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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의 집터에 표석을 세우지 못하는 까닭은? ‘삼청동(三淸洞)’ 집터의 실제 위치는 ‘팔판동(八判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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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의 집터에 표석을 세우지 못하는 까닭은? ‘삼청동(三淸洞)’ 집터의 실제 위치는 ‘팔판동(八判洞)’

admin | 수, 2020/11/11- 02:43

[식민지 비망록 63]

단재 신채호 선생의 집터에 표석을 세우지 못하는 까닭은?
‘삼청동(三淸洞)’ 집터의 실제 위치는 ‘팔판동(八判洞)’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경무총감부 고시 제72호’에는 안녕질서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발매금지 및 압수대상 처분이 이뤄진 출판물의 목록에 신채호 선생의 저술인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이태리건국삼걸전(利太利建國三傑傳)』이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김가진, 김경천, 김옥균, 김창숙, 남궁억, 노백린, 민영환, 백용성, 손병희, 송진우, 심훈, 여운형, 이동녕, 이상재, 이준, 이회영 6형제, 지석영, 지청천, 현상윤 ……
.
여기에 나열한 명단은 현재 서울시에서 해당 인물의 생가(生家) 또는 집터에 표석을 설치한 19군데 사례들의 목록이다. 여기에 더하여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Ernest T. Bethell, 裵說)과 김수영, 박인환, 전영택, 현진건 등 문인(文人)들의 경우를 다 합치더라도이 숫자는 겨우 스물 몇 건 정도에 머문다.
우리 근현대사를 통틀어 그 집터를 기억하고 업적을 기릴만한 훌륭한 인물이 고작 이 정도뿐일까 마는 행적평가, 지명도, 형평성 등과 같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부분이 늘 존재하기 마련이므로 역사인물들에 대한 표석의 설치를 무작정 늘리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런데 설령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업적과 상당한 역사 문화적인 평가를 지닌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해 당 인물의 집터에 표석을 세울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 집터의 위치가 어디인지 도무지 확인을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선생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실제로 지난 2019년 3월 28일에 열린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 회의에서 ‘신채호 집터’ 표석설치에 관한 청원이 심의안건으로 상정되었을 때 해당 표석 설치 자체에 대해서는 참석 위원 모두의 만장일치로 공감하는 바였으나 집터의 위치를 특정(特定)하는 문제가 뒷받침되지 못하여 결국 아쉽게도 설치보류결정이 내려진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신채호가 살았던 집터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려내지 못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변영만(卞榮晩, 1889~1954)이 남긴 「단재전(丹齋傳)」(1936)의 한 토막을 옮겨보기로 한다.

 

나는 일찍이 장원서다리(掌苑署橋) 서쪽에 있는 단생(丹生)의 집을 방문하였다. 뜰 가운데 커다랗게 던져진 물건이 있고 우유통 대여섯 개가 수채구더기에 버려져 있었는데, 우유 찌꺼기가 흘러나온 것이 차마 볼 수 없었다. 방안으로 들어가니 단생이 분이 아직 식지 않아 나를 쳐다보고도 못본 척하였다. 내가 괴이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단생은 아직 치솟은 화가 등등하다가 이에 말을 끊었다 이으며 급한 듯이 다시 천천히 말하기를 “관일(貫日)의 어미가 젖이 나오지 않으니 천하에 이런 여자가 있단 말이오? 내가 약간의 우유병을 구하여 대신하라고 주었더니, 그녀가 그것을 제대로 먹일 줄을 알지 못하고, 관일은 병이 들어 죽으려고 하기에 내가 모두 뒤져다가 버리는 참이오!”라고 한다. 말을 마치고 뛰어 일어나 또 무슨 일을 저지를 듯하였다. 나는 그를 억지로 붙들어 자리에 앉히고 갖은 말로 위로하여 겨우 무사하게 되었다.(하략)

[이 글의 원문은 김종하 간행, <산강재문초(山康齋文鈔)> (1957)에 수록되어 있으며, 국역 부분은 <단재 신채호 전집> 제9권(2008), 339쪽의 것을 재인용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관일(貫日)은 신채호가 늦게 얻은 아들의 이름이며, 그가 사다준 ‘수리표 연유(Eagle Brand 煉乳)’를 잘못 먹인 탓에 체하여 끝내 숨지자 이 일로 첫 부인인 풍양조씨(豊壤趙氏)를 친정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얘기가 그 아래에 채록되어 있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이 일이 벌어진 집의 위치는 ‘장원서다리 서쪽’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장원서(掌苑署)는 조선시대 원유(苑囿), 화훼(花卉), 과물(果物) 등을 관장하는 곳이며, 옛 성삼문(成三問)의 집터(화동 23번지 및 24번지 일대)에 자리하였다.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장원서다리는 안국동네거리 쪽에서 화개동을 거쳐 팔판동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삼청동 초입에서 삼청동천(三淸洞川)을 마주하여 건너는 지점에 놓여 있었다.

 

위) <중외일보> 1929년 7월 13일자에 수록된 수해관련보도에 함께 수록된 ‘장원서다리’의 옛 모습이
다. 변영만이 남긴 「단재전(丹齋傳)」이라는 글에는 신채호의 집이 ‘장원서다리의 서쪽에 있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아래)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어 옛 모습을 가늠하기 어려우나 ‘삼청파출소’ 바로 앞 자리가 옛 장원서다리가 있던 지점이다. 이곳은 팔판동, 소격동, 화동의 세 지역이 겹치는 경계지점이기도 하다.

 

지금은 하천이 모두 복개된 탓에 그 흔적을 쉽사리 확인하기 어렵지만 옛 지도를 활용하여 그 위치를 가늠해보면 팔판동(八判洞), 화동(花洞), 소격동(昭格洞)의 세 지역이 겹치는 경계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지금의 삼청파출소(三淸派出所) 바로 앞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다리의 서쪽이라 하였으므로 신채호의 거처는 넉넉잡아 팔판동 구역의 어디쯤에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욱 명확하게 집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이 하나 남아 있는데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자에 게재된 ‘초가 문권 분실 광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기는 신채호선생이 중국에 활동근거지를 마련하고 그곳으로 막 망명을 시도하려던 때와 정확하게 겹친다.

 

[광고(廣告)] 본인(本人)의 소유(所有) 초가(草家) 6간(間) 문권(文券)을 부지중(不知中)에 실(失)하였사옵기 자이광고(玆以廣告)하오니 수모습득(誰某拾得)하여도 휴지시행(休紙施行)하압. 경 북서 삼청동 이통 사호(京 北署 三淸洞 二統 四戶) 신채호 백(申采浩 白).

 

위)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자에 수록된 신채호의 ‘초가문권 분실 광고’이다. 이것이 집터의 위치를 알려주는 핵심적인 자료인 것은 맞지만, 참으로 아쉽게도 이것만으로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사용된 지번체계로 전환할 수 있는 아무런 방도가 없는 상태이다.

아래) <광무호적(진장방)> 과 <토지조사부>의 명부가 일치하는 두 사례에 해당하는 지점을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를 표시한 내용이다. 이것으로 ‘옛 삼청동 2통 구역’이 지금의 ‘팔판동’에 속한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두 곳의 편차가 워낙 큰 관계로 신채호 집터의 위치를 가려내기는 매우 어렵다고 하겠다.

 

여길 보면 초가문권을 분실하여 이를 무효처리한 신채호의 주소지가 ‘경 북서 삼청동 2통 4호’라고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도입된 지번주소체계로 ‘어느 동 몇 번지’를 가리키는지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집터의 위치는 여전히 밝혀내기가 어렵다.
이런 경우에 개략적인 위치라도 찾아보기 위해 곧잘 애용하는 것이 <광무호적(光武戶籍)>(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이다. 여기에 나타난 호주의 성명과 일제강점기 이후의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임시토지조사국 작성)>(국가기록원 소장자료)에 기재된 소유자의 성명이 일치하는 것을 통해 지번의 위치를 가려낼 수 있고, 더구나 연번(連番)으로 일치하는 사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신뢰도는 매우 높다고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위해 우선 <광무 10년 한성부 북서 진장방 호적(光武 10年 漢城府 北署 鎭長坊 戶籍)>에 기재된 내역을 살펴보았더니, 신채호 소유의 초가인 ‘삼청동 2통 4호’는 정식 주소지가 “한성부 북서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 2통 4호(漢城府 北署 鎭長坊 三淸洞契 三淸洞 二統 四戶)”가 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 당시, 즉 광무 10년(1906년)에는 이 집의 호주가 체전부(遞傳夫)인 한주성(韓周成)이었던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광무호적>에 나타난 ‘통호(統戶)’의 부여방식을 보면, 각각의 동네마다 새로 번호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장방’이라는 ‘방(坊)’ 단위에서 1통부터 35통까지 누적되는 것이 눈에 띈다. 이를 개략적으로 말하면 대개 1통에서 25통까지는 삼청동(팔판동 포함) 구역이, 26통 및 27통은 복정동(福井洞) 구역이, 그리고 28통에서 35통까지는 화개동(花開洞) 구역이 포진하는 형태였다.
또한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광무호적>에 삼청동이라고 표시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지금의 ‘삼청동’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1914년 4월 1일에 일제가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기존의 명칭이 바뀌거나 관할구역이 크게 조정되는 사례가 많았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삼청동 일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경기도고시 제7호 「경성부 정동(町洞)의 명칭 및 구역」을 보면 옛 진장방(鎭長坊)에 속했던 구역은 삼청동, 팔판동, 화동 등으로 관할구역이 흩어져 있으며, 이 가운데 삼청동은 옛 삼청동과 팔판동 일부가 합쳐졌고 또한 팔판동은 팔판동 일부가 속하는 구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듯하다. <광무호적(진장방)>과 <토지조사부>에 표시된 인명을 대조하여 정리한 작업결과물을 살펴보면, 이 지역의 경우 세(貰)를 든 사람들이 유달리 많은 탓인지는 몰라도 명단이 일치하는 사례들이 생각만큼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개략적인 추세는 분명히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관할구역이 어떻게 변경 및 조정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광무호적(진장방)>(1906)과 <토지조사부>(1912)의 인명대조 결과자료

이에 따르면 진장방의 삼청동에 속한 구역 가운데 대개 1통에서 9통까지는 1914년 이후 ‘팔판동’으로 귀속된 지역이 압도적이고, 11통에서 25통까지는 ‘삼청동’으로 귀속된 지역이 월등히 많은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보면 결국 지금의 ‘팔판동’은 옛 팔판동에다 삼청동 구역 일부가 더해지면서 형성된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채호의 집터인 ‘옛 삼청동 2통 4호’와 가장 근접한 ‘옛 삼청동 2통 13호’와 ‘옛 삼청동 2통 14호’의 경우에 1914년에 각각 ‘팔판동 19번지’와 ‘팔판동 131번지’로 전환된 사실이 드러나는데, 이에 따라 신채호 집터의 실제 위치는 지금의 ‘삼청동’이 아닌 ‘팔판동’ 지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욱 확실시된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소개한 변영만의 「단재전」(1936)에서 “장원서다리의 서쪽”이라고 적어놓은 구절과 그대로 일치하는 대목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만 가지고는 이 집터가 팔판동에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뚜렷이 밝혀진 것이 없다. 더구나 <광무호적(진장방)>에서 추출할 수 있는 비교 가능한 자료가 두 건에 불과하고 그것도 각 소재지의 위치편차가 너무 큰 편이므로 집터일 가능성이 높은 지번(地番)의 후보군을 얼추 간추리는 것조차 힘든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너무도 아쉽지만 신채호 선생이 살던 ‘삼청동’ 집터는 장원서다리 서쪽에 있는 지금의 ‘팔판동’ 지역이라는 사실만 드러난 채 지번을 전혀 알 수가 없으므로 표석을 설치하기가 매우 곤란한 상태는 당분간 그대로 지속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탑골공원 건너편 인사동 초입에 새로 설치된 ‘박자혜 산파터’ 표석(2020.8.26)의 모습이다. 이 지점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신채호 선생이 사망할 당시 박자혜 여사가 살던 ‘인사동 122번지’의 집터가 있었으나, 이곳 역시 최근 도심재개발사업으로 땅을 파헤치는 통에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총독부관보> 1916년 11월 21일자에 게재된 총독부의원 간호부과(看護婦科) 졸업생 명단에 ‘박자혜’의 이름이 포함된 것이 보인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이러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의미 있는 대안의 하나로 부각된 것이 2020년 8월 26일에 설치 완료된 ‘박자혜 산파 터’ 표석이다. 박자혜(朴慈惠, 1895~1943)는 사립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1914년 졸업)를 거쳐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과(1916년 졸업)를 나왔고, 이후 1920년에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연경대학(燕京大學) 의예과를 다니던 도중에 그곳에서 신채호와 만나 결혼한 사이였다. 이들 사이에 수범(秀凡, 1921년생)과 두범(斗凡, 1927년생) 두 아들이 있었고, 그 이후 남편 신채호가 상해(上海)로 돌아가야 하는 문제와 여러 가지 경제적 사정이 겹쳐 아내 박자혜는 2년가량의 동거를 마치고 홀로 국내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 후 신채호 선생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경제적 궁핍을 이겨내기 위해 운영했던 것이 ‘박자혜 산파(朴慈惠 産婆; 인사동 69번지)’였던 것이다.

왼쪽) <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자에 수록된 「신채호 부인 방문기」에 함께 소개된 ‘박자혜 산파’의 모습과 ‘박자혜 인물사진’이다. 지붕위 간판에 ‘인사동 69번지’라는 주소 표기가 또렷이 드러
나 있다.

오른쪽) <조선일보> 1936년 2월 25일자에 실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망관련 기사에는 ‘유골함을 들고 경성역에 도착한 박자혜 여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박자혜가 산파를 꾸려나가던 시절에 지극한 곤경에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자 및 12월 13일자에 2회 연재된 「신채호 부인 방문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 한 토막을 옮겨보면 이러한 내용이 눈에 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홀로 어린 아이 형제를 거느리고 저주된 운명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애처로운 젊은 부인이 있다. 시내 인사동(仁寺洞) 69번지 앞 거리를 지나노라면 산파 박자혜(産婆 朴慈惠)라고 쓴 낡은 간판이 주인의 가긍함을 말하는 듯이 붙어 있어 추운 날 저녁볕에 음산한 기분을 자아내니 이 집이 조선사람으로서는 거개 다 아는 풍운아 신채호(風雲兒 申采浩) 가정이다.
간판은 비록 산파의 직업이 있는 것을 말하나 기실은 아무 쓸데가 없는 물건으로 요사이에는 그도 운수가 갔는지 산파가 원체 많은 관계인지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는 일이 없어 돈을 벌어 보기는커녕 간판 붙여놓은 것이 도리어 남부끄러울 지경이므로 자연 그의 아궁이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4, 5일이 될까말까 하여 말과 같은 삼순구식(三旬九食)의 참상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라도 빨리 가장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박자혜 여사는 밤이나 낮이나 대련형무소(大連刑務所)가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볼 뿐이라 한다.

 

이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1936년 2월 21일 신채호 선생은 여순형무소(旅順刑務所)의 병감(病監)에서 홀연히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여순화장장에서 수습한 그의 유골은 박자혜 여사의 품에 안겨 경성역(京城驛)을 거쳐 고향인 충북 청주군 낭성면 관정리(忠北 淸州郡 狼城面 官井里)의 선영(先塋)으로 옮겨져 그곳에 묻혔다. 이를 테면 이곳 ‘박자혜 산파터’는 독립지사의 가족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고난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부각되기에 충분한 장소가 아닌가 말이다. 더구나 박자혜는 비단 신채호의 아내라는 위상이 아니더라도 그 자신이 3.1운동 당시에 총독부의원 간우회(看友會)를 주도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폈고, 그 후 여러 애국지사의 의열활동을 도운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바 있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여성독립운동가의 위상과 역할을 재조명하는 의미에서도 표석 설치의 당위성과 의미가 아주 크다고 할 것이다. 다만, 못내 아쉽고 여전히 풀지 못한 일이지만 신채호 집터의 위치를 명쾌하게 규명할 수 있는 관련 자료가 서둘러 발굴되어 그 자리에 자그마한 표석 하나라도 남겨질 수 있는 기회가 빨리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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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용천수 조사를 다녀왔습니다.

중산간에 위치한 용천수는 예부터 중산간 지역 주민들에게 중요한 식수였으며 자연생태계 생명들의 삶을 이끌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관찰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조사한 용천수는 주루렛물, 절굴물, 거욱대물, 유수암, 거문덕이, 정물, 원물오름 용천수 입니다.

 


주루렛물

  • 마을의 생명수 였던 주루렛물, 해안동의 최초 설촌지로 알려져 있다.

절굴물(정연물)

  • 정연은 제주특별자치도 도청에서 서쪽으로 11km 지점에 위치하고 현주소는 광령2리 796번지 일대에 있는 샘물이다. 15세기 말엽 조선 성종때 현재 광령2리 남동쪽으로 약 1km 지점인 서당골과 남쪽으로 약 1km 지점인 산이골에 살았던 유목민들이 비옥한 농지와 온화한 기후 등 입지적 조건이 좋은 이승굴(현재 광령2리) 에 옮겨 살면서 주민들이 식수로 거악대 물을 활용하였으며 거악대 물이 부족하면 연연물을 길어다 먹었고 물이 좋아 식수 및 물맞는 장소로도 이용했고 주변에 고인물은 마소에게 먹이는 물로 활용했다.

원물오름


원물오름 용천수


유수암천


거욱대물

  • 여전히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 조사 당시에도 주변 주민이 물을 사용하기 위해 다녀갔다.

거문덕이(흘이물)

  • 흘이물 또한 중산간 설촌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이었다.
  • 관련 유적비가 흘이물 앞에 세워져 있다.

정물

  • 샘이 2개가 연결되어 안경모양을 닮았다 하여 안경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물

  • 용천수 주변으로 식생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수, 2020/07/1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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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은아 : (휴가중)

석탄 : (휴가중)

우현 : 뭐야 이것들 다 어디갔어. <작가의 말> 쓰고 가라 이놈들아.

 

 

일, 2020/08/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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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 조사가 진행되어 비교적 조사에는 힘이 든 날씨였지만

안개 아래 신비롭게 숨쉬며 자리잡은 제주의 용천수를 볼 수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당일 조사한 용천수는 속개물, 절곡지물, 포젯단물, 산물남서시물 입니다.

 

  • 산물남서시물

수질 조사 모습


용천수 옆에 살포시 자리잦ㅂ은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 대흥란 입니다.


주변 전경


주변전경. 용천수를 둘러싸며 다양한 식물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물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용출량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많아보였습니다.


주변 전경입니다. 절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풀이 풍성하게 우거져 있습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물길 따라 많은 양의 용천수가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날씨가 안좋아서 사진이 잘 찍히지 않아 조금 아쉽습니다.

 

  • 포젯단물

용천수 주변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용천수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용천수를 찾아가는 조금은 험난한 길


주변에서 발견한 목이버섯


용출지점 아래에는 이렇게 많은 양의 물이 고여있었습니다.


용천수의 용출지점은 오염방지를 위해서인지 이렇게 천막천으로 가려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천막을 걷은 모습


용천수 주변전경


돌아가는 길. 안개 덕분에 숲 길이 더욱 운치있고 아름답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고고히 핀 타래난초

 

  • 절곡지물

용천수는 절 위쪽에 위치했습니다. 절에서 용천수를 끌어다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물 저장 탱크


가는 길목입니다.


멸종위기2급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용출량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 속개물


    속개물을 찾아가는 길.


가는 길에 흐르는 물길이 보입니다.


드디어 속개물을 만났습니다. 다가오는 자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하루종일 마냥 보고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속개물 뒷편 풍경입니다. 역시 너무나 멋집니다. 이러한 자연은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주변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수, 2020/08/26-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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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탄소 시대 그린인프라와 그린뉴딜

탈탄소 그린뉴딜 웹자보-수정후

환경정의와 환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은 탈탄소 시대를 맞아 회색인프라에서 그린인프라로의 전환을 위해 성찰과 방향을 모색하고, 그린뉴딜과 자원순환분야에서 전략과 사업을 논의해보고자 세미나를 준비했습니다.

  • 주제 : 탈탄소시대 그린인프라와 그린뉴딜의 전략
  • 일시 : 9월 17일(목) 오후 2시
  • 장소 : 추후공지(온라인 세미나 진행시 참석링크 발송)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화, 2020/09/08-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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