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기고] 전교조 법외노조통보처분취소 판결의 의미와 남은 과제
대법원 2016두32992 전교조 법외노조통보처분취소 판결의 의미와 남은 과제 신인수 회원 (민주노총 법률원) … 더보기
The post [회원기고] 전교조 법외노조통보처분취소 판결의 의미와 남은 과제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대법원 2016두32992 전교조 법외노조통보처분취소 판결의 의미와 남은 과제 신인수 회원 (민주노총 법률원) … 더보기
The post [회원기고] 전교조 법외노조통보처분취소 판결의 의미와 남은 과제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돌아오라 마봉춘! 고봉순!
언론위 김정욱 변호사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양간을 관리하는 자와 소의 주인이 다른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외양간을 관리하는 자가 타인의 소를 제멋대로 한다면요?
박근혜 씨가 탄핵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사회 곳곳에 얼룩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언론기관이 아닐까 합니다.
언론위에서는 ‘공범자들’ 영화 개봉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영화가 개봉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MBC와 김장겸 사장, 김재철, 안광한 전 사장 등 MBC 전, 현직 임원 5명은 법원에 영화 <공범자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초상권과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한다며 상영금지가처분을 신청했습니다. 영화개봉을 불과 사흘을 앞둔 시점이었던 8월 14일(월)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은 기각 결정이 되었고, 우리는 ‘공범자들’ 단체 관람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공범자들’ 개봉 바로 다음날인 8월 17일 오후 4시 여의도 CGV 앞에서 언론위 이강혁 변호사, 김준현 변호사, 류신환 변호사, 김정욱 변호사, 이희영 변호사, 이수연 간사가 모였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언론을 장악하던 작태들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가감 없이 보였습니다. 촛불 집회 때 시민들이 등돌리고 외면하던 공영방송사들, 하지만 그 내부에서도 언론의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던 여러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영웅이었고 또 다른 촛불이었습니다.
영화 관람 후 저녁을 간단히 먹고 자리를 옮겨, KBS 앞마당에서 시민들과 공영방송국 관계자들이 함께하는 돌마고 불금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언론의 기능이 망가져 있음을 스스로 느끼면서 마봉춘과 고봉순이 돌아오길 외치는 언론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이전의 네 번의 불금 파티가 눈에 가시였는지 다섯 번째 불금 파티 장소는 KBS 앞마당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더 떨어진 좁은 인도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언론의 초라한 현실을 느끼면서, 과거와 현재를 영상으로 돌아보며 열기를 더 해 가던 불금파티는 가수 이한철의 ‘괜찮아, 다 잘 될거야’ 노래로 절정에 치달았습니다.
불금 파티 종료 후 자리를 정리하고 쓰레기를 치운 후, 근처 둘둘치킨에서 뒤풀이 시간을 가졌습니다. 촛불 혁명 등으로 높아진 시민 의식과 더불어 아래로부터의 개헌 논의가 한창입니다. 언론위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기본권 조항에 대하여 많은 토론을 해 오던 차였습니다. 여러 다른 나라의 헌법 조문들을 비교하고,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헌법 개헌안에 대하여 고민을 하였습니다. 작금의 언론 사태를 보면서,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개헌안에 어떻게 반영시킬지에 대하여 고민하였습니다.
무더운 여름은 이제 끝나갔습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폭염도 여름의 끝자락에서 더는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시원한 밤이었습니다. 정부의 언론 통제도 이제 그 끝이 보입니다. 외양간은 고장 났고 보수해야 하지만, 다행히도 소는 주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혜정 : ‘판사 최은배’ 하면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했던 페이스북 글이 먼저 떠올라요. 당시 응원이나 비판도 많았겠지만, 특히 법원 내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최은배 : 사실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크게 번질 줄 몰랐어요. 그런 부분도 생각 못하고 올렸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죠. 글을 쓸 때는 페이스북 친구 200명 정도가 보고, 서로 공감하고 말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글을 밤 9시쯤 올렸는데 이틀 후 조간신문부터 조선일보에서 “이 사람이 이랬다더라”하는 식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거예요. 제 일이 더는 제 일이 아니게 돼버린거죠.
그때 사용했던 말 자체는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었어요. 당시 이상득 의원이 미국 대사한테 했던 말이거든요. 이상득 의원이 동생인 이명박 대통령은 ‘to the core’ 그러니까 ‘뼛속까지 한미동맹에 대한 의견이 확실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이걸 약간 비틀어서 “그래서 FTA 했나보다” 한 거였어요.
사실 제가 FTA나 통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FTA에 대해 오해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국회 비준 절차가 충분한 토론 없이 날치기로 진행됐고, 시민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잖아요. 국가 간의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 농림수산업을 희생시키고 공업, 특히 자동차를 더 팔기 위해서 우리 경제 안에서 형성되는 부를 밖으로 이전하는 것이고요. 이런 문제로 서민들이 더욱 고통당한다는 공감도 있었고요. 공직자로서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과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문제는 구분되는 일입니다. 지금도 공무원법 집단행동 금지 조항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는 부정선거의 악몽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법에 못 박았지만, 사실 정치적 중립은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니거든요. 공직자가 의무를 다하는 것과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은 양립 가능합니다.
그 후에는 제가 무슨 말만 해도 반응이 득달같이 일어나는 상황이 됐어요. 나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보편타당한 가치에 대해서만 말하고 어딘가 휘말릴 수 있는 말은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된 사건은 아닌데요. 2012년 대선 때 대선후보 토론회를 보고 페이스북에 “국가원수가 되면 외신 기자 앞에서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저렇게 아무 말도 안 하니 너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썼어요. 그랬더니 다음날 바로 법원장이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나도 판사로서 나라 일을 한다고 앉아있는데, 정말 판사가 말을 못하게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2013년 국방부장관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을 때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걱정되고, 누구하고 토론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용하게 페이스북에 올려봤다가 사단이 났어요.
남이 하는 말을 내 뜻과 맞지 않다고 배척하고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떤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틀리거나 잘못된 의견이라면 자연히 사라지겠죠. 그런 사회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헌법에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이렇게 네 가지 자유를 규정해요. 앞의 두 가지는 개인적인 표현이고 뒤의 둘은 집단적인 표현이죠. 40년 전에 처음 헌법을 공부할 때는 왜 ‘결사’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귀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모여서 노는 것도 결사이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러 모이고 동창 만나러 모이는 게 왜 표현의 자유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한참 후에 국가보안법 사건을 다룰 때에야 이게 왜 표현의 자유 문제인지를 깨달았어요. 어느 조직에 있느냐를 기준으로 상대의 생각을 재단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사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연결되더라구요. 우리나라는 반공이라는 이념 하나로 다른 의견을 완전히 배제해왔고, 또 이렇게 얻은 권력이나 이득을 지키려는 습성으로 항상 적을 만들어왔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법연구회나 국제인권법연구회 같은 모임은 ‘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잣대나 도구가 돼요. 옛날에는 ‘빨갱이’라는 말로 배제하면 다 통했는데 지금은 국민들이 ‘빨갱이’, ‘공산주의자’ 같은 말에 반응해주지 않으니 어떤 소수자를 만들어서 배제해요. 소수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상대를 배제하고 공격하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빨리 극복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혜정 : 일반 시민들은 비슷한 정치적 표현으로 실제 기소된 분들이 많아요. 민변에서 표현의 자유 기금으로 도와드리기도 하구요.
최은배 : 표현의 자유에 대해 형법으로 제한하고 민사상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불이익을 주는 게 분명히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프랑스 식 관용, 즉, 똘레랑스의 훈련이 되면 사회적으로도 나 역시 저런 상황의 당사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지사지가 가능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프랑스는 시민혁명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의 경험이 쌓였고, 2차대전 같은 비극의 피바람도 겪는 과정에서 똘레랑스를 확립할 수 있었죠. 우리나라도 동족상잔, 이념갈등 같은 피바람을 겪을 만큼 겪었는데.. 우리는 똘레랑스로 서로를 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배제하는 양상으로 나타나요.
정치나 선거의 영역 안에서 이야기하자면, 이런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명분은 대체로 ‘선거가 혼탁해진다’ 이런 얘기잖아요. 옛날에는 일반 시민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많지 않았죠. 미디어는 신문이나 방송같이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뿐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욕설을 한다든가 그냥 확성기나 스피커에 대고 말하는 것,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는 것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퍼스널 미디어가 발달했고, 이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건, 보기 싫거나 듣고 싶지 않으면 피하면 되잖아요. 표현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한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요?
물론 서구에서도 홀로코스트 같은 사건을 옹호하는 등 반인류적인 발언, 혐오발언을 하는 것은 처벌해요. 이런 부분은 제한되어야 마땅합니다. 동시에 정당한 발언을 했음에도 ‘혐오발언’으로 몰려 처벌당할 위험도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 이론이 충분히 쌓여야겠죠. 혐오발언과 혐오발언이 아닌 것을 구분할 충분한 기준이 있다면 혐오발언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발언에 대해 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부터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나도 어떤 점에서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새기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학교 현장에서는 앞만 보고 가르치잖아요. ‘좋은 대학 가야 한다, 이런 게 행복이다, 노력하면 오늘은 괴로워도 나중에는 도움이 된다…’ 이런 이야기 대신 내가 실패를 겪거나 약자가 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죠.
그래서 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의 삶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있어요. 다들 자라서 노동자가 될 텐데 노동3권 같은 기초적인 권리도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거죠. 노동자의 권리도 가르치고, 토론과 회의를 통한 민주주의의 진정한 면모도 겪어보게 해야 해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걸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때부터 배우기 시작해요.
법률가로서의 소양에도 문제가 있죠. 예를 들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단체법 이론을 이해하는데도 차이가 있어요. 총회를 소집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토론하고 결의하는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그 결의는 무효잖아요. 이런 과정이 민법의 가장 기본이에요. 그런데 학교 다닐 때는 전혀 배우거나 겪어보지 못하다가 법조인이 되어서야 주입식으로 배우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사람들이 자라는 동안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푸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아요. 그나마 학교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그 세대 때부터 조금씩 배우지 않았나 싶네요.
이혜정 : 그런데 오랜 법관 생활 후 어떤 계기로 민변에 가입하시게 되었나요.
최은배 : 제가 민변에 가입할 때 민변 회장이셨던 한택근 변호사님이 저와 연수원 동기입니다. 사법 연수원 때부터 같이 지냈고, 모임도 같이하고 해서 저는 변호사가 되면 민변에 가입하는 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민변 가입을 안 하면 한택근 변호사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웃음)
어떤 분들은 법원에 있다가 나와서 변호사가 되면 공직 출신이기 때문에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법원에 있을 때도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어요. 그때도 비슷한 프레임이 있었어요. 보통 법원행정처 업무로 들어가게 되면 상당수의 법관들이 우리법연구회를 탈퇴하고는 했어요.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다 보면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는데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이유가 많았죠. 그런데 저는 법원행정처에서 일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이혜정 : 판사 재직 시절에 바라보았던 민변은 어땠나요?
최은배 : 사실 제가 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기본적으로 민변에 아는 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제 시각이 일반적인 판사들의 시각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대학 때부터 조영래 변호사님을 비롯한 정법회 변호사님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이 인권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한 저는 민변이 모든 변호사의 가치를 포함할 수 있다고 봐요.
70년대에는 사법시험을 통과해 법조인이 되는 것이 운동의 차선책이 될 수도 있었는데, 80년대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87년 이전에는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뭔가 양심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법시험을 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시절에 제가 사법시험을 치르고 법률가가 되었다면 제 주변 사람들도 지금과 달랐을 거고, 제 생각도 지금과 달랐겠죠. 87년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사법시험을 부담 없이 치를 수 있게 되었고, 저도 주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혜정 : 그렇다면 법원에서 판사로서 민변을 바라보다가, 지금은 민변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민변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최은배 : 저는 법관 생활 하면서도 노동법을 많이 다뤘고, 민변에서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요. 법원에 있을 때터 노동위원회 위원들과 이미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 점이 좀 편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민변에 막 가입했을 때도 낯설거나 겉도는 느낌은 받지 않았어요. 다만 저는 법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전관예우’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거든요. 새내기 변호사님들은 민변 활동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저는 중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가입한 새내기 변호사님들이랑 같은 스텝으로 함께하기는 어렵더라고요.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비슷한 법조경력에 잘 알고 지냈던 분들이 여기서는 너무 높은 자리에 계세요. 회장 하시고, 총장 하시고(웃음). 그렇다고 막 가입한 새내기 변호사님들과 같이 다니기에는 또 세대차이가 나고요. 활동하면서 그런 부분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지만, 다들 너무 잘해주시기 때문에 민변에서 늘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혜정 : 혹시 판사일 때 할 수 없었던 일 중에, 민변에서 회원으로서, 변호사로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최은배 : 법원에 있을 때는 사실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어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오랫동안 고민하고 준비하지는 않았거든요. 판사를 잠시 머무는 자리라고 여기면서 언젠가 변호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판사로 계속 일할 생각이었어요. 여러 가지 문제로 사직을 결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변호사가 되었고요. 판사로 일하는 동안에는 변호사들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요구사항을 주로 들었죠. 피드백이나 모니터링 중심이었고요. 내가 변호사가 되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준비를 하지는 못했고요.
대신 법관으로서 법원을 어떻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있어요. 법원을 나오면 변호사가 되어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죠. 민변에서는 사법위원회가 법원 개혁에 대한 일을 주관하고 계시죠. 저보다 전문성을 갖춘 분들도 계시고요. 저는 법원 안에서도 사법제도나 앞으로 법원이 추구해야 할 지향보다는 재판을 잘 하는 것, 어려운 사람이나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자를 위한 재판이 이뤄지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법제도나 외국의 법관 양성, 외국의 사법 인사 제도 같은 분야는 저 말고도 전문성을 갖춘 분들이 많으니 오히려 제가 따라가기 바빠요.
이혜정 : 판사하고 변호사를 경험하셨는데, 그 중 어느 쪽이 더 적성에 맞으신가요.
최은배 : 판사는 국가의 녹을 받는 공직입니다. 사실 가정경제면에서 보자면 월급은 모자란 편이죠. 물론 판사가 받는 월급은 공무원 중에서 최고액에 가깝고, 흔히 ‘월급쟁이’라 말하는 분들에 비하면 많기는 합니다만, 반대로 변호사들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니 능력에 따라서는 많은 수익을 올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역으로 경기 부침에 따라 집에 월급을 못 가져다 줄 수도 있더라고요. 저도 작년에 한 달 반 정도 집에 월급 가져다주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다행히 제가 노동법에 특히 전문성이 있다는 약간의 이름을 얻어서 사람들의 신뢰를 사는 면이 있어요. 그 덕에 다른 부장판사 출신들보다 형편이 좀 더 나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담인데, 흔히 아기가 태어나서 사주를 보면 관운이 있다, 재물 복이 있다, 혹은 장수할 거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아버지가 제 이름을 지어준 작명소에서 제 사주를 봤더니, 행정 관료가 될 거라고 했답니다. 법관이 아니고요.
이혜정 : 판사는 변호사가 서면으로 정제하고 정리한 언어로 사건을 접하고, 변호사는 정제하기 전 날것 그대로의 사건을 만나게 되죠. 양쪽을 경험한 지금, 느낌이 어떤지 궁금해요.
최은배 : 일반론적으로 답하자면, 저도 절실하게 깨달았죠. 법원에 있을 때 변호사인 친구들이 “변호사가 서면으로 법원에 제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아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변호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법률 언어로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변호사는 사건의 전후와 쟁점을 법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요. 그런데 이건 이성으로 파악하는 얘기고요, 사실 판사는 괴로워요.
봐야 하는 서면도 많고, 재판도 많고, 일에 시달리고, 짜증도 나고, 변호사하고 싸우기도 하죠. 가끔은 변호사의 서면을 받았을 때 “이렇게밖에 못하나”, “이런 신청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하나, 안 해도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실제로 법정에서 “그쪽에서 받아봐라, 당신이 요청한 그 자료 받으면 제대로 쓸 수 있겠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판사일 땐 제가 판단하기에 부적절하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취하시키라고 하기도 했는데, 변호사가 되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변호사 편에 서게 되더라고요. 의뢰인이 무리한 요구를 할 때는 “판사한테 오히려 인상만 망가진다”고 말리기도 하지만요.
변호사가 되어보니 알게 된 점은, 법원의 명령이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모든 기관이 법원의 명령을 핑계로 미룰 수 없어요. “판사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고요. 법원의 명령이 강력해요. 실제로 법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건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회사에서 영업비밀이라고 자료 요청을 거부할 때 법원이 명령해주면 훨씬 쉽게 풀리잖아요. 판사일 땐 몰랐는데 의외로 법원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요. 법원이 강하게 나갈 때는 강하게 나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변호사들이 많은 부분 더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법원이 소심한 태도를 보이는 부분이 많아요.
이혜정 : 작년에는 변호사님이 민변에서 신입변호사를 위한 강연도 하셨죠. 판사의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좋은 변호사’는 어떤 변호사인지, 후배 법조인들에게 팁을 주시다면.
최은배 : 사실 법조인이 되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 내용 없는 답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서면은 공들인 만큼, 공부하고 쌓아온 실력만큼 나오게 되어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실 판사 입장에서 가장 보기 편한 서면을 내는 사람들은 부장판사 출신인 변호사가 직접 쓴 서면이에요.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직접 자기 판결문을 쓰듯 써 낸 서면이 가끔 있거든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판사를 경험할 수 없고, 또 부장판사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잖아요. 그러니 이건 특별한 일부의 이야기죠.
좀 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첫째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컴팩트하게 쓰는 게 중요합니다. 이야기 많이 하는 게, 서면 60페이지씩 써 내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고민하는 만큼 정제된 서면을 쓰게 됩니다. 분량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요. 판결문도 너무 긴 판결문보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읽을 만한 판결문이 더 좋고요. 짧게 쓴다고 생각도 짧은 건 아니에요.
둘째는 국어 실력입니다. 법학 소양의 문제가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그 변호사를 가르친 국어선생님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부장판사가 되고 남의 글을 고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건데, 나이 드신 변호사님들 중에 서면의 문장이 항상 ‘것입니다’로 끝나는 분들이 있어요. “~할 것입니다” 이렇게. 그게 모든 문단에 나와요. 그러면 읽는 입장에서 지쳐요. 최근 문장 교정하는 법을 다룬 책이 있는데, 전문교정인이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적, 의, 것, 들 이 네 가지만 주의하면 훨씬 깔끔한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지적하더군요.
중언부언하는 서면, 보여주기 식으로 분량만 길게 쓴 서면, 습관적으로 문장에 군더더기가 붙어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서면. 이런 글쓰기와 국어 실력 문제가 두 번째 문제예요.
세 번째가 법학이론의 문제입니다. 본인이 공부를 충실하게 한 만큼 장기적으로 실력차이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사법시험 세대에 빗댄다면, 민법 총칙 교과서 네 권을 다 읽은 사람과 수험서로 본 사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길게 보면 노동법을 다룰 때도 민법을 성실하게 공부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정치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이혜정 : 서면이 중요하다, 판사님도 정성들인 만큼 본다, 글 잘 쓰기 위한 노력을 하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죠. 그런데 가끔은 저 수많은 사건과 기록을 판사님이 정말 다 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최은배 : 기본적으로 눈에 들어와야 더 읽게 된다는 건 맞아요. 사실 세 페이지 정도 넘기다가 덮게 되는 서면도 있어요. 제목만 봐도 ‘했던 말 또 내는구나, 상대방이 서면 써냈으니까 반박하겠지’ 지레짐작으로 안 본 서면도 있었고요. 그런 재판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서면이 몇 개 안 나와요. 소장, 답변서, 답변서에 대해 제출한 원고의 서면, 그리고 끝이죠. 나머지는 감정이 필요할 때, 혹은 중요한 증거 조사 결과가 밝혀졌을 때 보면 되고요.
민사재판도 재판이 수십 차까지 길어지는 재판이 많고 변호인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자기가 원고라면 첫 번째 변론기일, 증거조사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해요. 법정에서 요구하는 것도 이 두 가지이고, 시간이 모자라 똑같은 말 그대로 쓴 똑같은 서면 내는 것보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는 게 낫다 싶어요. 변론의 기술보다 강력한 건 진실이에요. 사실관계가 우리한테 유리하다면 글도 간단히 핵심만 전달하면 되죠. 그게 아닌데 어떻게든 돌이키고 만회하려고 하면 말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하게 되고 변명처럼 느껴집니다.
이혜정 : 지금 민변 활동 중에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가장 많이 하고 계시잖아요. 노동법 전문가로서 최근 통상임금 판결은 어떻게 보시나요.
최은배 : 저도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사용자 입장이 되었어요. 도발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사용자가 큰돈을 버는 것은 위험부담을 떠안는 대가 아닐까요? 기업이 성공과 실패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사업적 위험을 감수한 결과 성공하여 큰돈을 벌었다면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사업 기반이 모두 마련되어있어 땅 짚고 헤엄치면서 들어오는 돈만 챙기는 기업도 있어요. 특히 지금의 통신사 같은 기업들이요. 그런 기업을 운영하는 CEO는 앉아서 1억 이상 급여를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스톡옵션으로 수십억씩 챙겨가기도 하죠. 그런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주주들도 마찬가지고요.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기업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기업 그 자체가 기업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조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세팅하는 것이 기업입니다. 사람의 조직과 사업 기반에서 재화가 생산되고, 용역과 재화가 결합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나의 조직체고 용조물이라는 거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기업은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비용’ 취급하면서 기업 그 자체의 보전만을 가치로 삼고 있어요.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돈입니다. 매출이 적어서 임금을 지불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하더라도 그게 정당한 사업의 결과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상한 일이 아니죠.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비축해두는 유보금, 예비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기업에서 실제로 일을 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의 절반도 안 된다면 좀 이상한 일 아닐까요? 대기업의 순수익 중 일부는 국가가 세금으로 거둬들여서 돈이 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에 분배해줘야죠. 결국 임금, 세금, 상품 원가를 제하고 나면 주주가 가져갈 이익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주주가 자본을 투입한 것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보상해주는 게 맞지만, 회사가 주주만의 것은 아니잖아요. 주주자본주의는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 초기에 나타난 극단적인 이론이에요. 지금은 기업의 존재 이유는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 있다는 게 정설이에요. 기업의 기반은 그 회사의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첫째, 회사의 사업에 노동을 투여하는 노동자가 둘째입니다. 자본은 마지막이에요. 소비자, 노동자, 자본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기업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기업과 노동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회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
우리 사회는 노동자는 비용 지출을 발생시키는 대상으로만 보고, 이윤이 안 나면 인건비를 가장 먼저 깎아요. 일을 할 사람을 조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는 기업의 존재 가치가 우선시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공헌은 ‘비용’으로 환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판결을 본다면 임금을 더 주는 바람에 적자가 생겨도 그 때문에 기업이 망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사람이 모이는 조직체이니 이 문제도 사람이 해결하겠죠.
이혜정 : 마지막으로, 요즘 법원개혁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어요. 가장 시급한 사법개혁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으시겠어요.
최은배 : 법원 내부의 문제라서 국민들이 실감하기 어려운 문제로는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 문제가 있어요. 기업에서도 직급별로 권한이 구분되어야 하잖아요. 판사도 스스로 협의회를 구성해서 의견도 내야하고, 사법 현장에서 대법원장 개인의 판단에만 근거하여 행정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여러 판사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권력이나 권한을 분산해야 해요. 지금은 전국의 모든 법정이 일사분란하게 의자 개수까지도 대법원의 결정을 따르고, 법원장은 법원 안에서 기금 운영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권한을 모두 분산시켜야죠. 연방제 국가는 주 법원과 연방법원이 완전히 달라요. 우리나라도 법원 자체적으로 특색 있는 법정도 만들어보고, 재판 받으러 온 사람들의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법원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사법부가 국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다른 게 없습니다. 판사 수 늘리고 법정 늘리고 법원 많이 만들어서 국민이 재판을 받을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는 게 가장 급선무입니다. 판사나 사법부의 틀도 국회의 입법에 의해 결정되고, 행정부는 공무원의 정원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크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사실상 검사가 민사재판을 하고 있거든요. 판사가 모자라니 민사재판을 진행하는데 오래 걸려서 재산 분쟁이 일어나면 사기, 횡령, 배임 같은 형사 사건으로 해결하려 해요. 법원이 제대로 기능하면 재산 문제나 개인 분쟁을 민사 재판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하는 많은 일을 법원이 가져와야 하고, 그러려면 법원이 경찰서만큼 많아야 해요. 경찰서는 자치구마다 하나씩 있잖아요. 법원이 인구 50만명당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면 검사가 형벌로 다스려 사회 질서와 사법정의를 지키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노동위] 2017 노동위 전체모임 후기
와 가을이네!
신경주역에 도착하는 열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여갈 때 즈음,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신경주역은 KTX만을 위해 지어진 역이기에 경주 시내와 멀리 떨어져 눈에 걸리는 건물도 없었고, 약간의 나무와 멀리 보이는 논밭, 능선들이 가을이 왔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우리를 마중나와주신 경주인권센터 집행위원장님은 멀리까지 운전하여 오시고 꽤 기다리셨을 것임에도 지친기색 하나 없이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황금 들녘과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능선을 구경하며 한 시간여를 달려서 권영국변호사님께서 예약해놓으신 식당에 도착했다. 구시가지 골목 안쪽에 자리한 식당은 외지인들은 잘 모르는 식당이라고 했다.
푸짐한 한 상에 교대역의 슬픈 밥들을 먹던 변호사들은 정말 행복한 얼굴로 밥을 먹었다. 맛있는 식사에 빠질 수 없는 친구인 막걸리를 곁들였는데, 경주법주막걸리는 지금 쌀 소비량이 최저를 찍는 이 시점에 수입산 쌀을 섞어 쓰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배도 부르고 해서 다음 장소인 경주노동인권센터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식당에서 걸어가는 동안, 3층을 넘어가는 건물이 거의 없었다. 프렌차이즈 가게들이 적은, 왕복 1.5차로 정도 되는 길을 걷다보니, 권영국변호사님께서 하신 ‘경주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경북노동인권센터는 경주 번화가에 인접해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보고 접근하기 좋게 되어있었고, 넓은 사무실에, 주방을 갖추고 창밖이 트인 환경이 참 신기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들어와서 우리가 아니더라도 북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 일정은 경북지역 노동현안에 대해서 들어보는 자리였다. 메인은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문제였다. 아사히 글라스는 일본기업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부지, 세금면제 등의 엄청난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최저임금인 비정규직(불법파견)으로 공장을 채우고.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동조합을 만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하루의 휴무일 이후에 해고해 버린 ‘엄청난’ 기업이다. 이렇게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분들은 오랫동안 투쟁을 계속 해왔고, 최근에 노동부에서 이러한 아사히 글라스 비정규직에 대하여 불법파견이므로 직접고용하라는 시정지시를 내렸다고 했고,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라고 했다. 사업장이 구미에 있고, 전통적으로 유명한 사업장도 아니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가 어렵다고 하셨는데,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갖고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아사히 글라스 측에서 노동부의 시정지시를 이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여서 앞으로 추이를 지켜보아야겠다.
아사히 글라스 지회의 얘기 외에도 투쟁에서 승리한 발레오만도 노동자의 발언도 들었고, 다른 경북지역 노동현안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던 뜻깊은 자리였다.
간담회가 끝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위원장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경주지역에서 나는 향토 특산물(?)인 천년한우를 먹게되었다. 망언처럼 들리지만, ‘소고기는 금방 질린다’라는 말을 가끔 하는데, 정말 넉넉한 마음으로 고기를 시켜주셔서 고기로만 배를 채우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부른 배를 안고 우리는 안압지로 향했다. 사실 이 코스는 2012년 여름 내일로 여행에서 굉장히 좋았던 인상이 남았던 내가 강하게 추천한 것이었는데, 주말이고 단풍철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예전에 느꼈던 고요한 기분은 느끼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조명을 켠 안압지와, 안압지를 나와서 월성터, 첨성대를 지나 대릉원 인근을 거쳐 황리단길에 이르는 여정은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겹쳐서 얼굴을 상기시켰다. 물론 황리단길로 오는 직선 코스가 아니라 빙- 돌아서 오는 바람에 다리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결국 술은 경주에 계신 분들이 마련하신 노상(!)에서 마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정말 대단했다.
나무가 무럭무럭 자란 봉황대가 보이는 공원에서 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수제맥주를 마셨는데, 이것이야말로 경주에서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약간 쌀쌀하기는 했지만, 좋은 사람들과 좋은 술 그리고 좋은 풍경과 공기. 이보다 더 멋진 술자리는 한동안 경험하지 못할 것 같다.
날이 점점 더 추워져서 숙소로 술자리를 옮겼다. 여기에서는 현재 노동위의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졌고, 새벽 4시쯤 자리가 파했다.
체력이 좋은 것인지 의지가 뛰어난 것인지, 권영국변호사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경주문화원장님의 문화해설이 준비되어서인지, 많은 변호사님들이 늦게 잤음에도 제 시간에 일어나서 아침도 먹고 약속시간에 거의 늦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둘째날은 태풍 ‘란’의 영향으로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정말 날아갈 뻔하기도 하였고, 까마귀떼가 바람에 휘청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문화원장님의 강의는 단지 문화재의 양식에 대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그 바탕이 되는 역사를 곁들여 설명해주셔서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점심으로 물회를 먹었는데, 다른 부재료가 잡다하게 많이 들어가지 않고, 배와 신선한 물회의 조합은 정말 깔끔하고 맛있었다. 그 이후에 약간 시간이 남아 황리단 길을 다시 구경이나 해볼까하였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하기로.
다시 신경주역으로. 사실 이번 모임에서 처음 뵌 변호사님들도 많았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사람은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만나는 법이니까.
[소수자위] 차별은 비켜비켜!, 차별금지법 빨리빨리! 민주주의 Go! Go!
안녕하세요. 소수자인권위원회입니다.
지금 한국사회에 성 차별을 비롯하여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 비정규직, 지역, 학력, 질병 등울 이유로 한 각종 차별과 불평등이 매우 심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 이런 다양한 차별을 금지하여 평등을 실현하고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논의의 진전 없이 지체되어왔습니다. 보수정권은 다양한 차별과 불평등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어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어렵다는 답변을 반복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지난 겨울 우리는 우리사회의 민주주의를 더 깊고 더 넓게 만들기 위해 촛불을 들었습니다. 차별과 불평등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넘어서는 것, 우리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선언하고 확인하는 것, 이것은 단지 몇몇 소수자가 아니라 촛불로 세워진 정권, 그리고 더 평등한 사회, 더 민주적인 사회를 요구하는 평등 시민들 모두가 함께 지고 있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런 시민들의 요청에 부응하여 여러 시민단체들이 다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민변도 이 흐름에 함께 하고 있고, 소수자인권위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조금 더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차별은 비켜비켜!, 차별금지법 빨리빨리! 민주주의 Go! Go!
차별금지법 서명운동에서 외쳤던 구호처럼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민주주의가 더 성숙할 그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많은 민변 회원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신고리 5,6호기 백지화와 탈핵시대를 여는 울산시민 1000인 대토론회> 참가
지난 9월 24일 울산에서는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울산시민운동본부] 주최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와 탈핵시대를 여는 울산시민 1000인 대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시민사회, 노동단체, 정당, 마을모임 등 210개 참가단체와 가족들이 함께 하는 행사였습니다. 민변 울산지부는 [신고리 5,6호기백지화 울산시민운동본부]가 출범한 지난 7월 19일부터 참가단체로 함께 하면서 지부장 김병수 변호사가 공동대표를, 사무국장 장석대 변호사가 집행위원을 맡아 활동하였고, 당일 토론에는 정기호, 장석대, 신지현변호사등이 가족과 함께 참가하였습니다.
[1000인 토론]은 당시 진행되던 정부의 공론화절차 관련 “신고리 5,6호기를 둘러싼 핵심쟁점에 대한 입장을 토의하고, 신고리 5,6호기 백지화를 위한 울산시민들의 결의의 장”이라는 취지로 개최되었으며, 성인 870여명, 청년 30여명, 청소년 30여명,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의 어린이 100여명등이 참여하여 각 조당 10명 내외로 총 100개 조가 동시에 같은 자리에서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토론회에 앞서 울산지역 곳곳에서 각계가 참여하는 탈핵릴레이토론이 115회 개최되었고, [1000인 토론]은 각 릴레이토론의 성과를 종합하여 탈핵결의를 다지는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40분간 진행된 선택토론에서는 “핵발전소 주변 서생면 주민들의 고통과 피해(이주, 건강, 생존권, 보상문제 등)에 대해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주제로, 이후 40분간 이어진 공통 토론에서는 “공론화위원회가 신고리 5,6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날까지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이 무엇인지”등에 대한 토론 등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10. 20. 신고리 공론화위원회가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로 결론을 내려 아쉽기는 하지만, 울산지역에서 광범위한 시민들이 참가하는 형태로 ‘핵발전소의 문제점과 탈핵의 당위성에 대해 토론하고, 이후 실질적인 탈핵활동’까지 이어지는 등 나름대로 탈핵운동의 외연을 확장하는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경남지부 소식
김형일 회원
1. 경남은 전국유일의 도지사 청정구역으로 이름 높은 곳입니다. 경남 도민들은 병원도 없애고 아이들 밥도 못주겠다고 하셨던 경남 특산 도지사님을 우리만 독점할 수 없다는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가슴에 품었고, 경남지부 하귀남 회원은 굳이 도지사를 송별하겠다며 경남도청 앞에서 소금을 뿌리며 떠나는 길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가장 큰 팔각도로 소금을 뿌리는 하귀남 회원 : 영상 썸네일 기준 우측 여섯번째]ⓒ경남도민일보
2. 즐거웠던 민변 정기총회 이후, 경남지부의 핵심 사업은 조선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2017년 노동절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는 800t급 골리앗 크레인과 32t급 타워 크레인이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경남지부는 별도의 법률지원단을 구성하여 피해 노동자에 대한 법률지원을 시작했습니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도정운영의 모토로 삼았던 전임 도지사의 영향인지, 관할 고용노동부는 사고 발생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이렇다 할 대책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연히 지급해야 할 휴업수당마저 지급받지 못한 노동자가 많고, 끔찍한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들에 대한 심리치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3. 이 와중에 2017. 8. 20. STX조선 진해 조선소에서는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4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습니다. 삼성 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발생한 사고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안전시설 미확보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들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사고의 핵심 원인이며, 이는 하청에 재하청을 거듭하는 조선업 특유의 고용환경 때문이었습니다. 경남지부에서는 유족들을 만나 원청에 대한 손해배상에 관한 법률지원을 진행 중이며, 후속 대응에도 함께할 예정입니다.

4. 경남지부 회원들은 고용노동부 통영지원 앞에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무료 법률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정기총회에서 보셨다시피, 경남의 바다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바다 한켠에는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경남지부의 2017년은 아마도 조선업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와 함께 흘러갈 것 같습니다.
다음 번 경남지부 소식은 유쾌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보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당장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지요. 열심히 싸우고 좋은 소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민변 국제통상위 모임에 참석하고는 있으나 아직은 통상문제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고 심지어 FTA 영문본을 보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던 저에게, 드디어 회원으로서 밥값(?)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12월 1일에 열리는 한미 FTA 2차 공청회를 참관하는 것이었지요. 1차 공청회가 파행을 겪었기에 2차 공청회도 파행되는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되기도 하였지만, 어찌되든 FTA 개정현장의 분위기를 느껴보자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공청회가 열리는 코엑스로 향하였습니다.
등록절차를 마치고 명찰과 자료를 받아 공청회 장소로 들어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방청석을 채우고 있었고, 취재진들이 발표무대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어 방청석에서는 무대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청회 시작 전 농민단체들이 공청회장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외치는 ‘개정협상 반대’의 구호소리가 공청회장 내부까지 생생히 들려 이러한 분위기만으로도 한미 FTA 개정문제가 뜨거운 감자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공청회에 참석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항의, 토론회 좌장에 대한 좌장 교체요구, 무대를 전부 가린 취재진에 대한 방청객의 항의 등으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장내가 정리되고 본격적인 패널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민변에서는 국제통상위원장이신 송기호 변호사님이 참석하셨는데, 송기호 위원장님은 한미FTA 개정협상에 있어 우리가 견지해야 할 원칙과 자세에 대하여 주로 발언하셨습니다. 송기호 위원장님은 한미 FTA 시행 이후 정부에서 시행한 농업피해대책이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엄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시면서, “사람 중심의 FTA가 되어야 한다. 일자리 증가와 서민의 삶의 질 향상, 환경보호와 노동권 보장이 중요하다.”고 하여 FTA 개정협상의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에 쫓기듯 하는 개정 협상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와 목표에 의해 우리 절차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개정 협상을 해야 한다.”고 하여 우리가 주도적으로 개정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토론 과정에서 여러 의견들이 나왔는데, 의외로 ‘FTA 폐기도 불사하는 강한 자세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고, 정부의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국장도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것보다 폐기가 낫다는 토론자들의 발언을 유념하겠다. 이익의 균형차원에서 제조업과 농업 등 특정산업간 균형을 유지하고, 농업이 희생되지 않도록 농민 관련단체, 농림부와 긴밀한 협의를 해나갈 것”이라고 답변하면서 공청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공청회를 지켜보며 한미 FTA로 인하여 농축산업이 입은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점에 많이 놀랐고 농축산인들이 FTA를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언론을 통하여 농축산업이 가장 큰 피해를 받는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사실 농업은 제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분야가 아니기에 그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농업의 어려운 현실을 토로하시는 어르신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소 안일하게 FTA 문제를 바라봤던 저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FTA 개정협상을 지켜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공청회와 업계별 간담회에서 나온 의견들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정부가 통상조약체결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국회에 보고하면 한미 FTA 개정협상을 위한 국내법 절차는 모두 마무리되는데, 정부는 지난 12월 18일 국회에 통상조약체결계획을 보고함으로써 국내법 절차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따라서 조만간 한미양국이 FTA 협상개시를 선언하면 본격적으로 FTA 개정협상이 진행될 것인데, 한미 FTA 개정협상이 우리나라의 국익에 부합하고 농축산업 등 피해를 최소화하며 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되는지에 대하여 민변 회원님들께서도 많은 관심가지고 잘 지켜보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글은 사법위원회를 함께하실 미래의 위원님을 모시기 위해 보내는 열렬한 초대장입니다. 오세요, 얼른 오세요. 사법위원회의 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제도개혁에 관심 있으신 변호사님이라면 두려워말고 꼭 오셨으면 합니다.
무조건 오시라고 당기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사법위의 올 한해를 소개해드립니다.
2017년 올해의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적폐청산’이었습니다. 적폐청산은 한편으로는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아직 미치지 못하는 각종 사회 조직과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부패한 인적 구성원들에 대한 법적 단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법위는 여기에 어떠한 내용의 개선이어야 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토론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올 해 초인 3월경 사법위원회는 검찰개혁이슈리포트를 통해 공수처 설치, 검경수사권조정, 법무부탈검찰화, 재정신청사건 확대 등 민변의 검찰개혁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였습니다. 그 중 특히 공수처 설치 문제와 검경수사권조정의 문제의 경우 실질적인 수사실무의 관행이나, 경찰 조직에 대한 이해와 신뢰의 문제 등 여러 현안이 겹쳐져 있어서 보다 다각도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에 사법위는 10월, 경찰대 출신으로서 경찰 실무경험을 가지고 계신 경남대 법학과 유주성 교수를 모시고 의견을 청취하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법위는 미래의 위원님과 아래의 일들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사법위원회는 2018년을 맞아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적폐청산’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슈인 검찰개혁, 법무부 탈검찰화, 검경수사권조정, 경찰개혁, 공수처 설치, 법원개혁, 법조일원화에 따라 도입된 로스쿨제도, 개헌 등 온갖 제도개선의 필요성 등의 문제가 내년에는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민변 사법위 위원님들께서 각 단위별 위원회에 참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실제 제도개선을 위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우리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개혁의 과업이란 사람 몇 명 바꾸는 것이나 조직 하나를 없애고 새로 만드는 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기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메타적인 시선이 강력하게 요구됩니다. 사법위원회는 민변의 다른 위원회도 물론 그렇지만 사법개혁에 대해 오랜기간 고민하고 공부하신 선배 변호사님들의 주옥같은 말씀을 가까이서 듣고, 배울 수 있습니다.
사법개혁에 관해서라면 민변 사법위원회에서의 논의가 언제나 최신이며 최고이고 최선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어, 그러면 난 잘 모르는데 위원회 활동을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참여의 마음은 있지만 왠지 겁이 나시는 변호사님을 위해 단란한 사법위 사진을 공유합니다.
민변의 자랑은 선후배 변호사의 연차 고하 막론하고 동등하고 평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함께 토론할 수 있는 문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법위는 현재 위원 구성으로 본다면 표준분포가 큰 위원회이지만 어느 위원회보다도 가장 동등하고 평등한 발언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드립니다.
사법개혁은 인권을 수호하고, 민주적 절차를 준수하며 국민의 법감정에 맞는 법치주의 작동을 현실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논의의 흐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전혀 사법위에 오셔서 말씀하시는데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언제나 활력을 주고, 더 사회에 적합한 논의를 심화시키는데 이롭기 때문입니다.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환경보건위원회는 최재홍 위원장과 김정욱, 김지은, 김혜원, 진재용, 이정일, 노승진, 이성규, 조영관, 안현지, 황정화, 지현영, 김경은, 손준호, 박애란, 이영기, 전종원 변호사 등 40여명의 회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월성1호기 수명연장 취소소송, 4대강 수문개방소송 등 환경보건과 관련한 법적 쟁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환경보건위원회는 당초 환경위원회로 출발하였으나, 보건에 관한 문제가 환경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환경보건위의 사업분야를 확대하기 위하여 명칭을 환경보건위로 개편한 이후 보건문제와 관련하여 가습기살균제 피해사건, 메르스 피해 사건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환경보건문제의 특성상 환경보건위원회는 환경단체들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으며, 4대강 사업, 탈핵, 유해물질 배출시설의 설치와 피해, 대기환경오염 등의 문제를 환경단체들과 함께 현장에서 활동하고, 관련 법률안의 개정작업도 병행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환경보건위원회는 매월 세 번째 주 목요일 저녁에 정기월례회를 진항하고 있으며, 정기 위원회 월례회 이외에 지리산 오색케이블카 현장답사, 4대강 현장방문 등 환경과 관련한 곳곳에 방문하거나 외부단체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있습니다.
2018년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에도 환경보건위는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위원회는 소송분야에서 4대강 사업취소소송, 월성1호기 수명연장취소소송, 갑상선 암 피해소송, 석면피해소송, 가습기살균제 피해소송, 메르스 피해소송, 송전탑 피해소송, 폐기물매립장 관련 소송, 석탄발전소 건설 관련 소송, 골프장 허가 취소 및 피해소송 등 환경문제로 인한 피해구제와 예방을 위한 민형사, 행정소송등을 다수 진행하였습니다. 새해에는 그동안 위원회에서 진행했던 소송에 대한 연구작업과 함께 주요한 환경 판례에 대해 공부모임도 꾸려갈 예정입니다.
정책입법분야에서는 가습기살균제구제법, 환경권의 헌법개정안 연구, 환경영향평가법과 규제프리존법등 입법감시활동, 수용권의 남용과 관련하여 사업인정의 현실화 관련 정책입법연구등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환경보건 분야는 그 특성상 피해의 장기누적성, 광범성, 피해원인의 불명확성을 가지고 있기에 피해가 현실적으로 발생하였다 하더라도 가해자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책임의 입증책임 문제로 인해 피해배상이 쉽지 않고, 가해물질의 배출을 차단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이를 위해 환경보건위원회는 사안의 특성에 따라 대기, 토양, 수질 등 관련 전문가분들과의 협력을 통해 피해원인을 규명하고, 가해자를 특정하는 작업들을 수행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에 특별위원회에도 참여하여 법률가로서 환경문제의 사전예방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환경보건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리고 환경보건 문제를 법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계시다면 다가오는 새해 바로 환경보건위에서 활동을 시작하세요. 환경보건위원회에 가입신청을 하고 그동안 모임에 함께 나오지 못해 어색한 상황이라면 다가오는 새해 첫 모임 (1월 18일 목요일 늦은7시 민변 회의실) 에서 새출발을 함께 해요!
2018년, 당신도 녹색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의 : 위원장 최재홍 010-2698-7073 , 간사 조영관 010-8848-7828)
대설주의보가 내린 빙판길 위를 거침없이 달리는 변호사. 민변 언론위원장 이강혁 변호사를 만나보았다. 9년 경력의 기자였던 그는 지금 법조인으로서 언론의 영역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7년 만에 파업에 마침표를 찍은 MBC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동시에 여전히 아픈 손가락인 KBS와 언론 생태계 전반을 걱정하는 그의 솔직한 생각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날 수 없는 돌마고(돌아오라 마봉춘 고봉순) 파티의 아름다운 피날레를 위해 오늘도 이강혁 변호사는 달린다. 아이스 스케이팅도 마다하지 않는 언론 지킴이 이강혁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민변 언론위원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특히 언론위원장으로서 맡은 직무는 무엇인지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언론위원회는 영어로 대외적으로 소개할 때 ‘committee on media’, 즉 ‘언론매체에 관한 위원회’예요. 하지만 언론의 자유는 좁은 의미의 언론매체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표현의 자유 전반으로 이해되기도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하냐고 묻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잠재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도 있고 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역사적으로 언론위원회는 언론 매체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어요.
처음 언론위원회 조직을 만든 안상운 변호사님께서 언론매체의 문제, 그중에서도 언론의 왜곡·과장 보도로 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시작했어요. 이걸 중심으로 오긴 했지만, 활동 영역을 넓혔어요. 언론보도 피해자 구제에서는 언론이 대상화되어있지만, 언론을 중심에 놓고 언론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활동도 하고 있어요.
정리하자면, 활동영역의 기본은 언론 보도의 피해자 구제 지원이에요. 그 유관분야로 우리 민변을 언론과의 관계에서 수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민변 회원들도 언론 보도의 피해가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조·중·동에 의해 종북으로 매도당하고 공격받기도 해요. 그때 언론위원회가 소송을 대리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언론매체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언론매체 내부에서의 개혁운동 같은 것을 지원하기도 해요. 대표적인 예로 현재 방송개혁을 위한 양대 공영방송 파업에 결합하여 지원하는 활동을 들 수 있고요. 조금 더 나아가서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언론의 자유 개념이 포괄적이기 때문에 더 폭넓게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 채 다양한 관심을 두고 추가의 활동 영역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분들이 오셔서 어떤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폭이 넓어질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 위원회입니다.
9년 넘게 신문기자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계기로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신문기자가 된 것 자체가 투철한 계획이나 적성이라든가 장래 진로와 전망을 확실히 정리한 상태에서 되었다기보다는 상황에 의해 불가피하게 된 면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당시만 해도 보편적으로 민주화운동·학생운동에 많이 참여하는 분위기였고, 저도 그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운동에 참여했어요. 그 과정에서 감옥에도 다녀오다 보니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 대상자가 되었고요. 그래서 다른 분야로 갈 수는 없었고요. 노동운동을 하거나, 언론사도 다른 언론사가 아닌 ‘한겨레신문’ 밖에 대안이 없었어요. 이 두 가지의 선택지 가운데에서 고민했는데, 나름대로 학생운동도 하고 그 당시에는 투철한 혁명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백면서생 스타일이고 미국식 자유주의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고 급진주의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여러모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사실은 직업으로서의 기자 생활이 아주 잘 맞았던 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 언론사들에서는 제도의 틀에 맞서 소위 ‘곤조’, 즉 근성을 부리고 거칠게 싸우며 공격적으로 하는 것이 권장되는 분위기거든요. 그래야 특종기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최근 문재인 대통령 중국 방문 과정에서 중국 경호원들과의 충돌과정에서도 (관련 기자님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편린이 드러났죠. 이것이 제 서생적인 기질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신문 동료들이 인간으로서, 그리고 우리 시대에 살면서 품는 지향성 면에서 굉장히 존경할만한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우고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안 맞는 부분들 때문에 계속 고민을 했죠.
그러다 정권 교체(김대중 대통령 당선)가 이루어지고 (표현이 왜곡되어 들릴 수 있고 한겨레에 계신 분들이 오해할 수도 있어 조심스럽지만) 한겨레신문이 일종의 여당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굳이 그곳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고 개인적으로 더 하고 싶은 일, 더 맞는 것을 찾아도 될 것 같아서 다른 직업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퇴직하고 처음에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는데 건강 문제 등으로 실패했죠. 그 후 생계를 위해 고등학생 대상 논술학원 강사를 몇 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다 안정적인 활동을 하려면 아무래도 변호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마무리 짓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로스쿨 1기로 들어가 변호사가 되었고, 이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직업으로서 맞지 않은 것 외에 구체적으로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 그 점에 관해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했던 점이 있어요. 한겨레신문이 좋은 선·후배가 모인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어떤 기사를 쓰기 싫은데도 써야 하는 것 등이요. 타사처럼 위에서 억압하거나 안 좋은 기사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어요. 제가 워낙 개인주의적이고 못된 성미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면에서 ‘나 혼자 간섭받지 않고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봤을 때 변호사가 떠올랐어요.
또, 언론사 기자 생활이 소모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자기계발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실력을 쌓고 싶었어요. 일반적인 학문 공부를 하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만, 생계에 대한 압박이 있어 도저히 그 나이에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법학을 다루는 변호사를 선택했는데, (신문사의 동료들에게 죄송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는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지금이 기자 때보다 더 맞는 것 같아서 후회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된 후에 여러 소송을 수행하셨을 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소송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작년에 신문법시행령에 대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결정을 얻어낸 헌법소원 사건(2015헌마1206)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박근혜 정권이 (이미 드러난 공영방송 등에 대한 개입 외에) 인터넷언론 쪽에도 개입을 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2015년 당시에도 이런 정황을 포착하여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어요.
인터넷신문의 기준은 신문법과 신문법시행령에 규정되어 있는데, 기존에는 상시로 고용해야 하는 취재 및 편집 인력을 3인 이상 요구했거든요. 그런데 문체부에서 기업들 대상의 신뢰하기 어려운 설문조사 결과 등을 내세워 ‘인터넷신문들이 기업체를 공갈하고 안 좋은 쪽으로 쓴다, 언론계의 물을 흐리고 질을 떨어뜨린다’는 등의 논리를 펴면서, 신문법시행령의 인터넷신문 인력 기준을 3인에서 5인으로 개정했어요. 인터넷신문 업계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인 미디어나 2인, 3인 미디어 수준이 많은 것이 인터넷신문의 현실이거든요. 당장 사람을 더 고용한다는 것은 인건비가 들어간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이런 매체들은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하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문을 닫으라는 이야기인 셈이에요. 그때 당시 조사한 바로는 절반 이상의 기존 인터넷매체가 폐업을 고민했었고, 그래서 충격이 컸죠. 이 시행령 개정 배경으로는 앞서 언급한 나름 내세운 명분은 있었지만, 사실은 인터넷 언론을 완전히 장악해나가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봤습니다. 신문 쪽에서는 ‘한경오 진영’이 있긴 합니다만 조·중·동이 꽉 잡고 있고, 공영방송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물론 종편에서도 JTBC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통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인터넷’ 언론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기준 요건 강화를 통해 많은 인터넷신문사들의 문을 닫게 하고 시장 자체를 재편하는 계기로 삼으려 했던 거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1인 미디어가 가능한 시대잖아요. 소수의 인력으로 하더라도 특정 전문 분야를 성실하게 지속해서 취재하고 보도한다면 기존의 대형매체들이 하지 못하는 영역을 다룰 수 있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물론 영세한 업체 중 문제가 있는 업체도 있긴 하지만,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우면 안 되듯이 당시 개정한 시행령처럼 과도한 기준을 요구해서 이에 미치지 못하는 매체들은 모두 없어지게 하면 안 되는 거죠. 이런 측면에서 너무 획일적이고 지나친 입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어요.
사실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신문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한 기존 정권에서 임명한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최소한의 자유주의적인 언론관에 입각해서 이건 너무 심하다고 인정한 것 같아요. 그래서 7:2로 위헌이라는 판단을 받았고, 덕분에 많은 인터넷신문들이 문을 닫지 않고 살아나게 됐습니다. 그종사자 분들한테도 그렇고, 무엇보다 언론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칠 시도를 막아냈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현재까지 KBS는 파업 중이지만, MBC는 최근 김장겸 사장이 해임되고 해직된 최승호 PD가 사장으로 내정됐습니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남다른 감정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일단 저 자신도 그렇고, 많은 분이 양대 공영방송인 KBS와 MBC의 언론인들에 대해서 많이 실망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2012 MBC 파업이라든가 열심히 언론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한 분들이 계시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방송이 엉망으로 왜곡돼 갈 때 무엇을 하셨는지, 더 적극적인 노력이나 저항을 할 수는 없었는지 등에 대해서 의심이나 약간의 불신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파업을 MBC는 마무리했지만, KBS는 지금도 진행하고 있잖아요. 소위 무노동무임금 원칙에 의해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달 파업을 하고 계시는데, 몇 달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KBS 같은 경우에는 최근에 사태의 분기점으로 강규형 이사 해임 사전통지가 되면서, 저도 파업을 이끄는 새노조 위원장께 “이젠 파업을 접으시라, 너무 힘드니까”라고 그렇게 권유를 많이 했는데 “힘들더라도 끝까지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교훈이 남는다.”라며 투쟁을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런 모습들과 아울러, 영화 <공범자들>을 통해 2012 MBC 파업 이후 지속해서 싸워오고 고통받아온 뜻 있는 방송인들의 노력을 생생하게 눈으로 보면서, 적어도 이런 움직임과 운동을 주도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다시 기회를 가질 자격과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파업에 참여하는 분 중에는 대세를 따라서 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꾸준하게 싸워오고 지금도 절절하게 실천하는 분들은 정말 진정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분들을 중심으로 공영방송이 개혁되고 제자리를 찾아갈 희망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동안 공영방송 장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무섭게 했죠. 국정원까지 동원해서요. 특히 노조가 저항하니까 플랜을 만들고 그 플랜에 맞춰 해바라기 언론인들에게 지시를 내려서 노조 활동을 하거나 뜻있는 언론인들을 한직으로 부당인사를 하는 등의 식으로요. 물론 정권이란 가해자가 있고 이것이 핵심이지만, 이외에도, 주체적인 반성이란 면에서 본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언론사 내부에서 양지를 좇은 해바라기 언론인들의 문제이겠죠.
정권이나 자본 등 외부의 유혹이나 압력은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거든요. 그래서 내부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주체의식이 중요한데, 그런 부분에서 타락한 해바라기 언론인들이 호응을 했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악화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특히 결과적으로는 비슷했을지 모르겠지만, 많은 국민들이 공영방송에 대해 심각한 불신을 가지게 됐던 부분이 그런 것들 때문이었으리라는 면에서 굉장히 그 문제가 컸죠. 노조 파업 하시는 분들도 주목하고 있는 사안인데, 정권의 언론장악을 내부에서 협조해주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한 분들에 대해서 법적인 차원이든 도덕적이고 직업적인 차원이든 확실한 책임추궁과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론인들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고 중요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절대로 그렇게 처신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교훈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변 언론위원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파업에 연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매주 금요일에 불금파티라고 외부 지원 단체 연대 집회가 있습니다. 저나 위원님들이 참석하면서 연대를 꾸준히 했죠. 개별적인 법률 지원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예로 방송통신위원회에서 해임통지를 한 KBS 강규형 이사 사안을 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애견 동호회 활동을 하는데, KBS 법인카드로 동료 동호인들에게 밥을 사주는 등의 비리가 드러났습니다. KBS 이사들 문제가 제기되니까, 애견 동호회 분들이 KBS 노조에다가 제보를 한 거죠. 그런데 그걸 알고 그분이 제보를 한 사람들에게 협박성 문자를 여러 날 보냈습니다. 모 유명 사립대 교수님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수님의 말이라 생각하기 힘든 폭언적 내용이 가득한 채로요. 그래서 언론위 소속 위원이신 서창효 변호사님이 KBS노조를 대리해 강부영 이사를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파업에서 내용으로 봤을 때 제일 크게 쟁점으로 부각됐던 것은 ‘공공기관 경영진의 임기를 정권교체 과정에서 보장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008년도에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KBS에 정연주 사장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을 이명박 정권에서 쫓아내기 위해서, 어떻게 보면 외형적으로는 지금과 비슷하게 KBS 이사를 바꾸고 이어 사장을 바꾸는 수순을 진행했습니다. 나중에 판결을 통해서 위법이라는 판단을 받긴 했습니다만, 이미 임기가 지난 뒤라 원상회복은 못 했죠. 당시 사태와 이번 투쟁이 외형적으로는 비슷하기 때문에 뒤집어서 보면 우리가 그 과오를 또 범하는 것이 아니냐, 안 좋은 전례를 남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 문제에 대해서 다른 언론단체들은 상대적으로 깊게 고민을 하지 않고, 적폐 세력이 말도 안 되는 얘기 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거나, 우리는 어떤 논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지지한다는 식으로만 대부분 정리를 했죠.
하지만 우리 민변 언론위원회 같은 경우는, 특히 법률적인 문제도 많이 깔렸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죠. 역으로 저쪽에서 소송한다고 큰소리치며 이미 법정공방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이고, 당장 정연주 사장님 판결 때 우리가 이겼던 것처럼 소송에서 우리가 질 수도 있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지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그 과오에 대한 책임 문제, 또 나아가서 사회 전체의 적폐청산과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부담이 클 수 있습니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죠.
그래서 그 부분을 나름대로 언론위원회에서 심도 있게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공영방송 경영진 같은 경우 ‘일반적으로는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예외적으로 해임하지 않을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임기 보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해임 절차 규정이 대통령 탄핵처럼 세부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기에 이전의 판례나 일반적인 단체법 법리를 적용해 절차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는 등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가장 먼저 성명으로 발표했고 위원장 명의로 오마이뉴스에 기고해서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당장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영방송 정상화 투쟁의 정당화 논거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나름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영방송 장악 금지와 관련한 여러 법률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권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독립된 언론을 위해 추진해야 할 법적 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근혜 정권 말 즈음에 ‘언론 장악 방지법’이라고 당시에 야 3당인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국민의당이 같이 법안을 만들어 놓은 게 있습니다. 기존 KBS‧MBC 이사 구성이 일방적으로 여 쪽에 편향되어 있었다면, 이 법안의 핵심적인 내용은 7대 6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특히 사장 선출과 선임을 할 때는 편향성을 가지지 않는 사람을 사장으로 해야 한다는 취지로, 3분의 2 동의를 받는 ‘특별 다수제’가 있습니다. 결국엔 야 쪽의 동의를 받아야만 하는 거죠. 이게 현 여권(옛 야권)의 기존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이 법안은 지금의 자유한국당이 여당 지위를 지속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느냐 하는 압박감에 많이 시달리면서, 최소한의 보험용으로 이만큼의 견제선은 확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정리되고 제시된 성격이 강합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나온 이후에 촛불혁명이 일어났고, 촛불혁명에서 확인한 에너지와 요구는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지금 얘기한 언론장악방지법안은 여당이나 대통령으로부터는 조금 자유로운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정치권 전반, 즉 기존 정당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입법부의 각 교섭단체가 추천해서 이사들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이 법안을 시행하면 각 당의 세력 구도에 따라 이사회가 구성되고 제어되는 구조가 되거든요.
그래서 이게 과연 정답이냐는 문제 제기가 쭉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집권 뒤 그런 맥락에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죠. 언론사 노조들, 언론 단체들에서도 같은 문제 제기가 있었고요. 이런 맥락에서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 등을 정치권에만 맡길 게 아니라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하여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도록 하자는 대안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이사를 전부 선출한다는 것은 어렵더라도 일부나마 선출해서 민의를 직접 대변하는 이들 국민 선출 이사가 여·야 추천 이사 간에 의견이 갈릴 때 캐스팅 보트가 되는 구조로 가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이미 이런 법안을 제출한 상태이고요. 대표적 언론단체인 민언련에서도 그런 방안을 낸 상태입니다. 심지어는 방송법 개정을 계속 반대하다가, 또 최근에는 언론장악방지법안 식으로 개정을 하자고 하던 자유한국당마저 지금 말한 새로운 근본적인 요구가 나오다 보니까 강효상 의원이 새로운 법안을 제출한 상태입니다. 이 강효상 의원 안은 직접 국민들이 참여하는 방식은 아닌데, 각 사회·직능단체들의 추천으로 공영방송 이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서, 정치권에 그냥 맡겨놓는 것보다는 나름 진전된 방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안의 문제점은 명확한 기준 없이 추천 단체들을 아예 명시해놨는데, 속이 들여다보이게 교총이라든지 (조‧중‧동이 주도하는) 신문협회라든지 자유한국당 입장에서 우호적이라 생각하는 단체들을 여럿 포함시켜놨다는 점이죠.
따라서 걸러서 보기는 해야 합니다만, 어쨌건 결국 언론장악방지법안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쟁점 구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롤 플레이어로서 안을 내놓아야 할 더불어민주당은 아직 새로운 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 측인 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지금 막 자문기구를 통해서 안을 만들어 내고 있고요. 새해 1, 2월 정도에 그런 안들까지 나오게 되면, 정권에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언론 독립을 법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논의가 각 세력의 안을 토대로 본격화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핵심적인 방향은 여야 정치권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겠죠.
추상적인 의미의 직접 민주주의 도입을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인 형태로써 도입되어야 할 안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논의들이 이뤄지고 있는데, 아직 민변 언론위원회에서는 결정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세부적으로 말하긴 그렇습니다. 다만, 얼마 전 운영됐던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원회처럼, 무작위로 국민들에게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 선출과정에 참여하겠는지 의사를 물어서 의사가 확인된 분들을 상대로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선출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통 ‘국민참여단’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세부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더 연구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2018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60년 만에 맞는 황금개띠 해라고 합니다. 황금개띠는 풍년과 다산을 상징한다고 하는데요, 저출산 시대를 맞아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는 것도 좋겠지만, 이와 더불어 이미 태어난 아동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제도 개선을 이뤄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동이 단순히 보호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서 당당히 인정받는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저희 아동인권위원회는 올 한해도 최선을 다해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이번 아동인권위원회(이하 ‘아동위’라고 함) 활동 소식에서는 2017년 한 해 동안 저희 위원들이 아동인권 향상을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해왔는지 사진을 통해 돌아보고자 합니다.
1. 입양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
지난 한 해 동안 저희 아동위의 강정은, 김경은, 김영주, 소라미 위원은 「대구포천 입양아동 학대 사망사건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이하 ‘진조위’라고 함)」에 참여하여 현행 입양제도의 문제점을 조사하고, 제도 개선을 위한 입양특례법 개정을 촉구하는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위원들의 진조위 활동 내용은 월례회를 통해 모든 아동위 위원들과 공유되었고, 아동위 위원들은 7월 월례회에서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현행 입양제도의 한계 및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고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아동위는 지난 활동을 통해 가지게 된 입양제도에 대한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향후 입양특례법 개정, 강제추방 된 해외입양인을 대리한 국가배상 청구 소송 등 입양제도의 문제를 알리고 제도개선을 촉구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갈 것입니다.
2. 각종 아동학대 사건 대응
2017년에도 아동학대 사건은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는데요, 아동위 위원들은 ‘관악구 지역아동센터 아동학대 법률지원단’을 구성하여 피해 아동들 위한 법률지원을 하는 등 각종 아동학대 사건에 대응에 왔습니다. 한편 저희 위원회의 강정은, 김영주, 김희진, 신수경, 이혜선 위원은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발간한 「아동학대사건 법률지원 매뉴얼」의 집필진으로 참여를 하였습니다. 본 매뉴얼은 아동위 위원들이 그동안 각종 아동학대 사건들을 다루면서 얻게 된 실무적 노하우가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실제 아동학대 사건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3.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연대활동
아동위는 2017년에 아동인권 시민단체들과의 연대 활동 강화를 신년 계획으로 삼았었는데요, 그 활동의 일환으로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에 민변아동위의 이름으로 결합하였고, 김수정 위원장이 공동상임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1) 16세 청소년 참정권 확대, 2) 아동‧청소년 인권기본법 제정, 3) 학생인권의 법제화를 위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목표로 조직된 단체입니다. 2018년에도 아동위는 아동‧청소년이 권리의 주체로서 바로 서고 우리 사회의 당당한 시민으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적극적으로 연대활동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4.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 도입 촉구 활동
우리 사회에는 제도적‧법적 공백으로 인해 출생신고 되지 못하는 아동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동은 출생신고 된 후에야 비로소 국가에 의해 ‘법 앞에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아동이 출생 즉시 공적으로 등록될 권리는 최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동위에서는 ‘아동이 출생즉시 등록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 도입을 촉구 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2017년에는 UBR(Universal Birth Registration) 법률지원단을 구성하여, 출생신고 되지 못한 아동들의 사례를 접수하여 법률적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5. 친목활동
아동위 위원들은 작년 한 해 숨 가쁜 활동들을 이어가면서도 틈틈이 만나서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함께 웃으며 좋은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누구보다 끈끈한 우애로 뭉친 아동위 위원들이 올 한해도 멋지게 활약하길 기대해 봅니다.

《2017. 3. 17-18. 부암동 G하우스에서 열린 아동위 워크샵. 밤늦게까지 이어진 수다 타임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끝까지 살아남은 멤버들끼리 의기투합한 모습!》

《아동위 활동의 하이라이트! 연말 송년모임! 조덕상 준비위원장을 포함한 준비위원들 덕분에 다정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감동적인 시와 아름다운 음악이 함께 하는 따뜻한 연말이 되었습니다. 》
#1. 최근 1년여간 민변 부산지부에는 젊은 피가 넉넉히 수혈되었습니다. 제가 가입했던 2015년 초만 하더라도 청년 변호사의 신입회원 가입은 아주 간간이 있던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리하여 2017년 11월 말경 부산지부 권혁근 회장님 이하 선배 변호사님들께서는 신입 청변 회원들의 순조로운 민변 적응을 위한 “신입회원과의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산지부의 경우 매월 둘째 주 화요일 점심에 월례회가 열리지만 신입회원이 민변에 더욱 잘 적응하도록 하려는 선배님들의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신입회원과의 만남은 민변가입 2년 미만 변호사를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당시 가입기간이 1년 10개월 정도였던 저도 가까스로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신입회원과의 만남에는 20여명의 변호사님이 참석하였는데 청변 회원이 많아졌음을 피부로 느낀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오고간 다양한 의견들은 민변의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 2017년 8월경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한 기결수로부터 민변부산지부를 수신인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송되었습니다.
내용인즉 구치소 내에서 뇌경색으로 쓰러졌는데 이에 상당한 처치를 받지 못하고 주말 내내 방치되었으며 월요일에 되어서야 응급실로 가게 되었지만 마비증세로 인해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시간을 내어 접견을 하였는데 처음 접견하였을 때에는 왼쪽팔다리가 거의 마비되어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말을 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구치소 측에 휠체어를 요청하였으나 휠체어는 골절환자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여 마비된 왼쪽다리를 질질 끌며 힘든 걸음을 겨우 걷고 있었습니다. 이후 몇 차례 더 접견을 하였는데 오른쪽 부위까지 마비증세를 보이고 안면부도 더 불편해졌는지 의사전달에 어려움을 겪는 등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으며 그나마 휠체어 지원은 받고 있었습니다. 뇌경색이나 뇌졸중과 같은 질병은 촌각을 다투기 때문에 시급한 응급처치가 필수적인데 토요일에 쓰러진 뒤 월요일이 되어서야 응급실로 실려 간 부분에 있어 구치소 측의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보아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기로 하고 민변이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해당 수감자는 신체마비로 인해 형집행정지를 받았고 현재 이 소송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 언론매체를 통해 춘천소년원에서 체중이 40kg이나 빠진 대장암3기 재소자에 변비 진단을 해왔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수감시설 의료지원 체계의 허술함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우연히 다른 매체에서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한 재소자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으나 의무실에 사람이 없다며 18시간을 방치하는 바람에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현재 진행 중인 손해배상 청구 사건의 사안과 매우 유사한 사건의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해당 수감자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구치소나 교도소등의 수감시설 내 의료지원 체계의 구조적인 미흡함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재 지원하고 있는 손해배상청구 사건이 의뢰인 개인적인 피해회복뿐 아니라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열어 놓은 길, 아들이 걷는다.
– 일본 제1호 외국인변호사 故김경득 변호사의 장남 김창호 변호사를 만나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걸…”(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中에서)
이야기 하나 : 재일한국인 청년의 애환을 유쾌하게 그린 영화 “GO”는 로미오와 줄리엣 속 대사 한 대목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스기하라는 자신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한국인인지 헷갈린다. 이름이 스기하라인지 이정호인지도 헷갈린다. 그래서 ‘나는 누구지’라는 물음은 지겹게 그를 쫓아다닌다. 어느 날 일본인 여자 친구에게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내가 좋다던 그녀는 무섭다고 했다. 나는 어제와 같은 그대로의 나일뿐인데 말이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
이야기 둘 : 사기사와 메구무의 소설 “진짜 여름”의 주인공 청년은 길을 가거나 운전을 하다가도 경찰만 보일라치면 저 멀리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심검문이라도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한국인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청년은 일본인 애인이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까봐 늘 전전긍긍한다.
두 개의 이야기는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재일한국인들이 겪는 차별과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름이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나만의 향기는 그대로일진데, 한국인임이 드러나는 순간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한다. 여기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한국인임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다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 이름을 버리고 다시 태어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최초의 재일한국인 변호사 김경득. 안타깝게도 김경득 변호사님은 10여년전 돌아가셨지만 그의 아들 김창호 변호사가 민변의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잘 모르는 회원들을 위해 소개 먼저 부탁 드릴께요.
김창호 :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3세 김창호입니다. 아버지로 하면 3세인데, 어머니는 한국분이시니까 정확히는 2.5세라고 할 수 있어요. 일본에서 변호사 일을 몇 년 하다가 유학을 다녀왔고,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한국의 공익변호사는 어떤지, 예를 들면 ‘공감’에서 4년 전 인턴으로 1달 정도 있었는데, 그때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알게 돼 지금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장기간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1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작년 2월에 한국에 왔어요.
이혜정 : 민변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김창호 : 민변 가입은 작년 4월인가 5월에 한 것 같아요. 민변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사법시험을 봐서 합격을 2006년에 했거든요. 2007년 사법연수원에 가서 연수를 받고, 변호사 활동은 2008년부터 했으니 10년 정도 됐는데,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서 황필규 변호사님, 정미화 변호사님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 초대해 주신 분이 바로 정미화 변호사님이셨어요. 그리고 정미화 변호사님 부인이 저희 어머니와 대학 동창이었어요. 그런 관계로 민변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민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은 몰라서 작년 2월에 왔을 때 황필규 변호사님이 국제연대위원회에 초대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민변에 여러 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혜정 : 민변 어느 위원회를 가봤나요. 민변 활동이 궁금하네요.
김창호 : 주로 나갔던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에요. 저는 일본 변호사라 그래도 국제적인 일은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싶어 참여했어요. 국제통상위도 그렇고요. 그런데 민변이 좋은 것은 민변에 있으면 한국의 모든 이슈를 조금씩 다 알게 되잖아요(웃음). 교육위나 언론위는 한번 정도 참여했어요. 민변에서 진행하는 기획이 재밌는게 많아서 여행도 여러 번 갔다 왔어요. 여러 외국 변호사 모시고 진행하는 것도 재밌고, 한국의 공익변호사를 알게 된 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가장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공감’이나 ‘동천’ 같은 공익전담 변호사가 일본에는 없어서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한지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분들과 대화해 보면, ‘사실 나도 민변회원이다. 그래서 민변활동 같이 하고 있다’ 하시는 분들 되게 많지 않나요? 민변 변호사들이 옛날부터 자기 일을 하면서 공익활동 하시는 분과 전담으로 하는 변호사들이 연결이 잘 되어 있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민변 노동위가 오사카와, 미군위는 오키나와와 교류를 하고 있는데, 계속적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혜정 : 숱하게 많이 받은 질문이겠지만 아버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아버님인 김경득 변호사님은 1949년 일본 와카야마에서 태어나 일본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일본 이름을 썼고, 한국 핏줄이란 게 남들에게 알려질까 봐 한글 공부를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했다면서, 어린 시절에는 일본으로부터 냉대받고 경멸받는 한국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당시를 ‘민족에서 도망쳤던 때’였다고 고백하시면서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자를 꿈꾸셨다가 좌절돼 사법시험에 도전하셨다고요.
김창호 : 맞아요.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하려고 했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신문사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일반 상장기업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어요. 기자에 관심이 많았는데 일자리를 구하려고 대학교 취업 상담실을 찾아갔더니 직원이 노트를 가져와서 이름을 적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특별관리 장부였어요. 대학생 때까지 일본 이름을 썼었는데…그런 차별을 경험하고 나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밝히고 살아야 한다. 그럼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 옆에 있었던 것 같아요. 1970년대 초에 대만 사람이 대만 국적으로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국적을 바꿔야 해서 그 사람은 일본 이름으로 해서 변호사가 됐어요. 지금도 저와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인종 차별 관련한 변호 활동을 하고 계세요. 70살이 넘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그분의 기사를 보고 사법시험을 시작하셨어요.
이혜정 :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일본은 사법시험에 붙어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었다면서요. 아르바이트로 와세다 대학 청소를 하면서 어렵게 사법시험에 붙었는데, 사법연수원 입소가 거부되자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청원서를 수차례 보내고 아사히신문에 기고문도 보냈다고 들었어요.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보낸 청원서를 소개할께요.
| “저는 변호사를 지망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사법연수생에 채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재판관·검찰관과는 달리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인(私人)의 입장에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의 실현에 진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직업적 성격을 일본국 헌법의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현 변호사법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를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변호사가 될 수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변호사가 되기 위한 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열려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률적으로 사법연수생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길을 막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법연수생 채용선발 결격 사유 제1호는 적어도 변호사가 되려는 외국인에게 적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사안이 저 개인이 사법연수생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일본국에 귀화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이 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는 65만 동포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였으며, 개인적으로 해결(귀화)할 문제가 아니며, 이는 일본의 민주화에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 개인의 존엄이 최대한도로 존중받는 사회체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가치관은 다양하며, 개개인은 이질적이므로 소수자의 권리존중이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는 재일한인의 민족적 특성, 소수자로의 권리가 반드시 존중받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체의 한국적인 것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해를 거듭하며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처럼 가장하는 것은 매우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졸업이 가까워짐에 따라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봐 주위에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의 비참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하여 낭비한 노력의 바보스러움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차별을 없애는 것이지, 일본인으로 가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차별에 대처할 재일한인의 살아갈 방도는 한편으로는 조국의 통일을 빨리 실현해 조국과 일본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생활의 현장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존재를 통하여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있는 한국인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지금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최고재판소로부터 국적변경을 강요받고 있는 시점에서 경솔하게 귀화신청을 하는 것은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제가 변호사로서 설 자리 그 자체를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화한 제가 어떠한 형태로 한국인 차별해소에 관련할 수 있고, 귀화를 한 제가 어떻게 재일동포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원망스러워 하며 가슴 아파하는 동포 자녀에 대하여, “한국인인 것을 수치스러워 하지 말고 강인하게 살아라”고 말해 봐도 이 말이 귀화한 인간의 말이라면 도대체 어떠한 효과가 있을까요. 일본 사회의 한국인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저의 귀화는 어떠한 이유를 붙여도 결국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닐 것입니다. 저처럼 자기 민족에게 등을 돌려온 인간이라도 지금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제가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게 하는 일본국으로의 귀화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사법연수생 임용청원서”, 재일변호사 김경득 추모집 중에서) |
– 김경득 변호사는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다’는 조항에 맞서 긴 싸움을 한 끝에 마침내 일본 내 한국 국적 변호사 1호가 되었다. 1976. 12. 14.자 아사히 신문에 ‘변호사로 인정해 달라’고 투고한 글을 보자.
“나 김경득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이다.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최고재판소로부터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사법연수생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귀화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내 안의 ‘한국’을 거부했다. 조선말 배우는 것도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 지나쳤다. 내가 한국 핏줄임을 알까 두려웠다. 대학 졸업 무렵, 나는 희망하던 언론계 취직이 99.9%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살려던 생각을 버렸다. 한국인임을 써 붙이고 살기로 결심했다. ‘한국인 변호사’가 되어 한국인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설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다.”
김창호 : 당시 주위에서 아버지를 말리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고 했어요. 쉽지 않은 문제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리고 변호사까지 됐는데 부모님 생활을 도와 주는게 맞지 않냐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고 해요. 그런데 차별을 없애기 위해 변호사가 되신 것이고, 아버지뿐 아니라 대학 교수, 변호사 후배들이 외국국적자 차별을 해방해야 한다는 성명도 내주었어요. 언론에서도 도와주는 분위기가 있었고요. 아버지가 사법시험에 1976년 합격해서 적어도 10년 정도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의견서를 계속 내셨는데 다음 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 방침을 바뀌게 하셨던 거죠.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 정말 대단하세요. 아버님이 그렇게 힘들게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그 후에 김창호 변호사님처럼 그 길을 따르는 분들도 많이 계셨겠네요.
김창호 : 지금은 재일교포 변호사가 120명 정도 있어요.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가 그것이고요. 70-90년대만 해도 외국 국적자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 따로 면접이 있어서 최고재판소 담당자와 따로 이야기해서 뭔가 하사하는 식이 되어서… 면접을 하긴 하지만 못 들어 간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이후에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 할 수 있어요. 2000년도부터 일본도 로스쿨을 시작하면서 국적조항 자체를 삭제했어요. 지금은 주로 외국 국적 갖고 일본변호사 되신 분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일본으로 유학 와서 일본변호사가 됐다는 분 몇몇 계시고요. 중국이나 미국 국적을 갖고 변호사 되신 분들도 꽤 있으시고요. 좋은 쪽으로 진행된 사례입니다.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어머님을 한국에서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김창호 변호사님도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김창호 : 저는 와카야마에서 태어났어요. 제 여동생이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에서 태어나셨고, 저도 거기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좋아한 것 같아요(웃음). 어머니가 아버지를 강한 의사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8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이 일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안 좋았을 때였어요. 주변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고도 했는데.. 어머니쪽 부모님이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셨대요. 인터뷰 내용과 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웃음)..,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중매결혼이 많았는데 외할머니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해서 연애결혼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연애결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이 장남이고, 형제가 2남 2녀라고 들었는데, 모두 법조인인가요.
김창호 : 여동생 한명은 변호사 자격은 있는데 등록은 안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과정을 마친 상태구요. 여동생 한명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아버지 추모집 낼 때만 해도 살아있었는데, 병으로 일찍 사망했어요. 그 때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법대, 로스쿨까지 갔는데 건강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남동생은 그냥 일반 회사원으로 있습니다.
이혜정 : 몰랐어요..가족분들이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3명이나 아버지의 길을 선택했어요.
김창호 : 저희들이 문과 쪽이라서..어머니도 법대 출신이에요. 사실 이공계 갈 수 있는 머리가 있으면 아마 그쪽으로 갔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아버지 시대와 달리 취직이 어느 정도 가능해요. 그 안에서 일본 사람과 경쟁해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문과로서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일 중 변호사가 하나의 좋은 직업인 것 같아 사법시험을 봤어요. 대학교 때는 학자 같은 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2005년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험에 합격해서 제가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200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혜정 :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불을 꺼도 또 키고 공부하고, 쟤가 저러다가 머리가 이상해 지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요. 한국도 사법시험이 어렵지만 일본도 무지 어렵지 않나요.
김창호 : 저는 되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정도 열심히 하긴 했는데…당시에는 매우 젊어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취직 활동하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변호사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한국도 그렇지만 옛날 사시라고 하는게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도 합격률이 2% 정도니까 운이 안 좋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집에서는 한국어만 써야 하고, 어머님이 일본말 쓰면 엄청 뭐라고 하시는 바람에 김창호 변호사님이 6살 때까지 일본어를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볼 책을 직접 빌려 오셨다고 하던데, 가정에서 아버님의 모습은 어땠나요.
김창호 : 아버지는 한국어를 많이 강요하셨어요. 어머니는 일본에서 생활하려면 일본어도 필요한데, 당시에 유치원이나 학교 다닐 때 집이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살아서 조선학교가 주변에 없었어요. 그래서 일본 학교나 일본 유치원에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집에 돌아올 때도 일본어로 이야기하고요. 그런데 계속 집에서 한국어를 쓰라고 하셔서 어릴 때는 그게 좀 싫기도 했어요. 집에서 아버지가 이야기 할 때는 한국어로 하는데, 저희가 대답할 때는 거의 일본어로 했어요. 그리고 빌려오신 책은 다 일본 책이었어요(웃음). 아마 한국어 책이 주변에 별로 없었고, 읽는 것도 더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앞선 두개의 이야기를 통해 보듯이 재일한국인은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진짜 여름’의 작가 사기사와 메구무는 재일교포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인으로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으면서 일본에서 자라나 일본의 교육을 받았다. 가정에서는 아직 한국의 풍습이나 습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고방식이나 감정적인 면에서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에 가깝다.”
성인이 되고 나서 우연히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기사와 메구무는 한국을 찾았고, 짧은 한국생활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 그녀만의 소설가적 감성으로 표현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하룻밤을 자고 나니 시들해지고 마는 사내가 있다.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슬슬 피하기까지 하다가 엉겁결에 몸을 허락하고 나니 별안간 마음마저 빼앗기고 마는 사내도 있다. 나에게는 한국이 두 번째 사나이와 비슷하다.”
김창호 변호사에게 한국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고민과 어떤 정체성을 느끼고 살아왔을까.
김창호 : 저의 아버지 경우에는 재일교포 2세로 전형적으로 일본 이름을 쓰다가 정체성을 의식하셨어요. 저는 태어나서부터 한국식 이름을 써왔고 어머니도 한국인이에요. 보통 재일교포 3세 정도가 되면 일본식 이름을 쓰고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데 그런 경우와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 때보다 상황이 많이 나아진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김’씨라는 성을 부를 때 아직도 약간 긴장하는 것은 있어요. 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도 ‘김상’이라고 부를 때, 사람들이 많이 쳐다봐요. 일본에 많이 없는 성이라서 꼭 차별적인 시선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재일교포 3세라는 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데, 일본 사회에서 일본사람과 같은 노력과 능력이 있어도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많이 노력했어요. ‘창호’라는 이름이 일본에서 발음하기 어려워요. 차무호. 김치양호. 이런 발음이 되니까.. 이것 때문에 괴롭힘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초등학교 졸업식 때 일본에서 ‘기미가요’를 불러야 해요. ‘기미가요’라는 노래 자체가 일본군의 천황을 칭송하는 노래라서 절대로 부르면 안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부 기립해서 노래 부를 때 저만 혼자 앉아있었어요. 그 때 제가 일본의 소수파라는 것을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졸업장에도 일본에서 천황이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날짜를 쓰는데, ‘쇼와’나 지금은 ‘평성’을 쓰고 있어요. 아버지가 이것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교육위원장이랑 협상을 해서 제 졸업장만 매직으로 찍찍 그어서 양력으로 표기했어요. 그 당시 저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별로 안 좋아 했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일본 사회에서 좀 특이한 존재이긴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갖게 되었어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일하시느라 무지 바쁘셨을텐데.. 교장이랑 협상도 다니셨네요.
김창호 : 바쁘셔서 운동회나 졸업식에도 거의 못 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졸업장은 다 바꾸셨어요(웃음).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정말 의미 있는 소송을 많이 하셨잖아요. 국민연금 청구소송, 사할린 잔류 한국인 귀환 청구소송, 지문날인 거부소송, 일본 군속 장애연금지급 청구소송, 공무원관리직 수험자격 소송 등 2005년 암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재일한국인 인권옹호활동에 앞장섰잖아요. 일본은 외국인에 한해서만 지문날인을 받고 있나 봐요.
김창호 : 맞아요. 일본은 주민등록증도 없어요. 사실 한국에 왔을 때 가장 놀라웠던게 그 동안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주민등록증을 만든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장기간 있게 돼서 만들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지문찍기가 너무 싫어서 사진도 찍어 놓았어요. 일본에서 지문 날인은 재일교포가 싸웠던 하나의 이유로, 90년대 이후 없어졌어요. 아버지가 이상호씨 재판에서 졌는데, 이후 없어졌어요. 재일교포들에게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기니 재일교포들만 제외하고 다른 외국인들은 지문날인을 시행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반 영주권인데, 어머니가 일본 들어올 때는 한번씩 지문날인을 하고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재일교포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다른 외국인들을 위해 싸워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여러 소송을 하시긴 했어요. 사실 사회적 변화를 이끌긴 했지만 소송 결과로 보면 많이 졌던 것 같아요. 지문날인 하나만 잘 된 것 같고, 국민연금은 졌어요. 1970년 말에 외국인도 연금에 가입하게 되어 있어서 지금 태어난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데, 그 당시에는 연금을 받으려면 25년 정도가 필요했어요. 25년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다면 45살 넘은 분들은 자동적으로 못 받게 되잖아요. 그런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야 됐어요. 헌법 위반으로 제소했는데, 최고재판소에서 그것은 국가의 재량이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위안부 소송도 하셨고, 옛날 재일교포 일본군의 군인이었던 분의 재판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졌어요. 주위에서 계속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계속 지는 소송만 하셨어요.
이혜정 : 한국에 1년 정도 머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김창호 : 여러 가지 있어요. 작년에 계속 있었는데, 2016년 말부터 촛불집회가 있었어요. 저는 2017년 2월에 와서 거의 막바지였어요. 탄핵 직전까지 매우 재밌었어요. 역사의 순간에 한국에 있었던거에요. 탄핵의 순간도 TV로 볼 수 있었고요. 시민단체 운동의 힘, 변화의 시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컸어요. 처음 대선투표는 4-5년전 미국 유학가 있을 때, 현지에서 재외국민들에게도 투표권을 인정하라는 판결이 났고, 이번에는 한국에 있을 때 투표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찍은 후보가 그 당시에는 떨어졌지만, 이번에 똑같이 찍어서 결국 당선됐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공익활동하고 계신 변호사들 만난 것도 그렇고, 좋은 기억이 많아서 하나 고르기가 어려워요.
이혜정 : 곧 일본에 돌아가신다고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향후 활동 계획은 어떤가요.
김창호 : 이번 2월에 활동을 마치면 1년 정도 대만에서 NGO활동을 하려고 해요. 아버지도 그랬지만 한중일 또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에요. 인권 일이든 변호사 일이든 그런 방향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은 어느 정도 아는 분이 계시고 중국은 다른 관계를 갖거나 중국어를 배워보고 싶어요. 그게 끝나면 ‘공감’과 같은 공익법인을 만들고 싶어요. 일본에 아는 변호사들과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하면 공익 법인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요. 아무래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공익로펌 모델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일을 돌아보면, 아버지는 국내소송을 주로 해왔고, 많이 졌어요. 저는 국내소송 뿐 아니라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요. 휴먼라이트와 함께 하는 것도 그렇고, 인권 NGO로서 민변 국제연대위도 그렇지만 제네바와 같은 곳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거죠. 제가 그런 활동을 유학기간 합쳐서 3-4년 정도 계속 해왔고, 민변에서 UPR을 진행하고 있듯이 일본도 UPR이 있어서 운동해왔어요. 국제적인 일을 하나의 업무로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다른 문제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같은 차별이나 혐오 관련 활동을 하고 싶어요. 어제도 마쓰이 의원이 한국·조선 국적, 일본 귀화자 등 의원 이름 열거하면서 “몇 번이고 죽일 가치 있다”고 독설한바 있어요. 요즘에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지방의원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혐한’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일본 사회 내에서 혐한 분위기가 지난 몇 년 간 계속 강해지고 있어요. 언론을 통해 보수 세력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유포하고 있어요.
앞으로 민변 변호사들과 계속 교류를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민변 상근변호사나 간사님들과 공익 분야에 대한 교류도 재밌을 것 같아요. 재일교포 분야와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기업이 해외에서 일으키는 인권 또는 노동문제도 다루고 싶어요. 예를 들면 유니클로라는 기업이 인기가 많은데, 중국이나 미얀마 공장에서 문제가 많았어요. 전통적인 변호사 일보다는 국제 쪽 문제를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특히 인권활동하시는 분들이 국제적인 활동에 좀 약하고 시간 배분이 어려워요. 일본사회에서 재일교포만으로 활동하게 되면 불필요한 비판을 받게 돼요. 특히 역사문제로 가게 되면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일본사람과 같이 해야 사회적으로 진동하는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가 간단치 않아요. 오늘 민변에서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민생위] 경의선 공유지 현장 월례회
– 시민이 꾸리는 서울의 26번째 자치구를 상상하다
기차가 다니던 자리에 시민들이 장터를 만들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장터에 언제나 사람이 북적북적한 장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늘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벼룩시장, 수공예 제품,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과 사방치기를 할 수 있는 공터가 생겼습니다. 도시 재개발로 ‘주거난민’이 된 청년도 늘장이 있는 이곳으로 왔습니다. 시민들은 이제 그 장터를 어떻게 하면 시민 모두의 공간으로 남겨둘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입니다. 도심 개발의 흐름을 피하고 시민들이 스스로 운영하는 가치 있는 공유 공간으로 남기는 방법을 찾아내려고요. 서울 마포구 공덕역 인근의 ‘경의선 공유지’ 이야기입니다.
민변 민생경제위원회는 지난 2월 21일 (수) 이곳에서 현장월례회를 진행했습니다.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 활동가들로부터 경의선 공유지에 개발사업이 추진된 경위와 앞으로 이 공간을 어떻게 시민의 공간으로 남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듣고 법적 이슈에 대한 고민도 나눴습니다. 또 현재 경의선 공유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주거난민 ‘뜨거운 청춘’의 이희성 씨의 도시난민 경험을 나누고 도시 주거 난민의 문제를 고민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개발사업 주춤하는 사이 경의선 공유지에 들어온 식구들
원래 경의선 기차가 지나다녔던 이 곳은 철도 지하화 사업으로 ‘철도유휴부지’가 되었습니다. 철도시설공단은 2011년 (주) 이랜드 공덕과 30년간 임대계약을 맺고 이 자리에 생활주택을 건설하는 개발계획을 세웠습니다. 원래 2015년까지 생활주택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축소·변경되어 지금은 사실상 관광호텔 계획이 되어버렸습니다.
2013년 마포구는 기차가 지나가지 않아 흉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경의선 공유지를 시민·지역단체가 꾸린 ‘늘장 협동조합’에 맡겼습니다. 경의선 숲길의 공원과 작은 플리마켓을 합쳐 ‘늘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린이들이 뛰어 놀고, 어른들은 수공예 제품을 구경하거나 맥주 한 잔을 나누는 공간이 되었죠. ‘2015년부터 이곳에서 진행될 도시개발 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만’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경의선 공유지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늘어만 갔습니다.
원래대로라면 2015년부터 생활주택 건설이 시작되어야 할 이곳엔 지금까지 어떤 개발이나 사업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이 경의선 공유지에는 식구가 늘었습니다. 2016년 마포구 ‘아현동 포차거리’ 강제 철거 이후 ‘아현 포차 이모님’들이 경의선 공유지에 임시 포장마차를 만들고 영업을 계속하는 중입니다.
민생경제위원회는 이날 ‘아현포차 이모님’이 운영하는 포차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포차 안에는 지금은 사라진 아현동 포차거리 시절의 마지막 모습과 철거 용역과 싸우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따뜻한 밥에 시원한 쇠고기뭇국, 소주 한 잔에 꼼장어까지. 이모님의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김태근 변호사는 ‘속이 풀리는 것 같다’며 국물을 들이키고, 박정만 변호사도 “정말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다”고 밥을 두 공기나 비웠습니다.
청년 주거난민 희성씨, 주거권을 말하다
경의선 공유지에는 청년 도시 주거난민 이희성씨도 머물고 있습니다. 의류업계에서 일하는 꿈을 꾸며 서울로 올라온 이희성씨는 동대문과 가까운 성동구 행당동에 작은 방을 얻었습니다. 행당동에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자 세입자들은 아무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재개발 조합은 임대인들에게 ‘주거이전비 1000만 원을 받으려면 세입자를 내보내야 한다’고 했고, 임차인들은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속수무책 쫓겨나야 했습니다.
12월까지만 버티면 그래도 방을 구할 수는 있었을 텐데. 봄이 절정이던 2015년 4월 하순, 희성씨의 집은 강제철거됐습니다. 당장 갈 곳이 없어 구청 마당 원두막에서 노숙을 하는데, 봄인데도 새벽이 너무나 추웠다고 합니다.
지금 희성씨는 청년 주거문제의 중요성을 알리고 국가와 서울시에 대책을 요구하는 등 청년 주거난민을 대변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세입자를 무작정 내쫓는 도시 재개발에 반대하고 세입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입니다. 하지만 제도와 행정의 눈으로 볼 때 희성씨는 ‘거주불명자’이고,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입니다.
‘경의선 공유지’를 서울 시민의 26번째 자치구로
현재 경의선 공유지의 사업권을 가지고 있는 (주)이랜드공덕은 개발 사업을 진행할 기미가 없는 상태입니다.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은 ‘26번째자치구운동’과 힘을 합쳐 경의선 공유지를 자율적이고 이질적인 시민들의 공유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경제적 환경에 영향 받지 않고 시민이 직접 꾸려 나가는 공유지 ‘공덕 커먼즈’를 만들어 이곳에서 지식과 예술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계획입니다.
가장 큰 전제는 기존 (주)이랜드공덕의 사업계획을 해소하고 서울시나 철도시설공단을 통해 이 공간을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꾸려나가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현재 경의선공유지 시민행동은 이와 같은 시민 공유지 계획을 서울시나 철도시설공단과 함께하는 협력사업으로 만들고자 제도와 절차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날 월례회를 추진하고 준비한 김태근 금융부동산팀장은 “공덕 커먼즈라는 새로운 시도가 성공했으면 좋겠고, 여기서 사실상 홀로 숙박 중인 ‘뜨거운 청년’ 이희성 씨가 자기 꿈을 찾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전했습니다. 또 “도시난민이라는 화두를 (계속) 잡고 있는 그분들이 고맙기도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월례회에 참석했던 김가희 변호사 역시 “기사와 댓글로 짐작할 수 없는 것들이 현장에 있었다”며 “그 현장에 선배 변호사님들이 먼저 도착해 계신 것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진 월례회”였다는 소감을 전했습니다. 민생위가 직접 현장을 찾아가는 ‘현장 월례회’는 올해 몇 차례 더 이어질 예정입니다. 또 다른 현장 소식은 다음 소식에 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