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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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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1)

admin | 화, 2021/03/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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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편집자주

 

1. 박정희와 같은 뱀띠의 다른 운명

분단 한국은 별들의 전쟁이래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진짜 별들과 5·16쿠데타를 비판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다가 투옥당했던 국립 서대문대학(서대문구 현저동의 서울교도소)을 나온 전과자라는 별들의 전쟁 말이다. 교도소에서는 전과 1범을 별 하나, 둘은 투 스타로 불렀는데 원수급인 5성도 적잖으니 아마 별들의 숫자로 보면 국방부의 별보다는 법무부의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두 별들의 차이는 엄청나게 많으나 가장 중요한 점은 국방부의 별들은 한 번 달면 평생을 보장받는 신분적인 우대로 성우회란 막강한 단체가 있으나, 법무부의 별들은 천차만별인 데다 분파가 많다는 점이다. 

1974년 3월 2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이호철ㆍ임헌영ㆍ김우종ㆍ장백일ㆍ정을병 씨의 모습(오른쪽부터)

 

군부독재란 바로 이런 다양한 별들을 과잉 배출하는 별을 찍어내는 공장인지라, 그래서 총총 하늘에는 별들도 많고 국민들 가슴엔 근심만 많은 세월이었다. 박정희와 내가 닮은 건 같은 뱀띠라는 건데, 세속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사주는 정사년(丁巳年) 출생으로 신해월(辛亥月)에다 경신일(庚申日)에 무인시(戊寅時)에 태어난 것으로 소문나있다. 사주에서 흔히 말하듯이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다 들어있는 사맹격(四孟格)으로 고난을 헤치고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천운이라고들 하는데, 이것까지가 가짜라는 설도 파다하다. 그런데 내 사주에는 그 사맹 중 셋은 갖췄지만 ‘신’이 빠진 채라, 복권 숫자가 앞자리에서는 잘 맞아 돌아가다가 마지막이 틀어져 버린 격이라 천을귀인(天乙貴人)이 2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형충파해(刑沖破害)를 당한다는 풀이다. 결국 내가 발산하는 빛은 매우 강하나 구름이 끼어 있어 짱짱하게 빛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각종 운명철학이나 점을 나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해본 소리니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그러기에 믿거나 말거나지만, 별들로 따진다면 박정희나 나나 둘 다 투 스타로 동급이었다는 게 내 소견이다. 그가 5·16 때까지 달았던 별은 투 스타였고 그 뒤에 단 건 말짱 헛것이란 뜻이다. 전두환 역시 12·12반란 때는 투 스타였으나 그 뒤 제 멋대로 별을 더 달았으니 박정희의 판박이다. 세계의 모든 쿠데타는 다 권력욕에 불타는 갱단들의 난장판이라 일단 성공하고 나면 자신의 어깨에다 별들의 숫자를 올렸다. 그렇지 않고 쿠데타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유일한 사례가 가말 압델 나세르로, 그는 거사 때의 대령 그대로 대통령이 되어 제3세계 국제정치사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20세기 정치인 중 내가 좋아하는 순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 후에 자기 손으로 갖다 붙이기 이전에는 같은 투 스타였기에 감히 투 스타였던 내가 당당히 그들과 맞장 뜰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농 삼아 지껄이지만 정작 그들의 별과 나의 별은 천문학적으로 그 좌표도가 완전히 달라 내 인생은 아무리 말로 수식을 해도 험난하기만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초라한 내 인생살이 전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에 두 별들의 사연 중 첫 번째 별을 달게 된 경위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2. 빙고동 호텔

나에게 첫 스타를 달아준 곳은 ‘빙고동 호텔’이었고 때는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갓 발동된 하수상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나와 함께 원 스타를 달았던 동기생으로는 작가 이호철,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5인조로, 세칭 ‘문인 간첩단 사건’ ‘공범’들이다. 이 호텔의 호적명은 육군보안사령부로 군부통치 시절에 스타를 많이 배출했던 남산(중앙정보부)과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과 함께 3대 유명 재야 사관학교 중 하나였다. 이 트로이카 명문 중 빙고동 호텔은 일단 입교하기만 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어딘가에 탈이 난다고 할 정도로 성한 몸으로는 나오지 못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 호텔의 이력서는 찬연하고 그 명칭 또한 화류계 여성처럼 휘황찬란하다.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산하에 설치됐던 정보과(1945.11)가 남조선국방경비대 정보과(1946.1),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대(1948.11), 방첩대(1949.10)란 명칭을 거쳐 육군본부 직할 특무부대(特務部隊, CIC, 1950.10)로 신분을 바꿨다. 그동안 이 기구가 이승만 독재체제를 위하여 비판세력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는 구태여 여기서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월혁명 후 육군 방첩부대로 개칭(1960.7)됐으나 5·16쿠데타 세력은 육군 보안사령부로 개칭(1968. 9), 이어 육군뿐이 아니라 해공군을 망라하여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1977.9), 시종 박정희 군사정권의 버팀목으로 중앙정보부와 충성 경쟁을 전개한 쌍두마차였다. 그러니 내가 입교했던 1974년은 아직도 ‘육군보안사령부’ 시절이었다.
남산 3호 터널이나 반포대교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역 – 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좌회전해서 언덕길을 오르면 그 이태원 입구(지금의 녹사평역. 당시에는 콜트장군 동상이 서있었다), 그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내리막길(지금의 반포대교길, 초라한 도로)을 달리노라면 좌우가 다 미군부대 철조망만 있었다. 길은 좁고 왕래 차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크라운 호텔을 지나면 이내 반포대교로 이어지는데, 그 직전에 동작대교로 빠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이내 왼쪽으로 약간 경사진 곳에 삼엄한 검문대가 나타난다. 지금은 민주기행 코스로 공개되어 있지만 그땐 그 장소 자체가 국가기밀이어서 그냥 ‘빙고동 호텔’이라고 불렀다.
1974년은 정초부터 어수선했다.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유신헌법 철폐)이 발표되자 재빠르게 이튿날 1.8긴급조치가 선포되더니, 10일에는 관할 경찰서에서 우리 집을 다녀갔고 이틀 후 또 방문, 그 뒤 다시 전화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미 이호철은 연행당했다는 소식이고, 함석헌 천관우 안병무 문동환 김동길 법정 계훈제 제씨를 연행, 심문 중이며, 장준하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구속했다는 흉흉한 때였다. 보안사에서 다녀갔다기에 일단 몇일간 피신했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곤 귀가, 17일 밤에 아주 신사적으로 연행됐다. 그들은 항상 한 30분이면 끝난다고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가운데 앉힌 채 양쪽에서 조이면서 검은 지프차는 퇴계로의 모 호텔(현 세종호텔 맞은 편쯤)에 들렸다. 으슥한 방으로 들어가자 마왕이라도 나올 듯한 어두컴컴하고 큰 방 입구에 책상과 걸상이 있는데 앉으라고 강박했다. 잠시 후 내가 태어난 뒤 처음 본 가장 덩치가 큰 중후한, <쿠오바디스>의 우루서스 같은 남성이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도 아닌 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 나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느껴졌던 걸까. 아무리 뜯어봐도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혈통 속에서도 저런 골조의 인간이 있었던가를 의심케 하는 모양새다. 나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냥 얼어붙었다. 반나치 영화에서 레지스탕스들이 잡혀가면 첫 신에서 비슷한 위협적인 장면을 보여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선 덩치에서 아무리 대담한 레지스탕스도 야코가 팍 죽어버린다. 뭐라 한 미디 묻자 마음에 안 들면 마치 기중기가 작은 바위를 들어 팽개치듯이 던져버리는 장면.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나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바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는 꼬나보기에 나는 점점 더 얼어붙었다. 그렇게 아마 한 10분정도 지나자 “데려 가!”라고 딱 한 마디를 천둥처럼 울리게 내뱉었다. 그러자 나를 연행해 왔던 장년 신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사병들이 “예” 하더니 나를 양쪽에서 옥죄며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몇이서 따르며 “본대로 간다, 본대로 간다” 하면서 신이 났다. 겁주기의 제1단계였고, 본대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 심문소, 속칭 ‘빙고동 호텔’이었다.

 

재일동포 잡지 한양 1962년 6월호

 

1층 어느 방, 카펫이 안 깔린 맨바닥에다 벽은 머리를 쳐다 박아도 상처 나지 않도록 특수장치를 했으며, 간이침대만한 쪽에 있고, 화장실은 복도 밖에 있었다. 허리띠부터 소지품 전부를 압수, 의학박사가 간단한 건강진단(얼마나 때려도 괜찮은지를 검토) 등등을 마치고는 인정심문이 끝나면 바로 고문이 시작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이다. 무조건 털어놓으라면서 매질이다. 뭘 털어 놓으라는지도 모른 채 비명 지르기에 혼비백산할 즈음에야 의자에 앉으라더니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다 쓰라는 명령이다. 바로 라이프 스토리다. A4 용지로 한 10매 정도로 얽어서 건네주면 그걸 대충 읽고는 엉터리라며 확 찢어버리고는 더 자세히 쓰라면서 그제서야 큰 인심이라도 쓰듯이 일본 여행 간 적 없느냐, 그걸 자세히 써 넣으라고 일러준다. 그 힌트를 받고나자 아, 바로 재일동포들이 내는 월간 종합 교양지 <한양(漢陽)>을 트집 잡으려는구나 하고 뜬구름을 잡고는 얼핏 통박을 굴려보니 그거라면 자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신통치 독재체제라 한들 죄가 될 것 같지 않았다.
1962년에 창간한 이 잡지는 재일동포들이 주축으로 내는 것으로 그동안 한국 내 유명 문사들(박종화 백낙준 백철 이해랑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 정비석 조경희 유주현 등)이 거의 망라된 필진이 참여했던 데다 한국 보급 총책으로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아주 친숙한 구상 시인이 맡았던 터라 어떤 명분으로도 나 같은 피라미가 얽혀들 것 같지는 않았다. 국회도서관에도 비치될 정도로 전혀 불법이 아니었다. 내 라이프 스토리는 무려 20매로 늘어났으나 그들은 짜증을 내며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이 새끼 안 되겠구먼. 군복으로 갈아 입혀!” 하더니 진짜 그런다. 매질의 예고편이었다. 가끔은 “이 새끼 엘리베이터 태워야 하나”라고도 해서 뭔 뜻인지 몰랐는데, 친절하게 설명도 해준다. 나중 들은 바로는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땅 밑 몇 백 미터로 하강시켜 죽여 시신도 없애버린다는 위협이었다. 실제로 죽이진 않고 그냥 속임수로 땅 밑으로 깊이깊이 내려가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어느 지점에서는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고문 담당자들이 몰려들어 매타작을 하고는 다시 집어넣어 내려가다 보면 또 문이 열려 다른 식의 고문을 행하는 것으로 빙고동 호텔에서 가장 끔찍한 고문으로 자랑하는 메뉴였다. 실은 몇 백 미터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의 조작으로 그런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건 총책을 맡은 ‘강 전무’(한 사건 때마다 그 성과 직함이 바뀐다. 5공 때 민정당 국회의원 이상재)는 이 방 저 방 다니며 고문을 독려했다. 여러 고통 중 바닥에 꿇어앉힌 채 날카로운 구둣발을 옆 날로 세워 바로 무릎 위를 세차게 걷어차는 것인데, 이미 숙달된 그 발길질은 치명적이라 차라리 매를 맞는 게 훨씬 낫다고 할 정도로 며칠간 절뚝거렸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늙어가면서 그 부분은 지금도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시큰거린다. 뺨 때리기는 예사고 몸통 뻗기, 꿇어앉히기, 팬츠 차림 등등은 그들에게 오락이었다. 고약한 자는 아예 발가벗겨 세워두곤 나체를 감상하는데 내 풀죽은 남성 심볼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심문할 땐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아아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저럴 수 있다’는 음향 효과를 배경에 깔고 심문을 진행하는 기법이었다. 오륙 명이 한 조가 되어 그 중 한 명은 내 맞은편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나를 병풍처럼 둘러싼 채 심문자의 말을 큰소리로 반복하거나 윽박지르고 나머지는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군!”이라든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추임새를 수시로 넣어서 단 한 순간도 내가 말할 틈새를 주지 않고 “….했지!?”라고 다그치면 “예”란 대답만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매타작을 하고는 지금까지 말했던 그대로 적으라며 백지와 볼펜을 주고는 사라진 자리에 대학생 징집자들로 이뤄진 사병들이 감시하는 가운데서 나는 손목이 시릴 정도로 ‘대하소설’(내 자서전) 집필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심문과 고문이 거듭될수록 점점 길어져 100매 전후를 넘나들었다.

 

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

 

요지는 ‘북괴의 간첩’들이 내는 잡지인 <한양>지에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았고, 일본 여행 중 그 잡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인으로부터 대접과 선물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국가기밀(원고료가 너무 싸다, 잡지마다 고료 액수가 다르다, 한국 문인들의 근황 등등)을 누설했으니 우리도 ‘간첩’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가정 아래서 엮어낸 데다 그들이 간첩임을 우리가 알고서도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는 논리였다. 세상에! ‘나 간첩이요’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으며, 그런말을 않는데도 그들이 간첩임을 무슨 재주로 우리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보니 개헌서명을 한 이호철과 나는 간첩이고 나머지 셋은 그냥 반공법 위반으로 휘몰아갔다. 징집당해온 근무병들은 옆에서 거의 지켜봤기에 요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망해라!”라고 소리 지르며 노골적으로 나를 동정하면서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해 줄 터니 부탁하라고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마운 한편 이 젊은 것들도 앞잡이가 되었나 하는 의구심이 솟아 뜨악했는데, 며칠 간 지내면서 보니 그게 진심이었다. 어느 수사관은 지나다가 들러 천장의 텔레비전과 녹음장치를 가리키며 조심하란 몸짓과 함께 종이에다 “반공법, 문제가 많다”고 써서 보여주곤 잘게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버리곤 했다. 나중 그는 자기 아내에게 안동사범학교 출신 친구가 있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살갑게 대해 줬다. 이쯤 되니 곧 풀려나겠구나 낙관했는데 며칠 사이에 슬그머니 분위기가 얼어붙더니 그간 정들었던 사법경찰관이 바뀌었다.

 

3. 분단 한국과 서독, 그리고 타이완

“젊은 사람이 매로 다스렸으면 이제 늙은이가 슬슬 엮어서 징역을 보내야지”라며 본격적인 서류작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뜻대로 안되자 사법경찰관이 또 바뀌어 무척 경직된 분위기로 표변하기에 아하, 기어이 징역을 보낼 작정이구나 싶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각료회의에서 문공부장관(윤주영, 당시의 명칭)이 자신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군 관련 기관에서 문인들을 연행해 간 사실을 문제시하여 풀릴 듯 했지만 보안사는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확실한 범죄로 몰아갔으며, 여기에다 예술단체 모 간부(시인)가 은근히 이를 지지해 줬고, 정치권 역시 민주화운동을 억압코자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터라 3박자가 잘 맞아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대단히 유명한 모 여류문인이 육영수에게 은근히 이 사건의 부당성을 진언하자 도리어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반론만 강조하더라는 뒷이야기도 있다. 보안사는 이 심문 및 재판 기간 중 가족들의 대사회적인 구원활동을 막고자 계속 다방에 다섯 구속자의 아내를 불러모아 발을 묶어두곤 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이제 고문자들이나 심문자들과도 말문이 터져서 온갖 이야기도 나눌 처지가 되었다. 필시 그들 자신도 이 간첩 조작이 무리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사를 느슨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문관 중 한 무표정한 분은 월남한 진짜 간첩 출신으로 눈빛이 매섭고 과묵하면서도 어딘가 공포가 느껴졌는데, 한쪽 손 무지가 뭉그러져 있었다. 나중 알게 된 바로는 체포당해 고문을 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왠지 연민의 정이 갔다. 어느 눈이 쌓인 날, 한 호의적인 심문관이 나에게 답답하니 잠시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라며 사병에게 건물 옆 뜰로 산책을 시켜주게 했다. 마침 거기에 바로 그 월남 간첩이 우두망찰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하염없이 허공으로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허망함!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착잡한 심경과 뇌리의 흐름에는 어떤 회한이 서려 있을까. 북녘의 고향과 부모와 어렸을 적의 동무들, 남녘에 와서 얻게 된 처자식들, 자신이 믿었던 ‘인민공화국의 이상’과 남녘의 풍요로운 ‘미제의 식민지로서의 미끼인 달콤한 물질적인 유혹의 삶’의 괴리가 주는 번민, 민족, 역사, 진리, 정의, 그리고 국가, 대체 그런 게 뭐란 말인가. 그는 나에게 가끔씩 “이 사람이!”라는 협박성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눈 덮인 땅에 쪼그
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그 순간을 보고서 나보다 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나 나나 다 강대국에 빌붙어 자기 국민을 괴롭히는 독재세력들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동병상련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나의 속셈을 그도 읽었는지 그 뒤부터 나를 보는 그의 시선도 약간 달라진 듯 했다. 기계론적으로 적용하는 잣대인 전향자 운운이나, 왜 살아남아 그런 반동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치욕스럽게 지내느냐, 어서 자살이라도 해라, 라는 식의 당위론적인 테제만이 정당할까. 물론 이런 내 생각은 나중 두 번째 별을 달고 징역을 살았던 대구교도소의 비전향 장기수들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허물어졌지만 적어도 빙고동 호텔의 눈 덮인 뜰에서만은 잠시 보살처럼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홀연히 엔도 슈사쿠의 가톨릭 순교를 다룬 20세기 최고의 걸작 <침묵>(1966)이 떠올랐다. 원제는 <양지의 향기(日向の匂い)>였으나 편집자의 제안으로 <침묵>이 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에 대한 잔혹성은 가히 세계 최악이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도에게 자행했던 고문의 야만성은 일본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야마 하이리 고문(山入拷問)은 화산인 운젠(雲仙) 온천에 데려가 뜨거운 물 퍼붓기, 뜨거운 바위 위에 세워두기, 입 막고 열탕에 처박기 등이었고, 아나츠리(穴吊り)는 볏짚으로 몸을 꽁꽁 묶어 거꾸로 매달아 머리를 땅구덩이에다 넣어 귀에다 바늘구멍만한 상처를 내어 출혈하도록 해서 며칠 동안 그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피가 똑똑 덜어지는 소릴 들으며 서서히 죽도록 하는 것이다.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의 기둥에 매달아 그대로 숨이 멎을 때까지 두기도 했다. 그 고통을 못 이겨 배교하겠다면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상을 새긴 동판을 더러운 발로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후미에(踏絵)를 시켰다. 일본 농부들은 그런 고통의 고문 중에 죽어갔고 살아남자면 후미에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감행해야만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런 고문은 이겨낼 수 있었으나 자신을 따랐던 신자 농부들을 바로 눈앞에서 살해하는 걸 차마 견딜 수 없었다. 버젓이 후미에를 했건만 하나씩 죽이기에 항의하자 관리들은 이 농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선교사인 당신이 직접 후미에를 하는 것밖에 없다고 윽박질렀다. 차라리 자신을 얼른 죽여 달라고 했으나 그럴 수 없다, 반드시 후미에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다.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자면 결국 배교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런 고뇌의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만 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자문 앞에서 그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너 앞의 그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
에 태어나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踏むがよい。お前のその足の痛(いた)みを、私がいちばん
よく知っている。その痛みを分かつために私はこの世に生まれ、十字架を背(せお)ったの
だから, Trample! Trample! It is to be trampled on by you that I am here.)

 

이런 환청도 들렸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다. / 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누가 말했던가(私は沈黙していたのではない。お前たちと共に苦しんでいたのだ. ” “弱いものが強いものよりも苦しまなかったと、誰が言えるのか?)” 이래서 주인공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해서 농부들을 살려냈고 자신도 생명을 부지했다. 그러나 섬나라 관료들의 잔혹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드리고로 하여금 순교로 죽은 한 농민의 아내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일본을 위해 서양문물을 번역, 소개하도록 강박했다. 그의 사생활 일체는 감시 하에서 십자가를 상징하는 어떤 것도 가까이에 두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다가 후배 선교사들이 오면 그들을 배교시키도록 설득작전에 나섰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내가 이 소설을 중시한 것은 인간의 신념과 현실적인 괴리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병립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인간존재의 근본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이런 잔혹성을 바탕 삼아 제국주의로 중무장하여 우리나라를 침탈했다. 식민지시기에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잔혹성의 뿌리는 섬나라의 편협한 ‘부시도(武士道)’이며, 그 연장선이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었고, 그 유산이 점령지에 내린 탄압이었음을 나는 느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했던 그들의 악랄한 전향 강요는 이 기독교 배교시키기와 너무나 닮았다. 이걸 그대로 전수받은 게 8·15 이후 친일세력들이 지배했던 권력의 대행자였던 정보기관이었음을 연상하는 데는 통박을 그리 많이 굴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향자의 운명은 아마 두꺼운 책으로도 모자랄 지경일 만큼 한국 근현대사의 비화로 흥미진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권에 투신했던 왕년의 열렬한 투사 출신들 중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인사들의 행적만 추적해도 어디 소설 <침묵>에 그칠손가.
북에서 월남해 오면 반드시 북한 비난 대중강연에 동원하여 반공캠페인을 벌리기 일쑤다. 꼭 그 길밖에 없을까? 아니다. 동독의 작가 우베 욘존은 작품 출간이 불가능한 데다 직장도 보장 못 받자 서독으로 갔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끝내 ‘망명‘이란 단어를 피하고 “10년 동안만 사용했던 국적을 반환하고 서베를린 당해지 관리의 허가를 얻어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는 장편 <여수(旅愁)>(1961)에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의 피난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자상하게 소개해준다. 위생검사 후 심문 내용은 성명과 연령 및 가족, 탈출하게 된 동기, 동독에서의 직업과 생활상태, 희망하는 직업과 살고 싶은 지역 등으로 5~10분이면 끝난다는 것이었다. 바로 수용소로 보내져 비행기 등 교통사정과 직장 알선 때문에 7~8일간만 기다리면 이주절차가 완료된다. 스파이가 많을 텐데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서독은 이미 동독의 문제인물 리스트를 장악하고 있기에 문제없으며, 설사 놓치더라도 언제나 적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첩이나 국가변란죄의 최고형은 5년이라며 서독 검사는 주인공 춘우에게 반문했다.

 

“귀국에서는 얼맙니까.”
“사형입니다.”
이번에는 검찰간부가 깜짝 놀랐다.
“왜 사형합니까.”
“국가를 전복시키는 건데 그에서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당신네 나라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러한 죄수를 감옥에서 그냥 가두어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6년간 사랑으로서 감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박계주, <여수>)

 

중국도 마찬가지다. 타이완 출신 여류작가 천뤄시(陳若曦)는 미국 유학 중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베이징으로 가서(1966) 잘 살다가 다시 타이완(1973)으로 돌아왔다. 관계당국은 그녀의 ‘망명’을 환영했으나 이 작가는 끝내 그 단어를 피하며, 자신은 ‘반공 의거’가 아닌 ‘중국인의 증언자’라고 주장했다.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여행을 다녀오기에 제일 위험한 지역이었고, 특히 유학생에게는 더욱 위태로웠다. 조총련이 워낙 센 지역이라 미처 알지도 못 한 채 걸려들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학금제도가 조총련계에 많아서 함부로 받으면 바로 ‘간첩’으로 일생을 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타이완은 한국과 달랐다. 그들은 중국계 장학금을 받으면 관계기관이 소환하여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더 이상 말려들지만 말고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도록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빙고동 호텔에 대해서는 김병진의 <보안사>(소나무, 1988)가 실감나게 그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재일동포 유학생으로 보안사에 연행, 고문 유경험자로 거기서 2년간 근무 후 사직하고 이 책을 통해 그 사실을 폭로했다. 이곳이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 사건을 주로 다룬 곳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서승-서준식 형제들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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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을 차근차근 들추다 보면 형제, 부자, 조손, 사촌 등 혈연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함께 실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박기순과 박영철이 그런 경우다. 국가도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전북 전주에서 미곡상으로 시작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친일파하면 떠오르는 ‘명성’을 얻기까지 이 부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신도시 개발 특수를 누리다
박기순(朴基順, 1857~1935)의 장례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매일신보>1935.10.6)에의하면,그는 40세가 넘어서야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생전에 1만 5천여 석을 넘길 정도의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79세에 사망했으니 그의 재산 형성 시점은 일본인들이 경제침탈을 본격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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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과 취향정(醉香亭). 취향정은 박기순이 1917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전주 덕진공원 내 연지에 세운 정자다.

 

박기순은 열두 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느 상점의 사환 노릇을 하다가 미곡상으로 독립하였고, 전주평야의 미곡을 군산에서 인천으로 내다 팔아 큰 이득을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토지를 사들여 만석꾼의 이름을 얻었고, 당시 전라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토지왕’이 되었다.(<삼천리>,1931)특히박기순은신도시‘이리’(지금의익산)개발과정에서막대한시세차익을얻었다. 오늘날의 강남 개발이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벼락부자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일본 자본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에 주목했다. 강제병합 후 그들은 이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181920년대 이리역 주변 모습

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그 과정에서 군산과 전주를 사이에 둔 식민도시 이리가 개발되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경성-대전-이리-나주-목포로 연결되
었고, 그해 11월에는 이리와 전주를 잇는 전북경편철도가 개통했다. 10여 호에 불과하던 작은 마을 ‘솜리’는 가로로는 군산과 전주, 세로로는 경성·대전과 목포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거듭났다. 신도시 이리 개발은 식민지경영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총독부 권력층의 의도와 일본인 대토지자본가들과 박기순과 같은 일부 조선인자본가들의 적극적 개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박기순은 신도시 및 역세권 개발의 혜택을 온전히 누렸다. 원래 박기순의 소유 토지는 전주도심이 아니라 외곽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주로 이리역, 구이리역, 대장촌역, 삼례역, 전주역, 신리역 등 경편철도 연변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도시·경편철도·역세권 개발로 이어진 토지가치 상승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그의 토지는 1930년 현재 685정보였고, 사망하기 2년 전인 1933년 조선신탁주식회사에 320만평을 신탁했는데 당시 토지 시가는 150만 원에 달했다.
그렇다고 떨어지는 감을 누워 받아먹은 것은 아니다. 박기순은 전주경편철도설치기성회 회장을 맡아 전주-이리간 경전철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철도가 개통한 후 1916년에는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 이사까지 맡았다.
개발에 필요한 기부도 아끼지 않았다. 1912년부터 1919년 사이에 박기순은 호남선 부지, 전주-군산 간 도로부지, 전주-영동 간 도로부지, 전주 덕진공원 건설비, 전주 다가공원 방천석축, 전주 다가교 가설비 등을 기부했다. 그 덕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0세트와 감수포장 등을 받았다. 자신이 소유한 땅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차역과 시가지가 개발되도록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의 관계도 잘 관리했다. 여산군수, 조선식산은행 이사, 전주면협의회 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지역 유지들이 일제 협력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밟아갔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북자성회를 조직한 점이 주목된다. 당시 3.1운동을 방해하고 저지할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대 단체가 조직되었다. 자제단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북자성회 규약에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는 자를 배척하며, 그러한 자가 있다면 곧 본부장이나 지부장에게 밀고할 의무’를 명시했다. 박기순은 이 단체의 조직에 앞장섰고, 전주지부의 지부장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힘을 보탰다. 박영철은 1912년 8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전북 익산군수를 지냈다. 신도시 이리가 개발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즉 박영철은 신도시 개발과 주변지역을 잇는 도로 및 철도 개설에 있어서 관권 즉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실행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식민권력을 등에 업은 부자의 콤비플레이는 그들을 일약 전북을 대표하는 갑부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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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업은행 은행장 시절의 박영철(52세)

 

이제는 중앙이다
터닝포인트는 조선상업은행이었다. 1931년 박영철은 전국적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인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 자리를 꿰찼다. 전북을 주름잡던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을 대표하는 자산가로 도약한 것이다.
1920년 박기순은 전주에서 삼남은행을 설립했다. 미곡상을 거쳐 신도시 개발에서 축적한 막대한 토지자본이 금융자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전주 지역 대지주와 유지들이 대주주이자 경영진으로 참여했다. 그렇지만 삼남은행이 성장해 가는 몇 년 동안 박기순은 대주주와 중역들을 차츰 물갈이해나갔다. 기존 주주들이 매도한 주식은 박기순 일족이 사들였다. 1925년 무렵이 되면 본인이 사장이자 최대 주주였고, 아들 박영철을 비롯한 박준철, 박판철, 박신철 등 일가붙이가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했다. 삼남은행은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주식 세습구조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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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상업은행

 

박기순은 삼남은행을 경영하면서 전북경편철도, 전북잠업, 전북축산주식회사 등의 이사로 참여했다. 은행가로서 그 재력을 토대로 다른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의 기업활동은 전주를 넘어 익산, 남원, 군산 등지로 확대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각종 공직과 사회단체, 학교조합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제 박기순은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이자 유지로 성장했으며, 1924년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명망과 사회적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중추원 참의가 되고 전북을 대표하는 지역유지가 되었지만, 박기순의 경제적 기반은 여전히 지역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적 레벨의 자본가로 발돋음하는 것은 아들 박영철의 몫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의 길을 걷던 박영철은 강제병합후 행정관료로 변신했다. 처음 부임한 곳이 전북 익산이었고 앞서 보았듯이 신도시 이리 개발과정에 힘을 보탰다. 조선총독부 지시에 철저히 순응하면서도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여 신도시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익산군수에 이어 도참여관, 도지사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때 박영철은 새로운 도약을 모색했는데 바로 중앙 재계로의 진출이었다.
함경북도 지사를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난 박영철은 박기순으로부터 삼남은행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곧바로 조선상업은행과의 합병을 단행했다. 1928년 5월 당국의 인가를 받은 은행 합병으로 조선상업은행은 전국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이 되었고, 삼남은행은 6개월 뒤 단행된 ‘신은행령’(자본금 200만원 이상의 주식회사가 아니면 은행 업무를 할 수 없음)의 파고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금융정책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할수 없었을 발빠른 대처였다. 박영철은 조선상업은행 부행장에 취임했다. 지역 관료출신인 박영철이 본격적으로 중앙 재계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선상업은행 은행장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는 토지의 민영휘, 금광의 최창학, 방직의 김연수와 함께 조선인 4대 재벌로 불렸다.(<삼천리>, 1932) 박영철은 차츰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1930년에는 조선미곡창고회사 이사, 1932년 10월에는 조선철도회사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 1932년 12월 조선신탁주식회사 이사가 되었다.
이 회사는 경제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신탁업무를 담당했다. 박기순이 이 회사에 320만 평(시가 150만 원)의 부동산을 신탁했으므로 박영철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밖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맥주회사,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 등의 중역을 맡았다.
조선의 4대 재벌이라 해도 총독부 권력과의 돈독한 관계는 필수였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확전해 가는 동안 박영철은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부육군병지원자후원회 등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의 주요간부로 활동했다. 또 조선미곡조사위원회,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저축장려위원회, 물가위원회, 시국대책조사회 등에 참여하는 등 총독부의 식민통치 파트너로 활약했다. 이제 박영철은 “한상룡과 함께 중앙의 중요한 지위에서 활약하는 조선 문제의 대표자”란 평판을 얻었다.(<시정25년기념 약진지조선>, 1935)
한시에서 드러나는 친일의 진정성 박영철은 일제강점기에 군수, 도지사, 중추원 참의를 비롯한 고위 관공직을 역임했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 조선 재계에서 알아주는 전국구 재벌이었다. 그렇다 보니 박영철이라고 하면 친일파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박찬승 교수는 박영철을 일러 ‘전방위 활약을 보인 친일파’라 표현했다.(<친일파99인>,1993)그런데 박영철은 많은 한시와 여행기, 그리고 회고록을 남긴 문학인이기도 하다. 현재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1921),<아주기행(亞洲紀行)>(1925),<구주음초(歐洲吟草)>(1928),<오십년의 회고(五十年の回顧)>(1929),<다산시고(多山詩稿)>(1932,1939)와같은 저작이확인된다.
친일파들이 하는 흔한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것이다. 내심으론 일제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제 권력의 위협과 강제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허접한 변명에 불과하다. 특히 박영철의 시와 산문처럼 내면의 목소리가 담긴 문학작품은 그런 변명을 일축할 분명한 증거가 된다.
<다산시고>를보자.다산(多山)은박영철의호다.박영철은1932년에자신의한시를모아이 책을 펴냈고, 그후에 쓴 시를 합쳐 1939년에 다시 같은 제목의 책을 냈다. 모두 859수의 한시가 실렸는데,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 가운데 대략 100여 수를 친일작품에 해당한다.

  風雲日露兩交兵 풍운처럼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니
  東亞安危在此行 동아시아의 안위가 여기에 달렸구나
  萬里從征投筆起 만리 출정길에 붓 던지고 일어서니
  誰知定遠是書生 정원후(定遠侯, 班超 33~102)가 서생임을 누가 알리요
 〈종군일로전역 從軍日露戰役, 1904〉

박영철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그때 지은 시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동양과 서양의 대결로 인식하고, 동양의 평화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초를 떠올렸다. 후한시대 학자였지만 무인으로 자원해 서역 흉노원정에 용맹을 떨친 반초처럼 자신도 붓을 던지고 일본의 대륙 진출에 공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서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동양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연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위해 내세웠던 이른바 ‘대동아합방론’에 정확히 부합한다.
박영철은 일본에 공감하여 그들의 조선 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식민지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다. 박영철이 추구하는 세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번영과 함께 했다. 따라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추구하는 행동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 발전을 돌이키려는 것으로 보았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함경북도 참여관이던 박영철은 “신정(新政) 이래 생명재산의 안전 또는 교육 민업의 발달은 구한국정치에 비할 바가 아님은 누구라도 이의 없을” 것이니 성과 없는 무모한 운동은 그만두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란 것도 두 민족이 같은 수준에 이르면 권리의무에 차별이 없어질 것이란 희망도 피력했다.
박영철에게 조선은 ‘일본 내지가 연장된 곳’이었다. 동민회(同民會) 활동은 그런 생각의 실천이었다.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주장하며 참정권 청원 운동을 벌인 단체다. 즉 제국 신민의 일원이란 의식의 내면화를 기반으로 조선인들에게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였다. 서구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1928년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본 후 박영철의 감상은 이런 시로 표현되었다.

  白黃人種各西東 백인종 황인종이 각기 서양과 동양을 차지해
  文字方言互不通 문자와 지역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欲求平和長久策 평화를 이루려는 장구한 대책은
  先須全亞結心同 먼저 모든 아시아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세계대세 世界大勢, 1928〉

러일전쟁 한복판에서 가졌던 박영철의 다짐은 2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이 재현되었다. 이제 일본과 조선을 넘어 동양이 하나가 되어 서구 열강을 막아내야 한다. 드디어 일본 제국의 성장과 번영이 중국대륙으로 뻗어 나가니 박영철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아래는 1932년 만주국에 가서 발표한 경축시,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공략하는 일본군대를 찬양하는 시다.

  滿洲九月下天兵 9월 만주에 하늘의 군사가 내려오니
  一境簞壺老幼迎 노유를 막론하고 밥 싸들고 환영한다.
  革舊而今新政好 옛 제도를 혁파하니 이제 새 정치가 좋아서
  三千萬衆得蘇生 삼천만 민중들이 다시 살아났도다.
  〈축만주신건국 祝滿洲新建國, 1932〉

  北京戰捷又南京 북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함락하니
  萬里山河旭日隆 만리산하에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네
  赫赫皇威光四表 혁혁한 천황 군대의 위세 사방에 빛나니
  東洋自此保平和 이 때문에 동양이 평화를 유지하는구나
  〈황군위문가 皇軍慰問歌, 1937〉

1937년 박영철은 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가 되었다. 시에서 보듯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이고, 더 나아가 만주와 중국도 일체라는 대동아공영론을 확신하고 있다. 일본 군대는 침략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해방자였다. 만주의 민중들을 다시 살린 일본 군대는 하늘이 내린 천병이요, 중국대륙을 점령한 천황의 군대는 동양의 평화를 가져올 평화유지군이었다. 일제의 전쟁은 동양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한 성전이었다. 당연히 조선 사람도 신성한 일본의 전쟁에 동참해야 했다.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중추원 참의 박영철은 “반도민의 국민관념에 신기원을 그은” 것으로 평가하고, 신성한 의무를 위해 “부디 모범적이고 개인이나 가정에 치부가 없는 자신 있는 사람이 지원”하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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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시절 박영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박영철 총영사는 북중국과 몽고 각지를 순회하며 일본군을 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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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유람록>과 <아주기행>

 

박영철은 시 외에도 기행문과 회고록 등을 남겼다. <백두산유람록>은박영철이전라북도참여관이던 1921년에 출간한 것으로 백두산 기행문과 시를 엮은 것이다. <아주기행>은강원도지사 시절에 발간한 기행문으로 백두산·지리산·한라산 등 국내여행지와 일본·대만·간도·블라디보스톡·만주·몽고·중국 등 해외를 견문한 것이다. <구주음초>는1928년암스테르담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3개월에 걸쳐 아시아·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오십년의회고>는박영철이51세되던1929년에낸 회고록이다.한글이나한문이아닌일본어로 썼으며, 본인의 행적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주 독자층으로 일본인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조선 멸망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 돌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창궐과 관리의 부패, 정의와 공적 도의의 전멸 등을 꼽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한 민족성, 낮은 문화와 생활수준을 지적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사대주의적 자학사관에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 박영철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박순(朴淳)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본래는 양반이었지만 점차 가세가 기울어 박기순 대에 이르러서는 평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미곡상으로 시작해 ‘토지왕’으로 이름을 날리는 등 형편이 나아지자 한학에 관심을 쏟았다. 1935년 박기순이 사망할 때 그의 집에는 3만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박영철도 일본에 유학가기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이후 한시를 즐겨 짓고 한문으로 저작을 남기는 등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인지 고서화와 시문 등 전통예술에 큰관심을 기울였다. 경성 소격동 144번지(현재 정독도서관 앞 선재미술관 자리) 박영철의 저택
에는 추사 김정희와 오세창 등의 그림과 글씨, 고려자기 등이 널려 있었다. 1930년과 1932년에는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고서화전람회에 유명한 고서화를 다수 출품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를 이룬 경제력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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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역화휘>와 <근역서휘>

 

그런데 박영철을 단순히 수장가로만 평가하고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당시 박영철은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아 <근역화휘(槿域畵彙)> 3책과 <근역서휘(槿域書彙)> 35책을 펴냈다. <근역화휘>는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림 67점을 수록한 것으로 안견의 그림으로 전하는 산수도, 신사임당의 그림 등이 실렸다. <근역서휘>는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망라한 책이다.
흩어져 있던 고서화를 모으고 위창의 안목에 기대 가치 있는 작품들을 책으로 엮었으니, 우리문화유산의 정수들이 실렸다고 평가된다. 특히 1932년 5월에는 <연암집(燕巖集)>을 17권 6책으로 간행해 냈다. 학계에 ‘박영철본 <연암집>’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그동안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열하일기>와 <과농소초> 등 연암 박지원의 저작을 최초로 공간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으며, 내용 또한 매우 정확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국역 연암집도 박영철본을 대본으로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39년 박영철이 사망한 후 유족은 경성제국대학에 115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자신의 수장품과 진열관 건립비를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라는 박영철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거기엔 <근역화휘>, <근역서휘> 외에도 김정희, 이황, 정약용,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이를 기초로 경성제국대학진열관을 건립했고, 이를 인수한 서울대학교는 1946년 부속박물관을 개관했다.
박영철의 인생에서 <근역화휘>, <근역서휘>, <연암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데 일조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어 보인다.
박영철이 고서화를 수장한 것은 한학에 관심이 컸고 한시와 서화 등을 즐겼던 그의 성정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또 자신의 수장품을 조건없이 기증하고 심지어 전시실 건립비까지 쾌척한 사실은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박영철이 수장품을 기증한 곳이 서울대학교가 아닌 경성제국대학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 군대가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박영철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 역시 일본이 건설할 ‘대동아’의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민족의 유산,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일본이 대동아주의를 내세우며 추구한 동양성의 한 축을 담당할 미래 가치였다.

아버지와 아들, 친일파의 오명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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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이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렸다는 <동아일보> 1939년 3월 15일자 기사.

 

1939년 3월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한 박영철에게 일본 천황은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리고 훈2등 욱일중수장을 추서했다. 당시 박영철의 사망으로 뇌일혈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의학박사 김성진은 “뇌일혈이란 대체로 지식계급에 많은 병입니다. 그 이유는 혈액이 몰려오는 기회가 노동자보다는 훨씬 많기 때문에 출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압이 높아져서 혈관이 파열되어 뇌에 출혈을 일으키게 됩니다. 장소가 뇌인만큼 위험하고 또 뇌를 많이 쓰는 저명인사에게 많게 됩니다. 대체로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이에게 많은 병으로 노동자에게는 좀 드문 병입니다.”(<매일신보>1939.3.15)라고설명했다.
뇌일혈이 노동자보다 지식계급에 많은 병이라는 설명은 지금의 의학상식으로선 동의할 수 없지만,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설명은 일견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아마도 박영철의 비대한 몸집을 염두에 둔 설명인 듯하다. 박영철의 사진들을 보면 그의 체구 변화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깊어짐과 함께 박영철의 몸집도 비대해져 갔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땅에서 지배자에게 코드를 맞춘 삶으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해방 후 그들의 고백처럼 세상이 뒤바뀔 줄 몰랐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부자가 나란히 치욕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줄은 짐작이나 했을까. 대를 이어 친일한 사람들 중 아랫대의 누군가는 해방을 맞아 일제의 패망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박기순-박영철 부자처럼 해방 전에 목숨이 다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친일로 이룬 부를 누리다 삶을 마쳤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친일파라고 평가받는다면 그 치욕이 배가되지 않을까.

∷ 권시용 선임연구원

월, 2017/08/0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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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사 · 25

대한의원 100주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년 기념우표

SNS가 사람들 간에 절대적인 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표는 그만큼 대중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표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수집가들에게는 새로운 우표 발행이 큰 관심거리다. 특히 특별한 날이나 역사적 사건을 오랫동안 기념하고 싶을 때 가장 떠오르는 것이 바로 우표 발행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난데없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으로 논란이 일었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6년 5월 결정된 사안이었고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에 연구소의 대응도 늦었지만 다행히 발행 결정을 취소시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번 달에는 우표와 관련된 연구소의 몇 가지 활동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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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5일 우정사업본부는 서울대학교병원의 요청으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160만 장을 발행했다. 당시 서울대병원 측은 1907년 설립된 대한의원이 현재 서울대병원의 전신이라고 하면서 서울대병원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였고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신청했던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당시 일제의 통감부는 광제원, 의학교와 그 부속병원, 대한적십자사병원 등 세 병원을 통합해 대한의원을 설립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을 거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일조했다. 이 같은 사실을 지적하며 연구소와 의학사 연구자들은 “대한의원은 일제 통감부가 한국인 회유책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일제 식민통치를 미화할 소지가 있”기에 기념사업 재고를 요청했다. 한국정부의 전신이 통감부나 조선총독부가 아니듯이 국립 서울대병원의 전신이 통감부가 설립을 주도한 대한의원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연구소는 우표 발행 저지를 위해 서울대병원,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청구하는 한편 우표발행 중지 가처분신청을 서울지방법원에 냈다. 이 당시 가처분신청은 현 성남시장으로 연구소 자문 변호사였던 이재명 변호사와 김한규 변호사(전 서울변협 회장)가 맡았다. 그러나 3월 21일 가처분신청은 기각되었다. 기각 결정이 난 바로 다음날 우정사업본부에 ‘반민특위 출범 60주년 기념우표 발행 요청’ 공문을 보냈다. “반민특위 출범 60주년인 2008년에 기념우표를 발행하여 국민들에게 반민특위의 정신을 널리 알려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의 큰 뜻을 되새기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취지였고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과 같은 일제 식민통치 미화정책에 맞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정사업본부는 5월 21일 반민특위 기념우표가 2008년 발행대상에 선정되지 않았다고 알려왔다.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의 경우와는 반대로 연구소가 신청하여 기념우표를 제작한 적이 있다. 바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우표’로 2011년 6월 10일 100만 장이 발행되었다. 우표에 들어갈 그림과 문구, 설명 등 거의 전반적인 내용을 연구소가 제안했다. 신흥무관학교 당시 사진이 전무한 탓에 우표에 들어갈 이미지는 독립기념관 제5전시관에 있는 ‘무명독립군상’에서 따왔으며 신흥무관학교의 지향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신흥무관학교 교가의 3절 가사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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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 새나라 세울 이 뉘뇨 /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 두팔 들
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떳다

04

2014년 3월 26일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 기념우표’를 기획, 제작했다. 2010년 우정사업본부가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한 우표를 제작한 적은 있지만, 민간이 주도해 안중근 의사 우표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는 우정사업본부가 심의를 거쳐 제작
하는 기념우표와 달리 ‘나만의 우표’라는 우표발행 서비스를 통해서 가능했다. 보통 ‘나만의 우표’는 가족이나 기업들이 소량 제작 하지만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 기념우표’는 이례적으로 우표세트 1만 매(1세트 14장)를 제작했다. 우표 발행 소식이 알려지자 판매를 맡은 연구소에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주문 전화가 넘쳐났다. 우표 수익금 전액을 안중근 의사 기념·연구 사업에 기부했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적폐청산’은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기념우표라는 아주 작은 것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 곳곳에서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또 무엇을 청산할지 두 눈 부릅뜨고 살필 일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7/07/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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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조근송 명예회장

정리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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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준 열사의 외손자인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조근송 명예회장

 

우리 연구소는 헤이그 특사 110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집터 위치가 ‘안국동 152 및 153번지’였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하고 종로구청을 통해 표석신설 신청서를 제출한 결과, 지난 3월에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표석설치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 자리가 1907년 헤이그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회를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공간적 의미가 모두 고려된 결정이었다. 이준 열사 순국 110주년이 되는 7월 14일 해당 표석의 설치 제막식이 거행될 예정인데, 이에 앞서 이준 열사의 유족 대표인 조근송(趙根松) 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문 :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근송 선생님은 이준 열사의 외증손이신데, 가계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 이준 할아버님은 어렸을 때 아버님과 할아버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셨는데, 외롭게 크신 분이기 때문에 정이 많고 또 혼자이시기 때문에 깐깐한 면도 계셨다 그래요. 저의 증조부 조시범(趙時範)과 이준 할아버지는 같은 서당에 다니던 학동이었습니다.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서 일찍 장가를 들어 태어난 분이 따님 한 분과 아드님 한 분인데, 맏딸이 저의 할머님 이송선(李松鮮)이예요. 그 할머니 이름의 ‘송’자를 따서 제 이름에 붙였다고해요. 아들 이름이 이종승(李鍾乘)인데 이용(李鏞)으로도 부르죠. 그리고 서울에서 또 한 부인을 얻었는데 이분이 이일정(李一貞) 여사입니다. 이분 슬하에 이종숙(李鍾肅)이라는 따님한 분을 두었습니다. 어릴 때 사직동에 계셨는데 맨날 놀러도 가고 용돈도 얻고 그랬습니다. 이분들은 눈이 잘 안 보이는 병을 얻어 고생이 많으셨어요.

문 : 유족들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답 : 저의 집 쪽으로 아버님 조윤(趙潤)은 1971년에 돌아가셨고, 제 위로 형님이 세 분 계셨는데 다 돌아가셨어요. 누님도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여동생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이용 할아버지 쪽은 이열(李洌)과 이활(李活) 이렇게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준 열사의 친손자들은 지금 전부 이북에 있습니다. 그 후손이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 파악이 안 되니까 심지어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고 싶은데 못하고 있어요.
이종숙 할머님 쪽으로 유성천(柳星天)이라는 따님 한 분이 계셨으나, 지난 2011년에 돌아가셨어요. 이 아주머니 밑에 아들 둘하고, 딸 하나가 있죠. 이종숙 할머니의 사위가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낸 이규현(李揆現) 씨예요.

문 : 이준 열사의 집터에 관해 따로 전해 들으신 얘기가 있는지요?
답 : 안국동 집터 위치는 옛날 아버님이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이준 할아버지가 이곳에 계실 때 민영환 선생과 교류가 많았다고 그래요. 집들이 서로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그 집안을 너무 잘 알고, 민영환 선생이 자결하실 때 상하이에 계시다가 급거 귀국하셨대요. 집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민충정공이 자결하신 그 칼을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는데 그 칼이 헤이그로 가실 때 없어졌답니다.

문 : 선생님께서는 원래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답 : 저야 뭐, 이공계 전자 쪽을 나와서 금성사 중앙연구실에 있었죠. 디지털파트예요. 하나의 에피소드를 말하면 학생들이 사용하던 OMR 카드, 그 포맷을 제가 정했어요. 1980년대에 에어 스페이스 매니지먼트(공중공용관리)라고 군사용 프로그램 개발에도 관여했고요, 가상현실(VR)도 1995년도에 제가 처음 했었죠. IT쪽 일을 계속하다가 대신증권으로 옮겼어요. 당시 한국의 증권산업의 통신인프라가 취약했었는데 이 일을 담당했습니다. 지금의 증권전산망이라든가 이런 것을 안정화시키는데 힘을 기울였지요.

문 :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일은 어떻게 관여하시게 되었습니까?
답 : 헤이그에 있던 이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오던 1963년도부터 추도식에 계속 다녔는데 이일정 할머니의 외손녀인 유성천 아주머니가 유족 대표로 하시고 나는 그냥 참여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7년 헤이그특사 100주년 기념행사 때 예전에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무를 하고 이준 열사 유해를 모셔올 때 영정도 들기도 했던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 이준 열사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언론에 나오고 한 일이 있었어요. 그때 KBS 열린음악회에 그 사람을 유족이라고 데려다 앉혀놓고 사진도 찍고 했던가 봐요. 북청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사셨던 형님들이 그 사정을 훤히 아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그래서 가짜가 드러났는데, 이 문제를 따지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제 이름이 노출되고 제가 이준 열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많이 알려지게 된 겁니다. 문화공보부 자료에 보면 이준 열사 유해 봉환 때 유족들이 몽땅 모여서 찍은 사진이 있어요. 형님들 계시고, 형수들 계시고, 사직동 할머니, 성천이 아주머니, 이규현 씨도 있고, 꼬마들까지 다 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이 유족들이 다 모여서 찍은 것으로 유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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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준 열사 유해봉환 국민장의식 1907년 7월 순국한 후 56년 만인 1963년 9월 30일 환국한 이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10월 4일 10시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이후 현재의 수유리 묘지로 운구하여 오후 3시 30분에 하관하였다. 가운데 검은 완장 찬 여성이 이준 열사의 작은딸 이종숙.

3 이준 열사 유해봉환 당시 수유리 묘역에서 촬영한 유족 사진(1963.10.4) 사진의 앞줄 가운데에 선 남자 아이가 인터뷰 당사자인 조근송 명예회장이고, 바로 뒤쪽에 이준 열사의 따님(이종숙), 그 오른쪽에 부친(조윤, 두건 차림)과 모친이 나란히 서 있다. 다시 왼쪽으로 이준 열사의 외손녀(유성천)와 그 부군(이규현, 검은 넥타이 차림)의 모습이 보인다.

 

문 : 이준열사기념사업회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답 : 1946년도에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시작될 때 함태영(咸台永) 선생이 초대 회장을 하셨어요. 이분이 이준 열사보다 연세 차이는 많지만, 같이 법관양성소 출신이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1945년에 해방이 되고 이준 열사의 아들인 이용 장군이 북쪽에서 못 빠져 나왔고, 소련군 점령하에 있다가 이듬해 5월에 월남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남에 와서 7월 14일 순국일에 제사를 지낼 때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답니다.
그 이후 김창숙 선생 등 여러 저명인사들이 기념사업회를 이끌었는데,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 이갑성 씨와 같은 경우에도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봤고, 꼿꼿하고 마르게 생긴 윤치영 같은 이도 기념사업회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친일행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제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어쨌건 이렇게 왔는데 근년에 기념사업회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지금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전재혁 씨라고 정보기관 출신인데 용공이니 반공이니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요. 또 깜짝 놀란 게 안두희를 열혈청년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난 당신하고 일 못 한다 강력 반발했더니 이준열사기념사업회는 유족이 필요없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그래서 보훈처에도 얘기했지만 사단법인 내의 문제이니까 방법이 없다 이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스스로 기념사업회를 나가는 것은 반대입니다.
현재 명예회장이고 제가 들어가겠다는 것은 자기들이 인정했으니까 말이죠. 회장은 2, 3년을 하고 넘기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람은 벌써 만 10년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문 : 이준 열사의 아드님이신 이용 장군에 대한 말씀을 좀 들려주시죠.
답 : 1907년에 이준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 충격으로 큰 따님인 저희 할머님(이송선)이 식음을 전폐하시다가 불과 1년 만인 1908년에 스물여섯 나이로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은 만 두 살짜리로 북청 외가에서 컸는데, 그때 이용 장군이 안아서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한테서 이준 할아버지보다는 이용 할아버지 얘기를 더 많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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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0년대 찍은 이준 열사의 아들인 이용 장군(가운데)과 그의 아들 이활(왼쪽), 이열(오른쪽) 사진. ⓒ 조근송

이분이 하신 일은 대한민국 무장투쟁사를 다시 적어야 할 정도예요. 청산리전투 때 홍범도 장군 밑에서 중대장을 하셨습니다. 이용 장군은 김경천 장군과 더불어 고려혁명군의 사령관으로 그분은 동부사령관이고, 이용 장군은 북부사령관을 맡으셨어요. 북만주사관학교 교장도 하셨지요.
그리고 이용 장군에 대해서는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때 평양에 올라가서 북한하고 붙었다고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건 조금 달라요. 제가 듣기론 이용 할아버지가 밤에 몰래 종로 쪽에 사시던 아버님을 찾아와서 “여기 있으면 죽는다, 나 오늘 북한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내가 장개석을 만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온다. 지금은 몸을 피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답니다. 집에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음력 5월달에 김우송(金又松)이라는 할아버지의 생신 때 찍은 건데, 이걸로 보면 아버님 말씀대로 7월초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 맞습니다.

문 : 이준 열사 기념관 건립 등 현양사업이 현재 추진되고 있나요?
답 : 이준 열사와 관련한 기념시설은 아직 국내에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요, 헤이그에 있는 것도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요. 이걸 서로 합해야 하는데 관계도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념사업회 쪽에서 이런 기념관을 마련하고 통합에 앞장서야 하는데 사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원래는 기념관 건립뿐만 아니라 남북교류와 이준대학 설립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딴 분은 몰라도 이준 열사에 대해서는 남한이건 북한이건 모두 긍정적이고 거부감이 없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거든요. 남북 합작으로 비무장지대 안에 이준대학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지난 정부에서 어디 들어줘야 말이죠.
위와 같은 내용의 대화를 끝내고 표석 제막식 때 다시 모시기로 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연구소로 어려운 발걸음을 주시고 이준 열사의 가계에 관한 소상한 설명과 비화를 들려주신 조근송 명예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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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07/2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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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구성]

•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터’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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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식민지]
• 세계 식민지 분포 /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 ‘조선병합’ 시나리오
• 망국전야 :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
• 조선총독 • 경찰 : 헌병경찰 / 보통경찰 / 일상의 지배
• 일본군 : 조선주둔 일본군 / 만주출동 / 조선의 병참동원
•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 남산 일대, 용산 일대
• 출세의 길 : 관료의 꽃 군수
•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 재조일본인
• 친일파군상 :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
• 일상을 지배한 차별 •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
• 전시체제기 식민지 :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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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08/2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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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32

삼남으로 가는 길목인 청파 배다리는 왜 사라졌을까?
– 남대문정거장 확장과정에 희생된 만초천 물길의 돌다리들

이순우 책임연구원

칠패, 팔패, 이문골, 도저골, 쪽다리를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작이 바삐 건너 승방뜰 건너 남태령 넘어 인덕원 지나 과천에서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이를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참나무정이 얼른 지나(하략)

 

이것은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 1925년 12월 4일자에 연재한 〈춘향(春香)〉에 수록된 한 대목으로,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서울도성 남대문을 나서 전라도를 향해 내려가는 행로가 길게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을 살펴보면 칠패니 이문골이니 돌모루니 하는 곳들처럼 더러 생소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있고, 도저골(도동), 청파, 동작, 남태령, 인덕원과 같이 지금도 제법 익숙한 지명들인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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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전도(완산본)>에 표시된 청파주교의 위치.이곳을 지나석우(石隅,돌모루)에 이르면 다시 노량진(당고개경유)이나 동작진 또는 서빙고진 방향으로 길이 갈라진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정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정리고(程里考)에는 ‘성문분로(城門分路)’ 즉, 서울 도성의 각문을 나서면 전국으로 갈라지는 길이 일목요연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울의 남쪽을 향해 한강으로 이어지는 행로는 동작나루를 건너는 8대로(해남 방향)와 서빙고로 넘어가는 4대로(동래 방향), 그리고 노량진으로 연결되는 7대로(수원 방향) 등 세 가지가 있다.

<대동지지> ‘정리고’에 표시된 청파 배다리 경유 주요 대로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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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모두 숭례문을 벗어나면 이문동을 거쳐 석우참(石隅站, 돌모루참)에 이르러 각각의 길이 갈라지는데, 요컨대 그 옛날 삼남지방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는 청파 배다리와 청파역이 오늘날의 경부고속도로 양재 톨게이트나 만남의 광장쯤으로 받아들여졌던 셈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 국왕 정조가 화성능행에 나서거나 효창원에 행차할 때도 이용했던 행로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머릿속에 담아둘 만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성현(成俔)의 문집인 <허백당집(虛白堂集)>에 수록된 ‘청파석교기(靑坡石橋記)’에 따르면 이곳에 돌다리가 처음 놓인 것은 연산군 때의 일로 확인된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대개 이곳을 ‘배다리’라고 불렀던 모양인지 여러 고지도나 문헌자료에는 이곳을 ‘석교’라기보다는 ‘주교(舟橋)’로 표시해놓은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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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년에 설치된 ‘청파 배다리 터’ 표석.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거듭 등장하는 청파 배다리가 있던 자리는 어디였을까? 서울역 앞쪽에서 용산 방향으로 걷다 보면 동자동과 갈월동의 경계면을 따라 경부선 철길 아래를 비스듬하게 뚫고 지나는 갈월가도교(葛月架道橋)라는 이름의 쌍굴다리가 이내 나타난다. 이곳을 통해 청파동 쪽으로 건너가면 1997년 9월에 서울시에서 세운 ‘청파 배다리터’를 나타내는 표석 하나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국협회본부(청파동 1가 161번지) 앞에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표석은 잘못된 고증의 결과물이며, 원래 배다리는 300미터 남짓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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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사>제2권(1936)에 수록된 청파배다리일대의 전경. 만초천 물길 위에 놓인 이 다리에 인접하여 경인철도가 그 옆으로 함께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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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래거문(漢城府來去文)>에 수록된 남대문외 지도. 동그라미 표시는 각각 오른쪽 위가 숭례문, 가운데 위가 염천교, 가운데 아래가 청파 배다리의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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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작성된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 부지협정도’. 동그라미 표시는 각각 왼쪽 위가 숭례문, 왼쪽 아래가 염천교, 가운데가 청파 배다리이며, 그 오른쪽에 점선으로 표시된 것이 신설되는 우회도로(지금의 갈월가도교 자리)이다. (<조선철도사> 제1권, 1929)

 

이 자리는 현재 서울역 철도부지에 편입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이 부근의 지적도면을 살펴보면 청파 배다리의 원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서울역 안쪽 플랫폼의 남단부 아래에는 ‘서계동 76번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동쪽으로 동자동과 접한 경계선 가운데 유독 배가 불룩한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가 나타난 것은 원래 만초천 물길이 흘러내리던 흔적이 그대로 동네의 경계선으로 굳어진 탓인데, 이를 통해 청파 배다리의 원위치를 가려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러한 청파 배다리가 사라지게 된 이유는 1902년 작성된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 부지협정도(京釜鐵道 南大門停車場 敷地協定圖)’에 잘 드러나 있다. 일본자본으로 이뤄진 경부철도회사가 남대문정거장을 경부철도의 종착역으로 설정하는 과정에서 이 일대의 철도부지가 광범위하게 편입되는데, 이때 청파 배다리로 연결되는 기존의 도로가 차단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오랜 세월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의 길목 역할을 했던 옛 돌다리는 용도 폐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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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정거장 확장과정에서 용도 폐기된 청파 배다리를 대체하기 위해 조성된 갈월가도교의 현재 모습.

 

이와 아울러 이 지점에서 남쪽으로 멀찍이 물러난 곳에 별도의 우회도로가 만들어졌으며, 그 결과 경부철도와 교차하도록 굴다리가 조성된 것이 오늘날 ‘갈월가도교’의 원형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철길 아래를 지나는 굴다리는 대개 직각 방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은 전차선로가 함께 지나는 탓에 회전반경과 기존도로의 연결관계 등을 고려하여 사선(斜線)으로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더하여 청파 배다리의 존재를 완전히 말살시킨 것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 시행된 남대문정거장 일대의 대규모 개축공사였다. <경성일보> 1919년 2월 21일자에 수록된 「남대문역 개축설계」 제하의 기사는 경성역과 수색역을 곧장 잇는 ‘경의선 직통노선 개설공사’와 관련하여 장차 변모할 남대문정거장 일대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설계의 내용]을 살펴보면, 역전광장은 시구개정(市區改正)과 정거장의 개축 등에 의해 그 면적이 현재의 3배로 확장하고 구내의 총연장은 650간(間), 즉 약 11정(町)에 달하며, 그 북단은 봉래정(蓬萊町) 1정목의 도로에서 80간 북방으로 넓히는데, 이곳에 남대문소학교 정문과 봉래정 1정목 통과의 중간부터 서쪽을 향해 새로 개착하는 12간 도로와 접속시키며 새로 다리를 놓고 건널목을 만들어 현재의 봉래정 건널목은 폐지하기로 되었다.
[하상(河床)의 이전(移轉)] 역의 서부를 흐르는 하상은 상류 서소문 외 합동(蛤洞) 부근에서 일직선으로 남쪽을 향하도록 교체하고, 현재의 하상 위치는 이를 매립하여 역 구내에 이용하고 곳곳에 교량을 가설하며, …… 이와 관련하여 새로 변경하는 하상의 폭원은 8간으로 이에 부수된 도로는 10간폭이 될 것이라 한다.

 

이렇듯 대규모의 경성역 개축공사에 곁들여 만초천이 직선화하면서 원래의 물길은 사라지고 오늘날 서울역 후면에 자리한 청파로(복개하천)가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바람에 그나마 간신히 남아 있던 청파 배다리의 옛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볼 대상은 ‘염초청교(焰硝廳橋)’의 행방이다. 이 다리는 남지(南池) 옆 칠패길을 거쳐 만리재나 애오개로 건너갈 때 반드시 경유하던 곳이며, 흔히 ‘염천교(鹽川橋)’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은 위의 기사에 나와 있듯이 남대문정거장 확장과정에서 하천 물길과 더불어 매립되어 사라졌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남대문 옆 상공회의소 앞쪽에서 중림동 약현성당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의 이름이 ‘염천교’이다. 그러니까 이 다리는 여전히 실존하는 다리인 셈인데, 이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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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21년 3월호에 수록된 철도과 선교 ‘봉래교(蓬萊橋)’의 모습이다.1920년 5월에 준공된 이 다리는 당시 ‘경성역과 수색역간 경의선직통노선’을 만들 때 우회도로의 용도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엉뚱하게도 ‘염천교’로 둔갑한 상태이다.

 

알고 보면 이 역시 ‘청파 배다리터’ 표석이 엉뚱한 자리에 서 있는 것만큼이나 오류투성이다. 현재 염천교로 오인되고 있는 이 다리의 원래 이름은 봉래교(蓬萊橋)이다. 이것은 일제가 수색역 방향으로 직통선로를 만들 때 ‘오리지날’ 염천교를 없애버리고 경성역 뒤쪽으로 연결되는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 만든 과선교(跨線橋; 1919년 7월 15일 기공, 1920년 5월 24일 준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염천교라는 이름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익숙하게 남은 탓인지, 봉래교라는 존재는 부지불식간에 잊히고 그 자리는 종종 염천교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이 다리의 교각에는 ‘염천교’라는 이름이 버젓이 달릴 정도로 일제가 만들어놓은 봉래교는 이제 완전히 염천교로 둔갑한 상태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봉래교라는 것은 봉래동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따온 것일 텐데, 실상 이 이름조차도 일제가 이 땅에 남겨 놓은 고약한 왜색지명의 하나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경성부사????제2권(1936),536쪽에수록된내용에따르면“청일전쟁개시전일본거류민은전전긍긍하며 사지에 처한 상황이었으나, 일본군이 입성하여 만리창에 막영(幕營)하고, 현재의 봉래정(蓬萊町)을 거쳐 남대문 안으로 들어와 거류민을 보호했다. 거류민은 흡사 봉래도(蓬萊島: 신선이 살고 있다는 불로불사의 이상향)에 온 듯한 생각을 했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다.”고 적고 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잘못된 다리 이름은 서둘러 바로 잡아주거나 차제에 새로운 명칭으로 바꿔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울러 일제에 의해 지형이 크게 훼손된 청파 배다리와 염천교의 경우 원위치에 가장 가까운 곳을 선정하여 올바른 ‘표석’을 설치하는 노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만약 안내문을 덧붙여야 한다면, 일제에 의해 이 다리들이 사라진 과정도 꼭 함께 서술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목, 2018/01/2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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