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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질병관리청장 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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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질병관리청장 정은경

admin | 토, 2020/10/10- 00:12

그는 전 국민을 걱정했지만, 전 국민은 그를 걱정했다.

코로나19 위기 국면을 맞아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시민들은 코로나19 대응에서 가장 신뢰하는 기관으로 질병관리본부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정 청장의 머리카락은 점점 더 희끗희끗해져 갔고 얼굴은 까칠해졌다. 첫 브리핑 때 그는 깔끔한 재킷을 입었지만 이내 노란색 민방위복으로 바뀌었다.

정 청장은 코로나19 환자가 처음으로 국내에 발생한 1월19일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대개 오전 7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다. 숙소는 질병관리청 옆 관사였다. 186일을 연달아 일한 뒤 7월24일 오후부터 25일까지 처음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그러나 다소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싶었던 코로나19는 8월 들어 또 다시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세가 이어졌다. “5월 연휴로부터 촉발된 2차 유행이 진행되고 있다”며 경고한 정 청장의 말대로였다.

시민들은 다시 정 청장만 바라보고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질병관리청으로 승격, 독립하면서 정 청장의 어깨도 더 무거워졌다. 정 청장은 취임사에서 “아직 우리는 태풍이 부는 바다 한가운데 있지만 질병관리청이라는 새로운 배의 선장이자 또 한명의 선원으로서 저는 여러분 모두와 끝까지 함께 이 항해를 마치는 동료가 되겠다”고 밝혔다.

 

메르스 때문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못 볼 뻔

정 청장은 1965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전남여고, 서울대 의대를 거쳐 서울대병원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의사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갈 수도 있었지만 정 청장은 공공의료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작은 1994년 경기 양주시의 보건소였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그는 전염병 신고 기준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1998년에는 질병관리본부의 전신인 국립보건원에 연구관으로 특채되면서 공직에 들어섰다.

2006년부터는 보건복지부로 옮겨 혈액장기팀장을 맡았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당시 노연홍 복지부 보건의료정책본부장(전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이 ‘삼고초려’ 끝에 데려왔다고 한다. 정 청장은 처음에 연구원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연구원에서 복지부로 넘어와 행정을 하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정 청장은 반대였다. 막상 자리를 맡은 뒤 업무 처리 능력은 탁월했다. 노 전 수석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정 청장이 업무를 맡은 이후 “대형 혈액사고가 사라졌다”고 밝혔다.

2009년에는 복지부 질병정책과장을 맡아 신종플루 대응에 참여했다. 본격적으로 감염병 업무를 맡기 시작한 셈이다. 2014년부터는 다시 질병관리본부로 돌아왔다. 2015년에는 질병예방센터장을 맡았고,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는 정부 대책본부 현장점검반장으로서 역학조사 과정을 지휘했다.

메르스는 정 청장에게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16년 감사원은 메르스 방역 실패의 책임을 물어 보건의료 분야 공무원 9명의 중징계를 요구했다. 정 청장은 이때 정직 처분을 받았다가 나중에 감봉으로 한 단계 낮은 징계를 받았다. 과도한 징계 처분에 공직사회를 떠난 보건·역학 전문가들도 있었다. 정 청장 역시 자리를 떠났다면 지금의 그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정 청장을 질병관리본부 본부장에 임명했다. 당시 국장급이었던 정 청장을 차관급인 본부장에 임명한 것은 2단계를 뛰어넘는 파격 인사였다. 정 청장은 본부장으로 임명된 이후 역학조사관 충원, 진단 검사 및 동선 추적, 위기단계별 전략 등 신종 감염병 대응 전략을 착착 진행했다.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정 청장의 준비는 빛을 발했다.

전문가들도 정 청장의 능력에 신뢰감을 표한다. 이재갑 한림대 감염내과 교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질병관리본부 본부장을 제안 받은 정 청장이 자신에게 “너무 책임이 큰 자리라 두렵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그때 놀랐습니다. 남자 공무원은 야망이 앞서서, 일단 수락하고 카리스마로 휘어잡는데… 이분은 책임질 생각부터 하시는구나. 정 본부장 리더십의 핵심은 ‘책임감’이에요. 그 자리에서 하루하루 책임의 기적을 이뤄가는 분이죠.”

박도준 전 국립보건연구원장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정 청장에 대해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우리나라 최고 방역 전문가”라며 “차관급은 보통 2년 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는 올해로 본부장을 맡은 지 3년이 됐다. 대체할 만한 전문가가 없다는 방증 아니겠나”라고 평가했다.

 

위기에 빛난 정은경의 브리핑

최근 한 현역 의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은경이 한 게 브리핑밖에 더 있냐”라고 비판해 논란이 됐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설사 ‘브리핑’밖에 없다고 해도 그 브리핑의 무게감은 컸다. 시민들은 정 청장의 말 하나하나를 무거운 신호로 받아들였다. 작가 김훈은 <한겨레>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늘 현실의 구체성에 입각해 있었고, 당파성에 물들지 않았고, 들뜬 희망을 과장하지 않았으며, 낮은 목소리로 간절한 것들을 말했다. (…) 모두의 힘을 합쳐야 희망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거듭된 호소는 가야 할 방향을 설득했다. 그는 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했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말하기는 매우 희귀한 미덕이다. (…) 나는 날마다 정은경 청장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같은 미증유의 상황은 종종 사람들이 이성적 판단을 하기 어렵도록 만든다. 방역의 최고 책임자가 우왕좌왕하거나, 팩트를 자꾸 바꾸거나, 상황에 따라 감정적인 기복을 보였다면 시민들은 더 불안에 빠졌을 것이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한국의 방역 총 책임자가 정 청장이었다는 사실은 행운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들은 정 본부장이 그 사실을 믿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정 본부장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무엇보다 정 청장 스스로의 자세가 신뢰감을 줬다. 감염병 위기 경보가 심각 단계로 격상됐던 지난 2월, 정 청장은 머리 감을 시간도 아껴야 한다며 짧은 단발머리를 숏컷으로 다시 한 번 잘랐다. 브리핑 때 “1시간도 못 주무신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묻자 “한 시간보다는 더 잔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 세계가 정 청장과 한국의 방역에 찬사를 보낼 때도 자신의 치적에 대해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인터뷰는 가급적 피하고 ‘국민에게 보고한다’는 원칙으로 브리핑에 집중했다.

지난 5월 <시사저널>이 정 청장의 100일간 브리핑 내용을 분석한 결과 정 본부장에 사용한 단어는 대개 감정이 배제된 ‘중립적 표현’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 이를테면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코로나19 검사 건수를 축소한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 “사실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린다”며 단호한 어조를 취했다.

대신 그의 말 속에는 정확한 수치들이 가득하다. 확진자가 급증했을 때도, 한 자리로 줄었을 때도 ‘안심할 수 없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보냈다. 착오나 실수는 즉각 수정하고 모르는 부분은 ‘확인하고 알려드리겠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이태원 클럽 관련 집단 발병 사태가 벌어졌을 때는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정 청장의 브리핑이 단순한 사실 전달만은 아니었다. 그는 “마스크 자국이 선명한 의료진의 얼굴을 떠올려달라”고 호소했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의 방역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특집 브리핑도 열었다.

이인숙 ‘플랫폼9 3/4’ 이사는 정 청장에게 있는 것과 없는 것을 5가지로 정리했다. 없는 것 5가지는 이렇다. “① 정은경이 없다 ② 희망고문과 과장이 없다 ③ 전문용어가 없다 ④ 뜨거움과 차가움이 없다 ⑤ 정치색이 없다” 있는 것 5가지는 이렇다. “① 데이터와 팩트가 있다 ② 잘못과 한계가 있다 ③ 부탁과 당부가 있다 ④ 공감과 감사가 있다 ⑤ 원팀이 있다” 어쩌면 쉬워 보이는, 기본적인 원칙처럼 보이지만 아홉 달 가까이 일관성 있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정 청장은 봉준호 감독과 함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오랜만에 확진자 수도 두 자리 수를 유지하는 추세가 계속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 청장은 감염 위험을 경고하는데 주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라는 문구를 인용해 타임지에 직접 정 청장에 대한 소개를 썼다. “정 청장의 성실성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질 가치가 있는 이야기, 세계 곳곳에서 코로나와 맞서는 수많은 ‘정은경’들에게,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은 인류 모두에 영감을 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청장은 지난 7월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종결되고 나면 무엇이 제일 하고 싶으냐는 당시 진행자 박원순 서울시장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일단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웃음) 국민들께서도 그러시는 것처럼 저희도 예전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는 것 같습니다.”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기 위해, 아마 시민들은 오늘도 정 청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참고자료

[시사저널 2020. 5. 1] 정은경 100일 브리핑 분석 – 상황은 흔들려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중앙일보 2020. 9. 16] 돈 안되는 시골의사로 26년…’코로나 헌터’된 문학소녀 정은경

[동아일보 2020. 7. 30] 186일 연속근무후 첫 휴가… 정은경 “집근처서 안전하게”

[WSJ 2020. 4. 4] Thank God for Calm, Competent Deputies

[한겨레, 2020. 9. 14] 김훈 거리의 칼럼 – 정은경

[조선일보, 2020. 2. 25] “머리 감을 시간도 아껴야” 숏컷한 질본본부장

[조선일보, 2020. 9. 13]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 “희망 버려야 살 길 생겨, 코로나 2~3년 더…생활 태도 바꿔라”

[김현정의 뉴스쇼 2020. 7. 3] 정은경 “국민이 백신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인숙의 새로운 발견19>‘닥터 코로나’ 정은경에게 없는 5가지, 있는 5가지

<신동아 2020. 3. 28> 정은경 본부장이 날마다 직접 브리핑하는 이유

 

황경상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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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이범은 불광동 사람이다.

원래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지만(1957년생) 7살 때 서울에 올라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 동네에서 나왔고, 평생 이 동네에서 일하다가 이 동네에서 죽었다. 놀기도 이 지역에서 많이 놀았다. 주말이면 지인들과 불광역에 모여 북한산에 올랐고, 불광사 길로 내려와 길목에 있는 연신내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죽어서도 이 동네에 묻혔다. 그의 유골은 지금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구파발성당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말하자면 민주화운동권이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를 입학한 이후에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징역을 살았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시대에 1980년, 1985년, 2번 징역을 살았다. 그밖에도 여러차례 경찰에 붙들려 갔고, 구류도 살았다.

또 그는 출판인이었다.

1982년 결혼하고 생계수단으로 번역실을 시작했고, 출판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85년부터는 백산서당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하여 탄탄한 사회과학 출판사로 키웠다. 죽을 때까지 이 출판사에서 수백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본인이 여러 권의 책을 직접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이범은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정책실 차장으로 참여했고, 민중당 해체 후에는 1996년부터 나라정책연구회라는 정치단체에서 사무국장, 상근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범은 한편으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2001년 서영훈 한국적십자사 총재를 모시고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창립을 도왔고, 이어 서영훈 총재가 대표로 있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의 운영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몸살림운동본부를 만들고 초대 연구소장, 연신내수련원장등을 하면서 몸살림운동을 전파했다.

이범은 자신의 시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실천을 모색했다. 그는 58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불꽃같은 열정’과 ‘사심 없는 직선적인 삶’은 지금도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학창생활과 학생운동

1973년 이범은 경기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 시험으로 경기고를 들어간 마지막 세대였으니 당시로서는 꽤 수재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식들 교육을 서울 가서 시켜야 한다’고 상경했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재미없는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에도 빠지고,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정동교회에서 함석헌 선생께서 하시던 『장자』 강의도 들었다. 한때는 쇼비니즘적인 민족주의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때는 낮이고 밤이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잘 이해도 못하는 철학과 역사,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게 제일 큰 낙이었다.’(이범의 저서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국회의원 노회찬, 대안학교 이우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정광필, 언론인 고성국 등이 이범의 경기고 동기동창이었다. 경기고 동창 최만섭은 이범이 ‘머리를 박박 깎고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도서관에서 두꺼운 사상전집을 읽고 있는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머리가 빨리 트였던 이 경기고 동창들은 함께 몰려다니며 박정희정권을 비판하는 연설회나 강연을 들으러 다녔고, ‘문제의 뿌리를 천착하기 위해’ 철학공부를 함께 하기도 했다.

1976년도에 이범은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입학 후 무슨 사정에선가 1년을 휴학하고 1977년에 1학년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1년 후배 77학번들과 가깝게 어울려 지냈다. 이범은 고등학교 때 가입한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대학 입학 후에도 열심히 했는데, 그 안에 ‘도산연구회’라는 이념서클을 조직하여 리더로 활동했다.

2학년이 되는 1978년 6월 이범은 서클에서 광화문에 유신반대 데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광화문에 나갔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이 도산연구회를 했던 정경대의 송광의와 친구 이승환 등이 이때 구속되었다. 다행히 이범은 단순가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때의 경험이 이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후 이범은 본격적으로 반독재 반정부활동에 뛰어든다.

 

지하신문 「소리들」과 두번의 감옥생활

78년 가을에는 고대 내에서도 선배 고광진, 천영초, 정경연 등의 시위가 있었다.

박정희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이범은 그해 가을 광화문시위 때 유치장에서 만났던 백병규, 정태헌, 장동현 등과 함께 지하신문 「소리들」을 발간할 계획을 세운다. 77학번 백병규와는 1학년 말에 함께 그룹스터디도 했고, 2학년 초에 하숙도 함께 한 적이 있어 서로 의기상통하는 관계였다. 이범은 1년 선배인 김상복과 전체 기획을 의논하고, 구체적인 신문 제작과 배포 작업을 백병규 등 77학번 3명과 함께 했다.

제작은 원지를 철필로 긁어 가리방으로 인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해서 수백부를 인쇄하고, 배포는 고대신문 우편함을 열고 우편물을 수거하여 주소를 확인한 다음 그 주소로 일일이 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그밖에도 서울 시내와 학교 이곳저곳에 몇 부씩 뿌렸다.

지하신문이 학교와 정보기관에 들어가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악명 높은 성북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의심가는 학생들을 한명씩 불러 취조하여 주모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범은 사태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팀원들과 의논하여 지하신문 발간은 1호로 마감하고 등사기 등 관련물품은 모두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1979년 2월 지하신문 제작팀 한 사람이 시국재판에 참석했다가 정보과 형사 눈에 띄었다. 형사들에게 집을 털렸고, 집에서 유인물이 발견되었다. 결국 이범과 김상복, 백병규, 정태헌 등 5명이 모두 검거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다가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그해 11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이범은 11월 24일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또한번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다. 8.15 특사로 먼저 감옥에서 나왔던 백병규, 정태헌 등과 함께 YWCA회관에 갔다가 현장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붙들려 육군본부 보안사분실로 잡혀 간 것이다. 다행히 구속까지는 가지 않고 즉심에 회부되어 구류 29일을 받았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이승환, 백병규 등과 함께 활동했고, 한편으로 새로 구성된 학생회에서 신계륜 학생회장과 함께 학생회 실무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5.17 계엄확대조치로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일제검거령이 떨어지자 이범도 일단 피신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범은 광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학살현장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학생회 활동과정에서 맡아 가지고 있던 돈을 광주시민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광주로 내려가는 차 속에서 검문에 걸려 연행되었고, 결국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게 된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7개월만인 그해 12월 석방되었다.

 

김철미를 만나 결혼하다

78년 이후 구속과 감옥생활을 거듭하던 중에 이범은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난다. 80년 포고령 위반으로 감옥 살이하던 중에 한 아름다운 여대생이 면회를 왔다. 이대 4학년에 다니던 김철미였다. 김철미 역시 이대에서 횃불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고, 학생회에서 간부도 맡은 경력이 있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김철미는 78년부터 향린교회에 다녔는데 80년 무렵부터 이범도 이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만난 적은 없었던 걸로 김철미는 기억한다.

80년 이범이 구속되자 교회에서 옥바라지 할 사람을 찾았고, 김철미가 자원해서 책을 넣어주면서 옥바라지에 나섰다. 김철미는 이범의 친구 송광의에게 부탁해서 이범 어머니를 소개받고 가족과 함께 면회도 다녔다. 80년 12월 이범이 석방되어 나오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범 집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김철미를 며느리 될 사람으로 인정했다.

두 사람은 82년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그의 고등학교 절친인 노회찬과 최만섭이 홍제동 옥탑방 신혼방을 정성스럽게 도배해 주었다.

 

출판인 이범, 그리고 시련

이범의 출판인 경력은 1984년 고대 1년 선배 서원기 사장의 강권으로 백산서당 편집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생계수단으로 다산출판사에서 잠시 일하기도 하고, 금강기획이라는 번역실을 차려 번역에 종사한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출판일에 뛰어든 것은 이 때부터였다. 1년 후 1985년 서원기가 민청련 집행국장으로 가면서 이범이 아예 백산서당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시작한다.

이범은 출판사 운영을 통한 지식계몽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적극적인 한 분야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한다. 아내 김철미도 번역에서부터 편집, 교정 등 모든 일을 옆에서 도왔다. 그의 오랜 친구 이명식, 이승환, 고성국 등이 편집위원으로 책의 기획을 도왔다. 이승환은 『경제사 입문』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여 백산서당 살림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재화라는 필명으로 『한국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백산서당은 이후 수백종의 책을 내면서 사회과학출판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출판사로 자리잡았다. 『전공투』,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공산당선언』, 『철학의 기초이론』 등 수만권씩 팔리는 히트작도 여러권 냈다.

그러나 출판인으로서 시련이 찾아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동안 사회과학 출판계가 활기를 띠었다. 독재시기의 족쇄가 어느 정도 풀려 국가보안법의 법망 속에서도 공산권 저작들의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이때 백산서당에서 북한의 공식출판물인 ‘주체사상 총서’를 입수하고 몇 개 출판사와 합동으로 출판하기로 약속했다. 총 10권 중 백산서당이 선두타자로 1-4권을 내기로 했다. 원전을 가져다 타이핑해서 1-4권을 1만여부씩 찍었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는 예상외로 신속하고 강력했다. 책은 모두 압수당했고, 사장 이범에 대한 구속령이 떨어졌다. 이 일로 이범은 몸을 피해 가까스로 구속은 피했으나 장기 수배상태로 들어갔다. 결국 1990년 공식적 대표로 되어 있는 김철미가 대신 구속되는 조건으로 수배에서 해제되었다. 이 일로 김철미는 7개월이나 감옥을 살았고, 이범은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재야운동, 민중당, 공동선시민운동

출판사를 경영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이범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1983년 9월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민청련이 창립되자 이범은 고려대 70년대 중반 학번을 대표하여 민청련의 기별대표조직에 참여했다. 그리고 고대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간 노동운동조직들과도 연계를 가지고 지원했다.

1985년 이범은 이른바 ‘다산·보임사건’에 연루되어 김상복, 고성국 등과 함께 구속된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는 전두환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용공조작사건의 하나이지만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산보임사건의 구속자들은 노동현장과 연결된 일종의 정치조직, 정당까지 내다보는 한 정파조직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당국의 발표는 완전 조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의 발표처럼 간첩 활동을 한 친북조직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1심에서 7년, 2심에서 3년을 선고 받았고, 2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이범은 재야운동 뿐 아니라 정당정치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1990년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등을 중심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었을 때 이범은 수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실 차장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참여한 후에는 당 활동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 지도부와 당 노선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언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주변에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범은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대통령후보 선거활동까지 돕고 민중당을 떠났다.

1993년 민중당이 해체하자 이범은 민중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른바 ‘민중당 우파’들과 함께 나라정책연구회를 만들고 사회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모색했다. 이범은 이 연구회에서 발간한 월간 ‘21세기 나라의 길’ 책임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1996년부터는 나라정책연구회 사무국장, 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되는 세계사적 대격변을 겪고 나서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범 역시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재정립하려는 나름의 치열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정책연구회 활동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흥사단 운동의 대선배이면서 공동선운동을 이끌었던 서영훈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98년 백산서당에서 『자유시민 서영훈의 세상읽기』, 『벽오동 심은 뜻은』 등 2권의 서영훈 선생 책을 출간했다. 이범은 서영훈의 생명질서사상에 감명을 받고 서영훈 선생의 공동선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1년에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

이런 이범의 사상적 실천적 모색은 2003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백산서당, 2003)가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서울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거울 때 그는 한 선배의 소개로 전남 곡성의 한 암자에 들어가 20여일간을 머물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회고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토론했던 주제들을 화두로 삼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 제시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서양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도 아니고 동도동기(東道東器)로 하자는 것이다 바로 탈구입아(脫歐入亞)가 우리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버리고 서양을 목표로 해서 서양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세태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깊은 사상과 문화에 대한 긍지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한동안 맑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이범 자신의 사상적 편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은 모두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상이 정확하게 맺힐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야 우리가 약소민족, 변방의 위치에서 벗어나 세계 문명을 창조하고 지구촌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 – 배워서 나눠주는 운동

2003년 어느 날 이범은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특히 등과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몇 군데 병원을 옮겨 다니며 물리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물리치료를 잘 한다는 김철을 소개했다. 김철은 이범의 굳어 있는 근육들을 풀어주고, 몸을 펴는 몇 가지 운동을 권했다. 김철 말대로 몸을 펴는 운동을 꾸준히 하자 못견디게 아픈 통증이 신기하게 씻은 듯 사라지고 건강이 돌아왔다. 이범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경험이었다.

이범은 이런 체험을 혼자만 누릴 수 없고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범은 김철을 모셔와 출판사가 있는 홍제동 2층에서 운동지도를 받았다. 그러다가 김철과 의논하여 아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수련원을 내기로 했다. 사무실을 얻는 데는 정병문, 전종덕, 박성규, 송종환 등 골목산악회 선후배들이 십시일반 일조를 했다. 이범은 김철을 도와 수련원 안에서 수련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몸살림 수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전파하는 데 진력했다. 2005년에 『몸의 혁명』, 2006년에 『김철의 몸살림이야기 상,하』 등 3권의 책을 김철의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2006년쯤에는 연신내에 수련장을 마련하고 초대 수련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몸살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저술활동과 더불어 활동사범을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09년 이범은 그동안의 경험과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백산서당, 2009)가 바로 그것이다.

이범은 한동안 이 몸살림운동에 전력을 투구했다. 선후배 지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소문을 듣고 이범의 수련원을 찾아왔다. 이범은 자신을 찾아온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성심껏 몸을 풀어주고, 그들에 맞는 운동을 찾아 권유하고, 경과를 체크해줬다. 때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치료도 해주었다. 몸 치료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범은 암이나, 중풍환자들까지도 치료해 효과를 확인했고, 구완와사나 크론병 같은 희귀병에도 자신의 치료법을 적용해 효과를 보았다.

이범의 혼신을 다한 노력으로 몸살림운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몸살림도장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고, 미국, 영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범은 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몸을 돌보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다녔다. 이렇게 몸살림운동이 확산되면서 향후 운영방침을 놓고 김철과 의견차이가 생겼다. 이범은 이 운동을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동호회 중심의 비영리 운동단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처음에 이범을 도왔던 지인들조차도 이범에게 이 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영리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이범의 생각은 확고 했다. 그는 자신의 방침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몸살림운동의 진로를 둘러싼 김철과의 의견 차이는 결국 조직 내의 갈등요소가 되었다. 결국 이범은 숙고를 거듭한 결과 2008년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비영리단체로서 몸살림운동 동호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2011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사)몸살림운동협회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기존 ‘몸살림운동’과 상표권 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2013년 ‘몸펴기생활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08년 동호회 창립취지문을 보면 당시 이범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은 사람들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 건강해진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자세만 바르면 적어도 큰 병에는 걸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 설사 큰 병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몸만 펴면 쉽게 나을 수 있다. (중략) 몸펴기생활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배워 이웃에 살고 있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몸살림운동에서 몸펴기생활운동으로 정립해 나가는 과정은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승을 버린 패륜아라는 등 이범에 대한 갖은 악선전과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범이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술수를 모르는 고지식한 이범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조직적으로 분리해 나와 ‘몸펴기생활운동’이라는 동호회 운동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범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술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몸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몇 시간씩 온몸에 진이 빠지도록 도움주기를 했다. 이런 무리한 생활은 이범의 건강을 급격히 무너뜨렸다.

 

골목산악회

1990년대 초 이범이 사는 불광동 지역에 민주화운동권 선후배들로 골목산악회라는 산행모임이 조직되었다. 서울대 73학번 정병문, 전종덕, 오세구 3명이 시작했는데, 얼마 후 이범과 우리교육 박성규 사장(서울대 72학번)이 합류했고, 거기에서 알음알음으로 이영창(서울대72), 이명식(고대 76), 나상억 교수(서울대 78)등이 합류해 1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아침 7시면 불광사 앞에서 만나 북한산을 등반하고 12시쯤 내려와 불광사 골목길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이범이 산악회 총무를 맡았는데, 산행날 새벽 6시면 회원들의 집에는 이범이 회원들을 깨우는 전화벨소리가 어김없이 울렸다.

토요일이 휴일이 되면서 골목산악회 모임날짜도 토요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모이는 시간도 오후 2시로 변경했고, 5시쯤 하산해서 뒷풀이를 했다. 시간을 바꾼 것은 뒷풀이가 너무 길어져 술 마시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골목산악회는 한때 회원이 40-50명, 산행에 모이는 사람이 15-2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2003-4년 쯤부터는 민청련산악회가 여기에 합류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함께 산행했다. 골목산악회는 여전히 매주 어김없이 모였다.

2005년 4월경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금강산 세존봉 산행이 가능해지면서 골목산악회 뒷풀이에서 우리도 금강산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금강산지역 남북협력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병호(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가 주선하고 민청련동지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와 총무 한영수가 금강산 등반대 조직에 나섰다. 처음에는 가볍게 버스 한 대에 30-40명 정도 갈 예정으로 시작했으나 이 소문이 퍼져 너도나도 신청하는 바람에 결국 신록이 푸르른 2005년 5월, 138명이나 되는 대군이 버스 4대에 나눠타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이범과 그 아들 재승군도 여기에 동승했다.

이 산행에서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했다.

우리 등반대는 전날 금강산호텔 숙소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금강산 등산에 나섰다. 잔뜩 흐리고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산행을 시작했는데 점차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우리 눈앞에 금강산의 비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4시간 만에 세존봉 정상에 오른 우리는 끼리끼리 삼삼오오 흩어져 준비해간 점심식사를 했다.

나도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5월의 빛나는 신록이 갑자기 군청색 푸르죽죽한 색깔로 변했다. 옆에서 아내가 놀래서 준비해간 우황청심환을 먹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등반대 중에서 젊은 20대 청년 둘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 옆의 너른 바위로 옮겨 눕게 했다. 그리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신록의 색깔이 서서히 원래의 색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아마도 전날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산행하면서 가벼운 뇌졸중이 왔던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뜻밖에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큰 신세를 졌는데, 이들이 알고보니 이범의 몸살림 연신내수련원에서 수련하는 이범의 둘째아들 재승군과 또 한명의 또래 청년이었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이범의 몸살림이 내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골목산악회와 민청련산악회의 합동산행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계속되고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이범과 함께 오랫동안 골목산악회를 같이 하며 옆에서 지켜봤던 박성규 사장은 이범을 ‘순수한 사람’, ‘원칙을 정하면 타협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범의 최초 감옥 동기였던 백병규는 그를 ‘대륙풍이 있는 사람’이고, 소박하고 품이 넓은데다 세상과 사람의 근원을 천착하는 사람으로 평한다. 친구 이승환은 그를 바둑으로 치면 포석이 강한 ‘선이 굵은’ 친구였고, 지적인 탐구가 왕성하고 죽을 때까지 사상적 실천적 탐구를 계속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아내 김철미는 이범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잔머리가 없고, 2번 3번이 없고, 항상 직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속정이 깊고 항상 가족과 아내를 걱정했던 사람, 눈물이 많아 영화를 보면서도 잘 우는 사람으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다

이범에게는 그 이전부터 신병으로 부정맥이 있었다. 그런데 몸펴기생활운동이 독립하던 2013년 무렵부터는 그 증상이 심해졌다. 자다가 깜짝깜짝 놀랬고, 과묵한 그가 아내 김철미에게 자주 고통을 호소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몸살림운동을 하면서부터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을 해오던 터라 이범은 자가치료와 운동을 할뿐 병원은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몸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하면서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아내와 가족들이 아무리 권해도 병원 신세를 지려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성모병원 의사로 있는 친구를 찾는 정도였다.

그러다 2013년 말 어느 날 이범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쓰러졌다. 2014년 3월 경 병세가 심해져 가족과 친구들이 나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며칠 안가 이범은 병원을 탈출해 나왔다. 그리고 한사코 집에서 자신이 치료하는 게 낫다고 고집을 부렸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고 심부전으로까지 발전하자 8월에 가족들이 모두 나서 통사정해 양길승 원장이 있는 녹색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이미 병세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범은 원래 비종교였으나 그 무렵 새로 교황에 취임하여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 최헌걸이 보내온 교황 화보집에서 교황 브로마이드를 떼어 병상 머리에 붙이게 했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때때로 간성혼수 상태에 빠지는 상황이 되자 이범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세례받기를 청했다. 친구 이승환에게 부탁하여 수원교구 홍창진 신부를 모셔와 약식세례를 받았다. 친구 송광의가 대부를 섰다. 그리고 2-3일 후 2014년 10월 27일 오전 11시 10분 이범은 아내 김철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골은 화장하여 구파발성당 요셉관에 안치하고, 그 중 일부를 지인들이 그가 자주 다니던 산행길 옆 바위, 산사, 바다 등에 뿌렸다. 자연 속에서 편안히 안식하라는 바램이었다.

수, 2019/10/0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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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현은 2014년 4월 친구 김태경이 죽었을 때 장례식 추모 글에서 김태경을 이렇게 평했다. “출판인으로, 고난 많았던 민주화의 투사로, 탁월한 미식가요 사통팔달의 인문학자로 일생을 풍운아로 살았던 그” 세상에는 법무장관을 지낸 강금실의 전 남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우리 출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출판인이자 60년 한 생애를 ‘굴곡진 우리 역사 한 가운데서 불꽃처럼 살다 간’ 불굴의 민주화운동가였다.

칼럼_190116

 

『교수대의 비망록』

죽기 2년 전인 2012년에 ㈜도서출판 다빈치에서 김태경 자신의 이름으로 낸 『교수대의 비망록』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체코의 언론인이면서 문예평론가였던 체코 공산당 간부 율리우스 푸치크(Julius Fucik 1903~1943)가 체코에 침공한 나찌에 맞서 지하에서 해방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 당하기 직전 까지 쓴 비망록과 옥중편지를 모아놓은 것이다. 200쪽 정도의 작은 이 책이 평생 출판인으로 수많은 두꺼운 명저들을 출판한 김태경에게도 특별히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김태경은 이 책의 발문을 직접 썼다. 여기에서 그는 푸치크의 죽음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자유혼, 미래에 대한 낙관과 동지에 대한 신뢰,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경탄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는 수식어로 비하하고 낙인찍는 모든 인간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푸치크를 보라고. 그러고도 생각이 변치 않는다면 그 가시면류관을 나에게 달라고. 같은 류의 존재로서 억압받고 학대받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빨갱이‘로 낙인찍는다면 그 낙인을 나는 내 삶의 훈장으로 받겠노라고.

 

사실 김태경의 삶은 철의 규율을 추구하는 현실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학생시절부터 그와 함께 활동했던 김영현, 이을호는 그를 ‘허무주의자’라고 평했다. 그리고 정치사상적으로는 아나키스트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어째서 철저한 공산주의자 푸치크에 대해서 저렇듯 열렬한 찬사를 보냈을까?

김태경은 감옥을 두 번이나 간 민주화운동가이면서도 천하가 알아주는 미식가여서 장안의 맛집이란 맛집은 그의 발길이 거쳐가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뒤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조에 따라 결혼 후에도 아이조차 가지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라고 할 만큼 철저했지만 사회적 명성이나 출세 같은 세속적 가치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어떤 권력이나 권위 앞에서도 당당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믿는 동료나 후배들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냈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하면 서슴없이 주머니를 털어 도와 주었다.

김태경 장례식에서 호상을 맡았던 친구 양춘승은 김태경에 대해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을 수사하던 수사관들이 양춘승의 본가가 있는 장흥에 들이닥쳤다. 사건 관련자로 수배 중인 양춘승의 후배를 잡기 위해서였다. 당시 학내시위로 2년여 수형생활 끝에 석방되어 집에서 요양 중이던 양춘승은 간발의 차로 체포를 면하고 맨몸으로 산을 넘어 서울로 도피했다. 무슨 영문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 엮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도착한 양춘승은 마지막으로 수중에 남은 동전 2개로 김태경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김태경은 두말할 것 없이 택시를 타고 급히 달려와 당시로는 거금이었던 10만원을 주고 갔다. 양춘승은 그 돈으로 방을 얻고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양춘승은 두고두고 그 일을 잊지 못했고, 김태경이 죽자 호상을 자청하여 사흘을 내리 빈소를 지켰다.

2014년 3월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로 문병 온 친구들은 김태경에게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당찬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극도로 쇠약한 중에서도 끊임없이 불의한 정권에 대해 분노하고, 가야할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를 위로하려는 친구들의 농담을 받아넘기며 어린아이처럼 웃곤 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한 그의 모습이 교수대를 눈 앞에 둔 푸치크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급조치시대, 대학에서 루카치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읽다.

김태경은 1954년 진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네 살 때 일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여 계모 밑에서 동생 태성이와 두 형제가 화곡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미동초등학교와 서울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다.

그 해는 박정희가 1972년 유신 쿠테타 이후 일인 독재체제를 강화하면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비판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고 옥죄던 숨막히던 시기였다. 바로 그 해 4월에 천여명의 민주인사와 청년 학생들을 구속한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 1975년 5월 장기독재체제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서울농대 김상진이 독재에 항거해 할복자살하고 서울대에서 5.22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1년 반 동안 독재정권의 혹독한 탄압 속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도 기관원들이 상주하여 감시하는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은 지하로 잠복하여 암중모색하였다.

김태경 역시 입학하자마자 인문대 선배들의 학생운동 흐름에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당시 인문대학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태경은 천재로 알려진 철학과 이을호와 글솜씨가 뛰어나 나중에 소설가가 된 철학과 김영현, 국문과 김사인(시인, 현재 동덕여대 교수) 등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들은 학문적 관심사도 비슷했지만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식을 공유한 동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3학년 때인 1976년부터는 인문대 학보 편집실에서 자주 만났다. 당시 김영현과 김사인이 학보 편집위원으로 있었는데, 거기에 김태경과 이을호가 합세하여 편집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다. 이 시절이 김태경에게는 사회과학 이론과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루카치와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을 함께 읽었는데, 텍스트가 되는 책들은 대체로 김태경이 공급했다.

김태경은 대학시절부터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는 대학도서관을 샅샅이 뒤지고, 외국 원서 전문서점과 청계천 헌책방들을 섭렵하여 당시로는 귀하기 힘들었던 철학/미학 책들, 그리고 금서가 된 사회과학 원서들을 구했다. 당시 서울대도서관에 유일하게 고속복사기가 있었는데, 김태경은 이 복사기를 이용하여 이 책들을 복사하여 복사본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은밀히 팔았다. 주로 루카치, 헤겔, 모리스 돕, 카우츠키 등의 영어 원서들이었는데, 이 책들은 모두 당시에 당국에 의해 금서로 분류돼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노란 커버를 씌운 이 책들은 당시 학내 이념서클에서 활동하던 운동권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김태경은 책을 팔아 얻은 수익금으로 항상 주머니가 풍성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가난한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는 물주였다.

 

반유신 시위 모의와 투옥

1976년 12월 8일 이범영, 박석운, 백계문 서울법대 삼총사의 유신철폐 시위사건은 철옹성 같은 유신체제에 균열을 냈다. 한동안 잠잠했던 학생운동권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1977년 4학년이 된 김태경과 편집실 친구들 역시 이 저항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이 해 9월 김태경과 김영현, 이을호, 김사인 등 4명은 서울근교 일영 장자원에 가서 10월 중에 학내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인문대 74, 75학번들 중에서 함께할 사람들을 물색하고, 시위 선언문 초안은 김영현이 작성하여 이을호 자취방에 보관해 두었다.

이들의 시위계획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연기되었다. 그해 10월 서울대 26동에서 사회과학대학 심포지움이 대학당국의 저지로 무산되었는데,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자연적인 반정부시위로 발전하였다. 이 시위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수백명의 학생들이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연행된 학생들 속에 김태경과 김영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구속은 면했지만 구류 처분을 받아 15일 만에 석방되었다. 또 석방된지 얼마 안 된 11월 11일, 국사학과 김경택 등이 주동한 학내시위가 서울대 도서관을 점거한 채 수천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유신독재 철폐의 함성으로 서울대 교정을 뒤흔들었다.

이런 저런 사유로 지지부진하던 김영현 김태경 그룹의 시위계획은 결국 불의의 사건으로 무산되게 되었다. 11월 16일 김영현이 서울대 후문 낙성대 쪽에서 이을호에게서 등사기를 받아들고 나오다가 서울대 상주 기관원의 검속에 걸려 체포된 것이다. 김영현이 관악서로 붙들려 가고, 이어 김사인과 이을호도 차례로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에 앞서 김태경의 집에도 경찰이 들이닥쳐 김태경을 체포함과 동시에 집안에 쌓여있는 수십 박스의 책들을 압수해 갔다. 이 속에는 김태경이 공들여 수집한 수십 종의 사회과학 원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지 자체만으로도 몇 년씩 징역을 살아야 하는 금서들이었다. 그런데 압수된 장서 속에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같은 도색잡지들이 있었는데, 이런 책들에 눈이 팔린 기관원들이 금서는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단순 압수물로 넘어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 가슴 조마조마했던 김태경이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이 불발 시위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이들과 별개로 진행되던 75학번 반병률, 이증연, 배남효 등의 시위모의사건을 합쳐 <불온 유인물 제작배포 미수사건>으로 확대했다. 이들 서울대 74,75학번 10여명은 한 묶음이 되어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태경은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구속 후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던 김태경은 1심 재판이 시작되면서 서울구치소로 옮겼다. 이후 항소심 진행 중에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어 1년 6개월로 감형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었다.

 

광화문 시대 – <민중문화사>와 양서조합운동

김태경의 출판 경력은 1979년 광화문에서 시작한다.

그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고대 출신 김진영과 함께 민중문화사라는 조그만 사회과학 서점을 냈다. 이 서점에서는 주로 대학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진보적인 사회과학 서적들 뿐만 아니라 루카치나 모리스 돕, 폴 바란 등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원서를 복사본으로 만들어 팔았다. 물론 이런 책들은 대개가 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당시 진보적 변혁 이론에 갈급했던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이런 책들을 구할 수 있는 민중문화사는 반드시 들러야하는 필수 코스였다.

물론 이런 책들은 서점 진열대에 놓지 않고, 안쪽 골방에 숨겨 놓고, 믿을만한 고객이 찾을 때만 꺼내서 팔았다. 그리고 국민연합이나 민청협 등 재야운동권에서 나오는 유인물도 이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의 엄혹한 철권통치가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이 작은 서점이 재야 민주화운동권의 정보가 공유되고 유통되는 거점 구실을 한 것이다.

이 당시 이 서점을 찾는 많은 젊은이들 중에 강금실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서울법대 4학년으로 이 서점에서 김태경을 처음 만나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거의 매일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김태경과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2-3년 후 결혼으로까지 발전한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1980년 5월까지 ‘서울의 봄’이라는 잠시 동안의 열린 공간이 열리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서구의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공부하는 열풍이 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양서조합운동도 그런 흐름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태경은 이을호, 김영현 등과 함께 양서협동조합을 만들고, 헤겔 철학,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회변혁 이론, 루카치의 미학이론 등에 관한 책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책들은 김태경이 공급했고, 그 근거지가 민중문화사였다. 이런 양서조합운동은 부산, 광주, 전주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광주의 녹두서점, 전주의 금강서점 등이 지역근거지의 역할을 했다.

김태경의 민중문화사는 양서조합운동을 통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게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넘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민주변혁운동의 이론과 실천의 과학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했다. 민중문화사를 효시로 서울에도 박경희 사장이 세운 광화문 논장서점이 문을 열었고, 서울대, 연대, 고대 앞에도 사회과학 전문 서점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신촌시대 – <오늘의 책>과 <이론과 실천>

1985년에 김태경은 광화문 민중문화사를 접고 신촌 연대 앞에 <오늘의 책> 이라는 이름으로 당시로서는 꽤 큰 서점을 오픈했다. 이곳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운동권 학생들의 약속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이곳은 양질의 사회과학 서적과 문화비평서들을 소개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기획도서전을 열었다. 소설가 공지영, 백원담(백기완 선생 딸, 현재 연대 중문과 교수) 등도 이 서점의 단골이었다. 이 서점의 골수단골로 당시 서점에서 살다시피 했던 연대 국문과 학생 김재환(현재 헝가리한국문화원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서점은 좋은 책을 선별하여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오늘의 책>의 존재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김태경은 서점운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980년대 초 출판사 지청사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회과학 출판사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1985년에는 백원담 씨가 운영하던 <이성과 현실>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해 운영했다. 그러다 이듬해 1986년 <이성과 현실>을 편집장으로 일하던 최청수(현재 출판사 <자작나무> 대표)에게 넘기고, 본인은 마포구 신수동에 출판사 <이론과 실천>을 설립해 국내의 대표적인 철학/예술 분야 출판사로 키웠다.

<이론과 실천>는 한국 출판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슬람문명사’, ‘음악이 있는 풍경’ 등을 출간해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설립 당시 미학과 출신답게 책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 그는 삼청동에서 부부가 운영하던 북 디자인 회사에 표지를 맡겨 당시로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교보문고>에서 주는 ‘올해의 북디자인상’을 받기도 했다.

서점 <오늘의 책>과 출판사 <이론과 실천>은 출판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면서 경영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김태경은 확대된 자금력을 바탕으로 영세 출판사 4-5개를 합병하여 사업 규모를 키워 나갔고, 그가 기획한 책들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사업의 황금시대’를 열어나갔다.

1986년 김태경은 사업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 속에서 학생시절부터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사업에 착수했다. 마르크스 <자본>의 독일어 원서 번역본 출판이었다. 이 책은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에서 금서로 되어 있는 책이라 출판 자체가 위험부담이 컸다. 게다가 총 9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이라 번역 출간하는 데에 적지않은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김태경은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노력을 이 사업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5년만인 1990년 드디어 한국 최초로 <자본> 전 9권을 완간하였다. 이것은 군사정권이 사상통제의 수단으로 출판계에 드리웠던 오랜 금기를 깨뜨리고, 국내 마르크스 연구의 물꼬를 터놓은 쾌거였다. 그러나 이 획기적 출판으로 김태경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두 번째 징역 생활을 해야 했다.

<자본> 완간은 김태경의 배짱과 수완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1985년 이후의 사업적 성공이 바탕이 되었다. 김태경은 <자본> 출판 다음 해인 1991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3대 회장에 선출되어 출판인으로서 최고 정점을 찍었다.

 

시련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대를 거침없이 달려온 김태경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왔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을 선도했던 <오늘의 책>에게 정권의 손길이 뻗쳐왔다. 건물주가 어느날 갑자기 보증금을 10배, 임대료를 3배 올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사실상 나가달라는 요구나 다름 없었다. 신촌 대학가 학생들에게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전파하는 서점에 대해서 정부당국이 건물주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김태경이 부당한 요구에 항의하고, 연대, 이대 학생들이 ‘서점지키기 운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잘 나가던 <이론과 실천>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도 형식적/절차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면서 사회주의운동 등 진보적 사상 이론과 문예에 대한 출판물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속에서 김태경이 영세출판사들을 인수 합병하는 등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한 것이 화근이었다. 1992년 무렵 김태경의 <이론과 실천>은 수십억의 부도를 내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몰렸다. 부도를 막기 위해 김태경은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을 처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본인은 파산하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뿐만 아니라 당시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아내 강금실의 월급까지 차압당하는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잘 나가던 출판인이자 사업가에서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추락한 김태경은 모든 일을 접고 아내 강금실과도 별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북한산 밑에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건강도 급속하게 나빠졌다. 오랜 지병이었던 당뇨병이 악화되었고, 그에 따라 시력도 현저히 저하되어 반실명상태가 되었다. 결국 90년대 말 강금실과도 이혼했다. 계속되는 부채의 압박에서 아내를 해방시켜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혼 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어졌지만 이로써 부부로서의 법적 관계는 정리되었다.

이런 실의의 상태 속에서 10년을 지냈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도 김태경은 출판의 꿈을 접지 않았다. 그는 해외의 출판정보를 계속 수집하고, 후배들과 만나 토론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90년대 말 그가 후배들과 자주 들렀던 곳이 인사동 카페 ‘하가(霞歌)’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강대 출신 최석도 등 후배들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출판이야기를 나눴다. 이것이 그의 삶에 큰 위로가 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이 되었다.

2000년 이후에 그에게 기회가 왔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미국에서 출판되고 있는 책들을 훑어보고 있던 그에게 세계역사에 관한 아동도서 시리즈가 눈에 들어왔다. 출판인으로서의 오랜 경험 속에서 직감적으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이 책들을 번역해서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다시 신수동 출판단지에 <꼬마이실>이라는 출판사를 새로 내고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2004년 펴낸 『세계역사이야기』 (전 5권)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청소년 추천도서와 각 신문사의 ‘올해의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팔려나가 그의 말년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새로운 삶과 죽음

2004년 8월 20일 김태경은 출판사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홍대입구 철길 옆 땡땡거리의 카페 ‘섬’에서 김인미를 만난다. 카페 주인 김인미는 사업 실패 이후 신산(辛酸)한 삶을 살았던 김태경을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고 품어 주었다. 김태경은 그해 말 김인미에게 프로포즈했다.

김인미와 북한산 밑에 보금자리를 차리고 생활의 안정을 찾은 김태경은 한편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책들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전투적인 작업 속에서도 인생의 맛을 즐기는 여유로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해마다 김인미와 함께, 때로는 신세진 출판계 동료들과 함께 이태리, 체코, 독일, 프랑스,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그에게 병마가 찾아 왔다. 2009년 11월 뇌경색이 왔고 12월에는 심장수술을 받았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좌측 마비와 언어장애가 왔지만 강한 의지로 재활 치료에 전념하여 일년 만에 거의 정상상태로 회복했다. 주치의에게서 와인 한 잔 정도는 마셔도 좋다는 허가도 받았다. 그래도 아주 완전하지는 않아 김태경은 이후에도 지팡이 신세를 져야했지만 그러나 더욱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2013년 12월 육십세 생일기념으로 일본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에 배에 복수가 차는 등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급히 여행에서 돌아와 2014년 1월 1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김태경은 검사 결과 악성 간암 진단을 받는다. 암종의 위치가 나빠 수술이나 화학요법 시술도 어려운 상태였다. 간의 해독기능이 멈춰 간헐적으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찾아왔다. 간성혼수가 올 때면 옆에 있는 사람조차도 몰라봤다. 평생 천하에 두려움이 없었던 김태경이지만 자신의 그런 상태만은 몹시 두려워했다. 두 번의 간성혼수를 겪은 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김태경의 마지막 투쟁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남은 기운을 다 쓴 듯 김인미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서서히 악화되어 갔다. 간암 말기 신부전으로 신장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의사가 투석을 권했지만 김태경은 거절했다. 자신의 상태가 끝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한 것이다.

2014년 4월 초 병세가 위급한 상태로 가면서 집에서 가까운 일산 명지병원에 입원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김인미가 강금실에게 전화해서 문병을 권했다. 황급히 달려온 강금실을 김인미가 병실로 안내했다. 강금실의 뜻밖의 방문에 김태경은 깜짝 놀라면서도 짐짓 농담을 하는 여유를 보였다. “내가 평생 당신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을 이 사람에게 다 해 줬어.” 세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강금실이 다녀간지 사흘 후인 2014년 4월 17일 03시 20분 김태경은 마지막 10년간을 항상 그 옆에서 지켰던 아내 김인미의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틀 후 4월 19일 오전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한 후 김태경의 유해는 벽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을 했다. 그리고 유골은 김태경과 김인미가 말년에 자주 찾았던 양평미술관 발치의 남한강 강변에 뿌려졌다.

공동선, 2017년 11-12월호 137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수, 2019/01/16-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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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대법정이 통일신학의 강연장이 되다

1991년 11월 1일 오후 2시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대법정 417호실에서는 70을 바라보는 노령의 여신학자 박순경 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1심 재판이 열렸다. 100여명의 방청객이 법정을 가득 메운 가운데 재판장 정호영 부장판사가 개정을 선언하자 희끗희끗한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구치소 수감자들의 겨울용 회색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박순경 교수가 여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법정으로 들어왔다. 왼쪽 가슴에는 수인번호 ‘72’를 새긴 명찰을 달고, 까만 털실양말을 장갑으로 끼고 있었다. 여기저기 가벼운 탄식소리와 함께 방청석이 잠시 술렁거렸다. 박 교수는 방청석의 낯익은 얼굴들에게 잠시 고개를 돌려 눈인사를 나누고 교도관에 이끌려 피고인석에 앉았다. 검사석에는 조영수 검사가, 변호인석에는 홍성우, 한승헌, 강철선, 백승헌 등 변호인단이 이미 나와 앉아 있었다.

재판장의 인정신문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름, 직업, 주소를 묻는 간단한 확인이 끝나자 피고인의 모두진술 시간이 주어졌다. 박순경 교수는 구치소에서 공들여 작성한 장문의 모두진술서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1시간 반에 걸친 모두진술에 이어 검사 심문, 변호인 반대심문, 판사 심문 순으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박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은 크게 2가지로 압축되었다. 첫째는 1990년 3월부터 정부가 불허하는 범민족대회 예비회의에 참여하는 등 범민족대회추진본부(이하 범추본)에 간부로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이후 1991년 1월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이적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를 결성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둘째 1991년 7월 일본 동경 재일 한국YMCA에서 개최된 ‘제2차 조국의 평화통일과 기독교선교에 관한 기독자 동경회의’에 참석하여 ⌜기독교와 민족통일의 전망⌟이라는 주제 강연을 통해 북한의 주체사상에 적극 동조하고 찬양하였다는 것이다.

모두진술에서 박 교수는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해 나갔다. 박 교수는 검찰이 현직 교수이며 신학자인 자신을 구속한 사유가 동경강연에 초점이 있었다고 보고 두 번째 공소 사실에 집중하였다. 반론의 요점을 요약하면 우선 자신의 동경 강연은 주체사상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 시도이고, 내용상으로도 결코 ‘찬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강연에서 보인 주체사상에 대한 재해석 시도는 오히려 주체사상을 상대화시키고 따라서 그에 대한 비판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범민족대회와 범민련준비위 참여에 대해서는 자신의 활동내용을 검찰이 부정확한 자료에 근거하여 부당하게 확대해석한 점을 지적하였다.

박 교수의 모두진술은 250~260매에 달하는 장문으로 읽는 데만 2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것이었지만 백승헌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요약해서 낭독했다. 그런데도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 중에서도 동경 강연에 대한 신학적 변증은 거의 학술논문 수준으로 대법정을 신학강연장으로 바꿔놓은 듯했다. 그것은 박순경 교수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이 날 재판은 5시간쯤 진행되었고, 재판장이 11월 8일 2차 공판을 선언하면서 폐정했다. 이 날 재판은 일반 언론에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한겨레신문에 죄수복을 입은 박순경 교수의 사진과 함께 보도되어 민주진영 안팎에 큰 감동을 던져 주었다.

11월 8일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박 교수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변호인 변론에서 변호인들은 박순경 교수가 ‘학문의 외길을 걸어온’ 학자로서 민족사의 정의를 대변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했다고 주장하면서 박 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이 부당하다는 점을 강력하게 변론했다.

마지막으로 최후진술에 나선 박 교수는 모두진술에서 밝힌 통일신학과 통일운동의 정당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역설하였다. 아울러 연약한 몸으로 겪는 철창 속의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나는 홀로가 아니고’,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고백을 함으로써 방청객의 심금을 울렸다.

1991년 11월 22일 선고공판에서 박순경 교수는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그날 저녁 9시경 서울구치소에서 구속 된지 106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 재판과 수형생활을 겪으면서 박순경 교수는 8.15 해방과 분단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걸어온 고난과 희생의 길에 동참하고 민족통일운동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인물이 됐다. 그리고 박순경 교수가 법정에서 제기한 신학적 과제는 이후 통일신학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예견되었던 박순경 교수의 구속 – 범민족대회와 동경회의

박순경 교수는 1991년 8월 9일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로 서울지방경찰청 옥인동 대공분실로 소환되어 조사받고 8월 12일 구속영장이 떨어져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경찰 조사 3주 만인 8월 29일 검찰로 송치되어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약 한 달간의 검찰 조사 끝에 9월 27일 기소되었고, 11월 1일 첫 재판이 열린 것이다.

사실상 박 교수의 구속은 연초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었었다.

1991년 1월 23일 향린교회에서 계훈제, 이창복, 김희택, 김희선 등 60여명이 참석하여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회 결성대회’를 개최, 준비위원장에 문익환 목사, 부위원장에 계훈제, 윤영규, 박순경, 권종대, 김종식 등 5명을 선임하고, 홍근수 목사, 이창복 등 12명의 준비위원을 임명했다. 이 회의 직후에 정부당국은 이창복 집행위원장, 김희택 사무처장, 권형택 사무차장 등 실행간부들을 전격적으로 구속하고, 범민련준비위를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일체의 활동을 불법화하였다. 문익환 위원장은 감옥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구속은 면했지만 부위원장, 준비위원과 더불어 일거수일투족 감시대상이 되었다. 준비위 부위원장 박순경 교수, 준비위원홍근수 목사, 김쾌상, 한충목 등은 결국 나중에 구속되었다.

이 회의는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 창립 총회 결의에 의해 추진된 범민족대회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전민련은 연세대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3월 1일 남북 대표 각 10인씩 참여하는 ‘범민족대회 개최를 위한 예비회담’을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하 조평통)이 수락하여 전민련은 3월 1일 계훈제 박형규 상임고문과 박순경 학계대표 오충일 대표단장, 이재오 조국통일위원장 등 28명의 대표단을 판문점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 예비회담은 경찰이 대표단을 고양군 벽제검문소에서 전원 연행함으로써 무산되었다. 그해 7월 북측이 이듬해 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범민족대회를 열 것을 다시 제안했다.

1990년 8월 15일 판문점 범민족대회도 남한 당국의 저지로 남측대표의 참가가 좌절되었고, 북측과 해외대표만으로 판문점 북측구역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방북 중이던 소설가 황석영 씨가 참가하긴 했으나 남측대표로서 공식성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반쪽 대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 중앙방송에서 이 대회에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 결성이 이루어졌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범추본 남측본부는 격론 끝에 이 결정을 수용하기로 하고, 그러나 그 결정사항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베를린에서 남,북, 해외 범추본 대표들의 3자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남측 대표로 조용술 목사, 이해학 목사, 조성우 평화연구소 대표를 파견했다. 1990년 11월 19일 베를린 시청에서 열린 베를린 3자회담에서는 “1995년을 통일 원년으로”라는 목표 하에 이를 추진할 민간차원의 상설적 통일운동체로서 범민련을 결성할 것과 남북 각각 범민련 지역본부를 건설할 것에 대해 최종 합의하였다. 베를린 3자회담 남측대표 3인은 11월 30일 귀국하자마자 김포공항에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합의한 범민련 결성은 예정대로 추진되었고, 이듬해 1월 23일의 향린교회 회의는 이 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박순경 교수는 범추본 고문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90년 범민족대회 예비회의에 남측대표로 참석하려고 판문점으로 가다가 재야인사 27명과 함께 파주경찰서로 연행된 바 있었고, 이후에도 범추본 공동본부장, 범민련 남측본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꾸준히 통일운동을 이어갔다. 그래서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후 공안정국으로 돌아선 노태우 정부가 90-91년 전민련과 범민련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구속할 당시에 이미 박순경 교수는 저들의 구속 대상에 올라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박순경 교수는 91년 8월 15일 서울에서 열기로 한 제2차 범민족대회에 남측본부 부위원장으로서 참가할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와 별도로 정부당국으로 하여금 박순경 교수의 구속을 결정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구속 한달 전 7월 8일에 동경에서 있었던 제2차 기독자 동경회의에서의 박순경 교수의 발언이었다.

 

금단을 깨고 통일신학의 지평을 넓히다

동경회의는 조승혁 목사와 박순경 교수 등 남측 인사 30여명과 미국 LA에서 활동하는 홍동근 목사 등 해외 인사 30여명, 북한 조선기독교연맹 서기장 고기준 등 북측인사 4명 등 60여명이 모여 평화통일과 기독교 선교에 관해 논의하는 기독자들의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박순경 교수는 2일째 회의에서 ⌜기독교와 민족통일의 전망⌟이라는 제목의 주제강연을 했다.

이 발표에서 그는 한국의 서양 기독교 선교의 유산을 물려 받는 반공기독교가 반통일세력으로 기능하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민족해방, 민족통일의 길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주장하는 인간개조론, 수령론 등도 민족복음화의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등 기존에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져왔던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한 신학적 견해를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이것은 남한의 신학자로는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기독교사상과 주체사상의 대화 필요성’을 밝힌 것으로 교계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박 교수는 이 강연의 동기에 대해서 1991년 12월 28일자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체사상을 언급한 것은 기독교 선교의 물꼬를 트기 위해 선교신학적 접근을 시도해 신학이 주체사상에 파고들지 않으면 기독교신앙과 선교가 북한에 뿌리내릴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체사상 부분에 대해서도 검찰의 ‘주체사상 찬양’ 주장은 어불성설이고, “수령은 유한하므로 역사에서 퇴진하게 될 상대적 존재이며, 영생하는 집단의 주체, 즉 비어 있는 자리는 인간수령 이상의 신적인 자리, 하나님의 자리라고 강연에서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강연은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시 동경회의에 함께 참석했던 보수적인 반공목사들과 공안당국에게는 박순경 교수가 ‘주체사상을 찬양했다’고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동경회의에 참석한 목사 중 15-6명이 검찰에서 박 교수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고, 그 중 몇 명은 박순경이 주체사상·수령찬양자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박 교수의 강연은 결국 박 교수의 구속을 부르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째든 금단의 영역을 깨고 통일신학의 지평을 넓혔고, 이후 통일논의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가톨릭신학대학 교수로서 신학생들과 함께 주체사상을 연구한 적이 있는 함세웅 신부는 박순경 교수의 강연을 읽은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저는 박 교수님의 동경 강연내용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분을 통해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얻은 것입니다. 참으로 큰 문제점을 안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신선한 시각을 지닌 이러한 신학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또한 이렇게 예리한, 그리고 용기있는 여성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여성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개혁이 가능하다는 여성해방적, 전인적 구원의 미래전망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1991년 10월 24일 ‘박순경 교수 석방을 위한 기도회와 촉구대회’에서 함세웅 신부의 강연)

 

필생의 과제를 세우다 – 기독교와 민족과 공산주의의 대화

박순경은 1923년 여주에서 한학자 박용선 선생과 어머니 조원 사이에서 4남5녀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박순경의 부친은 선비로 인품은 학자이지만 생활 능력이 없었으며, 둘째 오라버니가 집안 살림을 지탱하게 했다. 박순경은 부모를 따라 서울, 인천 등지로 이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겨우 입에 풀칠하는 생활형편 때문에 학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10살이 넘어서야 겨우 인천에서 성냥공장에 다니면서 무료야학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학원에 어머니가 데려다 주면, 순경은 엎드려 잠만 잤다. 1935년 경 12살 무렵에 원주로 이사 가서야 비로소 간이학원 (초등학교 과정) 4학년에 입학했고, 반에서 1등을 하면서 아버지의 친구인 한학자 학원장이 순경을 4학년으로 월반시켰다. 그리고 봉산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졸업하고, 상명실천 전수과 2년을 거쳐 1933년 세브란스고등간호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 3학년 때 박순경은 친구 김옥선과 함께 1944년 좌파 민족운동가들을 만났다. 이 때 몽양 여운형 선생의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고, 용기를 내서 친구와 함께 혜화동 몽양의 집에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당시 친구 김옥선의 오빠가 공산당 계열 독립운동가였는데, 그 오빠가 앓아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의주까지 가서 약병을 전하고 오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간호학교 시절에 만난 민족운동가들의 영향으로 박순경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과 인민공화국(인공)을 지지하였고, 해방공간에서는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항일독립의식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이 깊이 의식 속에 남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에 어린 나이로 기독교와 민족과 공산주의와의 대화라는 필생의 과제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봄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근무하던 시간 사이에 서울역에서 안국동까지 걸어서 한글학당에 다녔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어머니와 아머지가 몇 달 사이에 작고하니, 박순경은 인생무상과 허무감에 빠졌다. 그래도 공부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우선 한글학원을 택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충격에다 끼니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무리하게 공부하던 박순경은 결국 허무감과 늑막염으로 쓰러졌다. 마산의 둘째 오빠 집에서 요양 중 병석에서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구절을 묵상하다가 불현듯 하나님의 실존을 깨닫고 허무의식을 극복하고, 신학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하게 된다.

1946년 둘째 오빠의 도움으로 서울 감리교신학교 전수과에 입학했는데, 3년제 본과와 통합되어 1948년 졸업했다. 감리교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어느 정당에서 여론조사를 한다고 해서 박순경은 여운형계를 지지한다고 손을 들었다가, 하나님 동산에 붉은 마귀가 들어왔다고 학교에서 쫓겨날 뻔 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교수 한 분과 몇 명의 학생이 옹호해줘서 간신히 퇴학을 면했다. 1948년 봄 당시의 학제에 따라 박순경은 편입시험을 보고 서울대 철학과 2학년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신학에 몰두하였다.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에 심취하여 감신대 동기생들인 허혁, 이영빈과 칼 바르트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박순경에게 민족 수난의 역사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기회가 되었다. 6.25 발발 당시에는 서울에 남아 있다가 연합군이 서울에 진주하여 비로소 거리에 나왔다가 서울대 병원 뒤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체들을 보았다. 거리에 나뒹구는 시체들과 피난민들의 처참한 모습들을 보면서 박순경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1951년 피난처 부산에서 서울대를 졸업하고 4년 정도 성신여고와 정신여고에서 영어와 독일어 교사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박순경은 신학 공부의 꿈과 젊은 시절 세웠던 결심을 실현하기 위해 1955년 말 교사생활을 접고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1956년 초 에모리대학에서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여 1958년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드류대학 박사과정에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지만 1년간 뉴욕 유니온신학교 에큐메니칼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1960년부터 드류대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고, 1966년에 철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여성으로서 조직신학을 전공한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였다. 드류대학 시절 유니온신학교에 유학 중이었던 박형규 목사와 서광선 목사를 만났고, 이들의 도움으로 박순경은 1966년 귀국하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이후 박순경은 이화대학에서 1988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봉직하였으며, 1988-90년 까지 대전 목원대학 대학원 초빙교수로 재직하던 중 통일운동으로 1991년 구속되었다. 목원대학은 박순경을 즉각 해임하였다.

 

칼 바르트와 작별하고 한국신학으로 전환하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자 박순경은 ‘아이쿠! 내가 민족통일문제를 진작 취급했어야 했는데 내가 지금까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8.15 해방과 좌우이념대결이 극한으로 치달았던 3년간의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 당시 서울 시내에 나뒹굴던 시체들과 피난민의 참상이 머리를 스쳐가면서 ‘잠에서 깨어나듯이’ 이제까지 숙제로 남겨뒀던 민족통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이화대학에서 1974년부터 2년간 안식년 연구교수로 유럽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74년 박순경은 민족문제 연구에 앞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만남’이라는 과제를 세우고 이념문제를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칼 바르트의 고장 바젤 대학을 찾았다. 그 다음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튀빙겐대학으로 갔다. 거기에서 초기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을 비롯해 많은 책들을 읽고 그들의 사상을 탐구했다. 그리고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마르크스 사상과 연관된 역사철학을 공부했다. 칼 바르트 신학을 비롯해서 그 계통의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의 대변자 헬무트 골비처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다.

이 2년간의 유럽에서의 공부 과정에서 박순경은 일찍부터 직관적으로 생각해왔던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만남’ 가능성을 재삼 확인했고, 그래서 이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쌍둥이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 유럽 유학과정에서 박순경은 서양신학에서 한국 신학에로의 전환이라는 결정적 계기를 맞았다. 1975년 독일 동아시아 선교부가 주최한 ‘독일-한국 세미나’에서 강연하면서 박순경은 한국 신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민족분단과 통일문제를 한국 신학의 주제로 발표했다.

1975년 바젤에서 박순경은 바젤에서 유학 중이던 변선환 교수와 함께 칼 바르트 무덤에 찾아가 큰 절을 올리고, “이제는 끝입니다”라고 인사를 고한 사실이 한 때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박순경은 단지 (옛 스승에 대한) 고별인사일 뿐이라고 확대 해석하지 말기를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어쨌든 서양신학 에서 한민족의 신학, 한국 신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귀국해서 이화대학으로 복귀한 후 박순경은 한편으로 민족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가들의 저작을 탐독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교회와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통일문제 강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반공기독교를 비판하고 민족통일의 과제를 제시하는 통일신학의 글들도 연이어 발표했다. 귀국 후에 박순경은 남미 해방신학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였다. 그래서 1981년부터 제3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자협의회(EATWOT) 한국연락책임자를 맡고, EATWOT에서 발행하는 『Voices』라는 잡지의 편집위원을 역임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는 여성신학을 개척하는 역할도 담당하여 1980년에는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의 창립회장으로 선출되어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강단의 신학자에서 통일운동가로 – 6월항쟁과 조성만 열사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박순경을 서양신학에서 한국신학에로의 전환의 계기였다면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박순경은 민주주의 투쟁과 통일운동을 정치신학•통일신학의 주제로 설정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강화하게 하였다.

1987년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죽고, 6월민주항쟁이 활화산처럼 터지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박순경도 내가 민족사의 현장에서 과연 무엇을 했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6월항쟁 기간 동안에 이대 제자들이 학교 광장에서 스크럼을 짜고 이대 정문 앞을 지나 신촌로터리로 향하면 박순경도 남몰래 그 뒤를 따라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최루탄도 맞고, 거리의 군중들과 함께 경찰에 쫓겨 다니기도 했다. 언젠가는 전투경찰들이 이대 캠퍼스 안까지 들어와 학생들이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박순경은 쫓아가 울고 소리치며 연행을 막은 적도 있었으며 수배당한 학생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기도 하였다. 연세대에서 이한열 열사가 장례식이 있던 날은 감옥에서 막 나와서 장례위원장을 맡은 문익환 목사가 장례식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고 시청 앞까지 행진해 갈 때는 박순경도 신촌로터리부터 내내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따라 갔다.

88년 이대 교수 은퇴를 며칠 앞둔 시점에 박순경의 영혼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5월 15일 명동성당 문화관 옥상에서 서울대생 조성만 열사가 남북공동올림픽 개최를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5월 18일 이화대학 대강당, 은퇴를 앞둔 박순경의 마지막 채플 설교는 조성만 열사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자가 흐느껴 우는 바람에 학생들도 따라 울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은퇴설교의 일부분이다.

모든 피조물의 진통을 우리는 분단된 민족사회에서 체험하며, 더 구체화시키자면 5.18 피눈물 나는 광주사건에서 , 또한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부터 투신 살신(殺身)한 조성만군의 기막히는 사건에서 체험한다. 이 밖의 많은 사건들이 새로운 통일된 민족사회의 탄생을 외치는 소리들이다

은퇴 무렵에 이대 출신 여학생 한 사람이 찾아와 평화연구소 고문으로 참여해 주십사는 조성우 소장의 말을 전하고 간다. 그 여학생도 자기 학교 교수 중에 통일문제에 너무나 열심인 분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고 조성우 소장에게 소개했고, 조성우 소장도 너무나 뜻밖이고 놀라와 바로 그 여학생을 박순경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통일신학자, 조직신학자로서 학계에서는 이름을 날리던 박순경이지만 통일운동 진영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박순경은 조성우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고, 조성우는 박순경을 자신이 관여하고 있던 전민련 통일위원회 위원, 범민족대회 예비회담 학계대표 등으로 추천했다. 이 때를 계기로 박순경은 통일운동 일선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통일신학자, 박순경

감옥에서 나온지 1년쯤 지난 1992년 11월 12일, 박순경은 그동안 걸어온 고난의 체험과 통일신학의 논문들을 한울출판사에서 두 권의 책으로 펴내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와 『통일신학의 여정』이 그것이다. 이 출판기념회 소식을 듣고 옥중에 있던 문익환 목사가 무려 7차례에 걸쳐 연속해서 편지를 보내 축하와 함께 박순경의 노고를 치하했다. 아울러 박순경의 통일신학이 화해의 신학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책을 읽고 난 감동을 문 목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를 심도 있게 본격적으로 다룬 신학이 울창한 한 그루 상수리 나무로 자란 것을 보면서, 축하를 받아야 할 것은 한국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새 한국교회도 이만큼 자랐다는 것, 이만큼 깊어졌다는 게 그리도 자랑스럽군요.

박순경을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그 곱고 단아한 모습에 감탄하면서, 저런 사람이 어떻게 그 험난한 학문의 길을, 그리고 투옥까지 겪는 통일운동의 길을 걸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고운 자태 속에 숨어 있는 뜨거운 열정과 강인한 기백을 발견하면서 놀라곤 한다. 1962년 미국에서 박순경을 만난 박형규 목사에게도 그런 인상이 강력했던 것 같다. 1991년 8월 “박순경 교수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서 ’내가 아는 박순경‘이라는 연설에서 박 목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박순경 박사 방에 가서 커피도 한 잔 대접 받고 빵도 얻어 먹었는데…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여잔가, 남잔가? 얼굴은 분명히 여잔데. 그분의 사는 방식은 남자로 하여금 굴복하게 만드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보통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남자를 상상하는데, 예컨대 예레미야, 이사야, 엘리야 같은 사람을 상상하는데, 내가 박순경 박사를 딱 보고는 ‘아! 여자도 하나님에게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순경이 8순이 될 때까지도 설악산, 지리산, 관악산을 등산하고, 그 과정에서 5차례나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71년 이대 기독교학과에 입학하면서 박순경을 만나 지금까지 스승으로, 어머니로 모시고 살고 있는 한신대 신학과 김애영 교수의 회고담이다.

내가 한신대 대학원에 다니던 1978년 가을 어느 날 연락이 오기를 당신이 이대 동료교수등과 내설악을 등반하던 중 마등령 정상에서 오른쪽 다리 골절을 당해 앰블런스로 이대병원에 이송되어왔는데, 내일 수술을 해야 하니 와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로 짐을 싸들고 병원에서 선생님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퇴원 후에도 선생님 댁에서 몇개월를 간병했는데, 그 때 선생님과 밤새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제가 막연하게 느끼던 삶에 대한 회의와 방황을 모두 털어버리고, 일생을 바쳐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원초 박순경 박사 팔순기념문집 『과거를 되살려내는 사람들과 더불어』, 2003, ㈜사계절출판사)

범민련 사건으로 감옥을 살고 나온 이후에도 박순경 교수의 통일운동 행보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1994년부터 6년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공동의장을 역임하였고, 이후에도 통일연대 명예대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2009년 6월에는 (사)통일맞이에서 수여하는 ‘늦봄 통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순경 교수는 올해 만 95세로 방배동 자택에서 박 교수의 저 구속사건이 계기가 되어 1991년 이래로 제자 한신대 신학과 김애영 교수와 함께 살고 있다. 2014년 11월 박순경 교수는 92세의 나이로 710페이지에 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 제1권 구약편』를 탈고하고 출판기념회를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인지 그 해 12월 빙판에서 낙상하여 척추압박골절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지금까지 잘 걷지 못한다. 또 2015년에는 대상포진이 발병하여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순경 교수는 굴하지 않고 집필계획대로 제2권 신약편의 총서론을 쓰고 있는 중이다. 제3권 성령편은 제자 김애영 교수의 몫으로 남겨두었는데, 박 교수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계획들이 다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박순경 교수는 지금도 민족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쉼 없이 기도하고 있다.

 

공동선, 2018년 1-2월호 138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수, 2019/02/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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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동안 나를 잘 몰랐다가, 인제 얘가 이런 애구나…”

2012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선거에 뛰어들었을 무렵, 당시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보 정당에서 넘어와 돈도 조직도 배경도 없이 뛰어든 선거였다. 운동원도 차량도 없이 지하철과 기차로 전국을 돌면서 당원들을 만난다. 다른 후보의 선거운동원을 상대로 주로 선거운동을 한다고 자조하면서도 기죽지 않는다. 어묵으로 식사를 대신하면서도 ‘준비된 게 많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 이후로도 사람들은 그를 잘 몰랐다. 이제야 사람들은 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사립유치원 비리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면서 ‘국감스타’로 떠오른 국회의원 박용진 이야기다. 그가 사립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해 내놓은 유아교육법, 사립학교법, 학교급식법 개정안은 ‘박용진 3법’이라고 불린다. 국회의원으로서 법 앞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 ‘영광’까지 누렸다.

반짝 등장은 아니었다. 국회에 입성한 후 그의 별명은 ‘삼성 저격수’였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명계좌에 제대로 과세를 하지 않았다며 문제제기를 해 1093억원을 환수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고의 분식회계 정황을 드러낸 내부 문건을 폭로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기득권의 심기를 건드리다 쫓겨나다시피 정무위원회에서 나와 교육위원회로 옮긴 뒤에 터뜨린 게 사립유치원 문제다.

그는 한편으로 “두렵고 무섭다”고 한다. 사립유치원 쪽의 집단행동과 쏟아지는 비난도 무섭지만, 유치원 문제 하나 바로잡는 일도 “혁명을 해야 할 판”으로 어렵다는 사실 자체가 더 그렇다. 6년 전 영상에 비하면 흰머리와 주름살이 부쩍 늘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슈도, 그 자신조차도 잊혀질 것을 알기에 빨리 법제화해야 한다는 초조감도 묻어난다.

박용진의 집무실에는 선거 포스터 3개가 붙어 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더불어민주당으로 출마했던 16, 18, 20대 3번의 총선 포스터다. 과거 진보정당 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던 포스터까지 왜 붙여놨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2012년 최고위원 선거에서 결국 2.76%의 득표로 꼴지를 했지만 그는 말했다. “신나고 재밌다. 진보 정당 했던 사람들은 국민 여러분의 관심에 굶주려 있다. 말할 수 있는 공간과 자리가 없어 힘들었다.” 여전히 그는 ‘신나게’ 정치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국회의원

 

■ 바꾸자고 주장하기보다 바꾸는 정치를

박용진 의원은 1971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는데,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대공 형사’였다고 한다. 부친의 근무지가 바뀌면서 1979년 서울 강북구로 이사와 화계초, 신일중을 거쳐 신일고에 진학했다. 훗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이 되는 이수호 선생님이 고교 2학년 시절 담임이었다.

1989년 전교조 결성으로 이수호 선생님이 구속되자 박용진은 당시 고3이었음에도 교내시위를 주도하는 등 선생님을 구하는 데 나섰다. 이수호 선생님은 그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학창시절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던 것 같다. 관념적이거나 명분을 앞세워 폼을 잡는 형이 아니라, 현실생활에서 불합리한 것을 어떻게 고치고 어떤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서 실용화하는가 등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려 애쓰는 형이었다.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개선책을 제시해 교사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1990년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명지대생 강경대가 집회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고 이어 격화된 정국 속에서 학교 선배이기도 한 김귀정이 시위 도중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용진은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으로 가서 장례가 마무리될 때까지 그곳에 있기도 했다. 그는 “시대가 무서워서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맞서야 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1994년에는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지부인 북부총련 의장을 지냈다. 그해 6월 전국철도기관사협의회와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연대파업을 지원하다가 구속돼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군에 입대한 그는 1997년 제대 후 복학해 김귀정추모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경찰공무원이던 아버지 뵙기가 죄송해” 취업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운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출근이 가까워진 어느 날 아내에게 사회운동을 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자 아내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

사회운동의 첫 공간은 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으로 택했다. 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독자 후보를 내려고 한다는 소식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전국연합 정치부장 자리 제안을 받고 대선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해 보고 싶어 참여했다. 그해 9월 결성된 국민승리21에 파견돼 대변인실 언론부장을 지내며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과 함께 선거를 치렀다.

이때 경험은 훗날 그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열정만 갖고 덤벼들었지만 후보만 내면 민중들은 따라올 것이라는 식의 아마추어적인 선거 운동이었다. 여론조사에서 1%대의 지지율이 나왔지만 믿지 않았다. ‘일어나라 코리아!’ 같은 정체불명의 선거 구호로 나섰다가 비웃음만 사기도 했다. 박용진은 이때 진보진영의 실력 부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고 했다. 대중들을 선동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으로 삼아 꾸준히 마음을 움직여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방법은 진보 정당 창당이었다. 국민승리21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고 박용진도 함께했다.

창당 직후 총선에서 서울 강북구을에 출마해 13.3%를 득표했다. 당내에서 서울지역 최고 득표율이었다. 이어 당 전국집행위원(최고위원)에도 선출됐다.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전국민중대회에 나섰다가 또 다시 구속돼 2년 1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결혼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혼인신고도 제대로 못한 아내는 신혼집을 정리하고 시부모와 살림을 합쳐야만 했다.

사면으로 풀려났지만 복권이 되지 못해 2004년 총선에는 출마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10석의 제3당으로 떠올랐고 그는 당 대변인이 됐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는 분당에 반대했지만 진보신당이 결성되자 자리를 옮겼다. 진보신당 소속으로 강북구을에 두 번째로 출마해 11.8%를 득표했지만 또 낙선했다.

2010년에는 진보신당 부대표가 됐다. 그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진보신당이 독자적 길을 걷기보다는 진보정당 계열, 필요하면 민주당까지 포함해서 통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상을 바꾸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정당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머물기보다는 현실에서 어쨌든 승리를 일궈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2011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통합 논의조차 무산되자 그는 탈당했다. 통합진보당 동참도 거부했다.

대신 문성근이 주도하는 ‘국민의 명령’ 운동에 참여했고, 2011년 ‘혁신과 통합’ 상임운영위원으로 야권 통합 운동에 합류했다. 혁신과 통합이 결성한 ‘시민통합당’ 지도위원이 됐고, 시민통합당이 민주당과 합당해 만든 민주통합당 창당에 함께했다. 진보진영에서는 ‘배신자’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박용진은 저서 <과감한 전환>에서 “진보 정치가 제시하는 진보적 가치,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동의한다면 연대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박용진은 한 인터뷰에서 민주당 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년 죽기 살기로 해 봤습니다. 하루도 논 적이 없어요. 수천 명이 감옥에 가고, 수많은 사람이 진보정당의 집권을 기대하다 생을 마쳤습니다. 온 가족을 당원으로 가입시키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바치면서 당을 세웠어요. 그런데 안 돼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혁명의 시대가 가 버렸습니다. 더 이상 봉기나 민중항쟁을 만들어 낼 수 없어요. 무엇보다 국민이 달라졌죠. 2년에 한 번씩 어느 때는 1년에 두 번 큰 선거를 치르면서 국민들은 집권자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짱돌과 화염병 대신 투표로 심판하는 시대입니다.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하고, 새로운 노선을 찾아가는 것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요.”

민주통합당에서는 최고위원 선거에 나서기도 했지만 낙선했다. 당 대표가 8~9번 바뀌는 동안 2년여 간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늘 ‘비주류’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녔다. 대변인이었지만 내밀한 이야기는 자기들끼리만 했고, 당에서 자리를 못 잡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문을 뒤적이고 기자들이랑 이야기하고 당 방어하면서”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

2016년 총선에서 강북구을에 다시 출마해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선 직후 김종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진보정치를 표방해 온 그가 보수의 길을 걸어온 김종인 대표를 보좌하게 된 것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박 의원을 이 당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판단했다”며 비서실장 임명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계파나 오래된 관습에서 자유롭다는 얘기다. 박용진은 김종인 위원장이 마지막 의원총회에서 “당신들의 지적인 만족을 위해 정당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라고 일갈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이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세력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정치세력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 비주류, 미운오리? 즐겁게 안고 가는 정치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박용진은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삼성 특검에 의해 확인된 1199개 차명계좌의 4조5000억원대 돈을 삼성이 벌금과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찾아간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자 금융위원회는 오히려 이것이 ‘합법적’이라며 삼성을 두둔하고 나섰다. 박용진이 끈질기게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자 당시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종합 국정감사 때 “이건희 차명계좌는 차등과세 대상”이라며 항복했다.

현대자동차 세타2엔진 결함에 대한 문제도 지적했다. 이 문제 역시 국토부는 현대차를 두둔하고 나섰으나 현대차로부터 미국 소비자 기준으로 국내 소비자도 리콜을 받을 수 있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이런 과정을 겪은 박용진은 진정한 적폐가 관료 세력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무위에서도 드러내놓고 불편해 했던 사람들은 관료들이었다. 차명계좌 건도 10년이 넘도록 어떤 조치도 없다가 지적을 받자 오히려 잘했다고 버텼다. 관료들은 과거 선배들이 한 결정들을 뒤바꾸는 일을 성경을 찢는 일처럼 싫어한다. 대책을 가져오라고 하면 과거했던 재탕·삼탕 정책들을 가져온다. 일이 잘못되면 관료가 책임지는 게 아니라 정치가 책임진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여당이 책임져야 한다.”

그는 의원에 당선되고 나서도 늘 ‘비주류’였다. ‘김종인 사람’으로 분류됐고, 당에서도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았다. 청와대 오찬에 참석한 뒤 페이스북에 “밥은 부실해도 성공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넘쳤다”는 글을 남겼다가 ‘반찬 투정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정부·여당이 밀어붙인 인터넷전문은행법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정무위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민주당 원내지도부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배제했다고 전해진다.

교육위원회로 옮긴 뒤 그가 들고 나온 이슈가 바로 사립유치원 문제다. 그도 밝혔듯이 ‘정치하는 엄마들’ 같은 시민단체들이 꾸준히 제기한 이슈였지만 정작 정치인들은 목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정치인들에게 사립학교 문제는 건드리기 어려운 이슈다. 사학 세력들은 “당선시킬 순 없어도 낙선시킬 수는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많다.

사립유치원 문제를 이슈화한 것에 대해 박용진은 “선무당이 사람 잡고, 대타가 홈런 친 것”이라고 표현한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똘끼’ 덕분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용기였음에는 분명하다. 덕분에 그는 당의 ‘미운 오리새끼’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로 떠올랐다.

현재는 사립유치원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는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삼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전자가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생각하기에 이 엄청난 기업이 잘 되기를 바라서 문제를 바로잡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3월부터 전국을 돌며 재벌개혁 강연을 하고 있다. 100회가 목표인데, 지금까지 40여 차례 진행했고 3000명이 넘는 시민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벌개혁에 사람들이 관심이 없을 것 같나? 그런데 한 시간 반 강연이 끝나면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라며 눈이 동그랗게 된다. 저 광 팔러 다니는 거 아니다. 박용진 도와줄 의병 모으는 거다. 어휴,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겠나. 찾아줄 때 잘해야지.”

종교가 가톨릭인 그의 세례명은 베드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를 시켜주겠다고 하셨듯 나도 그런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최종 목표는 여느 정치인이라도 한 번쯤 꿈꿨을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지금 그의 당면 과제는 “민주당이라는 거함을 내 작은 노라도 저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의 노질은 조금의 성과도 냈다. 사립유치원 문제 제기를 계기로 청와대와 정부에 끌려가던 국회와 정당이 모처럼 이슈의 중심에 섰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과감한 전환> 추천사에서 박용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박토에서 시작된 진보 정당 창당 과정은 외로움과의 싸움이었지만, 박용진은 항상 희망과 미래를 말했다.” 돈도 빽도 없이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할 때도 그랬지만, 그는 어쨌든 뭐든 ‘즐겁게 안고 가겠다’는 말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 참고자료

박용진 공식 홈페이지

박용진 블로그

위키백과 – 박용진

재벌저격수 박용진 “재벌과 싸워보니 관료가 더 적폐더라”

백조가 된 미운 오리, 박용진 의원이 걸어온 길

[경향신문] 구혜영의 이면 – 박용진, 과감한 전환

[줌인]민주당의 ‘천덕꾸러기’ 박용진은 어떻게 국감 스타가 됐나

[300인터뷰]’차르’의 남자 박용진 “김종인, 골잡이 가능하다”

[대자보]강철처럼, 때릴수록 단단해진 진보의 아들

[人더뷰]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 “총선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매일노동뉴스] “진보정당과 노동운동, 그 위태로운 연환(連環)을 풀어야”

[오마이뉴스] “나는 우리의 오만을 반성한다 진보신당 당원 여론조사의 충격”

[한겨레] 재벌저격수 박용진 “재벌과 싸워보니 관료가 더 적폐더라”

[주간경향] 비주류에서 국감스타로 떠오른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게 중요”

[밀착마크]’똘끼’ 때문에 유치원 폭로?···박용진 “나도 무서웠다”

박용진 “문 대통령 재벌개혁·경제민주화 추진 지치지 마시라” [더정치 인터뷰#47]

남편 박용진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

화, 2018/12/2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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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집에 불이 났어요. 불이 났다고 말하려고 여기 왔습니다.”

지난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16살 스웨덴 소녀의 연설이 화제가 됐다. 이 소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모든 곳들처럼 이곳 다보스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돈에 대해서만 얘기합니다. 돈과 성장이 우리의 주요한 관심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는 한 번도 위기로 취급되지 않았죠.”

이 소녀의 이름은 그레타 툰베리. 지난해부터 어른들에게 기후변화 대책을 촉구하며 ‘등교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전 세계의 정·재계 유력 지도자들과 학계·예술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스위스의 휴양지에 모여 툰베리의 말을 들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에 따르면 우리의 실수(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기후변화)를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12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소한 50% 줄이는 것을 포함해 우리 사회 모든 측면에서 전례 없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올해 다보스 포럼에 모인 유명 인사들은 기후변화에 대해 전에 없는 우려를 표명했지만, 그들이 스위스에 오기 위해 몰고 온 전용기 대수 역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진정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 수 없는 자리였다. 툰베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주는 희망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공포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나는 내가 매일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당신도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툰베리는 혼자 운동을 시작했지만 전 세계 학생들에게 영감을 줬다. 이제는 호주, 영국, 벨기에, 미국 등 전 세계 270개 지역에서 10만 명 가까운 학생들이 등교 거부 운동에 함께하기 시작했다. 3월15일에는 전 세계 59개국, 524개 지역에서 전 세계적인 등교 거부 운동이 벌어질 예정이다. 과연 툰베리와 어린 학생들의 움직임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툰베리는 말한다.

“등교 거부 운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건 당신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더 없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왜 공부를 해야 합니까? 이건 학교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늦다, 더 빨라야 한다

툰베리는 15살, 9학년이 됐던 지난해부터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스웨덴의 여름은 기록이 시작된 이래, 262년만에 가장 더웠다. 열파와 산불이 나라 곳곳을 덮쳤다. 툰베리는 8월 20일부터 스웨덴 총선이 열리는 9월 9일까지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툰베리는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정치인들에게 기후 변화를 우선 순위로 두고 위기 상황처럼 이 문제를 다뤄달라고 요구했다. 매일 조용히 국회 의사당 앞마당에 앉아 전단지를 나누어 주면서 “당신들 같은 어른들이 우리 미래를 망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은 사실 기후 변화에 모범적으로 대응해 온 국가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2015년 유엔기후변화회의가 채택한 파리 협정의 목표를 무난하게 달성할 것이라 예상한다. 2045년까지 탄소 중립국(탄소 배출량과 포집량이 같아서 더 이상 추가적인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상태)을 목표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후관련 법안을 제정하기도 했다. 스웨덴은 1990년 이래 계속 경제가 성장했지만 탄소 배출량은 26%나 줄였다. 불과 10년 만에 재생에너지 사용을 12% 늘린 국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툰베리는 “너무 늦다. 더 빨라야 한다”며 “스웨덴 역시 낙원이 아니며 가장 큰 탄소배출국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선진국은 매년 15%의 배출량을 줄여야 하지만 스웨덴은 지난해 1/4분기의 경우 오히려 실제 배출량이 늘었다.

총선이 끝나고도 툰베리는 매주 금요일마다 등교 거부 운동을 계속했다. 어른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툰베리를 걱정한다. 툰베리는 그래도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가방에 있는 교과서를 가리키며 말한다.

“여기에 내 책이 있어요. 그러나 나는 또한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죠. 학교에서 뭘 배울 건가요? 팩트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정치인들은 과학자들의 말도 듣지 않죠. 그런데 내가 왜 배워야 하나요?”

2003년생인 툰베리는 3학년이었던 9살 때부터 기후 변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전등을 잘 끄고, 물과 종이를 절약하고, 음식을 버리지 말라고 가르쳤다. 살 곳을 잃어가는 북극곰의 모습을 보여주고 휴가철에 비행기 여행은 자제하라고 말했다. 툰베리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기후 변화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믿기지 않았다. 인간이 실제로 기후를 변화시키고 있다면 그건 우리 문명을 위협하는 일일 테고 모든 사람들이 그걸 얘기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고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툰베리는 기후 변화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답이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11살 때는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몸무게가 10kg이나 빠지기도 했다. 어느 순간 툰베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조차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울증에서 벗어나는데 힘이 됐다.

툰베리는 지난해 스웨덴 신문에서 주최한 작문 경연대회에서 기후 변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를 써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 인연으로 환경운동가들과 만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등교 거부 운동을 원하는 툰베리와 함께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었지만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결심했고 오늘날 이런 호응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내 시위의 가장 좋은 점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가와 참여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학교에서 징계를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한 사람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툰베리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행동이나 관심 분야가 제한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다. 툰베리는 자신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밝힌다. 트위터 계정의 자기 소개에도 써 놓았을 정도다. 툰베리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후 위기에 눈을 뜨게 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했다면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어요.” 오히려 몇 시간이고 똑같은 일을 해도 지루하지 않아서 집중적으로 기후 변화를 공부하는데도 도움이 됐다고 한다.

툰베리는 2015년 비행기 타기를 그만뒀다. 지금도 등교 거부 운동이나 국제기구 연설을 위해 유럽 각국을 이동할 때면 기차를 타고 다닌다. 지난해에는 스웨덴 ‘어린이 기후상’ 위원회가 후보 중 한 명으로 자신을 지명하자 “상 받으러 수상자가 비행기를 타고 멀리서 스웨덴까지 오는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발생한다”며 자신을 후보에서 빼 달라고 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툰베리가 부모의 세뇌를 받아서 이런 행동을 한다고도 말한다. 툰베리는 반대로 부모와 주변을 변화시켰다. 유명 오페라 가수인 툰베리의 어머니는 더 이상 해외 공연을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했다. 툰베리의 가족은 집에 태양광 발전 장비를 설치하고 도심 외곽에서 텃밭을 가꾼다. 대부분의 거리는 자전거로 이동하고 꼭 필요할 때만 전기차를 이용한다. 툰베리는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신도 채식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자녀를 지지할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툰베리의 생각과 등교거부 운동을 존중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툰베리는 집에 있으면 불행할 거예요. 시위에 나가야 행복할 겁니다.”

툰베리의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함께 학교를 나가지 않은 선생님도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후 변화를 막으려 하면서 느끼는 우리의 무기력함은 세계 대전을 멈추려는 노력했을 때의 그것과도 비슷합니다. 여러 해 동안 기후변화가 진행된다고 알고 있었고, 온갖 종류의 컨퍼런스가 열렸지만 막지 못했습니다. 그레타는 말썽꾸러기이고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죠. 하지만 대격변을 앞두고, 이 상황에서 유일하기 합리적인 것은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세상을 바꾼다

어린 청소년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건 처음이 아니다. 1888년 런던 성냥공장에서는 10대 여공들이 14시간의 고된 노동과 독성물질에 중독돼 아래턱이 괴사하기도 하는 끔찍한 작업 환경에 맞서 파업을 일으켰고, 결국 근무환경 개선을 이끌어냈다. 1951년 미국 캔자스 주 토피카에 살던 여덟 살 소녀 린다 브라운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집근처 학교에 입학을 거절당하고 한참을 걸어다녀야 했다. 린다와 가족들은 부당함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고 미 연방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에는 미국 플로리다주 파크랜드 소재의 한 고교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을 계기로 중·고교생들이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툰베리도 이 집회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훗날 역사는 16살의 툰베리 역시 2018년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첫걸음을 뗐다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지난해 12월 툰베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4)에서 전 세계 190개 나라의 대표들을 향해 각성을 촉구했다.

“당신들은 당신의 자녀를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 아이들의 눈앞에 있는 미래를 빼앗고 있습니다… 2078년이면 나는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녀들이 있다면 내게 물을 거예요. 왜 아직 행동할 시간이 있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고.”

툰베리의 뼈아픈 질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난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최대치를 경신했다. 지난 5년간은 근대 기록이 시작된 이래로 최고로 더웠다. 툰베리는 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느냐는 질문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면 옳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해요. 사람들은 온실가스 때문에 지구 온난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로 인한 실제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요.”

툰베리는 지난 2월 유럽경제사회위원회(EESC)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세상을 구하길 바라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자라서 책임을 질 만한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릴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습니다. 2020년부터 온실가스 배출 곡선이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데, 그게 바로 내년입니다.”

여전히 어른들은 ‘등교 거부’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도 ‘기후 위기’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무단 결석 처리를 할 것인지, 학교에는 언제 돌아갈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우리와 대화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좋아요, 우리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과학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길 바랍니다. 우리가 말한 것은 과학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한 번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파리 협약과 IPCC 보고서를 따르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선언이나 요구 사항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과학적 사실 아래 함께하자, 그게 바로 우리의 요구입니다.”

툰베리는 희생 없이 변화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우리 삶의 방식까지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위해 우리 문명은 희생되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만든 정치 체제는 모두 경쟁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협력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구의 자원을 공평하게 공유해야 합니다. 매우 순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구온난화의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과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 역시 툰베리와 같은 스웨덴 출신이다. 노벨상을 받기도 했던 그는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을 처음으로 정량적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그의 예측은 틀렸다. 아레니우스는 지금 수준의 온난화가 진행되려면 20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속도는 훨씬 빨랐다. 사람들이 지구온난화에 대처하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져야 한다. 툰베리는 오늘도 그 목표를 위해 달린다.

“우리는 세계 지도자들에게 관심을 구걸하기 위해 여기 오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과거에도 우리를 무시했고 또 무시할 겁니다. 당신에게 변화가 올 것이라고 알려주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진정한 힘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 참고자료

2019년 2월 유엔경제사회위원회 연설

2018년 12월 기후변화당사국 총회(COP24) 연설

[레디앙] ‘기후변화 위한 휴업’ 변화의 바람이 한국에도 닿을까?

[Guardian] The Swedish 15-year-old who’s cutting class to fight the climate crisis

[Guardian] ‘Our leaders are like children,’ school strike founder tells climate summit

[New Yorker] The Fifteen-Year-Old Climate Activist Who Is Demanding a New Kind of Politics

[Financial Times] Greta Thunberg: ‘All my life I’ve been the invisible girl’

화, 2019/03/1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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