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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후원,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발행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친일잔재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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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후원,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발행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친일잔재를 찾아라』

admin | 화, 2021/03/02- 20:24

[후원회원 마당]

경기도 후원,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발행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친일잔재를 찾아라』

김찬수 수원동원고 교사

“선생님, 친일파가 뭐예요?”
“경기도에는 친일인물이 누가 있어요?”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는 무엇인가요?”
“우리 학교 교목(校木)과 교가(校歌)는 왜 일제잔재인가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당연한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에는 범위가 넓고 다양하여 학생들의 궁금증을 다 풀어주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사실은 교육을 맡은 선생님들이 더 답답하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벅찬 감격에 이어 2012년에는 모바일 친일인명사전까지 출시되었지만, 일반인들이나 성장하는 학생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교육자들을 위한 ‘친일교육자료’는 많이 부족하였다. 인물별, 기관별로 여러 가지 노력이 있기도 했지만, 비교적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의 친일파 관련 자료집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 선생님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기댈 뿐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선생님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아주 적절한 친일 관련 역사교육 자료집이 나왔다. 이 자료집은 역사교육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사용하기에 아주 유용하도록 편집되어 1권의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사료편(PDF로 제공)을 포함하여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경기도를 4개 권역 즉 1편 경기도, 2편 경기동부지역, 3편 경기남부지역, 4편 경기서부·북부지역으로 나누어 집필되어 있다. 선생님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혀져 언제든지 찾아서 활용하기에 최적이다. 이제 경기도교육청의 선생님들은 근무지가 바뀌어 어디에서 근무하든 근무지역의 식민지 시대 친일인물과 그 흔적을 쉬게 찾아서 가르칠수 있게 되었다. 1권에서는 일제잔재의 개념과 유형별로 분류하고, 친일인물 중에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과 일제강점기 신사(神社)를 정리해서 설명하였고, 학교생활 속의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들도 한 번쯤 궁금했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일제잔재 용어 사용 문제, 일제잔재 유형, 일제잔재 대상 시기, 일제잔재 청산 관련 사료집이나 관련법 그리고 매국행위 친일인물부터 통치기구 협력자, 군인, 경찰, 친일단체, 문화계 친 일인물을 표로 만들어서 잘 정리하였고, 경기도 곳곳에 있었던 ‘신사(神社)’ 그리고 학교 속의 일제잔재로서 교가와 교표가 왜 일제잔재인지 설명하고 있다.

‘반장’, ‘부반장’, ‘간담회’, ‘결석계’ 심지어 ‘차렷 경례’, ‘수학여행’도 일제잔재라는 것에 지금까지의 교육활동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가평 대성초등학교, 김포 대명초등학교, 동두천 양주 삼숭초등학교, 이천 이헌고등학교, 수원 삼일학원, 화성 정남초등학교의 교표를 바꾸는 노력을 친일잔재 청산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이어 2-4권은 권역별 친일인물, 친일 관련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을 담았다. 지역 출신 친일인물을 분류하여 그들의 행위들을 정리하고 각종 일제강점기 건축물, 기념비, 송덕비, 기념물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조금만이라도 식민지 역사에 대해 궁금해하고 고민한 분들이라면 이러한 자료의 발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우리는 책이 나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한다. 경기도의 후원으로 지역사연구소 중심이신 신대광 선생(원일중학교)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이 기획하고, 김진호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을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철환 선생(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최도현 선생(단원고등학교)이 함께 집필하였다. 이제 이 역작의 활용방안은 각종 교사연수, 토론회, 발표대회, 다양한 교육활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좋은 자료집은 아쉬움도 있게 마련이다. 우선 경기도 지역에 한정되어 아쉽다. 서울과 경기, 인천은 별개 지역이 아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는 지역 구분이 없었다. 현재의 행정구역 경계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아쉽다. 이 자료집으로 서울과 인천이 자극을 받아 이 같은 집필 작업이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시·군 단위 기초자치단체의 세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각 기초자치단체의 문화
원과 이 작업을 함께하면 더 좋을 것이다. 초중고 학생용 친일잔재 관련 교육자료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학생 수준별 서술의 전문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쉽게 쓰여지고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유산답사 해설사나 관련 업무 종사자 분들을 위한 자료제공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최대한 찾으려 노력했겠지만 사진 자료도 적고 편집과 인쇄가 흑백이어서 조금 아쉽다. 더불어, 경기도교육청 차원에서 이 자료집을 모든 역사 선생님들에게 모두 배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자료집이기에 실제 수업을 위한 선생님들의 또 다른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많은 선생님들과 네트워크를 맺어 함께하면 어깨가 좀 더 가볍지 않을까? 교사 연수 때 연수 교육과정으로 담을 경기도교육청의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을사늑약 이래로 40년 동안의 치욕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4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아니 시기적으로 늦어져서 역사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까닭에 더 오래 걸릴 것이다. 해방 이후 세대가 여러 번 바뀌면서 몇 단계로 성장한 친일파 청산 작업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재정치를 경험한 우리 세대에는 친일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갈증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은 지난날의 세대만큼 역사문제에 절실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세대의 역사교육을 책임져야 할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제2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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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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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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