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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분지’의 작가 남정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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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분지’의 작가 남정현 별세

admin | 화, 2020/12/22- 20:46

반공법 위반으로 고문과 재판 겪어
‘허허 선생’ 연작으로 왜곡된 사회구조 풍자도

소설 ‘분지’의 작가 남정현이 21일 오전 10시에 별세했다. 향년 87.

193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대전사범학교를 나온 남정현은 몇달 간 교사 생활을 했으나 지병인 결핵 때문에 곧 그만두고 치료를 받으며 습작을 했다. 1958~9년 <자유문학>에 ‘경고구역’과 ‘굴뚝 밑의 유산’이 추천을 받으며 등단한 그는 1961년 중편 ‘너는 뭐냐’로 동인문학상을 받으며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러나 1965년에 발표한 단편 ‘분지’가 북한의 기관지 <조국통일>에 전재되면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1967년 고등법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기까지 고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분지’는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를 주인공 삼은 소설로 반미 의식이 충만한 작품이다. 홍만수의 어머니는 미군에게 강간당한 충격으로 세상을 떴고 누이동생은 미군 상사 스미스와 동거를 하며 성적 학대를 당한다. 그에 분노한 만수가 스미스 상사의 아내를 겁탈하고 향미산으로 들어가 숨자, 미국 펜타곤이 핵미사일을 동원해 향미산을 폭격하려 한다는 것이 소설의 얼개다.

‘분지’ 필화사건은 창작의 자유를 옥죄고 감시·처벌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전횡과 횡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남정현은 ‘분지’ 필화 사건 뒤에도 ‘허허 선생’ 연작을 발표하며 창작 의욕을 이어나갔으나 1974년 대통령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다시 구속되어 반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고 1980년에도 예비 검속으로 구속되는 등 고난이 그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창작 활동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1973년 ‘허허 선생 1’로 시작해 1992년 ‘허허 선생 옷 벗을라’까지 모두 8편으로 완성된 ‘허허 선생’ 연작은 일제 순사 출신으로 해방 뒤에도 승승장구하는 주인공 허허 선생을 통해 한국 사회의 왜곡된 구조를 풍자한 작품이다. 남정현 자신에 따르면 허허 선생은 “역사적으로 누대에 걸친 수수백년 동안 오로지 일신의 영화만을 탐한 나머지 언제나 침략세력이었던 외세와 늘 한통속이 되어 나라와 민중의 이익을 열심히 짓밟은 지배계층 공통의 반인간적이며 반민족적인 그 못돼먹은 의식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타기할 인물”을 대표한다. ‘분지’와 ‘허허 선생’ 연작에서 보듯 남정현의 소설은 풍자와 반어의 기법을 통해 강렬한 민족주의 및 반외세 의식을 표현하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다. 문학평론가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은 “남정현 소설은 한 시대의 갈등과 모순을 마치 전자현미경처럼 확대시켜 이를 만화풍으로 소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남정현은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고문과 한국펜클럽 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문학 창작과 현실적 실천을 병행했다. 1990년에는 일본 도쿄와 교토 등에서 열린 국제평화포럼에 참가해 주제발표를 했으며 1992년에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세계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인대회에 참가하는 등 국제 문학 교류에도 힘썼다. 2002년에는 <남정현 문학전집>(전3권)을 출간했으며 2004년에는 <남정현 대표소설선집>을 내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건강이 나빠져서 집필과 외부 활동을 줄이고 칩거했다.

그가 2011년에 발표한 마지막 소설 ‘편지 한 통-미 제국주의 전상서’는 국가보안법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자신의 조물주이자 상전인 ‘미 제국주의’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북한의 핵 억지력이라는 현실 위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오가는 평화협정 논의를 불안하고 불만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는 국가보안법의 목소리를 빌려 작가 특유의 민족주의와 반미주의를 선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남정현은 2018년 산문집 <엄마 아 우리 엄마>를 내고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문학은 인간을 사랑하는 작업”이라며 “인간은 사회에 발 디디고 서 있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작가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는 사회를 형성하는 정치, 경제, 문화를 깊이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1987년에 낸 대표작품선 <분지>에 쓴 ‘작가의 말’에서도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은폐된 진실을 찾아내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감행되는 현실과의 가열한 싸움”이라고 썼다. 평생 글과 행동으로 현실에 맞서 싸우며 진실을 찾고자 했던 개결한 작가 남정현이 영원한 휴식에 들었다. 고인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주는 제12회 민족예술상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돈희(한국지도자육성장학재단 장학부장)씨와 딸 진희(전업주부)씨, 며느리 나명주(참교육학부모회 전국회장)씨, 사위 우승훈(마취과 의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3일 오전에 있다. (02)2072-2010.

최재봉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0-12-22> 한겨레 

☞기사원문: ‘분지’의 작가 남정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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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대종교를 중광해 독립운동가들의 스승으로 불렸던 홍암 나철의 일대기인 <나철평전>을 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조현 기자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역사가 신채호,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과 국무령 이상룡, 작사가 이은상, 최초 비행사 안창남, 마라토너 손기정, 이동휘, 정인보, 안희제, 지청천, 이범석, 지석영, 이동녕, 김규식, 신익희…. 독립운동사의 주역인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종교인으로, 대종교를 부활시킨 스승 홍암 나철(1863~1916)의 대의를 따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종교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철의 삶을 조명한 <나철평전>(꽃자리 펴냄)을 낸 김삼웅(78)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난 4일 만났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꼽은 친일부역자 5천명 가운데 종교인이 200여명인데, 대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며 “그런데도 나철과 2대 교주 김교헌, 청산리전투를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종사 등 대종교 지도자 3인의 묘소가 아직도 간도 들판에 방치돼 있으니 한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통탄했다.

대종교 부활시킨 스승 ‘나철평전’ 펴내
김좌진·홍범도·이회영·신채호 등등
수많은 항일지사들 대부분 ‘대종교인’
“친일부역자 종교인 중엔 한명도 없어”

박정희때 고문 후유증으로 집필 힘들어
“알수록 ‘놀라운 인물’ 전율 느끼며 써”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 나철. <한겨레> 자료사진

“2·8독립선언과 3·1혁명을 촉발한 대한(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가 주도했다. 또 3·1혁명 이후 중국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의 의정원 35인 중 28인이 대종교인이다.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항일투쟁의 주력도 대종교인들이었고, 국학·역사·한글운동도 대종교가 주도했다. 그 뿌리가 나철 대종사다. 독립운동사에서 기억해야 할 첫번째 인물로 꼽힐 만한 나철의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김 전 관장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온몸을 민족의 재단에 바쳐 신자 10여만명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종단 자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대종교와 나철을 언급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최제우, 황현,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안창호, 김성숙, 한용운, 안중근, 김창숙, 여운형, 함석헌, 장준하, 장일순, 송건호, 김대중, 노무현, 신영복 등 줄잡아 40여명의 평전을 썼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타자를 칠 줄 모른다. 오직 손글씨로만 써왔다. 근래 들어서는 손이 많이 떨려 원고 작업이 더욱 어렵다. 박정희 독재 시절 <민주전선>을 발간하면서 끌려가 고문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떨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나철평전>에는 ‘한 놀라운 인간’에 대한 필자의 전율이 스며있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석학 왕석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살에 과거 급제해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을 맡았다. 33살 때 징세국장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민족의 뿌리인 단군사상을 기초로 입산수도한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비밀결사 ‘자신회’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했다가 1907년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외딴섬인 전남 신안 지도로 유배를 갔다가 민심을 두려워한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나철은 일제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단군교를 ‘중광’했다. 중광이란 우리 민족이 믿었던 옛 종교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기라성 같은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일제는 국권침탈 뒤 제일 먼저 단군 관련 책 20여만권을 압수해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밀반출하며 1918년까지 민족말살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나철은 이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망명해 백두산 인근 청파호로 본부를 옮겼다. 대종교 신자가 수십만명으로 늘자 일제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유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대종교는 ‘유사종교단체’로 분리해 악명 높은 경무국에서 감시하게 했다. 더 이상 포교가 어렵게 되자 나철은 1916년 일왕과 총독, 신자들에게 글을 남기고 구월산 단군사당에서 순명을 택했다. 그의 죽음 뒤 대종교인들의 항일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김 전 관장은 “일제 때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나철은 종교적 위세를 보이지 않았고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주검도 상여가 아닌 지게로 옮겨 화장하고, 부고도 돌리지 말고, 제사에도 밥 한그릇 찬 하나만 놓으라고 유언했다”며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란 뜻으로 ‘만세의 종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최근 여당 국회의원들이 교육이념에서 단군사상의 핵심인 ‘홍익인간’을 빼려는 시도를 했던 것에 대해 “역사 공부를 안한 것인지, 역사의식이 없는 것인지”라며 혀를 찼다. 그는 “목사인 규암 김약연의 용정 명동학교는 기독교학교임에도 교가에 ‘한배검 단군의 자손의 긍지’를 담았고, 교실 뒤엔 예수 사진과 함께 단군 영정을 걸었다.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단군 집회를 개최했다. 이승만도 1921년 <독립신문>에 ‘한배검은 인류의 스승이셨다’고 썼고, 기독교인 백범 김구도 조선인 치고 대종교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며 “해방 후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인인간을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로 번역해 교육기본이념으로 삼게 한 것도 기독교인 백낙준 박사였다”고 설명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mail protected]

<2021-06-08>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화, 2021/06/1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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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에서 미군기지 건설용 매립재 채취 추진
일본 정부 “채취 장소 미정…유골 안 들어가도록 눈으로 확인”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소재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일본 정부는 이 비행장을 대체할 군사 시설을 건설하겠다며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연안을 매립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이 섞인 토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미군 기지 공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해 수습 운동을 벌여 온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미국 유족과 힘을 모아 공사 중단을 촉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에 있는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같은 섬 중부 헤노코(邊野古) 연안으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 정부가 공사 계획을 일부 변경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인근 바다에서 매립 공사 등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을 대신할 새로운 기지를 이곳에 건설 중이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쟁 희생자 유해가 다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채취한 토사 등을 매립재로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은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바다를 매립해 후텐마 기지를 대체할 새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매립재 종류 등을 바꾸겠다며 작년 4월 21일 오키나와현에 공사 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7일 연합뉴스가 계획서의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니 2차 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현장인 오키나와 본섬 남부 이토만(絲滿)시와 야에세초(八重瀨町)가 매립용 토사 등을 채취할 장소로 기재돼 있었다.

[그래픽]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공사 매립재 채취 장소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민, 일본군, 미군 등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오키나와현 집계)된다. 희생자 중에는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된다.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경된 공사 계획이 승인되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유해를 수습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하는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 등은 일본 정부의 공사 계획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토사 등을 어디서 조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계획서가 “적정한 조사를 거쳐 채취 장소 등을 결정한다”며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계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토만과 야에세가 변경된 계획서에 파쇄된 암석을 채취할 후보지로 명시된 것을 보면 결국 이 지역에서 채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계획서는 이토만과 야에세에서 파쇄된 암석 3천160만㎥를 채취하는 방안이 기재돼 있다. 이는 오키나와현 내부에서 조달할 파쇄석(4천476만㎥)의 약 70% 해당한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가마후야 대표가 올해 3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에 나서자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개발 전에 유골이 없는지 육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유골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호(壕·구덩이)가 있는 장소는 개발하지 않는 등 유골을 배려하며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맨눈으로 유골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뼈는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채취할 토사 등의 양에 비춰보면 유해가 포함됐는지 철저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을 모집하고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정부에 매립 계획 취소를 요구할 계획이다.

한국인 희생자 이름 (오키나와=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오키나와(沖繩)현 이토만(絲滿)시 소재 ‘평화기념(祈念:이뤄지기를 비는 것)공원’에 한국인 전쟁 희생자 이름을 새긴 비석인 각명비(刻銘碑)가 설치돼 있다.(위) 각명비에는 히코산마루 피격 사건으로 희생된 명장모(왼쪽 하단) 씨와 김만두(오른쪽 하단) 씨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미국 유족 참가자도 모집한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이 현대사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 씨가 발간한 명부 자료와 자체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에 해당)으로 동원됐고 이 가운데 70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이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mail protected]

<2021-06-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관련기사 

☞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화, 2021/06/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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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깊숙이 뿌리박힌 ‘일제 그림자’ 이젠 걷어내자
상명하복·서열주의 등 일본제국주의 관행 영향
일제강점기 역사관 ‘식민사관’ 대표적 무형잔재
항일지사들 국학연구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워

올림픽을 앞둔 일본이 독도문제로 우리를 또 도발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반발을 알면서도 계획적으로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지도상에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의도는 명백히 자국내의 혐한 분위기 조성과 극우파들을 준동시켜 이미 실패한 올림픽을 면피하려는 속셈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분노를 삭일 수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도발하는 일본에 대한 응징의 소리는 온 국민을 일치단결시키는데 왜 그럴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의사 출신의 지식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백인보다 더 백인인 척하고자 노력했던 흑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식민지배를 경험한 자들의 폭력 사용과 함께 문화적 지배를 폭로하여 자아를 회복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은 자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가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무형의 친일잔재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친일잔재는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ㆍ무형의 유산’으로 정의하고 있다. 건축물이나 조형물, 친일파 등과 같은 ‘유형의 친일잔재’와 달리 정신과 의식에 남아있는 ‘무형의 친일잔재’는 그 범위가 엄청나고 일상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무형의 친일잔재는 군국주의로, 때로는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로 그리고 패배주의 문화로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며 해독을 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형의 친일잔재는 생활문화 속에서 용어로 가장 흔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화나 언어 그리고 전문용어들에도 친일잔재는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익숙한 ‘묵찌빠’, ‘무궁화 꽂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문화 속에 남아있는 왜색은 성인이 된 뒤의 화투 놀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친일잔재다. 의식과 관행적인 문화 속에도 친일문화는 강하게 남아있다. 흔히 군사문화로 알려진 상명하복의 전통, 기합과 구타 그리고 서열주의 등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표적인 일본제국주의의 관행으로 학습된 친일잔재다. 또한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국민교육헌장’은 일본의 군국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칙어에서 따온 것으로 오랜 기간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암송해야 했다. 아직도 그 흔적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로 남아있다.

법과 제도 속의 친일잔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치안유지법의 이름만 바꾼 국가보안법으로, 그리고 어려운 한자 말투성이인 재판의 판결문도 역시 친일잔재이다. 행정 서식과 지명들 그리고 교육계의 만연한 친일잔재들. 각종 문화예술 분야의 문투나 음계, 화풍 등도 역시 대표적인 무형의 친일잔재들이다. 아직도 친일작가들의 문학상과 친일음악가를 기리는 상장이 버젓이 수여되는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역사관에 관한 논쟁과 교육계의 친일잔재

무형의 친일잔재로 대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인 식민사관 문제이다.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의 다툼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지만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입장이 식민지 시절을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연구(식민사관)의 의도를 담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더욱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상존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전쟁 속에서 역사를 그대로 순수한 학문의 영역으로 국한한다는 것은 순진함을 넘어 아둔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항일지사들은 대부분 국학연구를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를 필두로 백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안재홍 그리고 조소앙까지 모두 한 손에는 일제와 싸우는 총을 들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식민사관과 싸운 펜을 들었다. 정신사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그들의 충심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해방 이후 신채호의 역사학을 계승한 학교나 학자가 없었음을 역사학계는 자문해 봐야 한다. 어쩌면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보다 이병도의 실증주의 역사학이 강하게 지배한다면 이 역시 정신적으로 강하게 남아있는 친일잔재이다.

교육계에 만연한 친일잔재는 그 영향성과 파급성 때문에 무엇보다도 앞장서서 해소해야 할 부분이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경기도 내 2천400여 학교 중 친일인물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89개교로 파악되고 있다.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현제명, 백남준, 이광수 등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에 의해 작사 작곡된 교가를 오늘도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무비판적으로 부르고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친일파들이 만든 교가를 부르는 학생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참상과 독립운동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 밖에도 반장, 부반장이라는 호칭이나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군사용어인 훈화(訓話) 등도 여전히 아무런 생각없이 사용되는 무형의 친일잔재이다.

또한 아침 조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궁성요배(宮城遙拜)라고 매일 아침 등교해서 교장부터 전 교생이 모두 일왕이 있는 동경 쪽을 향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행위에서 출발했다. 학교행사마다 으레 행하는 차렷이나 경례 등의 용어 역시 일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일제의 잔재이다.

■용어로 남아있는 친일잔재

일상용어에 남아있는 친일잔재 역시 무형의 일제유산이다. 그동안 꾸준히 순화의 과정을 거쳐 많은 일본식 용어가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용어가 1천171개(국립어학원, 2005년 조사)나 된다고 한다. 특히 음식과 행정분야가 가장 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우동(가락국수), 다데기(양념장), 덴뿌라(튀김), 오뎅(어묵), 고로케(크로켓), 소보로빵(곰보빵), 돈가스(돼지고기 너비), 모찌(찹쌀떡) 등 음식에는 여전히 순화의 대상이 되는 용어들이 넘친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심각한 영역은 행정용어이다. 지금도 일선 행정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공람(돌려봄)과 결재(재가), 견학(보고 배우기), 감봉(봉급 깎기), 과세(세금), 가건물(임시건물), 나대지(빈 집터), 나염(무늬들임), 납득(이해), 납입(납부), 내역(명세), 가계약(임시계약), 견적서(추산서), 마대(포대 자루), 명찰(이름표) 등 부지기수로 많다. 산업 현장에서의 친일잔재는 용어로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특히 건설분야와 인쇄분야가 심한데 모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공구리(콘크리트), 노가다(공사판 노동자), 가쿠목(각목), 단도리(채비), 찌라시(전단지) 등 한 둘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는 거짓말의 비속어인 ‘구라(くら)’였다는 조사가 있다. ‘거짓말하다’ 보다 ‘구라친다’라는 말이 익숙하다면 그만큼 우리는 무형의 친일잔재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순화시켜야 할 언어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왜색 용어를 남발하는 것인지를 반성해야 한다.

무형의 친일잔재 중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역명도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1914년부터 일제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강제로 통ㆍ폐합시켜 오랫동안 생활해 오면서 붙여진 정겨운 지명들을 마음대로 변경해 지역 정체성에 혼동을 주었다. 2020년 경기도 조사에 의하면 도내 398개 읍·면·동에서 약 40%인 160곳이 일제에 의하여 지명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모두 행정편의주의로 지명의 유래나 정체성은 무시되고 일방적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하여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공교롭게도 1990년대 신도시 개발할 때의 분당(盆唐), 일산(一山), 평촌(坪村), 산본(山本) 등이 대표적이고 수원의 영동시장의 경우는 원래 성외시장이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영정(榮町)으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영동(榮洞)이라고 정이 동으로만 바뀐 채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두 옛 정취를 버린 지명들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치 치하에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던 까뮈(Albert Camus)는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며 식민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오늘 우리가 친일잔재를 성토하고 청산을 외치는 이유도 명확하다. 더 맑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를 그대로 덮어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형의 친일잔재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청산하기가 쉽지만, 무형의 친일잔재는 독버섯처럼 숨어서 지금도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갉아먹으며 과거 그시절이 좋았다고 세뇌시키고 있다.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의 영역은 치유하고 복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서둘러야 한다. 법과 제도로 고칠 수 있는 분야는 시급히 시행하고, 자각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언행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일선 교육계의 선생님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모두의 노력은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1-06-10>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무형 친일잔재와 청산, 현황과 과제

※관련기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05.6.2): “무형으로 의식 지배, 해독주는 것이 일제문화잔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기획연재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수, 2021/06/16-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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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양성중학교]

도교육청 주관 탐구활동 목적 진행
‘친일파’ 김성태 곡 “개정해야” 92%
학내공모 실시 3학년생 작품 당선
작곡과정 거쳐 1학기내 완성 예정

▲ 학생들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학교구성원의 ‘교가 개정’의견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제공=양성중학교

안성 양성중학교 학생들이 일제 잔재 청산으로 교가 개정을 추진한다.

학생 등의 교가 개정은 경기도교육청이 주관하는 ‘일제 잔재발굴 탐구활동’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양성중학교의 교가는 김성태(1910-2012) 작곡가의 곡으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김성태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음악단체인 경성후생 실내악단 등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학교측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교육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가 개정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또 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도 들었다. 교가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교육공동체(학생·학부모·교사)와 양성중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을 1차로 수렴했다.

나아가 학급자치회와 교육공동체 대토론회에서 ‘교가를 개정해야 한다’는 찬성의견 92%를 바탕으로 개정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교가 개정 TF팀’을 중심으로 교가 개정을 위한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가 가사를 공모해 학생들의 정서를 담은 긍정적인 내용,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빛낼 수 있는 내용 등을 학생들이 직접 작사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 결과 공모전에 참여한 17명의 학생 작품 중 심사를 거쳐 3학년생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를 토대로 작곡 과정을 거쳐 1학기 내로 교가를 완성할 예정이다.

안준기 교장은 “이번 교가 개정 프로젝트는 양성중학교 교육공동체가 다 함께 교가 개정에 참여해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애교심을 고취하는 기회가 됐다”면서 “무엇보다도 독립을 향한 애국심이 3.1만세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양성지역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장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안성=이명종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6>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학생들이 교가 바꾼다

목, 2021/06/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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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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