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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는 일제잔재 청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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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는 일제잔재 청산이다

admin | 수, 2020/12/30- 20:11

[기고]

국가보안법 폐지는 일제잔재 청산이다

 

원희복 <민족화해> 편집인(전 경향신문 부국장)

 

12월 1일 한국진보연대를 비롯, 137개 사회단체와 161명 인사가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를 외쳤다. 이날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청년학생 기자회견이 열렸고, 여타 많은
장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를 가졌다. 이날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가 집중된 것은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 제정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대법전을 펼치면 나오는 국가보안법 제정날짜만보면 그렇다. 현행 법조문만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단견’이다. 문제는 이 ‘단견’이 국보법 운동의 의미와 실제 효과를 크게 반감시킨다는 것에 있다. 지금이라도 빨리 수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짚어본다. 일단 현재 사용하는 대법전을 접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자. 보안법에 대해 “1907년
7월 24일(27일의 오류-편집자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분위기를 설명해 보자.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행정권을 행사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매일신문>과 <황성신문>이 일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조선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이완용 내각을 강제해 법률 제1호(1907.7.24.)로 제정한 것이 바로 신문지법(新聞紙法)이다. 그리고 3일 후 일제는 자국의 치안경찰법을 본따 보안법(保安法)을 강제했다.(법률 제3호는 출판법) 그 주요 내용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결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경찰관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회 또는 다중(多衆)의 운동 혹은 군집(群集)을 제한, 금지 또는 해산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해 그 거주지에서의 퇴거를 명할 수 있고, 동시에 특정 장소에 일정 기간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다.
더 악독한 것은 처벌조항이다.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타인을 선동 또는 교사하고 치안을 방해하는 자에 대해서는 태형 50대 이상, 또는 10개월 이하의 금고,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사법제도를 도입한다는 명분으로 강제한 법에 태형이라는 전 근대적 처벌조항을 둔 것은 조선을 야만시한 행위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조선인의 말과 사상을 틀어막는 두 법이 필요했던 것은 조선병탄을 위해서였고, 일제는 이 법을 통해 매우 효율적으로 항일언론과 애국계몽운동, 의병활동을 탄압할 수 있었다. 이 보안법으로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등 민족단체들이 해산되고, 많은 의병과 만세운동 가담자들이 억울하게 수감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결국 일제는 1910년 조선병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뤄냈다.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일본 제국주의의 바탕인 일왕제에 대한 도전, 즉 국체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다. 1917년 황제 차르가 무너지는 소련을 봤기 때문이다. 이 법은 일본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물론 무고한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활용됐다. 흔히 현재 국가보안법 기원을 이 법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데 구태여 이념이 짙게 개입된 이 법을 기원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가. 그보다 훨씬 앞서고 부담없이 전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보안법이 있는데 말이다.
일제는 한편으로 기성 언론을 통제하고 순치시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월 ‘조선 동아 100년’을 기해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과 동아일보 백관수 사장이 1937년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쓴 서약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을 발굴 공개했다. 좀 길더라도 서약서 전문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1. 황실기사는 정중히 지면 상단 중요한 장소에 오탈자 없이 할 것.
2. 황실 및 국가, 군기, 신사 등을 존중하고 국체명징, 국위선양, 연중행사 의식은 정중히 취급하고 크게 보도할 것. 가급적 그 사진을 실을 것.
3. 황실 및 국가적 경사에 대해 회사도 자발적 축하의 뜻을 보낼 것.
4. 외국 전보 등으로 제국의 불리를 보도하지 말 것.
5. 총독, 총감 기타 내외지의 현관귀빈의 동정은 성의를 가지고 보도할 것.
6. 총독의 유고, 관청의 발표사항 및 지사회의, 중추원회의 등 중요한 관청 회의는 빠짐없이 보도할 것.
7. 당국의 시정시설에 대해서는 민족적 편견을 제거하여 국가적 관점에서 보도하고 비판은 공명정대를 기할 것.
8.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범죄에 관한 기사 및 국외 불령운동 기사를 과대하게 취급하거나 호의적 명칭을 쓰거나 상휼적 문자를 쓰지 말 것.
9. 소련의 선전적 통신을 호의적으로 등재하지 말 것.

10. 주의적 색채가 있는 논문, 소설 등을 배격할 것.
11. 농촌진흥, 자력갱생 등의 운동 및 이민노동자 알선 등의 사업을 성원하고 격려 고무하도록 노력할 것.
12. 천재사변 때는 관청의 구제 사업을 성원하고 결코 민심을 혹란하여 민중의기를 키우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3. 함부로 조선민족의 궁핍을 곡설하고 민중생활의 비참한 상황을 나열하지 말 것.
14. 노동 소작 기타 쟁의에 관한 기사는 사안을 연구하여 공평한 보도를 하고 격화시키지 말 것.
15. 조선의 역사적 인물, 산악, 고분 등에 관한 기사나 기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배일사상을 고조할 우려가 있는 것은 게재하지 말 것.
16. 내선인 간 충돌 기사는 취급을 신중히 하고 민족적 대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할 것.
17. 존황정신을 취지로 대일본제국의 신문으로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
18. 반국가적 또는 공산주의, 민족주의적 언론보도를 하지 말 것.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능가할 정도로 꼼꼼하고, 조항 하나하나가 굴욕적 통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조선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물론, 독립정신을 고양할 그 어떤 작은 싹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있다. 일제는 조선인이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애당초 용납하지 않고, 독립운동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이간시키는 작업에 언론을 활용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흉행’이라 보도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소비에트 로서아의 명령에 따라 하르빈에서 적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적색테러 계획을 진행시켜 윤봉길로 하여금 이런 흉행을 하게 한 것”이라 보도했다. (조선일보 1932년 5월 8일자)
윤봉길 의거는 민족주의 임정세력(백범)에 의해 이뤄진 것은 당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래서 임정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봉길 의거가 러시아, 즉 사회주의 세력의 지시를 받았다고 쓴 것은 민족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이간질시키는 보도라고 할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빨갱이’ 논란으로 상징된다. 흔히 빨갱이의 기원을 비정규 무장세력인 파르티잔(partisan)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 해방, 즉 분단 이후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2009)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앞서 보안법의 기원과, 조선총독부의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에서 보듯이 일제는 사상과 이념통제를 조선병탄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적색은 깃발과 노래 등으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상징색이 됐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붉은 색의 아카(赤)로 불렀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
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일본은 일왕제를 수호하기 위해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었고, 조선독립 세력을 이간질하는 수단으로 빨갱이를 사용했다.
우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붉은 색 종이에 소련의 <코뮤니스트>를 인쇄해 전국에 뿌렸다. 1932년 김단야를 비롯해 김형선, 김명시, 김찬 등은 5월 1일 ‘붉은 5·1절’(노동절)을 기해 붉은 색(혹은 푸른 색) 종이에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조선의 절대적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수립하라’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라’는 등의 삐라 수천 장을 만들어 뿌렸다. 그 붉은 색 삐라 그 말미에는 ‘조선공산당’이라는 문구를 새긴 것은 물론이다.(원희복,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2015) 따라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비어를 만들었고, 이는 앞서 언문
신문 지면쇄신 요항에서 그대로 명시돼 있는 것이다. 1942년 이승만의 편지에는 “호놀룰루에서 얼마 전 이곳에 도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전경무에 따르면 그(한길수)의 조직은 50명이 못되는 한국 ‘빨갱이’ 이상은 아니라고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해방 이전에도 보수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을 빨갱이라 비하했던 것이다.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사상범과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 보수언론은 ‘빨갱이라는 표현은 일제잔재가 아니다’라는 엉뚱한 주장을 했다. 이 역시 일제 잔재다운 보도태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해방 후 당연히 폐기됐어야 할 이 보안법이 그대로 존속한 것이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 법과 제도를 그대로 수용했다. 1945년 10월 9일 미군정은 법령 제11호를 발표했다. 이 법령 제11호는 일제의 정치범처벌법, 예비검속법 등 7개 법안만 폐지하는 것으로 보안법과 불온 문서 취체령 등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제 잔재는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였던 것이다.(내무부 치안국, <미군정법령집> 1956)이 보안법은 해방 후 진보, 혹은 좌파 언론과 단체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한 것은 물
론이다. 이런 가운데 제주 4·3, 대구 10·1 사건 등이 발생했으며 결국 남북 분단의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모든 법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보안법도 국가보안법이라고 이름만 바뀌고 다시 제정됐다. 흔히 국가보안법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기화로 제정됐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이 법의 역사적 실제적 의미를 간과하고 ‘법전적’ 의미만 판 단한 것이다.
이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복기해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1월 6일 제97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국가보안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하며 “1945년 10월 이후로 친일파에 대해 제일 말 많이 한 것이 공산당 사람인줄 압니다. 군정에서 그들(친일파)을 몰아내고, 경찰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등 열렬히 요구하는 사람이 그 사람(공산당)입니다”라고 주장했다.(국회사무처, 1948 제97호, 802)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세력은 공산당이라는 엉뚱한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과거 많이 회자됐던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의 기원이 여기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빨갱이로 몬다’는 무서운 발상이 바로 친일청산을 두고 벌어진 것이다.
이런 발상은 2013년 3월 13일 박근혜 청와대가 뉴라이트 인사와 오찬 모임에서 그대로 재연됐다. 이날 오찬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장(후에 KBS이사장에 임명됐음)은 “이런 역사왜곡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세우자는 것이 무슨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는가. 이런 발상은 종북몰이를 통해 눈엣가시를 제거하겠다는 과거 이승만의 발상과 일치한다. 이모임 이후 종편 등을 동원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비난은 현실화됐다. TV조선은 “<백년전쟁>은 김일성 대남 문화공작과 흡사하다”고 매도했다. 정확히 일제 잔재의 반복이고, 이승만적 발상이었다.
또 하나,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제헌국회 국회법사위원장이 바로 백관수 전 동아일보 사장이다. 그는 1937년 앞서 언급한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이라는 굴욕적인 서약서를 쓴 당사자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정적(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미국에 인정받으려(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법살),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 분위기 조성용(인혁당 사건 등), 조직과 개인의 승진용 등으로 활용됐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은 이미 많은 과거사 사건 재심을 통해 확인됐다.
결론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기원은 분단이나 이념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일제 잔재일 뿐이다. 이를 정통성이 약한 권위주의 정권이 정치적으로 변질해 활용한 것일 뿐이다.
일제가 조선의 독립정신을 말살하고, 독립운동 세력을 이간시키려 만든 보안법이 지금 분단상황에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알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오히려 증오하게 만드는 반통일의 핵심 악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청산은 이념이나 분단의 문제가 아닌, 친일청산 작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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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조 소속 교사 윤희찬 회원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08

문 : 1995년 3월에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답 : 평소 친일문제에 관심을 갔고 있었는데 마침 1995년 3·1절 무렵 경희대학교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당시 이름 반민족문제연구소)에 직접 방문하여 회원 가입을 하였습니다. 1995년이 한일협정 체결 30주년이 되는 해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재평가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었습니다. 연구소도 그때 ‘친일협정, 30년 동안의 굴욕’이라는 학술회의를 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 : 할아버지께서 3·1운동 독립유공자라고 알고 있는데,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후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답 : 할아버지 함자가 윤영주(1893~1988)입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데 3·1운동 당시 26세의 나이로 대구에 있는 동산 기독교성경학교에 재학중이었습니다. 3월 8일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대구 시위에 참석한 후 고향인 의성군 금성면 대리동으로 귀향했습니다. 대리동 기독교회 박낙현 목사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어요. 그리고는 태극기 100여 장과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비밀리에 제작했습니다. 의성군 장날인 3월 18일, 장터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지요. 보안법 위반으로 1년 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출옥 후 할아버지는 목사가 되어 목회활동을 하셨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혀 일경에게 항상 감시를 받았습니다. 1988년 96세의 연세로 부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92년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다 감시받는 생활이 싫어 만주에 건너가 지내시다 해방 후 귀향했습니다. 의성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좌익활동을 하셨습니다. 1949년 보도연맹으로 대한민국 군경이 보도연맹관련자들 학살할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부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학살의 공포를 한평생 트라우마로 안고 사셨습니다. 잠을 못 주무시고 잠들었다가도 한밤중에 갑자기 깨어나 두려움에 떨기도 하셨습니다.

문 : 지난 9월 21일 대법원으로부터 복직 판결을 받으셨는데 그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답 : 2001년 전교조 서울지부 교권국장으로 있을 때 상문고 비리와 관련해 재단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2001년 7월 교육청 앞에서 상문고와 관련해 민주 관선 이사 선정과 파견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경찰이 저를 비롯해 전교조 서울시지부장 김재석 용산고 교사(용산고)와 이을재 교사(한천중), 우삼동 교사(신정여상)를 구속 기소했습니다. 2004년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2005년 광복절 때 특별사면을 받아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택 교육감 시절이어서 복직이 안 되었습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두 번째 구속을 당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유로 그동안 복직 발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조희연 교수가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된 후, 복직 신청을 하여 서울 숭곡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한두 달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직권 취소로 말미암아 다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2016년 교육부를 상대로 한 임용취소처분 취소소송에서 두 차례 승소했고 이번에 대법원에서의 확정 판결로 마침내 복직하게 된 것입니다.

문 : 17년 만에 복직하시는데 감회가 어떠신지요.

답 : 물론 기쁩니다. 서른 살 무렵인 1985년에 서울 고려대 사대부고 국어교사로 부임한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제가 환갑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정년이 1년 5개월쯤 남았습니다. 2015년에 잠깐 재직했던 숭곡중학교로 갈 것 같습니다. 비록 남은 기간이 아주 짧지만 비정상적이고 특권층만을 위한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문 : 전교조 가입은 언제 하셨고 어떤 부문에서 중점적으로 활동하셨습니까?

답 : 1989년 전교조 출범 때부터 활동한 창립멤버입니다.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교권부장, 조직부장, 부지부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제가 전교조에 들어와서 주안점을 둔 것은 사학비리 척결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비리재단은 대체로 일제시대 친일파와 닿아 있습니다. 김달하라고 아시죠. 북경에서 밀정짓을 하다가 다물단에 의해 처단된 사람 말입니다. 김달하는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 선생에게 총독부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김달하의 사위인 조 아무개(초대 교장을 겸함)와 친일교육자 김활란이 공동 설립자로 있었던 동구학원이 대표적인 세습비리사학입니다. 조 아무개의 아들이 현재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2008년 11월 동구여상(현재의 동구마케팅고)에서는 교육청 예산으로 200여 권의 도서를 구입하기로 했는데, 학교측이 국어·역사 교사들이 신청한 <친일파 99인>(연구소 기획) 등 3종의 근현대사 관련책에 대한 구입목록을 무단으로 제외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2014년에는 동구마케팅고 이사장과행정실장의 비리 관련 민원을 교육청에 제기한 교사를 파면하기도 했습니다.
전교조는 사학비리를 막기 위해 꾸준히 입법 청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발의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2006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서는 사립학교법이 재단측에 유리하게 개악되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자신이 박정희가 불법으로 탈취한 영남대 이사장으로 재직했었으니 가재는 게편이란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09

문 : 2015년에 잠깐이나마 복직하셨는데 전교조 해직교사에게 특혜를 줬다는 등 종편과 보수언론으
로부터 인신공격을 받지 않으셨나요?

답 : 엄청난 인신공격을 받았지요. 종편과 보수언론에서는 제 과거 발언과 SNS에 올린 글까지 철저히 뒤져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재판정을 만들어야”와 “세월호 범인 박근혜”입니다. 전자는 김정훈 전교조 전 위원장의 징역 1년 반에 집행유예 선고를 내린 사법부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후자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박근혜의 잃어버린 7시간이 없었으면 세월호 최악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음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TV조선, 채널A 등은 북한식 표현이니 하며 저를 친북 용공분자 혹은 파렴치한으로 몰았습니다. 이러한 종편과 보수언론의 여론몰이로 인해 교육부의 임용 취소 결정이 훨씬 앞당겨진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공격의 이면에는 진보 진영의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흠집 내려는 의도도 다분했습니다. 더구나 이 무렵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대통령 명예훼손 사실에 대해 저를 조사하였는데 그후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문 : 요새 이명박·박근혜 집권기의 적폐청산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교육계에서 시급히 청산
해야 할 적폐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시급한 현안은 불공정한 입시제도 개선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동안 교육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욱 더 심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입시사정관제도, 자사고·특목고 활성화 등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악화시킨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교육계 적폐를 바로 잡아 참다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실현해야 합니다.
한편 박근혜 정권하에서 전교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법외노조’가 되었습니다. 전교조의 합법화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행정통보를 취소하면 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해고당한 노조 전임자가 50여 명이나 되는데 이들이 교단에 설 수 있도록 신속한 조치가 취해져야 하겠습니다.

문 : 끝으로 연구소 회원들께 드릴 당부 말씀은?.

답 :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폐해는 일제 교육제도를 답습한 데서 옵니다. 사학 비리가 대표적이죠. 또 자사고다 특목고다 하여 교육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학제가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회원들께서 우리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인간다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성원해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목, 2017/10/1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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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상 운영위 부위원장

 

2001년 8월 4일, 중앙일보에서는 서정주 시인을 기리는 미당문학상을 제정했다. 이에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에서는 친일문학의 부역자이며 친독재 행적이 뚜렷한 서정주 시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문인단체로서 회원들 모두가 미당문학상의 수상 및 심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발맞추어 경향 각지의 작가들은 미당문학상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예총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문화예술, 사회, 노동, 시민단체에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작가들과 문단에서 터져 나온 비판의 목소리는 금세 가라앉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다음해부터 대다수의 시인들, 평론가들이 미당문학상 심사에 참여하고 수상의 영광을 떠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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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4일 연구소가 주최한 대한문인협회의 육당 춘원 문학상 제정 규탄 기자회견. 플래카드 뒤 오른쪽 첫 번째가 필자

 

그로부터 미당 사후 15년이 지났다. 보수재벌언론과 결탁한 미당문학상의 권위와 명예는 날로 높아졌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이 한국 최고 문학상의 위치에 올랐다. 이에 영합하는 몰지각한 문인들의 행위를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떼로 몰려들어 찬사와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마침내 2015년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박근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건국절’을 제정하고 법제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국민에 의해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들자는 건국절 제정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한일합의 등 반역사적, 반민족적 폭거를 일방적으로 자행했다. 바로 이 즈음에 한국작가회의 내에서도 친일문학상에 대한 비판이 다시 등장했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을 규탄하는 글들이 한국작가회의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해 한국작가회의 총회장에서는 미당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반대하는 피켓 시위가 한 회원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작가들에게 친일문인문학상 반대 서명을 받기도 했다.

2016년 한국작가회의의 산하 대외활동기구인 자유실천위원회(위원장 맹문재, 안양대 교수)는 친일문인문학상 반대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을 논의했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를 자유실천위원회의 내부 사업 안건으로 공식화했다. 작가들의 주체적인 활동을 모색하기로 하고, 아울러 작가와 시민단체가 반대운동을 함께 논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친일문제에 있어 가장 공신력 있는 단체인 우리 연구소와 자유실천위원회가 공동 주관으로 토론회를 준비했다. 10월 29일, 혜화동 소재 함춘회관에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자문과 성찰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우리 임헌영 소장님(문학평론가)을 좌장으로 하고, 발제자로 박한용(교육홍보실장) 임동확(시인, 한신대) 이규배(시인, 성균관대) 이도흠(문학평론가, 한양대), 토론자로 김점용(시인, 문예바다 주간), 정세훈(시인, 리얼리스트 100 상임대표), 안재성(소설가,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장), 김란희(문학평론가, 고려대) 김응교(문학평론가, 숙명여대) 노혜경(시인) 등이 동참하였고 그 밖의 학자, 문인, 시민 등 100여 명이 회의장을 채웠다. 4시간에 걸친 토론회는 ‘친일문학’과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문제를 한국문학계에 공개적으로 던졌다. 비판적 성격을 분명히 한 이 세미나는 문단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친일문학(상)’에 대한 반대운동을 다시금 점화시키고 문인들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2017년 1월에 열린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 대한 한국작가회 차원의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총회 자료집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회원들에게서도 ‘친일문학상‘에 관한 한국작가회의의 방침이 정해져야 한다는 요구가 다시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2017년 미당문학상 후보에 오른 명망 있는 시인들이 후보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송경동, 심보선, 이장욱 시인 등이 미당문학상 후보가 되기를 거절했다.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후보를 사양한 시인은 더 있었다고 한다. 문학과 역사 앞에 자연인으로서, 아니 일개 미물로서의 부끄러움조차 없었던 서정주의 권위가 미당문학상 제정 17년 만에 비로소 깨어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작가회의 본회의 공식 사업 안건으로 채택되었다. 일부 회원들은 친일문학상에 참여하는 회원들을 제명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마침내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에서는 3월 25일, 최원식 이사장과 안상학 사무총장의 주도하에 친일문학상 내부토론회를 열었다. 김진경(시인), 임성용(자실위 부위원장), 이영광(미당문학상 기수상자), 장성규(문학평론가)를 발제자로 하여 한국작가회의 이사, 전국 지회장, 분과별 위원장 및 자유실천위원회 위원들은 치열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찬반의 입장이 부딪치는 지점도 생겼고, 토론회 참석자들의 의견만으로 이를 극복하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아무튼 이날 열린 작가회의 내부토론회는 많은 문인들에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주요한 관심사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점차 친일문학상 문제에 대한 비판적 공감대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올 7월, 한국작가회의 이사회에서는 3월의 내부토론회에서 나온 결과를 놓고 이사진들 간에 장시간의 논전이 벌어졌다. 진통 끝에, 한국작가회의는 공식적인 조직입장으로서 친일문학상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5·18문학상 수상자가 미당문학상에 당선되었고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일자 결국 수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우리 연구소와 자유실천위원회가 공동으로 친일문학상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장대 같은 폭우 속에서 20여 점의 친일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친일시 낭독회 개최와 시민 서명 운동을 통해서 친일문학상의 부당함을 널리 알렸다.
많은 언론과 SNS에서도 친일문학(상)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인하대 김명인 교수는 서정주를 ‘비단옷을 입은 노예’라고 규정짓고 ‘서정주의 이름을 걸고 상을 주는 문학상은 기형적 유산으로 보편적 신뢰나 합의가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서정주를 ‘일제와 전두환 찬양뿐만 아니라 십수 년간 문인협회, 시인협회 등 대표적 문인단체에 군림한 권력자로 한국문학을 극우, 냉전 문화정치의 일부로 만든 장본인’이라 규정했다.
때마침 미당 전집이 발간되자 동아대 전성욱 교수는 ‘미당의 문학적 성취는 무엇인가? 그 성취는 과연 그의 역사적 반역을 대속할만한 것인가?’라고 비판했고, 김륭 시인은 영화 ‘택시운전사’를 빗대 ‘이 나라 문단엔 택시운전사보다 나은 어른이 왜 없는가?’라며 미당 전집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했다. 그 외에 여러 잡지와 매체에서도 미당문학상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폐지의 정당성을 거듭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특히 이명원을 필두로 한 젊은 평론가들이 본격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주장은 확고하고 명료했다. ‘친일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번번이 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제 때, 제대로 앓았어야 할 진통을 회피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 일제에 적극 협력하고 나아가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놓는 데 앞장섰던 문인들을 기리는 문학상을 시행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지독한 모순이요, 넌센스’라고 했다. 또한 ‘과거 식민지 종주국에 적극 협력하고 파시즘적 담론을 만든 문인들은 기리는 문학상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그들은 ‘기념’할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이라고 했다.
여전히 일부 작가들과 문단 권력이라 할 만한 문인들은 ‘문학주의와 미학주의’를 내세우며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는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한국문학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 문학과 예술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를 겪고 강대국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 중에서,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민족을 팔아먹은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기리는 기념상을 만들어 찬양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한 가지다. 오랫동안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주의를 빼앗기고 친일세력들이 정치적 지배자가 된 한국에서, 문학인들조차도 친일문학의 삐뚤어진 문학정신을 내면 에 간직해 두고 그동안 호가호위해 온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문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은 단언컨대 찬반의 논란이 필요치 않다. 친일문학은 ‘문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 그리고 반민주의 폭압 속에서 살아온 한국 작가들에게 친일문학,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은 ‘역사의 문제’이자 ‘정의의 문제’인 것이다.

편집자주 – 권위상 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시인)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소속으로 친일문학상 반대운동에 앞장 서 활동해왔으며 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의 연대에 기여하였다. 서울 서부지부장을 맡아 수년 간 지부를 이끌어왔다.

월, 2017/10/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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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26

13일 용산연병장의 본사 주최 자전거경주회장은 오전부터 남녀노소가 답지하여 수십 대의 전차는 서로 연하여 운전을 하나 오히려 올라탈 여가 없어 도보 혹은 인력거로 나오는 사람이 남대문에서 연병장까지 발자취를 서로 연함으로 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다지 넓은 대경주장 주위에는 송곳 세울 틈도 없이 사람이 열 겹, 스무 겹씩 둘렀고 산비탈 언덕 아래에도 사람으로 가리워 오후 2시경에는 십만 인 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 …… 그 다음에는 전조선 제일류(第一流)의 대경주를 개시하였는데 선수는 내지인(內地人) 네 명, 조선인 엄복동 황수복의 두 명이라. 용맹 활발한 여러 선수는 평생의 용맹을 다하여 명예 있는 일등을 다투는데 활동사진은 기념으로 사진을 백이며 십만 관객이 박수 응원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앞서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와 좇아옴을 보고 더
욱 용맹을 내여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 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독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 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에게 떨어지고 황수복도 삼등을 점령하여(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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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3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 안내광고.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진 실제 대회일정은 1주일이 연기되었으나, 이때 ‘엄복동’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사는 <매일신보> 1913년 4월 15일자에 수록된 것으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구전가요의 구절로 유명한 자전거대왕 엄복동(嚴福童, 1892~1952)이 처음 자신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공동주최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全朝鮮自轉車大競走會)’는 인천, 경성, 부산, 평양의 네 곳에서 3주간에 걸쳐 연속 경기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복동이 자전거를 탄 장소가 ‘용산연병장(龍山練兵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산연병장은 그야말로 러일전쟁 이후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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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연병장’의 위치가 표시된 「경성급용산」 지도 자료. <조선철도여행안내>(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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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7년 1월 9일자에 소개된 용산연병장 관병식 장면. 말 위에 앉은 이는 조선주차군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육군대장.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이 연병장은 본연의 군사훈련장이라는 용도 이외에도 해마다 정초 또는 천장절이나 육군기념일과 같은 ‘경축일’이 되면 조선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관병식(觀兵式)이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곤 했다. 또한 1912년 여름에는 그들의 천황이 세상을 뜨자 성대한 봉도식(奉悼式)이 이곳 연병장에서 거행되었고, 이보다 약간 앞서 친일파의 거두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벌어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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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 나라하라 산지에 의해 제작된 ‘봉호(鳳號)’가 용산연병장에서 비행하는 장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비행기가 등장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매일신보> 1913. 4. 5)

 

용산 일본군 연병장은 서울 시내의 ‘훈련원 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수의 군중이 집결하기 용이한 위치에 있었던 탓에 여러 학교 단체의 운동회가 벌어지거나 갖가지 별스러운 흥행이 벌어지는 장소로 곧잘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13년 4월에 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의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 1877~1944)가 나라하라식 4호 비행기인 ‘봉호(鳳號, 오토리호)’를 서울에서 처음 선을 보였을 때 비행장으로 사용된 곳이 용산연병장이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일본의 제국비행협회가 파견한 오자키 유키데루(尾崎行輝, 1888~1964)의 ‘삼중호(三重號, 미에호)’ 축하 비행을 비롯하여 1917년 미국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Art Smith, 1890~1926)의 비행대회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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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찾아온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대회를 알리는 광고문안. 용산연병장에서 거행된 그의
비행묘기는 장차 비행사가 될 안창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매일신보> 1917. 9. 11)

 

그런데 1915년 6월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주차군 편제를 상주군으로 전환하는 결정과 관련하여
용산병영지가 확장됨에 따라 신연병장(新練兵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일대)이 새로 조성되는 한편 종래의 연병장 터는 야포병연대(野砲兵聯隊, 1920년 4월 병영공사 준공)가 차지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현재 이곳은 통칭 ‘캠프 코이너(Camp Coiner)’로 용산미군기지의 북쪽 끝 지역에 해당한다. 이때 연병장 터의 서쪽 대로변에 접한 구역에는 따로 시가지가 만들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부대 신영공사(朝鮮部隊 新營工事)」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연병장(新練兵場)에 이전 후의 용산연병장 한강통 전차연선(漢江通 電車沿線) 전부의장(長)을 광(廣) 60간(間)에 긍(亘)하여 일대지(一帶地)를 시가지로 군사령부에서 총독부에 인도를 료(了)하고 기 후방(其 後方) 전부를 야포병연합대(野砲兵聯合隊)의 부지로7년도(1918년도)부터 병영공사에 착수하겠고(하략)

 

새로 생긴 동네는 일제가 정한 행정구역상으로는 한강통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가 이미 연병장 터로 각인되어 있었던 탓에 대개 ‘연병정(練兵町)’으로 통용되었다. 더구나 연병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구용산과 신용산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이곳 전차정류장의 이름은 여전히 ‘연병정’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4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부시(京城府市)의 행정구획정리」 제하의 기사는 그 무렵 ‘연병정’이 이미 속칭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강통 삼번지(漢江通 三番地) 부근은 속칭 연병정(練兵町)이라 하고 우(右) 칠번지각삼각정(七番地角 三角町) 등도 개(皆) 속칭이오 행정구획에 의하여 명명된 정명(町名)은 아닌 고로 금회의 정리에는 당연 우(右) 정명을 폐지하고 공식의 정명으로 변경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나 부당국(府當局)에서 혹 지방 거주자의 의지를 존중히 하여 현재 속칭 정명으로 그대로 명명하게 될지 알지 못하나(하략)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패망기로 접어든 1941년 10월 1일에는 경기도고시 제379호를 통해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이 개정됨에 따라 종래 ‘한강통’으로만 불러왔던 용산 일대의 군영지 및 배후지역이 여러 동네로 세분화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조치에 따라 옛 한강통 3번지 일대의 땅은 ‘공식적으로’ 연병정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고, 여타 구역에는 한강통 몇 정목이니 용산정 몇 정목이니 하는 식의 명칭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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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연병장은 사라졌으나 ‘연병정’은 전차정류장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진은 <경성과 인천>(1929)에 수록된 연병정 전차분기점의 모습.

 

이로부터 불과 4년여 만에 일제가 패망했으나 그들이 부여해놓은 지명은 그대로 이 땅에 남는 상태가 되었다. 누가 봐도 ‘연병정’은 그대로 용납할 수 없는 표현이었으니만큼 1946년 10월 일본식 지명 잔재를 일소하는 차원에서 종전의 ‘연병정’을 대체하기 위한 지명이 창안되었는데, 이때 성급하게 붙여놓은 명칭이 ‘남영동(南營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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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문> 1925년 1월 13일자에 수록된 일본인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의 화재위문 답례광고. 이곳의 지번 주소는 ‘한강통 3번지’이지만 광고문안에는 ‘용산 연병정’이라고 소재지를 그대로 기재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지명총람 1(서울편)????(한글학회, 1966)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서울 남쪽에 영문(營門)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남영동으로 개칭함”이라고만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영문’이 어느 시대에 존재했던 것인지, 아님 무슨 문헌상의 근거라도 있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관련 자료가 제시된 바는 없다. 그저 짧은 소견에 생각건대 남쪽에 있는 병영, 즉 남영은 일본군대의 용산 병영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이 와중에 지난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부터 존재했던 ‘남영역’은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익숙한 생활공간의 하나로 정착된 지 오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정작 이 철도역사의 소재지는 ‘남영동’이 아니라 ‘갈월동’이라는 사실이다. 행정구역으로만 따지자면 ‘갈월역’이 되어야 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건 지금껏 남영역이었고 앞으로도 이 이름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애당초 ‘연병정’이라는 이름은 일본군대가 이 땅에 침탈의 흔적으로 남겨놓은 것이고, ‘남영동’ 이니 ‘남영역’이니 하는 것은 다시 거기에서 파생한 말이니 이래저래 꽤나 고약한 이름이 아닐수 없겠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남영동’이라는 지명은 삭제되어야 하고, 다른 적절한 명칭을 찾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금, 2017/07/2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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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 교육부는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고석규)를 출범시키고 박근혜정권의 국정화 추진과정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사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고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거론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보면서 한 인물을 생각합니다. 전 재산을 들여 평생 동안 친일연구를 한 임종국 선생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친일연구 과정에서 본인 아버지의 이름도 친일인물로 기록하였던 분입니다. 사실에 기초한 기준 이외 혈연, 지연 등 다른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저 역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위원회가 세운 기준을 존중하고 일관성 있는 조사를 추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임종국 선생이 시대의 귀감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단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의 역할이 컸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에 대한 요구는 연구소 출범 당시부터 조금씩 논의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착수한 계기는 2003년 8월 22일 〈KBS 1TV 인물현대사〉 ‘임종국 편_배반의 역사를 고발하다’(연출 김정중)가 방송된 직후부터다. 방송 이후 선생의 대표 저작인 ????친일문학론???? 판매가 급증하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나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준비에도 힘이 부쳐 기념사업은 언감생심이었다.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연구소 재정 외에 외부의 안정적인 재원 마련이 필요하였다. 그러던 차에 당시 연구소 조문기 이사장이 광복군 장이호 선생의 아들이며 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던 장병화 가락전자 대표에게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병화 이사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회장직을 수락했다. 이후부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설립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2005년 2월 3일 준비 모임에 이어 3월 29일 서울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의실에서 정식으로 출범식을 가졌다. 기념사업회는 별도의 사무국은 두지 않고 연구소가 업무를 맡기로 했다.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기념사업회에 힘을 보태고 있는 주요 인사로는 김지철 현 충남교육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이용길 천안민주단체협의회 초대 의장 등이 있다. 기념사업회는 출범 당시 크게 5가지 사업 계획을 마련했는데 임종국상 제정, 추모 조형물 건립, 문화훈장 추서, 평전 발간 및 학술사업, 장학사업이 그것이다.
이들 사업 중에서 출범 첫해인 10월 15일 문화훈장 추서가 가장 먼저 이뤄졌다. 추서 신청에는 당시 작가회의 이사장이었던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동참해 주었다. 그러나 임종국 선생에게 추서된 문화훈장은 총 5등급 중 금관, 은관에 이어 3등급은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삼웅 전 관장은 2000년 서정주에서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 사실을 상기하면서 추서 거부를 언급하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지만 그럴수록 기념사업 활동에 더욱 분발하자고 다짐했다. 임종국상 역시 기념사업회 출범 첫해인 2005년 11월 11일 제1회 시상식을 시작으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전력코자 2008년과 2009년 두 해를 거른 것을 제외하고는 올해까지 11회에 이르고 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임종국상의 권위가 높아지고 있다.
임종국 선생의 19주기를 맞는 2008년 11월 18일에는 정지아 작가가 ????임종국 – 친일의 역사는 기록되어야 한다????(여우고개)를 펴냈고, 기념사업회와는 별도로 정운현 씨가 2006년 ????임종국 평전????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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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12일 임종국 선생의 기일에는 천안공원묘원에서 선생의 추모식이 열렸다. 1990년대 말까지는 천안민주단체협의회를 중심으로 이용길, 김지철, 전재진(현 우키시마호 폭침진상규명위원장), 김영수(현 천안시의원), 장기수(전 천안시의원) 그리고 전교조 선생님들과 전농 회원님들이 수고해 주었고 2000년대 들어서부터 현재까지는 연구소 충남지부, 천안지회, 아산지회 회원들이 추모식을 주관하고 있다. 찬바람이 부는 높은 산에서 진행되는 추모식을 위해 손을 비벼가며 정성스럽게 제사상을 준비하는 회원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임종국 선생과 기념사업회의 존재를 널리 알린 데는 역시 방송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앞서의 인물현대사 외에 2012년 〈EBS 지식채널e : 임종국 편〉과 2013년 뉴스타파에서 방영한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3부작이 그것이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사업은 바로 임종국 선생 조형물 건립이다. 임종국 선생 조형물 건립은 오래 전부터 시도되었지만 천안시(당시 시장 성무용)의 비협조로 진척을 이루지 못하다가 작년 초 천안지회(지회장 전훈진)가 발의하고 7월 9일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용길)가 발족해 본격 착수하여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1월 13일 천안신부공원에 조형물이 건립되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3,626명이 참여해 1억 2천만원이란 거금의 모금으로 이뤄낸 쾌거였다.
앞으로도 연구소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선생의 정신을 더욱 널리 계승, 발전시켜나갈 것을 다짐한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7/11/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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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수 회원

 

2018년 2월 9일, 드디어 기대보다 걱정이 많았던 평창겨울올림픽이 엄동설한을 녹이는 감동을 연출해냈다. 평창올림픽은 유치단계부터 우여곡절이 많았고, 국내적으로 수천 년 동안 온존한 산천을 허물어야 하는 환경훼손문제로 불화가 있었고 막대한 예산으로 준비된 시설들의 올림픽경기 후 유지와 활용방안이 논란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 한반도의 휴전선에 인류평화의 제전을 마련하여 갈등과 적대와 대결을 끝내고 평화를 함께 누려보자는 간절한 소망으로 성공적인 올림픽 개막을 이루어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조성된 국제사회의 제재와 긴장으로 남한 민중이 겪은 두려움과 불안은 올림픽경기가 제대로 치러질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올림픽 참가와 한반도기를 앞세운 단일팀 입장으로 그동안의 근심이 봄날 눈 녹듯이 풀어졌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그동안 꽉 막혔던 남북 사이에 대화의 문이 열리고 땅길, 하늘길, 바닷길까지 열려 막힘없이 오가며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평화가 찾아와 이것이 현실인지 실감하기조차 어리둥절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유폐되고 장막 속에 묻혀 있던 통일 논의가 봇물처럼 터지고 기대 또한 만발하다. 그러나 통일로 가는 길은 기대만큼 난제가 너무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첫 번째 장애는 남남 갈등이다. 이것은 불행 중 더 큰 불행이다. 지구촌 여러 나라를 초대한 잔치마당에 북한 참가를 반대하는 시위로 올림픽정신을 부정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이전에 남남 갈등을 풀지 않고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준 사건이다.
또 하나의 장애는 국제적 개입과 부당한 간섭이다. 미・소 야합으로 비롯된 조국 분단과 국제대리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열강들은 여전히 우리의 통일 의지를 꺾고 분단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국토 분단과 겨레의 분열은 73년간 갈등 분노 적대 대결의 악순환으로 생긴 내상으로 증오의 일상화를 초래했다.
통일은 남과 북이 서로 미워해야 할 적이 아니고 가엾은 피해자라는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통일은 애초에 한말 한글 한역사 한겨레로 한반도에서 한나라로 살았던 때로 돌아가서 다투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는 간절한 소망이다. 통일은 평화로 가는 디딤돌이고, 남과 북이 평화로 가는 길이 함께 사는 길이며 오직 함께 사는 길만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평화로 가기 위해서는 맨 먼저 마음부터 열고 남과 북이 한겨레 한동포임을 자각하고 미움을 걷어내야 한다.
다음으로 말문을 터서 서로 위로하고 이해하면서 희망을 살려내야 한다. 그리고 길을 열어 서로 오가며 정을 쌓고 도와주면서 자주 자립을 이뤄내야 한다. 이번 평창올림픽이 이 땅 이 겨레에게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자각케 하는 단처를 마련해 준 것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득이요 횡재라 아니 할 수 없다.
반목은 서로에게 손해를 주고 평화는 서로에게 이익을 준다. 국제사회의 야욕으로 갈라졌던 국토, 찢겨진 겨레의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지금 이 땅에 사는 겨레가 있는 힘과 지혜를 모아서 외세 개입과 간섭을 물리치고 ‘생명과 평화 자주권’을 굳건하게 지켜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이제 우리 겨레의 비극과 불행과 고통을 청산하는 길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로 뭉쳐서 우리를 구원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6・25 동족상잔의 쓰라린 전쟁을 치르고도 65년 동안이나 서로를 노려보며 불안하게 살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은 파멸이다. 핵과 미사일을 소용없게 하는 길은 화해와 평화만이 유일한 길이다. 화해로 가기 위해 우리 겨레 한 사람 한 사람이 휴전선 철조망보다 강고한 마음속 장벽을 허물어 버리자.

2018. 2. 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길’ 김판수 두손모음

화, 2018/03/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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