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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군 총칼에 죽은 모자, 102년 뒤 세워진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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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군 총칼에 죽은 모자, 102년 뒤 세워진 추모비

admin | 토, 2021/04/03- 07:21

[현장] 충남천안 ‘독립운동’ 주도하다 죽은 김구응 열사, 그의 모 최정철 열사 ‘추모비 제막식’

▲ 최정철·김구응 모자(母子) 상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안에 있는 만세운동 동상 속의 최정철·김구응 모자(母子) 상,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 중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진 아들을 끓어 안고 일본 순사를 호통치다 어머니도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 이윤옥

지난 1일 찾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의 모자(母子) 무덤에서는 102년 전, 아우내장터의 만세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천안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주동자인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이었다. 뜻깊은 날을 기려, 무덤 주변에서는 과거 천안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정철(1995, 애국장), 김구응(1991, 애국장) 열사 모자의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흔히 아우내 만세운동이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102년 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순사의 총검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의 길을 걸은 모자(母子)가 있다. 바로 어머니(최정철, 당시 66세)와 아들(김구응, 당시 32세)이 그분들이다.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모자는 가전리 산 8-6번지에 묻힌 채, 지난 100여 년간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과거 어떤 일 벌어졌나 보니… ‘독립선언’ 하려 모인 6400명, 일본군과 맞서다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의사(義士) 김구응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일경)이 조선인의 기수(旗手, 행사 때 대열의 앞에 서서 기를 드는 일을 맡은 사람, 곧 조선인들)를 해치고자 했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이를 막느라 피가 낭자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 헌병의 잔인무도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 김구응은 머리를 맞아 순국했으나 일본 헌병은 사지(四肢)를 칼로 난도질했다. 이때 김구응의 노모(최정철 지사)가 일본 헌병을 향해 크게 질책하자 노모마저 찔러 죽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김병조 지음, 1920.6, 국한문혼용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번역함, 76쪽.)

이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김병조 선생이 상해에서 펴낸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병조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상해에서 임시정부에 관여하면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6월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을 지었다.

▲ 추모비 제막식에 앞선 고유제 천안, 가전리 최정철 열사 무덤에서 유족들이 추모비 제막식에 앞서 고유제를 지내는 모습 ⓒ 이윤옥

한편, 이 책과 같은 해에 나온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상해)에서도 천안 아우내장터의 주모자(主謀者)를 김구응(金九應) 의사로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따끈따끈한 기록이 이 두 역사책이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에서는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조명하고자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제2회째로 아우내 문화제를 열었다. 지난 1일 열린 ‘최정철·김구응 추모비 제막식’은, 이런 ‘제2회 아우내 41문화제’의 한 고리로 추진된 것이다.

‘제2회 아우내 41문화제’는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 성공회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유족회 주최로 열린 행사로 오전 10시에 시작된 아우내 4.1혁명의길 걷기를 시작으로 오후 2시에는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최정철·김구응 열사 별세 성찬 추모 미사가 열렸다

▲ 성공회 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 천안 아우내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열린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 미사 모습 ⓒ 이윤옥

성공회 병천교회는 당시 진명여학교를 만들어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곳으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한 교회다. 이 학교 교사였던 김구응(32세) 열사는 4월 1일, 교인들과 지역유지, 젊은 청년, 학생들을 이끌고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어머니 최정철(66세) 열사 역시 성공회 병천교회 신자로서 여성들이 대거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끈 인물이다.

“사실 성공회 병천교회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천안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와서 보니 이 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여학교가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구응 열사께서 활약하신 무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를 통해 일제 만행을 기억하며 선조들의 독립정신이 큰나무 가지가 되어 뻗어 나가길 빕니다.”

이는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병천교회 관할 사제 장동윤(미카엘) 신부의 설교의 한 대목이다. 추모 미사를 마치고 오후 4시부터는 병천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최정철·김구응 무덤에서 추모비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오후 4시, 가전리 산 8-6번지,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에는 추모비 개막식을 알리는 주홍빛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 최정철 열사의 무덤은 윗자리에, 아드님 김구응 열사의 무덤은 아랫자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번에 조성한 추모비는 김구응 열사 무덤 옆에 세웠다.

“오늘 이렇게 증조할머님(최정철 열사), 할아버님(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을 맞아 시비 제막식에 찾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 말씀 올립니다. 두 분께서 목숨 바쳐 순국으로 지켜오신 나라를 위해 앞으로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김운식(73세, 최정철·김운식 열사의 유족대표) 선생은 목이 멘 듯 말했다.

“부끄럽게도 아우내에 오래 살고 있었지만 이 두 분의 존재를 잘 몰랐기에 더욱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앞으로 자랑스러운 아우내의 독립운동가 최정철·김구응 열사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해 손자들에게 들려주겠습니다. 아우내 시내에 내걸린 펼침막을 보고 추모 미사에 참석하였고, 무덤까지 와 보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아우내 시내에 산다는 지역주민 이수민(47)씨는 기자와 만나 연신 부끄럽다고 했다.

▲ 최정철·김구응 열사 추모비 제막식 최정철·김구응 열사 추모비 제막식 모습 ⓒ 이윤옥
▲ 최정철·김구응 추모비 최정철·김구응 열사 추모비 ⓒ 이윤옥

일제에 목숨 잃었지만… 이름 석자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 추모비에 새겨진 시는 기자가 쓴 것이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하여 헌시(獻詩)를 쓰고 그 일생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사람으로서 몇 해 전, 여성독립운동가 최정철 열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취재 과정에서 이들이 아우내장터의 주동자였다는 사실과 이 지역에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열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안타깝게 느낀 것은 바로 최정철·김구응 열사 같은 분들처럼 역사의 조명에서 비껴간 인물들이다. 일제 침략기에 목숨까지 던지면서 순국의 길을 걸었지만 그 이름 석 자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슬프고 쓸쓸하고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제(4월 1일), 무덤가에서 기자는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이곳에 모였던 사람들 역시 그랬으리라. 참석자들은 추모비 제막을 마치고, 최정철·김구응 열사의 이름을 부르며 만세를 불렀다. 102년 만에 가전리 무덤가에서 울려 퍼진 만세 함성에 아마 최정철·김구응 열사께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위한 만세 추모비 제막식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아우내만세운동 주동자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위해 만세를 불렀다 ⓒ 이윤옥

유난히 붉어 보였던, 활짝 핀 진달래 꽃잎 속에 어머님(최정철)과 아드님(김구응) 열사의 화사한 미소가 겹쳐 보였다. 기쁜 날이었다.

<2021-04-0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군 총칼에 죽은 모자, 102년 뒤 세워진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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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에서 미군기지 건설용 매립재 채취 추진
일본 정부 “채취 장소 미정…유골 안 들어가도록 눈으로 확인”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소재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일본 정부는 이 비행장을 대체할 군사 시설을 건설하겠다며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연안을 매립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이 섞인 토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미군 기지 공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해 수습 운동을 벌여 온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미국 유족과 힘을 모아 공사 중단을 촉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에 있는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같은 섬 중부 헤노코(邊野古) 연안으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 정부가 공사 계획을 일부 변경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인근 바다에서 매립 공사 등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을 대신할 새로운 기지를 이곳에 건설 중이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쟁 희생자 유해가 다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채취한 토사 등을 매립재로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은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바다를 매립해 후텐마 기지를 대체할 새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매립재 종류 등을 바꾸겠다며 작년 4월 21일 오키나와현에 공사 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7일 연합뉴스가 계획서의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니 2차 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현장인 오키나와 본섬 남부 이토만(絲滿)시와 야에세초(八重瀨町)가 매립용 토사 등을 채취할 장소로 기재돼 있었다.

[그래픽]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공사 매립재 채취 장소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민, 일본군, 미군 등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오키나와현 집계)된다. 희생자 중에는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된다.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경된 공사 계획이 승인되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유해를 수습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하는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 등은 일본 정부의 공사 계획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토사 등을 어디서 조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계획서가 “적정한 조사를 거쳐 채취 장소 등을 결정한다”며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계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토만과 야에세가 변경된 계획서에 파쇄된 암석을 채취할 후보지로 명시된 것을 보면 결국 이 지역에서 채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계획서는 이토만과 야에세에서 파쇄된 암석 3천160만㎥를 채취하는 방안이 기재돼 있다. 이는 오키나와현 내부에서 조달할 파쇄석(4천476만㎥)의 약 70% 해당한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가마후야 대표가 올해 3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에 나서자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개발 전에 유골이 없는지 육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유골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호(壕·구덩이)가 있는 장소는 개발하지 않는 등 유골을 배려하며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맨눈으로 유골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뼈는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채취할 토사 등의 양에 비춰보면 유해가 포함됐는지 철저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을 모집하고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정부에 매립 계획 취소를 요구할 계획이다.

한국인 희생자 이름 (오키나와=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오키나와(沖繩)현 이토만(絲滿)시 소재 ‘평화기념(祈念:이뤄지기를 비는 것)공원’에 한국인 전쟁 희생자 이름을 새긴 비석인 각명비(刻銘碑)가 설치돼 있다.(위) 각명비에는 히코산마루 피격 사건으로 희생된 명장모(왼쪽 하단) 씨와 김만두(오른쪽 하단) 씨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미국 유족 참가자도 모집한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이 현대사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 씨가 발간한 명부 자료와 자체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에 해당)으로 동원됐고 이 가운데 70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이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mail protected]

<2021-06-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관련기사 

☞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화, 2021/06/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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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깊숙이 뿌리박힌 ‘일제 그림자’ 이젠 걷어내자
상명하복·서열주의 등 일본제국주의 관행 영향
일제강점기 역사관 ‘식민사관’ 대표적 무형잔재
항일지사들 국학연구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워

올림픽을 앞둔 일본이 독도문제로 우리를 또 도발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반발을 알면서도 계획적으로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지도상에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의도는 명백히 자국내의 혐한 분위기 조성과 극우파들을 준동시켜 이미 실패한 올림픽을 면피하려는 속셈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분노를 삭일 수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도발하는 일본에 대한 응징의 소리는 온 국민을 일치단결시키는데 왜 그럴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의사 출신의 지식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백인보다 더 백인인 척하고자 노력했던 흑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식민지배를 경험한 자들의 폭력 사용과 함께 문화적 지배를 폭로하여 자아를 회복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은 자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가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무형의 친일잔재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친일잔재는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ㆍ무형의 유산’으로 정의하고 있다. 건축물이나 조형물, 친일파 등과 같은 ‘유형의 친일잔재’와 달리 정신과 의식에 남아있는 ‘무형의 친일잔재’는 그 범위가 엄청나고 일상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무형의 친일잔재는 군국주의로, 때로는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로 그리고 패배주의 문화로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며 해독을 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형의 친일잔재는 생활문화 속에서 용어로 가장 흔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화나 언어 그리고 전문용어들에도 친일잔재는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익숙한 ‘묵찌빠’, ‘무궁화 꽂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문화 속에 남아있는 왜색은 성인이 된 뒤의 화투 놀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친일잔재다. 의식과 관행적인 문화 속에도 친일문화는 강하게 남아있다. 흔히 군사문화로 알려진 상명하복의 전통, 기합과 구타 그리고 서열주의 등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표적인 일본제국주의의 관행으로 학습된 친일잔재다. 또한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국민교육헌장’은 일본의 군국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칙어에서 따온 것으로 오랜 기간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암송해야 했다. 아직도 그 흔적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로 남아있다.

법과 제도 속의 친일잔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치안유지법의 이름만 바꾼 국가보안법으로, 그리고 어려운 한자 말투성이인 재판의 판결문도 역시 친일잔재이다. 행정 서식과 지명들 그리고 교육계의 만연한 친일잔재들. 각종 문화예술 분야의 문투나 음계, 화풍 등도 역시 대표적인 무형의 친일잔재들이다. 아직도 친일작가들의 문학상과 친일음악가를 기리는 상장이 버젓이 수여되는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역사관에 관한 논쟁과 교육계의 친일잔재

무형의 친일잔재로 대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인 식민사관 문제이다.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의 다툼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지만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입장이 식민지 시절을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연구(식민사관)의 의도를 담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더욱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상존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전쟁 속에서 역사를 그대로 순수한 학문의 영역으로 국한한다는 것은 순진함을 넘어 아둔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항일지사들은 대부분 국학연구를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를 필두로 백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안재홍 그리고 조소앙까지 모두 한 손에는 일제와 싸우는 총을 들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식민사관과 싸운 펜을 들었다. 정신사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그들의 충심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해방 이후 신채호의 역사학을 계승한 학교나 학자가 없었음을 역사학계는 자문해 봐야 한다. 어쩌면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보다 이병도의 실증주의 역사학이 강하게 지배한다면 이 역시 정신적으로 강하게 남아있는 친일잔재이다.

교육계에 만연한 친일잔재는 그 영향성과 파급성 때문에 무엇보다도 앞장서서 해소해야 할 부분이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경기도 내 2천400여 학교 중 친일인물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89개교로 파악되고 있다.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현제명, 백남준, 이광수 등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에 의해 작사 작곡된 교가를 오늘도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무비판적으로 부르고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친일파들이 만든 교가를 부르는 학생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참상과 독립운동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 밖에도 반장, 부반장이라는 호칭이나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군사용어인 훈화(訓話) 등도 여전히 아무런 생각없이 사용되는 무형의 친일잔재이다.

또한 아침 조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궁성요배(宮城遙拜)라고 매일 아침 등교해서 교장부터 전 교생이 모두 일왕이 있는 동경 쪽을 향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행위에서 출발했다. 학교행사마다 으레 행하는 차렷이나 경례 등의 용어 역시 일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일제의 잔재이다.

■용어로 남아있는 친일잔재

일상용어에 남아있는 친일잔재 역시 무형의 일제유산이다. 그동안 꾸준히 순화의 과정을 거쳐 많은 일본식 용어가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용어가 1천171개(국립어학원, 2005년 조사)나 된다고 한다. 특히 음식과 행정분야가 가장 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우동(가락국수), 다데기(양념장), 덴뿌라(튀김), 오뎅(어묵), 고로케(크로켓), 소보로빵(곰보빵), 돈가스(돼지고기 너비), 모찌(찹쌀떡) 등 음식에는 여전히 순화의 대상이 되는 용어들이 넘친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심각한 영역은 행정용어이다. 지금도 일선 행정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공람(돌려봄)과 결재(재가), 견학(보고 배우기), 감봉(봉급 깎기), 과세(세금), 가건물(임시건물), 나대지(빈 집터), 나염(무늬들임), 납득(이해), 납입(납부), 내역(명세), 가계약(임시계약), 견적서(추산서), 마대(포대 자루), 명찰(이름표) 등 부지기수로 많다. 산업 현장에서의 친일잔재는 용어로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특히 건설분야와 인쇄분야가 심한데 모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공구리(콘크리트), 노가다(공사판 노동자), 가쿠목(각목), 단도리(채비), 찌라시(전단지) 등 한 둘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는 거짓말의 비속어인 ‘구라(くら)’였다는 조사가 있다. ‘거짓말하다’ 보다 ‘구라친다’라는 말이 익숙하다면 그만큼 우리는 무형의 친일잔재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순화시켜야 할 언어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왜색 용어를 남발하는 것인지를 반성해야 한다.

무형의 친일잔재 중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역명도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1914년부터 일제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강제로 통ㆍ폐합시켜 오랫동안 생활해 오면서 붙여진 정겨운 지명들을 마음대로 변경해 지역 정체성에 혼동을 주었다. 2020년 경기도 조사에 의하면 도내 398개 읍·면·동에서 약 40%인 160곳이 일제에 의하여 지명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모두 행정편의주의로 지명의 유래나 정체성은 무시되고 일방적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하여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공교롭게도 1990년대 신도시 개발할 때의 분당(盆唐), 일산(一山), 평촌(坪村), 산본(山本) 등이 대표적이고 수원의 영동시장의 경우는 원래 성외시장이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영정(榮町)으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영동(榮洞)이라고 정이 동으로만 바뀐 채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두 옛 정취를 버린 지명들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치 치하에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던 까뮈(Albert Camus)는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며 식민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오늘 우리가 친일잔재를 성토하고 청산을 외치는 이유도 명확하다. 더 맑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를 그대로 덮어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형의 친일잔재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청산하기가 쉽지만, 무형의 친일잔재는 독버섯처럼 숨어서 지금도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갉아먹으며 과거 그시절이 좋았다고 세뇌시키고 있다.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의 영역은 치유하고 복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서둘러야 한다. 법과 제도로 고칠 수 있는 분야는 시급히 시행하고, 자각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언행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일선 교육계의 선생님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모두의 노력은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1-06-10>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무형 친일잔재와 청산, 현황과 과제

※관련기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05.6.2): “무형으로 의식 지배, 해독주는 것이 일제문화잔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기획연재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수, 2021/06/16-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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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양성중학교]

도교육청 주관 탐구활동 목적 진행
‘친일파’ 김성태 곡 “개정해야” 92%
학내공모 실시 3학년생 작품 당선
작곡과정 거쳐 1학기내 완성 예정

▲ 학생들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학교구성원의 ‘교가 개정’의견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제공=양성중학교

안성 양성중학교 학생들이 일제 잔재 청산으로 교가 개정을 추진한다.

학생 등의 교가 개정은 경기도교육청이 주관하는 ‘일제 잔재발굴 탐구활동’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양성중학교의 교가는 김성태(1910-2012) 작곡가의 곡으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김성태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음악단체인 경성후생 실내악단 등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학교측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교육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가 개정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또 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도 들었다. 교가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교육공동체(학생·학부모·교사)와 양성중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을 1차로 수렴했다.

나아가 학급자치회와 교육공동체 대토론회에서 ‘교가를 개정해야 한다’는 찬성의견 92%를 바탕으로 개정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교가 개정 TF팀’을 중심으로 교가 개정을 위한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가 가사를 공모해 학생들의 정서를 담은 긍정적인 내용,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빛낼 수 있는 내용 등을 학생들이 직접 작사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 결과 공모전에 참여한 17명의 학생 작품 중 심사를 거쳐 3학년생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를 토대로 작곡 과정을 거쳐 1학기 내로 교가를 완성할 예정이다.

안준기 교장은 “이번 교가 개정 프로젝트는 양성중학교 교육공동체가 다 함께 교가 개정에 참여해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애교심을 고취하는 기회가 됐다”면서 “무엇보다도 독립을 향한 애국심이 3.1만세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양성지역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장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안성=이명종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6>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학생들이 교가 바꾼다

목, 2021/06/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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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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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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