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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혼란, 인사(人事)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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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혼란, 인사(人事)에서 비롯되었다

admin | 화, 2021/03/30- 19:37

나라의 존망은 인사에 달려 있다

문재인 정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필자는 오늘의 난맥상이 문재인 정부의 인사 정책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주지하는 바처럼, 인사(人事)는 만사다.

세종대왕 때 나라가 그렇게 융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세종이 인사(人事)에 탁월해 널리 유능한 인재를 찾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것이 주효했다.

중국 역사상 최전성기인 당나라 왕조 중에서도 가장 번영을 누렸던 당 태종도 “인재(人才)의 경제”라 할 만큼 인재 기용을 성공적으로 해낸 제왕이다. 그는 “치국의 근본은 오직 인재를 얻는 데 있다”라고 말하면서 “국가의 요체는 현자를 임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는 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또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기용되지 못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수치다. 나라의 존망은 인사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촛불시민이 배제된 정부, 관료와 국가를 공치(共治)하다

본래 촛불항쟁으로 박근혜 정부를 축출한 그 정치공간은 공공재(公共財, public goods)로서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 공공재는 항쟁의 주체인 촛불시민과 공동으로 운영해야 한다. 물론 현대 대의제 하에서 이러한 원론적 원칙은 실현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촛불시민과의 연대라는 상징성을 담보해나갔어야 했다. 지속적인 소통 채널을 작동하고 정부 주요 직책에 최소한 2, 3명을 참여시키면서 소통을 지속했어야 한다. 이는 정부로서도 촛불정신을 계속 활용해나갈 수 있는 기제이며, 촛불시민과의 연대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됨을 의미한다. 특히 그럼으로써 촛불시민의 힘이 개혁과 민주주의의 추진에 있어 강력한 지원역량으로 역할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한 단계 도약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거의 자파 세력으로 독점했다. 더구나 촛불정신과의 문제를 차치한다고 해도, 그 전 과정에서 ‘유능한 인재의 기용’이라는 차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대신 자파만의 전리품 나누기나 끼리끼리의 회전문 인사 모습으로 비쳤다. 이것은 이전 보수 정부와 전혀 차별성이 없는 행태로서 국민적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는 애초부터 관료개혁의 측면에 전혀 관심과 의지가 부재했다. 그리하여 본래 촛불시민과의 연합정부여야 할 정부는 좀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관료집단과의 연합정부로 된 셈이었고, 사실상 관료집단과 권력을 분점하고 국가를 공치(共治)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문재인 정부는 이제껏 사심이 없이 성실한 문재인이라는 개인의 이미지로 유지해왔다. 하지만 촛불의 연대도 사라지고 유능한 인재에 의한 시너지 효과도 부재한 채, 정부에 오직 대통령 1인만 존재하고 의존하는 이러한 조건에서 문재인 정부가 동력을 잃는 것은 사실 시간 문제였다.

 

참여정부 부동산정책 책임자들의 복귀’, 시한폭탄을 안은 셈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급속한 조락은 무엇보다도 부동산정책의 실패에 있다. 참여정부 역시 후반에 무너진 가장 큰 요인은 부동산 문제였다. 그러나 한때 폐족임을 자인하는 등 불운한 조건에서 암중모색 재기를 노리던 이들 그룹은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고(혹은 불철저한 반성이나 온정주의), 이러한 경향성은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참여정부 시기 부동산정책 책임자들의 복귀로 연결되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문제 해결을 지체시키고 도리어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동되었고, 스스로 ‘시한폭탄’을 안고 있던 셈이었다.

참여정부 시기보다 더욱 좋지 않았던 사실은 참여정부는 그래도 정책 실패를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 당국자들은 계속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였으며 심지어 거듭 국민 탓으로만 돌렸다는 점이었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다주택자에 대한 관용적 시각과 ‘임대에의 집착’에 토대한 임대사업자 특혜, 거위의 깃털을 뽑듯 아프지 않게 예술적으로 세금을 거두면 된다는 ‘거위깃털론’에 입각하여 (보유세라는 핵심은 피한 채 부동산 언저리의) 세수 확보에 관심이 집중된 기재부 관료들 그리고 공급확대라는 토건족과 대체로 일치된 시각을 공유한 국토부 관료들의 관점이 미봉책으로 뒤엉킨 채 상호 작용을 일으키면서 결국 미증유의 부동산가격 폭등 현상을 자초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참여정부 부동산정책 라인의 끝줄인 변창흠을 국토부장관에 임명하는 최후의 악수를 두었다. 특히 그는 직전 LH 사장을 지냈고 그가 추진한 공급확대 정책은 LH 중심의 정책이었는데, 정작 그 LH가 국민을 속이는 투기꾼 집단이었다는 핵폭풍은 정확히 그 자리에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그간 축적된 부동산정책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 불을 지르는 도화선이 되어 그대로 문재인 정부를 강타했다.

 

잘못된 인선의 상징, 윤석열

다음으로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은 지극히 부적절한, 결국 잘못된 인사였다. 돌이켜보면 조국 사태도 조기 해결을 모색해 조국 임명도 빨리 포기하고 윤석열도 조기에 교체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지루하게 시간을 허비하고 정부 역량을 낭비했으며 대중적 불신을 자초했다.

윤석열 총장은 처음부터 부적절한 인선이었고, 특히 그런 잘못된 결정을 한 정무 시스템은 큰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 이 잘못된 인사가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커다란 아킬레스건으로 작동했고 윤석열 사퇴는 부동산 문제와 결합되어 그 폭발력을 극대화시켰다.

 

지인(知人)과 택인(擇人) 그리고 용인(用人)에 약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를 쓴 사마광은 지도자란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知人)과 사람을 선택하는 택인(擇人) 그리고 인재를 기용하는 용인(用人)에 뛰어나야 한다고 갈파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큰 약점은 바로 지인(知人)과 택인(擇人) 그리고 용인(用人)에 존재했다. 이 지점에서 취약점을 드러냈다. 유능하고 덕망 있는 인사를 널리 살펴 찾지 않았고 편한 사람을 기용했다. 대부분 기존의 인간관계에 의존하거나 혹은 측근에서 추천하는 ‘평용(平庸’)하거나 때로는 부족하고 심지어 부적합한 사람들을 골라내지 못했다. 이렇듯 정치의 요체로서의 인사(人事)가 난맥상을 보이자 필연적으로 치국(治國)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위기를 자초하였다.

 

소준섭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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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작년 여름, 광저우의 80년대 청년문화를 그린 “커피에 설탕 좀 타기 給咖啡加點糖(1987) https://movie.douban.com/subject/2080567/?dt_dapp=1 ”라는 ‘데카당한’ 영화 한편을 관람했다. 당시, 이 영화를 소개한 중국 친구들은 관람후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동행했던 싱가폴 친구와 나는, 영화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면서 투덜거렸다. 막 개혁개방이 시작됐을 뿐인 당시의 중국 광저우 청년들이 이웃 도시 홍콩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예술적 탐미의식을 생활속에서 놀이문화로 즐겼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 후에 중국의 80년대와 관련한 글 몇편을 읽고, 소위 ‘80년대 문화열’ 시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실은 이 ‘백열상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경제위주의 개혁개방이 지속됨으로써,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예술인, 지식인의 공론장도 201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인류학자 샹뺘오 박사는 80년대 후반 고향인 져장성 원저우溫州의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남방의 지역도시까지 전파된 훈훈한 문예의 열기를 맛볼 수 있었고, 천안문 사태가 일단락된 1991년 베이징 대학 학부에 진학해서 개방의 시대 2막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 글은 8~90년대를 관통하며, 중국의 사회과학계를 재건해 나가고, 정부의 정책 방향에 끊임없이 아젠다를 세팅하는, ‘지식청년시대’ 지식인들의 공헌과 그들의 변화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특징과 이러한 특징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 그들의 강점과 한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신향촌건설 운동의 지도자인 원테쥔 선생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중 한명으로서, 바로 글에서 묘사된 정부의 씽크탱크인 ‘중공중앙농촌연구실’ 출신의 연구관료였다. 이후에, ‘경제체제개혁연구소’산하 언론사의 대표를 거쳐, 인민대학 교수로 재직함으로써, 지식청년 출신 관료와 학자라는 양쪽 커리어를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아래 사진1의 두룬셩 선생이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고, 현재 국가 부주석인 왕치샨은 당시 그의 사수였다. 이 글이 묘사하는 지청 지식인의 모습은 원톄쥔 선생과 ‘씽크로율’ 100%에 가깝다. 그는 2016년 인민대학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다양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학술연구는 그의 후학들인 후지청시대지식인 70허우, 80허우 연구자들이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이 글의 설명과 일치한다. 샹뺘오가 현재 협력하고 있는 칭화대학 왕후이 교수 등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과 서구이론의 도구적 사용 (아마도 오류가 있거나, 체리피킹하는 경향도 있는)이라는 공통점도, 많은 중국내외의 지식인이 지적하는 사항이다. 한국의 청년 인문학자가 이를 평한 것을 본 적도 있고 (https://begray.tistory.com/447 푸단대 역사학자 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 도론평), 홍콩에서 활약하는 대륙출신의 문학평론가 쉬즈둥許子東이 “서구 학자들은 방법론에 집중하고, 중국학자들은 문제 자체에 집중한다”는 커멘트를 하기도 한다. (“ 当时有个机缘,1987 年我去香港大学做访问学者,接触了西方流行的学术界理论,我看到了中西根本性的区别。内地做文学,像在前线打仗,你要治病救人,别管用什么方法,赶紧把病人救活。但在海外,就像医学院学生旁听的实验课,老师们做演示,学生在下面看。区别就在于内地文学批评,问题最重要,但西方学术圈,他们不讲问题意识,他们讲方法

https://shop.vistopia.com.cn/article?article_id=36txI&source=article).   

‘지청시대’ 지식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한국의 586세대와 포개지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자식, 공화국의 주인”이라는 역사적 사명감과 주체성이 문자 그대로 공유된다. 그래서,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역사실천안에서 민주화와 (후일 제도권안으로 들어온 이후엔)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에 무한한 관심을 두는 반면, “일상생활속의 권력관계가 낳은 다중적 모순이 만드는 미약한 파열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려 들지 않는 지적 편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2~30대 청년세대, 진보좌파, 페미니즘과 척을 진다. 중산층 계급의식 때문에, 이중인격에 속물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이제 고위급 정치가군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신향촌건설운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운동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중국의 사회과학계, 지식인 사회의 역할에 대한 전망과 제언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원톄쥔 교수를 포함하는 소위 중국의 ‘공공지식인’들이 왕성한 사회실천과 학술활동을 벌이던 시절이 있다. 이들은 중국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개발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이론이 ‘중국의 길’을 설명할 뿐아니라 세계체제에서 주변부나 준주변부에 속한 비서구국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를 바랐다. 서구의 뉴레프트, 제3세계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오랜기간 지역의 근대성 과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한국, 일본, 타이완과 같은 동아시아 좌파 지식인들이 이러한 논의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학파’를 건설하고 싶다는 그들의 야심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시진핑 정권의 등장이래, 지식인 담론 공간이 거의 완전히 ‘체제화’하면서, 오로지 관방의 언어로 중국 주류사회에 공명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이제 중국 영토를 한발짝만 벗어나도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기 쉽지 않다.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서구학계의 담론 권력이 워낙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중국 자신의 거버넌스 진화 문제, 그리고 홍콩과 신장 등 국내 지역 문제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이들 담론의 대외설득력이 떨어지게 된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중국내에서 자유롭게 논의할 수 없기 때문에, 샹뺘오 박사는 중국 학문의 규범화가 가져온 체제화 문제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체제’라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류, 비주류 구분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비민간’ 혹은 정부와 정부의 직간접 영향이 있는 조직을 포함하는 ‘제도권’에 가깝다. 이를테면, 순수한 민간자본 기반의 사립대학을 제외하고, 중국의 대학은 소위 ‘사업단위’라고 불리는 정부의 ‘지도관리’하에 있는, 공공의 영역을 다루는 조직들의 일부이고 그래서 ‘체제’안이라고 봐야 한다. 즉 ‘공공’이라고 불리는 영역조차 민간의 파이는 매우 작고, 거의 ‘체제’와 등치된다.     

샹뺘오 박사는 지청시대의 지식인과 관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신은 후지식청년시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 중국의 체제내 학계 출신이지만, 본인은 서구 학계인 옥스포드 대학에 소속돼 있다. 중국의 ‘중앙’, 핵심 ‘노른자’인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에서도 수재로 꼽히던 인물이지만, 자신의 보다 근원적 정체성 기반은 고향인 ‘지방’ 원저우溫州의 소상공인과 몰락한 향신계급, 실증주의의 본고장 영국 학술계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역자가 그의 대담집인 ‘방법으로서의 자기’ 서평을 일간지에 기고하였다). 그가 사회학과에 소속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주변부를 지향하는 학과인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도 정체성과 부합한다. 그는 2014년 ‘어큐파이 센트럴’운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천안문 사태의 부정적 유산이 어떻게 홍콩사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논한 바 있다 ( “홍콩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http://platformc.kr/2019/09/%ed%99%8d%ec%bd%a9-%eb%8c%80%ec%a4%91%ec%9a%b4%eb%8f%99%ec%9d%98-%eb%af%bc%ec%a3%bc%ed%99%94-%ec%9a%94%ea%b5%ac%ec%99%80-%ec%a0%95%eb%8b%b9%ec%a0%95%ec%b9%98/) . 당시 중국 대륙의 국가 권력층과 홍콩의 시민들이 균형감있게 문제를 바라보고 행동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2019년 홍콩사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른 것 같다. 이제 중국과 외부 세계의 지식인들, 중앙과 지방, 통일적 거대담론과 파편화된 작은 세계들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이어줄, 중국의 새로운 ‘공공지식인’ 샹뺘오의 활약을 여전히 기대해 본다. 한편 한국의 ‘후586시대’ 지식인들이 중국의 후지청시대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되기도 했다.  

보너스 – 중국의 8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 듀오였던 웸이 서방의 대중청년 예술인을 대표하여 1985년 베이징과 광저우에서 공연을 갖은 것이다. 당시 북방과 남방의 거리와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생동하는 80년대 문화열의 분위기를 간접 체험해보길 바란다.

Wham ! Freedom (공식 뮤직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BFwOs-jy53A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계열을 예로 들자면, 2015년은 아마도 중국의 사회과학 “지식청년시대”의 종언을 고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을 전후해서 1960년 이전에 출생했으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산하향(하방)경험이 있는 학자들은 모두 은퇴했다. 이들 대부분이 교직을 떠났다. 동시에, 정규교육을 받고, 학교 외에는 별다른 인생경험을 해보지 못한 70년대 출생 학자들이 학계의 주류로 나서게 됐다. 지식청년의 배경을 갖는 학자들은 1978년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리더쉽이었고,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지식청년(이후 지청)의 시대’를 만들었다. 2015년 8월13일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으며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왕한셩王漢生 선생이 겨우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그의 죽음이 2015년의 의미를 내게 되새겨주었다.

지청시대의 종언은 이들 학자의 학술생명이 끝났다거나, 그들의 영향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後지식청년시대’의 학자인 우리들은, 뭉뚱그려 말하자면 가까운 시일내에 그들의 연구업적을 전면적으로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제와 관점은 미래 상당히 오랜 기간, 중국사회과학발전의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지청시대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그래서 그들이 리더쉽을 발휘해오던 독특한 분위기와 기질의 학술실천 방식이 종료했음을 의미한다. 중국현대사회과학의 변천은 아마도 토마스쿤이 말한 패러다임 구축(지식이 점차로 쌓이는 과정)과 패러다임 전환이 상호교대되는 경로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듯 하다. 다른 세대간에 학술실천방식이 전환되는 것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과 축적방식의 변화이다. 만일 이런 축적방식의 전환을 파악하지 않으면, 유효한 지식의 축적방식에 대해서 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청시대의 학술실천은 제한된 물질적 조건하에서, 비공식적인 교류와 조직을 이용하고, 강렬한 사명감과 개척정신에 기반하며, 발산형 사고방식 (역자 주 – divergent thinker)을 택하고 있었다.  반대로 2000년 이후의 학술활동은 공식적인 기관안에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자금을 따내고, 인정과 허가를 받으며 (이런식으로 학교순위가 매겨지고, 지도자가 칭찬을 하고, 학자 개인도 지명도를 쌓아간다) 전문연구자로서의 직업적 안정성과 커리어의 개발을 추구한다. 지청시대는 반半민간의 연구공간을 창조했지만, 국가기관과도 잘 소통했고, 새로운 의제를 설정함으로써, 공개토론을 하거나, 심지어는 여론을 형성해서 정부개혁방향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 이제 후지청시대에 들어와서, 연구방법은 고도로 전문화했지만, 학술은 이제 행정관리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민간과 반민간이 함께 지식을 생산하던 공간은 사라졌다. 학자와 정부간의 협력은 정부관리효율을 높이는 것이 주요목표이다. 이른바, 폐쇄적인 씽크탱크 컨설팅이다. 주어진 과제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이 주요한 방식이고, 정부의 논리와 정책 방향을 바꿀 정도의 영향을 주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사회과학의 지청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국가관료의 지청시대도 끝났다. 2010년 이후 대부분의 지청출신 지방정부 간부들도 은퇴했다. 그들은 대학의 학자들과 사회적 배경, 학습경험, 지식의 구조, 생활방식이 동일했다. 공무원의 지식전문화 그리고 규범화가 관료시스템에 새로운 합법성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점점 완고해지고,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한 동기로 삼는 집단으로 변해갔다. 공무원과 대학과 정부연구기관에 속한 학자들도 2014년 이후 모두 1990년대말에 시작된 ‘사회안정제일주의維穩’ 정책에 반대했지만, 사실은 자기 밥그릇 안정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사회안정제일주의’가 모두의 이익을 지키는 기반이 됐고, 연구주제든 방법이든 해바라기식唯上으로 변하게 된 이유도 그때문이다.

1980년대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달랐다. 당시, 정부의 연구기관, 대학과 반半민간문화단체의 지청세대 학자들과 정부내의 중하층간부, 그리고 지방정부 간부 (모두 대부분 지식청년 배경을 갖고 있다)들이 심리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의제를 주고 받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나는 1990년대 중기에 저쟝浙江성, 후난湖南성 등에 가서 필드조사를 했는데, 지도교수인 왕선생님 네트워크의 덕을 보면서, 이 공동체를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방정부 간부들이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경제체제개혁연구소體改所, 특히 중공중앙농촌정책연구실農研室의 책임자는 최근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가 ? 힘있는 간부들은  끝도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힘없는 간부들은 나의 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드러내기 원했다. 모두 토론을 희망했다. 지금의 간부들은 소심한데다가 안온한 분위기만 좋아한다. 국가안전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구호하에,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이익만을 보호하려 한다.

<사진1> 지식청년시대를 창조한 반半민간연구공간은 정부부문과도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공개토론이나 혹은 정부개혁방향을 뒤엎는 제안도 서슴지 않았다. 농연실 시절의 두룬셩杜潤生, 왕샤오창王小強, 왕치샨王歧山 (왼쪽부터 오른쪽으로)이 농촌에 가서 필드조사를 하고 있다.

당시와 오늘날의 가장 큰 시대적 차이는 사회과학계와 관료시스템안에 있던 지식청년들이 은퇴하고, 그 중 일부는 정치 상층부로 이동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13년까지, 엔지니어 출신이나 문화대혁명시기의 대학생 지도자들이 제도, 규범, 조화를 강조했다면, 2013년 이후의 키워드는, 돌파, 의지, 이상, 소그룹小組정치, 과단성과 박력 (大刀闊斧 역자주 – 큰칼과 도끼, 수호지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정치 상층부가 갖는 이런 ‘지식청년 기질’과 다음 세대의 지식인 및 중하층 공무원 그룹은 잘 맞지 않는다. 만일 이들과 같은 매개계층이 없으면, 상층 정치인들이  유효하게 서로 다른 사회의 이익을 적절히 대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지청시대종언의 역사적 의미가 갖는 중요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사회과학 지청시대의 종언과 고급정치인 지청시대의 시작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는, 동일한 역사과정의 결과이다. 이중에서, 지식청년과 국가체제의 관계가 관건이 된다. 1980년대이래 지식청년 담론중에서 이들이 갖는 ‘민간’의 성격에 대해 많이들 논의한다. 문화혁명기간중에 특히 린뺘오林彪 사건후, 어떻게 지하에서 독서를 하고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키우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해왔느냐는 것같은 이야기들이다. 사실 이것은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회복과 재건기간중에, 가장 주목을 받던, 두개의 중첩된 커뮤니티가 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해간다走上未來>>총서와 <<20세기문고>>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그룹이 있고, 두번째로는 구舊경제체제개혁연구소와 구舊중공중앙서기처농촌정책연구실이 중심이 되던 ‘씽크탱크’그룹이 있다. 당시에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과 베이징대학 등의 대학원생들도 이 두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두 그룹으로부터 중요한 학자들과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지식청년시대 학자와 학생들이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그들이 온전히 ‘민간’의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관심을 끌었고, 우선은 그 문제들이 사회주의 진영내 발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은 그들의 주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소련공산당내부의 모순, 1956년 이후 유럽좌파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 1968년 이후 사회주의 경향의 사상 (싸르트르, 알베르 까뮈), 유고슬라비아의 개혁 등이 특히 중요했다. 그들의 자아의식안에는, 상당히 강한 ‘공화국정서’가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사회주의 혁명의 자식이자, 인민공화국의 주인이라 여겼다. 그들이 제안하는 의제들은 중국이 다음 행보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이냐였다. 가장 핵심은, 지식청년들의 활약이었다. 이들중의 리더쉽은 고급간부의 자녀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문혁기간중에 소위 ‘황피서(노란색 커버의 책)黃皮書’, ‘회피서(회색 커버의 책)灰皮書’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혁’이 끝나고, 최고통치자 집단은 이들 청년들을 자기편으로 여겼다. 지방정부에서도 그들을 무관의 제왕으로 대우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그들은 “내가 아니면 누가 맡으랴”는 자신감과 권위에 기죽지 않는 당당한 기질을 갖게 됐다.

<사진2>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중앙선전부와 중앙편역국조직이 번역해서 ‘내부참고비판용’으로(일반인은 열람 금지) 출간한 정치, 역사, 철학, 문학작품 시리즈의 책 대부분 국제공산주의운동과 관련이 있다. 책표지는 대부분 옅은색을 띄고 있어서. 회피서, 황피서라고 불렸다.

1990년이후 (역자 – 천안문 사태가 종결되고), 국가체제와 지식청년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는 조직의 책임자가 되어, 목소리를 낮추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공론장을 떠났다. 다른 일부는, ‘우리편’에서 제외되어, 그중에서도 학문에 뜻이 있는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술연구의 제도화에 힘썼다. 이들 사상가들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선진국의 학술연구를 동경한 이유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80년대 급진사상운동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다. 90년대 지식청년학술시대의 주제는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전문지식체계와 연구방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규범화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학술활동이 온건한 민주주의의 건설, 사회의 장기적 안정의 기초를 닦도록 돕는 것이었다.

현재 지식청년 세대가 고급정치가로 등장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수는 구체적으로 누가 선택될 것이냐에 대한 질문과 답일 뿐이다. 학계의 지청시대 종언은 그래서 바탕으로 돌아가, 학술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통해서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실패했다. 형식상으로는 규범화된 학술활동은 전면적으로 체제안으로 들어왔다. 사회과학원 체계의 변화가 특히 명확하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사회학자 잉싱應星이 지적한 것처럼, 지청세대의 학자들은 1990년후기부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싱의 설명과는 달리 나는 그들이 이중인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신과 기허, 개척과 탐욕, 무실과 속물성 創新與氣虛,開拓與貪焚,務實與媚俗”,역자주 – 2009년 칭화대학 사회학과 교수 잉싱이 ‘문화종횡’지에 발표한 글, 지청 학자들이 학계의 실력자가 되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함) 학계의 변화가 지식청년그룹의 도덕적 변신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지청학자들의 학술실천이 내재적으로 가진 모순이었다. 이 글에서는 사회학계안에서 드러난 두가지 모순에 대해서만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지청세대 학자들은 원래 비규범적인 학교체제바깥에서의 학술활동에 능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간 이후에는 학술의 규범화에 진력해야 했다. 두번째로, 지청세대 학자들은 다른 보통학자들이 얻기 힘든 풍부한 인생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경험연구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하지만,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 이론에 복무하는 소재가 되고, 다양한 경험을 초월하는 통일 사상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다양한 측면의 모순간의 상호작용이 1990년대 학술생태계의 하나의 내적인 동력이었다. 지식청년시대의 종결은 모순운동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순의 구체적인 측면은 계속 존재했지만, 반대로 그 대립면이 사라지면서 생명력을 잃게 됐고, 부정적인 측면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지청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자산이 오히려 우리의 족쇄가 됐다. 규범과 비규범의 모순은 이제 ‘체재화’되었다. (지금 시대의) 상대적으로 협소한 경험과 이에 따른 관점이, 실사구시 정신과 자주적 혁신의 기초를 결여한 학술활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연구활동을 통한 파괴적 혁신을 방해하고, 체재화 앞에서 저항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모순운동이 지청시대 종결의 원인은 아니다. 훨씬 더 복잡한 스토리가 있다. 사실 주요한 원인은 학계 내부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정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는 이 실마리가 우리가 현재 직면한 주요한 곤경을 드러내기를 희망한다.

나는 1991년에 일년간 캠프에 갇혀 군사훈련을 받고,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대략 대학 2학년에 해당하는 1993년에 왕선생님의 “유동流動농민공” 과제소그룹에 참여했다. 1990년대 베이징의 사회학자들사이에 소위 ‘왕한셩워크숍’이라는 타이틀은 왕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중국사회학에 핵심적인 공헌을 한 일군의 중년학자들이 자주 모여서 토론을 하고, 과제의 협력을 조직한 활동을 의미한다. 나는 1995년에 정식으로 왕선생님의 석사과정 지도학생이 됐고, 1998년에 졸업을 해서, 이 학자들과 더 깊은 교류를 갖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회합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는데, 즉 이들이 구성한 아주 독특한 사회적 관계와 학술실천 방법을 접했다. 왕선생님의 학생으로서 나는 운좋게도, 그분의 매력적인 인격을 직접 지켜봤을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사람됨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평가하는 말이다) 이러한 매력이 구체적인 인생경험이 농축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매력적인 사람됨이 환원되어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으로 나타났고, 우리는 그러한 실천과 유효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우리가 이를 계승할 수 있을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이 글에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사회역사요소적 속성을 의미한다. 지청시대 학자들의 사람됨이나 학자됨을 적지 않은 ‘후지청세대’의 학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전체적 상황과 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다르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의 진퇴결정이 학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가 이 그룹의 기복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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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화, 2021/05/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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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NYT에 실린 내용으로 기고자는 현재의 위기에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구제지원을 선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른백년은 이런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다만 생산적인 논쟁을 위하여 게재를 결정했다.

우리는 지난 IMF 시기와는 달리하여 은행과 거대 기업에 지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대신, 수요자인 시민들과 중소기업자들에게 필요한 만큼 무제한적으로 직접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거래은행은 해당산업의 지원과 존폐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정부는 이번 위기를 미래의 일상적 혁신을 위해 대규모 산업구조조정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에 따라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큰 기업과 은행의 파산에 대응하면서, 정부가 선택적으로 이들을 공기업으로 전환하되 경제가 정상화된 이후, 시장에 재매각을 검토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수천만 명이 실직을 당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기업들이 부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연방의회는 위기의 확산을 차단하려고 이미 3조 달러의 지원을 승인하였고, 추가의 금액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에 신속하고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에 대하여 다른 정치적인 견해들이 분노와 함께 돌출하기 시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인들과 언론매체 그리고 일반시민 사이에 잠재적인 불황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수혜자들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여부를 밝히는 것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좌파적 정치인들은 거대기업들이 연방정부의 지원혜택을 받거나 연방준비제도가 공급하는 초저금리의 신용공여를 받는다는 것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반면에 우파에 속하는 측은 연방행정부가 주정부나 지방정부를 지원하거나, 실업자들을 돕기 위해 고용보험을 확대하는 것에 화를 내고 있다. 여론매체들은 스테이크하우스 체인이나 사설학원같이 자격미달인 조직들에게 지원금이 투입되는 것에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수조 달러에 달하는 연방지원금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엔 자금이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오는 제로-섬 게임의 위험이 존재한다. 이는 위기가 종결되기 이전에 곤궁에 빠진 개인과 기업 그리고 공조직에 대한 연방정부의 대응수단을 제한하고 지원을 중단시킬 잠재성을 지닌다.

“보수적인 견해를 지닌 친구들은 주정부나 지방도시는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현재 해밀톤 전략연구소의 파트너를 일하고 있는 Tony Fratto는 이야기한다. ”반면 진보적인 인사들은 민간기업들에게 도움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누구에게도 지원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들 각자의 견해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고통의 결과물들이라고 덧붙였다.

2008년 세계적 규모의 금융위기와 후유증을 겪은 지금은 물론 보다 합리적인 주장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매우 긴급한 사항이다.

지난 위기 과정에, 보수주의자들은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택구매자금을 담보조건으로 융자해준 사실을 비난한다. 당시의 은행들은 거대한 ‘모랄-해저드’라는 문제를 동반하면서 금융조직들이 부동산 저당의 거품에 자금을 공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결과에 대해 전액의 구제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Covid-19에 대하여 같은 내용으로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주택버블과 금융위기를 야기했던 금융회사들이 구제지원을 받은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번의 사태는 경우가 다르다”고 자유 루스벨트 재단의 연구원인 Mike Konczal은 주장한다.

금융위기 상황과 확실하게 다른 것은 기업들이 코로나를 야기시킨 장본인들이 아니라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분야와 금융분야에 종사하는 자유주의적 인사들이 이를 묵살하고 있는데 이들은 과거에 구제를 받았던 기업들이, 지난 수 년간 바이-백을 통하여 주주들에게 배당을 높이는 행동을 보여 왔다며, 이제 다시 정부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데 분노를 터트린다.

이런 비판에 앞장서온 Oaktree Capital의 Howard Marks는 최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비도덕인 행위를 한 기업을 정부가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면, 이는 분명히 ‘모랄-해저드’에 해당한다. 이들 조직과 관련 투자자들은 고통에서 보호를 받겠지만 이는 아주 나쁜 사례를 남기는 것이다.”

수많은 기업들, 특히 부채가 많아 충격에 취약한 조직들이 우선적으로 파산의 위기에 몰리겠지만, 동시에 현재 전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충격에는 어떤 기업조직도 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연방준비제도가 기업채권에 자금을 투입하지 않으면, 많은 기업조직들이 자신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순간의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서 파산에 이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파산은 부실기업을 주주로부터 분리시켜 신용제공자에게 되돌려주는 효율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팬데믹과 같은 충격에 대해 정부가 온전히 방관으로 일관하면 파산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결과적으로 일하는 미국시민들과 경제전반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경제가 좋은 호시절에도 파산의 정리과정에서 신용제공자(채권은행)와 노동조합 또는 노동계약자들 간에 협상을 통하여 퇴직보상이 없는 정리해고를 자주 허용하기도 한다. 여러 산업분야를 관통하며 수 천개의 기업들이 상법 제11조의 파산신청에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이로 인해 파산법정의 업무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고, 구조조정의 기간 동안 조업을 지속하도록 하는 부채정리의 과정이 지연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우량기업들이 살아남기 보다는 청산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연이은 파산사태는 부채에 시달려온 투자자들이 헐값에 가치있는 자산을 사들일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며, 산업이 소수의 거대기업으로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잘못된 경제관계를 회복하려면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경제상황에서는 파산이 창조적인 파괴의 선순환으로 작동하지만, 지금은 파괴가 거대한 조업중단과 폐업을 야기할 것이다”라고 경제혁신그룹의 책임자로 일하는 John Lettieri는 이야기한다.

비슷한 논리가 연방정부 구제지원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적용되고 있다.

상원의 주류인 공화당 총무인 Mitch McConnell은 지난 4월의 한 인터뷰에서 현금유동성이 부족한 주정부들을 파산시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나중에 그런 입장에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와 공화당 동료들은 민주당 소속의 주정부들이, 한편에서는 대규모 공공실업연금의 의무를 시행하면서, 연방정부의 구제지원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많은 주정부들이, 위기 이전에는 건전한 재무상황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이제는 세수가 격감하면서 향후 수년간 재정지출을 심각하게 축소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민간분야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경제가 정상화되는 것이 지연될 수 있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대상에 대한 논란의 와중에도, 고용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중소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지불보호정책을 서명하는 주정부들의 노력이 진행되어 왔다.

우선적으로 3,500억불의 자금지원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연방의회의 결정여부에 있으며, 문제는 상기 금액으로는 중소기업들의 임금지불을 충당하는데 역부족이라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차적인 자금의 집행으로는 부족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는 대규모의 스테이크 체인사업체들뿐만 아니라, 벤처지원 기업들을 포함하여 지원할 가치가 있는 조직들도 희생당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수 만개의 기업들 중에 섞여 일부 불량기업이 구제지원 자금을 받는 것에 분노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며, 사람들이 누가 자격이 있고 누가 없다는 식으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를 잘못 접근하는 것이라고 Lettieri는 말한다.

팬데믹에는 도덕적 기준이 없다. 경제를 회복시키는 조치가 공정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이라고 분노하는 것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는다.

 

2020-05-04.

Neil Irwin

뉴욕타임즈 경제칼럼 기고가

수, 2020/05/2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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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코리아 양국체제

코리아 양국체제1란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두 나라가 주권국가로서 서로 인정하여 공식 수교하고 평화롭게 공존, 교류, 협력하는 일 민족 이 국가2의 평화체제, 공존체제이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지난 70여 년 남북 간에 쌓이고 쌓인 적대와 불신을 완화하고 해소함으로써 평화적 통일로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

지난 70여 년 남북은 수없이 많은 ‘통일방안’을 경쟁적으로 제안해 왔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통일은 멀어졌다는 역설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까지 한국과 조선은 서로를 국가 대 국가로서 인정한 바 없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통일을 말해봐야 통일이 이뤄질 리 없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통일하자고 하니까 전쟁까지 했던 것 아닌가. 그래서 통일을 하자고 할수록 통일이 멀어지는 역설이 여태껏 발생해왔다고 하는 것이다.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제1보’가 양측이 상대를 진심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인정하는 데 있음은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가로서 성립되어 있는 양자 간의 관계에서 그렇듯 진정에서 우러난 실제적인 인정이란 서로를 정당한 주권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남북 서로가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각자의 내부에서 상대를 부정하고 적대했던 심리와 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야 편지 한 통 오가는 데서 시작해서, 전화가 오가고, 사람이 오가고, 그리고 마음이 오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음 간의 긴장이 먼저 풀려야, 정치적 긴장도 풀리고, 군사적 긴장도 따라 풀릴 것이다. 이 길이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제1보’이고 그러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이 코리아 양국체제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 동안 그 ‘제1보’는 한 번도 제대로 떼어지지 못했다.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면서 내달리고 도약하기를 꿈꾸는 온갖 화려한 통일안들이 난무했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여태껏 미뤄져온 그 첫걸음을 제대로 분명하게 내딛자는 제안이다. 통일에 이르는 첫걸음이 될 양국체제가 정착되고 안정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첫 과정을 제대로 이수(履修)하는 데만 많은 노력과 인내와 창의력이 요구된다. 이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분명한 목표로 인식하고 그 과제의 실현을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과정을 애매모호하게 남겨둔 채 2단계, 3단계로 건너뛰자는 통일안들은 말만 화려할 뿐 실효가 없다. 오히려 갈등과 불신만 키워왔다.

양국체제란 단순히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두 국가 간에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공식적으로 이뤄지고 그러한 상호 인정 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어야 비로소 양국체제라 할 수 있다. 2018년 현재 세계 157개국이 남북 두 국가를 동시에 인정하고 수교하고 있으니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세계인이 인정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한반도에 양국체제가 성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막상 남북 두 국가는 서로를 국가로서 정식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고 극단적으로 적대했던 두 국가가 엄혹했던 냉전 기간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상황 탓으로 넘겨본다 하더라도, 소련·동구권이 붕괴하여 미소 냉전이 해소되고 1991년부터는 남북 두 나라가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음에도 그 후로도 거의 30년을 서로 국가 대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내왔다는 것은 분명 비정상이다.

그러나 현실이 크게 변하여 이러한 비정상이 더는 지속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해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연이어 열리면서 한국전쟁(Korean war)의 종전과 북미 수교가 남, 북, 미 3국의 공식 어젠다에 올랐다.3 정전 상태를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사자가 될 남북 두 국가가 이제 서로를 정상적인 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후 북미·북일 수교가 이뤄지는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도 남북만은 끝내 상대를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은 채 준 전쟁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제 양국체제가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도 놀라운 것이지만 그러한 변화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대중적 힘이 대한민국 내부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힘은 물론 2016년 겨울 이후 형성된 촛불혁명의 민의다. 촛불혁명은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정권의 모든 실정(失政), 무능, 독단에 대한 항의와 비판을 ‘종북’으로 싸잡아 억누르고 ‘블랙리스트’로 묶어 배제했던 박근혜 ‘신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환멸과 거부가 있었다. 결국 북을 이용해 독재를 강화하는 낡은 공식을 재탕·삼탕하려다 국민적 대저항에 부딪쳤던 것이다. ‘보수가 안보는 잘할 거’라는 근거 없는 공식도 완전히 깨졌다. 이명박, 박근혜 소위 ‘보수정부’ 시절 내내 안보 위기·전쟁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만 갔다.

높아가는 안보 위기, 전쟁 위기에 대한 국민적 불안과 불만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음은 2018년의 판문점, 싱가포르 회담에 대한 여론의 압도적 지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4 2019년 2월 하노이에서의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상황은 교착되는 듯했으나, 같은 해 7월 1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다시 만나 70년 적대를 종식시킬 대장정의 새 장을 열었고, 여론은 여기에 대해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냈다. 이 지지는 촛불민의의 연장이자, 촛불민의를 믿고 과감한 대북 화해, 북미 화해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던 새 정부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제 남북미 간의 평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의지와 역량이 새 정부가 ‘촛불정부’임을 입증하는 핵심 증표가 되었다. 이로써 양국체제로의 현실 변화는 남북미 간의 해빙 기류와 이를 지지하는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통해 안팎의 든든한 근거를 갖추었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어느덧 이미 시작된 사건이었다. 이제 코리아 양국체제는 학술적 발상이나 탐구의 수준을 넘어서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양국체제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인식을 정립하여 임박한 변화에 준비된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기 때문에 양국체제에 대한 이해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상식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간단해 보이나 실은 간단하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양국체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흥미로운 현실의 블랙박스를 먼저 풀어야 한다. 오랜 세월, 상식이 현실로 되지 못하게 가로막아온 모종의 강고하고 거대한 장애가 우리 자신의 안팎에 존재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양국체제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 정립을 위해서는 먼저 이 거대한 장애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작업은 현실에서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다. 양국체제로의 첫 전환 시도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첫 시도는 너무나 짧은 시간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시도가 어떻게 가능했고 왜 실패했는지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국체제에 대한 체계적 인식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양국체제 발상이 억압되어온 까닭

먼저 양국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상(像)을 그리기 위해, 한중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현재 한국과 중국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국은 2003년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제1교역국이 되었고, 2017년에는 중국에 체류하는 한국인과 한국에서 체류하는 중국인이 각각 100만 명을 넘어섰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진 후 벌어진 놀라운 변화다. 편지 한 통 자유로이 오가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이러한 큰 변화가 이뤄진 것은 한중 두 나라가 국가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정식으로 수교했기 때문이다. 먼저 정식 외교관계가 이뤄지면 여러 변화가 물꼬를 터서 연이어 진행되게 마련이다. 한중 수교와 교류는 한중 양국에 큰 혜택을 주었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수교 이전의 냉전시대 한중 관계는 사실상 전무했다. 당시엔 중국을 중국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중공’이라 불러야 했다. ‘적성공산국가’를 마치 정상적인 나라인 것처럼 부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교류는커녕 교류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적대와 금기의식이 지배했다. 러시아(구소련)와의 관계, 베트남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실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주지하듯 이러한 변화는 미소 냉전체제의 붕괴로 인해 가능했다. 더는 이념과 체제의 차이가 교류와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일반인들이 서로 만나 협력하고 사업하는 데 이념의 차이를 물고 늘어질 이유가 없었다. 한중, 한러, 한베 수교국 정부 사이의 공무(公務)를 수행하는 데서도 서로의 이념이나 체제를 문제 삼아 마찰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간단히 말하면, 코리아 양국체제란 한국과 조선 두 나라 사이에도 한중, 한러, 한베 사이와 같은 정상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뤄지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한국과 조선은 같은 민족의 두 국가이지 서로 민족이 다른 외국이 아니다. 같은 민족의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일반 외국과의 관계보다 긴밀하고 특수할 수밖에 없다. 양국체제란 일종의 ‘한 민족 두 국가 간의 특수한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그 특수성이 지금까지는 불행하게도 삼엄한 휴전선을 경계로 대치하면서 어떤 정상적 교류도 불가능한 상태에 머무르도록 지극히 부정적으로 작용해왔다. 일반적인 대외 관계와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철저히 가로막힌 상태였다. 그러나 과거 냉전시대 ‘적성국’이었던 중국, 러시아, 베트남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일반인 사이에서도 ‘왜 북과는 같은 민족인데도 그럴 수 없느냐’는 자연스러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일반인 대상으로 양국체제를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기본적인 소개만 하고 나면 오히려 필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남북 간의 양국체제는 여태껏 현실화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발상조차 분명한 형태로 제기되지 못했던 것일까?5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양국체제를 설명하다 보면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반응을 자주 접하게 된다. 뒤집어 보면, 비록 막연하게나마 그런 방향과 방식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또는 그런 식의 생각을 표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뜻이다. 정신분석의 용어로 말하면, 그러한 생각과 발상은 무엇인가에 의해 ‘억압’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그렇듯 양국체제적 생각과 발상을 억압해왔던 것일까?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각 개인의 외부로부터 오는 억압이다. 이는 주로 그동안 북을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했던 국가와 국가기관으로부터 오는 억압이다(남북이라는 말을 바꾸어도 상황은 정확히 같다). 일례로 우리는 오랫동안 ‘북한사람’을 우연이라도 만나게 되면 공포를 느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6 국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해외에서도 그러했다. 북을 불법화하고 있는 국가 당국이 언제든 그런 ‘접촉’을 ‘간첩사건’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이러한 억압은 독재의 수단으로 오랜 세월 애용되어왔다. 어떤 정당한 비판도 ‘종북’이라 몰고, 어떤 비인도적 탄압도 ‘종북 척결’로 정당화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양국체제적인 발상을 떠올리기도, 꺼내놓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 절에서 말했듯 촛불혁명을 전후하여 국내외의 상황이 크게 바뀌고 있다. 이러한 외적 억압은 점차 약화되고 있고, 앞으로 더욱 약화되어갈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런 외부 억압은 억압을 당하는 각자의 의식 속 내면화를 수반하기도 한다. 스스로 ‘종북’ 딱지에 걸리지 않도록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내 귀의 도청장치’가 생긴다.7 이런 자기검열을 통해 북에 대한 경계와 공포, 적대감이 내면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듯 외적 억압에 의해 내면화된 의식 역시 결국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외적 억압 요인이 약화·소멸됨에 따라서 같이 또는 다소의 시차를 두고 약화·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비롯된 억압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이 억압은 원인이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외적 억압이 사라져도 존속할 수 있다. 그러한 억압은 과연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 내면의 ‘분단의식’임을 알 수 있다. 남북뿐 아니라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코리안들에게 ‘분단’이란 그저 단순한 한마디의 말, 언어가 아니다. 범상치 않은 단어다. 반드시 ‘비원(悲願)’이나 ‘한(恨)’과 같이 강렬한 정서적 에너지가 고도로 응축되어 있는 표현을 수반한다. ‘분단’이란 모든 코리안에게 깊은 고통과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수반하는 상처의 표현이다. 일제에 억눌리면서 맺혔던 한이 풀리나 했던 순간 야밤의 봉변처럼 닥쳐왔던 것이 민족분단, 조국분단이었다. 일본을 몰아낸 미국과 소련의 힘, 그리고 그들 사이의 냉전이 분단을 가져왔다. 민족의 심장에 꽂힌 가시가 반드시 뽑혀야 하듯, 이 ‘분단’은 반드시 거부되고, 부정돼야만 한다. 따라서 ‘분단의식’이란 강렬한 ‘분단부정의식’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단’에는 또 항상 ‘극복’이란 말이 따라 붙는다. 그 결과 ‘분단의 비원’과 ‘분단의 극복’은 항상 짝을 이루는 말이 된다. 이러한 분단은 나뉘어 있되 결코 둘이 아님을, 아니 결코 둘일 수 없음을 말한다. 지금은 나뉘어 있지만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함을 정언적(定言的)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이드)을 ‘억압’하는 것은 초자아(슈퍼에고)이고, 이 초자아의 명령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과 닮아 있다. 정언명령을 닮은 이 ‘분단(부정)의식’이 ‘한 민족이 이룬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코리아’라는 생각, 양국체제의 발상을 억압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금압, 터부는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한중, 한러, 한베 수교 이후 현실이 크게 변했음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음에도 그렇듯 상식적인 양국체제적 발상을 제기한다는 것이 왠지 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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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1/1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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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제40조는 국회의원의 상임위원 임기를 2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초 제헌의회 때 상임위원 임기는 의원의 임기와 같이 4년이었다. 그랬던 것이 1953년 1월 22일 국회법 개정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국회 무력화 과정에서 1년으로 단축되었다가 다시 1963년 11월 26일 박정희의 제3공화국에서 2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제3공화국 당시 본회의 중심 체제를 상임위 중심 체제로 전환한 것은 의회기능 강화의 목적이 아니라 독회제도 폐지 등 행정부 안의 신속한 국회 통과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이 상임위 중심 체제는 말이 상임위 중심이었지 의원의 정책전문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상임위 중심체제에서는 극히 기형적인 “임기 중 상임위원 개선(改選) 제도”였을 뿐이다. 이 점에서 “임기 중 상임위원 개선제도”는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의회 무력화의 도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 국회의장 임기도 2년이다. 국회의장 임기도 제헌의회 때는 4년이었다. 그러나 1951년 3월 15일 당초 임기 4년이던 국회의장 임기를 “국회 운영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1년 임기제로 개정하고자 했다. 이 개정안은 심지어 “토의시간만 허비하는 전원위원회 제도 폐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반발에 부딪혀 의장 임기는 2년 임기로 수정되었다.

 

국회의원의 업무 전문성은 어떻게 높아질 수 있는가?

우리 국회에서 의원들의 업무 전문성에 있어서의 취약성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그 취약성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제도적으로 관행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의원의 업무 전문성이란 임기 동안 혹은 선수(選數)를 쌓으면서 “동일한 상임위원회를 유지”함으로써 업무 전문성을 축적하는 것이다. 미국 의회의 경우 의원의 업무 전문성은 상임위를 중심으로 업무 전문성이 축적되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집권당 내 위원회를 중심으로 전문성이 축적된다. 미 의회에서 상임위원회는 의회와 행정부 간의 정책결정의 중심무대로서 따라서 자연스럽게 상임위를 중심으로 한 정책형성은 의회 활동의 중심으로 되었다. “한 상임위 내에서의 선임 순위가 위원장이나 간사로 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미 의회의 불문율, 즉 ‘선임우선제’는 위원회 내의 승진에 대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자동적이고 공평한 원칙이었다.

한편 일본은 자민당 일당독재가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법안과 예산 심의가 의회 위원회가 아니라 자민당 내 정책결정기구인 정무조사회로 되었고, 이 정무조사회의 각 부회(部會)가 의회 위원회 역할을 대신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동일 위원회와 부회를 유지하면서 관청과의 인적 네트워크 및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이른바 ‘족(族)의원’의 위치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관련분야의 정책전문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의원들이 2년마다 상임위를 변동할 뿐 아니라 상임위 배정 뒤 임기 2년 중에도 수시로 상임위를 변동하고 있다. 실제 역대 국회의원 임기 중 상임위 변동률은 50%를 상회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상임위원장을 1년씩 ‘쪼개기’로 맡는 것이 관행화되고 있다. 또한 현역의원이 재선될 경우 전임기의 상임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비율도 40%를 넘지 못한다. 미국 재선의원의 90%가 전임기의 상임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전혀 딴판이다. 더구나 우리 국회는 1963년에 김종필에 의해 도입된 당정협의체제는 행정부 주도 하의 정부여당 협의기구로 오늘날까지 존속하면서 의회와 상임위 위상을 크게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동되어왔다.

임기 중 상임위의 빈번한 변동과 재선 시 상임위 변동은 의원의 업무 전문성 축적에 결정적 저해 요인이다. 상임위 변동으로 소관 업무 및 관련 행정부처 역시 변경되고, 의원은 물론 보좌진도 새로 업무를 파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원과의 통로를 어렵사리 뚫어 놓아봤자 그 다음 만나면 이미 소속 상임위가 바뀌는 바람에 다시 다른 의원을 알아봐야 하는 고충을 겪어야 한다.

의원들의 업무 전문성은 의회 발전의 중요한 토대이다. 우리 국회의 정상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한 의원이 동일 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함으로써 업무 전문성을 축적해야 한다. 상임위원 임기는 의원 임기와 일치되어야 하며, 또한 재선 시에 전임기와 동일한 상임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국회는 너무 오래 이승만-박정희 체제의 관행에 머물러 있다. 이제 권위주의 정권이 국회 무력화를 위해 만들어놓은 국회 상임위 2년 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적대적 공존’, 그 나눠먹기의 시작

본래 우리 국회도 상임위원장은 다수당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국가 의회든 의회의 일반적 형태이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탄생된 이른바 ‘87 체제’의 여소야대 4당 체제 정국에서 상임위원장을 의석 비율에 따라 배분하게 되었다. 긍정적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이는 의회 상임위 활동에서 독점을 해소하고 공존과 균형 그리고 타협의 공간을 제공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여야 나눠먹기의 전형적 형태라 할 수 있다.

당시 여소야대 4당 체제에서는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 조항도 신설되어 각 당이 정책연구위원을 ‘나눠 갖게’ 되었다. 그리고 줄곧 여당의 몫이었던 국회도서관장 자리도 제1야당의 몫으로 가져가기로 되었고, 이 관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 과정은 당시 제1야당으로 올라선 평민당의 의도가 관철되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물론 이는 DJ의 구상과 ‘철학’이 반영된 셈이었다. 이러한 DJ식 정치는 “상인적 현실감각”에 대한 강조에서 드러나듯, 독점된 권력을 분배하고 균점하는 계기로 작동되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나눠먹기’, ‘기득권의 공존’ 혹은 개량주의라는 단점 역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 국회의 고질적 폐단이기도 한 여야 간 ‘적대적 공존’의 토대로 기능해온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우리 국회의 중요한 폐단인 “나눠먹기” 혹은 “적대적 공존”이 관행적으로 구축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수, 2020/07/0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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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복지국가는 국민의 행복증진을 목적으로 하며, 복지국가의 성숙도가 높을수록 국민의 행복 수준 또한 높다고 여겨진다. 유엔의 「세계행복보고서 2021」에 따르면, 핀란드(1위), 아이슬란드(2위), 덴마크(3위), 스웨덴(6위), 노르웨이(8위) 등 복지국가의 모습을 가장 잘 갖추었다는 나라들이 행복순위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다.[1] 이러한 주장은 직관적으로는 이해가 쉽다. 하지만 여기에는 복지국가의 정착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중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복지국가 5.0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복지국가와 행복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부정적/긍정적 감정과 행복

우리나라 표준국어대사전은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영어의 happiness는 ‘기쁨이나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불어의 bonheur는 “인간이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얻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고 다양한 열망을 완전히 달성하며 개성들의 조화로운 발전에 있어서 균형을 찾았을 때, 인간이 정신차원에서 일반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행복이란 “원하는 바을 얻었을 때 도달하게 되는 긍정적인 감정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감정들 중에 기본감정(primary emotion)이란 범주가 있다. 연구자마다 다소 다르지만, 기본감정은 대략 6~8개의 감정들로 구성된다. 플루치크(Plutchik)의 8감정(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기대, 놀람, 신뢰, 증오)이, 희로애락애오욕(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증오, 욕심)이라는 칠정(七情)이 대표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수백 가지의 감정은 바로 기본감정에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기쁨이란 기본감정에서 감정의 정도가 낮으면 평안 높으면 황홀이 된다. 그리고 2개의 기본감정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감정이 만들어진다. 기쁨과 신뢰 사이에서 사랑이, 두려움과 놀라움 사이에서 경외라는 감정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연구들은 행복이란 감정을 기본감정으로 여기지 않고, 둘 이상의 기본감정을 포함하는 집합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위 사전적 규정에 따르면 행복은 최소한 기쁨(joy), 만족(satisfaction), 즐거움(amusement)이라는 3가지의 기본감정을 아우르는 분류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기뻐도 행복한 것이고 만족해도 행복한 것이며 즐거워도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욕망이나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생기는 기쁨, 만족, 즐거움만을 행복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다면, 슬픔∙두려움∙고통 등이 없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은 행복이라 부를 수 없을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도 행복이라 여긴다. 따라서, 행복을 규정할 때 슬픔∙두려움∙고통 등의 부정적 감정과 함께 동시에 기쁨∙만족∙즐거움 등의 긍정적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조합으로 구성해보면, 1) 슬픔∙두려움∙고통이 있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없는 상태, 2) 슬픔∙두려움∙고통이 없고, 기쁨∙만족∙즐거움도 없는 상태, 3) 슬픔∙두려움∙고통이 없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상태 등 총 3가지가 나온다 (그림1 참고).

그림. 동일 사안에서의 행복과 불행의 감정 범위

 

행복의 2가지 유형: ‘0의 행복’, ‘+의 행복’

동시에 긍정-부정의 감정을 스펙트럼으로 보는 것 또한 행복의 의미 구성에 중요하다. 현재의 나의 감정은 최대의 부정상태에서 최대의 긍정상태까지 연속되는 스펙트럼 중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런데 문제는 긍정-부정의 스펙트럼의 중간에 0의 영역이 있다는 점이다. 즉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상태가 있다. 원래 건강했던 사람의 다리골절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날 자동차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다면 부정(-)의 상태가 되고, 수술과 통증치료를 잘 마치게 되면 고통이 없는 (0)의 상태가 되며, 물리치료, 운동치료 등의 재활을 잘 해서 다시 운동도 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 원래의 긍정의 상태인 (+)상태가 된다.

이제 2가지의 기준을 동시에 적용하여 종합적으로 행복을 규정해 보자. 우선, 하나의 사안과 관련해 아픔∙걱정∙고통 등이 있다면, 동시에 기쁨∙만족∙즐거움이 있을 수는 없다. 다리골절은 고통이지 기쁨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슬픔∙걱정∙고통 등이 있다면 기쁨∙만족∙즐거움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이는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상태이며, 소위 말하는 불행이라 할 수 있다. 불행을 나타내는 불어의 malheur라는 용어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함을 어둡게 하고 그것을 정신적인 비참함과 절망에 빠뜨리는 고통의 상태”라고 사전적으로 규정되는데, 바로 이런 상태이다.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해당 슬픔, 걱정, 고통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없앤다고 해서 곧바로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긍정적인 정신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단지 부정적인 정신상태로부터 해방되었을 뿐이다. 이 상태가 바로 슬픔∙걱정∙고통도 없고 기쁨∙만족∙즐거움도 없는 (0)의 상태이다. 나는 이런 상태를 ‘0의 행복’이라 부른다. 이 유형의 행복은 주로 편안함, 안정감, 평화로움 등의 감정이 지배적이다.

(0)의 상태에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 앞의 예를 다시 들자면, 고통이 없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재활과정을 거쳐 능동적인 활동이 가능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운동이나 여가생활 등의 신체적 활동을 해야 비로소 건강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슬픔∙걱정∙고통은 없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상태를 ‘+의 행복’이라 부른다. 요컨대, 당장의 슬픔, 걱정, 고통 등을 없애거나 사전에 이런 부정적 감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함으로써 이르게 되는 슬픔, 걱정, 고통이 없는 상태가 ‘0의 행복’이고, 여기에 더 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 기쁨∙만족∙즐거움을 얻는 상태가 ‘+의 행복’이다.

 

현재의 복지국가의 목표는 주로 ‘0의 행복’의 실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0의 행복’과 ‘+의 행복’을 구분하는 것은 복지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복지국가의 정책들 중에 상당 부분은 ‘0의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안되었다. 복지국가의 핵심적인 정책인 사회보장정책은 눈앞에 나타난 질병, 실업, 육아, 요양, 장애, 주거, 소득부족 등의 사회적 위험, 즉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 결핍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을 벗어나거나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들이다. 건강보험은 아팠을 때, 국민연금은 노후시기의 소득 부족을 대비하기 위해, 고용보험은 실업에 따른 소득 결핍을 위한 것들이다. 소득보장 관련 정책들은 소득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복지국가는 ‘+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제공하기보다는 주로 그것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우선, 사회구성원의 역량(capability)를 키우는 데 초점을 둔다. 유럽 복지국가들은 19세기부터 ‘교육국가’라고 부를 정로도 공교육의 제공을 제일 중요한 책무로 여겼다. 현재에도 대부분의 유럽 복지선진국은 대학교까지 공교육체제를 갖추고 있어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며 학비걱정 없이 역량을 쌓을 수 있다. 또한, 직업고등학교도 잘 발달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높다. 최근에는 직업재교육체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대학교 및 대학원 진학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사회구성원은 ‘+의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제도와 관행 그리고 암묵적 규칙 등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노력과정이 더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는 장치들을 깔아주는 것이 ‘+의 행복’을 위한 복지국가의 두 번째 방점이다. 요컨대, 복지국가는 시민들이 원하는 ‘+의 행복’에 필요한 조건들을 제도적으로 구축하는데 힘을 쏟는다.

 

‘+의 행복’을 위한 복지국가의 노력들

노동을 통한 사회참여는 일상의 1/3~1/4를 차지하므로 ‘+행복’의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이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그런 직업이 차별 없이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직업선택이 잘못 되었을 때, 취업서비스, 직업재교육, 실업시기의 소득보장 등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직업으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복지선진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 구축에 있어 매우 앞서 있다. 그 결과 국민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다. 특히 복지국가 4.0에서 가장 앞선 북유럽 국가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으며 스웨덴의 경우에는 2019년 기준으로 73.4%에 이른다.[2]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여유시간의 보장은 ‘+의 행복’을 위한 또 다른 주요 조건이다. ‘+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절대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직장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길수록 다른 곳에서의 행복을 느끼기 위한 활동을 할 여지는 줄어든다. 물론 근래 유럽에서 나타나는 노동시간단축은 일자리를 나누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단축된 노동시간을 자신의 역량 개발이나 여행이나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는 등에 사용함으로써 ‘+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은 지방자치제도의 완성도를 높여 국가의 주요 사무들이 주민들의 ‘+의 행복’을 실현하는데 공헌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지방정부가 사회서비스에 대한 규제, 관리, 재정 모두에 대해 책임과 자율권을 가지고 있다. 시민사회 출신자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지방정부의 주요 요직에 자리잡음으로써, 그들이 주민들과 맺은 네트워크가 주민들의 직간접적인 참여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반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0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을 직접 기획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즉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지역주민의 일원으로서 지역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위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구조는 사회서비스의 영역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복지선진국이 보여주는 정책상의 특징 중 하나는 동행서비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행서비스는 사회구성원이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 부족한 요소들을 보조하는 인원이 동행하면서 채워주는 것이다. 장애인의 경우 직업교육이나 직업생활을 할 때 동행인인 함께 생활하면서 활동에 도움을 제공한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일환으로 각각의 구직자에게 동행인을 붙여주어 취업계획작성부터 시작해 취업이 될 때까지 현장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이러한 동행서비스는 각 개인이 삶의 주체가 되어 일상에서 중요한 일들을 스스로 기획하고 결정하며 그것을 추구∙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의 행복’의 실현을 가능하도록 한다.

 

 

복지국가 5.0은 ‘0의 행복’ 보장을 유지하면서 ‘+의 행복’ 보장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구축된 복지국가 4.0은 ‘0의 행복’과 ‘+의 행복’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다. 위에서 기술한 ‘+의 행복’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 4.0은 ‘0의 행복’의 보장에 치우쳐 있다. 이런 불균형은 복지국가 4.0이 주로 보장하는 행복과 국민이 실제로 요구하는 행복 사이에 미스매치가 낳고 있으며, 이는 결국 복지국가 5.0으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압력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

유럽의 복지선진국은 ‘0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와 프로그램을 이미 촘촘하게 갖추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는 이미 형성된 슬픔, 걱정, 고통에 대한 방지책으로 인해 편안함과 안정감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즉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축된 제도와 프로그램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주는 효능감이 낮아지고 있다. 따라서 ‘0의 행복’의 강화를 위한 요구는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다만 ‘0의 행복’을 지원하는 제도들을 축소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할 뿐이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의 행복’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져가고 있는데 이를 충족시킴에 있어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당장의 실업률의 문제로 인해, 정부는 취업 자체에 초점을 맞추느라 일자리의 질에 대한 고려는 줄어들고 있다. 비록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일을 제공하고자 노력은 하지만 충분치가 않은 상황이며, 특히 새롭게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층의 불만은 커져가고 있다. 경제활동에 있어서의 주체적인 참여 요구는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단순히 취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생산을 주도적으로 관장하려 하지만 그를 위한 토대가 별달리 구축되어 있지 않다. 현재 도입된 노동이사제는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운영권 내지는 결정권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조합원의 주체성을 보장하는 협동조합이 활성화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복지국가 5.0으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위해,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은 ‘+의 행복’의 증진을 위한 정책들을 새롭게 도입하고 강화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황이 좀 더 복잡하다.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0이 행복’에 대한 인식 없이 ‘+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자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 또는 임금이 높은 일자리를 원한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항상 보다 높은 자리 또는 높은 위상을 가지려 한다. 주거의 안정성보다는 자기의 집을 사려는 데 보다 더 큰 열의를 쏟아 붓는다. 적당한 소득보다는 자기가 벌어들일 수 있는 최고의 소득수준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맥락에서 ‘0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복지국가는 국민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게 된다. 결국, 행복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이해는 복지국가패러다임을 지배적 통치패러다임으로 위치 지우는 데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 행복’은 ‘0의 행복’을 보장하는 제도들을 조건으로 달성 가능한 것인데, 우리나라는 토대가 없는 사상누각을 꿈꾸고 있다.

 

[1] Helliwell, John F., Richard Layard, Jeffrey Sachs, and Jan-Emmanuel De Neve, eds., World Happiness Report 2021, New York: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 2021, p.18.

[2]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2KAA301_OECD&conn_path=I3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정치학도로 시작해 프랑스 파리제1대학과 그로노블정치대학(IEP de Grenoble)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한 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연구실장으로 활동했음. 현재는 복지국가를 마을에서부터 만들기 위한 운동을 진행 중. 사회사상, 복지국가와 복지정치, 사회보장, 건강 및 요양, 복지도시 등을 사회성(the social)과 이론-실천의 통합 관점에 기반해 연구 중

목, 2021/09/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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