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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농사는 누가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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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농사는 누가 지을까?

admin | 목, 2021/03/04- 19:02

우리나라 농산물 자급율이 43% 정도 된다고 하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43%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맞는 말이지만 따져 보면 우리 농산물이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종자의 대부분은 수입하고 있다. 이를 심기위해 밭을 만들어야 하는데 농기계는 수입 석유로 가동한다. 결정적인 건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손인데 국내 농업노동 자원이 점점 고령화되고 부족해지면서 외국인 노동자 의존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조수익(농산물 총 매출액)에서 생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올라가 60%를 상회하는 수준이 되었다. 만원어치 팔면 6천원은 농지 임차료, 농기계값 상환, 농기계 임차료, 농업노임, 종자대, 비료값, 시설비, 기타 경영비 등으로 들어가고 농민들 손에 들어오는 농업소득은 4천원이 채 안되는 수준. 1년에 1억 매출을 올리는 농민들은 말이 ‘억대 농부’이지 실상 농업 소득은 4천만원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농민들은 비닐 하우스 등 시설을 늘리거나 소득이 높은 인삼이나 과일 농사 혹은 축산으로 전환하며 규모를 늘린다. 시설이든 농지 면적이든 규모를 늘리면 혼자 감당할 수 없고 마을에서도 품을 구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노동력을 사와야 한다. 한동안은 농촌에 살다가 인근의 도시지역으로 이사가 살고 있는 아주머니, 할머니 들이 외부 농업노동을 감당했었는데 이들이 고령화되어 더 이상 노동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지난 해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꾼을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부족한 노동력으로 인해 임노동비용도 크게 올라 이중고를 겪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국내에 남아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농장들은 그나마 농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서 올리는 수입이 줄어드니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규모를 늘려도 실제 소득은 크게 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생활여건이나 노동조건을 보장해 주기가 쉽지 않다.

소득을 늘리기 위해 규모를 키워야 하고 늘어난 농사규모를 감당하자니 농업노동자를 고용해야하고 늘어난 일꾼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려고 다시 규모를 늘리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출신 여성노동자인 ‘누온 속헹’(31세)씨가 지난 해 12월 20일에 비닐하우스로 만든 숙소에서 자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올해 2월 1일에는 여주에서 또 다른 캄보디아 출신 남성 노동자가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람 다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속헹씨는 가장 추운 겨울날 전기가 끊겨 전기장판도 못켜고 자다가 숨졌다고 한다.

‘속헹’씨 사고가 일어난 후 고용노동부는 올해부터 외국인 노동자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비닐 하우스 내 컨테이너나 조립식 패널로 만든 숙소를 제공하는 농가에게는 외국인 노동자 고용허가를 내주지 않는 ‘외국인 근로자 숙소 기준강화 방안’ 을 적용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에게도 차별없이 노동법을 적용하고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행복추구권과 사람답게 살 권리 역시 똑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주거환경을 갖춘 숙소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농가들은 대부분 외국인 들을 위한 주택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이유를 들자면 숙소를 짓는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 두 사람이 거주할 정도의 공간인 열평짜리 집을 평당 5백만원의 최소비용으로 지어도 농지전용비, 설계비, 대지 조성비 등을 포함하면 7~8천 만원의 목돈이 들어간다. 집을 짓는 비용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지만 농민들 대부분은 남의 땅을 임차하여 농사를 짓기 때문에 땅 주인들이 집을 짓게 허락을 해주지 않는다. 또 집을 지으면 1가구 2주택이 된다.

고용노동부의 조치가 나오자 농민단체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고용노동부의 방침대로 하자면 대부분의 농업 경영주들은 외국인 노동자 고용허가를 받지 못하게 되어 인력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사실상 농사를 중단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고용노동부의 조치도 이해가 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열악한 환경을 강요하는 것도 중단해야 하고 가중되는 생산비에 코로나 위기로 인해 인력을 구하기도 힘든데 제대로 된 숙소까지 마련하기 힘든 농가의 처지도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 농축수산물 생산과정의 상당 부분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존하는 현실을 금방 바꿀 수도 없다. 현재 우리 농업 현실은 외국인 노동자들 없이는 그나마 절반도 안되는 식량자급율을 유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농가에 압박을 가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개선하려면 단기적 과제와 중장기적 해결책을 세워야 한다.

나름 급한대로 장·단기적 대안을 생각해 봤다.

단기적 해결책으로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을 최소한이라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따뜻한 지역 사람들이다.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난방시설을 설치하고 취사와 화장실, 욕실 등 생활시설은 개선되어야 한다. 고무통을 묻고 널판지 두 어개 걸치고 거적대기로 가리는 곳에서 용변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

중장기 대책으로는 냉난방 설비를 갖추고 조리와 현대식 화장실과 욕실을 갖춘 표준화된 거주시설을 농식품부와 지방정부가 설계하고 이런 시설을 갖춘 농가에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고용허가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 시설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 농가에 신고만으로 설치할 수 있게 하고 비용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부 보조하고 농가가 부담하되 시설 자금은 저리로 융자할 수 있는 보조금을 만들어 농가가 큰 부담없이 외국인 주거시설을 갖추도록 한다.

이 글을 처음 구상할 때는 어떤 대안이라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변의 농민들이나 농민들의 처지를 잘 이해한다는 생활협동조합의 임원들 그리고 농업전문가들과 대화를 해봤다. 그런데 여러 가지 규제가 얽혀있어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농식품부와 법무부, 고용노동부, 외무부 등 부처 간에 풀어야할 문제 그리고 세제와 보험 가입, 교통법 등 많은 부분에서 얽혀 있다.

그렇지만 이대로 규제와 압박 그리고 불법과 관행으로 유지할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 잊혀지길 기다린다면 제2, 제3의 속헹씨는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농업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시선과 태도가 바뀌고 식량안보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범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쨌든 그들이 현재 우리 국민들의 먹을 거리를 해결하는 가장 큰 일꾼이고 이들을 대신할 수 있는 농업 노동력을 단기간에 쉽게 확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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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중국과 독일의 양국관계가 점차 심화되고 있는데 반하여, 바이든의 미국이 유럽과 대서양 동맹을 재개하고 강화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업적인 Nord Steam-2공사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고 추가적인 조치를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독일의 현 집권여당인 기민기사당은 이를 국가주권에 대한 간섭이라고 크게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아래의 칼럼은 독일 내 친미인사가 기고한 것으로 미국의 입장과 시각을 대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통적 동맹 독일에게조차 자국이기주의를 강요하는 미국외교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Nord Stream-2 공사는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다.


Nord Stream 2 공사 현장 Kingisepp, Russia, June 2019

지난 2월 뮌헨 안보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은 “유럽과 재결합”하고, 대서양 횡단동맹에 다시 참여하며, 독일에 주둔한 미군 철수계획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2015년 착공이래 미국과 독일 간의 관계를 긴장시킨 문제의 프로젝트에 대하여 Biden은 상기의 연설에서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가스파이프 라인 Nord Stream -2에 대해서 말입니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매년 최대 550억 입방미터의 천연가스를 가져오도록 설계된 파이프 라인은 현재 약 92% 완성되었습니다. 베를린은 이를 유럽 에너지 시장을 강화하는 상업적으로 유익한 프로젝트로 보고 있지만 워싱턴과 다른 유럽 국가들의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파이프라인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럽을 러시아 가스에 연결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얻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이 상호신뢰를 회복하기 전에, Nord Stream-2가 이제 막 재결합하는 대서양 횡단동맹에 부담을 줍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파이프라인은 독일의 목에 맷돌이 되어 외교정책의 신뢰도를 약화시키고 동부국가인 다른 EU회원국(우크라이나) 및 미국과의 관계에 부담을 줍니다.

따라서 독일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외교적 접근 방식을 채택해야 합니다. 파이프 라인을 협상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러시아에게 외국해킹-캠페인을 중단하거나 야당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석방하겠다는 약속 등 양보를 유도해야 합니다

 

좁은 창- A NARROW WINDOW

독일정부는 프로젝트 진행여부(현재 러시아가 EU가스 수입의 40%를 차지함)에 관계없이 러시아가 유럽의 주요 에너지 공급업체로 남을 것이며, 미국 역시 러시아로부터 연간 수십억 달러의 웜유를 수입한다는 이유로 Nord Stream-2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 몇 년간 유럽에서 러시아 가스수입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대륙 자제는 실제로 에너지 시장을 자유화, 다양화 그리고 통합한 개혁의 결과로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특별한 이점도 없고, Nord Stream-2가 유럽에 대한 모스크바의 영향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국제적 두려움을 덜어 주지 못합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를 비밀로 하지 않았습니다. 3월 18일 Antony Blinken 국무 장관은 파이프라인을 “나쁜 거래”라고 말하고 “Nord Stream-2 파이프라인에 관계하는 모든 주체(기업과 공공조직)는 미국의 제재를 받을 위험이 있으며, 파이프라인 작업을 즉시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독일파트너와 함께하는 NATO장관회의에서도 다시 한번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Biden 행정부는 EU에서 미국의 영토주권의 개입이라는 광범위한 비판으로 민감해진 상기의 프로젝트에 관계하는 회사들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추가로 확대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미국연방의회는 초당파적으로 언제든지 제재를 확대할 수 있습니다. Nord Stream-2에 대한 새로운 국무부 보고서가 5월에 의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며 이에 따라 연방의회가 추가적인 제재의 조치를 취할 추진력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Nord Stream-2는 대서양 횡단동맹의 재결합에 부담을 줄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Nord Stream-2 분쟁을 축소하고 파이프라인의 성공적인 완료를 보장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다면 공사는 빠르게 준공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제적인 반대에 더하여, 독일 내에서도 역풍에 직면해 있습니다. 9월로 예정된 총선 이후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녹색당과 자유민주당의 연합정부는 아마도 Nord Stream-2에 대한 독일의 공약을 축소시킬 것입니다. 자유민주당은 파이프라인 건설의 일시 중단을 주장하는 반면에, 녹색당은 환경과 정치적 이유로 전면적인 중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파이프라인이 다음 연합정부의 주요 국내 및 국제 걸림돌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베를린은 적극적인 외교적 접근 방식을 펼쳐야 합니다. 베를린은 건설을 중단하는 대신 Nord Stream-2을 모스크바와의 정치적 협상수단으로 사용하여 러시아에게 양보를 조건부로 파이프라인을 최종적으로 준공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을 EU 내 파트너 및 대서양횡단 동맹국가(미국)와 긴밀히 조율함으로써 독일정부는 현안을 러시아로 넘길 수 있습니다.

베를린은 파이프라인의 주요 소유주이자 운영주체인 러시아의 Gazprom에게 Nord Stream-2에 대한 국내 및 국제적 반대가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여 프로젝트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Gazprom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러시아는 독일이 유럽에 가스가 공급되도록 청신호를 줄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만들도록 도와야 합니다. 베를린은 파이프라인 완성을 모스크바와 양국 관계개선 및 독일과 동맹국의 논쟁적인 문제 해결과 연계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들 중에서도 해킹중단, 허위정보, 외국지역에서 암살기획 등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유럽 인권재판소의 결정인 Navalny의 석방, 그루지아 및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분쟁 해결 등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조건의 제시와는 관계없이, 이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러시아의 결정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동의 강력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독일이 파이프라인을 폐쇄하면 러시아는 보복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지만, 유럽의 협상지위는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유럽가스시장의 통합은 에너지 정책의 전환을 강화시켰고 글로벌 가스시장은 “구매자 시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더욱이 유럽의 녹색에너지로의 전환은 가속화되고 있으며, “Bridge-에너지(100% 신재생에너지로 넘어가는 중간단계)”로서 천연가스에 대한 필요성이 감소하고 있어서, Nord Stream-2와 같은 프로젝트의 경제적 및 환경적 근거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파이프라인이 가동된 후 모스크바가 약속이행을 포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독일은 필요한 경우 가스구매를 중단할 수 있는 “비상중단”의 계약조항을 삽입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베를린은 특히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중부 및 동유럽 국가들과 에너지 인프라와 연결성을 개선함으로써 유럽가스시장의 지위를 더욱 강화하는 포괄적인 계획을 제안하는 동시에, 수소와 같은 녹색 에너지의 기술연구와 개발 및 생산에 지원을 강화하여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유럽에너지 시장이 더욱 견고하고 지속가능한 기반에 놓이는 데 도움이 되는 “종합적인 대서양횡단 녹색의제”를 구축하자는 유럽위원회의 최근 제안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은 러시아로부터 화석 연료를 수입할 필요성을 더욱 줄이고 우크라이나와 같은 국가들이 함께하도록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독일은 Nord Stream-2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특정 접근방식에 관계없이 유럽집행위원회와 유럽 및 대서양 횡단파트너와 긴밀하게 협력해야 합니다. 베를린의 외교 정책은 대서양 횡단동맹을 다시 재개하고 대서양 횡단관계를 심화할 뿐만 아니라 신뢰성을 강화해야 합니다.

 

출처 : Foreign Affairs(포린어페어) on 2021-04-22.

Wolfgang Ischinger

2008 년부터 시작한 뮌헨 안보회의의 의장으로 2001년부터 2006 년까지 미국주재 독일대사를 역임했습니다

월, 2021/05/1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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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우리는 현재 지식경제가 경제의 각 분야에서 섬과 프린지의 형태로 제약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흔히 지식경제와 그 가장 친숙한 형태(소수의 세계적인 거대기업들과 주변부의 신생기업들이 추진하는 첨단기술산업)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는 규모와 상관없이 어떤 기업이 그 운영방식을 달리 변경하지 않으면서 지식경제의 제품과 서비스, 특히 컴퓨터와 기타 정보기술을 사용하여 복잡한 정보를 조직하고 업무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경우에도 우리는 지식경제와 그 제품 혹은 서비스를 혼동한다. 이러한 지식경제의 제품과 서비스의 사용이 새로운 생산방식의 잠재력 중 극히 일부를 포착할 뿐이라는 명백한 신호는 그러한 사용이 반짝했다가 곧 사라질 생산성의 일시적인 상승을 제공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그것은 1994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에서의 생산성의 일시적인 상승을 해명하는 데에 유용한 변화였다. 즉 정보관리를 통해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디지털 기술을 채택하는 흐름이 일회적인 상승을 낳았다.

우리는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참된 성격을 파악하려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널리 보급되고 이러한 보급을 통해 심화되고 급진화되는 것을 상상해야만 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넓고 다양한 경제활동 영역을 가로질러 펼쳐짐으로써 그 성격과 잠재력을 보여준다.

우선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지식경제는 생산활동의 수행에서 자본, 기술, 기술관련 역량 및 과학의 축적이다. 지식경제의 특징적인 이상은 제품과 기술뿐만 아니라 절차와 방법의 영구혁신(permanent innovation)에 있다. 지식경제는 특징적인 기술적 장비를 통해서 상품과 서비스의 또 다른 생산방법으로 그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지식경제는 자체적인 재발명을 지속하는 생산패러다임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경제의 이상이 의미하는 바를 우선적으로 경영, 조정, 생산의 좁은 수준에서, 이윽고 세 가지 더 심층적인 속성들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성들은 지식경제를 지금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보급되고 급진화된 다음 존재할 수 있는 모습으로 기술한다.

경영과 생산 공학의 제약적이고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지식경제는 대규모 생산과 ‘탈규격화’나 맞춤제작을 조화시키고, 생산계획의 일관성 및 추진력의 유지와 기업활동의 분산화를 조화시키는 관행이다. 이러한 성과들은 얼마나 많이 성취되는지에 따라 사소한 의미를 갖거나 혹은 중대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기업 안에서 재산과 권력을 재편하지 않은 채 개인적 주도성과 팀워크를 위한 더 큰 여지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효율성의 부수적인 향상과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전략을 재현할 수 있다. 혹은 이러한 성과들은 업무조직과 궁극적으로는 재산체제에서 누적적이고 중요한 변화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산방식의 이러한 더 피상적인 특성들의 재현과 발전은 모두 내가 나중에 논의할 더 깊은 특성들의 진보에 따라 달라진다.

적층제조(3차원 프린터), 로봇 공학 및 더 일반적으로 유연하고 수리적으로 제어되는 기계도구는 가능한 변형을 탐구하면서 제품의 다각화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엄청난 다각화와 생산규모를 조합할 수 있게 한다. 생산활동과 실험과학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다양한 능력을 동원하고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기술적인 역량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3차원 프린터는 사용자가 제품의 개념과 실현 사이에서 신속하고 부단히 움직이는 것과 구체화 과정에서의 발견에 비추어 개념을 수정하는 것을 허용한다. 인공지능은 기계가 우리 대신에 수행할 수 있는 일(아직 반복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영역으로 우리가 전진할 수 있도록 이미 반복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면 기계의 도움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명료화함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생산규모와 탐험적인 제품 차별화 및 변형과 조화시키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는 방식(기술적인 노동분업)을 변화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요체는 일관성과 추진력을 잃지 않고서 주도권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업무를 조직하든지 간에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분권적이고 재량적인 주도권의 장점들과 그러한 추진력과 일관성의 유지 사이에는 완전한 모순은 아닐지라도 녹록치 않은 긴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지식경제의 방식은 현재의 고립된 형태에서도 이러한 긴장을 해소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를 완화시킨다.

지식경제의 한 가지 방식은 업무의 조직방법에 대한 포괄적인 재량을 누리는 작업반에게 업무를 할당하는 방식이다(예컨대, “도요타 생산방법”). 또 다른 방식은 이러한 팀들의 활동을 조정함으로써 작업반들과 반장들에 의한 생산계획의 협력적인 개발과 수정으로 중앙의 경영권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더 훌륭하게 개선의 기회를 확인하고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더 고차원적이고 더 유연한 형식을 낳는다.

기술만으로는 규모와 차별화의 결합 나아가 조정된 전진운동과 분산적인 주도권의 결합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 기술의 사용은 작업방식에서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경제의 제도적 안배와 생산작업 참여자들의 교육과 문화에서 더 심층적인 변화 방향을 가리키는 관행과 태도로 밑받침되어야만 한다.

거의 무제한적인 제품 차별화 또는 맞춤제작과 규모의 결합은 자사제품의 수요를 외생적이고 불변적인 여건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신규수요, 신규소비자층, 신규시장의 창출을 추구하는 기업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을 전제한다. 상품과 서비스 등의 차별화에 대한 욕구는 소비자들이 새로운 선택지들에 대해 놀라워하고 대규모 시장 위한 제조업생산이 엘리트를 위한 장인생산의 특성을 일부 갖게 되며, 제조업과 서비스간의 구분이 붕괴됨으로써 탄력적일 수 있다. 선진적인 제조업은 서비스와 결부된 제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넓은 범위에서 결정(結晶)된 지적 서비스들로 구성된다.

분산적 주도권과 조정된 생산계획의 일관성 간의 화해는 업무조직에 대한 지휘통제 접근법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한 화해는 기술적 노동분업의 성격(생산과정 참여자들의 협력방식)에서 변화를 요구한다. 감독역할과 집행역할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사라져야만 한다. 생산계획은 집행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수정되어야만 한다. 감독역할과 집행역할의 차이를 완화시키는 것은 모든 전문화된 집행역할들을 상대화하는 것을 동시에 요구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경직된 전문화는 개념의 수립과 집행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전제한다. 유동적인 내부 조직을 가진 작업반은 전문가를 대체한다. 기술적 노동분업의 성격에서 이러한 변화는 생산과 과학의 관계에서 더 심층적인 변화를 미리 보여준다.

경영과 생산 공학의 수준에서 다루어지는 국한된 지식경제의 외견상 피상적인 특징들은 결국 그렇게 피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한 특성들을 완전히 성취하려면 더 중요한 변화들이 요구된다. 그러한 변화들은 억압된 변혁적 잠재력의 존재를 암시한다.

지식경제가 경제 전반에 걸쳐서 입지를 구축하려면 지식경제는 고립된 전위 부문들에 제약되어 있는 대신에 지금으로서는 먼 장래의 약속에 불과한 권능들을 지속적으로 이행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어야만 할 것이다.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보급과 그 급진화는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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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5/2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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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나는 이제 표층에서 심층까지,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이 발전하고 확산될 때에만 드러나는 세 가지 특성들을 논의하겠다. 지식경제가 현재 프린지 안에 고립되어 있는 경우 지식경제는 그 본성을 숨긴다. 우리는 현재의 고립적인 지식경제가 제공하는 파편적인 증거에서 지식경제의 잠재력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이와 같이 더 심층적인 첫 번째 특성은 한계수확체감(다른 요소들이나 투입물들이 불변적인 상황에서 하나의 요소나 투입물의 연속적인 증분들의 한계산출에서 수확체감)의 제약조건을 완화하거나 심지어 역전시키겠다는 약속이다. 하나의 투입물이나 요소의 연속적인 증분들의 생산성은 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감소하기 시작한다. 경제생활의 어떤 특징도 한계수확체감의 제약만큼 경제생활의 보편적이고 초시대적인 법칙으로 여겨질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한계수확체감의 법칙과 그 가능한 수정이나 대체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법칙과 종종 혼동되는 다른 관념, 즉 규모수익(returns to scale)을 구별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최상이다. 규모수익이란 두 가지 정량의 관계를 말한다. 첫 번째 정량은 생산에서 모든 투입물이나 요소들이 같은 비율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우에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에 활용되는 요소나 투입물의 증감이다. 두 번째 정량은 장기간에 걸쳐 표시된 산출물의 결과적인 증가 또는 감소이다.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에 활용되는 투입물의 증감에 비례하여 산출물이 증감할 때 규모수익은 불변적이다.

규모수익은 통상적으로 불변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규모수익의 체증이나 체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모든 투입물이 동일비율로 증가된 더 큰 공장은 더 작은 공장보다 더 효율적일 수도 있고 덜 효율적일 수 있다. 규모수익불변의 발생은 결코 경제생활의 법칙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껏해야 반박가능한 사실적 가정이다. 그러한 가정은 생산의 투입물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익한 또는 유해한 상호작용을 포함하여 그 가정을 부정할지도 모르는 무수한 상황 중 어느 것도 없는 경우에만 유효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 가정은 뉴턴 역학에서 불변적인 운동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존의 허다한 경제분석과 마찬가지로 계시적 단순화를 용이하게 하기 때문에 유용한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경제가 규모수익체증과 관련이 있고 이러한 추정을 정당화하는 원인을 이러한 생산방식의 일정한 특징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중 일부는 지식경제의 일부가 누리는 장점, 즉 플랫폼사업의 사용자 커뮤니티에 새로운 고객을 추가하는 데 거의 제로에 가까운 한계비용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주장들은 그러한 장점을 갖지 못한 지식경제의 다른 부분들이 어떻게 규모수익체증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기껏해야 지식경제의 특정 분야에 대한 주장이다.

다른 제안들은 지식경제의 기업들이 의존하는 통찰력, 기술, 인력들에 의해 발생되는 긍정적 외부효과를 강조한다. 이러한 기업들은 실천적인 지식의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소비자다. 이러한 기업들이 판매하는 재화와 서비스는 그러한 지식을 풍부하게 구현하고 효과적인 사용을 위해 지식기반 기술을 요구할 개연성이 높다. 게다가 지식경제의 기업들은 그들 주위에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사람, 제도, 관행, 아이디어의 넓은 잠재 영역을 창조해야만 번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육화되거나 암묵적인 모든 지식은 경제학자들이 “비경합적” 재화라고 부르는 유형을 대표한다. 지식재산법이 비경합적 재화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자 개입하여 이를 “배제적인” 재화로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고 비경합적 재화는 일부 사람들의 재화 사용이 다른 사람들의 재화 사용을 막을 수 없는 재화를 의미한다. 지식경제에서 공유된 암묵적 지식과 능력의 확산은 생산체계의 선진기업들과 선진분야들의 발전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성공적 기업과 부문들(성공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선도성을 확장함으로써 번창하는 것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 것이다. 바로 이들은 (유형적 자원뿐만 아니라 무형의 기술축적에 의해) 지식경제의 비경합적이고 비배제적인 재화를 이용할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적 외부효과는 지식경제만의 특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긍정적 외부효과는 비슷한 제한 아래서 이전의 생산형태들에서도 일상적이었다. 예컨대, 이전의 생산방식들이 19세기의 기계발명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발명가들을 지원한 과학, 문화, 제도들에도 의존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긍정적인 외부효과는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의 전성기에도 일상적이었다.

거의 제로에 가까운 한계비용이나 긍정적 외부효과에 대한 이러한 추측들이 과잉포섭이나 과소포섭 없이 그들의 주제(지식경제)를 충분히 차별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추측들은 더 기본적인 결함을 가질수도 있다. 즉 이러한 추측들은 우선적으로 편의적이고 우발적이고 경험적인 가정에 불과한 표준(규모수익불변)에서 한계적인 이탈을 설명할 수도 있다.

우리는 생산성의 미래에 대한 지식경제의 혁명적 중요성을 다른 부분에서, 즉 지금까지 사실상 경제법칙에 준하는 것으로 여겨진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을 완화하거나 역전시키는 지식경제의 잠재력에서 찾아야만 한다. 생산과정에 모든 투입요소들을 불변적으로 유지하고 그 중 하나의 투입요소를 증가시켜보자. 그 투입요소의 증가에 대한 산출물의 수확은 증가하다가 한계에서 감소할 것이다.

산출물의 감소를 막고 회피하고 지연시키는 것은 개념적, 과학적, 기술적, 조직적 또는 제도적 혁신이다. 그러나 혁신들이 일련의 산발적인 일회성 조치들로 그친다면 각 혁신은 수확체감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투입요소와 등가적인 요소가 된다. 혁신은 산출물의 증가를 낳지만 이윽고 혁신이 가진 촉진적인 잠재력은 소진되고 혁신의 더욱 확장적인 사용에 대한 한계수확은 체감하기 시작한다. 한계수확체감의 법칙(다른 투입물들이나 요소들을 불변적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생산에서 하나의 투입물이나 요소의 연속적인 증분에 따른 생산성의 체감)은 규모수익불변과 모순되지 않는다.

실제로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은 이 법칙이 적용되는 단기간에는 규모수익불변을 당연시한다.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이 관행상 장기적이기보다는 단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이러한 법칙의 발생은 엄청나게 중요한 장기적 결론을 내포한다. 이러한 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계수확체감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이 경제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근본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한계수확체감의 기초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별로 없다는 사정은 주목할 만하다. 그 기초는 혁신의 일회적 또는 불연속적 성격이고, 이러한 성격은 생산체계에서의 진보가 생산체계 외부에 있는 과학적 기술적 (그 자체로 일회적인) 돌파구들에 의존함으로써 악화된다. 혁신은 한계수확체감을 상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이다. 그러나 혁신이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회적이거나 불연속적인 것이라면, 각 혁신은 마치 동일한 한계수확체감의 제약 아래서 새로운 투입요소 혹은 수정된 기존 투입요소인 것처럼 작동할 것이다.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특히 지식경제의 바로 직전 형태인 공장제 대량생산과 그 선행 형태인 기계화된 제조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혁신들의 특성을 이루어온 세 가지 불연속 형태를 고려해보자. 첫 번째 불연속 형태는 과학적 발견의 역사 자체에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의 발명과 이로부터 나오는 이론, 실험, 절차의 조직이나 규칙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번째 불연속 형태는 과학적 통찰을 과학기술적 발명에 적용하는 데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과학의 관행에 대한 과학기술적 발명, 특히 과학적 장비의 역(逆)작용으로 강화된다는 점이다. 세 번째 불연속 형태는 생산체계가 과학에 기초한 기술을 이용하는 데에서의 불연속이다. 이러한 중첩적이고 누적적인 불연속들은 생산 외부의 진보에 생산이 의존한다는 점과 결합하여 한계수확체감이라는 제약조건의 궁극적인 기초를 형성한다.

지식경제는 한계수확체감의 궁극적 기초를 무너뜨리고 따라서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을 극복하거나 심지어 역전시킬 잠재력을 창출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하여 한계수확체감의 완화 또는 역전은 지식집약적인 생산이 왜 규모수익체증을 산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에서 원용된 이유들보다 더 근본적이고 동시에 더 특수한 이유들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내가 다음 절에서 논의하게 될 지식경제의 더 심층적인 특징들 중 하나는 우리의 협력방식을 상상력의 작동방식과 더욱 유사하게 만들고 노동자가 기계의 거울이라기보다는 기계의 대립물이나 보완물이 될 수 있게 하는 과학적 실험주의의 모형에 따라 생산을 쇄신하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앞으로도 불연속적인 상태에 머물지 모른다. 그러나 지식경제를 특징짓는 실험주의적인 생산은 과학적인 발견과 기술적 발명을 이전보다 더 직접적으로 또한 더 지속적으로 생산활동으로 변형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생산은 과학기술의 진보가 가져다주는 결과물의 수동적인 수혜자로 머물지 않고 관행과 제품뿐만 아니라 아이디어들에서도 스스로 끝없는 혁신의 원천으로 변한다. 그러한 생산은 과학기술을 더욱 닮아가기 때문에 과학기술이 창조한 것을 더 기꺼이, 더 완전하게, 더 항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혁신이 일회성보다는 영구성을 띨수록, 혁신이 생산체계 외부에서 발전된 아이디어와 기계의 이용뿐만 아니라 생산체계 내부에서도 더 많이 일어날수록,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을 완화시키거나 심지어 역전시킬 가능성은 그 만큼 더 커진다. 이러한 제약조건은 기술 속에 구현된 지식과 관련해서도 나아가 노동과 자본을 포함한 생산과정의 모든 투입요소와 관련해서도 완화되거나 역전될지도 모른다. 각 요소와 각 투입물의 성격과 그 생산적 잠재력은 지식경제의 일부가 됨으로써 변화된다.

이러한 사변적 명제들은 반증가능한 가설을 낳는다. 우리는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이 완화된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에 비례하여 그러한 완화가 발생한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제약의 극복에서의 성패는 한가한 호기심이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그러한 성패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물질적 도덕적 이익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을 완화하거나 극복하는 것은 생산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를 두드러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경제사는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가장 원시적인 조건에만 해당하는 경제사의 제1기에서 경제성장의 결정적인 제약은 현재의 소비를 공제한 잉여의 규모, 즉 마르크스가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라고 불렸던 바다. 스미스와 마르크스 둘 다 본원적 축적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요한 연구대상인 그 시대의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한계라고 믿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아래서 매매상품으로서 노동력의 취급에 대해서도 지배적인 설명은 잉여의 강제추출을 확보할 필요성이었다. 스미스에게 있어서 기술적인 노동분업의 계층적이고 전문화된 형태 아래서 노동자의 비인간화는 경제적 진보를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미래 성장에 필요한 자본 스톡을 증가시키기 위한 조건의) 일부를 형성했다.

스미스와 마르크스 둘 다 오류를 범했다. 그들의 시대에도 이미 잉여의 규모가 아니라 관념적, 기술적, 조직적, 제도적 혁신이 성장에 대한 결정적인 제약이었다. 영국은 꽤나 높은 수준의 국내 민간저축과 정부저축을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아시아의 농업적-관료적 제국들과 다르지 않았다. 역사적 연구는 영국이 도리어 다수의 아시아 제국들보다 낮은 저축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영국은 혁신과 이에 적합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서 이러한 아시아 사회들과 달랐다.

문명의 시작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역사 전체에 해당하는 경제적 진화의 제2기에는 혁신의 수준, 범위, 속도 나아가 생산기술과 생산안배에서의 혁신과 제도, 과학, 문화에서의 혁신의 관계가 경제성장의 주요한 제약조건이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혁신은 성장의 주요한 동력으로 전환되었다.

저축은 성장의 원인이기보다는 성장의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혁신에 의해 촉발되고 지속된 성장은 희소성과 한계수확체감의 이중적인 비호 아래서 일어났다. 혁신은 비록 다면적이지만 단속적이었다. 혁신은 여타지속적인 관행과 안배에서 일련의 불연속적인 변화였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사람들의 협력방식과 인간의 편익을 위한 자연의 변형이나 자연적 요소들의 동원과 관련된 혁신이었다. 기계의 설계와 사용은 두 가지 유형의 실험(자연에 대한 실험과 협력적 관행에 대한 실험)의 흔적과 이러한 실험을 연관시키는 방법의 흔적을 간직하였다.

경제사의 제3기는 혁신이 그 단속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이 완화되거나 심지어 역전되는 때 시작된다. 희소성과 부족한 자원의 분배와 이용에 관한 다양한 방법들의 불평등한 결과는 계속해서 경제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혁신은 일회성보다는 영구성을 갖는다. 혁신은 생산체계 외부에서 도입된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게될 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에 내부적으로 된다. 좋은 기업이 좋은 학교를 닮기 시작하고 생산의 발전이 지식의 발전을 닮기 시작하는 까닭에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은 이완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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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5/29-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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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유사전위주의와 초고립적 전위주의가 수반하는 또 다른 동향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노동에 불리하게 변질된다는 점이다. 경제학의 가장 불변적인 교리 중 하나는 노동수익(실질임금)이 생산성 증가를 지속적으로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도그마는 부분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노동수익의 강제적인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통해 원래대로 돌아가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조건과는 별도로, 우리는 이 도그마가 명백히 거짓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다양한 요소부존량(특히 인구밀도와 천연자원의 부)의 발전과 제약에서 비슷한 경제를 비교한다면, 우리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국민소득의 분할에서 큰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떻게 이런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차이의 원인은 자본과의 관계에서 노동을 강화 또는 약화시키고 생산을 위해 노동자를 채용할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하는 법적 제도에 있다. 경제성장은 수요측면과 공급측면에 대한 제약을 반복적으로 돌파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수요에 대란 제약을 돌파하는 가장 오래 지속되고 효과적인 방법은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권을 통해 분배를 사후적으로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는 [제도적 안배들을 혁신함으로써]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인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경제적 이익의 일차적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적 안배 중에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법적 위상을 정하는 안배(계약법, 회사법, 노동법)와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의 조건을 규정하는 안배(재산권 체제)가 있다.

자본과의 관계에서 노동을 강화 또는 약화시키는 방법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기반을 두는 경우에만 안전하다.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조직과 대표 방식은 그러한 기반을 확보하였다. 부유한 북대서양양안의 국가들에서 노동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지배적인 안배와 지지대는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이거나 단체협상에 입각한 노동법 체제였다. 단체협상은 고용관계의 불평등한 여건에서 조직된 노동에 “대항력”을 부여함으로써 계약의 현실을 유지하려고 설계되었다. 중남미에서는 대안적인 조합주의적 노동법제가 등장하였다. 노동력의 절반 또는 그 이하를 관장하는 공식적이고 법적인 경제 영역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부의 보호 아래 직종별 노동조합에 자동적으로 가입되었다.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와 조합주의적 노동법 제체는 모두 기업 조직체들[협회들]의 비호 아래 확립된 생산단위(공장 등)에 안정적인 노동력을 특징적으로 결집시키는 공장제 대량생산을 자신의 경제적 배경으로 삼았다.

고립적인 지식경제의 등장은 대량생산을 유사하게 경제 전반에 퍼져있는 선진적인 생산방식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전위 부문의 동향은 전통적인 대량생산이 쇠락하는 상황과 안정적 노동력의 고용이 확고한 경제적 지원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대변한다. 기업들은 더 싼 노동력, 더욱 유연한 노동력의 고용, 세금 우대(노동과 세금의 차익 거래) 등을 찾아 세계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고립적인 지식경제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불안정계약의 제도들을 통해 업무를 할당받는 세계에 두루 존재하는 비전위 기업들도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와 조합주의적 노동법 체제가 공히 의존하였던 경제적 기반을 침식하는 데에 일조한다.

노동의 대표와 보호의 자연적 형태처럼 보이던 것들이 회고해보면 노동이 경제적 안전이나 시민권이 없이 주로 분권적, 계약적 안배들로 조직된 두 시대 사이에 상대적으로 짧은 간주기의 현상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공장제 대량생산과 계약주의적 및 조합주의적 노동법 체제 이전에는 선대제수공업(先貸制手工業)이 존재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의 초반부에서 기술하였다. 이제 대량생산의 쇠락과 새로운 선진적이지만 독점적인 생산방식(지식경제의 고립적 혹은 초고립적 전위주의)에 의한 대량생산의 추월 과정에서 또 다른 선대제수공업이 세계적인 규모로 등장하였다. 많은 대량생산의 일자리들은 더 가난한 나라의 저임금 회사에 하도급으로 제공되었다. 다른 일자리들은 특히 서비스 분야에서 불안정한 도급직과 임시직으로 대체된다. 노동의 대표와 보호를 위한 대안적인 법적 체제가 부재하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포용적 전위주의로 향하는 활동들이 부재하다면 노동은 무방비상태가 되고 국민소득 중 노동의 몫은 감소한다.

초고립적 전위주의와 유사전위주의의 출현이 초래한 동향들(과점기업들이 두 가지 전위주의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과 많은 노동자들이 불안정 노동으로 전락하는 상황)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응들은 전체적으로 불충분하다. 이러한 대응들은 더 크고 더 넓은 변혁으로 휩쓸려 들어가야만 작동할 수있다. 현재까지 그러한 변화는 시행되기는커녕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주변의 미미한 신생기업들로 둘러싸인 과점기업들이 지식경제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해답으로서 독점금지법을 고려해보자. 독점금지법을 적용할 수 있는 사실요건(예컨대, 특정한 제품의 확정된 시장에서 제품가격책정에 대해 측정 가능한 영향력을 통해서 경쟁을 억제하는 행위)이 자주 결여되어 있다. 독점금지법이 지식경제의 거대기업이 경쟁을 억제하는 양상을 다루는 방향으로 개정되거나 발전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개정된 법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소수의 글로벌 기업들에게 초고립성과 과점을 결합하는 데 결정적인 편익을 제공해온, 결합적이고 누적적인 요소들을 역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독점금지법의 개정은 시장경제의 제도적 법적 구조에서 파급효과가 더 큰 변화의 일환으로서만 작동할 수 있다.

더욱이 플랫폼기업들의 해체는 이러한 기업들이 사용자들의 단일한 커뮤니티로 결집시킨 다수의 사람들과 연결된, 기업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의 많은 부분을 파괴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는 플랫폼기업들을 소규모 회사로 분할하고 덜 포괄적인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대신에 플랫폼기업들을 유지하려고 결정하면서도 이 기업들을 새로운 지배구조 형태에 복종하도록 결정할 수도 있다. 예컨대, 법에 의해 설립된 독립적인 신탁회사들은 시민사회의 대표자들과 합께 플랫폼기업들을 통제할 권한을 보유하고 그리하여 주주의 권리와 경영자의 권한을 동시에 제약할 수 있다.

독점금지나 지배구조 활동의 효과는 경제적 제도들에 대한 더욱 파급력이 큰 혁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혁신은 지식경제에 대한 참여 수단들, 즉 자본, 선진기술 및 선진관행 등에 대한 접근을 확대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혁신은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뿐만 아니라 정부와 신생기업들 간의 협력의 새로운 형식들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혁신은 기본적인 재산권 체제(사람들이 사회의 축적된 자본을 배치하고 생산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방식과 조건들)에 대한 다원주의적인 실험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은 현재 국한적인 형태의 지식경제의 계승자로서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에서 법적이고 제도적인 요소를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순서도이다.

유사한 취지에서 특정한 직업 보유와 무관하게 모든 노동자-시민에게 제공되고 그래서 보편적으로 휴대가능한 안정성-보장적인 안전장치와 역량-강화적인 기부재원의 발전에서 북구의 실험, 즉 “유연안정성(flexsecurity)”을 고려해보자. 안전장치와 기부재원은 모든 일자리에서 노동자와 함께 이동한다. 일부 이러한 제도적 안배는 새로운 생산현실 아래서 나타나는 고용불안에 대한 효과적인 해답을 구성해야만 한다. 유연안정성의 광범위한 채택은 유연성과 안정성이 역의 관계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증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혁신과 협력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체제의 일단을 범례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경제의 카르텔 형성과 연관된 독점금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응답의 단편 그 이상을 제공할 수 없다.

유연안정성이 제공할 수 있는 더 넓은 해법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경제를 위해 만들어진 기존의 노동법 이외에 또 다른 노동법체제를 탄생시켜야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노동법 체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뚜렷한 경제적 불안에 대한 완곡한 언어로 복무하는 것을 보증하도록 설계될 수도 있다.

체제의 원칙들 중 하나로서 아마도 차등제의 채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불안정노동이 통신기술과 지식경제의 관행의 도움으로 더 많이 조직되고 대표될수록, 고용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법적 개입이 불안정 노동을 보호할 필요는 그만큼 작아진다. 반대로 불안정노동이 덜 조직되고 대표될수록, 그러한 직접적인 법적 보호의 명분은 그만큼 더욱 강력해진다.

이러한 보호의 내용을 발전시키는 또 다른 원칙은 법이 유사한 업무에서는 안정적 고용과 시간제 혹은 과업지향적인 고용 중 선택의 가격중립성을 요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즉 계약직 노동자는 유사한 노동에 대해서는 최소한 정규직 노동자만큼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 목적은 지식경제의 관행과 관계들에 의해 요구된 유연성이 노동의 가격인하와 국민소득 중 노동의 몫의 감소에 대한 구실이나 위장수단으로 복무하지 않도록 보장하려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대안적인 노동법 체제의 진화의 후기 단계에서 노동법의 변화는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금노동이 농노제와 노예제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자유노동의 하자 있는 과도기적인 형태라는 19세기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카를 마르크스부터 존 스튜어트 밀까지)의 공유된 믿음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미래에는 경제적 종속노동은 고차적인 형태의 자유노동(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자유노동의 고차적인 형태들이 종속적 또는 주변적 지위로 격하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그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식경제의 포용적인 형태의 제도적 안배들과 사법은 21세기 여건에서 19세기 이상을 쇄신함으로써 이러한 이상을 부활시키고 재해석할 수도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현재 세계화되었으되 고립적인 지식경제 형태의 증가에 수반되는 위협적인 동향들에 대한 적합한 유일한 해답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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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7/0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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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양국체제적 발상을 가로막아왔던 심리적 억압 기제는 크게 외부에서 비롯된 것과 내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두 개의 억압기제는 일단 겉보기에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외적 억압은 상대를(즉 남은 북을, 북은 남을) 부정하는 쪽으로 작용한 반면, 내적 억압은 반대로 상대를 부정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을 분석해보면 이 두 개의 계기가 역설적인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렬한 ‘분단(부정)의식=내적 억압’이 결과적으로 남북 두 국가 간의 적대를 심화시켜 국가기구의 외적 억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곧잘 그러하다고 하듯, 당위는 그 당위가 강할수록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분단의식에 내포된 당위, 즉 분단부정의 당위 역시 그러했다. 남북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당위는 과연 어느 정도나 실제로 남북이 하나로 되는 데 기여했을까. 분단사에서 결정적 사건인 6·25 전쟁부터 생각해보자. 통일의 당위는 당시 남북 모두 하늘을 찌를 듯 강렬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단의 고착이었다. 분단부정, 즉 통일에 대한 열정의 강도(强度)는 전쟁의 참혹도와,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긴 분단의 고착도와 정확히 비례했다. 그때 심어진 적대와 원한을 아직까지도 다 지우지 못하고 있다. 통일을 외칠수록 통일에서 멀어지고, 분단극복을 외칠수록 분단현실이 강화되는 역설이 바로 2016년 겨울의 촛불 직전까지도 강력하게 작동했다.

당위의 정언성이 강하고 이념적일수록 그 당위의 실현을 저해하는 반대물, 장애물에 대한 부정과 억압은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한반도에서 분단부정의 당위는 고도로 이데올로기적인 미소 냉전의 대립구조 안에서 작동했다. 따라서 그 당위의 정언성이 강해질수록 이데올로기적 순수와 오염의 이항 대립구도 역시 극도로 첨예해진다. 남과 북은 서로 전쟁을 한 군사적 적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적이다. 적은 휴전선 저 밖에도 있지만, 더욱 위험한 적은 내부의 적이다. 따라서 남의 체제는 내부의 적인 ‘빨갱이’를 탐색하고 제거하는 고도의 정화 기계이고, 북의 체제는 또한 내부의 적인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끄나풀, 간첩’을 색출하여 말살하는 고도의 검열 장치이기도 했다. 이 정화와 검열의 장치는 그 속에 사는 인간의 마음과 뇌까지를 점유하여(‘내 귀의 도청장치’) 그 지배를 완성한다. 이로써 분단의 골은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까지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듯 전면화된 분단체제는 커다란 고통과 함께 분단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비판의식 역시 또 하나의 분단부정의 정언성에 기초한 당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비판운동이 두드러지게 전개된 곳은 재야, 야당,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한국이었다.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은 이러한 비판을 ‘이적’ ‘용공’ ‘친북’으로 몰아 탄압해왔다. 이들이 통치체제를 비판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분단극복, 통일이란 결국 대치하고 있는 적의 편에 동조하는 통일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체제의 차이만 있을 뿐 남과 북에서 동형적으로 진행되어왔다. 분단체제란 이러한 분단체제 비판 세력을 식량으로 먹어치우면서, 즉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탄압하면서 자신의 몸체를 괴물처럼 더욱 키워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독재정권이 비판 세력을 ‘적’으로 상정하고 탄압하는 한, 극악한 탄압을 당하는 비판 세력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독재정권을 ‘적’으로 상정하고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독재정권은 비판 세력이 자신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이적단체’에 불과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강변해왔다. 이로써 상호를 적으로 간주하여 투쟁하는 상승적 순환 구조가 남과 북의 정권 사이에서, 그리고 남 내부와 북 내부 각각에서 형성되고 교차하면서 가속도를 얻어 작동한다.(이 책, 153쪽)

결국 분단체제란 분단의 부정, 즉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기묘한 체제였다. 이 기묘한 작동논리는 2중의 차원에서 전개된다. 먼저 남북의 분단체제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체제의 목적이 분단의 극복이다. ‘조국통일’, ‘북진통일’, ‘흡수통일’, ‘붕괴통일’, ‘통일대박’, 매한가지다. 모두 분단을 부정하고 자기 중심의 통일, 즉 ‘분단의 극복’을 표방한다. 이렇듯 분단체제가 분단을 부정하면 할수록 남북 양측에서 서로에 대한 의심과 대립과 적대의 힘, 즉 분단의 장력(張力)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지는 물리학이 성립한다. 그러나 분단체제의 자기생산력이란 이것만이 아니다. 이렇듯 자기생산성을 갖는 분단체제의 기득 권력을 비판하고 맞서는 힘 역시 ‘분단극복’을 표방한다. 분단을 극복해야 분단체제가 종식될 것이니 당연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체제는 바로 이렇듯 ‘분단체제극복’을 부르짖는 세력을 기다렸다는 듯이 체제비판 세력, 내부의 적, 간첩으로 낙인찍어 잡아들인다. 수많았던 기획된 간첩사건, 체제전복사건, 내란선동사건들이 그러했다.

분단체제의 적대적 장력은 이렇듯 서로를 외부·예외로 간주하는 남북 간에 형성될 뿐 아니라, 바로 남북의 내부에 외부·예외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겹2중’으로 형성된다. 이 ‘겹2중’이 맞물려 돌아가는 동력 구조가 분단체제다. 내부에 외부를 설정하는 이 ‘내부 적대’의 장치 마련을 통해 ‘외부 적대’의 동력을 증폭시키는 매커니즘이다. 분단체제란 이렇듯 강고할 뿐 아니라 교묘한 자기생산 – 재생산체제다. 70여 년이나 생명을 이어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애초에 문제는 분단을 부정하는 당위의 주체가 하나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분단부정의 당위는 무엇보다 우선 분단부정의 또 다른 당위와 생사존망의 대결 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다. 분단부정의 당위가 또 다른 분단부정의 당위를 부르는 구조였다. 이제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반복적 순환 사이클로 요약할 수 있다.

분단부정의 당위 → 남북 적대의 심화 → 분단독재체제의 강화 → 분단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의 강화 → 분단부정의 당위의 강화

이 순환은 자꾸만 반복된다. 피하고 싶은 불쾌한 증상을 자꾸만 되풀이하는 반복강박과 닮아 있다. 이처럼 철저하게 외부와 내부를 완전히 포괄한 분단구조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위가 강할수록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정언명령의 역설은 분단체제 70년의 현실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분단을 부정할수록 분단이 고착된다는 ‘분단(부정)의 딜레마’는 애초에 둘임을 부정했던 데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딜레마를 끊으려면 둘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가 되자고 하면 오히려 하나가 되자는 둘이 우선 분명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애당초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의 발단이 되어왔다. 둘임을 인정하고, 하나가 되는 노력을 하자는 것이 양국체제다. 이것을 하지 못하고 ‘분단(부정)의 딜레마’에 빠져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미 너무나 컸고 길었다. 북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통일대박’과 ‘종북몰이’를 양 손에 들고 휘둘렀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하에서의 경험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촛불혁명은 유신체제로 되돌아가려 했던 총체적 종북몰이, 블랙리스트 소동을 종식시켰다. 촛불혁명 이후 이 나라의 민심은 마치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 새로운 눈으로 현실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힘에 기초하여 2018년 판문점 선언, 싱가포르 선언, 평양 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어 대한민국 대통령이 평양에서 평양 시민들 앞에서 대중연설을 하였고, 머지않아 서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이 시민들을 만나는 날도 올 것이다. 한 민족의 두 나라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통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길로 접어든 것이다. ‘코리아 양국체제’, 다시 말해 ‘한 민족 두 국가의 평화체제, 공존체제’가 이미 현실로 시작된 것이다.

 

양국체제의 첫 번째 역사적 계기: 반쪽국가의식에서 양국의식으로

그렇지만 양국체제적 인식이 오직 촛불혁명과 판문점·싱가포르 선언을 통해서만 처음 생겨났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큰 변화에는 반드시 그에 선행하는 역사적·예비적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반에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형 사건들이 그러했다. 1987년의 민주항쟁과 1989~1991년 사이의 소련·동구권과 미소 냉전체제의 붕괴, 한소·한중 수교, 그리고 1991년의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교환으로 이어진 초대형 변화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분단체제의 지반을 처음으로 크게 흔들었다. 세계 판도 전체가 크게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변화 속에서 분단의식도 크게 흔들렸다. 분단의식은 ‘반쪽의식’이기도 하다. ‘반쪽만으론 온전하지 못하다’, ‘나뉜 반쪽은 합쳐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생각이다. 반쪽의식에서 양국체제 발상은 나올 수 없다. 양국체제는 두 코리아를 각각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 보기 때문이다. 온전한 국가란 ‘내부의 정당성’과 ‘외부의 인정’이라는 양 측면을 모두 갖추어야 성립한다. 남북이 이 두 근거를 어느 정도 갖추기 시작한 최초의 계기는 1991년의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교환이었다. 이 두 사건은 1987년부터 시작된 세계적 대변동의 연쇄가 낳은 종합적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사 차원에서는 미소 냉전구조의 붕괴가 주원인이었고, 국내적으로는 87년 시민항쟁이 열어놓은 민주화 지향의 강력한 여론이 있었다.

분단의식, ‘반쪽의식’으로 보면 남북의 국가는 ‘반쪽(만의) 국가’일 뿐이다. 우선 이러한 ‘반쪽국가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면 양국체제 발상은 생겨나기 어렵다. 그러나 반쪽국가의식에도 그만한 현실의 근거가 있었다. 냉전시대 남북 국가의 내적·외적 정당성 구조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고 반쪽짜리로 보이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외적 측면부터 살펴보자. 어떤 국가에 대한 외부의 인정이란 국제사회의 인정, 외국과의 수교관계로 표현되는데, 냉전시대 남북의 국제적 인정, 수교관계는 실제로 ‘반쪽짜리’였다 할 수 있다. 한국(ROK)은 미국 영향권의 국가들과만, 반대로 조선(DPRK)은 소련 영향권의 국가들과만 수교하고 있었다.8 나머지 반쪽의 인정이 없었던 것이다. 남북 모두 외부 세계의 절반으로부터만 인정받고 있다는 ‘반쪽국가의식’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내적으로도 남북은 ‘반쪽국가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1948년 두 정부의 수립 이래 남북은 자신이 통일을 목적으로 세워진 일종의 ‘경과적인 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신만이 적통자(嫡統子)고, 자신이 주도하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두 국가 모두 자신이 이미 완결되었거나 완성되어 있는 국가라고 내세울 수는 없었다. 스스로 ‘반쪽국가’이고 따라서 ‘반쪽만의 정당성을 가진 국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반쪽국가의식’이 강할수록 통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반쪽국가’의 정당성이 충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측이 모두 통일을 내세우고 자신만이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통일은 말은 늘 좋지만 실제 의도는 상대를 소멸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냉전시대 남북의 통일정책들은 언어로 하는 전투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총탄을 교환하듯 오갔던 통일정책, 통일방안들이 오히려 통일을 멀게 했다는 것은 역설이라기보다 당연한 결과였다.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은 이러한 관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 채택을 주도했던 것은 한국의 노태우 정부였다.9 소련·동구권 붕괴 이후의 유리한 상황에서 상대를 인정해주더라도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북은 곤란한 상황이었다. 동구권 붕괴 이전까지 북은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해왔다. 통일 주도권이 자신의 편에 있다고, 자신만이 ‘조선반도’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정통성 없는 ‘남조선’ 정부를 굳이 유엔 동시가입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해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냉전의 한 축이었던 소련 중심의 ‘진영’이 무너져 국제무대에서 남과 북의 지지 균형은 한국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여기에 더해서 87년 개헌에 따라 대통령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 한국 새 정부의 정통성을 (야권분열에 따라 군부 출신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제 북은 예전처럼 한국 정부를 무작정 반대하거나 무시할 수 없었다. 체제 유지를 위한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단국의 유엔 동시가입은 1973년 동서독의 선례가 있다. 그러나 동서독 상황이 1990년 급속한 흡수통일로 마감되었다는 사실이 북으로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한국과 수교하고(1990년) 중국이 남북 유엔 동시가입을 지지하자(1991년 5월) 북도 입장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서독의 경우 1973년 유엔 동시가입과 1990년 흡수통일은 별개의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과 흡수통일을 혼동할 이유가 없다. 북은 북대로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 판단의 중심에 물론 김일성 주석이 있었다. 불가피한 일이라면 오히려 이를 자신의 체제 보장을 강화하는 기회로 살려보려 했다.

실제 유엔 동시가입이 북에 대한 국제적 공인을 담보하여 일방적 흡수통일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할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핵무기 철수 등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양보도 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남북 대화가 최고조에 올랐던 1991년 하반기에는 다음 해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취소가 결정되었고, 미국은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를 철수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로 인해 연말에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이뤄질 수 있었다. 북은 결단을 했고, 이로써 유엔 동시가입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남북은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유엔 회원국은 회원국 상호의 주권을 인정하고 서로 침해하지 않는다는 유엔헌장을 준수해야 한다. 따라서 일단 형식 차원에서라도 ‘두 개의 코리아’가 온전한 국가로 공인된 것이다. ‘반쪽국가’가 아닌 ‘온쪽국가’로 인정되었고, ‘반쪽의식’ 자리에 ‘양국의식’이 생겨났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로 다시금 분명히 표현되었다. 3장 25조에 이르는 기본합의서의 핵심은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에 있다. 과거 냉전시대에도 주도권 경쟁 차원에서 그와 유사하거나 또는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구절들을 사용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과 방어 차원의 언어 공세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분명한 합의였다. 크게 달라진 상황에 대한 인식과 이해(利害)의 공통기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많았지만 당시 양측은 이 합의를 통한 공존 기조의 지속에 상당한 기대와 믿음을 공유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모두 크게 흡족해했다. 애초부터 각자의 적대적 체제를 오히려 강화하려는 목적을 숨기고 서로가 일시적으로 이용하였을 뿐이던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때와는 분명히 달랐다. 이 합의로 양국의 자체적·내적 정당성 근거 역시 분명 ‘반쪽국가’에서 각자가 충족된 정당성을 갖는 ‘양국체제’ 쪽으로 이동했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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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1/2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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