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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파워로서 한국의 미래적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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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파워로서 한국의 미래적 위상

admin | 화, 2020/06/09- 19:14

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한국 유수한 대학의 국제대학원에 재직중인 미국인 교수가 한국의 정치와 외교에 던진 조언의 글이다. 한반도상황과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라는 주문은 매우 고맙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의 글속에서 동아시아 역사전반에 대한 몰이해, 근대역사에서 탈아입구를 추구하며 주변국들에게 패악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은 일본에 대한 무지, 미국의 패권을 위해 일본에 면죄부를 제공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패혜와 4.3항쟁에서 저지른 미군의 범죄 및 광주민주항쟁에 보인 미국의 패착 등에 대한 묵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에 대한 악의적 폄하 등을 엿볼 수 있다. 자연스레 과연 한국의 대학에 체류하는 미국 지식인들은 우리를 돕고 있는 우인(友人)인가? 아니면 미국의 패권유지를 위한 하수인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온전히 글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다.


2020년 세계보건회의에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 체제와 과학기술에 기반한 COVID-19 대응의 성공사례를 발표하였다. 그는 동시에 인간의 안전보장(human security)에 대한 협력분야에 세계적인 지도국가가 될 것임을 약속하였다.

이는 아시아에서 미들-파워로 부상하는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반영한 사례로, 지난 시절 식민지배와 격심한 전쟁을 겪은 과거의 역사와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미들-파워’라는 것은 다자주의에 기초하여 외교적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 한국의 외교정책의 성과에 대한 표준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다만 이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아시아에 있어서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옹호하고 북한의 도전에 응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기도 한다.

미들-파워 국가로서의 한국의 위상은 자신에 대한 확신과 야망과 필요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아시아의 지정학적 어려움으로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 그리고 여전히 군사적 위협과 인권이 무시되는 레짐(북한체제)의 한가운데 한국이 처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워싱턴과 동맹은 북한을 대응하는데 필수적이지만, 지난 시기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야기시킨 것처럼 자신의 주도적 전략이 결여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서울당국은 친(親)사회적 좌표와 기구들을 통해 아시아의 미래를 형성해 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정권의 새로운 남방정책의 목표는 실재적인(physical) 것과 디지털적인 인프라를 사회기제적으로 융합하는 방식으로 아시아의 남방과 북방지역을 연결하는 것이다. 경제적 상호의존의 혜택 국가로서 한국은 이해상충의 해결방식으로 군사적 대결과 무역전쟁을 피하고자 한다.

외무장관인 강경화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웃 국가들과 사전적으로 협력을 제안함으로써, 우리는 개별국가 간의 협력이 다른 개별국가들과 협력을 확대하는 선의적(virtuous) 사이클을 형성하고자 도모한다’.

물론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는 것은 환경과 타산에 의한 수동적 기능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신감과 확신에 기초한다.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을 국제무대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진국과 개발국을 연계하는 여러 종류의 국제회의 주관하고, 산업적으로는 삼성과 현대 등의 브랜드가 부상하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K-Pop, BTS 그리고 기생충과 같은 영화가 한국의 지위를 알려준다.

동시에 해외협력기금(ODA)와 유엔평화유지군 등에 유의미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도전을 받고 있는 아시아의 질서유지에 주도적인 미들-파워 국가로서 다음의 3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일본과 과거사에 대한 대립이 미들-파워 외교라는 에너지의 공급에 주기적으로 정전(停電)사태를 야기한다. 독도분쟁과 불충분한 과거사의 화해, 전쟁(강제노동) 보상 등 반일본의 정서가 미들-파워의 위상에 걸림돌로 돌출한다.

한국의 주요 언론매체들은 일상적으로 일본군사주의의 위협을 과장하고 도쿄당국과 협력의 중요성을 간과하면서, 한국이 지역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미사일방어 등에 대한 정보 교환, (북한의) 제재의 기피와 수출통제의 위반에 대한 확인, 항해의 자유보장과 재난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에 대한 협력 가능성을 제한한다.

두 번째, 한국의 자유민주적 가치는 중국을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에 입각한 현실적 외교정책과 가끔 충돌을 한다. 한국당국은 평양과 외교적 접근은 북경을 경유한다는 믿음 때문에 때때로 가장 주요한 무역 파트너이자 강력한 이웃(중국)에 대하여 차별화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은 신장과 홍콩의 인권 상황과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착취당하거나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보이는 팽창주의, WTO 규칙의 준수여부, 그리고 일대일로가 국제적 규범을 지키는지 여부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

세 번째, 국내의 정치적 대립이 외교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양당체제 하에서 전임의 두 대통령이 감옥으로 보내졌고, 국회는 입법과정에서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는 실제적 전장터이다.

단임의 5년제 대통령 임기와 불안정한 정당정치 때문에 북한과 주변 이웃국가들에 대한 정책이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이러한 내부의 균열로 인해 외국의 개입전술에 쉽게 노출되고, 성과있게 운용되는 정권이라도 외교정책에서 자원할당의 주도권을 행사하기에 비효율적이며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대치적 정치상황이 정치적 지도력에 제한을 가하면서, 이념적 경쟁의 주변국가들에 대해 주도적 우위를 취하기보다는 주어진 법적 규정을 수동적으로 따르게 한다. 한국의 외교정책은 민주적 절차와 국가이익에 대한 전략적 사고를 갖추기 위해 투명성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북한과 평화경제를 추구하기 위해 일본과 결별한다는 정책적 오류(fantasy)를 피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그리고 인권상황, COVID-19 팬데믹의 위기극복, 미국 미사일시스템의 한국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 등에 대하여 일관된 정책이 요구된다.

미들-파워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한국은 워싱턴과 동맹을 강화하고 북경과 평양과의 관계를 조정해가는 가운데 제로-섬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의 방위비 분담 요구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면서 중국과 북한을 자극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동맹의 의무라며 국제적 질서유지에 기여하는 것보다, 패권국가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자유무역을 증진하고 기후변화를 완화시키는 소소한 분야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아시아 내에 새로운 협력기구를 창립하면서 이념과 역사의 갈등에서 외교정책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지역 내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합의에 의한 한반도 통일에도 다가갈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MIKTA(Mexco, Indonesia, S. Korea, Turkey & Australia) 협력기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운 남방정책에 있어서도 인도를 결합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또한 지역역량의 증대를 위해서 동반자 국가들인 호주와 아세안과 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미들-파워 외교를 통하여 한국의 위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강화할 수 있고 다른 국가들과 국제적인 협력의 가치를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EastAsiaForum, 2020-05-27.

Leif-Eric Easley

이화여자 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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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미중 간의 신냉전적인 대결구도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아래의 칼럼은 일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긍정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해도, 첫째 서구제국의 백인우월주의 시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둘째 수천 년의 역사적 경험과 중국인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기반으로 출범한 중국공산당의 체제를 레닌 또는 스탈린 체제의 수준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여전히 패권적 국제질서를 옹호하면서 팩트를 과장하고 왜곡하는 미국지식인의 자기도취적 한계를 보이고 있다. 100년 역사의 중국공산당은 당주석 개인의 독재가 아닌 대중들의 풀뿌리 참여와 현안에 대한 실사구시적 절차 그리고 인민집중적 당중심의 권력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Xi Jinping은 소명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2012년 말에 집권한 후 그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고, 중국공산당(CCP)의 만연한 부패를 제거하고, 상대를 제압하고, 중국의 첨단기술 및 금융 대기업 집단을 길들이고, 내부의 반대를 억제하고,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학대하려는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중국의 “핵심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진핑은 자신의 이웃국가들과 적대적인 국가, 특히 미국과의 대결을 택했습니다. 그의 전임자들은 중국이 급속한 경제성장과 기존 세계질서에 대한 전술적 타협을 통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확대해야 한다(韜光養晦)고 믿었지만, Xi는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참을성 없이 성급하게 국제질서에 도전(新型大國)을 시도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서두르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정반대되는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진핑이 중국공산당에 유리한 조건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광범위한 정책의 이니셔티브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견해는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삐걱거리고 낡은 레닌주의식 정치체제를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불안한 감독자라고 주장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진실의 부분적 요소를 포함하지만 Xi의 긴박감에 대한 배경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보다 정확한 설명은 Xi의 계산은 자신의 열망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타임라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Xi는 10년에서 15년이라는 짧은 시간의 기간 동안 중국이 일련의 중요한 기술 및 지정학적 변화를 활용할 수 있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좁은 시야로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으로 광대한 권력을 통합하려고 시도하면서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Xi는 “한세기 만에 진행되는 심오한 변화”라고 칭하면서 심각한 인구통계학적 역풍, 구조적 경제침체,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 그리고 미패권이라는 글로벌 권력의 전환시기를 인지하면서 이에 대한 즉각적이고 대담한 대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에서 15년이라는 연한으로 미래비전의 기간을 설정함으로써 Xi는 중국의 고질병같은 국내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수준의 글로벌 중심국가로 도약하기 위하여 중국 정치시스템에 집중과 결단력을 심고자 합니다. 시진핑의 기획이 성공하면 중국은 떠오르는 다극화 시대의 중심국가로 자리매김하고 경제는 소위 중간소득의 함정에서 벗어날 것이며 제조업과 군사의 기술력은 선진국의 기술에 필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야심적인 기획과 이를 실현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시진핑은 이제 중국을 위험한 궤도에 올려 놓았는데, 이는 그의 전임자들이 마오 이후에 성취한 업적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이 경제를 이끌어야 하고 정부가 민간부문을 통제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중국의 미래경제 성장을 제약할 것입니다. 당간부들에게 이념적 정통성을 고수하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을 보여 달라는 요구는 국가 거버넌스 시스템의 유연성과 역량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국가안보에 대한 광범위한 규정에 대한 그의 강한 요구는 국가를 더욱 내향적이고 편집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입니다. 고삐풀린 그의 민족주의적인 “늑대전사” 전술은 더욱 공격적이고 고립된 중국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국 정치체제 내에서 Xi의 확고한 유일의 위상은 정책대안과 진로수정의 가능성을 봉쇄할 것입니다.

Xi는 자신이 과거역사의 황제들처럼 중국의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오만함을 자신감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아무도 감히 그에게 달리 조언하려 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편협한 심성을 지닌 유일한 지도자가 불편한 진실을 들을 수 없는 정치환경은 재앙으로 들어서는 길입니다.

돌이켜보면 Xi의 성급한 타임라인은 임기의 초기부터 명확했습니다. 그동안 중국은 그의 전임자인 신중하고 안정된 후진타오의 느린 속도에 익숙해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진핑도 경제개혁에 중점을 두면서 선임자를 따라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2012년 집권을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Xi는 국내정치 및 경제환경을 전혀 다르게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중국공산당 내의 전면적인 숙청이 이루어졌습니다. Xi 이전의 중국공산당은 국내의 여러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반복적으로 보여 주었지만, 시스템 내부에 모순이 심각하게 누적되었습니다. 부패가 만연하여 대중의 불만과 조직규율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당의 조직규모는 빠르게 확대되고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의 예외주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개인들로 충원되어 왔습니다. 국영기업 내의 핵심당원 조직 그리고 민간기업과 비정부 조직들은 수수방관의 상태에서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상급단위의 의사결정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여 고립되었습니다.  선전기관들은 냉소적인 시민집단들에게 당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Xi의 등장으로 상기의 모든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었습니다. 2013년 일년 내내 전면적인 반부패 운동을 시작했고, 대중담론에서 정치적 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을 제거하기 위한 ‘대중노선 ‘의 캠페인을 시작했으며, 당원의 무조건 충원을 제한하는 새로운 지침을 발표했으며, 당원이 되기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자격요건을 추가했습니다. 진정한 신념을 지닌 당원들로 구성되지 않는다면 공산당의 조직규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위기에 처했을 때 “인구비례적으로 소련공산당의 규모가 중국공산당보다 컸지만, 문제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Xi는 지적합니다.

시진핑의 다음 의제는 세계무대에서 중국의 이익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Xi는 신속하게 남중국해에서 인공섬의 매립(건설)을 시작했고, 동중국해 분쟁지역에 대한 방공식별 구역을 구축했으며, 신개발은행(BRICS 은행이라고도 함)의 출범을 도왔으며 대규모 국제인프라 프로젝트인 일대일로BRI를 발표했습니다. 연이어 이를 지원하기 위한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도 제안했습니다.

Xi는 임기 5년의 전반기 동안 현상유지의 관례를 계속 흔들어댔고, 후반기 5년의 시한이 끝나가고 있음에도 이러한 활동의 강도를 줄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권력통합 노력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국내에서 정치적 라이벌과 어려운 경쟁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임기제한을 제거했으며 주요 직책에 자신의 충성파들을 배치했습니다. 당의 교육센터는 그의 글과 연설을 연구하는데 전념하고, 당 관리들은 그의 지혜와 미덕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며, 당규정과 정부계획 문서는 점점 더 “시진핑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사회와 경제생활의 방대한 영역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우위를 주장했으며 심지어 영향력있는 비즈니스 및 기술분야의 거물들에게 당에 대한 충성도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이를 강요하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외부관찰자들은 당이 COVID-19 발생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중국 시스템의 약점이라고 믿습니다만, 이후 2020년 여름까지 Xi가 주도한 전염병의 국내확산을 제어하는 중앙집중식 통제의 장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정치적 권위를 훼손하는 것과는 별도로 중국의 바이러스 퇴치에 대한 철통같은 접근방식은 이제 중국의 국가적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Xi의 신속한 개혁의 속도는 지정학적, 인구통계학적, 경제적, 환경적, 기술적 변화의 수렴으로 가능했습니다.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 파생할 수 있는 위험은 매우 위협적일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개혁의 성과와 변화는 괄목할만한 것입니다.

첫 번째 주요 변화는 서방의 권력과 영향력이 가속적인 쇠퇴국면에 접어 들었다는 베이징의 평가이며, 결과로 다극주의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중국이 원하는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였으나 실패하면서 확인되었고 미국의 세계적인 명성에 대한 골칫거리였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중국지도부의 입장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미국과 더불어 서방진영이 쇠퇴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지도력이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2035년이면 82세를 맞이하는 Xi의 수명연한에 대한 염려로 인하여 서방진영의 퇴조를 그저 방관하면서 바라만 볼 수 없다는 것이 북경당국의 현재 입장입니다.

시진핑이 직면한 두 번째 중요한 과제 현안은 중국의 인구통계 및 경제전망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취임할 때 이미 중국의 인구는 고령화와 감소를 동시에 겪고 있었고, 중국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의료 및 연금 시스템에 의존하는 은퇴자의 급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회 과학아카데미는 현재 중국인구가 2029년에 정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중국인구가 세기 말까지 거의 50 %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2016년에 이미 예외없는 1자녀정책을 종료했지만 지난 12개월 동안 출산율이 15 % 감소했습니다. 중국정부는 2033년까지 인구의 3분의 1이 60세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더하여 중국의 노동력 감소에 따른 임금상승이 이루어지면서 2005년 이후 평균 10 % 증가했습니다. 높은 급여는 근로자에게 좋은 일이지만 글로벌 제조업체는 중국에서 저비용 국가로 사업을 옮겨가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의 저숙련 노동자는 점차 실업자 혹은 임시취업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노동력의 12.5 %만이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미국의 24 %에 비해), 중국의 현재 노동력으로 미래의 고숙련 일자리에 대한 수요를 채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걱정스러운 인구통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중국경제의 둔화입니다. 연간 GDP 성장률이 2007년의 최고14 %에서 오늘날 한자리 수 중반으로 떨어짐에 따라, 중국이 양탄자 밑에서 숨겨왔던 고질적인 문제 중 상당수가 현재화되고 있으며, 빚을 지고 있는 기업을 포함하여 대부분 기업과 개인이 국가의 세금금고에 더 많이 지불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포함하여 이제 경제적이며 정치적 고통을 받아들일 의지가 필요합니다.

중국의 성장문제의 핵심은 생산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등소평의 개혁 이후 처음 수십 년 동안 계획경제가 해체되고 시장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도시와 해안지역을 찾아 고향인 시골을 떠나면서 보다 높은 수준의 생활을 약속했기 때문에 생산성 향상을 실현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외국기업들이 투자와 기술노하우를 중국 국내에 도입하면서 산업효율성은 지속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프라, 특히 도로와 철도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여 연결성과 생산성이 향상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빈곤하고 주로 농업 경제가 선진 경제를 빠르게 따라 잡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진핑이 권력을 잡을 무렵의 정책입안자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한 것처럼 지속불가능한 수준의 부채를 창출하지 않고 추진력을 유지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중국은 이미 교통인프라가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추가 1마일의 도로 혹은 고속철도의 건설은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유능한 노동자들이 이미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에 노동력을 재배치한다고 해서 생산성 저하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이전성장 패러다임으로 사회적 및 환경적 비용은 지속 불가능하고 불안정해졌습니다. 엄청난 대기오염과 환경파괴가 중국 시민들 사이에서 극심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Xi의 임기 중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아마도 인공지능, 로봇공학 및 생물 의학 공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일 것입니다. Xi는 이러한 새로운 도구의 “엄청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중국의 경제, 군사 및 지정학적 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으며 중국을 첨단기술 강국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당을 동원했습니다.

여기에는 반도체에서 배터리에 이르기까지 국가 안보에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기술에 대한 국가의 R & D 및 생산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지출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Xi가 2014년에 언급했듯이 선두의 영광은 “과학과 기술 혁신의 소를 잡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Xi는 또한 새로운 기술이 공산당이 중국의 거의 모든 국내 문제를 극복하거나 적어도 우회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감소하는 인구의 부정적인 영향은 자동화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로 약화될 수 있으며 전통산업의 일자리 손실은 새로운 첨단기술 부문의 기회로 상쇄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국제무대에서 입지를 굳히고 ‘중산층의 함정’을 넘을 수 있는지 여부는 과학기술 혁신역량의 향상에 크게 좌우됩니다.”

새로운 기술은 다른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얼굴인식 도구와 인공지능은 중국의 내부 보안기관에게 시민을 감시하고 반대의견을 억압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합니다. 당의 “민군융합” 전략은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여 중국군대의 전투능력 을 크게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녹색기술의 발전은 경제성장과 오염저감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합니다. 중국은 일반적으로 긴장 상태에 있는 상기의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의 수렴은 2012년에 누가 중국에서 권력을 잡았는지에 관계없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지도자도 비슷하게 대담한 의제를 수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중국 정치인 사이에서 시진핑은 관료적 내부갈등에 대한 독보적인 역량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중국공산당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다.

중대한 변화를 추진하기 위해 시진핑은 중국공산당의 권력과 권위의 대폭적인 강화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축을 직접 감독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당권력의 강화를 넘어서는 시진핑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아마도 광범위한 국가안보 재정의 증액일 것입니다.

그는 2014년 초 ‘종합적인 국가안보 개념’을 옹호했으며 지난 4월 연설에서 중국이 ‘역사상 가장 복잡한 내부 및 외부의 위협 요인’에 직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비록 이것이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지만 – 한국에서 미국과의 전쟁, 1950년대 후반의 전국적인 기근이 더 복잡했지만 – Xi의 정치 체제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위험과 불확실성의 새로운 시대에 당이 전면적으로 맞선다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의 오랜 피신의 경험(연안정부), 쿠데타 시도, 외부 인사들에 의한 전복은 마오 쩌둥 시대에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문화혁명의) 극심한 편집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Xi는 이러한 편집증적인 스타일을 제도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내부 안보와 외부 위협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위협에 대한 과장입니다.

범죄율이 낮고 위험도가 낮은 지역의 당간부들도 테러리즘, “칼러혁명” 및 “기독교침투”를 경고합니다. 신장에서는 분리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전체지역을 디스토피아적인 첨단감옥으로 바꾸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홍콩에서 Xi는 중국의 철권통치에 대한 위협을 걸러내면서 현지의 법규를 무시하고 완전한 비밀로 운영할 수 있는 “국가안보” 관료제를 설립했습니다.

국내에서 시진핑은 중국을 외부의 적들에게 둘러싸여 포위당하는 것으로 짜맞추고, 과거에 대한 깊은 감정적(그리고 매우 왜곡된) 견해를 이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에 대한 중국의 투쟁과 미국에 대한 “승리(한국전쟁)”를 낭만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합니다. 중국이 ‘적대적인 외세’의 위험이 높아진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경고로 시진핑은 중국 시민들이 앞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한 생각을 수용하고 당과 Xi자신이 안정세력으로 인식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이 세계정세에서 퇴각하는 동안 이러한 기회의 창을 활용하기 위해 중국은 여러 외교 정책전선에서 공격적으로 전진했습니다. 여기에는 남중국해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기 위해 상업용 어선을 사용하고 지부티에 중국최초의 해외 군사기지를 설립하는 것과 같은 “회색 지대” 전술이 포함됩니다. 중국의 광대한 국내시장은 시진핑이 COVID-19를 유발하는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를 요구하는 캔버라의 요청에 대응하여 중국이 최근 호주에 대한 경제 강압 캠페인을 통해 입증된 바와 같이 정치적 외교적 순종을 보여주지 않는 국가를 위협할 수 있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시진핑은 중국을 비판하거나 적대하는 상대국가를 협박하고 괴롭히는 “늑대전사” 외교관을 장려했습니다.

마오 쩌둥과 덩 샤오핑은 글로벌 무대에서 중국의 이익을 주장하는데 전략적 인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실제로 마오는 닉슨 미국대통령에게 중국이 대만을 되찾기 위해 100년을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고, 덩은 50년의 지방자치 기간이라는 약속을 제시하며 홍콩반환을 협상했습니다. 두 지도자는 중국의 상대적 취약성과 신중하고 미묘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Xi는 평정심이나 장기적인 해결책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는 시진핑이 인민해방군 창립 100주년인 2027년까지 대만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해 매우 위험한 도박을 시도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 일으킵니다. 물론 그가 중국해안선에서 불과 110 마일 떨어진 섬때문에 미국과의 군사적 갈등을 불러 일으킬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대만의 점령시도는 Xi의 다른 글로벌 및 국내의 야망을 거의 모두 소진시킬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시나리오는 당분간 가능성이 낮지만 Xi는 계속해서 이웃국가들에게 중국의 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외부를 향하도록 할 것입니다. 수많은 현안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임기 안에 해결을 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미래의 궤적 과정을 정확히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 Xi의 경향은 미래의 어느 영역 혹은 가장 작은 편차조차도 ”단기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버리고 미리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 행위자들에 의존하는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것은 중국의 기술혁신에 대한 중국의 접근방식을 형성하기 시작했을 때 전임자인 후진타오의 임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선호되지 않았던 경제운용의 도구인 산업정책에 대한 당의 개입이라는 Xi의 선택이었습니다. 2015년은 주어진 기술이나 산업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의 전체 구조를 재편하려는 초대형 산업정책 프로그램의 도입과 함께 중요한 변곡점의 시기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주요부문에서 중국의 제조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Made in China -2025 계획이 포함됩니다. 보다 전통적인 산업에 정보기술을 통합하는 계획인 Internet Plus 전략; 그리고 중국의 외국기술 도입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야심찬 의제를 설명하는 14차 5개년 계획, 이러한 정책을 통해 베이징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업, 기술 및 부문에 수십 조 위안을 투자하여 왔습니다. 직접 보조금, 세금환급, 준시장적 “정부지원기금”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는 마치 국가가 통제하는 벤처캐피탈 회사와 유사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분야에서 베이징의 실적은 확실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막대한 투자 금액이 적은 수익을 가져 왔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자 Barry Naughton이 경고했듯이 “중국의 산업 정책은 너무 크고 새롭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이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성공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비참하게 귀결될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산업 정책과 관련하여 중국의 민간부문 기업에 대한 Xi의 접근방식은 불과 몇 년 전 관측통들이 정치 및 사회변화의 주체로 간주했던 많은 기술 및 금융 거대기업 들을 포함합니다. 기술혁신으로 인해 Ant Group 및 Tencent와 같은 회사들은 중요한 새로운 데이터 흐름과 금융기술을 제어할 위치에 있으며, Xi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는 위협으로 인식합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최근에 Ant Group의 초기공모에 많은 지금이 모여든 상황에서 당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인식한 설립자 Jack Ma의 발언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Xi는 당의 이익을 보호하고 비즈니스 엘리트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중국의 재정적 명성이 국제사회에서 훼손되는 것을 기꺼이 수용할 것입니다. 당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국의 명목상 민간기업과 정치체제 사이의 긴밀하고 지속적인 연결을 고려할 때 가족불화에 더 가깝습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가 대부분은 중국 공산당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많은 기업의 성공여부는 외국 경쟁으로부터의 보호를 포함하여 당사자의 호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중국지도자들은 민간 부문에 넓은 권한을 부여했지만 Xi는 강력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의 혁신 능력이 더욱 제한되었습니다. 베이징의 규제기관과 국가투자자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지속적인 혁신과 생산성 향상은 활기찬 민간부문 없이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이점을 포착하고 국내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Xi는 15년의 게임에 자신을 바치고 있습니다. 게임의 성공을 위해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명령시스템의 놀라운 기능을 동원했습니다.  Xi의 압축된 타임라인은 베이징의 정책 의제, 위험허용 및 타협하려는 의지를 규제하는 긴박감을 야기합니다.

미국은 미국사회의 회복력을 강화하고 미국정부의 역량을 향상시킴으로써, 민주주의가 위축되고 워싱턴의 역량이 약화되고 있다는 중국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혁신과 인적 자본에 투자한다면, 신흥 및 핵심기술에서 선점 우위를 확보하려는 Xi의 노력을 막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질서를 형성하는데 있어 보다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미국의 역할은 자신의 국경 너머로 불법적인 이념을 전파하는 중국의 능력을 제약할 것입니다.

시진핑이 권력을 잡기 이전의 중국공산당은 규칙적이고 평화로운 권력전환을 위한 예측가능한 과정(格代指定)을 수립했습니다. 내년 가을에는 제 20차 당대회가 열리며, 이에 따르면 시진핑은 차기지도자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Xi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기대는 없습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 자체뿐 아니라 중국의 미래에도 매우 위험한 현상입니다. 후계자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시진핑이 향후 10년 안에 예기치 않게 사망하면 중국은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시진핑이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 건강이 유지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의 임기가 오래 지속될수록 중국공산당은 마오 쩌둥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인격(우상)숭배가 수없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분명해졌고, 중국의 정치계급 사이에 눈에 띄는 획일성은 이제는 표준이 되었습니다. “시진핑 사상”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조차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외부인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주요한 의사결정의 질과 당내 정보 흐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칩니다.

당과 국가를 구하려는 사명을 가진 지도자 시진핑이 오히려 이들 모두를 위태롭게 했다면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일 것입니다. 그의 현재 과정은 지난 40년 동안 중국이 이룩한 위대한 전진을 되돌릴 위험이 있습니다.  Xi의 판단처럼 향후 10년이 중국의 장기적인 성공을 결정하는 매우 중차대한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진핑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출처 : Foreign Affairs(포린어페어) on 2021-06-25.

Jude Blanchette

캘리포니아 대학의 21세기 중국연구소 책임자를 역임했으며, 현재 미국전략연구기관인 CSIS의 중국연구센터 비상임 의장을 맡고 있다

수, 2021/07/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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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해야 우리는 국회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인가?

‘국회’라는 말이 나오게 되면 누구든지 목소리를 높여 맹비난한다. 모든 사람들이 국회를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긴급하게 개혁할 대상 1호로 지목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 모두의 ‘사고뭉치 국회’를 과연 어떻게 개혁해나갈 것인가의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정작 명쾌한 방안이 없이 수십 년 째 “그 밥에 그 나물”, 도돌이표 레토릭일 뿐이다.

국회 개혁, 이제 추상적이고 원론적이며 환원론적 논리는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야 한다. 국회 개혁의 진실을 분석하고 실제적인 해결 방안을 도출해내야 한다.

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쉬운 예를 들어보겠다.

학생의 본업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수업, 즉 학습이다. 그런데 만약 학생이 수업을 하지 않고 대리 수업을 한다든지 대리 시험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은 학생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학습과 수업을 하지 않고서 나가서 연애나 하고 패싸움하고 게임하고 놀 수밖에 없다. 패싸움 금지규정을 만들어본들 막을 수 없다. 수업을 하지 않고 시간이 남고 남아돌아서 날이면 날마다 패싸움하고 연애하고 게임하는데, 예를 들어, 패싸움금지법, 연애금지법, 게임금지법 등등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본들 그것들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또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학생을 선발해본들 학생이 수업을 하지 않는 그 본질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발된 그 좋은 학생들도 수업을 안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교사를 초빙한다고 해도, 수업을 하지 않는 그 자체를 고치지 않고서 왜곡된 이 상황을 결코 바꿀 수 없다.

동일한 논리로 나는 오늘 국회 문제의 핵심이 바로 국회가 국회의 본분, 즉 입법을 국회의원들 스스로 하지 않고 ‘방기’ 혹은 ‘피동적으로 배제’된 데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 국회처럼 이렇게 입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또는 ‘소외된’ 의회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입법이야말로 의회의 본령이고, 이 본령을 방기한다면 그것은 이미 의회가 아니다.

 

인식하지 못하면,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해내지 않고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의욕에 넘치는 국회의원을 선출해본들 모든 국민들이 바라마지 않는 ‘좋은 국회’, ‘신뢰받는 국회’로 발전할 수 없다. 그렇게 ‘입법’을 방기하는 객관적 조건을 바꿔내지 않는 한, 그 어떠한 좋은 선거법에 의해 좋은 인물을 선출해도 ‘좋은 국회’, ‘좋은 국회의원’이 나올 수 없다.

지금 ‘국회 문제’를 말하면, 모두 입을 모아 “지긋지긋한 정쟁(政爭)의 종식”을 말하지만, 의원들이 자신들의 본업인 ‘입법’에 몰두한다면 솔직히 ‘정쟁’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국회 문제의 ‘진실’이다.

 

일하지 않는 국회의 숨겨진 진실

얼마 전 국회의 한 의원실에서 ‘검토보고서’가 처음엔 찬성 취지였다가 중간에 부정 취지로 바뀌는 바람에 법안 통과가 무산되자 의원이 수석전문위원을 의원실로 불러 문제를 제기하던 중 보좌관과 입법조사관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빚어져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건은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들의 깊은 불신의 영향으로 “국회의원의 갑질 사건”으로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사실이 있다.

해당 사건에서 수석 전문위원은 항의하는 보좌관의 태도를 문제 삼아 “건방지다”라고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은 그야말로 “갑중의 갑”으로 통하는 위상이다. 그런 ‘높으신’ 국회의원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국회의원을 보좌하는 보좌관에게 “건방지다”라는 말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듯, 국회 수석전문위원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수석전문위원의 힘이 얼마나 센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 ‘검토보고서’가 바뀌는 바람에 결국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하고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국회의원과 전문위원 중 과연 누가 입법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국회의원은 국민이 선출하여 입법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것이 곧 대의민주주의다. 그렇다면 국민이 입법권을 부여하지 않은 국회 전문위원은 어떻게 하여 이렇게 “국회의원보다 더 큰” 입법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전 시기에 기업들은 재경부(지금의 기획재정부, 기재부)에 로비를 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회에 로비를 한다. 기재부 관료에게 해봤자 다시 국회의 문턱에서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시 반전이 존재한다. 바로 국회에 대한 로비에서 그 로비의 대상이 국회의원이 아니라 바로 ‘국회 전문위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국회 전문위원은 각종 법안만이 아니라 예산 심의에 대한 검토보고 권한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회 공무원인 예산결산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에게는 장관들이 머리를 숙이고 부탁한다. 나아가 국정감사 때 피감기관을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가히 무소불위 ‘권력의 핵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국회 주변에서는 “(국회공무원인) 수석 전문위원이 초선 의원 5,6명을 합한 것보다 힘이 세다”라는 말이 널리 퍼져있었다.

“일하지 않는 국회”, 이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지금 우리 국회는 국민들의 불신 대상 1위다. 하지만 국민들은 비록 그렇게 불신을 받는 국회지만 입법이라는 본연의 업무는 미흡하지만 그럭저럭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입법이라는 의회의 본연의 직무 수행에 있어 우리 국회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왜곡과 비정상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나마 국회의원은 국민들이 싫어할 경우 투표로써 심판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 뒤에 가려져 국민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권력 ‘국회 전문위원’은 알려지지 않은 숨은 권력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본업인 입법에서 분리된 국회의원

오늘의 우리 국회를 명실상부 국민 의사를 대표하는 기구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아마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국회는 정확하게 민의를 반영하여 올바르게 구성되어 있을까? 그러나 한마디로 유권자의 민심은 국회 의석수에 정확하게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과반이 넘는 표가 사표(死票)로 되고 있고, 18세 청년들의 투표권은 계속 거부당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정당 득표율에 따라 국회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철저히 저지된 채 거대 정당들의 독과점 체제만이 군림하고 있다.

오늘 우리 국회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그야말로 첩첩산중 쌓여있다.

이 시점에서 과연 어떠한 문제부터 풀어야 이 국회를 바꿔낼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 것인가?

시민운동은 이제까지 국회의원에 대한 평가에서 입법건수 발의를 기준으로 삼아왔다. 이는 한 마디로 방향 착오다.

흔히 법률안에 대한 ‘검토보고’라고 하면 당연히 국회의원이 그 책임 주체가 되어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회에 소속된 공무원들이 검토보고의 ‘준비’와 그 ‘발언’까지 모두 담당한다.

우리 국회법은 제58조에 “위원회는 안건을 심사할 때 먼저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듣고”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검토보고’란 국회의원이 제출하는 법률안에 대해 국회 공무권이 ‘검토’하는 것으로서 예·결산에 대한 검토도 모두 그들의 몫이고 권한이다.

사실 국회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된 현실에서도 국민을 위해 진정성 있게 열과 성을 다하려는 국회의원이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재의 국회 입법과정에서 의원 개인이 높은 의욕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해보려 해봐도 그 역할은 대부분 입법발의의 단계에서 끝나게 된다. 결국 현 국회는 근본적으로 의원의 의욕과 능력이 발휘될 수 없는 구조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아무리 똑똑하고 열의에 불타는 사람이라도 사실상 할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어느 누가 국회의원이 되어도 예외 없이 모두 아무 탈 없이 임기를 무사히 채울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한 지인은 초등학생을 국회에 갖다놔도 충분히 국회의원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유치원3법’이나 ‘김용균법’ 등을 둘러싸고 의원들이 갑론을박, 거칠게 논란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의원들이 입법을 주도한다고 쉽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빙산의 일각’처럼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로 부각된 극히 일부 법안에만 해당될 뿐이다. 왜냐하면 현재 국회 입법은 법안 발의 그 단계에서 의원들의 개입은 사실상 종결되기 때문이다. 대다수 법안들은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법안 검토부터 모두 철저히 입법관료들의 손으로 넘어가 처리된다.

그리하여 결국 국회개혁의 핵심은 바로 국회의원들과 ‘분리’된 국회의 본업, 즉 입법 활동을 다시 ‘복원’하여 결합시키는 것에 있다. 즉, 입법의 전 과정을 국회의원이 그 ‘검토’부터 모두 ‘직접’ 수행하는 것이다.

화, 2020/01/14-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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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소련과 러시아

1) 소련 붕괴 25주년

1989년 12월, 미국과 소련은 정상 회담을 통해 “냉전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미국은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을 종결짓겠다고 했고 소련은 핵무기 감축에 동의했다. 개혁과 개방이라는 소련의 새로운 대외 정책이 가져온 결과였다.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앞으로 동유럽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였고, 소련 내에서도 공산당 이외의 정당을 허용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겠다고 약속하였다.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유럽 모든 국가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였다. 공산당 정권은 무너졌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형태로 독일이 통일되었다. 1991년에는 소련이 러시아를 비롯한 14개 공화국으로 분리되면서 세계 최초 사회주의 혁명(1917년)을 통해 형성된 소련이 7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1년 12월 25일. 소련연방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사임 연설이다.

“독립국가연합이 창설됐기 때문에 저는 소련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을 마칩니다.“

단 한 장의 간단한 성명서와 함께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르바초프

1991년 말,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브추크, 벨라루스 대통령 스타니슬라우 슈슈케비치가 한자리에 모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그해 8월 모스크바에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난 뒤 소련 공산당은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그 권력과 특권도 붕괴되었다.

옐친에게 소련과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불편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전자를 없애면 후자도 자연히 따라서 사라지게 되며, 러시아 연방 내에서 옐친의 권력을 확고하게 해줄 것이었다. 그는 독립국가연합(CIS)이 소비에트 연방을 대체하고 세계에서 소련이 차지해왔던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공화국 대다수, 특히 우크라이나는 CIS가 러시아에의 종속을 끝낼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은 아예 CIS 가입을 거부하였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소련이 소유했던 힘의 상실을 아쉬워했고, 우크라이나가 영구적으로 떨어져나갔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못했다. 러시아와 전 소비에트 연방 회원국들과의 관계는 항상 불편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러시아가 자국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분노하였다. 이들 나라에 거주하는 2,500만 러시아인들은 하루아침에 외국인이 되어버렸으며, 종종 심각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러시아 연방 내에 존속한 민족 가운데 일부도 독립 투쟁에 나섰다. 1994년 체첸이 독립을 선언하자 야만적인 전쟁이 발발하였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세력이 등장하여 인종 차별적인 폭력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지금도 전 소련 회원국들은 많은 러시아인이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기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모스크바 거리2016년 12월 25일. 소련 붕괴 25주년을 맞아 필자는 모스크바 시민들을 만나 25년간의 변화와 소련에 대한 평가를 들어봤다. 상당수 러시아 사람들 특히 노년층은 옛소련에 대해 강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71살 루드밀라 쥬라블료바씨는 전직 회계사로 지금은 연금생활자이다.

그녀는 ”소련시절에는 모두가 평등했으나 지금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생겼다. 나는 즐거움과 미소, 행복함으로 소련시절을 회상한다. 우리는 빈곤하게 살았지만 서로에게 모두 친절했다. 그 친절함, 다정함이 그립다. 지금은 나쁜 일을 저지르는 사악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역시 연금생활자로 일자리를 찾고 있는 50대의 이리나씨는 ”나도 긍정적인 측면 때문에 소련시절을 때때로 그리워한다. 그 시절에는 국가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우리가 국가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 느낌은, 국가가 일부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다.“라고 심경을 털어 놓았다.

유럽부흥개발은행과 세계은행이 공동조사해 2016년 12월 14일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을 보면 옛소련시절 보다 현재의 삶이 더 나아졌다고 느끼는 러시아 사람은 전체의 15%에 불과했다. 현재의 시장경제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의 엘레나 포노마료바 교수는 ”소련이 붕괴된 후 사람들은 엄청난 부자들(super-rich)과 최빈층(super-poor), 극단적 사회 양분화는 물론 이른바 ‘신빈곤층(new-poor)’의 등장을 목도하며 고통스러워(괴로워)하고 있다. 신빈곤층이란 잘 교육받은 엔지니어, 의사, 선생님들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 낙오자가 돼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러시아 문명은 결코 돈 만으로 평가받지 않았고 세계관이나 도덕성, 사회 정의 등으로 평가받았다.“라고 역설했다.

포노마료바 교수는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제국 경영, 세계 경영 국가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제 그 힘의 상실감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젊은 세대와 구세대 모두 러시아가 피터 대제가 이룩한 러시아 제국과 같지 않다는 점을 가슴 아파하고 있다. 국제적 위상도 예전같지 않다는 점이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련을 회고하고 그때의 장점을 취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바꾸기를 원하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이 푸틴 시대 들어 ‘강한 러시아’를 추구하는 정부 방침을 지지하는 것도 이같은 배경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냉전시절 세계의 절반에 영향력을 미치던 소련은 15개 나라로 조각났지만 최근에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등 독립국가연합(CIS) 내 5개국이 ‘유라시아 경제연합(EAEU)’을 결성하는 등 경제적 통합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또 ‘위대한 러시아 재건’을 부르짖는 푸틴 대통령이 등장한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사태,크림반도 병합, 시리아 내전 개입 등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양상이다. 여기에 푸틴이 최근 전략 핵무기 강화를 연설한데 대해 트럼프도 핵 능력 확장을 언급하고 나서 미-러간 핵 경쟁이 부활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2) 사회주의 혁명 100주년

2017년 11월. 사회주의 혁명 100주년을 맞은 해에 필자는 러시아 땅에 특파원으로 있었다. 100년이란 숫자가 던지는 무게감, 사회주의 및 혁명이란 단어가 한국사회에서 갖는 복잡성 등을 안고 필자는 혁명의 도시로 향했다.

2017년 11월 4일.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100주년(7일)을 사흘 앞두고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화려한 ‘빛의 축제’가 펼쳐졌다. 1917년 10월 혁명 때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이름은 페트로그라드)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에르미타주 광장

‘빛의 축제’는 황제가 살던 겨울궁전, 즉 예르미타시(에르미타주) 박물관과 구 참모본부 건물로 둘러싸인 ‘궁전 광장’에서 펼쳐졌다. 건물과 구 참모본부 건물이 대형 스크린으로 변한 것이다. 특히 구 참모본부 건물의 외벽은 6,700m²로 축구장 면적에 해당한다.

‘빛의 축제’란 건물 외벽에 직접 영상을 투영하는 이른바 ‘비디오 매핑’(video mapping)을 말한다. ‘비디오 매핑’이란 건물이나 조형물 등을 3D로 스캔한 뒤 표면의 굴곡에 따라 영상물을 제작해 해당 외벽에 직접 영상을 투영해 미디어 기능을 구현하는 것이다.

빛축제 4월테제

구 참모본부 건물 외벽에는 1917년 혁명의 한 해가 13분 영상물로 압축돼 투영됐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는 굶주린 백성과 2월 혁명,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퇴위, 스위스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의 혁명전술 4월 테제, 그리고 10월 혁명까지… 격동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순양함 오로라호예르미타시에서 볼 때 네바강 건너편에 전시돼 있는 순양함 오로라호에서도 현란한 3D 비디오 매핑이 시연됐다. 오로라호는 10월 혁명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오로라호에서 발사된 대포 한 발은 10월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로라호에서는 1917년부터 지금까지 100년간의 역사가 압축적으로 소개됐다.

이번 빛의 축제를 총감독한 예카테리나 갈라노바는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를 재평가하고, 미래엔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빛축제 혁명

빛의 축제를 본 시민들은 대체로 혁명의 불가피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선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반응이었다. 모스크바 시민인 시스템 분석가 아나스타샤는 “나는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다. 당시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표출됐지만, 실상은 거짓이었다”라고 말했다. 연금 생활자인 루드밀라는 “이제 시대는 달라졌고 관점은 바뀌는 법이다. 혁명의 진행에 대한 많은 부분이 아직 논쟁 중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생 비카는 “최근에 황제 일가의 최후에 대해 읽었다. 혁명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황제 일가에게 벌어진 일들은 끔찍하다”라고 밝혔다. 다수의 시민들은 더 이상 혁명이나 혼란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빛축제 황제 니콜라이

어쩌면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야 말로 러시아인들이 겪는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일가는 1917년 혁명에서 총살됐지만, 소련 붕괴 후 2000년에 러시아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정치탄압의 희생양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100주년 기념 공산당 행사

혁명 100주년을 맞은 11월 7일 오후 러시아 공산당은 모스크바 중심가 거리를 행진했다. 레닌과 스탈린,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사진을 든 공산당원들이 푸시킨광장에서부터 마르크스동상이 있는 혁명광장까지 행진하며 혁명 100주년을 기념했다. 행진에는 이탈리아·스페인 등 80개 나라 공산당·좌파 정당 대표들도 함께했다.

혁명광장에서 열린 기념집회에서 쥬가노프 러시아 공산당 당수는 “레닌과 스탈린의 20년 근대화는 우리나라의 능력을 70배 향상시켰다.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 국가는 전 세계 생산의 1/5을 생산했다. 나는 사회주의 깃발이 러시아와 전 세계에 휘날릴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연설했다. 쥬가노프는 7일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년 대선에 다시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이 5번째 도전이다.

볼셰비키의 맥을 이은 러시아 공산당은 현재 전체 450개 의석인 러시아 하원에서 42석을 차지해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당’(343석)에 이어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공산당 행진

공산당 소속 레베데프 하원의원은 혁명이 추구했던 사회주의 이념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공산당은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레베데프 의원은 “공산당은 미래를 확신한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입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일자리를 얻기 힘들고 소비에트 시절 주어졌던 각종 특혜들을 이젠 아무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대중의 30%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혁명에 대한 평가를 질문하자 레베데프 의원은 “혁명 이후 적군과 백군 간 내전이 벌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또 스탈린 독재 기간에 과도한 행동들이 있었다. 그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어마어마한 진보가 있었다. 우주개발에 나섰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규모 건설로 국민의 85%가 무상으로 집을 받았다. 이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붉은광장 퍼레이드

11월 7일 오전. 모스크바의 심장부 크렘린궁 앞 붉은광장에서는 5,000명의 군인들이 참가한 군사퍼레이드가 성대하게 펼쳐졌다. 그런데 이 퍼레이드는 혁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의 군사퍼레이드를 재현하는 ‘1941년 대독일 출정식 76주년 기념’ 열병식이었다.

모스크바로 진격해오는 독일 나치군과 전쟁 중이던 1941년 11월 7일, 소련은 군인들과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붉은광장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었다. 전제 권력을 무너뜨린 민중 혁명 대신, 나치 독일에 맞선 소련 국민과 군인들의 영웅적 애국정신을 기념한 것이다.

혁명 100주년을 맞았지만 러시아 정부 차원에선 이렇다 할 행사나 공식 성명조차 없다. 옛 소련시절에는 11월 7일을 휴일로 지정하고 붉은광장에서 대대적인 퍼레이드 행사로 혁명을 기념했다. 하지만 지난 2005년 러시아 당국은 11월 7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대신 16세기말 폴란드의 간섭으로부터 국가를 지킨 것으로 기념하는 11월 4일을 ‘국민통합의 날’이라는 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래서 올해는 11월 4일(토)부터 6일(월)까지 3일 연휴이건만 정작 11월 7일은 평일이다.

붉은 광장 행진

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은 옐친 대통령 시절인 1995년에 ‘모스크바 자유의 날’(국민통합의 날)로 이름이 바뀌는 등 수난을 겪다가 결국 2005년에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소련 붕괴 후 90년대를 집권했던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서 러시아 혁명과 ‘소련 지우기’에 나섰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소련 붕괴 이후에도 당시 최대 야당으로 정치적으로 옐친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러시아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이 컸다는 분석도 나온다.

푸틴 대통령이 혁명 기념일에 침묵하는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다. 우선 본인이 2000년 이후 17년째 장기집권 중이기 때문에 ‘혁명’이란 단어 자체가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2014년 이후 계속되는 대러 서방 제재와 국제 유가 하락 등으로 악화된 경제난에 불만을 품은 반정부 민심이 혁명기념 분위기를 타고 반정부 시위 등으로 표출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 3월 26일 야권 운동가 나발니가 주도해 전국 80개 이상의 주요 도시에서 반부패·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 이후에도 모스크바 등 대도시에서 간헐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지속되면서 푸틴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푸틴 대통령의 65번째 생일이었던 지난 10월 7일에는 그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000여 명의 시민들이 푸틴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푸틴은 또 2000년대 말부터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이끌었던 스탈린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스탈린 재평가 작업’에 열을 올렸다. 푸틴은 스탈린을 앞세워 옛 소련시절의 영광을 기억하는 러시아인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미국과 유럽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스탈린과 같은 권위주의적 통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내년 3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아직 공식 출마 선언은 안 했지만)해 집권 4기를 준비하고 있는 푸틴으로서는 이래저래 생각이 많을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혁명 100주년을 바라보는 러시아 사람들의 입장이 모호하다는 점도 이 같은 사회적 현상과 무관치 않다.

‘전 러시아 공론 연구센터’가 지난 10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10월 혁명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견해가 각각 46%로 나타났다. 즉 “누구의 관심 속에 혁명이 발발했느냐?”는 질문에 46%는 대중의 관심 속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확신한 반면, 다른 46%는 “소수 혹은 몇몇 크지 않은 단체에 의해 발발했다”고 응답한 것이다. 또 응답자의 92%는 “오늘날 러시아에 혁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레바다 여론조사 기관의 구드코프 대표는 “대다수는 혁명이 불가피했다고 인식하지만 혁명의 결과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고 평가하고 있다”며 “혁명의 이중성 때문에 여전히 러시아인들이 혼란스러워한다”고 말했다. 구두코프 대표는 “혁명은 소비에트 체제와 스탈린식 근대화, 급속한 산업화를 만들어냈다. 단기간의 변혁으로 소련을 핵무장한 슈퍼파워로 만들었고, 우주개발도 성공시켰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특권층, 관료주의가 득세하면서 결국 스탈린 독재로 이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고 말했다.

공산당 행진 속 중국인들

러시아 내부 상황이 이런데 이 와중에 혁명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를 찾는 중국인들 이른바 ‘홍색 관광’(Red tourism)이 2016년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러시아 혁명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중국의 운명도 바꿔 놓았으니 중국인들에게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의 레닌묘를 찾는 것 자체가 관광 이상의 의미, 즉 성지순례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러시아 관광 당국은 모스크바로부터 동쪽으로 약 720km 떨어진 볼가 강변의 소도시로 레닌의 출생지인 울리야놉스크에도 2017년 당시 6,000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찾아올 것으로 예상했다.

사회주의 혁명 100주년. 20세기 최대의 체제 실험은 좌절된 것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사회적 불평등과 분배의 형평성 문제 등을 제기하면서 ‘자본주의의 방부제’ 역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주장도 있다.

수, 2019/12/0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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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국인들이 지난 세기 동안 중국공산당 CPC의 놀라운 업적을 축하하고, 7월1일 목요일을 가하여 새로이 영광스러운 백년의 세기를 기대하면서, 공산당의 본래 임무에 대한 성찰까지도 즐거운 축제의 분위기로 변하여 중국대륙을 뒤덮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적 열망에 충실하고 우리의 사명을 굳건히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라는 글귀는 1921년 당의 여정으로 시작된 상하이의 CPC 제1차 전국대표대회 현장 및 전국의 모든 박물관과 유적지, 중앙과 지방정부의 축하모임 연회장소에 이르기까지, 전국 어디에서나 방문객이 줄을 서서 열광하며 제창하는 숭고한 격언입니다.

상기의 격언은 아래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1) 왜 중국인들은 출발부터 중국 공산당을 선택하여 국가를 이끌었을까?

2) 공산당은 어떻게 역사의 온갖 시험을 이겨내고 중화민족을 위대한 부흥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었을까요?

시진핑(習近平) 중앙당 총서기는 2017년 19차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 보고서를 발표할 때, 상기의 격언을 처음으로 언급했습니다. “중국공산당 본래의 열망과 사명은 중국인민의 행복과 중화민족의 부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민에 기반한 정당성 

중국이나 중국공산당에 대한 서구의 서사는 통상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를 통치하는 당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제기해 왔습니다. 서방식 자유주의 정치사상은 중국의 정치체제에는 ‘서구의’민주주의’ 기준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고 따라서 중국의 정치체제가 국민의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가정합니다 “서양식 1인1표 선거와 다당제도 없이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인민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중국은 오래 전에 거의 모든 종류의 서구 정치체제를 연구하고 시도했습니다. 청나라 말기(1644-1911), 외세와 식민주의의 침략에 맞서 끝없는 국내혼란과 굴욕적인 실패로부터 가난하고 약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중국의 정치 엘리트와 혁명의 선구자들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아나키즘, 파시즘을 포함한 많은 서구 정치사상을 시도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소비에트혁명이 일어난 1917년 10월 이전에 이미 마르크스주의도 중국에 도입되었습니다.

상하이 푸단대학교 중국연구소 소장인 Zhang Weiwei 교수는 “우리 조상들은 외부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며 “입헌군주제에서 다당제,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까지 모든 것을 시도했지만 불행히도 이들 중 어느 것도 중국자신이 스스로 보호하고 혼란을 끝내는 데 효과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택 중 어느 것도 대다수 중국인민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가 결국 최종선택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을 당시는 겨우 50명 내외의 당원과 대의원 1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즉, 중국적 특성과 융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에는 한가지 매우 독특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인민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마오 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1세대 지도부의 창의적인 탐색과 혁신 덕분에 중국공산당은 혁명의 주도세력에 농민을 포함시켰습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 약 80-90%가 농민이었습니다. 또한 불평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도시화는 도시지역에서도 엄청난 수의 빈곤층을 양산했습니다. 끝없는 전쟁과 기근에 더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혁명이론에 대한 마오의 혁신적인 공헌은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인민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맑스주의를 현지화하거나 “중국화”한 것이지만, 이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소련이 지지하는 고전적 맑스주의 이론의 정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정통이론에 따르면 혁명은 대도시에서 시작하여 도시노동계급이 주도해야만 합니다.

결국, 중국공산당 CPC는 마오 쩌둥의 지도력을 승인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고 중국화하기로 결정했고, CPC의 용감한 시도는 결국 당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던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마침내 자신들을 대변하는 대표자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역사상 농민 봉기세력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이 아니었고, 지도자들은 대부분 해외교육의 배경을 가진, 상하이와 베이징을 포함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지역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의 국방대학 Jin Yinan 교수는 최근 연설에서 “CPC는 가장 발전된 도시에서 가장 진보된 사고를 견지하였으며, 가장 발전된 지역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들을 모았다”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선진사상을 바탕으로 농촌의 전사들을 무장시키면서, 중국역사의 농민봉기와 같은 개별집단의 이기적인 이익보다,는 중국인민 모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현대적인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자력갱생의 역량

혁명시대뿐만 아니라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시대에도 중국공산당의 자력갱생 역량으로 여러 면에서 동유럽국가들의 공산당과 다른 경로를 담보할 수 있었습니다.

CPC는 격랑의 역사적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이후 산업과 경제의 세계화라는 기회를 포착했으며,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자기혁신(교정)의 실현을 통하여, 대다수의 인민이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중화민족의 위대한 잠재력을 활성화했습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CPC는 중화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이며, 이것이 바로 1949년 이전에 중국을 통치하고 태생적으로 자본가,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 봉건주의자들의 중국인민에 대한 불공정하고 불법적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관료의 이익에만 봉사했던 이전의 정치집단과 분명하게 다른 이유입니다.

“중국인민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구호 – 이것이 당 본연의 염원이며 국내외에 산적한 적들과 피비린내 나는 혁명투쟁에서 꿈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구자들이 견지해온 신앙의 힘입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은 인민에서 유래하고 인민과 공생하는 인민의 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CPC의 특성입니다. Zhang 교수는 CPC가 서구 정당과 완전히 다르며, 이들은 단지 국가내부의 일부집단 또는 특정계급, 민족단위 또는 부문의 공동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권력을 위해 투쟁하고 취약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사회를 마비시키고 양극화시키는 반면에 CPC는 중국의 모든 인민들의 총체적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입니다.”

이런 특징이 중국이 코로나-19 확산억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1인1표로 선출된 1인1표 정부와 다당제, 이른바 ‘언론의 자유’가 있는 서방은 왜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을까요? 왜 많은 서구사람들이 자신들이 선출한 정부와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온라인에서 반지성적 음모론을 퍼트리고 있을까요?

중국공산당은 초기부터 경제성장보다 인민의 생명을 우선시하였습니다. 중국이 팬데믹에서 다른 국가보다 빨리 회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중국인들 모두가 정부를 신뢰하고 과학적 지침과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했을까요? 그 대답은 이미 공산당의 역사에 나와 있습니다.

 

국가의 사명

국가는 주어진 의무를 완수하려는 열망을 입증해야 합니다.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달하지 못하면 원래의 포부와 약속은 무의미한 슬로건에 불과합니다.

사회주의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에서 선택하였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당이 결국 자국의 국민에 의해 버려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적 단계에 따라 가장 중요한 임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맹목적이고 완고하게 인쇄된 책의 교조적인 규칙을 따르거나 과거에 혁명을 이끈 올바른 이론을 버리고 현명하지 못한 서구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CPC는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상기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거나, 혹은 실수를 범하였어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30년 동안 CPC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동맹을 격퇴하고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침략의 위험”을 해결했습니다. 중국이 서구의 따돌림과 굴욕을 효과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독립자치국가가 된 것은 청나라 말기 이후 처음입니다. 세계 최강국이 쏘아 올린 미사일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침략이라도 자기 영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9년부터 현재까지 CPC는 새로운 임무가 “굶어 죽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2세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핵심인 덩 샤오핑은 ‘현명하지 못한’ 일방적 서구화를 추진하지 않고 1970년대와 80년대에 재차 용감하고 자신있게 중국식의 사회주의 이론을 혁신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CPC는 경제의 세계화를 수용하고 현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마침내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중화민족과 인민에게 경제적 기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현재의 중국은 CPC의 영도 하에 14억 인구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현대화하며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수억에 달하는 인민들의 빈곤을 퇴치하였으며 외부의 도발로부터 주권을 수호할 수 국가가 되었습니다. 세계유일 패권 초강대국의 위협에서 지역의 평화를 효과적으로 수호하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고속철도 네트워크와 가장 발전된 5G 서비스를 구축하고, 우주정거장을 운영 및 건설하고, 화성 탐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CPC는 자신의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 외에도 전세계의 많은 저변국가들, 특히 서구중심의 세계화에서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한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한 야심적인 계획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통해 중국개발의 경험과 이점을 공유하고, COVID-19 대유행 및 지구온난화와 같은 글로벌 과제에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현대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인류의 미래를 함께하는 지구촌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동아시아의 병자”로 묘사되었던 가난하고 늙고 약한 나라가 불현듯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낙관적인 예측과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불과 100년 만에 많은 분야에서 서구와 어깨를 겨누며 일부 분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이룩한 모든 성과를 통하여, 본래의 사명을 지키고 성취하며 염원을 견지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으며 이제 인민과 함께 가장 근본적이며 미래의 사명인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중화민족은 수많은 재앙 및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지만, 중국에는 “고난이 많으면 민족이 부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은 후 민족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과 희생이 무의미할 것이기에 부흥은 중국인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적이고 궁극적인 꿈입니다.

100년 전의 굴욕적인 역사는 중국이 통일, 주권, 영토보전 없이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고 평화로운 발전은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는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유혈의 고통스런 교훈을 통하여 반복하면서 중국인에게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동맹국들은 여전히 ​​중국의 발전권을 빼앗고자 하지만, 100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는 중국이 아니라 서구열강 자신들이 불안을 앉고 있는 형세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고 배우기를 거부한 많은 서방국가들은 국가부흥이 중국에 얼마나 중요한지, 왜 중국인민에게 주권과 국가통합 그리고 영토보전이 양보할 수 없는 “정치적 正道”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방국가들이 중국인들이 간직한 국가부흥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대한 국가로서의 중국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중국인을 올바르게 대하고 중국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중화민족이 100년 전에 잃었던 지위와 존엄과 영광을 되찾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혁명적 여정을 시작한 핵심의 이유이자 미래여정의 종착지이기도 합니다. 중국인민의 변함없는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반드시 달성할 것입니다.

 

출처 : 환구시보 on 2021-06-30.

Yang Sheng

환구시보의 논설위원

월, 2021/07/0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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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타인, 환경과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란 맥락에서 ‘문명’이란 용어는 대개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문명은 농업부터 경제, 거버넌스, 교육, 종교, 교통, 의학, 건축, 예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타인, 그리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라는 대안이 필요한) 현재 우리의 문명은 ‘현대문명’ 혹은 줄여서 ‘현대성’으로 불린다.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문명을 탐구한 뛰어난 학자인데, 그는 주류 제도들이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지 설명한다.

내 가정은 서구 현대성의 핵심이 사회의 새로운 도덕적 질서라는 것이다. 처음에 도덕적 질서는 몇몇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의 정신에 있는 단순한 아이디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광범위한 사회적 상상력을 형성하며 사회 전체로 퍼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 하나의 가능한 개념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도덕적 질서에 대한 이런 관점의 전환은 서구 근대성을 특징짓는 사회적 형식을 발전시켰다. 시장경제, 공공영역, 자율적인 인간이 그것이다.

테일러는 현대문명의 세 가지 명백한 특성을 강조한다. 1)우리는 상호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경제로서 사회를 상상하게 됐다. 2)우리는 낯선 사람끼리 상호관심사를 숙고하고 토론하는 은유적 장소로서 공공영역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우리는 초월적 원리에 의지하지 않고 세속에 “기초”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이라는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이런 실천과 가치는 현대인에게 너무 자명해서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연 그럴까? 현대성의 개념적 토대를 생각해보자. 이른바 현대사상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 주체를 의미와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는 전환을 감행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단지 기계로, 자연을 정신과 사고의 모험을 위한 배경으로 간주했다. 그럼으로써 세계를 “사고하는 존재”와 “확장된 존재”둘로 나눴다.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주의는 “자아”를 생각하는 주체로 특권화하는 개인주의와 쌍을 이뤘다.

개인주의는 자연스럽게 경쟁과 지배의 모델로 흘러갔다. 1649년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조건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며 따라서 지구상의 생명은 “추잡하고 짐승 같고 단순하다”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곧바로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든”(앨프리드 로드 테니슨)자연으로 해석됐다. 이런 지배의 태도가 인간 존재와 사고의 전 영역에 만연하면서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대국과 소국, 과학과 종교, 인간과 비인간, 부자와 빈자의 위계를 가져왔다. 물론 다양한 형식의 협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게 성공을 위한 더 근본적 전략이라는 공생(symbiosis)의 아이디어는 대개 배척당했다.

현대문명에서 사회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며, 유사하게 국가는 시민을 위해 배타적으로(“아메리카 퍼스트”) 존재한다. 존 로크는 그의 『통치론』 제2논고에서 국가는 재산권을 가진 (남성)시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국가의 목표는 각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이런 현대적 이상의 대변인이 됐다. 밀은 이 전통을 확장시켜,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로울 때만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의 행동은 살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직접 해를 끼쳐 국가가 규제해야 할 때까지는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게 밀의 주장이다. 개인은 공공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견해인 공동체주의는 현대적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주의를 이기지 못한다.

마침내 현대성은 스스로의 옹호자가 됐다. 이전 단계의 역사는 모두 “전(前)과학적’이며 과학시대에 비해 열등한 것이 됐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낡은 정치체제와 철학, 사회적· 정치적 조직의 형식들이 대체됐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이룬 위대한 진보는 현대성의 원리 덕분이며, 사회는 점점 좋아진다는 신념인 사회개량론이 올바른 태도로 여겨진다.

 

우리는 현대문명의 끄트머리에 있다

당연히 현대문명은 유일한 문명이 아니다. 문명의 등장은 농업 발전과 연결돼 있는데, 기원전 3000년 최초의 문명은 농업이 인간에게 잉여의 음식과 안전을 보장했을 때 등장했다. 식량안전성이 증가하면서 많은 인구가 기본적 생존을 넘어 예술이나 여가 활동 같은 다른 문제들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문명은 인구의 집적, 문어(文語), 기념비적 건축물, 고유한 예술양식, 통치체제, 복잡한 분업, 그리고 사회적 계급으로 특징지어진다. 문명들은 농업과 더불어 등장하며 무역, 전쟁, 탐험 등으로 확대된다. 대부분 문명은 다른 확장되는 문명에 합병되거나 붕괴하거나 단순한 형식으로 회귀함으로써 사라진다.

과거 문명의 범위는 산과 대양과 원거리로 인해 제한됐다. 그래서 헬레니즘 문명은 중국문명이나 마야문명과 같은 시대에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는 최초로 하나의 글로벌 문명 안에서 살고 있다.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전은 서로 다른 문명들을 갈라놓았던 지리적 한계를 극복했다. 스마트폰, 할리우드 영화, 인터넷은 군대와 전쟁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냄으로써 공유된 가치, 국가 간의 균형(혹은 불균형), 그리고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한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를 창조했다.

현대인과 현대국가는 이전에 없었던 하나의 글로벌 문명으로 함께 묶여있다. 점점 강력해지는 기술에 매혹됨으로써 소비자들은 전지구적으로 하나의 욕망과 열망 앞에 도열했다. 그 결과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은 점점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떤 군대와 예술작품, 문화적 성취도 성공하지 못한 곳에서 소비주의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글로벌 시민으로 묶어냈다. 물질적 성취에의 매혹은 거대한 자석이 돼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글로벌 소비자를 “예스맨”으로 만들었다.  “세계를 주머니에 넣는” 스마트폰은 전세계의 필수품목 가운데 하나다.

끝없는 진보라는 신화는 유혹적이다. 의약품은 질병을 물리치고 사망률은 떨어졌다. 오늘의 문제는 내일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기술이 소비자들을 위해 준비한 안락과 효율의 초입에 서있을 뿐이다. 더 큰 번영과 즐거움으로의 전진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삶은 점점 더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사람들은 원하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 돈만 있으면 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시장의 성공 덕분에 더 많은 부가 창출되고,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계속 개선될 것이다.

이런 현대성의 마술은 화석연료 덕분에 가능해졌다. 전례 없이 에너지가 풍부해졌고, 우리가 당연시하는 대부분의 기술은 엄청난 탄소를 배출함으로써 유지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구의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인 모두가 이런 문명의 변화를 지지한 건 아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가진 물건을 갈망하도록 했다. 인디아의 소농도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가졌다. 아주 외딴 마을의 주민도 서구식 티셔츠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신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오래 살수록 더 많이 소비해야 하며 지구에 더 큰 스트레스를 준다. 지구가 우리 욕망보다 먼저 고갈될 것이다. 지구 스스로 현대문명을 끝장낼 것이다. 현대의 막바지인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지난 몇 세기를 돌아보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뒤늦게야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 문명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

문명에 대한 짧은 학습의 결론은 분명하다. 앞선 모든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도 끝날 것이다. 언제 어떤 방식이 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끄트머리에 서 있는 건 분명하다. 이는 다음의 핵심적 질문을 불러온다. 현대성 뒤에 진정으로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한 문명이 올까? 인간은 현재의 문명이 막다른 지점에 이른 뒤 땅,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와 경제, 급진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지구적 붕괴를 막고 문명을 재건할 수 있을까?

 

생태학에서 상호의존성을 배워야 한다

지난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는 생태과학 분야의 폭발적인 성장을 지켜봤다. 이제 생태적이라는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 단어는 살아있는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의 사실과 더불어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자연생태계를 보존해야 하는지의 가치를 모두 담고 있다. 우리의 존재자체가 생태계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 경우 사실과 가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생태계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태계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크다. 따라서 생태계와 관련된 사실은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홈즈 롤스턴에 따르면, “어원상 ‘생태학(ecology)’이라는 말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집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뜻하며, 이는 똑같이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 우리가 사는 세계)란 어원을 가진 ‘보편적(ecumenical)’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생태학은 탹월한 상호의존성의 과학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면서 모든 과학이 보다 근본적인 법칙을 이용해 복잡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생태과학 역시 다른 과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는 과학적 성공이 생태계에서 유기체로, 유전자로, 다시 생화학, 화학, 마지막에는 가장 기초가 되는 물리학으로 이루어진 환원의 사다리를 내려가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예일대 삼림과학대학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특정 숲에서 전체 나뭇잎의 표면적을 계산한 뒤 나뭇잎들의 생화학적 처리능력의 총량을 이용해 그 숲의 진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태계 연구는 이런 식으로 환원적이지 않다.

생태계는 부분의 합보다 크고 복잡한 창발적 실재이며, 그런 복잡하고 통합적인 전체의 견지에서 개별적 유기체가 이해돼야 한다. 높은 수준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환원주의적인 설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종의 번성은 다른 종들의 번식률과 영양 수요에 달려있으며, 식물과 동물 간의 균형은 양쪽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이다. 매우 큰 유기체와 아주 작은 유기체가 상호의존의 복잡한 춤에 참여한다. 정교하게 조정된 그들의 공생적 관계는 생존확률을 높이는 협동의 형식을 보여준다. 물론 다윈 식의 경쟁이 여전히 존재하며, 자연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들이 경쟁자를 압도하고 더 많은 수의 자손들을 생식가능연령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 간의 협력이 그들의 생존과 생태계, 그리고 생태계를 이룬 다른 유기체들의 번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유기체들은 서로 외향적인 영향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내향적으로도 상대를 변형시킨다. 포유류나 썩은 나무의 배출물이 다른 종들의 먹이가 된다. 생태계 내부의 이런 풍부한 상호의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생태문명은 생태과학의 이런 통찰에 따라 만들어진 모델이다. 이것은 경제와 정치, 생산, 소비, 농업 등의 사회 시스템이 지구적 한계 안에서 재설계되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향한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은 현대의 확장, 정복, 소비 정신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며 계약, 협력, 육성 등의 정신에 기초하여 살아있는 지구와의 조화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말한다.

 

생태문명은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문명이 기존 다른 문명들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자연세계와의 관계이다. 다른 문명 형태들의 가장 큰 특징이 인간을 위한 자연의 조작인 것과 달리, 생태문명은 사람뿐 아니라 자연의 웰빙도 고려하면서 자연환경을 지속 가능하고 공생적인 방법으로 변형시킨다. 이는 원초적인 자연의 순수성으로의 회귀와 같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며, 어쨌든 문명의 한 형식이다. 생태문명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번영을 위해 사람들끼리도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것까지 포함한다.

19세기까지는 다른 모든 문명을 정복하고 제거할 수 있는 하나의 문명, 즉 글로벌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지역적 형태를 띨 때는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기에 그 위험성은 낮았다. 오늘날 지구는 최초로 과학, 기술, 국가, 전지구적 소비자들에 기반한 현대문명이라는 하나의 글로벌 문명이 지배하고 있다. 과거 다른 문명들이 그랬듯이 이 단일 문명이 사라진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미국정부는 몇몇 은행이 “파산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이 글로벌 문명이 휘청거릴 경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인류 역사에서 50번째 혹은 100번째로 다시 한번 문명변화의 율동적인 순환과정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첫 번째 북소리가 지금 들린다.

다음문명, 즉 사회조직의 다음 패턴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생태문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 “생태적”이라는 말은 유토피아적 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최소 한도로 우리의 현재 문명 뒤에 올 어떤 것을 뜻할 뿐이다. 어쩌면 다른 문명이 없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무에서 살거나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끝난 뒤에도 어떤 종류의 안정된 사회가 지속된다면, 그 사회는 지속가능한 문명이 돼야 한다. 즉 현대문명이 지금 초래하는 종류의 파괴적 손상을 피하거나 되돌릴 수 있을 만큼 환경과 충분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

제레미 렌트에 따르면, “생태문명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생각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생 에너지에 투자하고 고기를 덜 먹고 전기 자동차를 운전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전지구적인 사회적, 경제적 조직의 내재적인 틀이 바뀌어야 한다.” 현대성이 (아마 말 그대로)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그 계승자가 등장할 때, 과연 어떤 종류의 문명-어떤 종류의 세계관과 생명관–이 부상할 지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과학은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문명의 종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우리는 현대의 고통스러운 실수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일으키고, 과소비 및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초래하고, 공공선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회구조를 형성했으며,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에너지원에 의존하도록 만든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결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우리의 생태문명은 어떤 모습일까?

번역: 한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앤드류 슈왈츠(Andrew Schwartz)

미 생태문명연구소 부대표·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조교수

월, 2019/11/1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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