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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병합’을 기념한 침략의 주범들 – 「한국병합기념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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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병합’을 기념한 침략의 주범들 – 「한국병합기념화보」

admin | 수, 2020/08/26- 00:23

[소장자료 톺아보기•18]

‘한국병합’을 기념한 침략의 주범들
– 「한국병합기념화보」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오사카신보大阪新報>가 제7666호 부록으로 제작한 「한국병합기념화보」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한 달 후인 1910년 9월 28일에 발행된 화보로 일본 내각의 주요 인물과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 메이지‘천황’ 무쓰히토의 사진을 중앙 상단에 배치하였는데 ‘메이지明治’의 이름을 생략하였다.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성스러운 천황의 이름’이라 표기하지 않고 비워 둔 것이다. 바로 밑에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다. 태황제인 고종을 ‘이태왕’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표기했다. 이는 일본이 병합과 동시에 한국의 황제·황족을 왕족·공족으로 전락시키고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이어온 조선왕조를 패망시켰음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표기한 것이다.
메이지 사진 양측에는 조선침략에 앞장선 주요 인물들과 병합의 공로가 있는 조선의 인물을 배치하였다. 우측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필두로 ‘소야만국小野蠻國’이라며 조선을 멸시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정한론의 중심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명성황후를 살해하고도 무죄를 확신한 극악무도한 범죄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의병 대탄압을 지휘하고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등 32명의 인물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좌측에는 을사늑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이익선 보호’라며 조선 침략을 주창한 일본 군부 세력의 거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강제병합을 자랑하고 무단통치를 감행한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금융지배를 확립하고 ‘한국병합기념장’ 수여받은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와 ‘일본의 보호정치는 한국의 이권’이라고 주장한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가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실려 있다.
이들 사진 밑에 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조선왕실 종친들, 개화파 김옥균과 박영효,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을 주도한 이완용, 이지용 등 주요 관리들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렇게 하여 강제병합과 관련된 일본의 주요 인물 57명, 유일한 외국인 스티븐스, 조선인 주요인물 17명 등 총 75명의 강제병합 주역들이 화보 상단을 채우고 있다. 화보의 하단에는 조선 13도를 그린 지도를 싣고 있는데 금, 은, 동, 철 등 조선의 지하자원 분포와 담배, 면화, 목화 등 재배 식물과 철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의 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와 함께 ‘일한연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내용이 기가 막히다. 한일관계를 ‘숭신천황 65년 7월, 임나국任那國의 소나카시치蘇那曷叱知가 조공을 받치면서 시작되었다.
’고 하면서 ‘신공황후가 여러 제국에 명하여 배를 타고 삼한 정벌’을 감행한 결과로 기술하고 있다. 주
로 일본이 한반도를 정벌하거나 조공을 바쳐온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데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고 강화도 개항의 시초인 운요호 사건, 청일·러일전쟁으로 맺은 각종 조약의 과정들을 기술하였다. 연표의 마지막은 ‘명치 43년 8월 29일 한국병합을 달성하여 관보 호외에 발표’한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는데 연표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에 1909년 12월 말 통계조사에 따른 ‘조선국세일람’으로 조선의 면적, 인구, 재정 현황, 중요 생산액 등의 정보를 실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를 발행한 <오사카신보>는 오사카에서 발행된 3대 신문 중 하나로 1900년 9월 15일에 결성된 입헌정우회의 기관지이다. 입헌정우회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재를 맡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당으로 한때 3·1운동 탄압을 총지휘한 하라 타카시原敬가 사장이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에도 등장하는 하라 타카시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이번 사건을 국내외에 극히 가벼운 문제로 알리되 실제로는 엄중한 처치를 취하고 재발방지를 기하라’는 훈령을 내린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었다.
202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지 11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강점기 징용문제, 일본군 성노예문제 등 아베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은 「한국병합기념화보」에 실려 있는 침략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파렴치한 저들의 행보를 끝까지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해방 후 75년이 지나도 지속되고 있는 저들의 가해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1910년 8월 29일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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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6

01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1학년용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1915) 표지와 본문>

 

10월 9일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날, 바로 한글날이다. 올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세종 28년, 1446년) 지 571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국기’로, 그것도 ‘국어’의 지위를 빼앗긴 ‘한글’로 배우는 참담한 시대를 보여주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제1학년용 ????보통학교조선어와한문독본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교과서이다.교과서는한사회의교육이념을반영할뿐아니라그 사회의 구조 및 지식 발전 정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189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국민소학독본????으로알려져있다.이 시기한성사범학교령,소학교령을공포하고한성사범학교 규칙과 소학교 규칙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8년에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을 공포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이 담긴 교과서들을 판매 금지시키는 한편,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국어’라는 명칭 대신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하고, 대부분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기술하게 했다. 이로써 ‘조선어’와 ‘한문’ 과목 이외의 대부분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편찬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일제의 충성스러운 제국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은 바로 이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조선총독이 모든 사항을 관할했다. 1911년 9월부터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우리말이 ‘조선어’로 일본어가 ‘국어’로 바뀌었으며, 일장기를 ‘국기’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이른바 ‘교육칙어’를 근거로 식민화 교육을 본격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독본????과 ????국어[일어]독본????은 식민정책을 알리고 시행하는 교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철자, 어휘, 절과 문장 학습, 글 읽기’ 등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좀 더 체계적인 모습을 띠게 되나,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나 애국적인 내용은 모두 빠지게 된다. 그 대신에 주로 상식과 관련된 설명문, 우화 등의 이야기, 서간문, 속담, 노동, 수필, 문학 작품, 예절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총 120쪽에 84과(課)로 구성된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은 기본적인 한글체계인 모음을 제1과로 시작하여 자음과 단어 연습, 짧은 문장, 수와 관련된 글자를 ‘조선어’와 ‘한문’을 혼용하여 설명했다. 가족관계, 신체, 시계 등 간단한 단어를 시작으로 예절, 국기, ‘천황’ 등 ‘예절과 도덕’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식민치하의 특수한 상황에서 강요된 규율과 지침이었다. “황국 신민다운 자질과 품성을 구유(具有)케 해야 한다.”는 일제의 교육목표처럼, 도덕과 예절은 식민지민으로서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특히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병참기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대두된 ‘대동아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반영되었다. 따라서 일본을 중심으로 황국 신민화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소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의 단선 학제를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언어도 ‘국어’로 통일하여 조선어 말살정책을 실행하였다. ‘조선어 말살정책’은 1937년 이후 학교, 병영, 관공서, 사회 전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실행된 정책으로 이른바 ‘국어상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를 반영한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바꾸어 사실상 폐지하였다. 이로써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조선에서의 ‘나랏말’ 교육은 사라져 버렸다.

∷ 강동민 자료팀장

목, 2017/10/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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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9

01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교제관시보이던 하야시 부이치의 유고 사진집 <조선국진경> (1892)의 표지

 

02

1882년 재동에 설치된 ‘외아문’의 대문 모습. 대문 기둥에 걸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또렷하다.

03

‘기보포정사’라는 편액이 내걸린 경기감영 대문의 모습

 

04

서울 남산에 있던 일본공사관 구역 안에서 외아문 독판 민종묵(한복 차림)과 서울주재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청국주차조선총리 위안스카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선국진경>을 남긴 일본공사관원 하야시다.

 

돈의문(敦義門)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오른쪽에 이태호(怡泰號)의 각색점(各色店)이 있고 남쪽으로 붙어서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 씨의 우소(寓所)이며 이어서 법국이사관(法國理事官)의 공서(公署)가 된다. 왼쪽에 아라사와 미국 양국의 공사관이 있으며 또한 좌우로 미합중국 전도사 여러 사람의 거택, 부인병원(婦人病院), 여학교 및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이곳에 있는데, 모두 합중국 전도사의 감독에 관계된다. 독일상(獨逸商)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지점과 아울러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도 역시 이곳에 있다. 미공사관의 남린(南隣)은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이며, 그 안쪽에 영국총영사관이 있다. 거기에 상림원(上林苑)의 뒤편 작은 언덕에서 시가를 내려 보면 조망이 아름답다. 독일제국영사관은 왕성(王城)의 동방 안동(安洞)에 있으며 우리 공관(일본공사관을 말함)의 정북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1891년에 발행된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제 막 서양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정동 일대의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각국 공사관의 위치는 물론이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이나 근대식 공립학교의 효시로 일컫는 육영공원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남긴 이는 일본공사관의 관원이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로, 이 책 말고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사진첩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군소주계(海軍少主計, 경리장교) 출신으로 1888년 7월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로 서임되는 동시에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발령받아 그해 8월부터 1891년 10월까지 서울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 후 3년 만기 근무의 대가로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892년 1월에 재차 임시파견의 명을 받아 조선 각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던 차에 그가 승선한 이즈모마루(出雲丸)가 그해 4월 5일 전라남도 소안도 앞바다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에 일찍이 사진기술을 익힌 그가 평소 여가를 활용하여 담아낸 120여 장의 조선 관련 사진자료 가운데 이를 선별하여 그의 처 하야시 카메코(林龜子)가 유고 사진첩으로 묶어낸 것이 바로 ????조선국진경????이었다.
이 사진첩에 수록된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서울 도성의 각 성문을 비롯하여 경복궁 광화문과 창경궁 홍화문, 그리고 동묘 남묘 세검정 영은문 남한산성 등과 같은 여러 문화유적의 옛 모습이 담겨 있다. 대개 익숙한 풍경이긴 하지만, 그의 조선주재 시기에 비춰 촬영시점이 명확하게 파악되므로 이들 유적의 원형고증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정동 일대에 포진한 각국 공사관의 전경은 물론이고 용산과 마포 일대의 강변풍경과 부산, 인천, 강화 등지를 포함하여 저 멀리 거문도와 제주도의 풍광까지도 두루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남산 부엉바위약수터의 모습이라든가 초가집에 파묻힌 원각사탑(지금의 탑골공원 자리)과 조대비(익종비)의 장의행렬과 같은 이색적인 장면도 담고 있다.
또한 이 사진첩의 강점은 여느 사진자료에서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공간들의 모습을 다수 채록해두고 있다는 점인데, 예를 들어 훈련원 청사와 하도감의 전경, 그리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라든가 경기감영의 대문 사진 등이 그것이다.
흔히 ‘외아문(外衙門)’으로 불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개항기의 외교통상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882년 12월에 재동에 있는 민영익의 집터(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치한 중앙행정기구이다.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외무아문(外務衙門)’으로 고쳤다가 다시 1895년 7부 편제로 전환할 때 ‘외부(外部)’로 개칭되며, 그러다가 1896년 6월에 이르러 광화문 앞 옛 이조 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요컨대 ‘외아문’은 세계열강과의 교섭이 본격화하던 시기에 이들을 상대로 한 외교업무를 전담했던 주요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기관에 관한 사진자료는 퍼시벌 로웰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885)에 수록된 단 한 장의 사진을 빼고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바로 하야시가 남긴 이 사진첩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는 외아문의 대문 모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진의 희소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것 말고도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라고 새긴 편액이 달린 경기감영의 대문 모습도 크게 눈길을 끄는 사진자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보’는 경기도를 가리키며, ‘포정사’는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으뜸 관아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따지고 보면 ‘경교장’이라는 명칭의 어원도 바로 이곳 경기감영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이곳의 옛 모습은 대개 1902년 한성부 청사가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의 것만 더러 남아 있을 뿐 명실상부하게 경기감영 시절의 것은 제대로 구경해 보질 못했다.
일본공사관원이던 하야시가 짬짬이 채록한 이러한 사진자료들은 애당초 점차 자기네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되고 있는 ‘잠재적 식민지’ 조선에 대한 충실한 정보보고의 용도로 제작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우리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땅의 옛 모습을 사진자료로나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는 셈이다. 마치 일제가 문화침탈을 위해 제작 배포한 ????조선고적도보????가 오늘날 유적지 복원의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제작된 근대 사진첩의 양면성은 대개 그러한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1/2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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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화가가 그린 원태우 지사의 투석 장면이 묘사된 삽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 1905년 12월 8일자)

 

원태우 지사의 항거에 대한 삽화와 단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자)의 표지이다.

 

의거터 표석 자리에서 보이는 경부선 철길의 모습

 

안양 관악역 인접지(승강장 북단에서 25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의 모습이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4명의 범인이 포박되어 그 중에 2명이 자백했다는 급보가 날아들게 된다.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 (1905년 12월 8일 발행)에는 이날의 상황을 묘사한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의 삽화 하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민소(憫笑, 가엽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의 설명문에도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農民)으로, 대사(大使)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항거의 의미를 축소하는 어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잡지의 본문에 게재된 「대사(大使)의 조난(遭難)」이라는 짧은 글에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토 대사는 22일 하야시 공사 등과 더불어 수원부에 사냥을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부철도의 열차를 타고 오후 6시 안양정거장을 발차하자마자 이내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진자가 있어, 돌이 유리창을 깨고 후작(侯爵, 이토)의 얼굴을 덮쳤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협약(協約, 을사조약)에 불평하는 폭한(暴漢)의 소행일 거라는 말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한제(韓帝, 한국황제)는 이 사변에 대해 매우 심통(心痛)하여 23일 오전 2시 예식원경(禮式院卿) 이근택(李根澤, ‘이근상’의 오류)을 대사의 여관 대관정(大觀亭)에 보내 정중한 위문(慰問)을 겸해 사의(謝意)를 표하도록 했으나, 대사는 어제 저녁의 일은 본디 아희(兒戲, 어린아이 장난)와 같은 것이었고 또한 부상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일도 아니었기에 결코 깊이 존려(尊慮)를 기울여 주실 일은 아니라고 답주(答奏)하였다. 이 폭한은 그날 밤에 포박 되었는데, 과연 취한(醉漢)의 악희(惡戲, 고약한 장난)로 추호(秋毫)도 고의(故意)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이토 대사가 매우 대범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인물인 듯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예식원경 이근상의 사죄 방문에 이어 그날 아침이 되자 궁내부대신 이재극(宮內府大臣 李載克)이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사죄와 위문을 뜻을 전하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상황이 이어졌는데, 한껏 쇠잔해진 국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참으로 서글픈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처리 결과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에 수록된 「이토대사 탑승열차 위해범 원태근 조치 건」 제하의 문건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선고서(宣告書)
경기도 과천군 안양시장(安養市場) 22통 호 불상(不詳)
원태근(元泰根) 당 22년

피고는 명치 38년(1905년) 11월 22일 동 시장의 이만여(李萬汝) 외 2명과 함께 일가(日稼, 날품팔이)를 위해 영등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마신 결과 약간 술에 취하여 동일 오후 6시 17분 경 경부철도 안양역 서북방 약 8백 미터 안양 부근에서 북행열차가 진행하여 오는 것을 보고 마침 가지고 있던 작은 돌멩이를 선로 위에 놓아두는 것을 동행자인 이만여가 이를 제지하여 스스로 이를 치워버리자 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주먹 만한 크기의 화강석(花崗石)을 주워 객차를 향해 던졌기 때문에 차창이 파괴되어 당시 차 안에 있던 승객 한 명에게 미상(微傷)을 입히게 하였다.(중략)
이상 피고의 행위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 제4조 제9항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정상작량(情狀酌量)하는 것으로 함에 따라 군율위범심판규정(軍律違犯審判規定) 제6조에 의거하여 감금(監禁) 2개월, 태(笞) 1백에 처한다.

명치 38년(1905년) 11월 25일
한국주차헌병대장 오야마 미츠키(韓國駐箚憲兵隊長 小山三己)

 

<각사등록 근대편 자료>에 수록된 「조회(照會) 제25호(외부대신 발신, 의정부 참정대신 수신, 1905년 7월 10일)」에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의 세부사항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확인해보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4조 제9항은 “아군(我軍)의 징발(徵發)에 응(應)함을 거(拒)하고 우(又) 방해(妨害)한 자(者)”로 표시되어 있다. 달리는 열차에 돌멩이를 던진 사안과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으므로, 요컨대 선고서를 작성할 때 군율의 해당 항목을 잘못 인용 기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돌을 던진 한국인의 이름이 ‘원태근’으로 적혀 있지만 호적자료에는 그의 정체가 원태우(元泰祐, 1882~1950)로 기재된 것으로 확인된다. 원태우 지사는 이때 혹독한 구타로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면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한국전쟁 발발 시기에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행적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1990년에 이르러 겨우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그 결과 뒤늦게 ‘원태근’이라는 이름 아래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금, 2019/02/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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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25]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 강동민 자료팀장

 

 

<애국 제10 조선호> 엽서, 14.1×9.1 식민지 조선에서 ‘국방헌납운동’으로 전개한 모금으로 일본에 최초로 헌납한 비행기. 기종은 주로 사격관측과 연락에 사용하는 정찰기(偵察機)다.

 

‘애국 제10 [조선]호’ 명명식 장면, 매일신보 1932년 4월 18일자 2면 1932년 4월 17일 오전 11시, 애국기 헌납식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우가키 조선총독을 비롯해 총독부 주요 관료, 군사령부 수뇌부와 함께 한상룡, 윤치호 등 친일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애국기와 보국기 목록, <방공독본>, 1933 ‘제10호 조선’과 ‘제20, 21호 조선’이 표기되어 있는 <방공독본>. 번호와 기종, 헌납자(지역)가 기재되어 있다. 일본은 물론 조선과 타이완 등 식민지에서 비행기가 헌납될 때마다 순서대로 호수와 이름을 붙였다.

‘애국 제10 조선호’, <한국백년>, 동아일보사
‘1936년 5월 15일’은 오기다. 다만 1932년 5월 15일 오전 10시, ‘제20, 21호 조선호’의 명명식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거행되었고 기념엽서에도 이 날짜의 엽서인(印)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참고하여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애국 제10 조선호’, <한국사>,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에 잘못 기재된 사례. ‘애국 헌납기 1444호’는 지역명이 붙여진 ‘경기시흥’호이다.

‘애국 제1444(경기시흥)호’ 전투기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왼쪽) ‘애국 제133(경성제1)호’ 소형연락기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오른쪽)

‘애국 제10, 제20, 제21 조선호’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

‘보국 제73(문명기)호’(文明琦號), <시정25년사>, 1935 일본인 유력자들과 행정기관장을 중심으로 시작된 애국기 헌납운동은 문명기가 ‘1군郡 1기機 헌납운동’을 주도하면서 조선인의 애국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는 1934년 자신이 경영하던 금광을 일제의 주선으로 미쓰코시三越 재벌에게 12만 엔에 인계하는 대신 1935년에 육군기(애국기)와 해군기(보국기) 각각 한 대씩을 헌납하는 비용인 10만 엔의 국방헌금을 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친일 부호들이 경쟁적으로 국방 헌납에 참여했다.

(광고)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조일신문(남선판)>, 1944년 7월 9일 4면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와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이 비행기 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당시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와 사업부장,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과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로 재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사히신문에 기명 광고를 게재해 비행기 헌납을 선동하기도 했다.

 

“여러분의 적성으로 된 애국 제10호기 조선호가 도착하였습니다. 아울러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여러
분께 깊이 감사를 올립니다.”
– <매일신보>, 1932년 4월 15일자 2면

1932년 4월 14일 정오 무렵, 경성 하늘에 이와 같은 오색(五色) 선전문을 뿌리는 비행기 한 대
가 나타났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헌납기’ 조선호가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호는 경성 상
공을 한 번 돌더니 조선군사령부 수뇌부와 체신국 간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여의도 비행장에 곧
착륙을 하였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하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한편, 부
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방헌납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가
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애국기 헌납’이다.
‘애국기’는 지역민이나 기업, 단체 그리고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를 일컫
는데 육군용은 애국기(愛國機), 해군용은 보국기(報國機)라 불렀다.
‘애국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는 기종에 따라 1대에 최저 6만 원(현재 약 6억 원)에서 2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이 필요했다. 따
라서 부호 몇 명의 힘으로 충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 조직과 단체를 동원한 모금운동
이 조선 전 지역에 벌어졌다.
일본인 유력자와 행정기관장이 나서서 ‘애국기 헌납 운동’을 시작한 후 ‘1군(郡) 1기(機) 헌납
운동’을 주도한 문명기를 필두로 조선인 헌납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애국기 헌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연수, 문명기, 최창학, 김용주 등 조선인 부호들을
비롯해 부·도·군민 등의 지방단위, 학교나 종교단체, 전쟁협력을 위해 조직된 관변·동원단체 등
다양한 개인과 단체가 애국기 헌납운동에 참여했다.
전쟁이 확대될수록 일제는 물자공급과 항공전 수행을 위해 더 많은 비행기 헌납을 요구했다.
일반인은 물론 초·중등학생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애국부인회를 이용하여 국방헌금을 위한 바자
회를 개최했으며 심지어 기생들의 화대까지 ‘애국기 헌금’에 동원되었다. 일제는 연일 ‘미담사례’
를 홍보하고 헌금액과 헌금자의 명단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일본의 패배로 끝난 1945년까지 식민
지 조선인의 피와 땀의 강요로 헌납한 ‘애국기’는 수백 대에 달했다.

목, 2021/04/29-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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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9]

식민지 지배의 선전물, 관제엽서

– 「조선체신사업연혁사 朝鮮遞信事業沿革史」

 

체신국의 사진엽서는 초기에 통감의 취임 기념엽서가 주를 이루었다가 1910년 강제병합 이후는 ‘시정’기념엽서, 통신사업기념엽서 등 조선총독부의 ‘근대화’에 관한 사진엽서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1930년 이후에는 비행기, 전투 전략과 같은 전쟁 관련 이미지가 인쇄된 사진엽서가 발행되었다.

 

<조선체신사업연혁사>에 수록된 사진은 철도와 수로 등 근대화된 교통시설, 개선된 사업 환경, 신식 시설물 등이다. 관제엽서를 정치적 선전의 수단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38년 2월 10일, 우편·전신·전화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조선체신사업연혁사>이다. 1914년에 발간한 <조선통신사업연혁소사(朝鮮通信事業沿革小史)>를 증보, 개정하여 1935년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기념’ 및 ‘조선체신의 날’ 제정 기념사업의 하나로 엮은 책자이다.
<연혁사>는 먼저 체신국장 야마다 츄지(山田忠次)의 머리말과 역대 체신국장, 체신훈(遞信訓), 조선체신가와 조선체신행진곡을 시작으로 본문은 3부로 구분할 수 있다.
1부는 대한제국시대의 우표 5쪽 37매와 기념우편그림엽서 20쪽 65매, 기념특수통신 날짜도장(記念特殊通信日附印) 9쪽 96종, 명소(名所)의 스탬프 12쪽 87종, 체신국 건물 사진을 시작으로 30쪽에 걸친 우편통신관계의 건물·인물·사진 수백 매를 수록하고 있다.
2부는 체신사업의 현황과 연혁을 서술한 부분으로 제1편 사업의 연혁을 시작으로 체신기관, 통신사업 시설, 통신업무 상황, 우편위체(郵便爲替) 저금사업, 조선 간이생명보험사업, 항공사업, 해운사업, 전기사업, 와사사업(瓦斯事業), 체신사업의 선전, 사업의 경리, 토지와 건물 등 472쪽에 걸쳐 조선체신사업연혁사를 정리해 놓았다.
3부는 각종 체신사업의 성과를 22매의 화려한 통계표와 그래프로 보여준다. 19l0년에서 1934년까지의 통신기관 및 체신종업원수, 우편물수, 전보통수, 전화도수 및 가입자 수, 당시 조선의 통 신현황, 라디오 청취자수, 우편위체금액, 우편저금 액수, 우편진체저금 액수, 조선 간이생명보험도별 계약건수 분포도, 전기사업, 전등전력 수요, 항로 표지, 등록 선박 수 등을 수록하고 있다.
<연혁사>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관제엽서이다. 일본은 메이지시대부터 사진을 이용하여 각종 시각 매체를 통해 통치정책을 홍보하였는데 관제엽서 또한 그중 하나였다. 사진그림엽서가 정보전달 매체의 역할을 넘어 팽창하는 일본제국주의를 선전하기 가장 좋은 매체로서 활용도가 높았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조선 근대화의 선전 및 자원 수탈의 정당성을 굳혀나갔다.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가 시작됨을 경축하는 시정(始政) 기념엽서를 발행해 ‘조선병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동시에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엽서는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성상 선전 효과가 크고 ‘엽서’라는 실용적 용도에 힘입어 보다 은밀하게 제국의 정책을 선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조선총독부 관제엽서의 주요 사진은 식민통치에 의한 근대화를 홍보하거나, 진구황후와 ‘삼한정벌’설과 일선동조론, 내선융화 등 동화이데올로기를 내세웠다. 대부분의 관제엽서가 식민통치의 치적을 입증하는 사진을 선별하여 구성했는데, 이는 조선 민중의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거센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전략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즉, 일제의 관제엽서는 ‘실용성’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대중들에게 손쉽게 다가갔고, 식민정책 현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을 이용함으로써 그 효과를 증대시켰다.
그러나 ‘근대화’를 표상한 엽서들은 역설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수탈’, ‘강제동원’ 등을 나타내는 기록물이다.
‘시정’을 홍보하기 위한 관제엽서는 식민지 통치 전과 후의 조선을 보여주는데, 정비된 설비 및 공장의 모습, 체계화된 유통 환경의 이미지는 조선총독부의 법령에 따라 시행되었던 조선 개발 사업의 근대화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수탈적 행위를 은폐하고 일제에 의한 조선의 경제성장을 보여줌으로써 식민지배의 합리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또한 1930년대부터 발행된 침략전쟁 관련 관제엽서는 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에게 ‘황국신민’으로 전쟁에 나서라고 강제하고 있다.
이렇듯 관제엽서 속의 이미지는 대중성을 가진 엽서라는 통신 매체와 결합하여 권력의 의도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재현의 도구이자 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목, 2020/09/24-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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