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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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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admin | 월, 2020/07/13- 19:54

[김종성의 히,스토리] 국민 학살한 친일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 별세 (서울=연합뉴스)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휴전회담 한국대표를 역임한 백 장군이 육군에 기증한 군 역사 관련 기록물 중 1951년 7월 10일 유엔 대표들이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가기에 앞서 기념촬영 하고 있는 모습. 휴전협정 당시 계급으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2020.7.11 [연합뉴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지난 5, 6월 서울현충원 안장 논란의 당사자였던 백선엽 전 만주국 중위 겸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대장이 7월 10일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육군은 육군장 영결식이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다고 예고했다. 안장식은 같은 날 11시 30분 대전현충원에서 열릴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백선엽은 20세 때인 1940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군 잡는 특수부대로 명성을 날린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했다.

해방 뒤 잠시 고향에 체류한 그는 남쪽으로 넘어온 뒤 육군 정보국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친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하는 숙군 작업을 전개했다. 그런 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부터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1월 국군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1959년 2월, 39세 나이로 연합참모본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 총장이 된 그는 이듬해인 1960년에 뜻하지 않게 군복을 벗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의 격동 속에서 군대를 떠났고, 그해 7월 주중화민국대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됐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 뒤로도 프랑스·캐나다에서 대사 직을 수행했던 그는 1969년 교통부장관이 됐고 1971년(51세) 장관직을 퇴임했다. 1973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는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사장을 지냈다.

군대를 떠난 나이(40세)와 공직을 떠난 나이(51세)가 좀 이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면 화려한 공직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가시’들이 감춰져 있다. 한국 사회의 핵심 독소들이 그 가시들에 잔뜩 묻어 있다.

백선엽의 인생

▲ 백선엽 장군 빈소 조문 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빈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선엽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이었다. 그가 근무한 간도특설대는 친일 군인 중에서도 특별한 친일 군인들만 가는 곳이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한 이 부대의 주력은 식민지 한국인들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식민지인을 이용해 식민지인을 탄압하는 일본제국주의의 방식을 실천하는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가 쏜 총탄에 쓰러진 항일투사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로서 이 부대에서 활약한 백선엽은 누구도 부인 못할 친일파였다.

그가 친일에 깊이 물들었다는 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로당 박정희’를 구해준 데서도 드러난다.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치는 민족주의 장병들이 일으킨 여순항쟁(여순사건) 당시, 박정희는 이들과 연관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 박정희가 1개월도 안 된 12월 10일 석방된 것은 숙군 작업을 주도하던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이 신원보증서에 도장을 찍어줬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최소한 과거 만주군이나 일본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박정희는 자신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파격적인 구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정희 구명은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또 백선엽은 국민 학살,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것은 친일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중한 범죄다. 전쟁 상황 속의 민간인을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치부하는 일부 그릇된 군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범죄로 비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 군사행동을 하다 보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사고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소유자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민간인을 죽이는 군인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한낱 범죄자에 불과하다. 그 시절 한국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범죄자가 범죄로 인식하지 못했다 하여 범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범죄를,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 시절에 저질렀다. 그는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민간인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이 부대는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여성들에게 죄악을 저질렀다.

이런 일을 두고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사고였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군인은 국민의 명을 받은 몸이고 국민을 지켜야 하는 몸이다. 그런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민간인인지 빨치산인지 구분도 하지 않고 마구 살상했다는 것은 애당초 국민의 신성함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백선엽의 동종 범죄는 한국전쟁 때도 있었다. 그는 이끄는 백야사라는 특수부대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국민 학살을 감행했다. 백선엽의 부하들이 일반 국민과 빨치산을 가리지 않고 총을 쐈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의 상황만으로도 명백히 증명된다. 이 12일간 이들은 4천 명의 빨치산을 잡겠다는 목표로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사살된 사람은 총 6600명이었다. 아무나 마구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은 6·25 전쟁 영웅으로 불린다. 육군 홈페이지의 ‘육군 소개’ 코너에 실린 다음과 같은 ‘백선엽의 전공’과 위와 같은 ‘백선엽의 국민 학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무겁겠는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중에는 보병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2군단장으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1군단장으로 설악산 부근 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움.”

그가 세운 전공이 그가 범한 국민 학살보다 더 중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섣불리 치켜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전쟁영웅이라면 그가 죽인 국민들은 대체 무엇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적군이 아닌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백선엽의 일생에서 하나의 ‘패턴’처럼 자주 나타났다. 해방 이후뿐 아니라 이전에도 그는 동종 범죄를 저질렀다.

그가 속한 간도특설대는 항일투사뿐 아니라 민간인들한테도 학살을 자행했다. 2008년에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의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이 부대가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간도특설대의 여타 구성원들을 포함해 백선엽이라는 인물의 머릿속에서 국가만 중요하고 인간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백선엽의 행적은 해방공간의 남한 땅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사회발전을 저해한 이북 출신 청년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해방 뒤 북쪽에 체류하다가 월남한 그는 극우 청년단체가 아닌 군대로 가기는 했지만, 극우 청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보를 걸었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그는 국민 살상을 자행했다.

백선엽은 왜 마흔에 군대를 떠났나

▲ 백선엽 장군 별세,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한 백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2013년 8월 경기도 파주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입은 뒤 경례하는 백 장군. ⓒ 연합뉴스

그런데 그는 친일과 반공의 길만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 궤적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에 나오는 이인국 박사를 연상케 할 만하다. 평양에서 친일파 의사로 살던 이인국은 해방 뒤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소련파로 변신했다가 한국전쟁 중에 남하해 친미파로 둔갑했다.

만주국 중위 백선엽은 일본이 패망한 다음달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인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서 치안대장으로 활동했다. 친일파들이 빨갱이로 부르던 조직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그 시기에 백선엽은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의 비서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조만식이 김일성에게 밀리자 38선을 넘어 친미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꺼삐딴 리 스타일의 인생행로를 아주 전형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백선엽에 대해 파고들 것이 많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왜 나이 마흔에 군대를 떠나 주중화민국대사가 됐는가 하는 점이다. 국방장관 승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가 전역을 결심한 배경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연합참모본부 총장 백선엽의 전역은 1960년 5월 31일에 있었다. 4·19혁명에 직면한 이승만 대통령이 사법처리를 피하고자 하와이로 망명한 지 이틀 뒤였다.

그해 6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연참본부총장) 백선엽 대장 사표 수리’에 따르면, 백선엽은 사퇴 성명서에서 “민주혁명의 정신에 호응하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군대의 민주적 개혁의 터전을 선임자로서 닦아주려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으니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자 사퇴하게 됐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가 사퇴를 결심하게 되는 과정이 유광종 <중앙일보> 기자가 정리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백선엽 회고록에 나온다. 사퇴하기 얼마 전에 그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이 장면이 회고록에 소개돼 있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선 나를 보더니 ‘이제 다 때가 되지 않았느냐. 나도 옷을 벗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물러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였다. 나는 그의 말뜻을 빨리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히 내게 군에서 은퇴하라는 의사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하야를 지켜보면서 언뜻 품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장관에게 ‘알았다. 잘됐다’고 말했다.”

이종찬은 현역군인 신분을 갖고 국방부장관 직을 수행했다. 그는 1960년 5월에 전역했다. 이 대화 시점의 그는 국방장관 직만 갖고 있는 상태였다.

사퇴 성명이나 회고록만 놓고 보면, 백선엽의 전역이 이승만 퇴진에 따른 의례적인 일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고위 공직을 지낸 사람이 4·19 혁명 뒤에도 계속 공직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퇴임한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에는 군부 수뇌부도 개입했다. 이 점은 1960년 5월 13일에 이종찬 국방부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했던 증언에서도 증명된다. 1960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 기사 ‘군의 부정선거 개입 부인 못해’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군대가 부정선거에 전혀 가담치 않았다고 부인하지는 못하겠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바로 이 부정선거 책임이 백선엽 전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하야 뒤에 과도정부(과정)를 이끌며 국정을 책임졌던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의 기고문을 담은 1962년 4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허정 씨가 공개하는 과정 3개월 (5)’에 이 점이 설명돼 있다.

기고문에서 허정은 군부 수뇌부의 부정선거 가담을 규탄하는 젊은 장교들의 압력이 거셌다는 점을 설명한 뒤, 자신이 소장급 이상 장군들에게 “당신들은 자기 스스로가 잘 판단해서 좋은 구실과 계기를 만들어 자진 사퇴를 해주시오”라며 “그러면 나도 여러분의 인격과 위신에 맞도록 해외 대·공사직을 마련하여 내보내도록 노력하겠소”라고 권유했노라고 회고했다. 그런 뒤 허정은 기고문 끝에 이런 글을 달아놓았다.

“나의 이 방법은 후에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어 자진 사퇴하는 이가 많이 나왔고, 또 몇몇 분들에게는 약속대로 해외 공관의 공사 또는 대사로 임명해서 현지에 보내준 일도 있다(주: 백선엽·유재흥 장군 등의 주중국·주태국 대사직이 이때부터 마련되었음).”

이 일화는 백선엽이 친일행위와 국민학살에 더해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적폐청산 작업이 군부에 대해서도 철저히 이뤄졌다면, 백선엽의 죄악은 좀더 명확히 세상에 드러났을 것이다. 전쟁영웅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이면의 백선엽은 독 묻은 가시처럼 온갖 부조리를 묻힌 인물이었다.

이처럼 죄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백선엽은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품었다. 그는 자기가 선엽(善燁)이란 이름의 善처럼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위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이름에는 착할 선(善)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 내 회고록을 집필한 <중앙일보> 유광종 기자가 1948년 박정희 대통령을 숙군 작업에서 살려준 동기가 무엇이냐고 집요하게 묻길래, 그때에도 ‘내 이름에 착할 선이 들어 있잖아’라며 넘어간 적이 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는 데 만족한다. 가능하면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돕고,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고, 남을 해치려는 자는 힘을 기울여 막으면 좋은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정말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살렸으면 그만이다. 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얻으려 고심할까.”

자신이 선하게 살았노라고 자부했다. 살릴 사람은 살리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살릴 사람’이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항일투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고한 민간인들이 ‘살릴 사람’과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 중에 후자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3·1운동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당시의 헌법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3·1운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나라에서, 3·1운동을 부정하는 친일행위에 가담하고 그것도 모자라 국민들을 마구 학살한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모신다면, 국민들은 현충원이 어떤 사람들을 모시는 곳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2020-07-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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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박철홍 시의원 문제제기 “역사의 교육 현장으로 알리자”

▲ 진주성 비석군. ⓒ 민족문제연구소

“비석군의 어떤 비석 주인공은 친일행위를 했고, 애국지사도 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같이 모아 두다 보니 마치 모든 비석의 주인공이 공적이 있거나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것처럼 여길 수 있다.

민족과 나라를 배신했던 사람의 비석을 모두 없애자는 말은 아니다. 그 비석의 주인공이 어떤 친일행적을 했는지는 알 수 있도록 해놓아야 한다. 애국지사 비석과 같이 있다 보니 혼동이다. 더구나 왜적과 싸운 역사가 뚜렷한 진주성 안에 친일인사의 비석이 있다고 하니 말이 안 된다.”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이 17일 진주성 비석군에 있는 일부 비석에 대해 이같이 지적했다. 이날 박철홍 진주시의원도 진주시의회 정례회 5분자유발언을 통해 일부 비석의 친일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헤야 한다고 제시했다.

진주성 비석군에 친일행적 정태석·정상진·정봉욱 있어

진주성 안 경절사와 청계서원 앞에는 ‘비석군’이 있다.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가 당시 진주성과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 놓았던 것이다.

비석군에는 ‘1604년 이수일 진주목사 음애비’와 ‘1656년 성이성 목사 청덕 유애비’를 포함해 30여 기가 있다.

비석군에는 친일행위가 있는 인사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정태석(鄭泰奭), 정상진(鄭相珍), 정봉욱(鄭奉郁)이다.

▲ 진주성 내 국립진주박물관 좌측 길 옆 3.1운동기념비 아래에 있는 ‘정표환 시혜불망비’.. ⓒ 민족문제연구소
▲ 진주성 비석군에 있는 정태석 비석. ⓒ 민족문제연구소

정태석(진사)은 지주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비행기 ‘진주호’ 헌납에 당시 진주 최고액 1만188원을 기부했고. 1938년 진주 유지들의 모임인 ‘연재계’ 회장으로 300원의 국방성금을 헌납했으며, 1938년 <조선시보>에 ‘전승신년’ 시국광고를 게재하고, 1935년과 1938년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정상진(창씨명 烏川相珍)은 지주이면서 실업가로, 193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 민간공로자 표창으로 은잔을 하사받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비행기 ‘진주호’ 헌납에 5000원을 기부했으며, 1938년 3월 <조선시보>에 ‘황군 대승의 봄을 맞이하다’라는 제목의 시국광고를 게재했다.

또 그는 1939년 <매일신보>에 ‘황군의 무운을 바라는’ 시국광고를 게재하고, 1939년 3월 26일 조선특별지원병 진주후원회 고문으로 선출됐다. 1940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축 황기 2600년 신춘’을 게재했고, 1940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합방 30주년 민간공로자 표창’을 받았으며, 1941년 <매일신보>에 ‘흥아유신’을 축하하는 시국광고 게재 등의 친일행위를 했다.

정봉욱은 1918~1930년 내동면장을 지냈고, 1921년 <매일신보> 주최로 일본 시찰을 다녀왔으며, 1933년 ‘기원절’에 일장기 게양을 독려하고, 1940년 ‘동아의 건설에 유도(儒道)정신을 발휘’라는 경남유도연합회 결성식에 진양군 대표로 참가했다.

진주성 내 국립진주박물관 쪽 3.1독립운동기념비 옆에는 ‘정표환(鄭杓煥) 시혜불망비’가 있다. 그는 지주로, 1914년 12월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木杯)와 밭 130평을 하사받았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비행기 ‘진주호’ 헌납에 5000원을 기부하고. 1939년 1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황군의 무운을 바라는’ 시국광고를 게재했다.

이밖에 비석군에는 일제강점기 때 면장과 구장을 지낸 김종백(金鍾百) 면장, 정승주(鄭承周) 면장, 이○열(李○列) 평거구장의 비석도 있다.

▲ 진주서 비석군에 있는 정상진 비석. ⓒ 민족문제연구소

박철홍 시의원 “진주성은 자랑이지만 한이 서린 곳”

박철홍 시의원은 이날 자유발언에서 비석군에 대해 설명하면서 “임진왜란 계사년 전투에 7만 민관군이 장렬히 순국한 진주성은 우리에게는 자랑이지만 한이 서린 곳”이라고 했다.

그는 “친일인사의 시혜비가 진주성 안에 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 치욕이지만 이를 알리고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역사의 교육 현장으로 알리자는 의견을 피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해방 후 친일파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독립운동가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고 지배층으로 자리잡았다”며 “오랜 세월이 흘러 이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는 사라졌지만 진주 명승지에 이름을 새긴 그들의 잘못된 행위와 친일인사의 시혜비가 진주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잊지 말자는 취지는 시민 모두가 공감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또 촉석루 아래 의암 쪽 벽면과 뒤벼리에 새겨져 있는 친일파 이름에 대해, 박 의원은 “표지판을 세워 아픈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고 강조했다.

촉석루 아래 의암 쪽 벽면에는 ‘이은용’과 개명 후 이름인 ‘이지용’의 이름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지용은 ‘을사5적’이다.

뒤벼리 쪽에는 구한말 경남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탐관오리로 일제의 침략에 적극 가담했던 이재각(李載覺), 이재현(李載現), 성기운(成岐運)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뒤벼리 앞에는 시민단체가 세운 ‘친일행적 안내판’이 있다. 박 의원은 “뒤벼리에 세워진 알림판은 낙석 방지 철조망 안에 방치돼 있으며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며 “뒤벼리 강변 쪽 인도에 세워 많은 분들이 관심 가지고 읽을 수 있게 해야 된다”고 했다.

촉석루 아래 의암 쪽 음각에 대해, 박 의원은 “이지용, 이은용 글씨를 알릴 표지판을 세우자는 건의는 수차례 있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진주시에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강 건너편에 알림판과 망원경을 설치하여 쉽고 안전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대안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 진주성 비석군 표지석. ⓒ 민족문제연구소

<2020-12-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진주성 안 ‘친일파’ 비석 여럿, 안내판이라도 세워야”

금, 2020/12/18-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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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민족 행위 처벌법’과 특위 구성했지만 청산 못해
– 일본식 표현을 사용한 법률용어에 대한 공동연구 진행
– 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 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

[선데이타임즈=윤석문 기자]‘일제잔재법률용어 청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은 17일 국회 소통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행 법률 중 일본식 표현을 사용한 법률용어 청산을 통해 우리 법률 속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바꿔가겠다”고 밝혔다.

모임의 정청래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제헌 국회는 제헌 헌법에 따라 ‘빈민족 행위 처벌법’을 만들고 반민 특위 구성을 하였지만 1년이 채 못 되어 해산하면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2000년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친일인명사전’이 공개되는 등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다시 시작 되었지만 여전히 일제 잔재는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광복 75주년을 맞아 일제잔재법률용어청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소속 19인은 현행 법률 중 일본식 표현을 사용한 법률용어에 대한 공동연구를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121건의 법률에서 일본식 표현을 발견했고 개정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언어는 민족의 얼과 문화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올바른 우리말을 사용해야 우리의 얼과 문화가 바로 설 수 있지만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 아직도 일본식 표현이 많이 남아 있다”고 강조한 ‘일제잔재법률용어 청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은 “이번 개정을 통해 우리 법을 명실상부한 ‘우리 대한민국의 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고 밝혔다.

일제잔재법률용어 청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에는 정청래 의원(대표, 이하 가나다순)을 중심으로 김남국, 김민철, 김병주, 신현영, 오기형, 오영환, 이성만, 이수진, 이용우, 이원택, 임오경, 임호선, 장경태, 장철민, 주철현, 최혜영, 한준호, 홍성국 의원이 함께 하고 있다.

<2020-12-17> 선데이 타임즈 

☞기사원문: 정청래 의원, “일제잔재법률용어청산을 통해 일제의 잔재 바꾸겠다”

화, 2020/12/22-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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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 친일 잔재 전수조사 용역 결과
김성수·김연수 형제, 서정주, 신상묵, 채만식 등 118명
관료나 군인·경찰이 다수, 종교·언론계도 포함

전라북도청사 전경.(사진=자료사진)

일본제국주의 강점기 전북 출신 인사의 친일 행적과 잔재 청산을 위한 전라북도의 연구용역이 마무리됐다.

이번 용역에선 전북 출신 친일파 명단을 추리고, 지역에 산재한 친일 잔재를 조사했다.

21일 전라북도에 따르면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 전북 출신 친일 인사는 118명, 친일 잔재는 131건으로 조사됐다.

전북 출신 친일 인사 일부 명단(사진=최명국 기자)

전북 친일 인사 명단은 이번 용역을 맡은 전북대 산학협력단이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을 기초로 작성했다.

도내 출신지가 명확하지 않은 36명을 제외하면 시·군 중에선 전주 출신 친일 인사가 24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익산(10명), 군산(7명), 남원·고창·정읍·임실(각각 6명), 김제(4명), 무주·진안·장수·완주·부안(각각 2명) 등이다.

일제강점기 전북에 속했던 충남 금산 출신은 3명이다.

고창 출신으로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를 설립한 김성수와 그의 동생으로 삼양사 창업주인 김연수, 전북경찰국장을 지낸 신상묵, 시인 서정주 등 친일 행적이 잘 알려진 인사가 다수 포함됐다.

또, 중추원 참의를 지낸 강동희, 3·1운동 진압 목적으로 설립된 전라북도자성회장을 역임한 백낙신, 지역유력자로 일제에 국방금품을 헌납한 한인수가 친일파로 지목됐다.

종교계 인사로는 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총무·장로교 목사였던 김종대,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상무이사 박완, 유재환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 등이 이름을 올렸다.

언론·문학계에선 이익상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 이창수 매일신보 논설위원, 소설가 채만식이 친일파로 꼽혔다.

전북 출신 친일 인사의 활동분야를 보면 관료나 군인·경찰이 69명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이었던 중추원(20명), 친일단체(5명) 활동 인사도 많았다.

도내 친일 잔재는 총 131건으로 지역별로는 군산이 30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전주(27건)·고창(16건)·익산(15건)·완주(11건)·김제(8건) 등의 순이다.

친일 잔재는 친일 인사의 출신지역이나 행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당시문학관·수당 김연수 송덕비(고창), 채만식 소설비(군산)를 비롯해 군산내항철도, 구마모토 공덕비(김제), 향가터널(순창), 사이토 총독 탁본(임실), 김해강 시비·취향정(전주), 황토현 전봉준 장군 동상(정읍), 풍혈냉천(진안), 만인의총 박정희 현판(남원)이 친일 잔재로 조사됐다.

전라북도는 친일 잔재 등의 청산과 관련해 시·군과 후속조치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안내판 설치 등 예산이 수반되는 사업에 대해서는 예산 확보를 통해 친일 잔재를 지속적으로 청산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전라북도의 이번 용역에서 다소 미흡했던 지역유력자의 친일 행적에 대한 후속 연구와 친일 잔재의 조속한 청산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재호 전북지부장은 “대지주 등 일제강점기 지역유력자나 기업인 중에도 친일 인사가 많다”며 “이들에 대한 친일 행적 연구와 친일 잔재의 효과적 처리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북CBS 최명국 기자

<2020-12-21> 노컷뉴스 

☞기사원문: 전북 출신 친일파·친일 잔재 면면 보니

화, 2020/12/22-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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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법 위반으로 고문과 재판 겪어
‘허허 선생’ 연작으로 왜곡된 사회구조 풍자도

소설 ‘분지’의 작가 남정현이 21일 오전 10시에 별세했다. 향년 87.

193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대전사범학교를 나온 남정현은 몇달 간 교사 생활을 했으나 지병인 결핵 때문에 곧 그만두고 치료를 받으며 습작을 했다. 1958~9년 <자유문학>에 ‘경고구역’과 ‘굴뚝 밑의 유산’이 추천을 받으며 등단한 그는 1961년 중편 ‘너는 뭐냐’로 동인문학상을 받으며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러나 1965년에 발표한 단편 ‘분지’가 북한의 기관지 <조국통일>에 전재되면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1967년 고등법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기까지 고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분지’는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를 주인공 삼은 소설로 반미 의식이 충만한 작품이다. 홍만수의 어머니는 미군에게 강간당한 충격으로 세상을 떴고 누이동생은 미군 상사 스미스와 동거를 하며 성적 학대를 당한다. 그에 분노한 만수가 스미스 상사의 아내를 겁탈하고 향미산으로 들어가 숨자, 미국 펜타곤이 핵미사일을 동원해 향미산을 폭격하려 한다는 것이 소설의 얼개다.

‘분지’ 필화사건은 창작의 자유를 옥죄고 감시·처벌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전횡과 횡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남정현은 ‘분지’ 필화 사건 뒤에도 ‘허허 선생’ 연작을 발표하며 창작 의욕을 이어나갔으나 1974년 대통령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다시 구속되어 반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고 1980년에도 예비 검속으로 구속되는 등 고난이 그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창작 활동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1973년 ‘허허 선생 1’로 시작해 1992년 ‘허허 선생 옷 벗을라’까지 모두 8편으로 완성된 ‘허허 선생’ 연작은 일제 순사 출신으로 해방 뒤에도 승승장구하는 주인공 허허 선생을 통해 한국 사회의 왜곡된 구조를 풍자한 작품이다. 남정현 자신에 따르면 허허 선생은 “역사적으로 누대에 걸친 수수백년 동안 오로지 일신의 영화만을 탐한 나머지 언제나 침략세력이었던 외세와 늘 한통속이 되어 나라와 민중의 이익을 열심히 짓밟은 지배계층 공통의 반인간적이며 반민족적인 그 못돼먹은 의식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타기할 인물”을 대표한다. ‘분지’와 ‘허허 선생’ 연작에서 보듯 남정현의 소설은 풍자와 반어의 기법을 통해 강렬한 민족주의 및 반외세 의식을 표현하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다. 문학평론가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은 “남정현 소설은 한 시대의 갈등과 모순을 마치 전자현미경처럼 확대시켜 이를 만화풍으로 소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남정현은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고문과 한국펜클럽 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문학 창작과 현실적 실천을 병행했다. 1990년에는 일본 도쿄와 교토 등에서 열린 국제평화포럼에 참가해 주제발표를 했으며 1992년에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세계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인대회에 참가하는 등 국제 문학 교류에도 힘썼다. 2002년에는 <남정현 문학전집>(전3권)을 출간했으며 2004년에는 <남정현 대표소설선집>을 내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건강이 나빠져서 집필과 외부 활동을 줄이고 칩거했다.

그가 2011년에 발표한 마지막 소설 ‘편지 한 통-미 제국주의 전상서’는 국가보안법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자신의 조물주이자 상전인 ‘미 제국주의’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북한의 핵 억지력이라는 현실 위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오가는 평화협정 논의를 불안하고 불만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는 국가보안법의 목소리를 빌려 작가 특유의 민족주의와 반미주의를 선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남정현은 2018년 산문집 <엄마 아 우리 엄마>를 내고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문학은 인간을 사랑하는 작업”이라며 “인간은 사회에 발 디디고 서 있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작가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는 사회를 형성하는 정치, 경제, 문화를 깊이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1987년에 낸 대표작품선 <분지>에 쓴 ‘작가의 말’에서도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은폐된 진실을 찾아내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감행되는 현실과의 가열한 싸움”이라고 썼다. 평생 글과 행동으로 현실에 맞서 싸우며 진실을 찾고자 했던 개결한 작가 남정현이 영원한 휴식에 들었다. 고인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주는 제12회 민족예술상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돈희(한국지도자육성장학재단 장학부장)씨와 딸 진희(전업주부)씨, 며느리 나명주(참교육학부모회 전국회장)씨, 사위 우승훈(마취과 의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3일 오전에 있다. (02)2072-2010.

최재봉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0-12-22> 한겨레 

☞기사원문: ‘분지’의 작가 남정현 별세

화, 2020/12/2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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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0/12/24-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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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학술계 결산
뉴라이트 연구자들 또 한차례 역사부정 소동에 역사학계 체계적 반박
민중사학자 이이화, 생태사상가 김종철, 한국 여성학 대모 이효재 떠나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지난 5월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터 앞에서 열린 제1440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email protected]

코로나19 대유행이 지구촌을 강타한 가운데 올해 국내 학술계에도 주목할 만한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 우익의 논리와 연계된 국내 연구자들의 역사부정 행위가 올해도 이어졌으며, 이이화·김종철·이효재 같은 학계의 거목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일도 연달아 일어났다.

‘반일 종족주의’ 집필자들 역사 도발

올해 국내 학술계에서 가장 큰 사건은 뉴라이트 연구자들이 일으킨 ‘일제강점기 역사 왜곡’ 소동이었다. 지난해 <반일 종족주의> 출간으로 한차례 논란을 불렀던 이 책 집필자들이 지난 5월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두 번째 책을 펴낸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은 비슷한 시기에 터진 ‘정의기억연대 사건’과 얽혀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비화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우익 연구자들이 쓴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은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역사학계의 비판을 반박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반일 종족주의> 주장을 되풀이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의 주장은 사료를 왜곡하거나 사실을 과장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호도했다는 역사학계의 재반박에 부닥쳤다. 전선은 특히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두고 그어졌다. 역사학계는 일제강점기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위안부 강제동원’이 자행됐으며 ‘위안부들이 위안소에 감금돼 인간으로서 존엄을 침해당한 국가범죄의 피해자’였음을 입증했지만, 우익 집필자들은 ‘권력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은 증명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들의 주장을 논박하는 책들도 잇따라 출간됐다. <반일 종족주의> 집필자들의 역사 왜곡에 맞서 가장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반박서를 낸 학자는 강상현 성공회대 교수였다. 강 교수는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에서 <반일 종족주의> 집필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사료적 근거를 대가며 비판하고, 일본 극우의 역사부정론이 한국 뉴라이트의 ‘반일 종족주의 프레임’으로 각색됐음을 논증했다. 강 교수에 이어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으로 이영훈 등의 주장을 다시 해체했다. 전 교수는 이 책에서 뉴라이트 연구자들이 ‘사실을 재가공한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고 공박했다. 그러나 일부 수구언론은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정의기억연대 사태’가 나자 <반일 종족주의> 집필자들의 언어와 주장을 그대로 가져와 정의기억연대와 수요집회를 비판하는 데 몰두했다.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집필자들이 박정희 군사정변 기념일인 5월16일에 맞춰 책을 펴냈다는 것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이영훈 전 교수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가 망한 이유가 “개인보다 사회를 앞세우는 전체주의”에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전체주의적이었던 이승만-박정희의 통치를 옹호하는 모순된 행태를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뉴라이트 연구자들이 일으킨 역사 왜곡 소동은 결국 역사학계의 계속된 비판과 역공 속에 이들의 주장이 공론장 밖으로 밀려나는 양상을 보이면서 수그러들었다.

생태사상가 김종철.

큰 족적 남긴 김종철·이이화·이효재

올해 학술계의 또 다른 주목할 사건은 굵직한 학문적 자취를 남긴 학자들이 연거푸 타계한 일이다. 생태사상가 김종철,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한국 여성학의 대모 이효재가 올해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 7월 갑자기 세상과 이별한 김종철은 30년 동안 올곧게 생태주의 운동을 벌인 이론가이고 운동가였다. 1991년 국내 최초의 생태주의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창간한 뒤 타계할 때까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이 잡지를 발행해 왔다. <녹색평론> 창간사에서 그는 지금 상황을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위기, 정치나 경제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문화적 위기, 즉 도덕적·철학적 위기”라고 진단했다. 1999년 펴낸 평론집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지난 8년 동안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이 자신에게는 ‘구원’과 같았다며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고 술회했다. 김종철은 이 잡지의 매호마다 폭주하는 자본주의 문명을 생태 문명으로 바꾸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고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펴낸 <녹색평론> 5·6월호 권두언에서는 지구 전체를 흔들고 있는 코로나19 대재앙이 “자본주의의 폭주, 과잉 산업발전과 소비주의의 소산”이라며 “이윤을 위한 이윤 추구, 소비라기보다는 끝없는 낭비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시스템을 종식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역량이 총동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이렇게 ‘생태 사상’의 전파에 힘쓰는 중에 김종철은 민주주의 심화와 불평등체제 혁파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촛불시위가 번져 나가던 2017년에는 주권자인 시민의 정치적 힘을 키우기 위해 추첨을 통한 시민의회 구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기본소득 아이디어도 김종철이 국내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고 공론화에 앞장섰다. 김종철의 선도적 노력으로 기본소득은 정치적으로 뜨거운 현실적 주제로 떠올랐다.

역사학자 이이화.

김종철의 타계에 앞서 지난 3월에는 민중사학의 거목 이이화가 세상을 떠났다. 이이화는 극심한 가난 속에 고학한 탓에 대학에서 정식으로 역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고대부터 현대까지 두루 꿰는 장쾌한 시야로 민중의 역사를 복원하며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1994년부터 10년에 걸쳐 쓴 총 22권의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는 개인이 쓴 통사로는 가장 방대한 분량이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선생님은 상아탑에 갇힌 민족사를 해방시켜 대중의 역사, 거리의 역사, 현실에 발 디딘 살아 숨 쉬는 역사로 바꾼 행동하는 지성인이요 실천가셨다”고 고인의 삶을 기렸다. 이이화는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제 2대 연구소장을 지내기도 했다. 민중사학자로서 이이화가 깊은 애정을 지녔던 한국사 분야는 동학농민혁명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집필에 몰두한 <동학농민혁명사>(전 3권)는 이이화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이 책에서 이이화는 동학농민혁명의 평등·자주 사상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여성학자 이효재. <한겨레> 자료사진

10월에는 한국 여성운동의 1세대 지도자 이효재가 96년의 삶을 마쳤다. 1950년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효재는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자리 잡은 뒤 한국 최초의 여성학과를 탄생시켰다. 이효재는 국내 학계에서 처음으로 ‘여성 문제’를 독자적 주제로 연구했고, 한국적 상황을 바탕으로 한 여성학 이론을 만들었다. 이효재가 1979년에 펴낸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천>은 여성운동의 교과서로서 수많은 후배 여성들을 여성운동으로 이끌었다. ‘우리 역사의 맥락 속 여성운동’에 대한 강조는 ‘분단사회학’ 개척으로 이어졌다. 분단사회학은 남북 분단이 여성과 가족을 비롯해 사회구조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함으로써 분단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분단과 여성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그의 학문적 노력은 1985년 <분단시대의 사회학>으로 열매를 맺었다.

이효재는 사회적 실천에도 깊이 관여해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의 전신) 창립을 주도했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쟁 범죄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노력을 다했고, 1996년 유엔 인권위원회의 ‘위안부’ 특별보고서 채택을 이끌었다. 1990년 정년 퇴임 뒤에도 ‘평화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2015년에는 자신이 직접 제안해 마련된 ‘한반도 평화를 이루고자 호소하는 여성 10000인’ 기자회견에 나와 ‘전쟁과 핵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여성들이 앞장서자’고 제안했다. 이효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남북이 화해해 평화통일을 이루자’였다.

고명섭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0-12-25> 한겨레 

☞기사원문: ‘반일종족주의’ 역사 왜곡에 맞서고, 학계의 거목들 쓰러지고

토, 2020/12/26-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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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역사정의 실천 상’ 시상식
이건상 총괄본부장 ‘역사정의 실천 언론인 상’ 수상
김순흥 지부장 ‘역사정의 실천 시민운동가 상’

광복회는 23일 광주시지부 광복회관에서 ‘역사정의 실천 시민운동가 상’에 김순흥(오른쪽)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역사정의 실천 언론인 상’에 이건상(왼쪽) 전남일보 기자에게 수여했다. 광복회 제공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23일 광복회 광주시지부 광복회관에서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에게 ‘역사정의 실천 시민운동가 상’을, 이건상 전남일보 총괄본부장 겸 선임기자에게 ‘역사정의 실천 언론인 상’을 각각 수여했다.

광복회는 올해 처음으로 시민운동가, 교육가, 정치인, 언론인 가운데 역사정의를 실천한 인사를 선정, 수상하고 있다.

김주원 광복회 광주시지부장은 김원웅 회장을 대신해 인사말에서 “김순흥 지부장과 이건상 기자는 우리시대의 독립군으로 친일잔재 청산과 조선의용대 등 숨은 우리 독립운동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알려왔다”고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김순흥 지부장은 수감소감으로 “항일 애국지사와 독립군들은 춥고 낯선 땅에서 배고픔을 참아가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항일의 길에서 맹렬하게 싸웠고, 그리고 장렬하게 순국했다”며 “오늘의 이 영광을 먼저 독립군 선열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이건상 본부장은 “분단과 반공, 이념의 장벽에 갇혀 아직도 반쪽의 독립운동사에 머물고 있어 안타깝다”고 전제한 뒤 “좌우를 아우르는 온 쪽의 독립운동, 가려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드러내고 선양하는 일에 더욱더 매진하겠다”고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광복회는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으로 구성된 공법단체로 3·1절, 광복절 기념식 주관, 국내외 독립운동사적지 발굴 등 민족정기 선양사업을 펼치고 있다.

By 김해나 기자 [email protected]게재 2020-12-23 17:06:35

<2020-12-23> 전남일보 

☞기사원문: 이건상 총괄본부장 ‘역사정의 실천 언론인 상’ 수상

토, 2020/12/26-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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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는 22일 파주 임진각 평화부지사 현장집무실에서 ‘개성공단 재개선언을 위한 연대회의 준비위원회’를 열었다. /경기도 북부청사 제공

22일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위한 연대회의 준비위원회 개최

[더팩트 l 파주=김성훈 기자] 남북 경제협력 상징인 개성공단의 재개를 이끌어 내기 위한 민간 주도의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위한 연대회의’가 내년 1월 중 출범할 전망이다.

경기도는 22일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평화부지사 현장집무실에서 열린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위한 연대회의 준비위원회’를 열고 이 같은 추진 방향을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날 준비위원회는 지난 15일 이재강 평화부지사가 통일대교에서 ‘삼보일배’를 통해 제안한 ‘개성공단 재개선언을 위한 범국민운동 전개’ 구상에 대해 정관계, 기업, 시민단체 등이 호응해 열리게 됐다.

준비위원회에는 이재강 평화부지사,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심규순 도의회 기획재정위원장 등과 개성공단 기업인, 시민사회단체 및 종교계, 학계 대표 등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회의에서는 연대회의 명칭, 조직체계 구축 및 향후 추진 방안 등에 대한 사항을 논의했다.

‘개성공단 재개선언을 위한 연대회의’는 각계각층의 구성원들과 함께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실질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모색하고 추진하는 역할을 맡을 민간 주도 협력기구다.

이날 회의에서는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상임대표로 추대됐다.

츨범식은 내년 1월 중에 ‘연대회의 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되, 실무적인 업무는 경기도가 주도적으로 준비키로 합의했다.

준비위원들은 이날 평화부지사에게 “연대회의가 만들어질 예정이니, 평화부지사께선 도청으로 복귀해 코로나19 대응 등 어려운 현안 해결에 나서달라”고 거듭 건의했다. 경기도는 이 같은 요청을 받아들여 현재 운영 중인 임진각 현장집무실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재강 평화부지사는 “앞으로 코로나 정국 돌파와 함께 개성공단 재개 선언을 위한 연대회의가 활발한 활동을 하도록 협력할 계획”이라며 “특히 개성공단 재개 선언 캠페인, 전문가 포럼 등 민관이 함께 개성공단 재개를 이끌어 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 나가자”고 말했다.

경기도는 개성공단 재개선언을 목표로 지난 11월 10일부터 43일간 파주 임진각에 평화부지사 현장집무실을 운영하는 동안 약 120여개 기관·단체 350여명의 격려방문을 받았다.

[email protected]

<2020-12-23> 더 팩트

☞기사원문: ‘개성공단 재개선언’을 위한 민간 주도 협력기구 다음 달 출범

※관련기사

☞연합뉴스: ‘개성공단 재개 선언 촉구’ 민간 주도 협력기구 내달 출범

머니투데이: ‘개성공단 재개선언’ 위한 시민·사회단체 등 민간 주도 협력기구 1월 출범

경기도정신문: 경기도, ‘개성공단 재개선언’ 위한 민간 주도 협력기구 출범 합의

화, 2020/12/2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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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제정 후 1년 5개월 동안 파악한 공공조형물 22건에 그쳐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태식, 홍난유 비석 여전히 방치
당진시 “단죄비, 친일 행적 문구를 넣는 등의 방안 마련 할 것”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태식 공적비(남산공원)

[당진신문=지나영 기자] 시유지에 친일파 공적비가 버젓이 세워져 있음에도 당진시가 친일 잔재 청산에 안일하게 나서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공조형물 조례에 따라 당진시는 친일파 공적비를 조사해야 하지만 뒷짐만 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7월 당진시의회 조상연 의원은 친일 인물의 공적비를 파악하고 전수조사를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공공조형물 건립 및 관리 조례안을 발의했다.

당진시 공공조형물의 건립 및 관리 등에 관한 조례에서 정한 공공조형물은 공공시설에 건립된 회화나 조각, 공예, 사진, 서예 등 조형물과 상징탑, 기념비, 상싱물 등 상징조형물 등을 말한다. 조례에 따르면 시유지에 세워진 친일파의 공적비는 물론 모든 비석들은 관리 현황에 올려져야 한다. 또한 문제가 되는 비석에 대해서는 당진시가 위원회를 구성해 이설 또는 철거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당진시가 1년 5개월간 파악한 공공용지에 설치된 조형물은 단 22개뿐이다. 당진시는 시유지인 남산공원과 시가 관리하는 당진문화원에 세워진 비석들은 물론 조례에서 정한 공공조형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지난 4일 당진시의회에서 진행된 문화관광과 소관 시정질문에서 조상연 의원은 “각종 조형물이 공공시설에 무분별하게 세워지고, 누구의 것인지 불분명하다”며 “조례 제정 후 1년이 지났는데도 22개만 파악했다는 것은 조사를 부실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홍난유 공적비(당진문화원)

특히 당진 남산공원에는 친일인물사전 명단에 수록된 당진 출신의 관료·정치인 출신 인태식 씨의 공적비가, 그리고 당진문화원에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당진군수로 재직한 홍난유 씨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지만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관련기사: 당진 남산공원과 문화원에 버젓이 세워진 친일파 공적비, 1320호)

광주공원에 있던 홍난유의 선정비를 뽑아 옮기고 그 앞에 단죄문을 설치한 광주광역시의 모습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조상연 의원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공공용지에 조형물을 난립하는 것에 대한 방어막을 갖기 위해 당진시 공공조형물의 건립 및 관리 등에 관한 조례안을 만들었다”며 “실질적으로 조례 발의를 한 의미로는 사적인 역사 왜곡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보통 비석 같은 것을 세우면서 내 이름을 남기려고 하는데, 정확한 사실로 근거해 세워지는 것이 맞다”며 “조례에 따라 당진시는 친일 인물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인태식 씨 공적비와 홍난유 씨 선정비를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 정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당진시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그동안 세워진 조형물을 한 부서에서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어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면서도 “마을의 이정표나 개인이 세운 조형물에 시의 예산을 투입해 관리해야 하나 싶어서 조례의 공공조형물의 범주를 수정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고, 범주가 명확해지면 관리를 어떻게 할지를 구체화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비석 같은 경우는 한참 오래전에 군청사든 관아에 얘기해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세워졌을 것”이라며 “후대에 와서 친일의 문제가 드러났다고 무작정 엎어버리고 없앨 수는 없으니까, 실태조사를 통해 단죄비나 친일 행적을 알리는 문구를 넣는 등의 방식을 향후 심의위원회에서 결정해 시민에게 객관적으로 사실을 알리도록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지난 16일 충남도의회는 전국 최초로 지역 내 남아있는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충청남도 친일잔재 조사 및 연구 활동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제정, 충남도의회의 친일잔재 관련 조례 제정에 따라 당진시 친일 잔재 청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20-12-26> 당진신문

☞기사원문: 당진시, 공공조형물 조례 무시?…친일파 공적비 알고도 ‘뒷짐’

화, 2020/12/2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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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문학동네 | 284쪽 | 1만4500원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서울 옥인동에는 한때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서양식 대저택, 벽수산장(碧樹山莊)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제는 기둥만 남은 이 호화 별장은 악명 높은 친일파이자 경술국적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윤덕영이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지은 것이다. 매국으로 번 돈으로 옥인동 일대 땅을 절반 가까이 사들인 그는 자신의 아호를 따 이 건물을 ‘벽수산장’이라 이름 붙였고, 인왕산 중턱에서 경성 일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우뚝 솟은 이 프랑스식 건축물은 그 호화로움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1966년 4월5일 벽수산장(당시 언커크 건물) 화재 당시 진압 모습. 국가기록원

친일파 윤덕영이 남긴 ‘아방궁’
거기 빌붙어 부를 누리려는 후손과
그 뻔뻔스러움에 분노하면서도
선택 고민하는 독립운동가 후예

심윤경의 장편소설 <영원한 유산>은 해방 이후 20여년이 흐른 1966년, 당시 ‘언커크 건물’이라 불린 벽수산장을 배경으로 한다. 해방 후 국유화된 이 건물은 한국전쟁 중 미군 장교 숙소로 사용되다 전쟁이 끝난 뒤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본부가 됐다. 재건과 통일, 민주정부 수립 등을 목적으로 7개국 대표단으로 구성된 이 기구는 영문 약칭인 ‘언커크’란 이름으로 불렸다.

주인공 이해동은 언커크에서 호주 대표의 통역 비서로 일하는 27세 청년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데,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죽음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고 미국인 선교사 손에 자라며 영어를 익힌 그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꽤 괜찮은 일자리’인 언커크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부모 세대의 비극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 괜찮은 삶을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해온 그의 앞에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이 나타나며 안정적이었던 삶도 뒤흔들린다.

해방 후 가세가 기울고 사기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출소한 윤원섭은 언커크에 나타나 벽수산장의 옛 주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킨다. 가문의 부끄러운 역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이 건물이 자신의 아버지가 조선에 남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하는 그를 보며 이해동은 속이 뒤틀리지만, 언커크의 외교관들은 그의 현란한 말에 점차 빠져든다. 두 개의 열쇠로 이 건물의 비밀 통로를 찾아낸 윤원섭은 급기야 ‘문화복원 디렉터’로 언커크에 합류해 예산까지 주무르게 된다.

이해동은 상사의 지시로 본연의 통역 업무가 아닌 윤원섭을 보좌하는 일을 맡게 된다. 윤덕영 가문의 친일 행적을 언급하며 윤원섭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그에게 상사인 호주 대표 애커넌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답한다. 국제사회의 시각을 대변하는 듯한 그 외국인의 말처럼 그들에게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해동은 대단한 자긍심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온 아버지의 독립운동, 그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죽음을 떠올리지만 “혼란스러움에 대처할 때 힘없는 자들이 하는 방식대로” 침묵한 채 윤원섭을 돕는 일을 시작한다. “더럽혀진 것. 모욕받은 것. 그렇게 쉽게 조롱받는 것.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것이 겨우 그렇게 미약한 것. 그런 것들이 해동의 푸른 새벽에 끝도 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 한 평범한 사람들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이었음을

심윤경 작가. 문학동네 제공

소설은 친일파가 남긴 대저택과 그것에 빌붙어 다시 영광을 누리려는 후손, 그 뻔뻔함에 분노하면서도 포기하기 어려운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청년을 통해 삶의 여러 국면 속 개인의 쉽지 않은 선택 순간을 그린다. 천애 고아였던 해동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거쳐야 했던 모든 노력과 그 결과물을 쉽게 놓아버릴 수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랑하고 지키려 했던 “온통 미미한 것들”과 달리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 것들 앞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가 벽수산장의 아름다움에 압도되면서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듯이. “저택은 그의 눈앞에 확실히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아버지의 인쇄기처럼, 그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의심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저택은 1966년 화재로 일부가 전소돼 방치되다, 다시 수년이 흐른 1973년 철거돼 빠른 속도로 사람들 기억에서 잊힌다. 작가는 언커크와 벽수산장 화재까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윤원섭과 이해동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영원한 유산’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윤원섭에게 유산인 벽수산장이 전혀 다른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이해동에겐 적이 남긴 유산, ‘적산’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찍힌 사진 속 벽수산장이 이 소설의 출발이 됐다는 심윤경은 ‘작가의 말’에서 “물질로도 정신으로도 박멸된 벽수산장의 예를 통해 적이 남긴 유산 앞에 선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고자 했다”고 썼다.

작가는 “이 소설에는 친일파와 왕가, 국제기구와 대저택 같은 거창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을 이리저리 떠밀어대는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해동의 선택이 그러했듯, 쉽게 희미해질 “온통 미미한 것”이라도 누군가에겐 전부를 걸어 지켜야 했을 어떤 유산이 세상에 남았을 테니 말이다.

<2020-12-30> 경향신문 

☞기사원문: [책과 삶]어찌할까? 적이 남긴 유산 앞에 선다면

목, 2020/12/31-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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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교수 송년 특별기고

백낙청 ㅣ <창작과 비평> 명예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2020년은 정말 길고 힘든 한해였다. 유달리 어수선한 정국에다 전에 없던 코로나19 대유행까지 겹쳐 살림살이가 극도로 힘들어진 세월이었다. ‘세상이 왜 이래?’라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세상은 늘 이랬고 여러 면에서 더 나쁘기도 했다. 물론 감염병 대유행이 겹친 점이 새롭지만, 이 경우도 주로 예전에 힘들었던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진 사례가 대부분이다.

‘촛불’이라는 화두와 표준

따라서 ‘세상이 왜 이래?’라는 물음도 그냥 탄식에 그칠 것이 아니다. 지난해 신년칼럼에서 나는 촛불혁명을 섣불리 정의해서 찬반 어느 쪽을 고집하기보다 이를 화두 삼아 연마할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는데(졸고 ‘촛불혁명이라는 화두’, <한겨레> 및 <창비주간논평> 2019년 12월30일), ‘이런 세상’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그렇다. 민낯들의 드러남이 촛불혁명의 성과인 동시에, 드디어 민낯을 보여준 세력이 이제는 그야말로 ‘안면몰수’하고 나설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으로 가장 일찍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 거대 수구정당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크게 변한 집단이다. 국민을 속여서 집권하는 게 목적이었고 2007년과 2012년 모두 그 목적을 너끈히 달성했던 정당이 촛불 이후 국민을 속이는 능력뿐 아니라 속이려는 성의마저 상실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최근에는 2012년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입안했던 분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돌아와 다시 국민을 속일 수 있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분투하고 있지만, 그사이 국민의 의식수준이 엄청 높아진데다 당내에 솔직한 인사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끼리 손발을 제대로 맞춰갈지도 의문이다. 일시적으로 여론의 지지도가 좀 오르더라도 반촛불세력의 지휘부라기보다 누구든 앞장서 정부를 흔들어대는 인사의 서포터스 역할에 머무는 형국이다.

검찰의 민낯도 온 천하에 드러났다.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전부터 꾸준히 늘어왔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개혁을 추진한 대통령과 정부도 잘 몰랐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윤석열 총장이 이끈 대대적 반항사태를 지켜보면서 철저한 검찰개혁이 수구정당 제압에 못지않은 시대적 과제임이 분명해졌다. 또한 검찰처럼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뿐이지 국민을 죽이고 살리는 최종적 권한을 가진 법관들의 정체도 드디어 국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 동네야말로 설마가 사람 죽이는 곳인데, 사실 ‘설마’는 배부른 계층들 얘기이고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은 일찍부터 그곳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본고장임을 실감해왔다. 아무튼 학습의 소중한 기회를 얻었는데, 이럴 때일수록 관성적인 개탄이나 옥석을 안 가리는 과격한 공격이 아니라 촛불을 표준 삼은 냉정한 형세판단과 착실한 제도개혁으로 대응할 필요가 절실하다.

마지막 촛불집회가 열린 2017년 3월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폭죽을 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아직 덜 드러난 민낯들

경제관료들, 특히 예산권을 틀어쥔 관료들의 실상도 드러나는 중이다. 한국의 재정건전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매우 양호한 축인데도 코로나 사태로 거의 사경에 처한 사람들 도와주자고 할 때마다 ‘재정건전성’을 들고나와서 한푼이라도 덜 주려고 한다. 케이(K)방역이 진단과 추적에서 모범적인 성과를 내면서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협조를 얻는 데 한계를 보이는 것도, 정부 관료가 서민을 ‘죽게 내버려두는’ 속마음으로 재난 극복에 임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신을 사기 때문은 아닐까.

이 밖에도 우리 사회의 숨겨졌던 진실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언론계가 정직한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대중이 직접 참여한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이 실상을 보도하지 않음을 체득하는 사람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계의 문제가 일부 기자들의 타락, 또는 특정 언론사들의 진실 왜곡에 국한되지 않은 현상임을 더 깊이 연마할 시점에 왔다. 이제는 저들의 왜곡보도가 단순한 사실 왜곡의 수준을 넘어 촛불정부의 실패를 위한 면밀한 작전의 일환이며 그런 점에서 제1야당보다 대형 수구언론이 반촛불세력의 전략본부로 기능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소위 진보신문이 이에 효과적인 대응을 못 하는 것이 단지 물적 자원의 부족과 발행부수의 열세 탓이 아니라, 손쉬운 양비론에 안주하면서 포털의 클릭 수에 누구 못지않게 집착하는 자세에 기인하기에 이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 배경에는 정권보다 금권이 우위에 선 지 오래된 우리 사회에서 언론인 집단 자체의 체질에 일어난 변화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미진한 공부거리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으나 여당에 대한 지적을 빼놓을 수 없다. 민주당이 수구야당과 동일한 수준의 적폐세력은 아니지만 줄곧 우리 사회 기득권 구조의 일부로 기능해왔음은 엄연한 사실이며, 의석 180석을 동원할 수 있는 지금도 툭하면 말을 뒤집고 개혁에 발을 끄는 모습은 결코 대충 넘길 일이 아니다. 대통령 자신은 여전히 촛불정부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믿기에 나는 계속 지지를 보내는 축이지만, 촛불혁명의 개념조차 희박한 고위관료와 여권 정치인들을 제대로 통어하지 못하는 책임마저 불문에 부칠 수는 없다. 이는 정치적 개인기의 문제라기보다 촛불시민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선한 기운을 북돋우는 노력의 문제인 것이다.

근대세계와 ‘중근’ 고비

이런저런 민낯들을 보면서 우리가 반드시 할 일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추론해도 세상이 온통 ‘이런데’ 자신만 온전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각자가 스스로 해온 몫이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한민국을 ‘기후악당국가’로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한 바 있을 것이고, 노동을 멸시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무심코 살아왔다면 그것도 반성하고 참회할 대목이다. 나는 분단체제가 괴물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온 우리 내부에도 괴물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라는 주장을 펴왔는데, 분단체제를 포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괴물스러움 또한 팬데믹 시대를 맞아 한층 뚜렷해지고 있다.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교화를 받을 능력과 소질을 근기(根機)라 하고 상·중·하 등급으로 나누곤 한다. 물론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상근으로 진급할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中根)의 고비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으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라는 것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병자’들을 식별하기는 어렵지 않다. 반면에 자신이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한결 어렵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은 중근기일수록 하지 못한다. 이런 때야말로 스승이나 목자, 도반의 일깨움이 필요한데, 우리 시대에는 어떤 스승의 존재보다 촛불혁명의 거대한 흐름을 마음에 모시고 정진하는 것이 중근 고비 넘기의 관건이다.

굳이 불교 용어를 빌려온 것은 근대세계체제야말로 중근병자를 대량생산하도록 설계된 체제라는 생각에서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정보기술의 극대화로 하근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아니, 자기 몸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촛불혁명을 화두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세상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엄청난 도전이다. 2020년의 고난과 혼란 속에서도 이런 작업이 멈추지 않았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감염병 대유행에 대처해온 공동체의 분투, 사회운동, 시민정치, 학문, 예술, 기술 등의 수많은 현장에서 촛불을 화두로 삼은 창의적 노력들이 계속 벌어져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2020-12-29> 한겨레

☞기사원문: 세상의 민낯을 본 뒤에 무엇을 할까

금, 2021/01/01-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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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웅, 1월 1일 새해 신년사에서 밝혀

▲ 마이크 잡은 김원웅 광복회장 김원웅 광복회장이 24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비호 세력과 결별하지 않는 미래통합당은 토착왜구와 한 몸이라는 국민들의 인식이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남소연

“변화된 시대정신이 담기고 애국심과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국가(國歌) 제정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광복회가 조성해 나가겠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1일 신년사에서 “표절과 친일·친나치 행위로 얼룩진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하겠다”면서 한 말이다.

이어 김 회장은 “전국에 세워져 있는 친일인사들의 기념시설을 조사하여 관할 지자체로 하여금 해당 시설물을 철거하거나 친일행적 안내판 설치를 계도하겠다”면서 “은닉된 친일재산을 찾아내 국고로 환수하는 노력을 통해 광복회의 사회적 위상을 한층 높여나가겠다”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8월 김 회장은 광복절 경축식에서 “광복회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관련 자료를 독일정부로부터 받았다”면서 “그중에는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연주회를 지휘하는 영상이 있었다.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라고 밝혔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가 친일·친나치 이력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

이후 지난 11월 안익태의 친조카인 안경용씨(미국명 데이비드 안)는 김 회장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안익태, 만주국 찬가 지휘… 영상으로 남아

▲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안익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내용에 따르면 “안익태는 나치 정부의 제국음악원 회원으로 활동하며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의뢰받아 완성했다. ⓒ 김종훈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됐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37년 유럽으로 건너간 안익태는 1940년대 초 나치 독일에서 <일본축전곡>을 연주했고,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만주환상곡> <만주축전곡>을 작곡하는 등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음악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안익태의 활동 영상이 2006년 독일 훔볼트대학교에서 재학했던 한 유학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영상 속에서 안익태는 베를린방송교향악단을 지휘했다. 그가 지휘하는 무대 정중앙엔 커다란 일장기가 걸렸다. 당시 그가 지휘한 <만주환상곡>은 일본외교관 이하라 고이치가 노랫말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 교향곡이다.

그러나 1944년 나치가 연합군에 밀리자 안익태는 스페인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마요르카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인 1948년 8월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탄생한 뒤, 이승만 정권은 안익태의 <애국가>를 국가로 공식 지정했다. 안익태는 1955년 3월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회 기념음악회’를 지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1호 문화포장을 받기도 했다.

1962년 1월 한국을 다시 방문한 안익태는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군사정부의 대내외적 이미지 개선을 위해 국제음악제 개최에 협의했다. 1962년부터 64년까지 3년 연속으로 음악제를 주관했다.

안익태는 1964년 9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1977년 7월 지금의 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2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 아래쪽에 임시정부요인묘역과 애국지사묘역이 조성돼 있다. 2001년 안익태기념재단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후원을 받아 국유지인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 공원에 안익태 동상을 세웠다.

2009년 당시 안익태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되자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만주국군 군의 출신인 안익태의 형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1일 김 회장은 새해 신년사에서 “지난 75년간 우리사회의 갈등과 분열은 친일 미청산에 기인하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는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해 기득권을 증식시켜온 세력이 점령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은 진보·보수가 아니라, 친일 반민족 세력이 부당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저항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이어 김 회장은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는 위험할 정도로 기형화됐고, 노후화했다”면서 “우리 세대가 친일청산에 실패하면, 대한민국은 애국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다음 세대에게 절망을 넘겨줄 수밖에 없다”라고 내대봤다.

<2021-1-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광복회장 “새로운 국가 제정 위해 국민 공감대 조성”

월, 2021/01/04-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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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징용됐다 소련 붙잡힌 한인 청년들, 1948년 12월 귀국
1991년 결성된 생존 피해자 모임 회원들 대부분 고령으로 숨져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김형우 특파원 =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만주와 사할린 등지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됐던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의 모임 시베리아 삭풍회(朔風會)는 1991년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올해로 구성된 지 30년이 되는 셈이다. 피해자들은 모임의 이름을 시베리아의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라는 뜻의 ‘삭풍’에 빗대어 만들었다.

‘시베리아 한의 노래’의 표지.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캡처. 재배포 및 DB화 금지]

일제는 전쟁 막바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수많은 식민지 청년들을 끌어모아 전쟁터로 내보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이후 속수무책으로 패배를 거듭하던 일본군은 결국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 상황에서 무려 1만여 명의 한인 청년들이 소련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작년 1월 홈페이지를 통해 고(故) 이규철 씨가 작성한 육필원고 가운데 일부를 소개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1941년 울산 공립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주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 징집돼 일본 관동군에게 편입됐다가 결국 소련군에 붙잡혔다.

그는 원고에서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내 몸을, 내 목숨을 바치고 이런 싸움을 해야 하는가. 적함 굴뚝에 돌진한 ‘신풍(가미카제) 특공대’와 같은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러시아 극동 연해주(州) 나홋카 항의 하늘. [연합뉴스 김형우 촬영]

소련군에 붙잡힌 한인 포로들을 괴롭혔던 것은 시베리아의 혹독한 자연환경과 배고픔이었다.

시베리아의 포로 수송 화물열차에서 물이나 빵과 같은 음식물을 먹지 못하고 혹한에 시달려야만 했던 한인 청년들은 굶주림과 각종 배고픔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씨는 수용소에서 지냈던 첫해 겨울의 추위로 인한 고통에 대해 혹한 속에 체온을 유지하면서 살려는 눈물겨운 사투가 계속됐다고 강조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에 매달리고 있는 목숨이 정말 질기고 모질더라”고 밝혔다.

심지어 몇몇 한인 포로들은 현지에서 숨지기도 했다.

시베리아 곳곳의 수용소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한인 청년들은 미국과 소련이 전쟁 포로와 관련한 협의를 이뤄내며 1948년 12월 대거 귀향길에 올랐다. 당시 2천명이 넘는 한인 청년들은 연해주(州)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3∼4시간 거리에 있는 나홋카 항에서 1948년 12월 함경남도 흥남으로 귀환했다.

1948년 12월 한인 포로 2천여 명이 귀환한 나홋카 항. [구글지도 캡처. 재배포 및 DB화 금지]

소련에서 건너왔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받았던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은 한국과 소련이 국교를 맺은 1990년 이후가 돼서야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삭풍회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청구했었지만 결국 외면받았다.

일본의 전후 보상 대상에서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한국 정부 차원의 위로금과 의료지원이 전부였다. 현재 삭풍회 회원들 대부분은 고령으로 숨진 상태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삭풍회 분들이 다들 연로하셔서 대외 활동을 하셨던 분들이 돌아가신 상황”이라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20-01-02> 연합뉴스 

☞기사원문: [특파원 시선]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삭풍회’를 아시나요

월, 2021/01/04-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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