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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경성(京城) 지역에만 두 곳의 감옥을 만든 까닭은? 장기수 전담감옥이었던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의 건립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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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경성(京城) 지역에만 두 곳의 감옥을 만든 까닭은? 장기수 전담감옥이었던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의 건립 내력

admin | 목, 2021/03/25- 21:50

[식민지비망록 68]

일제가 경성(京城) 지역에만 두 곳의 감옥을 만든 까닭은?
장기수 전담감옥이었던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의 건립 내력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감옥(마포 공덕리) 앞에 모여든 인파의 모습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 출옥하는 16인을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일제가 이른바 ‘만세소요사건(萬歲騷擾事件)’이라고 불렀던 거족적인 삼일만세운동의 여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인 1921년의 어느 늦은 가을날, 이른 아침부터 4, 5백 명이 훨씬 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삐 아현(阿峴, 애오개)을 넘기 시작했다. 누구는 전차로, 누구는 자동차로, 누구는 직접 걸어서 각기 도착한 곳은 먼저 온 이들로 꽤나 혼잡해진 어느 감옥의 문 앞이었다.

<매일신보> 1921년 12월 23일자에 수록된 최린, 권동진, 한용운, 오세창, 이종일, 김창준, 함태영 등 7인의 가출옥 관련기사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사건 관련 48인에 포함되어 최초에는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다가 확정판결 이후 경성감옥 쪽으로 이감된 상태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든 까닭은 바로 ‘독립선언사건(獨立宣言事件)’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출옥(滿期出獄)을 하는 16명의 인사들을 맞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광경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악수(握手)하고 감루(感淚)만 종횡(縱橫), 경성감옥 문밖에는 5, 6백 명의 고구 친척이 산 같이 모였다, 작조(昨朝) 감옥(監獄)에서 출감(出監)된 17인(人)」 제하의 기사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작(昨) 4일 오전 9시로부터 아현리(阿峴里) 경성감옥(京城監獄) 앞에는 남녀 합하여 4, 5백 명의 인원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전차길 옆으로부터 감옥 문 앞까지 사람이 피하여 다닐 수 없이 섞기여 섰고 자동차 7, 8대는 감옥 들어가는 어구에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 사람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그리웠던 사람을 일 분 일 초라도 얼른 좀 보았으면은 하는 빛이 나타난다. 이 일은 다른 일이 아니라 이미 본지로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고 장구한 사이에 춥고 더운 것을 참아가면서 또는 엄밀한 옥칙을 지키여 가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살이를 하다가 금월 3일까지가 만기되어 작 4일에 출옥되는 날이었는데 오전 9시 반이 되매 출옥하는 분들의 가족은 의복일습을 가지고 들어와서 감옥에 드리매 제1회로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이필주(李弼柱), 김원벽(金元壁) 4인을 감방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의복을 바꾸어 입히는 모양이더니 …… 그 뒤으로 제2회에는 신석구(申錫九), 나용환(羅龍煥),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4인이 나왔고, 제3회로 김완규(金完圭), 최성모(崔聖模), 박준승(朴準承), 홍병기(洪秉箕) 4인이 감방으로부터 함께 나아와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옥문 밖을 나아갔고 제4회로 권병덕(權秉悳),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신홍식(申洪植) 4인이 나왔는데 시원하게 옥문을 벗어져 나오면서도 아직 1년이나 고생살이할 다른 분들을 애처롭게 여기면서 2년 전에 들어갔던 옥문을 다시 아주 나와 버리기는 11시 20분경이었더라.…… 그리고 별항에 보도한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았던 20명 중에 16명은 경성감옥으로부터 출옥되고 유여대(劉如大), 강기덕(康基德), 홍기조(洪基兆) 3인은 수속의 관계로 5일까지가 만기로 되었고 그 외 이종훈(李鍾勳)은 지우금(至于今)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 있었던바 역시 2년이었으므로 작 4일 오전 10시에 만기 출옥되었더라.

 

이들에 이어서 그해 연말에는 권동진(權東鎭), 김창준(金昌俊), 오세창(吳世昌), 이종일(李鍾一), 최린(崔麟), 한용운(韓龍雲), 함태영(咸台永) 등 7인이 가출옥(假出獄)의 형태로 경성감옥에서 풀려났다. 다시 해가 바뀌어 1922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오화영(吳華英)과 이갑성(李甲成), 그리고 이승훈(李昇薰)이 차례대로 만기출옥을 하면서 ‘독립선언사건’과 관련하여 투옥된 인사들은 모두 감옥을 벗어나게 되었다. 삼일만세운동이라고 하면 그 누구라도 퍼뜩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 1923년 5월에 서대문형무소로 개칭)’의 존재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여기에 정리된 자료에서도 나타나듯이 독립선언사건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핵심인사들이 막판에 옥고를 치렀던 곳은 바로 경성감옥(京城監獄, 공덕리 105번지; 지금의 서울서부지방법원 구역 일대)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이 맨 처음 투옥되었던 서대문감옥에서 경성감옥 쪽으로 이감(移監)된 것은 결국 최종심이 되고 말았던 경성복심법원의 항소심 선고(1920년 10월 30일)가 이루어지면서 기결수(旣決囚)로 신분이 바뀐 이후의 일로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경성감옥의 편제는 조선총독부령 제11호 「조선총독부 감옥 및 감옥분감의 명칭, 위치(1912년 9월 3일 개정)」에 따라 처음 설치되었으며, 감옥의 소재지는 마포 공덕리였다. 이때 종전에 경성감옥이라고 했던 곳은 이 이름을 물려주고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다. 이보다 앞서 금화산(金華山) 아래 금계동(金鷄洞)에 신축 감옥이 들어선 것은 1908년 10월 19일의 일이었으니, 불과 4년 사이에 2개의 감옥이 잇달아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렇다면 직선거리로 놓고 보더라도 3킬로미터 남짓에 불과한 구역 안에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 이렇게 둘씩이나 만들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명시적으로 그 연유를 풀어놓은 자료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그 시절의 신문자료를 죽 훑어보았더니 독립문 밖의 새 감옥이 준공 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이곳이 협착(狹窄)하여 죄수를 수용하기 곤란하므로 다시 증축(增築)하기를 의논중이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실제로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27일자(국문판)에서는 남부 둔지미(南部 屯芝味)가 새로 짓는 감옥서의 후보지로 거론된 바 있고, 그 직후에 다시 용산 청파 4계(靑坡四契)와 청파 피병원(避病院) 부근 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효창원(孝昌園)의 일부에다 공역비 3만 원을 들여 1천 명을 수용할 큰 감옥을 건설한다는 기사가 잇달아 게재된 사실이 눈에 띈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 (1935)에 수록된 재감인원(在監人員) 추이에 관한 도표자료이다. 경술국치 이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특히,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는 이 수치가 15,000명 수준으로 크게 치솟아 오른 것을 확인할수 있다.

이러한 논의가 거듭된 끝에 1911년 4월에 이르러 신축감옥의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곳은 마포공덕리에 자리한 탁지부 양조소(度支部 釀造所, 아현리 451번지)의 건너편 지역이었다. 이곳의 위치는 애오개 너머 마포나루로 가는 길목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일제가 부여한 지번상으로는 ‘경성부 용산면 공덕리 105번지(총면적 16,817평)’에 해당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1년 9월 2일자에 수록된 「경성감옥공사(京城監獄工事)」 제하의 기사는 신축감옥에 대한 착공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덕리(孔德里)에 신설(新設)하는 경성감옥공사(京城監獄工事)는 작일(昨日) 총독부 영선과(總督府 營繕課)에서 지명입찰(指名入札)을 행(行)한 결과(結果) 약(約) 20만 원(圓)의 가격(價格)으로 마츠모토구미(松本組)에 낙찰(落札)이 되었는데 부지(敷地)는 전부(全部) 1만 6천여 평(評)이라. 선(先)히 지균(地均)을 행(行)하고 갱(更)히 감방(監房), 기타 부속가옥(附屬家屋)을 건축할 터인데 본(本) 감옥신축에 관하여는 내지(內地)의 신식감옥(新式監獄)의 건조물(建造物)을 시찰(視察)하고 각종(各種)으로 연구중(硏究中)인즉 조선감옥(朝鮮監獄)의 모범(模範)으로 건축할 터이오, 공사(工事)는 직(直)히 착수한다는데 46년(즉, 1913년) 상반기(上半期)에 준공(竣工)할 예정이라더라.

 

그 이후에 일부 설계변경이 있었고 이에 따라 당초의 예정보다는 공사일정이 크게 앞당겨질 것으로 보였으나, 막바지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912년 12월 16일에 느닷없이 발생한 화재로 옥사(獄舍) 1동(棟)이 소실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아직 서대문감옥 쪽에서 죄수들이 옮겨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사인부 2백여 명만이 긴급하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불 탄 건물은 그 이듬해에 재건되었다고 알려진다. 이 당시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을 통틀어 어떠한 수형자를 어느 곳에 수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그나마 대략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총독부 사법부 장관의 통첩(通牒)으로 고시되는 「감옥수용구분(監獄收容區分)의 변경에 관한 건(件)」 정도이다. 여기에는 우선 “경성지방법원과 관할 지청(인천, 춘천, 원주는 별도)의 판결을 받은 수형자는 ‘서대문감옥’에 수용되고, 이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외국인(중국인은 제외) 남자는 ‘경성감옥 영등포분감(永登浦分監)’에 수용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경성감옥 자체에 대해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명단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을 뿐더러 아무런 관련 규정이 적시된 것이 없다.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1929)에 나타난 경성형무소(공덕리 105번지)의 위치이다. 이곳은 애오개와 만리재 쪽에서 각각 넘어온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가까우며, 마포가도의 길 건너편에는 총독부 양조시험소(釀造試驗所, 지금의 마포경찰서 자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아래쪽으로 효창원과도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은행에서 펴낸  <픽토리얼 초센 앤 만츄리아(Pictorial Chosen and Manchuria)> (1919)에 수록된 경성감옥의 전경 사진이다. 이곳의 편제는 1912년 9월에 설정되었지만, 실제 감옥 시설이 완성된 것은 1913년으로 넘어간 시점이었다. 이 사진은 건립 초기에 촬영된 탓인지 외곽에 둘러진 담장의 모습이 벽돌 재질이 아닌 목책(木柵)인 것이 눈에 띈다.

경성감옥의 존재는 경성형무소로 개칭된 이후의 시점에 와서야 관련 규정상으로 처음 명시적으로 등장하는데, 1923년 12월 8일에 총독부 법무국장의 통첩으로 고시된 「감옥수용구분의 변경에 관한 건(개정, 1924년 1월 1일 시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경성형무소의 관할 판결청으로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이 명기되었고, 특히 별표(別標)의 말미에 따로 “본 수용구분중 무기(無期) 및 형기(刑期) 10년을 넘는 남자 수형자에 대해서는 내지인(內地人)인 때는 영등포형무소에, 기타의 것이 되는 때는 경성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에 수용할 자는 경성형무소에, 대구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에 수용할 자는 대전형무소에 각 이를 집금(集禁)한다” 는 구절이 첨부되었다.
이 규정으로 본다면 경성형무소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과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 관내에서 무기 및 형기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장기수(長期囚), 그것도 조선인 남자 수형자만을 전담하여 가두는 공간으로 정의되는 셈이었다. 그 이후 이러한 구분에 다시 한 번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40년 2월 19일에 총독부 법무국장의 통첩으로 고시된 「형무소수용구분(刑務所收容區分)의 변경에 관한 건(개정, 1940년 3월 1일 시행)」에 수록된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종래 ‘경성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 및 지소’의 장기수형자(長期受刑者)는 집금형무소인 ‘경성형무소’에 수용한다는 구절을 바꿔 그 대상지역을 훨씬 더 확대하도록 결정한 사항이 표시되어 있다. 이를 테면 이 시기 이후로는 ‘조선 전체의 각 형무소와 지소’의 장기수형자를 초범(初犯), 누범(累犯), 사상범(思想犯)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이들을 각각 경성형무소, 대전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일괄 수용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2월 19일자에 게재된 법무국장 통첩 「형무소수용구분에 관한 건(개정)」을 보면 종래 경성복심법원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에 속하는 장기수들을 수용하던 경성형무소의 기능이 폐지되고, 이때부터 그 대상이조선 전역으로 확대되어 무기 또는 형기 10년 이상의 남자 수형자 가운데 초범(初犯)을 집합 수용하는 집금형무소(集禁刑務所)로 전환된 사실이 드러나 있다.

경성감옥에 대한 얘기를 하노라면, 이곳에 갇힌 수형자들의 노역장으로 사용된 ‘마포연와공장 (麻浦煉瓦工場, 도화동 7번지)’의 존재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곳은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활발하게 건립이 추진되던 각종 관아청사(官衙廳舍)와 관사(官舍)의 건립공사에 소요되는 건축자재를 저렴하게 조달하기 위해 1906년 10월에 영등포의 토관공장과 짝을 이뤄 탁지부건축소(度支部建築所)에 부속되어 만들어진 연와제조소(煉瓦製造所)에 뿌리를 두었다. 이것들은 1907년 4월과 7월에 잇달아 직영(直營)으로 편입되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벽돌은 대한의원 본관, 탁지부 청사, 평리원 청사, 공업전습소 등의 신축공사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에는 총독부의 직할로 전환되었다가 1913년 4월에 이르러 이곳의 업무가 일체 경성감옥의 관장(管掌)으로 넘겨지면서 감옥의 작업장으로 탈바꿈하였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8일자에는 진광렬(秦光烈)이라는 사람이 기고한 「내동리 명물, 도화동 연와공장(桃花洞 煉瓦工場)」 제하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붉은 옷 입은 직공’이라고 하는 것은 기결수 수형자(旣決囚受刑者)가 착용하는 자색(赭色, 검붉은 황토색)의 죄수복을 가리킨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8일자에 수록된 연재기고문 「(내동리 명물) 도화동 연와공장」 관련 기사이다. 이곳은 1913년 4월 이후 경성형무소의 노역시설로 사용되었으며, 이 글에 나오는 ‘붉은 옷’이라는 것은 기결수들이 입는 죄수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 서울 안에 양제집이 겅성드뭇한 오늘날 벽돌 만드는 공장이 없어 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새문 밖 도화동에 연와공장이 생겼습니다.
◇ 도화(桃花)에는 흰 꽃 피는 벽도(碧桃)도 있건마는 보통 도화라 하면 붉은 빛을 생각하고 벽돌에도 여러 가지 빛이 있건마는 보통 벽돌이라 하면 붉은 빛으로 여깁니다. 벽돌 만드는 공장이 도화동에 앉은 것은 빛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 이 도화동 연와공장에서 노동하는 직공(職工)들은 다른 공장 직공과 다릅니다. 붉은 옷 입은 직공들입니다. 붉은 옷 입은 직공들이 붉은 벽돌 만드는 것도 역시 빛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붉은 옷 입은 직공은 두 사람이 한데 쇠사슬로 매어 다니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할 때는 쇠사슬이 풀립니다. 그러나 총 든 사람이 망대 위에 서고 칼 찬 사람이 뒤를 따른답니다. 직공 중에는 따라지신세의 직공들입니다. 이 직공 중에는 붉은 염통의 끓는 피를 눈물 삼아 뿌릴 유지한 사람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빛으로 어울린다기가 차마 어려워 그만 두겠습니다.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는 해방 이후에 서울형무소 지소(1945.11.21 개칭)와 마포형무소(1946.3.28 개칭)를 거쳐 마포교도소(1961.12.23 개칭) 시절을 거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 일대를 에워싸고 진행되는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1963년 가을에 이르러 안양교도소의 신축 준공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감에 따라 최종 폐쇄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마포형무소의 내력을 뒤지다 보니 조금은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퍼뜩 눈에 띈다. <동아일보> 1949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노덕술(盧德述) 등도 이송(移送)」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다.

 

<경향신문> 1949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친일부역자 피의자들이 일괄 마포형무소로 이감될 것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반민특위에서는 23일 위원회 결의로서 노덕술(盧德述), 문명기(文明琦), 노기주(魯璣柱), 하판락(河判洛), 이원보(李源甫) 등 5명을 동 특별검찰부로 송청하였다고 한다. 한편 동 특위에서는 종래에는 체포된 반민혐의자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 수감하여 왔었던바 여기에는 미결수도 수용되어 있는 관계로 기밀누설의 염려가 있다 하여 위원회 결의로서 25일부터 일체의 반민혐의자를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로 이감하기로 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독립선언사건의 주역들과 무수한 장기수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옥고를 겪어야 했던 바로 그 공간이 어느덧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의해 체포된 친일파 군상의 집결지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교차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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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구소는 10월 27일부터 12월 18일까지 고양 창원 대전 광주 부천에서 ‘촛불 1년, 다시 부르는 항일의 노래’ 토크 콘서트를 순회 공연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마련과 항일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된 이 공연에 이야기 손님으로 이재명 시장, 노회찬 박주민 의원, 김광진 정청래 전 의원이 초대되어 ‘촛불혁명과 우리 시대의 적폐청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1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조재곤 박사, 사회부문 한상권 교수 수상

11월 10일 제11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렸다. 학술부문에는 러일전쟁을 한국인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러일전쟁과 한국사회』를 저술한 조재곤 박사가, 사회부문에는 오랜 기간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의 상임대표를 맡아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보급과 한국사 국정교과서 도입을 저지한 한상권 교수가 선정돼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박정희 관련 명예훼손 소송, 모두 승소

1월 25일, 연구소가 박정희혈서조작설을 유포한 강용석 변호사,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 일베회원 강모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각각 500만원, 300만원, 3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하라는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12월 12일에는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를 상대로 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 소송 2심에서 서울북부지방법원은 피고의 항소를 기각하고 연구소에 500만원을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심포지엄을 통해 3•1혁명의 의미를 재조명해

연구소는 6월 1일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주년 기념으로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지역문화연구센터와 공동으로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함흥법원 검사의 기소자료와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등 기존 연구에서 다뤄지지 않은 자료를 활용하여 3•1혁명의 새로운 양상을 도출하였고, 운동보다는 혁명으로 명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3•1혁명의 역사상을 한층 풍부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2회째 맞은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8월 12일 일본 도쿄의 한국YMCA에서 열린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행사에 무단합사 피해자 유족들을 비롯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사무국을 맡은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이 행사는 2006년 8월부터 한국 타이완 오키나와 일본의 시민들이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매년 개최해왔다.
한편 6월에는 그간 보추협의 숙원사업이었던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가 출간되어 유족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근현대사기념관, 다채로운 강좌로 학생•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어

연구소가 2016년부터 위탁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시의적절한 다양한 주제의 강좌를 개최하여 학생과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7월 25일~28일 진행된 ‘영화로 배우는 일제강점기’ 강좌에서는 최근 흥행한 영화 <밀정> <암살>과 강제동원문제를 다룬 <안녕 사요나라> <군함도>를 소재로 삼아 연구소 상근자들이 강사로 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강제동원 피해실태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이밖에도 ‘저항과 협력-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3~6월) ‘역사의 길에서 민주주의를 묻다’(6~7월)와 ‘순례길의 독립운동가’(9월) 등의 강좌를 열어 독립전신과 민주의식 고양에 앞장섰다.

목, 2018/01/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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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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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항 위안소구지진열관 안에는 할머니가 된 소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답사단의 소녀가 그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청년백범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기행’이 10회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를 시작으로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을 찾아가는 일정이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여든이 넘으신 민문연 이광찬 회원과 이윤 회원 등 17명이 다녀왔다.
이봉창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문을 두드렸던 상하이시기 마지막 임정 청사. 의열단원 오성륜・김익상・이종암 의사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한 황포마두. 김구 선생 어머니가 먹을 만한 것을 고르기 위해 중국 사람들이 다듬고 버린 채소더미를 뒤지던 골목길.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 송경령능원(상하이 외국인묘지였던 만국공묘의 현재 명칭). 김구 선생이 이봉창ㆍ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 뱃사공 주애보와 살았던 자싱의 피신처.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 당서기 시절에 찾아왔던 하이옌의 김구선생피난처. 중국의 ‘국가급 항전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된 항저우 서호 옆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김원봉 선생이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했던 난징 산골의 천녕사, 여운형・조동호・김마리아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다녔고, 민족혁명당 창당식을 거행했던 난징대학교.
중일전쟁시기 일제가 난징 시민 30만 명을 학살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남경대도살조난동포기념관(南京大屠殺遭難同胞紀念館). 난징총독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동양 최대 규모의 위안소를 만들어 놓고, 눈앞에서 벌였던 그 잔인한 짓을 지금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일본의 무모함에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곳 리제항 위안소구지진열관. 그곳에는 끌려온 어린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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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천녕사 앞에서 기념촬영

 

옛날 의병전쟁을 하시던 분들의 머리에는 꽃이 피었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과 들에서 몇날 며칠을 씻지도 못했던 그분들의 머리에, 바람에 날려 씨앗이 꽂히고 그것이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현실의 몸은 거칠고 고단했지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꽃으로 기억돼야 하는 역사다. 우리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분들 같은 삶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 다시는 그런 삶을 걸어야만 하는 시대가 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그분들을 잊지 않아야 하고, 그분들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걷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화, 2018/03/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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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조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

 

북한은 지난 7월 두 차례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마침내 미국 본토 타격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 동북아 전략 구도의 게임체인지 순간이 다가왔다.
ICBM은 현대 군사 기술의 집약체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속옷도 제대로 못 만드는 북한의 ICBM 개발이 미스터리라고 하면서, 성공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봤다. 첫째, 지난 수십 년 간 ICBM 관련 과학자들을 꾸준히 관리했으며, 둘째 스스로 확보한 비공식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사일 개발 비용을 감당했고, 마지막으로 김정은이 미사일 개발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연합뉴스???? 2017.7.10).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는 워싱턴포스트 분석보다 뿌리가 더 깊다.
북한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됐다. 이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올인했다. 모든 국가자원을 다 쏟아 부었다. 북한 스스로 핵개발 의도를 미국의 핵위협 대처, 재래식 무기의 엄청난 비용 부담에 따른 코스트 측면에서 핵개발, 그리고 민족통일의 원동력 구축임을 밝히고 있다. 북한의 ‘피포위 의식’과 미국의 대북 핵위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 무기로서의 핵’이라는 데에 북핵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북한 비핵화 전략은 실패했다. 왜 실패하고 말았는가?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우려하면서도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가 군산복합체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었고, ‘불량국가’와의 협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국 미국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미국은 좀체 북한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체결의 세 이벤트가 주목된다. 그해 말 전술핵무기가 철수되었다. 독일 통일(1990.10.3)을 전후하여 한소수교(1990.9.30), 한중수교(1992.8.24)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과 미일과의 교차승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2년 초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 용인을 전제로 북미수교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거절했다. 그러자 북한은 핵프로그램 추진으로 돌아섰다.

 

북핵, 협상 실패의 역사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몇 차례의 협상 타결이 있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로 제1차 핵위기가 봉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발목잡기에 걸려 경수로 건설의 첫 삽을 뜨는데 3년 가까이 걸렸다.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다시 미국의 주목을 끌었다.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의 「북미 공동코뮤니케」(US-DPRK Joint Communique)로 한반도의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공동코뮤니케는 다음해 부시 대통령에 의해 찢겨지고 말았다.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으로 제2차 핵위기가 불거졌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 8월 다자간 협상틀인 6자회담이 개최되어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거의 완벽한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 자금을 묶은 BDA(방코델타아시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음해(2006.10.9) 마침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놀란 미국은 다시 북미 양자 협상을 서둘렀다.
2008년 6월 영변 5MW 원자로 냉각탑 폭파, 10월 테러지원국 해제 등 북핵 협상이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의 6차 회담을 끝으로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김정일이 2008년 8월 스트로크(뇌졸중)를 맞았다. 갑자기 건국기념일(9월 9일) 행사가 취소되었다. 그러자 김정일 사망 관련 예측 보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미국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김정일 사망 후 대책이 얘기됐고, 미국과 한국에서 북한붕괴론이 크게 부각되었다. 학술 세미나,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미국은 협상 판을 걷어 치웠다.
김정일은 ‘유감스럽게도’ 3년이나 더 살았다. 그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를 수차례 방문했고, 핵미사일 소요 첨단 소재와 장비들을 구입했다. 2009년 1월 김정은을 세습 후계자로 내세웠다. 김정일은 3년의 후견 기간을 통해 절대 미국을 믿어서는 안 되고, 핵미사일만이 살 길이라는 점을 확신시켜주고 떠났다. 김정일의 사망이 급변사태나 붕괴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북한 비핵화, 2단계 접근
미국은 본토 침공을 두 번 당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12.7), 2001년의 9․11 테러가 그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언어폭탄으로 미국 시민의 충격은 크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는 사실상 전략적 무대책으로 실패했다. 그렇다고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 예방전쟁(preventive war) 카드를 함부로 휘두를 형편은 못된다.
북미 간 치킨게임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는가? 북한의 협박 자제와 한미연합훈련 축소로 일단 긴장국면을 넘긴다면, 이제 본격적인 협상 모멘텀을 찾아 나서야 한다.
2단계 접근이 가능하다. 1단계는 위기 봉합과 핵·미사일 상황 악화 방지에 초점이 있다. 이는 ‘동결 vs 제재·압박 해제(완화)’의 맞교환이다. 2단계는 장기전망 구도 위에서 ‘핵폐기 vs 평화체제’ 협상틀이 예상된다. 1단계 진입이 쉽지는 않지만, 협상 이외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편집자주 – 이 시론은 8월 25일 접수된 글이라 이후 북핵 위기의 변동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다.

월, 2017/09/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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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3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20점 보내와
2월 2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3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공무여행증명서, 1940년도 소작료납입고지서 등 문서류와 일제강점기 농업교과서 등 도서류다.

조영숙 회원(도쿄지회 총무) 자료 기증
2월 1일 조영숙 회원이 지난해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있는 자료에 이어 남편의 자료 5점을 기증했다.

이건제 회원 자료기증
2월 20일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교주했던이건제회원이「노동자신문」(1989~1996)과 도서 16권 등 총 464점의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8/03/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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