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토픽뉴스]인천광역시교육청(교육감 도성훈)은 지난 29일 제110주년 경술국치일을 맞아 ‘인천 학교 내 남아있는 일제 잔재 및 군사문화 바로 알기’ 조사를 진행했으며, 현재 조사 결과에 대해 정밀화 및 학술 검토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인천시교육청은 작년 12월에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와 업무 협약을 맺고 전문적인 조사를 의뢰했다. 기초 사료 조사를 시작으로 올해 3월부터 5월까지 관내 학교의 상징물(교명, 교가, 교목, 교화, 교표 등)과 조형물에 대한 1차 전수조사를 마쳤으며, 현재 학교 현장의 의견수렴과 협의회를 거쳐 3차 검토가 진행 중이다.
연구진은 일제식 지명과 관련된 교명,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이 작사 또는 작곡한 교가, 학교 내 일본식 석등이나 조형물, 군사문화 일부로 여겨지는 동상 등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향후 연구진이 검토를 완료하면 인천시교육청은 모든 학교에 보고서를 배부할 예정이다. 또한 교육공동체가 일제 잔재와 군사문화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고, 자율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도성훈 교육감은 “객관적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충분히 검토한 후 학교에 알리고자 한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이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다”고 강조했다.
민족연 ‘역사 현장 시민답사’ 이원규 작가 강연·안내 성황 “국가유공 수훈이 진정한 복권”
▲조봉암 연구의 권위자인 이원규 소설가가 ‘조봉암의 생애와 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22일 ‘강화 죽산 조봉암 생가터와 청년기 활동 및 추모비’를 살펴보는 ‘역사 현장 시민답사’ 행사를 진행했다.
이날 답사는 강화에서 나고 자라 청년기를 보냈던 죽산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의 업적과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됐다.
죽산 연구에 독보적인 지위를 굳혀 온 소설가 이원규 작가의 강연과 안내로 진행된 행사에는 강화와 인천지역 주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대거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답사단 일행은 죽산의 모교인 강화초등학교를 출발, 생가터 표지석이 남아 있는 강화읍사무소를 거쳐, 갑곶돈대 앞 진해공원추모비와 선원면 생가터를 차례로 살펴봤다.
이원규 작가는 답사에 앞서 진행된 강연에서 ▲죽산의 출생과 소년시절 ▲3.1 만세운동과 청년시절 ▲독립운동과 고난기 ▲광복 후의 영광과 굴레 ▲53년 만의 무죄선고 ‘햇빛 속으로’ 등 시기별로 조봉암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강화지역 조봉암 생거지 및 활동지역 현장답사 참가자들이 이원규 작가로부터 죽산의 독립운동사와 정치역정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다.
-죽산의 생애
죽산은 1899년 강화 선원면에서 출생했다.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강화군청 사환 임시고원으로 취직했지만 3.1 만세운동에 참가해 구속과 고문을 되풀이하며 ‘민족적 각성’을 다져 나갔다. 일본과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거치면서 사회주의자의 길로 접어든 죽산은 국내와 중국 상하이를 오가며 눈부신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중국에서 체포돼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형극의 수감 기간을 겪은 뒤 출옥해 인천에 정착했지만, 광복 직전인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돼 감옥 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여운형, 박헌영 등과 손잡고 건국준비위원회와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조직했으나, 미군의 공작으로 전향 성명을 내고 공산당을 떠나 ‘비(非) 공산정부 건립’을 기치로 내걸었다.
1947년 하반기에 우파와 결합해 단독정부안을 받아들인 뒤, 48년 5월 제헌의원으로 당선돼 헌법 기초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7월에는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취임해 “혁명 없이 신속한 토지 균등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은 ‘농지개혁법’을 주도했다.
국회부의장으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죽산은 1952년 8월 5일 2대 대통령에 출마해 79만 표를 얻었으며, 56년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16만 표를 획득, 이승만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했으나 그의 득표력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1심 형량인 5년을 2심에서 뒤집고 사형을 선고한 뒤, 1959년 7월 31일 재심이 기각된 지 17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20세 청년기에 3.1 운동에 뛰어들어 모진 고초를 감내하며 20여 년간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광복 뒤에는 ‘농지개혁’ 등 화려한 업적을 남긴 죽산은 “내가 비록 사형을 당해도 애국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유언을 남긴 채 60세의 나이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강화지역 조봉암 생거지 및 활동지역 현장답사 참가자들이 이원규 작가로부터 죽산의 독립운동사와 정치역정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다.
– 죽산의 꿈과 남겨진 과제
지난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권유에 따라 2011년 2월 11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해 50여 년 만에 ‘간첩죄’의 누명을 벗었으나, 지금까지도 ‘독립유공 서훈’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죽산이 가졌던 꿈’과 그가 뿌린 ‘씨앗’에 대해 이원규 작가는 “죽산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관철시켜 신속한 시간 안에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균등성 확보에 성공했고, 이는 농민들이 공산혁명을 거부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면서 “자경농이 된 농민들은 자녀교육에 집중해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평등과 정의의 사회’는 여전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진보당 강령인 ▲민주주의 체제 확립과 책임 있는 혁신정치 실현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를 통한 민족자본 육성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현 ▲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및 노동자 권리 보장 등은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를 대변하고 있다.
▲이원규 작가가 죽산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금월리 가지마을을 가리키고 있다.
– 죽산의 생가터,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 26-3
갑곶돈대 앞 ‘진해공원 추모비’에 이어 선원면 생가터를 찾은 답사단 일행은 이 작가의 안내에 따라 죽산의 정확한 출생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갔다. 죽산이 태어난 곳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맞서고 있다. 한쪽은 강화군 선원면 선원사를 등지고 바라보이는 마을 왼편 구릉지대인 ‘지산리 남산대’ 를 다른 쪽은 바로 옆 100m 지점의 ‘금월리 가지 마을’이라고 주장한다.
‘남산대’를 주장하는 쪽은 먼 친척형으로부터 “‘너희들은 기억하고 있다가 후손에게 알려 줘라. 독립운동가인 봉암이라는 우리 집안 사람이 남산대에서 태어나 강화 성내 소학교를 다녔는데 대문고개를 넘으며 책을 읽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반면 이 마을 출신 친척인 전직 교장 조규성 씨는 “1957년 강화초등학교 교사로 부임 직후 출생지가 ‘선원면 가지마을’로 표시된 죽산의 생활기록부를 봤다”고 기억한다.
이에 대해 이 작가는 “현장 확인과 증언 등을 종합하면, 금월리 가지마을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가지마을의 지적도에 나오는 대지 7필지에 대해 현지에서 전수 조사한 결과, 26-3 한 곳의 내력이 확인되지 않는 점에 비추어 이 곳이 가장 유력한 출생지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 작가는 답사를 마치는 자리에서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 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는 ‘잘 사는 나라’를 추구했고, 남북이 대화를 통해 평화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면서 “죽산의 국가유공 수훈이 관철되는 것이 진정한 복권이자, 국가 양심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원규 작가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고와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겨울 무지개‘가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이는 가운데도 동국대와 인하대에서 소설 강의를 맡는 등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분단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온건한 필체로 표현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세 차례의 조봉암 평전과 김원봉, 김산 평전 등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조명하는데도 열정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문학상, 현대문학상, 박영준 문학상, 동국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죽산 조봉암 생가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인천지역 김구선생 발자취 탐방 행사’ 참가자들이 출발지인 인천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8일 오전 중구 일대에서 백범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탐방하는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두 번째 행사를 진행했다. 이 행사는 청년 김구(김창수)가 일본인 살해 혐의로 체포돼 인천감옥(감리서)에 갇혀 있으면서 인천 지사들의 도움으로 사상 전환을 한 뒤 탈옥해 민족운동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됐다.
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장과 이희환 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의 해설로 진행된 탐방에는 인천내항살리기시민연합, 구월지역아동센터 어린이 등이 시민들과 함께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참가자들은 인천역을 출발해 중구청(구 일본 영사관 자리)과 인천감리서터(인천 감옥), 김구 선생의 탈옥길(답동 마루터)을 답사했다. 이어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가 김구 선생의 옥중 생활을 돌보던 ‘옥바라지길과 내리교회, 선생이 수감 중 직접 쌓은 축항 노역길을 둘러 봤다.
– 인천 감옥(감리서) 수감생활과 탈옥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김구 선생과 인천과의 인연은 청년시절부터 시작된다.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다음해인 1896년 3월 김구는 일본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황해도 치하포에서 스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뒤 체포됐다.
인천감옥으로 옮겨진 김구는 미결수로 생활하던 기간 동안 중국에서 발간된 ‘세계 역사·지지’ 등 신서적을 읽으며 사상적 전환을 이뤘다. 22세 때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도 다른 죄수들을 공부시켜 ‘김창수 덕분에 인천 감옥이 학교로 불렸다’는 신문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모친 곽낙원 여사는 감리서 주변에서 기거를 하며 인천 객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모진 고초를 마다하지 않고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백초 유완무와 인천 서구 서천동 출신 서예가 유희강은 수감 중이던 김구의 사상 전환을 도와준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1898년 3월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탈옥을 감행했다. 탈옥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남아 있으나 현재 인천시는 대강의 탈옥로를 ‘백범로’로 이름 붙여 기념하고 있다.
– 광복 직후 첫 전국순회 방문지로 인천 찾아
광복 직후 어렵사리 귀국한 김구가 1946년 38선 이남 지방을 순시하면서 처음 들른 곳이 인천이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3세 때 탈옥·도주했고 41세 때 17년 형을 선고받고 또다시 감옥으로 들어간 형극의 장소를 첫 방문지로 선택한 것이다.
지난 1996년 전국순회로 열렸던 백범 김구의 겨레사랑전이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전시실에서 개최된 것을 계기로 ‘백범 김구선생 동상건립 인천시민위원회’가 꾸려졌다. 그 다음해인 1997년 전국 최초로 시민들의 성금으로 인천대공원에 백범광장이 조성됐고 김구 동상에 세워졌다.
이 때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실물크기 동상이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전시관에서 인천대공원 백범 동상 옆으로 옮겨졌다. 곽 여사가 하루 종일 객주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서 얻은 찬밥을 바가지에 담아 선생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향하는 모습을 새긴 동상이다.
인천시는 현재 백범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중구 신포로 주변에 ‘청년 김구 거리’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내년 말쯤 완공할 예정이다. 이곳에는 내동 감리서 터 주변의 ‘탈옥로 도보 순례길’과 곽낙원 여사의 노고가 서린 신포시장 주변의 ‘옥바라지길’, 백범의 손길이 남아있는 내항 1부두 일대의 ‘노역길’ 등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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