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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제시대에도 없던 건물… 연해주에 세운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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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제시대에도 없던 건물… 연해주에 세운 독립운동가

admin | 화, 2021/04/06- 22:10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②

– 이 기사는 1편 조선인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사람에서 이어집니다.

“한인사회당은 그 뒤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나 이동휘가 이 당을 만든 것은 단순히 한국 독립 후원자를 얻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이동휘란 사람은 원래 구한국군의 정령(正領) 출신으로 열렬한 반일민족운동자이지, 사회주의 이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초기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짐짓 공산당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많았는데 볼셰비키 집단이 이들을 항일운동에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동휘는 도량이 넓고 활동력이 큰 독립운동가였다.”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 성재 이동휘 한인사회당은 1918년 4월 28일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자 사회주의 정당이다. 이동휘는 항일 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볼셰비키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인사회당은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8개 지부를 설치했다. 한인사회당 최초 중앙위원에는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오와실리, 군사부장 유동열, 선전부장 김립, 김알렉산드라가 뽑혔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한인사회당은 조선인 최초 사회주의 정당일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이다. 1918년 출범한 한인사회당은 1921년과 1922년 각각 창설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보다 더 빨리 탄생했다.

성재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을 기반으로 연해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를 만들고, 군사학교를 세웠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韓人赤衛隊)도 구성했다. 한인적위대가 참여한 우수리 전투는 러시아 한인이 참여한 첫 무장투쟁이었다. 한때 개신교도였던 이동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이 틀림없다.”(A true Christian must be a socialist and a real socialist must be a Christian)

칼 바르트(Karl Barth)의 말처럼, ‘개신교도’였던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종교이자 이념이었던 ‘독립’

▲ 윤석남이 그린 김알렉산드라 1885년 김알렉산드라(본명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했다. 191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그녀는 조선인 최초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동휘를 구명 활동으로 석방한 그녀는 한인사회당 창당 5개월 만에 백군에게 체포됐다. 1918년 9월 16일에 처형당했다.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시회에서 촬영. ⓒ 백창민

‘무인’이었던 이동휘가 ‘혁명가’의 길을 걸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른다. 여운형은 “이동휘는 공산주의의 ABC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지만, 성재는 종교와 이념도 독립을 위한 ‘도구’로 여겼다. 이동휘에게 ‘독립’은 종교이자 이념이었다. 실제로 1919년 12월 25일 <혁신공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1919년 3.1 운동 전후 조선에는 한성정부가, 중국에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러시아에는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다. 각각 활동하던 세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1919년 11월 3일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초창기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였다. 세 사람이 주도했기 때문에 ‘삼각정부’ 또는 ‘삼각내각’이라 불렸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세 지도자의 독립운동 노선은 달랐다. 우남 이승만은 ‘친미외교론’을, 도산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을, 성재 이동휘는 ‘무장투쟁론’을 펼쳤다. 성재는 오직 무기와 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철혈주의'(鐵血主義)를 표방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이동휘와 그의 동지 1919년 8월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동휘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한인사회당 소속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냈다. 모스크바로부터 지원받은 거액의 자금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자금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백범 김구는 내각 비서장 김립을 암살했다. 일제는 “반일 조선인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제일류의 인물”로 김립을 꼽았다. 그런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가 죽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진 앞줄 오른쪽 끝이 김립이다. 김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진순, 이동휘, 이극로, 김철수, 계봉우, 신원미상이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1920년 여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며 조선인 무장투쟁이 큰 성과를 거뒀다. 그 보복으로 일제는 만주 간도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조선인 동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자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었다.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논쟁도 터져 나왔다. 이동휘는 급진론에 근거해 임시정부의 전면 개혁을 요구했지만, 그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여기에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 유용 시비가 맞물려 일어났다. 성재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있을 때 한인사회당은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약속받은 바 있다. 임시정부 개혁이 실패하자 성재는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하이 임정을 탈퇴했다.

총리 사임 후 성재는 북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 5월 20일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대표자 회의에서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이동휘는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11월 고려공산당 대표로 레닌과 회담을 했다.

이 무렵 러시아 극동에서 한인 공산주의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대립했다. 여기에 ‘자유시 참변’까지 터지면서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1923년부터 이동휘는 새롭게 출범한 코민테른 꼬르뷰로(Korbureau 고려국)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외 독립운동 무대가 된 ‘도서관’

▲ 대한간호협회 광고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캠페인을 벌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34인의 간호사와 간호 학생을 기억하자는 내용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윤익선, 이범승, 이긍종, 이묘묵 같은 ‘친일 도서관인’ 외에 ‘독립운동을 벌인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 대한간호협회

1924년 2월 꼬르뷰로가 해산하자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고려도서관’에서 관장으로 일했다. 신한촌은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 말 그대로 한인이 꾸린 새로운 마을이었다. 고려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조선 땅에서 해외 동포 위문을 목적으로 보내온 백과사전과 책을 바탕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교육구국운동을 펼친 성재가 도서관을 통해 그 행보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연해주 신한촌에서는 1910년대부터 ‘도서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대동공보>가 발행금지를 당하자 한글 신문 <대양보> 발간을 준비했다. 신개척리에 <대양보> 발행소를 새로 지으려 한 최재형은 건물 일부를 ‘도서관’으로 계획했다.

러시아 연해주뿐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사례가 있다. 송재 서재필과 성엄 김의한, 김영숙(난영)은 해외 도서관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초까지 일제는 조선에 도서관을 짓지 않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펼쳤다. 이동휘가 신한촌에서 도서관을 운영할 무렵, 조선 땅에 도서관은 흔치 않았다.

타국을 정처 없이 떠돈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흔적이라 이동휘의 사례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를 ‘도서관인’으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학교와 도서관을 기반으로 펼친 성재의 구국운동은 ‘해외 독립운동사’ 뿐 아니라 조선인의 ‘해외 도서관 운동사’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할 대목이다.

‘도서관인’으로 스스로 인식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던 그들에게 정규 도서관 교육을 받았는지, 도서관인으로 자각했는지 묻는 것은 사치스러운 질문 아닐까? 도서관인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도서관은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무대’요, 또 다른 ‘무기’였다.

조선인이 많이 거주한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학교는 제법 알려졌지만 도서관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 문헌정보학은 우리 땅에 명멸한 도서관 위주로 관심을 가져왔지만, 해외에서 한국인이 운영한 도서관 역사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속지주의'(屬地主義)에서 ‘속인주의'(屬人主義)로 관점을 확장하는 것은 한국 도서관사 연구의 과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인 34인을 기념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 독립운동 전선에서 빛나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 데 이어 신문광고를 했다. ‘독립운동가 간호사들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시회도 개최했다.

그러면 독립운동에 참여한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도서관을 무대로 펼쳐진 독립운동’은 없었을까? 이동휘 사례처럼 도서관에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

▲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시절 이동휘 이동휘는 원동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MOPR) 위원으로 활동했다. 모플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해 모금과 선전 활동을 펼쳤다. 원동변강 모플위원회는 이동휘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하여, 1932년 10월 12일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모플 열성자대회에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사진 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동휘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고려도서관을 운영하던 성재는 1928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추진했다. 1929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서 코민테른과 연락을 담당하는 총지휘자가 되었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는 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에서 활동했다.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던 이동휘는 1935년 1월 31일 심한 독감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숨졌다. 작가 김성동이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이라 칭했던 이동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로 분투했으나 그는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보지 못했다.

62세로 숨진 이동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성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성재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조국이 해방된 지 50년 만이었다. 권업회 사무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이동휘의 신한촌 집도 이젠 사라졌다. 그 자리엔 아파트와 상점이 들어섰다. 성재가 관장으로 일한 도서관은 이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동휘 집안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성재의 부친 이승교는 3.1 운동에 가담했다. 큰딸 이인순은 길동여학교 교사로, 둘째 딸 이의순은 명동여학교와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두 딸뿐 아니라 성재의 사위들 역시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성재의 아버지 이승교는 독립장을, 이동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그의 큰딸과 둘째 딸은 애족장을 받았다. 첫째 사위 정창빈은 대통령표창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으로 활동한 둘째 사위 오영선은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 중심에 이동휘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독립운동의 한복판에 늘 성재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아명이 ‘독립'(獨立)이었던 성재는 이름처럼 ‘독립’에 몸 바친 삶을 살았다. ‘다른 나라에 의지하는 외교가 아닌, 오직 무장투쟁과 최후 혈전을 통해서만 영원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주창한 그는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렸다.

이동휘가 활약한 신한촌에는 3개의 기둥으로 만든 기념비가 서 있다. 3개의 기둥은 각각 조선에 있던 한성정부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를 상징하는 동시에,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해외동포를 의미한다.

그의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은 조선인이 집단 거주했던 곳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서북방, 개척리의 정북방에 있다. 신한촌에는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같은 독립운동 단체가 활동했다. 연해주 신한촌은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추 기지였다. 1999년 사단법인 국외 한민족연구소는 3.1 독립운동 80주년을 맞이하여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26A에 있다. ⓒ flickr

해방된 조국은 결국 갈라졌고, 해외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남도 북도 아닌 러시아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오랫동안 살아야 했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그들이 바라던 해방 조국이 ‘분열’된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1913년 권업회에서 이동휘는 이렇게 연설했다.

“나누면 멸망을 받을지니 과연 오늘날은 살부살형(殺父殺兄)의 원수라도 우리의 광복을 희망하여 서로 나누지 말자.”

남북이 둘로 나뉘어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를 것을 성재는 알았던 걸까? 살부살형의 원수라도 진정한 해방을 위해 서로 나뉘지 말자고 역설했던 그의 말은 민족의 미래를 향한 예언자적 일갈이었다. 성재가 강화도에 처음 세운 근대학교 이름도 ‘합일학교'(合一學敎)다.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한다’라며 ‘단합’도 아닌 ‘영원단합’을 강조한 성재는 죽어서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에 세운 세 기둥이 하나 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성재의 ‘혁명’과 그의 진정한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2021-04-02>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일제시대에도 없던 건물… 연해주에 세운 독립운동가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조선인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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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승 광복회 고문 변호사]

가정의 달 5월에 가장 흔하게 듣게 되는 노래가 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누구나 귀에 익을 정겹고 뭉클한 선율의 이 노래의 제목은 “어머니의 마음”인데, 현제명 서울대 음대 초대학장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반역행위를 일삼았던 이흥렬 숙명여대 음대학장이 작곡한 노래다.

일제강점기에 음악인들이 어떻게 친일반민족행위를 했을까? 음악인들은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대화악단 등 친일활동을 위한 음악인단체를 조직하여 일본국민가요를 조선에 보급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정책을 도왔고, 각종 음악회를 개최하여 모금한 수익금을 일제의 전쟁군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전쟁물자 생산을 위한 공장, 광산 등을 돌며 위문음악공연을 함으로써 생산을 독려하였을 뿐 아니라, 널리 이름이 알려진 자들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국민과 학생들에게 징용 및 학병 지원을 독려하였고, 구로야 샤이민(현제명), 나오키 오키이찌오(이흥렬), 모리카와 준(홍난파) 등 일제의 창씨개명에 앞장서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정책에 협력하였다.

위와 같은 각종 친일반민족행각을 가장 적극적 주도적으로 자행했던 음악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현재명과 이흥렬인데, 이들은 해방 후에는 자신들의 미국 유학경력 등을 최대한 이용해서 친미반공으로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변신해서 서울대 음대학장, 숙대 음대학장, 예술원 종신회원, 대통령 문화훈장 등 음악계의 행정가, 교육자, 원로, 실력자로서 죽을 때까지 권위와 명예를 누렸고, 현재 음악계는 이들이 배출한 제자나 후진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어떠한 비판도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현제명과 이흥렬은 2001년부터 8년 동안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선정한 일제 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4389명에 포함되어 2009년 11월 8일에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고, 특히 현제명은 2009년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명에 포함되었음에도 이들의 후진들이 국내 문화예술계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명성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하는데, 그 예로 현재 서울대 음대건물에는 현제명의 흉상이 있다.

이들은 이처럼 해방 후 감쪽같이 변신하여 음악계 명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수많은 학교, 기관으로부터 교가 등을 작곡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모양인데, 그 결과 전국 138개 학교들의 교가가 이흥렬 작곡이고, 14개 학교 교가가 현제명 작곡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학인 서울대학교의 교가부터가 현제명 작곡인데 그가 2009년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7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된 지 1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서울대에서는 이를 바꾸자는 목소리조차 없다.

참고로, 위와 같이 친일 음악인이 작곡한 교가를 갖고 있는 대학들은 서울대 외에도 경북대, 성균관대, 국민대, 경희대, 홍익대, 동국대, 한국외대, 단국대, 인하대, 숭실대 등 전국 29개 학교에 이른다는 언론보도(YTN)가 있다.

심지어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라면 수도 없이 불러봤을 군가 “진짜 사나이”도 위 대표적 친일파 이흥렬의 작곡이다. 이흥렬은 “진짜 사나이”를 작곡하면서 부끄럽지 않았을까?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라는 가사의 군가를 작곡하면서 말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파시즘 세력으로부터 식민지 또는 점령지에서 해방된 민족ㆍ국가들은 새나라를 재건하는 작업을“민족을 배반하고 국민을 학대한 자들”을 처단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이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하고 재판소 등 처벌기관을 설치한 나라는 22개국이고 이와 관련하여 제정한 법률은 총 63개에 이르는데, 아시아에서는 한국ㆍ중국ㆍ일본ㆍ북한ㆍ필리핀 등 5개국이고, 유럽은 독일ㆍ프랑스ㆍ오스트리아ㆍ네덜란드ㆍ벨기에ㆍ덴마크ㆍ루마니아ㆍ불가리아ㆍ노르웨이ㆍ그리스ㆍ이탈리아ㆍ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ㆍ헝가리ㆍ유고슬라비아ㆍ에스토니아ㆍ소련 등 17개 국가다.

위와 같은 반역자 처벌의 정신은 벨기에 정부가 1944년 5월 6일 공포한 <전시에 국가의 국외 안보에 반해 저지른 범죄로 인해 국적과 일정한 권리를 박탈하고 정지하는 사안에 관한 명령>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조국을 배신한 자는 그가 절대로 다시 해를 끼치기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그리고 신속히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도 1948년 제헌국회에서 친일반역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법을 집행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까지 구성하였으나, 1949년 6월 친일파 세력의 반격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친일반역자 단죄는 실패하였고 단 한 명의 반역자도 처벌하지 못한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는 반민특위가 와해되어 친일반역세력의 단죄에서 실패한 지 72년이 되는 해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조국을 배반하고 동족을 해친 친일반역자들 중 생존한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반역자들에 대한 단죄는 미완의 역사로 묻어두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이 어떤 반민족행위를 했는지는 분명하게 기억함으로써 그런 자들이 죽은 후까지 명예를 누리는 일만은 없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오늘날 가능한 최소한의 과거사 청산이 아닐까 싶다.

정철승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사법학과 ▷법무법인 THE FIRM 대표변호사 ▷광복회 고문변호사 ▷한국입법학회 회장

<2021-05-17> 아주경제

☞기사원문: [정철승 칼럼] 음악계의 친일반역자들

목, 2021/05/20-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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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토, 2021/05/22-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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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 사진 52점 전시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 독립운동 사적지 담겨…온라인 또는 전화로 사전 예약 후 관람 가능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강북구(구청장 박겸수)가 8월18일까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개최한다.

근현대사기념관 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사진전은 쿠바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으며 김동우 작가가 촬영한 52점의 사진이 준비됐다.

김 작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해 왔다.

독립운동가들은 먼 타국의 땅에서 굶주림, 차별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한인교회, 한글학교 등을 세워 정체성을 유지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자금 모집 등 활동을 해 왔다.

전시회에서는 쿠바 마나티 항구와 멕시코의 애니깽 농장 등 한인 이주 역사의 상징적인 장소와 3·1운동 2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던 미국의 타운홀,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도 레드포트 훈련지,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의 묘적지 등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쿠바와 멕시코,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전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관람 희망자는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예약하거나 전화신청 후 이용할 수 있다. 비용은 무료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이번 전시회가 세계 곳곳에서 광복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했던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고 기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관심 있는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람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2021-05-21> 아시아경제

☞기사원문: 강북구 ‘쿠바 이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개최

화, 2021/05/25-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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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거래’ 의혹 [연합뉴스TV 제공]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이 박근혜 정권 당시 ‘재판거래’로 지연돼 피해를 봤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와 피해자 고(故) 김규수씨의 배우자가 최근 국가를 상대로 1인당 1억원씩 총 2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고 27일 밝혔다.

앞서 이씨와 김씨를 비롯한 4명의 강제동원 피해자는 2005년 2월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당시 1·2심에서는 패소했지만, 2012년 5월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하고 피해자들의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파기환송심에서도 2013년 대법원 판단대로 일본제철이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사실상 결론이 달라질 가능성이 없는 재상고심에는 5년이란 시간이 소요됐고, 원고 4명 중 이씨를 제외한 3명은 세상을 떠났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검찰 수사에서 재판 지연이 박근혜 정권과 사법부의 재판거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간부들이 정부 인사들과 강제동원 소송 재상고심 결과를 ‘피해자 패소’로 바꾸거나 진행을 미루는 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이씨 등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받았다”며 소송을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재판거래 피해자들은 아직도 사건의 진상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며 “손해를 배상받지도 책임 있는 주체로부터 어떤 공식적 사과나 의사 표시를 받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권력 행사 중 가장 높은 독립성을 가져야 할 재판이 부정됐고 불법이었다는 것이 확인됐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어떤 절차로도 회복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보도자료를 내 “재판거래 혐의로 기소된 것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소수이며, 1심 판결도 선고되지 않았다”며 “불법행위자 각각을 피고로 삼기보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5-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재판거래로 피해”…日강제동원 피해자들 국가 상대 소송

※관련기사 

KBS: 강제징용 피해자, ‘불법 재판거래’ 국가배상 소송 제기

목, 2021/05/2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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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친일파 처벌 특별법 제정 착수, 경기도 등 일제 잔재 청산 작업 이어져
군사·산업시설 관련도 상당 부분 존재해…‘철거 방법’ 가장 언급되지만 역사 잊혀져, 문화콘텐츠 등
활용 주민참여형 개발 필요

걷어내지 못한 친일파·기업… 기념·조형물도 곳곳 산재

1944년께 동원된 어린 소녀들이 미쓰비시 중공업기숙사 사감으로부터 지시사항을듣고 있다. 경기일보DB

걷어내지 못한 친일파·기업… 기념·조형물도 곳곳 산재

■친일 인물 청산을 위한 노력

친일 잔재는 ‘일제강점기 남겨진 유산 중 부정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 볼 때 상당한 의미와 기준 등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유형들이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가장 많이 언급하고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 이른바 친일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친일파’로 많이 알려졌다. 그동안 친일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이를 위해 해방 직후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 설치한 바 있으며, 2004년에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국가가 직접 친일 인물을 선정하였다.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친일 인물 청산을 주도하였다.

특히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계기로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이를 계기로 경기도 등 광역 지자체에서 구체적인 일제 잔재 청산이 진행됐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지자체에서도 일제 잔재 청산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친일 잔재의 유형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동안 친일 잔재 청산은 ‘친일 인물’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는 친일 인물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많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친일 잔재의 유형은 친일 인물 외에 상당한 잔재들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친일 잔재는 우선 인적 잔재와 물적 잔재로 구분할 수 있다. 인적 잔재는 구한말 일제의 침략과 강점기 식민 지배통치에 부역한 반민족 행위를 한 자라 할 수 있으며, 물적 잔재는 반민족 행위로 인해 얻은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를 흔히 ‘친일 인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세력을 ‘친일파’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일파는 가장 먼저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적, 물적 친일 잔재 외에도 유형 잔재와 무형의 친일 잔재로도 구분할 수 있다. 유형 친일 잔재는 일제가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물 등 선전 조형물이다. 여기에는 식민 지배와 관련된 건물, 상업과 산업시설, 군사시설, 기념탑 및 기념비, 종교시설, 전쟁 기념물, 찬양조형물, 일본식 가옥 등이 포함된다.

무형 친일 잔재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 시기에 역사와 문화 등 주로 정신적으로 왜곡된 잔재들이다. 여기에는 언어 등 생활문화를 비롯하여 법과 행정제도, 관습과 의식, 교육, 문화예술, 역사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친일 인물과 건축물을 제외한 유형의 친일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 있고, 청산되었는가 살펴보자. 그리고 이를 위한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군사 관련 친일 잔재의 현황

친일 잔재 시설물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조선 왕궁의 맥을 끊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한편에서는 해방 후 이른바 ‘중앙청’이라 불리며 정부 건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보존하자는 여론도 있었지만 결국 해체돼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이처럼 식민 지배와 관련된 건축물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일부에서는 리모델링하여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사시설은 아직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 상당 부분에 이르고 있다. 군사시설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기에 주로 형성됐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강제 동원하여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이를 전쟁유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비행장, 격납고, 연병장, 대피호, 동굴 진지, 방공호, 지하호 등이 있다. 국내에서 조사된 바로는 군사 관련 잔재는 전국적으로 1천300여곳이 산재한다. 경기도의 경우 비행장 건설이 적지 않았는데 수원, 오산, 시흥, 평택, 고양 등이 해당된다. 군사시설물 구축과 관련된 곳으로는 시흥, 양주, 평택, 포천 등이 있다. 이외에도 평택 함정리의 방공호, 평택 안정리의 해군시설대 보급기지, 의정부와 수원, 김포 등지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산업 관련 친일 잔재 현황

일제강점기 산업시설과 관련한 친일 잔재도 상당 부분 존재한다. 산업 관련 친일 잔재는 공장을 비롯하여 탄광이나 광산, 철도, 도로, 토건, 하역 수송 등이 해당된다. 이 가운데 철도와 항만은 산업 관련 잔재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 식민통치 잔재이기도 하다. 산업 관련 잔재는 탄광과 광산이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다.

일제는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석탄 외에 금, 은, 구리 등 일반 광물과 텅스텐, 석면, 몰디브덴 등 특수 광물까지 채광하였다. 광산과 탄광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한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경기도는 320여개가 있었다. 철도와 도로는 교통의 편리함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 물적 자원을 수탈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산업 관련 잔재는 대부분 일제 지배를 지원하거나 적극 후원하는 일본 기업들이었다. 현재도 널리 알려진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아소(麻生), 스미모토(住友), 일본제철(日本製鐵) 등 대기업 등이 있다. 이들 대기업 외에도 가네보(鐘紡), 다이니치보(大日紡), 도요보(東洋紡) 등 방적공장도 있었다.

경기도의 산업 관련 친일 잔재는 앞서 언급했듯이, 광산과 탄광이 가장 많았다. 해당 지역을 살펴보면 가평 12곳, 고양 3곳, 광주 6곳, 김포 1곳, 부천 26곳, 수원 9곳, 시흥 9곳, 평택 1곳, 안성 35곳 등 각지에 산재하고 있었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한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미쓰비시 줄사택’. 경기일보DB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과 조형물

유형의 친일 잔재 중 가장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은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과 조형물이다. 기념물과 송덕비, 찬양비 등 비석류가 해당된다. 어느 지역에 답사를 간 적이 있는데, 일제 말기 지역에서 면장을 한 분의 기념비가 있었다. 면장은 친일 인명에는 빠져 있지만, 전시체제기 최말단에서 식민 지배에 협력한 직책으로 지역에서는 부일협력과 관련하여 가장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지역과 관련된 부일협력을 한 면장을 비롯하여 반민족 행위를 한 인물과 관련된 기념시설은 친일 잔재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에 산재한 친일 인물 관련기념 시설은 160여개다. 이중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120여개, 확인 불가능한 것이 26개, 망실되거나 매몰된 것이 2개 정도였다. 지역별로 보면 안성 57개, 화성 18개, 평택 13개, 용인 10개, 이천 9개, 광주와 양주 8개, 여주 7개, 포천 4개, 의정부 3개, 파주 3개, 연천 2개, 남양주 2개 등으로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돼 있다. 이들 기념시설은 대부분 강점기 군수나 읍장, 면장 등 공직을 맡았던 인물과 부일협력을 한 인물의 송덕비 또는 기념비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안성의 경우 읍내면장, 공도면장, 금광면장, 소초면장, 미양면장, 보개면장, 원곡면장 등 면장으로 활동한 인물들의 송덕비이다. 평택은 서면장(진위), 현덕면장 등의 송덕비가 있다.

이외에 친일 인물과 관련된 기념시설로 기념탑과 동상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수원 서둔동의 옛 농촌진흥청 구내에는 ‘혼다 코스케(本田幸介) 권업모범장장 흉상 좌대’, 안성농업학교 교정에 세워졌다가 금속물 회수에 헌납 제공된 ‘박필병(松井英治) 중추원 참의 동상’, 현재 현재 용인문화원에서 보관 중인 ‘팔굉일우비(八紘一宇碑)’ 등이 있다.

■식민 잔재 청산 방안과 앞으로의 과제

친일 잔재의 청산 중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철거이다. 그렇다고 철거가 청산의 진정한 방법은 아니다. 철거를 하면 이후 잊힌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킨다. 역사를 언급할 때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자랑스럽고 기억할만한 것은 기록하지만, 역사에 부정적인 것은 대부분 없애거나 지우려고 한다. 그러면 잊힌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도 남겨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유형의 친일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 잔재의 아카이브 구축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이후 망실된다 하여도 역사적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자료집을 편찬하여 연구와 교육 자료로 활용돼야 한다.

또한 기존의 친일 잔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친일 잔재가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졌으며, 관련된 인물의 친일 행적에 대해 최소한의 기록을 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친일 잔재 기념시설물은 송독이나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다. 기존의 기념시설물과 함께 부일협력을 기록함으로써 인물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은 관련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문화콘텐츠는 ▲교육프로그램 운영 ▲웹 또는 모바일 콘텐츠 개발 및 활용 ▲교육형 테마파크 활용 ▲기억의 공간 활용 ▲다크 투어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관이 주도할 것이 아니라 주민참여형으로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주현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 부소장

<2021-06-06>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 유형 친일 잔재와 청산… 현황·과제

화, 2021/06/0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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