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가 가져올 끔찍한 재앙을 막기 위해 필요한 변화에 대한 행보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 라고 미국의 기후대사로 새로이 임명된 John Kerry가 첫 기자회견에서 말문을 열었다.
미합중국의 전직 국무장관 출신인 Kerry는 도날드 트럼프 시절에 지구온난화의 위기에 대처하는 국제적 노력에 미국이 불참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현재 어느 국가, 어느 대륙도 제대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을 가한다.
그는 합의된 목표인 탄소중립을 2050년까지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계경제에 전반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현재의 탄소소비량 감소추세를 5배로 빨리 가속해야 하며, 지구상에 녹지를 5배 이상 빠르게 확보해야 하고,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속도를 6배 그리고 전기차로 전환속도를 22배로 높여야 한다고 단언한다.
“재앙적인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합의한 장기적인 목표는 고사하고, 눈앞의 계획조차 제대로 실천하는 국가가 거의 전무한 상태인 현재, 우리는 모두 함께 담대하게 나서야 한다”고 Kerry는 이야기한다.
상기의 발언은 새로 출범한 바이든의 행정부에서 그가 국제기후특사로 임명된 직후 G20 포럼에 참가한 민간기업 책임자들의 모임에서 행한 첫 연설의 내용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오는11월에 영국의 글래스고우에서 있을 UN의 매우 중요한 회의(COP26)를 앞두고 사전에 기후위기에 대한 주요 국가들의 정상회담 개최를 기대하고 있다고 그는 밝혔다.
유엔기후회의는 2015년 파리에서 합의한대로 지구온난화를 야기하는 배출가스의 감축계획을 신속히 추진하고자 한다. 그러나 최근 UN의 관련보고서는 현재의 진행상황이 목표에 지극히 미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기후재앙을 야기하는 지구의 온도를 산업화시기 이전에 대비하여 섭씨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력을 5배 이상 배증해야 할 필요를 제기하고 있다.
Kerry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오는 11월 기후당사자회의에서 모든 국가들이 담대한 목표를 설정해야만 합니다 – 아니면 모두가 공멸합니다. 멸망은 우리들의 선택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트럼프 시절, 미국은 파리회의에서 탈퇴하여 발전소와 차량에 대한 배기규제를 완화하고, 미합중국의 방대한 대지와 강물을 민간기업들의 가스와 원유의 채굴사업에 개방하여 왔다. 국제사회는 세계에서 오염가스를 두 번째로 많이 배출하는 국가가 다시 합의의 모임에 귀환한 것을 환영하지만, Kerry 자신은 이전의 행정부가 벌린 소동으로 인하여 미국이 수취심을 갖고 돌아 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과거4년을 허비하며 미합중국의 지난 행정부가 협상의 테이블을 떠나 있으면서 인류의 도전적 과제에 함께 대응하지 못한 수치심을 갖고 있다” 라면서 2004년에 미국대통령 선거에 민주당의 후보로 출마했던 Kerry는 상기의 사실을 글래스고우의 COP26 회합의 의장을 맡을 예정인 영국의 해당부처 장관인 Alok Sharma에게 인정했다.
Shama 장관은 Kerry대사에게 미합중국도 파리회의에서 합의한 국가별기후약정(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즉 2030년까지 오염가스 배출량감소의 계획을 조속히 제출하도록 요청하였다.
국가별기후약정은 파리회의의 핵심적 내용으로 Cop26 회의 이전에 UN에 제출하여 사전에 평가를 받도록 합의되었다. 영국의 경우, 2030년의 배기가스배출량을 1990년에 대비하여 68%를 줄이는 계획서를 지난 12월에 이미 제출하였다.
가디언의 확인에 따르면, Kerry는 언제까지 미국이 국가기후약정NDC을 제출할지 정확한 일정에 대하여 답변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우선적으로 진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들은 동시에 오는 기후회의 가장 주요한 의제인 기후금융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안토니오 쿠테흐스 UN 사무총장은 지난 12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가난한 나라들이 기후변화의 충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부유한 국가들이 연대하여 연간 1000억불을 지원하는 것을 약정하였으며,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UN이 주도하는 기후당사자회의Cop구상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Kerry와 Shama 양자는 기후변화에 취약한 빈국들에 대하여 기후금융을 지원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의견을 공유하였다.
바이든 행정부가 캐내다 Alberta지역에서 원유를 수송하여 미국 내에서 정제하려는 사업인 Keystone XL 배관공사를 중단시키려고 하자, 곧바로 기후위기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얻어내는 일이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바이든과 외국 지도자로서 처음으로 국제통화를 나눈 캐나다의 Justin Trudeau수상은 상기 공사의 진행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를 대응하는 도전의 과제에 희망적 근거가 있다고 Kerry는 강조하면서, 태양에너지의 발전단가가 떨어지고 있고 청정에너지 기술에 대한 투자와 관련 분야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했다.
“배출가스의 제로를 향한 기획은 기업들에게 거대한 기회를 마련하면서 청정의 일자리와 경제적 성공을 제공하고 있으며, 미국 대통령의 표현에 따르자면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극복하여 과거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 build back better.”
출처 : The Guardians(영국 가디언지) on 2021-01-22.
John Kerry
현재 미국의 국제기후 특명대사이며 지난 오바마 정권시절에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이란핵협정JCPOA을 주도하였다
중국이 현대화의 곤경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내총생산(GDP)의 빠른 성장이 보여주듯 중국 현대화의 성과는 탁월했으나 그 대가 역시 매우 혹독했다. 그 대가는 환경문제, 점점 커지는 빈부격차,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상실 등이다.
중국 현대화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누가 이런 곤경을 책임져야 할까? 이런 곤경에서 중국이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까? 현재 방식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고 쉬운 해결책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은 실제적이고 통합적이며 심오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지혜를 보태줄 수 있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초청장이라고 하는 게 맞다.
내 주장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기반한 구성적 포스트모던 사상이 중국의 현재 방식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적 포스트모던 문화가 중국이나 세계 다른 나라에 정착되려면 “두 번째 계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두 번째 계몽은 중국의 현대화에서 나타난 문제의 책임이 있는 첫 번째 계몽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두 번째 계몽은 중국이 현대성을 넘어 후현대성, 즉 후현대화로 불리는 과정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후현대화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따라 후현대화를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현대화가 현대화와는 완전히 다르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나는 후현대화가 현대화의 긍정적 성취를 보존하는 동시에 현대화의 부정적 효과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그리핀의 설명을 좋아한다.
그리핀이 볼 때 중국은 서구세계의 실수로부터 배움으로써 현대화의 파괴적 효과를 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이미 후현대화의 과정에 있다.
후현대화란 “경제를 인간과 모든 생물권역을 위해 다시 방향 짓는 것”을 요구한다. 중국의 후현대화는 경제성장에 대한 변함없이 헌신하기보다 공동선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려면 경제성장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인식해야 하고, 건강한 성장은 생태적 책임을 다하면서 인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이 후현대화로 전환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전은 주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현대화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경제성장이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궁극의 선”이라는 현대화의 신화를 믿는다. 경제성장과 과학적 발견은 의심이 여지 없이 진보를 구성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동서양,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을 막론하고 이런 개념이 우세하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경제성장을 추구하려는 주류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보도록 하려면 첫 번째 계몽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첫 번째 계몽은 무엇인가
첫 번째 계몽이란 이런 뜻이다: 1)17-18세기 유럽에서 이성과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 역사적인 지식운동, 2)중국에서 민주주의와 과학을 옹호한 1919년 5.4 운동. 중국에서 우리는 이런 계몽을 “미스터 민주주의”와 “미스터 과학”이라고 불렀다. 그 시절, 중국인들은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심지어 삶의 의미에 대한 대답까지 해줄 거라고 믿었다. 비록 첫 번째 계몽의 중국 판과 유럽 판 사이에는 시차가 있지만 이 둘은 역사적으로, 나아가 정신적으로 연관이 깊다. 둘 다 과학과 이성에 대해 온전하게 헌신(실제로는 숭배)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둘을 첫 번째 계몽이라고 부른다.
유럽과 중국에서의 첫 번째 계몽이 사람들을 전근대적 폭정과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혁명적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계몽의 성과 가운데는 자유의 개념, 민주적 참여, 그리고 개인의 위엄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성과들은 높이 평가 받고 보존돼야 한다. 아직도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중국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가치를 증진시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그러나 서구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이미 사회적, 생태적 비용을 지적한 마당에 우리가 첫 번째 계몽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계몽은 현대화를 정당화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근대화에서 경제적 성장의 숭배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개인들의 성공이나 실패에는 무관심” 현대인에 대한 계몽의 강조를 명백히 드러내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첫 번째 계몽의 한계는 무엇인가
첫 번째 계몽에는 다섯 가지 한계가 있는데,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
1) 자연을 향한 제국주의적 태도
첫 번째 계몽은 자연에 대한 불경스런 태도를 취했다. 인간중심주의적 위치에서 자연을 정복, 조작, 지배, 착취하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계몽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었던 것은 자연과 타자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자연은 제국주의적 태도에 따라 노예로 취급됐다. 이는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와도 바로 통하는데, 계몽주의 문화에서 자연과 여성은 둘 다 “비이성적이고 불확실하며 통제하기 어렵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구의 상상력 속에서 두 가지가 상징적으로 연결돼 있는 만큼, 여성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자연 역시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은 이제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
2) 전통과 과거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
첫 번째 계몽은 인간이 어떤 성취를 이루려면 전통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전통과 과거에 대해 허무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유럽에서 과거는 “암흑시대”로 여겨졌다. 중국에서 전통은 완전히 폐기해야 할 쓰레기로 취급됐다. “유교의 폐기”는 현대화 시기의 가장 유명한 슬로건이었다.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은 우리 중국인들이 전통과 맺었던 내재적 관계를 끊어놓음으로써 “하늘과 도의 경외에 대한 존중”, “차이와의 조화”처럼 우리 전통에 존재했던 훌륭한 영적 자원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전통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나아가 전통에 대한 이런 허무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중국에서 믿음과 가치의 상실을 야기한다. 성스러움에 대한 신념과 감각의 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은 과학 혹은 금전처럼 세속적인 어떤 것을 쉽게 숭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오늘날 서구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과학주의와 금전에 대한 숭배가 왜 그렇게 횡행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3) 과학 숭배
첫 번째 계몽주의 사상가 대부분이 과학을 숭배했다. 그들에게 과학은 우주를 사유하는데 있어 유일하게 정확하고 타당한 방법으로 보였다. 이런 확신에 기초해 종교적, 예술적, 직관적, 정서적 앎과 같은, 다른 방식의 우주에 대한 사유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억압하고 폐기시켰다. 생명에 대한 이 같은 “과학 유일”의 옹호자들은 쇼비니스트 과학자들이었다. 리유솅(李玉生)에 따르면, 중국의 계몽주의인 5.4운동 기간 동안 중국 과학자들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으며 중국의 발전은 완전히 자신들에게 달려있다고 믿었다. “나는 과학을 믿는다. 고로, 나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당신보다 우월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반대자들과 논쟁할 때 그들에게 이처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중국의 대표적 계몽주의 사상가인 첸두슈(陳獨秀)는 오직 과학과 민주주의만이 “정치적, 도덕적, 학술적 사고의 수준을 포함한 모든 암울한 면면”으로 부터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이 인류의 문명을 증진시키는데 위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학을 숭배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숭배가 중국이나 서구에서 모두 과학의 한계를 등한시하게 만든다. 사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숭배해온 서구의 과학은 기계주의와 환원주의라는 특징을 갖는 뉴턴 물리학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것은 많은 핵심적 측면에서 틀렸으며 새로운 이론이 이어졌다. 기계론적 과학의 시야에서 볼 때 기계인 자연은 “소리도, 냄새도, 색깔도 없는 무딘 물체”로 보인다. 막스 베버의 표현으로는, 세계는 현대과학의 힘으로 마법에서 풀렸다. 그러나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에 따르면, “문명이 이끄는 대규모 불완전의 잠재적 원인”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4) 이성 숭배
과학 숭배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이성 숭배다. 첫 번째 계몽은 “이성의 시대”로 간주돼 왔는데, 이는 “이성이 그 시대의 통일적, 중심적 지점으로서 그것이 원하고 추구하고 성취했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성, 특히 “정서, 감각, 사회적 구성물, 비인지적 인식에 물들지 않은 순수 이성”이 발전의 원동력이며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순수한 혈통의 이성은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 소수 종족에 대한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역사적 증거들에서 드러난다. 이성은 우리를 더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볼 때 이성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문화적, 영적 규범으로부터 추상화된 채 작동될 때 윤리적 차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성은 자신을 가치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비이성적인 어떤 것을 억압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성은 행위자이자 심판이며, 이런 의미에서 독재자이다.
생명에 대한 “이성 유일”의 옹호의 또 다른 단점은 구획화하려는 경향이다. 이성에는 사회적 이성, 정치적 이성, 경제적 이성, 기술적 이성, 도구적 이성 등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각각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을 지배한다. 이런 종류의 이성의 지배는 현대 산업사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물론 이것이 이성의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상에서 이성은 정서와 가치를 포함하며 사물을 이해하는 보다 통합적인 방식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첫 번째 계몽에서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축수되고 폭넓은 시야를 보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현대적 이성의 세 번째 단점은 개인주의로, “합리적인 자기이익”이 인간 활동의 근본적 동기라고 간주한다. 서구의 신고전주의 경제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합리적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끼친 결과를 고려하는 데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5) 자유에 대한 일면적 이해
“자유”는 계몽주의의 보편적 슬로건으로서, 사람들이 전근대적 폭정의 억압에 맞서 싸우도록 독려하는데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촉진했던 자유의 개념에는 한계가 있다. 간단히 말해 계몽 사상가들은 자유를 공동체에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의 소유물로서 여겼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그리고 (존 로크의 사상에서는) 재산을 소유할 자유로 한정시켰다.
두 번째 계몽은 무엇인가
현대화의 파괴적 결과는 위에 언급한 첫 번째 계몽의 한계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화를 뛰어넘으려면 첫 번째 계몽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두 번째 계몽이 필요하다. 우리는 후현대화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는 릭스 마이어에 따르면 “새로운 방식의 학습/교육, 경제 발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리더십의 새로운 방식, 거버넌스의 새로운 개념, 나아가 더욱 복잡한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첫번째 계몽이 현대적 계몽이라면, 두 번째 계몽은 현대적 계몽을 완전히 배척하는 대신 그것의 많은 위대한 성취를 수용하는 후현대적 계몽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계몽은 어떤 내용을 함축하고 있을까.
1)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생태적 인식으로
인간중심주의가 오늘날 생태적 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두 번째 계몽은 인간중심주의와 그것이 갖는 자연을 향한 제국주의적 태도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이 촉진하는 생태적 인식은 자연을 “주체”로 여긴다. 두 번째 계몽은 우리가 별, 바람, 돌, 흙, 식물, 동물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끊임없이 펼쳐지는 과정의 일부임을 깨닫도록 만든다. 자연은 GNP를 높이기 위해 냉담한 관리자의 입장에서 착취하는 가치중립의 “자원”이 아니다. 아직도 자연을 인간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일반적 환경주의 태도와 달리, 생태적 인식은 자연이 우리를 지킨다고 강조한다. 자연은 음식과 옷을 제공하고 우리의 신체를 키울 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양육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대자연을 사랑하며 경외하며 존중해야 한다.
2) 서구중심주의를 넘어 상호보완적 인식으로
첫 번째 계몽과 현대화가 서구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흔히 현대화는 서구식 현대화와 동일시된다. 서구식 현대화가 유일한 현대화의 발전모델로 보인다. 후쉬(胡適)나 첸슈징(陳序紅) 같은 몇몇 중국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서구문화, 특히 과학과 민주주의가 중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완전히 서구화된 중국”, 즉 정치, 경제, 문화에서 완전히 서구방식을 채택한 중국을 주장했다. 오늘날 이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이 이론의 영향력은 크다.
반면, 두 번째 계몽은 동서양 문명 간의 상호보완적 인식을 촉진한다. 제이 맥다니엘이 지적했듯이 상호 보완적 인식의 핵심은 각각의 전통보다는 그 전통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더 많은 지혜가 생기며,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많은데 그 이유는 “상대로부터 통찰력을 얻음으로써 서로 완전해지도록 돕기” 때문이다. 생태위기, 도덕적 위기와 같은 현대화의 파괴적 결과에 대처하기 위해 두 문명이 협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화, 인(仁), 생태적 의식 등 중국 전통 속의 가치 있는 개념들은 현대화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재평가되고 부활할 수 있다.
3) 동질화에서 다양성으로
동질화란 현대화가 차이보다 같음,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글로벌화에 따른 토착문화의 파괴는 동질화의 사고이며 “타자”에 대한 폭력적 행위이다. 본질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은 다양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 태도를 견지한다.
동질화와 통일성을 선호하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종족, 인종, 성, 문화, 종교를 포함한 인간 사회의 차이에 대해 매우 긍정적 태도를 보인다. 다양성을 존중할 뿐 아니라 감사하고 “영광”으로 여긴다.
구성적 포스트모던 철학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상향 발전하기 위한 조건은 다양성과 복수성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인간사회의 다양성은 “인간정신의 오딧세이를 위한 준비와 자극, 재료”라고 강조했다.
4) 자유에 대한 일차원적 이해에서 다차원적 이해로
첫 번째 계몽이 자유를 추상적으로 취급하는 것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자유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드러내며 특히 사회적 차원에서 그렇다.
첫째, 두 번째 계몽은 자유가 항상 긴장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절대적 자유란 없다. 푸코의 권력이론은 절대적 자유라는 개념을 약화시킨다. 푸코에게 권력관계는 편재한다. “사회의 급소를 구성하는 것”이 권력이다. 자유조차 권력의 효과이다. 행동의 가능성, 자유가 실행되는 조건을 생산하는 건 권력이다.
둘째, “사상, 언론, 혹은 종교의 자유”만 강조하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행동의 자유 혹은 실천의 자유에 주의를 기울인다. 언론, 사상의 자유와 대조적으로 행동의 자유는 원초적인 인간의 요구이다. 화이트 헤드에게 “자유의 본질은 목표의 실천가능성”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 언론의 자유를 갖다 주지 않았다. 그는 불을 구해왔으며, 이는 요리와 난방이라는 인간의 목적에 순종했다.”
셋째, 두 번째 계몽은 자유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다. 자유에 책임을 부과하며 자유와 책임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드러낸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책임이 자유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자유는 항상 내재적으로 책임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책임이 자유를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고 보았다. 이는 자유가 타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타자를 돕는데 헌신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찰스 버치와 존 캅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는 서로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자유다.”
5) 순수 이성에서 미적 지혜로
우리 시대에 등장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신선한 지혜가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현대적 이성은 내재적 약점, 특히 그것이 갖는 헤게모니, 가치로부터의 분리, 구획화, 좁은 시야, 통합적 전망의 부재 때문에 이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두 번째 계몽은 미적 지혜를 필요로 한다.
미적 지혜란 진선미를 조화시키기 위한 유기적 상호연관성의 개념에 근거해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미적 지혜는 과학적 합리성, 인지적 이성뿐 아니라 예술적 직관, 종교적 경험이 함께 발달한 것이다. 미적 지혜에서는 모든 종류의 인간경험이 상호 보완되며 보다 풍성해진다. 미적 지혜는 현대적 이성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 현대 이성은 감수성, 느낌, 가치, 아름다움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를 배척하고 억압한다. 반면 “이것 그리고 저것”이라는 사고에 기반한 미적 지혜는 조화를 중시한다. 이런 점에서 정반대처럼 보이는 것을 통합 조화시키는 것이 본질인 도의 지혜이기도 하다.
미적 지혜는 어떤 면에서 서구의 지혜와 동양의 지혜의 결합이다. 사실 현대의 순수이성 혹은 도구 이성이란 이성이 도 혹은 가치에 내재적으로 관련돼 있다고 보는 중국문화에는 낯선 개념이다. 도가 없는 이성은 없다 .이런 이해에 기초해서 두 번째 계몽에 요구되는 미적 지혜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생명에는 가치가 내재한다는 생명관을 갖는다.
자연을 생명 없는 물질로 취급함으로써 세계를 탈마법화한 현대적 이성과 달리, 미적 지혜는 세계의 재마법화를 목표로 한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 따르면, 자연은 자체의 완결성을 갖는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과학도 미적 지혜의 관점에 설 때 보다 개방적이고 인간적이 된다. 과학 역시 재마법화돼야 한다.
후현대의 미적 지혜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두 번째 계몽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롭지만 책임감 있고, 과학적인 동시에 영성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생태적이다. 중국과 세계가 소비주의의 천박함을 넘어 보다 의미 있는 삶의 방식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런 비전이다.
1972년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이후, 경제성장 위주로 달려오던 현대 문명이 지속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이 더는 인류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문명의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면 인류가 지속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의 한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제안되었다.
이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을 사람들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한 극단은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무한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이며, 다른 한 극단은 지구, 정확히 말해 인류를 위기에 봉착하게 할 경제 성장을 중단하고 지구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준 내로 경제규모를 한정함으로써 인류도 지속되도록 하는 방향이다. 현실에서 각각의 집단이나 개인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 양 극단의 스펙트럼 중 어느 한 지점으로 각자 이해할 것이다.
무한 경제 성장의 욕구를 담보하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이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수식어가 제안되었으며,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 언급될 때 대부분의 경우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해석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논의에서 추구하는 바는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우 지속 가능한 발전에서 ‘생태’가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의 의식과 행동이 변해야 한다. 의식과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방안의 하나는 교육이다. 이러한 목적의 교육 중 하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큰 줄기인 생태 개념을 시민이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생태교육이다. 하지만 생태교육의 개념에 대해 아직 명확한 정의가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생태교육의 정의
생태(ecology)의 뜻은 학문으로서 생태학(ecology)의 정의가 생태학자의 수만큼 다양한 것처럼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는 순수 자연의 상태나 그 속성을 전제하기도 하고, 인간에게 전혀 위해가 되지 않는 환경의 상태를 전제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상태는 인간 개입이 없는 자연이 순수하고 안전하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위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인간이 철저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다. 후자에서 인간의 개입은 전자의 순수 자연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훼손 행위를 방지하는 개입일 수도 있고, 인간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안전하게 개조하는 개입일 수도 있다.
자연 개조를 옹호하는 관점에서의 생태 용어 사용은 생태농법에 대한 인식에서 볼 수 있다. 생태농법으로 생산된 농작물이 인간 건강에 좋다는 관념은 인간을 위한 식량생산의 도구로 자연을 이용하면서 인간 건강에 좋도록 자연을 개조하는 개입을 정당화하고 옹호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태교육에서 말하는 생태는 순수 자연을 전제하며 무한의 물질순환을 통한 생태계의 지속성 개념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다. 생태계는 개별 구성원인 종보다는 구성원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로서 하나의 계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즉 생태교육에서 생태계는 인위적인 개입 없이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물질의 순환계로 여겨진다. 에너지는 생태계 외부에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태계 내 생물구성원의 연결망(관계)을 통해 전달되다가 외부로 흘러 나가는 일방향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물질은 생물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에서 생물공동체 내로 들어와 생물 구성원의 연결망을 통해 전달되다가 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으로 되돌아가며 생태계 내에서 무한히 순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생태교육에서 생태는 인위적인 개입, 즉 에너지의 투입 없이 무한히 순환하는 상태나 속성을 말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개념에 기초한 생태도시는 환경에 위해가 발생하지 않는 자연 순환의 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생태도시에서는 생태위기를 초래하지 않고 도시 문명이 지속되면서 자연 생태계의 생물상도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이상적으로 전제된다.
이처럼 생태교육에서 생태란 인간 문명 내에서 무한의 순환에 저해가 되지 않도록 인간 이외의 생물 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포함한 모든 생태계의 구성원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생태의 정의에 기초한 생태교육은 순수 자연이 무한의 순환을 하듯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인간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 시민의 행동 양식을 익히게 하는 교육으로 정의할 수 있다.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 즉 생태주의에 이념적 바탕을 두고 있는 생태교육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고 인간이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라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다.
요컨대 생태교육은 일차적으로 현대 문명의 지속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자연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민의 생태소양을 높여 생태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생태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 생태교육의 목적은 생태시민이 인간 이외의 생물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현대문명이 자연과 공존하고 지속 가능하게 하며 인류공동체 구성원들도 평등하게 공존하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생태교육
20세기 후반부터 융‧복합적 또는 통합적 접근이 중요시되고 통합적 접근의 교육이 강조되면서 공통과학이나 공통사회 교과목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도입되었고, 생태교육에서도 통합적 교육의 요구가 높아졌다.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가치관 변화와 사회 제도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 생태시민의 개별 행동과 사회행동이 교정되도록 하는 데 기반이 되는 생태교육은 통합과학이나 통합사회를 넘어 전 분야가 통합하는 접근이 더욱 절실하다.
‘통합’은 표준대국어사전의 정의를 참조하면 ‘둘 이상을 하나로 합치는 일’로 교육에서는 ‘학습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학습결과를 종합하고 통일하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통합적 접근’은 ‘경험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치관과 태도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분야의 시각에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통일된 해석과 결론을 내리는 접근’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접근을 통해 개인의 가치관과 태도는 조정 변경되고, 조정된 가치관과 태도에 따라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즉 행동이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적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이 없다. 고등학교에서 형식적인 문∙이과 통합교육과정이 도입되었고 대학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통합교육이 시도되고 있지만, 실제 교육내용이나 방법은 단순한 메들리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통합교과목이라는 명목 하에 한 교과목에 다양한 분야를 넣어놓고 한 교사가 가르치거나 다양한 전공 교사들이 연이어 가르친다고 통합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를 학습하며 형성된 다양한 시각으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통합할 수 있게 훈련시키는 교육이 진정한 통합적 교육이다. 각 분야를 폭넓고 심도 있게 가르침으로써 배양된 학습자의 다양한 시각이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한층 더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해석하며 통합할 수 있다. 이렇게 분석되고 해석된 결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충을 종합적인 틀에서 포괄하여 차이를 줄이고 조화로운 통일을 만들어가는 통합 훈련을 하는 것이 진정한 통합교육이 될 것이다.
생태교육은 이러한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이다. 환경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일차적인 단순한 해석들이 서로 상충되더라도 개인 또는 사회는 하나의 실천적 결론을 강제적으로라도 내려야 하며, 그러한 훈련이 이루어지는 교육이 생태교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합적 결론을 내려야 하는 사례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러한 기술 개발을 친환경적이라거나 생태적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연비가 개선된 차를 소유하게 된 개인은 친환경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보다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되어 운행 시간과 거리를 늘리기 때문에 연료의 소비량이 늘어나고 실제 배출되는 공해기체도 늘어날 수 있다. 낮은 연비 때문에 자동차 소유를 꺼렸던 사람도 자동차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됨에 따라 자동차를 구입하고 운행에 합류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공해기체의 배출총량이 친환경기술 개발 이전보다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 게다가 늘어난 차량을 소화하기 위해 도로 수요까지 늘어 자연이 더욱 훼손될 수 있다. 실제 역사는 이러한 현상을 증명해왔다.
이와 같이 환경부담 감소라는 개별 기술의 분석이나 해석이 기술수요 증가라는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이나 해석과 상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충을 해결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게 하는 제도적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단순한 접근으로 자동차 운행수요를 줄이는 방법은 연료가격을 올려 연비개선에 따른 운행의 경제효율을 이전과 같게 되돌리거나 오히려 개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동차 운행이 유지되거나 감소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 대응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기술자나 회사는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을 더는 개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복합된 환경문제나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 중심 혹은 과제 중심의 생태교육은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이끌어갈 교사를 어떻게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는지의 난제가 있다. 과학, 기술, 사회, 인문 분야의 지식을 모두 갖춘 교사가 통합적 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각 분야의 지식이 부족한 교사라도 통합적 접근의 교육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속 가능성의 생태학적 이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중심이 되는 생태교육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원리를 자연 스스로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생태계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 방식이 더는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제안된 지속 가능한 발전이 인간에게 경제 성장을 중단하거나 축소하도록 경고하기보다는 경제 성장의 부작용을 줄이거나 없앰으로써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을 키우려는 욕구를 오히려 더 자극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친환경 또는 생태 기술을 개발하여 지구 자원(물질과 에너지)의 소비가 계속 늘어나도록 하는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물질의 상을 변환하는 모든 에너지 흐름의 과정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지구의 무질서도(엔트로피)를 높이며 최소한 인류의 지속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엄연한 우주법칙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류 문명은 소비를 유지하거나 줄이기보다는 늘리는 방안을 생태계의 원리에서 찾으려 노력한다. 생태계는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계이기 때문에 생태위기를 악화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물질 소비와 에너지 소비를 늘리는 경제 성장 방안을 제공할 수 없다.
성장의 욕구를 채우려는 지속 가능성 요구와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생태계의 본질은 서로 모순된다. 진정한 생태교육은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고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지속 가능성에 부응하는 인류 문명의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모든 생태학 교과서는 생태계 내의 무한한 물질 순환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생태계 내에서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는 물질은 전체 물질 중 극미량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물질은 저장고에 머물러 있다. 극미량의 물질이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간접적인 에너지는 상대적으로 막대하다.
광합성을 통해 생물공동체가 직접 사용하는 태양에너지의 양은 지구에 유입되는 양의 0.023%에 불과한데 비해 지구 밖으로 반사되어 나가는 34%를 제외한 66%의 태양에너지는 극미량의 물질이 순환하는 생물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도록 지구의 무생물 환경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 극히 적은 양의 물질과 에너지를 생물공동체가 직접 이용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생물공동체 밖에 머물기 때문에 지구는 생물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반증은 제한된 공간에서 생물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이었던 ‘생물권 2’(생물권 1은 지구이므로) 실험이다. 1991년 미국 아리조나 주 남부 오라클의 사막지대에 1만2000㎡의 거대한 유리온실을 지구의 축소판인 바다, 습지, 열대우림, 사막, 초원 등과 3800여 종의 각종 동식물, 자원참가자 8명이 2년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제한된 밀폐 공간에서 생물공동체의 생명현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속 증가하는 무질서도를 감당할 수 있는 거대한 무생물 공간이 없던 생물권 2는 지속되지 못하고 2년 만에 종료될 수밖에 없었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물질 순환은 생태계 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지속 가능한 생물공동체가 이용하는 생태계 내 에너지도 극소 분량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지구 내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계속 늘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원리는 인류 문명의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때만 인류 문명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팽창이 아니라 다른 수준의 질적 향상, 정확히 말하면 자연의 과정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한정된 수준 내의 물질적 풍요를 수용하고 만족하는 정신적 행복의 향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생태교육의 이념
물질과 에너지 소비를 지속적으로 팽창하려는 무한 탐욕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따라서 생태교육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성은 인류 문명의 물질과 소비를 한정된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인간 사회로 확장하는 논의가 필요하다.
(1)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생태철학적 반성
많은 생물학과 인문사회학 책들이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생태계의 존속 방식인 것처럼 호도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생태계는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강자가 약자를 초토화하고 박멸하여 강자가 취할 수 있는 약자가 더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자로 비유되는 포식자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포식활동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포식자는 약자로 비유되는 피식자에게 무심할 수밖에 없으며, 피식자도 그렇게 무심한 포식자에게 도피활동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무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포식자와 피식자는 한 생태공간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필자는 이러한 공존을 ‘모자람의 지혜(frugal wisdom)’를 바탕으로 하는 ‘무심의 공존(disinterested coexistence)’이라 명명하였다. (『이해하는 생태학: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찾아서』, 공주대 출판부, 2005)
이와 반대로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철저한 약자의 멸살로 공존이 무너지는 것을 ‘지나침의 무지(indulgent ignorance)’라 명명하였고, 그 결과는 인류 미래의 지속 불가능성으로 나타난다. (‘함께하는 사회의 구현: 4대강 사업의 이기적 탐욕과 생명경시 극복’, 『생명연구』45호, 2017)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인류는 자연과 공존하지도 못하고 인류공동체가 갈등 없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없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물론, 인류공동체의 갈등 없는 공존을 위해서 인류는 생태계가 보여주는 ‘모자람의 지혜’를 탐욕을 억제하는 자기 절제의 지혜로 깨닫고, 생태계가 보여주는 ‘무심의 공존’을 타자의 생존과 권리를 존중하는 타자 배려의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류 문명은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토대로 자연이 보여주는 생태 평등(ecological equality, 정민걸, 위의 논문, 2017)을 인간 사회의 공동체에서도 구현하는 지혜로운 문명으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다.
(2)함께하는 생태시민의 자아실현
생태계가 지속되는 원리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는 과도한 에너지 전환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작동하는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이다. 이 생태계 지속성의 원리는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무한한 팽창을 희구하는 인간의 무한 탐욕과 기술능력 과신으로 공존을 무너뜨리는 지나침의 무지와 대조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서 무한소비 탐욕의 발로인 지나침의 무지를 생태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소비를 생태적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로 절제하는 ‘모자람의 지혜’가 시민의 삶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비가 절제된 이러한 시민이 생태시민이다.
생태교육은 생태계의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지향하며, 학습자가 이런 이념을 체득함으로써 생태시민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자연과 인간, 인류공동체의 생태 평등을 구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생태교육은 학습자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인간의 탐욕에 비추어 그릇되게 이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생태계는 ‘모자람의 지혜’로 ‘무심의 공존’을 구현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생태계 내에서 능력이 모자란 구성원들이 서로를 관조하며 공존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도 생태교육이 학습자에게 생태계 지속성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깨닫게 하고 자연에 대해 인간의 능력을 절제하고 생태계의 존재를 무심하게 관조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무한 탐욕에 빠져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인류공동체는 구성원 간 불평등의 심화로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하는 생태교육은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공존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함께 하는 생태 평등도 구현하는 교육이다.
기후 파업 참가자들이 도보 행진을 하고 보수 정당들이 퇴조하고 있는 가운데 진정한 시스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손에 얻었다.
미국의 패권적 강짜, 브렉시트라는 암초, 이민자의 강제수용소, 환경 파괴와 같이 매일 계속되는 악재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2008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위기와 뿌리가 같은 또 다른 조짐이라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기실 유럽과 미국 활동가들은 인간과 지구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투자로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이라는 총체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성 경제학자는 이러한 요구 사항을 거부하며 기존의 부당한 이해에만 힘을 실었다. 과거 불황의 모든 심각한 징후가 오늘날 다시 나타나고 있지만, 오래된 해결책은 더 이상 효과가 없으며, 진행되는 위기에 처방전은 이미 약효가 다한 항생제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뻔히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냐며 다그칠 때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 축적되는 반면에, 여유 자본이 인간의 건강 및 주거 환경을 위한 투자가 이렇듯 비참하게 실패한 적도 없었다. 그린 뉴딜은 오래 전에 시행되었어야 한다.
지난 2008년 평론가들은 금융에서 촉발된 자본주의의 종말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앨런 그린스펀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금융시장 자율화에 대한 자신의 과신을 사과하기 위해 의회에서 변론했다. 운동가들은 오클랜드에서 마드리드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광장을 점령했고 심지어 골드만 삭스 CEO도 “후회 할 이유”가 있음을 인정했다. 당시에는 급진적인 변화가 코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그러나 변화는 오지 않았다. 골드만 삭스와 같은 은행이 무너지기는커녕 기록적인 수익을 기록하고 염치없이 엄청난 상여금을 지급하며 대침체를 촉발했던 위험한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 월가 붕괴의 원인인 모기지 부채는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 시기보다 높은 수준이다. 2008년 이후 유럽과 미국의 BBB-급 채권 주식이 4배 증가하고, 공채가 급등해왔다. 그리고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대출채권담보부 증권(collateralised loan obligations, CLO)이 3조 달러 이상으로 급증하며 ‘자산담보부 증권의 급부상을 암시’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재발한 것일까? 금융업자들은 어떻게 파산 직전에 부를 강탈하는데 성공했을까? 한 세기 동안 가장 심각한 불황에도 불구하고 붕괴된 금융질서가 여전히 되살아나 건재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은행산업의)지원과 (인민대중의)처벌이라는 조합의 속임수로 가능했다.
지원과 처벌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은행들은 각자 지원을 받았다. 미국과 유럽연합 정부는 파산한 사채업자들을 구제하여 부채 대부분을 공공 대차대조표로 전환했다.
반면에 대중들은 손해를 얻게 된 것이다. 정부는 금융위기 관련 무책임한 담당자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연금 수급자, 빈곤 계층과 이들에게 지불될 지원금에 도입된 역누진적 삭감에 반대하며 들고 일어선 모든 이들을 처벌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경기 부양책 대한 재정수요를 막기 위해 은밀한 계책을 진행해온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스왑 거래, 교환, 특별 수단(special vehicles purposes)과 같은 많은 정책 중에서 양적완화가 가장 뚜렷했고, 유해했다.
양적완화를 이해하려면 은행이 이자을 받지 못하는 장부 자산을 은행강도보다도 싫어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2008년 실패 이후 투자가 물거품이 되면서 중앙은행은 투자 촉진을 위해 금리를 거의 제로 또는 때론 제로 아래로 내몰았다. 그러나 은행가는 대출자산에 이자를 부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때 난관에 처했다.
중앙은행은 은행가들을 돕기 위해 막주조된 현금을 활용하여 은행으로부터 엄청난 자산을 매수했다. 혹자는 영란은행이 맥도날드(McDonald)가 발행한 차용증(IOU)을 구입하면서 일어난 우스꽝스러운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속임수가 통했다. 중앙은행의 자금 유입으로 불경기를 종결했고 실업률을 낮췄으며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마저 2008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켰다. 은행은 평상시와 같은 영업을 통해 다시 우위를 찾았고, 신뢰도 되찾았다.
그러나 내막적으로는 위기가 악화되고 있었다. 임금 상승과 신규 창업 장려는커녕 양적완화와 금리 인하에 의해 생겨난 대출이 용이한 환경은 기업들이 자사주를 매입하고, 기업의 부유한 주주들에게 더 많은 돈을 넘겨주는 과정 속에서 기업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했다. 2018년에는 자사주매입액이 전년대비 55% 증가하여 사상 최고치인 806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영란은행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양적완화의 전반적인 효과는 영국 내 하위 10%의 개별적 부를 겨우 약 3,000 파운드 정도 상승시킨데 반하여, 상위 10%의 개별적 부를 35만 파운드 증가시켰다.
한편 실물경제에 대한 투자는 급감해왔다. 미국 내 공공투자는 75년 만에 최저 수준인 GDP의 1.4%로 떨어졌다. 유로존에서는 남부 유럽 국가 내 인프라 투자가 위기 이전보다 30% 이상 낮은 수준으로 행해지면서 공공 부문 순투자가 거의 10년 동안 제로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런 현상과는 별개로 지구가 따뜻해지고, 환경이 붕괴되며 생물종들이 멸종해갔다.
오늘날 우리는 불경기로 되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속임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금리가 인하되고, 유동성이 증가했지만 경제는 여전히 침체 상태이다. 매리너 에클스(Marriner Eccles)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중앙은행들이 단지 “무리하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뉴딜 제안이 2008년에 처음 제의된 점으로 보아 이제 2020년은 그린 뉴딜을 활용할 시기이다. 즉 오래된 전략의 담당자들의 주머니가 비어서 더 이상 제안을 변호할 수 없을 시기라는 것이다. 드라기 전(前)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의견이 만장일치였다”면서” 재정정책이 주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번 속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잘못이다. 과거의 위기를 허비했던 우리는 인류 멸종에 맞서 드라기가 뒷받침한 완화된 케인스 자극에 다시 속을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다가오는 불경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인 대응책인 그린 뉴딜에 결집해야 한다.
현재 상황을 하나의 교차로처럼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그린 뉴딜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면 잘못된 에코파시즘으로 빠져들 것이다. 지난 경기 침체의 여파는 우리가 공유된 수요(그린 뉴딜)로 과감하게 전환하지 못하면 단지 현 상황과 다를 것 없는 허망한 결과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주변 지역은 약간 녹색화가 되겠지만 권력 및 자원의 분포는 대략적으로 비슷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계획을 이미 진행 중인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현재 그린 뉴딜 의제에서 바뀐 내용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과거형의 ‘그린 딜’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 파업 참가자들이 도보 행진을 하고 보수 정당들이 퇴진하는 가운데 진정한 시스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손에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정부에게 과감한 그린 뉴딜 없이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며 확실히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Yanis Varoufakis
2015년 7월 6일 그리스의 급진좌파가 이끄는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사임한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세계의 미노타우로스(The Global Minotaur)’의 저자이자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교의 방문 교수이다.
David Adler
데이비드 애들러는 국제 경영대학원 (EUI)의 정책 선임연구원이자 유럽 민주주의 운동(DiEM25)의 정책 코디네이터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대량 살상 무기를 제거한다는 구실로 전개된 2003년 이라크 침공은 ‘미국이 선택한 전쟁(war of choice)’이었으며 지난 세기를 통 털어서 최악의 외교 정책이었다. 이러한 참혹한 과정 뒤 숨겨진 모순이 오늘날 비슷하게 잘못 행해진 미국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중국 동부 저장(Zhejiang)구 제품 라인 앞 화웨이(Huawei) 근로자
이라크 침공은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리차드 딕 체니(Richard Dick Cheney)의 비논리적 사고로 결정되었다. 그는 테러리스트가 대량살상무기(WMD)를 입수할 위험성이 약 1퍼센트로 아주 낮더라도 마치 그런 상황이 분명 일어날 것처럼 단호히 행동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위와 같은 엉터리 추론은 대부분 그릇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미국과 몇 동맹국들은 유사 체니 독트린(Cheney Doctrine)을 행사하여 현재에 중국의 기술력을 공격한다. 미국 정부는 중국 기술의 안전성이 확실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의 기술이 매우 위험한 것처럼 행동하고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올바른 의사 결정은 해당 확률 추정치를 결과에 따른 대안적 행동과 함께 평가한다. 이전 세대의 미국 정치 입안자들은 1퍼센트 위험성이 있던 테러리스트의 대량살상 무기입수 혐의뿐 아니라, 잘못된 전제에 입각한 99퍼센트 때문에 발생할 전쟁 위험도 고려했어야 한다. 그런데 1퍼센트 위험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체니는 (연방의원들과 함께) 이라크 전쟁은 정당성이 부족하고 중동과 세계 정치를 불안정하게 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체니 독트린은 아주 큰 손실을 입을 가능성을 감안하지 않고 사소한 위험에만 집중하여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하는 문제점만 가지고 있지 않다. 정치인들은 이면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포를 자극한다.
현 미국 지도자들은 이런 행위를 다시금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사소한 위험을 높이고 과장하는 방식으로 중국의 기술기업에 대한 공포감을 형성한다. 미국 정부가 무선 광대역 통신(broadband) 업체인 화웨이(Huawei)에 가한 제재가 이에 해당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미국은 미국시장 내 화웨이의 진입을 막고 있고, 전 세계에서 화웨이의 사업을 중단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지정학적 재앙을 초래하려는 것이다.
필자는 화웨이의 기술 발전과 개발 도상국에서의 활동들을 줄곧 지켜봤다. 5세대 이동통신(5G)와 기타 디지털 기술은 빈곤 종식과 여타 지속가능발전목표(SDV) 달성을 위한 주요한 원동력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화웨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통신 회사들과도 교류하면서 지속가능 발전목표를 방책을 강화할 수 있도록 각자의 사업을 장려했다.
필자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이런 주제를 다룬 화웨이의 보고서에 대해 짧은 서문을 작성했을 때, 중국에 악의를 품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당연히 필자는 경쟁하는 상대 기업체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화웨이의 불법 행동에 대한 증거를 요청했고, 여러 번의 검증을 통해서 화웨이 경영진 역시 신뢰받는 경쟁 기업체의 지도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화웨이 5G 장비가 세계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관리는 화웨이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 장착된 ‘백도어(backdoor비밀통로)’를 통해 중국 정부가 전 세계를 감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건대 미국 관리들은 ‘중국 기업들이 국가안보 목적으로 중국정부와 협력을 요구하는’ 중국 법이 있다고 지적한다. .
사실은 이렇다. 화웨이의 5G 장비는 저렴한 비용과 높은 품질 면에서 현재 많은 경쟁사들을 앞질렀고, 이미 시장에 출시되었다. 화웨이의 놀라운 성과는 연구, 개발과 규모 경제에 수년간 엄청나게 투자하고 중국 디지털 시장에서 부딪히며 얻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술 개발이 지니는 중요성을 감안하면, 전세계 저개발 국가들이 저렴한 5G의 조기 출시를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미국은 아직 백도어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전 세계 사람들에게 화웨이를 배제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주장은 막연하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위원은 “5G를 소유한 국가가 혁신을 장악하고 전 세계의 표준도 제정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그 나라가 미국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고 말했다.
다른 국가들 중 특히 영국은 화웨이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백도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설령 나중에 백도어가 발견이 되더라도 그 시점에는 거의 확실하게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독일에서는 화웨이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오가고 있다. 미국 정부는 독일 당국에게 화웨이 5G 기술을 배제하지 않으면 정보 공유를 축소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아마 미국 압박에 영향을 받아, 최근 독일 정보 국장은 체니 독트린에 버금가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통신 인프라(infrastructure)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기업에게 어울리는 분야가 아니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문제점을 입증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화웨이에게 시장을 개방하도록 물밑에서 노력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불만 배경은 미국 자신이 벌리고 있는 국내외 감시 활동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다. 중국 장비 때문에 미국 정부의 비밀 감시가 더욱 어렵도록 방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정부라도 부당한 감시를 해서는 안되며, 부당 행위를 감독하기 위한 독자적인 유엔(United Nations)모니터링이 국제 통신 시스템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 즉 기술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반대로 외교 및 제도적 안전 규정을 선택해야 한다.
화웨이의 배제를 요구하는 미국의 압박은 5G 네트워크의 조기 출시 외에 더 많은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규칙을 기반으로 한 무역 시스템에 미치는 위험성은 엄청나다. 미국이 더 이상 반박의 여지가 없는 세계 기술 강국이 아니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과 고문들은 규칙에 기반한 시스템을 통한 경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중국의 경제 성장을 억누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동시에 그들은 분쟁해결 시스템을 약화시켜 WTO 즉 세계무역기구를 무력화하려고 한다. 이는 국제 규범을 멸시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만약 트럼프 정부가 별개의 기술 진영으로 세계를 분할하는데 ‘성공’한다면, 향후 일어날 분쟁의 위험성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개방 무역을 지지한 이유는 세계 효율성 증대 및 미국 기술 시장을 확장함과 더불어 1930년대 대폭락했던 국제 무역의 역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무역의 붕괴는 1930년 스무트-홀리법(Smoot-Hawley Act) 아래 보호 무역주의의 과다한 관세에 상당한 정도 영향 받았다. 스무트-홀리법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확산시켰고 차례로 히틀러(Hitler)의 부상 그리고 결과적으로 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국제 문제에서는 증거에 입각하지 않고 공포를 조성해서 정책을 실행하면 결국 파멸의 길로 가게 된다. 합리성, 증거, 규범을 우선적으로 안전한 행동 방침으로 굳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어떤 국가도 감시용 세계 네트워크나 사이버 전투를 통해 협박하는 행위가 사라지도록 독자적인 감시 모니터링을 창설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전세계 이익을 위한 디지털 기술 약진을 활용하여 우리가 당면한 시급한 현안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제프리 D. 색스(Jeffrey D. Sachs)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 보건 정책 및 관리학과와 지속가능발전개발학과 교수이며 지속가능발전 콜롬비아(Columbia) 센터와 유엔 지속가능발전 해법 네트워크(UN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 센터장을 역임하고 있다.
작년 9.13대책 이후 거래량이 급감하고 일부 랜드마크 단지 위주로 가격도 급락했던 서울 아파트 시장이 올 여름 완연히 기운을 차린 듯한 모양새를 보이자 향후 서울 아파트 시장의 방향성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거의 모든 미디어들과 자칭 타칭의 부동산 전문가, 대부분의 부동산 유튜버들은 지금이 바닥이라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먼저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동산가격은 인구총량 및 생산가능인구의 변화, 도시화 정도, 산업구조의 변화 등의 요소, 각종 거시경제(금리, 환율, 경제성장률, 1인당 실질구매력, 실업률 등)지표, 수급 등의 요소에 의해 중장기적으로 규정된다. 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 공급(공급량-공급유형과 로케이션 등, 분양방식-원가공개, 후분양제, 청약제도, 실질주택보급율 등)정책, 수요(세제-취득세, 보유세 및 양도세 등)정책, 금융(주택담보대출-LTV 및 DTI- 관리)정책, 공공임대주택 건설 등 주거복지 정책, 개발이익환수장치(개발부담금, 재건축 규제 등)정책 등-도 부동산 가격에 중단기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즉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장,중,단기적으로 허다하며, 경중과 선후가 있지만 지극히 복잡하다.
위에서 열거한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가운데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에 호재는 찾기 어렵다. 인구 등의 장기요인, 성장률 등 거시 지표 등은 향후 서울 아파트 가격을 암울하게 만드는 요소이고, 서울에 신규로 공급되는 아파트 총량도 2024년까지는 충분할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도 서울 아파트 가격의 하락을 강하게 유도하는 정책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격 상승에 친화적인 정책도 아니다.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의 유일한 호재는 사상 최저 수준의 기준금리인데, 이마저도 대출 관리가 엄격하게 되고 있는 점, 기준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다는 건 경제주체들의 체력이 그만큼 약하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호재라고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영원히 상승하는 시장은 없다
사정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아파트 가격이 올 4월 이후 8월까지 거래량 상승을 동반한 전고점 회복을 보인 끼닭은 무엇일까? 부동산가격 상승을 주구장창 주장하는 미디어, 자칭, 타칭의 부동산 전문가들, 대부분의 부동산 유튜버들의 여론조작과 그에 현혹된 시장참여자들의 가격상승기대감이 주범이 아닐까 싶다. 거의 모든 미디어, 자칭,타칭의 부동산 전문가, 대부분의 부동산 유튜버들은 서울 아파트 공급이 부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다주택자들이 투기목적으로 서울 아파트를 구입하지 않는 한 서울 아파트 수급이 문제 될리 없다)부족하니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화폐개혁을 하면 서울 아파트 가치가 더 올라갈거라고 주장하며,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를 하면 신규 아파트 가격이 더 올라갈 거라고 주장하고, 기준금리 인하가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3기 신도시 토지보상이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기승전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론인 셈이다. 견강부회와 곡학아세의 전형이다.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미 서울 아파트 시장은 대세하락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장,중, 단기 요인들이 거의 모두 가격하락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 2014년 가을부터 시작된 서울 아파트 가격 폭등세로 말미암아 강남과 마용성은 고사하고 입지가 떨어지는 지역의 신규 아파트 가격조차 평당 3천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가격 피로도가 극심하다는 점, 가격에 선행하는 지표인 거래량이 작년 8월을 정점으로 확연히 꺾였다는 점(올 8월 이후의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은 거래량이 줄면서 가격이 상승하는 장세인데, 이는 대세하락의 초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 반대로 서울 아파트 가격이 바닥이었던 2013년 같은 경우는 거래량이 상승하면서 가격이 떨어지는 장이었는데, 이는 대세상승의 초입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등이 그 근거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영원히 상승하는 시장은 없다는 사실, 서울 아파트도 대한민국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인내심을 갖고 시장을 지켜볼 때지 시장에 뛰어들 때가 아니다.
지난 10월 25일 – 11월 초에 ‘한반도평화국제회의’를 겸하여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단체와 시민단체 인사들이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 조야에 대북제제의 완화와 미북 간 정산회담 재개를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당시 이들 대표단과 함께 했던 워싱턴의 저명한 팀 서록 기자는 대표단의 활동 과정에 대해 미국의 유력한 정치 전문지인 Foreign Policy와 Nation에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칼럼 기사를 제공하였다.
다시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사안을 놓고 트럼프 미 대통령과 진행하고 있는 양자 협상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데 진저리가 난 것은 북한 국민뿐만이 아니다. 한국 국민들도 더딘 협상에 지쳐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1월 5일, 대한민국 국회의원 71인은 남∙북∙미∙중이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결의안을 발기한 국회의원들은 비무장지대(DMZ)를 가운데 두고 있는 남∙북 국민들에게 필요한 비핵화 회담을 촉구하는 과정이며 “한반도 평화를 불러오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라고 전했다.
그러한 결의는 의미 있는 시기에 이루어졌다. 한 주 전인 10월 31일, 김정은은 단거리 미사일 ‘시험 사격’을 진행하면서 워싱턴을 긴장시켰다. 김정은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위한 정권의 핵무기 언쟁을 다루는 새 제안을 연말 기한까지 맞추라’ 며 트럼프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고 한국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관행적으로 미 주요 언론들은 미사일 시험 사격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반면에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시작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협상은 점차 경멸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북한이 트럼프와 어려운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북한은 여전히 재무장하고 있었다는 예의 소식은 외교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쳤다.
워싱턴 포스트지 강경파 필진인 조쉬 로긴(Josh Rogin)은 “북한은 단거리 미사일을 두 차례 더 발사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고 시험 사격에 대한 트위터를 남겼다. 그러나 한국은 확실히 염려하는 입장이다. 한국인들은 전쟁의 위협 속에서 70년 간 지내왔고 진정한 평화를 간절하게 원한다.
미사일 시험 사격 한 주 전인 10월 말, 한국의 진보 단체는 남∙북 화해 진전 계획을 이어 나가기 위해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의 정책이 변화함으로써 교착 상태가 타개되도록 촉구했다.
미-북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문재인 대통령이 제재를 유지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묵인하는 것에 참지 못한 대표단 22인은 한국 교회, 노동 조합, 학계, 농업을 대표하여 대서양 연안에서 닷 새 동안 미국이 하락해주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 협상 과정은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적 현안
신필영 6∙15 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대표위원장은 “미국과 북한의 답보 상태가 2020년까지 악화되면 한반도에 극단적인 군사 행동이나 심지어 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10월 26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 회담 개회사를 통해 전했다 (필자는 독립 기자로 회담에 초청받았다).
언론과 케이블 뉴스에 한국 관련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미국의 대북 회의론자들과는 달리, 한국 내 진보주의자들은 미국 정책 그 자체가 한국 평화 협정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라는 견해를 보인다.
평화 대표단장이자 중심 인물인 이창복씨는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DPRK,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 정책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해 왔습니다” 라고 북한을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칭하면서 유엔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주장했다. ‘적대 정책’ 이라는 단어 또한 북한이 미국에게 주장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이어서 “미국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의 정신으로 돌아와서 교착된 현 상황과 북한을 억압하는 규정들을 완화해야 합니다.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절차들을 통해 우리는 결과적으로 안정된 평화 정권을 보장하고 비핵화를 이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2018년 6월 12일, 그는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북한과 미국 간의 오래된 적대 관계 종결을 약속했다”고 선언한 사실을 언급하며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 깊게 침식된 전쟁 메커니즘을 뿌리 뽑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표와 함께 한 한국대표단은 지난 10월 5일 스웨덴에서 열린 미국 협상 대표단과의 마지막 실무 회담에서 북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든 것은 완전한 비핵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제재를 강행한 트럼프의 강경책이었다고 주장했다. 열흘 후, 김정은은 눈 내린 백두산에서 언론에 백마를 탄 모습으로 나타났다.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북한의 민족주의, 권력과 불패를 상징한다. 한겨레는 ‘김정은은 북한 국민에게 인내심과 주체성이 담긴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표제를 통해 진보 성향의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미국 전문가 대부분은 소셜 미디어에서 크게 놀림감이 되었던 김정은의 모습을 두고 미국이 올해 초에 정한 기한을 지키지 않으면 아마 ‘더 규모가 크고 더 질이 안 좋은’ 미사일 훈련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것임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이어 데일리 비스트(The Daily Beast)지의 도날드 커크(Donald Kirk)는 김정은의 백두산 등반에 대해 “미국과 한국을 겨냥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끝내 자신의 요구 조건에 굴복하도록 극적 추진력을 얻고자 벌인 협박 작전에서 영웅처럼 보이려는 계획” 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한국 대표단은 김정은의 모습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10월 마지막 주, 유엔 외교관과 미 국회의원, 평화 단체와 만난 자리에서, 대표단은 트럼프가 ‘최대 압박’ 정책으로 김 위원장에게 즉시 비핵화를 시행하도록 강요하며 제재 해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북한이 최근 미사일 시험 사격을 통해 군사력을 과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참관인에 따르면 올해 미사일 24회 발사).
더 나가서, 대표단은 지속적인 제재로 인해 남과 북이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역사적인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이 합의했던 경제 프로젝트를 진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중요한 경제 프로젝트 중 하나인 금강산 관광 재개 안건은 10월 말 김 위원장이 격렬하게 비난한 주제가 되었다. 한국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하자 북한은 한국의 역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대표단은 교착 상태의 원인인 미국의 제재를 비난했다. 신 원장은 “동맹국인 미국에게 간청합니다. 미국이 금강산 프로젝트를 가로막는 규제를 계속 가하고 있습니다” 라고 워싱턴 내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원(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의 연구자 단체에게 말했다. “이 난관을 함께 극복하고 싶습니다.” 신 위원장은 남북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북한 핵무기에 관한 한미 협정 전망이 밝지 않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미국의 비정한 제재는 절실하게 필요한 인도적인 원조도 진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대표단은 에드워드 마키(Edward Markey) 메사추세츠 상원의원과의 회의에서 의약품이나 정수기와 같은 제재 면제 항목에 대한 가능성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10월 30일,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단체에서 이끄는 코리아 피스 나우(Korea Peace Now!) 캠페인에서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 제제가 미치는 심각한 영향이 강조되어 보고되었다. 이 보고서는 객관적인 통계치와 함께 월스트리트 저널과 일간지 등의 매체에서 널리 다루어졌다.
보고서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피해가 나타난 것이 증거로 드러납니다”라고 밝혔다. “제재로 인한 관련 지원의 지연과 유엔의 특정 인도주의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치는 자금 부족의 결과로 2018년에 사망자가 3,968명 넘게 (5세 이하 어린이 3193명, 임산부 72명 포함) 있었을지 모른다고 꽤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6∙15 위원회는 금강산 프로젝트가 시작된 2000년에 첫 남북 정상회담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던 2009년 폐쇄). 위원회는 2016년과 2017대규모 촛불 집회를 조직한 많은 단체 중 주요 일원이었고, 해당 촛불 집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 대통령이 당선된 2017년 5월 선거를 이끌어 냈다.
그 이후, 한국의 진보 세력들은 문 대통령 지지층의 근간이 되어 왔다. 필자가 2017년 광주에서 목격했을 때, 당시 문재인 후보는 정치 및 경제 업무에서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맹세하며 대선 운동을 했다. 햇볕정책은 1990년대 후반 시작되었는데, 2000년 북한에 첫 발걸음을 한 김대중과 노무현 전임 대통령들에 의해 시행되었다. 문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 대다수는 그의 평화 계획에 찬성의 의견을 보였다. 최근 몇 달 동안 지지율이 하락했지만, 여론조사 대부분에 따르면 한국 국민 60%가 문 대통령의 대북 원조를 찬성한다.
그러나 미국의 강경한 대북 입장은 한국과 심지어 문 정부까지 큰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왔다. 미국이 관장하는 한국 내 유엔군사령부(UNC, United Nations Command)가 한국 관리들이 북한 철도 시스템 조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고 한국인들이 북한측과 논의하려고 국경을 넘을 때 엄격한 통제를 지속해오는 것을 보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소한 규제도 있었다. 6∙15 위원회 대표단에 따르면 지난 2월 금강산에서 소환된 한 단체는 노트북과 카메라 소지를 금지당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는 유엔군사령부의 입장을 공개적으로는 옹호하면서도 사령부 정책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표출했다. 10월 21일, 국회 청문회에서 문 정부 측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유엔군사령부(UNC)가 ‘부적절한 법적 근거’를 들어 DMZ 통과를 거부하고 있다며‘ 제도적인 해결책’을 수립하여 사람들이 민간 목적으로 비무장지대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례 없는 질책을 받은 유엔군사령부는 언론 발표를 통해 보도가 ‘부정확’하다고 대응했다).
한국 대법원이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 후일본이 무역 논쟁으로 대응한 것을 두고 문 정부가 반응하자 미국은 문 정부를 비난했고, 한국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미국 반응에 충격을받았다. 6∙15 위원회가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 데이비드 스틸웰(David Stilwell)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서울에서 문정부에게 일본 수출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파기한 정보공유협정(GSOMIA)복귀를 요청했다.
주로 미국과 일본 무기 수출업자로부터 후원을 받는 군사 싱크탱크인 전략국제연구센터(CSIS)에서 주관한 회담에서 한국과 미국의 입장차이는 매우 극명했다. 전략국제연구센터 선임고문이자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정부에서 한국관련 사안을 다뤘던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한국 당국은 자신에게 가장 해가 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문 정부가 일본과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이 분쟁에서 전략적으로 승리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공식적 적개심이 깊어지자, 며칠 전 문 정부의 이수혁 신임 주미대사는 기자들에게 한국의 대북 정책이 미국측으로부터 ‘친평양’이라는 비난을 초래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한국 좌파에게 대북 정책에 대해 칭찬을 받고 있던 트럼프는 한국이 주한 미군에 대한 재정지원을 5배로 늘려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비난을 자초했다.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전 미 국방부 장관의 비서관이 집필한 최신 저서에서는 트럼프가 한국이 미국을 ‘가장 많이 이용해온 나라(a major abuser)’이고 한미 동맹관계는 ‘손해 보는 거래(losing deal)’로 이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트럼프는 주한 미군 주둔을 위해 한국이 연간 60억 달러(약 7조원)을 지불한다면 괜찮은 거래” 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한국측은 이러한 진술을 접한 후 이의를 제기했다. 10월 18일, 진보성향 대학생 단체가 사다리를 타고 해리 해리스(Harry Harris) 주한 미국 대사 관저에 침입하여 미군 지원금 500% 인상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대학생 단체는 ‘해리스는 이 땅을 떠나라’는 배너를 들고 있었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주한 미군 문제에 관해서는 대세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한국인 대부분이 미국과의 군사 동맹을 지지한다고 나타났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주한 미군의 향후 거취를 모호하게 생각하고, 주한 미군을 위한 지원금 인상을 요구하는 미국과는 뚜렷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한국 여론 조사 기업인 리얼미터(Realmeter)는 60% 한국인이 주한 미군 기지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요구를 반대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한국인 52%는 ‘심지어 미국이 병력을 감축하거나 한반도에서 군사를 철수하더라도’ 트럼프의 요구에 반대한다고 보고되었다.”
트럼프의 최근 발언 역시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코리아 타임즈 오영진 편집자는 “필자는 미국 국민들이 트럼프식 교란(Trumpian diversion)을 극복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논평으로 ‘왜 트럼프는 한국인들을 증오하는가’를 제목으로 일간지에 실었다.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회의에서 미 국방부 임원은 한국군은 중동 같은 지역에서는 미군의 지원 병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비침으로써 트럼프 정부 또한 비난을 받았다. 국방부 대변인은 “전시작전통제권(Opcon) 반환 후에 미국이 위기라고 판단하는 해외 분쟁 지역에 한국군을 보내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닙니다” 라고 발표했다.
워싱턴 모임에서 6∙15 위원회 위원들은 제재에 대한 한미 간의 의견 차이를 볼 때, 1954년 공식화된 한미동맹의 의미에 대한 재정립의 필요성이 강조된다고 주장했다.
평화단 대표인 이창복 씨는 “종속적인 구조가 아니라 더 동등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동맹이 변화할 때까지 남북 간 대화는 제한될 것이다.” 게다가 그는 “미국이 한국과 위계적 동맹을 유지하는 이상, (미국 정부와) 북한의 관계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계속해서 해결책은 “한국이 한미 동맹에서 주권을 가지면서 한반도에서 한국의 이해를 옹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탄핵 조사로 곤경에 처해 있고, 외교 문제에서 전혀 예측이 가능하지 않는 트럼프에게는 무리한 요구이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은 여전히 종래의 입장을 보였다. 민주당 핵심 의원(낸시 펠로시(Nancy Pelosi) 하원 의장을 포함한)들은 ‘폭군’ (조 바이든(Joe Biden)의 표현 )김정은과 문 대통령의 협상안을 폄하했고 전략국제연구센터(CSIS)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보상 관련 논쟁에서 공공연하게 일본 편을 들어주었다.
내년 미국 대선 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트럼프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교 정책을 시도하고 여느 때처럼 정책에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김정은과 맞서 비핵화를 성공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예측하지만, 합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급할 것 없다”고도 말했다.
북한 수뇌부도 합의에 대해 같은 의견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위 관료들이 미국의 입장을 맹렬하게 비판한 후에도 김 위원장은 트럼프가 합의를 성사시킬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트럼프와 김위원장은 여전히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김계관 고문은 “워싱턴 정계와 미 행정부 내 북한 관련 정책입안자들은 냉전 사고와 이념 편견에 사로잡혀 북한에 이유 없이 적대적이다” 라고 조선 중앙 통신(KCNA, 북한 통신사)에 논평을 기고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미국이 얼마나 현명하게 연말을 보낼지 지켜보고자 한다.”
이후 10월 31일 CNN은 트럼프가 스티븐 비건(Stephen Biegun) 대북특별대사를 국무부 2인자 자리인 부장관으로 임명했고, 이를 통해 ‘북한 포트폴리오를 유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비건은 놀랍게도 북한에 초점을 둔 인도주의 단체와 평화 단체를 도우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예를 들어 지난주, 그는 여성평화걷기 단체의 창립자인 크리스틴 안(Christine Ahn)과 코리아 피스 나우 캠페인 회원들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제네바(Geneva)에서 마주 친 안 대표는 비건과 만난 적이 있고, “그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고 전했다). 그리고 화요일, 한미 평화 협정 간청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호로서, 알렉스 웡(Alex Wong) 미 국무부 북한 담당 부차관보가 한반도의 전쟁 상태는 “영속돼선 안 되고 영속될 수 없다”고 워싱턴에서 전했다.
한편, 문 정부는 북한이 미국과의 회담에 다시 참석하길 바란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지난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10월 31일 있었던 북한 미사일 시험 발사를 염려하는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을 향한 위험을 경시했다. 그는 국회에서 “북한이 현재 개발하고 있는 미사일 능력은 한국 안보에 아주 위중한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국방비 예산 규모가 북한보다 월등히 많고 한국도 단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다수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부의 입장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신랄하게 비난을 받았다). 11월 4일, 서훈 국정원장은 국회의원들에게 미국과 북한 협상가들이 ‘늦어도 12월 초까지는’ 또 다른 양자회담을 열 것으로 예상된다며 낙관적인 어조로 말했다.
한국군과 미국군은 협상 전에 유연성을 보여주는 뜻으로 예정된 연합공중훈련인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를 중단하기로 동의했다. 2017년 비질런트 에이스에서는 F-22, F-35를 포함한 한미 항공기 270여 대가 투입되어 북한을 향한 한미 합동 능력을 보여주었다 .대신에 그들은 2018년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훈련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러한 결정은 ‘북한 비핵화를 위한 지속적인 외교를 유지’하려는 양국의 노력이라고 한국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이러한 군사 훈련 중지는 한국 전쟁 종전을 위한 평화 조약일 뿐 아니라 미국을 방문한 한국 대표단의 주된 요구이기도 했다. 제재와 관련하여 미연방 의회와 회의를 마친 후 대표단 중 한 위원은 ‘한 번에 하나씩’ 차분히 해결해 나가자고 말했다.
팀 셔록(Tim Shorrock)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는 기자이자 한국 관련 안건 전문가로 «고용된 첩자들: 기밀 아웃소싱의 비밀스러운 세계 (Spies for Hire: The Secret World of Intelligence Oursourcing)»의 저자이다.
일상적 하루였던 1999년 11월 아침, 마닐라에서 열린 10+3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조찬 회동이 열렸고, 한중일 정상들이 모여 행복과 불행을 포함한 유구한 역사를 공유한 동아시아 이웃 국가 간에 3국 협력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
지난 20년간 이루어진 3국 협력은 무역, 경제, 문화, 교육, 기술, 혁신, 높은 수준의 교류에서 생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정상회의를 중심으로 장관급 회의 21차례, 실무 메커니즘 50회 이상을 진행하면서 모든 분야의 협력체제를 구축하여 30개 이상의 분야에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 및 무역 협력
지난 해 한중일 3국간 교역액이 7200억 미국 달러를 넘어선 가운데 GDP를 합산한 수치가 20조 1980억 미국 달러에 육박함으로써 세계 GDP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3국은 3국 투자협정을 체결해왔고 현재까지 자유무역협정(FTA)을 16차례 진행하면서 무역 및 투자를 자유화하고 촉진하기 위해 공조하고 있다.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속도를 낼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얻으면서 3국이 참여한 거대 무역 협정인 역내포괄적 경제협약(RCEP)을 향한 긍정적인 진전을 이루어냈다.
“향후 협력의 추세는 ‘한국-중국-일본+X’가 되어 말하자면 3국이 4·5차 시장에서 협력을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3국은 일대일로 (육상, 해상 실크로드) 연결을 촉진하기 위해 각국의 장점과 자원을 이용할 것입니다”라고 장루핑(Jiang Ruiping) 중국 외교 학원 전 부총장이 말했다.
사회적 및 문화적 교류
2007년 중국 난퉁에서 열린 첫 번째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서 3국은 문화장관 간의 정기적인 대화 메커니즘을 마련하여 3국 문화교류 및 협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중요한 플랫폼을 구축했다.
지난 해 국가간 방문이 3100만건을 기록하면서 3국은 문화 및 예술 교류 증대 및 증진, 유형 및 무형 문화재 보전 추진, 창조산업 교류 활성화, 청소년 교육 교류 심화 등과 같은 주요 협력 분야에 합의했다.
한국과 일본은 정보, 빅데이터 및 기타 첨단 기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강점을 보인다.
한편 중국은 5G와 인터넷 분야에서 거대한 시장과 후발주자의 우위를 지닌다. 뤄 자오후이(Luo Zhaohui)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중국은 한국, 일본과 시장 및 개발 기회를 공유할 용의가 있습니다”고 말했다.
국가 간에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뤄 부부장은 3국 또한 당연히 역사와 영해를 놓고 분쟁을 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3국 모두가 이러한 차이점을 적절하게 다루고 협력 부분을 증대하여 외부 요인의 개입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8차 한중일 정상회담은 지난 12월 24일 중국 서남부 청두에서 열렸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3국간 정치적 상호 신뢰를 더욱 강화하고 경제 및 무역 협력 수준을 높이며 상호 호혜적 협력의 전폭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합의를 이루었다.
2018년 5월 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차 한중일 정상 회담 이후 기자 회견에 참석한 리커창(Li Keqiang)(왼쪽) 중국 총리, 아베 신조(Shinzo Abe)(중앙) 일본 총리, 문재인(Moon Jae-in) 한국 대통령(오른쪽)/사진 <출처: 중국 정부 웹사이트>
세계 경제에 대한 하향 압박과 무역 보호주의 및 일방주의의 배경에는 한국, 일본, 중국이 아시아 주요국 및 동아시아 3대 경제국으로서 지역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세계 발전과 번성을 도모하는 중요한 책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지 윈린(Ji Yunlin)
CGTN 해설가
한-중-일, ‘동북아시아 파라독스’ 타파할 수 있을까?
제8차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12월 22일, 베이징에서 제12차 한중일 3국 경제통상장관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상호무역 및 투자 개선, 역내포괄적 경제협약(RCEP)의 조속한 타결 추진, 한중일 자유무역협정은 물론 무역 보호 및 다국간 무역 시스템 추진과 같은 경제 및 무역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경제적 이해 관계가 한국, 일본, 중국 3국 관계의 초석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한중일 3국 협력은 지역 경제 성장을 분명 촉진할 것이다. 냉전 이후, 한국과 일본은 중국 내 투자를 계속 확대해오면서 3국 사이의 경제적 의존도를 심화시켰다.
지난 1999년, 주룽지(Zhu Rongji) 중국 총리, 오부치 게이조(Obuchi Keizo) 일본 총리, 김대중(KIM Dae-jung) 한국 대통령은 아시아의 금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삼국 협력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3국은 서울에 3국의 협력사무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했고, 2018년에 중국은 일본과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 되었으며 일본과 한국은 각각 중국의 투자처 1위국 및 2위국이 되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 경제는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집착과 같은 비관적인 요인으로 인해 다시금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때문에 한국, 일본, 중국이 지역 투자, 수출, 소비 신뢰도를 증진하고 ‘트럼프 쇼크’를 방어하기 위해 더 심화된 협력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게끔 한다.
동북아시아는 세계에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활동적인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지역 협력은 RCEP와 같은 지역 구성원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지역 국가는 취약한 산업 보호와 지역 영향력과 각국의 상대적 혜택에 더 많이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RCEP 협상 중단이 야기되었다.
때로는 3국 간에 팽팽한 논쟁과 대립이 전개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농업을 강력하게 보호하고, 한국은 새로운 3국 자유무역협정인 한중 자유무역협정에서 비교 우위를 잃을까 우려한다. 동아시아 지역 협력은 복잡하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 일본, 중국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
3국 장관 회담 또한 지역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여전히 냉전 자산을 지닌 유일한 지역이다. 일부 국제 연구자는 안보 대립과 모순된 경제적 상호의존 구조가 구축된 것을 보고 ‘동북아시아 파라독스’라고 부른다.
미국은 한국, 일본과 동맹을 유지하면서 한국, 일본 중국 사이에 ‘분할 및 통치’를 진행하며 동북아시아를 위한 조세 우대 균형 전략을 지속하고 있다.
2018년 이례로 중국에 ‘최대 압력’을 가하기 위해 미국은 중국이 ‘전략적 경쟁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미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K)과의 관계를 아직 정상화하지 못했고, 핵 위기가 초래했다. 반면에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기 거부했고, 먼저 ‘수출 우대국 목록’에서 한국을 제외하여 ‘강제 노역’ 및 ‘위안부’에 대한 한국의 주장을 질책했다.
중국은 한국, 일본과 협력하여 지역 평화를 지키고 번영하는 동북아시아 건설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중국은 더 많은 양자간, 지역간, 세계적인 협력을 수용할 것이다. 한중일 3국 협력은 무역 및 물류에 관한 실용적인 협력을 증진하고, 상호 이해 및 친선 관계를 넓히며, 일본이 역사적인 범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도록 설득하며, 공공의 이익에 기반한 적대적인 지역 주체를 연결하기 위한 성공적인 사례를 마련하는 중요한 플랫폼이 되어왔다. 한중일 3국 협력은 이른바 동북아시아 파라독스라고 불리는 장애를 타파하는 데 충분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기후변화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사회적, 생태적 시스템 붕괴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대표적 문제이며 현재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가 복합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개럿 하딘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공유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은 국가나 시장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유지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세이가 발표된 이후 50년 동안, 우리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규제와 민영화가 어떻게 전세계 공유자원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그것을 망쳐왔는지 지켜봤다.
신자유주의의 공공재 민영화는 공유지의 비극을 자연자원의 영역(공기, 물, 토양 등)으로부터 사회보장의 영역(보건, 교육 등)으로, 마침내 사회적 교류와 내적 삶의 영역(기업 소유의 디지털 기술, 소셜미디어, 광고의 확산을 통해)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기후변화는 공유자원의 민영화와 잘못된 운영의 결과이지, 하딘이 주장한 대로 민영화와 규제를 더 진전시키기 위한 구실은 될 수 없다. 하딘은 공유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못 이해한 것으로 비판 받아왔다. 공유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정치, 경제 제도에 널리 수용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대신, 개인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협력할 능력이 없는 자율적, 이성적, 이기적 존재로 바라보는 신고전주의적 관점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됐다.
엘리노어 오스트롬의 선구적인 작업은 하딘과는 대조적으로 공유자원이 협력을 장려하고 무임승차자들이 자원을 취하지 못하게 막도록 구상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저서 『공유자원의 관리』(1990)는 공유자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8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했다. (역자주: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명확한 경계 ②규칙의 부합성 ③집합적 선택장치 ④감시활동 ⑤점층적 제재 ⑥분쟁해결장치 ⑦규칙제정권리 ⑧최소한의 자치권 보장) 수십 년 간 오스트롬은 어떻게 공유자원이 자율 조직되고 자율 규제되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대규모 연구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200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는 놀랍게도, 오스트롬은 사람들이 시장 또는 국가의 개입이 아닌 효율적 의사소통, 신뢰, 호혜성을 바탕으로 공유자원을 자율 관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업적 덕분에 공유자원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잘 이해되고 확립되었다.
자본주의 대안으로서의 커먼즈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유자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심오한 연구가 확산됐으며 이는 중요한 고려대상이다. 오스트롬은 제도경제학과 게임이론의 방법론을 채택했는데 이는 그의 작업이 주류학계에 호소력을 갖게 한 동시에 연구의 범위와 관련성에 제한을 가했다. 오스트롬이 채택한 방법론은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을 전제했다. 개인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편견은 예컨대 마르크시즘 연구가 탐색했던 것과 같은 구조적, 정치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공유자원의 사유화, 즉 인클로저 운동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역사적으로 인류에 의한 기후변화는 인류의 독특한 특성에 기인한 게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의 글로벌화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은 인류가 지질을 변화시키는 지구물리학적 세력으로 출현한 시기를 1800년 전후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잡는다. 이는 기후위기의 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요구되는 정도의 시스템 위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제이슨 무어는 인류세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이 말은 모든 인간이 기후변화에 똑 같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훨씬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인 책임은 인간과 자원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다행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대안은 이미 존재한다. 「복수우주(Pluriverse)의 공유지」(2015)라는 에세이에서 아투로 에스코바르는 공유화(commoning)의 실천이 글로벌 산업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여러 개의 세계들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커먼즈(역자주: 영어로는 모두 commons로 표기됐으나 이 글에서는 맥락에 따라 공유지, 공유자원, 커먼즈로 번역했다. 커먼즈는 현대 사회운동으로 물질적, 비물질적 공유자원은 물론 참여자들의 주체성 변화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운동은 글로벌 시장 혹은 국민국가에 의한 가치의 포획과 맞서는 시스템적 대안을 위한 존재론적 복수성-Pluriverse-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현재 공유화 실천의 정치적 잠재력을 간과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핵심적인 참조점으로 여전히 자본주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J. K. 깁슨-그래함은 이런 경향을 “자본중심주의”라고 비판했다. 그와 동료들이 개발한 다양한 경제연구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커먼즈에 기반한 경제의 수백 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이런 일련의 경험적 연구는 커먼즈 운동으로 자본주의의 대안들이 수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 국가, 그리고 커먼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다. 인류역사 전반에 걸쳐 공유화의 실천은 생산의 기본 방식이었고, 얼마나 많은 무급노동이 여성과 유색인종에 의해 수행됐는지를 고려할 때 사회적 재생산의 기본 방식 역시 대부분의 경우 공유화를 통해 이뤄졌다. 오늘날 현대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공유지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새로운 도시, 디지털 커먼즈를 결합한다. 철학자 안드레아 베버는 심지어 공유화가 사실상 자연의 재생산에서도 기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로서의 실재」(2015)라는 논문에서 그는 “커먼즈는 실존적인 동시에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관계의 존재론을 묘사한다. 공유화는 지구상의 생명체의 공존을 서로 연결되고 창조적인 과정, 생물권과 문화권의 활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썼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활력 역시 언제나 공유화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다.
가까운 미래에는 이것이 단순히 계속될 수 없다. 세계 경제성장은 꾸준히 감소하며 우리는 경기침체의 시기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비어있는 세계에서나 제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착취논리는 더 이상 가득 찬 세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 기후변화는 시장과 국가 시스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하며 시스템의 일부는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붕괴될 수도 있다. 공통의 자원을 공유하는 일은 불안정성, 갈등, 점증하는 자원부족으로 압박을 받는 점점 더워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 제공하는데 필수적이다.
최근 공유 기반 경제학의 폭발적 증가는 이런 시스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공유에 기반한 시스템은 자원 처리량을 최대 80 %까지 줄이면서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Rizos, X., & Piques, C. (2017). Peer to peer and the commons: A path towards transition. A matter, energy and thermodynamic perspective. Amsterdam, Netherlands: P2P Foundation). 미셀 보웬스와 호세 라모스는 공유 기반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실험이 포스트 자본주의 단계로의 전환을 위한 맹아 형태를 구성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Bauwens, M., & Ramos, J. (2018). Re-imagining the left through an ecology of the commons: Towards a post-capitalist commons transition. Global Discourse. doi: 10.1080/23269995.2018.1461442). 공유화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넘어선 제3의 공급부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력적인 시장과 국가 시스템은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지원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런 좋은 사례를 실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2년부터 공유도시 정책을 시행했으며 불과 3년만에 서울시민은 연간 120억원, 서울시는 1조1800억원을 절감했다. 이 정책으로 1,28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9,800톤까지 줄었다. 여러 국제기구들이 이 정책의 성공을 인정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대중의 인식과 의지를 높이는 것이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시인한다.
커먼즈를 위한 사고방식
패러다임 변화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사회적,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 도넬라 메도스는 대규모 사회적 전환을 촉진하는 가장 전략적인 레버리지 포인트는 사고방식(mindset)의 차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현재 상황이 시사하는 것처럼 만약 커먼즈 운동이 시스템 위기의 제한된 조건에서의 자원이용에 대한 광범위한 대응이 되려면, 사람들의 사고방식, 사회적 규범, 행동양식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관계적 세계관과 존재론은 인류세에 인간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많은 관련이 있다. 인류세의 생명의 복잡성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질문할 뿐만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비인간 행위자들의 권위와 역할을 존중하는 윤리학의 개발을 요구한다. 내가 내부주체성(intra-subjectivity)이라고 부르는 윤리학을 따르는 공유참여자들이 늘어난다면, 단순한 P2P 경제학을 넘어 공유화를 확장함으로써 보살핌을 모든 존재로 확장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자연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상호작용 안에서 공동 생산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관계가 외적으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의존적이며 내적 인식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성 개념과 구별된다. 내부주체성은 어떻게 모든 존재가 서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연결돼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고통과 더 깊이 연결될수록 우리는 그것이 타자의 고통과 어떻게 구성적 관계를 갖는지 더 잘 알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 타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더 많이 행동하게 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문화를 공동 생산하는지, 자연과 문화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어떻게 더 긍정적으로 사회-생태적 시스템 위기를 완화시키는지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해준다. 인류세에 각자 능력이 많이 다른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에게로 확장되는 보살핌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주체성과 행위자라는 개념을 날카롭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의 삶이 문제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간적 품위를 갖추고 지킬 수 있을지, 보다 생생하고 우호적인 세계를 향한 전환의 집단적 조건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등 복잡한 질문들의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공유화는 우리의 비분리성, 상호의존성, 공존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방식이다. 협동조합과 풀뿌리 조직을 결합한 잘 조직된 커먼즈는 투명성, 평등, 존중을 실천함으로써 다양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신뢰를 만들고 책임을 실천하는 것은 성공적인 자기조직과 운영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우분투의 서술처럼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역자주: 우분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건국이념으로 사람들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윤리사상이며, 그 자체로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뜻이다.) 초기불교의 보살사상에 응용한다면, 세속적이고 영적인 운명의 결합으로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에서 생겨난다. 포용성의 확장은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의식은 물질적 인프라와 욕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물질의 전환과 의식의 전환은 함께 이뤄진다.
거의 인식되지 않지만 공유화는 물질적, 사회영성적 교환-스스로 조직하고 서로를 책임지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교환-이라는 형식으로서 이중의 원자가를 갖는다.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정책화하고 규제함으로써 공동자원을 관리하는 정책입안자들과 달리, 공유참여자들은 커먼즈를 땅과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라는 감각으로 운영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의 어부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의무로부터 나온 “신사협약”을 따른다. 유사하게 오픈 소스 디지털 커먼즈 운동은 자발적인 교환이 교육과 리소스에 대한 공공의 접근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오픈스트리트맵의 데이터와 정보를 공유하는 자원봉사자들의 글로벌 커뮤니티는 의료시설, 관공서, 공공시설에 대한 리소스와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이들은 합리적 자기이익으로부터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타자에 대한 헌신의 감각에 따라 서로의 요구를 보살피는 것이다.
커먼즈의 생태계
개럿 하딘,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엘리노어 오스트롬도 현재 패러다임 안에서 공유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공유를 대상물로 여기는 그들의 이해방식은 암묵적으로 실체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커먼즈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주어진 공식적인 규범과 규칙의 존재로 인해 협력하는 합리적, 자율적 개인들에 의해 구상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개인, 시장,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을 경유한 커먼즈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생활을 운영하기 위해 부과된 일련의 과정과 체제로 커먼즈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커먼즈 운동이 글로벌 사회운동이 된다면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사람들의 가치와 세계관을 재형성할 것인가. 공유화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공리적 차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관계적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로버트 울라노비치는 『세 번째 창』(2009)이라는 저서에서 근대성으로의 중요한 전환을 이룬 세 가지 세계관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계론의 세계관으로 데카르트, 흄, 칸트, 베이컨, 특히 뉴턴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는 진화론의 세계관이며 카르노와 다윈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 세계관은 첫 번째 세계관보다 진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관계의 원동력으로서 협력의 중요성, 진화에서의 창발이론, 자연-문화의 동시생산과 같은 최근의 발견을 깎아 내린다. 세 번째 세계관인 관계적 혹은 생태적 세계관이야말로 커먼즈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장 관련이 깊다. 아직 초기단계인 이 세계관은 생태적 혹은 과정적 형이상학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시스템을 상향과 하향의 과정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관계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커먼즈는 탄생 이전에 미리 존재 지어진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실천에 의해 생성된다. 공유화에 대한 이런 합리적 관점은 차이들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로 나아간다. 또한 “커먼즈의 생태계”를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커먼즈 공동체들을 가로지르는 역동적 연대와 협력을 실현한다(Bauwens & Lamos, 2018). 이런 관점은 공유참여자들(commoners)이 서로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바라보며, 자유와 자기결정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 힘, 자원들로 이뤄진 공동체들과의 보다 풍부하고 정교하게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삶의 내재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유쾌하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창발적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자기결정과 공동체의 연대 사이의 조화롭고 끝없이 복잡한 대조를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 커먼즈 운동의 가장 고무적인 측면은 그것이 생태적 방식의 사고, 존재, 행동을 선취하면서 관계적 세계관 안에서 공동체가 번영하기 위한 이미 검증된 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시스템 위기에 대한 광범위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커먼즈를 삶의 방식으로서 탐색해야 하며, 더 큰 문화적 전환의 한 부분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의 모습으로 상상해보는 일이 요구된다.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서 있다. 지금은 인류가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출처: 한겨레>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지구와 호혜적 균형을 이루면서 평화, 아름다움, 창조력, 물질적 만족, 그리고 영적 풍요라는 오랫동안 부정돼온 인간의 꿈을 이루는 것은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꿈을 실현하려면 우리를 그 꿈에서 멀어지게 했던 현재의 문화, 제도, 그리고 사회인프라의 깊고도 신속한 변화가 필요하다.
다섯 가지의 주요한 세계적 경향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멸종, 나아가 생명을 유지시키는 지구 용량의 잠재적 파괴라는 위협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경향은 지구의 지속력을 넘어선 소비 증가이다. 이는 잠재적으로 기후변화, 비옥한 토양의 유실, 깨끗한 담수 공급의 감소, 숲의 소멸, 어업 붕괴 등의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글로벌 생태발자국 네트워크는 우리 인간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1.7배를 소비한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성과의 결정적 척도로 쓰이는 국내총생산(GDP)을 계속 늘리고 있다. 사람과 지구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는 무시한다.
두 번째 경향은 극단적인 불평등의 증가이다. 우리는 소수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과도한 소비를 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삶으로 빠트리는 세계적인 부의 격차를 인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6명의 금융자산이 인류의 절반에 달하는 38억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자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세 번째 경향은 생명파괴 기술에 대한 의존의 증가이다. 우리의 핵, 탄소에너지, 유전자 변형, 인공지능 기술은 지구에 점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종류와 잠재적인 영향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네 번째 경향은 정부와 공공정책에 대한 기업 통제의 증가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금융자산을 늘려주는 데 헌신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다국적 기업의 독점이 점점 집중되도록 방치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매수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에 비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더욱 증가시키는 정책을 촉진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다섯 번째 경향은 점점 증가하는 제도적 정당성의 상실이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기관들이 점점 절망의 삶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공포 속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선동을 목격한다.
내 나라인 미국은 이 다섯 가지 치명적인 경향을 주도하는 세력이자 이런 경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 앞의 도전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한국이 블룸버그 혁신지수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선정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잘못된 서사를 선택했다
우리 인간의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현재가 왜 이렇게 심각하게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엄청나게 나쁜 문화, 제도, 그리고 사회인프라를 선택해 왔다. 이제 전지구화된 하나의 종(種)으로서 우리는 돈을 명백한 공통의 가치로 선택하고 행복의 척도로 사용한다. 관계를 맺는 주된 방식으로 권력과 자원을 가지려는 경쟁을 선택한다. 규범이 되는 기관으로서 사적인 목적과 이윤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을 선택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요 거주지로 사람보다는 차를 위해 설계된 도시를 선택한다.
우리는 서사의 창조물인데, 결함 있는 서사를 선택해왔다.
초기 인류는 상징적인 사고와 의사소통 능력을 발달시켜 점차 다른 종들과 스스로를 구별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소통하고 공유하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한 서사를 창조했다. 공유된 신념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
드문 경우를 빼면 우리는 태어난 집단의 서사를 진정한 현실로 단순히 받아들였다. 이것은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서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가상적으로는 제한 없는 규모의 일관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한 사회의 서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배타적 목적을 위해 서사를 쉽게 조작하도록 만들었다. 현재 우리 인간의 오만, 자기파괴 능력, 그리고 서사적 조작에 대한 취약성, 이 모든 것은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지난 5000년동안 인간과 지구를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조작해온 서사를 그대로 따른다. 과거에 그 지배자들이 왕들과 황제들이었다면, 현재 그들은 기업의 CEO들과 월 스트리트 금융가들이다.
현재 우리 인간의 불행은 거침 없이 미화된 서사이자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인,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사기에 넘어간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돈이 부이며, 돈을 버는 사람이 부를 창조하고, 개인이 얻은 이윤의 합을 넘어선 공동체의 이익은 없다고 믿도록 한다.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우리 모두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접근을 통제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착취해 소수가 이익을 취하는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것의 가치와 논리는 신중하게 고른 “밈”(meme: 비유전적 문화요소로 문화의 전달방식임)을 통해 전세계 대중의 의식에 침투했는데,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구인 “경제 성장” “개인의 자유” “자유시장” “자유무역” “투자자” “다국적 기업” “작은 정부” 등이다. 각각의 문구는 인류와 지구의 복지보다 사적인 금융이익을 우선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암호들에 불과하다.
“경제성장”은 GDP를 증가시키는 것과 관계 없는 자조적 돌봄이나 헌신보다는 시장에서의 거래를 중요하게 여긴다. “개인의 자유”는 단정적으로 개인이 우월하다고 보고 공동체를 폄하한다. “자유시장”은 (규칙에 기초한 윤리적 시장과는 반대로) 기업이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라면 공공의 규칙, 감독, 공공선에 대한 배려를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자유무역”은 (공정하고 균등한 무역과는 반대로) 단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에게 시장, 노동, 자원 및 돈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과 궁극적 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환경적 결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우리의 정치제도는 보호가 필요한 공동체에 봉사할 의무를 가진 정부로부터 주주들의 금융배당을 최대화하는 것 외에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단언하는 다국적 기업에게로 권력을 쉽게 넘기도록 설계돼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에서 근본적인 요건은 돈이 숫자에 불과하고 돈을 벌기 위해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자살만큼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동양문화가 오랫동안 인식해 왔고 지배적인 서구문화가 오랫동안 무시해 왔으며 심지어 부인해온 근본적인 진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명체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남고 번성한다.
우리 몸처럼 지구는 유기체이다
생태문명은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의 적절한 이름으로 보인다.
생태라는 말은 생명이 존재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자기 조직하는 유기체의 능력에 초점을 둔다. 문명이란 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겸허한 관계를 맺는데 요구되는 문화적, 제도적 전환의 깊이를 상기시킨다..
수십 조의 살아있는 세포로 구성된 공동체인 당신의 몸을 생각해보라. 이 세포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요구와 자신들이 의존한 몸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 그들은 각 세포의 연쇄적인 죽음과 재생, 기온의 변화, 영양분·물·정보 그리고 에너지의 다양한 투입을 포함한 변화의 조건에 끊임없이 적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의식의 보금자리이자 에너지의 운반체인 당신의 몸을 창조하고 유지한다.
지구도 진정 엄청난 규모로 이와 똑같은 일을 한다. 지구 안의 무수한 단세포와 다세포 유기체들은 토양, 대수층, 숲, 해양생태, 하천, 강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너지, 영양소, 물과 정보를 교환한다. 또 잉여의 탄소, 독소 및 기타 폐기물을 격리시키고 태양 에너지를 잡아두고 공기를 정화하며 날씨와 기온을 안정시킨다.
우리는 돈, 시장, 기업과 정부라는 인간의 제도에 상응하는 등가물 없이도 지구에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작동하는지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지구 간의 교환을 안내하는 수단으로서 돈, 시장, 기업과 정부라는 인간적 제도에 계속 의존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제도들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 구조화된 대로 우리가 선택한 제도들은 의사 결정을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우리 중 가장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희생시키고 착취하도록 우리의 생존수단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를 이루려면, 이러한 제도들은 모든 사람의 물질적 충족과 정신적 풍요를 확보하기 위한 탈중심화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또한 살아있는 지구가 온전한 건강과 활력을 갖도록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 퍼즐 조각이 하나 더 있다. 우리 인간은 공동체에서 살도록 진화했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에 발을 디딘 이래 대략 99%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조상은 사냥과 채집을 하는 종족으로서 다른 인간, 자연과 직접 연결된 상태로 살았다. 부족 구성원들은 함께 견과류, 씨앗, 과일, 그리고 야채 등을 찾으러 다녔다. 그들은 함께 사냥감을 쫓고 놀이를 즐겼다. 그들은 함께 공동부엌에서 함께 쓰는 불로 식사를 준비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맺는 관계는 직접적이고 평생 유지됐으며 상대방이나 자신이 사는 지역의 실물과 동물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함께 생활하는 여러 세대로 구성된 가족 구성원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지지와 관여, 인내하는 관계를 경험했다. 청소년들 역시 부모들과 거의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그리고 자연과는 절대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활동적인 야외생활을 영위했다.
이런 경험은 어린이들의 직접적인 행복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행복,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과는 얼마나 다른가! 세계적 추세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1인 가구에서 혼자 살고 있다. 1960년대 이래로 1인 가구의 비율은 호주, 캐나다,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현재 미국 아이들의 31%는 한부모 가정에서 살고 있다. 종종 한부모는 한 개 이상의 저임금 일자리에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투쟁하는 엄마들로 긴 통근시간에 시달리며 사회보장을 거의 받지 못하고 동료나 이웃들과 어울릴 기회도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는 대부분의 깨어있는 시간 동안 부모나 다른 친척들과 접촉하지 못 하고, 자연과의 접촉도 거의 혹은 전혀 없다.
이처럼 고립된 상태와 공동체의 지원 부족은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자살이 25% 증가했으며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 인구의 50%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정신질환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난 세기에 걸쳐 우리가 진보라고 자축했던 것들은 돈의 개입, 자동차, 기업, 그리고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정부 등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렇게 아둔하게 망쳐놓은 직접적 관계들을 복원해야 하는 당위에 직면했다.
생태문명은 공동체의, 책임 있는 삶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미래는 대부분 사람들이 대도시나 소도시 혹은 마을에 살면서 다른 사람, 그리고 자연과의 본질적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요소를 충족시키며, 우리가 지구에 가하는 총체적인 물질적 부하를 최소화하는 특징을 갖는다. 자동차에 대한 의존이 증가하고 각 가구를 고립시키며 생태적 통합성을 망치는 교외로의 무질서한 확산은 생태문명 안에는 설 자리가 없다. 또한 대도시에서 자동차의 자리가 없어져야 한다.
생태문명의 자동차 없는 도시에서는 다세대의 여러 가정으로 이뤄진 주거단지가 시설, 도구, 자원 및 노동을 공유하는 활력 있는 생태공동체로서 작동하며,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현재도 일부는 그런 것처럼 부족공동체로서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아이들을 보살피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사회인프라를 설계해야 한다. 사람들이 필요한 서비스, 쇼핑, 교육, 영적 활동, 직장, 그리고 거주지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즐길 수 있는 여가생활 등의 수요가 충족돼야 한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섞이고 어울리는 매력적인 장소가 많은 것이 이런 도시들의 특징이 될 것이다.
호감 가고 개성적인 이웃들이 초고속 부상열차나 지하철로 연결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이 초고속 인터넷으로 소통할 것이다.
교외로부터 철수하면서 도시와 농촌 지역의 경계는 도농간 연계와 공유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으로 다시 그려질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지방정부가 음식, 물, 에너지, 물질적 필요 등 양 지역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다. 또한 공기, 물, 비옥한 토양의 자연적 재생을 가능하도록 하고, 인공비료와 살충제의 사용을 배제하며, 쓰레기를 재활용, 분해 및 재사용할 것이다. (역자주: 필자는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적 번영의 결과물로, 중산층이 교외에 큰 저택을 짓고 각자 자동차를 이용해 도시로 출퇴근하는 생활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다. 생태문명을 위해서는 한국의 아파트처럼 도시의 밀집한 주거단지가 에너지와 자원의 이용이나 관계 회복에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는 오히려 “생태적인 삶” “귀농귀촌”이라는 이름으로, 공동화된 농촌지역에 대형 주택을 짓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기본적으로 관계의 자본화와 붕괴를 나타내는 지표인 GDP의 성장이 아니라 진정한 건강과 복지의 지표로 우리의 진보를 측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건강하게 살며 삶을 즐기고 있는가? 아이들이 적절한 보살핌과 교육을 받고 있는가? 자연은 풍요로운가? 이런 것을 측정하는 지표들이 발전한다면, GDP가 증가하는지 줄어드는지에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보자면, 우리는 다국적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세계에 걸쳐 돈, 인력, 재화가 이동하는 대신,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더불어 살면서 건강과 행복을 최대로 누릴 수 있는 자립적인 생태권역경제를 선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계급분리를 최소화하고 평등을 최대화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도시가 주변 농촌 지역 및 농민들과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실천하려면 법률, 기술, 사회기반시설의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유재산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조금씩 재산을 가져야 한다. 가급적이면 자신의 집과 생계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있어야 한다.
지역 참여적 소유의 필요성은 부의 재분배, 금융투기 해소, 독점기업 해체, 그리고 모든 사업체가 사업을 수행하는 공동체에 종속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의 필요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는 소규모 지역공동체 사업을 통해 가장 잘 성취된다. 아담 스미스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장은 개인 농부나 장인이 개인 소비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곳이다. 현대사회에서는 큰 규모의 사업이 필요하지만, 소유권은 지역적이고 안정적이며 평등해야 한다. 집중화되거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의 소유권은 지역 협동조합원, 소비자, 지역사회 소유권을 위해 없애야 한다.
협력의 정신과 윤리에 따라 각 생태권역은 권역 안의 노동과 자원을 이용해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생태권역에서는 아이디어와 기술, 문화를 자유롭게 공유하며,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것은 이웃들과의 공정하고 균등한 교역으로 얻을 것이다. 은행, 금융, 그리고 소유권을 지역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현재 궤도대로 살면서 소수 사람들이 일시적 과소비를 즐기도록 도와주는 황금만능주의를 추구하다가 멸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생태문명의 비전을 수용해서 모든 인간이 번영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화, 제도, 사회인프라의 전환을 이루자는 공동의 목적에 동참할 수도 있다.
모든 이들을 위한 평화, 아름다움, 창조성, 물질적 충족, 영적인 풍요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가족, 공동체, 국가 모두가 같은 지구생명체의 구성원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갖고 함께 헌신해야 할 시간이 왔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 중단을 위한 협상에서 “책임 있는 어른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어른으로서 협상을 되돌리는 동시에 동북아에서 북한이 할 수 있는 생산적 역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간 각자의 목표 달성을 위한 초반 작업에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인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다소 불공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국가의 지도자는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힘과 그 힘을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하며, 주요 당사자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국가의 “핵심”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김정은 위원장은 분명 앞장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북한에 대한 논의는 당사자 그 누구보다 김 위원장에게 중요한 일이다. 또한 그는 가장 경험이 풍부한 조언자들을 등에 엎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의 행동 방침으로 단결되어 있다. 그 결과 직설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북한의 목표와 필요를 표명하는 리더십이 탄생했고, 김 위원장이 이제 게임을 주도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손에 쥔 자신들의 자산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핵심 이익은 십중팔구 권력의 유지일 것이므로, 북한은 외부의 공격 시 의존할 수 있는 핵무기 및 미사일 대응책을 우선시할 것이며 정치경제적 안정성을 최대한 지키려 할 것이다. 이러한 핵심 이익은 김 위원장이 조선노동당 전체회의에서 선보인 일장연설과 지난 몇 주간 북한 고위급 관료들이 발표한 성명과도 일치한다. 나아가 2018년 3월,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첫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강렬한 브로맨스와도 맞닿아 있다.
북한과 중국은 이후 네 차례의 정상회담을 더 가졌다. 중국은 북한 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기댈 말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되, 가급적 북한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려는 듯하다. 북한이 불안이나 절망에 처하는 것은 중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북한에 양날의 검을 제시했다. 경제 및 안보 상 이익이 충분했다면, 한국의 경제적 개입과 인적자원의 투입도 용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대규모 경제성장과 국제사회에서의 정통성을 얻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과 함께 평화협정을 근거로 외부 공격에 대한 안보가 적절히 확보되었다면, 미국이 주장한 개방적 사찰을 포함한 북한 핵무기 및 ICBM프로그램의 점진적 해체 역시 정당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 위원장도 한국과 미국과 함께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려는 듯 보였다.
마침내 각자의 패가 드러난 하노이 회담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트럼프와 그의 참모진이 불협화음을 낸 그 순간, 그 처참하고 무례했던 순간, 근본적으로 나약하고 무기력한 미국의 입장이 분명해졌다. 미국 최고 당국자들이 계속 입장을 거짓으로 둘러대 왔다는 사실을 통해 미국의 입장이 얼마나 현실성 없는 것인지 재확인된 셈이다. 이렇게 속이 텅 빈 미국의 입장은 이미 회담 2주 전부터 스티븐 비건(Stephen Beigun)대북정책 특별대표 그리고 앤디 김(Andy Kim) 전 CIA 코리아미션센터장에 의해 예고된 바였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이 미국의 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언제든 제재를재추진할 수 있는 “스냅 백 (snap-back)”방식 쪽으로 기울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빠르게 회담장을 빠져나가려 하자 최선희 조선 외무성 제1부상은 영변의 “모든” 시설이 북한의 핵시설 해체에 포함될 것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이후 보도에 따르면 폼페이오(Pompeo) 장관과 볼튼 (Bolton) 전 보좌관이 함께 그랬는지, 아니면 볼튼 전 보좌관이 단독으로 그랬는지는 불확실하나, 이들은 치열한 협상이 이뤄지기도 전에 바로 북한과 합의하면 트럼프가 “나약해” 보일 수 있다며 트럼프를 만류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 후에 개인적으로 트럼프대통령과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의 측근들은 어떨지 몰라도 트럼프는 조기 합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내린 결론, 즉 트럼프를 제외한 그 누구도 북한이 수용할 만한 거래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결론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듯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 제한, 해체하는 동시에 이를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헛된 욕구로 대체하는 것이 곧 자신의 최대 이익이라고 착각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는 유엔의 주요 제재를 경감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이를 간과했다. 게다가 그는 외교와 결합된 가상의 경제전쟁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미국의 태도는 조지 부시(George W. Bush) 정권 이래 국가 정책처럼 자리를 잡았다.
하노이 회담의 실패는 문 대통령에게도 경고 사인이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과의 첫 정상회담을 능숙하게 마무리했다. 이후 김 위원장의 초대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극적으로 화답하면서 이들 사이에 마치 무언가 진행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첫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는 오랜 긴장을 풀고 새로운 유대를 맺자는 내용이 담겼고, 이는 실로 대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를 언급하지 않고, “코피 터뜨리기”위협을 거둔 것만으로도 진정 무언가를 성취한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위협은 소용이 없었을 뿐더러, 트럼프 대통령은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조끼를 부여잡듯 김 위원장의 초대장을 움켜잡았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줄곧, 트럼프와 참모진은 미국과 북한 모두가 수용할 만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한국은 계속 트럼프 정권에 의지했다. 하노이 회담 후, 한국에게는 상황의 재평가가 절실했다. 그러나 재평가가 이루어졌나? 물론 한국 정부와 정계 안팎에서는 엄청난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핵심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하노이에서 중단된 잠정적 합의의 제안자이자 리더로서 한미동맹 안에서 이를 이끌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달에는 트럼프 대통령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은 상원의 탄핵 심판을 기다리게 됐고, 그 자신은 물론 그 측근과 지지자들 역시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2월 5일부로 탄핵안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이러한 미국 내 상황이 한국의 정책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지는 않다. 작년에 미국, 북한,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문재인 대통령을 푸대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의 평화 및 경제발전이라는 한국의 핵심 이익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모두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드라마 같은 대북 협상 속에서 문대통령이 가장 유연한 위치에 있다. 그는 한국의 주요 이익을 구축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풍부한 권력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를 버릴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다른 미 동맹국의 반복적인 괴롭힘이 한국을 불안하고 움츠러들게 하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문 대통령이 민주주의적 정통성, 절충과 관리의 전문성 측면에서 트럼프 대통령보다 훨씬 앞서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게임의 결과는 외국의 어떠한 당사자보다 (김정은 다음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중요하다. 다행히 문 대통령에게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짊어진 빈곤, 고립, 취약함이 없다. 누가 동북아시아의 어른이 될 수 있는가, 또는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스테판 코스텔로 (Stephen Costello)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조지워싱턴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아태재단(Kim Dae Jung Peace Foundation) 워싱턴 지부장을 역임했으며,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대서양위원회(Atlantic Council)에서 한국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현재는 동북아시아의 안보, 발전, 정치에 중점을 둔 정책 이니셔티브인 AsiaEast.Org를 이끌고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Asian Infrastructure Bank)는 2016년 출범 이후, 18개 회원국에서 45개의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회원국이 100개국에 이르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AIIB는 회원국 수에서 세계은행(World Bank)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다자개발은행(MDB, Multilateral Development Bank)이 되었다.
AIIB에 가입하는 회원국이 늘어나면서 이 기관이 기존의 다자간 자금조달의 규범, 표준, 관행 등을 통합하거나 이에 대해 논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AIIB의 가장 가까운 다자간 경쟁상대이자 협력자인 아시아개발은행(ADB, Asian Development Bank)과의 관계가 이같은 의문의 중심에 있다.
아시아개발은행 ADB에는 68개의 회원국이 있으며, 총 가입자본금은 1000억 달러 규모다. 2018년 아시아개발은행 ADB의 자금지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215억8만 달러의 신규 유, 무상 차관이 도입됐으며 민간부문 공약은 전년 대비 37% 증가했다.
AIIB는 설립 4년 만에 아시아개발은행 ADB와 동일한 수준의 가입 자본금을 보유하게 됐지만, 투자포트폴리오의 경우 2019년 15~20개 프로젝트에 대한 예산은 총 35억~45억 달러 정도로 더 작은 규모다. 이는 아시아개발은행 ADB의 2018 포트폴리오의 6분의 1 수준이다.
AIIB에 2020년 이전 필요한 자금은 약 26조 달러로 추정된다. AIIB이 아시아개발은행 ADB와의 경쟁 없이 신규 프로젝트 포트폴리오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하다.
아시아개발은행 ADB와 AIIB는 개발 및 인프라 자금조달이라는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협력적 관계를 빠르게 발전시켜 왔다. AIIB는 올해 ADB, 세계은행, 12개 기타 개발은행 및 기금들과 양해각서를 체결한 바 있다. AIIB는 ‘국제 개발은행의 일원’이라는 지위를 부각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AIIB의 고위간부 중 다수는 아시아개발은행과 세계은행에 몸담았던 인물들이다.
아시아개발은행 ADB와 AIIB간의 협력이 증가하고 있지만, 이들 기관 주주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정학적 긴장 역시 함께 증가하고 있다. 이는 AIIB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미국 및 일본의 결정과 AIIB에 대해 가입의지를 보인 정치 경제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비판을 통해 입증된다.
미국과 일본은 아시아개발은행의 2대 주주로서, 각각 총 가입 자본금의 15.6%를 출자하고 있으며, 12.8%의 의결권을 가지고 있다. 이 기관은 항상 이 두 나라, 특히 일본의 지리적 이해를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돼왔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아개발은행의 역대 총재는 모두 일본인이며, 일본인 직원들이 기관 내 고위직책을 장악하고 있고, 아시아개발은행이 자금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의 경우 일본의 지정학적 우선순위에 따라 계획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시아개발은행을 주로 일본이 주도한다면, AIIB는 중국의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 중국은 AIIB의 최대 주주로서 뒤이은 5개 국가의 의결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높은 26.6%의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로써 중국은 다수결에 의한 모든 결정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갖게 됐다. 중국은 이미 대만의 가입신청을 거부하는 데 이 권한을 행사한 바 있다.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개발국가군)의 주요 인프라 자본국이며, AIIB는 중국이 중국개발은행이나 상하이협력기구와 같이 인프라 자금조달을 확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많은 기관 중 하나다. 이들 기관은 세계 정치경제 환경에서 중국 주도로 아시아 미래 개발 궤적을 구체화하는 역사적 변화를 보여주는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AIIB는 중국 공산당에 다른 수많은 혜택들을 제공하는데, 외교적 이익을 취하며 중국 건설회사를 지원하는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에 자본준비금을 투입하는 수단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다자개발은행의 성공적 운영을 통해 지리적,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지역화를 형성하고, 동시에 중국의 위상과 차용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다.
다자개발은행은 채권국들과 긴밀히 연계돼 있지만, 이같은 관계와 거리를 둘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자개발은행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쌍무 원조 관련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할 수 있다. 일본, 미국, 중국의 동맹국이 아닌 국가들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해 온 아시아개발은행과 AIIB의 대출 패턴이 이를 반영한다. 2019년 4월 현재, 인도는 중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부상국가임에도 불구하고 AIIB 전체 대출금의 28%를 할당 받았다.
그러나 인프라 자금조달과 건설이 지리경제학 및 지정학적 권력을 투영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시아개발은행과 AIIB 간의 어느 정도의 경쟁은 불가피해 보인다.
중국은 아시아개발은행과 AIIB의 미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두 기관 모두의 대주주이자 아시아개발은행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대출을 받은 수혜국이다. 또 중국은 관련국들을 진정시키고 광범위한 회원국 확보를 위해 AIIB의 초기 계획안을 상당부분 수정했다. 다시 말해, 다자개발은행을 이끄는 리더십 측면에서 미국을 뛰어넘는 타협의지를 보인 것이다.
키어런 심스(Kearrin Sims)
케언즈연구소 연구원 겸 호주 제임스쿡대학(James Cook University)의 개발연구 강사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강도”(intensity)라는 용어가 맡는 역할에 가장 상응하는 용어는 “아름다움의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아름다움”은 자연의 미적 성질이나 예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경험이 갖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 주요성분은 감각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비록 감각이 감정의 깊이에 명백하게 관여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어떤 경험의 계기에서 주체성이 갖는 조화의 완전함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의 힘은 두 가지 요소, 즉 구성요소의 다양성과 그러한 구성요소를 개별적으로 느끼면서 얻는 강도를 조합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강도란 여전히 가치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로서 기여하는 것이다. – 존 캅, 「화이트헤드의 가치론」(https://www.openhorizons.org/whiteheads-theory-of-value.html)
어니스트 캘런벡의 1975년 소설 <에코토피아>의 영화 이미지컷.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배경으로 에코토피아라는 이상향의 생활을 그렸다.
개요와 소개
“아름다움”은 생태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1)일상의 직접성에서 감정적으로 느낀 경험의 조화와 강도, (2)그러한 느낌을 환기시키는 경험의 객체, 즉 타인, 다른 형태의 생명, 인간 관계, 자연 세계를 뜻한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예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삶의 예술적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관계적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다움은 삶 자체의 내면에서 발현하는 활력이자 번영이다. 인간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이는 다른 동물도 그렇다. 아름다움은 삶을 “삶”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아름다움의 경험에 수반되는 마음과 정신의 성질은 인간의 정신적 알파벳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폭넓은 감정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주목(attention), 연결(connection), 헌신(devotion), 열광(enthusiasm), 신념(faith), 용서(forgiveness), 감사(gratitude), 관용(generosity), 환대(hospitality), 상상(imagination), 정의(justice),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사랑(love), 의미(meaning), 양육(nurturance), 개방성(openness), 재미(playfulness), 호기심(questing),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그리고 신비에 대한 감각 등이다. (번역자주: 필자는 아름다움과 관련된 감정의 요소가 갖는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알파벳 순서로 단어를 나열했다.) 생태문명은 교육과 예술, 건강한 가정 생활과 시민으로서의 삶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런 감정적 성질들을 느끼고 알고 실제 그렇게 살도록 돕는다. 또한 이를 통해 타인이나 보다 큰 생명공동체에 존중과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생태문명은 아주 이상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위한 온실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다섯 가지 형식은 생태문명에서 특히 중요하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과 강, 나무와 별),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예술, 음악, 그림과 음악의 풍경), (3)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 그리고 인간세계를 넘어선 사회로부터 얻는 관계의 느낌),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친절, 정의), (5)전인적 아름다움 (깊이와 넓이를 동반하는 ‘폭넓은’ 영혼의 성장).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아름다움의 생태학’의 구성요소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세우고 유지하게 만드는 벽돌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가!
이런 공동체가 “아름다운” 이유는 창조적이고 연민적이고 참여적이고 다양하고 포용적이고 동물에게 자비롭고 지구에 좋고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우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등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공동체를 상상하고 발전시키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생태문명이라는 “전공”의 목적이다. 이 전공의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에 대한 더욱 심화된 고찰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1)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2)아름다운 공동체, (3)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4) 아름다움의 생태학.
1. 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수 년 전에 맥신 홍 킹스톤(湯婷婷)이 우리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명예교수인 그녀는 재능 있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중국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겪는 경험에 대한 여러 편의 논픽션 저자이기도 하다.
킹스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에 강연을 했는데, 그녀는 킹의 연민적 공동체에 대한 구상을 자신의 참조틀로 사용하였다. 알다시피 킹은 연민적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beloved community)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서로를 걱정하며 보살피는, 그러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문구였다. 사랑의 공동체는 연민적인 공동체이며 애정 어린 공동체이다.
킹스톤은 킹의 문구에 기대어 예술이 어떻게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배려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킹의 문구를 인용할 때마다 실수로 “사랑의 공동체” 대신 “아름다운 공동체”(beautiful community)라고 말하곤 했다. 그 때마다 그녀와 청중들은 매번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지점에서 킹스톤은 결국 고쳐 말하기를 그만두고 강연 내내 예술과 정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나를 포함한 청중들은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에 익숙해졌고 또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그리고 킹스톤에게 사랑의 공동체는 사실상 아름다운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움 자체처럼 본질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시적인 언어 말이다. 이 점은 뛰어난 과정철학자인 샌드라 루버스키가 쓴 「아름다움을 말하라(Speak the Name of Beauty)」라는 짧지만 우아한 글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과 아름다움 사이의 연결을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자연의 질에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하다. …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삶을 격상시키는 만드는 관계들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가치다.
이처럼 자연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그리고 삶을 격상시키는 아름다움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킹스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녀의 강연이 끝나갈 즈음에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지구와 다른 생명체를 어떻게 취급하게 될까요? 그들은 올바른 대접을 받게 될까요?” 그녀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킹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생명의 그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간과 다른 생명체에 대해 수용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생태 공동체가 될 거예요.”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간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개념을 확장시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대학생들이 그러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공부할 수 있는 “전공” 혹은 전문분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2. 아름다운 공동체
세계 어딘가의 대학에 생태문명 전공이 개설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 나아가 그 전공이 캠퍼스 내에서 가장 인기 있다고 상상해보라. 학생들은 그 전공이 실천적이면서 희망적이고 전일적이면서 창조적이기에 매력을 느낀다. 생태문명 전공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활기차고 삶을 격상시키는 공동체를 지역 단위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기술과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킹스톤의 말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공동체 말이다.
이런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런 공동체의 아홉 가지 중요한 특성 혹은 성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창조적이다.
(2)연민적이다.
(3)참여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한다.)
(4)다양하다. (공동체가 종교적, 문화적인 다양성을 환영한다.)
(5)경제적으로 포용적이다.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며 경제적 격차가 크지 않다.)
(6)동물에게 자비롭다.
(7)지구에 좋다. (오염을 수용하고 자원을 공급하는 한계 내에서 살며 다른 생명체의 서식지를 남겨둔다.)
(8)정신적으로 만족스럽다.
(9)누구도 뒤쳐지지 않는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살핀다.)
이러한 공동체의 “영성”은 감성적 지성과 일상에서 구현된 지혜가 조합된 것으로, 종교를 갖고 자신의 종교로부터 “영성”을 찾아내는 사람들에게도, 영성에는 관심이 있으나 특정 종교에 연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수용 가능한 것이다. 영성은 인간성의 영적 알파벳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로 관련된 형식의 마음과 정신의 광범위한 특성을 포함한다: 주목(attention), 연민(compassion), 연결(connections),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상상(imagination), 재미(playfulness), 호기심(wonder), 침묵(silence), 정의(justice), 숭배(reverence),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번역자주: 여기서도 다시 알파벳 순으로 단어를 나열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내가 “전인적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의 부분들이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는 바람직한 이상이다. 지구상의 어떤 공동체도 이러한 특성들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홉 가지 이상을 상당한 정도로 실현한 현존하는 공동체들은 사실상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구축하는 벽돌들이다. 생태문명 전공은 학생들이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고 발전시키도록 돕는 걸 목적으로 한다. 그 과정에는 긍정심리학, 도시계획, 유기농업, 사회정의, 영성, 종교 간 대화, 교육, 건강 관리, 환경경제학, 진화생물학, 생태학 실습 등의 과목이 포함된다. 생태문명 전공은 또한 학생들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행하며 평가함으로써 생태문명의 역동성을 구현하는 실천적이며 능동적인 배움의 요소가 요구된다.
3. 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생태문명 전공을 위한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라 부른다. 이 과목은 학생들에게 생태문명의 철학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전반적인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이상인 “아름다움의 힘”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가르친다.
처음에 학생들은 교과목의 제목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듣고 놀랄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별적인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양철학의 편협한 척도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적인 감각, 개인의 취향 혹은 예술에만 한정된 어떤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공공의 선도 아니며 “실제 세계”에 속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교수들은 이 과목에서 아름다움이 사실은 공공의 선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예쁨도 아니며 예술 작품에서 발견되는 성질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화이트헤드가 “아름다움의 힘”을 통해 말하고자 한 어떤 것이다. 아름다움은 조화와 강도의 조합이며 경험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활력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힘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것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활력과 살아있음(강도)의 감각을 조합한다.
교수들이 강조하듯 아름다움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은 우리를 이끄는 이상이자 희망의 원천으로서 생태문명과 그것의 출현을 위한 일차적인 가치가 된다. 학생들은 곧바로 이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생태문명이 파국적인 미래에 대한 공포나 현재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로부터 출현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한다. 생태문명은 좀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으로부터 등장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것보다 좀더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감각 말이다. 아름다움은 희망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학생들은 몇몇 화이트헤드의 관념을 배우며 그 관념들을 통해 교수들이 “아름다움의 우주론”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 이 관념들은 다음과 같다.
(1)인간은 생명의 그물의 일부다: 인간이 거대한 생명의 그물의 일부이지 그 바깥에 있지 않다는 관념.
(2)모든 것은 상호 생성의 과정에 있다: 전체로서의 그물, 그리고 그물의 각 매듭은 언제나 과정 혹은 되어감에 있다는 관념.
(3)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각자의 권리로서 가치를 지니며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관념.
(4)모든 곳에 살아있음의 활력과 같은 것이 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부터 하늘의 가장 높은 곳까지 “생명” 혹은 “살아있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관념.
(5)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서 내면적인 활력을 얻는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 안에 만족 혹은 삶의 충족을 향한 에로스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험의 풍부함 혹은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는 관념.
(6)전체로서의 우주 또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 움직인다: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이 살아가고 움직이고 자신의 존재를 갖는 동시에 전체로서의 우주 자체가 어떤 종류의 생명이며 우주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를 갖고 있다는 관념.
이러한 관념들은 학생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식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런 관념들은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또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질 때 아름다움의 생태학을 위한 우주론적 배경을 형성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다른 철학적, 문화적 전통, 아마도 특히 동아시아 전통들에서 유사한 관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전통으로부터 비슷한 관념을 찾고 공유하도록 권장된다.
4. 아름다움의 생태학
이렇게 학생들은 아름다움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입문한다. 생태문명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종류의 아름다움들이 있다. 자연적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관계적 아름다움, 도덕적 아름다움, 전인적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몇몇 중요한 점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 통합되어 생태문명의 아름다움이 된다. 아름다움의 생태학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 강, 나무, 별, 동물, 식물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서로 연결돼 존재한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에서 외경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연구가 증명하듯 인간의 행복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샌드라 루버스키의 말의 떠올려라: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인간이 설계한 다양한 형식의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도구와 가구, 건물과 도시경관 같은 유형의 생산물을 포함하며 상징과 로고스, 이야기와 시, 춤과 음악 또한 포함한다.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참여하거나 그것과 협동한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의 그물과 함께하는 공동창조의 행위이다.
(3)관계적 혹은 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이 우정과 가정생활,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세계와 맺는 만족스러운 관계에서 오는 아름다움. 이런 아름다움은 예를 들어 유교경전, 성경, 코란의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 연결의 영성에도 내포돼 있다.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봉사, 정의를 추구하는 행위에서 오는 아름다움. 수필가 이푸 투안은 이를 이렇게서술했다: “사심 없는 기품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관용의 행위는 용기 있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아름다움의 사례이다. 진실된 겸손도 이타적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몇몇 사람이 신체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듯이 몇몇 사람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도덕적 아름다움은 타고 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고무하는 사회에서는 쉽게 등장하고 번창한다.”
(5)전인적 아름다움: “통합적인 되어감”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지혜와 연민, 창조성을 키우는 전인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혹은 되고자 추구하는 아름다움. 아일랜드의 시인 존 오도노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아름다움은 멋진 사랑스러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다 통합적인 것, 실체가 있는 되어감, 원만함의 출현, 은혜로움과 우아함의 위대한 감각, 깊이에 대한 깊은 감각, 그리고 만개하는 삶에 대한 풍성한 기억으로의 돌아감에 관한 것이다.”
예비과정의 끝에서 학생들은 아름다움이란 관념이 이처럼 생태적인 문맥에서 이해될 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생태문명을 실현시키고자 활기차게 노력하기 위한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또한 지구에 기반을 둔 사랑의 공동체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이며, 아름다움이 갖는 매력은 삶의 활력과 격상을 위한 영감을 제공한다는 맥신 홍 킹스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산업문명은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된 문명 형태가 아니다. 16세기 유럽에서 근대적 사고방식이 시작된 것을 기점으로, 이후 과학과 기계기술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확산된 삶의 방식이다. 산업문명은 인류에게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산업문명에도 부작용이 생겼다. 첫째는 구조화된 빈부차이다. 산업혁명에 의해서 가능해진 물질적 풍요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빈부차이가 구조화되었고 그 차이는 더욱더 벌어지고 있다. 특별히 1990년 이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빈부차이를 더욱 심각하게 벌리고 있다. 둘째는 생태계 파괴이다. 모든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원을 자연으로부터 가져와야 하고 자연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는 과학과 기계기술은 생태계의 흐름을 심각하게 파괴하였다.
한국에서 산업문명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만들고, 발전소가 가동되고, 전차로 이동하면서 산업문명의 일부를 미리 체감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가 한국을 산업화시키려는 목적보다는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제는 실제로 35년 동안 한반도의 생태계와 문화계를 철저히 짓밟았다. 한반도 전체에 대해 체계적인 생태계 조사를 한 다음, 전 국토의 나무를 대대적으로 벌목해 전쟁물자로 사용했다. 한국이 1960년대부터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일이 ‘나무심기운동’이었다. 북한은 나무심기보다는 식량 증산 운동을 장려하였고, 이 때문에 북한에는 아직도 민둥산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은 나무심기에 성공함으로써 국토에 물이 충분해지면서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 한국은 경공업, 중공업, 그리고 전자산업까지 발전하였다. 산업문명 역사를 시작한 지 약 60년 만에 한국은 산업화에 성공했다. 이후 한국은 민주화에도 성공함으로써 한 세대 만에 문명의 전환을 이루고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한국도 심각한 환경파괴와 빈부의 차이로 고통을 겪고 있다.
첨단기술문명이 아닌 생태문명을 선택해야 한다
산업문명 이후의 문명 형태로 인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앞에 놓여 있다. 하나는 과학과 기계기술을 최첨단으로 발전시켜서 환경파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첨단기술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상호 공존하는 방향으로 재정립하는 생태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첨단기술문명은 지구의 생태적 질서보다는 인간의 산업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생태문명은 인간의 기술보다는 지구의 자기조직과정인 지구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기술은 지구의 자연적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 생태문명의 입장이다. 첨단기술문명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자연을 착취하고 조작하는 문명이라고 한다면, 생태문명은 인간이 자연과 함께 존재하면서 함께 진화하는 문명이다.
첨단기술문명과 생태문명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관점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두 문명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20세기를 주도했던 갈등이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정치, 사회적 갈등이었다면, 21세기를 주도하는 갈등은 자연을 계속적으로 착취하려는 자본주의자들과 자연세계를 보전하려는 생태주의자 사이의 갈등이다.
첨단기술문명은 인류와 생태계를 조작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첨단기술문명의 전망 속에서는 100년이나 500년 후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어떻게 변할지 상상할 수 없다. 생태문명을 미래의 대안문명으로 주창하는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과의 원형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성찰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신석기 시대의 삶의 방식이나 고전문명의 생태적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는다. 특별히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조화를 강조했던 동양종교의 지혜에서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과학이 우주에 대해 발견한 새로운 통찰에서 생태문명의 당위성을 찾고 있다. 최첨단 우주과학은 우주가 138억 년 전 빅뱅이라는 같은 기원에서 시작했다는 과학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진화론은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같은 진화의 연속성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료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의 진화, 지구의 진화, 생명의 진화, 의식의 진화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생태문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과학적 전망 안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새롭게 통찰한다. 우주 진화 안에서 인간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지 묻는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를 의식하는 존재이며 경축하는 존재이다. 이런 통찰에 근거할 때 인간은 자연을 파괴해서 안 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생태문명은 이러한 인간관과 우주관에 근거하고 있다. 생태문명을 우리의 미래전망으로 가질 때 인류와 지구생태계가 미래에도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두 문명 사이의 갈등은 핵발전소에 대처하는 방식, 이산화탄소를 줄이자고 약속한 파리기후정상회의의 합의를 실천해가는 과정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우리나라도 국가발전 계획에 대한 국론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분열돼 있다. 4대강 사업에 대하여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갈라졌고, 핵발전소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편과 폐기를 주장하는 편이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주장의 근저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문명관이 전제돼 있다. 4대강 사업이나 핵발전소 건설을 주장하는 근저에는 산업문명의 세계관이, 4대강 사업이나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근저에는 생태문명의 세계관이 전제돼 있다. 어떤 문명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찬성과 반대가 갈리며, 환경파괴에 대한 진단과 처방도 달라진다.
인간과 지구생태계가 미래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문명이 아니라 생태문명을 선택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 진화의 산물(earthling)이며, 지구를 떠나서는 살 곳도 없고 살 방법도 없다. 지구의 질서를 존중하고 생태계와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보전하는 길이다. 산업문명을 생태문명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그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기계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문명이 제공하는 중독을 끊고 생태문명을 선택하는 일은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류와 지구생태계 전체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다.
지구는 단 한 번 주어진 것이다
생태문명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생명중심주의’ 또는 ‘지구중심주의’이다. 산업문명이 인간중심주의라고 한다면 생태문명은 인간생명만이 아니라 생태계의 모든 생명, 더 나아가 지구질서를 소중하게 여기는 문명이다. 생태문명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몇 가지 통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이다. 산업문명의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만이 주체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대상화할 수 있는 객체였다. 그러나 생태문명의 세계관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같은 근원에서 유래하는 주체적 존재이다. 이런 우주적 공동체적 이해에서 생태계를 보전해야 할 원리가 나온다.
둘째, 지구는 오직 통합적으로 기능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며 유지될 수 있다. 산업문명은 지구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 분할하고 부분화해 처리했다. 그러나 지구의 운영체계는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 없으며, 어떤 생태계도 지구의 운영체계와 분리해서 보존할 수 없다. 지구는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셋째, 지구는 단 한 번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허락되지 않는다. 산업문명은 지구의 자원이 무한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만약 지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생물종도 멸종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떤 것도 멸종한 생물종을 다시 복원시킬 수 없다.
넷째, 지구가 일차적이고 인간은 이차적 존재이다. 산업문명에서는 인간과 국가가 일차적이고 지구는 이차적이었다. 생태문명의 세계관에서는 지구 공동체가 일차적 경제 실체이며, 일차적 교육자이며, 일차적 통치자이며, 일차적 치유자이며, 일차적 도덕적 가치다. 지구의 건강이 우선이다. 지구가 건강하면 지구에 속해 있는 모든 것도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가 파산하면 지구에 속한 인간과 국가 그리고 모든 생물종도 파멸하고 만다.
다섯째, 현재 지구의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45억 년의 지구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맨 나중에 출현한 존재이다. 그동안 인간은 지구 생태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 생태계가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은 지구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지구의 진화과정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 지구를 살리는 길이고, 인간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도맡아야 한다.
여섯째, 산업문명의 윤리가 인간윤리를 최우선으로 삼았다면, 생태문명의 윤리 원칙은 생태계를 보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돼야 하며, 새로운 종교적 감수성도 개발돼야 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명주의다
세계관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인간 문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네 가지 사회 체제, 즉 정치, 경제, 교육, 그리고 종교를 변화시킨다. 근대 산업문명의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 도입되면서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모두가 인간중심주의적으로 개편하였듯이,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네 체제가 생태문명의 세계관인 생명중심주의 또는 지구중심주의에 맞춰서 개편돼야 한다. 생태문명시대에 정치, 경제, 교육, 종교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democracy)에서 생명주의(biocracy)로 전환시켜야 한다. 민주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민족국가 의식이 생긴 다음에 나온 정치체제다. 현재 가장 발전한 정치체제로 간주되고, 모든 나라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국가나 개인의 권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생물종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생태민주주의 또는 생명주의로 변해야 한다. 그리고 생태문명 시대에는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새로운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지구는 지구 전체 기능 안에서만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를 부분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 따라서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라들의 연합(The United Nations) 정도가 아니라 종들의 연합(The United Species)이 필요하다.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기적 상황을 맞아 1982년 유엔 총회에서 통과한 ‘세계자연헌장(World Charter for Nature)’은 새로운 정치적, 법적 체계를 위해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헌장은 모든 형태의 생명은 유일하며, 인간에게 유용한지 여부에 상관없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현재 인간은 지구의 기능을 지배하는 막강한 힘을 지녔기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적 장치가 특별히 필요하다. 현재 법조계에서는 야생 세계에 대해 법적인 지위를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는 2008년 국민투표를 통해 자연에 대해 존재할 권리와 스스로의 순환과 구조, 기능과 과정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헌법을 채택한 첫 번째 나라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는 1999년 동물의 복지권을 인정하는 법을 세계 최초로 통과시켰다.
둘째,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인간과 지구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자본주의 경제는 자연 세계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 사고방식은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것을 허용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세계의 엔트로피는 그 한계에 이를 것이고 현재의 경제 체제는 더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지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체제의 정립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현재 세계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지구 생태계에 어떠한 사회 조직보다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자본주의 경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의 힘은 정치, 교육은 물론 종교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와 지구 생태계의 미래는 다국적기업이 지니는 사회적 책임과 생태적 윤리의식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익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정치계의 견제와 시민단체들의 압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과 대안경제공동체를 설립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명과 창조영성을 가르쳐야 한다
셋째,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체제를 ‘인간중심 교육’에서 ‘생명중심 교육’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교육은 미래 세대를 준비시키는 과정이기에 중요하다.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에 치우쳐 있다. 교육 내용은 학생들에게 자연세계와 친밀히 지내도록 하는 역할이 아니라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의 내용은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조화와 공존을 가르치기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르치는 반면, 자연세계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한다. 자연과 대화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의 심리상태는 자기 안에 매몰된 자폐아적 상황과 비슷하다. 또한 산업문명의 교육방식은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있다. 전문화는 다른 말로 파편화이기도 하다. 산업문명의 교육방식으로는 실재에 대한 전체적 이해도 부족하고, 따라서 통합적 대책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생태문명에서는 인간이 지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체적 이해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 지구의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지니는 위치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인간은 지구 진화의 절정이며 지구 생태계를 보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 교육과정에서 가르쳐야 한다.
넷째, 생태문명 시대에는 종교도 그 가르침의 강조점이 변해야 한다.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연이 단순히 경제적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숨결과 손길이 깃든 신성한 창조세계임을 강조해서 가르쳐야 한다. 그동안 종교들은 자연세계가 인간에게 가장 우선적인 계시적 경험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 소홀했다.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원죄에 근거한 구원영성만을 강조한 면이 없지 않았다. 생태문명을 실현하려면 원죄만이 아니라 원복에 근거한 창조영성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현대세계에서 우리는 자살, 살인, 종족살해 등에는 민감하지만, 생태계와 지구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윤리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생태계 파괴, 지구 파괴를 절대적 악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원칙이 있어야 한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인간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책임감과 윤리 의식도 가져야 한다.
현재 생태적 가르침을 정립하고 실천을 권유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중요과제이다. 이를 위해 메리 이블린 터커와 존 그림이 주관해 하버드 대학교에서 개최한 종교와 생태포럼(Forum on Religion and Ecology)은 매우 중요한 시도였다. 1996부터 1998년까지 각 종교와 생태문제를 가지고 토론한 후 그 결과로 각 종교와 생태라는 주제로 총 열 권이 도서가 출판됐다. 이 포럼은 각 종교가 생태문제를 더욱 깊이 성찰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산업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을 실현하는 과업은 현재까지 인류가 이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그리나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생태위기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문명으로 발전시켜 나가야만 한다. 생태문명은 인류와 자연이 공존하면서 양자를 공진화시키는 문명으로 인류를 한 단계 성숙시킬 것이다. 이런 생태문명을 실현시키는 것이 우리 시대에 주어진 ‘위대한 과업(The Great Work)’이다.
미국은 지난 1월 3일 바그다드 국제공항 외곽에서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혁명수비대(IRGC) 사령관을 드론 공격으로 살해하여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나흘 뒤, 이란은 이라크 미군 주둔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여 보복했다.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이며 이제 미국이 국제법상 이러한 암살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는지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2단계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솔레이마니 살해를 변호하는 미국의 논거는 무엇인가?
둘째, 미국의 주장은 국제법상 타당한가?
미국 정부는 살해 행위를 방어하기 위해 두 가지 주장을 내세운다.
첫째, IRGC는 미국이 지정한‘대외 테러조직’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거셈 솔레이마니는 ‘테러 주모자’가 된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은 더 나아가 솔레이마니를 ‘세계 제1의 테러리스트’라고 일컬었기에 “테러로 지배했던 그의 시대가 종결했음을 알기에 안도할 수 있습니다”고 밝혔다.
둘째, 트럼프에 따르면 솔레이마니는 “미국 외교관과 군 인력을 향한 임박하고 사악한 공격을 꾸미고 있었으나 미국은 그를 현장에서 폭살하여 제거했다”고 전해진다.
얼핏 보기에 미국의 설명은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국제법 아래에서 신중하게 평가해보면 정반대의 답변이 나올 수도 있다.
먼저 IRGC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닌 일방적으로 미국에 의해 테러조직으로 규정되었다는 점, 다시 말해 미국이 일방적으로 테러조직으로 설계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국제법상 테러나 테러집단을 정의하는 보편적인 합의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두 원칙에 주목해야 한다.
(1) 국제법상 특정 국가는 테러조직을 규정할 수 있는 있는 법적 권한이 없다
(2) 일반적으로 국가 기관은 테러 조직 명단에 포함되어선 안 된다.
이 두 원칙으로 미루어 볼 때 IRGC가 테러조직이라고 선언하는 미국의 입장은 좀처럼 성립하지않는다. IRGC 자산이 동결되었다가 2016년에 해제되었음에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따르면 IRGC는 전혀 테러조직이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IRGC는 이란 군대의 한 부서로서 이란 정부에 소속된다는 점이다. 이로 보아 미국의 첫 번째 주장은 사실 무근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두 번째 주장은 국제법상 정당한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솔레이마니가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에 미국이 이번 ‘일촉즉발’ 공격을 서둘렀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은 이번 공습이 어느 정도 예상된 정당방위 차원에서 행해졌다고 주장해온 셈이다. 그러나 솔레이마니 살해는 국제법상 합법적인 정당 방위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국제법은 지속되는 무장 충돌 외의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는 유엔헌장강행 규범에 명시되어 있다. 유일하게 자위권만 이 규정에서 예외로 적용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의 경우 역시 제한적이다.
일부 규제는 유엔헌장 51조에 명시되어 있고 기타 규제는 국제법 일반원칙으로 규정되어 있다. 국제법상 ‘임박한 공격’을 포함하여 향후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력 사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임박한 공격’은 유엔헌장 51조에 나와있지 않다. 유엔헌장에는 정확히 “무장 공격이 발생한 (완료형) 경우”로 명시되어 있다.
임박한 공격이 무력 사용을 위한 명분이 될 수있다 해도 미국은 주장을 뒷받침해줄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1월 9일,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미국 국무장관이 폭스뉴스(Fox News)에 출연하여 “거셈 솔레이마니가 모의하던 일련의 임박한 공격이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그 공격이 언제, 어디에서 행해졌을지는 우리도 정확히 모르지만 임박한 공격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다”고 밝혔다. 분명 공습에 대한 미국의 논지가 예견된 자위 행위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욱이 필자는 미국이 미국 영토 내에서가 아닌 이라크에서 솔레이마니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이는 독자적인 주권 국가인 이라크의 주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이다. 현대 국제법의 초석인 주권평등 원칙에 의거하여 국가는 다른 국가의 영토에서 해당 국가의 동의 없이 군사력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국내법을 집행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미리 이라크 정부의 동의를 얻지 않았다면 바그다드 공습으로 인한 솔레이마니 살해는 이라크의 주권을 침해한 행위이다. 아델압둘-마흐디(Adel Abdul-Mahdi) 이라크 총리가 공습으로 인해 이라크 관료 또한 사망했다고 분노를 나타냄에 따라 미국이 이라크로부터 사전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
게다가 1월 5일, 이라크 의회는 주권의 침해로 인해 정부에게 외국 군대를 철수하도록 조치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요악하면, 법률 전문가들은 솔레이마니 살해가 미국 국내법에 의해 합법적인지에 대해 상이한 의견을 나타낸다. 그러나 필자는 국제법상 이번 사건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의 유럽은 사민당의 역사이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사회당은 존재가 사라졌고, 스웨덴의 사민당은 1당의 위치를 유지는 하였으나 무기력한 정당으로 전락하고, 유럽진보 정치의 중심이었던 독일 사민당(SPD)조차 소수정당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해진 가운데, 아래의 기사는 10월-11월간에 벌어지는 사민당 당대표 선출의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한국 내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은 유럽의 교훈, “사회적 정체성으로서 산업 노동계급의 감소, 노조 가입자 정체 및 더 많은 맞춤형 정책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녹색당, 포플리즘 정당 등 다양한 요구들이 좌파 정치조직의 과거 빅텐트(big-tent) 모델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달 바이에른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모습
9월 중순 화요일 밤, 독일 사회민주당원 수 백 명이 1960~70년대 독일을 이끌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의 동상을 지나 베를린 당사로 몰려들었다. 1964년부터 1987년까지 당을 이끌었던 브란트의 동상은 마치 그의 동료 당원들을 보호하듯 한쪽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새다.
참가한 당원들은 대강당에 자리했고, 곧 이어 남녀 7쌍이 무대 위에 올랐다. “검투사가 나타났다” 필자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속삭였다. 각 쌍은 당의 차기 당대표에 출마하여 한 때 브란트가 홀로 맡았던 역할을 둘로 나눠 가지게 됐다
“우리 당을 다시 노동자의 당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한 후보가 말했다. “사회민주당은 희망의 당이 돼야 한다”고 다른 후보가 말했다. 또 다른 후보자는 사회민주당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성향의 기독민주당으로 구성된 연합인 “대연정을 파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날 밤 대강당을 가득 채운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독일어 약자로 SPD)의 일원이 되기에 좋은 시기라고 할 순 없었다. 당의 전임 지도자 안드레아 날레스(Andrea Nahles)는 취임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지난 6월 대표직을 내려놨다. 사민당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또 다른 큰 패배를 맛본 바 있었다. 지난 2017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득표율은 20%로, 2000년대 중반 34%, 1998년 40%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수치를 보였다. 현재는 여론조사 지지율이 약 15%대로 떨어졌다. 한 때 독일 좌파의 지배적 목소리였던 사민당은 현재, 특히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녹색당에 자주 밀리는 형국이다.
잔존 지도부는 날레스 대표가 사임할 당시, 그녀의 후임은 대개 비밀리에 결정되던 것과는 달리 모든 당원들에게 공개되는 예비선거에 의해 선출될 것이며, 9월 베를린에서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포함해 전국적인 공개방송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이번 금요일 최종 투표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민당은 토요일 투표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독일 법에 따라 선출 대의원 회의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겠지만, 정치적으로 당원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당대표 투표는 당원과 당 기득세력 간의 싸움이 됐으며, 동시에 연정을 유지할지 여부에 대한 싸움이 되기도 했다. 많은 평당원들은 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맺은 타협을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만약 연정 “탈퇴”를 주장하는 후보 팀이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는 경우엔 연정이 붕괴되고, 내년 독일은 조기선거를 치르거나 소수당 정부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이 같은 후보자 명부의 경우, 사민당 투표는 당 역사상 유례없는 경우다. 노스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회 의원이자 연정을 탈퇴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인인 크리스티나 캄프만(Christina Kampmann, 39)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민당 역사에서 결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다. 새 출발,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다. 이번 예비선거는 누가 그런 변화를 실현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새 시대는 독일 사회민주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이 90년대 중반 평균 3분의 1을 훌쩍 넘어섰던 수준에서 최근 몇 년간 약 5분의 1로 줄었다. 프랑스 사회당과 같은 일부 정당들은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2017년 총선에서 프랑스 사회당의 득표율은 7.4%에 그쳤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같은 기타 정당들은 그보단 나은 사정이지만, 여전히 종종 선거에서 패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쇠퇴에 국가별 요인이 작용하긴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근본 원인이 정치구조에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중도좌파 유권자의 비율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사회 민주당은 점점 더 그들을 동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취리히 대학의 정치학자 실야 하우저만(Silja Häusermann)은 유럽사회의 분열이 전후 시대를 지배했던 경제 및 계급적 요소에서 이주 및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로 옮겨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문화적으로 보다 진보적인 세계주의자와 문화적으로 보다 보수적인 “사회주의자”를 갈라놓는데, 이 둘은 모두 한 때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유권자들이 가졌던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산업 노동계급의 감소, 노조 가입자 축소 및 더 많은 맞춤형 정책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녹색당, 포퓰리즘 정당, 극좌 정당의 부상 등 이 모든 것들이 좌파 정치조직의 과거 빅텐트(big-tent) 모델에 도전하고 있다.
쇠퇴의 압력 속에서 유럽의 많은 사회민주당은 대표직을 두고 벌이는 싸움과 당 진로에 대한 격렬한 싸움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재정정책과 경제부양 비법을 가지고 있는 포르투갈인이나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덴마크 사회민주당원이 제시하는 쇠약한 희망에 지나치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다.
뒤셀도르프 대학(University of Düsseldorf)의 정치학자 토마스 포군트케(Thomas Poguntke)는 유럽의 다른 정당들이 고려하고 있는 공개 예비선거의 경우 당 기반세력이 기득세력보다 더 온건하다면 완화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Matteo Renzi)가 2013년 비당원들에게 개방된 경선에 의지하며 좌파 지도부에 맞서, 사민당 내에서 중도 노선을 힘겹게 방어했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공개예비선거는 결과를 왜곡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같은 비정통 후보자가 선출되어 기득세력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극좌파 후보 브누아 아몽(Benoît Hamon)이 주류 선두주자인 마뉘엘 발스(Manuel Valls)를 제치고 사회당을 장악했다. 영국에서는 평화주의 사회주의자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2015년 3파운드에 표를 산 “기명 지지자들”에 의해 노동당 지도자로 선출됐다.
독일 후보자에는 제레미 코빈이 없다. 심지어 대연정 탈퇴를 옹호하는 사람들조차도 비교적 온건하다. 그럼에도 위험성이 높은 것처럼 대연정 탈퇴에 대한 지지율도 여전히 높다. 사민당 예비선거는 새 지도자 또는 정부를 떠나는 것 같은 단기적인 움직임이 당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요인을 고칠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느 쪽도 중도파 타협에서 멀어지면서 철저히 양극화로 다가가는 유럽 정치의 구조적 변동에 대해 고심하고 있지 않다.
이제 유럽 내 사회민주당의 미래는 누가 그들을 이끌 것인가 보다는 새롭고 지속적인 기반을 구축하도록 이끌 수 있은 인물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누구의 얼굴이 포스터에 그려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 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회민주당은 그 부분을 파악하지 못해왔다. (2019-10-26, 1차 개표결과 독일 사민당 당대표 선거에서 숄츠 재무장관이 1등을 차지했으나 과반수 미달로, 현재 숄츠와 대연정 파기를 주장하는 발터-보어얀스 간에 결선투표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며 11월 30일 경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다른백년).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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