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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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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admin | 월, 2021/01/25- 23:07

[식민지 비망록•66 ]

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금은 사용빈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옛 서울의 특정지역을 일컫는 독특하고 고유한 표현들이 그런대로 잘 남아 있었던 흔적이 곧잘 확인된다. 북촌(北村, 백악 밑)이니 남촌(南村, 남산 밑)이니 동촌(東村, 낙산 근처)이니 서촌(西村, 서소문 안팎)이니 하는 것은 그마나 제법 알려진 사례에 속하고, ‘동구내(洞口內, 동구안)’라든가 ‘통내(通內, 통안)’처럼 지금은 완전히 잊힌 용어도 없지 않다. 이 가운데 ‘동구내’는 창덕궁 돈화문 앞길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단성사(團成社, 수은동 56번지)와 같은 곳은 이곳의 위치를 알리는 문구에 ‘동구내
단성사’ 또는 ‘동구안 단성사’라는 식으로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통내’는 배오개 쪽에서 함춘원(含春苑)에 이르는 지역의 통칭(通稱)인데, 이로 인해 지금의 종로 4가 사거리를 일컬어 ‘통안네거리’라고 불렀던 흔적이 완연하다.

 

<매일신보> 1915년 2월 18일자에 수록된 신구연극 대흥행 광고 문안에는 ‘동구내단성사’라는 표기가 또렷하다.

 

이것 말고도 상촌(上村, 웃대)과 하촌(下村, 아랫대)이라는 것도 그 시절 서울사람들의 일상대화 속에 자주 오르내린 말이었는데, 박태원(朴泰遠, 1909~1986)의 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1938)에도 ‘웃대’와 ‘아랫대’의 표기가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소춘(小春)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김기전(金起田, 1894~?)이 <개벽> 제48호(1924년 6월)에 수록한 글을 보면, “광통교 이상(廣通橋 以上)을 우대, 효교이하(孝橋 以下)를 아래대”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들 지역의 개략적인 위치를 일러주는 내용도 남아 있다. 그리고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556쪽에는 일본인 거주지와 그 주변의 옛 모습을 그려내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고래(古來)로 상대(上臺, 웃대), 하대(下臺, 아래대)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前者)는 서리(胥吏)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야마노테(山の手)’에 비견되며, 주로 현 청운동(淸雲洞)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키고, 후자(後者)는 하급무관(下級武官)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 훈련원(訓練院)으로부터 동남 방면을 가리키며, ‘시타마치(下町)’에도 비견될 만하다. 또 남촌생원(南村生員, 남촌의 하급관리라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북부에 권세자의 거주자가 많고, 남부에는 이에 반하는 선비가 거주했던 것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아랫대 지역은 각종의 군속(軍屬, 장교와 집사 등)이 주로 몰려 살던 공간이었으며, 이러한 영향 탓인지 이곳과 가까운 도성밖 왕십리나 이태원 등지에도 하급 군졸과 병사들이 많이 거처하였다. 이 때문에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난병(亂兵)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청국군(淸國軍)에 의해 이들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아랫대의 범주는 자료 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어 보이나 이 가운데 ‘훈련원’이라는 공간이 그 핵심에 놓여 있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훈련원은 원래 조선의 개국 초기에 ‘훈련관(訓鍊觀)’이라 하다가 이름을 바꾼 것이었는데, 이곳은 무과시험과
아울러 활쏘기와 습진(習陣) 등 무예를 연마하거나 대규모 군사조련과 열병(閱兵)을 실시하는 공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원시(院試)는 훈련원에서 이름을 등록하여 시취(試取)한다”는 구절이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드나무 껍질을 덧대어 동여매고 다시 달렸다는 얘기의 현장이 곧 이곳 훈련원이었던 것이다. 순조 때 사람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었다고 전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1830)에는 훈련원의 연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다. 개국 초에 창건되어 과시(科試)와 무재습독(武才習讀)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이곳 곁에는 연자루(燕子樓)가 있으며 석초(石礎)가 매우 높다. 무과(武科)를 볼 때마다 이곳이 일소(一所)가 되므로 원관(院官)이 이 누에 올라 화살을 배부하면 거자(擧子, 응시자)는 누 아래에 둘러서서 이를 받는다.
살피건대 태종(太宗) 17년에 훈련관(訓鍊觀)의 모든 밭을 이곳에 속하게 하고, 이로써 무사(武士)를 양성하였다. 나중에 훈련관을 훈련원으로 고쳤으며, 이 곁에는 옥전(沃田)이 있어서 숭채(菘菜, 배추)를 심는데 그 맛이 좋아서 이를 일컬어 ‘훈련원배추(訓鍊院菘)’라 한다. 이 옆에 우물이 있어 ‘통정(桶井, 통우물)’이라 하는데 물맛이 제일이라 칭한다. 훈련원 사청(射廳)에는 성간(成侃)의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훈련원의 구체적인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갑오개혁 당시 한성부 오서(漢城府 五署)의 방계동명(坊契洞名) 정리자료에 ‘훈련원’이 ‘남서 명철방 남소동계(南署 明哲坊 南小洞契)’에 속해 있었다고 채록된 사실이 눈에 띈다. 이를 단서로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경성부 정동(町洞)의 명칭 및 구역(제정)」을 살펴보니, 이 당시에 종래의 훈련원은 ‘황금정 6정목(黃金町 六丁目, 지금의 을지로 6가)’ 구역에 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정리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2년 조사)>에는 “황금정 6정목 18번지, 잡종지(雜種地), 35,029평, 국유지”로 표기된 항목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옛 훈련원 자리이다. 이곳은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 일대와 그 후면으로 청계천변에 접하는 광활한 지역 전체를 두루 포괄하는 지번이다.
그런데 현재 이곳과 서쪽으로 이웃하는 지역에 훈련원공원(訓練院公園, 을지로 5가 40번지 일대)이 별도로 남아 있으므로 이로 인해 훈련원 구역의 공간적 범주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약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옛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있었던 구역이며, 동쪽 일부가 ‘황금정 6정목’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황금정 5정목’과 ‘방산정(芳山町)’에 들어 있으므로 딱히 훈련원 구역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경성사범학교에서 펴낸 <경성사범학교총람(京城師範學校總覽)>(1929)에 수록된 ‘학교연혁’ 항목을 보면 “[1921년 9월 30일] 경성중학교 가교사(假校舍)에서 황금정 5정목 훈련원 신축교사(기숙사 3동)로 이전”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미뤄 보건대 아마도 이곳 역시 대개 훈련원 권역에 포함하여 인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3년 1월 26일자에는 훈련원 옛터에서 야구경기가 벌어지는 광경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보이는 훈련원 청사는 1917년 6월에 동대문 소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의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간호부양성소 교실로 사용된다. 왼쪽 저 멀리 흥인지문(동대문)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근대 시기 이후 훈련원에 관한 흔적을 살펴보니, 1906년 8월에 군부(軍部)에서 친밀기관(親密機關)의 하나로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를 이곳에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눈에 띄긴 한데, 이런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울 지역의 각종 단체와 학교들의 운동회가 벌어진다거나 서양에서 도입한 각종 스포츠 종목들의 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된 사실을 알리는 신문기사들이 단연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잘 알려진 YMCA야구단의 야구시합이라든가 엄복동(嚴福童,1892~1952)이 참가한 자전거 경주대회 등도 이곳에서 자주 개최되었다.

프랑스 화보잡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1907년 9월 7일자에는 군대해산과정에서 숨진 시위대병사들의 시신을 늘어놓은 광희문(光熙門) 밖의 광경과 이를 수습하려는 가족들의 모습을 수록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리고 이곳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강요로 군대해산(軍隊解散) 조치가 이뤄질 때 해산식이 거행된 장소로 기억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31일 장차 징병제(徵兵制)를 공포할 요량으로 일시(一時) 해대(解隊)케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졌는데, 이에 앞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韓國統監 伊藤博文)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군대해산순서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군대해산순서(軍隊解散順序)]
제일(第一). 군대해산이유(軍隊解散理由)의 조칙(詔勅)을 발(發)할 사(事).
제이(第二). 조칙(詔勅)과 동시(同時)에 정부(政府)는 해산후(解散後)의 군인처분(軍人處分)에 관계(關係)한 포고(布告)를 발(發)하며 차(此) 포고중(布告中)에는 좌개사항(左開事項)을 시명(示明)할 사(事).
일(一). 시위 보병 일대대(侍衛 步兵 一大隊)를 치(置)함.
이(二). 시종무관(侍從武官) 기명(幾名)을 치(置)함.
삼(三). 무관학교(武官學校) 급(及) 유년학교(幼年學校)를 치(置)함.
사(四). 해산(解散)할 시(時)에 장교 이하(將校 以下)에 일시은급금(一時恩給金)을 급여(給與)하고 기 금액(其 金額)은 장교(將校)는 봉급 대개 일개년반(俸給 大槪 一個年半)에 상당(相當)한 금액(金額), 하사 이하(下士 以下)는 대개 일개년에 상당(相當)한 금액이라. 단(但), 일개년 이상 병역(兵役)에 복종(服從)한 자(者)이라.
오(五).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軍事學)의 소양(素養)이 유(有)하야 체격강건(體格强健)하고 장래유망(將來有望)한 자(者)는 일(一), 이(二), 삼호(三號, 전항)에 직원(職員) 우(又)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속(附屬)케 할 사(事). 단(但), 하사(下士)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附)치 아니할 사(事).
육(六).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 소양(軍事學 素養)이 무(無)한 자(者)로 보통학식(普通學識)이 유(有)하야 문관기능(文官技能)이 유(有)한 자(者)는 문관(文官)에 채용(採用)할 사(事).
칠(七). 병기탄약(兵器彈藥), 군복(軍服)은 환납(還納)할 사(事).

 

이 당시 서소문 안쪽 시위대 병영에 자리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력은 박승환 참령(朴昇煥 參領, 1869~1907)의 자결 소식에 호응하여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분연히 저항에 나섰으며,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훈련원에서 거행한 해산식에 일괄 소집되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다음의 기사들에 간략히 묘사되어 있다.

 

[최종경례(最終敬禮)] 작일(昨日) 상호 10시부터 각대 병정(兵丁)을 훈련원(訓鍊院)에 소집(召集)하고 해산식(解散式)을 거행할 새 일병(日兵)이 사면환위(四面環圍)하여 견여철통(堅如鐵筒)하고 한국위관(韓國尉官)을 곤재해심(困在該心)하여 대대장(大隊長)이 효유(曉諭) 후 장졸(將卒)이 호상작별경례(互相作別敬禮)를 시(施)하고 장교(將校)는 고위대명(姑爲待命)이고, 하사(下士)는 80원씩(圜式), 병졸(兵卒)은 1년 이상 근무자는 50원씩, 1년 이하 자는 25원씩 반사(頒賜)하였더라.
[한병휘루(韓兵揮淚)] 작일(昨日) 훈련원(訓鍊院)에서 해산한 한병(韓兵)들이 은사(恩賜)를 수(受)하고 출래(出來)하야 분기(憤氣)를 불승(不勝)하여 혹자(或者)는 지전열쇄(紙錢裂碎)하고 혹자(或者)는 의관제구(衣冠諸俱)를 매(買)하며 낙루자(落淚者) 다(多)하더라.

 

그런데 ????경성부사???? 제2권(1936), 29쪽에는 이 날의 상황에 대해 그야말로 일본인의 시각에서 정리한 구절이 남아 있다.

 

…… 11시에 이르러 약 2천의 병사가 몸에 촌철(寸鐵, 기병대의 패검)을 차지 않고 세우(細雨)가 소소(蕭蕭)한 훈련원원두(訓練院原頭)에 개연(慨然)히 정렬했다. 이 시각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제2연대 제1대대의 양대(兩隊)는 남대문 내에서 모반(謀叛)하여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식장참집부대(式場參集部隊)만 해산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해산의 취지(趣旨)를 선언하고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여 현장에서 수의해산(隨意解散)하는 것을 허가했다. 병사들은 일이 의외인 것에 놀라 처음에는 호읍(號泣)하는 자도 있었으나 당시의 병사로서는 과분한 금원(金員)을 얻게 되자 읍성(泣聲)은 홀연히 소성(笑聲)과 환성(歡聲)으로 변하였고 오후 3시 식(式)의 종료를 기다려 은사금을 지니고 광희정(光熙町)과 부근의 전체 주막(酒幕), 입주가(立酒家, 선술집), 내외주가(內外酒家)에 설퇴(雪頹, 우르르 몰려가는 것)하여 우음(牛飮)했다. 술집은 이 때문에 입추(立錐)의 여지(餘地)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훈련원 일대는 동대문공립심상소학교(東大門公立尋常小學校, 1917년 4월 개교)를 위시하여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 1919년 5월 신축이전), 경성사 범학교(京城師範學校, 1921년 9월 신축이전),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京城女子公立實業學校, 1928년 12월 신축) 등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그 영역이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이밖에 돈의문 밖 경기감영 터에 있던 고양군청(高陽郡廳)이 1928년 4월 7일에 옮겨와서 이 구역을 다시 분할하여 차지하였다가 해방 이후 1961년 8월까지 머물렀던 일도 있었다. 또한 1934년에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 요구에 직면한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 돈으로 지은 ‘경
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이 들어선 자리가 곧 훈련원 구역이었다.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이 신축되고, 경성전기회사의 본점이 서울로 옮겨진 것도 모두 이 당시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경성전기의 1차년도 기부금 50만 원을 재원으로 경비진료소(輕費診療所)를 건립하기로 하고 1933년 6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3월에 낙성식을 보았는데, 완공 직전에 ‘경성부민병원’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1941년 3월에는 이곳 후면에 상이군인 유가족을 위한 수산장(授産場)으로 2층 규모의 양관인 ‘생활의 집’이라는 명칭의 시설이 추가된 바 있다. 경성부민병원은 해방 이후에 한때 시민병원(市民病院)으로 개칭하였다가, 그 자리에는 1958년에 신설된 ‘국립의료원’이 들어서게 된다.
이보다 앞서 훈련원 자리는 1919년(고종황제 인산)과 1926년(순종황제 인산) 두 번에 걸친 국장(國葬)이 벌어질 때마다 봉결식장(奉訣式場)으로 사용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1932년에는 동일한 자리에서 만주사변(滿洲事變)과 이에 따른 ‘만주국(滿洲國)’ 수립의 선포를 계기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서울프레스사가 공동주최한 ‘신흥만몽박람회(新興滿蒙博覽會, 1932.7.21~9.18)’라는 대규모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옛 훈련원 지역의 공간해체내력을 훑어가다보면 그 말미에 존재감이 뚜렷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 1940년 4월 11일에 다시 ‘경성부 훈련원 회장’으로 개칭)이다. 이것은 원래 1937년 2월에 일본인 광산업자인 코바야시 우네오(小林采男, 1894~1979)의 기부금으로 확보한 1만 4천 원의 금액으로 훈련원에 자리한 약학전문학교 후편 공터에다 새로운 장재장(葬齋場))을 건설하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통해 홍제내리(弘濟內里)의 장재장 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한편 그곳 화장터에 가마 두 기를 추가로 건설하려던 계획도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朝鮮)> 1926년 7월호에 수록된 순종 국장 당시 장의식장으로 사용된 훈련원 터 일대의 전경이다. 이에 앞서 1919년3월 고종 국장 당시에도 이곳 훈련원 터가 장제장(葬祭場)으로 사용되었다.

1932년 가을에 옛 훈련원 터에서 벌어진 신흥만몽박람회의 모습을 담은 항공촬영사진이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박람회장이고 그 뒤로 청계천 일대와 경성약학전문학교, 동대문소학교,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 등이 두루 포진한 광경이 함께 포착되어 있다. 이 사진의 오른쪽으로는 경성운동장이, 왼쪽으로는 경성사범학교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뻗어가는 경성전기>(1935)에 수록된 경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 1934년 3월 낙성)의 전경이다. 이른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의 당면과제에 놓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한 거액의 기부금으로 이를 지었으며,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 1935년 12월 준공)’ 역시 이 건물과 건립유래는 동일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러나 도중에 장례식을 거행하는 ‘장재장’만 건설하기보다는 마치 일본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과 같은 공간처럼 야외음악회와 영화회 등을 곁들여 운영할 수 있는 시설로 꾸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를 ‘경성부민회장’으로 그 용도와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성부민회장(부지면적 5,566평, 건물평수 26평 3합)의 개장 과정에 대해서는 <경성휘보(京城彙報)> 1938년 1․2․3월호(합본), 76~77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부민 대망(待望)의 부민회장(府民會場)도 부내 모 독지자(某 篤志者)의 기부금(寄附金)으로 드디어 그 실현을 보기에 이르러, 객년(客年) 8월 황금정 6정목 18번지 구 훈련원(舊訓練院)의 광장에 기공(起工), 공비(工費) 1만 2천여 원을 들인 근세식 철근 콘크리트조(近世式 鐵筋 コンクリート造)의 건물도 최근에 준공(竣工)을 고하여 3월 5일부터 개장(開場), 일반(一般)에 대여하는 것으로 되었다. 사용시간(使用時間)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이며, 사용요금(使用料金) 20원을 전납(前納)하고 부윤(府尹)의 사용승인(使用承認)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부민회장사용조례(府民會場使用條例) 5조(條)에 해당하는 경우는 사용불승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제5조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략)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와 관련하여 이들 전몰장병에 대한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는 광경이 수록된 <동아일보> 1938년 10월 2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비단 이 행사만이 아니라 이곳 훈련원 터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에는 이러한 종류의 위령제와 추도회가 쉴새없이 거행되었다.

 

<매일신보> 1940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윤덕영 자작의 부고광고이다. 그의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이며, 영결식장은 ‘경성부민재장(京城府民齋場, 옛 훈련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일상적인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곧잘 스모(相撲, 일본씨름) 대회나 중량거(重量擧, 역도) 경기대회가 벌어졌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과정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위한 추도집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곤 했다. 여기에는 장고봉사건(張鼓峰事件)의 전사자들에 대한 위령제(1938년 9월), 야스쿠니신사 합사 전몰장병 위령제(1938년 10월), 경성부 출신 장병 영령 추도회(1939년 7월), 지나사변 군마(軍馬) 위령제(1939년 10월), 지나사변 전몰자들에 대한 추도회(1940년 7월), 지나사변 5주년 전몰장병 추도제(1942년 7월) 등의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경학원 대제학, 귀족원 의원, 종2위 훈1등 자작 ……. 이것도 벼슬이랍시고 이러한 긴 수식어를 앞에 달고 있는 이는 대표적인 친일귀족이자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사람인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윤덕영이 죽었을 때 그의 영결식이 벌어진 자리가 바로 이곳 경성부민회장이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이미 조중응 자작(1919), 민원식 국민협회 회장(1921), 조동윤 남작(1923), 민영기 남작(1927), 유맹 중추원 참의(1930) 등 적지 않은 친일파 군상이 이곳을 이승과 작별하는 장소로 이용했던 흔적이 포착되고 있다. 이래저래 훈련원 옛터는 일제의 폐해와 친일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던 공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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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혈서 군관지원’

 

9월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317호 법정, 10시로 예정된 재판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선고 당일인데 정미홍씨는 10시가 넘어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무죄를 확신하는 것인지 마음이 매우 느긋한가 봅니다. 반면 연구소 법무책임자인 저는 매우 초조했습니다.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운 만큼 패소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정미홍씨가 법정에 들어왔고 뒤따라 수십 명의 어르신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은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되어있는 배지를 옷깃에 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법정에 자리 잡았습니다. 의자에 앉지 못한 분들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순서가 후반부에 있는지 다른 여러 재판이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한참 후에 시작된 재판, 정미홍씨가 선고를 받기 위해 피고인석에 섰습니다. 재판부는 판결을 내린 경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공소장의 내용, 재판의 쟁점사항, 원고와 피고 간 주장의 충돌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정리했습니다. 마치 원고와 피고 그리고 방청객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설득 과정 같았습니다. 이 재판의 쟁점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 여부였습니다. 만약 조작이 있었다면 정미홍 씨가 주장한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조작’ 이란 트위터는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조작이 없었다면 정미홍 씨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유죄가 인정될 것이었습니다.

정미홍 씨는 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발굴했다며 언론에 만주신문을 공개한 2009년 이전 5년 동안 만주일보에 해당기사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수차례 밝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만주일보가 1939년 당시 폐간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되자 만주신문으로 말을 바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바꾼 사실이 조작의 증거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재판부도 이 부분을 쟁점으로 여겼습니다. 연구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공식적으로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려 있다고 말한 증거를 정미홍 씨가 제출한다면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없었습니다. 연구소는 만주신문에서 해당 기사를 발굴하기 전까지 어떤 신문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렸다고 특정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증언만 있을 뿐 1차사료인 혈서기사를 본 적이 없으니 특정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5년 동안 만주일보라고 주장했다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것인지 출처가 궁금할 뿐입니다. 하지만 연구소는 만주일보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5년 동안’의 시작이 되는 2005년에 연구소가 공식적으로 발간한 출판도서에서 증거를 발견했고 이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재판부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미홍 씨에게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적인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 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벌금형이 내려지자 정미홍 씨는 판사를 향해 “판결을 인정할 수 없으며 역사왜곡을 바로 잡는 활동을 계속 하겠다. 이 법정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는데 잘못 걸려 있다. 제대로 다시 걸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방청객도 술렁였습니다. 몇몇이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경위들이 나와 제지했고 그분들은 이내 복도에 나가 재판부에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소리가 법정 안에까지 들렸습니다.
정미홍 씨는 기자 인터뷰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며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번 재판은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이었습니다. 연구소는 이미 민사재판에서 최종 승소하였습니다. 지난 1월 대법원은 박정희 혈서가 날조라고 주장한 강용석 씨에게 500만원, 정미홍 씨에게 300만원, 일베회원 강모씨에게 300만원의 손해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이 중 강용석 씨와 정미홍 씨는 해당 금액을 연구소에 보내왔고 일베회원 강모씨는 벌금을 연체하여 이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월, 2017/09/2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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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08/2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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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사회는 없다.’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자본의 거대한 재구성’과 ‘노동의 국제 분업(화)’를 수반한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부의 실패’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기라는 ‘신자유주의’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영국사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억압·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자학사관’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계급의 역사전쟁이 ‘역사수정주의’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년의 ‘비트부르크 사건’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 그들도 강제수용소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자유주의사관론자’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 극우 교과서 제작
→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은 일본군‘위안부’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는 처음에는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커밍아웃’하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포괄적인 과거청산’ 정책을 추진하자 보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자학사관’, ‘종북좌파사관’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용한 진상규명’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자학사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내 마음대로’였다.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0828-13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자학사관’에 대응하는 ‘자긍사관’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불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인종차별·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던 수많은 ‘난쟁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월, 2017/08/2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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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지도위원, 소장자료 75점 기증

10월 16일, 강만길 지도위원(고려대 명예교수)이 북한 방문증명서, 리영희·이우성 선생 등과 주고받은 서신, 2004년 평양 남북학술토론회 관련 자료 등 소장자료 75점을 기증했다. 특히 이번 기증자료에는 강만길 지도위원이 1984년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사업’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을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보고서, 탄원서, 공동성명 등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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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9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9월 19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9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각종 보험증서와 통장, 해방 직후 학교 관련 문서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새농민????(1970),????국민독본????(1964),????지방행정????(1964)등박정희 정권기에발행된도서류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7/11/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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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 자료실 안미정

아버지의 기록을 찾는 아들 진광홍 씨가 연구소에 자료 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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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를 설명하고 있는 진광홍 씨

 

작년에 진행한 ‘근현대사기념관과 함께하는 서울시민대학’ 수강생으로 인연을 맺은 진광홍 씨가 1월 23일에 자료 기증차 연구소를 방문했다. 기탁한 자료는 아버지 진기섭 선생의 기록을 모은 자료로 사진, 도서, 일기 등이다. 진기섭 선생은 1943년 7월 31일 일본북지파견군에 징집돼 중국 천진에서 훈련을 받고 등원중대에 배속됐다. 그 후 일본 군대에서 탈출해 일본 점령지 수복활동 및 한인회 조직과 교포들
의 안전 귀국을 선도했다.
그러나 환국하면서 신분보호상 서류를 소각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진광홍 씨가 국가보훈처에 지속적으로 독립활동 재심사를 청구했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공문만 받았다. 연구소는 진기섭 선생의 독립활동 자료를 추적 조사할 예정이다.

 

박동규 회원(경북북부지부) 생활사 자료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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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회원이 1월 17일과 22일 두 차례 가족들의 손때가 묻은 생활사 자료들을 기증했다. 어머니가 직접 지으신 수의 치마저고리, 할아버지가 쓰던 갓, 망건, 초등학교 졸업앨범, 주산 등이다. 조부가 간직했던 매도증서는 일제시대에 작성되고 해방 후에 작성된 등기필증과 함께 동봉되어 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62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60점 보내와
1월 17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2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료영수장, 전시채권 등
이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목, 2018/02/2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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