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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통치자들은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 – 은뢰恩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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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통치자들은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 – 은뢰恩賴

admin | 월, 2020/07/27- 20:18

[소장자료 톺아보기•17]

조선의 통치자들은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 – 은뢰恩賴

 

조선신궁어진좌10주년기념 <은뢰> 표지

 

<은뢰>, 발음부터 어렵다. 뜻은 ‘천황’의 위엄한 자태 또는 존엄한 ‘천황’이 내려와 온 세상에 가득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목부터 이 책자의 편찬 방침이 ‘천황의 은혜’가 곳곳에 미쳐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시각적이고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은뢰>는 1937년 11월 조선신궁봉찬회에서 조선신궁 건립 1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사진첩이다. 따라서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하는 조선신궁의 모습을 중심으로 조선의 자연, 문명, 모성, 의례 등 350여 점의 사진 이미지 삽입, 총 338쪽으로 구성하였다. 책자의 크기는 가로 26cm, 세로 36.5cm
이며 재질이 좋은 종이를 사용하여 고급스러움을 추구했다. 비매품인데도 불구하고 발행년도를 달리하여 여러 쇄를 찍었는데 배포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조선을 통치하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증정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은뢰>의 소장처는 독립기념관과 연세대 등 몇몇 대학도서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데 인쇄 수량에 비해 발견된 것은 많지 않다. 연구소는 수집본과 기증본(즈시 미노루) 총 2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모두 1940년 판본이다.
<은뢰>는 총설편, 제1편~제5편,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설편에서는 신궁의 창립 유래와 진좌제 등 조선신궁을 개략적으로 소개한다.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내선융화’의 정서를 시각화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제1편~제5편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11년을 11개의 장, 5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각 장마다 해당 년에 일어난 사건과 각종 의례 등을 기록해 연보적 성격을 보여 주는데 각 지역의 신사와 명승고적 및 메이지 ‘천황’의 제사를 고르게 배치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실체는 사진첩에 나타내지 않고 있다. 대신 인간의 모습이 아닌 신성한 자연으로 표상된다. 나무, 해, 구름, 빛 등 자연의 모습을 신비로운 광경으로 이미지화하였다. 또 경성 전역의 야경 사진과 제신의 신체를 싣고 달리는 기차 등의 이미지를 통해 ‘천황’은 조선에 문명을 가져온 상징으로 표상되었다. 이러한 상징 기법은 “조선의 산천 가득히 생생한 발전모습이야말로 진실한 신광(神光)의 현현(顯現)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호도 ‘은뢰’ 즉 ‘천황의 은혜’”이며 “조선 전역 곳곳에 부는 신풍(神風)”과 함께 “내선동근(內鮮同根)의 사상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몽환적 분위기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은뢰>는 기념사진집의 성격과 함께 식민통치의 이념을 정서적 차원에 호소하는 선전물이다. 식민통치권력이 ‘사진’이라는 시각매체를 통해 식민통치의 역사를 기록하고 스스로 어떠한 판타지를 꿈꾸며 그것을 선전하려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강제병합을 하자마자 대한제국의 국가제례를 폐지하고 일본의 국가신도로 대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신궁 건립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메이지 ‘천황’과 일본 황실의 선조로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제신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조선신궁은 국가신도의 제사뿐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주요 시정과 행사를 알리는 의례 공간이 되었고 공식행사에는 반드시 이왕가를 참여시켰다. 또한 조선신궁은 조선 및 경성 관광 코스의 하나로 반드시 포함시켰으며 황국신민화정책이 전면화되면서 모든 학교와 단체의 공식적인 신사참배가 이뤄지는 내선일체의 공간으로 자리잡는다. 이들에 대한 참배는 결국 일본 황실의 조상을 섬기고 일제의 조선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었다. 신사 참배는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하려는 상징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 이후 민중이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이 바로 조선신궁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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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8]

 

해방이 아닌 침략 구호, ‘대동아공영권’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1년 일본에서 제작한 <대동아공영권지도大東亞共榮圈地圖>이다. 일본의 산업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가정의 빛(家の光)????이 창간한 지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록으로 발행한 지도다.
지도는 일본과 일본의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선과 항공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의 적이 본토를 폭격하는 가상도를 최상단에 배치하고 아래로 일제가 꿈꾸었던 대동아의 인구, 면적, 일본인 진출 수 등 각종 통계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직접적이고 전격적인 군사점령 대신 ‘함포외교(Gunship Diplomacy)’라는 우회 침략의 방식을 취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과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등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유혈 진압하면서 마침내 한반도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1910).
일본의 야욕은 이에 멈추지 않고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다. 쇼와(昭和)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군부는 ‘황군(皇軍)’을 자처하며 군국주의로 나아갔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몽고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주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여기에 대공황에 따른 정치·경제적 위기를 타개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결합하면서 군부의 모험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개전 두 달 만인 11월에 벌써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다음해인 1932년 3월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점령지역 철수를 권고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면서 노골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1937년 7월 일본은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군사충돌을 유발한 뒤, 중국본토를 침략했다. 순식간에 베이징, 톈진을 함락한 일본군은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의 인명을 살육하며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三光)작전’을 펼쳤다(난징대학살).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본은 전쟁물자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과 영국이 장제스 국민정부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경제 제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일본은 새로운 자원공급처가 절실하게 되었다. 결국 유럽 각국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빼앗기 위해 인도차이나(프랑스령) 침공했다. 이에 앞서 일본내각에서는 국책요강으로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결정하고 이를 전쟁확대의 명분이자 전쟁동원체제 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가 단결해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전쟁을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팔굉일우(세계를 ‘천황’ 아래에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정신을 바탕으로 각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
할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총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침략전쟁의 지속을 위한 인력충원과 물자 보충도 절실해져 갔다. 각종 전쟁물자를 양산하고 군사시설 등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군대의 경우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했으며 전투를 수행하는 현역 군인을 대신해 각종 군사 업무를 볼 민간인(군속)도 필요했다. 이러한 인력 수급문제는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젊은 여성의 징발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시체제 아래 조선 민중들은 오로지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을 위해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고 쥐꼬리만큼 떼어주는 배급품을 가지고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19/10/29-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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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28]

다색판화로 보는 청일전쟁

 

• 강동민 자료팀장

1. 대일본해륙군조선상륙도 大日本海陸軍朝鮮上陸之圖
일본군 제1진 해군 육전대가 전함에서 상륙정으로 갈아타고 인천에 상륙한 모습을 묘사한 다색판화.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국이 파병 하자 일본은 텐진조약을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다.

 

2. 조선경성 오오토리 공사 대원군을 호위하다 朝鮮京城 大鳥公使大 院君ヲ護衛ス
조선정부의 철병요구를 묵살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개입할 것을 결 정하고 경복궁을 점거한 뒤 친일내각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 과 전투를 벌이며 말을 탄 대원군을 호위하는 오오토리 공사가 경복 궁에 입성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3. 조선풍도근해 격전 일군함대 대승리도 朝鮮豊島近海激戰日軍艦隊 大勝利の圖
7월 25일에 일본군은 아산만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기습 공 격, 청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청나라의 순양함 제원(濟遠)과 광을 (廣乙)이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순양함 요시노(吉野)와 나 니아(浪速) 함대 사이에 포격을 벌이다 도주하였다. 일본함대가 도주하는 청나라 함대를 쫓아갔는데 광을은 결국 좌초하고 제원은 일본 에 노획되었다.

 

4. 육군사단대만세 陸軍師團大萬歲
1894년 7월 29일 아산 전투를 묘사한 다색판화. 전투에서 패한 청국 군을 끝까지 쫓아가는 대규모 일본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쓰러 져 있는 군인들은 청국 병사뿐이며 쫓기듯 도망가는 청국병사들은 작 게, 쫓아가는 일본 병사들은 압도적으로 표현했다.

 

5. 조선평양대격전 朝鮮平壤大激戰
1894년 9월 15일 평양 전투를 묘사한 다색판화.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 격하여 파죽지세로 청국군을 무찌르고 있다.

 

6. 아국대승리 적진 군기를 빼앗다 我軍大勝利 敵陣ニ軍旗ヲ奪ス
말을 탄 일본 장교가 청국기를 빼앗고, 이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청 국 병사의 모습을 그린 다색판화. 일본의 군대가 적군인 청국의 깃발 을 빼앗으면서 전쟁의 마지막을 가늠하게 해준다.

 

더위가 한창이던 1894년 7월, 한반도는 무더위를 집어 삼키는 화염에 휩싸였다. 국토의 곳곳이 불타고 무너지고 시체가 뒹구는 처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던,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가 한창이던 2018년 3월 20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해 다카하시 가즈히꼬(高橋和彦) 씨가 족자 2점을 기증했다. 바로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두루마리 형태의 다색판화(錦繪, 니시키에) 33점을 2개의 족자로 분할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이번 자료는 바로 다카하시 씨가 기증한 청일전쟁 판화 중 몇 점을 소개한다. 니시키에는 당대의 풍속을 서민 감각으로 그려낸 근세 일본의 회화로 목판화 방식을 채용한 에도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실제로 전쟁 상황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화가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일반 민중은 청일전쟁의 동향을 니시키에를 통해 사실처럼 알게 되었다. 특히 시중에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조선 침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청일전쟁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니시키에 속에 조선인을 소재로 한 그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이미 니시키에 화가들의 상상력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멸시의 대상은 일본군에게 패주하는 오합지졸 청국 병사들에게 옮겨갔다. 꽁무니 빼는 청나라 병사들을 멸시적인 비속어로 매도하고 조롱하며 청일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다. 거의 모든 그림이 근대적인 무기를 갖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투하는 늠름하고 용감한 일본군의 모습을 묘사했다. 반면 청국 병사는 재래식 무기인 창과 칼을 지닌 오합지졸로 묘사했다. 

화, 2021/07/27-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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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 1주기 묘소 참배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3월 15일(월) 민족문제연구소 상근자들은 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의 별세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성묘를 다녀왔다. 이이화 선생은 코로나19 대유행이 막 시작되던 작년 봄(3월 18일), 암 수술에 따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 장례 또한 수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선생은 생전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등에 함께 참여하며 연구소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 바 있다.
선생의 묘소는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별세 후 1년이 지났음에도 선생을 기리고 존경하는 시민과 팬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 성묘 당일에도 어느 시민이 두고 간 듯한 꽃이 묘소 곁에 놓여있었다. 연구소에서는 제수용품과 음식, 꽃다발과 함께 생전 선생이 즐겼다던 맥주와 담배를 준비해 제단에 올렸다. 성묘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임헌영 소장의 참배로 시작되어 조세
열 상임이사의 추도문 낭독으로 이어졌다. 추도문은 선생의 뜻을 존경하고 따랐던 후학들의 마음을 담아 조 이사가 작성한 것으로,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를 필두로 선생의 연구업적을 기리는 한편 ‘역사 대중화’를 위해 정열을 바쳤던 한 역사학자의 삶을 되새기는 내용을 담았다.

아울러 이날 성묘에는 이이화 선생의 부인 김영희 여사도 함께 자리했다. 김 여사는 묘소를 찾아온 연구소 상근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연구소가 이이화 선생의 유지를 이어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주길 당부했다. 코로나19로 각박한 삶이 지속되고 크고 작은 사회문제가 두드러지는 요즘, 역사학계의 ‘녹두장군’이자 한없이 따뜻한 ‘역사 할아버지’로 민중의 곁을 지켜주던 이이화 선생의 부재는 두드러진다. 하지만 100여권에 달하는 선생의 저서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그가 역사학자로서 견지해온 삶의 태도 또한 ‘역사의 이정표’로 뚜렷이 노정되어 있다. 이에 부응하는 취지로 우리 연구소는 ‘이이화 선생님 추모사이 ’(http://rememberleeewha.com)를 개설, 운영 중에 있다. 선생의 1주기를 맞아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방문을 부탁드린다.

목, 2021/03/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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