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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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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admin | 월, 2021/01/25- 23:07

[식민지 비망록•66 ]

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금은 사용빈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옛 서울의 특정지역을 일컫는 독특하고 고유한 표현들이 그런대로 잘 남아 있었던 흔적이 곧잘 확인된다. 북촌(北村, 백악 밑)이니 남촌(南村, 남산 밑)이니 동촌(東村, 낙산 근처)이니 서촌(西村, 서소문 안팎)이니 하는 것은 그마나 제법 알려진 사례에 속하고, ‘동구내(洞口內, 동구안)’라든가 ‘통내(通內, 통안)’처럼 지금은 완전히 잊힌 용어도 없지 않다. 이 가운데 ‘동구내’는 창덕궁 돈화문 앞길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단성사(團成社, 수은동 56번지)와 같은 곳은 이곳의 위치를 알리는 문구에 ‘동구내
단성사’ 또는 ‘동구안 단성사’라는 식으로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통내’는 배오개 쪽에서 함춘원(含春苑)에 이르는 지역의 통칭(通稱)인데, 이로 인해 지금의 종로 4가 사거리를 일컬어 ‘통안네거리’라고 불렀던 흔적이 완연하다.

 

<매일신보> 1915년 2월 18일자에 수록된 신구연극 대흥행 광고 문안에는 ‘동구내단성사’라는 표기가 또렷하다.

 

이것 말고도 상촌(上村, 웃대)과 하촌(下村, 아랫대)이라는 것도 그 시절 서울사람들의 일상대화 속에 자주 오르내린 말이었는데, 박태원(朴泰遠, 1909~1986)의 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1938)에도 ‘웃대’와 ‘아랫대’의 표기가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소춘(小春)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김기전(金起田, 1894~?)이 <개벽> 제48호(1924년 6월)에 수록한 글을 보면, “광통교 이상(廣通橋 以上)을 우대, 효교이하(孝橋 以下)를 아래대”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들 지역의 개략적인 위치를 일러주는 내용도 남아 있다. 그리고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556쪽에는 일본인 거주지와 그 주변의 옛 모습을 그려내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고래(古來)로 상대(上臺, 웃대), 하대(下臺, 아래대)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前者)는 서리(胥吏)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야마노테(山の手)’에 비견되며, 주로 현 청운동(淸雲洞)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키고, 후자(後者)는 하급무관(下級武官)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 훈련원(訓練院)으로부터 동남 방면을 가리키며, ‘시타마치(下町)’에도 비견될 만하다. 또 남촌생원(南村生員, 남촌의 하급관리라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북부에 권세자의 거주자가 많고, 남부에는 이에 반하는 선비가 거주했던 것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아랫대 지역은 각종의 군속(軍屬, 장교와 집사 등)이 주로 몰려 살던 공간이었으며, 이러한 영향 탓인지 이곳과 가까운 도성밖 왕십리나 이태원 등지에도 하급 군졸과 병사들이 많이 거처하였다. 이 때문에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난병(亂兵)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청국군(淸國軍)에 의해 이들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아랫대의 범주는 자료 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어 보이나 이 가운데 ‘훈련원’이라는 공간이 그 핵심에 놓여 있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훈련원은 원래 조선의 개국 초기에 ‘훈련관(訓鍊觀)’이라 하다가 이름을 바꾼 것이었는데, 이곳은 무과시험과
아울러 활쏘기와 습진(習陣) 등 무예를 연마하거나 대규모 군사조련과 열병(閱兵)을 실시하는 공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원시(院試)는 훈련원에서 이름을 등록하여 시취(試取)한다”는 구절이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드나무 껍질을 덧대어 동여매고 다시 달렸다는 얘기의 현장이 곧 이곳 훈련원이었던 것이다. 순조 때 사람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었다고 전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1830)에는 훈련원의 연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다. 개국 초에 창건되어 과시(科試)와 무재습독(武才習讀)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이곳 곁에는 연자루(燕子樓)가 있으며 석초(石礎)가 매우 높다. 무과(武科)를 볼 때마다 이곳이 일소(一所)가 되므로 원관(院官)이 이 누에 올라 화살을 배부하면 거자(擧子, 응시자)는 누 아래에 둘러서서 이를 받는다.
살피건대 태종(太宗) 17년에 훈련관(訓鍊觀)의 모든 밭을 이곳에 속하게 하고, 이로써 무사(武士)를 양성하였다. 나중에 훈련관을 훈련원으로 고쳤으며, 이 곁에는 옥전(沃田)이 있어서 숭채(菘菜, 배추)를 심는데 그 맛이 좋아서 이를 일컬어 ‘훈련원배추(訓鍊院菘)’라 한다. 이 옆에 우물이 있어 ‘통정(桶井, 통우물)’이라 하는데 물맛이 제일이라 칭한다. 훈련원 사청(射廳)에는 성간(成侃)의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훈련원의 구체적인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갑오개혁 당시 한성부 오서(漢城府 五署)의 방계동명(坊契洞名) 정리자료에 ‘훈련원’이 ‘남서 명철방 남소동계(南署 明哲坊 南小洞契)’에 속해 있었다고 채록된 사실이 눈에 띈다. 이를 단서로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경성부 정동(町洞)의 명칭 및 구역(제정)」을 살펴보니, 이 당시에 종래의 훈련원은 ‘황금정 6정목(黃金町 六丁目, 지금의 을지로 6가)’ 구역에 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정리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2년 조사)>에는 “황금정 6정목 18번지, 잡종지(雜種地), 35,029평, 국유지”로 표기된 항목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옛 훈련원 자리이다. 이곳은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 일대와 그 후면으로 청계천변에 접하는 광활한 지역 전체를 두루 포괄하는 지번이다.
그런데 현재 이곳과 서쪽으로 이웃하는 지역에 훈련원공원(訓練院公園, 을지로 5가 40번지 일대)이 별도로 남아 있으므로 이로 인해 훈련원 구역의 공간적 범주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약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옛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있었던 구역이며, 동쪽 일부가 ‘황금정 6정목’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황금정 5정목’과 ‘방산정(芳山町)’에 들어 있으므로 딱히 훈련원 구역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경성사범학교에서 펴낸 <경성사범학교총람(京城師範學校總覽)>(1929)에 수록된 ‘학교연혁’ 항목을 보면 “[1921년 9월 30일] 경성중학교 가교사(假校舍)에서 황금정 5정목 훈련원 신축교사(기숙사 3동)로 이전”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미뤄 보건대 아마도 이곳 역시 대개 훈련원 권역에 포함하여 인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3년 1월 26일자에는 훈련원 옛터에서 야구경기가 벌어지는 광경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보이는 훈련원 청사는 1917년 6월에 동대문 소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의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간호부양성소 교실로 사용된다. 왼쪽 저 멀리 흥인지문(동대문)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근대 시기 이후 훈련원에 관한 흔적을 살펴보니, 1906년 8월에 군부(軍部)에서 친밀기관(親密機關)의 하나로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를 이곳에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눈에 띄긴 한데, 이런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울 지역의 각종 단체와 학교들의 운동회가 벌어진다거나 서양에서 도입한 각종 스포츠 종목들의 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된 사실을 알리는 신문기사들이 단연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잘 알려진 YMCA야구단의 야구시합이라든가 엄복동(嚴福童,1892~1952)이 참가한 자전거 경주대회 등도 이곳에서 자주 개최되었다.

프랑스 화보잡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1907년 9월 7일자에는 군대해산과정에서 숨진 시위대병사들의 시신을 늘어놓은 광희문(光熙門) 밖의 광경과 이를 수습하려는 가족들의 모습을 수록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리고 이곳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강요로 군대해산(軍隊解散) 조치가 이뤄질 때 해산식이 거행된 장소로 기억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31일 장차 징병제(徵兵制)를 공포할 요량으로 일시(一時) 해대(解隊)케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졌는데, 이에 앞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韓國統監 伊藤博文)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군대해산순서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군대해산순서(軍隊解散順序)]
제일(第一). 군대해산이유(軍隊解散理由)의 조칙(詔勅)을 발(發)할 사(事).
제이(第二). 조칙(詔勅)과 동시(同時)에 정부(政府)는 해산후(解散後)의 군인처분(軍人處分)에 관계(關係)한 포고(布告)를 발(發)하며 차(此) 포고중(布告中)에는 좌개사항(左開事項)을 시명(示明)할 사(事).
일(一). 시위 보병 일대대(侍衛 步兵 一大隊)를 치(置)함.
이(二). 시종무관(侍從武官) 기명(幾名)을 치(置)함.
삼(三). 무관학교(武官學校) 급(及) 유년학교(幼年學校)를 치(置)함.
사(四). 해산(解散)할 시(時)에 장교 이하(將校 以下)에 일시은급금(一時恩給金)을 급여(給與)하고 기 금액(其 金額)은 장교(將校)는 봉급 대개 일개년반(俸給 大槪 一個年半)에 상당(相當)한 금액(金額), 하사 이하(下士 以下)는 대개 일개년에 상당(相當)한 금액이라. 단(但), 일개년 이상 병역(兵役)에 복종(服從)한 자(者)이라.
오(五).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軍事學)의 소양(素養)이 유(有)하야 체격강건(體格强健)하고 장래유망(將來有望)한 자(者)는 일(一), 이(二), 삼호(三號, 전항)에 직원(職員) 우(又)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속(附屬)케 할 사(事). 단(但), 하사(下士)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附)치 아니할 사(事).
육(六).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 소양(軍事學 素養)이 무(無)한 자(者)로 보통학식(普通學識)이 유(有)하야 문관기능(文官技能)이 유(有)한 자(者)는 문관(文官)에 채용(採用)할 사(事).
칠(七). 병기탄약(兵器彈藥), 군복(軍服)은 환납(還納)할 사(事).

 

이 당시 서소문 안쪽 시위대 병영에 자리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력은 박승환 참령(朴昇煥 參領, 1869~1907)의 자결 소식에 호응하여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분연히 저항에 나섰으며,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훈련원에서 거행한 해산식에 일괄 소집되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다음의 기사들에 간략히 묘사되어 있다.

 

[최종경례(最終敬禮)] 작일(昨日) 상호 10시부터 각대 병정(兵丁)을 훈련원(訓鍊院)에 소집(召集)하고 해산식(解散式)을 거행할 새 일병(日兵)이 사면환위(四面環圍)하여 견여철통(堅如鐵筒)하고 한국위관(韓國尉官)을 곤재해심(困在該心)하여 대대장(大隊長)이 효유(曉諭) 후 장졸(將卒)이 호상작별경례(互相作別敬禮)를 시(施)하고 장교(將校)는 고위대명(姑爲待命)이고, 하사(下士)는 80원씩(圜式), 병졸(兵卒)은 1년 이상 근무자는 50원씩, 1년 이하 자는 25원씩 반사(頒賜)하였더라.
[한병휘루(韓兵揮淚)] 작일(昨日) 훈련원(訓鍊院)에서 해산한 한병(韓兵)들이 은사(恩賜)를 수(受)하고 출래(出來)하야 분기(憤氣)를 불승(不勝)하여 혹자(或者)는 지전열쇄(紙錢裂碎)하고 혹자(或者)는 의관제구(衣冠諸俱)를 매(買)하며 낙루자(落淚者) 다(多)하더라.

 

그런데 ????경성부사???? 제2권(1936), 29쪽에는 이 날의 상황에 대해 그야말로 일본인의 시각에서 정리한 구절이 남아 있다.

 

…… 11시에 이르러 약 2천의 병사가 몸에 촌철(寸鐵, 기병대의 패검)을 차지 않고 세우(細雨)가 소소(蕭蕭)한 훈련원원두(訓練院原頭)에 개연(慨然)히 정렬했다. 이 시각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제2연대 제1대대의 양대(兩隊)는 남대문 내에서 모반(謀叛)하여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식장참집부대(式場參集部隊)만 해산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해산의 취지(趣旨)를 선언하고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여 현장에서 수의해산(隨意解散)하는 것을 허가했다. 병사들은 일이 의외인 것에 놀라 처음에는 호읍(號泣)하는 자도 있었으나 당시의 병사로서는 과분한 금원(金員)을 얻게 되자 읍성(泣聲)은 홀연히 소성(笑聲)과 환성(歡聲)으로 변하였고 오후 3시 식(式)의 종료를 기다려 은사금을 지니고 광희정(光熙町)과 부근의 전체 주막(酒幕), 입주가(立酒家, 선술집), 내외주가(內外酒家)에 설퇴(雪頹, 우르르 몰려가는 것)하여 우음(牛飮)했다. 술집은 이 때문에 입추(立錐)의 여지(餘地)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훈련원 일대는 동대문공립심상소학교(東大門公立尋常小學校, 1917년 4월 개교)를 위시하여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 1919년 5월 신축이전), 경성사 범학교(京城師範學校, 1921년 9월 신축이전),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京城女子公立實業學校, 1928년 12월 신축) 등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그 영역이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이밖에 돈의문 밖 경기감영 터에 있던 고양군청(高陽郡廳)이 1928년 4월 7일에 옮겨와서 이 구역을 다시 분할하여 차지하였다가 해방 이후 1961년 8월까지 머물렀던 일도 있었다. 또한 1934년에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 요구에 직면한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 돈으로 지은 ‘경
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이 들어선 자리가 곧 훈련원 구역이었다.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이 신축되고, 경성전기회사의 본점이 서울로 옮겨진 것도 모두 이 당시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경성전기의 1차년도 기부금 50만 원을 재원으로 경비진료소(輕費診療所)를 건립하기로 하고 1933년 6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3월에 낙성식을 보았는데, 완공 직전에 ‘경성부민병원’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1941년 3월에는 이곳 후면에 상이군인 유가족을 위한 수산장(授産場)으로 2층 규모의 양관인 ‘생활의 집’이라는 명칭의 시설이 추가된 바 있다. 경성부민병원은 해방 이후에 한때 시민병원(市民病院)으로 개칭하였다가, 그 자리에는 1958년에 신설된 ‘국립의료원’이 들어서게 된다.
이보다 앞서 훈련원 자리는 1919년(고종황제 인산)과 1926년(순종황제 인산) 두 번에 걸친 국장(國葬)이 벌어질 때마다 봉결식장(奉訣式場)으로 사용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1932년에는 동일한 자리에서 만주사변(滿洲事變)과 이에 따른 ‘만주국(滿洲國)’ 수립의 선포를 계기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서울프레스사가 공동주최한 ‘신흥만몽박람회(新興滿蒙博覽會, 1932.7.21~9.18)’라는 대규모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옛 훈련원 지역의 공간해체내력을 훑어가다보면 그 말미에 존재감이 뚜렷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 1940년 4월 11일에 다시 ‘경성부 훈련원 회장’으로 개칭)이다. 이것은 원래 1937년 2월에 일본인 광산업자인 코바야시 우네오(小林采男, 1894~1979)의 기부금으로 확보한 1만 4천 원의 금액으로 훈련원에 자리한 약학전문학교 후편 공터에다 새로운 장재장(葬齋場))을 건설하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통해 홍제내리(弘濟內里)의 장재장 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한편 그곳 화장터에 가마 두 기를 추가로 건설하려던 계획도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朝鮮)> 1926년 7월호에 수록된 순종 국장 당시 장의식장으로 사용된 훈련원 터 일대의 전경이다. 이에 앞서 1919년3월 고종 국장 당시에도 이곳 훈련원 터가 장제장(葬祭場)으로 사용되었다.

1932년 가을에 옛 훈련원 터에서 벌어진 신흥만몽박람회의 모습을 담은 항공촬영사진이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박람회장이고 그 뒤로 청계천 일대와 경성약학전문학교, 동대문소학교,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 등이 두루 포진한 광경이 함께 포착되어 있다. 이 사진의 오른쪽으로는 경성운동장이, 왼쪽으로는 경성사범학교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뻗어가는 경성전기>(1935)에 수록된 경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 1934년 3월 낙성)의 전경이다. 이른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의 당면과제에 놓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한 거액의 기부금으로 이를 지었으며,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 1935년 12월 준공)’ 역시 이 건물과 건립유래는 동일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러나 도중에 장례식을 거행하는 ‘장재장’만 건설하기보다는 마치 일본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과 같은 공간처럼 야외음악회와 영화회 등을 곁들여 운영할 수 있는 시설로 꾸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를 ‘경성부민회장’으로 그 용도와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성부민회장(부지면적 5,566평, 건물평수 26평 3합)의 개장 과정에 대해서는 <경성휘보(京城彙報)> 1938년 1․2․3월호(합본), 76~77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부민 대망(待望)의 부민회장(府民會場)도 부내 모 독지자(某 篤志者)의 기부금(寄附金)으로 드디어 그 실현을 보기에 이르러, 객년(客年) 8월 황금정 6정목 18번지 구 훈련원(舊訓練院)의 광장에 기공(起工), 공비(工費) 1만 2천여 원을 들인 근세식 철근 콘크리트조(近世式 鐵筋 コンクリート造)의 건물도 최근에 준공(竣工)을 고하여 3월 5일부터 개장(開場), 일반(一般)에 대여하는 것으로 되었다. 사용시간(使用時間)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이며, 사용요금(使用料金) 20원을 전납(前納)하고 부윤(府尹)의 사용승인(使用承認)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부민회장사용조례(府民會場使用條例) 5조(條)에 해당하는 경우는 사용불승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제5조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략)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와 관련하여 이들 전몰장병에 대한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는 광경이 수록된 <동아일보> 1938년 10월 2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비단 이 행사만이 아니라 이곳 훈련원 터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에는 이러한 종류의 위령제와 추도회가 쉴새없이 거행되었다.

 

<매일신보> 1940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윤덕영 자작의 부고광고이다. 그의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이며, 영결식장은 ‘경성부민재장(京城府民齋場, 옛 훈련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일상적인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곧잘 스모(相撲, 일본씨름) 대회나 중량거(重量擧, 역도) 경기대회가 벌어졌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과정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위한 추도집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곤 했다. 여기에는 장고봉사건(張鼓峰事件)의 전사자들에 대한 위령제(1938년 9월), 야스쿠니신사 합사 전몰장병 위령제(1938년 10월), 경성부 출신 장병 영령 추도회(1939년 7월), 지나사변 군마(軍馬) 위령제(1939년 10월), 지나사변 전몰자들에 대한 추도회(1940년 7월), 지나사변 5주년 전몰장병 추도제(1942년 7월) 등의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경학원 대제학, 귀족원 의원, 종2위 훈1등 자작 ……. 이것도 벼슬이랍시고 이러한 긴 수식어를 앞에 달고 있는 이는 대표적인 친일귀족이자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사람인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윤덕영이 죽었을 때 그의 영결식이 벌어진 자리가 바로 이곳 경성부민회장이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이미 조중응 자작(1919), 민원식 국민협회 회장(1921), 조동윤 남작(1923), 민영기 남작(1927), 유맹 중추원 참의(1930) 등 적지 않은 친일파 군상이 이곳을 이승과 작별하는 장소로 이용했던 흔적이 포착되고 있다. 이래저래 훈련원 옛터는 일제의 폐해와 친일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던 공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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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2심 판결이 있었다. “피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주문 내용은 간결했고 연구소는 승소했다. 1심에 이어 2심까지 재판부는 연구소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재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가 2014년 8월경부터 인터넷에 널린 유포된 박정희 합성사진을 연구소가 조작했다며 4년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소를 음해해왔다.

 

이에 연구소는 2016년 3월 방모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방모씨는 소송대리인으로 서석구 변호사(박근혜 변호인)를 선임했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 연구소를 종북단체라고 부르며 “방모씨의 행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1심에서 패소한 그들은 2심에서도 여전히 색깔론을 펼쳤지만 2심 재판부는 1심의 판결을 유지하며 방모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로써 방모씨는 5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해야 하는데 방모씨 측이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여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청량리 사무실에 침입해 출입문과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달아난 60대 김모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반성의 뜻을 담은 사과문을 12월 20일 연구소로 보내왔다.

08작년 4월 새벽 1시쯤 연구소가 위치한 동대문구 사무실을 찾아온 김모씨는 연구소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출입문에 엑스(X)자 모양의 낙서를 한 후 도주했다. 스프레이 테러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CCTV를 토대로 수사에 들어간 동대문경찰서는 11월에 김모씨를 붙잡아 재물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기소 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했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서 열린 형사조정에 참석한 김모씨는 모든 것이 가짜뉴스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말하면서 수차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연구소도 김모씨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만큼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래의 사과문은 김모씨가 형사조정의 결정에 따라 작성하여 연구소로 보내온 것이다.

 

사 과 문

상기 본인은 사건 당일 집회를 마치고 저녁식사 겸 회식자리에서 탄핵 반대 등 시국에 관해 토론을 나누는 중 잘못된 교육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분위기로 흘러 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문제라는 잘못된 소신과 판단으로 만취상태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황당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이 문제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물심양면으로 피해를 끼친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차후 두 번 다시 이런 사태를 재발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죄송합니다.

2017. 12. 20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목, 2018/01/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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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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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경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평화와 교육, 환경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자료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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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평화박물관’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15년전쟁’(1931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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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시장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피해’와 ‘가해’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저항’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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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교 문집과 ‘간도 빨치산의 노래’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이라는 말처럼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헌법의 숲’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박물관’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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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노보효 전시관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사노보효’라는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고겐지(光顕寺)’에서 수십 개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도 여러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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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 대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화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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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를 띄우자’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蔡鴻哲, 현재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화장인허가증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이후 2001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70년만의 귀향’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70년만의 귀향’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월, 2017/08/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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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률 성신여대 교수

 

지난겨울 촛불 시위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라고 개탄하였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에서 정권에 비판적이라 지목된 연예인들의 합성사진까지 만들어 유포했다고 하니 정말 이러한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추석 연휴 기간 중 많은 언론들이 적폐청산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사 청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흔히 보수 언론과 논객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미래를 대비하자고 강조한다. 또한 당장 안보, 경제 등 긴급한 현안들이 있는데 과거사 청산 같은 일에 몰두하는 것은 소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매번 지겹도록 듣는 식상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일으키는 데 상당히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프레임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와 미래를 극단적으로 분리시켜 보는 것으로, 역사인식 차원만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데에도 큰 문제를 초래한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위해 자신이 이미 지출한 내역을 가계부에 꼼꼼하게 기록하며 자신의 소비생활을 성찰한다. 그러나 가계부를 아무리 잘 써도 이미 지출한 돈은 단 한 푼도 회수되지 않는다. 이미 지출해 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실용주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아마도 가계부보다는 미래의 지출 계획서를 작성하여 미리 불필요한 지출을 방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는 다양한 변수와 변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나마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대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하고 확실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한 꼼꼼한 정리와 깊이 있는 성찰이다. 과거에 대한 충분한 정리와 성찰 없이 그냥 막연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시간 낭비이다. 그러하기에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들은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위해 지출 계획서를 미리 작성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가계부를 주로 작성해왔던 것이다.
잘못된 과거는 이미 지나 간 것이니 접어두고 긴급한 현안과 미래에 대비하자는 이야기는 사실상 미래를 중시하는 태도라기보다는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계속되기를 희망하는, 그러하기에 다양한 변화가능성이 없는 미래를 희망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논리를 묘하게 미래 지향성이라는 단어로 치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보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여 성찰하지 못하면 불행이 반복된다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쉽게 자주 놓쳐 버리는 역사의 진리이다. 박근혜와 최태민·최순실 등 최씨 가문과의 관계는 1970년대 말 유신체제하에 전개되었던 새마음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새마음운동은 ‘충’과 ‘효’를 강조하는 일종의 관제 대중운동이었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었다는 사실보다는 유신체제기 중요한 관제 대중운동의 하나인 새마음운동의 주도자였다는 것이 정말 더 큰 문제였다. 새마음운동에 대해서는 2007년 이명박과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불충분하게 다루어졌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만약 그때 이러한 문제가 충분히 드러나고 시정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은 커다란 혼란과 고통은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던 것이다.
또한 과거사 청산이 쟁점이 될 때마다 나오는 소리 중에 하나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색출하고 책임을 묻는 인적 청산보다는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킨 제도와 관행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인적 청산과 제도적 청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마치 이를 양자택일적인 문제로 말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잘못한 사람들을 밝혀내고 그 책임을 묻는 일은 제도와 관행을 청산하기 위해 유보하거나 부차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탕이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법적 처벌을 받거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범죄자를 수사와 재판을 통해 가려내어 처벌하지 않고, 범죄 예방을 위한 제도만 개선하면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형식적으로 좋은 제도를 구상하여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할 사람들의 사고와 행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기능할 리도 없다. 따라서 인적 청산이 없거나 유보되는 제도적 청산은 무의미하고, 역시 공허하다.
요점은 과거사 청산 작업을 단기적인 인적 청산에 머물지 말고 문제를 장기적이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관행의 개선으로 연결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개인적인 범법행위, 비리행위만을 조사하고 시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방지하지 못했던 제도와 관행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블랙리스트나 국정교과서 문제의 경우 이를 주도한 사람들도 밝혀내야 하지만, 이 일과 관련된 조직 내부의 사람들이 그것이 부당한 것임을 알 수 있었음에도, 왜 여기에 침묵하거나 순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이는 결국 내부의 비판자, 고발자를 소외시키는 구조와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발단은 문체부 직원들에 대한 부당한 인사 조치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 내부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풀리는 문제이다. 또한 국정원 댓글 공작에서 나타나듯 국가기관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사회적 감시 및 통제 장치를 만드는 것도 시급해 보인다. 이러한 일들, 특히 제도 개선과 관련된 부분들은 단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시민사회의 능동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적폐청산을 통해 여러 폐해들을 해결할 때 그 혜택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리게 될 것이다.

목, 2017/10/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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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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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계몽주의에서 이 빛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펼치는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은 이성, 기계론적 과학, 보편주의, 진보, 개인주의, 관용, 자유주의, 사유재산, 세속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주의의 총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연관됩니다, 좀 복잡한 문제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들을 설명해야겠지만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는 교회와 절대왕권으로부터의 ‘자유주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세계 3대 시민혁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라는 번역은 ‘enlightenment’라는 단어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뭔가 부족한 번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서구의 계몽사상가는 ‘계몽’을 위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단을 개발했으며 소설, 연극, 풍자시, 심지어 포르노그래피까지 동원하여 기성 세계와 가치관을 비웃고 공격했습니다만 핵심이 ‘계몽’ 그 자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한 계몽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근대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깨지고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서 야만, 오랑캐로 상징되던 서양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개화, 자강 등의 단어가 이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1904년 이후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혼란입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서구사상 즉, 18세기 계몽주의의 뒤를 이은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동시에 혼재되는 양상이 이 혼란을 증명합니다. 서구에서 2세기에 걸친 사상적 흐름이 10여 년 정도의 기간에 왜곡된 형태로 압축되어 전개된 것은 제국주의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억지로 근대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06년 2월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1906년 6월 만세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1906년 7월부터 <혈(血)의누(淚)>를 만세보에 연재합니다.이후 <귀(鬼)의성(聲)>(1906.10)을이어서 연재한 다음 1908년 유일서관에서 <치악산(雉岳山)>과 <은세계(銀世界)>를 출간합니다.

 

양반을 보면 대포로 놓아서 무찔러 죽여 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 거죽으로 따르고 (귀의 성)

우리나라 일은 깊은 잠 어지러운 꿈과 같아 불러도 아니 깨이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니 깨이는 터이라. 어느 때든지 하늘이 뒤집히도록 천변이 나고 벼락불이 뚝뚝 떨어지기 전에는 저 꿈 깨기가 어려우리라 싶은 것도 옥남의 생각이라(은세계)

 

이인직의 신소설은 평가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봉건사상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임화조차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낡은 사회기구의 부패상이나 몰락과정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계층적인 제 모순과 사회적인 제 갈등이 투쟁의 높이에까지 고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즉 봉건적인 학정 하에 신음하는 인민의 참을 수 없는 상태와 더불어 그들의 반항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행위가 부패한 구기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범백의 신소설 중 <은세계>를 가지고 최고봉을 삼지 아니할 수 없다.(임화, 「개설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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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글에서도 이인직이 일관되게 봉건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고 표현했듯이 “이인직에게 글쓰기는 봉건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한기형,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1999)이라는지적은일면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된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혈의누>와 <귀의성>의경우제목에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드러냅니다. <혈의누>와 <귀의성>는우리말로‘피눈물’과‘귀신소리’인데한문혹은 한국어는 이렇게 복합명사를 간단히 붙여 쓴 명사의 나열로 표기하여 앞의 명사가 뒤에 오는 명사의 재료 또는 구성요소임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의 눈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の)’를 체언의 뒤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 복합명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血의淚>와 <鬼의聲>은일반적으로 <血淚>와 <鬼聲>이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관형격 조사를 붙이는 방식은 石の橋(돌다리), 竹の子(죽순) 등처럼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명사의 표현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인직이 10년간 일본생활을 했던 습관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최초의 신소설이 일본어투의 제목을 달고 계몽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론 이인직뿐만 아니라 신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계몽이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가 입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혈의누)

 

만일 우리나라가 칠십년 전에 개혁이 되어서 해삼위(海蔘威)에 아라사 사람이 저러한 근거지를 잡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착수하였을 것이요, 만일 오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다면 해삼위는 아라사 사람에게 양도하였으나, 청국 만주는 우리나라 세력 범위 안에 들었을 것이오.
만일 사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육해군의 확장이 아직 일본만 못하나, 또한 당당한 문명국이 되었을 것이오. 만일 삼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년 동안에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은세계)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기초한 「삼진연방(三陣聯邦)」을 비롯해 이인직은 소설을 비롯해 여타의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인직의 계몽운동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계몽사상이라고. 그가 가진 이런 사상과 관점은 그의 논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경술국치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 3부에 계속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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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흥 광주지부장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헤엄치지 말고
걸어서 가자
배 타지 말고
버스로 가자
비행기 타지 말고
기차로 가자

오늘 못 가면
내일 또 가고

 

모레도 못 가면
글피에 또 가고

올해안에 못 가면
내년에 또 가고
내년에도 못 가면
그 내년에 또 가고

서둘지 말고 가자
싸목싸목 가자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화, 2018/03/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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