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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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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admin | 목, 2021/03/25- 20:07

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박광종 선임연구원

KBS는 지난 3·1절 저녁 9시 뉴스에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KBS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가 1921년 6월에 작성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 철에서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하고, 1920년 간도참변 당시 한국인 경찰들이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 일제의 만행에 적극 가담
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KBS가 입수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는 <응원경찰관 공적조서>(재간도일본영사관), <간도사건 공적명세서> (두도구분관과 용정촌총영사관), <간도사건 공적조사서>(국자가분관) 등 4종류, 600여 쪽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중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서’가 상세하게 담겨있다. 이 문서들은 간도참변을 지휘한 일본군 부대장들이 ‘토벌’에 참여했던 일제 경찰(한국인·일본인)들에 대한 공적서를 작성하고, 간도총영사관이 이 공적서를 취합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것이다. 연구소는 각종 사료(자료)를 조사해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 소속 순사로 간도로 파견된 ‘응원 경찰’ 9명이 일제로부터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48명 중 간도참변 당시 간도총영사관경찰서에 근무하던 일본 외무성 경부 2명(현시달·김
영규)은 이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이외 종군기장을 받은 ‘응원경찰’ 9명을 포함해 46명이 독립운동(가)을 탄압한 사실이 자료를 통해 확인된 만큼 추가 행적 조사가 필요하다. 예컨대 연구소가 소장한 다른 자료에서 간도참변 당시 일본 외무성 경부보(간도총영사관경찰서)였던 최태욱이 1926년 1월 당시 경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태욱은 간도참변에 앞장 서 공적서에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연구소는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48명에 대한 행적을 철저히 조사해 이들 중 친 일·반민족행위가 명백하고 선정기준에 부합한 경우 향후 발간할 <친일인명사전> 증보판에 수록할 예정이다. 한편 연구소는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보고>에서 한국인 경찰들이 체포에 앞장 선 독립운동가 중에 이미 서훈이 추서된 독립유공자를 일부 확인하였다. 또한 이들 외에 확인된 다수의 한국인 사상자(死傷者)와 피체자(被逮者)와 관련한 독립운동 행적을 추가 조사해 KBS와 공동으로 서훈을 요청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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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굿바이 활란’ 대학 내 친일청산의 바람

정리 : 신다희(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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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역적2 녹화장에서 김광진 전 의원과 함께 찍은 셀카 사진. 왼쪽이 정어진 단장, 오른쪽이 김예원 대외협력팀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이자 이화여대 초대 총장으로 유명한 김활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활란은 1919년 3・1혁명기에는 비밀결사에 참여했지만 전시체제기에 들어서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 각종 관변단체 간부로 재직하였고 해방 직전까지 열렬히 친일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교육계 친일인사다. 그럼에도 김활란의 동상이 그의 살아생전인 1958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이화여대의 상징으로 버젓이 서 있다.
마땅히 철거해야 될 동상이지만 친일문제는 감추고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요즘은 동상 철거보다는 안내문을 설치하는 추세다. 김활란 동상 옆에 친일행위를 기록한 팻말을 세운 ‘개념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있다고 하여 인터뷰를 나눴다.

문 : 안녕하세요. 정말 용기 있고 뜻깊은 일을 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연구소 회원들을 위
해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답 : 정어진 : 안녕하세요. 저는 ‘김활란 친일행적 알림팻말 세우기 프로젝트’ 기획단
장 정어진(역사교육과 2학년)입니다.
김예원 : 안녕하세요. 저는 대외협력팀장 김예원(언론홍보영상학부 2학년)이라고 합
니다.

문 : 지금 김활란 친일행적 알림팻말 세우기 프로젝트는 끝난 상태인가요?

답 : 정어진 : 일단 친일행적을 알리는 팻말을 세우기 위한 기획단이기 때문에 팻말 설치를 완료해서 일
차적으로는 끝났지만 지금은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문 : 기획단이라고 하셨는데 단원이 총 몇 명인가요? 또 어떤 방법으로 단원을 모집하게 됐나요?

답 : 정어진 : 저희는 굉장히 소규모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곱 명이에요. 처음에 프로젝트를 기획하자
고 결심한 후 단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학교 커뮤니티에 웹자보를 올렸어요. 처음에는 많은 분들
이 연락해줬어요. 첫 오리엔테이션 때 구체적인 계획서를 보여주니 너무 힘들 것 같다며 하나둘
씩 나갔고, 결국에는 소수 정예로 활동하게 됐어요. 옆에 있는 김예원 학우가 그 중 한 명이에
요. 그 전에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요.(웃음)
김예원 : 네. 저보다 제 친구들이 더 김활란에 관심을 갖고 얘기를 많이 했어요. 너희 학교는 친일
파 동상을 왜 세웠어? 언제 치워? 이런 말을 듣다보니까 저도 학교에서 왜 동상을 철거하지 않을
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안
왔어요.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정어진 학우의 계획을 보고 참여하게 됐어요.

문 : 예전부터 김활란 동상 철거 운동이 몇 차례 있었는데 팻말 설치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요.

답 : 정어진 : 학교를 다니면서 항상 김활란 동상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또 역사교육을
전공하고 있어서 그런 부분들이 더 잘 보이더라고요. 이 동상을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배들도 예전부터 김활란 동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왔어요. 그
러나 학교측에서는 늘 침묵으로 일관했죠. 어떻게 하면 학교측을 논의의 자리로 끌어낼 수 있을
까 고민했고, 시각적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이 뭘까 고심하던 끝에 생각해낸 것
이 팻말을 세우는 거였어요.

문 : 팻말을 설치하겠다고 했을 때 이화여대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답 : 김예원 : 긍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어요. 저희가 SNS와 학교 커뮤니티에 홍보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럴 때마다 학우들이 댓글을 남겨주었는데 ‘옳은 일을 하고 있다’ ‘응원한다’는 내용이 많았어요.

문 : 기획단원은 7명이라고 했는데 기사를 보니 실제 팻말을 만들 때 1,000명의 학생들이 동참했
다고 하는데요.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나요?

답 : 김예원 : 정확히 1,022명이에요.

정어진 : 기획단 참여에 조금 부담을 느낄까봐 뜻을 같이하는 학우들을 참가단으로 모집했어요.
1,000명이 1,000원씩 모아서 팻말을 만드는 거죠. 기획단끼리 몇십만 원을 모아서 할 수도 있었
는데… 어쩌면 그게 더 쉬운 방법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많은 학우들이 동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학교측에 알리고 싶어서 1,000명을 모집하게 됐어요.

문 : 중간에 팻말 설치가 연기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답 : 김예원 : 학교측에서 반대해서 늦어진 건 아니에요. 그때만 해도 학교와 대화하진 않았거든요. 팻말 제작업체와 진행하다 보니 추석 연휴가 있는 걸 생각하지 못했어요. 또 중간고사 기간이 겹치기도 해서 조금 늦어지게 됐어요. 그래서 딱 한 달 연기해서 2017년 11월 13일에 팻말 제막식을 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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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그러면 제막식 이후에 학교측과 논의하게 됐나요?

답 : 김예원 : 저희가 처음에 학교 정문에서 참가단 모집 캠페인을 진행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기자분들이 학교측에 캠페인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르는 일이다’라는 식으로 아무 대응이 없었어요. 1,000명의 참가단을 모집하고 나서 팻말 제막식이 진행된다는 기사가 나가자 학교측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연락해왔어요.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학교측이 그 자리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노골적으로 김활란의 입장을 옹호하는 거예요. ‘김활란 자서전을 읽어보라’는 둥 ‘김활란이 마음에서 우러나서 그랬겠느냐’고요. 그때 느꼈어요. 학교측은 팻말을 세우기 위해 어떤 도움도 줄 의지가 없음을 확인했죠. 제막식 전까지 팻말 설치에 대해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소용없겠다 싶어서 11월 13일 팻말 제막식 행사를 단행한 거예요.

문 : 그 후 학교 반응은 어땠나요?

답 : 정어진 : 팻말 설치 직후에는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된 상태여서 그런지 한동안은 팻말을 그대로 뒀어요. 그러나 팻말을 설치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우리에게 팻말을 자진 철거하라는 공문을 보내왔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진 철거할 수 없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죠. 그런데 어느 날 말도 없이 팻말이 사라져 버렸어요. 당사자인 저희한테 치운다는 말도 없이 학교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올려놨더라고요. 절차상의 문제로 철거하겠다고요. 그래서 항의 방문을 했어요. 최소한의 통보도 없이 철거하는 것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1,000명의 학우들의 마음을 무시하는 거라고요.
• 이화여대측은 기획처장, 학생처장 명의의 입장문을 내어 “영구 공공물의 교내 설치는 ‘건물 등의 명칭 부여에 관한 규정’이 정한 절차를 따라야 하고 학교 당국은 이를 준수하지 않은 설치물을 철거해야 한다”며 철거 사유를 밝혔다. 학교는 팻말 설치 당시 “팻말이 건축물은 아니지만, 영구적인 시설물이므로 교내 ‘건축물 명칭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이 없었으므로 불허한다”는 방침을 학생들에게 통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정어진 학생의 말대로 이화여대측은 팻말 제막식 이전에 팻말 설치를 불허하는 방침을 말해준 적도 없었고, 철거과정에서도 자진 철거하라는 공문만 달랑 보낸 것으로 보아 이 문제에 대해 학생들과 대화로 해결할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문 : 그러면 팻말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김예원 : 처음에는 학교 지하창고에 가림막이 씌워진 채 방치되어 있었어요. 지금은 저희가 찾아와서 학생문화관에 전시해놨어요.

문 : 불이익 받으신 건 없으신가요? 징계라던지…

답 : 김예원 / 정어진 : 그런 건 없었어요(웃음)

문 : 팻말에 관해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답 : 정어진 : 원래 기획단은 한 학기만 활동하기로 하고 만들어진 거였는데 일정이 길어져서 1년이나
활동했어요. 팻말을 세우고 활동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팻말이 철거되는 변수가 생기면서 쉽
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동참해준 학우들의 마음도 있고 방학 동안 재정비한 다음에 팻말 재
설치를 위해 노력할 거예요. 기존 팻말의 학교건물 순회 전시도 계획 중입니다. 학우들과 협의하
여 좀 더 나은 방안이 있는지 찾아야지요.

문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답 : 김예원 : 그동안 여러모로 도움들을 받아서 감사드릴 분이 많아요. 많은 후원과 지지를 보내준
1,022명의 이화인들에게 정말 감사하고요. 팻말 내용을 정할 때 자문해주신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인 소감은 친일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활동한건 처
음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친일청산이 이루는 게 정말 힘들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친일문제
가 앞으로도 금기시되고 잊히길 친일파들은 바랄 겁니다. 비록 뜻대로는 안 되었지만 저희들이
한 문제제기를 계기로 시민들도 친일청산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문제가 사회 이슈화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친일청산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
가 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어진 : 네.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단장으로서 소수의 기획단원들이 너무 고생
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희가 한 일이 정말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활동을 시작으로 대
학 내 친일청산을 위한 바람이 계속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해나갈 예정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목, 2018/02/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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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을 펴냈다.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는 연구소로서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오랜만에 내는 학술적 성과다. 본래 이 사전은 연구소가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사전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곧바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재정과 인력의 부족, 실천운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 상황 등으로 지연되다가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착수해 올해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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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대상은 일제가 조선 지배를 위해 설치한 통치기구 중에서 최고 권력기구인 통감부・조선총독부 본부와 소속관서들이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분석을 통해 190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40년간에 걸쳐 존속했던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는 모두 망라했다.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전체를 종합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이 사전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에 대해서는 일부 기구만이 그 실체가 드러났을 뿐, 상당수의 기구는 극히 소략한 정보만을 알 수 있거나 아예 파악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이 사전을 통해 비로소 그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총 248개(통감부 26개, 조선총독부 222개)의 기구가 수록되었으며, 각 기구 항목마다 존속기간・성격・연혁・조직과 기능・참고문헌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140여 개에 달하는 각종 조선총독부 위원회를 정리한 것은 그동안 다수 위원회가 존재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히 중요한 성과다. 위원회는 대부분 한시적으로 운영되었지만 심의・조사・자문・징계・조정 등의 기능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안 문제를 처리하거나 긴급한 정책・대책을 마련하고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 주목해야 할 연구 대상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전쟁동원에 적극 협력했던 이완용 박중양 박영효 박영철 송병준 한상룡등 ‘직업적’ 친일파들이 민간위원으로 참여한 위원회도 상당수에 달한다.
연구소는 이 사전이 일제강점기 정책사・제도사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나아가 식민통치 구조나 식민지배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사전에는 연구소가 소장한 각종 관청이나 인물 사진 등을 중심으로 다수의 희귀자료도 수록되어 있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식민지 근대화론’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일제의 식민통치기구 설치와 운영은 외형적으로 근대의 법령 체계와 관료제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상당수의 기구는 해방 이후에도 그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통치기구의 근대적 체계와 운용은 식민지 지배의 억압성과 수탈성을 은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근대화보다는 식민지 경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근대의 외피’를 둘렀을 뿐 그 본질은 식민성에 있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각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기초자료 조사와 정리가 필수적인데, 이 사전은 적어도 현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통감부・조선총독부 기구와 관련된 기초정보를 최대한 모아서 정리했다.
이번 사전 발간은 정부기관의 지원 없이 오롯이 시민의 후원만으로 이루어 낸 연구소의 공동 작업의 결실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통감부・조선총독부 기구 전반에 대한 정리는 진즉에 이루어졌어야 할 기초적인 작업이지만 자료의 정보화 없이 개인 연구자들이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연구소가 그동안 축적된 자료와 연구원들의 공동작업으로 이를 극복해 낸 것이다.
앞으로도 연구소는 실천운동뿐 아니라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전문기관으로서 일제강점기 각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기초자료 조사와 정리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 이번에 발간된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의 후속작업으로 일본군・국영기업・관변단체 등을 아우르는 식민통치기구사전도 곧 추진할 예정이다.

∷ 박수현 연구실장

목, 2017/10/1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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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부터 18일까지 박정희 신화를 소재로 한 연극 〈국부〉가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2017 시즌 프로그램으로 공연되었다. 연극 〈노란봉투〉의 전일철이 연출한 공동창작 작품으로 같은 소재로 작년에 올려진 〈해야된다〉의 후속작인 셈이다(극단 돌파구). 〈해야된다〉는 “하면 된다”는 박정희 시절 구호를 비튼 것으로 최근 검열과 블랙리스트사태에 대한 연극인들의 답변인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 프로젝트(6월~10월 대학로 연우소극장)의 참여작이기도 하다. 이 연작들은 작년 구미시가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기획한 28억짜리 뮤지컬이 계기가 되었다. 이 기획은 논란 끝에 취소되었고 이제 역설적으로 전일철의 〈국부〉가 무대를 채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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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국부〉의 포스터에는 북한 출신 작가 선무(線無, 휴전선은 없다)의 〈청소〉가 사용되었다. 하녀가 줄지어 걸린 액자들을 열심히 닦는 것처럼 무대 가득 액자의 틀이 설치되었다. 이 프레임 위를 배우들이 종횡하며 걸터앉기도 하면서 박정희로 상징되는 우상을 둘러싼 만화경이 펼쳐진다.
연극은 크게 3장으로 구성되는데 제1장에서 박정희를 경험한 사람들 그러나 찬양 일변도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간단한 박정희의 이력서를 들려준다. 그 다음엔 모세의 출애굽기를 ‘신화’의 모티브로 삼고 종장 ‘초인’에서 박정희 피살의 술판을 극화하고 있다.
나는 용케 6월 14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는데 전날 공연에서는 해프닝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이든 관객들이 대거(?) 오시는 바람에 공연관계자들을 긴장시키더니 급기야 공연 중에 퇴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고 한다. 박정희 찬양을 기대하고 온 분들은 아닌 듯하고 이게 찬양이지 뭐냐 하며 항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연극 〈국부〉는 박정희를 다루었지만 소재일 따름이지 그에 대한 복고가 아니다. 성서와 신화의 세계를 접목시키면서 발터 벤야민이 얘기한 근원적 폭력의 신성함 획득을 실감케 한다. 어느새 박정희와 겹쳐진 한국 기독교의 확산이 우리 정신세계에 여러 상징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국부〉의 제목을 일본식으로 굵직한 한자 글씨체로 무대 화면에 띄운 것은 일제 식민 유산을 연상시키도 한다. 이승만 등 면면히 이어지는 우상들의 수립과 교체과정에 대한 연작적 고찰이며 우상과 파시즘 문제를 화두로보편화시켜 보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신화 해체를 위한 설계도면처럼 구성요소들을 극적으로 나열하고 거울처럼 관객들에게 비춰주면서 아직도 그런 관념들과 판타지들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낯설고 그저 지난 시대의 낡음만을 느끼는지 확인해보시라고 제시하는 것만 같다. 종장 ‘초인’에서 나오는 피살 장면의 재구성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여러 시점들과 해석들을 드라마로 보여주고 있다.
그날 밤 등장인물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이 연극을 보고 기억하는 방식은 다 다른 모양이다. 잘못된 인과관계 파악과 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조건 반사적으로 형성된 신화들.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선택과 배제의 문제 등 논쟁적 요소들이 전문가들에겐 눈에 뜨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역사와 신화의 사이에서 역사를 하는 분들께도 연기가 가지는 성찰적 미덕을 느껴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다.
공연 후 개인적으로는 연출가, 극장장, 평론가 등과 함께 조촐한 뒤풀이 자리에서 이모 저모를 더 듣는 호사도 누렸다. 세대 차이와 역사인식, 지식과 관람의 관계, 주체성 또는 시민의식의 형성과 편파적 추모방식의 강고함의 상관 등 여러 생각들이 표출되었지만 나로선 배우들의 몸의 언어를 통한 다양함의 광경 등 볼거리와 머리에 기억해둘 만한 장면들이 무척 많았다고 생각한다. 연극소개 사이트는 http://www.nsartscenter.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111. 팸플릿에는 충북대 이성재 교수의 논고 등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 조시현 연구위원

금, 2017/07/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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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33] 일제에 끌려간 게 사람만이 아니었더라 – 이출우검역소를 거쳐 일본에 끌려간 160여 만 마리의 조선 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반도(半島, 조선)의 소는 논갈기, 밭갈기와 농사짓기에는 물론이고 일반운수용으로 혹은 피혁용, 식용으로도 그 이름이 널리 전동아(全東亞)에 떨쳐서 해마다 내지(內地, 일본)를 비롯하여 만주, 남양 방면으로 대량적으로 수이출되어 축산반도의 명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드높아가고 있다. 이에 반도에서도 전선(全鮮) 2천만 농가에 외쳐서 그동안 축우증식에 철저한 지도 장려를 거듭하여 온 결과 현재에는 175만여 두의 소가 총후농촌에서 씩씩한 식량증산의 일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농촌 노무력이 상당히 긴박한 내지의 농촌을 비롯하여 만주 방면에서는 반도의 소를 더욱 많이 보내어달라고 얼마 전 총독부에 부탁하여 왔으므로 본부 농림국에서는 금년도에는 내지에 7만 마리, 만주에 2만 5천 마리, 합계 9만 5천 마리를 수이출키로 결정하고 각도 축산과와 연락하여 전북을 제외한 12도에 각각 그 수량을 결정
한 다음 근근 일제히 현지로 보내기로 되었다. 이것으로써 반도의 소는 결전하의 식량증산과 수송전선의 씩씩한 일꾼으로 또는 피혁용, 식용으로 더욱 커다란 책무를 완수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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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2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기사를 보면, 총독부의 공식집계 이전 시기인 1907년
과 1908년에도 이미 각각 19,787마리와 18,060마리의 이출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것은 <매일신보> 1943년 4월 25일자에 수록된 「조선우(朝鮮牛) 9만 5천 두(頭), 내지와 만주 방면으로 수이출(輸移出)」 제하의 보도내용이다. 이 기사가 나온 때는 일제의 패망이 불과 2년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이를테면 식민통치기의 막바지에 이르도록 그들의 침략전쟁을 위해 사람이건 물자건 간에 닥치는 대로 총동원하는 국면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위의 기사에는 일 잘하고 죽어서까지 가죽과 고기로도 활용할 수 있는 조선소가 일본과 만주 등지로 대량반출되고 있는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소들은 통칭 ‘이출우(移出牛)’라고 하였다.
‘이출’이라는 표현은 한 나라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자가 옮겨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에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으로 간주될 뿐이라는 뜻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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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근거를 둔 일지식료회사(日支食料會社)가 배포한 1920년대 초반 무렵의 조선우 판매광고. 광고문안에 “조선우는 하루에 3반보(反步, 300평)의 밭을 갈고, 200관적(貫積)의 짐수레를 끌고, 쌀 4표(俵, 가마니)를 지고, 비료와 송아지를 생산하며, 최후에는 고기소로 하여 산 가격보다도 아주 비싸게 파는 이익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이출우의 연원이 궁금하여 몇 가지 자료를 뒤져봤더니, 쓰즈미 요시오(鼓義男)가 편찬한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朝鮮興業株式會社三十周年記念誌)>(1936), 168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흥업은 부산이출우검역소에 계류된 소들의 우사(牛舍) 및 사양관리(飼養管理)를 담당하는 회사였다.

 

대체로 조선우의 내지(內地) 수출에 관해서는 …… 근대에 있어서는 명치 17년(1883년) 오이타현(大分縣) 사람 사토 이사고로(佐藤伊佐五郞)와 시모노세키(下關)의 미치모리 만지로(道森萬次郞) 양씨가 이, 삼십 두를 부산에서 수입한 것을 효시로 한다. 그 후 청일, 러일 양전역(戰役)의 결과는 군수용 우육 공급상 내지에 있어서 축우의 감소를 가져왔고, 이것의 보충을 계기로 하여 해마다 다수의 축우가 수출되어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진출에 동반하여 당연 문제가 된 것은 우역(牛疫)의 전파와 그 예방이었다. 명치 연간 내지에 있어서 우역의 유행은 전후 11회에 이르고 그 손실은 7만 두에 달하고 있지만 그 병원지(病源地)는 항상 조선에 있었다고 칭해지고 있다. 명치 37년(1904년) 농상무성(農商務省)은 후쿠오카현 수입수역검역소(福岡縣 輸入獸疫檢疫所)를 설치하고 내지 축우의 옹호에 나
섰는데 명치 41년(1908년)에는 또 다시 2부(府) 14현(縣)에 걸쳐 우역의 대유행을 보게 됨에 따라, 마침내 한국정부에 대해 부산진(釜山鎭)에 이출우검역소의 건설을 교섭하였고 이로써 발본색원의 방책을 강구하려고 했다.

 

여길 보면 일본에서 발생한 우역의 근원지를 조선으로 지목하고, 한국정부에 대해 검역소의 설치를 요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1909년 7월 10일에 법률 제21호 「수출우검역법」과 칙령 제65호 「수출우검역소관제」가 제정 공포되었는데, 이 당시는 아직 대한제국의 실체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의당 ‘이출’이 아닌 ‘수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동래부 용주면 우암동(慶尙南道 東萊府 龍珠面 牛巖洞)에 수출우검역소가 처음 설치되어, 이곳에서 우역, 탄저, 유행성아구창(流行性鵝口瘡, 구제역)에 대한 검역을 실시할 목적으로 9일간 계류검사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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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뉴얼리포트(1908~1909)>에 수록된 부산 우암동 소재 ‘수출우검역소(1909년 개설)’의 전경. 이곳은 경술국치 이후 ‘이출우검역소’로 이름만 변경된 채 그대로 사용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는 이출우검역소로 명칭이 변경되는 한편 부산세관(釜山稅關)에 부속된 기구로 변했다가 1912년 3월에 총독부경찰관서관제의 개정에 따라 위생관련업무 일체가 경찰사무로 귀속되면서 이곳은 다시 경무총감부 위생과의 소관 기구로 바뀌기에 이른다. 곧이어 1919년 8월에는 경찰관서관제의 폐지와 더불어 도지사(道知事)의 소관에 속하는 검역기구로 전환되었다.
그 사이에 1915년에 제정된 「수역예방령(獸疫豫防令)」과 「이출우검역규칙」에 따라 이출우에 대한 검역이 점차 강화되어 부산항은 물론이고 마산항, 원산항, 성진항, 행암만(行巖灣, 진해), 청진항, 웅기항 등지로 검역대상항구가 계속 확장되었다. 특히 1925년 8월에는 총독부령으로 「축우(畜牛)의 이출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수역예방령 제13조의 규정에 의해 행하는 검역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면 이를 이출할 수 없다”고 정하는 한편 「이출우검역규칙」도 전면 개정하여 “경기도 인천항, 경상남도 부산항, 평안남도 진남포항, 함경남도 원산항 및 함경북도 성진항에서 의무적으로 이뤄지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부산이출우검역소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의 항구에는 해당 이출우검역소가 신설된 바 있다. 그 후 1937년 11월에 이르러 경상북도 포항항에도 이출우검역소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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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설치되었다가 1943년에 폐쇄된 인천이출우검역소(인천 항동 소재)의 전경. <일본제국가축전염병 예방사>, 1938.

 

이출우검역소의 개설 및 폐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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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출우검역소의 제도가 다시 한 번 크게 변경된 때는 1943년 7월이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결전식량증산(決戰食糧增産)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이출우가 격증함에 따라 검역의 철저를 기하는 동시에 여러 항구에 흩어져 있는 각 검역소를 통합 정리하기 위해 종래 도지사 소관이던 부산, 진남포, 원산 등 세 곳은 총독부 직할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나머지 검역소는 일괄 폐지하였다. 또한 종래의 이출우 검역사무에 더하여 황해도 신계군과 장연군에 각각 모리나가제과(森永製菓)와 메이지제과(明治製菓)의 목장을 설치하고 1944년부터 100마리씩의 젖소를 이식함과 동시에 연유, 분유, 버터 등을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는 등 조선에서 낙농사업(酪農事業)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에 따라 일본에서 이입되는 유우(乳牛, 젖소)에 대한 결핵병검사도 이곳에서 수행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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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통해 수송된 이출우들이 부산진역에서 하역되고 있는 모습.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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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재능력 500두에 달하는 이출우 수송전용선 닛쵸마루(日朝丸)의 모습. 부산에서 시모노세키 후쿠우라(下關 福浦)까지 불과 13시간이면 도착하며, 이곳에 도착한 이출우는 다시 5일간의 검역을 거친
이후 일본 전역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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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에 수록된 ‘조선우 집산계통 약도’이다. 여기에는 조선 각지에서 수집된 소들이 각 항구를 통해 일본 또는 만주로 빠져나간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와 함께 「조선가축전염병예방령」의 개정을 통해 우역(牛疫), 탄저(炭疽), 기종저(氣腫疽), 우폐역(牛肺疫), 구제역(口蹄疫), 비저(鼻疽), 양두(羊痘), 돈콜레라(豚コレラ), 돈역(豚疫), 돈단독(豚丹毒), 광견병(狂犬病), 가금콜레라(家禽コレラ) 등 12종이었던 법정가축 전염병의 종류에 우(牛)의 야수역(野獸疫), 가성피저(假性皮疽), 마(馬)의 전염성빈혈(傳染性貧血), 가금페스트(家禽ペスト) 등 4종이
추가되었고, 종래 도지사에게만 속했던 가축전염병예방에 관한 처분권한을 이출우검역소장에게도 부여하는 내용이 신설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출우검역소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소는 과연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조선총독부가 해마다 펴낸 <조선가축위생통계>에 따르면 1909년 이후 1942년에 이르는 기간에 무려 147만 여 마리가 이출되었으며, 그 가운데 부산항을 통해 빠져나간 것만 100만 마리에 달할 정도로 이 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수치에서 빠진 1943년 이후에도 해마다 최소 7만 마리 정도가 일본으로 유출되었으므로 이를 추계하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출우의 총규모는 160만 마리를 상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은 분야가 어디 한 둘이랴마는 이렇듯 이 땅의 소들에게도 수탈의 손길이 비껴나지 않았음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대개 뼈 빠지게 일만 하고 결국 한 줌의 고기소가 되어 사라졌을 테지만, 이 대목에서 불현듯 일본 땅 어디에 조선소의 혈통을 이은 후손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그 현황이 자꾸 궁금해진다.

금, 2018/02/2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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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


안녕하십니까?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적폐 청산을 위해 달려온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저는 항상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원 여러분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무겁지만 행복한 소임을 제게 맡겨 주셨으니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팔십 평생 마지막 역사적 소명으로 생각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고대하며 하루하루 결의를 다집니다.

오늘도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일본은 아베 총리 집권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일본군‘위안부’와 독도 문제뿐 아니라 일제 침략사 전체를 왜곡하거나 삭제, 미화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잔재들이 다시 부활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오도하고 있는 꼴입니다. 주변국인 중국도 1990년대부터 이른바 ‘동북역사공정’을 내걸고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억지를 부려왔습니다. 이는 단지 고대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남북통일 문제에도 중요한 논란거리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난 보수정권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이를 국정교과서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역사도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청산했지만 우리에게는 친일의 잔재와 반민주적인 행태 등 뿌리 뽑아야 할 적폐가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 친일청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대중들에게 깊이 이해시킬 수 있을지 더 고민하고 더 실천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크고 좋은 박물관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국민성금으로 조성된 독립기념관에 가보면 수장고에 많은 자료들을 수집해 놓았습니다. 드넓은 야외 공간에 각종 기념 조형물도 많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강조하다 보니 ‘식민지’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부족하고 대중들에게 식민지 시대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퇴임 직전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전시하면서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우다 보니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하게 다루었습니다. 역사 인식의 시대적 한계와 동시에 박물관이 권력의 정치 선전장으로 전락하기 쉬운 공간이라는 위험성을 이런 국립박물관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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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위험성들을 반성하며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회원들의 기증과 소중한 회비로 모은 자료가 7만여 점이나 됩니다. 3‧1독립선언서 등 국내 몇 점뿐인 희귀본도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직접 보았던 무운장구 어깨띠, ‘진충보국(盡忠報國)’ 이런 것들을 써놓은 일장기, 공출로 뺏긴 놋그릇 대신 받았던 사기그릇도 있습니다. 내 동무의 형뻘 되는 분들이 징용‧징병에 끌려갔고, 이웃마을 사는 누이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모습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들이 사지로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저는 어른들을 따라 나가서 박수를 쳤었습니다. 새삼 어릴 때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자료들은 일제 식민 잔재가 얼마나 오랜 기간 해를 끼쳐왔는지를 제대로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 식민 지배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반성하고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역사의 힘을 찾아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자료 전시만이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도 시민에게 현장을 가본 듯한 실감나는 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세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 인권박물관 등과도 교류의 폭을 넓히고 특히 일본의 건강한 시민들과 연대하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함께 실천해 나가는 세계 시민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리라 희망합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우리의 이런 문제의식에 뜻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만들어 모금도 하고 자료도 수집해 기증해 주고 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가교로 삼아 과거 침략과 지배, 갈등의 역사가 아닌 인권, 평화, 미래를 여는 연대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데 이게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취지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든든한 터전으로 가꾸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온갖 어려움과 협박을 뚫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냈고, 한국 사회에 정의의 이정표를 세웠던 경험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 이상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미래 자손들에게 민족의 유산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남길 수 있도록 많은 회원 여러분과 시민들이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행히도 그동안 우리가 모금활동을 벌이는 데 많은 시민들이 몇 만원부터 몇 억까지 십시일반 동참해 주시고 있습니다. 기금만이 아니라 자료 기증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평생 역사를 공부하면서 모은 자료들을 여기에 다 내놓으려고 합니다. 자료는 쌓여가지만 장소가 좁네요. 실감나는 교육의 현장으로 꾸미려니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국고를 하나도 받지 않고 순수한 시민의 모금으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도 목표액이 많이 모자랍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꼭 큰돈을 기부해야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설렁탕 한 그릇 값이라도 모아주신다면 그 정신 올곧게 이어서 박물관 건립을 끝까지 추진하는 큰 용기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현실과 맞지 않는 막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 문제이자, 통일의 문제, 미래의 민주주의 확대와 인권의 문제라고 이해하시면서 여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월, 2017/08/2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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