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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단독 문서발굴]‘친일파끼리 싸움’이었던 1973년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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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단독 문서발굴]‘친일파끼리 싸움’이었던 1973년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

admin | 월, 2020/07/20- 19:49

월전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표준영정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3년 박정희 정부가 충무공 이순신의 표준영정을 지정할 당시 화가의 친일 전력(前歷)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기록원이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1973년 문화공보부의 문서에 따르면, 표준영정 통일 심사에서 심사위원들은 월전 장우성과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초상화를 놓고 고심하다 월전의 작품을 표준영정으로 결정했다. 경쟁 대상이던 두 화가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적 때문에 <친일인명사전>(2009년 발간)에 친일화가로 이름이 올라 있다. 당시 문서를 보면 표준영정 지정 당시에는 이들의 친일 행적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월전 장우성의 작품은 1973년 지정된 이후 47년간 표준영정의 영광을 누려왔다. 하지만 곧 지정해제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국정감사의 지적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조만간 영정동상심의위원회를 소집해 표준영정 지정해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는 지난 6월 문체부에 충무공 표준영정 지정해제를 신청했다. 문체부가 김영주 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영정동상심의위원회 제3차 회의(6월 12일)’ 자료에 따르면 올해 지정해제가 이뤄진 후 내년의 연구용역을 거쳐 2022년 작가 선정과 2023년 표준영정 지정 등의 절차가 보고됐다. 표준영정 해제의 이유로는 ‘복식 오류’와 ‘국정감사에서 친일화가 지적’이 나타나 있다. 지난해 10월 문체부 국정감사에서 김영주 의원은 “충무공의 표준영정을 그린 장우성 화백은 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다수 그렸고, 조선총독부가 주는 상까지 받은 사실까지 역사 기록에 나와 있다”면서 “항일의 상징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을 친일화가가 그렸다는 자체는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문체부가 김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는 충무공 초상화에 대한 현황이 파악돼 있다. 월전 장우성과 이당 김은호의 작품에는 ‘친일화가 작품’이라는 평가가 들어가 있다. 1973년 정부 문서에 들어가지 않았던 ‘친일’이라는 평가가 2020년 정부 문서에 포함된 것이다.

2023년 표준영정 새로 지정 계획 1973년 5월 문공부 문서를 보면 5월 17일 “사계 권위자 회의를 개최하여 현충사 봉안 영정으로 통일할 것을 합의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현충사 봉안 영정은 월전 장우성이 1953년 제작한 초상화를 말한다. 이날 회의 내용 가운데는 ‘이당본을 택하는 경우’에 대해 “월전본은 현충사에 봉안되어 성역화 이후 많은 국민에게 알려져 있으며 어느 영정보다도 기품이 있어 보이므로 이를 대체하기 어려움”이라고 적혀 있다. 월전 장우성의 초상화가 충무공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이유다. ‘월전본을 택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이당은 월전의 은사로서 월전보다 먼저 충무공 영정을 그려 봉안하였고 그동안 많이 보급되어 있어 이당 측의 강한 반발과 물의가 예상됨”이라고 적혀 있다.

월전 장우성에 앞서 스승인 이당 김은호는 1950년 이순신 초상화를 그렸다. 김은호의 작품은 당시 해남 우수영과 통영 제승당에 있었다. 장우성의 작품은 아산 현충사와 정읍 충열사에 걸려 있었다. 두 친일화가의 문화권력 다툼 때문인지 표준영정의 지정은 당시에 널리 공식화되지 않았다. 문공부 문서에는 “영정 통일에 따르는 사회적 물의를 가급적 줄이고, 새로 제작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이당 김은호의 기존 영정과 진해·광화문·부산의 동상은 존치시키고 기타 조잡한 것은 폐기, 철거함”이라고 적혀 있다. 또 이 문서에는 “영정 통일의 내용은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아니하고, 정부 및 공공단체에 1차 행정적으로 보급하며, 전 국민에게 단계적으로 확대시킴”이라고 적혀 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1949년 반민특위가 해체됐고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됐다”며 “1973년 표준영정 통일 당시 독재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친일문제를 언급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표준영정을 놓고 다퉜던 월전과 이당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나란히 친일화가로 실려 있다. 장우성은 1944년 3월 결전미술전 일본화부에 <항마(降魔)>라는 작품을 응모해 입선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장우성의 1942년작 <부동명왕(不動明王·일본 군국주의의 호국불)>을 근거로, ‘항마’라는 작품에서 악마는 ‘귀축미영’, 즉 연합군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했다. 1943년 6월 16일 <매일신보>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 기사가 실렸다. 여기에는 “동양화의 장우성 화백은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銃後)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답사”를 했다고 나와 있다. 장 화백의 후손들은 2009년 서울고법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게재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으나 기각됐다.

“표준영정 제도 폐지해야” 견해도 김은호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 친일화가다. 그는 1937년 일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렸다. 귀족이나 관료 부인이 금비녀를 조선군사령부 중장에게 바치는 내용의 그림이다. 김은호는 일왕을 위해 ‘화필보국’·‘회화봉공’하고자 결성한 조선미술가협회에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표준영정 지정 작업은 197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문공부의 1973년 5월 2일 ‘충무공 영정 통일’ 기안 자료에 따르면 영정 통일 사업이란 타자 글자 앞에 “대통령 각하의 지시에 따른”이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다. 이 문서는 사업 추진 경위를 일자별로 요약해 타자로 쳤다. 마지막 부분에는 “1973년 4월 28일 충무공 영정 및 동상 통일 문제 연구를 대통령 각하께서 지시”했다고 손글씨로 덧붙여 놓았다.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당시 충 남 아산 현충사에서는 해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탄신일 행사가 개최됐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에는 “박 대통령은 온양관광호텔에서 있은 리셉션에 참석, ‘현재 전국에서 제작되고 있는 충무공의 영정이 각기 다르므로 이를 통일하고 각지에서 난립되고 있는 동상 건립을 규제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윤주영 문공부 장관에게 지시했다”고 나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일제 충성 혈서’를 쓰는 등의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1973년 표준영정 통일 작업을 지시한 정치지도자부터 초상화를 그린 화가까지 모두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방학진 기획실장은 “표준영정 제도 자체가 역사적 인물의 영정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정하는 독재의 잔재”라면서 “영정 해제 이후에는 표준영정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0-07-18>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 문서발굴]‘친일파끼리 싸움’이었던 1973년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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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우철훈 선임기자

2019년은 3·1운동 100년, 상해 임시정부 100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단 한 명의 독립운동가도 누락되지 않게 찾아라”고 ‘엄명’을 내렸다. 보훈처는 최근 전국 시·군·읍·면사무소에 있던 일제강점기 수형인 명부 전수조사를 통해 독립운동 수형자 5313명을 찾아냈다. 이 중 2487명은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 정부와 민간단체도 별도의 위원회를 만들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문·방송을 비롯한 많은 언론도 역시 일제강점기와 항일투쟁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기획물을 쏟아내고 있다.

충남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은 1987년 8월 15일 문을 연 대한민국 최대 독립운동사 전시·연구·교육·홍보기관이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부터 준비해 국민 성금과 모금, 정부 예산 등 말 그대로 온 국민이 합심해 만들었다. 아마 올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기관일 것이다. 이준식 관장(63)은 한국독립군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손자다.

한국독립군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자

-3·1운동 100년, 임정 수립 100년이다. 올해 의미는 역시 1919년 4월 11일 나온 임정헌장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선언에 있다 할 수 있나.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을 잡으라면 바로 1919년이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혁명적 변화가 이뤄진 때다. 당시는 국민주권주의의 선언적 의미가 강했다면 이후 100년의 역사는 이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어떤 외국학자가 한국은 세계 혁명운동사에서 100년간 끊임없이 혁명하는 특이한 사례라고 하더라.”

-독립기념관 차원에서, 또 산하 독립운동사연구소 차원에서 하고 있는 사업은 무엇인가.

“올 2월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려 하고 있다. 우선 2024년 완성할 예정인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의 경우 올 100주년에 맞춰 특별판을 낼 예정이다. 또 1000명 정도를 웹으로 전시하고,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을 3·1운동 주제로 리모델링한다. 이번에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당시 만세시위 때 사용된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 원본도 특별 전시한다. 이들 자료는 워낙 소중해 평소에는 복제본만 전시했다. 기미독립선언서 원본은 국내에 3개밖에 없다.”

-이번에 보훈처에서 수형인 명부를 통해 새로운 독립유공자를 발굴했다. 독립기념관도 독립유공자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가.

“우리도 지난해 TF를 꾸려 360명 정도를 찾아냈다. 올해는 주로 3·1운동 유공자를 찾으려 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서훈받지 못한 김찬·강달영 등 이른바 좌파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시급히 재개해야 한다. 참여정부 때 이들을 대대적으로 서훈했지만 이명박 정부 중반 이후, 7~8년간 좌파 독립운동가 서훈이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해방 후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다. 사실 이 분들은 새로 찾아내기보다 정리해 포상을 신청하면 된다. 개인적으로 꼭 포상해야 할 사람은 허형식이다. 의병장 허위의 조카이자 독립운동 명문가 출신으로 본인도 항일무장투쟁 중 순국했다. 동북항일연군이지만 김일성 부대와 다른 부대였다.”

-4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하고, 큰형과 조카가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박진목은 ‘통일되지 않은 조국은 진정한 광복이 아니다’라며 서훈 신청을 하지 않다 돌아가셨다.

“그렇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조문기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부민관에서 친일 어용대회가 열리는 것에 분노,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분이다. 조문기 선생도 ‘자주적 통일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서훈을 받느냐’면서 신청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서훈을 신청했다. 그런 사람도 찾아내 포상해야 한다.”

이 관장은 임시정부는 좌우 통합의 결과였고, 또 좌우 합작기간에 가장 큰 성과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정신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완전한 자주독립은 민족통합과 떼려야 뗄 수 없다”면서 “그것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광장에 무명용사 상징물을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번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남북이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남과 북이 함께 추진할 다양할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 관장도 “정부 입장에서 올해 가장 시급한 것이 한반도 평화 분위기”라며 “일단 북에 있는 3·1운동 자료를 입수하고, 3·1운동 사적지에 대한 현지조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북에 있는 3·1운동 사적지 문헌조사는 이미 마친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사업은 우리 통일부가 승인하고, 무엇보다 북측에서도 입국을 허가해야 할 사안이다. 이 관장은 남북 독립운동사 문제에 대해 “좁게는 독립운동가 발굴을 위한 자료협조 부문이 있고, 더 넓게는 현존하는 현대사 역사인식의 간극을 좁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장의 외조부는 한국독립군총사령관과 한국광복군총사령을 지낸 지청천 장군(1888~1957)이다. 지 장군은 대한제국 시기 장학생으로 일본 육사에 유학, 중위시절 3·1운동 소식을 듣고 선배 김경천과 만주로 망명했다. 지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시작으로 해방까지 26년간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해방 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해 제헌·2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그는 “할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사시다 말년에 잠깐 정치를 한 분으로 군인으로서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면서 “만주에서 무장투쟁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다”고 소개했다.

-독립운동사에서 무장투쟁은 외교투쟁에 비해 소홀히 연구된 분야다.

“할아버지에 대한 평전도 있고 논문도 몇 편 있다. 그러나 만주 무장투쟁은 독립군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별로 없다. 지난해 만든 신흥무관학교 뮤지컬 가사를 보니 ‘우리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다. 실제 무장투쟁이 그렇다. 나중에 귀국한 인사들의 회고록이나 일제 밀정의 정보문서가 발굴되지만 무장투쟁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연구가 금기시된 측면도 있지 않나.

“그렇다. 1910년에서 1930년대까지는 민족주의 계열이 무장투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무장투쟁 세력이 중국 관내로 이동한 1934년 이후 만주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이 활동했다. 한국학계에서는 민족주의 계열만 강조하거나, 사회주의 계열만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둘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다. 평화통일을 얘기할 때 남북 역사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부문으로 김일성 주석의 무장투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무장투쟁은 이제 학계에서 사실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19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짜 김일성, 복수 김일성을 얘기했는데, 지금 학계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김일성 주석의 실체 활동은 인정하는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선 남북의 견해 차이가 있다.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이 평화공존, 평화통일을 위해 필요한 과제다.”

이 관장은 요즘 많은 언론이 독립운동 다큐멘터리와 기획기사를 쓰는 것에 대해 “분단 이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조선의용대’를 다큐로 다룬 것을 보면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김원봉이 만든 독립무장투쟁 부대로 김원봉은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6·25 때 참전하기도 했다.

이 관장은 숨겨진 독립운동가를 찾고, 임정기념관을 세우는 것도 의미 있지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고 아쉬워했다. 항일투쟁과 광복과정에서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찾지 못한 무명용사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조선에서, 만주에서, 저 연해주는 물론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름도 얼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문헌에 나오는 독립운동가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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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올해 사업계획 등을 밝히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운동 주도

사실 외국 정상이 방문했을 때 첫 번째 방문지가 바로 대부분 해당국의 무명용사비다. 우리는 1907년 영국 언론인 존 매켄지가 찍은 구한말 의병사진에 큰 감명을 받지만 정작 그들의 신원을 확인할 생각을 않는다. 이 관장과 기자는 사진 속의 의병 실체를 찾는 작업도 의미 있겠다는 것에 공감했다. 그는 “적어도 대한민국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무명용사를 추념하는 상징물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 상징물에 ‘이름은 모르지만 당신의 희생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라고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스크바 크렘린궁 바로 앞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고, 베이징 천안문 앞에 중국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무명의 인민을 기념하는 커다란 비석이 있고, 파리 개선문에도 무명용사 기념 상징물이 있다는 점을 들어 광화문광장에 무명용사 상징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지청천 장군과 같이 환국했다. 어머니는 서울대 도서관 사서를 하다 아버지와 결혼했다. 부친이 사업을 하다 망해 부산 화교학교에 취업하는 바람에 식구들이 모두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는 초·중·고교를 부산에서 다녔고, 1976년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역사를 좋아했지만 ‘사학과 나오면 배고프다’는 담임선생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학보다 역사공부를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의 전공은 ‘일제강점기 운동사’다.

학위를 받고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제작에 상임위원으로 참여했고, 그 인연으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았다. 주변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이 친일파 청산작업을 하니 당신이 적격”이라는 추천 때문이다. 2009년 다시 민족문제연구소로 돌아온 그는 근현대사기념관을 만들고 관장으로 활동했다.

2011년 11월 이명박 정부 때 ‘건국절’ 논란으로 시작된 친일·독재 미화 역사왜곡에 항의, 그는 ‘역사정의실천연대’에 참여해 ‘역사전쟁’을 시작했다. 2013년 박근혜 정권부터 역사왜곡을 노골화하자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으로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이 관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제1타깃이 통합진보당, 제2타깃이 전교조와 민주노총, 그리고 제3타깃이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면서 “1·2타깃을 치고 세 번째 타깃을 치려다 역사왜곡이라는 강한 역풍을 맞고 박근혜 콘크리트 지지율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 8학군 학부모 사이에서 ‘박근혜가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든다’는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 이 싸움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촛불정부가 들어선 2017년 12월 그는 제11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했다. 그는 “처음에는 독립기념관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제주 항일투쟁기념관과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됐고 서울에도 임시정부기념관이 생길 예정”이라면서 “(독립기념관이) 국내 최대 독립운동사 연구·전시시설이지만 천안이라는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email protected]·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9-01-26> 경향신문 

☞기사원문:[원희복의 인물탐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김찬·강달영·허형식도 서훈해야”

월, 2019/01/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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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교서 사용 확인…”친일 청산을 통해 학교문화 개선”

(청주=연합뉴스) 변우열 기자 = 충북 도내 일부 학교가 친일 음악가들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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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연합뉴스 자료사진]

19일 충북도교육청에 따르면 친일문화 청산 등을 위해 도내 초·중·고 교가의 작사가, 작곡가를 전수조사하고 있다.

현재까지 376개교를 조사한 결과,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9개교 등 19개교가 친일 음악가들이 만든 노래를 교가로 사용하고 있다.

충주의 3개 고등학교의 교가는 현제명이 작곡하고, 이은상이 작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현제명이 작곡만 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도 1곳이 있다.

또 김성태가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가 9곳이 있다. 김동진과 이흥렬이 작곡한 노래도 각각 3곳에서 교가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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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명사전 [연합뉴스 자료사진]

현제명, 김동진, 김성태, 이흥렬 등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고, 이은상은 친독재 논란을 빚고 있다.

도교육청은 전수조사를 마친 뒤 친일 음악가들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다른 노래로 교체해 나갈 예정이다.

이에 앞서 충북도교육청은 2017년 ‘일본 향나무(가이스카 향나무)’를 교목(校木)으로 지정한 5개교의 교목을 소나무, 은행나무 등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3·1운동 100년을 맞아 아직도 남아있는 친일을 청산하는 등 학교 문화를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친일 음악가들이 만든 교가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19-02-19> 연합뉴스 

☞기사원문: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교체”…충북교육청 전수조사 

※관련기사 

☞노컷뉴스: 친일 음악가 만든 교가 19개교 교체 추진 

☞한국일보: 충북교육청 “친일음악가들이 만든 교가 교체”

☞뉴시스: 충북 19개 학교서 친일 작사·작곡가 교가 사용 

☞헤럴드경제: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지금도 부른다…충북도교육청 전수조사

☞대전일보: 충북교육청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교체” 전수조사 나서

화, 2019/02/1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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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③·끝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마지막 편으로 “박정희가 경제는 살렸다”는 주장의 맹점을 짚어봤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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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유신’이라는 명칭은 메이지유신(1868년)에서 따온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그러나 1936년 2·26쿠데타를 일으킨 황도파 군인 등 군국주의자들이 쿠데타 등으로 강력히 요구한 쇼와 유신이 그 원형이라고 지적하셨다. (2·26쿠데타는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조선 총독을 지내기도 한 사이토 마코토를 비롯해 주요 인사를 살해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요구했던 사건이었다. 토론과 협상에 의한 정치를 부정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추구한 것이다.편집자)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열등생이었다가 만주 군관학교 이후 우등생이 됐다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박정희의 국가 운영 방식이 일본 사관학교의 군대식 교육과 만주국 국가 운영에 그 원형이 있다고 했는데, 결국 일본 식민 시대의 국가 운영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서중석 : 박정희가 메이지 유신을 중시했다는 것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회상을 통해 나온 말이다. 기시는 만주 침략의 핵심 인물이었고 연합국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지목됐는데도 두 번이나 일본 수상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그의 글에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가 5.16 쿠데타 직후에 쓴 글들, 특히 <우리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의 책에 메이지 유신 지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한 문장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언급이 전혀 없다. 특히 <국가와 혁명과 나> 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는 있는데도 이런 말이 한마디도 안 나온다. 추측건대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것은 박정희가 기시에게 외교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정희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는 1936년 젊은 군인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서 큰 감명과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쇼와 유신과 박정희 유신 체제가 닮은 점이 많다. 기성 민간 정치인에 대한 불신, 강력한 통치, 군대식의 능률적 사고 등이 그렇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박정희는 쇼와 유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재학중일 때, 일본 육사에 있었을 때, 또 만주군 군인이었을 때 군인 사회를 풍미했던 것이 쇼와 유신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박정희가 이른바 국가개조 운동으로 재건 국민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데 그때 <조선일보>에는 재건 국민 운동은 일제 말기 군국주의 일본의 전시 동원 국민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재건 체조는 일제 말기의 라디오 체조를, 신생활복은 국민복을, 국민가요는 말 그대로 일제 말기의 국민가요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이 쓴 글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등 국민 개조 운동, 국민 교육 헌장이 쇼와 유신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 교육 헌장은 메이지 교육칙어, 황국신민서사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조회, 국기 하강식 등 국가주의 맹세의 의례와 교련과 체육의 모의 수류탄 던지기 군사교육, 충효교육, 라디오 체조와 내 집 앞 쓸기 운동, 국민가요 부르기, 퇴폐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 고도 국방 체제를 목표로 한 총력 안보 체제, 국가 통제형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일제가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에서 실행했던 국가주의를 본 떠 되살린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유신 체제는 일본 극우가 꿈꿨던 쇼와 유신의 한국형 변조라는 지적인데 대체로 적절한 평가라고 본다.

유신 체제는 쇼와 유신의 군국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쇼와 유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만주 인맥이라고 평가되는데,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 중심 인물로 체포됐을 때 살아난 것도 국내 만주 인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과 경제적 관계를 포함해서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자들이 아베의 외조부 기시를 비롯한 만주 인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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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프레시안 : 그런데 대다수 국민은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공로는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 개발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한국인 중 상당수가 1960~70년대의 경제발전을 박정희의 공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발 독재’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붙어있던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특히 유신체제가 경제 발전에 효율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이 점을 특별히 유의해 검토하고 있다.

<현대사 이야기> 8권 전체가 박정희 집권기의 경제 발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9권에서 유신 쿠데타를 다룰 때도 이 문제를 포함했다. 앞으로 유신 붕괴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루려고 하는데, 경제가 유신 붕괴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예정이다.

일부 진보 세력의 ‘개발 독재’ 주장은 심각한 허점을 안고 있다. 우선 3공화국과 유신체제가 삼척동자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히 다른 정치체제인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박정희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중화학 공업인데, 1970년대에 한국에 중화학 공업 시설들이 많이 세워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유신체제 붕괴에서 경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대만도 1972년 10대 건설 계획을 세우며 1970년대 내내 중화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우리의 경우 1972년 유신 체제 이전에 중화학 공업은 이미 포항제철이나 비료공장 등 중요한 시설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2년에서 76년까지 진행된 제3차 경제개발계획도 1971년에 구체적 계획이 다 세워졌다. 즉 이 개발 계획은 유신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화를 1973년 1월에 선언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박정희는 1971년 7월 1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중화학 공업을 선언한다. 그는 앞으로 중화학 공업 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 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박정희 스스로도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신 체제 같은 강권 체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개발 독재론자나 중화학 공업 건설과 관련한 글 등에서 보면 1973년 정부의 각종 특혜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1974~75년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는 두 해 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화학 공업을 시작하려면 엄청난 자본이 투자돼야 하는데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그 정도의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한국 경제에 기적이 출현했다.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74년부터 ‘중동 건설 특수’가 나타났다. 석유 폭등으로 떼돈을 번 산유국들이 대규모 건설공사에 착수한 것이다. 이것은 다 알다시피 박정희와도, 유신체제와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중동특수에 맞춰 한국은 1975년부터 몇 십억 달러씩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대를 포함해 몸집이 엄청나게 커진 업체들이 있었고, 1975년을 전후로 해서 부동산 투자와 투기가 벌어졌다.

여기서도 건설 업체들이 상당한 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즉 중화학 공업화의 발판은 유신 체제가 아니라 중동 건설 특수에 따른 막대한 외화 수입, 그리고 부동산 투자 투기에 따른 대기업의 막대한 이윤 창출이었다.

이런 요소들이 작용하면서 국가가 보증해주는 차관을 가지고 중화학공업에 투자해서 누가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느냐가 당시 재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재벌로 성장하는데 중화학 공업처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중화학 공업에 투자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과다 중복 투자 현상이 일어났다.

유신 체제 붕괴에는 경제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1978년 12.12 선거에서 여당이 심각한 패배를 당했는데 당시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경제통인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부총리 등을 포함해 경제 각료를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경제 문제가 심각해져서 선거에 패배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가 나온 것이다.

대통령은 처음에 말을 안 들었지만, 김정렴 회고록에 따르면 계속 이러한 요구가 나왔고 결국 김정렴은 9년여 만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남덕우 등 경제 각료를 다 바꿨다.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신민당 농성 사건과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면서 시작된 부마항쟁 역시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고 이에 따라 유신 체제가 경제 파탄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쏘겠다고 한 것도 부마항쟁 현장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회고록에는 김재규가 경제 문제에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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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은 군사 작전을 하듯이 밀어붙여 수출을 늘렸다.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쥐어짠 병영 같은 공장이 있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성 노동자들. YH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은 유신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다. ⓒ연합뉴스

유신체제에서는 특히 재벌 중심의 팽창 정책이 주조를 이뤘는데, 유신 체제를 지키기 위해 성장 경제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일어난 이유도 과도한 성장 위주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박정희가 1979년 1차 조정을 했지만 이어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이 두 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조정을 했어야 할 정도였다. 1979, 80년에는 중화학 공장 가동률이 40~60%에 머물고 있었다.

박정희의 고도성장정책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피부로 느끼게 했고 너무나도 지독한 투기 광풍에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1978년 한 해에 지가가 48%가 올랐다. 부마항쟁 때 낮에는 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지만 밤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샐러리맨도 있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 당하고 사는 사람들, 소외된 자, 실업자, 저임금 노동자 등 20대 안팎이 시위 대열에 대거 합류했고, 세금 폭탄으로 불만이 컸던 상인들도 가세했다. 김재규는 이를 민란으로 규정했다.

물론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해에 중동 노동자 송금액이 11억 달러를 넘어서 기록적이었고, 현대의 총 매출액이 36억 달러로, 미국 종합경제지인 <포춘>이 집계하는 기업 총 매출액 순위에서 세계 98위에 올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8년에는 노풍(통일벼 계열 신품종)벼 피해도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작물 시험장 책임자인 박노풍의 이름을 따서 노풍으로 불린 새 볍씨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볍씨가 나왔으면 실험 단계를 충분히 거쳐야 하는데 박정희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빨리, 많은 양을 수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박정희 정권은 12·12선거 나흘전인 12월 8일 이듬해부터는 노풍을 재배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돌아선 농민들의 마음을 붙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농민들은 박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

1978년 후반기부터 나빠진 경제는 1979년에 한층 악화되었고, 1980년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5.6%(전두환 회고록 등), -5.2% 등으로 나온다. 남한이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것은 잘못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박정희가 얼마나 경제를 잘못 운영하고 있었는지가 막 드러나고 있었던 시점이었는데 김재규가 조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박정희 유신 체제가 경제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지를 미처 깨닫게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미 동맹과 촛불 민심

프레시안 : <현대사 이야기>에는 유신 선포 하루 전 미국 대사관에 관련 사실을 통보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에서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자라는 인식은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1960년 4월 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미국이 강경 진압을 막았다는(그리하여 민주화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한미 동맹을 절대시하는 측과 자율성을 늘려야 한다는 측이 대립하고 있다. 촛불 민심을 받들어 자주적 외교를 하라는 요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북핵 위협이 커지면서 남한 정부의 운신 공간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내 민주화가 대외 관계의 민주화로 나아갈 길은 없을까

서중석 : 미국은 자신의 국익 범위 내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한 역할을 했다. 기본적으로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4월 혁명 때만 해도 미국은 4월 18일까지 3.15 부정선거를 용인하고 이승만-이기붕을 인정하는 가운데 한국 문제를 바라봤다. 그런데 4.19 시위를 보면서 달라졌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문제를 풀어가기가 어렵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한말에도 있었고, 그러면서 중립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한반도의 중요성은 해방후 미·소 점령 아래서, 특히 좌우 합작 세력에 의해 강조됐다. 친미파로 미 군정 입법의원 의장이었던 김규식은 ‘친미 반소’나 ‘반미 친소’는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건 자주적 입장을 망각하고 미·소 양국의 조선에 대한 진정한 협조를 방해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미 군정에서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도 미국과 소련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중심을 바로잡고 ‘중앙당’으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길만이 통일 독립을 보장하고 국익을 최대화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친미파임에도 왜 이런 주장을 했는지, 이들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울리고 있는 때가 지금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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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해 새로운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90년을 전후로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와해되는 가운데.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가 여기서 벗어나려면 전략적 사고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여운형 등이 활동할 때만 해도 미·소 두 나라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은 4강 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됐다. 21세기 들어오면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세계 4강으로 부상했는데, 이 4강은 모두 한국을 둘러싸고 있다. 한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4강시대를 맞게 되었다.

1990년 전후로 냉전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한 이후 경제 및 문화 관계가 강화되면서 굉장히 긴밀해졌다. 중국은 어차피 우리와 이웃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국가였는데, 이제는 경제적으로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로 부상했다.

한국 경제의 돌파구로서 남북 관계라든지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진출해 유라시아 시대를 여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한반도가 중·러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북핵 해결도 4강과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전처럼 한쪽에 따라다니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고, 우경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전쟁국 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중국과 협력해 대응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일본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일본을 중·러에 대한 대항마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이런 차원에서 한·일 군사관계도 권고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는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해야 한다.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찾아온 4강 시대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4강에 대해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김규식이나 여운형, 안재홍 등이 친미친소를 중요시했던 것은 두 나라로부터 강력한 지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친미친소만이 두 나라로부터 주체성 자주성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한반도를 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이 점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아주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때를 전후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중국은 1992년 한국과 수교 이후 북한과 관계가 아주 심하게 틀어졌는데 이 때 북한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고 김정일이 8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최상의 환영을 받고 장쩌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해 7월 김정일은 평양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김정일과 포옹을 하고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가능성을 속삭였다는 점이다. 미국 못지 않게 북에 적대적이었던 일본은 그해에 갑자기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를 크게 늘리고 2002년 고이즈미 수상의 평양 방문을 진행했다.

이 나라들이 김정일이 좋아서 그랬을까? 남북 협력시대가 열릴 때 북한에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이 동아시아 또는 세계 정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북아 정세는 또다시 경색됐다.

2000년대에 사는 우리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안목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대처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 배치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아무런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작스럽게 배치를 결정했다. 더군다나 탄핵을 받은 상황에서 이른바 사드 ‘알박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 문재인 정부가 전쟁 반대를 명확히 선언하고 그에 따르는 노력을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비판도 받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4강 시대에 얼마나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는 데 관건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대해 명료한 인식과 확고한 실천이 요구된다. (끝)

<2017-10-26>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목, 2017/10/2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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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대법원 공보관실(02-3480-1451)


대법원(재판장 대법원장 김명수, 주심 대법관 김소영)은 2018. 10. 30.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신일철주금 주식회사)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신일철주금)의 상고를 기각하여, 피고가 원고들(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시켰음(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

이 사건 핵심쟁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임. 이에 대하여 다수의견(7명)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으로서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였음.

이러한 다수의견에 대해서는, ‘이미 2012. 5. 24. 선고된 환송판결에서 대법원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그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하여 재상고심인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대법관 이기택의 별개의견1과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는 포함되지만,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므로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대법관 김소영, 대법관 이동원, 대법관 노정희의 별개의견2가 있고,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이 아니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대법관 권순일, 대법관 조재연의 반대의견이 있으며, ‘다수의견의 입장이 조약 해석의 일반원칙에 비추어 타당하다’는 취지의 대법관 김재형, 대법관 김선수의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이 있음.

1. 사안의 내용

▣ 원고들은 1941년~1943년 일본의 제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임

▣ 2005. 1.경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었고 원고들은 2005. 2.경 일본 기업인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함

▣ 제1, 2심에서는 원고들이 패소하였으나,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68620 판결(환송판결)은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로 판단하였음

▣ 환송후 제2심은 환송판결 취지에 따라 피고가 원고들에게 강제동원 피해에 따른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고, 위자료 금액을 1억 원씩으로 정하였음

▣ 피고가 이에 불복하여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음


2. 대법원의 판단

가. 사건의 주요 쟁점

▣ ① 원고1, 2에 대한 일본 법원 판결의 효력과 기판력 (상고이유 1점)
원고1, 2는 이 사건 소 제기에 앞서 일본에서 동일한 소송을 제기하였다가 일본 법원에서 패소 확정되었음
이러한 일본 법원의 판결이 외국법원 판결의 승인 제도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그 효력이 미친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됨

▣ ②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부담하는지 여부 (상고이유 2점)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이 운영하던 제철소에서 강제노동을 당하였는데, 구 일본제철의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채무가 피고(신일철주금)에게 승계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됨

▣ ③ 청구권협정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 (핵심 쟁점) (상고이유 3점)

▣ ④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할 수 있는지 (상고이유 4점)
피고는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피고의 소멸시효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다투었음

▣ 우선 대법원은 위 ①, ②, ④ 쟁점에 관해서, 환송판결 및 환송 후 제2심판결과 마찬가지로, 일본 법원의 판결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으로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위 ①쟁점),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고에 대하여도 행사할 수 있으며(위 ②쟁점), 이 사건 소 제기 당시까지도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위 ④쟁점)고 판단하였음

▣ 위 ③쟁점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대법관 사이에 견해가 갈렸음
청구권협정은 전문(前文)에서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라고 정하였음. 제1조에서 일본이 대한민국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고 정하였고, 이어서 제2조 1.에서 “…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정하였음. 제2조 3.에서는 “…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고 정하였음.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에서는 “… 청구권에 관한 문제에는 한일회담에서 한국측으로부터 제출된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동 대일청구요강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을 확인하였다.”라고 하였음

이러한 청구권협정 등의 해석상, 1) 원고들이 주장하는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2) 포함되었다면 그에 따른 효력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즉 권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인지, 외교적 보호권만이 소멸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체법상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인지 등이 이 사건의 쟁점임

나. 다수의견(7명) : 원고들의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음

▣ 이 사건에서 문제되는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이하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임(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구하는 것이 아님) ☞ 이는 아래와 같은 환송 후 제2심판결의 사실인정에 기초한 것임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불법적인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기간 군수사업체인 일본의 제철소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인력을 동원하였고, 핵심적인 기간 군수사업체의 지위에 있던 구 일본제철은 철강통제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본 정부의 위와 같은 인력동원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인력을 확충하였음
원고들은 당시 한반도와 한국민들이 일본의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장차 일본에서 처하게 될 노동 내용이나 환경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일본 정부와 구 일본제철의 위와 같은 조직적인 기망에 의하여 동원되었음
더욱이 원고들은 성년에 이르지 못한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였고, 구체적인 임금액도 모른 채 강제로 저금을 해야 했으며, 일본 정부의 혹독한 전시 총동원체제에서 외출이 제한되고 상시 감시를 받아 탈출이 불가능하였으며 탈출시도가 발각된 경우 혹독한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음

▣ 이러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음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음
▪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개최된 제1차 한일회담에서 이른바 ‘8개 항목’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무관계에 관한 것이었음. 위 8개 항목 중 제5항에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라는 문구가 있지만, 이 또한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음.
▪ 1965. 3. 20.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가 한․일간 청구권 문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고, 나아가 “위 제4조의 대일청구권은 승전국의 배상청구권과 구별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인당사국이 아니어서 제14조 규정에 의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일간 청구권문제에는 배상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음
▪ 청구권협정문이나 그 부속서 어디에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없음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음
▪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발표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도, 정부가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책임이 ‘도의적 책임’에 불과하다는 것임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환송 후 제2심에서 피고가 협상 과정에 관한 증거를 추가로 제출하였으나, 그 증거들에 의하더라도 결론이 달라진다고 볼 수 없음
▪ 1961. 5.경 협상 과정에서 대한민국측이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언급한 사실, 1961. 12.경 협상 과정에서 대한민국측이 ‘8개 항목에 대한 보상으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그중 3억 6,400만 달러(약 30%)를 강제동원 피해보상에 대한 것으로 산정(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 부상자 1인당 2,000달러 기준)’한 사실 등을 알 수 있음
▪ 그러나 위와 같은 발언 내용은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 과정에서 교섭 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하고, 13년에 걸친 교섭 과정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었던 내용도 아님
▪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고, 실제로 당시에는 일본측의 반발로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음
▪ 위와 같이 협상과정에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청구권협정은 3억 달러(무상)로 타결되었음. 이처럼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 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포함된 것이라고는 보기는 어려움

다. 별개의견1 (1명) : 이미 환송판결에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였으므로,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하여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음 (다수의견과 상고기각 결론은 같으나 이유를 달리하는 것임)

▣ 환송판결의 기속력(상급법원의 판단에 하급법원이 따라야 하는 것)은 환송 후 제2심뿐만 아니라 재상고심에도 미치는 것이 원칙임

▣ 환송 후 제2심의 심리과정에서 새로운 증거 등에 의하여 환송판결의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변동이 생겼다면 기속력이 미치지 않는 것이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렇게 볼 만한 사정이 없음

▣ 재상고심이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기속력이 미치고, ‘환송판결에 명백한 법리오해가 있어 반드시 이를 시정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환송판결이 전원합의체를 거치지 아니한 채 종전 대법원판결이 취한 견해와 상반된 입장을 취한 때’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기속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함

이 사건의 경우 환송판결에 위와 같은 예외적인 사정이 없으므로, 환송판결과 같은 결론을 취할 수밖에 없음

라. 별개의견2 (3명)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함. 다만 원고들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함. 따라서 원고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피고를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 (다수의견과 상고기각 결론은 같으나 이유를 달리하는 것임)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

청구권협정 및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에 의하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8개 항목’ 제5항에서 규정한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이 포함됨이 분명한데, ‘기타 청구권’에는 원고들 주장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된다고 봄이 타당함
대한민국은 1961. 5.경 협상 과정에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까지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음. 1961. 12.경에도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보상금을 3억 6,400만 달러로 산정하고 이를 포함하여 8개 항목에 대한 총 보상금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였음
▪ 1961. 5.경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이 위 요구액은 국가로서 청구하는 것이고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일본은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여 협상에 난항을 겪었음
▪ 이에 일본은 증명의 곤란함 등을 이유로 유상과 무상의 경제협력의 형식을 취하여 금액을 상당한 정도로 올리고 그 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하였고, 대한민국은 순변제 및 무상조 등 2개 명목으로 금원을 수령하되 구체적인 금액은 항목별로 구분하지 않고 총액만을 표시하는 방법을 다시 제안하였음
▪ 이후 구체적인 조정 과정을 거쳐 1965. 6. 22.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제1조에서는 경제협력자금의 지원에 관하여 정하고 제2조에서는 권리관계의 해결에 관하여 정하였음


청구권협정 체결 이후 대한민국이 각종 보상입법을 통해 보상조치를 취한 것도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됨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임

▣ 위와 같이 포함은 되지만, 원고들의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일본의 국내 조치로 해당 청구권이 일본 내에서 소멸하여도 대한민국이 이를 외교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상실하게 될 뿐임

‘외교적 보호권’이란‘자국민이 외국에서 위법․부당한 취급을 받은 경우 그의 국적국이 외교절차 등을 통하여 외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민에 대한 보호 또는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

청구권협정에는 외교적 보호권의 포기에서 나아가 ‘개인청구권’의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음
 ▪ 국가와 개인이 별개의 법적 주체라는 근대법의 원리는 국제법상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권리의 ‘포기’는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하여야 한다는 법률행위 해석의 일반원칙에 의할 때,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대신 포기하려는 경우에는 이를 더욱 엄격하게 보아야
 ▪ 청구권협정에서는 ‘포기(waive)’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음

당시 일본은 청구권협정을 통해 개인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만 포기된다고 보는 입장이었음이 분명함

▪ 일본은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국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재산권조치법을 제정․시행하였음. 이러한 조치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음

마. 반대의견 (2명) :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됨.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하여 가지는 개인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되게 되었으므로, 원고들이 일본 국민인 피고를 상대로 국내에서 강제동원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소로써 행사하는 것 역시 제한됨 ⇒ 파기환송 의견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별개의견2와 같음

▣ 하지만 별개의견2처럼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개인청구권 자체가 소멸되거나 포기된 것은 아니지만, 그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함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된다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음
청구권협정 제2조는 대한민국 국민과 일본 국민의 상대방 국가 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청구권협정을 국민 개인의 청구권과는 관계없이 양 체약국이 서로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하는 내용의 조약이라고 보기 어려움.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 주체는 피해자 개인이 아니라 그의 국적국이며 개인의 청구권 유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음
▪ 청구권협정 제2조 1.에서 규정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문언은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체약국 사이에서는 물론 그 국민들 사이에서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부합함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양 체약국은 물론 그 국민도 더 이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함

청구권협정 체결 과정이나 체결 이후의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당시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도 소멸되거나 적어도 그 행사가 제한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으로 보임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고, 청구권자금의 분배는 전적으로 국내법상의 문제라는 입장을 취하였음
국제법상 전후 배상문제 등과 관련하여 국민의 재산이나 이익에 관한 사항을 국가간 조약을 통해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일괄처리협정’은 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조약 형식임
대한민국은 청구권보상법, 2007년 및 2010년 희생자지원법 등을 제정하여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함. 실제 피해에 비해 매우 미흡하다는 사실은 청구권협정의 효력을 해석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음 


청구권협정 제2조의 문언 의미는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됨
– 청구권협정에서는 명시적인 포기(waive) 표현이 없음. 개인청구권이 실체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되거나 포기되었다고 보기 어려움. 제2조 3.에서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음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함. 청구권협정으로 인하여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도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함.

대한민국은 피해국민의 소송 제기 여부와 관계없이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할 책무가 있음

바.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2명) : 다수의견의 입장이 조약 해석의 일반원칙에 비추어 타당함

▣ 청구권협정의 문맥, 청구권협정의 목적 등에 비추어 청구권협정의 문언에 나타난 통상적인 의미에 따라 해석할 경우, 청구권협정에서 말하는 ‘청구권’에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까지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려움

▣ 교섭 기록과 체결 시의 여러 사정 등을 고려하여 그 의미를 밝혀야 한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결론이 달라지지 않음
청구권협정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청구권과 그 포기에 관하여 명확하게 정하고 있지 않은데도 명시적 근거 없이 이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판단할 수는 없음


3. 판결의 의의

▣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은 2012년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환송판결을 선고하였음

▣ 이후 위 판결에 대하여 학계 등에서 그 찬반을 둘러싼 여러 논의가 있었고, 특히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포함되었다고 볼 경우 개인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인지,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되는 것인지 등에 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음

▣ 본 판결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피고의 다른 상고이유 주장도 배척함으로써, 피고가 원고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최종적으로 확정시켰음

화, 2018/10/3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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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권,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 안 돼”

[법률저널=안혜성 기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대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피고 신일철주금 주식회사의 상고를 기각, 피고가 원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원고들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의 제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로 일본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철주금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됐고 원고들은 2005년 한국에서 다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 모두 “일본 판결 내용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과 기타 사회질서에 비춰 허용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의 확정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은 “일본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것임이 분명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일본판결을 승인하여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1031-1

사건을 재심리한 서울고등법원은 다음해 7월 원고들에게 각 1억 원의 위자료 지급을 명하는 판결을 내렸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함에 따라 장장 13년 8개월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결론지어졌다.

이번 소송의 쟁점은 ①동일한 내용의소송이 일본에서 패소 확정됐는데 한국에도 효력이 미치는지 ②피고 신일철주금이 구 일본제철의 손해배상채무를 승계하는지 ③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원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볼 수 있는지 ④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항변할 수 있는 지로 이 중 원고들의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먼저 대법원은 ①, ②, ④ 쟁점에 관해 “일본 법원의 판결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으로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고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으며, 이 사건 소 제기 당시까지도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핵심 쟁점인 ③쟁점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의 해석과 효력을 두고 대법관 사이에 견해가 엇갈렸다.

다수의견은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으로 이러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판단에는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칙적으로 부인했고,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권리문제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 불명확하다는 점, 협상과정에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했음에도 정작 청구권협정은 3억 달러(무상)로 타결된 정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포함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상고를 기각해야 한다는 결론은 다수의견과 같으나 그 이유를 달리하는 별개의견으로 이기택 대법관은 “이미 2012년 5월 24일 선고된 환송판결에서 대법원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므로 그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해 재상고심인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소영,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는 포함되지만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므로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이에 반해 권순일, 조재연 대법관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이 아니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라며 일본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반대의견을 나타냈다.

이들 대법관은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한다”며 “청구권협정으로 인하여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고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협정에 따라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허용되지는 않지만 협정으로 인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는 국가에 의해 보상돼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한편 이번 판결에 대해 일본 측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며 고노 다로 외무상도 “이번 판결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위배되며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쌓아온 양국 우호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제재판 등 강경 대응할 뜻을 나타냈다.

<2018-10-30> 법률저널

☞기사원문: 대법원 “日기업, 강제동원 피해자에 위자료 1억 지급해야”


협의 VS 강제집행…강제동원 피해배상은 어떻게 진행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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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의 재판 끝에 일본 기업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어떠한 방식으로 배상받게 될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이춘식(94)씨 등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2심 승소 판결 이후 흐른 5년…강제동원 소송 원고 4명 중 1명만 남아

신일본제철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배상 소송은 지난 1997년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구 일본제철에 강제동원됐던 고(故) 여운택씨와 고(故) 신천수씨는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임금지급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 2003년 10월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에 고 여씨와 고 신씨는 지난 2005년 대한민국 법원에 같은 내용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구 일본제철에서 강제노역했던 또 다른 피해자 이씨와 고(故) 김규수씨도 소송에 합류했다. 1, 2심에서는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일본의 확정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지난 2012년 5월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서울고법)으로 파기환송했다. 서울고법은 지난 2013년 7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구 일본제철은 일본 정부와 함께 침략 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5년이 지난 후에야 대법원은 원심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씨를 제외한 피해자 3명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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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 vs 강제집행…“국외 재산은 집행 절차 복잡해”

긴 기다림 끝에 확정 판결이 내려졌으나 즉각적인 배상금 지급은 요원하다. 배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일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신일철주금에서 배상금 지급을 이행하지 않으면 법원으로부터 집행문을 받아 강제 집행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법령에 따라 재산조사를 걸쳐 국내에 있는 부동산과 주식, 채권 등으로 배상금을 받게 된다.

이씨 등의 소송을 지원한 시민·사회단체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공동행동)’에 따르면 신일철주금은 국내 기업인 포스코의 지분을 약 3% 보유하고 있다. 다만 정확한 재산 내역은 조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해당 소송을 대리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 김세은 변호사는 “신일철주금과 협의를 할지 강제집행을 할지 좀 더 논의를 해봐야 한다”며 “2013년 서울고법의 판결에 근거해 가집행할 수 있었으나 5년 동안 기다렸다. 신일철주금에서 직접 이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외에 있는 재산을 강제 집행해야 할 경우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국외 재산에는 우리 법원의 판결 효력이 미치지 못한다. 일본 법원을 통해 강제 집행 판결을 별도로 받아야 가능하다. 문제는 일본 법원에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우리 법원은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개인의 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지만 일본 법원의 해석은 다르다. 일본 법원에서 강제동원 피해 배상에 대한 집행 판결을 승인할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신일철주금은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청구권 협정과 일본 정부의 견해에 반하는 판단이 나와 매우 유감”이라며 “일본 정부의 대응 상황 등을 감안해 적절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매우 유감이다. 결코 수용할 수 없다”며 “국제 재판을 포함해 여러 선택지를 두고 대응을 강구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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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불참’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자는 어떻게 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 손해배상 소멸시효 기간 내에 소송을 제기하면 배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의 쟁점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해석이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일본 기업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유효하다’고 밝혔다. 향후 강제동원 재판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손해배상 소멸시효가 언제부터냐는 것이다. 손해배상 소멸시효는 ‘객관적 권리행사 장애 사유가 없어진 때’부터 계산된다. 전문가들은 강제동원 손해배상의 경우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이 확정된 이날을 기점으로 봤다. 앞서 대법원은 과거사 사건에 대해 대법원의 판결이 난후 6개월 이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거사 사건에 대한 소멸시효가 너무 짧다”며 단기 소멸시효인 3년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은 지난 1938년부터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과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중 최소 60만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이소연 기자 [email protected] / 사진=박효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8-10-31> 쿠키뉴스

☞기사원문: 협의 VS 강제집행…강제동원 피해배상은 어떻게 진행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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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열린 지난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박수를 받는 모습.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3년여 만에 승소하면서 피해자 측은 강제동원 등 일제의 반(反) 인도적 행위에 관한 배상 청구권이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는 관련이 없게 돼 배상이 가능해졌다며 반겼다.

이날 승소한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징용 피해자뿐 아니라 다른 기업 징용 피해자나 근로정신대 등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도 잇따를 전망이다. 그러나 해당 일본 기업에서 실제 배상을 받아내기까지는 쉽지 않은 절차가 남아있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변호사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대법원 선고가 나온 지난 30일 오후 민변 사무실에서 판결의 의미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법무법인 해마루 김세은 변호사는 “이번 소송은 청구권협정에 관한 쟁점이 핵심이었던 것 같다”면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까지 모두 소멸했는가, 일본 기업 상대로 일제 때 있었던 불법행위의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가 등이 쟁점이었다”고 짚었다.

이어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는 청구권협정에서 말하는 청구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 대법원의 결론”이라면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는가는 오랫동안 논란이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이 확정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함께 소송을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법률과 조약에 대한 법률적 해석에 대한 최고 권한은 대법원에 있다”면서 “외교부와 법원이 입장이 다르다거나 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는 유권해석만 있었던 것이고, 오늘의 대법원 확정판결에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구속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판결에 힘입어 이춘식(94) 씨 등 원고(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신일철주금에 위자료 지급을 임의이행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한일 양국의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탓에 신일철주금이 임의이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상태다.

원고 측은 신일철주금이 한국 국내에 재산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강제집행 절차를 밟을 수도 있지만, 이에 관해서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김 변호사는 “오늘 판결을 근거로 국내 재산에는 법원을 통해 강제집행 절차로 나아갈 수 있다”면서 “신일철주금이 포스코 제철소에 3%가량 지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해당 주식에 대한 집행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강제집행 절차로 나아가느냐는 별개 문제”라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강제집행 절차를 선택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신일철주금 주주총회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에 따를 의향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면서 “다만 정부 차원에서 풀어야 할 문제도 있기에 계속 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국제법 전문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조시헌 연구위원은 “일제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일 간에 합의가 없다는 것이 오늘 확인된 것”이라면서 “앞으로 한일 간 협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고, 협의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제 중재를 통해 분쟁 해결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은 “피해자들이 고령인데 국제 분쟁 해결 절차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한일 간에 과거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관해 청구권협정 외에 추가 협정을 조속히 진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한국 정부는 그동안 강제동원 진상규명 노력이 충분치 않았던 점을 인정하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유해·유골 수색 및 봉헌 작업을 해야 한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혼조차 귀국 못하는 분들도 돌아오게 해야 하고, 피해자 구제를 위한 외교적 보호 등 모든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송 당사자인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 씨는 “(원고가) 나까지 네 명인데 혼자 재판을 받으니 과히 기분이 안 좋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도 많이 나오고 서럽다”면서 “일본도 한국이 이렇게 해줬으니 ‘시원하다, 잘했다’ 하면서 환영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며 취재진 앞에서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원고들이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낸 1997년부터 원고들을 도운 일본재판지원회의 우에다 케이시 씨는 “이번 판결로 식민지배 피해자들이 권리를 회복하고, 신일철주금은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으로서 배상책임을 다해야 한다”면서 “이를 토대로 한일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디지털뉴스부

<2018-10-31> 경인일보

☞기사원문: 강제징용 피해자 측 “신일철주금 배상의사 타진할 것… 신일철주금 포스코 지분 강제집행 가능성”

수, 2018/10/3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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