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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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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admin | 월, 2021/01/25- 23:07

[식민지 비망록•66 ]

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금은 사용빈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옛 서울의 특정지역을 일컫는 독특하고 고유한 표현들이 그런대로 잘 남아 있었던 흔적이 곧잘 확인된다. 북촌(北村, 백악 밑)이니 남촌(南村, 남산 밑)이니 동촌(東村, 낙산 근처)이니 서촌(西村, 서소문 안팎)이니 하는 것은 그마나 제법 알려진 사례에 속하고, ‘동구내(洞口內, 동구안)’라든가 ‘통내(通內, 통안)’처럼 지금은 완전히 잊힌 용어도 없지 않다. 이 가운데 ‘동구내’는 창덕궁 돈화문 앞길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단성사(團成社, 수은동 56번지)와 같은 곳은 이곳의 위치를 알리는 문구에 ‘동구내
단성사’ 또는 ‘동구안 단성사’라는 식으로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통내’는 배오개 쪽에서 함춘원(含春苑)에 이르는 지역의 통칭(通稱)인데, 이로 인해 지금의 종로 4가 사거리를 일컬어 ‘통안네거리’라고 불렀던 흔적이 완연하다.

 

<매일신보> 1915년 2월 18일자에 수록된 신구연극 대흥행 광고 문안에는 ‘동구내단성사’라는 표기가 또렷하다.

 

이것 말고도 상촌(上村, 웃대)과 하촌(下村, 아랫대)이라는 것도 그 시절 서울사람들의 일상대화 속에 자주 오르내린 말이었는데, 박태원(朴泰遠, 1909~1986)의 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1938)에도 ‘웃대’와 ‘아랫대’의 표기가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소춘(小春)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김기전(金起田, 1894~?)이 <개벽> 제48호(1924년 6월)에 수록한 글을 보면, “광통교 이상(廣通橋 以上)을 우대, 효교이하(孝橋 以下)를 아래대”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들 지역의 개략적인 위치를 일러주는 내용도 남아 있다. 그리고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556쪽에는 일본인 거주지와 그 주변의 옛 모습을 그려내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고래(古來)로 상대(上臺, 웃대), 하대(下臺, 아래대)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前者)는 서리(胥吏)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야마노테(山の手)’에 비견되며, 주로 현 청운동(淸雲洞)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키고, 후자(後者)는 하급무관(下級武官)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 훈련원(訓練院)으로부터 동남 방면을 가리키며, ‘시타마치(下町)’에도 비견될 만하다. 또 남촌생원(南村生員, 남촌의 하급관리라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북부에 권세자의 거주자가 많고, 남부에는 이에 반하는 선비가 거주했던 것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아랫대 지역은 각종의 군속(軍屬, 장교와 집사 등)이 주로 몰려 살던 공간이었으며, 이러한 영향 탓인지 이곳과 가까운 도성밖 왕십리나 이태원 등지에도 하급 군졸과 병사들이 많이 거처하였다. 이 때문에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난병(亂兵)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청국군(淸國軍)에 의해 이들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아랫대의 범주는 자료 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어 보이나 이 가운데 ‘훈련원’이라는 공간이 그 핵심에 놓여 있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훈련원은 원래 조선의 개국 초기에 ‘훈련관(訓鍊觀)’이라 하다가 이름을 바꾼 것이었는데, 이곳은 무과시험과
아울러 활쏘기와 습진(習陣) 등 무예를 연마하거나 대규모 군사조련과 열병(閱兵)을 실시하는 공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원시(院試)는 훈련원에서 이름을 등록하여 시취(試取)한다”는 구절이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드나무 껍질을 덧대어 동여매고 다시 달렸다는 얘기의 현장이 곧 이곳 훈련원이었던 것이다. 순조 때 사람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었다고 전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1830)에는 훈련원의 연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다. 개국 초에 창건되어 과시(科試)와 무재습독(武才習讀)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이곳 곁에는 연자루(燕子樓)가 있으며 석초(石礎)가 매우 높다. 무과(武科)를 볼 때마다 이곳이 일소(一所)가 되므로 원관(院官)이 이 누에 올라 화살을 배부하면 거자(擧子, 응시자)는 누 아래에 둘러서서 이를 받는다.
살피건대 태종(太宗) 17년에 훈련관(訓鍊觀)의 모든 밭을 이곳에 속하게 하고, 이로써 무사(武士)를 양성하였다. 나중에 훈련관을 훈련원으로 고쳤으며, 이 곁에는 옥전(沃田)이 있어서 숭채(菘菜, 배추)를 심는데 그 맛이 좋아서 이를 일컬어 ‘훈련원배추(訓鍊院菘)’라 한다. 이 옆에 우물이 있어 ‘통정(桶井, 통우물)’이라 하는데 물맛이 제일이라 칭한다. 훈련원 사청(射廳)에는 성간(成侃)의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훈련원의 구체적인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갑오개혁 당시 한성부 오서(漢城府 五署)의 방계동명(坊契洞名) 정리자료에 ‘훈련원’이 ‘남서 명철방 남소동계(南署 明哲坊 南小洞契)’에 속해 있었다고 채록된 사실이 눈에 띈다. 이를 단서로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경성부 정동(町洞)의 명칭 및 구역(제정)」을 살펴보니, 이 당시에 종래의 훈련원은 ‘황금정 6정목(黃金町 六丁目, 지금의 을지로 6가)’ 구역에 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정리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2년 조사)>에는 “황금정 6정목 18번지, 잡종지(雜種地), 35,029평, 국유지”로 표기된 항목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옛 훈련원 자리이다. 이곳은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 일대와 그 후면으로 청계천변에 접하는 광활한 지역 전체를 두루 포괄하는 지번이다.
그런데 현재 이곳과 서쪽으로 이웃하는 지역에 훈련원공원(訓練院公園, 을지로 5가 40번지 일대)이 별도로 남아 있으므로 이로 인해 훈련원 구역의 공간적 범주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약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옛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있었던 구역이며, 동쪽 일부가 ‘황금정 6정목’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황금정 5정목’과 ‘방산정(芳山町)’에 들어 있으므로 딱히 훈련원 구역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경성사범학교에서 펴낸 <경성사범학교총람(京城師範學校總覽)>(1929)에 수록된 ‘학교연혁’ 항목을 보면 “[1921년 9월 30일] 경성중학교 가교사(假校舍)에서 황금정 5정목 훈련원 신축교사(기숙사 3동)로 이전”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미뤄 보건대 아마도 이곳 역시 대개 훈련원 권역에 포함하여 인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3년 1월 26일자에는 훈련원 옛터에서 야구경기가 벌어지는 광경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보이는 훈련원 청사는 1917년 6월에 동대문 소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의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간호부양성소 교실로 사용된다. 왼쪽 저 멀리 흥인지문(동대문)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근대 시기 이후 훈련원에 관한 흔적을 살펴보니, 1906년 8월에 군부(軍部)에서 친밀기관(親密機關)의 하나로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를 이곳에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눈에 띄긴 한데, 이런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울 지역의 각종 단체와 학교들의 운동회가 벌어진다거나 서양에서 도입한 각종 스포츠 종목들의 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된 사실을 알리는 신문기사들이 단연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잘 알려진 YMCA야구단의 야구시합이라든가 엄복동(嚴福童,1892~1952)이 참가한 자전거 경주대회 등도 이곳에서 자주 개최되었다.

프랑스 화보잡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1907년 9월 7일자에는 군대해산과정에서 숨진 시위대병사들의 시신을 늘어놓은 광희문(光熙門) 밖의 광경과 이를 수습하려는 가족들의 모습을 수록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리고 이곳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강요로 군대해산(軍隊解散) 조치가 이뤄질 때 해산식이 거행된 장소로 기억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31일 장차 징병제(徵兵制)를 공포할 요량으로 일시(一時) 해대(解隊)케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졌는데, 이에 앞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韓國統監 伊藤博文)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군대해산순서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군대해산순서(軍隊解散順序)]
제일(第一). 군대해산이유(軍隊解散理由)의 조칙(詔勅)을 발(發)할 사(事).
제이(第二). 조칙(詔勅)과 동시(同時)에 정부(政府)는 해산후(解散後)의 군인처분(軍人處分)에 관계(關係)한 포고(布告)를 발(發)하며 차(此) 포고중(布告中)에는 좌개사항(左開事項)을 시명(示明)할 사(事).
일(一). 시위 보병 일대대(侍衛 步兵 一大隊)를 치(置)함.
이(二). 시종무관(侍從武官) 기명(幾名)을 치(置)함.
삼(三). 무관학교(武官學校) 급(及) 유년학교(幼年學校)를 치(置)함.
사(四). 해산(解散)할 시(時)에 장교 이하(將校 以下)에 일시은급금(一時恩給金)을 급여(給與)하고 기 금액(其 金額)은 장교(將校)는 봉급 대개 일개년반(俸給 大槪 一個年半)에 상당(相當)한 금액(金額), 하사 이하(下士 以下)는 대개 일개년에 상당(相當)한 금액이라. 단(但), 일개년 이상 병역(兵役)에 복종(服從)한 자(者)이라.
오(五).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軍事學)의 소양(素養)이 유(有)하야 체격강건(體格强健)하고 장래유망(將來有望)한 자(者)는 일(一), 이(二), 삼호(三號, 전항)에 직원(職員) 우(又)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속(附屬)케 할 사(事). 단(但), 하사(下士)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附)치 아니할 사(事).
육(六).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 소양(軍事學 素養)이 무(無)한 자(者)로 보통학식(普通學識)이 유(有)하야 문관기능(文官技能)이 유(有)한 자(者)는 문관(文官)에 채용(採用)할 사(事).
칠(七). 병기탄약(兵器彈藥), 군복(軍服)은 환납(還納)할 사(事).

 

이 당시 서소문 안쪽 시위대 병영에 자리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력은 박승환 참령(朴昇煥 參領, 1869~1907)의 자결 소식에 호응하여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분연히 저항에 나섰으며,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훈련원에서 거행한 해산식에 일괄 소집되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다음의 기사들에 간략히 묘사되어 있다.

 

[최종경례(最終敬禮)] 작일(昨日) 상호 10시부터 각대 병정(兵丁)을 훈련원(訓鍊院)에 소집(召集)하고 해산식(解散式)을 거행할 새 일병(日兵)이 사면환위(四面環圍)하여 견여철통(堅如鐵筒)하고 한국위관(韓國尉官)을 곤재해심(困在該心)하여 대대장(大隊長)이 효유(曉諭) 후 장졸(將卒)이 호상작별경례(互相作別敬禮)를 시(施)하고 장교(將校)는 고위대명(姑爲待命)이고, 하사(下士)는 80원씩(圜式), 병졸(兵卒)은 1년 이상 근무자는 50원씩, 1년 이하 자는 25원씩 반사(頒賜)하였더라.
[한병휘루(韓兵揮淚)] 작일(昨日) 훈련원(訓鍊院)에서 해산한 한병(韓兵)들이 은사(恩賜)를 수(受)하고 출래(出來)하야 분기(憤氣)를 불승(不勝)하여 혹자(或者)는 지전열쇄(紙錢裂碎)하고 혹자(或者)는 의관제구(衣冠諸俱)를 매(買)하며 낙루자(落淚者) 다(多)하더라.

 

그런데 ????경성부사???? 제2권(1936), 29쪽에는 이 날의 상황에 대해 그야말로 일본인의 시각에서 정리한 구절이 남아 있다.

 

…… 11시에 이르러 약 2천의 병사가 몸에 촌철(寸鐵, 기병대의 패검)을 차지 않고 세우(細雨)가 소소(蕭蕭)한 훈련원원두(訓練院原頭)에 개연(慨然)히 정렬했다. 이 시각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제2연대 제1대대의 양대(兩隊)는 남대문 내에서 모반(謀叛)하여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식장참집부대(式場參集部隊)만 해산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해산의 취지(趣旨)를 선언하고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여 현장에서 수의해산(隨意解散)하는 것을 허가했다. 병사들은 일이 의외인 것에 놀라 처음에는 호읍(號泣)하는 자도 있었으나 당시의 병사로서는 과분한 금원(金員)을 얻게 되자 읍성(泣聲)은 홀연히 소성(笑聲)과 환성(歡聲)으로 변하였고 오후 3시 식(式)의 종료를 기다려 은사금을 지니고 광희정(光熙町)과 부근의 전체 주막(酒幕), 입주가(立酒家, 선술집), 내외주가(內外酒家)에 설퇴(雪頹, 우르르 몰려가는 것)하여 우음(牛飮)했다. 술집은 이 때문에 입추(立錐)의 여지(餘地)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훈련원 일대는 동대문공립심상소학교(東大門公立尋常小學校, 1917년 4월 개교)를 위시하여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 1919년 5월 신축이전), 경성사 범학교(京城師範學校, 1921년 9월 신축이전),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京城女子公立實業學校, 1928년 12월 신축) 등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그 영역이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이밖에 돈의문 밖 경기감영 터에 있던 고양군청(高陽郡廳)이 1928년 4월 7일에 옮겨와서 이 구역을 다시 분할하여 차지하였다가 해방 이후 1961년 8월까지 머물렀던 일도 있었다. 또한 1934년에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 요구에 직면한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 돈으로 지은 ‘경
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이 들어선 자리가 곧 훈련원 구역이었다.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이 신축되고, 경성전기회사의 본점이 서울로 옮겨진 것도 모두 이 당시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경성전기의 1차년도 기부금 50만 원을 재원으로 경비진료소(輕費診療所)를 건립하기로 하고 1933년 6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3월에 낙성식을 보았는데, 완공 직전에 ‘경성부민병원’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1941년 3월에는 이곳 후면에 상이군인 유가족을 위한 수산장(授産場)으로 2층 규모의 양관인 ‘생활의 집’이라는 명칭의 시설이 추가된 바 있다. 경성부민병원은 해방 이후에 한때 시민병원(市民病院)으로 개칭하였다가, 그 자리에는 1958년에 신설된 ‘국립의료원’이 들어서게 된다.
이보다 앞서 훈련원 자리는 1919년(고종황제 인산)과 1926년(순종황제 인산) 두 번에 걸친 국장(國葬)이 벌어질 때마다 봉결식장(奉訣式場)으로 사용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1932년에는 동일한 자리에서 만주사변(滿洲事變)과 이에 따른 ‘만주국(滿洲國)’ 수립의 선포를 계기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서울프레스사가 공동주최한 ‘신흥만몽박람회(新興滿蒙博覽會, 1932.7.21~9.18)’라는 대규모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옛 훈련원 지역의 공간해체내력을 훑어가다보면 그 말미에 존재감이 뚜렷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 1940년 4월 11일에 다시 ‘경성부 훈련원 회장’으로 개칭)이다. 이것은 원래 1937년 2월에 일본인 광산업자인 코바야시 우네오(小林采男, 1894~1979)의 기부금으로 확보한 1만 4천 원의 금액으로 훈련원에 자리한 약학전문학교 후편 공터에다 새로운 장재장(葬齋場))을 건설하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통해 홍제내리(弘濟內里)의 장재장 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한편 그곳 화장터에 가마 두 기를 추가로 건설하려던 계획도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朝鮮)> 1926년 7월호에 수록된 순종 국장 당시 장의식장으로 사용된 훈련원 터 일대의 전경이다. 이에 앞서 1919년3월 고종 국장 당시에도 이곳 훈련원 터가 장제장(葬祭場)으로 사용되었다.

1932년 가을에 옛 훈련원 터에서 벌어진 신흥만몽박람회의 모습을 담은 항공촬영사진이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박람회장이고 그 뒤로 청계천 일대와 경성약학전문학교, 동대문소학교,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 등이 두루 포진한 광경이 함께 포착되어 있다. 이 사진의 오른쪽으로는 경성운동장이, 왼쪽으로는 경성사범학교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뻗어가는 경성전기>(1935)에 수록된 경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 1934년 3월 낙성)의 전경이다. 이른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의 당면과제에 놓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한 거액의 기부금으로 이를 지었으며,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 1935년 12월 준공)’ 역시 이 건물과 건립유래는 동일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러나 도중에 장례식을 거행하는 ‘장재장’만 건설하기보다는 마치 일본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과 같은 공간처럼 야외음악회와 영화회 등을 곁들여 운영할 수 있는 시설로 꾸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를 ‘경성부민회장’으로 그 용도와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성부민회장(부지면적 5,566평, 건물평수 26평 3합)의 개장 과정에 대해서는 <경성휘보(京城彙報)> 1938년 1․2․3월호(합본), 76~77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부민 대망(待望)의 부민회장(府民會場)도 부내 모 독지자(某 篤志者)의 기부금(寄附金)으로 드디어 그 실현을 보기에 이르러, 객년(客年) 8월 황금정 6정목 18번지 구 훈련원(舊訓練院)의 광장에 기공(起工), 공비(工費) 1만 2천여 원을 들인 근세식 철근 콘크리트조(近世式 鐵筋 コンクリート造)의 건물도 최근에 준공(竣工)을 고하여 3월 5일부터 개장(開場), 일반(一般)에 대여하는 것으로 되었다. 사용시간(使用時間)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이며, 사용요금(使用料金) 20원을 전납(前納)하고 부윤(府尹)의 사용승인(使用承認)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부민회장사용조례(府民會場使用條例) 5조(條)에 해당하는 경우는 사용불승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제5조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략)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와 관련하여 이들 전몰장병에 대한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는 광경이 수록된 <동아일보> 1938년 10월 2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비단 이 행사만이 아니라 이곳 훈련원 터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에는 이러한 종류의 위령제와 추도회가 쉴새없이 거행되었다.

 

<매일신보> 1940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윤덕영 자작의 부고광고이다. 그의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이며, 영결식장은 ‘경성부민재장(京城府民齋場, 옛 훈련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일상적인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곧잘 스모(相撲, 일본씨름) 대회나 중량거(重量擧, 역도) 경기대회가 벌어졌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과정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위한 추도집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곤 했다. 여기에는 장고봉사건(張鼓峰事件)의 전사자들에 대한 위령제(1938년 9월), 야스쿠니신사 합사 전몰장병 위령제(1938년 10월), 경성부 출신 장병 영령 추도회(1939년 7월), 지나사변 군마(軍馬) 위령제(1939년 10월), 지나사변 전몰자들에 대한 추도회(1940년 7월), 지나사변 5주년 전몰장병 추도제(1942년 7월) 등의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경학원 대제학, 귀족원 의원, 종2위 훈1등 자작 ……. 이것도 벼슬이랍시고 이러한 긴 수식어를 앞에 달고 있는 이는 대표적인 친일귀족이자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사람인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윤덕영이 죽었을 때 그의 영결식이 벌어진 자리가 바로 이곳 경성부민회장이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이미 조중응 자작(1919), 민원식 국민협회 회장(1921), 조동윤 남작(1923), 민영기 남작(1927), 유맹 중추원 참의(1930) 등 적지 않은 친일파 군상이 이곳을 이승과 작별하는 장소로 이용했던 흔적이 포착되고 있다. 이래저래 훈련원 옛터는 일제의 폐해와 친일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던 공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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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조 소속 교사 윤희찬 회원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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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1995년 3월에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답 : 평소 친일문제에 관심을 갔고 있었는데 마침 1995년 3·1절 무렵 경희대학교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당시 이름 반민족문제연구소)에 직접 방문하여 회원 가입을 하였습니다. 1995년이 한일협정 체결 30주년이 되는 해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재평가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었습니다. 연구소도 그때 ‘친일협정, 30년 동안의 굴욕’이라는 학술회의를 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 : 할아버지께서 3·1운동 독립유공자라고 알고 있는데,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후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답 : 할아버지 함자가 윤영주(1893~1988)입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데 3·1운동 당시 26세의 나이로 대구에 있는 동산 기독교성경학교에 재학중이었습니다. 3월 8일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대구 시위에 참석한 후 고향인 의성군 금성면 대리동으로 귀향했습니다. 대리동 기독교회 박낙현 목사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어요. 그리고는 태극기 100여 장과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비밀리에 제작했습니다. 의성군 장날인 3월 18일, 장터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지요. 보안법 위반으로 1년 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출옥 후 할아버지는 목사가 되어 목회활동을 하셨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혀 일경에게 항상 감시를 받았습니다. 1988년 96세의 연세로 부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92년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다 감시받는 생활이 싫어 만주에 건너가 지내시다 해방 후 귀향했습니다. 의성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좌익활동을 하셨습니다. 1949년 보도연맹으로 대한민국 군경이 보도연맹관련자들 학살할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부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학살의 공포를 한평생 트라우마로 안고 사셨습니다. 잠을 못 주무시고 잠들었다가도 한밤중에 갑자기 깨어나 두려움에 떨기도 하셨습니다.

문 : 지난 9월 21일 대법원으로부터 복직 판결을 받으셨는데 그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답 : 2001년 전교조 서울지부 교권국장으로 있을 때 상문고 비리와 관련해 재단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2001년 7월 교육청 앞에서 상문고와 관련해 민주 관선 이사 선정과 파견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경찰이 저를 비롯해 전교조 서울시지부장 김재석 용산고 교사(용산고)와 이을재 교사(한천중), 우삼동 교사(신정여상)를 구속 기소했습니다. 2004년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2005년 광복절 때 특별사면을 받아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택 교육감 시절이어서 복직이 안 되었습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두 번째 구속을 당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유로 그동안 복직 발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조희연 교수가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된 후, 복직 신청을 하여 서울 숭곡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한두 달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직권 취소로 말미암아 다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2016년 교육부를 상대로 한 임용취소처분 취소소송에서 두 차례 승소했고 이번에 대법원에서의 확정 판결로 마침내 복직하게 된 것입니다.

문 : 17년 만에 복직하시는데 감회가 어떠신지요.

답 : 물론 기쁩니다. 서른 살 무렵인 1985년에 서울 고려대 사대부고 국어교사로 부임한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제가 환갑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정년이 1년 5개월쯤 남았습니다. 2015년에 잠깐 재직했던 숭곡중학교로 갈 것 같습니다. 비록 남은 기간이 아주 짧지만 비정상적이고 특권층만을 위한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문 : 전교조 가입은 언제 하셨고 어떤 부문에서 중점적으로 활동하셨습니까?

답 : 1989년 전교조 출범 때부터 활동한 창립멤버입니다.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교권부장, 조직부장, 부지부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제가 전교조에 들어와서 주안점을 둔 것은 사학비리 척결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비리재단은 대체로 일제시대 친일파와 닿아 있습니다. 김달하라고 아시죠. 북경에서 밀정짓을 하다가 다물단에 의해 처단된 사람 말입니다. 김달하는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 선생에게 총독부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김달하의 사위인 조 아무개(초대 교장을 겸함)와 친일교육자 김활란이 공동 설립자로 있었던 동구학원이 대표적인 세습비리사학입니다. 조 아무개의 아들이 현재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2008년 11월 동구여상(현재의 동구마케팅고)에서는 교육청 예산으로 200여 권의 도서를 구입하기로 했는데, 학교측이 국어·역사 교사들이 신청한 <친일파 99인>(연구소 기획) 등 3종의 근현대사 관련책에 대한 구입목록을 무단으로 제외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2014년에는 동구마케팅고 이사장과행정실장의 비리 관련 민원을 교육청에 제기한 교사를 파면하기도 했습니다.
전교조는 사학비리를 막기 위해 꾸준히 입법 청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발의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2006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서는 사립학교법이 재단측에 유리하게 개악되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자신이 박정희가 불법으로 탈취한 영남대 이사장으로 재직했었으니 가재는 게편이란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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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2015년에 잠깐이나마 복직하셨는데 전교조 해직교사에게 특혜를 줬다는 등 종편과 보수언론으
로부터 인신공격을 받지 않으셨나요?

답 : 엄청난 인신공격을 받았지요. 종편과 보수언론에서는 제 과거 발언과 SNS에 올린 글까지 철저히 뒤져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재판정을 만들어야”와 “세월호 범인 박근혜”입니다. 전자는 김정훈 전교조 전 위원장의 징역 1년 반에 집행유예 선고를 내린 사법부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후자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박근혜의 잃어버린 7시간이 없었으면 세월호 최악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음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TV조선, 채널A 등은 북한식 표현이니 하며 저를 친북 용공분자 혹은 파렴치한으로 몰았습니다. 이러한 종편과 보수언론의 여론몰이로 인해 교육부의 임용 취소 결정이 훨씬 앞당겨진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공격의 이면에는 진보 진영의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흠집 내려는 의도도 다분했습니다. 더구나 이 무렵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대통령 명예훼손 사실에 대해 저를 조사하였는데 그후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문 : 요새 이명박·박근혜 집권기의 적폐청산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교육계에서 시급히 청산
해야 할 적폐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시급한 현안은 불공정한 입시제도 개선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동안 교육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욱 더 심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입시사정관제도, 자사고·특목고 활성화 등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악화시킨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교육계 적폐를 바로 잡아 참다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실현해야 합니다.
한편 박근혜 정권하에서 전교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법외노조’가 되었습니다. 전교조의 합법화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행정통보를 취소하면 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해고당한 노조 전임자가 50여 명이나 되는데 이들이 교단에 설 수 있도록 신속한 조치가 취해져야 하겠습니다.

문 : 끝으로 연구소 회원들께 드릴 당부 말씀은?.

답 :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폐해는 일제 교육제도를 답습한 데서 옵니다. 사학 비리가 대표적이죠. 또 자사고다 특목고다 하여 교육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학제가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회원들께서 우리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인간다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성원해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목, 2017/10/1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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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상 운영위 부위원장

 

2001년 8월 4일, 중앙일보에서는 서정주 시인을 기리는 미당문학상을 제정했다. 이에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에서는 친일문학의 부역자이며 친독재 행적이 뚜렷한 서정주 시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문인단체로서 회원들 모두가 미당문학상의 수상 및 심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발맞추어 경향 각지의 작가들은 미당문학상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예총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문화예술, 사회, 노동, 시민단체에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작가들과 문단에서 터져 나온 비판의 목소리는 금세 가라앉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다음해부터 대다수의 시인들, 평론가들이 미당문학상 심사에 참여하고 수상의 영광을 떠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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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4일 연구소가 주최한 대한문인협회의 육당 춘원 문학상 제정 규탄 기자회견. 플래카드 뒤 오른쪽 첫 번째가 필자

 

그로부터 미당 사후 15년이 지났다. 보수재벌언론과 결탁한 미당문학상의 권위와 명예는 날로 높아졌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이 한국 최고 문학상의 위치에 올랐다. 이에 영합하는 몰지각한 문인들의 행위를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떼로 몰려들어 찬사와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마침내 2015년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박근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건국절’을 제정하고 법제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국민에 의해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들자는 건국절 제정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한일합의 등 반역사적, 반민족적 폭거를 일방적으로 자행했다. 바로 이 즈음에 한국작가회의 내에서도 친일문학상에 대한 비판이 다시 등장했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을 규탄하는 글들이 한국작가회의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해 한국작가회의 총회장에서는 미당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반대하는 피켓 시위가 한 회원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작가들에게 친일문인문학상 반대 서명을 받기도 했다.

2016년 한국작가회의의 산하 대외활동기구인 자유실천위원회(위원장 맹문재, 안양대 교수)는 친일문인문학상 반대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을 논의했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를 자유실천위원회의 내부 사업 안건으로 공식화했다. 작가들의 주체적인 활동을 모색하기로 하고, 아울러 작가와 시민단체가 반대운동을 함께 논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친일문제에 있어 가장 공신력 있는 단체인 우리 연구소와 자유실천위원회가 공동 주관으로 토론회를 준비했다. 10월 29일, 혜화동 소재 함춘회관에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자문과 성찰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우리 임헌영 소장님(문학평론가)을 좌장으로 하고, 발제자로 박한용(교육홍보실장) 임동확(시인, 한신대) 이규배(시인, 성균관대) 이도흠(문학평론가, 한양대), 토론자로 김점용(시인, 문예바다 주간), 정세훈(시인, 리얼리스트 100 상임대표), 안재성(소설가,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장), 김란희(문학평론가, 고려대) 김응교(문학평론가, 숙명여대) 노혜경(시인) 등이 동참하였고 그 밖의 학자, 문인, 시민 등 100여 명이 회의장을 채웠다. 4시간에 걸친 토론회는 ‘친일문학’과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문제를 한국문학계에 공개적으로 던졌다. 비판적 성격을 분명히 한 이 세미나는 문단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친일문학(상)’에 대한 반대운동을 다시금 점화시키고 문인들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2017년 1월에 열린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 대한 한국작가회 차원의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총회 자료집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회원들에게서도 ‘친일문학상‘에 관한 한국작가회의의 방침이 정해져야 한다는 요구가 다시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2017년 미당문학상 후보에 오른 명망 있는 시인들이 후보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송경동, 심보선, 이장욱 시인 등이 미당문학상 후보가 되기를 거절했다.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후보를 사양한 시인은 더 있었다고 한다. 문학과 역사 앞에 자연인으로서, 아니 일개 미물로서의 부끄러움조차 없었던 서정주의 권위가 미당문학상 제정 17년 만에 비로소 깨어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작가회의 본회의 공식 사업 안건으로 채택되었다. 일부 회원들은 친일문학상에 참여하는 회원들을 제명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마침내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에서는 3월 25일, 최원식 이사장과 안상학 사무총장의 주도하에 친일문학상 내부토론회를 열었다. 김진경(시인), 임성용(자실위 부위원장), 이영광(미당문학상 기수상자), 장성규(문학평론가)를 발제자로 하여 한국작가회의 이사, 전국 지회장, 분과별 위원장 및 자유실천위원회 위원들은 치열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찬반의 입장이 부딪치는 지점도 생겼고, 토론회 참석자들의 의견만으로 이를 극복하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아무튼 이날 열린 작가회의 내부토론회는 많은 문인들에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주요한 관심사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점차 친일문학상 문제에 대한 비판적 공감대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올 7월, 한국작가회의 이사회에서는 3월의 내부토론회에서 나온 결과를 놓고 이사진들 간에 장시간의 논전이 벌어졌다. 진통 끝에, 한국작가회의는 공식적인 조직입장으로서 친일문학상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5·18문학상 수상자가 미당문학상에 당선되었고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일자 결국 수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우리 연구소와 자유실천위원회가 공동으로 친일문학상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장대 같은 폭우 속에서 20여 점의 친일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친일시 낭독회 개최와 시민 서명 운동을 통해서 친일문학상의 부당함을 널리 알렸다.
많은 언론과 SNS에서도 친일문학(상)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인하대 김명인 교수는 서정주를 ‘비단옷을 입은 노예’라고 규정짓고 ‘서정주의 이름을 걸고 상을 주는 문학상은 기형적 유산으로 보편적 신뢰나 합의가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서정주를 ‘일제와 전두환 찬양뿐만 아니라 십수 년간 문인협회, 시인협회 등 대표적 문인단체에 군림한 권력자로 한국문학을 극우, 냉전 문화정치의 일부로 만든 장본인’이라 규정했다.
때마침 미당 전집이 발간되자 동아대 전성욱 교수는 ‘미당의 문학적 성취는 무엇인가? 그 성취는 과연 그의 역사적 반역을 대속할만한 것인가?’라고 비판했고, 김륭 시인은 영화 ‘택시운전사’를 빗대 ‘이 나라 문단엔 택시운전사보다 나은 어른이 왜 없는가?’라며 미당 전집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했다. 그 외에 여러 잡지와 매체에서도 미당문학상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폐지의 정당성을 거듭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특히 이명원을 필두로 한 젊은 평론가들이 본격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주장은 확고하고 명료했다. ‘친일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번번이 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제 때, 제대로 앓았어야 할 진통을 회피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 일제에 적극 협력하고 나아가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놓는 데 앞장섰던 문인들을 기리는 문학상을 시행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지독한 모순이요, 넌센스’라고 했다. 또한 ‘과거 식민지 종주국에 적극 협력하고 파시즘적 담론을 만든 문인들은 기리는 문학상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그들은 ‘기념’할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이라고 했다.
여전히 일부 작가들과 문단 권력이라 할 만한 문인들은 ‘문학주의와 미학주의’를 내세우며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는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한국문학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 문학과 예술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를 겪고 강대국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 중에서,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민족을 팔아먹은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기리는 기념상을 만들어 찬양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한 가지다. 오랫동안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주의를 빼앗기고 친일세력들이 정치적 지배자가 된 한국에서, 문학인들조차도 친일문학의 삐뚤어진 문학정신을 내면 에 간직해 두고 그동안 호가호위해 온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문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은 단언컨대 찬반의 논란이 필요치 않다. 친일문학은 ‘문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 그리고 반민주의 폭압 속에서 살아온 한국 작가들에게 친일문학,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은 ‘역사의 문제’이자 ‘정의의 문제’인 것이다.

편집자주 – 권위상 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시인)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소속으로 친일문학상 반대운동에 앞장 서 활동해왔으며 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의 연대에 기여하였다. 서울 서부지부장을 맡아 수년 간 지부를 이끌어왔다.

월, 2017/10/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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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26

13일 용산연병장의 본사 주최 자전거경주회장은 오전부터 남녀노소가 답지하여 수십 대의 전차는 서로 연하여 운전을 하나 오히려 올라탈 여가 없어 도보 혹은 인력거로 나오는 사람이 남대문에서 연병장까지 발자취를 서로 연함으로 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다지 넓은 대경주장 주위에는 송곳 세울 틈도 없이 사람이 열 겹, 스무 겹씩 둘렀고 산비탈 언덕 아래에도 사람으로 가리워 오후 2시경에는 십만 인 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 …… 그 다음에는 전조선 제일류(第一流)의 대경주를 개시하였는데 선수는 내지인(內地人) 네 명, 조선인 엄복동 황수복의 두 명이라. 용맹 활발한 여러 선수는 평생의 용맹을 다하여 명예 있는 일등을 다투는데 활동사진은 기념으로 사진을 백이며 십만 관객이 박수 응원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앞서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와 좇아옴을 보고 더
욱 용맹을 내여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 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독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 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에게 떨어지고 황수복도 삼등을 점령하여(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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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3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 안내광고.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진 실제 대회일정은 1주일이 연기되었으나, 이때 ‘엄복동’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사는 <매일신보> 1913년 4월 15일자에 수록된 것으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구전가요의 구절로 유명한 자전거대왕 엄복동(嚴福童, 1892~1952)이 처음 자신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공동주최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全朝鮮自轉車大競走會)’는 인천, 경성, 부산, 평양의 네 곳에서 3주간에 걸쳐 연속 경기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복동이 자전거를 탄 장소가 ‘용산연병장(龍山練兵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산연병장은 그야말로 러일전쟁 이후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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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연병장’의 위치가 표시된 「경성급용산」 지도 자료. <조선철도여행안내>(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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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7년 1월 9일자에 소개된 용산연병장 관병식 장면. 말 위에 앉은 이는 조선주차군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육군대장.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이 연병장은 본연의 군사훈련장이라는 용도 이외에도 해마다 정초 또는 천장절이나 육군기념일과 같은 ‘경축일’이 되면 조선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관병식(觀兵式)이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곤 했다. 또한 1912년 여름에는 그들의 천황이 세상을 뜨자 성대한 봉도식(奉悼式)이 이곳 연병장에서 거행되었고, 이보다 약간 앞서 친일파의 거두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벌어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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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 나라하라 산지에 의해 제작된 ‘봉호(鳳號)’가 용산연병장에서 비행하는 장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비행기가 등장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매일신보> 1913. 4. 5)

 

용산 일본군 연병장은 서울 시내의 ‘훈련원 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수의 군중이 집결하기 용이한 위치에 있었던 탓에 여러 학교 단체의 운동회가 벌어지거나 갖가지 별스러운 흥행이 벌어지는 장소로 곧잘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13년 4월에 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의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 1877~1944)가 나라하라식 4호 비행기인 ‘봉호(鳳號, 오토리호)’를 서울에서 처음 선을 보였을 때 비행장으로 사용된 곳이 용산연병장이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일본의 제국비행협회가 파견한 오자키 유키데루(尾崎行輝, 1888~1964)의 ‘삼중호(三重號, 미에호)’ 축하 비행을 비롯하여 1917년 미국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Art Smith, 1890~1926)의 비행대회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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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찾아온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대회를 알리는 광고문안. 용산연병장에서 거행된 그의
비행묘기는 장차 비행사가 될 안창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매일신보> 1917. 9. 11)

 

그런데 1915년 6월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주차군 편제를 상주군으로 전환하는 결정과 관련하여
용산병영지가 확장됨에 따라 신연병장(新練兵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일대)이 새로 조성되는 한편 종래의 연병장 터는 야포병연대(野砲兵聯隊, 1920년 4월 병영공사 준공)가 차지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현재 이곳은 통칭 ‘캠프 코이너(Camp Coiner)’로 용산미군기지의 북쪽 끝 지역에 해당한다. 이때 연병장 터의 서쪽 대로변에 접한 구역에는 따로 시가지가 만들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부대 신영공사(朝鮮部隊 新營工事)」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연병장(新練兵場)에 이전 후의 용산연병장 한강통 전차연선(漢江通 電車沿線) 전부의장(長)을 광(廣) 60간(間)에 긍(亘)하여 일대지(一帶地)를 시가지로 군사령부에서 총독부에 인도를 료(了)하고 기 후방(其 後方) 전부를 야포병연합대(野砲兵聯合隊)의 부지로7년도(1918년도)부터 병영공사에 착수하겠고(하략)

 

새로 생긴 동네는 일제가 정한 행정구역상으로는 한강통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가 이미 연병장 터로 각인되어 있었던 탓에 대개 ‘연병정(練兵町)’으로 통용되었다. 더구나 연병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구용산과 신용산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이곳 전차정류장의 이름은 여전히 ‘연병정’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4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부시(京城府市)의 행정구획정리」 제하의 기사는 그 무렵 ‘연병정’이 이미 속칭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강통 삼번지(漢江通 三番地) 부근은 속칭 연병정(練兵町)이라 하고 우(右) 칠번지각삼각정(七番地角 三角町) 등도 개(皆) 속칭이오 행정구획에 의하여 명명된 정명(町名)은 아닌 고로 금회의 정리에는 당연 우(右) 정명을 폐지하고 공식의 정명으로 변경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나 부당국(府當局)에서 혹 지방 거주자의 의지를 존중히 하여 현재 속칭 정명으로 그대로 명명하게 될지 알지 못하나(하략)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패망기로 접어든 1941년 10월 1일에는 경기도고시 제379호를 통해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이 개정됨에 따라 종래 ‘한강통’으로만 불러왔던 용산 일대의 군영지 및 배후지역이 여러 동네로 세분화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조치에 따라 옛 한강통 3번지 일대의 땅은 ‘공식적으로’ 연병정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고, 여타 구역에는 한강통 몇 정목이니 용산정 몇 정목이니 하는 식의 명칭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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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연병장은 사라졌으나 ‘연병정’은 전차정류장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진은 <경성과 인천>(1929)에 수록된 연병정 전차분기점의 모습.

 

이로부터 불과 4년여 만에 일제가 패망했으나 그들이 부여해놓은 지명은 그대로 이 땅에 남는 상태가 되었다. 누가 봐도 ‘연병정’은 그대로 용납할 수 없는 표현이었으니만큼 1946년 10월 일본식 지명 잔재를 일소하는 차원에서 종전의 ‘연병정’을 대체하기 위한 지명이 창안되었는데, 이때 성급하게 붙여놓은 명칭이 ‘남영동(南營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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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문> 1925년 1월 13일자에 수록된 일본인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의 화재위문 답례광고. 이곳의 지번 주소는 ‘한강통 3번지’이지만 광고문안에는 ‘용산 연병정’이라고 소재지를 그대로 기재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지명총람 1(서울편)????(한글학회, 1966)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서울 남쪽에 영문(營門)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남영동으로 개칭함”이라고만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영문’이 어느 시대에 존재했던 것인지, 아님 무슨 문헌상의 근거라도 있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관련 자료가 제시된 바는 없다. 그저 짧은 소견에 생각건대 남쪽에 있는 병영, 즉 남영은 일본군대의 용산 병영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이 와중에 지난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부터 존재했던 ‘남영역’은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익숙한 생활공간의 하나로 정착된 지 오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정작 이 철도역사의 소재지는 ‘남영동’이 아니라 ‘갈월동’이라는 사실이다. 행정구역으로만 따지자면 ‘갈월역’이 되어야 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건 지금껏 남영역이었고 앞으로도 이 이름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애당초 ‘연병정’이라는 이름은 일본군대가 이 땅에 침탈의 흔적으로 남겨놓은 것이고, ‘남영동’ 이니 ‘남영역’이니 하는 것은 다시 거기에서 파생한 말이니 이래저래 꽤나 고약한 이름이 아닐수 없겠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남영동’이라는 지명은 삭제되어야 하고, 다른 적절한 명칭을 찾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금, 2017/07/2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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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 교육부는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고석규)를 출범시키고 박근혜정권의 국정화 추진과정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사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고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거론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보면서 한 인물을 생각합니다. 전 재산을 들여 평생 동안 친일연구를 한 임종국 선생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친일연구 과정에서 본인 아버지의 이름도 친일인물로 기록하였던 분입니다. 사실에 기초한 기준 이외 혈연, 지연 등 다른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저 역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위원회가 세운 기준을 존중하고 일관성 있는 조사를 추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임종국 선생이 시대의 귀감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단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의 역할이 컸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에 대한 요구는 연구소 출범 당시부터 조금씩 논의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착수한 계기는 2003년 8월 22일 〈KBS 1TV 인물현대사〉 ‘임종국 편_배반의 역사를 고발하다’(연출 김정중)가 방송된 직후부터다. 방송 이후 선생의 대표 저작인 ????친일문학론???? 판매가 급증하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나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준비에도 힘이 부쳐 기념사업은 언감생심이었다.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연구소 재정 외에 외부의 안정적인 재원 마련이 필요하였다. 그러던 차에 당시 연구소 조문기 이사장이 광복군 장이호 선생의 아들이며 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던 장병화 가락전자 대표에게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병화 이사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회장직을 수락했다. 이후부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설립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2005년 2월 3일 준비 모임에 이어 3월 29일 서울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의실에서 정식으로 출범식을 가졌다. 기념사업회는 별도의 사무국은 두지 않고 연구소가 업무를 맡기로 했다.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기념사업회에 힘을 보태고 있는 주요 인사로는 김지철 현 충남교육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이용길 천안민주단체협의회 초대 의장 등이 있다. 기념사업회는 출범 당시 크게 5가지 사업 계획을 마련했는데 임종국상 제정, 추모 조형물 건립, 문화훈장 추서, 평전 발간 및 학술사업, 장학사업이 그것이다.
이들 사업 중에서 출범 첫해인 10월 15일 문화훈장 추서가 가장 먼저 이뤄졌다. 추서 신청에는 당시 작가회의 이사장이었던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동참해 주었다. 그러나 임종국 선생에게 추서된 문화훈장은 총 5등급 중 금관, 은관에 이어 3등급은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삼웅 전 관장은 2000년 서정주에서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 사실을 상기하면서 추서 거부를 언급하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지만 그럴수록 기념사업 활동에 더욱 분발하자고 다짐했다. 임종국상 역시 기념사업회 출범 첫해인 2005년 11월 11일 제1회 시상식을 시작으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전력코자 2008년과 2009년 두 해를 거른 것을 제외하고는 올해까지 11회에 이르고 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임종국상의 권위가 높아지고 있다.
임종국 선생의 19주기를 맞는 2008년 11월 18일에는 정지아 작가가 ????임종국 – 친일의 역사는 기록되어야 한다????(여우고개)를 펴냈고, 기념사업회와는 별도로 정운현 씨가 2006년 ????임종국 평전????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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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12일 임종국 선생의 기일에는 천안공원묘원에서 선생의 추모식이 열렸다. 1990년대 말까지는 천안민주단체협의회를 중심으로 이용길, 김지철, 전재진(현 우키시마호 폭침진상규명위원장), 김영수(현 천안시의원), 장기수(전 천안시의원) 그리고 전교조 선생님들과 전농 회원님들이 수고해 주었고 2000년대 들어서부터 현재까지는 연구소 충남지부, 천안지회, 아산지회 회원들이 추모식을 주관하고 있다. 찬바람이 부는 높은 산에서 진행되는 추모식을 위해 손을 비벼가며 정성스럽게 제사상을 준비하는 회원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임종국 선생과 기념사업회의 존재를 널리 알린 데는 역시 방송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앞서의 인물현대사 외에 2012년 〈EBS 지식채널e : 임종국 편〉과 2013년 뉴스타파에서 방영한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3부작이 그것이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사업은 바로 임종국 선생 조형물 건립이다. 임종국 선생 조형물 건립은 오래 전부터 시도되었지만 천안시(당시 시장 성무용)의 비협조로 진척을 이루지 못하다가 작년 초 천안지회(지회장 전훈진)가 발의하고 7월 9일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용길)가 발족해 본격 착수하여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1월 13일 천안신부공원에 조형물이 건립되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3,626명이 참여해 1억 2천만원이란 거금의 모금으로 이뤄낸 쾌거였다.
앞으로도 연구소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선생의 정신을 더욱 널리 계승, 발전시켜나갈 것을 다짐한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7/11/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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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수 회원

 

2018년 2월 9일, 드디어 기대보다 걱정이 많았던 평창겨울올림픽이 엄동설한을 녹이는 감동을 연출해냈다. 평창올림픽은 유치단계부터 우여곡절이 많았고, 국내적으로 수천 년 동안 온존한 산천을 허물어야 하는 환경훼손문제로 불화가 있었고 막대한 예산으로 준비된 시설들의 올림픽경기 후 유지와 활용방안이 논란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 한반도의 휴전선에 인류평화의 제전을 마련하여 갈등과 적대와 대결을 끝내고 평화를 함께 누려보자는 간절한 소망으로 성공적인 올림픽 개막을 이루어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조성된 국제사회의 제재와 긴장으로 남한 민중이 겪은 두려움과 불안은 올림픽경기가 제대로 치러질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올림픽 참가와 한반도기를 앞세운 단일팀 입장으로 그동안의 근심이 봄날 눈 녹듯이 풀어졌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그동안 꽉 막혔던 남북 사이에 대화의 문이 열리고 땅길, 하늘길, 바닷길까지 열려 막힘없이 오가며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평화가 찾아와 이것이 현실인지 실감하기조차 어리둥절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유폐되고 장막 속에 묻혀 있던 통일 논의가 봇물처럼 터지고 기대 또한 만발하다. 그러나 통일로 가는 길은 기대만큼 난제가 너무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첫 번째 장애는 남남 갈등이다. 이것은 불행 중 더 큰 불행이다. 지구촌 여러 나라를 초대한 잔치마당에 북한 참가를 반대하는 시위로 올림픽정신을 부정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이전에 남남 갈등을 풀지 않고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준 사건이다.
또 하나의 장애는 국제적 개입과 부당한 간섭이다. 미・소 야합으로 비롯된 조국 분단과 국제대리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열강들은 여전히 우리의 통일 의지를 꺾고 분단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국토 분단과 겨레의 분열은 73년간 갈등 분노 적대 대결의 악순환으로 생긴 내상으로 증오의 일상화를 초래했다.
통일은 남과 북이 서로 미워해야 할 적이 아니고 가엾은 피해자라는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통일은 애초에 한말 한글 한역사 한겨레로 한반도에서 한나라로 살았던 때로 돌아가서 다투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는 간절한 소망이다. 통일은 평화로 가는 디딤돌이고, 남과 북이 평화로 가는 길이 함께 사는 길이며 오직 함께 사는 길만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평화로 가기 위해서는 맨 먼저 마음부터 열고 남과 북이 한겨레 한동포임을 자각하고 미움을 걷어내야 한다.
다음으로 말문을 터서 서로 위로하고 이해하면서 희망을 살려내야 한다. 그리고 길을 열어 서로 오가며 정을 쌓고 도와주면서 자주 자립을 이뤄내야 한다. 이번 평창올림픽이 이 땅 이 겨레에게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자각케 하는 단처를 마련해 준 것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득이요 횡재라 아니 할 수 없다.
반목은 서로에게 손해를 주고 평화는 서로에게 이익을 준다. 국제사회의 야욕으로 갈라졌던 국토, 찢겨진 겨레의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지금 이 땅에 사는 겨레가 있는 힘과 지혜를 모아서 외세 개입과 간섭을 물리치고 ‘생명과 평화 자주권’을 굳건하게 지켜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이제 우리 겨레의 비극과 불행과 고통을 청산하는 길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로 뭉쳐서 우리를 구원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6・25 동족상잔의 쓰라린 전쟁을 치르고도 65년 동안이나 서로를 노려보며 불안하게 살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은 파멸이다. 핵과 미사일을 소용없게 하는 길은 화해와 평화만이 유일한 길이다. 화해로 가기 위해 우리 겨레 한 사람 한 사람이 휴전선 철조망보다 강고한 마음속 장벽을 허물어 버리자.

2018. 2. 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길’ 김판수 두손모음

화, 2018/03/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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