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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관계를 들어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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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관계를 들어다 보기

admin | 금, 2020/09/25- 19:12

백악관의 수석전략가 출신인 스티브 배넌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공산당을 분쇄시키자며 ‘전쟁-위원회’를 함께 구성하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때마침, 지난 6월말부터 미국의 고위공직자들이 중국공산당에 대하여 직설적인 공격발언을 이어왔다. 안보보좌관인 로버트 오브라이언, FBI 국장인 크리스토퍼 워레이, 법무장관 윌리엄 바 그리고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까지 가세하여 공산당을 전복시키라는 트럼프의 지시에 따라 “최악의 4인방” 발언이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미국 행정부는 중국과 양자관계를 단절하고자 구체적인 공세를 개시하면서, 휴스턴에 있는 중국 영사관을 폐쇄시켰고, 보건부 장관인 알렉스 아자르가 대만을 공적으로 방문하였으며, 중국의 온라인 매체인 Tiktok과 Wechat의 미국 내 운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미국에 대한 일대일 대응전략(tit for tat)과 보복전략인 이랑전사(wolf-warrior)방식 대신에, 중국의 실제반응은 놀랍게도 타협적이고 차분하였다.

지난 8월5일 신화통신과 인터뷰를 통해 외교부장인 왕이는 ‘신냉전’이라는 개념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어떤 수준이든 언제 어디서라도 대화를 통해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자는 제안을 역으로 제시하였다.

이틀 뒤에는 중국공산당 최고위직으로 외교관계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양제츠 상무위원은 기고를 통하여 “역사를 회상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미중의 우호적 관계를 확고히 지키고 안정시키자”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양 상무위원은 닉슨 행정부에서 시작된 미국의 중국 포용정책이라는 전례의 신화를 치세우면서 모든 방면에서 양국의 호혜적 협력을 촉구하였다.

문제는 중국의 우의적 외교정책이 너무나 늦게 내용도 없이 제기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누구도 이러한 제안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북경당국의 대화제안은 ‘소귀에 경읽기’ 식으로 워싱턴은 어떠한 대화도 중국측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외교정책은 너무나 단순하게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면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복원하기 위하여 다음의 3가지 사항을 전달하고자 의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첫 째는, 중국은 미국과 냉전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과거의 소련이 아님을 분명히 했으며 패권국가인 미국을 대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혔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희망을 담은 생각으로 양국이 함께 호흡을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한다. 중국은 과거 미국과 소련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갔던 냉전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미국에게 조언하고 있다.

왕이 부장과 양제츠 상무위원은 닉슨 대통령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하였던 과거의 호시절을 다시 조명하면서, 양국의 이념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협력하며 공존한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는 미국의 ‘4인방’이 던진 펀치를 태극권 방식으로 가볍게 피해가려는 대응이다.

두 번째의 메시지는 미국 독자적으로 냉전을 치를 수 없다.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5-eyes 국가들 즉 호주와 뉴질랜드 영국과 캐나다 등에게 중국은 미국과 새로운 냉전을 시작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린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타협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미국이 반-중국 동맹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무마하려고 한다. 중국의 냉전거부 노력은 왕이 부장이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순방에 나선 것으로도 확인된다.

미국의 동맹을 자처하는 국가들은 ‘4인방’이 제시한대로 냉전의 시대로 진입할 것인지, 반대로 ‘4 인방’의 제안이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 단기간의 대결을 통해서 장기판 방식의 승부(장군!)를 거는 반면에, 중국의 지도자는 바둑 방식의 셈법에 따라 향후 자신들의 위상에 유리한 경로를 찾아가고 있다. 이를 통하여 단기간의 이익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당장의 커다란 위험을 회피하는 개임을 추구한다.

마지막 세 번째의 메시지는 미중 간의 잠재적인 대결이 가져다 주는 위험에 대하여 국제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최근 미국대선을 앞둔 시기에 아시아-태평양에서 물리적 충돌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략적인 오판 혹은 군사적인 실수로 인하여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또는 대만해협 등에서 열전 또는 핵대결이라는 잠재적 위협이 존재한다.

중국 최고위직 외교관들은 중국이 가지는 인내의 한계선은 공산당의 규칙준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 보사부장관인 아지르가 대만을 공식 방문하면서, 중국은 대만해협을 둘러싼 대규모 군사훈련에 돌입하거나, 남중국해에 항공모함을 타격하는 미사일 시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편집자 주, 최근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유교적 전통에 의하면, 도덕적 기준(명분)을 상실하면 전쟁에서 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팬데믹이 창궐하는 가운데, 국제적인 긴밀한 협력을 촉구하고 나서면서 중국은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은 자중지란에 빠져있다.

과연 중국이 상기 메시지들로써 미국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을까? 중국이 자신들이 의도하고자 하는 부드러운(점잖은) 방식으로 상황을 대응할 수 있을까? 오는 11월 미국 대선이 미중 관계의 향후 진행에 매우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은 자칫 우발적 사고를 통해서 전쟁사태에 돌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출처 : 동아시아포럼EAF in ANU on 2020-09-01.

Kai He

호주 Griffith University의 국제정치학 교수이며, 당 대학의 아시아 센터 및 공공정책 연구소의 책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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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사고와 화이트헤드 철학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은 내 삶의 심장과 같은 주제이다.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만나면서 인생의 무의미함에서 탈출했다. 그의 철학은 근대적 사고를 무조건 규범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내 경험상 근대적 사고는 늘 니힐리즘으로 귀착된다. 무엇이 옳은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근대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통찰이었다.

나는 화이트헤드를 통해 나의 주관적 경험, 목적, 결정, 감정이 완전히 현실이며, 따라서 인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내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경험하며, 이는 모든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화이트헤드 철학은 경험의 어떤 특징들을 더욱 확장하면서 이원론을 피해가도록 도와준다. (역주: 흄, 칸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철학자들은 우리와 세계의 관계가 감각기관, 특히 시각에 의해 중재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대상인 객체의 분리를 낳았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전제를 거부한다. 감각은 우리에게 의식적 지식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우리는 훨씬 근본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존재를 느낀다. 화이트헤드는 전자를 현시적 직접성, 후자를 인과적 효과성이라 부르며, 실제 우리 경험을 분석하면 인과적 효과성이 현시적 직접성의 지각을 받쳐준다고 주장했다. 인과적 효과성의 지각은 앞선 사건의 어떤 측면을 새로운 생성의 참여자로 만드는데, 이를 파악이라 명명한다. 생성의 모든 순간은 물리적 극점과 정신적 극점을 동시에 지니기에 물리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라는 이원론을 대체한다.) 경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내 경험,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의 경험이 갖는 가치를 매우 명백하게 만든다. 경험은 거기에 가치가 더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실”이 아니다. 경험이란 “가치가 더해진 사실”이다. 경험에는 가치가 있고, 그것 자체가 가치일 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경험의 가치를 증가시킬지, 감소시킬지 결정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느끼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중요하며, 차이를 만들어낸다.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은 모든 것이 중요성을 갖는다고 여기며, 그러므로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1969년 나는 갑작스럽게 내가 이전까지 당연시했던 사회구조와 개발 패턴이 인류를 전 세계적인 자기파괴로 이끌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사방에서 인간의 요구에 부응해온 세계의 용량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지속 불가능한 길을 가고 있다.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시대에 이런 사실을 알고, 인간사회를 지속 가능한 길로 돌려놓기 위해 헌신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담했고 지금까지도 그들 중 한 명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지속가능성”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라고 본다. 우리의 목표를 좀 더 매력적이며 의미 있는 방식으로 명명할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세계관을 유기체 철학이라고 불렀다. 그의 핵심적 강조점은 유기체들의 상호연관성이다. 만약 화이트헤드가 생태철학이라는 용어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중국을 통해 나는 내가 희망하는 세계를 ‘생태문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주: 중국은 2007년 제17차 공산당 당대회에서 생태문명 건설을 주요 국정지표로 처음 제시한다. 필자는 화이트헤드철학을 매개로 중국 학계와 지방정부의 생태문명 논의에 깊이 관여해 왔다.) 세계의 구조 자체가 매우 생태적이고, 근대성이 그런 생태적 특징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파괴해 왔음을 이해하게 됐을 때, 나는 내가 희망하는 세계를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점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은 이 이름을 사용하며, 현재까지 유용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생태문명이라는 개념이 화이트헤드 연구자들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생태학이란 개념은 생물학의 하위분야에서 유래했으며, 자연에서 모든 식물이 다른 식물들, 곤충들, 동물들과 잘 연결됐을 때 잘 자란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대중의 주목을 끌게 됐다. 만약 자연이 건강한 상태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개별 종의 건강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건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근대 세계는 금전적 잣대를 들고 자연에 접근했다. 그 목적은 단위 면적의 토지에서 가능한 최대의 이윤을 거두는 것이다. 인건비가 내려가면 이윤은 올라간다. 따라서 생태계를 단일경작으로 대체하면 노동의 수요를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생태학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대중의 주목을 끄는 방식으로 경종을 울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현대문명이 전체적으로 생태적 고려사항들을 무시하고 문명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했을 때, 이런 문명은 생태적으로 민감한 문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철학 혹은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흥미가 없더라도 생태문명을 지지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세계에서 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일은 드물고, 만약 생태문명을 위해 헌신하는데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면 이 운동의 전망은 사실상 매우 암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화이트헤드 철학을 생태문명과 관련이 없는 것, 심지어 방해물로 만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치중립적 교육의 문제

우리 시대에 대학들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봄으로써 화이트헤드의 생태철학과 생태문명이 갖는 관계에 대한 나의 관점을 설명할 수 있다. 현대 대학에 대해 나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생태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들을 통해 생태위기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다. 좀 더 최근에는 기후학 교수들을 통해 기후 위기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대학들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제공하며, 때때로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이런 정보를 대중과 공유한다.

존 캅 교수 <출처: 중앙일보>

그럼에도 이제 비판적으로 접근하겠다. 오늘날의 대학들은 여러 학과들의 집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어떤 특수하고 경계가 분명한 주제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보탠다는 연구 목표에 따라 조직된 것이다. 이런 학과들은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사심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가치를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연구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은 스스로를 가치중립적 연구중심 대학이라고 소개한다.

기후학자들이 나름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이 기후를 부정적인 방향, 심지어 재앙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깊이 좌절했다. 그들은 지구를 인간이 살기에 쾌적한 상태로 만드는 기후에 가치를 매긴다. 나는 다른 학과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떤 가치들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역할은 인정되지 않는다. 학계 분위기는 각 학과들이 건강한 지구에서 건강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권유하지 않는다. 학계는 중립을 권유한다.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대학의 연구 주제들이 연구자금의 수혜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영향력 있는 책의 제목이 『당대의 세계를 구해라(Save the World on Your Own Time)』이다. 이 책은 대학 강의실에 가치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설명한다.  교수는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식을 증진시키고, 그것을 학생들과 공유하며,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 분야의 지식을 증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방대한 지식이 부족한 자원의 소모를 가속화하는데 쓰이는 시대에 교수의 역할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그런 염려가 자신들이 공부하는 내용과 방법에 영향을 미치도록 가르치는 것이며, 이것이 세계에 더 큰 이익을 가져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가치중립적 고등교육은 모든 가치들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가치가 뚜렷했던 인문대학(리버럴 아츠 컬리지)들을 대체했다. 인문학 교수들은 학생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걸 목적으로 삼고, 학생들이 장차 사회의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활용하도록 가르쳤다. 50년 전에는 많은 학생들이 이런 가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더 보수가 높은 직업을 얻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다. 부라는 가치가 중심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서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에 대한 추구가 사회적 가치가 되면 될수록 다가올 재앙 또한 커질 것이다. 인류의 운명이란 관점에서 볼 때 고등교육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부에 대한 봉사와 부라는 목적의 전파는 우리의 건강한 생존 기회를 감소시키고 있다.

많은 교수들이 강의 외의 시간에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일한다. 고등교육에 대한 나의 비판이 교수들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식의 사고, 그 이상을 부추기는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이다. 왜 이런 시스템이 고등교육을 바꿔놓은 것일까?

 

생태문명을 위한 철학의 역할

이 시스템은 근대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 개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아마도 불가피한 결과물일 것이다. 근대문명은 눈부시게 성공한 자연과학과 함께 성장해 왔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기계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탄생했다. 이것은 자연에 내재한 어떤 가치도 부정해 왔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를 가질 뿐이다.

19세기 후반까지 근대문명은 이원론적이었다. 자연이 기계라는 사고와 함께, 근대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에서 유래해 중세에 통합된 인본주의적 이해를 계승했다. 인문학에는 중세 대학들의 사고가 뿌리내리고 있으며, 19세기까지 이런 전통은 계속됐다.

그러나 19세기에 찰스 다윈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증명했다. 이는 자연을 다시 생각해 보거나, 인간도 자연이라는 기계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계론적 과학에 대한 근대의 헌신은 매우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자가 승리를 거둔다. 중세적 인본주의는 근대적 기계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계적 세계는 어떤 목적이나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 대학은 가치중립적이 되기를 스스로 희망했을 것이다.

물론 교수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좀비(기계인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가 좀 더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얻는데 사용하는 “이론적 이성”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데 필요한 가치를 고려하는 “실천적 이성”을 구별함으로써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칸트에게는 둘 다 중요했다. 그러나 대학들이 스스로를 이론적 이성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우리 문화에 지침을 주는 어떤 곳도 없었으며, 이는 아이들에게 가치에 대한 진지한 사고가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가능하지 않은 종류의 일이라고 가르치는 결과를 낳았다.

교수들이 강의하지 않는 시간에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자유롭게 일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정보에만 가치를 두고 판단을 정지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 같은 교육의 구조화는 현대세계의 근본적 믿음에서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파괴를 피하도록 도와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서 사회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 근본 전제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 전제들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더 나은 전제로 대체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데 철학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생태문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과 손자들이 쾌적한 지구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이는 행동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윤리적 관점에서 현재의 나쁜 행동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구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쁜 행동이 근대적 원리와 믿음을 내면화한 많은 이들에게는 좋은 행동이 된다. 재차 강조하지만 토대를 이루는 믿음들이 문제다. 그러한 믿음들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토론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혹자는 대학의 철학 교수들이 이런 임무에 종사한다고 기대할 수도 있다. 몇몇 교수들은 그렇다. 아마 모든 교수들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기회를 주는 인식을 갖도록 학생들을 북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인 전제들을 검토하는 철학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근대철학은 이 과제를 스스로 포기했다. 근대철학은 다른 학과들과 나란히 서서 또 하나의 학과가 되고자 했다. 다행히 예외는 있다. 그러나 근대적 사고의 전제들을 비판하는 과제를 근대 철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짧게나마, 필요한 비판이 제기됐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다윈의 증명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왔다고 간주한다. 다윈의 증명은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극적 도전이었다.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나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응답이 가능하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그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기계론적 사고가 근대성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자연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공적 논의가 일어났다. 이 선택지는 신자연주의라고 불렸다. 이런 움직임은 기계적 모델이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없다는 과학적 증거가 늘면서 지지를 얻었다. 기계적 설명의 한계는 점점 상식이 되었다. 과학을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체로 학회나 대학으로부터 배제 당했지만, 반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들은 바로 이런 신자연주의 철학자들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당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였으며, 오늘날에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도 그 중 한 명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찰스 퍼스는 미국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있다. 이들보다 영향력이 적지만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다.

 

기계론을 넘어 생태론으로

내가 명확히 했듯이, 나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가장 종합적이고 통찰력 깊은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은 자연과학의 토대를 이루는데, 그는 뛰어난 수리물리학자였다. 나는 우리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이 이런 신자연주의 사상가들의 후예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오늘날 과학자들의 발견이 이원론적 사고의 변화를 폭넓게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변화의 시기가 온 건 같다.

화이트헤드는 기계론에서 유기체론으로, 실체적 사고에서 사건적 사고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변화이다. 실체는,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 존재했는지에 상관 없이 그저 그것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사건은 오직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만 그것 자체일 수 있다. 사건이 관계들의 통합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실체에서는 관계들이 배제된다.

우리 경험에서 객관적인 것이 갖는 중요성으로부터 경험 자체의 중요성으로의 변화도 일어났다. 세계의 많은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 감정에는 근본적으로 가치가 들어있다. 가치중립적인 물체들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들의 영향을 받은 목적과 결단의 작용이 모든 경험에 들어있다.

형이상학 강의를 더 이어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생태적 형이상학은 기계적 형이상학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생태적 형이상학이 교육에 갖는 함의는 혁명적일 것이다. 경제학, 정치학, 농업, 산업에 갖는 함의 역시 혁명적일 것이다. 이 형이상학의 함의는 형이상학에 대한 의식적 지식이 없이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움직임을 지지할 것이다.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많은 부분은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에 대해 확신을 주고, 이를 지지한다.

근대적 정신은 형이상학을 거부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주장에 설득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근대적 정신은 미국인들의 사고에 만연해 있다. 그들은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래서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미국인들에게 모든 관심사는 이론적이기보다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에 비해 중국에는 기본적인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개방성이 있다. 중국인들은 근대 유럽인들의 사고가 자신들의 전통적 사고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들은 사고의 차이가 개인의 삶과 사회 제도에 만들어내는 차이를 목격했다. 그들은 또한 부르주아적 사고와 행동, 그리고 마르크시즘 사이의 깊은 차이 역시 경험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근본적인 믿음의 체계가 현실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비록 중국에서 생태문명이란 개념이 체계적 철학과는 상관없이 생겨났지만, 많은 이들이 중국의 생태문명 개념과 화이트헤드 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은 중국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일을 진행하기 쉽게 만들었다. 우리는 생태문명이란 주제로 수많은 컨퍼런스를 열고, 그것의 현실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보장받았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화이트헤드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생태문명의 바탕에 깔린 전제들이 생태적 철학을 구성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개인에게 필요한 변화조차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해가 이제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식을 구획화하기보다는 지식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봐야 한다. 일상에서도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부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뿌리 깊은 전제는 점점 문제시되고 있다. 요컨대 근대성은 더 이상 대중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배하지 못한다. 거기에 새로운 문명, 즉 생태문명을 향한 희망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좀 더 좋은 철학이 그런 이상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존 캅(John B. Cobb)

종교철학자,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월, 2019/12/0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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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마카오는 1997년, 1999년에 각각 중국에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로 정의되는 방침에 따라 통치되었다. 홍콩과 마카오 모두 중국과의 재통합 이후 특별행정구역(SARs)으로서 50년간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두 도시는 중국령이 되었지만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된 행정, 입법, 사법 자치권을 통해 독자적인 국정을 관할한다. 홍콩 기본법에는 중국 정부가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자치권 보장이 끝나는 2047년에 과도 시한이 끝나고 나면 홍콩 도시의 미래는 중국에 귀속된다.

선거가 치루어진 이후, 중국 인민일보의 1면 논평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렸다.

“홍콩은 중국의 홍콩이고 홍콩 사무는 중국 내정에 속한다. 홍콩 문제에 외부 세력의 간섭을 불허하는 것은 중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브라질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 정부는 변함없이 홍콩 문제에 대한 외부 세력의 어떠한 개입도 반대할 결의를 지녔다고 전했다”는 내용도 이어졌다.

지난 11월, 홍콩에서 구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범민주당이 “전체 452의석 중 347석을 차지하면서 압승을 거뒀다”고 보도하며 18개 구 중 17곳을 장악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홍콩 구의회(DC)는 홍콩 입법회와는 다르다. 홍콩 구의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 존재하며,교통, 환경, 거주 환경과 같이 생계와 관련하여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는 수개월 간의 ‘반체제 반향’으로 인해 2015년 선거때 47% 투표율과 비교했을 때 71%의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고, 투표 결과 또한 상당히 상이하게 나타났다고 전했다.

“범민주당이 선거에 압승하여 득의만만하자 유권자들 전반에 걸쳐 명백하게 불만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2015년 이후 이번 선거전까지는 건제파가 지방의회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대 친중 정당인 민주건항 협진연맹(민건령, DAB)은 기존 119석에서 줄어든 21석을 얻는데 그쳤다.

 

홍콩의 시민 불복종 운동 또는 미국의 색깔 혁명 시도?

이제 민주파는 홍콩행정장관을 선출을 담당하는 선거위원회에서 중요한 대표성을 띄게 된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식 폭력, 공공 기물 파손(반달리즘)과 혼돈 대신에 비교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에 중국을 와해하려는 워싱턴의 양당 강경파들의 분노를 감안했는지 여부는 향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도시 거주민 대부분은 과거에 벌어졌던 폭력적인 상황에 명백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황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홍콩을 와해 및 약화시키려는 (내부의 또는 외부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면서 홍콩 도시는 중국의 특별 행정 구역임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주에 미국을 “세계 불안정의 가장 큰 근원”이라 일컬으며 “미국 정치인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세계적으로 중국을 모함하고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대대적으로 일방주의와 보호주의에 관여하면서 다자주의와 다자 무역 체계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미국이 제로섬 게임을 이어간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중국과 미국 간의 협력과 공영만이 올바른 길입니다”이라고 덧붙였다.

패권주의적 목적을 위해 다른 국가에 대한 우세를 추구하고 상호 협력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미국의 운영 방식이 아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지난 지방 선거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번 구의원 선거는 현재는 철회되었으나 도시의 불안을 촉발시켰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이후로 홍콩특별행정자치구에서 처음 시행된 여론의 결과입니다.”

“지난 5개월 이상 동안 폭도들은 외부(미국)세력과 협력하여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강화하여 사회 및 정치적 대립, 사회적 정서 내 균열을 일으키고 경제와 민생에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수개월간 이어진 사회적인 동요는 선거 과정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있다. 일부 폭도는 선거 당일에도 애국적인 후보를 교란했습니다.”

“오늘날 홍콩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여전히 폭력 및 혼란의 종식과 질서의 회복입니다.”.

신화통신은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인민일보 역시 투표율이 높았고, 개표 작업을 완료했으며, 의원 사무실 100곳이 파손되었다는 사실을 약간 더 언급했을 뿐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 영자신문 차이나데일리는 야당이 승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뻔뻔스럽게 무법적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도시 주민들은 몇 달 동안 CIA에 의한 폭력, 공공 기물 파손, 혼돈 속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다.

현재의 상대적 평온함이 회복되고 지속된다면 미국이 새로이 중국 내정에 간섭하기 이전의 휴지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보여준 무법천지의 배경은 바로 미국 제국주의의 사회악이다. 그들의 어두운 세력은 자만심, 오만함, 그리고 변화를 꺼리는 마음에 의해 홍콩 시민들이 스스로 파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Stephen Lendman(스티븐 렌드먼)

시카고에 거주하는 자유 연구자로서 글로벌리서치의 정기기고자이다.

월, 2019/12/3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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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요 위협국가(중국과 이란)들이 새로운 실크로드라는 명분으로 점차 가까워지면서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21세기형 경제통합을 주도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의 배후세력(deep state)들은 이를 못마땅히 바라보고 있다.

이란 외무부의 대변인 Mousavi는 이란과 중국간의 포괄적 (전략)파트너십을 진행하는 공개적인 로드맵에 대해서 비난을 일삼은 각종의 거짓말(루머)에 대해서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곧바로 이란 외무부의 공식 입장을 대통령 비서실장인 Mahmoud Vezi가 다음과 같이 재확인되었다.

“이란이 주변국가들, 특히 중국과 러시아와 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공공연한 거짓선전이 시작되었다”. 그는 추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추가하였다.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단위에서 관계를 확대하고자 하는 이번의 로드맵에 곧 서명이 이루어질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이란은 더욱 많은 국가들과 관계를 넓혀갈 것이다.”

대략적으로 상기의 발언들은 이미 잘 알려진 이란과 중국의 포괄적 파트너십에 대한 항간의 기사들을 확인한 것이지만, 이것을 군사적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예단하는 염려에 미리 일침을 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란과 중국 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은 2016년 시진핑 주석이 테헤란을 방문한 당시에 공식적으로 체결된 것으로 20개 사항에 달하는 많은 지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중 다음의 두 가지가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7항은 유라시아를 통합하는 새로운 실크로드에 대한 파트너십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이란 측은 중국이 주도하는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양실크로드를 환영한다. 이러한 방향의 프로젝트를 함께 진흥하는 것과 산업 및 광업의 역량을 강화하는 투자의 건에 대한 양해각서와 관련 문건들에 서명함과 동시에 이와 관련된 역량과 혜택 그리고 기회를 기대하면서, 양국은 수송과 철도, 항만과 에너지, 상업과 서비스 분야 등 다양한 부문에 대하여 상호 간의 협력과 투자를 확대해 나간다.

제10항은 AIIB에 이란이 회원국으로 참여하는 것에 관련된 내용이다.

“중국은 이란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발기회원국가로 참여하는 것에 감사(평가)한다. 양국은 이를 통하여 아시아의 진보와 번영을 향한 다양한 분야에 협력을 강화하고 함께 노력할 것이다.”

상기의 양해각서가 담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상기의 양자간 포괄적 파트너십의 핵심은, 이미 지난 해까지 잘 알려진 대로, 중국이 이란의 에너지와 사회간접시설에 향후 25년간 4000억불의 투자계획이다. 이중에는 중국의 첨예한 국가이익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란에서 중국으로) 석유와 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과정에 위험이 잠재된 말레카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시장평균가격에서 18% 인하된 가격으로, 달러가 아닌 중국 위안화 또는 여러 통화(basket)를 혼용하여 지급하는 조건을 담고 있다.

북경당국은 주로 AIIB를 통하여 2280억불을 이란의 사회간접시설에 투자할 것이며, 대부분의 투자가 2025년까지 이루어질 것이다. 이중에는 에너지산업의 혁신에 긴급히 필요한 생산시설의 건설과 Tehran과 Mashhad를 연결하는 전철화 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Tehran-Qom-Isfahan을 고속철도로 연결하며 이를 추후 Tabriz까지 연장할 계획인데, Tabriz는 석유와 가스 및 석유화학공업의 거점지역이자 Tabriz-Ankara 간의 가스공급 라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이는 유라시아의 핵심통로인 셈이다. 이란을 관통하는 고속철도는 중국신장의 Urumqi에서 출발하여 4개의 칸국들 (Kazakhstan, Kyrgyzstan, Uzbekistan and Turkmenistan)을 통과하며, 곧 이어서 서아시아 지역인 이라크와 터키를 유럽으로 연결한다. 이는 역사적인 과거의 실크로드를 현대적 기술로 재현하는 것이며, 동쪽과 서쪽의 심장을 연결하던 당시의 무역용어인 ‘페르시아’를 상기시킨다.

이란과 중국 및 러시아 간의 공해(空海)군사적 협력에 관한 사항은 상기의 요인들이 밝힌 것처럼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Moosavi 대변인은 트위터를 통해서 이란이 중국에게 섬을 양도한다거나 군인들이 이란에 상주한다는 것에 합의한 바는 없다고 확인하면서 이에 대한 소문은 거짓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이란 내에 중국인민해방군의 주둔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하였다는 소문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재차 확인하였다.

지난 주말, 외무부 장관인 Zarif는 이란과 중국은 ‘신의와 확신’으로 협상을 진행하여 왔으며, 합의의 내용에는 아무런 비밀사항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란과 중국 및 러시아는 유라시아 통합의 주요한 삼국거점으로 유라시아 안보에 대한 군사적 협력에 대하여 다음 달부터 시작할 것이며 이의 결정에 따른 긴밀한 상호협력은 11월까지 이루어지도록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지정학/지경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열쇠는 미국의 무자비한 대이란 제재이며 더구나 이를 무기로 삼아 이란과 중국 간의 협상에 대한 광범한 개입여부이다. 이미 미국이 개입한 여러 내용들은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들이다.

이란과 중국 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은 아직 중국이 추구하는 예외주의라는 명목으로 취소가 가능한 도상그림 수준이며,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다양한 범위에서 서로 윈-윈을 추구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희망을 결집시킨 기획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정부의 요인이자 외교부장인 Wang Yi가 키진저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미중 싱크탱크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 것은 매우 암시적이다.

“최근 몇 년간 형성된 흐름 중에 한가지 잘못된 견해는 중국굴기의 경로가 서구의 체제와 경로에 대한 타격과 위협이라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고 우리는 이에 동의할 수도 없다. 침략과 협박은 중국 5천년 역사의 유전인자(gene)에는 없다. 중국은 타국의 방식을 따라 하지도 않지만 역으로 중국의 방식을 타국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게 우리가 하는 것을 모방하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 2500년 전(공자의 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모든 존재들은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고도 화합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으며, 서로가 간섭하지 않고 양립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을 추구해 갈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 왔다.”

 

관련기사 <한겨레 : 7월 13일자 보도 – 중국과 이란, 포괄적 동반자 협정 준비 중 >

Pepe Escobar is a frequent contributor to Global Research.

중국과 이란이 기간산업에 대한 막대한 자금 투자를 대가로 값싸게 원유를 공급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포괄적 협력에 관한 협정을 곧 체결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핵 개발을 이유로 이란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는 미국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보여, 미-중 갈등이 더욱 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12일 <뉴욕 타임스>의 보도를 종합하면, 중국은 향후 25년 동안 이란의 금융, 통신, 항만, 철도를 비롯한 각 분야에 걸쳐 4천억달러(480조원) 규모의 투자를 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중국 쪽은 대폭 할인된 값에 안정적으로 이란 원유를 공급받게 된다. 신문은 “이런 내용을 담은 18쪽 분량의 ‘중국-이란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 초안이 이미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며 “조만간 이란 의회에 제출돼 비준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협정문 초안에 언급된 약 100건에 이르는 중국-이란 합작사업 대부분이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에 포함된 것”이라며 공항·고속철도·지하철 등 교통분야 투자와 함께 이란 서북부 마쿠, 걸프 연안 아바단 지역과 케슘 등지에 자유무역지대가 건설되고, 이란의 5세대(5G) 이동통신 사업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도 중국이 맡기로 했다고 전했다.

대테러전과 마약거래·인신매매 등 다국적 범죄에 대한 대처를 명분으로 군사·안보 분야 협력도 대폭 강화된다. 또 양국군 합동군사훈련과 무기류 공동 연구·개발, 정보 공유 등도 추진된다. 일부에선 중국이 투자시설 보호를 명분으로 전략적 요충인 이란에 자국군을 주둔시킬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강대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원칙으로 삼아온 이란이 중국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압박과 봉쇄로 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탓으로 보인다. 특히 이란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원유산업은 미국의 제재로 수출길이 막힌데다, 시설 낙후로 개·보수가 절실한 상황이다. 실제 이란의 유전과 정유시설을 포함한 원유산업 기반시설 현대화에만 최대 1500억 달러가 필요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중국 쪽도 이란과 협력을 강화해 ‘중국-파키스탄-이란’으로 이어지는 3각 체제를 형성해 미국-인도의 영향력에 맞설 수 있다. 이란이 시아파 종주국이란 점에서 ‘이란-이라크-시리아’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를 통해 중동 일대에서 미국과 맞서는 구도를 이룰 수도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기존 중동의 전략균형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신문은 전문가의 말을 따 “이란과 중국의 이번 협정은 단순히 상호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게 아니라, 미국과 맞서는 데도 필요할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 협정이 체결되면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행정부로선 두고만 볼 수 없는 상황이라, 미-중 갈등의 추가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 쪽은 <뉴욕 타임스>에 “중국 업체가 이란과 제재 가능한 거래를 지속하도록 허용·지원함으로써 중국 정부는 스스로 주장해온 안정과 평화 촉진이란 국가적 목표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며 “세계 최대 테러지원국인 이란을 지원하는 중국 업체에 지속적으로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Asia Times via Global Research on 2020-07-12.

Pepe Escobar

브라질 출신 언론인으로 아시아 타임즈와 Sputnik에 기고하며 러시아의 RT 그리고 이란의 국영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고 있다

수, 2020/07/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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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NYT에 실린 내용으로 기고자는 현재의 위기에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구제지원을 선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른백년은 이런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다만 생산적인 논쟁을 위하여 게재를 결정했다.

우리는 지난 IMF 시기와는 달리하여 은행과 거대 기업에 지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대신, 수요자인 시민들과 중소기업자들에게 필요한 만큼 무제한적으로 직접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거래은행은 해당산업의 지원과 존폐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정부는 이번 위기를 미래의 일상적 혁신을 위해 대규모 산업구조조정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에 따라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큰 기업과 은행의 파산에 대응하면서, 정부가 선택적으로 이들을 공기업으로 전환하되 경제가 정상화된 이후, 시장에 재매각을 검토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수천만 명이 실직을 당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기업들이 부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연방의회는 위기의 확산을 차단하려고 이미 3조 달러의 지원을 승인하였고, 추가의 금액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에 신속하고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에 대하여 다른 정치적인 견해들이 분노와 함께 돌출하기 시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인들과 언론매체 그리고 일반시민 사이에 잠재적인 불황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수혜자들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여부를 밝히는 것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좌파적 정치인들은 거대기업들이 연방정부의 지원혜택을 받거나 연방준비제도가 공급하는 초저금리의 신용공여를 받는다는 것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반면에 우파에 속하는 측은 연방행정부가 주정부나 지방정부를 지원하거나, 실업자들을 돕기 위해 고용보험을 확대하는 것에 화를 내고 있다. 여론매체들은 스테이크하우스 체인이나 사설학원같이 자격미달인 조직들에게 지원금이 투입되는 것에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수조 달러에 달하는 연방지원금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엔 자금이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오는 제로-섬 게임의 위험이 존재한다. 이는 위기가 종결되기 이전에 곤궁에 빠진 개인과 기업 그리고 공조직에 대한 연방정부의 대응수단을 제한하고 지원을 중단시킬 잠재성을 지닌다.

“보수적인 견해를 지닌 친구들은 주정부나 지방도시는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현재 해밀톤 전략연구소의 파트너를 일하고 있는 Tony Fratto는 이야기한다. ”반면 진보적인 인사들은 민간기업들에게 도움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누구에게도 지원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들 각자의 견해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고통의 결과물들이라고 덧붙였다.

2008년 세계적 규모의 금융위기와 후유증을 겪은 지금은 물론 보다 합리적인 주장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매우 긴급한 사항이다.

지난 위기 과정에, 보수주의자들은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택구매자금을 담보조건으로 융자해준 사실을 비난한다. 당시의 은행들은 거대한 ‘모랄-해저드’라는 문제를 동반하면서 금융조직들이 부동산 저당의 거품에 자금을 공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결과에 대해 전액의 구제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Covid-19에 대하여 같은 내용으로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주택버블과 금융위기를 야기했던 금융회사들이 구제지원을 받은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번의 사태는 경우가 다르다”고 자유 루스벨트 재단의 연구원인 Mike Konczal은 주장한다.

금융위기 상황과 확실하게 다른 것은 기업들이 코로나를 야기시킨 장본인들이 아니라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분야와 금융분야에 종사하는 자유주의적 인사들이 이를 묵살하고 있는데 이들은 과거에 구제를 받았던 기업들이, 지난 수 년간 바이-백을 통하여 주주들에게 배당을 높이는 행동을 보여 왔다며, 이제 다시 정부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데 분노를 터트린다.

이런 비판에 앞장서온 Oaktree Capital의 Howard Marks는 최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비도덕인 행위를 한 기업을 정부가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면, 이는 분명히 ‘모랄-해저드’에 해당한다. 이들 조직과 관련 투자자들은 고통에서 보호를 받겠지만 이는 아주 나쁜 사례를 남기는 것이다.”

수많은 기업들, 특히 부채가 많아 충격에 취약한 조직들이 우선적으로 파산의 위기에 몰리겠지만, 동시에 현재 전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충격에는 어떤 기업조직도 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연방준비제도가 기업채권에 자금을 투입하지 않으면, 많은 기업조직들이 자신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순간의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서 파산에 이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파산은 부실기업을 주주로부터 분리시켜 신용제공자에게 되돌려주는 효율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팬데믹과 같은 충격에 대해 정부가 온전히 방관으로 일관하면 파산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결과적으로 일하는 미국시민들과 경제전반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경제가 좋은 호시절에도 파산의 정리과정에서 신용제공자(채권은행)와 노동조합 또는 노동계약자들 간에 협상을 통하여 퇴직보상이 없는 정리해고를 자주 허용하기도 한다. 여러 산업분야를 관통하며 수 천개의 기업들이 상법 제11조의 파산신청에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이로 인해 파산법정의 업무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고, 구조조정의 기간 동안 조업을 지속하도록 하는 부채정리의 과정이 지연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우량기업들이 살아남기 보다는 청산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연이은 파산사태는 부채에 시달려온 투자자들이 헐값에 가치있는 자산을 사들일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며, 산업이 소수의 거대기업으로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잘못된 경제관계를 회복하려면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경제상황에서는 파산이 창조적인 파괴의 선순환으로 작동하지만, 지금은 파괴가 거대한 조업중단과 폐업을 야기할 것이다”라고 경제혁신그룹의 책임자로 일하는 John Lettieri는 이야기한다.

비슷한 논리가 연방정부 구제지원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적용되고 있다.

상원의 주류인 공화당 총무인 Mitch McConnell은 지난 4월의 한 인터뷰에서 현금유동성이 부족한 주정부들을 파산시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나중에 그런 입장에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와 공화당 동료들은 민주당 소속의 주정부들이, 한편에서는 대규모 공공실업연금의 의무를 시행하면서, 연방정부의 구제지원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많은 주정부들이, 위기 이전에는 건전한 재무상황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이제는 세수가 격감하면서 향후 수년간 재정지출을 심각하게 축소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민간분야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경제가 정상화되는 것이 지연될 수 있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대상에 대한 논란의 와중에도, 고용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중소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지불보호정책을 서명하는 주정부들의 노력이 진행되어 왔다.

우선적으로 3,500억불의 자금지원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연방의회의 결정여부에 있으며, 문제는 상기 금액으로는 중소기업들의 임금지불을 충당하는데 역부족이라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차적인 자금의 집행으로는 부족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는 대규모의 스테이크 체인사업체들뿐만 아니라, 벤처지원 기업들을 포함하여 지원할 가치가 있는 조직들도 희생당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수 만개의 기업들 중에 섞여 일부 불량기업이 구제지원 자금을 받는 것에 분노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며, 사람들이 누가 자격이 있고 누가 없다는 식으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를 잘못 접근하는 것이라고 Lettieri는 말한다.

팬데믹에는 도덕적 기준이 없다. 경제를 회복시키는 조치가 공정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이라고 분노하는 것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는다.

 

2020-05-04.

Neil Irwin

뉴욕타임즈 경제칼럼 기고가

수, 2020/05/2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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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살인’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흑인에 대한 차별과 뿌리 깊은 인종주의의 민낯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실 모든 인종 이슈가 그러하듯 이번 사건의 본질은 ‘순수한’ 인종차별에 기인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백인 우월주의의 핵심은 피부색이 아니라, 백인 중심의 계급사회가 만들어낸 차별이기 때문이다.

조지 플로이드는 대부분 흑인 계층이 미국 사회에서 점하는 하층계급이다. 그로 인한 사회적 편견과 경멸은 미국의 ‘선량한’ 시민을 위협하며, 그는 마침내 미국의 ‘흑인’이 된다. 모든 흑인이 조지 플로이드와 같은 ‘살인’ 위험에 놓이지는 않는다. 미국 흑인 농구 스타 마이크 조던이 미국 경찰 손에 어이없이 살해당할 일은 시카고 슬럼가의 청년이 월스트리트에 입성하는 것만큼이나 낮은 확률일 테니까. 플로이드 죽음을 미국 계급사회의 차별이 부른 살인으로 보는 이유다.

미국 건국이 소수의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 북미 원주민들을 내쫓고, 이후에는 아프리카에서 ‘사냥’해온 흑인들을 노예제로 묶어 부국강병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흑역사 정도는 이미 세계 슈퍼파워로 등극한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 하층계급의 상당수가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들로 이루어진 이상 계급문제가 가려진 ‘인종주의’ 논쟁은 무한 반복될 공산이 크다. 미국의 계급사회에서 유색인종의 처지는, 라틴아메리카 토착 원주민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사회가 흑인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편견이 만연한 곳이라면 원주민을 향한 라틴아메리카의 백인 지배계급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지난 수 세기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그들이 백인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예를 들면, 마야 원주민이 국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미 과테말라 원주민들의 상황은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정복 이전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이들은 백인들에 의해 ‘미개한 인종’이 되었다. 유럽으로 이주한 소수 백인이 아메리카의 경제와 정치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였으며, 그렇게 그들만의 리그를 안정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 정착시켰다.

“영원한 봄이라고 불리는 과테말라의 화사한 날씨와 푸른 자연환경은 신의 선물이라 해도 가히 손색이 없다. 과테말라 시티의 부촌은 정갈하게 가꾸어진 나무들과 거리,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사람들로 가득 차는 쇼핑몰의 깔끔한 외벽과 실내의 화려함은 눈이 부시다. 반면, 뉴스와 일간지에서는 매일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한 유아동의 사망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부촌의 저택에서 정원사와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젊은 원주민들의 새벽 발 빠른 출퇴근 모습은 흔하다. 아침마다 ‘주인’집 애완견을 산책시켜야 하는 메이드 복장의 원주민 소녀들의 모습은 흡사 식민지 시대의 봉건 사회를 연상케한다…(중략)”【1】

물론 과테말라의 이 계급 질서를 바꾸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역사상 유일했던 개혁 정부가 백인 지배계급 엘리트와 우파 군부의 쿠데타로 1954년 실각하자, 이후 약 36년에 걸친 내전을 치러야 했다. 1944년부터 약 10여 년 동안 계속된 개혁 정치는 기존의 과두 엘리트 지배계급과 원주민을 비롯한 다수의 피지배 계층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이어지며 결국 전쟁을 불러왔다. 내전은 명백한 계급전쟁이었고, 이 과정에서 약 2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의 대부분은 마야 원주민이었다.

군부에 의해 자행된 대대적인 ‘인종’ 학살은 궁극적으로는 당시 마야 원주민들의 정치 세력화를 두려워한 군부의 군사적 선택이었다. “마야 원주민을 섬멸한다”라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인종 제노사이드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이유다. 그러나 평화협상 과정에서 과테말라 내전의 원인이었던 계급 갈등은 ‘인종’ 갈등으로 치환되었고, 원주민들의 계급적 요구는 부정되었으며, 오롯이 ‘전통문화’ 회복 운동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내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마야인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이대로라면 더 나아질 가능성도 없다.

그리고 남은 것이 있다면 1992년 마야 원주민 여성 리고베르타 멘츄가 ‘최초’ 원주민 출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뿐이다. 마야인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고발하고 이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는 공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멘츄를 제외하고 내전으로 목숨을 잃은 20만 명에 이르는 마야인들은 멘츄의 ‘평화’상에 가려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요지부동한 과테말라 기득권 계층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며, 개혁을 요구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졌다. 이것이 20만 원주민의 희생 위로 멘츄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의 민낯이며, 계급적 요구를 인종 문제로 가려버린 결과였다.

36년 내전 중에 진행되었던 소위 ‘인종청소’는 엄밀히 말하자면 마야인 제거가 아니라,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기득권에 저항한 농민에 대한 학살이었다. 내전의 수많은 희생자에 대한 진실규명은 고사하고 원주민들은 아직도 국가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득권층으로부터 받는 배제와 차별, 그리고 이로 인해 확대 재생산되는 사회적 편견은 견고할 뿐이다. 게다가, ‘공생’이라는 이름으로 우파 정권과 연대하는 멘츄가 보여주는 정치권의 행보는 씁쓸할 뿐이다.

멘츄의 노벨평화상이 과테말라에 새로운 ‘평화’라도 가져올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미국에서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의 등장, 그리고 연이은 수많은 기대와 희망들이 좌절된 경험과도 유사하다. 미국 전체 선거 흑인 유권자 중 95%가 오바마에게 표를 주었고, 저소득 계층의 약 73%, 그리고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인 셈이다.

그러나 정작 흑인 대통령 오바마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월 스트리트의 꼭두각시였을 뿐 정작 그는 흑인 대통령으로 흑인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 없다,” 는 그를 향한 미국 흑인 사회의 비판은 뼈아프다. 이에 대해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흑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국민 모두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고 맞선다. 그 전체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의 이해관계도 포함되었으니, 개혁과 변화를 원했던 계층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백인 자본가들의 이해를 더욱 보장해 주었다. 미국 시스템은 견고하게 유지되었고, 계급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결국, 지금의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인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반동적’ 동력이 아니었을까.

기득권 계급의 특혜와 질서의 해체 없는 ‘개혁’은 개혁하지 않음과 다르지 않았다. 오바마가 월스트리트의 이해를 더욱 보장하고, 멘츄가 자신이 대변하는 원주민을 학살한 주체인 현 기득권과의 연대를 개혁의 방향으로 설정한 이상, 이들이 누리는 ‘최초’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는 개인의 ‘영광’일 뿐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조지 플로이드와 같은 계급적 살인은 계속되고, 과테말라 원주민의 빈곤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 구조적 차별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인종 논쟁이 아니라 계급의 재소환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피부색 ‘논쟁’에 가려버린 미국 사회의 계급 질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여전히 ‘열등한’ 국민으로 규정하고 개도하려 드는 인종주의자들의 보편적 지배 담론을 구성하는 주요 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종이 아니라 계급에 의해 차별받는다. 가난해서 차별받는 현실을 피부색 논쟁으로 가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1】 필자의 연구논문에서 일부 차용한 것임. 정이나(2015),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 운동 정치: 계급과 문화사이에서. 중남미연구. Vol. 34. No. 2.

월, 2020/08/17-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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