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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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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admin | 화, 2020/06/23- 21:41

[식민지 비망록 59]

군부대 소재지를 일컬어 ‘◯◯대(臺)’라는 별칭이 생겨난 연유는?
일본천황이 육군사관학교에 ‘상무대’로 하사한 것이 최초 용례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른바 ‘7080세대’이면서 수도권대학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무대(文武臺)라는 명칭에 대해 아련한 기억 한 자락씩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해묵은 자료를 뒤져보니 ‘김신조 사건(1.21사태)’으로 촉발된 안보위기를 빌미로 대학생을 상대로 한 군사교육(교양필수과목으로 교련과목을 설정)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69년이었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 즉, ‘문무대’ 준공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 더하여 1975년에 월남이 패망하자 유신체제 하의 군사정권은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총력안보(總力安保)라는 구호를 앞세워 그 이듬해부터 이른바 ‘병영집체훈련’이라는 제도를 장착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경기도 성남시에 ‘학생병영훈련소’가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붙여진 이름이 ‘문무대’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76년 6월 29일자에 수록된 「학생병영훈련소(學生兵營訓鍊所), ‘문무대’ 준공」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대학생 병영훈련의 도장이 될 학생병영훈련소가 준공, 28일 오후 〇〇지역 현장에서 이세호(李世鎬) 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 및 현판식이 있었다. 박(朴) 대통령의 휘호로 ‘문무대(文武臺)’라 명명된 이 훈련소에는 7월 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전국 57개 대학 일반군사교육 대상자 중 1학년 일부가 단계적으로 입영, 10일간의 집체교육을 받게 된다.

 

더구나 이곳에는 1977년 4월 14일에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건립취지문을 덧붙여 박정희대통령의 휘호를 새긴 문무탑(文武塔)이 건립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 1981년에는 ‘전방부대 입소교’이란 것이 생겨나 철책선 경계근무가 추가되었고, 재학생 입영연기와 더불어 최대 6개월의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혜택 아닌 혜택이 주어졌던 대학생 군사교육제도는 민주화 과정의 초입에 들어선 1989년에 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런데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사례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구태여 군대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명칭을 접하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논산훈련소를 ‘연무대’라고 하는 것이 그러하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상무대’라든가 육군사관학교를 일컫는 ‘화랑대’, 그리고 육해공군본부가 터를 잡은 ‘계룡대’와 같은 곳도 일상용어처럼 자주 언급되는 공간이다. 어쩌다가 군부대에 면회를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큰 돌에 ‘〇〇대(臺)’라고 새겨진 휘호비(揮毫碑)를 목격하곤 했던 것도 제법 익숙한 풍경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군부대의 이름을 ‘무슨무슨대’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일이었을까? 대(臺)라는 것은 원래 사전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대개 “인위적으로 쌓은 것이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건 간에,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고 평평한 공간 또는 그러한 곳에 조성된 건축물”이라는 뜻으로 새겨지는 말이다.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는 일본 천황에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임석한 내용과 더불어 이곳 소재지에 대해 ‘상무대(相武台)’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3년 6월 4일자에 수록된 일본 카나가와현 소재 육군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상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속리산 문장대(文藏臺)라든가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라든가 부산 영도 태종대(太宗臺)라든가 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높고 평평한 지형’이라고 하는 범주와는 결코 거리가 먼 군부대 소재지, 그것도 전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것은 애당초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말이다. 알고 봤더니 여기에도 결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군국주의 시절의 일제가 남긴 유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속속 드러난다.
우선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육사소재지(陸士所在地)에 신명칭 어하사(新名稱 御下賜)」라는 제목의 기사가 퍼뜩 눈에 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대원수폐하(大元帥陛下)께옵서는 20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어임석(御臨席)하옵시기 위하여 신장(新裝)한 카나가와현 자마(神奈川縣 座間)의 동교에 처음으로 행행(行幸)하옵시었는데 졸업식 종료후 오후 2시 본관 2층 어좌소(御座所)에 스기야마 육상(杉山 陸相, 육군대신), 하타 교육총감(畑 敎育總監)을 어소(御召)하옵시고 동교 소재지에 대하사 상무대(相武台, 소부다이)의 명칭을 하사(下賜)하옵신 지(旨)를 궁내성(宮內省)으로부터 발표되었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는 이른바 ‘황군(皇軍)’의 근간을 이루는 육군장교를 배출하는 기관이 니만큼 해마다 졸업식에는 일본천황이 직접 임석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특히, 1937년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本科)를 도쿄 신쥬쿠(東京 新宿)의 이치가야혼무라쵸(市ケ谷本村町)에서 카나가와현 코자군 자마촌(神奈川縣 高座郡 座間村)으로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때의 졸업식은 이러한 소재지 변경 이후에 최초로 거행되는 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천황이 새로운 육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하사한 명칭이 ‘상무대’였던 것이다. 이 이름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사가미노쿠니(相模國)의 옛터에 속하고 바로 이러한 유서깊은 곳에서 무(武)를 연마한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으로 알려진다. 옛 사관학교 자리가 언덕위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탓에 통칭 ‘이치가야다이(市ケ谷台)’라고 부른 전례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지형과는 무관하게 벌판에 자리한 군사학교 소재지 전체에 대해, 그것도 천황의 명명에 의해 ‘무슨무슨대’라는 명칭이 하사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이로부터 몇 해가 흘러 1941년 3월 28일에 사이타마현 토요오카쵸(埼玉縣 豊岡町)에 자리한 육군항공사관학교(陸軍航空士官學校)에 일본천황이 이곳을 찾았을 때 다시 수무대(修武臺, 슈부다이)라는 명칭이 하사되는 일이 이어졌다. 또한 1943년 12월 9일에는 사이타마현 아사카(埼玉縣 朝霞)에 있는 육군예과사관학교(陸軍豫科士官學校)에 행차하였을 때도 직접 이곳 일대의 대지(臺地)에 대해 ‘진무대(振武臺, 신부다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진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인 <국어(國語)> ‘진어편(晉語篇)’에 나오는 “임금은 그 백성을 형벌하여 바로 잡은 후에 밖으로 무위를 떨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조화로 우면 밖으로 위무가 드러나게 된다.(君人者 刑其民 成而後 振武於外 是以內龢而外威)”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무비(武備)를 진작(振作)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13일에는 도쿄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의 졸업식 때 일본천황이 차견(差遣)한 황족 조향궁(朝香宮, 아사카노미야)에 의해 이곳 소재지에 대해 ‘건무대(建武臺, 켄부다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매일신보> 194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일본 사이타마현 소재 육군항공사관학교 탐방기에는 이곳 교정에 건립된 ‘수무대’ 휘호비의 모습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자리한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대해 소재지 전체의 명칭으로 ‘진무대(振武臺)’라는 이름이 하사 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2월 1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武)’자 돌림의 소재지 명칭하사가 거듭되다 보니, 여타의 군사학교 등 지에도 ‘무슨무슨대’라고 부르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통칭 ‘신경군관학교’)의 경우에도, 학교 소재지를 ‘동덕대(同德台)’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본천황이 머지않아 침략전쟁의 선봉에 설 일본군 예비장교들을 독려할 목적으로 여러 사관학교의 소재지 명칭으로 ‘〇〇대(臺)’를 잇따라 하사한 것은 그야말로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의 전형적인 소산물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이러한 명명법은 해방 이후 단절되기는커녕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되레 별다른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차용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라남도 광주에 신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한 기지명명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된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흔적들 가운데 가장 빠른 용례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1월 1일에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설치된 ‘육군제2훈련소’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휘호를 내려 명명한 ‘연무대(鍊武臺)’였다. 곧이어 1952년 1월 6일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개설된 육군종합학교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의해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경향신문> 1952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육군종합학교 기지 결정, 대통령 상무대라 명명」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 대통령은 6일 광주 육군종합학교 기지 명명식 석상에서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벤프리트 장군 이하 여러 장병과 내외 귀빈 앞에 우리 국군의 보병, 포병, 통신병학교 개교식을 하게 된 데 대하여 이 훈련장에 이름을 지으라고 해서 상무대(尙武臺)라고 하였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군인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평화를 숭상하고 수호하기 위함과 같이 우리도 상무를 한다면 그와 같은 것이다. 미국이 전력을 다하여 우리들을 돕고 유엔 각국이 우리와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이 전쟁을 해 나가는 것을 우리는 영광으로 알 것이며 우리는 국군을 강대하게 만들어서 국방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에 협력해서 세계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평화수호군대의 선봉이 될 것이다. (하략)

 

 

박정희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에 대해 ‘성무대(星武臺)’라고 명명한 사실을 알리는 <경향신문> 1966년 5월 13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러한 방식은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 시절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어 1966년 4월에는 공군사관학교 소재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명명으로 ‘성무대(星武臺)’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이후에도 전국 각처에 새로운 군사편제에 따른 상급단위의 군부대가 설치되거나 각종 군사학교가 만들어질 때마다 ‘무슨무슨대’라는 식의 이름이 붙여지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였다.
혹여 누군가는 우리들 역시 과거시험장이기도 했던 곳에 대해 경무대(景武臺)라든가 춘당대(春塘臺)라든가 하는 표현을 사용한 전통이 있었고, 수원 화성에도 연무대(鍊武臺)라는 시설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사실관계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궁궐 안의 누대(樓臺)와 그 앞에 펼쳐진 일정한 공간에 국한된 명칭이거나 건축물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군부대 소재지 전체를 일컫는 ‘무슨무슨대’라는 부르는 방식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군사교육시설을 대상으로 ‘무(武)’자 돌림의 이름이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손으로 작명되어 붙여지는 형태가 일본제국의 그것과 고스란히 닮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여러 군부대 소재지마다 ‘〇〇대(臺)’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일제 군국주의 시절의 소산물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지금에라도 이러한 명명법을 개선하거나 청산하는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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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 12월 8일, 김일동 작가가 전시품 ‘보상하라展’을 기증했다. 독립운동가 5인(김구, 김좌진, 안중
근, 이봉창, 유관순)의 희생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팝아트로 작가의 작품해설은 다음과 같다.
(작품 해설 :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등장하고 그들이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착용하고 현대 문화
기본매체인 영상과 사운드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위해 힘
들게 활약을 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들의 노고 끝에 이렇게 발전하게
되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대 대중문화·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를 기리는 의미를 작품으로 표현해 보았다.)

• 12월 7일, 야스쿠니재판지원회, 재일조선학교 차별과 배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화련 씨가 소장하고 있던 생활자료를 기증했다. 1934년(소화 9년)에 제작된 보자기로 ‘수복
강녕壽福康寧’이라고 쓰여 있다.

• 12월 10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김재용 교수(원광대)가 故 임종국 선생의 서신을 기증했
다. 서신은 임종국 선생과 <친일문학론>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오무라 교수가(2018년 7월 민
족사랑 참고) 주고받았던 것으로 <친일문학론>이 번역된 1976년 이전이 14점, 출판 이후가
30점, 총 44점이다.

• 12월 14일, 수원지부 소속으로 25년째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서용희 회원이 소장자료 4점
을 기증했다. 기증자료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법령관계 자료집으로 <모범조선호적기재례
전집>(1935), <조선호적예규>(1933) 등이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9/01/2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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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지선)는 12월 26일 오후 2시, 옛 남영동 대공분실 마당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운영과 관리를 경찰청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넘기는 이관식을 열었다.
1970~1980년대 대표적인 고문기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의 요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과거군사독재 시절 박종철 열사 등 수많은 민주화 인사를 고문했던 장소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최근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됐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10민주항쟁 31주년 국가기념식에서 이 자리에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이관되어 민주인권기념관이 조성될 예정이다. 이날 이관식에는 고문피해자, 고문피해자 가족 및 유가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그리고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민갑룡 경찰청장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
• 편집부

목, 2019/01/2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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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활동 백서> 출판기념회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상임대표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 주최로 12월 1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에서 열렸다. 역사학자 이이화 이사는 축사에서 “아무리 의미 있는 역사라도 기록해야 기억되며, 나쁜 놈은 나쁜 놈으로,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기록해 후배들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역사의 정의”라고 말했다. 1권 751쪽, 2권 894쪽, 3권 667쪽 등 모두 2312쪽에 달하는 백서는 1권에서는 활동가 소회 등 활동 평가와 일지·좌담회·언론 보도·논평, 2권에서는 교과서 분석·집필 거부·교육부 공문서, 3권에서는 법적 대응 자료와 국제기구 활동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송두환 민변 전 회장(전 헌법재판관)은 축사에서 “2018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민변이 제기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 위헌 헌법소원심판청구’를 각하했다”며 “국정화 고시와 같은 불순하고 위헌적인 시도의 재현 위험성을 보다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헌재의 명시적 위헌 선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본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조한경 부천 중원고 교사(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는 같은 자리에서 “박근혜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추진된 것처럼, 다음 문재인 대통령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폐기됐다”며 “앞으로 누구도 국정교과서를 꿈꾸지 못하는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9/01/2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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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명예이사장)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学) 초청으로 12월 12일~16일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한국학 연구센터 설립 2주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초청 방문으로 신용옥, 조세열 상임이사가 수행하였다. 일정은 12일 출국, 13일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 자택 방문, 14일 강연회, 15일 강덕상 교수와의 좌담회, 16일 귀국 순으로 이루어졌다. 강덕상 교수는 재일사학자로서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과 일제의 조선인 학병동원 등을 연구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초창기부터 지도위원을 맡은 인연이 있다.
강 교수는 12월 14일 히토쓰바시대학 국제연구관에 열린 ‘나의 인생과 역사학-분단시대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로’ 강연회에서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주장한 후쿠다 도쿠조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백남운의 사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다.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강만길 교수와 강덕상 교수의 ‘한반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역사연구의 과거·현재·미래’ 좌담회가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강덕상 교수는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두 강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관련한 역사인식 문제와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참석했는데, 한국 유학생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이 많았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 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는 질의가 있었는데 그 가슴 뭉클한 사연이 청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편집부

목, 2019/01/2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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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사회참여 운동 1세대 원로이며 연구소 3대 이사장인 김병상(86·필립보) 신부의 삶과 신앙을 기록한 회고록 〈따뜻한 동행〉 헌정 미사와 출판기념회가 12월 15일 인천시 심곡동 국제성모병원 3층 마리아홀에서 열렸다. 이 책에는 선후배 동료 사제들이 김 신부를 소개한 글과 더불어 김 신부의 구술·인터뷰·일기를 비롯해 지인들의 증언까지 충실히 정리해 놓았다. 1974년 유신독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되자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김 신부는 천주교와 인천지역 민주화운동계의 상징이 됐다. 1977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기도회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고, 1976년~1980년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3년 8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에 임명되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9/01/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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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함세웅 이사장

 

2019년 새해를 맞으면서 지난 한 해 우리 연구소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고 격려해주신 은인 회원들과 구성원 모든 분들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올해는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남북 정상은 지난 100년을 기억하고 평화와 통일의 문을 여는 새로운 100년을 남북 8천만 겨레가 함께하자는 취지로 남북공동행사를 약속했습니다.
남북공동행사의 성공을 위해 지난 역사에 대한 해석과 그 안에 남아있는 차이를 우리는 함께 극복해야 합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는 평화공존과 일치를 위한 약속과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 민족공동체는 일제의 침략과 그 후유증인 이념과 정파 때문에 갈등과 분열 속에서 서로 헐뜯고 살았습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이 모든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 3년 동안 서로 비판하고 심지어 경멸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부끄럽고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남북 분단과 증오였습니다. 이에 친일 매국노와 반공 분단 권력이 손잡고 독버섯이 되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올해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선조들이 품었던 그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3·1혁명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바로 구체적 표징입니다.
해방 정국 3년, 곧 미군정 시기가 미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였다는 분명한 역사 인식을 지녀야 합니다. 이 인식이 미국을 넘어 남북이 함께 손잡고 확인해야 할 평화공존의 민족적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북이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한 어머니의 자손이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어머니가 같은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가족이 함께 만나고 살아가는 것은 인륜이며 하늘이 주신 천륜입니다.
이에 새해 우리 모두가 새로운 마음으로 남북 8천만 겨레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되는 일에 앞장서도록 노력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잔재 청산은 물론 모든 비인간적 요소를 척결해 온 인류가 하나되는 평화공존의 보편적, 우주적 ‘민족문제연구소’로 승화하기 바라며 기도합니다.
새해 회원 여러분과 연구소 임직원 각자의 소망과 꿈이 실현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목, 2019/01/2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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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주관한 국제학술회의가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를 말한다-조사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덕성여대에서 열렸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 등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일어난 인적 피해 문제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국가와 시민사회 차원에서 달성한 진상규명 현황과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심화되고 발전된 진상규명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방법, 자료 발굴 등이 필요한지를 함께 모색하고자 마련되었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김승은 책임연구원이 ‘한반도 내 인명피해 조사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성균관대 박사과정의 김강산 씨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발표하였으며, 재한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모임의 이치바 준코 대표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강제동원을 주제로 한 발표는 김민철 책임연구원,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 관장, 고바야시 도모코 유골봉환종교인시민연락회의 공동대표가 맡아 한국과 일본에서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의 현황에 관해 각각 발표하였다. 이어서 조시현 연구위원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는데, 류준범(국사편찬위원회), 이상의(인천대), 히다 유이치(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고바야시 히사토모(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량대륭(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씨 등이 한국, 일본, 자이니치의 입장에서 연구 성과와 활동 등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깊이 있는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번 회의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현장에서 연구와 실천을 거듭해 온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띤 논의를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함께 모색한 뜻 깊은 자리였다. 또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이 부각되고 있는 지금, 국가를 뛰어넘은 양국 시민들의 연대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19/01/2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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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43

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이순우 책임연구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에 나온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광고란에는 다음과 같은 행려사망(行旅死亡)에 관한 내용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1. 본적: 미상 2. 주소: 미상 3. 성별: 여, 성명 나혜석, 연령 53세 4. 인상(人相): 신장 4척 5촌, 두발 장(長), 수족 정상, 입 코 눈 귀 정상, 체격 보통, 기타특징 무(無) 5. 착의(着衣): 고의(古衣) 6. 소지품: 무 7. 사인(死因): 병사 8. 사망장소: 시립자제원(市立慈濟院) 9. 사망년월일: 단기 4281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 취급자 서울시 용산구청장 명완식(明玩植) 단기 4282년 1월 3일

나혜석의 행려사망 사실이 기록된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해당 지면

 

관보의 말미에 겨우 수록된 행려 사망자의 내역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는 참으로 의문이지만, 여기에 언급된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 살아간 천재예술가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바로 그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는 철저하게 여느 사람들의 망각 속에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나마 여기에 기재된 이름 석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죽음에 관한 이토록 희미한 기록마저 영영 잊힐 뻔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숨진 곳은 ‘시립자제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일제시기 의료구호기관이던 경성불교자제원(京城佛敎慈濟院, 원효로 1가 12번지)이었고, 해방 이후에 ‘서울시립 자혜병원’ 시절을 거쳐 1960년 1월 1일에는 시립남부병원(市立南部病院)으로 전환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 병원이 서울중부병원과 합쳐 1977년 7월 2일에 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 이전된 뒤에는 도로확장공사 탓에 부지 일부를 상실한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원효로 1가 25번지)가 이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자리의 내력이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그 흔적이 저 멀리 1904년 러일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용산시가도> (1929)에 나타난 ‘불교자제원’의 위치이다. 바로 인접한 곳에 선립상업학교와 일본인 사찰 서룡사 및 흥국사가 포진한 것이 눈에 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각사등록(各司謄錄)> ‘외부일기(外部日記)’ 1904년 2월 17일자에는 일본공사관의 조회(照會)를 통해 “우리 북진군(北進軍, 일본군)이 내일 18일에 약 2만 명 내외의 병력이 일시 경성에 도착하여 2, 3일 머문 후 발정할 예정이므로 이들이 머물 곳으로 경복궁 안의 사용 무방한 청사를 일시 빌려서 이들 병력의 숙소로 충당”하겠다는 내용이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일본공사의 알현시 용산에 있는 별영창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및 정미소(精米所) 3곳도 신속히 차용하기로 윤허를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서울 인근에 일본군 병력이 대거 밀려들게 되자 당연히 이들이 묵을 공간 확보 문제가 긴급 현안으로 대두되었는데, 이에 따라 한국군 주둔지와 다수의 관공서 또는 학교 터가 징발되어 그들의 숙소로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1934), 731쪽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 18일 이후의 입성병(入城兵)에 대해서는 일본인측 가옥으로는 가장 먼저 수용의 여지가 없어졌으므로 한국 측으로부터 용산 별영창(龍山別營倉, 현 원정 3정목 조선서적인쇄회사 내의 옛 건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경성 원정 1정목 경성불교자제원의 부지 내), 서대문밖 평양병병영(平壤兵兵營, 현 죽첨정 1정목 서대문경찰서 적십자병원 부지 내 일대의 지점), 서소문안 시위제일대대(侍衛第一大隊, 현 서소문정 120번지 총독부 관사 부지의 일부), 통내(統內) 친위제일대대(親衛第一大隊, 현 연지동 전매지국의 부지 내), 동궐 앞 친위 제이대대(親衛第二大隊, 현 운니동 99번지 이왕직분실), 저동 공병대(苧洞 工兵隊, 영락정 1정목 전매국 부지 내)의 각 병영 및 명동 장악원(明洞 掌樂院, 현 황금정 2정목 동척회사 부지의 서남 모서리), 필동 잠업과(筆洞 蠶業課, 현 앵정정 2정목 186번지의 지점) 등의 여
러 장소를 빌려 받아 숙영(宿營)했다.

여기에서 용산 별영창의 위치를 ‘조선서적인쇄회사’라고 적어 놓은 부분은 잘못된 설명이다. 별영창은 원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속한 군병들의 급료 지급을 맡았던 한강변 창고이며, 한강 조망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했던 읍청루(挹淸樓, 청암동 168번지)라는 누각도 이곳의 구역 내에 함께 있었다. 위의 글에서 ‘원정 3정목’에 있다고 잘못 적어 놓은 것의 정체는 군자감 강감(軍資監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일대) 터를 말하며, 이곳에는 용산 전원국(龍山 典圜局)과 총독부 인쇄국에 이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를 거쳐 1936년 12월 이후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서게 된다.
앞의 내용에 등장하는 ‘초자제조소’는 대한제국황실에서 필요한 유리창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 유리제조공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조선신문> 1925년 5월 19일자에 게재된 경성불교자제회 실비진료부의 광고 문안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포함된 「한정(韓廷) 고용 외국인 해용(解傭) 처분에 관한 건(1904.5.30)」에 따르면, 유리제조기사로 초빙된 러시아인 화학교사 메이로(Meiro)와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李容翊)사이에 고용계약이 성립한 것은 1902년 1월 31일의 일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 당시 “대한정부
의 한성(漢城) 및 부근지에 건립될 황실유리창 공역에 투입된 기계검사와 제조 등의 사무”가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하지만 이 자리는 오래지 않아 러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러시아인 기사가 퇴각함에 따라 버려진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인 거류민단의 이시이 신(石井信)과 소가 츠도무(曾我勉)가 주축이 되어 한국정부로부터 이곳을 무상 양수하여 전염병자를 위한 한성병원 부속 청파피병원(靑坡避病院)을 설립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나중에 이곳에 들어선 것이 바로 ‘경성불교자제원’이었다.

 

옛 초자제조소 자리에 들어선 ‘경성불교자제회 부설 실비진료소’의 입구 모습이다. (<조선사회사업요람>, 1924)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자에 수록된 행려병인구호기관 ‘불교자제원’에 대한 탐방기사이다.

 

이 단체는 원래 1908, 9년 무렵 ‘대곡파 본원사 경성별원’, 즉 동본원사(東本願寺, 남산동 3가 33번지)의 경내에 행려병인의 구호를 위해 설립한 것이 시초였으며, 차츰 수용자가 증가하자 1917년 4월 20일에는 경성각파불교사원연합회(京城各派佛敎寺院聯合會)의 성격을 지닌 경성불교자제회(京城佛敎慈濟會)가 성립되어 이곳의 새로운 경영 주체가 되었다. 또한 1921년 7월 1일 이후에는 행려병인의 수용 이외에 일반구료(一般救療)를 목적으로 하는 실비진료소(實費診療所)를 두는 한편 양로구조(養老救助)의 업무도 개설하기에 이른다.
옛 청파피병원 터에 경성불교자제회가 옮겨온 시기에 관한 자료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1일자에 실린 「수용소 준공기(收容所 竣工期)」 제하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경성부(京城府)에서 행로병인수용소(行路病人收容所)에 관하여는 본지(本紙)에 누차 보도함과 여(如)하거니와 용산 청파(龍山 靑坡) 원 피병원적(元 避病院跡)을 개축하여 차(此)에 당(當)할 계획인데 기(旣)히 부(府)에서 경성불교자제회 기타(其他)에 인계하여 총독부(總督府)에서 보조금(補助金) 5천 원(圓)도 하부(下附)가 될 터인즉 지(遲)하여도 4월까지에는 차(此)의 준공을 견(見)함에 지(至)하겠더라.

 

이 조직은 1936년 12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 이름도 ‘경성불교자제원’으로 변경하는데,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4월 28일자에 게재된 ‘법인조합등기’ 항목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법인설립
▪ 명칭: 재단법인 경성불교자제원 ▪ 사무소: 경성부 원정 1정목 12번지 ▪ 목적: 불교의 정신에 기초한 자선구제의 사업을 행함 ▪ 설립허가 연월일: 소화 11년(1936년) 12월 18일 ▪ 자산총액: 금 59,792원(圓) 55전(錢) ▪ 출자의 방법: 일반 기부 및 기타의 수입 ▪ 이사의 씨명 주소: 경성부 서사헌정 166번지 이사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경성부 서사헌정 산4번지의 5 이사 우에노 쐌에이(上野舜頴), 경성부 대화정 3정목 26번지 이사 타케오 라이쇼(嶽尾來尙), 경성부 장사동 182번지 이사 카잔 타이기(華山大義), 경성부 약초정 107번지 이사 고토 쵸신(後藤澄心), 경성부 본정 3정목 50번지 이사 쿠가 지코(久家慈光), 경성부 남산정 3정목 33번지 이사 우에노 코진(上野興仁), 경성부 원정 1정목 18번지 이사 후지 토넨(富士洞然), 경성부 한강통 11번지 이사 카토 칸센(加藤觀穿) ▪ 대표이사: 이사장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여기에 수록된 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광운사(光雲寺, 고야산 경성별원), 박문사(博文寺), 조계사(曹谿寺), 묘심사(妙心寺), 약초관음당(若草觀音堂, 진종본파 본원사별원), 정토종 개교원(淨土宗 開敎院), 동본원사(東本願寺), 서룡사(瑞龍寺), 용광사(龍光寺) 등 경성 지역에 두루 포진한 일본인 불교사찰들의 주지 또는 포교관리자가 망라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총후사회사업시설(銃後社會事業施設)의 이모저모 (5) 행려병인 구호, 불교자제원 편」 제하의 탐방기사에는 설립 이래 이곳에서 수용구제를 받은 연인원(延人員)이 21만 740여 명이고, 사망자도 3,540여 명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대개 농촌을 떠나 직업을 찾아서 도회지로 나왔으나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거리를 전전하다가 병마로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잘 걸리는 병으로는 폐결핵이 40퍼센트, 위장병이 30퍼센트의 순서이고 사망률도 15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나혜석의 경우에도 일제패망기 이후 경성양로원(京城養老院, 청운동 산4-3번지; 청운양로원)과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옥천동 126번지)의 안양농장, 그리고 공주 마곡사 등지를 떠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끝내 1948년 11월 무렵에 경성불교자제원의 후신(後身)인 ‘시립자제원’에 간신히 정착을 시도하였으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질병으로 인한 최후를 맞이 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56년 1월 31일자에 수록된 ‘김창룡 저격사건의 현장약도’. 여기에 묘사된 ‘자혜병원’ 바로 앞 사건현장은 도로구조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경성불교자제원에 관한 흔적을 찾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있다.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으로 자유당 시기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악명을 떨친 김창룡(金昌龍, 1916~1956)이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저격되어 죽은 곳이 바로 자혜병원(慈惠病院, 시립자제원) 앞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날 아침 ‘원효로 1가 17-5번지’ 자택에서 짚차를 타고 ‘원효로 1가 51번지’ 지점을 지나는 도중에 다른 짚차로 길을 막아선 저격자(옛 부하였던 육군대령 허태영의 지시를 받은 특무부대 출신자들)가 쏜 여러 발의 권총탄에 맞아 피살된 바 있다.
겉으로만 보면 행려병자의 구호기관이 오랜 세월 터를 잡았던 곳으로만 인식되기 십상이지만, 그 내면을 파고들면 이곳 역시 근현대사의 굴곡이 제법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공간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목, 2019/01/2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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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일제강제동원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신일철주금,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후지코시)의 대리인 김세은, 임재성 변호사와 소송 사무국인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등이 일본 도쿄에 있는 신일철주금 등 피고기업의 본사를 방문했다.
원고 측은 2018년 11월 12일과 12월 4일에도 배상과 문제해결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신일철 주금 본사에 찾아갔지만 피고 측과 만나지 못했다. 이에 따라 2018년 12월 31일 원고 측은 신일철주금이 갖고 있는 ‘PNR’(POSCO-Nippon Steel RHF Joint Venture Co.,Ltd) 주식에 대해 압류신청을 했고, 지난 1월 4일, 포항지방법원은 해당 주식에 대한 압류결정을 했다.
이번 방문에서 “만약 본 협의요청이 합리적 답변이나 이유 없이 거절될 경우, 원고들의 연세가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한국 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절차를 개시할 예정”이라는 요청서를 전달하여 이후 압류주식에 대한 매각절차를 시작할 것임을 통지하였다. 한편,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 이후 제기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 3건의 항소심 판결에서 2019년 1월 18일, 1월 23일, 1월 30일에 모두 원고 승소판결이 나왔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금, 2019/02/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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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0일 광주지부가 오랫동안 추진해왔던 광주지역 친일잔재 조사결과보고회가 열린후, 친일잔재 조사 내용이 각종 미디어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명의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가 일선 학교에서 불리고 있음이 밝혀져 학생과 학부모, 동문 등의 거센 반발을 샀다. <광주지역 친일잔재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 현제명 : 전남대, 숭일중·고 ▲ 김성태 : 광덕중·고 ▲ 이흥렬 : 광주일고
▲ 김동진 : 호남대, 서영대, 동강대, 서강중·고, 금호중앙중·금호여고, 동신중·고, 동신여중·고

2월 13일 광주일고 측은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를 즉시 폐기하고 학교 동문인 김종률 씨에게 새 교가의 작곡을 맡기고, 학생을 대상으로 교가 가사도 공모해, 11월 3일까지 완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광주일고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가 1929년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이었음에 비추어 친일 작곡가의 교가를 사용하는 것은 그 역사성에 배치된다고 지적되었으며 재학생, 교직원,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90% 이상 교체를 원하는 것으로 나왔다.
연구소 충남지부와 전교조 충남지부는 14일 공동성명을 내고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충남 도내 학교도 상당수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충남도교육청은 친일 잔재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충남교육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시민, 교육 단체가 참여하는 가칭 역사교육위원회를 구성해 올바른 역사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편집부

금, 2019/02/2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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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군은 2006년에 홍천 출신 무용가 최승희(1911~1969)에 대한 기념사업을 추진했지만 광복회 등 도내 보훈단체들의 반발과 2011년 군민 설문조사에서 반대여론(67.6%)이 높게 나옴에 따라 관련 사업을 중단한 바 있다. 지난해 6월 당선된 허필홍 홍천군수는 최승희의 고향인 남면 제곡리에 기념관 건립과 함께 최승희의 춤 세계를 재조명하는 남북 합동추모사업을 공 약으로 내세우면서까지 적극 검토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최승희의 친일행적을 이유로 2011년과 마찬가지로 적극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군청 앞 집회를 비롯해 민주당 강원도당 방문, 언론 기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적인 반대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홍천군은 지난해 12월 12일 ‘남북이 함께하는 최승희 춤 재조명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공문을 반대운동에 앞장선 독립유공자유족회에 보냈다. 공문에는 “해당 사업을 검토한 결과 3·1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상황 등을 고려해해당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최승희는 1942년 2월 11일과 13일자 <매일신보>에 연재한 ‘나의 무용기, 동양무용 수립을 위해’에서 “자신의 창작 방향이 (중략) 일본 예술문화에 영원히 전해 갈 꽃이 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라고 밝혔다. 최승희는 여러 차례 황군 위문 공연을 다니면서 7만 5천원의 공연수익금을 국방헌금, 황군위문금, 독일 상이군인 위문금, 조선문인협회 기부금, 군사후원연맹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헌납했다. 최승희는 광복 직전 중국에서 일본군 전선 위문공연을 하다 베이징에서 광복을 맞았지만 바로 귀국 못하고 1946년 5월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제강점기 행적 등이 문제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7월 20일 남편 안막(본명 안필승), 큰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02/2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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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3·1운동과 한국인의 삶’ 좌담회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주최로 연구소 5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고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과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이태훈 연세대 교수가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3·1운동의 성격과 전개 양상, 3·1운동 후의 식민지 조선의 변화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였다. 참석자들은 이 운동이 전 지역, 전민족적, 전계층적으로 일어났을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민중이 사회 전면에 나선 운동이었음을 강조했다.

 

 

김정인 교수는 “3·1운동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스스로 조직한 운동”이라며 “학생 특히 여학생이 운동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은 일제가 향촌의 유대와 공동체를 해체하여 수직구조로 재편한 것에 대항하여 3·1운동은 학교와 교회, 시장 등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자율적으로 일어난 것이며, 이는 한국문화의 자율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이날 50여 명의 회원과 일반 시민들이 장시간 경청하고 질의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열띤 호응을 보여주었다.

• 편집부

금, 2019/02/2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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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화가가 그린 원태우 지사의 투석 장면이 묘사된 삽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 1905년 12월 8일자)

 

원태우 지사의 항거에 대한 삽화와 단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자)의 표지이다.

 

의거터 표석 자리에서 보이는 경부선 철길의 모습

 

안양 관악역 인접지(승강장 북단에서 25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의 모습이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4명의 범인이 포박되어 그 중에 2명이 자백했다는 급보가 날아들게 된다.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 (1905년 12월 8일 발행)에는 이날의 상황을 묘사한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의 삽화 하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민소(憫笑, 가엽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의 설명문에도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農民)으로, 대사(大使)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항거의 의미를 축소하는 어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잡지의 본문에 게재된 「대사(大使)의 조난(遭難)」이라는 짧은 글에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토 대사는 22일 하야시 공사 등과 더불어 수원부에 사냥을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부철도의 열차를 타고 오후 6시 안양정거장을 발차하자마자 이내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진자가 있어, 돌이 유리창을 깨고 후작(侯爵, 이토)의 얼굴을 덮쳤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협약(協約, 을사조약)에 불평하는 폭한(暴漢)의 소행일 거라는 말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한제(韓帝, 한국황제)는 이 사변에 대해 매우 심통(心痛)하여 23일 오전 2시 예식원경(禮式院卿) 이근택(李根澤, ‘이근상’의 오류)을 대사의 여관 대관정(大觀亭)에 보내 정중한 위문(慰問)을 겸해 사의(謝意)를 표하도록 했으나, 대사는 어제 저녁의 일은 본디 아희(兒戲, 어린아이 장난)와 같은 것이었고 또한 부상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일도 아니었기에 결코 깊이 존려(尊慮)를 기울여 주실 일은 아니라고 답주(答奏)하였다. 이 폭한은 그날 밤에 포박 되었는데, 과연 취한(醉漢)의 악희(惡戲, 고약한 장난)로 추호(秋毫)도 고의(故意)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이토 대사가 매우 대범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인물인 듯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예식원경 이근상의 사죄 방문에 이어 그날 아침이 되자 궁내부대신 이재극(宮內府大臣 李載克)이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사죄와 위문을 뜻을 전하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상황이 이어졌는데, 한껏 쇠잔해진 국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참으로 서글픈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처리 결과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에 수록된 「이토대사 탑승열차 위해범 원태근 조치 건」 제하의 문건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선고서(宣告書)
경기도 과천군 안양시장(安養市場) 22통 호 불상(不詳)
원태근(元泰根) 당 22년

피고는 명치 38년(1905년) 11월 22일 동 시장의 이만여(李萬汝) 외 2명과 함께 일가(日稼, 날품팔이)를 위해 영등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마신 결과 약간 술에 취하여 동일 오후 6시 17분 경 경부철도 안양역 서북방 약 8백 미터 안양 부근에서 북행열차가 진행하여 오는 것을 보고 마침 가지고 있던 작은 돌멩이를 선로 위에 놓아두는 것을 동행자인 이만여가 이를 제지하여 스스로 이를 치워버리자 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주먹 만한 크기의 화강석(花崗石)을 주워 객차를 향해 던졌기 때문에 차창이 파괴되어 당시 차 안에 있던 승객 한 명에게 미상(微傷)을 입히게 하였다.(중략)
이상 피고의 행위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 제4조 제9항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정상작량(情狀酌量)하는 것으로 함에 따라 군율위범심판규정(軍律違犯審判規定) 제6조에 의거하여 감금(監禁) 2개월, 태(笞) 1백에 처한다.

명치 38년(1905년) 11월 25일
한국주차헌병대장 오야마 미츠키(韓國駐箚憲兵隊長 小山三己)

 

<각사등록 근대편 자료>에 수록된 「조회(照會) 제25호(외부대신 발신, 의정부 참정대신 수신, 1905년 7월 10일)」에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의 세부사항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확인해보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4조 제9항은 “아군(我軍)의 징발(徵發)에 응(應)함을 거(拒)하고 우(又) 방해(妨害)한 자(者)”로 표시되어 있다. 달리는 열차에 돌멩이를 던진 사안과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으므로, 요컨대 선고서를 작성할 때 군율의 해당 항목을 잘못 인용 기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돌을 던진 한국인의 이름이 ‘원태근’으로 적혀 있지만 호적자료에는 그의 정체가 원태우(元泰祐, 1882~1950)로 기재된 것으로 확인된다. 원태우 지사는 이때 혹독한 구타로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면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한국전쟁 발발 시기에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행적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1990년에 이르러 겨우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그 결과 뒤늦게 ‘원태근’이라는 이름 아래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금, 2019/02/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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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44

청일전쟁 때 일본군 개선식은 왜 용산 벌판에서 벌어졌을까?
– 과장된 전공(戰功)이 곳곳에 만들어낸 그들의 전승 기념물들

이순우 책임연구원

1894년(갑오년) 여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감당하지 못한 조선국 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맞서 일본도 10년 전 갑신정변의 여파로 맺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동시 개입을 적극 시도하면서 끝내 이러한 군사충돌은 바로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촉발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해 6월 8일 청국군은 아산만(牙山灣, 마산포와 백석포)을 통해 상륙하여 아산과 성환 일대에 주둔했고, 일본군은 이보다 하루 늦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뒤 선발부대인 오시마 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이 만리창(萬里倉, 효창동 199번지 지점)에 본부를 마련하고 예하 주력부대는 효창원 계곡과 아현리 주변에 포진하였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효창원 만리창 지역의 일본군 숙영지 전경이다.

 

이때 오시마 병력이 한강을 건너 남하하여 청국군의 방어진을 향해 진군함에 따라 7월 29일 새벽 성환의 북쪽 안성도(安城渡, 안성나루;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중리)에서 두 외국 군대 사이에 첫 육상 전투가 벌어졌다. 불과 이틀 사이에 일본군은 청국군의 아산 본영까지 점령하고막대한 전리품을 수습하여 서울로 귀환하였고, 다수의 사상자를 낸 청국군은 홍주 방면으로 패주하였다가 강원도 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방식으로 행군하여 8월 하순에 평양(平壤)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들의 군영으로 간신히 합류하였다.

1894년 7월 29일 청국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가 벌어진 안성나루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는 나중에 안성교(安城橋)라는 다리가 설치되었다.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조선지풍광>, 1922)

 

이른바 ‘성환역(成歡役)’으로 표기되는 이 전투에서 크게 이긴 일본군이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이때의 전투 장면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다색인쇄 목판화 기법인 니시키에(錦繪)로 만들어져 대량 보급되었고, 이를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여기에는 대개 승승장구하는 일본 군대의 모습이 화려하고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이 당시에도 ‘보도사진’이나 ‘종군기자’와 같은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진을 인쇄물로 전환하는 기술이 원활하지 않았으므로, 무엇보다도 속보성(速報性)을 생명으로 하는 전쟁화보와 같은 매체조차 제작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대개 인화사진을 보고 다시 목판화로 그려 찍어내는 기법이 선호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청일전쟁 시기에 관한 자료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묶음 제작된 전쟁사진첩보다는 그때그때마다 제작된 목판화 종류의 기록물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수량이 남아 있다.

 

<도쿄아사히신문> 1894년 8월 28일자 부록으로 배포된 ‘일본군 경성 개선식 장면’이다. (이치노헤 쇼코 기증,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런데 이 와중에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은 드물게도 1894년 8월 28일자의 부록으로 ‘명치 27년(1894년) 8월 5일 아병경성개선지도(我兵京城凱旋之圖)’라는 제목을 붙여 3매 연속 사진을 파노라마 형태로 담아낸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이미 20여 일 전의 상황이긴 하지만 생생한 전투소식을 알리는 나름의 전쟁 속보였던 셈이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일본군 개선식 장면이다. 사진촬영자는 조선 인천항에 거주하는 히구치 사이조(樋口宰藏)로 표시되어 있다.

 

여길 보면 벌판의 한쪽에 ‘개선문’이라고 써 붙인 커다란 일본식 녹문(綠門)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대가 도열한 상태이며, 그 뒤쪽으로 약간 비탈진 언덕 위에는 구경꾼들이 뒤섞인 모습이 포착된다. 사진의 설명문에 이미 그해 8월 5일의 개선상황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를 단서로 몇 가지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경성부사> 제1권 (1934), 590~591쪽에 이 사진 장면과 딱 일치하는 설명이 수록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승전소식이 경성에 알려지자 …… 일본인 측에 있어서는 수비군, 공사관원, 거류민 등의 환희는 비할 바가 없었고, 곧장 환영을 협의하여 구용산 문평산(舊龍山 文平山)의 동측 평지에 높이 4장(丈) 가량의 녹문(綠門, 료쿠몬)을 만들어 중앙에 오토리 공사(大鳥公使)가 쓴 ‘개선문(凱旋門, 아산을 바라보는 방향)’과 ‘환영문(歡迎門, 경성을 바라보는 방향)’이란 편액을 걸었다. 8월 5일 공사관원은 소와 술독을 문 옆으로 옮겼고, 일본거류민은 얼음을 멀리 한강 남안까지 운반하여 향응 준비를 전부 마쳤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경성수비의 일본병은 도로의 양측에 나란히 늘어서고, 공병(工兵)은 동작진(銅雀津)에서 강을 건너도록 배를 띄울 준비를 했다. 오토리 공사는 관원들을 거느리고, 칙사 이윤용(勅使 李允用)과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 군국기무처) 대표 정경원(鄭敬源)은 박홍천록(薄紅淺綠)의 조선예장(
朝鮮禮裝)을 갖추고 개선문 옆에 도착했다.
일군(日軍)은 매일 황혼에 출발하여 진위(振威), 수원(水原), 과천(果川) 등으로 주간의 더위를 피하며, 선두에는 조선인 인부가 노획품인 징과 큰북을 난타하고 또 포획품인 황룡기(黃龍旗) 여러 유(旒) 및 엽자(葉字; 葉志超), 섭자(聶字; 聶士成), 위자(魏字), 상자(商字), 풍자(馮字) 등의 문자를 수(繡)로 새긴 군기(軍旗) 27류, 기타 당(幢)이라고 하는 간봉(竿棒), 새깃털을 부착한 장창(長槍) 등 20여 개를 들어올리며, 대포 8문(門)은 소가 이끌었는데 각각에 ‘성환(成歡)의 전리품(戰利品)’, ‘청병 대패(淸兵 大敗)의 증(證)’ 등을 묵서(墨書)한 작은 깃발이 더하였고, 초병(哨兵)이 이를 감시하며 전군이 그 뒤를 따랐다. 처음 출정할 당시 흰색이었던 융의(戎衣, 군복)는 전부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어서 한눈에 보더라도 격전(激戰)의 정도를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오시마 여단장(大島旅團長), 나가오카 참모장(長岡參謀長) 등이 앞서 말에서 내리자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공사관 통역관)는 이윤용에 의한 국왕전하로부터의 감사위로 칙지(勅旨)를 옮겨 전하고, 정경원의 축사를 통역하였다. 이어서 주객(主客)이 서로 교환(交歡)하는 바가 있었고, 공사는 ‘천황폐하만세’를, 여단장은 ‘조선국대군주만세’, 정경원은 ‘대일본황제폐하만세’를 소리 질러 일동 제창하며 개선의 식을 마쳤다. 때는 정각 오전 9시,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그 빛을 한강변 백사장 위에 정렬한 개선군에게 뿌렸다. 이로부터 분포품(分捕品)을 선두로 하여 전군 진행을 개시하여 선두가 막영지에 도달할 무렵에는 대행리(大行李, 군수품)는 여전히 개선문의 옆에 있었는데, 구불구불한 장사(長蛇)의 부대는 숙숙(肅肅)하게 만리창(萬里倉)을 향하고 군중은 도로의 양측에 운집하여 이 장관을 마주했다. (하략)

 

이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한강을 건너 자신들의 주둔지인 ‘만리창’으로 가는 도중에 ‘개선문’ 앞에서 거창한 의식을 벌이는 장면인 것으로 드러난다. 사진에 포착된 작은 개울은 만초천(蔓草川; 너추내, 너푸내)인 듯도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물줄기가 약해보이는 것이 지류(支流)의 한가닥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뒤쪽으로 효창원을 품고 있는 연화봉 자락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 개선식장은 대략 지금의 ‘삼각지(三角地)’에 가까운 어느 지점인 것으로 짐작된다.

<경성부사> 제1권(1934)에 수록된 종군화가 쿠보다 베이센의 개선식 삽화이다. 여기에는 이 행사가 벌어진 장소가 ‘문평산 동쪽’이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경성부사> 제1권 (1934), 591쪽에는 종군화가(從軍畫家)로 이름을 날린 쿠보다 베이센(久保田米僊, 1852~1906)이 그린 개선식 삽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에 대해 “장소는 구용산 문평산 동측(舊龍山 文平山 東側)”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문평산’은 일제 때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있던 당현(堂峴, 당고개) 일대의 작은 봉우리를 일컫는 용도로 곧잘 사용된 지명이었다. 따라서 문평산의 동쪽이라고 함은 지금의 ‘삼각지’ 언저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1925년 을축대홍수 당시 경정(京町, 지금의 문배동) 일대의 침수상황이다. 사진촬영지점은 ‘문평산’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전면으로 남산 자락과 삼각지 일대가 포착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조선의 홍수>, 1926)

 

이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일본군대가 효창원 일대에 포진한 내력은 그들만의 전쟁기념물을 곳곳에 설치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1929년 6월에 건립된 ‘오시마 혼성여단막영지적(大島混成旅團幕營之跡) 기념비’와 1931년 6월에 건립된 ‘합리비행기발상지지(合理飛行機發祥之地) 기념비’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우선 앞의 것은 1926년 6월 24일에 오시마 혼성여단 전몰장졸을 위한 추도회를 열면서 그 기념으로 ‘오시마 여단주둔지(大島旅團駐屯地)’라고 쓴 표목(標木)을 우선 세웠다가 이를 대체하는 형태로 효창공원 서쪽고지에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오시마 여단이 주둔하던 때에 제1야전병원부 육군일등조제수(陸軍一等調劑手)이던 니노미야 츄하치(二宮忠八, 1866~1936)가 이곳에서 비행기의 설계를 떠올려 발표했음을 기리기 위해 효창공립보통학교(청파동 3가 115번지 구역)의 경계면에 접한 동쪽고지에 설치한 비석이었다.

<매일신보> 1912년 11월 20일자에 수록된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의 낙성식 광경이다. 성환역 후면에 자리한 이 비석의 전면에는 테라우치 총독이 쓴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가 부착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세운 청일전쟁 관련 기념물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고, 일본 군인들의 행적이 남겨진 공간마다 이러한 시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이러한 장소들은 대개 그 지역의 관광명소로 크게 홍보되거나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그들의 전적지 또는 참배의 대상물로 활용되곤 했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로 일찍이 1912년 11월 3일에는 경부선 성환역(成歡驛) 뒤편 언덕에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松崎大尉記念碑)’가 건립된 바 있었다. 그는 제21연대 제12중대장으로 안성나루전투에서 앞장서 지휘하다가 총탄을 맞아 죽었는데, 이것이 일본군 측의 최초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그의 죽음은 즉시 ‘무부(武夫)의 귀감(龜鑑)’으로 치장되어 전사 장면은 니시키에(錦繪)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급되기도 했다.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 바로 옆에 자리한 ‘육군 나팔수 키구치 코헤이 기념비’의 모습이다. (경기도,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마츠자키 기념비가 건립된 장소는 청국군 섭사평(聶士成, 니에쉬청)의 중앙 진지였다가 점령되어 일본군 포병진지로 변한 구릉을 택하여 정했으며, 성환헌병파견소(成歡憲兵派遣所)와 성환보선구사무소(成歡保線區事務所)와 직산군청(稷山郡廳; 1914년에 천안군으로 흡수되어 합병)이 합동으로 건립부지를 조성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알려진다. 기념비의 높이는 30여 척(尺)이며, 위쪽에는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이 휘호(揮毫)한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를 달았고 아래쪽에는 옛 상관이던 오시마 요시마사 자작(大島義昌 子爵)이 쓴 “육군보병대위 마츠자키 나오오미의 비(陸軍步兵大尉 松崎直臣之碑)”라는 석판을 부착하였다.
이와 함께 육군나팔수 기구치 코헤이(陸軍喇叭手 木口小平)의 비석도 마츠자키 기념비 옆에 설치되었다. 그는 안성나루를 건너는 전투과정에서 선두에 서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나팔을 불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헛웃음을 자아내는 일은 당초에 공표된 나팔수의 정체는 시라카미 겐지로(白神源次郞)라는 군인이었고 그의 미담은 이내 소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일본국민의 열광적 추앙을 받았으나, 알고 보니 그는 전투 중에 익사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불과 1년 만에 실제 주인공이 기쿠치 코헤이로 번복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900년 남산 왜성대공원에 건립된 ‘갑오역기념비’의 모습이다.(<한국병합기념첩>, 1910)

 

그리고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남산공원(南山公園, 왜성대공원)에는 난데없이 ‘갑오역기념비(甲午役紀念碑)’라는 일종의 추모시설을 겸한 충혼비가 들어섰다. 이 장소가 선택된 것은 청일전쟁 당시 오시마 여단이 포열(砲列)을 펼쳤던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청일전쟁 때 죽은 일본군 전몰자만이 아니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의 조난자에 더하여 1907년 군대해산 당시의 전사자도 모두 합사되었다.
특히, 이 기념비 아래에는 양화진 등지에 가매장되었던 전몰자의 유골을 몰래 옮겨 파묻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데, <경성부사> 제2권(1936), 687~688쪽에는 갑오역기념비의 조성 경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수원 팔달산 정상에 설치된 ‘코시 소좌 의사지비’의 전경이다. (경기도,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5월에는 왜성대(倭城臺)에 갑오기념비를 세웠다. 처음에 거류민은 명치 18년(1885년) 이래 임오(壬午) 갑신(甲申)의 양란(兩亂)에 조난된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해마다 제사를 행해 왔으나 명치 29년(1896년) 양화진(楊花鎭)에 가장(假葬, 가매장)한 청일전쟁 때 성환, 중화 등지에서 전몰자의 유골들도 봉납하여 전자와 합사(合祀)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논의가 관민 사이에 번져, 기부금 3천 원을 갹출하여 주조(鑄造)를 오사카포병공창(大阪砲兵工廠)에 의뢰하고, 장소는 왜성대로 하여 8월 제막식(
除幕式)을 거행했다.
당시 성내에 매골(埋骨)하는 것은 이를 꺼리는 사정이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이 비석 아래에 매몰했다. 지금 경성신사(京城神社) 앞에 있는 ‘갑오역기념(甲午役記念)’의 비가 곧 이것이다.

이밖에 성환 전투와 관련하여 설치된 또 다른 전쟁 기념물로는 경기도 수원의 팔달산 정상 남단에 자리했던 육군소좌 코시 마사츠나(陸軍少佐 古志正綱)의 비석도 있었다. 그는 오시마 혼성여단에 소속된 제21연대 제3대대장으로 부천 오류동(富川 梧柳洞)을 거쳐 성환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수원에 머물 때에 치중대(輜重隊, 수송보급부대)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조선인을 대상으로 보급품을 운반할 54마리의 군마(軍馬)를 징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야간을 틈타 마부와 함께 군량미를 실은 말들이 모두 도망을 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해 7월 27일 새벽 팔달산 기슭 수원군청의 뒤쪽 소나무 숲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예외없이 분전(奮戰)을 고취하는 전쟁 미담으로 치환되기에 이르렀고, 30년가량이 지난 1932년 10월 1일 수원재향군인분회(水原在鄕軍人分會)의 주도로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높이 23척에 달하는 이 비석에는 오시마 혼성여단의 참모였던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의 글씨를 받아 “갑오역 코시 소좌 의사지비(甲午役古志少佐義死之碑)”라는 편액이 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자결 또한 끝내 의로운 죽음으로 승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미 30여 년 전에 있었던 청일전쟁 당시 과장된 전공이 만들어낸 전쟁영웅의 이미지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반복 소비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제국이 벌인 또 다른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독려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

금, 2019/02/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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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 선생의 생애를 온전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선생에 대한 사적인 기록이 적은 데다 자료가 없는 시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동안 발표되었던 선생의 글을 최대한 수집해서 단편적이나마 선생의 생을 더듬어 보려 한다.

 

어린 시절
임종국은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의 4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문호는 천도교 청년 당수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지냈고, 당대 대표적인 민족계몽운동가로서 오늘날 흔히 말하는 우파 민족주의자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다.

일곱 살 때인가, 형무소에 아버지를 면회 간 적이 있다. ‘의식 있는 조선인’이었던 까닭에 (아버지는) 그 후에도 한두 번 더 형무소를 드나들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 젊은이들에게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든 이것은 친일행적임에 틀림없다.(<민족정기를 살려야 합니다>, 월간조선 서병욱 차장 대우와의 인터뷰)

아버지의 이런 행적이 소년 종국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릴 때 일이었기에 종국의 의식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의 저 밑 어딘가에 아버지의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의 천도교단 내의 직책이 바뀌어 서울로 이사하면서 종국은 재동보통학교를 다녔고, 10대를 신설동에서 보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우리 집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만성루(萬盛樓), 오른쪽에 죽정(竹井)이라는 일인이 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집 기대(畿代)라는 소녀와 가까워져서 흔히 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다. 근로동원을 가서 꾀를 피우다 으레 “가찌노고다까라”(조선놈의 씨알머리니까) “아레 요보상다요. ”(저건 조선놈의 종내기야)라는 욕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검도하며 총검술을 배웠다. 배낭에 99식총과 대검을 찬 상급생들이 하늘만큼은 장해 보였다. ”조센진또 멘따이와 다다께바 다다꾸호도아지가 데루“(조선놈하구 명태는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라는 그 유명한 격언(?)을 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다. 배급쌀이라고 쌀 반 콩깨묵 반이 나오더니 나중에 쌀알만큼씩 부스러뜨린 국수 종류가 배급되고, 그러자 미구에 해방이 됐다고 세상이 벌컥 뒤집혔다. 나는
해방이 뭔가 하면서 덩달아 좋아했다.
이때 내 나이 17세. 하루는 친구놈한테서 김구 선생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에!~ 너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사람이래!”
“그래? 중국사람이 뭐하러 조선엘 오지?”
“이런 짜아식!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지금 나는 요즘의 17세에 비해서 그 무렵의 내 정신 연령이 몇 살 쯤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자화상> 중에서)

1966년 〈친일문학론〉을 출판하면서 쓴 글이다. 민족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무지와 그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과 그에 협력했던 사람들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극적인 기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해방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는 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런 소리를 10일 전 그러니까 8월 14일쯤에 했다면 영락없는 헌병대 영창감이었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일본군의 시선에 겁이 나서 나는 얼른 둘러댔었다.
“하지만 애써 싸운 당신네가 졌다는 것을 정말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20년 후에 만나자!”
(<술과 바꾼 법률책>, 『망국을 할 것인가』)

이 회고는 당시 경험과 훗날의 인식이 합쳐서 재구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일본이 다시 올 것이라는 인식은 1965년 대일 굴욕외교(한일협정)을 겪으면서 위기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기의식은 그를 ‘친일문제’라는 지난하고 고독한 세계로 들어서도록 했다.

 

방황하는 청년
청소년기의 임종국에 대해선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게 없다. 다만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소설을 배우는 문학가 지망생이었음은 분명하다. 청년 임종국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다.
전북 장수군에서 경남 함안군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육십령 고개가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인민군에게 잡혀 안의로 가는 수십 리 내리막길을 인민군의 짐을 진 채, 행렬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길가에 즐비한 수십 구의 아군 병사 시체를 보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위정자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국방과 정치를 어떻게 다루었기에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못 돼 이곳 경상도까지 밀린단 말인가. 점심을 평양, 저녁을 신의주서 먹는다더니, 누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죄없는 청춘들만 저렇게 죽어 자빠져야 하는 것인가. 안의에 이르러 인민군 여덟을 무밭에 끌어 묻어준 후 나는 인민군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낙동강을 넘으면 고향인 창녕 땅. 가도 가도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나는 줄곧 분노로 가슴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술과 바꾼 법률책>)

피난살이 속에서 문학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 시절 흔히 그렇듯이 가난한 수재라면 출세를 위해 고시라는 유혹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시 준비를 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 육십령 고개에서 본 젊은 죽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시에 합격하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칼을 휘둘러 나라를 좀먹은 버러지들을 무청 자르듯이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고시 준비의 한 이유였다.

시골에 처박혀서 여섯 달 정도 비지땀을 흘리면서 민법, 형법 총론, 각론 8권을 송두리째 암기하였다. 판사든 검사든 이미 반 이상은 맡아 놓았다고 기고만장해서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서울은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폐허의 도시이자, 먹고 잘 곳조차 마련되지 않은 수도였다. 팔자 좋은 친구들은 인삼, 녹용을 달여 먹으면서 고시를 준비했지만, 그는 밥 세끼 거르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더구나 한 달에 책 한 권을 완전히 외다시피 하는 강행군을 계속하니 체중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빈 강의실에 앉아서 형사소송법의 조문을 외면서도 마음은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운 좋게 절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숙식하던 것도 불가능하게 된 데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마저 휴학하게 되었다. 판검사가 되어 썩은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던 청년의 꿈은 끝내 잠자리와 끼니 걱정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청년의 가슴속에서 중뿔난 소리가 들려왔다. 타고난 오기라 할까, 반골의 소리가 그를 유혹한 것이다.
권좌에 앉아서 많은 사람을 머리 숙이게 하지 못할 바에야, 내가 많은 사람에게 머리 숙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권력을 내 것으로 못 한다면 대신 자유를 가지면 될 게 아닌가. 권좌에 연연하고 뇌물에 머리 숙이는 치사한 인간이 되느니 철저하게 자유인으로 살자.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뜬구름 한 조각이 되어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내 것으로 하면서 사는 거다.(<술과 바꾼 법률책>)

이렇게 해서 그는 신주 단지 모시듯 하던 법률책을 술과 바꿔 버리고 말았다. 대신 중학 시절의 꿈이었던 문학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말처럼 ‘돌아온 탕아’가 된 것이다. 탕아의 길동무론 이상(李箱)이 함께 했다.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를 위로한 것이 이상이었다. 〈민법총론〉 500 페이지를 한 달 만에 외워버린 천재(?)가 밥과 잠자리 걱정 때문에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자신이야말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아닌가. 이상이 죽은 지 20년이 되었건만 이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하나 없는 때였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이상을 발굴해서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스로 날지 못한 자신의 꿈을 이상을 통해서 실현시켜 보고자 했음일까.
〈이상론〉을 쓰고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전집〉 전3권을 출판하였고 틈틈이 써놓았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에 얼굴을 내민 후 몇 해 동안 술도 약간은 마셨다. 그러나 묵은 신문 잡지에서 이상의 작품을 뒤지면서 알게 된 1930년대의 사회는 그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공해 주었다. 작품인식의 한계성 문제, 즉 한 시대의 작품은 그 시대의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상투의 시대와 사회를 모르면서 상투꾼들의 생활감정을 말하는 한 결국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밖에 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문학과 사회의 관련성, 또 그것이 문학사회사의 문제로 발전하면서 그는 이것을 평생의 연구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1960년대 초엽에 그는 향토지 경남문학에 <물레방아론>을 발표했다. 문학사회학적 방법으로 나도향의 <물레방아>를 분석한 평론이다. 그는 이런 방법을 신문학 전체에 적용하여 문학사회사를 쓸 작정으로 본격적인 준비작업을 시작하였다. 1910~1945년의 매일신보를 뒤져서 정치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을 완결한 후, 그 작업을 다른 신문 잡지로 확산 시켜갔던 것이다. 2~3년 걸려서 이 작업을 하던 중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65년 한일회담이 타결된 것이다.

 

친일문학론 출간, 이후 일제침략•배족사 연구에 전념

1965년에 들어서마자 1월부터 제7차 한일회담이 개막, 6월 한일협정 정식 조인,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라는 과정에서 보듯이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대학생들을 비롯한 거국적인 반대투쟁을 묵살하고 정권의 명운을 걸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일사천리로 처리하고 말았다.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 여름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쪽발이 놈들이 다시 몰려오게 되는구나! 그놈들은 일개 병사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 타령을 하는 판이었다. 이완용이가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회담이 타결도 되기 전에 그런 타령부터 나온다면, 그것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밀듯이 일세(日勢)는 침투해 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과 박춘금…..얼마든지 또 생각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과 박춘금이 그래도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중략)
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다. 2~3년 걸려서 만들어 둔 신문과 잡지의 게재 작품 기타 문화 사회면의 기사색인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별 카드에 옮겨서 찾아 읽고 비평만 하면 됐던 것이다. 그 기사색인은 문학사회사를 쓰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책인『친일문학론』의 기초자료로 요긴하게 전용된 셈이었다. 그 기사색인 덕분에 『친일문학론』은 복사기가 없던 시대라 자료의 상당 부분을 필사로 옮겨 베끼면서도 원고 2천매 탈고까지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다른 문화 분야 및 사회 경제 부분을 원고지 각 2천매씩 2권 정도로 계속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필이 순조로웠던 반면에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문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책은 우선 팔리지 않았다….. 초판 3천 부를 파는 데 10년이 걸리더니 1975년부터 수요가 늘어서 지금 7판째가 찍혀나갔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실록 친일파』)

임종국은 한일협정 체결에 크나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절박한 심정으로 『친일문학론』을 썼던 것이다. 1965년 당시 친일파, 친일문학이란 말 자체가 금기시되는 풍토였다. 이광수, 홍난파, 김은호 등 이름 있는 문필가나 예술인들은 민족문학, 민족음악,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았고 그들에 대한 친일 시비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고 언급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수, 최남선, 김동환, 모윤숙, 노천명 등 쟁쟁한 문인들의 친일작품을 발굴하고 이를 치밀하게 분석한 그의 고투(苦鬪)는 한국문학사뿐 아니라 한국현대사 연구의 전환을 가져오는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이 책이 서점에 배포되자 국내 지성계는 큰 혼란을 겪었고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도 빗발쳤으나 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문학계나 강단에서는 이것을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책의 판매도 아주 저조했다. 하지만 임종국은 이 작업을 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패주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만든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5․16과 (10월)유신을 불러들였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임종국이 존경했던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였고 또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민족정기를 훼손했으니 그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그는 문단이 싫어지고 시나 소설을 쓰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임종국이 시를 쓰면 옹졸해진단 말야!’
언제던가 조지훈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말씀이 내 중뿔난 생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있었다. 남자 한평생에 붓을 잡았으면 몇 천 장 전적을 쓸 것이지, 원고지 서너 장을 시로 메운다는 것이 따분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일제의 침략사와 우리의 반민족사를 쓰자! 이리하여 나는 어느새 이사를 해도 문예지에 주소를 알리지 않는 괴팍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술로 바꾼 법률책」)

임종국은 시인, 문학평론가라는 딱지를 떼고 본격적인 친일․일제침략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길은 아무도 밟아본 적이 없는 길이요,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이었다.

1970년대로 들면서 나는 『친일문학론』의 계속작업을 조금씩 진행시켜 왔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엄청난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전 2권 4천 매의 계획이 전 8권 2만 매로 늘어나 버렸다. 1년에 2500매씩 써도 8년이니 여생을, 아니 그간의 자료조사기를 15년으로 쳐도 평생을 그 일에 매달린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민족혼이 바로 선다」)

 

자료수집, 생활 방편으로서의 글쓰기

1970년부터 임종국은 본격적인 자료조사 작업에 들어갔다. 원고료와 인세의 상당 부분을 자료 구입비에 쏟았고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안 다닌 곳이 없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를 비롯한 각 대학 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지에서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어서 일일이 필사했다. 이른바 ‘임종국카드’라 불리는 1만 5천여 매의 친일인명카드는 이때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친일파 연구는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인 연구였다. 아무리 신빙성 있는 증언이 있다 해도 일제시대 문헌자료에 나오지 않는다면 증거자료로 채택하지 않았다. 연구주제가 친일경력을 파헤치는 것이니 만큼 철저한 고증이 없다면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지나치리만치 꼼꼼하고 실증적인 연구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의 첫 성과는 1977년 8월 <대화>에 처음 게재되고 수정 보강하여 <해방전후사의 인식1>(1979)에 실린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였다. 76쪽에 달하는 이 글은 친일파 연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임종국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일제하 전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과 친일단체를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10년간에 걸쳐 총독부문서와 관보, 각급 관공서 자료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기사, 삼천리, 동양지광 등 잡지 등에서 모은 자료를 집약하여 전체적인 친일군상의 윤곽을 잡아놓은 것이다. 이 글은 이후 후학들에게 친일파 연구의 전범(典範)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 남긴 관련 글들은 다음과 같다.
「중추원참의」(<월간중앙>(이하 동일) 1973.5), 「징용」(1974.1), 「학도지원병」(1974.3), 「일제 고등계형사」(1974.8), 「일제하의 인력, 물자 이렇게 수탈됐다(1976.5), 「조선주둔군사령부」(1978.8).
임종국은 고려대학교를 마친 이후 별다른 직장 없이 여기저기 출판사를 옮겨 다녔다. 고시공부때 부실한 식사로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질상 직장생활이 맞지 않았다. 직장이라 할 만한 것은 2년 정도 근무한 신구문화사가 전부라 할 수 있다. 한편 늦게 장가든 임종국은 가솔까지 딸려 항상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그동안 펴낸 책들의 인세와 각종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여 받은 원고료가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자료를 수집하는 와중에 틈틈이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요구하는 글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여성시대의 굵직한 연애사」(<여성동아> 1967.11), 「개화의 발자취-단발령 야화」(<여성동아> 1968.1), 「명기열전-기생풍속도」(<여성동아> 1969.1), 「해방전야-빼앗긴 시절의 이야기」(<여학생> 1971), 「여학생풍물지-품삯 받고 다니던 학교」(<여학생>), 「광고면에 나타난 사회의 변천」(<독서신문> 1971.3.21), 「사회풍속야사-최초의 요정 정문루」(<세대> 1971.5), 「일화로 엮은 돈이야기」(<신여원> 1973.7), 「정절과 슬기의 설화」(<신여원> 1973.12), 「개벽지 야화」(<소설문예> 1977.8),
「윤심덕과 사의 찬미-좌절과 허무의 엘레지」(<여고시대> 1979.4) 등등 다양한 주제의 방대한 원고를 갖가지 매체에 발표했다. 이런 글들이 쉽사리 읽히는 읽을거리라지만 허투루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당시 문화사나 풍속사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에도 임종국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사회문화적 접근을 통해서 그 자체의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는 데 노력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미 축적해 놓은 문헌학적 자료와 함께 동시대상의 박학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근대 한국문학에 대한 문학사회사적 분석도 병행해 나갔다. 기존에 발표했던 문학비평을 묶어 <한국문학의 사회사>(1974)를 출간한 이후에도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기수-채만식」(1976.11), 「관념적 상상의 문학-전영택의 ‘화수분’과 ‘소’」(1976.12), 「지식인의 비극과 좌절 ‘김강사와 T교수’」(1977.3), 「역사를 통한 현실참여-박종화의 현실과 참여」(1977.6), 「민족으로 일관한 리얼리스트-‘북간도’의 작가 안수길」(1977.7), 「정의와 고발의 농촌작가-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 기타」(1977.12) 등등 한국근대문학의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요산재에서의 왕성한 집필활동

10년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주변 지식 축적을 기반으로 하여 1980년대에 들어 임종국의 연구는 드디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40여 년간 살아온 서울을 떠나 천안으로 이사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또한 일제침략과 친일파 연구와 집필에 오로지 전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짓고 스스로 요산재(樂山齋)라 이름 붙였다. 요산재는 이후 임종국의 영면 직전까지 일제침략사와 친일배족사 연구의 요람이자 산실이었다.

1982년 첫 결실로 <일제침략과 친일파>가 나왔다. 임종국은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일제침략의 근간인 사상침략・자원침략․대륙침략의 세 측면과 그에 관련된 친일상을 기술했으나, 그것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임은 우선에 필자가 잘 알고 있다. 종교침략․문화침략․경제침략․교육침략 기타에 걸친 병자수호조약 이래 70년의 친일을 어떻게 조감 할 것인가?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문제이지만, 이 책이 다룬 세 측면에 대해서만은 그런대로 개요는 서술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침략과 친일파>는 본문에서 서술한 세 측면을 기둥으로 해서, 종교침략․문화침략 기타가 그 기둥을 보좌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후 1984년에 일제총독부 고관들의 침략 이면사를 다룬 <밤의 일제침략사>를, 1985년에 강화도 조약 이후 70년간 일제의 사상탄압을 연구한 <일제하의 사상탄압>을 출간했다. 1987년에 그는 일제하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72명이 쓴 108편의 친일 글을 엮어 <친일논설선집>을 펴냈다. 머리말에서 그는 과거의 친일논설을 새로이 발굴하여 드러내는 작업의 의미를 “민족의 제단 앞에서 허물 있는 자는 허물을 벗어 도약의 제수로 바칠 것이며, 허물 없는 자는 그것
을 음복하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썼다. 단기간 이만한 분량의 논설을 엮을 수 있었던 것도 기존의 치밀한 자료 축적 결과였던 것이다.
1977년의 「일제말의 친일군상 실태」부터 1987년의 <친일논설선집>까지 여러 저작과 수많은 논설을 통해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를 다루어 왔는데, 뭔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친일문제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 위해 ‘친일파총사’(전10권)를 구상하였다. 총론, 사상침략과 친일파, 정치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경제침략과 친일파, 문화침략과 친일파, 만주․중국침략, 동양종교, 서양종교, 사회・교육침략과 친일파로 나누고 총론부터 1권씩 차근차근 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를 내놓고 나서 그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원래 건강 때문에 천안 벽지로 이사한 것인데 그동안의 무리한 집필과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인해 몸을 돌보지 못해 지병인 폐기종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 모를 ‘친일파총사’ 발간을 성사시키고자 그는 몇몇 역사전공자를 접촉하여 공동 연구작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쓸쓸한 죽음, 새로운 시작

임종국은 결국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환갑을 겨우 넘긴 1989년 11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타계소식을 듣고 그의 빈소에 여러 지인들과 연구자들이 찾아왔으나 그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임종국의 생애는 반골, ‘중뿔난 짓’만 골라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일체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나왔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신라 고구려의 핏줄기인 줄 알았던들 나는!”(자화상, <친일문학론>). 기성의 관념과 지식, 역사 심지어 자신의 의식을 부정하고 나서야 새로운 길이 열렸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부터 그는 각성되었고 그의 각성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역사 쓰기, 아울러 그에 걸맞은 치열한 삶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그가 당시 각광받고 있던 독립운동사를 차치하고 민족사의 오욕을 밝히는 친일연구에 몰두한 것은 ‘민족사를 가장 그르친 것은 친일파’라고 한 그의 올바른 역사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숱한 자료를 뒤져서 한 장 두 장 쓴 15,000매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는 민족사에 바치는 묘비명이었다. 그의 깊고 넓은 연구 성과는 이후 친일문제와 일제침략사 연구의 밑바탕이 되었고, 일반인들에게 오욕의 역사를 드러내어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게 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선생이 가신 지 16년이 지난 2005년 10월, 화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뒤늦게나마 선생의 지난하고 치열했던 작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또한 그해 3월 임종국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1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임종국상’을 제정하여 제1회 수상자를 내었다. 아직도 친일세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엄존한 현실 속에서 선생의 유지를 널리 알리고 새로운 민족사를 열어가는 것이 선생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리라.(2006년 작성)

김민철・박광종 연구원

금, 2019/02/2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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