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회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가 바로 국정감사다. 그야말로 국회의 큰 ‘행사’다. 그런데 이 국정감사 제도가 세계적으로 우리 국회에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파이낸셜신문>
국정조사(국정감사가 아니라) 제도는 영국 의회에서 1689년 아일랜드 전쟁의 실패 원인을 조사하고 그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활동을 전개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정조사권은 인정되고 있지만 국정감사제도는 다른 나라 의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1948년에 제정된 우리 제헌헌법의 제43조는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기 위하여 필요한 서류를 제출케 하여 증인의 출석과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제정된 국회법에서도 국정감사와 관련된 내용을 규정하였다.
“국회는 의안 기타 국정에 관한 사항을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의원을 파견할 수 있다(제72조).”
“국회로부터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정부 기타의 기관에 대하여 필요한 보고 또는 기록의 제출을 요구할 때에는 이에 응하여야 한다(제73조).”
“국회는 의안 기타 국정에 관한 사항을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증인의 출석을 요구할 때에는 따로 정하는 규정에 의하여 여비와 일당을 지급한다(제74조).”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국회법에서는 헌법과 달리 ‘감사’ 대신 ‘심사’ 혹은 ‘조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정례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이나 감사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별도의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국정감사와 국정조사의 구분을 하지 않았다.【1】
국정감사는 유신헌법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1987년 이후 부활하였고 헌법 제61조에도 다시 명문화되었다. 국회의 힘을 강화하고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엄격히 말해, ‘감사’와 ‘감시’ 그리고 ‘조사’는 상이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정확하게 구별되어 사용해야 한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로서 행정부에 대한 감시와 통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 직접 감사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행정부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권력분립 원칙에 위배된다. 더구나 현행 헌법상으로도 행정부 감사는 원칙적으로 감사원이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국정감사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2】 그에 따르면, 국회의 정부 감시 기능은 상임위원회 활동을 활성화시켜 상시적으로 이뤄지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미국 의회처럼 의회 내에 회계감사원을 설치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연방정부의 예산 지출과 운영에 대한 감사를 임무로 하며, 연방 정부의 예산을 사용하는 모든 사업과 활동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회계감사원의 감사결과는 수시로 모든 상하원 의원과 행정부에 제출된다. 그러므로 미국 의원들은 우리처럼 매년 국정감사를 하지 않아도 이 감사보고를 통해 각 부처의 운영상황을 손금 보듯 파악할 수 있다.
국회의원은 연예인이 아니다
국정감사가 진행될 때면 장관이 수시로 불려 다니고 국회 복도까지 공무원들로 북새통, 아수라장이 되어 국정 마비 현상을 초래할 정도다. 미국에서는 엄격한 권력분립에 의해 원칙적으로 의회의 장관출석 요구권이 없다.
그 동안 사람들은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이 피감기관에 호통을 치고 엄청난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목격해왔다. 감사보다는 정쟁의 연속이고 건수 위주며 ‘특권 과시의 현장’이다. 몇 해 전 국감에서도 태권도복을 입고 나오거나 한복 경연을 시연하고 고양이를 특별증인으로 신청하는 등 어떻게든 튀어보려는 연기정치의 희화화된 공연장이었다. 그러니 졸속감사에 수박겉핥기식 감사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으며, 이는 결국 국회의원들의 이미지를 더욱 추락시키고 정치 불신을 더욱 가중시킨다. 국회의원은 연예인이 아니다.
또한 국감이라는 이 과정을 통하여 전문위원을 비롯해 행정부에 대한 ‘갑’으로서의 국회 관료들의 권한 역시 필연적으로 더욱 강화된다.
‘개념의 오해, 혹은 착각’으로 탄생된, 세계 어느 의회에도 없는 국정감사 제도, 이제 폐지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1】 이러한 ‘감사’와 ‘감시’ 그리고 ‘조사’ 용어 혼동과 관련하여, 제헌헌법 기초자인 유진오 박사는 국정감사와 조사를 혼용하여 설명하며 국정감사를 영국에서 기원한 것이라 하여 국정조사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제헌헌법 제43조 규정에 대하여 유진오 박사는 “국회가 국정을 감시하기 위하여 제반의 조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기능이라 할 것이며, 본조는 국회의 이 당연한 기능을 선명(宣明)하는 동시에 국회가 국정을 감사할 때의 증인을 소환하여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음을 명백하게 한 것이다. 국회의 국정감사기능은 처음 영국에서 시작되어 점차 각국에 보급된 것인데, 종래 각국에 있어서의 국정감사의 실제를 보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유 박사는 국정감사를 영국에서 기원하여 각국에서 인정하고 있는 국정조사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김효전, “입법부의 정책통제 기능; 국정감사권과 조사권을 중심으로”, 「대한변호사협회지」제150호, 1989.
【2】 이관희, “우리나라 국정감사ㆍ조사 제도의 개혁방안”, 「헌법학연구」제11권 제3호, 2005. 9.
모든 중국인들이 지난 세기 동안 중국공산당 CPC의 놀라운 업적을 축하하고, 7월1일 목요일을 가하여 새로이 영광스러운 백년의 세기를 기대하면서, 공산당의 본래 임무에 대한 성찰까지도 즐거운 축제의 분위기로 변하여 중국대륙을 뒤덮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적 열망에 충실하고 우리의 사명을 굳건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라는 글귀는 1921년 당의 여정으로 시작된 상하이의 CPC 제1차 전국대표대회 현장 및 전국의 모든 박물관과 유적지, 중앙과 지방정부의 축하모임 연회장소에 이르기까지, 전국 어디에서나 방문객이 줄을 서서 열광하며 제창하는 숭고한 격언입니다.
상기의 격언은 아래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1) 왜 중국인들은 출발부터 중국 공산당을 선택하여 국가를 이끌었을까?
2) 공산당은 어떻게 역사의 온갖 시험을 이겨내고 중화민족을 위대한 부흥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었을까요?
시진핑(習近平) 중앙당 총서기는 2017년 19차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 보고서를 발표할 때, 상기의 격언을 처음으로 언급했습니다. “중국공산당 본래의 열망과 사명은 중국인민의 행복과 중화민족의 부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민에 기반한 정당성
중국이나 중국공산당에 대한 서구의 서사는 통상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를 통치하는 당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제기해 왔습니다. 서방식 자유주의 정치사상은 중국의 정치체제에는 ‘서구의’민주주의’ 기준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고 따라서 중국의 정치체제가 국민의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가정합니다 “서양식 1인1표 선거와 다당제도 없이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인민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중국은 오래 전에 거의 모든 종류의 서구 정치체제를 연구하고 시도했습니다. 청나라 말기(1644-1911), 외세와 식민주의의 침략에 맞서 끝없는 국내혼란과 굴욕적인 실패로부터 가난하고 약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중국의 정치 엘리트와 혁명의 선구자들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아나키즘, 파시즘을 포함한 많은 서구 정치사상을 시도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소비에트혁명이 일어난 1917년 10월 이전에 이미 마르크스주의도 중국에 도입되었습니다.
상하이 푸단대학교 중국연구소 소장인 Zhang Weiwei 교수는 “우리 조상들은 외부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며 “입헌군주제에서 다당제,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까지 모든 것을 시도했지만 불행히도 이들 중 어느 것도 중국자신이 스스로 보호하고 혼란을 끝내는 데 효과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택 중 어느 것도 대다수 중국인민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가 결국 최종선택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을 당시는 겨우 50명 내외의 당원과 대의원 1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즉, 중국적 특성과 융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에는 한가지 매우 독특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인민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마오 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1세대 지도부의 창의적인 탐색과 혁신 덕분에 중국공산당은 혁명의 주도세력에 농민을 포함시켰습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 약 80-90%가 농민이었습니다. 또한 불평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도시화는 도시지역에서도 엄청난 수의 빈곤층을 양산했습니다. 끝없는 전쟁과 기근에 더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혁명이론에 대한 마오의 혁신적인 공헌은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인민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맑스주의를 현지화하거나 “중국화”한 것이지만,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소련이 지지하는 고전적 맑스주의 이론의 정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정통이론에 따르면 혁명은 대도시에서 시작하여 도시노동계급이 주도해야만 합니다.
결국, 중국공산당 CPC는 마오 쩌둥의 지도력을 승인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고 중국화하기로 결정했고, CPC의 용감한 시도는 결국 당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던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마침내 자신들을 대변하는 대표자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역사상 농민 봉기세력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이 아니었고, 지도자들은 대부분 해외교육의 배경을 가진, 상하이와 베이징을 포함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지역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의 국방대학 Jin Yinan 교수는 최근 연설에서 “CPC는 가장 발전된 도시에서 가장 진보된 사고를 견지하였으며, 가장 발전된 지역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들을 모았다”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선진사상을 바탕으로 농촌의 전사들을 무장시키면서, 중국역사의 농민봉기와 같은 개별집단의 이기적인 이익보다,는 중국인민 모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현대적인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자력갱생의 역량
혁명시대뿐만 아니라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시대에도 중국공산당의 자력갱생 역량으로 여러 면에서 동유럽국가들의 공산당과 다른 경로를 담보할 수 있었습니다.
CPC는 격랑의 역사적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이후 산업과 경제의 세계화라는 기회를 포착했으며,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자기혁신(교정)의 실현을 통하여, 대다수의 인민이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중화민족의 위대한 잠재력을 활성화했습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CPC는 중화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이며, 이것이 바로 1949년 이전에 중국을 통치하고 태생적으로 자본가,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 봉건주의자들의 중국인민에 대한 불공정하고 불법적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관료의 이익에만 봉사했던 이전의 정치집단과 분명하게 다른 이유입니다.
“중국인민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구호 – 이것이 당 본연의 염원이며 국내외에 산적한 적들과 피비린내 나는 혁명투쟁에서 꿈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구자들이 견지해온 신앙의 힘입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은 인민에서 유래하고 인민과 공생하는 인민의 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CPC의 특성입니다. Zhang 교수는 CPC가 서구 정당과 완전히 다르며, 이들은 단지 국가내부의 일부집단 또는 특정계급, 민족단위 또는 부문의 공동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권력을 위해 투쟁하고 취약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사회를 마비시키고 양극화시키는 반면에 CPC는 중국의 모든 인민들의 총체적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입니다.”
이런 특징이 중국이 코로나-19 확산억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1인1표로 선출된 1인1표 정부와 다당제, 이른바 ‘언론의 자유’가 있는 서방은 왜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을까요? 왜 많은 서구사람들이 자신들이 선출한 정부와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온라인에서 반지성적 음모론을 퍼트리고 있을까요?
중국공산당은 초기부터 경제성장보다 인민의 생명을 우선시하였습니다. 중국이 팬데믹에서 다른 국가보다 빨리 회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중국인들 모두가 정부를 신뢰하고 과학적 지침과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했을까요? 그 대답은 이미 공산당의 역사에 나와 있습니다.
국가의 사명
국가는 주어진 의무를 완수하려는 열망을 입증해야 합니다.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달하지 못하면 원래의 포부와 약속은 무의미한 슬로건에 불과합니다.
사회주의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에서 선택하였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당이 결국 자국의 국민에 의해 버려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적 단계에 따라 가장 중요한 임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맹목적이고 완고하게 인쇄된 책의 교조적인 규칙을 따르거나 과거에 혁명을 이끈 올바른 이론을 버리고 현명하지 못한 서구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CPC는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상기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거나, 혹은 실수를 범하였어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30년 동안 CPC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동맹을 격퇴하고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침략의 위험”을 해결했습니다. 중국이 서구의 따돌림과 굴욕을 효과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독립자치국가가 된 것은 청나라 말기 이후 처음입니다. 세계 최강국이 쏘아 올린 미사일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침략이라도 자기 영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9년부터 현재까지 CPC는 새로운 임무가 “굶어 죽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2세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핵심인 덩 샤오핑은 ‘현명하지 못한’ 일방적 서구화를 추진하지 않고 1970년대와 80년대에 재차 용감하고 자신있게 중국식의 사회주의 이론을 혁신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CPC는 경제의 세계화를 수용하고 현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마침내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중화민족과 인민에게 경제적 기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현재의 중국은 CPC의 영도 하에 14억 인구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현대화하며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수억에 달하는 인민들의 빈곤을 퇴치하였으며 외부의 도발로부터 주권을 수호할 수 국가가 되었습니다. 세계유일 패권 초강대국의 위협에서 지역의 평화를 효과적으로 수호하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고속철도 네트워크와 가장 발전된 5G 서비스를 구축하고, 우주정거장을 운영 및 건설하고, 화성 탐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CPC는 자신의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 외에도 전세계의 많은 저변국가들, 특히 서구중심의 세계화에서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한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한 야심적인 계획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통해 중국개발의 경험과 이점을 공유하고, COVID-19 대유행 및 지구온난화와 같은 글로벌 과제에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현대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인류의 미래를 함께하는 지구촌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동아시아의 병자”로 묘사되었던 가난하고 늙고 약한 나라가 불현듯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낙관적인 예측과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불과 100년 만에 많은 분야에서 서구와 어깨를 겨누며 일부 분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이룩한 모든 성과를 통하여, 본래의 사명을 지키고 성취하며 염원을 견지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으며 이제 인민과 함께 가장 근본적이며 미래의 사명인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중화민족은 수많은 재앙 및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지만, 중국에는 “고난이 많으면 민족이 부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은 후 민족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과 희생이 무의미할 것이기에 부흥은 중국인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적이고 궁극적인 꿈입니다.
100년 전의 굴욕적인 역사는 중국이 통일, 주권, 영토보전 없이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고 평화로운 발전은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는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유혈의 고통스런 교훈을 통하여 반복하면서 중국인에게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동맹국들은 여전히 중국의 발전권을 빼앗고자 하지만, 100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는 중국이 아니라 서구열강 자신들이 불안을 앉고 있는 형세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고 배우기를 거부한 많은 서방국가들은 국가부흥이 중국에 얼마나 중요한지, 왜 중국인민에게 주권과 국가통합 그리고 영토보전이 양보할 수 없는 “정치적 正道”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방국가들이 중국인들이 간직한 국가부흥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대한 국가로서의 중국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중국인을 올바르게 대하고 중국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중화민족이 100년 전에 잃었던 지위와 존엄과 영광을 되찾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혁명적 여정을 시작한 핵심의 이유이자 미래여정의 종착지이기도 합니다. 중국인민의 변함없는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반드시 달성할 것입니다.
”대단히 말솜씨가 뛰어나고, 엄청나게 날카롭다” 많은 학자들, 특히 타이완과 해외에서 온 학자들이 지청시대의 학자들을 평가하는 전형적인 말이다. 말솜씨를 갈고 닦는 것은 당시 지청학자들의 중요한 일의 방식이었다. 1990년대초, 대학과 연구소의 중년, 청년학자들은 업무가 끝나면 거실이 딸린 기숙사로 돌아가곤 했다. 냉동만두와 쏘세지등의 인스턴트 식품이 보급되기 시작해서, 이를 안주삼아 즉흥적인 심야 혹은 철야토론이 가능했다.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핵심, 즉 ‘점’을 짚을 수 있어야 한다: 한가운데 ‘점’을 겨눠, 그 ‘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나서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도약한다. 이렇게 핵심을 짚기 위해서는 충격과 폭발력이 필요하다. 어떤 주제든 2~3분내에 듣는 사람이 이해가능하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들을 이어서 선을 긋는다면, 즉, 점을 글에 담아 생각하기 시작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글로 쓰기 위해서는 선을 그어야만 한다. 쓰기 전에 머릿속에 종이에 선을 긋기 위한 틀을 짜야 한다. 쓰는 과정에서, 다른 내용간의 관계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명료한 분류歸類, 선긋기劃分, 한계정하기界定가 필요하다. 정밀한 논리, 촘촘한 디테일, 물흐르는듯한 연속성이 필요하다. 글쓰기에서 돌파력과 임팩이 목적이 될 수 없다. 전문적인 학술 작법은 독자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독자는 에디터, 심사평가원을 포함해서 다섯명을 넘지 않는다). 구두발언조차 교과서를 또박또박 읽는 것처럼 답답하게 들린다. 학자나 관료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혁명가라고 해서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겐 밀실에서의 토론과 광장에서의 연설이 더 중요하다. 밤을 세우며 급하게 준비하는 신문평론이나 소책자도 이러한 토론과 연설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렇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즉흥적일뿐더러, 예측이 불가능하다.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보수파를 불안하게 만든다. 영국 수상 앤서니 에덴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세르의 연설방식이 무쏠리니나 레닌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1956년 수에즈운하 전쟁의 숨은 원인이기도 하다.
잡담같은 대화로 생각을 나누면 생각이 두루 퍼지고, 도약하게 된다. 이런 대화는 고도의 상상력에 의존해서 지속된다. 모두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상상을 해야 한다. 저런 관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감춰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썰렁해지지 않도록 평범해 보이는 현상에서 어떻게 재미있는 화제를 끌어낼 수 있을지 미리 생각을 해야 한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은 그래서 상상력이 뛰어나다 대신에 당시에 학술적인 능력은 좀 빈곤하기도 했다. 한번은 쑨리핑孫立平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잘모르겠다고 고백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누구는 제대로 알아?”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씀하셨다 “우리들도 어떨 때는 해외문헌을 보면서 큰 영감을 얻고 흥분하는데, 어쩌면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그럴지도 몰라”. “외국 이론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경우도 많아. 잘못 읽은게 오히려 ‘큰 깨달음’으로 다가 오는거지. “ 사상의 자주성이 자원의 빈곤을 오히려 혁신의 원천으로 전환시킨 셈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사회현상에 대한 통합적 판단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도 연관이 있다. 무엇을 토론하든, “사회주의의 본질은 이것이다”라든가 “중국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등의 지청학자들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점’에서 (‘선’을 거치지 않고) ‘면’으로 도약한다. 학제를 뛰어넘거나 아예 특정 학과에 소속되지 않으려는 그들의 경향도 상상력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중국사회에 대해서 통합적인 평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연히 철학, 역사, 정치, 경제의 각 영역을 넘나들게 된다.
대화와 토론은 단체 행동이다. 대화를 통해 사상이 전파되며 친구들간에 공명을 일으키고, 이때 저작권은 고려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제안한 생각인지도 따지지 않는다. 1990년대 중국은 가정전화 의 시대로 접어드는데, 작은 범위안에서 연락하고 동태를 전파하는데 매우 도움이 됐다. 당시의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문헌검색기능이 없었다. 개인 PC를 사용하면서, 프린터와 복사기가 보급됐다. 소그룹안에서 끼리끼리 책을 복사하고, 돌려 읽고, 이렇게 출력된 원고에 대해서 평했다. 타이완 사회학자 까오청슈高承恕교수가 왕선생님 소그룹의 허베이河北성 바이꺼우白溝시장 필드조사에 참여했다. 그를 매우 흥분시켰던 것이, 다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골로 내려갈 때였다. 대오를 만들어 페달을 밟으며 서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언제든지 멈춰서 군고구마를 사먹기도 하고, 그러면서 군고구마 장수의 살림살이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나중에 자전거가 자가용으로 대체됐다. 각자 자기 차를 몰아서 간다. 물리적 공간이 닫히고 개별화된다. 아마 이런 변화도 지청시대의 끝을 알리는 지표일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보다 20~30세가 더 많은 학계의 중진, 원로나 그들의 동료들과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사상적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격의없는 논쟁과 대화가 가능했다. 아마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일 것이다. 지금 스승과 제자 사이가 꼭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짜 중요한 변화는 동료들간에조차 제대로된 토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 재미없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행운을 누린 것은, 왕선생님이 학생들을 대단히 중시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반대로 그때는 사제관계라는 개념자체가 없었다. 세대의식조차 없었다. 만일 학생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흥미가 있다면, 왜 와서 한번 들어 보라고 할 수 없나? 만일 친구 사이에 절실히 어떤 문제를 궁리하고 있다면, 왜 학생이 뭐라 하는지 들어볼 필요가 없나 ? 한번은 농민공에 대한 이론의 함의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데, 쑨리핑선생님이 말했다. “눈앞 탕속에 들어 있는 고기 한점이 보이는데, 왜 건져 먹지 않나?” “꼭 모든 생각을 다 받아들일만큼 마음이 넓은 것은 아니다 등등. 그냥 눈앞의 고깃덩어리는 건지면 되는 것이고, 그 사상의 탐색이 그들의 반권위적 생활태도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그냥 원래 분위기가 개방적이고 평등했다.
이 학자들의 실천방식은 그들의 생활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동료들간에 질투와 시기하는 법이 없이, 철저하게 함께 생각을 나누는 것은, 아마도 하방시기 단체 생활의 연속선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학술계에는 서로 다툴 이익도 없었고, 관리도 엄격하지 않았다 (밤새 토론을 했다면, 아침에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시에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고도로 농축된, 혹은 희극적이기까지 했던 역사적 경험이,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넓은 시야와, 작은 일에서 큰 의미를 포착하는 능력을 선사했다. 어디에 고기덩어리가 있는지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이런 밑바닥 생활의 체험이, 각종 생활의 지혜를 근거리에서 관찰할 기회를 주었고, 평범함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민감함을 선사했다. “점”을 직관적으로 찾아냈다. 계획없이 책을 무차별적으로 읽었고, 다양한 전공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왕선생님 자신이 원래 수학전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철학과 기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사고는 틀에 갇히지 않고 튈 수 있었다. 그들이 사회과학을 공부한 것은 완전히 흥미와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진3> 지청학자들의 경계없는 학술실천방식은 그들의 생활경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동료들간에 질투와 시기도 없었고, 밤새워 함께 토론을 하던 것은 하방때 단체생활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학술실천은 1990년대 지청학자들의 자기비판적 태도를 키웠다. 당시의 공통인식은 전문적인 학과건설을 시급한 임무로 삼았으니, 학술활동은 반드시 지식공동체의 일정한 표준에 의한 대화에 기반한 것이어야 했고, 규범형식이 대화의 기초가 됐다. 그래서, 문헌리뷰와 분석의 틀을 명확히 하는 등, 모두 중요했다. 당시 우리가 시급히 보완해야 할 것들이었다. 왕선생님은 비록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베이징 사회학계의 국제협력을 열심히 추진했다. 많은 지식청년들이 1980년대 특히 1990년대초에 서방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0년대 이후 서구학계의 연구방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왕선생님의 또다른 업적은 전문과제형식의 사회학 연구방법을 도입한 것이다. 경험소재에 대해서 계획을 가지고 접근한다, 체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그저 관점을 내세우는 식의 주관적 글쓰기와 구분한다. 하지만 1990년대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은 관리자들의 학술규범화 열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학자들을 앞지른 것이라는 점이었다. 중국어 사회과학 검색 및 인용 시스템 (CSSCI), 학술지 평가 및 등급, 임팩트, 인프라 건설, 펀드신청, 과제평가, 국제협력, 국제순위 등과 같은 키워드가 아주 빠르게 학술업무의 황금률이 됐다. 1990년대 추진된 중국사회과학의 규범화속에서 기수역할을 한 덩정라이鄧正來는 그의 말년에는 규범화에 대해서 언급을 삼가하는 대신, 자주성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했고, 특히, ‘지식계획시대’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는 지식계획시대에 연구가 정치적 권력과 그로부터 확정되는 학술제도상 자원분배를 기초로 삼으면, 그 기초가 우리의 지식생산방식을 대부분 결정할뿐 아니라 우리 지식생산물의 구체적 내용까지 간섭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량용자梁永佳는 이에 대해, 덩과 그의 지지자들이 자신들이 초기에 규범화에 기울인 노력이 오히려 학문을 속박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규범화의 노력은 본뜻과 달리 ‘체제화’를 촉진한다. 이것은 국가 거버넌스 방식의 전환과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다. 1990년대 이래, 원래 장기혁명과정에 형성된 것으로써, 사회주의 개혁의 공식인증을 통해서 정당하게 획득한 정부의 합법성은 더 이상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게 됐다. 이제 정부는 새로운 합법성을 만들 필요가 생겼으며, 관리자에게 ‘동의’를 얻어야 했다. 학술연구형식상의 규범화와 운영사이의 상대적 독립은 학술에 대한 행정관리 합법성의 기초가 된다. 행정지도하의 규범화는 확실히 연구의 독립성을 강화한다. 장기간의 훈련이 없으면, 학술과 행정용어를 이해할 수 없다. 각종 명시적 규칙과 암묵적 규칙도 알 수 없다. 그렇게 학술 영역의 문턱을 높이게 된다. 학과내부에서 학자들은 고도의 학술화된 언어를 사용하여 다른 경우에는 사용할 수 없는 화법으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사진4> 덩졍라이(1956-2013)선생이 창간한 <<중국사회과학계간>>과 <<중국서평>>은 199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규범화, 본토화의 출발점이었다.
동시에, 처음부터 금단의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연구내용의 방법을 통제하는 것이 갈수록 원하는 효과를 얻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점점 학술연구의 일상적 운용기술 규정으로 전환되는 것을 관리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 – 행정요원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다. 자원을 농단하는 것은 소수파이고, 주로 여러가지 규칙이나 양식을 채우게 하기, 신청, 평가 등의 수단으로 이를 실현한다. 중년, 청년 학자들은 자기 커리어를 위해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체제화한다: 우선 직위를 추구하고, 점수를 따기 위해 노력하고, 나중에 행정직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기몫으로 할당된 머릿수 쿼터를 받아서, 독립적인 파벌을 만들고 싶어한다. 전속사무원을 배정 받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독립건물을 가진 자기 연구센터를 하나 꿰차는 것이다. 학술연구로부터 행정직으로 들어가면 물만난 고기와 같다. 일단 이런 위치에 오르면, 다시 학술연구직으로 돌아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다. 한명의 학자가 조직에 들어가서, 직함을 얻고, 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그의 경력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주요한 표준이 된다. 그 연구내용과 업적은 부차적인 것일뿐이다. 후지청학자들이 중년이 되면서, 체제화된 학술연구는 이미 관행이 됐다. 동료간에는 덕담만을 주고 받고, 조화와 평형을 추구하며, 각자 자기 몫을 챙긴다. (공무원 조직이 원래 그렇다. 중하급관원이 정확하게 당신의 연구에 대해서 가치를 평가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이미 정부의 손아귀안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서 매우 친근하게 당신의 가정생활과 건강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어본다. 유교, 선불교, 차도에 대해서 한담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거버넌스 기술의 정교화가 학자들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역으로 이런 구조는 등급화가 되고 심지어는 가부장제 형태로 틀이 짜여, 타파가 아주 어려워진다.
형식상 독립적인 사회과학 연구는 학력, 직책, 지명도 등 관련된 상징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는 이런 상징자본을 직접 장악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형성과 전환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 상징자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구조는 복잡한 사회과정이고, 자금을 투입하고 이익을 허락하는 것이, 이 과정속에서 아마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징자본도 결국 다른 자본과의 상호작용속에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가 학계의 인정을 받을 때 (예를 들어 발표를 하거나 상을 받는다) 직접 상금을 받을 수도 있고, 이 자체가 일정 정도 학술상징자본의 독립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로도 작동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정은 공정가격이 되고, 상품은 가격표가 달려야 계속 장사가 되는 법이다. 상징자본의 형성과 자본사이의 전환과정에서 층층이 쌓인 이익위탁대리관계가 다시 형성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학술체제화과정의 거의 정신분열적으로 보이는 면도 쉽게 이해가 된다. 이를테면, 정부는 대학이 서방사상에 침식당하지 않도록 저항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동시에 연구 성과가 서방의 인정을 받도록 격려한다. 어떤 대학의 규정은 외국의 저널에 발표하고 정부 지도자의 인정을 받은 연구는 모두 추가 보너스 점수를 얻게 한다. 구체적인 점수값과 이 점수를 인민폐로 환산하는 비율은 저널의 등급과 지도자의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의 연구가 정부의 관료를 기쁘게 하고 동시에 서양사람들의 칭찬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체제화된 학술관리는 두가지 모두를 필요로 한다. 관료는 자원의 공급을 결정하고, 서양 사람들은 체제에 합법성을 부여한다. 관료와 서양사람들 모두가 연구 바깥에 있는 인정 표준의 중요성으로 드러난다. 관료와 서양사람들의 공통점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는 서민들이 아니며, 그들의 인정이 인민폐로 환전가능하다는 점이다.
지청학자들이 추구하던 규범화와 후지청학자들이 직면하게 된 체제화는 당연히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것은, 규범화의 요구가 체제화에 제공하는 합법성이고, 최소한 이 것들이 우리들의 체제화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하고, 저항감을 줄인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규범화 자체는 원래 제한을 의미하지 않지만, 대신 일종의 독립성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회과학은 만일 사회의 기타부문과 유기적 연관성을 맺지 못하고, 누구를 위해 발언을 하는지, 누가 듣게 하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면, 형식상의 독립은 사실상의 고립이 되고, 쉽게 체제에 편입되어 버린다. 체제화가 바로 학술연구를 자족적인 시스템으로 만든다. 발전하면 할수록 인볼루션involution內卷 (역자 주 – 생산요소 투입이 늘고,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생산량이 늘다가, 그 성장 속도가 줄고 더 이상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으면서도, 돌파구가 생기지 않는 상황. 중국과 인도네시아 자바의 쌀농사 발전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표현)이 일어난다. 그렇게 닫힌 시스템은 스스로의 논리는 강화되지만, 그 생존은 더욱 외부자원에 의존하게 된다.
독립성은 확실히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가 20세기초에 결성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그 독립이라는 것은 정치와 사회에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독립된 학계에서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비판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이론’이었다. 연구소는 독일이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아마도 소련식 무산계급혁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신기원에 대한 기대와 충동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은 금방 실패로 돌아갔고, 나치가 등장했다. 이러한 반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 이론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혁신성은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강박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한 문제는 학계와 국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누구를 대표해서 국가와 상호작용할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반드시 인위적인 ‘탈규범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왜 규범화가 필요한지 분명히 하고, 규범화가 사상적 좀비가 입는 비단옷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체제화가 된 학술연구가 다시 유기적이고 자연적으로 하나의 장기적 투쟁과 탁마의 과정을 겪게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경험’이라는 이 범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아마도 도움을 줄 것이다.
20세기의 유럽은 사민당의 역사이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사회당은 존재가 사라졌고, 스웨덴의 사민당은 1당의 위치를 유지는 하였으나 무기력한 정당으로 전락하고, 유럽진보 정치의 중심이었던 독일 사민당(SPD)조차 소수정당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해진 가운데, 아래의 기사는 10월-11월간에 벌어지는 사민당 당대표 선출의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한국 내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은 유럽의 교훈, “사회적 정체성으로서 산업 노동계급의 감소, 노조 가입자 정체 및 더 많은 맞춤형 정책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녹색당, 포플리즘 정당 등 다양한 요구들이 좌파 정치조직의 과거 빅텐트(big-tent) 모델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달 바이에른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모습
9월 중순 화요일 밤, 독일 사회민주당원 수 백 명이 1960~70년대 독일을 이끌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의 동상을 지나 베를린 당사로 몰려들었다. 1964년부터 1987년까지 당을 이끌었던 브란트의 동상은 마치 그의 동료 당원들을 보호하듯 한쪽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새다.
참가한 당원들은 대강당에 자리했고, 곧 이어 남녀 7쌍이 무대 위에 올랐다. “검투사가 나타났다” 필자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속삭였다. 각 쌍은 당의 차기 당대표에 출마하여 한 때 브란트가 홀로 맡았던 역할을 둘로 나눠 가지게 됐다
“우리 당을 다시 노동자의 당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한 후보가 말했다. “사회민주당은 희망의 당이 돼야 한다”고 다른 후보가 말했다. 또 다른 후보자는 사회민주당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성향의 기독민주당으로 구성된 연합인 “대연정을 파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날 밤 대강당을 가득 채운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독일어 약자로 SPD)의 일원이 되기에 좋은 시기라고 할 순 없었다. 당의 전임 지도자 안드레아 날레스(Andrea Nahles)는 취임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지난 6월 대표직을 내려놨다. 사민당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또 다른 큰 패배를 맛본 바 있었다. 지난 2017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득표율은 20%로, 2000년대 중반 34%, 1998년 40%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수치를 보였다. 현재는 여론조사 지지율이 약 15%대로 떨어졌다. 한 때 독일 좌파의 지배적 목소리였던 사민당은 현재, 특히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녹색당에 자주 밀리는 형국이다.
잔존 지도부는 날레스 대표가 사임할 당시, 그녀의 후임은 대개 비밀리에 결정되던 것과는 달리 모든 당원들에게 공개되는 예비선거에 의해 선출될 것이며, 9월 베를린에서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포함해 전국적인 공개방송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이번 금요일 최종 투표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민당은 토요일 투표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독일 법에 따라 선출 대의원 회의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겠지만, 정치적으로 당원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당대표 투표는 당원과 당 기득세력 간의 싸움이 됐으며, 동시에 연정을 유지할지 여부에 대한 싸움이 되기도 했다. 많은 평당원들은 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맺은 타협을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만약 연정 “탈퇴”를 주장하는 후보 팀이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는 경우엔 연정이 붕괴되고, 내년 독일은 조기선거를 치르거나 소수당 정부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이 같은 후보자 명부의 경우, 사민당 투표는 당 역사상 유례없는 경우다. 노스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회 의원이자 연정을 탈퇴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인인 크리스티나 캄프만(Christina Kampmann, 39)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민당 역사에서 결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다. 새 출발,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다. 이번 예비선거는 누가 그런 변화를 실현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새 시대는 독일 사회민주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이 90년대 중반 평균 3분의 1을 훌쩍 넘어섰던 수준에서 최근 몇 년간 약 5분의 1로 줄었다. 프랑스 사회당과 같은 일부 정당들은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2017년 총선에서 프랑스 사회당의 득표율은 7.4%에 그쳤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같은 기타 정당들은 그보단 나은 사정이지만, 여전히 종종 선거에서 패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쇠퇴에 국가별 요인이 작용하긴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근본 원인이 정치구조에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중도좌파 유권자의 비율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사회 민주당은 점점 더 그들을 동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취리히 대학의 정치학자 실야 하우저만(Silja Häusermann)은 유럽사회의 분열이 전후 시대를 지배했던 경제 및 계급적 요소에서 이주 및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로 옮겨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문화적으로 보다 진보적인 세계주의자와 문화적으로 보다 보수적인 “사회주의자”를 갈라놓는데, 이 둘은 모두 한 때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유권자들이 가졌던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산업 노동계급의 감소, 노조 가입자 축소 및 더 많은 맞춤형 정책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녹색당, 포퓰리즘 정당, 극좌 정당의 부상 등 이 모든 것들이 좌파 정치조직의 과거 빅텐트(big-tent) 모델에 도전하고 있다.
쇠퇴의 압력 속에서 유럽의 많은 사회민주당은 대표직을 두고 벌이는 싸움과 당 진로에 대한 격렬한 싸움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재정정책과 경제부양 비법을 가지고 있는 포르투갈인이나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덴마크 사회민주당원이 제시하는 쇠약한 희망에 지나치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다.
뒤셀도르프 대학(University of Düsseldorf)의 정치학자 토마스 포군트케(Thomas Poguntke)는 유럽의 다른 정당들이 고려하고 있는 공개 예비선거의 경우 당 기반세력이 기득세력보다 더 온건하다면 완화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Matteo Renzi)가 2013년 비당원들에게 개방된 경선에 의지하며 좌파 지도부에 맞서, 사민당 내에서 중도 노선을 힘겹게 방어했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공개예비선거는 결과를 왜곡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같은 비정통 후보자가 선출되어 기득세력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극좌파 후보 브누아 아몽(Benoît Hamon)이 주류 선두주자인 마뉘엘 발스(Manuel Valls)를 제치고 사회당을 장악했다. 영국에서는 평화주의 사회주의자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2015년 3파운드에 표를 산 “기명 지지자들”에 의해 노동당 지도자로 선출됐다.
독일 후보자에는 제레미 코빈이 없다. 심지어 대연정 탈퇴를 옹호하는 사람들조차도 비교적 온건하다. 그럼에도 위험성이 높은 것처럼 대연정 탈퇴에 대한 지지율도 여전히 높다. 사민당 예비선거는 새 지도자 또는 정부를 떠나는 것 같은 단기적인 움직임이 당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요인을 고칠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느 쪽도 중도파 타협에서 멀어지면서 철저히 양극화로 다가가는 유럽 정치의 구조적 변동에 대해 고심하고 있지 않다.
이제 유럽 내 사회민주당의 미래는 누가 그들을 이끌 것인가 보다는 새롭고 지속적인 기반을 구축하도록 이끌 수 있은 인물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누구의 얼굴이 포스터에 그려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 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회민주당은 그 부분을 파악하지 못해왔다. (2019-10-26, 1차 개표결과 독일 사민당 당대표 선거에서 숄츠 재무장관이 1등을 차지했으나 과반수 미달로, 현재 숄츠와 대연정 파기를 주장하는 발터-보어얀스 간에 결선투표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며 11월 30일 경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다른백년).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붕괴에 대해 흔히 맥이 빠지는 기사 헤드라인 너머의 현실에서는 다행히 각국 정부들과 기업들이 세계무역기구(WTO)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 상소 기구의 기능 마비와 같은 부정적인 현안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지난 2년간의 발전이 이루어진 실제 분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들이 나서서 주도하는 한, 노력을 적절하게 이해함으로써 더 광범위하게 개혁하기 위한 건설적인 로드맵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는 위기 의식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생산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년 간, WTO 회원국 다수는 21세기에 무역 규범을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전자 상거래 협상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국가가 전자 상거래 협상에 참여하고 있고, 2019년 12월 10일에는 WTO 회원국들이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원칙(moratorium)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회원국들은 ‘규율화 된’ 수산업과 농업 보조금과 같이 전통적으로 다루기 힘든 쟁점에 대해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합의와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국내 및 국경을 넘어 투자와 서비스 제공을 촉진하고, 여성의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며 중소기업이 시장에 더 잘 진입하여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서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다고 해서 상황을 모른 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제력이 변화하고, 기후위기의 난제에 대처해야 하며, 기술 발전이 상업에 지장을 주고, 시민들이 점점 더 포괄적인 형태로 모두를 위할 수 있는 세계화를 요구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핵심 중 일부가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무역은 사람과 지구를 위해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전 세계 각국 정부는 이번 위기를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 현재 무역 분쟁이 ‘법의 지배’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상소 기구의 위기에서 야기한 시급한 과제를 넘어, 현재 정치의 역동성은 무역 시스템을 극적으로 개선할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
WTO를 향해 집중된 관심은 WTO 조직 구조와 책임 체제를 강화하여 시스템 내 신뢰를 구축하기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및 사업 단체의 참여 증진, WTO 과정 및 협상의 투명성 증대, ‘특별하지만 차등을 두는 방안’을 위한 증거 기반의 기준 확립은 시스템 신뢰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국의 정부는 현 시점에 기존의 WTO 규정들을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1990년대 초에 제정된 무역 규범은 갈수록 더 서비스 및 데이터의 흐름으로 특징되며 디지털 기술 및 글로벌 가치사슬로 가능해진 21세기 무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정부단위에서 기후위기, 지속가능성, 불평등과 같이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을 다룰 권한을 WTO에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독창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WTO가 세계화뿐 아니라 불만의 원인을 다루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만큼 WTO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특히 아시아 태평양의 몇 정부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나서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가 WTO의 세 기능(감시, 분쟁 해결, 협상)을 개혁하고 현대화하자고 제의했는데, 이는 정확히 국제상공회의소(International of Chamber of Commerce)가 요구해온 바이다. 호주의 복수국간 WTO 전자상거래 협상 촉진은 21세기 무역의 현실을 다루기 위해 규범 제정을 통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시이다. WTO 상소 기구의 교착 상태를 타파하기 위한 뉴질랜드의 핵심적인 중재 역할은 공로와 공감을 모두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2019년 12월 10일, WTO의 60 회원국이 규범에 근거한 다자간 무역 시스템에서 WTO의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역할을 재차 시인한 점은 고무적이다.
명백하게 정부 단위뿐 아니라 기업에서도 더 많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초소형 기업, 중소기업, 대기업을 포함한 기업체들은 지난 25년 동안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누려왔다. 세계 무역 시스템의 주요 사용자이자 수혜자인 기업은 WTO의 지지자가 되어 개혁 과정에 건설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리더십은 무역이 일자리, 환경,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정당하게 불평하는 일이 보호무역주의와 후퇴를 요구하며 역효과를 낳는 방향으로 변모되지 않도록 요구한다. 대신에 정부, 기업, 시민 사회는 무역 시스템이 사람들과 이 세상을 위해 작용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WTO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시기가 도래했다.
우리는 새로운 10년(decade)의 시작에 들어 왔다. ‘2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다수 사람들은 20년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 현대사에서 매 10년은 더 포괄적인 역사적 서술로 엮인 저명한 상징, 사건 및 주제로 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주어진 사건 또는 발견의 이면에 있는 요소들이 더 오래 지속되거나 깊이 뿌리 박혀 있을지라도 말이다. 예건데, 세계는 1940년대를 전쟁 및 파멸의 시기로, 1960년대를 반체제 문화 및 반항의 시기로, 1990년대를 새로운 ‘현대성’의 시기 등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2010년대를 어떻게 돌아볼 것인가? 필연적으로 역사는 항상 나중에서야 깨달음을 주기 때문에 현재의 대답은 불가피하게도 미완성이다. 우리는 세계가 아직 이루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미래 역사가들이 회고할 수수께끼에 오늘날의 사건들이 어떻게 ‘들어맞을지’ 확실히 예상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2010년대의 10년사가 1991년에 구축된 ‘자유주의적 합의’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대로 개념화되어 역사의 예비 전환점(preliminary turning point in history)으로 회고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통합 및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꿈이 흐지부지 사라졌다.
온라인 대중 매체가 부상하면서 사회가 극적으로 변화하도록 촉진되었고, 성난 반체제 정치 및 정체성 갈등이 뒤끓던 서구에 새로운 형태의 불만을 매개했다. 세계화는 역행했고, 10년이란 시간은 한 때 역사에 국한된 것으로만 여겨졌던 거대한 패권 경쟁이 재현됨에 따라 결국 퇴색되었다.
2010년대는 ‘소셜 미디어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정식으로 출시된 시기는 그보다 10년 전이지만,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및 기타 미디어는 스마트폰이 등장함에 따라 세계 문화로 확고히 통합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최근 몇 년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바로 이 장치 곧 스마트폰은 수십억의 인생을 영구적으로 바꾸었고 기존에 시간 할당제로 편리함을 주었던 인터넷을 일상 활동 자체의 본질적 요소로 이에 맞게 편리해질 수 있도록 탈바꿈시켰다. 소셜 미디어는 그 자체가 없는 상황을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 사회에 융합되었다.
결과적으로 대중 소셜 미디어의 부상에는 심오한 정치적 영향이 있었다. 기존 언론매체를 벗어나,이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견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새로운 플랫폼과 방식이 생겼다. 그 동안 자주 소식을 접할 수 없던 사람들도 오늘날에는 수백만 명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신문, 텔레비전과 같은 전통적인 매체를 넘어 사람들의 정보원 및 연락망이 다양해졌다.
자연스레 이러한 매체가 없었다면 사회에서 고립되고 소외되었을 이들이 새로이 불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2008년 서양 국가들에서 벌어진 금융위기라는 사건과 뒤따른 긴축 재정에 대해 사람들이 소식과 견해를 공유하면서 분노하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정치가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정치가 양극화되고, 좌파 및 우파의 새로운 움직임이 대중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1991년 이후의 소위 ‘자유주의적 합의’가 산산조각이 났다. 새로이 부상한 포플리즘 운동은 현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엘리트 계층과 권력 계층을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전세계 곳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선거 결과를 야기했다. 이제 ‘중도 정치’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2010년대는 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등으로 기억되는 시대가 되었다. 확실하게 인지된 세계화의 불확실성 속에서 급속히 형성되는 대중의 불평을 무기 삼아 나타난 현상들이다.
미국 내 변화는 지정학적 파급력을 지닌다. 이른바 1991년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서구의 승리가 더 이상의 영향력을 상실하자, 변화하는 세계를 중심으로 엄청난 불안과 불확실성이 자리잡았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문제, 불평등 및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새로운 희생양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부상하는 포플리즘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두려움이 조직적으로 자리잡도록 악용하였다.
미국 엘리트 계층은 트럼프 대통령의 부상이 러시아의 잘못이며 모스크바가 소셜 미디어의 거대 기업을 활용하여 편집증을 유발시켰다고 비난했다. 이런 대외 의혹 풍토 속에서 정작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중국에 대한 공포와 미국의 ‘강대국 패권 경쟁’의 부활을 조성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라는 문구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2010년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것은 2010년대가 불확실성과 불안정의시대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고 시사한다.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으로 소셜 미디어 문화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성난 포플리즘적 민족주의로 변모한 서양사회에 새로운 불안정을 초래했다.
미국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점점 더 편집증적이 되었다. 이후 미국은 공격적으로 두려움을 유발하고 지정학적 투쟁을 추구하며 오랫동안 유지된 팍스-아메리카나를 여전히 갈망함으로써 실패로부터 벗어나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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