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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와 시민사회는 홍콩안전법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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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와 시민사회는 홍콩안전법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admin | 수, 2020/07/22- 00:40

본론에 들어가기 이전에 한마디 하자면, 한국의 언론과 단체들은 홍콩문제를 거론하기에 앞서, 남한 땅에 적용되고 있는 국가보안법부터 살펴보고 이의 폐기 또는 개정을 먼저 다루어야 합니다.

중국은 그래도 인민대표자회의(NPC)라는 공식적인 입법기구의 절차라도 제대로 밟아 진행하였습니다만, 한국의 반공법은 (이후 국가보안법) 입법과정의 적법성조차 논란에 쌓여 있었습니다. 한국사회의 ‘적폐 중 적폐’인 국가보안법을 방치한 채 홍콩의 국가안전법 적용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누워서 (자기얼굴에) 침뱉기’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한국의 대부분 언론들은 예외없이 소위 워싱턴-프레임(Washington-Frame)에 갇혀 미국의 주류 언론의 보도내용을 그대로 베끼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오는 9월 중국과 전면적인 통상협상을 예정하고 있는 유럽연합의 주요 인사들은 지난 6월 시진핑 그리고 리커창과 영상회의를 가진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측은 홍콩문제는 전적으로 중국의 국가주권에 관한 문제이므로 제3자의 개입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분명한 선을 그었고, 유럽연합은 중국의 입장을 수용하는 한편에 홍콩인들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 가치에 대한 심각한 염려를 강조하고 재고를 요청하는 것으로 봉합하였습니다.

홍콩문제의 시발은 19세기 중반 서세동점의 과정에서 비열한 영국제국주의자들의 아편밀매이라는 촉수와 현대화된 함정을 앞세워 이루어진 강탈의 사건이며, 이후 149년간의 불법적 점거에서 비롯된 것이죠. 현대중국의 설계자이자 비난을 무릅쓰고 1989년 천안문사태의 무력진압을 지시했던 장본인 등소평이, 역사의 원점으로 정상화하는 1997년의 홍콩반환을 앞두고, 임종하면서 자신의 사체를 화장하여 뼛가루를 홍콩 앞바다에 뿌리도록 유언한 것이 매우 암시적 입니다.

반제반식민투쟁을 통하여 현대중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부패한 권력자집단들이 모인 국민당이 아니라 역사적 전승에 따라 백성의 지지를 결집시킨 공산당의 인민공화국이 대륙을 통일한 것은 역사적 순리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소련의 악명높은 독재자 스탈린이 국민당의 장개석을 지지하고 미국번영의 초석을 닦은 루스벨트는 내심 모택동을 후원한 것이 일견 모순으로 보이지만 당시의 사정을 솔직히 반영한 것입니다. 더구나 코민테른을 앞세운 스탈린은 1948-9년 간에 중국대륙의 통일을 위하여 인민해방군이 양쯔강을 도하하는 것조차 방해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소분쟁의 예고편 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종전 이후 대소냉전구도를 구상하면서 여러 구실로 늦장을 부리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개최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진행 중에, 제국주의자 영국은 이미 한국땅으로 확인된 독도를 조약의 내용에서 빼고, 조약참가 초청국가 명단에서 한국과 중국을 삭제하도록 배후에서 작업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패권국가 미국은 루스벨트 사후 중국을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으로 편입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협박과 당근의 전략을 구사하여 왔습니다. 미중 국교과정에서도 대만에 전략적 군사무기 판매를 끝까지 고집하였고, 국교수립 이후 대만내의 대사관을 철수시키는 대신 미국연구소 등 유사기관들을 확장하여 천명이 넘는 미국인(요원?)들을 대만에 잔류시키며 대중전략의 중심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일국양제 하에 있는 홍콩에 대하여도, 중국은 자신의 국가주권 하에서 영미식 자유시장경제를 중국식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50년의 모라토리움을 설정한 것에 반하여, 홍콩 반환과정에서 미영세력은 중국경제의 혼란을 유도하여 자신들의 체제로 편입시키려고 온갖 수작을 부리다가 실패하고 엉뚱하게 아시아의 통화위기를 유발시킵니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자본제로 편입 시나리오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수백만 시민들이 삶의 뿌리가 뽑히는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수많은 기업들이 도매금으로 외국자본가들 수중에 떨어지고 한국의 자본시장과 금융산업이 월가에 편입을 당한 1997년 외환위기의 주요 배경인 셈입니다.

아날학파의 거두 브로델과 정의론의 존 롤스도 확인하였듯이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에 중립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기제입니다만, 홍콩반환 과정에서 미국과 영국이 중국의 시장경제 운용원칙을 자신들의 자본중심제 즉 신자유주의로 재편하려고 엄청난 공격을 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쉐무차오에 의해 확립된 중국식 화폐금융제도를 주룽지가 끝까지 사수하면서 실패로 끝납니다 (주룽지曰 – 금융과 화폐는 경제의 심장이다 : 한광수 저 – 미중패권 전쟁은 없다).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미국은 패전한 고객국가 일본을 대중봉쇄의 전략적 거점(남한은 전방기지)으로, 대만을 중국민족문제의 정치군사적 기지로, 그리고 홍콩을 국제금융시장의 공략창구로 삼아 온갖all-rounds 공격을 시도해 봅니다만, 현재까지 전체적인 흐름에서 역전패를 당하는 양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홍콩문제는 미영세력이 허울로 내세우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식적인 가치와 정치체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중국굴기의 과정에서 충돌하는 파워게임이며 ‘주권방어와 편입강제’간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적확한 시각이리고 봅니다 (이는 하버드대학교 Walt교수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영국은 1997년 반환 이후에도 자신들이 뿌려놓은 서구가치 중심의 교육과 사회제도 그리고 소위 35만 명이 소지한 해외시민권BNO를 통해 중국과 홍콩 사이에 끊임없는 개입을 시도하였으며, 미국은 정보기관의 통제하에 있는 해외언론기관을 통해 줄기차게 이념적 공세를 가해 왔으며, 소위 극우 네오콘 집단인 민주재단(NED, National Empowerment of Democracy) 등을 배후로 가장한 시민조직들을 통하여 천명이 넘는 홍콩 젊은이들을 조직하고 자금을 제공하여 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홍콩우산 혁명의 실체이자 배후인 셈입니다.

남한의 경우에도 미국의 민주재단NED등과 극우교회세력들이 민족화해를 가로막는 대북전단 사업조직을 지원해온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죠.

단연코 한국정부와 한국시민단체들은 섣불리 홍콩문제에 개입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미패권(미국이 아닌)이 와해되는 국제정치의 냉정한 현실 속에서 동아시아의 이후 전개상황을 직시하고 우리 자신의 이해와 미래를 중심축으로 국가전략을 추구해 가야만 합니다. 이제 과거 방식의 견강부회한 동맹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민족의 화해와 공존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우선해야 합니다.

홍콩과 관련하여, 지난 6월 다른백년에 이미 게재되었던 내용들을 유첨으로 반복합니다.

# 홍콩 입법회의의 역할과 가능성

# 영국은 홍콩문제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

# 하이난 성의 자유무역항 개발 구상

이제 홍콩인들에게는 세가지 옵션이 주어져 있다고 보여 집니다.

1) 국가주권을 방어하려는 중국 공산당의 통제하에서도 입법회의 등 민주적 절차를 통해 홍콩의 행정자치권을 최대한 확보해 가는 길.

2) 영국이 제공하는 BNO를 활용하여 1년 한시적 체류를 통해 서방사회로 이민을 택하는 길 (또는 미군사패권에 의존하고 있는 대만으로 이주하는 선택).

3) 미영식 자본제도에 의해 주거와 일자리의 지옥으로 변한 홍콩 대신에 제3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는 하이난 자유무역 지대를 무대삼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아 도전하는 길.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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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의 세 단계

2016년 10월 29일 시작된 대한민국의 ‘촛불집회’는 3차째인 11월 12일의 100만 집회에서부터 ‘촛불혁명’으로 전환되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자진퇴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함에 따라 이때부터 촛불광장의 요구가 국민에 의한 ‘하야’와 ‘퇴진’으로 분명해졌고 이 요구를 여러 미디어에서 받아 ‘촛불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듯 혁명적 요구를 장착한 거대한 대중행동은 이어 4차(11월 19일, 95만), 5차(11월 26일, 190만), 6차(12월 3일, 230만) 집회를 통해 국회의 대통령 탄핵 가결을 압박했고, 결국 국회는 12월 9일 찬성 234명, 반대 56명으로 대통령 탄핵을 가결했다. 이 ‘합헌적 혁명’의 경로는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 결정을 승인하고 대통령에게 파면 선고를 내림으로써 그 1단계가 완료되었다.

대통령 탄핵 – 파면 이후 촛불혁명은 다음 단계인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41.08퍼센트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국회 내 탄핵을 주도했던 야3당 후보의 득표율을 합하면 68.66퍼센트(국민의당 21.41퍼센트, 정의당 6.17퍼센트), 촛불의 압박 아래 탄핵 지지로 돌아선 새누리당 이탈 세력의 지지율(6.76퍼센트)을 더하면 75.42퍼센트에 이른다. 유권자 4분의 3 이상이 탄핵지지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가운데 제1야당의 후보가 여유 있게 당선되어 정권을 안정적으로 교체한 이 대선 과정이 ‘합헌적 혁명’의 제2단계라 할 수 있다. 대선 이후 ‘촛불정부’가 들어선 이제 합헌적 혁명으로서 ‘촛불혁명’의 제3단계가 진행 중이다. 이 제3단계를 온전히 마무리하였을 때 촛불혁명은 비로소 완성·완수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은 이렇듯 세 개의 단계를 경과하여 진행 중인 촛불혁명의 지향과 목표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목표와 지향은 무엇보다 우선 이 사건의 역사적 위치, 위상을 객관적으로 점검할 때 비로소 분명해질 수 있다. 그러한 위상이란 한국 현대사 속에서의 위상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사, 더 나아가 세계사 속에서의 위상을 포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 이 혁명이 어디쯤 있는 줄 알 때,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2016~2017년 촛불혁명의 역사적 위상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한국 현대사 차원에서 볼 때 두드러진 점은 이번 촛불혁명이 1960년의 4·19 혁명과 1987년의 민주항쟁에 이은, 대략 30년 간격으로 터져 나온 거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세 번째 분출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4·19도, 87년 민주화도 각각 이후 30년에 걸쳐 점차 그리고 결국은 강고한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거대한 민주적 열망을 냉혹한 독재체제가 회수하고야 마는 ‘마(魔)의 순환고리’ 또는 ‘독재의 반복고리’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번 촛불혁명도 꼭 같은 순환고리에 포획되고 말 운명인가? 촛불혁명의 완성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이 점을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반복강박 증상과 매우 유사한 이 불쾌한 역사적 순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질 때, 2016~2017년 촛불혁명의 제1과제는 바로 그 ‘마의 순환고리’를 분명히 끊어내는 것에 맞추어지게 된다. 반면 이러한 반복성과 그 뿌리 깊은 구조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못하면 촛불혁명은 다시 한번 자기혼란 속에 퇴행 소멸할 수 있다. 이것이 지난 60년간 한국 현대사에서 두 차례 반복된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의 작동’ 속에서 배울 점이다.

한국의 이번 촛불혁명의 두 번째 역사적 차원은 기존 민주주의 시스템이 세계 곳곳에서 한계와 오작동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에서 유독 이를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돌파하는 새롭고 거대한 힘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한국의 촛불혁명에 세계가 놀랐던 이유다. 외국의 여러 주요 언론이 썼던 바와 같이 이번 한국에서의 촛불혁명의 에너지는 더 이상 ‘민주주의 선진국’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는 후발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체와 퇴행에 빠진 세계 민주주의 상태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보다 고양된 수준으로 이끌어가는 선도자의 힘이다.

끝으로 필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러한 선도적 에너지가 세계사의 단계가 ‘서구 주도 근대’ 단계를 넘어 ‘후기근대’로 들어서는 상황에서 표출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후기근대의 주요 특징의 하나는 일극중심 문명체제에서 다극균형 문명체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변동은 커다란 기회와 위기를 함께 수반한다. 한국의 경우 한편으로 정상사회, 정상국가로의 전환의 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전환을 오히려 신냉전 기류의 고조를 통해 모면하려는 흐름이 생겨난다. 현재 북미 간의 비상한 군사적 긴장 고조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러한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느냐에 따라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 전반의 안녕이 큰 영향을 받게 된다. 20세기적 또는 냉전적 행동패턴, 분단체제적 사고패턴과 과감하게 작별하는 새로운 발상, 담대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긴요한 시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촛불혁명은 한국 현대사에서 30년 간격으로 되풀이 되었던 ‘마의 순환고리’를 확실히 끊어야 하는 목표이자 과제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목표는 세계사 차원의 거대한 지각변동에서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과 깊이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표, 과제, 역할은 단기적 시야에서는 포착되기 어렵다.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진행되는 현상에 매몰될 때 촛불혁명의 제3단계는 방향을 잃고, 이 속에서 앞서 언급한 ‘마의 순환고리’는 다시 한번 거대한 작동을 시작하게 될 수 있다.

이 장은 이렇듯 촛불혁명이 놓인 역사적 위상과 여기서 도출되는 목표에 대해 가능한 구체적으로 적시해보려 한다. 그것은 ‘독재의 순환고리 끊기’와 ‘코리아 양국체제의 정립’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 두 목표·과제가 긴밀히 연관된 것임도 이 글은 밝혀 보일 것이다. 이 두 과제의 달성은 진정 ‘체제전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만이 이번 촛불혁명은 진정 그 이름에 부합하는 혁명으로 완성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마(魔)의 순환고리’

4·19와 87년은 대한민국 정치사, 민주주의 역사의 기념비적 봉우리였다. 이제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은 이를 잇는 세 번째 봉우리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두 번의 봉우리가 세계의 주목과 경탄을 받았던 만큼, 그 역사적 대분출 이후의 역사는 독재의 깊은 골짜기로 거듭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리하여 ‘민주의 대분출과 독재로의 회수’라고 하는 매우 불쾌한 사이클이 한국 정치사에 30년 주기로 반복되어왔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그리고 널리 인식되게 된 데는 박근혜 정부의 등장과 귀결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이전 이명박 정부 출범은 참여정부 실패의 결과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독재 회귀의 큰 사이클에 대한 인식이 아직 대중적으로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박정희 체제로의 회귀라는 상징성이 강했고, 실제 재임 동안 그러한 회귀가 정부의 공공연한 이념공세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물론 이 사실의 확인은 87년 민주항쟁 이후 30년 사이클의 대미를 박근혜 정부의 유신 귀환 행태가 장식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우선 박근혜 정부의 독재화 가속 현상은 최근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 시기의 전방위적 블랙리스트 정책(감시·배체 체제)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이전 김대중 – 노무현 민주화 정부 10년도 독재 회귀의 큰 사이클을 결코 끊지 못했다. 그 연원은 멀리 87년 하반기 민주화 진영의 분열과 대선 패배로부터 기인하는바, 이 30년의 전체 흐름에 대한 조망은 이 글 4절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박근혜 정부가 대미를 장식했던 독재 회귀의 피날레 현상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부터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과 군 정보기관의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선거 개입(이명박 버전의 ‘비상국가체제’의 작동)에 의해 출범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국가기관의 대규모 선거 개입에 대한 검찰 수사를 박근혜 정부는 유신체제를 연상시키는 매우 강압적인 방식(박근혜 버전의 ‘비상국가체제’ 작동)으로 종결했다. 그렇게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보여준 무능과 불통·불감, 통진당 해체에서 보여준 냉전 극성기의 배제와 억압, 국정교과서 추진에서 보여준 시대착오적인 이념적 강압으로 시종 일관했다. 이러한 오만과 강압은 2016년 4·13 총선 공천 과정에서 전통적 지지층마저 고개를 돌릴 만큼 무제약적인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통·불감, 억압·배제의 일방 통치와 오만에도 불구하고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다가오는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압승하고, 더 나아가 개헌선 이상의 여당 승리에 따른 제2의 유신 개헌 프로젝트가 가동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만큼 신 유신체제로의 회귀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때는 마침 87년 항쟁의 30주년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에 87년의 민주주의의 희망찼던 큰 진전과 그 30년 이후 민주주의의 암담한 추락의 대비가 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4·13 총선의 결과는 사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렇듯 전혀 예상 밖에 조성된 여소야대의 상황이 박근혜 체제의 유신 회귀 질주를 멈추게 한 것도 아니었다. 총선 이후로도 전방위 블랙리스트 압박과 국정교과서 개정, 사드 배치, 일제 위안부 문제의 종결(소위 대못박기)을 위한 강박적 정책이 집요하고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10월 말 최순실 국정 개입·농단의 구체적 증거가 언론에 폭로되기 시작하면서 급전직하로 진행된 박근혜 정권의 극적인 몰락 역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독선·독주를 해도 철옹성처럼 견고해 보였던 박근혜 지지층을 단번에 해체해버린 11월, 12월의 거대한 대중행동은 자연스럽게 30년 전, 1987년의 거대했던 민주대항쟁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렸고, 많은 미디어가 이 대비를 부각시켰다. 1987년 역시 철옹성 같았던 군부독재체제가 그처럼 물러설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험과 기억의 중복 속에서 한국 정치사의 반복성은 평범한 국민대중의 인식 차원에서도 분명해져갔다.

그러한 반복의 시간에서 희열은 짧고 고통은 길기 마련이다. 희망의 짧은 시간은, 길고 둔중한 망각과 냉소와 자학과 고통의 시간에 묻히고 만다. 실제가 그러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란 그렇듯 짧고 날카로운 희망과 압도적으로 길고 둔중한 절망의 시간의 반복 메커니즘을 말한다. 혹시나 이렇듯 확인된 반복성이 ‘아무리 어두워도 새벽은 또 오고야 만다’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도치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중증 반복강박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어두운 회귀 구조의 압도적인 불행과 불쾌와 고통에 주목해야 마땅하다. 역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묘하게도 1960년 4·19, 87년 6월, 2016~17년의 세 개의 봉우리는 30년을 주기로 솟아올랐다. 또한 그 사이에 낀 두 개의 시기(1960~ 1987년과 1987~2016년)의 전개 양상, 즉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장기(長期) 메커니즘’의 작동은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했다. 이 패턴은 극과 극이 대체되는 것으로서, ‘제도 밖의 대중행동이 제도를 변화시키고 점차 보수화되는 제도를 다시금 제도 밖의 대중행동이 변화시킨다’라고 하는 기존 사회변동의 교과서적 일반론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4·19나 87년 6월 대투쟁은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다) 반전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철옹성 같아 보이는 독재 상황, 즉 독재가 외적 구조만이 아니라 멘탈의 내면까지 깊게 장악하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규모와 방식으로 매우 극적으로 분출하였다.

이 글이 주목하는 ‘마의 순환고리’란 이렇듯 정상적인 수준이나 패턴을 넘어서는 지극히 극단적인 독재 수렴 구조의 작동을 말하고, 이러한 극단적 패턴이 반복되는 배후에는 매우 특수한 한반도(코리아)의 상황이 존재한다. 이 강고한 순환고리의 ‘마성(魔性)’은 거대한 대중행동·민주열망이 제도 안으로 수렴되어 제도를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회변동의 일반론이 작동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행동의 봉우리가 아무리 높고 거대해도 ‘마의 순환고리’ 자체는 끊기지 않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같은 패턴의 ‘독재수렴’이 반복된다.

그러한 ‘마성’의 효력을 마치 영구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반도적 상황’이란 무엇일까. 2차 대전과 6·25 전쟁 후의 동서(동방/서방) 그리고 남북(코리아) 간의 극단적인 적대적 대립이 지정학적 꼭지점에 2중으로 중첩되어 있는 상황을 말한다. 그로 인해 ‘2중의 독재권’이 중첩하여 증폭하게 된다. 이는 극히 예외적 –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그렇듯 특이해 보이는 국가 독재권의 작동 원리가 근대 국가주권론의 일반론에서 반드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근대 국가주권론의 이론적·이념적 순수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장 선명한 이론적 표현은, 필자가 아는 한,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에 의해 주어졌다. 그는 근대 국가주권의 핵심 권능과 표징이 국가 내외에 적(=예외)을 설정하는 권한(비상대권)의 독점, 즉 독재권에 있다 하였다.

냉전 시기 이 원칙은 국가 간이 아닌 동서 ‘진영’ 간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상황에서 슈미트적 의미의 국가주권의 배타적 권능(=독재권)이 가장 강력하게, 이론적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출되었던 곳이 한반도의 남북이었다. 남북의 두 국가가 하나의 주권을 두고 다투는 상황은 남북 상호를 절대적 적(=예외)으로 설정하게 함으로써 남북 각각의 주권이 절대성(=독재권)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진영 간 대립과 분단국가 간 대립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중첩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극단의 상황은 남북 내부에 정상적 정치 경쟁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카를 슈미트가 근대 국가주권 행사의 정화(精華)라고 보았던 최고통치자의 비상대권이 항시적·일상적으로 작동하는 ‘비상(非常)국가체제(permanent emergency state system)’, 그것이 남북한의 국가 상태였다.

한국의 경우 그러한 항시적 비상국가 상태에 파열구를 내고는 했던 것이 4·19였고 87년 6월 항쟁이었으며, 이번 촛불혁명이었다. 비정상 상태에서는 비정상이 정상이고, 정상은 비정상이 된다. 오직 그러한 비상 상태를 정지시킴으로써만 정상은 정상이 되고 비정상은 비정상이 된다. 즉 비로소 ‘정상 상태(normal state)’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에서 세 차례의 민주 분출은 비상국가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려는 거대한 계기들이었고, ‘마의 순환고리’란 그러한 거대한 계기를 다시금 비상 상태로 되돌리려는 ‘마적(魔的) 시스템의 회복력’ 또는 ‘비상국가의 자기회복 시스템’이라 하겠다.

정상 상태란 우선 거대한 민주열망의 분출이 정상적으로 제도화되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민주화의 일차적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4·19와 87년 이후 각 30년은 거대했던 민주열망을 정상적으로 제도화시키는 데 실패했던 시간이었다. 초기 얼마간은 과거 독재기에 비해 유사 민주화가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표피의 변화에 그치고 점차 비상국가체제의 독재·독점의 힘이 민주의 열망을 분산·둔화·왜곡시켜 결국은 몽땅 삼키고 만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러한 ‘마의 순환고리’가 지극히 강고하다는 것을 제대로 입증한 것은 4·19 이후 30년이라기보다 오히려 87년 이후 30년의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4·19 이후 30년은 세계적 동서 냉전이 맹렬하게 진행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비상국가 상태를 근본에서 종식시킨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87년 이후 30년은 동구권 붕괴와 소련 해체를 통해 동서 냉전이 종식됨으로써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를 강제하는 국제적 구속력이 크게 약화된 역사적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는 그 거대했던 87년의 민주 동력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회수하여 다시금 또 다른 독재체제로 회수하고야 말았다. 동서 냉전이 종식되었고 ‘북방정책’을 통한 대소·대중 해빙이 있었음에도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는 강고하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비상국가체제의 작동과 균열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의 핵심에 ‘비상국가체제’가 있다고 한다면, 우선 그 체제의 작동 방식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상국가체제는 최고권력자의 독재권과 상당히 광범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기득권층과 동맹관계를 통해 작동한다. 최고권력자의 정치적 독재권은 사회 각 부면의 권력과 자원의 독점권·기회획득권을 기득권 상층에게 배타적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비상국가의 지배동맹은 성립한다. 이 체제의 위기는 지배동맹의 균열·약화와 국민적 저항이 맞물렸을 때 발생한다.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임기 2~3년 차에 들어 (특히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박근혜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실망, 회의, 반발이 누적되었음에도 대통령에 대한 30~40퍼센트에 이르는 ‘콘크리트 지지층’은 2016년 10월 말에 이르기까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40퍼센트에 이르던 지지율이 30퍼센트대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4·13 총선 이후였다. ‘친박 독선·독주에 대한 응징’으로 풀이된 총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자신에 대한 지지율은 놀랍게도 콘크리트 밑바닥인 30퍼센트대를 굳건하게 유지했다.(아래 <그림 2>)

그러나 이 40퍼센트대에서 30퍼센트대로의 변화 과정에는 지배동맹의 균열과 약화라는 중대한 변수가 끼어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일단을 흥미롭게 정리해주는 기사가 JTBC의 최순실의 태블릿 공개 직전인 2016년 10월 23일 자 《미디어오늘》에 “조중동에게 노무현보다 박근혜가 최악인 다섯 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떴다. 당시 조중동 기자들의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풀이한 기사다. 주요 내용은 2014년부터 시작된 ‘비선실세’ 의혹의 각종 보도에 대해 정부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것(그 소송의 주역은 김기춘·우병우다), 언론사 수익원을 (역시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막고 있다는 것, (조중동과 같은) ‘언론사’ 출신을 배제하고 (MBC, KBS와 같은) ‘방송사’ 출신만을 청와대가 애호하고 있다(=감투를 주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상세히 밝혀진 ‘비선실세’ 건은 이미 2014년부터 ‘문고리 3인방’ ‘정윤회’ 보도로 시작되었고, 2015년 초부터는(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이후) 조중동이 한목소리로 대통령이 이 문제를 덮으려 한다고 비판해왔다. 권력과 자원을 조중동, 그리고 그들이 대변하는 사회 기득권층과 공유하고 대통령 개인의 사적 비선실세와만 나누려 하는 행태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권력 공유에 대한 묵언의 지배동맹, 계약을 위반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항의였던 셈이다. 이러한 불만 표출에 대해 청와대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좌파 세력이 우병우 죽이기에 나섰다”고 예의 그(=박근혜 전대통령의) 매서운 표현 방식으로 응수했다(2015년 8월 21일).

중요한 점은 박근혜 정부와 조중동은 국내의 여러 이권에 대한 입장만이 아니라 국사교과서 국정화, 대중·대러시아 관계, 유라시아 외교, 일제 위안부 문제 합의 건 등 이념과 국제관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미묘한 불일치와 마찰을 심심치 않게 보여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2015년경부터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하여 2016년 들어, 특히 4·13 총선 이후 빈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 시절과 다름없는 구시대의 이념과 외교관, 정치행태를 점점 더 강하게 표출함에 따라 지배동맹의 이념 전선에도 균열과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방증하는 사례의 하나로 대통령이 ‘주류 언론’에 대해서조차 이념적으로 지극히 적대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사실을 들어본다. 최근(2017. 8. 2) 삼성 이재용 특검 재판에서 나온 이재용 부회장의 증언이 그것인데,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2월 15일 그를 청와대에서 독대하는 자리에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을 언급하면서 “(《중앙일보》 계열 언론사인) JTBC가 왜 정부를 비판하나”라 항의하고 홍 회장에 대해서는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럴 수가 있나’라며 ‘이적단체’라는 표현까지 썼다”고 하였다. ‘이적단체’란 ‘좌빨·종북’과 동급의, 한국의 비상국가체제가 비판 세력을 말살하고 정치적 독재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지극히 폭력적인 언어다. 이제 그러한 정치적 비상(砒礵, 극독)을 삼성 – 《중앙일보》라고 하는 한국 보수의 대표적 주류 기관의 수장들을 대상으로 들이밀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상황은 국내 자본 그리고 온건 보수의 입장에서도 과거 유신 시절과 같은 강고한 구냉전적 자폐(自閉)와 대결 일변도의 정책이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한미 동맹은 유지하되 동시에 중국·러시아를 거쳐 유럽·중앙아시아·중동이슬람권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통로에 자유롭게 진입하고 싶은 것이 해외 상대의 사업을 하는 층과 온건 보수층의 일반적인 심정이었다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라도 (이명박 정부 이후) 꽉 막힌 대북관계를 어떻게든 풀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중·대러시아 정책은 이명박 정부 때보다 더욱 경직되어 있어 그런 방향의 유연한 타개를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본과 온건 보수의 입장에서도 불만과 우려가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렇듯 겉으로는 강고해 보였던 박근혜 체제의 보수동맹은 임기 중반(대략 2015년경)부터 내부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2016년 4·13 총선을 계기로 그 균열이 가시화되었고, 결국 2016년 10월 말 이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백일하에 폭로되면서 정권이 급속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기적처럼 되돌아온 거대한 대중행동이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의 열기가 별다른 성과 없이 소진된 이후 심화되는 양극화와 ‘헬조선’의 현실 속에서도 무기력한 패배감과 냉소·자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민심이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다시 크게 경각하기 시작하여 결국 촛불혁명의 거대한 힘으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2017년 5월 촛불혁명의 힘에 의해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다. 이렇듯 크게 이완·약화된 비상국가체제를 완전히 역사의 뒷장으로 넘기고 이윽고 정상 상태의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4·19, 87년 항쟁, 이번 촛불혁명의 공통점은 권력 교체기에 권력 최고층의 도를 넘어선 독주와 권력 남용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데 있다. 기득권층의 일정 부분이 권력에서 소외·이반·이탈하면서 민주화의 요구가 압도적 민심이 되었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앞서 두 차례의 거대한 대중행동(4·19와 87항쟁)은 비상국가체제를 종식시키는 데 결국 실패했다. 구 권력의 최고 담당층만을 밀어냈을 뿐, 비상국가체제를 작동시키는 구조와 논리, 이념을 종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비상국가체제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미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마의 순환고리’가 몇 차례의 커다란 타격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부활하고는 했던 것은 우선 한국이 처한 역사적·지정학적 내외 조건의 구조적 강제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강제의 힘을 별 수 없이 수긍하게 된 또 다른 수동적 민심의 (동의가 아닌) 수용이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문제적이라 하더라도 상당 기간 존속해온 체제에는 나름의 현실 근거가 있게 마련이고, 그렇듯 오래 존속해온 것은 비판이나 반대만으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선 현실이 변해야 하고, 그렇듯 변화한 현실을 정확히 읽어야 하며, 새로운 현실에 걸맞은 분명한 방향 제시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그동안 운명처럼 받아들여왔던 ‘역사적·지정학적 내외 조건’이 크게 변하여 더는 옛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의거했던 ‘비상국가체제’는 변화한 현실과 오히려 크게 부조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랬을 때 새로운 현실에 맞는 새로운 사회의 방향도 선명해질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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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4/0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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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 이후 근대 세계사는 새로운 단계인 후기근대(late modern age)에 접어들었다. 세계인이 이를 점차 실감하고 있는데, 촛불 이후 남북 코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새로운 시간의 실감 속에서 최원식 교수가 《프레시안》 창간 17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남북연합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강조하고 코리아 남북연합이 그 촉진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후기근대의 세계 상황이 두 코리아의 공존체제·평화체제를 가능하게 하고 있으니 이를 위한 내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평자로서는 동의하고 환영한다.

이제 촛불혁명과 판문점, 싱가포르 선언으로 그 가능성은 바로 코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촛불 직전인 2016년 5월 《프레시안》과 ‘다른백년’이 주관했던 4회 강연에서부터 평자는 공존체제, 평화체제보다 ‘양국체제’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공존체제나 평화체제는 ‘그냥 맞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좋아.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공존과 평화를 이뤄낼 실제적 방법, 핵심고리가 중요한데, 이것이 ‘코리아 남북 양국의 주권국가(sovereign state)로서의 상호 인정’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양국체제가 돼야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다. 양국체제란 양국 공존체제, 양국 평화체제의 줄임말이다. 공존과 평화를 실현할 양국체제가 남북연합의 바탕이 될 것도 자명하다.

발제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발제문은 ‘國際(inter-national)’보다 ‘民際(inter-civic)’를 중시하기에 통상 쓰는 ‘(남북)국가연합’이 아니라 국가를 빼고 ‘남북연합’이라 하는 듯하다. 국제(International)에 민간관계가 빠지는 게 아니니 민제라는 말이 굳이 따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국제와 민제가 따로는 아니겠다. 발제문이 언급한 한중일 관계만 하더라도 국제가 안 풀리면 민제도 어려워진다. 극적 사례는 1992년 한중 수교였다. 국제를 트니 민제가 크게 열렸다. 남북관계는 국제(이 경우는 inter-national이 아니고 inter-state가 된다)가 막혀 민제는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다 할 형국이니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남북연합 논의에서도 국가(state) 대 국가(state)로서 남북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발제문은 그와 전혀 다르게 본다. 아래 문단은 관련 주장이 집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양국론’에 대한 ‘경계 긋기’로 시작한다.

최근 세를 얻고 있는 양국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그을 필요가 없지 않다. 양국체제론자들의 논의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탓에 단정하긴 어렵지만 남북은 일국도 아니지만 양국도 아니다. 분단으로 두 쪽이 난듯이 보여도 남과 북은 분단체제의 드러남으로 연계된바, 분단체제를 상정하지 않은 양국론과는 애초에 무관하다. 그렇다고 그냥 일국론도 물론 아니다. 정말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不一不二]. 요컨대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을 설령 통일의 최종형태로 삼는다고 해도 그 연합이 두 나라의 단순 병치가 되기는 애시당초 그른 것이매 남북연합론은 주변 4강의 의심을 풀고 내부의 대국주의를 절약할 요체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남북연합론은 일국적 통일론과 양국적 반통일론을 가로지르는 중형국가적 분단해소론이다.

국가 대 국가의 문제를 시종 비켜가고 있다. 일국도 아니고 양국도 아니라 한다. 과연 그런가? 현실은 일 민족, 이 국가(one nation two states)이다. 둘이되 하나요, 하나이되 둘[一而二, 二而一]이다. 엄연한 사실이 그러함에도, 즉 이 두 개의 국가가 국제적으로는 모두가 널리 공인된 국가이면서, 막상 양국은 아직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문제요, 비정상 아닌가? 그러나 「발제문」은 거꾸로 본다. 이런 상태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여기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불일불이(不一不二)’라 한다. 불일불이란 불가(佛家)의 진리관[中論]을 표현하는 높고 찬란한 언어다. 진리적 불일불이가 ‘분단체제’라는 개념에도 적용되고 있다. “분단으로 두 쪽이 난듯이 보여도 남과 북은 분단체제의 드러남으로 연계된바 …… ”라고 하였다. 분단체제를 이렇듯 고도로 긍정적인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발제자의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이라 하였다. 그동안 ‘분단체제’란 말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이를 이렇듯 고도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용법이 일반인에게는 매우 낯설다. 분단체제는 남북이 적대하는 체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국가로서 인정하지 못해왔던 체제 아닌가?

거듭 말하여, 현실은 일 민족 이 국가 상태다. 체제 보장은 북미 간에만 아니라 남북 간에도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양국체제다. 과연 무엇이 분단과 분단체제를 영구화시켜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둘임을 부정했기 때문에, 둘을 부정한 채로 결코 하나이자고 했기 때문 아닌가? 둘이 서로 인정하는 것이 이 함정을 벗어나는 제1보다.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것만이 바른 길이다. 『노자(老子)』 22장에서 “곡즉전 왕즉직(曲則全 枉則直)”이라 했던 게 양국체제의 취지와 닿아 있다.

양국체제 없이 남북연합이 제대로 될까? 국(state) 간의 際가 안 열렸는데 民 간의 際가 활짝 열릴까? 그렇듯 국제가 닫힌 채로 가능한 남북연합이란 어떤 것일까? 양국체제가 성립하고 안정돼야 비로소 그 두 국가(state) 간의 남북연합이든 국가연합이든, 낮은 단계든 높은 단계든, 비로소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촛불혁명, 그리고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으로 이제 양국체제는 목전의 현실문제가 되었다. 판문점, 싱가포르 회담 한참 이전부터 줄곧 강조해온 것처럼 종전과 북미 수교는 양국체제의 입구요 일부다.

양국체제란 1973년 <동서독기본조약> 이후의 동서독 관계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동서독기본조약>에서 양독(兩獨)은 서로를 국가로서 분명히 인정했고, 기본조약 이후 미국은 동독과 수교했다. 그 두 고리가 풀리면서 양독 관계는 안정됐다. 반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이 둘 다 이루지 못했다. 유엔 동시가입으로 코리아 양국체제의 외적 모양새는 일단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불완전하고 불균형했다. 그랬기에 그 경로는 금방 닫혔다. 반면 동서독의 양국체제는 안정적으로 지속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존속했다.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당시 남북이 처해 있던 여러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낮은 수준에서 합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것이 마치 아주 높은 수준의 결과였던 것처럼 생각한다면 문제가 된다.

「발제문」의 ‘불일불이’ 구절을 읽으면서 연상을 금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유명한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구절이다. 이 표현은 매우 외교적인 것인데, 이를 액면가보다 낮추어 읽는 것이 아니라(외교문서를 읽는 기본이다), 오히려 액면가보다 훨씬 높게 읽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남북은 국가 대 국가로 서로를 (아직 외적 조건과 내적 능력이 부족하여)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뜻이 높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북은 애당초 두 국가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이다. 그렇게 읽으면 이 구절은 마치 ‘우리가 지금 하나는 아니지만 결코 둘일 수 없다(불일불이)’라는 높은 이상에 남북 대표가 의기투합하여 ‘우리는 결코 두 국가가 될 수 없으니 이러한 불일불이의 상태에서 곧바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통일로 직행하자’라는 뜨거운 마음을 이심전심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실제로 그런 오독들이 꽤 있었다.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연합이든 연방이든,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여태껏 듣지 못했다.

끝으로 ‘말이 아닌 말’을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는 없겠다. 위 인용문에서 “양국적 반통일론”이 그렇다. 앞서 설명한 대로 양국체제 없이는 공존체제도, 평화체제도, 남북연합도 담보되지 않는다. 양국체제 자체가 통일은 아니지만, 어떠한 경로보다 통일 촉진적이다. 양국체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바람직한 통일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반통일’일까? 또 이 말과 짝을 걸어놓은 “일국적 통일론”이란 뭘까? 진보진영에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안다. 북(DPRK) 역시 이 입장을 폐기한 지 오래됐다. 그럼 뭘까? 발제자의 뜻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런 게 있다면 우스꽝스런 무엇일 듯하다. ‘말이 아닌 말’을 만든 것으로 부족하여 실체 없는 허깨비와 짝을 붙여놓은 꼴이다. 왜 이래야 했을까? 양측에 ‘극단’을 세워놓고 중간에 끼어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때로 쓸 만하다. 단, 그 양쪽 입장이 단단하고 분명해야 한다. 그럴수록 자신의 입장이 힘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 ‘말이 아닌 말’과 ‘대립 아닌 대립’을 세워놓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식이라면 별다른 의미나 성과가 없을 듯하다. 또 그렇듯 가로지르는 게 ‘중형국가적 분단해소론’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국가’는 어떤 국가이고(일 국가? 이 국가?), 여기서 ‘분단 해소’는 어떤 해소인지(분단체제의 해소? 분단의 해소?)도 궁금하다. 어쨌거나 지금 필요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 사이의 ‘경계 긋기’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공통점을 모으는 일이 아니겠나 생각해본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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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4/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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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은 미국과 더불어 G20 중 양극화와 부의 집중도가 가장 심각한 나라이다. 지난 십수 년간의 가계부채증가 역시 두 나라가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에 대하여 오랫동안 공공금융과 부채문제를 깊이 연구해온 필자는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통화재정정책과 연계하여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래의 이야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 관한 도움말이며 팬데믹이 가져온 경제위기를 대처하기 위해 현재 진행되는 재난긴급지원 정책이 미래의 기본소득으로 반드시 연결되어야 할 이유를 들어보자.


CNBC.com의 지난 4월 6일자 보도에 의하면, 스페인이 유럽에서 장기적인 기본소득제도 UBI를 도입하는 것을 준비하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 같다. 스페인의 경제담당 장관은 전(全)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본임금을 국가단위에서 지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UBI 계획을 조속한 시일 내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런던대학의 연구 교수로 재직중인 Guy Standing은 CNBC와 인터뷰에서 UBI의 도입이 없이는 세계경제의 회복이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조만간 이루어질 UBI에 어떤 방식을 도입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디에서 정부가 재정을 마련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국민들에게 경제적 안전망을 제공하는데 실제적인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미국 내 자국기업들과 월가를 위해 중앙은행이 5조 달러를 발행하듯이 정부는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 된다. 한 평론가가 언급하였듯이 지난 4월 9일 CARES법(구제지원 관련법안)에 근거하여 1.77조 달러가 월가에 지원되었는데, 이를 130백만 미국 내 가구에 배분하면 가구당 13,600 불이 돌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헬리콥터-모니(비정상적 지원금)은 오직 월가와 기업가들만을 위해 뿌려졌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경제회복을 위해 발행하는 헬리콥터-모니는 실제로 다양한 용처로 사용될 수 있다: 인프라 건설, 각종 간접시설을 위한 개발은행에 대한 지원, 주정부 산하 대학의 등록금, 의료지원, 사회적 안전망과 UBI 등.

정부가 강제로 실시하는 방역봉쇄에 따른 현재의 위기상황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래 시민들의 가계 사정을 가장 취약하게 방치하고 있고 있기 때문에, UBI는 이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 직접적이고 가장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그룹은 UBI가 인플레를 야기하고 달러의 지위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비판한다. 금본위제를 지지하는 Mike Maloney는 4월 16일자 팝캐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불평을 토로했다. “콤퓨터에 추가적인 수치를 더하는 것(화폐발행)으로 우리가 부유해지지 않는다. 모두를 위한다는 구실로 비정상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돈을 찍어내는 것은 당신의 주머니와 지갑에 들어있는 달러의 가치를 갉아먹는 것이고……”

이 문제점에 대해 줄곧 연구를 해온 나는 상기의 언급을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면서, 중앙은행이 지원하는 UBI방식이 달러의 가치를 갉아먹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제대로 작동하는 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한다.

 

부채에 의존하는 제도에 있어서는 소비자의 경제는 만성적으로 돈이 부족하다

우선, 현대금융(MMT)의 기본원칙을 들어다 보자. 우리는 고정적이며 안정적인 통화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매일 은행에서 발행하고 소비되는 화폐통화라는 신용에 기초하고 있다. 은행이 대출을 일으키면 돈은 예금계좌로 들어가고, 대출금이 회수되면 사라진다. 한 시점에서 회수되는 금액보다 대출금이 적게 되면, 통화공급은 위축되고 이를 ‘부채디플레’라고 부른다. 디플레가 발생하면 불황과 불경기를 야기한다.

위에 언급한 헬리콥터-모니는 이러한 현상(syndrome)을 치유하기 위해 발행된 것이다. 밀턴 프리드만은 ‘디플레는 간단히 치유될 수 있으며 헬리콥터로 사람들에게 비를 내리는 듯이 돈을 뿌리면 된다’고 언급했다.

현재 화폐공급은 돈이 존재하는 방식에 문제가 생기면서 만성적인 디플레 상태에 빠져 있다. 은행들은 계좌를 만들면서 이루어진 대출금을 단순히 회수하는 것에 관심이 없으며, 이에 따라 최초의 대출금액보다 더욱 많은 액수가 항상적으로 누적되어 간다. 따라서 대출금액은 화폐공급량보다 빠르게 증가하게 되는데, 아래의 차트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https://workableeconomics.com/the-debt-based-economy/>

대출 부담이 채무자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커지면, 이들은 새로운 대출을 일으키지 않고 기존의 채무를 갚게 되면, 통화량이 줄어 들면서 디플레가 발생한다.

채무 바이러스(Debt virus)의 비판자들은 채무부담과 이를 갚을 수 있는 자금력 사이에 발생하는 격차를 통화의 속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약정 기한에 따라 채무자가 대출을 상환되면 대부자(은행)들은 총체적으로 이를 다시 경제영역으로 되돌려 빌려주면서, 해당자금은 다음 기한의 재무대차표를 담당할 채무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 가지는 결함은 대출로 창출된 자금은 상환이 이루어지면 소멸되는 것이지, 다시 경제영역으로 되돌아가 순환되지 않는다는 간단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창출된 부채는 갚는 순간에 제로가 되면서 돈(통화)은 사라진다. 또한 ‘통화의 속도’가 지니는 문제점은 대부자들이 획득한 이윤을 단순히 소비자 경제로 투입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실제 우리는 두 개의 경제영역에 살고 있다 – 하나는 실물경제로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고 거래되는 소비/생산의 실물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의 영역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서도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다. 금융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실물경제에 기생하면서 시스템 내부에 대부분의 자금을 총괄하고 있다. 문건으로 공식화 되어있지 않은 ‘연방제도의 역할’은 중앙은행의 통화량을 일상적으로 조작하여 금융시장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가와 투자자들이 산업의 노동자와 생산시설에 투자하는 것보다 금융의 영역에 투자하면 더욱 빠르고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은행가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자산가들은 그들의 돈을 주식과 채권에 투자하거나, 세금을 회피하는 조세천국을 찾아 외국으로 숨기거나, 또는 현금으로 보관한다. 2018년 현재 미국 기업들의 현금 보유액은 1.7조 달러에 이르고, 100불자리 지폐의 70%은 외국으로 빠져나가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생각보다 용이하다

반면에 생산/소비영역의 실물경제는 투자와 수요의 부족에 상시적으로 시달린다. 루즈벨트 재단에서 발간한 2017년 보고서의 제목은 ‘경제회복이란 무엇인가? 연방제도의 지속적인 통화확장의 정책에 관하여’이다.

이의 내용을 보면 GDP는 예측한 수준을 밑돌면서 하향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6년 당시의 실질 GDP는 십년 전에 이루어진 연방의회 예산처(CBO)의 예측보다 10% 낮은 수치를 보였으며, 이를 회복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보고서에 따르면, 빈혈병적인 성장세는 부족한 수요에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임금은 정체되어 있었고, 생산자들이 생산을 논하기 이전에 이를 소비할 수요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래 전 역사인 메소포타미아 시절에는 부채와 이를 갚을 자금 사이의 격차는 주기적으로 시행된 탕감, 즉 누적된 채무기록을 말끔히 지우면서 극복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채권자(은행)는 당시의 왕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단지 이들은 민간은행인으로 부채를 탕감시켜줄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더구나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것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므로, 파산에 처할 위험을 스스로 저지를 이유가 없다.

반면에 부채를 갚을 자금의 격차를 메우는 방안의 하나는 바로 UBI같이 부채의 의무가 없는 자금을 정기적으로 공급해 주는 것이다.

 

통화량을 안정시키기 위해 얼마만큼 돈을 풀어야 할까?

팬데믹에 따른 강제적 방역봉쇄는 위기의 부채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지만, 사실 경제상황은 이전부터 전례가 없는 과다한 부채의 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부채와 상환능력간의 격차를 해소할 해법으로 UBI가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채에 의한 디플레가 인플레로 전환되기 전에, 헬리콥터-모니의 정책에 여유를 제공해줄 기업들의 부채, 국가와 공공기관들의 부채의 격차 역시 만만치 않다.

소비자들(가계)의 사정을 들여다 보면, 2019년 현재 가계의 80%는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빌려야만 한다. 2019년 4월에 작성된 Lance Roberts의 차트를 참조해 보자.

2008년 이후 금융위기가 진행되면서 개인들은 소독과 부채를 합쳐도 생계유지 비용을 채울 수 없었다. 2019년 4월이 되자, 학자금과 자동차 구입용 대출은 이미 상환불능의 상태에 있거나 불능상황이 진행 중에 있었다. 마치 파도처럼 순서에 따른 개인파산, 은행파산, 그리고 부채디플레가 예측되어 있었다.

두번 째로 소개한 차트에 따르면, 개인당 소득과 생계비의 연간 격차는 15,000 불이 넘었고, 대출융자를 받아도 메울 수 없는 연간의 부족액이 3,200불을 넘어 섰다.

만약에 국가가 배당금으로 각 개인의 계좌로 매달 1,200불 즉 연간 14,200불을 입금시켜준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위에서 보듯이 필요한 생계비와 가처분 소득간의 격차인 15,000불을 거의 메울 수 있는 수준이다. 만약 수취인들의 80%가 입금된 돈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차용한 소비용 부채(신용카드, 학자금, 병원비 등)를 갚는데 사용하면, 풀린 돈은 부채를 상환하면서 사라진다.

이러한 부채의 상환(전부는 아니더라도)은 의무적일 수도 있고 자연적일 수 있다. 나머지 수취인 20%는 부채를 만들 필요가 없는 그룹으로 채무상환을 위한 국가배당금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부채상환 대신 저축을 하거나 비소비적 영역에 투자를 할 것이다.

소비재와 서비스 분야에 사용된 돈은, 물가를 인상시키지 않으면서 수요를 촉발하여 생산을 유도하고, GDP의 잠재적 예측치와 현실수치의 격차인 10%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것이고, 소비자 물가에는 변동이 없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현재의 경제적 봉쇄는 공급의 부족을 가져오고 부족한 상품 및 서비스 가격의 인상을 가져오게 될 것이지만, 이는 헬리콥터-모니에 따른 수요/창출(pull)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다. 반대로 공장의 조업중단과 공급의 혼란에서 야기된 거래비용의 증가에서 발생하는 비용/중가(push)의 인플레이다.

 

국제적인 선례

중앙은행의 통화공급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거 바이마르 시절의 독일과 짐바브웨, 베네수엘라 등에서 나타난 악명높은 초-인플레의 역사를 언급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경제를 진작하려고 정부가 통화를 팽창시켜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Michael Hudson 교수에 따르면, “역사에 나타난 모든 초-인플레 현상은 환율의 붕괴에 따라 외채가 과다해지면서 발생했으며, 국내소비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의 과정에서 형성된 외국환율의 문제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최근 국가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돈을 풀어낸 사례로 중국과 일본 같은 나라를 들 수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M2 통화량을 11조 중국우안에서 1800%를 증가시킨 194조 우안으로 늘려 왔지만, 같은 기간에 소비자 물가는 연간 2-3%선에 머물렀다. 풀려난 돈은 물가의 인상을 자극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GDP가 같은 속도로 성장하면서 이에 따른 통화의 수요와 공급을 동시에 맞추어가며 조절해 온 것이다. 별도로 고려할 사항은 중국인들의 저축성향으로 이들은 소득이 중가하는 만큼, 재화와 서비스에 사용하던 소득의 비중이 비례적으로 내려간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소위 ‘아베노믹스’라는 대규모 경제진작 정책을 통하여 일본은행이 정부의 채권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풀었다. 일본은행은 재무제표상으로 정부발행 채권을 구매하면서 정부부채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의 화폐를 추가 발행하여 경제부문에 돈을 공급하였다. 만약 미국의 연방제도가 같은 방식을 채택하였다면, 현재의 미재무부 채권액수인 3.6조 달러의 3배에 해당하는 12조달러를 보유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인플레의 목표인 2.0%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오히려 유례가 없는 화폐를 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가 아니라 디플레를 걱정하게 생겼다.

 

UBI와 보모국가에 대한 두려움

걱정이 많은 비판가들은 UBI를 도입하는 것이 혹 전체주의로 가는 것이 아닌지, 아니면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사회, 혹은 과잉보호의 보모국가 또는 의무적인 디지털 ID국가로 가는 통로가 될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것도 UBI와 동반할 필요는 없다.

제대로 작동하면 시민 개인들이 국가에 의존해야 할 일은 없다. 마치 투자자들이 주식에 따른 배당을 받듯이, 자신의 수입에 UBI가 추가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검증되었듯이 사람들이 게을러 지지 않는다. 반대로 UBI가 도입되기 전보다 더욱 적극적이며 생산적으로 변한다. 또한 현금사용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UBI가 아니어도 현재 통화량의 90%는 이미 디지털로 이루어진다. UBI의 지급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방식 그대로 따르면 된다.

UBI는, 곤경에 빠진 시민들에게 활력적인 안전망을 제공해주는 동시에, 통화 정책에 있어서도 안정적으로 자금을 공급해 주는, 재정정책의 양 측면의 목표를 모두 만족시켜줄 수 있다. 수요/공급의 실물경제영역에서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면서도 생산성을 촉진하기 위해서, 그리고 불경기에서 오는 디플레를 방지하기 위해서, 헬리콥터-모니의 자금살포가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출처 : from writor’s own The Web of Debt Blog.

Ellen Brown

변호사 출신으로 공공금융제도의 의장이자 ‘Web of Debt’, ‘The Public Bank Solution’, ‘Democratizing Money in the Digital Age’ 등 13권의 책을 펴낸 저자

월, 2020/05/0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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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의 시작을 알리는 『흔들리는 분단체제』가 출간된 것은 1998년이다. 앞서 말했듯 이 제목은 역설적이다. 분단체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리면서 분단체제 개념은 장기화되고 분단체제론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2006년에는 “지금 돌이켜 보면” 분단체제가 1987년 6월부터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었다”고 하였다. 1987년 6월은 양국체제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분단체제의 양국체제로의 전환’의 가능성이 이때부터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의 강조점은 다르다. 이렇듯 일찍부터 분단체제가 동요하고 흔들리고, 더 나아가 허물어지고, 해체되고 있다고 하면서, 그럴수록 분단체제는 묘하게 더욱 장기화하고 그에 따라 분단체제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고 하는 이론적 메커니즘이 분단체제론 2기의 특징이다.

이 메커니즘의 숨은 비밀은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매우 높은 평가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 두 사건은 높게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나 역시 매우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높게 평가하는 대목이 크게 다르다. 아무튼 ‘분단체제론적 고평가’는 1997년 발표한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에서부터 표명되기 시작하는데, 이 글은 1991~1994년 사이에 발표된 글들에서 보인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경계와 유보, 그리고 이를 전제로 한 소극적 인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입론의 첫 단계(1991~1994년)에서 분단체제론은 아직 분단체제극복운동과 현실과의 접맥점을 잘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접맥점이란 그렇듯 높은 목표를 갖는 분단체제극복의 경로와 주체를 구체화하는 것이 될 터인데, 첫 입론 단계에서는 아직 “통일운동이 민중운동이 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거나, “범한반도적 민중운동 …… 남북한 민중연대의 가능성”을 원론적 수준에서 언급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범한반도적 민중운동’과 ‘남북한 민중연대’ 주장이 “남북한의 현실을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 (현실적 근거가 없는) 당위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이상론이 아닌가”라는 비판에 대해, “문제의식은 정당한데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 구체적인 성과가 미미한 것과 문제의식 자체가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당위론 내지 관념론·이상론이라는 것은 마땅히 구별해야 할 터”라고 소극적으로 변명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원론적 시각에서 볼 때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 ‘남북한 민중연대에 기초한 범한반도적 민중운동’의 기준에서 한참 못 미침은 자명했을 것이고, 그래서 백 선생은 1991년 “유엔 가입을 포함한 한국 정부의 ‘북방정책’의 성과”가 “반민주적 분단체제의 부분적 개량에 불과함이 명백하다”고 썼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개량이요 개선이지 개악은 아니며,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할 가능성과 더불어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덧붙였다. 소극적인 인정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분단체제 장기화에 이바지”라고 하는, ‘분단체제의 장기화’가 긍정되는 묘한 표현과, 그 분단체제의 장기화가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고 하는, 분단체제론의 독특한 개념적 함수관계가 처음으로 명료하게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우선 유엔 동시가입 등 북방정책의 성과가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했다’는 말은 명백하게 틀렸다. 사태를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유엔 동시가입 등 북방정책의 성과들은 분단체제를 분명히 균열내고 흔들었다. 그 균열과 동요를 틀어막았던 것, 즉 진정 “분단체제 장기화에 이바지”했던 쪽은, 그 유엔 동시가입이나 <남북기본합의서>의 효과가 북미・북일 수교로, ‘남북 양국(평화공존)체제’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내외의 냉전대결 세력들이었다. 어쨌거나 이 말에서 드러난 분단체제론의 독특한 개념적 함수관계를 정리해본다면,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의거하여 분단체제극복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가기 위한 이론’이 될 것이다. 이 독특한 함수관계는 몇 년의 숙고를 거친 후인 1997년,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을 얻게 된다.

통일을 향한 획기적인 한 걸음을 뜻하면서도 분단체제의 급격한 붕괴를 피하는 국가체제라면 비교적 느슨한 형태의 복합국가인 국가연합(confederation)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 북의 ‘연방공화국’ 제안이 영어로는 ‘confederal republic’(즉 국가연합 공화국)으로 표현되었고 1991년 남한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안에 국가연합 단계가 포함되었다는 사실들을 떠나서라도, 남북 간에는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의 UN 동시가입이야말로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라는 면에서 그 어느 공동선언보다 실질적인 조치였으며, 이렇게 상호 인정을 나눈 두 국가 당국은 1991년 12월에 조인되어 92년 2월에 발표한 ‘남북합의서’에서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로 규정함으로써 이미 국가연합 형태의 단초를 열어놓은 형국이다.

“통일을 위한 획기적인 한 걸음”으로서 남북의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을 강조하고,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 이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였음을 언급하는 대목은 마치 분단체제론이 아니라 양국체제론의 논거를 펼치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피상적으로 보면 분명 그렇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중요한 점에서 인식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글을 쓴 1997년은 어떤 시간인가. 유엔 동시가입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고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수교한 반면, 북(DPRK)은 결국 미국, 일본과 수교하지 못한 채 매우 위축된 상황에서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음에도, 이러한 상태를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매우 후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양국체제론의 시각과 분명히 다르다. 양국체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남북 양국 모두에서 내적 외적으로 안정된 인정구조가 우선 성립되어야 한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은 외부 세계가 남북 두 국가를 각각 정상적이고 온전한 국가로 인정하는 ‘양국체제의 외적 인정구조 성립’을 위해 중요한 일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완전하고 불균등했다. 한국은 소련, 중국 및 동구권 모든 국가와 수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은 그러지 못했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후 위기에 처한 북을 압박을 통해 붕괴시키려만 했지 인정할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많은 국가가 북과 수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과 북은 국제적으로 매우 불균등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런 상태는 남북 간의 긴장의 소지를 오히려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듯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 속의 남과 북 두 나라의 관계가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이미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마치 안정된 평화적 동반 관계가 이미 달성된 상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분명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인식이었다.

양국체제론의 현실 인식과의 차이는 이어지는 다음 대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양국체제론은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이제는 유명해진 구절인 “(남북 쌍방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라는 표현을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본다. 나는 다른 글에서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란 앞서 분석한 ‘반쪽국가의식’에 정확히 상응하는 표현이다. 흔히 <남북기본합의서>는 1972년 체결된 <동서독기본조약>을 준용한 것이라 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상호 인정의 수준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동서독기본조약>에 크게 못 미친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동서독기본조약>은 서문, 10개조, 그리고 2개조의 추가조항 전체에서 조약 쌍방을 정식국호인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라 분명히 칭하고, 두 국가가 주권과 영토를 상호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구절은 <동서독기본조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필자가 독일의 동방정책과 관련해서 이와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표현을 조사해본 바로는, 1969년 10월 28일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의 연방정부 성명 중에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더라도 그 국가는 상호 외국이 아니며, 그 상호관계는 특수한 종류인 것”이라 했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 성명의 핵심은 독일에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그 두 국가는 서로 외국이 아닌 특수관계라는 뜻이었다. 먼저 국가로서 인정하면서, 그다음에 그 두 국가 간의 관계는 특수하다 한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이룬 두 개의 국가(one nation, two states) 간의 관계이니 특수하다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동서독은 기본조약 이후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일반 수교국 대사보다 격이 높은 장관급 대표를 상호 파견했다. 그런데 <남북기본합의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 국가로서 인정하지도 않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고 거듭 확인까지 하고 있다.(이 책 1부 1장, 52~53쪽)

따라서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문제의 그 구절은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아직 그 상태에 이르지 못한 남북 양 당국의 곤혹스러운 상황을 외교적 언어로 봉합하거나 절충하는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보면 비록 냉전이 종식이 되었다 하더라도 미국이 북을 인정할 의도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양측만으로 종전(終戰)을 이루기 어려웠다. 아직 전쟁도 공식적으로 끝마치지 못한 상대를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일이기도 하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미국과 별개로 독자적으로 북과 종전처리를 하고 상호 국가 인정까지 밀고 나갈 만큼의 의지와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북 역시 ‘남조선’을 곧바로 국가로서 인정할 만한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못했다. 위기에 처한 당시의 상황을 우선 모면하는 데 급급했지 장기적인 비전을 차분히 재정립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듯 남북 모두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제약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낮은 수준의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기본합의서>가 <동서독기본조약>에 비해 상호 인정의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불완전한 합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그것을 극복해갈 방향도 정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낮은 수준에서 합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 그것이 마치 오히려 더욱 높은 수준의 심오한 합의의 결과였던 것처럼 생각한다면 문제가 된다.

실제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표현은 그러한 혼란을 유발할 여지가 없지 않다. ‘남북은 국가 대 국가로 서로를 (아직 능력이 부족하여)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뜻이 높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북은 애당초 두 국가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으면 이 구절은 마치 ‘우리가 지금 하나는 아니지만 결코 둘일 수 없다’라는 높은 민족적 이상에 남북 대표가 의기투합한 결과, 곧바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통일로 직행하려는 속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표현되었던 것처럼 과잉 해석될 수도 있다.(이 책, 53~54쪽)

앞서 인용했던 1997년도의 백 선생의 글이 바로 그런 과잉 해석의 두드러진 일례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바로 그 문제의 구절을 “국가연합 형태의 단초를 열어놓은 형국”이라거나, “연방제 통일로의 길도 열어놓았”고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일종의 연합관계를 추인”하는 것이라고 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고평가는 이후 글에서 거듭 되풀이된다.

한쪽(DPRK)은 ‘고난의 행군’에다 ‘핵사찰’의 압박 속에서 생사존망의 위기에 빠져 있고, 휴전선의 삼엄한 대치와 긴장은 여전한데, 그러한 상황에서 ‘연방제 통일의 길’이 이미 열려 있고 남북 간 ‘연합관계’가 이미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강조한다? 실제 1991년은 그러한 ‘양국 평화공존 체제’의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열렸던 순간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이 분열되고, 내외 냉전대결 세력의 힘이 압도하면서 금방 닫히고 말았다.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1991년의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1997년에 돌아보면서 쓰는 글이라면, 그 가능성이 어떻게 열릴 수 있었으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빨리 닫히고 말았는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지적하는 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랬더라면 훨씬 더 시의적절했을 것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1997년 쓴 백 선생의 이 글이 왜 그렇게까지 낙관적인 글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분단체제론을 초기 입론한 1994년의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의 한반도 정세와 분단체제론」에는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1992년의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에는 지나가는 말로 “남북 양쪽에서 제기된 국가연합을 전제한 민족공동체라든가 연방제, 연합성 연방제 등”이라고 딱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두 사건이 분단체제론의 입론에서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에는 이 두 사건에 대한 매우 높은 사후 평가가 분단체제론의 새로운 입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렇게 변화한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시기상 남북 화해와 통일정책에 적극적이었던 김대중 씨의 집권 가능성이 생겼다는 상황과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북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든 짐작일 뿐이다. 그렇지만 순전히 이론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이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입론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미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 직후에 이 속에서 “분단체제의 장기화에 이바지할 가능성”, 그와 더불어 “분단체제극복운동에도 새로운 공간을 열어”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분단체제론 2기에는 ‘국가연합(또는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론의 키워드로 부상한다. 이 점이 1기와의 큰 차이다. 그런데 어떤 국가연합이든, 구 소련연방 국가들의 ‘국가연합(CIS)’이나 유럽연합(EU) 등 어떤 사례를 보더라도, 국가의 연합이라 하면 먼저 국가 간 국가로서의 완전한 상호 인정과 정식 수교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국가연합을 이룬 나라들은 국가연합 이전에 당연히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대사를 교환한다. 우리와 같이 한 민족이 두 나라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이 두 나라(ROK와 DPRK)의 수교관계란 마땅히 일반 외국 사이의 수교관계보다 더 높은 것이 된다. 그래서 동서독도 기본조약 이후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양국에 대표부를 설치했고, 일반 대사보다 급이 높은 장관급의 대표를 교환했다. 그것이 양국체제고, 그것이 전제되어 있지 못한 국가연합, 즉 ‘국가 간 정식 수교관계 없는 국가연합’이란 도대체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국가연합을 하자면 먼저 국가 간 수교가 당연히 선행해야 되지 않겠는가? 먼저 밥을 지어놓아야 그것으로 비빔밥이든 볶음밥이든 만들 것 아닌가. 밥도 해놓지 않고 비빔밥 나와라 볶음밥 나와라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애당초 불충분하고 불완전했던 것이 1991년의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였다. 이것이 양국체제론의 시각이다. 그러나 백 선생은 그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의 취지조차 그 후 북핵문제와 전쟁소동으로 빛이 바래버린 1997년에 이르러, 1991년에 남북은 이미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이뤄졌고, 더 나아가 기본합의서를 통해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조건이 무르익은 국가연합의 완성을 위해 이제 일로매진만 하면 된다. 이로써 분단체제론은 현실과의 실천의 접면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국가연합의 완성을 위해 일로매진할 때, 앞서 1991년의 글에서 예고하였듯, ‘분단체제극복운동에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새로운 공간이란 ‘분단체제 장기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분단체제론은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이곳, 국가연합(남북연합)의 터가 바로 분단체제론의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Hic Rhodus, hic salta! 동시에 바로 이곳이 ‘지평선 도달하기 운동’의 출발점이다. 이곳에 출발선을 그은 이상, 이제 여기서부터의 한 발짝은 모두 지평선을 향한 한 발짝이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는 만큼 우리는 지평선에 가까워진다. 분명하지 않은가! 지평선 도달하기 운동의 실체성, 실천성은 이로써 명확해진다.

백 선생이 “나라 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기본합의서 서문의 구절을 1997년에 이르러 그토록 높게 평가했던 이유를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분단체제는 하나의 체제다’라는 분단체제론의 명제에서의 강조점이, 이론 1기에는 ‘체제’ 쪽에 있었다면, 2기에는 ‘하나의’로 쪽으로 이동했다. 분단체제란 결코 둘일 수 없는, 둘이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체제다. 그렇다면 남북관계를 “나라 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했던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표현은, 이렇듯 (나라 대 나라 사이의) 둘의 관계가 아닌, ‘하나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관계”라고 하는 ‘분단체제’의 성격을 지극히 절묘하게 표현해준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태를 “국가연합을 향한 더욱 실질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와 등치하게 된다.

앞서 최원식 교수가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이라 했던 표현의 근원이 어디였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남북연합(국가연합)은 ‘하나의’ 체제인 분단체제를 상정하고 전제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하나의’ 체제인 분단체제를 상정하지 않고 ‘두 개의 나라’를 전제하는 양국체제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이런 사고법에서는 양국체제가 안정되어야 비로소 정책연합이든 국가연합이든 통일로 가는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는 생각은 자리 잡을 데가 없어진다. 분단체제론이 국가연합과 함께 강조해온 남북 민중연대(또는 시민연대)도 양국 수교를 통한 안정된 민간 교류 속에서 훨씬 대대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가로막혀 있다. 다만 양국체제는 ‘국가연합과 연방제를 통해 통일로 직행하는 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 간주될 뿐이다.

분단체제론 1기에서 분단체제 개념의 ‘과잉이론화’는 분단체제의 장기화와 분단체제극복 과제의 초역사적 보편화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2기에서의 과잉이론화는 분단체제가 국가연합(남북연합)의 전제조건으로 상정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로써 분단체제 자체가 국가연합이라는 적극적인 실천목표와 어느덧 엉켜버린다. 국가연합의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분단체제의 존속이 상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국가연합(남북연합)은 분단체체론의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초점이 된다. 이로써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의 존속을 상정해야만 하게 되었다. 앞서 이를 ‘분단체제론의 곤경(딜레마)’이라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분단체제론의 출발에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었던 분단체제가 이제 ‘남북연합’이라는 분단체제극복운동의 목표와 뒤엉키면서, 어느덧 분단체제 자체가 적극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처음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환골탈태하고 만다. 앞서 이를 ‘분단체제론의 역설(패러독스)’이라 했다. 이 분단체제의 곤경과 역설은 이론 2기에 이르러 이제 그 전모를 완연히 드러내게 되었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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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0/05/2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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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수석전략가 출신인 스티브 배넌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공산당을 분쇄시키자며 ‘전쟁-위원회’를 함께 구성하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때마침, 지난 6월말부터 미국의 고위공직자들이 중국공산당에 대하여 직설적인 공격발언을 이어왔다. 안보보좌관인 로버트 오브라이언, FBI 국장인 크리스토퍼 워레이, 법무장관 윌리엄 바 그리고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까지 가세하여 공산당을 전복시키라는 트럼프의 지시에 따라 “최악의 4인방” 발언이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미국 행정부는 중국과 양자관계를 단절하고자 구체적인 공세를 개시하면서, 휴스턴에 있는 중국 영사관을 폐쇄시켰고, 보건부 장관인 알렉스 아자르가 대만을 공적으로 방문하였으며, 중국의 온라인 매체인 Tiktok과 Wechat의 미국 내 운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미국에 대한 일대일 대응전략(tit for tat)과 보복전략인 이랑전사(wolf-warrior)방식 대신에, 중국의 실제반응은 놀랍게도 타협적이고 차분하였다.

지난 8월5일 신화통신과 인터뷰를 통해 외교부장인 왕이는 ‘신냉전’이라는 개념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어떤 수준이든 언제 어디서라도 대화를 통해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자는 제안을 역으로 제시하였다.

이틀 뒤에는 중국공산당 최고위직으로 외교관계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양제츠 상무위원은 기고를 통하여 “역사를 회상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미중의 우호적 관계를 확고히 지키고 안정시키자”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양 상무위원은 닉슨 행정부에서 시작된 미국의 중국 포용정책이라는 전례의 신화를 치세우면서 모든 방면에서 양국의 호혜적 협력을 촉구하였다.

문제는 중국의 우의적 외교정책이 너무나 늦게 내용도 없이 제기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누구도 이러한 제안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북경당국의 대화제안은 ‘소귀에 경읽기’ 식으로 워싱턴은 어떠한 대화도 중국측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외교정책은 너무나 단순하게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면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복원하기 위하여 다음의 3가지 사항을 전달하고자 의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첫 째는, 중국은 미국과 냉전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과거의 소련이 아님을 분명히 했으며 패권국가인 미국을 대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혔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희망을 담은 생각으로 양국이 함께 호흡을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한다. 중국은 과거 미국과 소련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갔던 냉전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미국에게 조언하고 있다.

왕이 부장과 양제츠 상무위원은 닉슨 대통령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하였던 과거의 호시절을 다시 조명하면서, 양국의 이념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협력하며 공존한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는 미국의 ‘4인방’이 던진 펀치를 태극권 방식으로 가볍게 피해가려는 대응이다.

두 번째의 메시지는 미국 독자적으로 냉전을 치를 수 없다.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5-eyes 국가들 즉 호주와 뉴질랜드 영국과 캐나다 등에게 중국은 미국과 새로운 냉전을 시작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린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타협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미국이 반-중국 동맹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무마하려고 한다. 중국의 냉전거부 노력은 왕이 부장이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순방에 나선 것으로도 확인된다.

미국의 동맹을 자처하는 국가들은 ‘4인방’이 제시한대로 냉전의 시대로 진입할 것인지, 반대로 ‘4 인방’의 제안이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 단기간의 대결을 통해서 장기판 방식의 승부(장군!)를 거는 반면에, 중국의 지도자는 바둑 방식의 셈법에 따라 향후 자신들의 위상에 유리한 경로를 찾아가고 있다. 이를 통하여 단기간의 이익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당장의 커다란 위험을 회피하는 개임을 추구한다.

마지막 세 번째의 메시지는 미중 간의 잠재적인 대결이 가져다 주는 위험에 대하여 국제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최근 미국대선을 앞둔 시기에 아시아-태평양에서 물리적 충돌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략적인 오판 혹은 군사적인 실수로 인하여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또는 대만해협 등에서 열전 또는 핵대결이라는 잠재적 위협이 존재한다.

중국 최고위직 외교관들은 중국이 가지는 인내의 한계선은 공산당의 규칙준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 보사부장관인 아지르가 대만을 공식 방문하면서, 중국은 대만해협을 둘러싼 대규모 군사훈련에 돌입하거나, 남중국해에 항공모함을 타격하는 미사일 시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편집자 주, 최근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유교적 전통에 의하면, 도덕적 기준(명분)을 상실하면 전쟁에서 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팬데믹이 창궐하는 가운데, 국제적인 긴밀한 협력을 촉구하고 나서면서 중국은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은 자중지란에 빠져있다.

과연 중국이 상기 메시지들로써 미국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을까? 중국이 자신들이 의도하고자 하는 부드러운(점잖은) 방식으로 상황을 대응할 수 있을까? 오는 11월 미국 대선이 미중 관계의 향후 진행에 매우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은 자칫 우발적 사고를 통해서 전쟁사태에 돌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출처 : 동아시아포럼EAF in ANU on 2020-09-01.

Kai He

호주 Griffith University의 국제정치학 교수이며, 당 대학의 아시아 센터 및 공공정책 연구소의 책임자이다

금, 2020/09/25-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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