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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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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admin | 목, 2021/03/25- 20:07

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박광종 선임연구원

KBS는 지난 3·1절 저녁 9시 뉴스에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KBS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가 1921년 6월에 작성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 철에서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하고, 1920년 간도참변 당시 한국인 경찰들이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 일제의 만행에 적극 가담
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KBS가 입수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는 <응원경찰관 공적조서>(재간도일본영사관), <간도사건 공적명세서> (두도구분관과 용정촌총영사관), <간도사건 공적조사서>(국자가분관) 등 4종류, 600여 쪽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중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서’가 상세하게 담겨있다. 이 문서들은 간도참변을 지휘한 일본군 부대장들이 ‘토벌’에 참여했던 일제 경찰(한국인·일본인)들에 대한 공적서를 작성하고, 간도총영사관이 이 공적서를 취합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것이다. 연구소는 각종 사료(자료)를 조사해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 소속 순사로 간도로 파견된 ‘응원 경찰’ 9명이 일제로부터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48명 중 간도참변 당시 간도총영사관경찰서에 근무하던 일본 외무성 경부 2명(현시달·김
영규)은 이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이외 종군기장을 받은 ‘응원경찰’ 9명을 포함해 46명이 독립운동(가)을 탄압한 사실이 자료를 통해 확인된 만큼 추가 행적 조사가 필요하다. 예컨대 연구소가 소장한 다른 자료에서 간도참변 당시 일본 외무성 경부보(간도총영사관경찰서)였던 최태욱이 1926년 1월 당시 경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태욱은 간도참변에 앞장 서 공적서에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연구소는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48명에 대한 행적을 철저히 조사해 이들 중 친 일·반민족행위가 명백하고 선정기준에 부합한 경우 향후 발간할 <친일인명사전> 증보판에 수록할 예정이다. 한편 연구소는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보고>에서 한국인 경찰들이 체포에 앞장 선 독립운동가 중에 이미 서훈이 추서된 독립유공자를 일부 확인하였다. 또한 이들 외에 확인된 다수의 한국인 사상자(死傷者)와 피체자(被逮者)와 관련한 독립운동 행적을 추가 조사해 KBS와 공동으로 서훈을 요청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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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

19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독재와 억압, 불의와 부정의 토대인 친일을 청산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70년 넘게 채워진 질곡의 사슬을 풀고 민주와 정의, 화합과 평등이 넘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만들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친미독재,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자비한 군사독재, 그리고 이들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권력을 이어받고자 했던 이명박과 박근혜의 국민분열, 친일반역, 국정농단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의 비열한 통치와 압제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체제가 반복되어 온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세력들의 인적, 제도적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와 친일, 그 뿌리 깊은 잔재는 오늘날 정치, 사회, 학문, 자본, 언론, 예술 등 모든 곳곳, 요소요소에 악의 고리로 남아있다.
1919년 3·1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은 모두 ‘친일세력의 근원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최후의 정점에 이승만을 몰아낸 민주혁명의 힘이 박근혜를 권력에서 끌어내린 촛불혁명으로 타올랐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보다 일제에 빌붙어 수족행위를 하고 나팔수 노릇을 한 친일파가 더욱 악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친일파들은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재산을 탈취하고, 항일투사들을 잡아들이고 살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학도병, 강제징병, 강제징용, 위안부 모집의 선동대가 되는 온갖 악행을 도맡아 저질렀다.
1948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구체적인 죄목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하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에 조인하거나 모의한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하거나 지휘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간부, 칙임관 이상 관리, 밀정, 독립운동 방해단체 간부, 군경찰 간부, 군수공업 경영자, 관리 중 악질적 죄질이 현저한 자, 도(道)나 부(府)의 자문기관 또는 의결기관 의원 중 현저한 반민족 행위자, 종교 사회 문화 경제 등 각 부문에서 반민족적 행위자,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 위해(危害)를 가한 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급 이상 관공리, 헌병, 경찰, 헌병보, 고등경찰 등이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방해로 인하여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친일파는 단 한 명도 단죄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살아남은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더욱 승승장구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치하에서도 그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했다. 나라의 권력은 오로지 친일파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후광을 입은 그들의 후손들도 역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현재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다.
문단을 예로 들어보자. ????친일인명사전????(2009)에 오른 친일문인은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용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등 무려 40인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미당 서정주는 가장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문인이다. 서정주야말로 친일에서부터 친독재까지 철저한 권력의 시녀였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문단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은’ 그는 대학강단에서, 문단에서, 관계에서, 수없이 많은 제자들을 키우고 또 그 제자들은 그를 스승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시인으로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였던 서정주는 죽어서도 그 권력을 문단의 후학들에게 그대로 넘겼다.
반민족적, 반문학적 친일의 과오가 명백한 그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이 만들어지고, 바로 그 문학상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증거한다. 이런 기이함은 미당 서정주를 ‘국민시인’, ‘민족시인’으로 칭송한다. 심지어는 올해 여름에 발간한 미당전집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은 미당을 ‘민중시인’이라고까지 말했다. 북한의 3대 세습 정권에서도 있을 수 없는 망언이었다.
미당은 1942년 7월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문학 작품을 썼다. 이미 여러 경로로 밝혀진 바와 같이 친일어용문학지인 ????국민시가????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들을 양산했다.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징병의 신성화와 정당화는 물론 학병지원을 권유했으며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적극 동조했다.

미당이 남긴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인지 그 평가는 차치하고, 그는 민족의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를 문학상 등으로 기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지어낸 천여 편의 시들도 ‘겨레의 말’이 아니라 일종의 기가 막힌 언어도단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류의 도덕적 보편성과 정의를 따르고자 하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미당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인간 본연의 품성이 그릇된 자였다. 그릇됨을 덮고 가치관마저 전도시키는 그의 문학은 우리 모두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원숭이가 손목이 잘려도 바나나를 놓지 않듯, 권력도 움켜쥔 힘을 쉽사리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반성과 성찰을 바라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사회권력과 관료권력, 종교권력과 문화권력 등이 그러하듯이 문학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은 물러났어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승계되고 이어가고 있다. 지배권력은 다른 피지배세력이 그들의 권력을 쟁취하기 전까지 유구한 것이다.
미당이 생전에 지닌 문단권력은 현재 그의 추종세력들에게 전이되었다. 추종자들에게는 미당의 매국적인 친일문학 행위도, 군부독재를 찬양한 행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점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미당문학상으로 미화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 그의 행적을 문인이 아니고 정치인에 대입시켜보면 참으로 소름끼치는 존재다. 그럼에도 미당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무리들이 미당을 기리는 것은 미당이 건재해야만 자신들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당문학상에 대한 비판 또는 폐지의 주장은 고사하고 그 상을 심사하고 수상하는 사람들이 우선 자기 검열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에게도 있을 터이다.
동서고금의 예술을 살펴보면, 정치권력과 결합한 예술은 차후에 거의 모든 평가가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대다수 예술에 대한 평가는 당대가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예술 등은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를 넘겨 한 세기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친일세력들의 영향력과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독립은 했으나 아직도 정신적 독립은 온전하게 하지 못한 결과다.
완전한 독립, 그리고 온전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이 득실거리는 시대, 누군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의의 역사를 모른 체 하면 대대손손 청사에 물려줄 정의의 역사는 사라진다.

편집자주 시인 정세훈은 1955년 충남 홍성 출생으로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작품에는 시집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과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등이 있고 현재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 한국작가회의 이사, 한국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목, 2017/11/1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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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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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용산’ 종점과 ‘신용산’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경성번창기 』,1915)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방(坊)’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1899년 12월 ‘용산행’ 전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新龍山)’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용산정거장’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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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 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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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 『조선사단창설기념호(조선사진화보특별호)』,1916년11월

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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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소화8년조선요람』,1932)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

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시베리아출병’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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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출정’과 ‘귀환’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장차 ‘용산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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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

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한강’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삼각지(三角地)’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연병정(練兵町)’은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

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월, 2017/08/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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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이 특사에게 위임장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The Independent> 1907년 8월 22일자(주간, 제3064호), 「A Plea for Korea(By Prince Ye We
Chong)」에 이위종이 쓴 호소문과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임장의 사본 및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1907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고 적혀 있다. 연구소가 소장한 ‘위임장’은 ????The Independent????에 소개된 것을 해방 이후 복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특사는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에게 탄원서를 배포하였으며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한국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당시 국제관계를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을 ‘을사조약’ 위반행위로 몰아 7월 22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이위종 두 특사는 망명했다. 그들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대한제국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위임장

대황제가 칙서를 내리는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한 것으로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국가 간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또한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의 의도는 인도자의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여기 종2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수결 황제어새

 

∷ 강동민 자료팀장

금, 2017/07/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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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선임연구원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한 번 맑아지고 땅이 한 번 편안해지매 통서(統緖)를 전하는 데에서 보록(寶籙)을 넓어지게 하였고, 별이 다시 빛나고 바다가 다시 넘실대매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데에서 영전(令典)을 송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업이 한이 없게 되었고, 척의(尺依)는 점차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천황 폐하께서는, 상제(上帝)께 밝게 받아서 후인들을 열어주셨습니다. 뇌사(雷肆:書筵)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림에 용안(龍顔)에는 기쁜 빛이 돌고 진저(震邸)에서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하는 칭송이 퍼짐에 따라 인지(麟趾) 역시 어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억만년토록 태평을 누릴 아름다움에 응하였기에, 바야흐로 황태자를 미리 세우는 예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자질은 공자의 학문을 세우는 데 부끄러우나, 정성은 요(堯)임금이 되기를 축원하는 데 간절합니다. 사해에서 구가(謳歌)의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만리 밖까지 덕스러운 교화가 퍼짐에 모두들 성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정 5년(1916년-필자) 11월 3일에 조선총독부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 신(臣) 이인직(李人稙)은 지어서 올립니다.

14<경학원잡지>제12호에당시경학원사성이었던이인직이일본태자(뒤에 쇼와천황)를 세우는 예식의 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으로 쓴 글의 일부입니다.
대단하지요. 이인직이 신소설의 개척자지만 그 글의 문학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이 문장은 그가 가장 ‘빛나는’ 글을 쓸 때가 언제인지를 알려줍니다. 그의 지향과 정체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을 쓸 때입니다.

 

숨겨진 행적
최초의 신소설<혈의누(血의淚)>로잘 알려진국초(菊初)이인직(李人稙)은1862년에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한산(韓山) 이씨 양경공파(良景公派) 25세손으로 이윤기(李胤耆)와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5살 때 1866년 생부 윤기가, 18살 때인 1897년엔 생모 전주 이씨가 각각 사망합니다. 그리고 9살 때 3대조 면채(冕采)의 손자인 은기(殷耆)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외 이인직에 대한 기록은 38살인 1900년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900년 관비유학이라는 공식적인 기록이 나타나기까지 이전 행적은 찾기 힘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행적은 38살부터 55살까지 16년간의 기록입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인직이 을미사변과 관련해서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전문 외교관 출신으로 통감부와 총독부의 초대 외사국장을 역임한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회고록(<明治外交秘話>,東京千倉書房,1936)에서이인직을조중응(趙重應)과함께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서 과외생(課外生)으로 자신의 강의를 들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중응은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으로 일제하 자작, 중추원 고문을 지낸 대표적 친일파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을미사변 후 법부 형사국장으로 명성황후의 폐비 조치를 강행하는 등 사후처리를 담당했습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1906년에 사면되어 귀국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는 아관파천으로 망명한 한국인들을 을미망명자(乙未亡命者)로 분류했으며 그 인원은 31명인데, 그 명단 중 이인직의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마쓰의 지위나 명망을 생각하면 그의 회고를 허위나 거짓으로 보기에 힘듭니다. 더불어 김기장(金基璋)의 증언까지 고려하면 이인직이 조중응과 일본 망명 생활을 함께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김기장의 경우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동경전문학교(현 와세다 대학)를 졸업하고 주일 공사관 참서관, 경리원 감독을 역임했던 자로 조중응의 일본 망명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는데, 그는 “조중응과 이인직은 일본에 재류할 때부터 거의 주종과 같은 관계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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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웅

 

아마 이인직은 조중응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인직이 일본으로 함께 망명한 것은 을미사변이나 김홍집 내각 하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서 피신했다기보다 정황상 함께 동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고서는 망명자가 귀국하여 관비 유학생 자격을 얻은 다음 1900년에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동경정치학교와 이인직

국비 유학생으로 이인직은 1900년 9월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 정식 입학합니다. 최소한 이인직의 자필이력서에 그렇게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동경정치학교가 이인직의 사상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근래 연구 성과는 이마저도 의구심이 들게 만듭니다.
동경정치학교(이하 정치학교)는 마쓰모토 쿤페이(松本君平)가 1898년 10월 ‘고등문관, 의회의원, 외교신문기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입니다. 3년제이며 17세 이상의 남자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교육을 통해 전문적 지식을 가진 정치가나 신문기자 등의 양성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고마쓰는 위 회고록에서 이인직과 조중응이 과외생으로 자신이 그 학교에서 강의했던 열국정치제도(列國政治制度)를 강습(講習)한 제자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인직이 관비 유학생 시절인 1900~1903년 사이 고마쓰는 정치학교에서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관비 유학생 이전 일본 체류 시기에 일종의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고마쓰의 기록 외에 다른 증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의문을 갖게 하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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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 미도리의 <명치외교비화>

우선 정치학교는 제대로 운영된 적이 별로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경부통계서>에 의하면 학교규모는개교 당시 1898년 강사 40명, 학생 97명, 1901년 강사 10명, 학생 120명, 1902년 강사 10명, 학생 13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강사 수가 급격히 줄었을 뿐만 아니라 1899년과 1900년 2년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2년간의 공백은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사실상 휴교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정치학교는 1903년 9월 경영부진으로 폐교됩니다.
실제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의 회고를 통해 본 정치학교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정치학교는 사루가쿠초 변에 있는 중학교의 낡은 교실을 빌려 개교했지만 수업이 시작되고 보니 학교라기보다는 고작 강습회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중략) 2, 3개월 채 되지 않아 점차 출석률이 나빠졌다. 학생의 출석이 아니라 선생님의 출석이었다.(중략) 나도 포기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山川均, <日本人の自伝>,平凡社,1982)

 

그러면 1900년 9월 정치학교에 입학해서 1903년 7월 졸업했다는 이인직의 이력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입학과 졸업 자체가 사실인지도 불투명해집니다. 이인직의 행적은 이토록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활자로 조합된 그의 글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 줍니다.

봉건주의에 대한 혐오

이인직은 1901년 한국공사관의 추천으로 일본 <미야꼬신문(都新聞)>에견습으로들어갑니다. 그는 미야꼬신문에 1901년부터 1904년까지 8개의 논설문을 게재했는데 그의 사상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팔베개를 하고서 사십성상(四十星霜) 동안 참으로 잘 잤다. 곁에서 잠꼬대를 하는 자는 우리 이천만 동포다. (「入社說」, <都新聞>,1901.11.29.)

 

이인직은 당시의 조선을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어찌 깨어났지만 아직 이천만 동포는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잠꼬대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서 동포를 깨우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인직에게 있어 조선이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꾸고 있는 꿈은 ‘봉건적 유습’입니다. 이후에 발표된 「몽중방어(夢中放語)」(<都新聞>,1901.12.18.)에서도당대주요국의상황을꿈으로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한국과 중국을 제외하고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 확대를 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깨어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미 이인직이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던 점은 후술하고, 그는 일관되게 봉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인직은 조선을 미개화 상태, 봉건적 유습이 지배하는 야만의 상태로 파악했기 때문에 일단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봉건적인 유습을 혁파해야만 했고, 그것이 이른바 ‘계몽주의’로 이어집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인직은 마치 봉건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진보적인 개화자강 운동가로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비롯해 구한말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 중 꽤 많은 숫자가 친일파가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타파하고자 했던 봉건 유생이 ‘의병’을 결성하여 일제에 항거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이렇듯 순식간에 바뀌어버립니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대단히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목, 2017/11/1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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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방송기자연합회 회장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방송기자연합회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답 : 지난 1월 30일에 방송기자연합회 10대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단체는 공중파 3사가 중심이 되어서 10년 전인 2008년에 만들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한국기자협회가 신문과 인터넷 매체, 활자 매체 위주로 돌아가는 반면에 방송기자연합회는 취재 이후에 제작 부담이 많은 방송기자들의 특수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기자는 출입처에서 퇴근해서 다시 방송사에 출근해 오디오를 읽고 영상을 편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KBS, MBC, SBS, YTN, MBN, OBS을 위시해서 케이블 뉴스 전문방송과 지역 공중파와 지역 민방을 포함한 59개의 방송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편 3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방송사가 가입해 있습니다. 현재 회원 수는 약 3천 명 정도입니다.

문 : 방송기자연합회는 어떤 일을 하나요?

답 : 방송기자연합회의 역할은 첫 번째가 특종상 시상, 두 번째가 기자 재교육, 세 번째가 방송보도 관련 연구, 네 번째가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 등 대외협력활동입니다.
첫 번째 특종상은 매달 이달의 방송기자상을 수여합니다. 5개 분야, 뉴스, 기획보도, 지역뉴스 등 5개가 있는데 이번에는 영상뉴스와 경제 분야를 추가해서 7개 부분에 대해서 수상자를 선정해서 상금과 상패를 줍니다. 한국방송학회 회장 등 교수님들과 공중파 3사와 YTN 등의 고참 기자들이 엄격하게 심사해서 월말에 시상합니다. 매년 1월에는 그해의 최고상인 ‘올해의 방송기자상’을 시상합니다.
어찌 보면 두 번째 재교육이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형사소송법도 알아야 되고요, 언론중재위에 갔을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지, 또 새로운 트렌드에 맞춰서 빅데이터 마이닝은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 팩트체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의 재교육을 국내와 국외에서 진행합니다. 해외 유명한 언론 학자나 기자들을 초빙해서 재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연구기능입니다.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 보도에서처럼 오보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살펴봐야 했습니다. 또 한국 뉴스의 문제들과 개선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자들과 교수들이 저널리즘 아카데미팀을 구성해서 여러 연구들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끝으로 대외협력입니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등 참여합니다. 또 방송기자들이 출입정지등의 불이익을 당했다든가 어떤 특정사가 파업을 하거나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고 하면, 방송기자들의 입장을 정리해서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문 : 지난 9년 동안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권 시기 언론에서 억압적인 관행이 굉장히 크지 않았습니까? 방송기자연합회도 상당한 시련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요.

답 : 좀 전에 말씀드린 방송기자연합회에서는 재교육, 해외 연수를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국의 기자들이 보도국에서 쫓겨나는 일이 모 방송사에서는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방송사에서는 방송기자연합회에 더 이상 상근자를 보내지 않겠다, 연합회 회장이 인사를 와도 몇 년 동안 만나주지 않는 그런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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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일종의 성명서 같은 것을 발표하는 일도 많았죠?

답 :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도 자유한국당이 MBN 기자들을 출입정지 했을 때라거나 YTN 기자들이 또다시 파업에 들어갔을 때에도 저희들이 가장 앞장서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문 : 과거에 방송노조가 파업했을 때 지지성명 같은 것도 내고요.

답 : 지지성명은 일반적으로 내왔습니다. 돕지 못했던 때도 잠시 있었지만 지금 상황이 바뀌었죠.

문 : 달라진 환경이더라도 새롭게 회장에 취임했으니까 특별히 마음에 들고, 이것만 꼭 해보겠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겠다 이런 건 없나요?

답 : 사실 제가 연합회에서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인터뷰를 통해서 제 속내를 좀 드러내자면, 저는 만주에 있는 중국의 동북 3성에서 한국어로 방송하는, 조선말로 방송하는 방송기자들과의 연대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연합회의 이름 앞에 ‘한국’이 붙어있지 않은 것에도 선배들의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큰 시야를 가지고 회장직을 잘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서 기자생활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답 : 1994년에 YTN 공채 2기로 입사해서 정치부, 사회부, 기획부를 거쳤습니다. 2001년 MBC 경력공채로 입사합니다. YTN와 MBC 양대 방송사와 기자들에 대해 소상히 아는 편이죠.

문 : 방송기자가 된 동기는?

답 : 1987년 6월항쟁 때 서울대 2학년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에 분개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현장이 텔레비전 뉴스시간에 중계되었는데 각종 구호소리와 운동가요 등 생생한 현장음과 시민들의 인터뷰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박종철의 고문치사 기사가 일간지에 실리고, 그 후폭풍으로 견고했던 독재 아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TV뉴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방송기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문 : 25년간 수많은 기사를 작성했을 텐데 어떤 기사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고, 또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답 : 앞에서 말했듯이 2001년 경력 기자로 MBC에 입사해 통일외교부로 발령났습니다. 그해 10월경 일본은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테러지역에 일본자위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저희 통일외교부는 자위대 해외파병 결정과 관련한 기획기사를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10월 30일부터 11월초까지 테러특별법 통과에 비추어본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신사 참배, 일본군국주의 부활, 한국에 진출한 일본 만화와 게임 등 대중문화에 파고든 군국주의의 모습을 부각시킨 ‘독도는 일본땅’ 그리고 ‘역사연구단체, 친일인명사전 편찬 추진’ 등을 연이어 방송에 내보내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보도가 나간 지 한 달 뒤 국회예결위는 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2억 8,000만 원의 정부예산을 지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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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2001년 11월경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데이터 구축사업인 ‘일제식민통치기구•협력단체편람-국내편’의 국고(민간경상보조금) 지원을 요청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안 기자님의 취재 덕택에 국회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돈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마중물이었던 셈입니다. 그 다음 기억에 남은 기사는 어떤 게 있나요?

답 : 검찰청 출입기자 때 특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인데 현직 대통령 아들의 금품수수 의혹과 관련한 압수수색 영장을 확보해 단독 보도한 것입니다. 또 휴대폰 통신요금 인하를 촉구하는 리포트를 40여 차례 방송했고, 2001년 9.11 테러 현장 취재와 2003년 이라크전쟁 종군 취재가 기억납니다.
2003년 7월에는 현대가 건넨 150억 원의 비자금을 박지원 씨의 측근인 김영완 씨가 세탁한 과정을 보도하여 정치권에 큰 파문을 일으켰죠. 이 보도로 저를 비롯한 MBC 보도국 기자들이 제154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문 :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MBC의 풍토는 어땠나요?

답 : 이명박 정권 3년차인 2009년 11월경 제가 일하던 시사교양프로그램 ‘뉴스후’가 폐지되었습니다. ‘뉴스후’에서는 MB가 다니던 교회를 비판한 ‘세금 내지 않는 사람들’, 4대강 정비사업 등 국정과제 아이템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런 뉴스들이 고위 임원들에 의해 커트당하다가 결국 프로그램 자체가 폐지되고 맙니다. 회사측은 주요 뉴스 앵커나 보직(정치・경제부장), 해외연수를 내걸고 기자들을 회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인사권으로 기자들과 거래하는 거죠.

회사측은 이런 당근 정책뿐 아니라 채찍도 휘두릅니다. 2012년 MBC 170일 파업 때입니다. 강지웅 박성제 박성호 이용마 정영하 최승호 등 파업 주동자들을 해직하고 120여 명의 파업 참여자들을 정직시켰습니다. 특히 정직된 사람들에게는 정직 기간이 끝난 뒤에도 김재철 사장의 지시로 3~9개월 간의 교육명령을 떨어졌어요. 서울 송파구 신천역에 위치한 ‘MBC 아카데미’에서 브런치나 와인 감별 등 기사작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양교육을 받았던 거죠. 교육생들은 그곳을 ‘신천교육대’ 혹은 ‘김재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불렀습니다. 이 교육을 마치고 나서도 보도국 사람들은 경인지사나 사업부서 등으로 발령하여 방송보도 제작과 철저히 격리시켰습니다.
저도 신천교육대 과정을 마치고나서 라디오뉴스를 잠시 편집하다가 MBC 경영부서의 하나인 아카이브 사업부로 배치되었습니다. 방송영상 도서관으로 영상과 오디오 자료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녹음테이프에 라벨을 붙이는 것이 주요 업무여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송보도를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내가 기자 맞나 하는 자괴감이 몹시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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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방송정상화투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 2012년 파업 때 7개월 동안 집에다 월급을 주지 못했어요. 회사측이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한 거죠. 제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는데 그때 마침 초등학교 6학년 졸업반이었어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데 경비가 100만원이었어요. 몇 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한 터라 끼니나 겨우 해결하는 형편인데… 그런 거금을 마련하기가 까마득했습니다. 어찌어찌 그 돈을 마련해서 수학여행을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문 : 오랜 투쟁 기간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버티게 해준 선배나 스승이 있다면?

답 : 경복고와 서울대 3년 선배인 김세진 열사입니다. 1986년 전방 입소 거부와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며 분신하기 바로 전인 4월 18일, 김 선배를 4.19기념식장에서 만났습니다. 항상 정의롭게 살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제가 힘들고 좌절에 빠질 때마다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저의 사표입니다.

문 : MBC의 앞으로 과제는?

답 : 작년 12월 최승호 PD가 MBC 사장으로 취임하여 해직자의 즉각 복직을 공표한 것에서 보듯이 MBC가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단 하드웨어적인 틀은 갖추었으나 소프트웨어적으로 개선이 필요합니다. 최근 들어 시청률도 완만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의 제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럼 정상화가 더욱 빨라질 수 있습니다

문 : 방송정상화 투쟁과 관계된 책을 집필중이라 들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답 : 이제까지 한 인터뷰와 비슷한 내용의 소설입니다. 뉴스후 폐지 사태를 겪고 나서 이것을 소설로 쓰면 되겠다 싶어 시작했습니다. ‘촛불혁명’을 비유한 일종의 팩트소설이죠. 3선 국회의원인 여성정치인이 대권을 노리고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는 가운데, 기자들이 맞서서 그녀의 출산의혹과 해외원정 성매매 의혹을 파헤친다는 내용입니다. 참, 소설에서는 3선 의원 조부의 친일행각도 드러나는데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개정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밝혀진다는 구성입니다. 며칠 전에 에필로그를 탈고했습니다. 조만간 서점에서 ‘딥뉴스’라는 제목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답 : 2001년 청량리 금은빌딩 3층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해 취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7년이 되었네요. 그때는 10평도 안 되는 허름한 사무실이었는데 용산의 연구소로 와보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연구소 이전을 축하드립니다. 5월에 개관할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 기금으로 제 소설의 인세를 일부 기증하고 싶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 중 53%가 중국동포(조선족)이라 합니다. 이렇듯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역할이 강화되고 우리나라의 외교・통일정책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봅니다. 제가 아는 동년배 중국동포는 중국의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공무원으로 있는 분인데 한국의 중국동포 하대 경향에 매우 분개합니다. 연구소에서도 시야를 넓혀 해외동포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월, 2018/03/2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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