3일 동안 인솔해주신 김동화 인솔대장
▼ 2일동안 인솔해주신 강성구 인솔대장
▼ 이번 탐사 총괄을 담당했던 오경석 대원

▼ 7박8일간 산행총괄을 담당했던 김경중 대원

▼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 고주범 대원
▼ 4차원 소녀 김나림 대원
▼ 사진뿐만 아니라 이것 저것 할일이 많았던 김다솜 대원
▼ 기록을 담당하고 전일정 참여하지 못해 아쉬워하던 김말숙 대원
▼ 멀리 평택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충북대에서 숲치유 공부를 하고있는 김윤수 대원
▼ 몇년간 백두대간탐사에 참여했고 전일정 참여가 앞으로는 힘들듯하여 이번에 전일정 참가했다는 민의기 대원
▼ 다리가 아파 고생고생 생고생했지만 기억에 남는 산행이었고 앞으로 할까 말까??? 고민중인 박설아 대원
▼ 제주환경연합 집행위원장이었고 지금은 경기대 교수로 있는 박진우 대원
▼ 이번 탐사에서 목본팀장을 하며 대원들에게 구라와 웃음의 경계를 없게 만들었던 박현수 대원
▼ 단 이틀 올해 자신의 생일 선물로 백두대간탐사를 선택했다는 신선영 대원
▼ 짧은 일정이라 아쉬움이 컸던, 내년에는 꼭 다 참여하겠다는 신준수 대원
▼ 웃음과 끼를 제대로 발산해 미친× 소리도 들어야 했던 오세안 대원
향유고래 소리가 그리울듯~~~
▼ 무릎이 움직이기 힘들정도로 아팠음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이미경 대원
▼ 올해는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역할을 담당했고 내년에는 반드시 운전면허를 따 지원을 하겠다던 이성우 대원
▼ 중3때 아빠와 함께 참여했던 계기로 고등학교때도 참여하고 이제는 당당한 대학생으로 아빠없이 묵묵히 걷던 이수연 대원
▼ 이틀동안 참여해 찍어준 사진이 모두 멋있었고, 버섯에 대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주던 이종범 대원
▼ 멀리 용인에서 정말 때가 잘 맞아 참여했고 지금은 회사일을 잠시 쉬면서 산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이주식 대원
▼ 이번 탐사에서 관리실태팀장을 맏았고
2012년, 2014년, 2015년 전일정 참여해서 수많은 별명과 개그를 남겼던 이창호 대원, 이번 별명은??? ‘꼭지’ 뭘까????
▼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직장이 있다보니 이번 탐사에 참여하게됐고
예전 환경연합 활동가로 있을때 지원만 시켜서 이번에는 직접 발로 걷도 싶어 신청했다는 임창우 대원
▼ 이번 탐사에서 초본팀장을하고 백두대간탐사를 오기 위해 휴가 7일이나 쓰신 전숙자 대원
▼ 하루 참여했지만 의미있었겠죠!!! 정남득 대원
[민변 논평]
집회·시위의 자유를 확인한 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
서울행정법원 제6행정부(재판장 김정숙 판사)는 12. 3. 오후, 백남기농민쾌유와 국가폭력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가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하여 제기한 옥외집회 금지통고 처분의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는 결정을 하였다.
재판부는 옥외집회 금지통고 처분의 효력이 계속될 경우 범대위가 예정된 시각에 집회를 개최할 수 없게 되어 범대위가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을 수 있는 반면, 집회가 집단적인 폭행, 협박, 손괴, 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하거나 집회 개최장소와 주변 도로의 교통 소통에 장애를 발생시켜 심각한 교통 불편을 줄 우려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위와 같은 재판부의 결정은 헌법상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가 우리 사회에 살아있음을 확인한 것으로, 집회·시위를 마치 허가제처럼 운영하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다. 경찰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위 집회를 충실히 보장하고, 차벽 설치·물포 및 최루액 살수 등 집회 참가자들을 위협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임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확인한 법원의 결정을 다시 한 번 환영하며, 광장에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울려퍼질 수 있도록 공권력남용 감시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2015년 12월 3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 장 한 택 근
민변의 민변: 민경한 변호사를 만나다
안녕하세요, 민경한 변호사입니다. 성씨가 민씨(閔氏)이기 때문에 민변 회원이 되는 건 생래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던 셈이죠(웃음), 오랫동안 유일한 민씨 회원이었고 그래서 ‘민변의 민변’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사법시험 3차 시험 낙방과 직장에 다니다가 변호사가 되다
저는 1983년 성대 법대 졸업 후 사시공부를 시작해서 83년 1차, 84년 사시 26회 2차에 합격했는데, 당시 2차 시험이 70%, 3차 시험이 30% 반영되었어요. 3차 시험에 모교 교수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같이 국가관·책임감·지도력·준법성 등 6개 항목을 수우미양가로 평가하여 위 교수평가 성적이 전체점수에 30% 반영됐어요. 당시 모교 교수가 학생운동 전력 등으로 나에 대한 교수평가 성적을 안 좋게 주어 2차 성적이 합격권에 있었는데 3차에서 떨어졌어요. 이 제도는 너무 불합리하다고 해서 26·27회 두 번 시행하고 없어졌지요. 1차 시험이라도 면제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3차에서 떨어지면 1차부터 다시 봐야 했어요. 다음 해 1,2차 동시 합격하려고 공부했는데 1차에서 떨어졌고, 빈농의 장남으로 공부를 계속하기 어려워 모 투자신탁 회사를 1년 정도 다녔죠. 원래는 3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저축도 안 되고 공부도 안 되서 87년 2월에 그만두고 그해에 사시 29회에 1,2,3차 합격했어요.
연수원을 수료하고 광주에서 개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미국으로 유학 가는 고교 선배 사무실을 인수하느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인천에서 90년 4월 1일, 개업을 했지요. 그때는 변호사 환경이 좋았고, 만 6년 동안 골프도 안치고, 토요일도 출근하고, 사무장한테 맡기지 않고 모든 사건을 직접 처리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경제적 여유는 약간 생겼는데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더라고요. 당시 개인 사무실을 하다가 외국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충전을 위해서 미국으로 갔지요. 96년 5월부터 97년 8월까지 시애틀 워싱턴대학교 로스쿨 객원연구원으로 15개월을 보냈어요. 귀국하면서 고향인 광주로 갔지요.
광주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쌓았지만 2006년 2월,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좀 큰 데서 놀고 싶었고, 당시 공직에 진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또 제가 연극이나 공연, 스포츠 경기 관람, 외국 여행을 좋아하여 문화생활을 하고 싶었고 당시 중학생이던 자녀들 교육문제도 있었고요. 광주에서 8년 반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온 지 12년 되었네요. 사업적으로는 광주보다 훨씬 못해요. 지금은 서울로 온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해요.
법조인이라면 잘못된 법과 제도, 관행의 문제점에 관심을
제가 2006년에 90년부터 2005년까지 15년 동안 법률관련 신문이나 일간지에 썼던 칼럼을 모아서 ‘민변호사의 조용한 외침’이라는 책을 냈어요. 2012년에는 22년간 변호사 활동하면서 법정 안팎에서 보고 들은 판사·검사·변호사들의 임상보고서 격으로 ‘동굴 속에 갇힌 법조인’이라는 책을 냈고요. 금년에는 2006년부터 최근까지 각종 잡지에 썼던 두 번째 칼럼 모음집을 낼 계획입니다. 이전에는 젊었고, 의욕과 열정이 넘쳤지만 이제 열정이나 기력이 떨어져 3번째 책을 마지막으로 책은 더 이상 내지 않을 생각이에요.
저는 잘못되거나 부당한 걸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어서 틈틈이 글도 쓰고 토론회도 나가고 언론 인터뷰도 많이 했어요. 부당하고 잘못된 법이나 제도, 관행을 시정해보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많이 노력했지요. 법조인들은 법조계나 사회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한데 많은 법조인들이 점잖은 채 하면서 생래적으로 그런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특히 문제 있는 법조인에 대한 비판은 아주 싫어하더라고요. 저는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옳은 것은 옳다고 원칙을 지키며 소신 있게 강하게 말하다보니 ‘미스터 쓴 소리’, 원칙주의자, 용기와 소신 있는 변호사라는 평가와 함께 성격이 너무 강하다,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들어왔지요. 이런 게 바탕이 되어 2014년 민주당에서 저를 특별감찰관으로 추천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법조인이 법으로 밥을 먹고 있고, 법과 제도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잖아요. 민변 사법위원회는 법과 제도 특히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안을 연구하는 위원회입니다. 법조인이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사법위원회에 들어와서 사법제도, 법원, 검찰, 변호사들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같이 공부하면 좋겠어요.
변호사 초년생에게 충격을 주었던 법조계의 고질적인 세 가지 병페를 접하다
제가 이렇게 사법개혁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개업 직후 한 달 만에 법조계의 여러 가지 고질적인 병폐를 목격하게 되었어요. 개업 첫날, 사무장 지인으로부터 조그만 형사사건을 수임했는데 소개비를 달라는 거예요. 많은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소개비를 주었지요. 두 번째는 며칠 후에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 중인 고교친구의 형 사건을 변론하게 됐어요. 부동산 미등기전매(국토이용관리법 위반)로 구속 기소되었고, 법정 최고형이 6월이에요. 보석까지 청구해서 기각됐는데, 친구가 변호사를 추가 선임하겠다고 양해를 구해서 하지 말라고 했죠. 법정 최고형이 6월이고, 이미 보석도 기각됐고, 변호사가 별로 할 일이 없는 사건이었어요. 그런데 고법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내 수임료의 10배 수임료를 받으면서 사건을 수임하더라고요. 그런데 담당 판사가 전관예우를 안 해주고 1심에서 4개월 실형이 선고되었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갔지요. 1심 판사가 참 괜찮다 싶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이 안 되더군요.
또 하나는, 제가 검사실에 변론하러 갔는데 검사가 책상 위에 신발을 벗은 두발을 올려놓은 채 발을 내리지도 않고 나를 세워놓는 거예요. 너무 무례하게 대해서 말 한마디 않고 나와 버렸지요. 그때 검사의 무례한 행동을 강하게 질책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냥 나온 게 몹시 후회가 돼요. 그땐 개업한지 한 달도 안 되서 검사한테 그럴 용기가 없었겠죠.
이렇게 한 달 사이에 좋지 못한 세 가지 사건을 목격한 거예요. 소개비 지급, 전관예우, 검사의 갑질. 그러다 보니 ‘내가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나. 법조계가 원래 이런 곳인가. 이 사람들만의 개인적인 일탈인가’ 라는 고민과 혼돈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90년 6월, 전국에서 최초로 인천 변호사회에서 변호사 자정작업을 시작한 거예요. 그때부터 앞장섰다가 지금까지 열심히 하게 되었지요. 제가 그때 두 가지를 다짐했어요. 하나는 변호사를 폐업하는 그날까지 정도를 걷는 변호사가 되자. 또 하나는 내가 평생 법조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몸담고 있는 법조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서 사법개혁에 일조를 하자.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나름대로 두 가지 다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런 쪽에 관심이 많고 강한 글도 쓰고, 또 변협 감찰위원 5년을 하다 보니 광주와 인천에서 동료 변호사들이나 기자들이 오히려 정보를 제공해주면서 글 좀 써 달라, 감찰위원으로서 문제 삼아 달라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남보다 법조계 비리는 많이 알게 되었지요.
민경한 변호사, ‘민변의 민변’이 되다
민변은 92년도 하반기에 가입했습니다. 민변이 지향하는 가치나 역할, 활동 등에 대해 적극 공감하고 내 가치관이나 성격에도 맞아서 당연히 가입했지요. 한편으론 민변 회원은 생활에서도 올바른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변호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스스로를 규율하기 위한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지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서울에서 진행되는 월례회나 행사에 자주 참석하기가 어려웠어요. 가끔 본부에서 사건을 배당해 주면 몇 개 사건을 변론하는 정도에 그쳤지요. 가끔 월례회에 참석해도 동기나 동문이 별로 없어서 어색하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지방회원으로서는 월례회나 총회에 많이 참석한 편이었지요.
97년 9월,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광주에서 개업 했는데 당시 민변 회원 6명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활성화되지 못했지요. 99년에 연수원을 수료한 28기 변호사 3명이 민변에 가입하더라고요. 나중에 3명 모두 지부장을 했지요. 기존 회원 6명과 28기 회원 3명에 제가 2명을 더 가입시켜서 총 11명으로 민변 광주 전남지부를 창립하고 제가 4년간 초대·2대 지부장을 했는데 최근 10대 지부장이 취임했어요. 회원이 50명이 넘고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지부가 되어 초대 지부장으로서 상당히 흐뭇해요. 2006년 2월, 서울로 오면서 2005년 가을 ‘평양 아리랑 축전’ 때 권유받은 것을 계기로 민변 활동을 열심히 하는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무법인 상록에 합류했어요. 이후 사법위원장, 부회장을 하면서 민변 활동을 열심히 했지요.
헌신적으로 공익활동을 하는 민변 회원들과 인권 감수성이 부족한 변협 임원들
변협 인권이사, 인권위원을 하면서 변협 활동도 했는데, 공익활동에 대한 민변 회원들과 변협 위원들의 헌신성은 차이가 많지요. 민변 회원들은 자기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면서, 무보수로 헌신적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데 변협 임원이나 위원들은 스펙을 쌓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 수당에 관심도 많고 헌신성도 많이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2014년, 제가 변협 인권이사 때, 변협 인권보고서를 발간하는데 집필자들이 마감 기한도 많이 넘기고 내용도 소홀했어요. 마감 후까지 3 파트나 펑크를 내서 민변의 조영관, 강문대 변호사가 세월호 부분을, 장완익 변호사가 과거사 분야를 대신 맡았어요. 평소 그 분야에 관심 있고 능력 있는 민변 회원들 아니었으면 짧은 기간에 대신 집필하는 게 불가능했지요. 결국 장애인 파트는 보고서에 싣지 못했어요.
또한 변협 임원들은 매우 보수적이고 인권 감수성이 너무 부족해서 제가 인권이사 때 집행부 회의나 단톡 방에서 자주 싸웠지요. 당시 최고 현안이었던 국정원 댓글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양심적 병역거부 토론회, 국정원법 개정, 국회의 국정원 합동신문센터 토론회 공동 개최처럼 의견이 대립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발표도 안하고 토론회도 못하게 했죠. 별로 의견대립이 없는 장애인, 일제피해자, 여성문제 등에 대해서는 의견을 피력하는데 공권력남용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국민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를 해요.
2013년 국정원 댓글사건 때, 전 국민이 규탄성명을 내고 시위를 할 때, 저는 당연히 변협에서도 규탄성명을 내야 한다고 했죠. 결국 못 냈는데 반대한 사람들이 “그것은 민변이나 야당이 제기한 문제라 부적절하다, 정치적인 문제이지 인권문제가 아니다. 시기가 아니다” 정말 여러 가지 한심한 이유로 반대하는 거예요. 제가 너무 화가 치밀어 집행부 카톡방에 ‘민주주의와 법치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수많은 국민들이 규탄성명을 내고 시위를 하는데 인권단체라는 변협이 규탄성명 하나 못 내냐. 변협 집행부 임원들이 이렇게 인권의식이 없느냐’고 올리기도 했지요. 2013. 10. 경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때도 변협 집행부가 변협 명의 성명은커녕 인권위 명의의 성명이나 의견서도 못 내게 방해를 해서 강하게 논쟁을 하다가 이런 집행부와 더 이상 함께 하고 싶지 않아 인권이사 사퇴 선언을 했어요. 인권위원들이 말리고 해서 다시 하게 되었죠. 2년 동안 변협 집행부와 인권 관련 사업으로 정말 많이 싸웠고,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소위 민정수석 ‘김영한 비망록’의 2014. 6. 28.자에 “변협 첫 직선제 회장→회원들에게 민감/ 내부에 민경한 민변 출신자가 인권위원장/ 내부에서 발언권 강하고/ 나이, 고향, 법인명” 등 제 이력과 성향까지 기재되었더라고요.
2014년 11월, 법원 국제인권법 연구회에서 변협에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토론회 공동 주최를 제안했는데 변협 집행부에서 변협은커녕 변협 인권위 명의로도 못 하게 하더라고요. 제가 하도 강하게 주장하니까 협회장이 비밀투표를 하면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집행부 회의에서 처음으로 비밀투표를 했어요. 그런데 17:9로 찬성의견이 더 많았어요, 회장이 오판한 거죠. 그래서 인권위 명의로 토론회를 하게 되었지요. 당시 발제자인 K 판사가 상당히 전향적이고 강한 발제를 했어요. 그런데 변협은 법원 학술단체와 변협은커녕 인권위 명의로도 양심적 병역거부 토론회 하나 못하게 하려고 비밀투표에 부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해요. 변협에서는 의견 대립이 있고 민감한 인권 사안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거의 취급을 안 해요. 저는 그런 문제일수록 오히려 변협이 최대 인권단체로서 양쪽 주장을 분석, 종합, 비판하고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민변 회원들은 자기 시간과 노력, 비용을 투자해가면서 헌신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보지요. 사회문제에 관심도 많고 전문성과 실력도 있고 보고서나 성명서 같은 문건도 잘 작성하고 일을 정말 잘해요.
‘민변’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러울 때
저는 누구 못지않게 항상 민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가끔 주변에서 민변을 폄하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민변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또 민변이 얼마나 ‘남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하는지 얘기해줘요. 민변 홈페이지나 민변이 발간하는 자료집을 보라, 민변 회원들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해주지요.
또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이나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각종 간첩사건은 누군가 꼭 변론을 해야 하지만 일반 변호사들은 많은 수임료를 준대도 맡지 않을 것이다. 기록이 수만 쪽 되고, 재판도 수십 번 해야 하고, 종북으로 찍히는데, 민변 변호사 아니면 이런 사건을 누가 변론하겠어요. 민변 변호사들은 실비 정도의 수임료만 받고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을 들여가면서 헌신적으로 변론하잖아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때는 변호인단의 한 명인 우리 법인의 천 변호사가 수원까지 다니면서 아주 적은 수임료만 받고 1심만 1주에 3, 4회씩 50번 재판을 하고 준비도 많이 했어요. 민변 회원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되요.
특히 자부심을 느꼈던 일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때였어요.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과 국민당이 탄핵소추안을 작성해야 하는데 소추사실은 많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니까 민변으로 연락을 하더라고요. 국민당 담당 의원은 저한테 연락을 하고, 민주당 의원은 다른 민변 간부에게 연락해서 혹시 민변에 탄핵소추안에 참고할 자료가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민변에서 소추안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해줬더니 그것을 토대로 탄핵소추안을 만들었어요. 밖에서 우리 모임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고 민변에서 준비를 잘하고 있었지요.
또 하나 개인적으로는 소송 상대방이 대기업, 국가기관 같이 힘 있는 집단일 때 ‘일반 변호사들이 그들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상대측에 매수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는 분들이 있더군요. 그런 분들 중 몇 분이 민변 지부장, 민변 부회장이면 상대편의 권력에 굴복하거나 매수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찾아온 분들이 있었어요.
선관위원장으로서 바라보는 민변 회장이 갖춰야 할 덕목
예전과 달리 민변 회원들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해졌어요. 민변 초기와는 달리 여러 현안에 대해 의견 합치가 어렵거나 대립되는 경우도 있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새로 회장이 되시는 분은 다양한 회원들의 갈등을 줄이고 화합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또한 민변 규모가 성장하면서 사무처도 커졌고, 민변이 다루는 분야도 엄청 확대됐어요. 회장이나 총장이 그런 일을 다 조율하기엔 어려움이 많겠지만 그런 일을 착오 없이 신경 써서 잘 지휘, 감독해야겠죠.
사무실 사정이 어렵더라도 열심히 민변 활동을
변호사가 열심히 변론해서 의뢰인을 위해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률가라면 부당하고 잘못된 법, 제도나 관행, 공권력 남용 등에 대해서 비판과 감시를 하고 대안도 제시하는 역할도 필요하다고 봐요. 저는 그런 방법의 일환으로 지금까지 법률관련 잡지나 일간신문에 28년 동안 120편정도 칼럼을 썼고, 토론자나 발제자로 30번 이상 참석했고 각종 신문과 방송 인터뷰도 수없이 했죠. 법무부 감찰위원과 정책위원(3번), 변협 감찰위원(5년)도 했었고, 25명의 예비법조인들(연수생 20명, 로스쿨 5명)의 실무수습 지도를 맡아 법조인의 자세나 역할에 대해서 많이 얘기해줬지요. 저는 변호사들이 법조관련 문제나 사회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글 기고, 토론회 참석, 각종 위원회나 NGO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개혁활동에 동참했으면 좋겠어요.
젊은 회원들이 ‘선배님들 때하고는 다르다. 지금은 사무실 사정이 어려워 민변 활동이나 공익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말하는데 이해는 돼요. 옛날에 비해 법조환경이 너무 악화되어 사무실 유지가 어렵잖아요. 회원들이 민변활동을 하기에는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어렵다고 사무실에 가만히 있으면 다른 뾰족한 수도 없고 더 침체되지요. 어려운 때일수록 가치 있는 일에 참여하면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민변 위원회나 월례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선후배들과 함께 활동하면 변론 지식이나 경험도 쌓이고, 선후배 또는 시민단체 활동가, 그 분야 전문가들과 인적 네트워크도 형성할 수 있어요. 그렇게 인맥과 전문성이 쌓이면 그 분야에서 사건을 수임할 가능성도 높아지잖아요. 사무실이 어렵다고 너무 소극적이고 쳐진 상태로 있지 말고, 가치 있는 일에 시간, 노력을 투자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면 좋겠어요. 꼭 여유가 있을 때만 공익활동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 때는 시절이 좋아서 특정 분야의 전문화, 특화의 필요성이 별로 없었지요. 앞으로는 변호사 수도 많고 사무실 유지도 어려운 만큼 치열한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관심 있고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선택해 전문성을 확보해야지요. 또한 변호사 초기에는 지식과 경험을 쌓고 고객을 확보하는 의미에서 어렵고 돈 안 되는 힘든 사건도 가리지 말고 많은 변론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고 봐요.
민변에 대한 부탁 말씀은
제가 자주 지적하듯이 민변 행사에 회원들 참석이 너무 저조해요. 회원 수는 많이 늘었는데, 월례회나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회원 수는 별로 안 늘었잖아요. 월례회에 가면 좋은 강연도 듣고, 공짜로 밥 주고, 술도 주잖아요. 총회나 월례회 등에 자주 참석해서 함께하면 좋겠는데 참석이 저조해서 아쉬워요.
개인적으로는 민변 활동이 너무 방대해서 선택과 집중이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8년 촛불 집회 이후 최근 10년 사이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위원회도 많아졌어요. 회원 수가 많이 늘어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인력,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백화점식 활동 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활동하는 사법위원회는 현장성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법과 제도에 대한 개선을 위해 이론적인 접근도 중요하지만 너무 거대담론에만 머물지 말고 잘못된 검찰 수사나 법원 판결 등에 대해 조사하고 사례를 수집해서 보고서를 내고 대안을 제시해야죠. 전관예우, 판검사의 일탈된 행동에 따른 징계 사례, 잘못된 수사나 재판 사례,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관대한 양형 분석자료 등 하려고 하면 많이 있지요. 그런 점은 노동위원회가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법위원회도 현장성이 가미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변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게 아직 쑥스럽고 변호사 생활에 애로사항이 있는 후배들은 언제든지 저를 찾아오세요. 저는 사람과 술을 좋아하고, 특히 민변 동료들과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민변의 민변’이니까요. 민변 행사에 자주 참석하고 대부분 끝까지 남아서 함께 술을 마셨지요. 작년 송년회 때도 마지막까지 남은 최후의 용사 10여 명 중 한 명입니다. 제 또래가 없어 아쉬웠지만요. 금년 회갑이 되었고, 40년간 술을 많이 마셨으니 예전만큼 체력이 안 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민변 후배들과 점심을 먹거나 저녁에 술 마시면서 즐겁게 진솔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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