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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맺힌 65년 투쟁 빈손으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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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맺힌 65년 투쟁 빈손으로 떠나다

admin | 화, 2021/03/30- 21:54

[가신이의 발자취] ‘마지막 비시급 전범’ 이학래 회장 별세

‘한국인 BC급 전범’ 피해자 고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2013년 11월 모습. 뒷쪽 사진 맨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전범’ 수감 시절의 이 회장이다. 박종식 기자 [email protected]

17살 때 ‘콰이강의 다리’ 포로감시원
일제 패망뒤 연합군 재판 ‘사형선고’
전후 일본 국적 박탈해 보훈도 제외

55년 70여명 동진회 결성 ‘보상’ 요구
65년 ‘한·일협정’ 구실로 ‘창구’ 닫아
91년부터 법정 투쟁 99년 최종 패소
지난해까지 의회 상대로 ‘입법’ 촉구

“슬픈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마지막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짤막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이 집단 거주하는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샛바람 문고’를 운영하는 후지이 고노스케는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이 회장이 이날 오후 숨졌다고 밝혔다. 향년 96.

“이학래상이 지난 26일 자택에서 넘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다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치료의 보람도 없이 28일 오후 2시10분 숨졌습니다. 학래상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먼저 숨진 동료들을 생각하고 (비시급 전범들을 구제하기 위한) 입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베 신조 정권이 힘으로 입법화를 가로막았습니다.”

후지이의 설명대로, 조선인 비시급 전범 이학래의 일생은 부당한 일본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투쟁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3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그는 1942년 봄 면장에게서 갑작스런 호출을 받았다.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데, 자네가 가소!” 근무 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고 했다. 17살 소년은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머잖아 시행될 징집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1942년 8월19일 부산에서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일제가 패망하면서 연합국 포로를 학대한 죄로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고통스런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파죽지세의 승리를 거듭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수십만명에 이르는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인 청년들(3012명)을 동원했다. 이학래가 배치된 타이에서 일본군은 충분한 식량·의약품·의복도 지급하지 않은 채 포로들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1957)로 유명해진 태면철도(타이~미안마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철로를 내는 난공사가 이어진 탓에 수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감시원 이학래는 일본군 공병대가 요구하는 노역 인원을 맞추려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관 어네스트 던롭 중령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전쟁이 끝난 뒤 ‘전범’이란 무시무시한 낙인이 찍히게 된 이유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최말단에서 그처럼 ‘도구’로 사용됐던 조선인 포로감시원 129명은 연합군의 전범재판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14명은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가까스로 감형된 탓에 죽음을 면했지만, 곧바로 사회의 냉혹한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조국은 이들을 ‘친일파’라 매도했고, 일본은 ‘전범’이라 멸시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발효로 일본 국적이 박탈되자, 일본 정부는 이들을 원호법·은급법 등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 과정에서 허영(1955년)·양월성(1956년) 등 두 명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조선인 비시급 전범 70여명은 1955년 4월 자치 모임인 동진회를 결성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호와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5년 6월 한-일 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는 한-일 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됐다며 대화 창구를 닫아버리고 만다. 이 회장은 “전범일 땐 일본인이고, 보상할 땐 조선인이라 하느냐”며 가슴을 쳤다.

이 회장과 동료들은 법정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91년 11월12일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은 무려 5년을 끌었다. 1996년 9월9일 판결에서 재판부는 보상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는 국가의 입법 정책에 속하는 문제”라며 원고들의 소를 기각했다. 이 기조는 고등재판소 판결(1998년 7월13일)과 최고재판소 판결(1999년 12월20일)까지 이어졌다. 좌절이 이어질 때마다 이 회장은 “같은 어려움을 당했던 동무들은 모두 죽었다. 가장 젊은 나만 살아 남았다”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짧게나마 문제 해결의 빛이 보인 것은 야당이던 일본 민주당이 2008년 5월 피해자 한 사람당 30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만든 뒤였다. 사실 택시업으로 성공한 이 회장에게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법안은 대다수 의원들의 무관심 탓에 폐기됐고, 여당이 된 민주당은 이들의 고통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고 이학래 회장이 2013년 11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1951년 촬영 아우트램 형무소 구금 전범 사진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다. 박종식 기자 [email protected]

한-일 국교정상화 50돌을 맞은 2015년 4월 일본 국회에서 만난 기자에게 구순의 이 회장은 “올해엔 꼭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울먹이듯 말했다. 2017년에는 <전범이 된 조선청년>(민족문제연구소 펴냄) 회고록를 통해 “일본 정부는 자신의 부조리를 시정하고, 입법을 촉구하는 사법부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입법 조치를 조속히 강구”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2월 도쿄도 니시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해 다시금 입법을 촉구했지만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정기국회에 관련 법안이 제출되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일 관계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되며 허무하게 세월은 흘렀고, 그는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길윤형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29> 한겨레

☞기사원문: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맺힌 65년 투쟁 빈손으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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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토, 2021/08/1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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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 작곡 교가·일본신사 잔재 등…교육청 “후속 조치는 자율”

친일 인사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 [학교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인천 지역 학교에 대한 일제 잔재 조사가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행됐지만 별다른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5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4∼12월 지역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52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모두 81건의 일제 잔재 사례가 파악됐다.

이 중 22건은 친일 작사가나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 사례였다.

특히 ‘섬집 아기’와 ‘봄이 오면’의 작곡가로 유명한 이흥렬이 만든 교가도 7개 학교에서 사용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음악의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대화악단 지휘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또 다른 친일 인사인 김동진이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도 6곳에 달했다. 김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음악 활동을 했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 인사의 동상이나 일본 신사 잔재 등 일제 관련 기념물이 교정에 남아 있는 학교는 3곳으로 파악됐다.

나머지는 서운, 송월, 백마, 작약도 등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된 지명이 교명과 교가 가사에 남은 사례였다.

시교육청은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각 학교에 알렸으나 개선은 권고 사항에 그쳐 눈에 띄는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학교 동문회와 학교운영위원회 등 내부 협의가 필수적인 만큼 교내 일제 잔재를 없애기까지는 시일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천황을 섬기던 신사의 돌기둥과 석등이 교정에 남아 있는 인천 중구 모 고교의 경우 별도의 시설물 철거 계획을 논의하지는 않은 상태다.

인천 연수구 모 중학교에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윤치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나쁜 역사도 역사로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철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동창회 차원에서 재원을 마련해 학교 설립자 동상을 세운 것이라 학교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며 “내부 검토를 여러 차례 했지만 역사를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동상을 남겨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들도 대부분 즉각적인 개선 조치에는 나서지 못했다.

친일파가 교가를 작곡한 인천 연수구 모 고교는 추후 학생, 학부모, 동문회와의 협의를 거쳐 교가 일부를 개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인천 동구 모 고교도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에 대해 별다른 개선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일선 학교에 일제 잔재 조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알리기는 했지만 후속 조치는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다”며 “이후 각 학교의 개선 여부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은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인천 학교들, 일제 잔재 남아 있어도 개선은 ‘거북이걸음’

※관련기사

☞서울신문: 친일파가 만든 교가…인천 각급 학교 일제 잔재 파악하고도 ‘개선‘ 소극적

화, 2021/08/1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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