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심각한 “세대 위기”에 처한 서방 민주주의

지역

심각한 “세대 위기”에 처한 서방 민주주의

admin | 토, 2020/12/12- 20:04

최근 2년 동안 서방국가 연구기관들이 발표한 다분히 많은 조사연구보고서는 모두 다음 사항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곧, 전 세계 범위에서 “밀레니엄* 세대(千禧一代)”와 “Z세대*”는 그들 앞 세대의 같은 연령시기와 비교해서, “서구식 민주주의 퇴조”에 대해 더욱 현저하고 확실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 출생하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세대.

**Z세대: 1995년 이후 태어나 어릴 때부터 IT기술에 자주 노출되어, 인터넷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세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피력하는데 거침이 없는 세대.

 

민주주의 퇴조”와 “청년의 동요”가 함께 흔들흔들

그들 “밀레니엄 세대”와 “Z세대”가 사회구성에서 양적으로 끊임없이 우세해 지고, 그에 따라 그들이 각국의 인구·노동력·유권자 단체의 주요 계층집단(제대 梯队)이 되었다. 이로써, 그들은 서구식 민주국가의 경제 불경기, 정치극단화, 사회권력의 “신분화 및 세습화(内卷化)” 등의 잘못된 후과를 고스란히 겪고 있는 중요 피해자가(主要承压者) 되었다.

게다가 2020년 이래 신코로나 전염병 창궐이 유발한 심리적 압력과 취업의 블랙홀은(黑洞, 검은 터널), 곧이어 또는 이에 막 사회에 발을 디딘 그들 젊은 집단에게, 특별히 심각한 타격을(格外沉重)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일부 민주국가에서 방역 및 항역에 대한 정부 대처가 지체되고, 상호 책임을 떠넘기는 자태(相互推诿的姿态)를 보여 주었다.

이에 그들 젊은 세대는 자기 나라의 제도와 복리에 대한 믿음을 더 한층 유보하게(进一步透支) 되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은, 한편으로 “민주주의가 가져온다는 복지(红利)”가 정말로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아마투어(政治素人), 신흥정당 및 일부 비주류 정치운동 또는 주장에 까지 이끌리고 또 사로잡히게 되었다(吸引).

바꿔 말하면, “민주주의의 퇴조”와 “그들 청년의 동요”가 함께 요동친다는 것은, 전 세계 다수 민주국가가 최소한 제도적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세대 간 위기”에 부득불 대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젊은이들의 의문점 3가지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 젊은 세대의 의문은 세 가지 방면에서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점점 더 전통적 민주정치 요소를 “계륵으로(鸡肋, 닭갈비로 뼈 때문에 삼키기도 어렵고 맛이 있어 내뱉기도 힘든-역자)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부터 의문을 가진다.

그들이 정치를 냉소적으로 보는 배후에는, 실은 ”형식을 중시하고, 실질적 내용을 중시하지 않는(重形式、不重实质)“ 서구의 선거중심 민주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과, 또 ”의제 지향형(议题导向型) 생활정치“를 열렬히 추앙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据此), 각국의 젊은이들은 정치적 쇼나(政治作秀) 정객의 낡은 수법을 배척할 뿐 아니라, 사회네트워크(SNS)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민의에 힘을 실어주는(给民意赋能) 것을 더욱 즐긴다. 또 이를 정치게임의 ”필수적인 대체물“로 만들려고 하지 ”선택 사항으로 남겨두려고(备选项)“ 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병폐인 정치부패와 빈부격차(贫富悬殊) 등에 대한 대가를 당사자들이 아닌 그들 젊은 세대들이 치러야한다는, 곧 덤터기를 쓴다는 점에서 그들은 의문을 가진다.

민주주의 만족도에서 “밑바닥”에 처한 곳은 라틴아메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서유럽과 앵글로색슨 “민주국가(영국, 미국, 호주) 등 4개 지역에서 현재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 3의 민주화 물결”에 휩싸였던(裹挟的)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정치제도 전환의 피로에(转型疲劳) 빠졌건, 혹은 스스로를 “민주주의 등대(民主灯塔)”라고 표방하는 서구 산업화 국가들이 민주주의의 “천장(天花板)”을 만났건 간에, 그들 젊은이들이 보기에 어쨌든 결과는 대동소이(大同小异)하다는 것이다.

곧, 일찍이 경험했던 민주적 다원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비록 그들 선배들에게는 비교적 좋은 대접을 해줬지만(犒劳了), 최적의 발전창구 시기를 놓친 그들 젊은이 자신들이, 오히려 정치부패와 빈부격차(贫富悬殊) 등의 잘못된 제도 때문에 생긴 ‘부산물’에 대한 대가를 부득불 치러야한다는(买单), 곧 덤터기를 써야 한다는 데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세 번째는 민주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만이, 어느 정도는(很大程度上) 주류 가치관과 그 운반체에 이르기까지 부정하는 반란으로 바꿔졌고, 또 좌익과 우익 포퓰리즘에 동시에 접근함으로써(靠拢) 민주주의에 대해 더욱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중하위 계층을 배회하던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난공불락(難攻不落, 牢不可破)과 같은 빈부 격차에 의해 계층 상승의 이상 실현을 포기했다(磨平了). 그들이 보기에는, 우익 포퓰리즘에 매달려(投靠) 문화와 신분의 불안감을 억제하는 것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식으로(救命稻草) 단단히 꽉 붙잡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중산층 이상의 고학력 “밀레니엄 족”은 사회정책 방면에서 자유주의를 숭상하면서도, 경제정책 상으로는 좌측으로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전 사회에 만연한 경제 불안감을 개선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좌익 포퓰리즘이 그들의 사회정의, 공민으로서의 능동성, 자아실현으로 생각하는 대상에(自我实现的想象) 그대로 딱 들어맞는 것이다(恰恰迎合).

하지만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值得一提的是), 특히 젊은 세대들이 포퓰리즘 이념과 정당 및 급진 후보들이 처한 곳에서 ‘질서’를 찾고 안도감을 되찾는(重拾) 방식으로 민주를 ‘징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독을 마시는(饮鸩止渴)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방법은 실제로 국가의 장기 전략안정과 장기 발전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삼고 있기 때문에, 민주적 합법성과 유효성의 위기를 일시적으로만 해소할 수 있을 뿐이다.

 

서구 민주주의의 세대 간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나?

그렇다면, 서구 민주주의가 직면한 세대 간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관련 각국의 종합국력이나 발전수준은 내던져버리고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다음과 같은 몇 개 요소가 그들 젊은 세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 “촉진제(催化剂)”에 일정정도(一定程度上) 해당한다(充当).

첫째(首先) 이른바 민주주의가 가져온다는 복지(民主红利)가, “실행이 없는 말뿐인 은혜에(맆 서비스) 불과하고(口惠而实不至)”, 사회 안정망 또한 나도 모르게(有意无意)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밀레니엄 세대”이건 혹은 “Z세대이건” 막론하고, 그들 대다수는 모두 냉전시기 엄혹한 이데올로기 투쟁과 같은 개념이 별로 없고, 전혀 상반되게(恰恰相反), 2008년 국제금융위기의 “후유증” 속에서 계속 힘들게 살아온 기억만 오히려 가득하다.

그 결과는,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고지(高地)나 혹은 “훌륭한 통치(良治)”의 대명사로 여기는 것이라고(引以为) 간주하기 어렵게 되었다.

둘째(另外), 생산수단의 사유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根源于生产资料私有制) 빈부격차는(贫富悬殊) 줄곧 서구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병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날이 첨예해지는(日益尖锐)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비교적 전형적인 방법은 바로 재분배를 강화하는 것이다. 곧, 사회보험·사회구제·사회복리 및 자선사업을 포함한 풍요로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근년에 이르러, 민주국가의 후예가 기력이 쇠잔해지고(后继乏力), 정당은 극화하고, 사회는 갈기갈기 분열함에(撕裂) 따라, 원래 젊은이를 위해 도움을 주고, 경제와 심리적 압력을 완화해 줄 수 있는 재분배 기제가 나날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日趋失灵). 그래서 사회 안정망이 언제인지 모르는 사이에(有意无意) 쇠약해진 것이다.

이 결과 오늘날 젊은이들이 직면한 사회경쟁은 잔혹할 정도이고, 또 채무와 생활 압력은 비슷한 연령대의 부모세대나 조부세대가 일찍 처한 것보다 훨씬 높아졌다.

게다가 계층의 고착화는(阶层固化) 엄중하고, 개인이 좋아질 기회는(个人际遇) 점점 더 개인의 천부적인 재능이나 후천적 노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가정 출신 배경에 따라 아주 큰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자기의 노력과 분투를 통해 자기 운명을 바꾸려는 적지 않은 젊은이들의 일상적인 시도는(尝试) 좌절되었고(受挫), 민주주의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다. 이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아는(不言而喻) 사실이다.

셋째(其次), 풀뿌리를 이탈한 민주주의와 “이익추구의 민주주의”가 농간(作祟)을 부리기 때문이다.

전 세계 젊은 세대의 민주주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하나는 “민주주의가 초점을 상실했기(民主失焦)“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젊은이들이 일상생활에서 민주주의가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인민을 믿고, 인민에 의존하고, 인민을 존중하고, 인민이 참여하고 결정하는 바를 받아들이는(吸纳)“ 요지의 핵심을(精髓要义) 직관적으로 감지 및 발견하기(感受到) 어렵다는 의미다;

둘은, 더욱더 젊은이를 실망시키는 것은, 정객들이 서로 힘겨루기 하는 가운데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오히려 “이익추구(功利化)”를 가속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이른바 정치엘리트들은 진정으로 민생과 관련된 일로 제기된 문제를 임시방편의 책략으로만 채택한다. 또 젊은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는 기후온난화, 환경보호, 난민안치 등의 문제에는 관심이 부족하다.

이들은 단지 선거 경선부분에만(竞选环节) 마구 돈을 쓰고(大肆注资), 여러 가지를 투입하고(百般投入), 심지어 권력남용까지 자행한다. 이렇게 민중의 의사를 추출하는(输出) 과정을 철저히 돈과 정치의 상호연결의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현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회 초년생이고(初出茅庐) 세상에 깊게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젊은 세대들에게, 자기 나라의 민주주의 제도를 세밀히 볼 때, 일찍부터 “색 안경”을 끼도록 만들었다.

더군다나, 디지털화가 민주주의 문턱을 재배치하고(낮추거나 높이고), 또 정치적 분노를 싼값에 복제하는(SNS를 통해 퍼 나르기 등으로-역자) 것을 가속화하였다. 곧, 젊은 세대는 클라우드 컴퓨팅(云计算), 빅 데이터(大数据), 모바일 커넥션(移动互联), 인공지능(AI) 등 고급신기술이 보급되는 시기를 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급 정보통신기술을 다루는 데에 능숙한(谙熟此道)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정치 감독의 새로운 무대로 만들어, 정치 참여의 공간과 시간의 장벽을 효과적으로 없애버렸다. 아울러 네트워크의 자유, 평등, 다원, 탈(脫)중심화를 이용하여, 전통 민주주의의 ‘신성한 인식’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여기서도 열세에 처한 젊은이 입장에서 보면, 디지털 격차는(数字鸿沟) 오히려 민주적 참여의 문턱을 함께 높인 셈이다(变相拔高了). 이런 종류의 공민들의 정보 취득과 사회참여의 비균형 상태는 젊은 세대의 불만을 조장(助長)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터넷은 어느 정도 색다른 정치(另类政治), 극단적인 언론, 기괴한 언사 등에(吊诡之辞) 활동공간을 제공했고, 일부 편파적인 선동정치구호가 이로부터(由此) 빈번히 젊은 집단 속에 개성화되어 공유되고 있다(예를 들면 일베의 가짜뉴스 등-역자).

또한 정치적 분노를 디지털화를 통해 ‘헐값으로 분출할 수 있는 제도’는 일부 혈기왕성한 사람들에게(血气方刚者) 대의제 민주주의를 둘러싼 번잡한 규제와(繁冗规程) 쓸데없는 논쟁을(无谓争论) 촉발하였다. 동시에 수평화(横向化), 분산화, 탈(脫)중심화 등의 직접정치 참여 방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출처 : 통일뉴스 , 2020-12-05.

저자: 왕총위에 (王聪悦)

중국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 학자

역자 :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종부세 시즌이 돌아오자 거의 모든 미디어들이 세금폭탄을 합창하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올해 종부세 납세 의무자는 59만5000명으로 지난해보다 12만9000명(27.7%) 증가했는데, 이는 전체 1,998만 가구의 약 2.5%수준이다. 납세의무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종부세 총액도 3조 3,471억원으로 전년보다 1조 2,323억원(58.3%) 늘었다고 한다. 작년에 서울 아파트 가격이 폭등했고 그 폭등이 공시가격에 일부라도 반영됐으니 종부세 납세의무자와 세액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를 노무현 정부 시즌 2라고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종부세(과세기준 및 세율)를 노무현 정부 수준으로 복원시키지도 못할 정도로 보유세 강화에 대한 의지가 약한 정부다. 게다가 2008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종부세 부부합산과세가 위헌결정을 받은터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올해 예상되는 종부세 추정세수가 3조 3천억원이 넘는다는 건 문재인 정부 들어 부동산 가격이 얼마나 많이 폭등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증거다. 참고로 종부세가 생긴 이래 최대 세수는 참여정부 당시인 2007년의 2조 7,671억원이었다.

종부세로 대표되는 보유세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가장 좋은 세금으로 평가하는 세금이며, 부동산 투기억제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세금이다. 대한민국은 보유세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가 횡행하고 부동산 과다보유자들이 천문학적 불로소득을 사유하고 있다. 보유에 따른 부담이 거의 없다보니 누구나 부동산을 통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14~16년의 서울 아파트 평당평균가격 상승률이 실거래가 기준으로 16.0%였는데,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17~19년 동안 무려 37.5%가 상승한 데에도 문재인 정부의 보유세 강화 의지 박약이 큰 몫을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주요선진국들과 비교해봐도 대한민국의 보유세는 너무 낮다. 대한민국의 GDP 대비 보유세 비율(2015년 기준)은 0.8%로 OECD 평균(1.12%)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며, 보유세와 거래세를 합친 재산과세에서 보유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OECD 평균은 69.8%인데 반해, 대한민국은 고작 28.7%에 불과할 정도로 기형적 구조다.

또한 보유세 부담의 정도를 직접 보여주는 실효세율(실효세율은 실거래가 기준으로 보유세를 실제 얼마내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예컨대 보유세 실효세율이 1%라고 하면 실거래가 10억짜리 아파트의 보유세가 1년에 1천만원인 셈이다)을 보면, 2015년 현재 OECD 주요국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호주(0.31%), 캐나다(0.87%), 일본(0.57%), 영국(0.78%), 이탈리아(0.62%), 미국(0.71%)이고, 한국(0.16%)을 제외한 15개국의 평균은 0.39%이다. 한국은 주요 선진국의 1/3~1/5밖에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보유세 폭탄 운운하는 미디어들의 주장은 전형적인 곡학아세이자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는 미디어들의 거짓선동에 현혹되지 말고 보유세 강화 로드맵을 입안해 발표해야 한다. 획기적인 보유세 강화 로드맵은 발표만으로도 시장에 미치는 효과가 클 것이다.

화, 2019/12/10- 21:01
5
0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

1972년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이후, 경제성장 위주로 달려오던 현대 문명이 지속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이 더는 인류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문명의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면 인류가 지속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의 한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제안되었다.

이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을 사람들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한 극단은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무한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이며, 다른 한 극단은 지구, 정확히 말해 인류를 위기에 봉착하게 할 경제 성장을 중단하고 지구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준 내로 경제규모를 한정함으로써 인류도 지속되도록 하는 방향이다. 현실에서 각각의 집단이나 개인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 양 극단의 스펙트럼 중 어느 한 지점으로 각자 이해할 것이다.

무한 경제 성장의 욕구를 담보하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이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수식어가 제안되었으며,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 언급될 때 대부분의 경우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해석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논의에서 추구하는 바는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우 지속 가능한 발전에서 ‘생태’가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의 의식과 행동이 변해야 한다. 의식과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방안의 하나는 교육이다. 이러한 목적의 교육 중 하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큰 줄기인 생태 개념을 시민이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생태교육이다. 하지만 생태교육의 개념에 대해 아직 명확한 정의가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생태교육의 정의

생태(ecology)의 뜻은 학문으로서 생태학(ecology)의 정의가 생태학자의 수만큼 다양한 것처럼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는 순수 자연의 상태나 그 속성을 전제하기도 하고, 인간에게 전혀 위해가 되지 않는 환경의 상태를 전제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상태는 인간 개입이 없는 자연이 순수하고 안전하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위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인간이 철저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다. 후자에서 인간의 개입은 전자의 순수 자연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훼손 행위를 방지하는 개입일 수도 있고, 인간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안전하게 개조하는 개입일 수도 있다.

자연 개조를 옹호하는 관점에서의 생태 용어 사용은 생태농법에 대한 인식에서 볼 수 있다. 생태농법으로 생산된 농작물이 인간 건강에 좋다는 관념은 인간을 위한 식량생산의 도구로 자연을 이용하면서 인간 건강에 좋도록 자연을 개조하는 개입을 정당화하고 옹호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태교육에서 말하는 생태는 순수 자연을 전제하며 무한의 물질순환을 통한 생태계의 지속성 개념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다. 생태계는 개별 구성원인 종보다는 구성원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로서 하나의 계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즉 생태교육에서 생태계는 인위적인 개입 없이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물질의 순환계로 여겨진다. 에너지는 생태계 외부에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태계 내 생물구성원의 연결망(관계)을 통해 전달되다가 외부로 흘러 나가는 일방향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물질은 생물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에서 생물공동체 내로 들어와 생물 구성원의 연결망을 통해 전달되다가 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으로 되돌아가며 생태계 내에서 무한히 순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생태교육에서 생태는 인위적인 개입, 즉 에너지의 투입 없이 무한히 순환하는 상태나 속성을 말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개념에 기초한 생태도시는 환경에 위해가 발생하지 않는 자연 순환의 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생태도시에서는 생태위기를 초래하지 않고 도시 문명이 지속되면서 자연 생태계의 생물상도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이상적으로 전제된다.

이처럼 생태교육에서 생태란 인간 문명 내에서 무한의 순환에 저해가 되지 않도록 인간 이외의 생물 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포함한 모든 생태계의 구성원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생태의 정의에 기초한 생태교육은 순수 자연이 무한의 순환을 하듯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인간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 시민의 행동 양식을 익히게 하는 교육으로 정의할 수 있다.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 즉 생태주의에 이념적 바탕을 두고 있는 생태교육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고 인간이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라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다.

요컨대 생태교육은 일차적으로 현대 문명의 지속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자연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민의 생태소양을 높여 생태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생태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 생태교육의 목적은 생태시민이 인간 이외의 생물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현대문명이 자연과 공존하고 지속 가능하게 하며 인류공동체 구성원들도 평등하게 공존하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생태교육

20세기 후반부터 융‧복합적 또는 통합적 접근이 중요시되고 통합적 접근의 교육이 강조되면서 공통과학이나 공통사회 교과목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도입되었고, 생태교육에서도 통합적 교육의 요구가 높아졌다.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가치관 변화와 사회 제도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 생태시민의 개별 행동과 사회행동이 교정되도록 하는 데 기반이 되는 생태교육은 통합과학이나 통합사회를 넘어 전 분야가 통합하는 접근이 더욱 절실하다.

‘통합’은 표준대국어사전의 정의를 참조하면 ‘둘 이상을 하나로 합치는 일’로 교육에서는 ‘학습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학습결과를 종합하고 통일하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통합적 접근’은 ‘경험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치관과 태도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분야의 시각에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통일된 해석과 결론을 내리는 접근’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접근을 통해 개인의 가치관과 태도는 조정 변경되고, 조정된 가치관과 태도에 따라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즉 행동이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적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이 없다. 고등학교에서 형식적인 문∙이과 통합교육과정이 도입되었고 대학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통합교육이 시도되고 있지만, 실제 교육내용이나 방법은 단순한 메들리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통합교과목이라는 명목 하에 한 교과목에 다양한 분야를 넣어놓고 한 교사가 가르치거나 다양한 전공 교사들이 연이어 가르친다고 통합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를 학습하며 형성된 다양한 시각으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통합할 수 있게 훈련시키는 교육이 진정한 통합적 교육이다. 각 분야를 폭넓고 심도 있게 가르침으로써 배양된 학습자의 다양한 시각이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한층 더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해석하며 통합할 수 있다. 이렇게 분석되고 해석된 결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충을 종합적인 틀에서 포괄하여 차이를 줄이고 조화로운 통일을 만들어가는 통합 훈련을 하는 것이 진정한 통합교육이 될 것이다.

생태교육은 이러한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이다. 환경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일차적인 단순한 해석들이 서로 상충되더라도 개인 또는 사회는 하나의 실천적 결론을 강제적으로라도 내려야 하며, 그러한 훈련이 이루어지는 교육이 생태교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합적 결론을 내려야 하는 사례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러한 기술 개발을 친환경적이라거나 생태적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연비가 개선된 차를 소유하게 된 개인은 친환경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보다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되어 운행 시간과 거리를 늘리기 때문에 연료의 소비량이 늘어나고 실제 배출되는 공해기체도 늘어날 수 있다. 낮은 연비 때문에 자동차 소유를 꺼렸던 사람도 자동차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됨에 따라 자동차를 구입하고 운행에 합류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공해기체의 배출총량이 친환경기술 개발 이전보다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 게다가 늘어난 차량을 소화하기 위해 도로 수요까지 늘어 자연이 더욱 훼손될 수 있다. 실제 역사는 이러한 현상을 증명해왔다.

이와 같이 환경부담 감소라는 개별 기술의 분석이나 해석이 기술수요 증가라는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이나 해석과 상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충을 해결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게 하는 제도적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단순한 접근으로 자동차 운행수요를 줄이는 방법은 연료가격을 올려 연비개선에 따른 운행의 경제효율을 이전과 같게 되돌리거나 오히려 개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동차 운행이 유지되거나 감소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 대응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기술자나 회사는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을 더는 개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복합된 환경문제나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 중심 혹은 과제 중심의 생태교육은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이끌어갈 교사를 어떻게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는지의 난제가 있다. 과학, 기술, 사회, 인문 분야의 지식을 모두 갖춘 교사가 통합적 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각 분야의 지식이 부족한 교사라도 통합적 접근의 교육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속 가능성의 생태학적 이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중심이 되는 생태교육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원리를 자연 스스로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생태계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 방식이 더는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제안된 지속 가능한 발전이 인간에게 경제 성장을 중단하거나 축소하도록 경고하기보다는 경제 성장의 부작용을 줄이거나 없앰으로써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을 키우려는 욕구를 오히려 더 자극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친환경 또는 생태 기술을 개발하여 지구 자원(물질과 에너지)의 소비가 계속 늘어나도록 하는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물질의 상을 변환하는 모든 에너지 흐름의 과정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지구의 무질서도(엔트로피)를 높이며 최소한 인류의 지속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엄연한 우주법칙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류 문명은 소비를 유지하거나 줄이기보다는 늘리는 방안을 생태계의 원리에서 찾으려 노력한다. 생태계는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계이기 때문에 생태위기를 악화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물질 소비와 에너지 소비를 늘리는 경제 성장 방안을 제공할 수 없다.

성장의 욕구를 채우려는 지속 가능성 요구와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생태계의 본질은 서로 모순된다. 진정한 생태교육은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고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지속 가능성에 부응하는 인류 문명의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모든 생태학 교과서는 생태계 내의 무한한 물질 순환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생태계 내에서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는 물질은 전체 물질 중 극미량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물질은 저장고에 머물러 있다. 극미량의 물질이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간접적인 에너지는 상대적으로 막대하다.

광합성을 통해 생물공동체가 직접 사용하는 태양에너지의 양은 지구에 유입되는 양의 0.023%에 불과한데 비해 지구 밖으로 반사되어 나가는 34%를 제외한 66%의 태양에너지는 극미량의 물질이 순환하는 생물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도록 지구의 무생물 환경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 극히 적은 양의 물질과 에너지를 생물공동체가 직접 이용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생물공동체 밖에 머물기 때문에 지구는 생물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반증은 제한된 공간에서 생물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이었던 ‘생물권 2’(생물권 1은 지구이므로) 실험이다. 1991년 미국 아리조나 주 남부 오라클의 사막지대에 1만2000㎡의 거대한 유리온실을 지구의 축소판인 바다, 습지, 열대우림, 사막, 초원 등과 3800여 종의 각종 동식물, 자원참가자 8명이 2년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제한된 밀폐 공간에서 생물공동체의 생명현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속 증가하는 무질서도를 감당할 수 있는 거대한 무생물 공간이 없던 생물권 2는 지속되지 못하고 2년 만에 종료될 수밖에 없었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물질 순환은 생태계 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지속 가능한 생물공동체가 이용하는 생태계 내 에너지도 극소 분량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지구 내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계속 늘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원리는 인류 문명의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때만 인류 문명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팽창이 아니라 다른 수준의 질적 향상, 정확히 말하면 자연의 과정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한정된 수준 내의 물질적 풍요를 수용하고 만족하는 정신적 행복의 향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생태교육의 이념

물질과 에너지 소비를 지속적으로 팽창하려는 무한 탐욕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따라서 생태교육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성은 인류 문명의 물질과 소비를 한정된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인간 사회로 확장하는 논의가 필요하다.

(1)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생태철학적 반성

많은 생물학과 인문사회학 책들이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생태계의 존속 방식인 것처럼 호도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생태계는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강자가 약자를 초토화하고 박멸하여 강자가 취할 수 있는 약자가 더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자로 비유되는 포식자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포식활동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포식자는 약자로 비유되는 피식자에게 무심할 수밖에 없으며, 피식자도 그렇게 무심한 포식자에게 도피활동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무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포식자와 피식자는 한 생태공간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필자는 이러한 공존을 ‘모자람의 지혜(frugal wisdom)’를 바탕으로 하는 ‘무심의 공존(disinterested coexistence)’이라 명명하였다. (『이해하는 생태학: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찾아서』, 공주대 출판부, 2005)

이와 반대로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철저한 약자의 멸살로 공존이 무너지는 것을 ‘지나침의 무지(indulgent ignorance)’라 명명하였고, 그 결과는 인류 미래의 지속 불가능성으로 나타난다. (‘함께하는 사회의 구현: 4대강 사업의 이기적 탐욕과 생명경시 극복’, 『생명연구』45호, 2017)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인류는 자연과 공존하지도 못하고 인류공동체가 갈등 없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없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물론, 인류공동체의 갈등 없는 공존을 위해서 인류는 생태계가 보여주는 ‘모자람의 지혜’를 탐욕을 억제하는 자기 절제의 지혜로 깨닫고, 생태계가 보여주는 ‘무심의 공존’을 타자의 생존과 권리를 존중하는 타자 배려의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류 문명은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토대로 자연이 보여주는 생태 평등(ecological equality, 정민걸, 위의 논문, 2017)을 인간 사회의 공동체에서도 구현하는 지혜로운 문명으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다.

(2)함께하는 생태시민의 자아실현

생태계가 지속되는 원리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는 과도한 에너지 전환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작동하는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이다. 이 생태계 지속성의 원리는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무한한 팽창을 희구하는 인간의 무한 탐욕과 기술능력 과신으로 공존을 무너뜨리는 지나침의 무지와 대조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서 무한소비 탐욕의 발로인 지나침의 무지를 생태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소비를 생태적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로 절제하는 ‘모자람의 지혜’가 시민의 삶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비가 절제된 이러한 시민이 생태시민이다.

생태교육은 생태계의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지향하며, 학습자가 이런 이념을 체득함으로써 생태시민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자연과 인간, 인류공동체의 생태 평등을 구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생태교육은 학습자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인간의 탐욕에 비추어 그릇되게 이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생태계는 ‘모자람의 지혜’로 ‘무심의 공존’을 구현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생태계 내에서 능력이 모자란 구성원들이 서로를 관조하며 공존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도 생태교육이 학습자에게 생태계 지속성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깨닫게 하고 자연에 대해 인간의 능력을 절제하고 생태계의 존재를 무심하게 관조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무한 탐욕에 빠져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인류공동체는 구성원 간 불평등의 심화로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하는 생태교육은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공존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함께 하는 생태 평등도 구현하는 교육이다.

 

정민걸

공주대 환경교육과 교수

월, 2020/01/20- 21:16
1
0

편집자 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의 경합과정에서 보이는 중도 구파의 모습에서 현재 한국 제도정치의 모습을 그대로 읽어볼 수 있다. 촛불혁명 덕분에 출범한 현재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현실에 도전하여 개혁할 의지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 세력과 야합하는 무기력한 정치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오바마는 미국에서 트럼프를 등장시킬 빌미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명박근혜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를 망쳐버린 장본인이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대비하며 공화당만큼 권력의 상실을 두려워할만한 미국의 또 다른 정치계층은 중도성향의 민주당 그룹이다. 버락 오바마 前대통령은 최근 자유주의 성향의 부유층 기부자를 대상으로 한 행사에서 “대부분의 국민은 제도를 완전히 해체하고 재정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하며, 그들의 두려움을 구체화했다. 그것은 “MediCare for All (모든 사람을 위한 의료제도)”, “그린뉴딜”과 같은 기후변화대응을 위한 행동계획 또는 엄청난 재산의 일부를 환원하는 억만장자에 부과되는 “자산세”에 대한 빗발치는 요구를 저격하는 노골적인 언급이었다.

오바마의 발언은 해시태그 “#TooFarLeft (극심한 좌파성향)”를 타고 트위터에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과감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 극심한 좌파성향(too far left)으로 비춰진다면 “그것이 사실이다”는 입장을 보였다.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전직 대통령이 진보적 후보자들을 훈계한 사건은 지난 몇 주간 두 번이나 발생했다. 그는 10월말에 있었던 한 행사에서 “순수하다고 믿는 신념, 결코 타협하지 않는 태도, 항상 정치적으로 ‘깨어있는’ 태도라고 치부하는 태도는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하는 병폐다”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마치 고집스런 보수적 세대의 미국인들이 좌파를 “암적 존재”라고 비난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짐작하건데, 오바마는 자신이 속한 당의 진보적인 목소리뿐만 아니라 좌파정치를 실현하고 있는 가장 인기있는 두 대통령 후보자인 버몬트주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와 메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렌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상기 두 대통령 후보자는 여론조사에서 중도성향의 선두주자이자 오바마 정권시절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보다 점차적으로 누적 지지율을 꾸준히 높여오고 있다. 오바마의 발언은 밀레니엄 세대에 대해 꼰대 “OK Boomer”가 신랄한 반박을 하는 것에 해당한다, 젊은 세대들은 불의에 대해 침묵을 지키라는 꼰대들의 잔소리에 지쳐 있다.

중도파들은 바이든과 오바마보다 매우 진보적인 후보, 즉 자신들이 속해있는 당파의 정체성을 위협을 하는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할 수밖에 없을 상황에 우려하고 있다.

흔들림없는 샌더스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오바마의 비판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최저임금을 생계가능한 수준의 임금으로 올려야 된다고 말한 것은, 미국의 시스템을 망가뜨리자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보건의료 분야에 관련하여 “미국만이 세계 주요국 중 유일무이하게 남녀노소의 의료보험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불명예를 종식시키자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시스템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30년 전에 시작했었어야만 했던 일을 이제 하려는 것뿐 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이러한 발언들은 하루하루 고생하며 살아가는 수 백만의 미국인들의 가슴을 울리지만, 불평등한 체계를 통해 이익을 받고 있는 (기득권)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정치는 지금까지 양당의 야합으로 경제체제를 부유한 엘리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갔으며, 이들 입법자들은 지난 날 미국의 부를 더욱 공평하게 분배한 적절한 제도(뉴딜)를 “폐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백만장자가 아닌 미국 국민들이 “역사상 최초로, 지난 해 미국 백만장자들이 중산층보다 적은 세금을 내게 되었다” 라는 보도 자료를 읽었을 때, 이는 마치 오바마가 우리에게 이런 좋은 제도를 폐지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처럼 매우 모욕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좋은 제도는 백만장자와 오바마를 포함한 백악관과 의회에 있는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붕괴되어 왔다.

샌더스와 워렌의 인기는 미국 내 곳곳에 퍼진 국민들의 분노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당연스레 부유한 엘리트층의 걱정을 자아내고 있다. 그들의 상상할 수도 없는 만큼의 부(1억 달러를 갖던 10억 달러를 갖던 한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에 있어서 실제로 아무런 차이도 못 느끼는)를 지키려는 어설픈 언설로, 그들이 처한 곤경을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과 비교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의 백만장자 레온 쿠퍼맨은 그가 비난을 받은 상황에 대해 불평했다. “백만장자가 무슨 잘못이 있나요?  당신도 사람들이 즐겨 구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한다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걸요” 라며, 그는 아주 쉽게 역겨울 정도로 엄청난 부를 얻었다는 듯이 말했다.

쿠퍼맨은 불공평한 세금정책, 해외조세도피, 납세자 보조금 등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조작하여 일반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무시했다. 그는 워렌이 제안하는 자산세에 대해 “나는 누진소득세와 부유층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은 워렌이 싸질러놓은 빌어먹을 아메리칸 드림이다. “라고 말하며 맹렬히 비난했다.

워렌과 샌더스 같은 후보를 못된 트럼프 형의 그러나 좌파로 낙인을 찍은 사람들도 있다. “저명한 월스트리트의 해지펀드 매니저이자 워렌의 라이벌을 위해 모금하고 있는 민주당 소속”으로 알려진 어떤 이는 메사추세츠 상원의원에 대해 “트럼프 때 공화당원들이 겪었던 경험과 같습니다. 당신은 그녀를 평가하면서 그녀가 국가를 위해 끔찍한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그것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그녀를 더욱 강하게(고집스럽게) 만들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허둥대는 부자들은 한참 늦은 단계에서야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들을 선거운동에 참여시켰다. 최근 경쟁에 합류한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개인의 재산이 너무 많아 선거자금을 모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반트럼프 광고에 1억 달러를 쓸 계획이다. 이에 열광하는 월스트리트의 경영진들은 그를 지지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한편, 경쟁에 뛰어든 또 다른 신인인 메사추세츠 전(前)총재 데발 패트릭은 그 시점에 다른 후보들이 더러운 돈이라며 피하던 수퍼 PAC(전미회의: 기득권자 집회)을 통해 들어온 기부금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패트릭은 또한 기업과 자본주의를 옹호 하는 것을 출마의 핵심으로 잡았으며, AP통신 인터뷰 도중 “이 나라에 진행되고 있는 사적 이익의 투기가 만들어낸 좋은 예들이 많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AP 통신은 패트릭이 ” 석유 및 가스회사의 자문역으로 일했던 사실과 비우량 대부회사로 2012년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중산층에게 약탈적인 회사라고 비난했고 롬니 후보의 목을 조여왔던 사모펀드 베인 캐피털에서 중역으로 봉사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민주당 후보 중 중도파의 상위를 형성하고 있는 바이든과 인디애나의 사우스밴드 시장인 피트 부티지지는 많은 후보들로 넘쳐나는 지역에서 선두가 되기 위해 헛수고를 해왔다. 바이든의 아들 헌터가 우크라이나 석유회사 이사회에서 보여준 부도덕적인(불법이 아니라면) 입장이 계속해서 언론의 헤드라인에 대두되면서 바이든은 하락세를 타고 있다. 前부통령 스스로도 최근 대마초를 “게이트웨이 드럭 (습관형성 약물)”이라고 칭하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하는 등 끊임없는 말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부티지지가 일단의 상승세를 타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는 민주당의 중요한 지지층인 흑인유권자의 저항에 직면해 있다. 흑인유권자들이 대놓고 동성애자 후보를 불편하게 여긴다는 단순하고 인종차별주의적인 주장을 넘어, 그는 사우스밴드 사법제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현재,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흑인유권자 지지를 조작한 것에 대한 조사를 앞두고 있다.

앞으로 몇 달 뒤면 민주당내 중도세력으로부터 트럼프를 이기기 위해 자신들 성향의 단일후보를 집중해서 밀어주자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될 것이다. 그러한 후보는 공화당과 타협하고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이 덜한 노선, 즉 트럼프 이전의 현상유지를 유지할 수 있는 온건한 중도주의자여야만 한다는 이야기 또한 들을 것이다. 중도주의자들은 유권자들이 무식하다고 비난할 것이고, 그들 스스로 샌더스나 워렌 후보 간에 단일후보화 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오바마가 좌파를 비난한 행사에서 그는 “그들이 오차범위의 밖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오바마는 조심성이 없는 대통령 후보 때문에 2016년 대선에서 패배한 최근의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신중하지 않다. 불평등을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 (기득권) 사람들이 신중한 사람들이다. 아무리 그들의 입장에서 희망스럽게 전망하려 해도, 그들의 시대가 이미 끝나가고 있다는 현실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Sonali Kolhatkar

Truthdig의 주요 기고자이자, “Rising Up With Sonali,” TV & Radio show 설립자 겸 진행자

원본출처: Commondreams.org. 

금, 2019/12/13- 21:09
1
0

편집자 주:

서구와 한국의 언론들은 8년 전에 튀니지로부터 시작된 아랍권의 색깔혁명을 민주화 봄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전문 연구자의 기술과 평가는 정반대 편에 서 있다. 현재에도 서구와 한국 언론들은 여전히 중국의 일국양제에 대한 일부 홍콩인들의 폭력적 저항을 민주항쟁이라고 연일 보도하면서도 남미에서 격렬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신자유주의와 미패권에 대한 치열한 해방투쟁은 제대로 보도조차 하고 있지 않다.

북한 역시 리비아의 사례를 크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구 언론들의 언술적 마법에서 벗어나 10년 뒤의 홍콩과 남미 국가들의 모습을 상상해면서 아래의 칼럼을 번역 소개한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지난 9월, 미국이 지지해주고 있던 이드리스 왕을 전복한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 혁명 이후 반세기를 맞았다. 1969년 리비아 혁명에서 무아마르 카다피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 중 하나인 리비아를 승계 받았다. 그러나 42년 뒤, 그가 암살 당했을 당시 카다피의 사회주의를 통해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리비아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과 기대수명이 가장 높았다.

2011년의 서구세력의 반체제 운동으로 리비아는 실패한 국가가 되었고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 최악의 실수는 리비아”이며,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를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

지난 50년 동안 리비아에서 일어난 두 개의 혁명은 확연하게 정반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카다피의 사망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초래 했다. 서구의 대사관은 모두 리비아를 떠났고, 리비아 남부는 테러리스트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북부 해안은 대량 이주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는 모두 리비아와의 국경을 폐쇄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중심부가 붕괴된 국가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학살, 강간, 고문과 더불어 발생했다.

2011년, 서구는 확실히 아프리카에서 생활수준이 가장 높은 리비아 국민을 돕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았다. 카다피를 몰아내고 꼭두각시 체제를 만들어, 리비아의 천연자원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람들은 서구의 리비아 개입이 또 다른 석유 강탈에 불과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군사 개입의 목적은 미국에 있어서는 무기,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프랑스에 있어서는 물 때문이었다. 리비아가 아프리카, 지중해, 아랍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의 가장 중심에 있다는 것을 고려 할 때, 리비아를 통제 하는 것은 서방국가들이 이 세 지역에 세력을 뻗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2011년 혁명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는 석유보다 더 귀중한 자원인 물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물은 20세기에 석유가 보장했던 것을 21세기에 약속한다. 물은 국가의 부와 운명을 좌우하는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기름과 달리 물을 대체 할 수 있는 자원은 없다. 자연은 물의 공급을 규정한다. 한편 물에 대한 수요는 인구가 증가하고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짐에 따라 거침없이 증가한다. 인구 증가, 기후 변화, 공해, 도시화가 끈끈하게 결합되어 있기에 2040년에는 물 수요가 공급을 40퍼센트 앞설 것으로 예상한다.

리비아는 석유보다 더 귀중한 자원인 세계 최대의 지하수 공급원인 누비아 샌드스톤 아퀴퍼(Nubian Sandstone Aquifer)에 자리잡고 있다. 이 화석수의 대수층은 약 2만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15만 큐빅 킬로미터의 신선한 물을 수용하고 있다. 카다피는 하루에 200만 큐빅 킬로미터의 물을 수송할 수 있는 사막 아래에 4,000km 길이의 복잡한 수로를 설치하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the Great Man-Made River Project) 에 250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 같은 기념비적인 물 유통 프로젝트는 95%가 사막으로 뒤덮인 리비아를 자급자족이 가능한 작물을 경작 가능한 오아시스로 만들기 위함 이었다.

오늘날 수에즈, 온데오 및 사우르와 같은 프랑스의 다국적 물 기업은 이미 세계산업의 4억달러에 달하는 지구상 물 시장의 45프로 이상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프랑스에게 2011 리비아 혁명은 리비아의 놀라운 수자원의 통제와 민영화를 진행시키는 것과 같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리비아에 폭탄을 투하하기 몇 달 전 미 중앙정보국(CIA)은 “… 강과 호수, 대수층 등 미래의 국가안보 자산이 되는 자원을 쟁취하기 위한 미래의 ‘수자원전쟁’에 대해 경고했으며 용병과 대리인 국가들을 통해 통제했다. 리비아의 정권교체 혁명은 패권국가들의 수자원 전쟁이라는 주요한 예시가 되었다.

이제 리비아의 물로 인한 수익은 서부 세력이 취하고 있으며, 놀랍지도 않게 리비아의 서부는 식수 고갈을 겪고 있다. 기업의 욕심과 방치로 인해 나라의 주요 수도관의 3분의 2가 더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리비아의 유니세프 대변인인 무스타파 오마르는 향후 대략 4백만명의 리비아인들은 지구상의 가장 큰 대수층을 바로 아래 두고도 안전하게 마실 물을 구하기 어려워질 것 이며, 이로 인해  A형 간염, 콜레라 및 다른 설사병들이 발병할 것으로 예측 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그들의 전 식민의 석유와 가스를 착취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2011 혁명의 지지 의욕을 불태웠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석유 매장량이 가장 높다. 카다피 정권 아래 석유 수출의 85%는 유럽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카다피 정권 이전의 아이드리스 국왕은 근본적으로 스탠다드 석유회사가 리비아의 석유법을 작성하도록 했다. 카다피 정권은 이러한 행위를 중지 시켰고, 석유로 벌어들인 돈은 모든 리비아 국민의 은행 계좌로 직접 입금되었다. 이탈리아가 석유 회사들은 이러한 고귀한 관행을 멈추어버린 것은 놀랍지도 않은 행위였다.

리비아의 석유는 근접성, 추출의 용이함, 유황분이 적은 원유의 특성을 갖고 있어 이탈리아에게 아주 중요한 자원이다. 이탈리아와 다른 지역 대부분의 정제소는 유황분이 적은 리비아산 원유를 취급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 설비들은 리비아산원유 부족으로 인해 대체되는 묵직한 사우디 원유를 취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리비아는 52.7조 큐빅 피트 이상의 천연가스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방대한 면적의 지역이 여전히 탐구 되고 있다. 리비아산 석유의 확보로 이탈리아는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덜 의존하게 되었고, 이에 대하여 유럽 본토에게 자랑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 거대 석유회사인 Eni는 영국 석유의 리비아 자산에 대한 통제 지분을 최근 매입했으며 매일 7억6천만 규빅 피트의 천연가스를 추출하도록 리비아 정권과 거래 했다.

프랑스인들은 리비아의 물 시장의 전리품을 누리고 있으며, 석유와 천연가스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인들에게 돌아간 반면에 결과적으로 2011년 혁명에서 미국은 무기밀매의 시장을 노리게 되었다.

뉴욕타임즈는 2019년 6월 미국이 지지한 리비아 반란군의 무기고에서 미국의 중화기들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뉴욕타임즈는 “미사일 상자는 무기 밀매거래의 대부이자 공동 제조업체인 Raytheon과 Lockheed Martin 것임을 확인하였으며, 1억 1천 5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재블린 미사일 주문거래 번호 또한 표기되어 있었다.”라고 언급했다. 리비아는 이제 미국 무기거래상에게 노다지가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허술한 무기 은닉처가 되었다. 2011년 리비아 혁명은 서구를 위해 석유, 물, 무기, 천연가스까지 수십억 달러를 긁어 모아 내어줬으며, 리비아인들에게는 끝없는 불행과 내전만을 일으켰다.

50년 전 카다피의 혁명은 완전히 달랐다.

40여년 동안 카다피는 경제민주주의를 장려했고, 리비아인들을 위한 진보적인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해 국유화된 석유를 활용했다.  카다피 통치 하에서 리비아인들은 무료 의료 서비스와 무료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무이자 대출과 무료 전기 혜택을 누렸다.

NATO의 카다피 퇴진에 힘입어 한때는 번창했던 지역인 트리폴리는 이제 정전사태가 흔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수천 명의 필리핀 의료 서비스 인력들이 해외로 도피하여 의료 부문은 붕괴 직전까지 치닫고 있으며, 동부 전역의 고등교육기관들이 문을 닫고 있다.

서구의 지지를 받은 2011년 혁명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은 집단 중 하나는 리비아의 여성들이다. 다른 많은 아랍 국가들과 달리 카다피의 리비아 여성들은 교육, 직업, 이혼, 재산 보유, 수입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유엔 인권이사회는 카다피가 여성의 인권을 증진시켰다고 칭찬하기 까지 했다.

1969년 카다피가 정권을 잡았을 때 대학교에 진학한 여성은 거의 없었다. 2011년, 미 공군이 리비아를 폭격하기 직전에는 리비아 대학생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카다피가 1970년에 처음 통과시킨 법안들 중 하나는 노동 평등과 그에 따른 동등한 임금 제공에 관한 법안 이었다.

2011년 혁명 이후, 새로운 ‘민주주의’ 리비아 정권은 여성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새로운 지배층은 가부장적 전통에 강하게 사로잡혀있다. 또한 개입 후 리비아 정치의 혼란을 틈타 양성평등을 서양의 도착적인 행위로 보는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이 군림하게 되었다.

서구의 언론에서 ‘카다피의 군사 독재’라고 표현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실과 반대로, 리비아는 사실 민주주의 국가였다. 카다피의 독특한 직접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전통적인 정부기관은 해체되고 폐지되었으며, 각종 위원회와 의회를 통해 국민들이 권력을 갖게 되었다.

리비아는 한 사람의 손에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강한 분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국가내 “미니 자치주”와 같은 다수의 작은 공동체들로 나뉘어져 있다. 이 자치주들은 그들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으며, 석유 수입과 예산 기금을 분배 방법을 포함하여 다양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이 작은 자치주 내에서 리비아 민주주의의 3대 주체는 지방 인민 회의, 기초 인민 회의, 총 인민 회의 였다. 리비아의 기본 인민회의(BPC 또는 Mu’tamarshaʿbiasāi)는 본질적으로 영국 의회의 하원 미국 의회의 하원의원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그러나 리비아의 8백 명의 기초인민회의는 그들만을 위한 법을 만드는 부유층의 선출 된 대표들로 구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의회는 모든 리비아 시민들이 법제정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2009년 카다피는 리비아에 뉴욕 타임즈를 초청하여 2주 동안 리비아의 직접 민주주의를 지켜볼 수 있게 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카다피가 실행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관해 “리비아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결정에 관여한다. 시민들은 위원회에서 만나 외교 조약에서부터 학교 설립에 이르기까지 모든 안건에 대해 투표를 한다.” 라고 말했다.  카다피 정권 하의 리비아는 군사독재와는 반대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창한 민주주의 국가였다.

오늘날 리비아 내의 서구형 ‘민주주의’ 에서 지역, 부족, 대륙, 이슬람, 범죄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된 민병대가 최근 두 개의 파벌을 형성했다. 리비아는 현재 각각 총리, 의회, 군대를 꾸리고 있는 두 개의 정부가 있으며, 이들은 영구적인 내전을 부채질하고 실제 민주주의 국가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파괴하고 있다.

카다피의 혁명은 확실히 21세기 경제민주주의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실험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아주 대조적으로, 서구 지지 하에 이루어진 2011년 반정부 시위는 21세기의 가장 큰 사회적, 군사적 실패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 될 것이다.

 

 

Garikai Chengu

고대 아프리카의 저명한 역사학자. 하버드와 스탠퍼드 및 콜롬비아 대학에서 평생 아프리카 지역을 연구하였다.

 

출처 : Global Research Center in Canada.

월, 2019/12/16- 21:44
0
0

대학의 탄생과 변화

대학은 1000년전 지금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기술도 거의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어서 지상에서의 존재란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단계라는 종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했다. 그때 이후 많은 것이 변했고 대학도 중세에서 현대, 후현대로의 역사적 변천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여러 차례의 중요한 변형을 겪었다. 현재 세계의 상태를 고려할 때 고등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무엇일까?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고등교육은 인간이 더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증진시키도록 도움으로써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은 이런 역할에 실패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도덕적 헌신을 상실하고, 다른 면에서 잘못되고 파괴적인 사고방식에 헌신하며, 또 다른 면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걸 어렵게 만들기조차 한다.

현대 대학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다. 과거에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이제 매우 세속적인 기관이 됐다. 한때는 엘리트 집단이었으나 이제 수백만의 학생들에게 열려있다. 이론을 모든 것의 우위에 놓는 동시에 지극히 실용적이어서 문학비평과 이론물리학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엔지니어링, 경영, 디자인과 나란히 존재한다. 대부분 학문분과들이 각자의 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졌지만, 대학의 전반적 구조는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갉아먹는다. 대학들은 경제성장에의 헌신이라는 지배적 문화에 긴밀하게 묶여있는 동시에 이성과 숙고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려는 기관이면서도 이런 전통의 기본적 가정들이 타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세계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거나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현재 형식의 대학을 심각하게 재고할 이유가 없다. 현대 대학들은 세계가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부분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여했다. 그러나 최소한 진보의 길에 서지는 않았다. 현대 대학들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적과 바탕의 가정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은 산업과 정치의 지도자들, 계획가와 분석가들, 교사와 시민들을 교육하며 우리의 파괴적 관행을 떠받치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발전시키고 합법화한다. 현대 대학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환경위기가 가장 심각하고 사회적 부정의(이는 환경의 쇠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가 역사상 가장 증가한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 해체와 환경 파괴에서 대학이 해온 역할은 크게 주목 받지 않는다. 환경위기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과잉인구, 과소비, 대규모 산업, 공공정책,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라는 성경의 가르침 등에 초점을 두었다. 대학은 대규모 산업, 정부, 종교의 이해와는 떨어져 있거나 거기에 적대적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했다. 전반적으로 대학구성원들의 입장은 자연세계의 파괴에 대한 비난이 다른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동체 붕괴에 있어서도 대학의 책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현대 대학들이 도시화를 촉진하는 이동성과 개인주의를 교육한다는 사실은 대체로 간과돼왔다.

 

현대적 믿음에 대한 대학의 헌신

나는 현재 형식의 대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특히 학문분과, 철학적 유물론, 그리고 경제주의-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대한 헌신 때문이다. 대학이 세계의 선을 위한 세력이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넘어서야 하며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 지구와 모든 서식자의 내재적 가치, 생명이 갖는 상대적 속성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보증해야 한다.

학문분과는 매우 강력한 동시에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특별한 방식의 구조적 사고이다. 대학이 분과 형식의 사고에 매진하는 한, 대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학문분과의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일관성과 통일성과 의미가 부족하다. 한 분과의 다양한 전제와 발견은 다른 분과의 전제와 발견에 의해 영향 받거나 점검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무제한의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가정하는 반면 물리학자들은 지구의 파괴를 경고하는데, 이런 경고와 발견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려되지 않은 채 넘어간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은 모든 실재가 물질로 환원되고 그런 물질은 내재적 가치, 경험, 자유가 없다고 가정하는데 비해 (암묵적으로는 대다수 과학자들을 포함해서) 대학의 다른 학자들은 최소한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고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의 행동과 믿음에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대학의 분과구조는 이런 모순적 관점이 어떻게 두 가지 모두 진리로 통용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것을 허용한다. 전반적으로 통일된 실재에 대한 관념을 공유하는 대신, 서로 정반대인 추상적 개념을 내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 대학은 현대성의 한 버전인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후현대적 입장을 보태놓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실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 그리고 중력 같은 물질적 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대학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세계관, 즉 오래 되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잔여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세계관이다. 유물론은 초기의 이원론에 비해 더 큰 장점을 갖는다. 비이원론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 분명한 실체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데 따른 문제를 피해간다.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것에는 경험(인간의 경험을 포함), 자유(인간의 자유를 포함), 내재적 가치(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포함), 도덕적 미적 규범 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생명이 없고 의미와 목적을 피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을 향유하는 개인의 존재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현대 대학은 또한 경제주의에 경도돼 있다. 경제주의에 따르면 세계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돈으로 해결되며 돈은 은총처럼 무한하다. 세계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섯 배나 팽창했는데도 세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다수가 더 나빠졌다는 사실, 전반적인 환경이 전지구적 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대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심각하게 쇠퇴했다는 사실은 이런 믿음에 대한 반증이 되지 않는다. 세계의 경제활동이 무한히 팽창하며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주고 건강한 생태권역과 양립 가능하다는 믿음이 너무 깊은 나머지, 경제주의가 보편적 부라는 공공연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에 설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주의는 잘못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점점 큰 지구의 쇠퇴와 인간의 고통을 가져온다. 단순히 말해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현대 대학들이 직간접적으로 경제주의를 지지하는 한, 환경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세계와 한편이 될 수 없다. 경제주의는 삶의 의미를 소비와 소득의 관점에서 정의하기 때문에 이런 목적을 수용한 대학은 자연세계의 파괴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고통을 증진시킬 뿐이다.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데도 대학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이 있다. 더 나쁜 것은 이 모든 생각이 진리로 간주되며, 전 세계의 고등교육기관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인증됐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자신의 권위를 부여한다. 그 열세 가지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실재는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2. 우주는 목적이 없다.

3. 진리, 정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주관적이어서 중요하지 않다.

4. 사회 전반의 건전도는 GDP로 측정될 수 있다.

5. 광범위한 경제적 불평등은 문제가 아니다.

6. 교육은 직업훈련과 출세에 관련된 것이다.

7. 공장식 농축산업은 효율적이고 필요하며 지속가능하다.

8. 모든 중요한 문제는 시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9. 개인이 사회보다 더 현실적이다.

10. 가능한 최선의 세계질서는 하나의 슈퍼파워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미국이다.

11. 글로벌 경제는 필연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12. 전쟁과 부정의는 피할 수 없다.

13. 경제성장은 기후안정성이나 생물다양성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지속 가능한 문명을 이루려면, 고등교육을 재발명하거나 현재 상태의 고등교육을 다른 종류의 고등교육으로 보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에 도전하고 그것을 보다 진실에 가까운 생각으로 바꾸도록 해주는 형식의 고등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위에 제시한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토론하고 이 목록에 다른 생각들이 추가되기를 바란다. 아마 내가 만든 목록은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미국 중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 요점은 대학들이 당대의 문화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몇몇 중요한 생각들은 현재 구축된 고등교육의 맥락에서는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형식의 대학이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대학의 구조와 관련이 있고, 둘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형태 짓는 광범위한 문화적 가정과 관련이 있으며, 셋째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대학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

오늘날 대학은 학문분과에 따라 조직돼 왔다. 과거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고 미래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 학문분과는 탐구분야, 기본적 가정의 세트, 방법론으로 구성된다. 학문분과에 맞지 않거나 현재 분과의 기본가정과 모순되는 생각은 오늘날 고등교육의 맥락 안에서는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내가 지구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삶에 해롭다고 꼽았던 위의 모든 생각들은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만물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분과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능성을 음미하는데 닫혀있다. 이론상 철학 같은 다른 분과는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거나 이것이 실재에 대해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만물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말이 안 된다거나 우리는 물리학자들의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초점은 실재하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정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현재 대학이 구조화된 방식 때문에 이런 생각이 대학에서 타당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산업화된 농업은 산출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토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속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들어보겠다. 농경제학이라는 분과는 그것이 바이오기술과 결합돼 있는데다 대규모 농화학제품 기업들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기 때문에 위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증명하거나 토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시해버린다. 많은 대학에 있는 환경연구, 지속가능발전, 음식연구 관련 학과들이 현대 농업은 지속 가능하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만, 이런 학과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일반적으로 대학 안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한다. 이 학과들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농업정책과 관행을 만들어내는 농과대학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학들이 위의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대부분이 이미 “상식”이 되어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목적은 개인의 성취라는 생각과 끝없는 경제성장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는 쌍둥이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모든 사람들이 경제성장은 끝없이 가능하며 대학에 가는 이유는 좋은 직업을 얻는 것, 즉 많은 돈을 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고등교육이 고강도 노동, 탁월한 경제정책과 함께 삶을 엄청나게 개선한 주역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생각에 도전하는 것은 상식을 배반한다. 그러나 전체 그림은 좀더 복잡하다. 한국의 삶이 모든 면에서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아니며, 10년마다 두 배가 되는 경제성장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강의 기적은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이것은 경제성장이 끝없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가정에 그 뿌리가 있다.

대학은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된 “상아탑”으로 불려왔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깊은 진실은 대학이 사회적 구성물이며 문명의 상식이 교육과정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경영대학원과 경제학과는 경제학이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학, 최소한 미국 대학들이 “경제학은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을 고려하는 게 지극히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다. 미국에는 대개 소규모인 사립대학들과 대개 대규모인 공립대학들이 섞여 있다. 미국의 대다수 학생들은 공립 대학에 다니고 있다. 공립대학 교수들은 각 주에 고용돼 있다. 일부는 종신직위를 보장받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현재는 70%의 교수들이 종신고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교수들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자유를 누리지만, 매년 계약이 끝나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이런 자유는 다음 학년초에 계약을 연장해야 한다는 열망에 의해 제한된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다시 고용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강의하는 게 결코 편안하지 않다. 슬프게도 정규직 교수들조차 종종 승진하지 못하거나 학생들의 평가에서 별점을 덜 받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피한다.

한국 대학들이 대개 사립이라고 하더라도, 내 짐작으로는 상식적 생각들에 도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 압력들이 존재할 것 같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전반적으로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대해 다루지 못한다. 이런 일반화에는 예외가 있으며 이런 예외를 축하해야 하지만, 이런 예외가 더 큰 진실을 가리도록 허용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대학들은 상황을 호전시키지 않는다. 대체로 자신들의 상당한 권위를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잘못되고 파괴적인 생각에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지식”을 재생산함으로써 상황을 점점 나쁘게 몰아간다.

 

대학을 변화시키는 두 가지 제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통할 수 있는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두 가지 제안은 가능성의 전부가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제안이 더해지길 바란다.

큰 대학의 교수들은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 이상에 대해 탐구하는 독서그룹을 조직할 수 있다.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독서그룹에서 한 학기 동안 한두 권의 책을 공들여 읽도록 한 다음, 이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자신들과 전공이 다른 동료들과 서너 번 만나도록 하면 된다.

우리는 애팔래치안 주립대학(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중간규모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이것과 비슷한 강의를 시도했다. 주제는 기후변화와 그것의 사회적 함의였다.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많은 교수들이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과 만나고, 자신들의 특수한 학문분과 바깥에서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환영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을 가르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학의 분과구조였다. 비록 임시적 토대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교수들이 자신의 전공을 넘어 함께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현재의 대학 구조를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독서그룹이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어떤 생물학과 조교수가 학생들이 생물학 전공기초 강의에서 전지구적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 부분은 선택강의이며 많은 강사들이 이 부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생물학과는 전공기초 강의에서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를 필수강의로 지정했다. 이론상 다른 학과의 교수들도 전공기초를 정하면서 비슷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이 강의에서 얻은 또 다른 결과는 약 100명의 교수들이 기후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정보를 자신들의 강의에 넣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것이다. 이런 서약은 교수들에게 부과된 의무사항이 아니라 개인적 결정이었으나, 그들이 이 서약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현대 대학처럼 오래 되고 존경 받는 제도를 금방 뜯어고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함께 독서를 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들이 변화를 위한 맥락을 만들어내는데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종류의 분과를 횡단하는 노력들이 현대 대학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가질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제안은 대학 바깥에 대규모로 존재하는 성인학습센터와 관련된 것이다. 1920년에 독일 철학자 프란츠 로젠츠바이그는 독일 대학들의 비인격적 교육에 맞서 레흐르하우스(Lehrhaus, 교육의 집)로 알려진 기관을 설립했다. (역자주: 당시 독일에서 제기된 평생교육의 필요성에 부응하면서도 유대의 전통에 기초한 성인교육기관으로, 회당(synagogue)을 학교(lehrhaus)로 바꾸되 거꾸로 하지 말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유대역사에서 첫번째 레흐르하우스는 제1차 바빌론 유수때 세워졌으며 혁신적 교육방법으로 신앙의 의무를 지켰다.) 레흐르하우스의 강조점은 전통적인 유대식 삶에 대한 현대성의 도전에 대응하고 비위계적인 교수법을 도입하는데 있었다. 1930년대에 나치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레흐르하우스는 독일에서 가장 활기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1970년에 레흐르하우스 모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느 정도 부활했다.

1960년대에는 몇몇 “대안대학”들이 미국에 설립됐는데, 이는 그 시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제도권 대학들이 실패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 건강한 공동체, 지속 가능한 경제학 같은 구체적인 문제 혹은 생태적이고 정의로운 문명을 증진시키는 발상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조직하는 성인학습센터 혹은 “대학”을 설립하는 게 가능하다. 이런 “대학” 혹은 성인학습센터는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을 얼마든지 탐구할 수 있다.

나의 주안점은 현재 형식의 대학들이 문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운영하는 대학들은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생각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무능력하다. 물론 문화 자체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고등교육을 변화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대학을 내부와 외부에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현대 문화의 모든 다른 측면들까지 변화시키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출발점은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종류의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고등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커스 피터 포드

철학자, 『현대 대학을 넘어: 구성적 후현대 대학을 향해』 저자

월, 2019/12/23- 19:59
3
0

비건 대표는 말한다. “미국에 협상 마감 시한은 없다.(12.16)” 발언 취지로만 본다면 미국은 ‘북이 얘기해온 연말’이란 시한에 개의치 않으며 계속 협상해 나가고 싶다는 정도의 의미 같다. “우리는 시한 없다. 일하자”는 동 발언에서도 같은 속내가 읽혀진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하지만, 이 발언은 명명백배하게 틀렸다. 이유는 미국 자신은 갑(甲)이고, 북은 을(乙)이라는 인식과 비례되어져 이 인식은 결국 마감 시한 결정권은 오직 미국 자신에게만 있다는 오만함으로 연결되어져서 그렇다.

그래서 만약 이 논리를 북이 수용하게 된다면 북은 협상 종료될 때까지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아무런 국가적 행위 없이 무조건적으로 인내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한과 기간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줘야한단 말인가? 동등하지 않는 공정성이다.

시한이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지금의 문제, 즉 미국이 북의 요구인 ‘새로운 계산법’에 대해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시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자국이 처해있는 정치·군사적 및 정파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미국이 풀어내어야 할 숙제이지, (이 숙제를) 자신들이 풀지 못한다하여 그 책임모두를 상대방인 북에게만 전가한다? 정직하지도 외교적이지도 않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협상을 계속 하겠다 면서도 미국은 북에게 줘야할 보상과 양보가 전혀 없다. 이른바 북은 미국과의 적대 관계개선을 위해 핵실험도, ICBM발사도,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등도 단행하였지만, 이 선의에 대해 미국은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명백한 대북제재결의 위반이다. 웬 대북제재결의 위반? 유엔결의안 239728(강조, 필자. 이 결의안에는 명백하게 대북제재 결의안이란 용어는 없다. 원문도 제재를 의미하는 ‘sanction’이 아닌 ‘Resolution’ 결의안또는 해결책이 나오며 연번호가 있을 뿐이다. 해서 결의 제0‘ ‘0호 결의라 번역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유독 북에게만 대북제재 결의안이라고 번역하고 일반화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의도 때문이다. ‘해결보다는 제재에 방점 찍고 싶어 하는 미국과 분단적폐세력들의 농간 말이다.)에는 ‘북(조선)이 결의안을 준수하는 정도에 따라 (제재를 강화 또는) 수정·중단·해제할 수 있도록’한 조항이 있는데, 이 조항을 과연 미국은 이행하고 있으며 그럴 의지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과 미국은 ‘유엔결의안 2397호 28항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이고,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역행하여 제재를 강화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은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협상을 계속 하자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은 하나도 보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목적인 북의 추가적 군사도발을 막고자 하는 자신들의 국익만 앞세우는 이율배반적 도발행위 다름 아니다.

공정하고 대등해 될 약속이 이렇게 어느 일방(=북한)에만 적용되고, 희생적으로 적용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 정의를 위배한다.

그래놓고 생각을 한번 잠깐 해보자. 미국은 당연히 자신들이 지켜져야 할 시간이 없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트럼프에게는 당장 좋다. 재선활용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도 패권지위를 계속 유지하는데 시간에 쫒기지 않는다. 북의 군사적 도발이 없는 한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갑 질 해나가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북은? 절대적으로 그렇지(=괜찮지) 않다. 모든 주권국가가 규범적으로 보장되어있는 자주권과 발전권이 침해당해 북은 엄청난 고통과 곤란을 계속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①대북제재가 지속됨으로 인해 국가의 정상적인 경제발전 경로를 왜곡시킨다.

②국가 간 외교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아 국가경쟁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③정전협정의 지속으로 인해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계속 시달려야만 한다.

▲다음으로는 등가의 문제이다. 즉, 북의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대가는 경제적 혜택이나 번영에 대한 언급 정도이다. 이걸 믿고 북이 핵을 포기한다? 너무나도 처절한 반면교사가 있어 이 논리는 북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날강도의 논리와 똑같다.

리비아의 경우가 그 예다. 미국으로부터 핵프로그램을 폐기만 하면 경제지원 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리비아는 핵프로그램 폐기했다. 그런데 돌아온 미국의 약속은 약속한 경제지원은 고사하고, 내전을 빙자한 미국의 공격에 무너졌다. 이걸 너무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북이 그 말만 믿고 핵을 폐기한다? 불가능한 상상력이다.

동시에 확실한 등가가 보장된 것도 아닌데, 달리 말하면 안보와 군사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등가가 안보와 군사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등가여야 한다고 한다면 북과 미국 사이에 존재하는 공정하고도 공평한 등가는 적대정책 철회 대(對) 평화협정체결을 중심에 놓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보장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 약속은 하지도 않고, 양보해 지금 한 약속도 미국 자신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쥐꼬리만 하게, 그것도 가역적인 방식으로만 하겠다는 것이고, 반면 북에게는 사실상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미국의 태도야 말로 현찰 받고 어음 주는 격, 그것도 의도된 부도어음에 가까운 것을 주겠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미국은 위에서 확인받듯이 자신들이 지켜야 할 유엔의무는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북 보고는 핵·미사일 활동을 재개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며 전면전을 경고하는 미국이야 말로 완전 사기범이고 범죄국가가 아니고 뭣이란 말인가?

하여 굳이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정당하지도 외교적이지도 못한 방식으로 시한을 무한정 연장하려는 미국의 태도야 말로 제아무리 선의적으로 이해하려 해도 일방적이며 패권적이고, 마피아집단과 너무나도 똑같은 폭력적 범죄 집단이라고. 또 이런 ‘나쁜’폐단을 막으려면 오히려 국제사회가 미국에게 (마감)시한을 줘 유엔외교를 정상화해야 된다고.

해서 다시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 백번양보해 재선을 앞두고 반드시 외교성과를 보여줘야 할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리고 그 유일한 외교적 성과가 북의 추가 군사행동(ICBM 발사 등)은 막아지면서도 예의 ‘bad deal’까지는 안가는 그런 외교적 성과라고 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트럼프 행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이자 곤궁함이지 북이 풀어야 할 숙제이고 곤궁함은 아니지 않는가?

다른 말로는 북의 입장에서는 계속 시간을 유예하고, 고통을 감내해가며 인내해야 할 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협상이 결렬되면 결렬된 상태에서 주권국가로서의 국가행위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으며 그 활동으로 미국과 다시 협상의 룰(rule)을 마련하면 되는 것이다.

연동해 지금의 문제가 시한의 문제라기보다는 위에서 확인받듯이 미국이 처해있는 정치·군사적 환경과 정파적 이해관계로 인해 발생한 문제라고 한다면 북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질 필요는 없다. 하여 북의 입장에서는 협상 시한을 정해놓고 미국에게 요구할 자기근거와 주장, 입장을 충분히 분명하게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정당성도 비교적 명확하다.

▲우선은, 2017년 11월 29일 국가핵무력완성 선언이후 단 한 번도 유엔결의 위반을 한 적이 없다. 핵실험과 ICBM을 발사한 적이 없다는 말이고, 비례해 이에 대한 상응 대가를 유엔결의 정신에 비춰 미국에게 충분히 요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한을 정해 그 이행정도에 따라 다음 전략을 선택해야 될 명백하고도 분명한 근거가 북에게는 있다. 다름 아닌, 김정은 위원장이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올 12월 31일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하라며 충분한 시간과 명분을 줬기 때문이다.

적용하려면 이렇듯 그것이 비록 시한이라 하더라도 똑 같이 두 국가(=북, 미국)모두에게 공히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민플러스, 2019년 12월 21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필자와 협의하여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수, 2019/12/25- 23:58
4
0

편집자 주:

문재인 정부의 주요 성과로 평가되는 한-아세안 협력여부는 세계최대 규모의 무역협정으로 평가되는 RCEP의 실현 여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인도-태평양 안보전략으로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RCEP의 체결을 방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한국을 방문한 미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인 스틸웰의 임무 역시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과 경제협력이 절실하며, 중국을 경계해야 하는 인도가 일단 RCEP에서 한발을 빼자, 일본 역시 이를 무력화하는데 앞장서는 양상이다.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없는 아베 정권은 경제보다 안보를 우선하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히데키 마키하라 일본 경제산업성 부대신(차관)은 지난 11월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인도가 참여하지 않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서명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해당 언급은 세계 최대 규모로 평가되는 무역 협정의 운명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이번 달 초,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가장 취약한 시민 계층에게 미칠 수 있는 협상의 잠재적 위험성을 언급하며 인도는 협상에 불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도가 협상에서 빠지게 되면, 일본 또한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김으로써 협정 추진을 위해 노력하는 기타국가들이 또 한번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저우융성(周永生) 중국 외교학원 국제관계연구원 교수는 이번 일본의 결정 뒤에는 안보에 대한우려의 우세가 있던 것 같다고 전하며 “일본은 아직도 미국의 무역 관세 압력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RCEP를 타결하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 단독으로는 지역 내에서 중국의 권력과 균형을 잡을 수 없기에 인도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라고 덧붙였다.

일본은 협상 초기부터 인도가 RCEP에 참여하도록 설득해 왔다. 일본은 인도가 협정에서 이탈한 이후 인도가 다시 협정에 참여해야만 협상에 서명하겠다고 밝히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본과 인도 간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 일본의 RCEP 이탈 가능성이 불거졌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일본과 인도의 외교·국방장관(2+2) 회의는 토요일에 시작했고, 양국은 안보 및 국방 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조만간에 아베 일본 총리의 인도 방문도 예정되어 있다.

중국과 아세안 국가의 관계가 완화하고 일본과 한국(ROK) 관계가 악화하는 현 시점에는, 아시아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간의 협력은 특히 전략적으로 필수적이다. 일본도 RCEP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내비치는 표현은 더욱 여세를 몰아서 인도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저우교수는 일본-인도 협력은 전략적, 지정학적 합의를 통해 소위 ‘중국 위협론’을 억제하기 위해함께 노력하겠다는 점에 항상 중점을 두었다고 가리켰다. 양국은 이미 2011년에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양국간 무역관계에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대일 인도 수출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대일 인도 무역적자는 여전히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과장된 위협 담론 아래에서 상호 안보 이익을 이유로 양국이 동맹을 맺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진정으로 이번 협상에서 빠지기로 결정한다면, 경제 전망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현재로서는 일본이 상황을 살피면서 다른 국가가 어떻게 반응할지 확인하기 위한 잠정적인 움직임으로 보인다.

해당 발언은 향후 일본이 RCEP 협상 테이블에 다시 합류하도록 할 수 있는 부대신으로부터 나왔다. 일본의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2%를 기록하며 지난 2분기 성장률 1.8%에 견줘도 대폭 하락한 점은 아베 총리의 내각이 경제 촉진 부양책을 대폭 강화할 필요성에 대해 갖는 상당한 중압감을 의미한다.

RCEP 협정문은세계적인 경기 침체에 맞서 동아시아 무역을 활성화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WTO 개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보호무역주의가 대두되면서 RCEP 체결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욱 통합된 동아시아를 이룩하기 위해 중요한 첫 관문이다. 이미 중-미 무역 전쟁이 세계 수요에 타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수출 주도의 일본경제는 RCEP와 같은 협약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일본이 협약에서 빠지는 쪽으로 결정한다면 거짓된 담론을 통해 안보 우려를 경제적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저우 교수는 “심화된 지역경제는 제지할 수 없는 추세이며 단일 국가나 지도자에 의해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다른 RCEP 국가는 일부 국가의 계획적인 결정 때문에 핵심 지역의 이해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목, 2019/12/26- 22:55
2
0

하원의 세 위원회가 Donald Trump의 탄핵조사를 진행함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다.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탄핵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는 ‘쿠데타’이다.” Britannica 백과사전은 쿠데타를 ‘소규모 집단에 의한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기존 정부의 전복’으로 정의하고 있다.

반면, 연방의회는 탄핵의 대상이 되는 불법행위 혐의를 조사하기 위한 헌법 상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이러한 불법행위는 중대한 범죄와 경범죄를 의미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처음부터 탄핵을 ‘정치적 무기이며 내전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무기’라 일컬었다.

탄핵은 미국 헌법 제1조, 제2조, 제3조에서 6번 언급된다.

‘탄핵의 유일한 권력’은 연방하원에 있다. 탄핵은 기소와 같은 것이다. 투표에 참여한 하원의원 중 단순 과반수가 찬성하여야 한다. 이 경우 사건은 재판을 위해 상원으로 넘어간다. 상원 의원의 3분의 2가 찬성할 경우, 대통령은 탄핵을 선고받아 파면된다.

1974년 하원 법사위원회의 참모가 작성한 Nixon 탄핵조사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하였다. “폭군과 협력자들에 의한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미 헌법의 최초 입안자들은 행정부의 권력 남용과 권력 찬탈에 대한 보호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탄핵사유는 형사범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74년 법사위원회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하였다. “형사사건과 달리, 대통령의 해임 사유는 그가 재직 중 행한 일련의 행위 전체에 기반할 수 있다. 특정 상황에는 개별 행위가 아닌 일련의 행위가 헌법 정치를 전복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Alexander Hamilton은 탄핵의 대상이 되는 불법행위를 정치적인 것으로 특징지었다. 그는 연방주의자(Federalist)논고 65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탄핵의 대상이 되는 불법행위는 공직자의 위법 행위, 다시 말해 공공 신뢰의 남용 또는 위반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불법행위는 주로 사회의 직접적 손해와 관련이 있기에, 특유한 적절성을 갖출 경우, ‘정치적인’ 것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Trump의 권력 남용과 사법 방해에 대한 증거는 풍부하다. 그리고 두 가지 모두 탄핵의 대상이 되는 명백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

Evidence of Abuse of Power

권력 남용의 증거

지난 8월 정보기관 감찰관인 Michael Atkinson은 내부고발자의 Trump에 대한 고발장이 ‘긴급한 사안’을 제기하였고, ‘믿을만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내부고발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작성하였다.

나는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미국 정부 관료들로부터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공직 상의 권력을 이용해 타 국가가2020년 미국 대선에 개입하도록 요청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러한 개입은 다른 무엇들보다도, 타 국가가 대통령의 주요 국내 정치적 라이벌을 조사하도록 압박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인 Ruldoph Giuliani씨는 이러한 활동의 중심 인물이다. 법무장관 Barr 역시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Volodymyr Zelensky는 Trump와의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내부고발자의 고발장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다수의 미국 정부 관료들은 내게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미국 대통령과 Zelensky 대통령 간의 회담이나 전화통화가”, Giuliani가 제시한 “이슈들에 대해 Zelensky가 협조의사를 보이는지 여부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Trump는 내부고발자의 신뢰도를 비난하며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통화의 내용에 대한 고발은 사기다!” 그러나 2019년 7월 25일 Trump와 Zelensky의 전화통화에 대한 요약본이 해당 고발장을 확증하였다.

해당 통화로부터 약 일주일 전, Trump는 Mick Mulvaney 비서실장 대행에게 의회가 승인한 우크라이나에게 제공할 약 4억 달러 상당의 군사적 원조를 보류할 것을 아무런 설명 없이 지시하였다.

통화 중 Zelensky는 Javelin 대탱크 미사일을 미국으로부터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Trump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 많은 일이 있었고, 우크라이나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만큼 한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 Zelensky에게 CrowdStrike(2016년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 해킹을 조사한 사이버 보안 회사)의 조사를 요청한 후, Trump는 Zelensky에게 대통령 후보인 Joe Biden과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의 아들에 대해 제기된 부정의혹을 조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Trump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Biden과 아들인 Hunter Biden이 이사회에 재직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가스회사의 조사를 방해하고자 부패 검사의 해고를 촉구한 혐의로 기소하였다. 그러나 Biden은 우크라이나 당국에 의해 모든 혐의를 벗은 상황이었다.

통화 요약본은 Trump가 Zelensky에게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법무장관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좋을 것이다. Biden은 자신이 기소를 중지시켰다고 뽐내고 다녔으니, 그것을 조사해볼 수 있다면….. 내게는 끔찍한 이야기로 들린다.”

마침표는 요약본 원문 중 일부가 생략되었음을 나타낸다.

Trump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와 Zelensky의 워싱턴 방문을 대가로 Zelensky에게 Biden 부자와 2016년 대선을 조사할 것을 압박하였다는 추가 증거가 나타났다.

10월 3일, 전 국무부우크라이나 특사 Kurt Volker가 하원 조사관들과의 인터뷰에서 대가성 보상이 있는 거래를 입증하는 문자메시지 기록을 제출하였다. Trump와 Zelensky의 통화가 있었던 7월 25일 아침에 보낸 문자메시지에 따르면, Volker는 Zelensky의 보좌관에게 다음과 같이 메시지를 보냈다. “백악관에서 들은 내용이다. Z 대통령이 Trump에게 조사 의사를 확신시켜준다면 / 2016년의 진상을 밝혀낼 것이라고 한다면, 워싱턴 방문일정을 확정 지을 수 있을 것이다.”

8월 9일, 유럽연합(EU) 주재 미국 대사 Gordon Sondland는 Volker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 “미국 대통령은 약속한 내용이 지켜지기를 정말로 원하는 것 같다.”

Sondland는 Zelensky가 기자회견을 열어 조사의사를 밝힐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하였다.

9월 9일,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리대사 William B. “Bill” Taylor는 Sondland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에서 말한 대로, 선거운동에 도움을 얻기 위해 안보 원조를 보류하는 것은 미친짓이라 생각한다.”

Taylor는 의회가 승인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의 보류 결정이 이미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로 이어졌다고 불평하였다.

“탄핵의 대상이 되는 불법행위는 대통령의 심각한 권력 남용, 그리고 심각한 공공 신뢰 남용을 수반한다.” North Carolina 대학교 법학 교수 Michael Gerhardt가 Los Angeles Times에 밝힌 내용이다.

“Trump 대통령의 통화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된다. 이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국가가 아닌 자신이 이득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기에 권력 남용에 해당된다. 그리고 미국인은 대통령이, 사업체들이 자신들의 뱃속을 불리도록 이끌어가는 방식, 또는 타국 권력과 협력 또는 공모하여 미국 대선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사적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라 신뢰하기 때문에 이는 배임에 해당된다.”

권력의 남용은 Nixon에 대해 제기된 탄핵소추안 조항들 중 하나였는데,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 침입이 일어난 Watergate 사건에서의 본인의 역할을 은폐하기 위해벌인 공모에 대한 것이었다.

Evidence of Obstruction of Justice

사법 방해의 증거

하원 정보위원회에서의 증언에서 국가정보국 국장 대행 Joseph Maguire는 감찰관 Atkinson이 내부고발자가 신뢰할 만하고 선의에서 행동하였다는 ‘타당한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인정하였다.

“내부고발자가 옳은 일을 하였고, 모든 단계에서 법을 준수하였다고 생각한다.”고 Maguire는 위원회에 진술하였다.

그러나 Maguire는 내부고발자 보호법에서 감찰관이 고발장이 ‘긴급한 사안’을 제기한다고 판단할 경우 해당 고발장을 의회에 전달하도록 정한 것을 따르지 않고, 백악관과 미국 법무부 법률자문국(OLC)을 찾았다. 그 자신이 해당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는 법무장관 William Barr의 감독 하에OLC는 내부고발자의 고발이 ‘긴급한 사안’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결정지었고, Maguire에게 그에게는 의회에 고발장을 보낼 의무가 없다고 조언하였다. 백악관이 대통령 특권의 적용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대중의 격분에 마주한 Trump는 해당 고발장을 공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내부고발자는 7월 25일 통화의 녹취록 은폐도 주장하였다.

백악관 관료들은 내게 자신들이 백악관 변호인들에게 ‘지시를 받아’, 그러한 기록이 조정과 협정 체결, 그리고 내각 관료들 대상 배포를 위해 일반적으로 저장되는 컴퓨터 시스템에서 해당 전자 기록을 제거하였다고 말했다. 대신, 해당 기록은 특히 민감한 성격의 기밀 정보를 저장하고 다루기 위해 사용되는 독립된 전자시스템에 저장되었다. 한 백악관 관료는 해당 통화가 국가 안보 관점에서 조금이라도 민감한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기에, 이러한 행위가 해당 전자 시스템의 남용에 해당된다고 기술하였다.

더 나아가, 백악관과 Giuliani는 하원 정보위원회, 외교위원회, 감독 및 개혁위원회의 탄핵조사에 따른 증인 및 문건 소환장에 불복하고 있다.

이러한 방해는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 위원장 Adam Schiff 하원의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Eliot Engel 하원위원, 감독 및 개혁위원회 위원장 Elijah Cummings 하원의원이 아래 진술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법 방해의 증거들을 역시 제공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국무부]장관 Mike Pompeo는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정치적 적수를 중상 비방하도록 압박하였을 때 통화를 청취 중이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Pompeo 장관은 이제 하원 탄핵조사의 사실관계 증인이다. 그는 자신과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국무부 내 증인들을 위협하는것을 즉각 중지해야 한다.

국무부 직원들을 포함해 증인들을 위협하려 하거나, 그들이 의회와 대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도 불법행위에 해당하며 탄핵조사 방해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이에 의회는 이러한 방해에서 어떠한 밝혀지지 않은 문건과 증언이 해당 내부고발을 확증하는 정보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9월 30일, Trump는, Trump가 실각할 경우 내전 발발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한 복음주의 목사 Robert Jeffress의 말을 인용하였다. “만일 민주주의자들이 대통령을 파면하는 데 성공한다면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이는 이 국가에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내전과 같은 분열을 불러올 것이다.”라고 Trump는 트윗을 남겼다.

Harvard 법학 교수 John Coates가 Newsweek에 밝힌 바와 같이, 해당 트윗은 별도 탄핵의 ‘독립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의회가 헌법 상의 탄핵과 파면 절차를 진행할 경우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은 전형적인 사법 방해라는 것이다.

사법 방해는 Richard Nixon과 Bill Clinton에 대해 제기되었던 탄핵소추안 둘 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항이다. Nixon은 탄핵당하기 전 사임하였다. Clinton은 백악관 인턴 Monica Lewinsky와의 정사를 은폐하기 위해 위증한 혐의로 하원에 의해 탄핵되었으나,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었다.

Trump Lashes Out

Trump가 악담을 늘어 놓다

Trump는 우크라이나와의 통화를 둘러싼 거센 비난여론에 매우 놀랐다. “그건 농담이었다. 그것으로 탄핵을?”이라고 그는 말했다. Trump는 현재 탄핵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Mueller 보고서 결과에 대해 트럼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정말 끝났다.”

그러나, 방어적인 트윗 폭격을 남기지 않고서는 어떤 비판도 견디지 못하는 Trump가 탄핵조사에 참여하는 하원 의원들을 비판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실제로 Trump는 정보위원장 Adam Schiff를반역죄를 들어 트위터 상에서 비난하였다. 반역죄는 전쟁 중 적에게 원조하거나 조력하는 것을 의미하나, Trump는 자신의 정치적 적수를 종종 반역죄라며 비난한다.

내부고발자의 고발에 대해 Trump는 염탐 행위가 처형으로 이어지던 ‘지난 사례들’을 상기시켰다.

“나는 내부고발자에게 정보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것은 스파이에 가깝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UN 주재 미국 대표부 직원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가 똑똑했던 지난 날들에 우리가 무엇을 하곤 했는지 알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스파이나 반역을, 지금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곤 했다.”

Trump는 우익성향에 총기에 찬성하며 이민자를 증오하고 복음주의성향을 가진 자신의 지지기반층을 노리고, 자신의 권력 남용 혐의에 대한 조사가 “국민의 주권, ‘투표권’, 자유, 수정헌법 제2조, 종교, 군대, 국경 장벽, 그리고 미국 시민으로서 가지는 천부인권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라고 트윗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마 가장 불안감을 주는 것은, 헌법 상으로 규정된 두번의 임기 후에도 대통령직을 맡겠다는 Trump의 위협일 것이다. 그는 UN 주재 미국 대표부 직원들과의 비공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또 다른 4년 동안 성공적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한다면 또 다른 4년, 그리고 또 다른 4년도.”

Trump는, “대통령이 행하면 불법이 아니다.”라는 말로 악명 높은 Nixon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심지어는 대통령도 법 위에 있을 수는 없다.

What’s Next?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원 위원회들이 탄핵조사를 위한 소환장을 계속하여 발부함에 따라 백악관은 이를 방해할 것으로 예상된다.

Harvard 법학 교수 Laurence Tribe는 The Guardian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게재하였다. “탄핵조사를 위해 하원 의회가 열리면, 이는 특별한 헌법 상의 힘을 행사하며, 불법한 대통령에 대한 최후의 억제수단 역할을 하게 된다. 때문에, 이는 거의 모든 대통령 특권이나 면책권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은 중대한 범죄나 경범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범법행위를 밝히기 위한 노력들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만으로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세 위원회는 자신들의 일을 마친 후 결과를 하원 법사위원회에 보낼 것이고, 이후 법사위원회가 조사를 주도할 것이다. 법사위원회는 자체 공청회를 열 수 있는데, 이는 Nixon 탄핵조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James Reston Jr.는 The New York Times에 1974년의 “TV로 방송된 하원 법사위원회 [Watergate] 공청회의 위력”에 대한 글을 기고하였다. “그들은 전혀 정치적 분열을 보이지 않고, 대통령의 지독한 위법행위에 품위 있고 적절한 대처를 보였다. 이는 위원회 내 17명의 공화주의자들 중 7명으로 하여금 탄핵소추안 조항 중 적어도 하나에 찬성하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법사위원회는 조사의 범위를 결정할 것이다. 하원 의원 전원에게 탄핵소추안 조항을 제시함에 있어, 법사위원회는 조사의 범위를 우크라이나 게이트로 제한할 수도 있다. 또는 매일 생겨나는 듯한 다른 문제들까지 포함하도록 할 수 있다.

10월 3일, 반항적인 Trump는 중국에 Biden의 조사를 공개적으로 요청하며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Biden 부자의 조사에 착수하여야 한다.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일만큼 나쁘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고는 Trump가 곧 있을 중국과의 무역협상을 언급한 직후 이루어졌으며, Trump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그들을 강제할) 엄청난 힘이 있다.” The New York Times는 Trump와 Barr가 “현재 대통령의 정치적 적수를 비방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우크라이나와 호주, 이탈리아, 그리고 한 보도에 따르면 영국에 요청한 상태”라고 보도하였다.

미국 재무부의 고위관료들이 Trump의 납세 신고 감사와 관련하여 비밀리에 미국 국세청고위 관료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추가 내부고발도 있다. 하원 조사관들은 보수단체들과 적어도 하나의 타국 정부가 Trump의 호텔을 예약하고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Trump의 호의를 얻으려 했다는 주장도 조사하고 있다. 이러한 ‘유령 예약’은 미국의 보수 조항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그리고 Mueller 보고서는 러시아 게이트 수사 동안 있었던 사법 방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원이 예상되는 바와 같이 탄핵소추안을 가결한다면, 탄핵소추안은 상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다수당 대표인 Mitch McConnell은 자신은 법에 따라, 그 문제를 취급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미국 연방대법원장 John Roberts가 상원재판을 주재할 것이다. 그러나 상원은 기각 동의안을 통과시켜 재판 전체를 막을 수도 있다. Clinton 탄핵 소송절차에서민주당 상원의원 Robert Byrd가 발의한 탄핵소추 기각 동의안은 당의 방침과 뒤따른 5주간의 재판에 의해 무산되었다. 공화주의자들은 탄핵소추를 기각시키기에 충분한 수의 상원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갈수록 탄핵 지지율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론에 응하여야 할 것이다.

아직 답이 이루어지지 않은 질문들도 있다. 탄핵 조사의 범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Trump가 탄핵될 것인가? 그렇다면 상원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탄핵은 2020년 선거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현재 스캔들에 연루된 Mike Pompeo와 William Barr, 부통령 Mike Pence도 우크라이나 게이트에서 역할로 인해 탄핵/면직되거나 기소 당할것인가?

Stay tuned

계속해서 주목하라

 

<원 출처: Global Research Center>

Marjorie Cohn

Thomas Jefferson법과대학 명예교수, 미국변호사협회(NLG) 전 협회장, 국제민주변호사협회(IADL) 사무차장, Veterans for Peace 자문위원

월, 2019/10/14- 19:44
0
0

국가 전체의 소멸은 보기 드문 사건인 만큼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된다. 그야말로 국가가 소멸하려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 걸쳐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참패를 겪어야 한다.

그러나 소멸보다는 새롭게 부상하는 주도 집단이 기존의 일반적인 사회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명령을 새로운 체제로 이행시키는 경우가 훨씬 보편적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신속하고 격렬하게 일어나거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건설적이거나 또는 파괴적인 과정이 얽혀 장기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지니며 세계 제1의 압도적 군대 강국이자 여전히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이 위와 같이 전면적인 파멸을 당하는 일은 실제로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현재 미국의 대외 및 대내 정책을 관리하는 소수의 특정 이익집단이 완전히 상이한 유형의 주도 집단으로 대체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주도 집단은 미국인 전체에 최선인 이익을 더 잘 반영하고 전 세계 국가들과 대립하기보다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협력과 지속이 가능하게 작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진행 중이다.

 

America’s Prevailing Order is Fading

미국 지배 체제가 쇠퇴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 및 대내 정책을 주도하는 현 상황의 특정 이익집단은 월가와 워싱턴 위주로 활동하고 있고, 전통적인 은행, 에너지, 제조 독점을 기반으로 하면서 점점 비현실적이고 지속 불가능하며 구태의연한 네트워크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대중 매체, 대규모 로비 활동, 해외 정치적 전복, 국내 정치적 분쟁 등 기존의 특정 이익 집단은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며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수많은 수단을 활용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과 전 세계 국가가 점점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효과적인 대응책 개발을 시작함에 따라 이들 수단의 효과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미국의 특수 이익집단은 ‘러시아’나 ‘중국’의 ‘선전(propaganda)’에 대항하기 위해 일단 겉보기에 엄청난 시간을 쏟지만, 실제 월가와 워싱턴이 행사한 부당한 영향력을 폭로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적국들이 아니라 미국과 동맹국 내부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대안 매체들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있다.

미국 사회의 기존 엘리트 계층과 네트워크가 약해짐에 따라 이를 대체할 대안의 집단과 수단들이 계속해서 강력해지고 있다.

지속 불가능한 해외 군사 작전과 동일선상에 결부되어 지속 불가능한 사회경제 및 정치 모델은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와 언론 방식과 더불어서 평범한 관찰자에게도 현재 미국 내 지배 체제가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여진다.

 

America’s Elite Face Challenges from Within as Well as From Abroad

미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은 국내와 해외로부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오랫동안 자리한 미국의 독점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중국 기업에 대한 내용은 세계 언론에서 점차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다. 미국이 주도한 무의미한 미중(美中) 무역 전쟁을 촉발한 것은 사실 이런 상황의 변화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미국 내 기성 엘리트 계층의 쇠퇴만 부각시킬 뿐 그들이 지닌 본질적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화웨이와 같은 기업은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제재와 노력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미국 기업들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해 공작이 있었음에도 화웨이는 견실한 기반을 갖춘 사업과 경제 기초여건을 토대로 갖추고 있었고, 미국 기업들은 경쟁 부재라는 초기 이점을 가졌지만 기초여건 구축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기성 엘리트는 중국 기업 외의 여러 도전자들과도 싸워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파괴적 기술을 보유한 몇 회사는 미국 내에서 성장하면서 대외 경쟁뿐 아니라 미국 국내에 기반을 둔 견고한 독점 체계도 도전하고 있다.

전기자동차 제조사 테슬라(Tesla)가 완벽한 예시이다. 테슬라의 놀라운 혁신 속도, 세간의 이목을 끄는 성공,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사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다른 무엇보다 미국 자동차 산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 또한 한 세기에 걸쳐 미국이 도입하고 전 세계를 장악해온 석유 중심의 에너지 모델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 자동차제조 독점업체는 진정한 소비자 가치와 혁신을 대신할 수 있는 의도된 관행과 구식의 마케팅 술수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수십 년을 투자했다. 이들 산업은 단순히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고 매해 이윤을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자동차제조’는 단지 돈과 구매 영향력을 축적하는 수단이 되었다.

반면에 수 년간 테슬라는 사업과 사회정치적 영향 측면에서 모두 성장해왔다. 미국 자동차제조 독점업체는 테슬라의 표면적인 매력을 흉내 내려고 시도했지만, 신설 회사의 성공을 주도한 본질을 이해하거나 복사하는데 실패했다.

미국 엘리트 계층이 해외의 화웨이와 같은 경쟁사를 상대할 때 직접적인 경쟁보다 ‘더러운 술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전략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유사한 발식으로 ‘미국 내의 테슬라와 같이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한 회사에게 ‘더러운 술책’을 사용했다. 가짜 노조가 테슬라의 미국 공장을 곤란하게 하려고 했던 사건이 한 예시이다.

미국의 신생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 X’는 오랜 기간 자리한 미국독점업체에 직접적으로 도전한 (그리고 위협하는) 미국계 경쟁사의 또 다른 예시이다. 이 경우, ‘스페이스 X’는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 보잉(Boeing), 노스럽 그루먼(Northrop Grumman)과 같은 우주 독점업체와 맞섰다.

‘스페이스 X’는 놀라운 속도로 우주 항공혁신을 이끌면서, 동시에 우주 여행의 전반적인 비용을 절감시키고 있다. ‘스페이스 X’의 인상적인 비용 절감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로비 네트워크를 형성한 록히드, 보잉, 노스럽과 같은 기존의 항공 독점업체는 ‘스페이스 X’ 고객들의 (미국 정부를 포함) 로켓 여행 탑승 구매를 저지시키지 못했다.

로비와 정치 게임을 통한 이윤 유지에 지나치게 의존 해온 거만한 독점업체는 실제 경쟁이 도래하여 경쟁업체와 직면했을 때 거대한 조직을 재정비할 대책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정책을 이끄는 지배적인 체제는 제대로 손을 쓸 수 없는 추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경쟁을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현존의 지배 체제를 대체하는 세력은 미국 기존의 권력과 영향력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렛대로 활용하여 미래로 향하는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갖는다. 또한, 미래로 나아가면서 미국과 미국민 및 미국과 교류하는 세계 국가 모두에게 근본적인 영향력을 지닐 것이다.

 

America’s New Order May Seek Genuine Competition and Collaboration

미국의 새로운 질서는 진정한 경쟁과 협력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테슬라와 ‘스페이스 X’는 중요한 예시지만, 미국 내에서 점차 분명해지고 있는 진행중인 변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예는 결코 아니다. 현재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 장악하고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는 새로운 혁신과 기업들이 등장하고 하여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의 뿌리 깊은 기업언론을 겨냥한 대안 매체들부터 미국의 대규모 농산물 독점업체들을 위협하는 지역 유기농 농부들의 고조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이미 실질적인 전환 사례가 많이 발생해 왔다. 미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국제적 수준에서 투자하거나 기여할 수 있다.

새로운 미국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신호로는 테슬라와 같이 기존 체제를 파괴한 기업이 다른 국가와의 협력을 꺼려하지 않고 독점을 위해 세계적 규모의 네트워크 망을 구성하기 보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업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 한 예로 테슬라의 대규모 기가팩토리는 미국이 아닌 중국 상하이에서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 공장을 설립한 이유는 미국이 오로지 정치적이고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이 미국 국내에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도록 차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 및 중국과 같은 국가 사이에는 명백하게 적대감이 존재하지만, 미국인들의 일반여론에 따르면 현존 질서의 표적이 된 모든 국가들과도 동등한 조건에서 공정하게 사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단순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적대감이 남아 있다면 이것은 국가 혹은 국민으로서의 일반적인 미국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와 미국 사이의 협력 및 건설적인 경쟁을 저해하는 특정 이익집단에 의한 것이다.

머지 않은 중간 미래까지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지속되면서 미국의 특정 이익집단이 권력을 손에 넣어 유지하려 하고, 불가피한 쇠퇴 및 변동과 맞서 싸우며, 외부 세계와 미국 내부의 경쟁자와 싸우려고 애쓸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기보다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고 건설적으로 경쟁하면서 자신을 다극화 세계의 건설적인 일원으로 여기는 희망적인 미래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관계에 있는 국가들과 민족은 미국과 불필요하고 광범위한 적대행위를 삼가고, 대신에 현재 월가와 워싱턴에서 행해지는 활동을 끈기 있게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폭력적인 관행에 근거하여 진행 중인 쇠퇴에 책임이 있는 미국 내 깊게 자리한 이익집단과 진정한 경쟁과 타협을 추구하는 한편, 미국의 미래를 대표하는 미국 새로운 주도집단을 구분하여 후자의 이익집단과 유대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편, 모스크바, 베이징 그리고 심지어 많은 신흥 및 개발도상국의 대외정책은 지나치게 소극적이거나 유화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여러 국가들의 중심역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미국에 일어나는 변화를 잘 인지하고 있으며, 미국 제국의 몰락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미국 기존의 권력 지렛대를 활용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대체 세력과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울슨 군나르(Ulson Gunnar)

뉴욕 거주 지정학 분석가이자 온라인 잡지 ‘뉴이스턴아웃룩’ 의 기자

출처 : Global Research, December 10, 2019

목, 2020/01/02- 21:33
2
0

왜 자연과 과학의 재정의가 필요한가

나는 자연과 과학이 이해되는 방식의 혁명적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혹은 철학 수업이 아니다. 이것은 정책결정, 정책의 프레임 구축, 지구의 미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마련에 필요한 설명이다. 현대적 가정의 바깥에서 “자연”과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문명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지구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 “과학”은 이런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인류는 자동차에서부터 화력발전소, 핵무기에 이르는 많은 기술을 통해 지구의 미래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런 기술은 폭발적인 과학지식을 통해 발명되고 실용화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바꿈으로써만 우리는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할 때만 새롭고 진정한 생태문명을 향해 진전하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큰 그림”의 문제이지만 추상적이지도, 우리와 무관하지도 않다. 정부, 교육, 산업, NGO 등이 정책과 우선순위를 바꾸려면, 현재를 넘어 우리가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목표를 향한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정책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급속도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현대(지난 50년 정도) 이전까지 아주 명백하게 보였던 근본적 가정을 의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생태문명연구소는 전 세계에 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조직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이미 기후위기와 그것이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재해석을 내릴 때만, 인류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사실상 생태계 전체가 인간의 통제에 들어간 후현대에 자연과 과학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자연과 과학

오늘날 자연세계에 가해진 피해의 많은 부분은 자연이 “몰가치하다”, 즉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현대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몰가치하다고 여겨진 적은 없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도 그랬고 동양도 마찬가지다. 만약 자연이 몰가치하다면, 과학도 몰가치하다.

서양철학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데이터와 패턴뿐만 아니라 자연의 기본원리(archē)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과학은 실증적이기보다 철학적이었다. 심지어 서양역사상 최초의 실증주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배우는 목적은 인간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이었다. 이 초기 과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신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대신 위대한 유교사상가들처럼 가치의 패턴이 이미 자연 속에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나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00년경 현대가 시작되기 직전, 만물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서양철학에서 정점에 달했다. 유럽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데는 각각의 이유가 있고 모든 것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적절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전체로서의 자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신의 선함을 드러냈으며, 모든 생명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여겼다.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과학은 일종의 자연신학, 즉 신의 과학이었다. 자연신학에서 신은 부분적으로 세계를 통해 이해됐으며, 세계는 신을 통해 온전히 이해됐다.

 

과학과 현대 세계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시기인 이른바 현대를 끝내고 있다. 현대의 기원은 약 400년전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인간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라고 가르쳤다. 동물은 “단지 기계”이며 자연은 인간의 문명과 사고의 확장을 위한 배경에 그쳤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과학이 그저 인간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지구 지배를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이런 자연의 모습을 감안할 때 데카르트가 선택한 과학이 어떤 종류인지 상상할 수 있다. 바로 물리학이다. 동시대에 토마스 홉스가 주장한 것처럼 만물이 “움직이는 물질”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운동의 방정식이다. 실제로 토마스 홉스가 이런 말을 한 뒤 40년이 지나기 전에 뉴턴이 운동의 방정식을 제시했다.

이제 이 글의 핵심적 생각에 이르렀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자연에 대한 연구, 즉 우리가 선호하는 과학의 종류를 결정한다. 즉, 자연이 과학을 결정한다. 만약 자연이 생명체를 포함한다면, 자연은 생명과학을 이용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연이 실재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자연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 인류학, 역사, 문학, 그리고 예술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근대가 탄생할 때 선구적인 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기본적으로 원자, 나중에는 부원자적 입자가 된 물질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전 세계로 수출한 세계관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생각을 퍼트리기 쉬웠던 이유가 있다. 자연을 단지 객체로 바꿔놓는 게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관이 배와 비행기, 총과 핵폭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 전세계 지도자들은 이런 세계관이 생산한 기술에 대한 대가로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상충하는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런 기술들이 이윤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주주들과 “공동선”을 위해 조금도 헌신하지 않는 다국적 기업들을 양산한다는 점이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력을 잃으니까!) 국내총생산(GDP)을 기반으로 성공을 측정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통제에 저항하는 국가들은 가난에 허덕이다가 국민들의 반란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작은 거라도 원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면 설사 기후변화를 일으킬지라도 국민들이 원하는 단기적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훈은 분명하다. 자연은 과학을 결정하고, 과학은 기술을 결정하며, 기술은 정치와 경제적 전지구화의 형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과학과 자연 사이에 형성된 역학의 나머지 절반이 있다. 자연이 과학을 결정하는 게 맞지만, 과학도 자연을 결정한다. 즉, 우리가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가정들은 결국 우리가 연구하는 자연을 정의하게 된다.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썼던 오래된 표현인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고 싶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과학에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과학도로서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생존에 결 정적임을 강조하고 싶다. 점점 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는 실험가들은 세계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를 얻고, 과학자들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경험적 일반화를 도출하고 자연의 기본법칙을 공식화한다. 이런 지식 없이는 기후파괴의 실제 규모를 알지 못했을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하는 방법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400년 동안 과학은 현대적 세계관의 시종으로 이용됐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과학과 가치 사이에 더 견고한 장벽을 쌓기 위해 투쟁해왔다. 과학자들은 “문화적 전통과 미신에 구속되면 과학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래된 미신을 없애고 그것을 (과학이라는) 새로운 미신으로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 지식을 수용해야 한다.

가장 최악은 현대적 세계관이 과학은 몰가치적이어야 한다, 즉 모든 가치를 넘어 존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지난 400년 동안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우위가 전통적 가치를 현대성의 세계관과 가치로 대체하는 비용을 치렀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부인한다. 예를 들어 객관적이고 입증 가능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정량화되고 통제되고 사용될 때만 정확하게 이해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다, 물질 이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생기, 의식, 예술과 종교, 선악-은 물질/에너지가 진화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방식일 뿐이다 등의 주장이 우위를 얻었다. 어느 신경학자가 내게 말했듯, “전선과 화학물질, 그게 우리의 전부이다.”

어떤 실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자연을 인간이 제약 없이 사용하는 자원의 집합으로 만든 게 그런 경우다. 결과적으로 깨끗한 공기, 파란 하늘, 마실 수 있는 물, 건강한 토양이 손상됐다. 기업농이 전통적인 농장을 대체했고, 교통체증은 세계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자전거와 보행자들을 대체했으며, 알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연결하고 보살피고 보호하려는 바람을 대체했다. 대학과 기업은 가치중립적인 곳이므로 학생과 노동자들은 가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됐다. 현대성은 식민권력의 확장과 함께 지구 전체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를 전파했다.

 

몰가치의 과학과 몰가치의 자연을 넘어

과학이 승리를 선언한 이후 수세기 동안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독립성에 기초한 실증과학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과학, 기술, 산업이 “몰가치적”이라는 생각은 지구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종을 위험에 빠트렸다. 자연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대양의 산성화, 토양이 죽은 농경지, 사막의 확장, 지하수면의 감소, 급속한 지구온난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현대과학이 지식과 가치를 분리하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몰아내고, 지혜의 단련을 끝없는 소비의 즐거움으로 대체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지구 생태계가 붕괴지경에 이르렀음을 발견했다.

좋은 소식은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성이 붕괴하면서 후현대가 등장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새로운 대안은 사람들이 땅, 공동체, 그들의 거처를 구성하는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돼 살아갔던 근대 이전시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성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면서 우리는 전근대의 선조들과 원주민들의 가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물론 전근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이것은 일종의 낭만주의이다-지구와 더불어 사는 새롭고 지속 가능한 방식을 창조하는데 과거의 중요한 요소들을 혼합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다. 첫째, 과학은 자연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연구로 해석하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인간사회도 수많은 생태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양한 생태계의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새로운 생태과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둘째, 근대성을 벗어나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만큼 과거의 잔재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탄생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생태적 사고와 문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하여

“생태문명”은 네 층위의 조화가 이뤄진 후현대적 비전인데, 이는 사회, 과학, 전통적 가치, 생태적 사고를 규정하는 방식들 사이의 조화를 가리킨다. 이는 강력한 비전이다.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문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뜻한다. 문명은 개별적인 법, 정치, 기술 이상이다. 문명이란 한 집단의 전체 생활방식, 지구화 시대에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이 공유한 가치와 열망을 가리켜 영어로 “에토스”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 집단의 에토스를 보존하는 것은 오래된 풍습과 가장 깊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단순히 개별적 정책들, 즉 정부가 원자력의 사용을 승인할지 말지, 누가 자동차를 소유할지, 혹은 사회가 어떻게 농업을 조직할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생태문명이란 용어는 환경이란 용어를 확장시켜 한 집단의 모든 생활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생태농업은 기업농이 해온 고도의 석유의존 관행을 줄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지속 가능한 방식의 농업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생태경제학은 단순한 GDP를 넘어 경제적 성공을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의 복지와 화합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의 다른 분야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새로운 네 층위의 비전에서 두 번째는 과학이다. 현대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 과학과 기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복잡한 문제를 가진 현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원시적 농업이나 토착민의 생활방식, 즉 삶이 보다 단순하고 과학이나 기술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생태문명 건설이라는 목표는 과거로의 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태문명은 과학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를 계승하므로 전근대가 아니라 후현대라는 목표를 갖는다. 과학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과학을 통합시킨다. 생태문명은 탈과학(post-scientific)이 아니라 현대가 가진 해로운 가정들에서 벗어나 자연과 과학을 보다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과거의 과학은 사회와 지구를 위해 봉사하는 시종이었으나 지금의 과학은 주인이 되어 인간과 문화를 노예로 만들었다. 이런 추세를 역전시키려면, 공동선을 위한 과학에 재정지원을 하는 등 사회와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후현대의 우선순위에 봉사하는 과학의 인도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 개발될 수 있다.

네 층위의 비전 중 세 번째는 전통문화의 가치이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종교라고 지칭하는 믿음과 실천의 집합인데 종교라는 말은 동양보다는 서구의 문화적 맥락에 좀더 편안하게 맞는다. 만약 우리가 종교라는 용어를 쓴다면, 후현대 종교만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역자주: 불교나 힌두교는 서구인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체계화하기 이전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체계화, 권력화된 서구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인해 수많은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됐다.)

후현대 종교는 현대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각 문명이 가진 오랜 지혜를 돌아보며 우리가 사는 후현대 세계에 각자의 전통을 적용한다.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대신, 상대방의 문화적 전통이 가진 지혜를 배우려고 한다. 후현대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실천할 수 있다. 믿음과 실천이 사회에 유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생태문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종교적 헌신 없이도 환경이라는 최우선의 가치를 위해 깊이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동물의 합일은 여전히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의 심오한 표현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유교는 상반된 힘과 이해들, 즉 남성과 여성, 통치자와 백성,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 지구와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라는 요구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높은 가치일 것이다. 도교는 차이간의 균형을 강조하는 또 다른 모델을 제공한다. 균형이란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사회의 각 부분들, 혹은 과학과 가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할 것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힘으로 억누를 때 불균형이 발생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군사강국과 약소국가, 북반구와 남반구가 그런 사례들이다.

생태문명의 네 층위의 비전 가운데 마지막은 생태적 사고, 즉 환경 전체를 고려하는 과학, 철학, 정책이다. 생태학은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건강한 생태계는 그 생태계의 모든 유기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환경이 균형에서 벗어나면 생태과학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행동지침을 제공한다. 정책이 확고한 생태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그 정책은 모든 구성 요소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더라도 바로 회복되도록 사회를 구조화할 것이다.

 

간단한 예: 과학 정책

한국과 미국 같은 국가의 정부는 과학정책을 구상하고, (미국의 경우) 국립과학재단(NSF), 국립보건원(NIH) 같은 과학단체들에 기금을 할당한다. 이런 정부출연기관들은 지원기준을 정하고, 이들의 기금 지원은 해당 국가의 과학연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금 지원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할까? 주요한 기금은 대개 매우 전문화된 프로젝트에 투입되는데, 그 이유는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의 개입도 차단되는데, 그 이유는 “인류의 장기적 이익”과 같은 목표는 5년 이내의 지원으로는 정확히 측정되거나 시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체적 기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떤 “가치”가 기금 수혜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 우선 정치적 가치인데 과학계에서는 기금을 받기 위한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다음은 기금 지원기관의 특수한 가치인데, 이 기관들은 현재 과학적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확성과 일관성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3년 내지 5년의 수혜기간 내에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는지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가치들이 지원기준이 되면 결국 우리와 자연세계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이론과 기술을 지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기술과 사회를 조직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연구하고 증진시키는 과학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비전이 있는 장기 연구를 지원하는 일이 어렵기는 해도 NGO나 민간기부자들을 통해 약간의 지원이 가능하다. 시민들이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지원을 요구한다면, 정부도 정책 변화로 응답할 것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

우리는 자연과 과학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지구는 위기에 처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연을 인간의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자원을 어떻게 측정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할지 결정하는 수단이 됐다.

나는 건강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구를 보호하려면 여러 과학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만 하면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사회질서가 어떤 것인지, 물리적∙생물학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엄격한 자연과학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확신하는 후현대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깊은 상호연관성을 인정하면서 생태과학과의 대화 속에서 후현대적 자연관을 세워나갈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전근대 시대에 인간은 자연과 가치를 통합할 수 있었다. 현대과학은 인간과 생태의 심오한 가치를 저버린 대가로 성공했으나 불균형의 과학이 됐다. 후현대 과학의 임무는 높은 수준의 현대과학을 과학분야 상호간의 관계, 지구와의 온전한 관계라는 가치 아래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생태연구는 지구의 미래를 담보하려면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한지 밝혔다.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은 사람들을 각자의 환경과 보다 가깝게 통합시키는 수단으로서 각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기를 권한다.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생태학이 함께 현재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더니즘의 힘은 여전히 우세하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쉽게 통제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많은 정부들은 계속해서 지구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다. 많은 소비자들은 사회의 이익보다 자신의 안락과 욕구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장기적 해결책보다 쉬운 단기적 대응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구의 미래는 위태롭다. 우리가 계속 상위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개인들은 계속 자신에게 가장 이익을 주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가치를 오직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정의하는 것은 지구의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대규모 멸종을 낳으며 지구상 생명의 정교한 균형을 손상시킨다. 새로운 생태문명은 자연 본연의 가치라는 기반 위에서, 그리고 그 가치가 지구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 기능할 때만 이뤄질 것이다.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교수, 생태문명연구소 대표

월, 2020/01/06- 22:43
2
0

조국 대전이 모든 걸 흡수하는 와중에 정말 중요한 뉴스가 나왔다. 부동산 양도차익 등 불로소득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미디어의 보도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유승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2017년 귀속 양도소득과 금융소득’ 자료를 국세청에서 받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부동산 양도차익으로 인한 소득이 한 해 84조8천억원, 주식 양도차익이 17조4천억원, 배당 및 이자소득 등 금융소득은 33조4천억원이었다고 한다([단독] 불로소득 ‘136조’ 돈이 돈을 불렸다).

<출처: 한겨레>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부동산 양도차익 등 불로소득 규모는 135조6천억원인데 이는 2016년(112조 7천억원)보다 20% 증가한 액수다. 불로소득의 규모도 천문학적이지만 이 불로소득이 극소수에게 집중된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하다. 배당소득의 경우 2017년 전체 배당소득이 19조6천억원에 달했는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9,313명이 8조9387억원(전체의 45.7%)을, 상위 10%가 18조3740억원(전체의 93.9%)을 각각 차지했다. 이자소득도 상황은 비슷하다. 2017년 전체 이자소득은 13조8천억원인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5만2435명이 2조5331억원을(전체의 18.3%), 상위 10%에 해당하는 524만3532명이 12조5654억원(전체의 90.8%)을 각각 차지했다. 부동산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신고액수를 기준으로 줄 세웠을 때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동산 거래로 인한 양도소득이 전체 소득 84조7947억원의 절반이 넘는 53조7913억원(63.4%)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말이다.

배당소득, 이자소득, 부동산양도소득 등의 불로소득 편중도와 근로소득을 비교해 보면 불로소득의 양극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근로소득의 경우 상위 0.1% 초고소득층(1만8005명)이 전체 근로소득(633조6천억원)의 2.3%를 차지하는데, 이는 자산소득의 불평등도에 견주면 귀여울 정도다.

 

부동산불로소득 환수가 가장 선행되어야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적이다. 불로소득이 창궐하고 시장참여자들이 불로소득을 추구문하면 자산양극화와 소득양극화가 심화되고, 자원배분이 왜곡되며, 기업가 정신과 근로의욕이 소멸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저해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암종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만사를 제쳐두고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에 나서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에 나설 때 무엇보다 먼저 손을 대야 하는 부문은 단연 부동산 불로소득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배당, 이자 등의 불로소득과 비교불가일만큼 규모가 크며(국세청 자료는 양도차익만 집계한 것이지만, 임대소득과 귀속임대소득까지 포함하면 GDP의 30%수준이다) 불로소득 중에서도 가장 악성의 불로소득이기 때문이다. 흔히 불로소득을 다 같은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불로소득도 악성의 정도가 다르다.

불로소득의 악성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을 1.기여 및 폐단의 정도, 2.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의 공평성, 3. 무책손실의 정도 이렇게 세 가지로 제시해보겠다. 주식과 부동산을 비교해 보자. 주식은 기업에 자금을 직접 제공하는 기여가 있으며, 비교적 금액이 크지 않아 주식투자로 인해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공평하고, 주식투자를 하지 않으면 손실을 볼 가능성이 없다. 반면 부동산은 사회경제적으로 폐단만 있으며, 금액이 너무 커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아도 가격이 오르면 엄청난 손실을 본다.

모든 일에는 선후와 완급과 경중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노력소득은 보장하고 불로소득을 환수해야 한다. 불로소득의 환수 순위는 부동산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조국 대전에서 승리하고 검찰개혁에 성공하더라도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에 지금처럼 미온적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앞날은 어두울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도 암담할 것이다.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의 성공여부에 대한민국의 앞날이 걸려 있다.

목, 2019/10/10- 23:57
2
0

4년 전 파리에서 행해진 기후 변화 협약이 이번에는 12월 1일부터 2주간 마드리드에서 이루어 졌다 (불행하게도 모임은 회기를 연장하면서 강제성 있는 합의를 도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심각성의 문제만 제기한 채, 내년에 있을 영국의 글래스고우 모임으로 강제성이라는 임무를 순연시켰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세계는 비극적인 기후변화를 막을 시간이 부족하다. 유엔 사무총장은 산업화 이전 평균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2도보다 낮게 유지하고 이상적으로 1.5도 이하로 제한하는 2015 파리협약을 준수하기 위한 노력이 “전적으로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안토니오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스페인에서 열린 배출권 거래 협상을 위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COP25)에 앞서 지구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점 (환경 복원이 불가능한 시점- tipping point)”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화석 연료 보조금을 지속하고 탄소세 부과를 거부하는 정치인들을 비난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아마도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린 지구 온난화 상태가 현재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기후적으로 가망이 없는 상태인지 추측하는 연구 결과를 읽었을 것이다. 기후 ‘티핑포인트’ 9 종류의 분석을 통해 과학자들은 현재 ‘행성 비상사태’에 처해 있고, 아마도 온실지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역사적으로 빙하 격감과 같은 일부 기후 위험은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5도 상승할 경우 발생한다고 예측되어 왔지만, 이후 모델을 통해 해당 기온의 폭을 1도에서 2도 사이로 낮췄다. 심각하게도, 연구진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티핑 포인트가 상호작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연쇄 피해를 일으킬 조짐을 보인다고 경고한다.

독일 및 덴마크 학자들과 협업한 티모시 렌턴(Timothy Lenton) 영국 엑시터 대학 지구시스템 연구소 소장은 “악영향을 끼치는 급변 연쇄 작용을 막을 수 없다면 이는 문명에 실제적인 위협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연구진은 위기 관리 측면에서 평균 기온 상승폭을 섭씨 1.5도 이하로 유지하기 위한 즉각적인 정치적, 경제적 행동을 촉구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 (IPCC)에서는 지구 기후 시스템의 ‘대규모 불연속’을 티핑 포인트로 정의했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요소에는 북극해 빙하와 아마존 열대 우림과 같이 익숙한 상징이 포함된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요소로는 열대 지방의 따뜻한 한 물을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심해의 차가운 물을 남쪽으로 가져오는 대서양 자오선 역전순환류인 ‘컨베이어 벨트’와 북위도를 감싸며 때로는 영구 동토층 위에 자리해 광활한 탄소 저장소 역할을 하는 상록수 숲인 타이가가 있다.

실제로 티핑 포인트는 작은 변화로도 되돌릴 수 없는 급격한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임계점을 의미한다. 연구진은 세계 기후의 일부 요소는 기타 요소보다 임계점에 더 가까이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그린란드 빙하는 임계점에 거의 도달했을지도 모르며 빙하는 티핑 포인트가 지나면 가차없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북극해 빙하 감소도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있다. 빙하는 심해보다 빛을 더 많이 반사하므로, 빙하가 녹으면 열 흡수율이 증가함에 따라 온난화가 가속된다.

두 현상 모두 북대서양에 더 많은 담수를 유입시키고 컨베이어 벨트를 늦춤으로써 이미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조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속도가 늦어진 순환이 서아프리카의 몬순을 흩뜨려서 아프리카 사헬 지역의 가뭄을 촉발할 수 있다. 이후의 도미노 효과로는 남극 대륙의 빙하 손실을 가속화하는 남극해의 기온 상승이 있다. 기후 도미노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 위험성은 두 배로 증가한다. 지속적인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지구는 이미 지하에 저장된 탄소를 배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영구 동토층으로 부터의 배출을 통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100기가톤(1Gt = 10억톤)을 채울 수 있다. 이는 3년 동안의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양에 해당한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2018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3.1Gt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종말론적 분석을 완전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피어스 포스터(Piers Forster)리즈 대학 기후변화학 교수이자 IPCC 저자는 “1.5C의 온난화에서 그린란드의 빙하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녹아내리더라도 수 세기가 걸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티핑 포인트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과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포스터 교수는 탈탄소를 위한 행동의 지연은 “우리 자신을 비극적인 미래로 몰고 나갈 것” 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세계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위험성에 대처하고 온난화에 적응하기 위해 적절하게 자금을 운용해야 한다. 이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네트 제로(net zero)로 만들기 위해 사회 내 재력과 능력을 활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앙이 닫쳐 오더라도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접근의 관점은 다르겠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안자나 야후자(Anjana Ahuja)

 FT 과학 평론가

목, 2020/01/09- 20:04
5
0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붕괴에 대해 흔히 맥이 빠지는 기사 헤드라인 너머의 현실에서는 다행히 각국 정부들과 기업들이 세계무역기구(WTO)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 상소 기구의 기능 마비와 같은 부정적인 현안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지난 2년간의 발전이 이루어진 실제 분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들이 나서서 주도하는 한, 노력을 적절하게 이해함으로써 더 광범위하게 개혁하기 위한 건설적인 로드맵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는 위기 의식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생산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년 간, WTO 회원국 다수는 21세기에 무역 규범을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전자 상거래 협상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국가가 전자 상거래 협상에 참여하고 있고, 2019년 12월 10일에는 WTO 회원국들이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원칙(moratorium)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회원국들은 ‘규율화 된’ 수산업과 농업 보조금과 같이 전통적으로 다루기 힘든 쟁점에 대해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합의와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국내 및 국경을 넘어 투자와 서비스 제공을 촉진하고, 여성의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며 중소기업이 시장에 더 잘 진입하여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서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다고 해서 상황을 모른 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제력이 변화하고, 기후위기의 난제에 대처해야 하며, 기술 발전이 상업에 지장을 주고, 시민들이 점점 더 포괄적인 형태로 모두를 위할 수 있는 세계화를 요구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핵심 중 일부가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무역은 사람과 지구를 위해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전 세계 각국 정부는 이번 위기를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 현재 무역 분쟁이 ‘법의 지배’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상소 기구의 위기에서 야기한 시급한 과제를 넘어, 현재 정치의 역동성은 무역 시스템을 극적으로 개선할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

WTO를 향해 집중된 관심은 WTO 조직 구조와 책임 체제를 강화하여 시스템 내 신뢰를 구축하기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및 사업 단체의 참여 증진, WTO 과정 및 협상의 투명성 증대, ‘특별하지만 차등을 두는 방안’을 위한 증거 기반의 기준 확립은 시스템 신뢰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국의 정부는 현 시점에 기존의 WTO 규정들을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1990년대 초에 제정된 무역 규범은 갈수록 더 서비스 및 데이터의 흐름으로 특징되며 디지털 기술 및 글로벌 가치사슬로 가능해진 21세기 무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정부단위에서 기후위기, 지속가능성, 불평등과 같이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을 다룰 권한을 WTO에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독창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WTO가 세계화뿐 아니라 불만의 원인을 다루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만큼 WTO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특히 아시아 태평양의 몇 정부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나서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가 WTO의 세 기능(감시, 분쟁 해결, 협상)을 개혁하고 현대화하자고 제의했는데, 이는 정확히 국제상공회의소(International of Chamber of Commerce)가 요구해온 바이다. 호주의 복수국간 WTO 전자상거래 협상 촉진은 21세기 무역의 현실을 다루기 위해 규범 제정을 통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시이다. WTO 상소 기구의 교착 상태를 타파하기 위한 뉴질랜드의 핵심적인 중재 역할은 공로와 공감을 모두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2019년 12월 10일, WTO의 60 회원국이 규범에 근거한 다자간 무역 시스템에서 WTO의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역할을 재차 시인한 점은 고무적이다.

명백하게 정부 단위뿐 아니라 기업에서도 더 많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초소형 기업, 중소기업, 대기업을 포함한 기업체들은 지난 25년 동안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누려왔다. 세계 무역 시스템의 주요 사용자이자 수혜자인 기업은 WTO의 지지자가 되어 개혁 과정에 건설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리더십은 무역이 일자리, 환경,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정당하게 불평하는 일이 보호무역주의와 후퇴를 요구하며 역효과를 낳는 방향으로 변모되지 않도록 요구한다. 대신에 정부, 기업, 시민 사회는 무역 시스템이 사람들과 이 세상을 위해 작용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WTO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시기가 도래했다.

 

John WH Denton AO

파리에서 국제 상공 회의소 (ICC)의 사무처장

Damien Bruckard

ICC의 (무역 및 투자 분야)부회장

금, 2020/01/10- 19:42
5
0

편집자 주:

다른백년은 그 동안 워싱턴 프레임이라는 관점에서 홍콩사태를 보도해온 국내 언론의 한계를 벗어나, 독일에서 연구중인 중국본토의 젊은 학자의 시각과 미국 내 진보적인 지식의 견해를 소개한 데 이어서, 마지막으로 제3세계 정치경제 분석의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호주 국립대 (ANU)의 동아시아포럼(EAF) 편집진의 입장을 번역하여 독자분들께 알리고자 한다.


중국과의 범죄인 인도 법안이 제의된 후 홍콩에서 평화적으로 시위가 시작된 지 6개월이 넘었다. 이후 전개된 폭력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면서 상황이 계속 악화하고 있다.

그 동안 시위자들과 당국의 격렬한 대응에 의해 홍콩 도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마비되었다. 폭력, 죽음, 대규모 체포와 잘못된 정보가 잇달았다. 경기 침체가 예상보다 심각해지면서, 호텔의 반 이상이 텅텅 비었고, 대학이 포위되었으며 소매업이 심각하게 타격을 받았고 일상적으로 교통이 마비되면서 경제가 위축하고 있다. 그러나 범민주 진영이 11월 말 지역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시위 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부각시켰다.

시위운동에는 지휘하는 중심적 지도자가 없고, 다만 범죄인 인도 법안을 철회하라는 초기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구속된 시위대의 사면과 보통선거권을 포함한 나머지 네 가지 요구 사항은 행정부와 절충하기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보통선거권 개혁 과정에는 어려운 난관이 있으며, 실은 2014년에 이미 당시 야당 의원들이 변화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EAF 칼럼리스트 케리 브라운(Kerry Brown)은 ‘홍콩의 주민 대부분은 안전에 필요한 비용과 행정부의 대책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상황임에도 시위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며 홍콩의 상황을 요약했다. 시위 및 당국의 대응이 격화하면서 ‘때론 베이징 정치 지도자들조차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지 모르는 것 같다’고 전했다.

중국은 상당한 국제적인 비난과 반발을 야기할 수 있는 직접적인 개입을 기피해왔다. 중국이 시위대에게 물러설 일은 없겠지만, 시위에 개입하게 되면 홍콩 내 혼란과 국제적으로 엄청난 결과가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국경 너머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면서도 사태를 지켜 보아야만 했다.

취약한 상황이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브라운이 설명하듯이, ‘2019년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2020년으로 사안들을 연기했을 뿐이다. 위기가 더 오래 이어질수록 홍콩은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홍콩 주민의 복지와 동아시아 번영 및 안보에 있어 홍콩 도시가 지니는 중요성이 위기에 봉착했다. 잘 알려진 제도를 갖추고 있는 홍콩은 서쪽으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며 특별하고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중국에게 있어서 홍콩은 주권이라는 주제를 넘어서 기업들과 정치인들이 (서구 사회에 대한) 전방의 위치에서 기능적으로 제도 및 재정 기법을 배우면서 본토 경제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경험적 교훈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가 오래 지속될수록 중국과 세계 다른 국가가 홍콩을 특별하게 여기는 요소가 줄어든다.

미국 의회가 11월 홍콩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중국과 미국 간의 진행되는 심각한 패권과 전략적 경쟁이 더욱 복잡해졌다. 2019년 한해 전세계적으로 대규모 시위운동과 대응으로 많은 도시들이 마비되었지만 그 어떤 사건도 홍콩처럼 두 초강대국의 전략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지는 않았다.

미국은 배후에서 홍콩 문제에 직접 관여했다. 그렇지만 다른 국가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여자 모두가 패배하는 (lose-lose) 위기 상황에 자칫 연루되면 잃을 것이 많다. 지난 10월 팀 서머스(Tim Summers)는 다른 국가들이 워싱턴, 런던, 캔버라 라는 배후 도시의 시각이 아니라 홍콩 사회 전반의 내적 견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홍콩 정부를 지지하고 홍콩과 베이징의 이해 관계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폭력사태는 반드시 멈춰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홍콩 사회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시위와 혼란이 멈추기를 바라며 시위대는 자신들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기를 원한다. 양측이 체면을 세우면서도 홍콩 사회를 재건할 수 있는 타협안이 필요할 것이다.

홍콩과 중국은 홍콩 헌법에 명시된 영국과의 50년 합의가 만료되는 2047년까지 ‘한 국가-두 체제’로 운영된다. 2047년 이후에 벌어질 일은 명확하지 않고, 그 동안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한 지 22년이 지난 현재, 특히 중국에는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

중국은 2047년에 다른 국가가 되어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번영 및 고소득의 꿈을 이뤄낼지 성공의 여부는 아마도 경제와 정치 제도 개혁의 가능성에 달려있을 것이다. 중국이 상기 개혁이 성공하면 본토와의 관계에 대한 홍콩 국민들의 사고방식 역시 크게 변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포럼(EAF) 편집위원회

호주국립대학교(ANU)

월, 2020/01/13- 19:26
1
0

기후위기에 따른 생태교육의 시급성

최근 수년간 급격한 기후변화와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인류는 불안한 마음으로 디스토피아가 다가옴을 지켜보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과학기술 낙관주의에 빠져있다. 현 인류가 처한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극적인 처방은 과연 있는 것인가? 지구 환경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적 노력과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조직체들의 활동으로만 충분한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류 문명을 개조하지 않는다면 디스토피아는 예상보다 빠르게 도래할 수도 있다. 기존 과학기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중심적 환경주의 운동과 교육은 임시방편적이고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반면 인간과 생태계와의 화합을 주창하는 탈인간중심적 종교와 신비주의 철학은 현 인류문명의 토대가 된 과학기술의 견고함에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 현 인류에 닥친 지구 생태계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우선 인류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곳에는 생태철학의 담론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 과학기술의 토대가 된 근대적 세계관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야 한다. 또한 새로운 생태문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생태교육이 학교교육 현장에 커리큘럼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데, 과학적 자연관과 인본주의적 능력배양 중심의 근대 교육의 한계를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 결과적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구의 문화는 과학기술, 생태계, 문명이 공진화하는 선순환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현재의 환원론적이며 기계론적 과학기술에 대한 탁월한 대안으로서 생태과학의 패러다임이 과학계에서도 인정받아야 한다.

생태철학의 담론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하였고 현재에도 유효하지만 생태과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가장 구체적이며 작은 실천부터 가능한 생태교육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철학과 과학연구의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세계관의 한계

17세기에 이르러 중세의 세계관이 종말을 고하면서 시작된 근대에는 인간, 신, 자연 간에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었다.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는 교권과 스콜라 철학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인격체로서의 개인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로써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가능해졌다. 자연사물과 정신의 공통된 존재론적 기원으로서 그 자체가 탐구의 목적이었던 신의 위상은 중세를 벗어나면서 기껏해야 과학적 인식의 객관적 타당성과 보편성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지표로 전락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복음주의 신학은 각 개인이 신과의 접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 구원의 체계를 교리화한 것이다.

근대철학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과 베이컨의 우상론은 자연세계의 진리에 접근하고 개인의 지적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과학혁명이란 이름 하에 자연세계의 여러 단면들을 탐구하는 여러 개별 과학분야가 이 시기에 태동하였다.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 자연현상은 관찰할 수 있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제한됐으며, 수학적 언어만이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수단이 되었다.

한편 개인의 자유, 평등, 인권, 복지, 자본, 부의 개념이 근대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었다. 자연세계는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자원의 의미로 전락하였다. 일부 환경주의자들에게는 지속 가능한 지구환경이란 인류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지구자원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관점에서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근대의 사유체계가 지식확장의 주체인 인간과 탐구의 대상인 자연세계가 철저히 분리된 이원론적 실체론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기계론적 인과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고 더 명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자연세계를 더 작은 단위의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게 되었다. 예컨대 복잡한 생명현상은 더 작은 단위의 분자수준에서 설명하고, 이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 화학과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생명현상, 기후변화, 국제정치상황 등은 단순히 환원적이고 기계론적인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인류문명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여러 기이한 부작용들을 현재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생태철학의 역사

지구환경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생태적 패러다임은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것인가? 제도화된 종교에 예속된 중세의 세계관과 권위에서 해방되어 인간중심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근대의 세계관은 인류의 전 문명에서 볼 때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종류의 세계관이 이미 동서양에 더 넓고 깊이 퍼져 있었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오래 전 동양의 도가사상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도, 자연세계를 개별화된 개체와 부분으로 나누지도 않았다. 자연에 존재하는 각 개체들의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연 개체들의 내재가치가 존재함을 믿었다. 생태학(ecology)의 어원인 그리스어 ‘oikos’(eco)는 가족, 집, 가정을 이루는 가족 구성원, 사회를 이루는 작은 단위 공동체를 의미한다. 자연은 모든 구성원들이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지어가는 가정과 같은 것이고 생태지혜(ecosophy)는 노자가 말한 ‘유무상생(有無相生, 있고 없음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생겨남)’, 즉 타자를 향한 관계적 진상을 깨닫는 직관적 통찰을 의미한다. 불교의 근본인 연기사상과 생명존중 사상에 따르면 법계와 생태계는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된 세계라는 점에서 같고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가치가 바로 불성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분리가 존재하지 않았고,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죄로 분리된 관계성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고, 사랑으로 연합되는 전 우주적인 공동체가 교회라고 여겼다. 도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심층생태학을 주창한 아른 네스는 자연보존운동을 지향하는 표층생태주의가 여전히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소아(self)에 국한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지구 안의 모든 것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심층생태학은 생물권 전체와의 일체 의식을 경험하면서 최대의 대아(Self)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관이라고 주장하였다.

근대철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정신과 철저히 분리된 물질의 개념을 공고하게 만들었지만 정신과 육체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그의 기계론적 설명은 모순이 많았다. 또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 자연은 인류의 발전과 진보의 수단으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한 스피노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윤리학)』에서 초월적 인격신을 거부하면서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 되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거나 파악될 수 없으며 모든 개체들은 시공간 안에서 신의 속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 혹은 변형태라고 설명했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자연관에 따르면 신은 자연에 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신과 분리된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전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사건, 경험들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고 이 모든 것들은 체계적으로 통합된 전체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란 무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스스로의 변화 생성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생태론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유기체로서의 생명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 자연전체와 자연법칙을 통찰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니체도 초인의 정신은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연적 삶을 누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19세기 말 이후 생태적 세계관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이다. 그의 유기체철학 혹은 과정철학은 절대 시공간 속에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를 갖지 않고 동일하게 정지해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파악되는 ‘실체’라는 개념의 과학적 유물론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로 여겨지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경험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에 의해 구성되어 이름 붙여진 것이다. 각각의 현실적 계기는 그에 선행하는 (과거의 세계 전체인) 경험의 계기들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 이런 현실적 존재가 자기를 구성하는 생성의 과정을 파악(prehension)이라고 명명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도 인간이 가지는 경험의 정도는 아니라 해도 파악의 과정과 경험을 가지며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또한 시공간적으로 상호 연결된 자연 내의 모든 유기체들은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생태계 내에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간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자기(Self)의 존재를 세계와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생태교육의 핵심인 것이다.

 

생태과학의 등장

현대 물리학에서는 기존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는 자연의 복잡한 현상을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의 생물학과 임상의학 분야에서는 복잡한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이고 미시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믹스(omics, ‘체학’이라 번역되며 생명과학에서 분자들이나 세포 등의 집합체 전체를 뜻함)라는 분야가 등장해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유전체학(Genomics), 단백질체학(Proteomics), 후성유전학(Epigenomics), 대사체학(Metabolomics), 연결체학(Connectomics) 등이 그 예인데 단백질, 신경세포 등 몸 속의 여러 단위들 간의 상호작용과 연결에 대한 패턴을 분석하여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세부 학문분야들이다. 기존의 기계론적이고 선형적인 방식으로는 복잡한 생명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실험실 연구를 넘어선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방법론이 복잡한 인과성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20세기 인공지능과 로봇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이버네틱스란 분야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상호관련성을 밝혀 시스템 스스로가 어떻게 자기를 조직하고 환경에 적응하는지를 개념화하였다. 오늘날 정보기술 분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월드와이드웹 기술도 정보와 데이터들의 연결을 통해 엄청난 양과 종류의 정보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초연결사회를 만들어가는 4차 산업혁명의 개념 역시 사람, 기계, 데이터, 환경이 서로 연결되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혁명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미 과학기술의 페러다임은 환원주의와 기계론을 넘어서 전체적 관점에서 관계와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구현하려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에도 이런 패러다임을 적용할 수 있을까?

 

화이트헤드의 교수학습 원리

화이트헤드는 생태적 교육에 있어서 생태적 자기(Ecological Self)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즉 생태교육은 한 개인이 세계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도와주는 도덕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실천적 요소라고 하였다. ‘생태적 자기’는 개인을 넘어 이웃, 사회, 인류, 생태계, 우주와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기본 개념이며 자기 초월성과 연결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학습자는 세계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상호 의존하면서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고 이 관계성을 통해 생명이 유기적으로 끝없이 탄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로서의 개별 학습자는 고립된 에고(ego)가 아닌 사회적 관계를통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자기(Self)의 존재를 경험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이며,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세상의 당면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 학습자 자신과 연결된 다른 존재들의 경험을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을 공감이라 하며, 생태적 교육은 자연의 모든 존재들과 공감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주장하였듯이 교육은 교실 내에서 생기 없는 관념(inert ideas)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창조성을 배양할 수 있는 환경을 학습자와 교사가 함께 가꾸어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도덕과 교수학습의 네 가지 방법적 원리를 제시하였다.

(1) 상호성의 원리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관점에 기초한다. 교사와 학생은 양방향으로 경험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상호 파악(prehension)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파악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교육은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세계에 대해 배우고 공통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2) 관계성의 원리는 도덕이 기본적으로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입장에서 관계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발생하는 도적적 개념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도덕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즉, 교육은 ‘관계적 자아’에 바탕을 두고 생태환경이나 주변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책임감을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도덕교육은 다양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통해 관계적 자아와 가치관계를 확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3) 리듬의 원리는 학습자의 정신발달의 리듬적 특성을 고려한 교수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리로서, 인간의 삶과 교육이 주기적으로 순환되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화이트헤드의 리듬의 원리는 그의 합생의 원리(다자가 모여 또 다른 하나의 존재가 되는 원리)와 일맥상통하는데 교육은 지속적인 파악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인 것이다.

(4) 조화의 원리는 추상적 사상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과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지혜를 강조한다. 교양교육은 조화의 원리를 토대로 추상적 이론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조화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자율과 훈육을 학습자의 정신발달의 특성과 전체 학습의 과정을 고려하여 학습 단계별로 조화롭게 커리큘럼에 적용함으로써 지혜롭고 창의적이며 책임감 있는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것이 화이트헤드 교육철학의 핵심이다.

 

생태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생태교육은 근대의 기계론적 패러다임 안에서 생태적 내용만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인본주의, 과학주의를 넘어 관계, 과정, 연결이라는 사고가 교육의 핵심원리가 될 때 진정한 생태적 교육이 실현될 수 있다. 생태철학과 생태과학에서 도입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태교육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과 교수학습의 방법론이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근대적 세계관의 전환과 생태적 자기의 형성이 이뤄져야 한다.

아직 제도권 교육에는 도입되고 있지 않으나 여러 대안학교들과 지역공동체들에서 생태교육을 실천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다양한 생태교육 커리큘럼과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학습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유기적 관계를 깨달을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높이고, 타인 및 자연과의 유대감을 통해 정서적으로 안정된 건강한 자아 발달에 도움을 주려는 노력들이다.

생태교육은 과학기술, 생태계, 문명이 공진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시도이다. 진화는 한 개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환경을 구성하고 관계의 연결망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모든 개체들이 서로에 대해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지구 환경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스스로 적응하고 자기조직화 하는 창조적 활동을 하고 있다. 생태교육은 인류가 지구와 함께 건강하게 진화할 수 있는 실천적 발걸음이다.

 

김홍기

서울대 치의과대학 교수, 의료정보학

월, 2020/01/13- 22:30
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