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오마이뉴스]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지역

[오마이뉴스]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admin | 월, 2020/07/13- 19:54

[김종성의 히,스토리] 국민 학살한 친일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 별세 (서울=연합뉴스)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휴전회담 한국대표를 역임한 백 장군이 육군에 기증한 군 역사 관련 기록물 중 1951년 7월 10일 유엔 대표들이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가기에 앞서 기념촬영 하고 있는 모습. 휴전협정 당시 계급으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2020.7.11 [연합뉴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지난 5, 6월 서울현충원 안장 논란의 당사자였던 백선엽 전 만주국 중위 겸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대장이 7월 10일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육군은 육군장 영결식이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다고 예고했다. 안장식은 같은 날 11시 30분 대전현충원에서 열릴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백선엽은 20세 때인 1940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군 잡는 특수부대로 명성을 날린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했다.

해방 뒤 잠시 고향에 체류한 그는 남쪽으로 넘어온 뒤 육군 정보국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친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하는 숙군 작업을 전개했다. 그런 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부터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1월 국군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1959년 2월, 39세 나이로 연합참모본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 총장이 된 그는 이듬해인 1960년에 뜻하지 않게 군복을 벗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의 격동 속에서 군대를 떠났고, 그해 7월 주중화민국대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됐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 뒤로도 프랑스·캐나다에서 대사 직을 수행했던 그는 1969년 교통부장관이 됐고 1971년(51세) 장관직을 퇴임했다. 1973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는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사장을 지냈다.

군대를 떠난 나이(40세)와 공직을 떠난 나이(51세)가 좀 이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면 화려한 공직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가시’들이 감춰져 있다. 한국 사회의 핵심 독소들이 그 가시들에 잔뜩 묻어 있다.

백선엽의 인생

▲ 백선엽 장군 빈소 조문 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빈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선엽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이었다. 그가 근무한 간도특설대는 친일 군인 중에서도 특별한 친일 군인들만 가는 곳이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한 이 부대의 주력은 식민지 한국인들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식민지인을 이용해 식민지인을 탄압하는 일본제국주의의 방식을 실천하는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가 쏜 총탄에 쓰러진 항일투사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로서 이 부대에서 활약한 백선엽은 누구도 부인 못할 친일파였다.

그가 친일에 깊이 물들었다는 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로당 박정희’를 구해준 데서도 드러난다.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치는 민족주의 장병들이 일으킨 여순항쟁(여순사건) 당시, 박정희는 이들과 연관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 박정희가 1개월도 안 된 12월 10일 석방된 것은 숙군 작업을 주도하던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이 신원보증서에 도장을 찍어줬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최소한 과거 만주군이나 일본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박정희는 자신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파격적인 구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정희 구명은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또 백선엽은 국민 학살,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것은 친일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중한 범죄다. 전쟁 상황 속의 민간인을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치부하는 일부 그릇된 군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범죄로 비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 군사행동을 하다 보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사고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소유자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민간인을 죽이는 군인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한낱 범죄자에 불과하다. 그 시절 한국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범죄자가 범죄로 인식하지 못했다 하여 범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범죄를,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 시절에 저질렀다. 그는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민간인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이 부대는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여성들에게 죄악을 저질렀다.

이런 일을 두고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사고였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군인은 국민의 명을 받은 몸이고 국민을 지켜야 하는 몸이다. 그런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민간인인지 빨치산인지 구분도 하지 않고 마구 살상했다는 것은 애당초 국민의 신성함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백선엽의 동종 범죄는 한국전쟁 때도 있었다. 그는 이끄는 백야사라는 특수부대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국민 학살을 감행했다. 백선엽의 부하들이 일반 국민과 빨치산을 가리지 않고 총을 쐈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의 상황만으로도 명백히 증명된다. 이 12일간 이들은 4천 명의 빨치산을 잡겠다는 목표로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사살된 사람은 총 6600명이었다. 아무나 마구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은 6·25 전쟁 영웅으로 불린다. 육군 홈페이지의 ‘육군 소개’ 코너에 실린 다음과 같은 ‘백선엽의 전공’과 위와 같은 ‘백선엽의 국민 학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무겁겠는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중에는 보병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2군단장으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1군단장으로 설악산 부근 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움.”

그가 세운 전공이 그가 범한 국민 학살보다 더 중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섣불리 치켜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전쟁영웅이라면 그가 죽인 국민들은 대체 무엇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적군이 아닌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백선엽의 일생에서 하나의 ‘패턴’처럼 자주 나타났다. 해방 이후뿐 아니라 이전에도 그는 동종 범죄를 저질렀다.

그가 속한 간도특설대는 항일투사뿐 아니라 민간인들한테도 학살을 자행했다. 2008년에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의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이 부대가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간도특설대의 여타 구성원들을 포함해 백선엽이라는 인물의 머릿속에서 국가만 중요하고 인간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백선엽의 행적은 해방공간의 남한 땅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사회발전을 저해한 이북 출신 청년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해방 뒤 북쪽에 체류하다가 월남한 그는 극우 청년단체가 아닌 군대로 가기는 했지만, 극우 청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보를 걸었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그는 국민 살상을 자행했다.

백선엽은 왜 마흔에 군대를 떠났나

▲ 백선엽 장군 별세,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한 백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2013년 8월 경기도 파주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입은 뒤 경례하는 백 장군. ⓒ 연합뉴스

그런데 그는 친일과 반공의 길만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 궤적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에 나오는 이인국 박사를 연상케 할 만하다. 평양에서 친일파 의사로 살던 이인국은 해방 뒤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소련파로 변신했다가 한국전쟁 중에 남하해 친미파로 둔갑했다.

만주국 중위 백선엽은 일본이 패망한 다음달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인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서 치안대장으로 활동했다. 친일파들이 빨갱이로 부르던 조직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그 시기에 백선엽은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의 비서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조만식이 김일성에게 밀리자 38선을 넘어 친미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꺼삐딴 리 스타일의 인생행로를 아주 전형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백선엽에 대해 파고들 것이 많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왜 나이 마흔에 군대를 떠나 주중화민국대사가 됐는가 하는 점이다. 국방장관 승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가 전역을 결심한 배경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연합참모본부 총장 백선엽의 전역은 1960년 5월 31일에 있었다. 4·19혁명에 직면한 이승만 대통령이 사법처리를 피하고자 하와이로 망명한 지 이틀 뒤였다.

그해 6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연참본부총장) 백선엽 대장 사표 수리’에 따르면, 백선엽은 사퇴 성명서에서 “민주혁명의 정신에 호응하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군대의 민주적 개혁의 터전을 선임자로서 닦아주려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으니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자 사퇴하게 됐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가 사퇴를 결심하게 되는 과정이 유광종 <중앙일보> 기자가 정리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백선엽 회고록에 나온다. 사퇴하기 얼마 전에 그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이 장면이 회고록에 소개돼 있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선 나를 보더니 ‘이제 다 때가 되지 않았느냐. 나도 옷을 벗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물러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였다. 나는 그의 말뜻을 빨리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히 내게 군에서 은퇴하라는 의사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하야를 지켜보면서 언뜻 품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장관에게 ‘알았다. 잘됐다’고 말했다.”

이종찬은 현역군인 신분을 갖고 국방부장관 직을 수행했다. 그는 1960년 5월에 전역했다. 이 대화 시점의 그는 국방장관 직만 갖고 있는 상태였다.

사퇴 성명이나 회고록만 놓고 보면, 백선엽의 전역이 이승만 퇴진에 따른 의례적인 일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고위 공직을 지낸 사람이 4·19 혁명 뒤에도 계속 공직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퇴임한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에는 군부 수뇌부도 개입했다. 이 점은 1960년 5월 13일에 이종찬 국방부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했던 증언에서도 증명된다. 1960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 기사 ‘군의 부정선거 개입 부인 못해’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군대가 부정선거에 전혀 가담치 않았다고 부인하지는 못하겠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바로 이 부정선거 책임이 백선엽 전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하야 뒤에 과도정부(과정)를 이끌며 국정을 책임졌던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의 기고문을 담은 1962년 4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허정 씨가 공개하는 과정 3개월 (5)’에 이 점이 설명돼 있다.

기고문에서 허정은 군부 수뇌부의 부정선거 가담을 규탄하는 젊은 장교들의 압력이 거셌다는 점을 설명한 뒤, 자신이 소장급 이상 장군들에게 “당신들은 자기 스스로가 잘 판단해서 좋은 구실과 계기를 만들어 자진 사퇴를 해주시오”라며 “그러면 나도 여러분의 인격과 위신에 맞도록 해외 대·공사직을 마련하여 내보내도록 노력하겠소”라고 권유했노라고 회고했다. 그런 뒤 허정은 기고문 끝에 이런 글을 달아놓았다.

“나의 이 방법은 후에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어 자진 사퇴하는 이가 많이 나왔고, 또 몇몇 분들에게는 약속대로 해외 공관의 공사 또는 대사로 임명해서 현지에 보내준 일도 있다(주: 백선엽·유재흥 장군 등의 주중국·주태국 대사직이 이때부터 마련되었음).”

이 일화는 백선엽이 친일행위와 국민학살에 더해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적폐청산 작업이 군부에 대해서도 철저히 이뤄졌다면, 백선엽의 죄악은 좀더 명확히 세상에 드러났을 것이다. 전쟁영웅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이면의 백선엽은 독 묻은 가시처럼 온갖 부조리를 묻힌 인물이었다.

이처럼 죄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백선엽은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품었다. 그는 자기가 선엽(善燁)이란 이름의 善처럼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위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이름에는 착할 선(善)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 내 회고록을 집필한 <중앙일보> 유광종 기자가 1948년 박정희 대통령을 숙군 작업에서 살려준 동기가 무엇이냐고 집요하게 묻길래, 그때에도 ‘내 이름에 착할 선이 들어 있잖아’라며 넘어간 적이 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는 데 만족한다. 가능하면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돕고,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고, 남을 해치려는 자는 힘을 기울여 막으면 좋은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정말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살렸으면 그만이다. 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얻으려 고심할까.”

자신이 선하게 살았노라고 자부했다. 살릴 사람은 살리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살릴 사람’이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항일투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고한 민간인들이 ‘살릴 사람’과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 중에 후자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3·1운동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당시의 헌법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3·1운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나라에서, 3·1운동을 부정하는 친일행위에 가담하고 그것도 모자라 국민들을 마구 학살한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모신다면, 국민들은 현충원이 어떤 사람들을 모시는 곳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2020-07-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1910년 국권침탈 이후부터
학교 고유 교육이념 없애고
제국주의 주입하며 지배화

민족성 담긴 ‘교표’ 사라지고
친일파 만든 ‘교가’ 아직 불려

배화학원 태극문양→ 난초로
중동학원 무궁화 도상 사라져
대부분 사립학교 교표 바뀌어

민족정체성 없애기 교묘히 시도
친일잔재 은연 중 한국사회 잠식

937년 배화학당 졸업생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출처=배화고등학교 홈페이지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가 자행한 민족말살 정책은 전통 문화를 훼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민족말살 정책은 유·무형의 잔재로 해방이후에도 존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학교 상징물이다. 초창기 민족성을 담은 학교 교표는 일제 상징물을 형상화하는 문양으로 교체됐다. 이런 일제 잔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교표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친일 작사·작곡가들이 제작한 교가는 지금도 어김 없이 학교내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8·15 광복 76주년을 맞아 경기도내 학교에 남은 일제 잔재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또한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있는 학교도 소개한다.

지난 9일 평택시 한 고등학교 교문은 돌로 된 기둥 둘 사이에 있었다. 기둥에는 날개 형상 위에 둥근 원이 그려진 모양이 있었다. 색깔을 더한 모양을 보자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문양은 청색 바탕에 황금색의 날개가 새빨간 반원을 떠받치고 있었다. 한국식이라기 보다는 일본식에 가깝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문양은 학교를 상징하는 교표다. 교표에 대한 설명을 봐도 한국식과는 달라 보였다. 붉은색 반원은 아침을 여는 태양의 의미, 날개는 비상하는 독수리의 날개라고 했다.

이미지를 검색하다 보니 비슷한 모양이 검색됐다. 바로 독수리 날개를 단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이었다.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 뒤에 일장기를 그리면 학교의 교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실시한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 조사 보고서’에서도 해당 교표를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학교 교화 역시 일본 철쭉인 영산홍이다.

l 일제에 의해 사라진 전통 교표

일제강점기 시절 경신학교의 모습. /출처=위키백과

학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부착하기 시작한 것은 100여년보다 그 이전으로 흘러간다. 1885년 반포된 교육입국조서와 소학교령은 조선 고종이 공교육의 기능을 국가의 부강과 독립, 생활상 필요한 보통 지식과 기능을 익히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학교에 제국주의 이념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제한하는 학교령을 통해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교표는 학교의 교육철학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일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기존 태극문양과 무궁화 등 한국 전통의 문양을 교표로 택하고 있던 학교들은 일제시절 교표개정의 아픔을 겪었다.

1885년 원두우 학당으로 개교한 경신학교는 1905년 십자가 중앙에 태극을 넣고 ‘경신학원’ 네 글자의 한자를 태극기의 4괘와 같이 배치했다. 이 태극교표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교표 중앙의 태극 도상(圖像)이 삭제당했다.

l ‘민족말살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된 학교 교표

배화여학원의 교표 변화. 왼쪽은 1908년 배화학당이 사용한 것으로 태극 도상이 가운데 들어있다. 중앙은 1923년부터 1937년까지 사용한 배화여학원의 교표로 교화인 난초가 그려져 있다. 반면, 교표 개정령 시행 후 1938년 사용된 교표(사진 오른쪽)는 태극도상이 삭제됐다. /‘한국교표 디자인의 역사와 문화적 변용 연구(정선아, 2021)’

<송도학원 100년사>, 한국 교표 디자인의 역사와 문화적 변용 연구(정선아) 등에 따르면 교표 개정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 극에 달했다. 당시는 만주를 침공한 일제가 대공황 등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으며 소위 ‘문화통치’에서 ‘민족말살통치’로 노선을 전환하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사립학교에 교표개정령을 전달해 민족정신의 말살을 시도했다. 이는 경기도 내무부가 경찰에서 보낸 ‘사립학교 교표개정령’에서 확인됐다.

당시 일제의 통치에도 한민족의 얼을 기리는 내용의 교표를 가진 다수의 사립학교들의 교표가 바꿨다.

배화학원의 경우 배화학당 시절 도장과 고등과의 졸업장 등에 태극문양을 사용했다. 1923년 교표를 만들 당시에도 태극 도안을 주 도상으로 썼다. 그러나 1937년 교표개정령과 함께 난초를 모티브로 한 일본 가문과 유사한 교표를 사용하게 됐다.

송도학원은 당초 무궁화 잎에 펜을 그린 교표(사진 왼쪽)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1937년 조선총독부에 교표를 빼앗긴 후 일본 한 가문의 문장과 유사한 솔방울 도안이 들어간 교표(사진 오른쪽)를 해방 전까지 사용했다. /송도중학교 홈페이지
중동학원 교표 변화. 왼쪽은 1919년부터 1937년까지 사용해온 교표이며, 오른쪽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교표.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 조사 보고서(2021)

송도학원도 1937년 교표를 일제 경찰에게 압수당했다. 송도학원은 무궁화 사이에 펜을 그려넣은 교표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를 압수당한 후 독수리 날개에 ‘중’자를 세긴 교표를 사용했다.

중동학원은 무궁화 사이에 떠오르는 태양의 도안으로 이뤄진 교표를 1929년부터 제정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1937년 교표를 압수당하고 교표 개정을 받자 문제가 된 무궁화 도상을 삭제하고 중동이란 교명만 표시하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정체성을 담고 있던 교표의 수난사였다. 교표는 제작 주체의 의도와 그 전달 방식이 함축된 상징물이란 점을 고려해 일제는 민족성 말살 정책에 교표 개정을 철저히 이용했던 것이다.

l 친일행적자 작곡·작사 교가의 탄생

교가 편찬은 1945년에서 1950년대에 집중돼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교가보다 일본 국왕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주로 불렀다. 그러다 보니 개별 학교를 상징하는 교가가 없었고, 해방 후 학교들은 교가를 제정하게 됐다.

문제는 당시 교가를 제정할 수 있는 음악가들 다수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경기도내 39곳의 학교 교가를 작곡한 이흥렬(李興烈, 1909~1980)은 1938년 7월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애국행진곡> 등을 반주하고 ‘음악으로 내선일체를 실현하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경성음악협회 제1회 연주회에 출연했다. 1943년 7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조선에서 악단의 식민통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데 역할을 한 히라마 분주의 고별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음악계 명사로 역할을 바꿔 가장 많은 교가를 작곡했다. 이 때문에 이흥렬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됐다.

도내 22곳의 교가를 작곡한 김동진(金東振, 1913~2009)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1942년 ‘대동아전쟁의 의의를 철저하게 관철시킬 가요 등을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만주작곡연구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했다. 일제를 찬양하는 ‘조국찬가’를 김대현, 윤용하 등과 함께 창작하고 1943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국, 양산가와 합창곡 건국 10주년 찬가 등을 작곡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 음악가로 변신해 1961년 조국광복, 조국수난, 조건재건 3부를 작곡하고 지휘하는 등의 행적을 보였다. 김동진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도 친일 행적이 뚜렷한 김성태(金聖泰, 1910~2012), 현제명(玄濟明, 1903~1960)이 작곡한 교가가 각각 18개교, 7개교 사용되고 있다.

작사가로는 친일 행적을 남긴 백낙준(白樂濬, 1896~1985), 이광수(李光洙, 1892~1950) 등이 있다.

해방 후 음악계 명사로 탈바꿈한 친일 행적 작곡·작사가는 한국 사회 음악계를 이끄는 주역으로 부상한다. 교가에 직접적인 친일용어를 담지 않았지만 근면과 애국, 조국 등 일제가 강조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은연중에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의 잔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며 “친일파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부르고, 일제를 상징하는 문양이 담긴 교표를 쓰는 등 배움의 장인 학교에 침투한 일제 잔재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라고 말했다.

/김중래 기자·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인터뷰/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l “학교 안 일제 잔재 수두룩 국민이 나서 뿌리 뽑아야”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일제 잔재가 학교에 남아있는 것은 친일파가 아닌 대한민국 역사 교육이 만든 상황입니다”

방학진(사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10일 인터뷰에서 “해방 후 청산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지적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80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학교 현장에서는 일제 잔재가 남은 교표와 친일 행적 작사·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부르고 있다. 방 실장은 교육적인 목표에서도 이러한 잔재를 해소해 가야 한다고 했다.

방 실장은 “친일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학생들이 만들고 듣는다고 해서 친일파는 아니다”면서도 “그러나 학생 개개인의 집에서 부르는 것도 아니고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 이를 부르는 건 대단히 모순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현장에 남은 일제 잔재의 이유로 친일 잔재 청산의 부재를 꼽았다. 특히 친일 행적 작사·작곡가의 교가 탄생 배경에 해방 후 음악계의 구조를 지적했다.

방 실장은 “해방 이후 한국 음악계는 친일 행적자에 의해 정리됐다”며 “이흥렬, 현제명 등은 서울대와 숙대, 경희대 등 유명한 음악대학의 초대 학장이 됐고, 교가를 음악계 권위자에게 맡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일 행적자들이 많은 교가를 만들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사회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처럼 학교에서도 교육부분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도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지목했다. 여자와 소수자, 장애인 등을 차별했던 제국주의 파시즘의 영향은 지역 차별, 인종차별, 성별차별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일제 잔재를 청산해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 실장은 “과거 ‘시대에 맞게 친일파는 열심히 살았고 독립운동가는 게을렀다’는 헛된 소리가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여준다”며 “이러다가는 이완용이 열심히 산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에 따라 친일파 청산을 내걸었지만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 청산, 토지개혁 등을 실시하지 못했다”며 “국가는 친일파 청산을 안 했으니, 이제는 국민이 나서 일제 잔재를 청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중래 기자·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전세계 여성 인권문제로 봐야”

오는 14일 제9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앞두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한일 양국간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세계 여성의 인권문제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관련기사 10면>

이은희 독일 풍경세계문화협의회 대표는 10일 수원시 매원감리교회에서 열린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의 활용 방안 모색을 위한 비대면 의정토론회에서 국제사회와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일본군 성노예제로 인해 35개국에서 피해자가 발생했다”면서 “사안 그 자체로 초국가적인 주제”라면서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동안 한국은 대규모 반 인륜범죄 7가지를 해결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다. ‘전쟁범죄 인정’, ‘정부 차원의 공식사죄’, ‘법적 배상’,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역사교육 실시 등 피해자 명예 회복에 초점을 맞춘 해결’ 등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외면해 왔다.

김현정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 대표는 “위안부는 전시상황에서 국가가 여성에게 얼마나 조직적으로 장기간 인권 탄압을 했는가에 대한 문제”라면서 “한일간의 역사 갈등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최대 성노예제도로 보고 해결해야한다”고 했다.

이어 “한국정부는 2015 구두선언은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이고 원칙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7가지 원칙에 기반한 해결을 위해 일본과 포괄적인 재협상을 요구해야한다”면서 “그동안 한국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면서 일본을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0> 인천일보

☞기사원문: [8·15 기획-배움터에 남은 일제 잔재] (상) 친일의 이름으로 말살된 ‘교육철학’

수, 2021/08/11- 06:34
4
0

경기교육청 전수조사…21개교 교표엔 친일 잔재 확인

(수원=연합뉴스) 이영주 기자 = 경기도교육청은 학교 내 유·무형으로 남아있는 일제 잔재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청산하는 방법을 제안한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고 10일 밝혔다.

도교육청은 일제 잔재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도내 2천500여개 학교를 대상으로 동상, 비석, 교표, 교화 및 교목 등 유형요소와 교훈 및 교가 등 무형 요소를 조사했다.

도교육청 차원의 일제 잔재 전수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내용 중 발췌.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이번 조사 결과 도내 12개 공립학교에 친일 인사의 비석이 설치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 결과보고서’에서 확인된 6개 비석 외에 남양주 한 초등학교의 이상옥(친일인명사전 등재) 기념비 등 6개가 추가로 확인됐다.

이들 비석은 대부분 학교 운영과 발전에 관한 공덕비 형태로, 해당 인물의 친일 행적은 안내되지 않았다.

도내 21개 학교 교표에서도 욱일문, 일장기, 일본 군경이나 기업의 심벌마크와 유사한 표식 등 일제 잔재가 확인됐다.

특히 한 초등학교의 교표는 전범 기업으로 분류된 ‘미쓰이 그룹’의 로고와 색깔만 빼고 거의 유사하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내용 중 발췌.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보고서는 일제 잔재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

교표에 자주 쓰이는 월계수 도안이 대표적이다.

보고서는 “월계수는 흔히 서양에서 승리, 평화, 정화 등을 상징하며 전투와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영예의 관으로 동양 전통에선 발견되지 않던 도상”이라며 “월계수를 일제 잔재로 보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도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정을 보면 러일전쟁의 승전을 축하하는 개선문 장식에 월계수를 사용한 일제를 통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월계수 도상은 도내 112개 학교 교표에서 활용된 것으로 파악됐다.

48개 학교에 비치된 ‘책 읽는 소녀상’에 대해서도 “일제강점기에 소학교 도덕(수신)교육의 하나로 ‘모범적인 국민상’을 주입하는 의도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표지.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연구보고서는 일제 잔재 청산은 상급 기관의 획일화된 명령이나 무조건적인 청산이 아닌 각 학교 구성원의 문제의식 공유, 토론, 대안 도출 등 민주적 과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일제 잔재는 일본 군국주의의 산물이고 당시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의 소산이므로 이에 대한 정리와 역사적 책임을 묻는 활동은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을 세우는 일”이라며 “역사교육은 식민지 사회가 과연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었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비민주성을 철저히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번 연구보고서는 경기도교육청이 기획하고 총신대 허은철 교수가 책임연구자로 나섰으며, 각급 학교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 현장에 안내됐다.

이영주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0> 연합뉴스

☞기사원문: “경기 12개 공립학교에 친일인사 공덕비 남아 있어”

수, 2021/08/11- 06:17
2
0

14일 대전MBC ‘항일음악 6천곡 대발굴’ 다큐 방송

항일음악 ‘거국행’ 악보. ‘거국행’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20년 4월 미국에 독립군 진영을 만들기 위해 조국을 떠나면서 지은 노래다. 악보는 1910년 5월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대전엠비시 제공

대전문화방송(MBC)은 오는 14일 묻혔던 항일음악을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 ‘노래하라! 저항하라! 항일음악 6000곡 대발굴’을 방송한다고 9일 밝혔다.

항일음악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며 독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로, 군가·혁명가·투쟁가·애국가·계몽가·망향가·추도가 등 여러 형태로 불렸다. 항일음악 발굴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고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자료집 <항일 음악 330곡집>에서 시작됐다. 2017년 발간된 유일한 항일음악 자료집으로, 1910년 항일투쟁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들이 시대별로 정리돼 있다.

현재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항일 음악 330곡집>를 뒤잇는 항일음악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항일운동 발자취를 따라 베이징과 톈진, 옌볜, 선양, 다롄 등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족들과 알마티, 크즐오르다, 타슈켄트 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만났다. 4년에 걸쳐 항일음악과 관련된 악보 , 서지 , 기사 , 잡지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6000곡을 발굴해 정리했다.

지난달 13일 대전엠비시(MBC) 공개홀에서 대전시민천문대어린이합창단이 항일음악 ‘그리운 강남’을 부르고 있다. ‘그리운 강남’은 일제강점기 조선 민요 운동을 한 충남 청양 출신의 안기영 선생이 1929년 만든 곡이다. 대전엠비시 제공

대전엠비시는 이번 다큐멘터리에 단국대 연구팀의 ‘항일음악의 보급과 연구를 위한 국내·외 자료 수집·해제 및 디비(DB) 구축’ 프로젝트의 발자취와 의미를 담았다. 발굴된 항일음악을 대전시립교향악단과 대전시민천문대어린이합창단, 뮤지컬배우 고은성, 아카펠라 그룹 ‘나린’, 밴드 ‘오빠딸’ 등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도 다큐멘터리를 통해 방송된다.

이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김지훈 대전엠비시 기자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발굴한 항일음악 중 1000곡은 악보로 표준화했고, 그 중 의미 있는 곡을 골라 음원으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앞서 대전엠비시는 7 ∼8곡을 골라 지역의 예술가들을 참여시켜 편곡하고 연주 ·녹음했다 ” 며 “ 항일 음악 음원화는 우리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 교육청 등과 협의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항일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다 ”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오는 14일 밤 8시50분 방송된다.

최예린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09> 한겨레

☞기사원문: 항일음악을 아시나요?

화, 2021/08/10- 22:52
3
0
수, 2021/08/11- 18:57
1
0

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특강
1강 –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의열투쟁의 선구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삶과 사상
강사 : 박중훈 (박상진 의사 증손)
* 2강은 15일, 광복절에 업로드 됩니다!

주최 : 근현대사기념관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 강북구

목, 2021/08/12- 00:52
1
0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토, 2021/08/14- 00:18
0
0

[앵커]
독립운동가로 홍보되고 있는, 최재형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조부와 증조부와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돼 논란입니다.

최 후보 측은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은 명백하다고 주장하는데요.

과연 그런지, 뉴있저가 자세히 취재했습니다.

이 문제 취재한 양시창 기자 나와 있습니다.

자, 먼저 최재형 후보 부친이 독립운동가로 알려졌는데 이건 캠프 쪽에서 나온 얘기인 거죠?

[기자]
확인해 보니까, 최재형 후보 본인 입에서 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등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습니다.

다만 후보 캠프에서는 미담 사례의 하나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최재형 후보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링크된 영상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최재형 TV : 독립운동가 최병규의 손자입니다. 최병규 선생은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고 전달하는 일을 맡으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정부에서 표창장을 수여하려 했지만,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거부했다고 합니다.]

캠프에서 직접 제작한 영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후보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고요.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도 지난달, 최 전 원장의 입당을 환영하는 논평에서 최 씨의 조부가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다.

[정경희 / 국민의힘 의원 :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 독립운동가입니다. 춘천고보 3학년 재학 중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상장 달기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했습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거류민단 대표를 맡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앵커]
이 정도면 캠프와 당에서도 최 후보 선친의 독립운동에 대해 충분히 홍보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군요.

대선 예비후보와 관련된 문제이니 검증해 봐야 할 텐데, 양 기자가 취재해 보니 어떻던가요?

[기자]
네, 최 후보 증조부와 조부가 일제 치하에서 면장과 면협의회 회원을 한 전력이 자료에 남아 있는데요.

먼저 증조부부터 보겠습니다.

최 후보 증조부 최승현 씨는 191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죠. 매일신보의 평강분국 분국장을 지낸 전력이 있습니다.

분국장을 지내다가 1918년에 평강군 유진면 면장에 오르는데요.

3.1운동 당시에도 면장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인근 고삽면장까지 포함해 이 지역에서 면장직을 1936년까지 지냈습니다.

18년 넘게 면장을 지낸 것이죠.

전부 친일 기관지, 매일신보에 소개된 내용이고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증조부의 이름은 여러 차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조부인데요.

증조부의 면장 임기 마지막에 조부도 매일신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바로 1935년, 아버지가 면장으로 있는 유진면의 면협 의회원으로 당선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지자체 의원 정도로 볼 수 있는데요.

참고로, 최 후보의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조부의 형, 그러니까 최 후보의 큰할아버지도 함께 면협 의회원을 지냈습니다.

최 후보 조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년 뒤에는 강원도 도회의원에 입후보합니다.

하지만 낙선했고요.

이후 다시 면협 회원에 당선됩니다.

정리하면 증조부는 평강군에서 면장을 20년 가까이 지냈고, 아들인 조부는 면협 의회원을 2차례 역임했고, 도회 의원까지 도전했다, 이 점이 사료에 남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 면장과 면협 회원을 지낸 전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중요한 부분인데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의 설명을 들어보시겠습니다.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최승현이라고 하는 인물이 평강 지역에 오랫동안 면장을 했어요. 대단한 거죠. 지역의 유력자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그 아들인 최병규 최병열. 이 두 사람은 면협회 회원까지 됐단 말이에요. 이 면협회 회원이라는 건 뭐냐 하면 면장의 자문 기구인데 일제 협력 기구라고도 볼 수가 있는 거죠.]

[앵커]
면장과 면협 회원은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인데요.

단순히 직책뿐 아니라 친일에 가까운 행적도 기록에 남았다고요?

[기자]
네, 앞서 정 의원의 언급에서도 나왔지만, 만주에서 조선 거류민 단장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는 게 최 후보 캠프의 주장입니다.

최 후보 부친 회고록에도 나오는 내용인데요.

하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최 후보 조부는 오히려 독립운동이 아닌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해석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요.

먼저, 1938년 매일신보를 보면, 최 후보 조부의 미담 기사가 하나 소개됩니다.

부친의 회갑축하 연회비를 절약해 20원을 일제 국방비로 헌납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군수 월급이 130원 정도라고 하거든요.

20원이니까, 고위직 공무원 월급의 6분의 1 정도.

중요한 부분은 일본이 이를 미담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소개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전쟁비용이 필요했던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국방헌금을 강요했는데요.

아버지 회갑 비용을 아껴, 앞장서서 국방비를 낸, 훌륭한 헌금 사례로 소개한 것이죠.

또 하나는, 최 후보 조부는 만주국 해림촌으로 넘어가서 조리원이라는 직책을 맡습니다.

이 역시 일제 치하에서 촌장을 돕는, 부촌장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 부촌장을 지내는 동안 최 씨의 이름이 만선일보에 여러 차례 거론됩니다.

만선일보는 매일신보처럼, 만주지역 대표적인 친일 신문인데요.

최 씨가 만선일보 해림지국 개소에 축하 광고를 띄웠고요.

또 조리원, 즉 부촌장에 취임한 뒤 인사차 만선일보를 방문했다는 것도 기사에 소개돼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 설명 이어서 들어보시죠.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만선일보라고 하는 것은 만주지역 최대의 친일 신문입니다. 한글 신문이기도 하고. 거기에 만선일보 해림천 지국 해림 지국 발전을 축하하는 광고를 내요. 최대 친일 신문인 만선일보의 기사 내용을 보면 부친이 부친의 회고록에 주장하는 그런 만주 지역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그런 얘기다.]

[앵커]
이에 대한 최 후보 캠프의 해명이 나왔나요?

[기자]
네, 최 후보 측은 조부와 증조부의 이 같은 행적에 대해 대부분 몰랐던 사실이라고 답했는데요.

해명을 정리해봤습니다.

조부의 면협 의회원 역임 사실과 도의회 의원 출마 사실, 또 국방헌금 20원 납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할 수 있는 보관 자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조부의 독립운동은 부친에게 들은 내용이고, 할아버지께서 동맹휴학을 주도해 제적당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만 당시 면협 의회원 역임이나 도의회 출마, 또 국방헌금 납부자를 모두 친일파로 여기는 건 무리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습니다.

최 후보 캠프 쪽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의 근거로 주장하는 게 조부의 동맹휴학 부분인데요.

확인해보니, 당시 춘천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조부가 ‘맹휴’를 주도해 제적당한 건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맹휴가 일제에 대한 저항인지, 단순히 구타를 일삼은 교사에 대한 저항인지는 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점은, 고교 시절 맹휴 이후의 행적이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입니다.

들어보시겠습니다.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독립운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행적이고 그리고 평범하게 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면협 의회원 그다음에 도의원 출마했고, 국방헌금 냈고 이거는 일제의 협력행위거든요. 이런 걸 가지고 독립운동했다, 이렇게 부르지는 않죠. 그런 주장대로라면 한때 독립운동을 했던 이광수, 최린, 김활란 이런 사람들도 독립운동가가 되는 거죠. 우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친일파라고 부르죠.]

네, 오늘은 국민의힘 최재형 후보 가문의 친일 논란을 다뤘는데요. 앞으로도 뉴스가 있는 저녁 ‘가보니’에서는 여·야 대선 주자들에 대한 검증 보도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앵커]
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양 기자, 고생했습니다.

YTN 양시창 ([email protected])

<2021-08-12> YTN

☞기사원문: [뉴있저] 최재형 조부 독립운동?…”친일 행적” 논란

※관련기사

☞JTBC뉴스: [단독]민족문제연구소 “최재형 증조부 조선총독부 표창 받았다”

금, 2021/08/13- 19:08
2
0

[KBS 광주] [앵커]

이틀 뒤면 제76주년 광복절인데요,

여전히 우리 주변 곳곳에는 일제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친일의 흔적을 미래세대가 기억할 수 있도록 일제 잔재에 단죄문과 안내문을 설치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김정대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광주천 건너에 자리잡은 낡은 방직공장.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여공들의 애환이 서린 이곳은 일제 강점기 어린 여공 수 천명이 저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착취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김순흥/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근로정신대처럼) 국내에서도 이렇게 강제동원했던 역사가 많이 있어요. 이 안에서 여공들이 기숙사라는 것도 거의 감옥 형태로 자유 행동을 할 수가 없었고…”]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이 있었던 광주공원.

일제 천황을 참배하던 신사가 세워진 민족의 아픔이 서린 공간입니다.

광복 이후 일본 신사는 시민들에 의해 헐렸지만, 일제가 만든 이 계단과 중앙광장은 아직 남아있는데요.

이 같은 역사를 잊지 않도록 계단 옆에 ‘단죄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광주시가 3년째 ‘단죄문’ 설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일제 잔재 시설에 대한 역사적 사실, 친일 인사의 행적 등을 소상히 적었습니다.

그동안 세운 단죄문은 17개에 달합니다.

[정전국/광주시 민주정신선양팀장 : “현재 광주 시내 현존하는 잔재물이 뭐고, 또 친일 인사의 행적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을 모두 조사해서… 올해 6곳을 대상으로 설치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목표로 3년치 사업이 마무리가 됐습니다.”]

광주시는 더 많은 시민들이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할 수 있도록 그동안 세운 단죄문을 소개하는 온라인 공간을 만들 계획입니다.

KBS 뉴스 김정대입니다.

촬영기자:조민웅

김정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3> KBS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단죄문 세워 역사 알린다

토, 2021/08/14- 05:49
4
0

광복절 앞두고 전북 일제잔재 현황보고회 개최
“청산도 중요하지만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 필요”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이날 포럼은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렸다.(전북교육청 제공)© 뉴스1

76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학교에 존재하고 있는 일제잔재 실태를 공유하고 향후 대책을 고민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는 도내 일선학교 교장과 교감, 교사, 각 교육지원청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석했다.포럼은 권익산(원광여중), 오경택(성심여고), 채창수(완산고), 권혜수(영생고), 문선빈(송북초), 라민아(익산가온초), 권민지(종정초), 손형태(부안고) 교사의 주제발표로 시작됐다. 이들 모두 일제 잔재 조사에 참여했던 교사들이다.

실제 전북교육정책연구소(소장 최은경)는 지난 1월 6명의 초·중고등교사와 정책연구소 파견교사 2명, 담당 연구사 등 9명으로 구성된 TF를 구성한 뒤 일선 학교 내 일제 잔재 현황파악에 나서왔다. 그리고 6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최근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일제잔재 조사에 나선 것은 도내에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8명의 교사들은 각자 자기가 담당했던 조사했던 내용을 발표했다.

발제 내용을 종합해보면 우선 일제잔재가 확인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총 15곳으로 집계됐다. 대부분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에 의해 친일 인물로 분류된 작곡가가 작곡하거나 군가풍·엔카풍 멜로디가 포함된 교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국에 바쳐’, ‘00학도’, ‘이 목숨 다하도록’ 같은 일제 군국주의 동원 체제에서 비롯한 비교육적인 표현을 포함한 교가도 있었다.

교표(학교를 상징하는 휘장)의 경우, 조사를 실시한 761개교 가운데 21.8%에 해당하는 166개교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전통문양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욱일문·일장기·국화문·벚꽃문양을 교표로 사용하는 학교도 무려 21개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 모양’을 사용한 학교도 75개에 달했다.

일제 잔재로 규정된 가이즈카 향나무, 히말라야시다, 금송을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도 91개교로 집계됐다.

일제 강점기 석물이나 건축물 역시 학교 부지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군산 발산초의 옛 일본인 농장 창고, 전주 풍남초와 전주초의 봉안전 기단 양식, 일부 학교의 충혼탑 등이 대표적이다.

학교 현장·행정분야 용어와 학교문화도 개선돼야할 부분으로 지적됐다. 개선대상 용어로는 시정표, 시건장치, 납기, 신입생, 절취선, 졸업사정회, 내교 등 학교 현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이 포함됐다.

또 역대 학교장이나 기관장 사진을 외부공간에 게시하거나 차렷·경례 같은 군대식 인사 표현도 바꿔나가야 할 일제 잔재로 꼽혔다.

순결을 강조하거나 부지런한 일꾼이 되자 등 순종하는 노동자가 되기를 강제하는 의미를 가진 교훈을 사용하는 학교도 11곳이나 됐다.

발제에 나선 교사들은 “조례 제정과 교육청 차원의 행·재정적 지원을 통해 일제 잔재 인식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지원단 운영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는 도내 일선학교 교장과 교감, 교사, 각 교육지원청 관계자 40여명이 참석했다.사진은 윤상원 전북대교수를 좌장으로 한 자유토론 모습.(전북교육청 제공)© 뉴스1

주제 발제에 이어 윤상원 전북대교수를 좌장으로 한 자유토론이 진행됐다.

권민지 교사는 “일제잔재를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살아있는 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경택 교사는 “학교에 남아있는 일제잔재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위해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학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학생까지 공감할 수 있도록 많은 학교장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중과의 질의 응답시간에서 김진 김제봉남초 교장은 “일재잔재 조사과정 자체가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의미가 있다. 아이들이 생각하고 인식을 바꿔가는 큰 동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제에 부역했던 사학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북지역 사립학교에 대한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승환 교육감은 “교목과 교표, 교가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무심코 쓰는 언어에도 그 나라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서 “불행하게도 우리 학교 곳곳에서는 여전히 일제잔재가 남아있다. 교육감이 되고 나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일제잔재 실태파악에 자발적으로 나서 준 교사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면서 “앞으로 교사들의 이러한 노력에 도교육청이 전폭적인 지원으로 호응할 것이다. 일제잔재 청산에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임충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3> 뉴스1

☞기사원문: ‘학교에 존재하는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토, 2021/08/14- 04:34
1
0

피해자 지원 단체 중심 구술 채록·녹화 작업
“생존자들 떠나도 문제의식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민간사업… “정부가 지원 역할 해줘야”

“옛날에 당꼬바지 있잖아요? 형사들은 벌써 표가 났어요, 그때는. ‘뭐하러 왔느냐’ 그래서 ‘배에 쓸 물건 좀 사러 왔다’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잠깐 좀 오라’더라고요. 가니까 웬 여관으로 들어가래요. 들어가니까 여섯, 일곱 명인가 와 있더라고요. 그걸로 문을 잠그고 내놓지를 않는 거예요. 자고 나니까 이튿날 아침에 속초역으로 나가자더니 그냥 기차를 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 가는 사람들 전부 다 납치예요, 납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제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중

1944년 일본 다카시마 탄광에 배치돼 노역했던 강제동원 피해자 손용암(93)씨의 육성 증언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한순간에 탄광으로 끌려간 기막힌 사연이 강제동원 역사의 실상을 선명히 드러낸다.

일제강점기 생존 피해자의 증언을 채록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 현재화하려는 노력이다. 벌써 광복 76주년, 생존자들의 기억과 육체가 빠르게 소멸해가는 사정을 감안하면 한시가 급한 일이기도 하다. 채록 작업을 진행 중인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정부가 속히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영원히 남는 증언’ 채록 작업 활발

11일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9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 1,50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13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올해부터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단으로부터 사업 수행을 의뢰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말까지 손용암씨를 포함해 24명의 생존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감탄사 하나까지도 빼놓지 않고 피해자 증언을 생생하게 채록하는 것이 원칙이다.

영상 채록 작업도 활발하다. 증언 내용뿐 아니라 구술 당시 감정과 표정까지 재연할 수 있다는 게 영상 채록의 장점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군함도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 시설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 영상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은 “관람객들이 ‘생존 피해자 목소리를 들으니 역사 교과서 속 얘기가 아니라 지금의 역사처럼 느껴진다’는 소감을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 30주년(8월 14일)을 기념해 김 할머니의 첫 증언 집회 영상과 활동 초기 사진 자료를 공개하는 전시회를 17일 연다.


피해자 떠나도 ‘당사자성’ 유지하려면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전시회에서 피해자의 영상이 나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이 공개됐다. 뉴스1

이런 구술 채록 작업은 일차적으로 일제강점기 미시사(微視史) 사료를 확보한다는 의미가 있다. 식민지 정책, 전쟁 등 거시적 관점에서 포착하기 힘든 역사적 실상을, 개인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입체적으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당사자 증언을 통해 일제강점기 역사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자는 의도도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고 박대하씨의 아들 박영만(78)씨는 “주권 상실로 입은 피해의 역사를 국민 전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가해자 일본이 극우세력 장기 집권으로 과거사 부정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어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승은 실장은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면 개인적 경험으로 파편화될 수 있다”며 “이미 피해 사실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여론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라고 우려했다.

생존 피해자가 세상을 뜨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기반도 필요하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지금 세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남은 생존자 수가 아니라 생존자가 모두 돌아가신 이후”라면서 “당사자성을 갖는 것, 다시 말해 피해 당사자들이 떠난 뒤에도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단체들은 ‘선대의 피해가 나와 무관치 않다’는 의식이 필요하며,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이 여기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이 이사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식민 시대의 불운한 여성들이 겪은 일 정도로 여기면 위험하다”며 “이 문제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시 성폭력은 물론이고 오늘날 여성 혐오와도 연결돼 있다는 걸 실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떠안은 부담… “국가 나서야”

광복절을 닷새 앞둔 10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생존 애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소개하는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작업은 이들을 지원하는 민간단체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단체들은 사안의 의미와 시급성을 감안할 때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이사장은 “피해자 단체가 서로 다른 자료를 갖고 있을 때 정부가 현황을 파악하고 단체 간 연계를 도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전시관이 없는 단체는 생존 피해자 흔적을 보존하기가 더 어려운 만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정부 쪽에서 ‘다 지나간 일이고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말도 들려서 씁쓸하다”면서 “정부가 생존 피해자의 구체적 기억과 경험을 계속 역사화하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익법인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는 “생존 피해자 수가 급감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구술채록 사업을 정규화해 예산과 인력을 안정적으로 지원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email protected]
오지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4> 한국일보

☞기사원문: “더 늦기 전에…” 진정한 광복 위한 ‘기억 투쟁’은 계속된다

토, 2021/08/14- 19:57
1
0

KBS [뉴스해설] 시간에 김환주 해설위원은 다시 확인된 군함도 ‘역사 왜곡’과 일본 정부가 국제기구의 시정 요구 조치에도 외면한다는 내용을 방영했다. 또 다른 매체는 일본 입장에서 반박하는 내용을 보도했다. 군함도 관련 유네스코 지적은 트집이라며 오히려 일본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려는 한국의 정치공작이라는 것이다. 광복 76주년이다. 아직 식민통치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피해자와 유족들이 많다. 일본군 위안부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강제동원의 역사가 바로 ‘군함도’이다.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 서울시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관련 브리핑을 하고있다.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영상 공개전시에 몰린 취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일본 근대 산업시설 등재 결정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은 철강·조선·석탄산업

세계유산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으며 10가지 등재기준에 따라 인류가 공유할 만한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평가한다. 1~6까지는 문화유산, 7~10까지는 자연유산에 관한 기준인데 그 가운데 1가지 이상 부합하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다만, 모든 문화유산은 재질이나 기법 등에서 유산이 원래의 가치를 보유해야 하는 ‘진정성’, 유산의 가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제반요소를 보유한 ‘완전성’, 법적·행정적 보호제도와 완충지역 설정 등의 ‘보호 및 관리체계’를 갖추어야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기준 가운데 인간 가치의 중요한 전환점 기준 2, 문화적 전통 및 문명의 독보적 유산 기준 3, 역사의 중요한 단계 예증 기준 4를 들어 등재 신청을 했다. 그러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이코모스(ICOMOS)는 기준 3을 기각하고 기준 2와 기준 4만 유산 가치를 평가했다.

일본의 근대 산업시설들이 명백히 군사적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음에도 일본 정부의 신청서에는 이런 사실들을 강조하지 않았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정문에 각 시설의 역사 전체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이코모스의 권고 사항을 각주에 부기하는 형식으로 명시했다. 일본은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노역을 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 또한 일본은 정보센터 설립 등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이코모스가 권고한 해석전략에 포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일본정부가 후속 조치와 관련해 2017년 12월 1일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문화유산 등재 이후 2년마다 제출하는 이행 경과 보고서에서도 약속을 저버려 경고를 받았다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이 지난달 7~9일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1940년대 해당 시설에서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을 했다는 등의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또한 미흡했다고 밝혔다.

군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군함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을 했던 슬픈 역사가 간직된 섬, 군함도의 공식 이름은 ‘하시마’다. 1974년 1월 탄광이 문을 닫아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이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TV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소개되고 영화 <군함도>를 통해 이 섬에 관한 관심도 커졌다. 위치는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졌으며 동서 160미터, 남북 480미터, 둘레 1.2킬로미터, 면적 0,063제곱킬로미터로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그런데 1960년에는 이 작은 섬에 5,267명이 살았다고 한다. 인구밀도가 도쿄보다 9배 높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기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유는 석탄 때문이었다. 1810년 근처에 살던 어부가 우연히 석탄을 발견한 뒤 1890년대부터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본격적으로 바다 밑에 묻혀 있던 석탄을 캐내기 시작했다. 석탄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1941년에는 41만 1,10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쓰비시는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를 세웠다. 그 후 10층 아파트를 비롯하여 고층 건물들을 계속 지었고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렀다. “도쿄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은 모두 하시마로 모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쓰비시는 해저탄광을 개발하기 위해 최신 기술을 개발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하시마는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 서정우씨의 영상이 최초로 공개되고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

군함도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500~800명의 조선인들이 하시마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설 『군함도』 의 한수산 작가가 실제로 만난 고 서정우 할아버지는 1944년에 16세였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해저탄광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탄광 바닥에 찬 물 때문에 습하고 후끈후끈한 공기를 마시며, 낮은 막장에서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하루 10시간 이상씩 석탄을 캐냈다. 강제로 끌려와 강제노동을 하다가 병이 들어서야 그는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바다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희생된 조선인들이 40~50명에 이르렀다는 증언도 있다.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서 군함도는 세계유산일 수 없다

오늘날 군함도는 연간 1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세계유산의 공식 명칭은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철강·조선·석탄산업’이다. 군함도를 홍보하는 메시지 속에는 침략전쟁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정당화하고 식민지의 희생을 감추고자 하는 일본정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 등 그들이 환호하는 군함도 건축물의 대부분은 메이지시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더구나 일본정부는 세계유산의 범위를 1910년으로 한정하였으므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섬을 둘러싼 호안의 일부와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 갱도 입구뿐이다. 일본정부는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가리기 위해 1910년으로 그 시기를 한정하는 꼼수를 부리고는 군함도 전체가 세계유산인 양 선전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모습이다. 또한 역사를 왜곡하는 현장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기억될 수는 없다.

유네스코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는 1945년 설립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다. 유엔의 전문기구로서 전 세계의 교육과 과학, 문화의 보급을 통해 빈곤국에서 문맹 퇴치 및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고 국제 교류 증진을 통한 국제간의 이해와 세계 평화를 추구한다. 무엇보다 인류가 창조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다양한 유형의 문화적 아이템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알리고 있다. 프랑스의 에펠탑과 같은 건축물, 앙코르와트 같은 신전,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유적, 오만의 관개수로와 같은 구조물까지 실로 방대한 영역의 인류유산이 포함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을 지정하는 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의 관리, 보호와 보존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위험에 처한 곳이나 위협을 받고 있는 곳도 알리고 있다. 그래서 일부 세계유산 중에는 관리나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아 리스트에서 제외되는 곳도 여럿 있다.

박혜숙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4> 대한뉴스

☞기사원문: 군함도가 왜 세계문화유산인가! 잘못된 것은 시정돼야 마땅

※관련영상

일, 2021/08/15- 08:41
1
0

[KBS 대전] [앵커]

교육당국도 일제 잔재 청산을 추진하고 있지만, 친일 인사가 작곡한 교가는 좀처럼 교체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문들의 반대가 크다는 게 이유인데 교육청에서도 강제할 방법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황정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이 초등학교는 최근 학교를 상징하는 나무를 고유 수종인 소나무로 교체했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가 일제 강점기 때 보급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학교 곳곳에 심겨진 가이즈카 향나무는 예산을 마련해 모두 제거할 예정입니다.

[박재관/대전 옥계초 교사 : “학생·학부모 의견 수렴을 거쳤는데 다행히도 모두 동의해 주셔서 한국 고유 수종인 소나무로 변경하게 됐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를 학교 상징으로 삼았던 대전지역 20개 학교, 충남지역 120개 학교가 수종을 교체했거나 교체를 추진 중입니다.

문제는 교가입니다.

충남의 이 고등학교 교가의 작곡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흥렬입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입해 일제의 징병과 징용을 찬양하는 노래를 다수 만들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습니다.

학교에서 교가 교체를 추진했지만 동문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성원기/충남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장학사 : “어린 시절의 추억 공유와 또 현재 재학생과의 연결 고리가 아무래도 교가이다 보니까 졸업생들의 반대가 좀 큰 편입니다.”]

친일 인사가 작곡한 교가는 대전에 9개, 충남에 24개 학교에서 불리고 있지만 대부분 학교가 비슷한 핑계를 대며 교체를 미뤄 지금까지 교체된 건 7곳에 불과합니다.

[홍경표/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 : “하루 빨리 미래 지향적인 내용으로 교가를 다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지역사회와 학교 동문들도 이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76주년을 맞았지만 교육계의 일제 흔적 지우기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KBS 뉴스 황정환입니다.

촬영기자:신유상

황정환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KBS

☞기사원문: 동문회가 반대해서?..일제 잔재 청산 지지부진

월, 2021/08/16- 10:00
3
0

【 앵커멘트 】

오늘은 76번 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광주시는 지난 2019년부터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친일 잔재물을 찾아 단죄문을 설치하고 있는데요.

친일파 선정비부터 친일 시인의 시비, 착취 유적 등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37건에 달할 정도로 우리 주변에 친일 잔재가 여전히 많습니다.

박성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기자 】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는 광주공원 비석군에 비석 3개가 눕혀져 있습니다.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

전남 관찰사와 광주 군수 등을 지내며 한일강제합병에 도움을 주거나 의병을 탄압해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와 상 등을 받은 친일파 3명의 선정비입니다.

이들의 친일행적은 쓰러진 비석 옆에 단죄문으로 남았습니다.

친일 시인 서정주가 쓴 허백련 화백의 동상 비문과 너릿재 ‘무등을 보며’ 시비 옆에도 단죄문이 세워졌습니다.

지난 2019년부터 광주에서 발견된 일제 잔재물은 모두 37개.

친일파의 단죄문 뿐만 아니라 어린 여공들을 착취했던 전남도시제사 옛터 등 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 건물에도 안내문이 세워졌습니다.

▶ 인터뷰 : 김순흥 /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조선의 많은 여공들이 장시간, 저임금, 강제노동을 당하다시피 해왔거든요. 노동착취를 통해 부를 착취해갔던 것이죠.”

광주시는 그동안 확인된 일제 잔재물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웹페이지를 올해 하반기 내에 구축하기로 했습니다.

▶ 인터뷰 : 정전국 / 광주시 민주인권과
– “지금까지 (단죄문을) 설치했던 현황에 대해서 웹자보를 구축해서 시민들께 홍보할 예정입니다. 또한 이 자료를 가지고 각급 학교, 교육청에도 배포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광주 전남 출신 인물은 모두 156명.

광주시는 시민들의 제보 등을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제 잔재물을 찾아나갈 계획입니다.

kbc 박성호입니다.

<2021-08-15> kbc광주방송

☞기사원문: 친일파 부터 착취 유적까지..3년간 37곳에 단죄문

월, 2021/08/16- 09:54
2
0

강제동원 배상 촉구 기자회견…고령 피해자들 온라인 참석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궁금해요. 일본 기업은,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이런 분(강제동원 피해자)이 있다고 하면 자기들이 사과해야지. 죄송하다고 빌어야지. 사과를 해야지. 그놈들 그렇게 무관심하게 있으면 일본이 나쁘지.”

1943년 1월 고등학교에 다니다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가마이시제철소에 징용된 이춘식(97) 할아버지는 광복절 76주년을 맞은 15일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서 이 할아버지 등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2018년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국내 법원에서만 13년이 걸린 노력이 무색하게 일본 측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올해 6월에는 피해자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다른 소송이 한국 1심에서 각하되는 등 피해자들의 숙원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일본 정부와 기업의 반성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4년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미쓰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간 양금덕(92) 할머니는 “오래됐고, 나이도 많이 먹었다. 달래줄 마음이 조금 있을까 생각했는데 서운하다”며 한숨지었다.

“나 혼자 눈물 흘리고 ‘내 죄다, 내가 복이 없응게 이렇게 했지’ 하면서도, 참 그냥 내가 이제 죽으려나벼.”

교사의 말을 믿고 12살에 일본 도야마(富山)현 후지코시 공장에 근로정신대원으로 동원된 김정주(90) 할머니는 “우리 정부나 국회의원이 힘을 써서 우리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에 간 모든 사람이 보상을 받을 수 있게끔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젊은 사람들도 우리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에 가서 고생했는지 알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김정주 할머니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강제 동원된 분들은 ‘일본의 사죄를 받고 후세에는 (이런 상황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일관되게 말씀하신다”며 “사죄를 못 받고 돌아가실까 봐 걱정하는 말씀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일본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인 야노 히데키 씨는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며 “일본 스가 정권은 정권 말기의 위기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강제동원 기업들이 그런 정권에 자신들의 판단을 맡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강제동원 판결대로 배상하라”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온라인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1.8.15 [email protected]

정성조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광복 76년 지나도 사죄 없는 日…피해자에겐 시간 없다”

※관련기사

☞한겨레: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도 효력 없나 싶어 마음이 안 좋아”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 2021.8.15/뉴스1
광복절인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주, 이춘식, 양금덕 어르신이 온라인으로 참석한 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서울=뉴스1) 이성철 기자 =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 2021.8.15/뉴스1

월, 2021/08/16- 00:38
1
0

친일인사 작곡 교가·일본신사 잔재 등…교육청 “후속 조치는 자율”

친일 인사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 [학교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인천 지역 학교에 대한 일제 잔재 조사가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행됐지만 별다른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5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4∼12월 지역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52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모두 81건의 일제 잔재 사례가 파악됐다.

이 중 22건은 친일 작사가나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 사례였다.

특히 ‘섬집 아기’와 ‘봄이 오면’의 작곡가로 유명한 이흥렬이 만든 교가도 7개 학교에서 사용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음악의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대화악단 지휘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또 다른 친일 인사인 김동진이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도 6곳에 달했다. 김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음악 활동을 했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 인사의 동상이나 일본 신사 잔재 등 일제 관련 기념물이 교정에 남아 있는 학교는 3곳으로 파악됐다.

나머지는 서운, 송월, 백마, 작약도 등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된 지명이 교명과 교가 가사에 남은 사례였다.

시교육청은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각 학교에 알렸으나 개선은 권고 사항에 그쳐 눈에 띄는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학교 동문회와 학교운영위원회 등 내부 협의가 필수적인 만큼 교내 일제 잔재를 없애기까지는 시일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천황을 섬기던 신사의 돌기둥과 석등이 교정에 남아 있는 인천 중구 모 고교의 경우 별도의 시설물 철거 계획을 논의하지는 않은 상태다.

인천 연수구 모 중학교에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윤치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나쁜 역사도 역사로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철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동창회 차원에서 재원을 마련해 학교 설립자 동상을 세운 것이라 학교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며 “내부 검토를 여러 차례 했지만 역사를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동상을 남겨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들도 대부분 즉각적인 개선 조치에는 나서지 못했다.

친일파가 교가를 작곡한 인천 연수구 모 고교는 추후 학생, 학부모, 동문회와의 협의를 거쳐 교가 일부를 개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인천 동구 모 고교도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에 대해 별다른 개선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일선 학교에 일제 잔재 조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알리기는 했지만 후속 조치는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다”며 “이후 각 학교의 개선 여부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은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인천 학교들, 일제 잔재 남아 있어도 개선은 ‘거북이걸음’

※관련기사

☞서울신문: 친일파가 만든 교가…인천 각급 학교 일제 잔재 파악하고도 ‘개선‘ 소극적

화, 2021/08/17- 00:19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