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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TV] 친일항일음악에 관한 민족문제연구소 김순흥 광주지부장의 변(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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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TV] 친일항일음악에 관한 민족문제연구소 김순흥 광주지부장의 변(辯)

admin | 일, 2020/11/22-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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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연보]

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 별세

민족사 정립과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헌신해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3월 18일 오전 11시경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이화 선생은 최근까지도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목표를 달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으나, 담낭암 진단에 따른 두 차례의 수술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이이화 선생은 1970년대부터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 규장각, 역사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등 학술단체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범국민위원회 등 역사관련 시민단체에서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에 매진해 100여권의 역저를 출간하는 등 수많은 연구 성과를 내놓는 한편으로 역사정의의 실현에도 크게 기여해왔다.

선생은 1973년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한 「허균과 개혁사상」을 발표하며 역사학자로서의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뿌리깊은나무》 《월간중앙》등에 한국사 관련 글을 연재하고 꾸준히 논문과 저서를 집필하며 연구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이이화’ 특유의 역동성과 활달함이 돋보이는 대외 학술 활동이 전개된 것은 198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1986년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의 운영위원 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8년에는 발기인으로 〈한겨레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다. 나아가 1993년부터는 우리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와 관련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는데 이는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1993), 동학농민혁명유족회(1994),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2004) 설립 등의 성과로 이어졌다. 당시 선생이 이끌어낸 연구업적으로 1996년 발간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권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관한 굴지의 바이블로서 자리 매김, 현재도 중요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2000년대는 오랜 연찬이 활짝 꽃피운 시기로, 평생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한국사 이야기』(총 22권)가 2004년 발간된다. 『한국사 이야기』는 기존의 왕조사와 정치사 중심 서술이 아닌 신기원을 연 민중사적 관점의 역사서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비슷한 시기 『한국의 파벌』 『인물로 읽는 한국사』 『만화 한국사 이야기』 등 수십여 권의 저서를 펴냈는데 여기에는 아동과 청소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역사의 대중화를 이루고자 했던 선생의 의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선생은 연구와 저술에만 열정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현실문제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회 각계의 대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친일 청산, 한일과거사 문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문제 등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는 분야의 활동에 강한 의지를 보였는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한일시민선언실천협의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한국전쟁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등에 참여한 것을 보기로 들 수 있다.

심산상, 단재학술상, 청명학술상, 허균허난설헌학술대상,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출판특별상, 녹두대상 등 숱한 수상 경력은 그의 막대한 노고에 대해 사회가 경의를 표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장례는 시민사회장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를 감안하여 추모식 영결식 등 집회는 생략하고 약식으로 치러진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직접 조문하기 어려운 시민들을 위해 19일 오후부터 연구소 홈페이지(www.minjok,or.kr)에 추모 사이트를 개설 운영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등 학술단체와 동학농민혁명 한국전쟁기민간인희생자 제주4.3 한일과거사 관련 시민단체 등 고인이 생전에 깊이 관여하였던 50여 단체로 구성된 장의위원회(공동위원장 : 박재승 임헌영 정남기 서중석 안병욱 신영우, 집행위원장 윤경로)는 적절한 시기에 별도의 추모식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오후 김거성 시민사회수석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로 보내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정부는 역사 대중화와 역사정의 실현에 기여한 고인의 공적을 인정해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20일 오전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훈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희 님과 아들 응일 님, 딸 응소 님이 있다.

발인은 21일 오전 10시에 있으며 장지는 파주 동화경모공원이다.


이이화 선생 연보(1936∼2020)

∙ 1936년 대구 비산동에서 아버지 야산 이달 선생과 어머니 박순금 님 사이에서 출생
∙ 7세 무렵(1942년)부터 주역의 대가인 부친 아래에서 한문 수학
∙ 10세 무렵(1945년) 부친을 따라 충남 논산 수락리와 대둔산 석정암으로 이주
∙ 14세 때(1949년) 안면도 개락금 지역으로 이주
∙ 18세 때(1953년) 한영중학교 입학
∙ 20세 때(1955년) 광주고등학교 입학. 은단 장사와 여관 종업원 일을 하며 고학
∙ 23세 때(1958년)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장학생으로 입학. 그해 부친의 별세로 중퇴. 이후 전국을 돌며 대학입시 문제집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감
∙ 25세 때(1960년) 광주 집에 기거하면서 419 시위에 참여. 이후 서울에 올라와 친구 하숙집을 전전하며 취업 준비
∙ 29세 때(1964년) 새로 창간된 《불교시보》 기자로 입사, 3년간 근무
∙ 32세 때(1967년) 모친 별세
∙ 33세 때(1968년) 《신동아》 별책부록 『한국 고전 백선』 작업에 참여, 천관우・박종홍・임창순・이숭녕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 이후 1974년까지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문서 해제 작업
∙ 34세 때(1969년)부터 5년간 동아일보사 촉탁직으로 《동아일보》 창간호부터 기사 색인 작업에 참여
∙ 38세 때(1973년) 《창작과비평》에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한 「허균과 개혁사상」 발표
∙ 39세 때(1974년)부터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근무하며 본격적으로 한국사 연구에 돌입. 이듬해 《창작과비평》에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 발표
∙ 41세(1976년) 김영희 여사와 백년가약
∙ 42세 때(1977년) 학술지 《한국사연구》에 논문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발표, 학계의 주목을 받음. 다시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 1981년까지 해제 작업. 아들 응일 출생
∙ 44세 때(1979년) 화곡동 자택에 ‘한문서당’ 개설
∙ 45세 때(1980년) 5월 ‘서울의 봄’ 당시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 첫 저서 『허균의 생각』(뿌리깊은나무) 출간
∙ 46세 때(1981년) 전두환 정권하에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으로 임용되었으나 1년 남짓 근무 후 사직
∙ 47세 때(1982년) 성심여대 국사학과에서 한국사상사 강의, 이후 10여 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섬
∙ 50세 때(1985년) ‘한길역사기행’, ‘한길역사강좌’에서 강의
∙ 51세 때(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후 초대 운영위원. 부소장, 소장 역임. 딸 응소 출생
∙ 52세 때(1987년) 6월 민주항쟁 참여. 《역사비평》 창간준비호에 논문 「역사소설의 반역사성」기고
∙ 53세 때(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 54세 때(1989년)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발족, 위원장으로 추대
∙ 56세 때(1991년) 저서 『중국역사기행- 조선족의 삶을 찾아서』 출간
∙ 58세 때(1993년) 《한겨레》에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연재. 12월 동학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추대
∙ 61세 때(1996년) 총 30권의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출간
∙ 64세 때(1999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국제회의’(1999)에 참가
∙ 66세 때(2001년) 단재학술상 수상
∙ 67세 때(2002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 위한범국민위원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 67세 때(2003년)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
∙ 69세 때(2004년) 고구려역사문화재단 공동대표, 고구려역사문화보존회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역임. 『한국사 이야기』 마지막 원고 탈고, 총 22권 완간(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위한 한국의 대표적인 책 100선’, 2007년 《한국일보》의 ‘우리 시대 명저 50선’에 선정)
∙ 70세 때(2005년)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석좌교수로 초빙됨. 『만화 한국사 이야기』 7권 출간(2011년 9권으로 개정 증보). ‘임종국상’과 ‘단재상’ 심사위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와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 역임. 개성에서 열린 남북 역사학자 학술 토론회에 참가
∙ 71세 때(2006년) 임창순청명학술상 수상
∙ 73세 때(2008년) 대통합민주신당(현 민주당) 18대 국회의원 후보 지역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 허균허난설헌학술대상,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출판특별상, 녹두대상 수상
∙ 74세 때(2009년) 진실과미래,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공동대표로 추대.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10권) 출간
∙ 75세 때(2010년) 강제병합100년공동행동한국실행위원회 상임공동대표로 추대. 《한겨레》에 회고록 「길을 찾아서-민중사 헤쳐 온 야인」 연재(6개월 동안 121회)
∙ 76세 때(2011년)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 동학혁명정신선양대회 대회장, 한일시민선언실천협의회 상임대표 역임. 자서전 『역사를 쓰다』 출간
∙ 78세 때(2013년) 역사교육에 대한 권력과 정치의 개입을 규탄하는 16인의 원로학자 중 한 사람으로 ‘한국사 교과서와 역사교육 문제에 대한 원로 교수 기자회견’ 참석
∙ 79세 때(2014년)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전봉준, 혁명의 기록-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출간
∙ 80세 때(2015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 행정 예고 철회와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원로학자 22인에 참여. 『한국사 이야기』 개정판 출간
∙81세 때(2016년)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 공동 집필. 《경향신문》의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에서 명사 70인에 선정
∙ 82세 때(2017년)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창립, 이사장으로 추대. 저항운동의 태동기인 19세기 민중봉기를 다룬 『민란의 시대-조선의 마지막 100년』 출간
∙ 83세 때(2018년)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 주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 취임. 역사에세이 『위대한 봄을 만났다』 출간. 8월2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 개관
∙ 84세 때(2019년) 동학농민혁명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데 헌신한 공로로 전주시 명예시민에 선정
∙ 2020년 3월 18일 오전 11시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
∙ 정부, 역사 대중화와 역사정의 실현에 끼친 고인의 공적을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추도사]

한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님 영전에

한국 민족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님, 이렇게 기어이 우주의 섭리에 순종하시는 겁니까. 문병을 극구 사양하면서 병원도 알려주지 않으시더니 이렇게 속절없이 떠나시는 겁니까. 가벼운 수술이니 2〜3주 뒤에 만나자고 하시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어찌 침묵하시는 겁니까.

선생님은 상아탑에 갇힌 민족사를 해방시켜 대중의 역사, 거리의 역사, 현실에 발 디딘 살아 숨 쉬는 역사로 바꾼 행동하는 지성이요 실천가셨습니다. 국민 필독서가 된 『한국사 이야기』의 저자답게 선생님의 지식은 비화에서 보학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경계가 없었습니다. 작지만 옹골찬 몸으로 뿜어내던 사자후는 청중을 압도하고 뉴라이트들을 떨게 하였습니다. 역사의 제단 아래 포청천처럼 거침없이 춘추필법을 구사하시던 이이화 선생님.

여러 학술단체나 시민단체의 고달픈 감투를 마다않고 기꺼이 맡아주셨던 선생님.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때 그 추운 날씨에도 서슴지 않고 거리로 나서던 최고령 연사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릅니다.

선생님이 자리하신 민족사의 법정에서는 역사정의에 어긋나는 모든 반동은 ‘김어준식 어법’으로 ‘아작’ 났습니다. 때로는 수사법이 위험수위를 넘나들었지만 그 신랄함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도, 헤겔의 변증법도 아닌 이이화체 횡설수설형 눌언식 불교적 변증법이었습니다. 근엄한 한국사학계에서 드물게 보는 유머리스트인 선생님은 박제화한 역사를 흥미롭고 친근한 학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주변에는 항상 경탄과 박장대소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19세기의 민중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동학농민전쟁을 민족사의 주축으로 삼아 그 계승과 부흥에 진력하셨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배려로 녹두장군 동상을 서울 종로 한 가운데다 건립하면서 흡족해하시던 그 환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부친인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으로부터 천부적인 탁월성을 물려받았으나, 성장기 내내 혹독한 가난 때문에 고리키에 뒤지지 않는 험난한 밑바닥 인생을 겪었습니다. 필시 그 참담함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눈치에 유머정신까지 터득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에다 선생님을 키운 8할은 술로, 밥이나 반찬보다 술을 먼저 찾았지요. 그런데 이 토착 민족주의자는 맥주 팬이었습니다. 저 호치민 선생도 미제와 전쟁을 하면서도 양담배를 즐기셨지만 아무도 트집 잡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맥주는 이미 토착화되어 우리 술이나 진배없으니까요. 술 없는 이이화 선생님은 하안거에 든 스님에 다름 아니었겠지요.

이런 사학계의 바쿠스를 술 한 모금도 않는 나 같은 소인배가 가까이할 수 있었던 건 시대 탓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신동아〉에 근무했던 1960년대 후반에 처음 뵌 이후 역사문제연구소와 도서출판 한길사의 학술행사와 역사기행, 그리고 만년의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 이르기까지 동고동락했던 선배이자 자문역에 동지이셨던 선생님.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으신 이후 만년의 선생님께는 술자리가 인생일락이었으며 그 곁을 오랜 지기 박재승 변호사님이 지켜주셨습니다. 간혹 임종국기념사업회 장병화 회장이 그 대역을 맡기도 했으나 안전귀가의 책임은 주로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상임이사의 몫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빈 자리는 누구도 채울 수 없다는 막막함이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못다 이룬 선생님의 뜻을 받들 후진들이 쟁쟁하게 뒤를 이어 갈 것입니다. 하니 이제 가시는 곳에서 녹두장군님과 신선주 드시면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임헌영 삼가 올림


[사진첩]

1980년대 한길역사기행_지리산 노고단에서 ⓒ 한길사 제공
이이화 선생 ⓒ 가족 제공
이이화 선생 ⓒ 한길사 제공
이이화 선생 ⓒ 한길사 제공
아들 응일이 찍은 아버지 이이화, 울릉도에서 ⓒ 가족 제공
1955년 고학시절 광주 충장로에서 ⓒ 가족 제공
문학청년을 꿈꾸던 이이화 선생 ⓒ 가족 제공
직장 동료들과 함께 ⓒ 가족 제공
김개남장군 고택 역사기행에 함께 한 네 가족 ⓒ 가족 제공
동학농민혁명 연구와 진실규명에 함께 한 후배이자 동지 신순철 신영우 배항섭 ⓒ 가족 제공
임진각에서 오랜 벗 박재승과 함께 ⓒ 가족 제공
1986년 11회 한길사역사기행 신돌석장군 생가 답사 ⓒ 한겨레 제공
강원도 농민전쟁의 현장 구룡령에서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2004년 금강산 금강문바위에서 ⓒ 가족 제공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운영회의 ⓒ 한겨레 제공
1993년 ‘다시 쓰는 사발통문’
1994년 공주 우금치 합동위령제 ⓒ 한겨레 제공
2013년 9월12일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 교과서 규탄대회 및 검정 무효화 국민네트워크 출범식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2014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전체회의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2015년 국정화 행정예고 철회 기자회견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2014년 원광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 ⓒ 가족 제공

이이화 선생님 추모 홈페이지

목, 2020/03/19-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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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보도자료]

□ 민족문제연구소는 제44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메이지산업유산에 대한 결정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이 성명은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하며 일본 정부의 성실한 약속이행을 촉구했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일본 정부의 역사부정론이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 그러나 일본은 “‘희생자’의 해석은 사람과 국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전쟁 중에 하시마의 조선반도 출신자는 함께 일하고 함께 살며 모두가 한 가족(全山一家)으로 증산체제를 뒷받침했다”며 또 다시 피해국과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 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는 메이지산업유산의 현장에 반인도적 강제노동과 인권유린의 어두운 과거사가 진정성 있게 반영될 때까지 국제사회와 연대하여 철저히 감시하고 끝까지 싸워나갈 것을 밝혔다.

□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16일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강제동원과 관련한 전시를 진행하고 있으며,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에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할 것을 촉구하는 온라인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관련 전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온라인 캠페인> 일본은 세계유산에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해야 합니다.


 

역사부정이 아닌 과거사 직시의 현장으로 거듭나길
–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메이지산업유산에 대한 결정을 환영하며 –

지난 7월 22일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제철·철강, 조선, 석탄산업’(이하 메이지산업유산) 시설에서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39 COM 8B.14 & 42 COM 7B.10)을 충분히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강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강제동원의 역사를 포함한 ‘역사 전체’에 대해 해석전략을 마련하라는 결정문을 채택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5년 유산 등재 당시부터 일본의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메이지산업유산시설에 강제노동의 역사를 기록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연구소는 세계유산위원회의 이번 결정을 크게 환영하며 일본 정부의 성실한 약속 이행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일본 정부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전 세계를 향해 메이지산업유산의 전체 역사를 설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6년 동안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를 통해 강제노동을 부정하여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중국인과 연합군포로의 강제노동은 철저하게 감추는 등 역사부정론으로 국제사회를 기만해왔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일본 정부의 역사부정론이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에 일본 정부는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는 구차스런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나아가 산업유산정보센터의 가토 고코 소장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희생자’의 해석은 사람과 국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전쟁 중에 하시마의 조선반도 출신자는 함께 일하고 함께 살며 모두가 한 가족(全山一家)으로 증산체제를 뒷받침했다”며 또 다시 피해국과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 했다(https://sangyoisankokuminkaigi.jimdo.com).

일본 정부와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지 않는 한 메이지산업유산은 유네스코가 지향하는 세계유산의 본래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시대착오적인 역사부정론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메이지산업유산의 현장에 반인도적 강제노동과 인권유린의 어두운 과거사가 진정성 있게 반영될 때까지 국제사회와 연대하여 철저히 감시하고 끝까지 싸워나갈 것이다.

2021년 7월 23일
민족문제연구소

금, 2021/07/23-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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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기자회견문]

대법원 판결 1년,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싸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18년 10월 30일 역사적인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뒤 1년이 지났다. 1997년부터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자신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싸워 온 피해자들이 20여년의 기나긴 투쟁 끝에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국제인권법의 성과를 반영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고, 식민지배와 직결된 강제동원·강제노동이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의 극복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딘 세계사적인 판결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냉전과 분단체제 아래에서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강요한 ‘65년 체제’를 피해자들과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극복한 역사적인 성과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1년, 해방 70여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못한 자신들의 인권회복과 정의의 실현을 고대해 온 피해자들의 기대는 처참히 짓밟히고 있다.

아베 정권은 한국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고 사죄, 반성하기는커녕 ‘국제법 위반’을 운운하며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피고 기업들에게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하여 판결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경제규제와 노골적인 배외주의를 선동하여 일본 사회 전체를 ‘혐한의 광풍’으로 몰아넣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혐한의 광풍’ 속에서 재일조선인들은 일상적으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으며,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 문제에서 드러나듯 역사왜곡과 혐한발언으로 채워지는 언론 보도를 통해 일본사회 전체가 ‘재특회’처럼 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강제동원의 근본적 책임이 있는 가해자 일본정부가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피고 일본 기업 일본제철, 미쓰비시, 후지코시는 판결에 따라 가해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을 위해 먼저 나서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대화마저 거부한 채 일본 정부 뒤에 숨어서 1년이 지나도록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글로벌 기업을 자처하는 기업들의 비겁한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며 피고 가해기업의 책임을 끝까지 물을 것임을 밝힌다.

한국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고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하여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천명하였으나, 지난 1년 동안 한국 정부가 보인 노력은 부족하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정부는 진상규명, 사죄, 법적 배상, 재발방지 등 과거사 해결의 기본원칙에 입각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나아가 한국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규명을 위해 한국 내에서 할 수 있는 조치들을 선제적으로 취하고, 소송 당사자뿐만 아니라 군인·군속 피해자 등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포함하여 강제동원 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을 위해 고민하여야 한다.

한국 정부는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 박근혜 정부 당시였던 2015년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와 같이,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은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아니 된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구상권 방안, 1+1 방안 등 이른바 ‘해결안’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안보문제와 한일관계를 빌미로 피해자의 양보를 강요하고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맞바꾸려는 일련의 시도에 대해서 우리는 강력히 경고한다.

지난 1년,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정의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은 얼마 없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보여준 지지와 연대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음을 기억한다. 우리는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이 실현되는 그 날까지 국제사회와 함께 연대하여 행동해 나갈 것이다.

2019년 10월 30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겨레하나,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대한불교조계종민족공동체추진본부,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선학교와함께하는사람들 몽당연필, 청년시대여행,
평택원폭피해자2세회, 평화디딤돌, 포럼 진실과정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합천 평화의집, 흥사단,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KIN(지구촌동포연대)]

목, 2019/10/3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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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집, 불법비리, 인권침해 사태는 여전히 해결과정에 있다.
정치인들은 경거망동 자제하라!

나눔의 집 문제를 왜곡하는 정치인들의 언행을 규탄한다.

월주스님 입적 후 나눔의 집에 대한 정치인들의 발언이 심각한 수준이다. 사실관계도 제대로 알지 못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시민단체나 언론에서 인격학살적인 공격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고 하고 ‘공익단체를 만들어 거기 참여해서 기부도 하고 열과 성을 다해 온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인격을 말살하고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건 국가라고 보기 어렵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 되었다. 문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발언이다.

2020년 경기도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에 대해 민관합동조사를 실시했고, 심각한 법령 위반 사실을 밝혀냈다. 나눔의 집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활과 활동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명목으로 기부금을 모집했는데, 기부금품법과 사회복지사업법 및 사회복지법인 재무회계규칙 등을 위반하여 기부금품을 모집했고,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 모집한 기부금품 88억원 중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이 실제 생활하고 계신 나눔의 집으로 보낸 시설 전출금은 고작 2억원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할머니들은 노인복지시설에 입소한 거주인이 되어 정부 지원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 시설에 거주한 할머니들은 기부금의 혜택을 거의 보지 못하고 모금을 위해 동원된 것에 불과했다. 법인 이사들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호텔식 요양원을 지을 계획까지 세웠다. 할머니들을 내세워 모금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분들과 무관한 일을 위해 돈을 적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눔의 집이 국민을 대상으로 벌인 사기라고 할 수 있다.

범법 사실은 이외에도 적지 않다. 형사재판도 진행 중이다. 민관합동조사 결과 이사들의 일부가 해임되고, 임시이사들이 파견되어 현재 법인은 임시이사회가 운영하는 상황이다. 즉 나눔의 집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며, 과거 법인에 의해 벌어진 심각한 불법, 비리, 인권침해 사실에 대해 책임진 사람도 단 하나 없으며 과거 법인이 잘못을 제대로 인정한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윤석열씨는 수사결과 범죄 혐의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이다.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으면 나눔의 집에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 지금 어떤 법적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지를 모를 수 없다. 김두관 민주당 대선후보 역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경기도의 잘못을 추궁하고 있다. 나눔의 집 법인 이사 해임은 법인과 시설 운영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이사들에 한정한 최소한의 처분이었다.

사회복지법인의 문제를 파악하고도 방치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법인에 대한 지도·감독권을 가진 경기도의 책임 있는 조치가 아니다. 경기도는 나눔의 집 정상화를 위해 이사 해임명령을 한 것이다. 여야 정치인들은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을 바라본다면 차마 할 수 없는 말들로 나눔의 집을 이용하는 짓을 중단하라.

아울러 대한불교조계종 원행 총무원장은 이재명 지사가 조문하는 자리에서 ‘나눔의 집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일이 좀 꼬였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최대한 빨리 매듭을 지어서 큰 스님의 유지를 잘 받들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하면서 사과의 뜻을 전한 것으로 밝혔다고 한다. 이지사의 발언 내용을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조문 자리에서의 발언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경기도의 처분이 잘못되었고 이지사가 사과를 한 것으로까지 과장해서는 안 된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죄송하다, 송구하다, 잘 처리하겠다는 말이 처분이 잘못되었으니 사과한다는 말이 되는가? 게다가 원행 총무원장도 나눔의 집 이사를 오랫동안 했으며 나눔의 집 문제의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월주 스님의 입적과 관계없이 나눔의 집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하여야 한다. 정치인들도 나눔의 집을 정쟁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나눔의 집 문제를 세상에 알린 공익제보자들은 아직도 힘들어 하고 있다. 잘못된 문제를 해결하고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치다. 지금 경기도와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게 하고, 할머니들의 남은 생이 최대한 존중받는 조치를 마련하는 길이다. 정치인들은 경거망동을 중단하고 법적 책임을 각오하라.

2021년 8월 1일

겨레하나, 경기여성단체연합, 경기여성연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구속노동자후원회, 국제민주연대, 군포YMCA,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 다산인권센터, 미디어기독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사)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스텔라데이지호 대책위원회,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운동사랑방,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KIN)지구촌동포연대, 진보 3.0,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평화디딤돌, 표현의자유와언론탄압공동대책위원회, 프로그레시브 코리아, 한국심리운동연구소, 형명재단, 흥사단 (총 35개 단체)

월, 2021/08/0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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