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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파워로서 한국의 미래적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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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파워로서 한국의 미래적 위상

admin | 화, 2020/06/09- 19:14

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한국 유수한 대학의 국제대학원에 재직중인 미국인 교수가 한국의 정치와 외교에 던진 조언의 글이다. 한반도상황과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라는 주문은 매우 고맙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의 글속에서 동아시아 역사전반에 대한 몰이해, 근대역사에서 탈아입구를 추구하며 주변국들에게 패악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은 일본에 대한 무지, 미국의 패권을 위해 일본에 면죄부를 제공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패혜와 4.3항쟁에서 저지른 미군의 범죄 및 광주민주항쟁에 보인 미국의 패착 등에 대한 묵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에 대한 악의적 폄하 등을 엿볼 수 있다. 자연스레 과연 한국의 대학에 체류하는 미국 지식인들은 우리를 돕고 있는 우인(友人)인가? 아니면 미국의 패권유지를 위한 하수인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온전히 글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다.


2020년 세계보건회의에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 체제와 과학기술에 기반한 COVID-19 대응의 성공사례를 발표하였다. 그는 동시에 인간의 안전보장(human security)에 대한 협력분야에 세계적인 지도국가가 될 것임을 약속하였다.

이는 아시아에서 미들-파워로 부상하는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반영한 사례로, 지난 시절 식민지배와 격심한 전쟁을 겪은 과거의 역사와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미들-파워’라는 것은 다자주의에 기초하여 외교적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 한국의 외교정책의 성과에 대한 표준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다만 이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아시아에 있어서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옹호하고 북한의 도전에 응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기도 한다.

미들-파워 국가로서의 한국의 위상은 자신에 대한 확신과 야망과 필요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아시아의 지정학적 어려움으로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 그리고 여전히 군사적 위협과 인권이 무시되는 레짐(북한체제)의 한가운데 한국이 처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워싱턴과 동맹은 북한을 대응하는데 필수적이지만, 지난 시기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야기시킨 것처럼 자신의 주도적 전략이 결여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서울당국은 친(親)사회적 좌표와 기구들을 통해 아시아의 미래를 형성해 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정권의 새로운 남방정책의 목표는 실재적인(physical) 것과 디지털적인 인프라를 사회기제적으로 융합하는 방식으로 아시아의 남방과 북방지역을 연결하는 것이다. 경제적 상호의존의 혜택 국가로서 한국은 이해상충의 해결방식으로 군사적 대결과 무역전쟁을 피하고자 한다.

외무장관인 강경화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웃 국가들과 사전적으로 협력을 제안함으로써, 우리는 개별국가 간의 협력이 다른 개별국가들과 협력을 확대하는 선의적(virtuous) 사이클을 형성하고자 도모한다’.

물론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는 것은 환경과 타산에 의한 수동적 기능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신감과 확신에 기초한다.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을 국제무대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진국과 개발국을 연계하는 여러 종류의 국제회의 주관하고, 산업적으로는 삼성과 현대 등의 브랜드가 부상하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K-Pop, BTS 그리고 기생충과 같은 영화가 한국의 지위를 알려준다.

동시에 해외협력기금(ODA)와 유엔평화유지군 등에 유의미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도전을 받고 있는 아시아의 질서유지에 주도적인 미들-파워 국가로서 다음의 3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일본과 과거사에 대한 대립이 미들-파워 외교라는 에너지의 공급에 주기적으로 정전(停電)사태를 야기한다. 독도분쟁과 불충분한 과거사의 화해, 전쟁(강제노동) 보상 등 반일본의 정서가 미들-파워의 위상에 걸림돌로 돌출한다.

한국의 주요 언론매체들은 일상적으로 일본군사주의의 위협을 과장하고 도쿄당국과 협력의 중요성을 간과하면서, 한국이 지역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미사일방어 등에 대한 정보 교환, (북한의) 제재의 기피와 수출통제의 위반에 대한 확인, 항해의 자유보장과 재난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에 대한 협력 가능성을 제한한다.

두 번째, 한국의 자유민주적 가치는 중국을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에 입각한 현실적 외교정책과 가끔 충돌을 한다. 한국당국은 평양과 외교적 접근은 북경을 경유한다는 믿음 때문에 때때로 가장 주요한 무역 파트너이자 강력한 이웃(중국)에 대하여 차별화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은 신장과 홍콩의 인권 상황과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착취당하거나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보이는 팽창주의, WTO 규칙의 준수여부, 그리고 일대일로가 국제적 규범을 지키는지 여부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

세 번째, 국내의 정치적 대립이 외교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양당체제 하에서 전임의 두 대통령이 감옥으로 보내졌고, 국회는 입법과정에서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는 실제적 전장터이다.

단임의 5년제 대통령 임기와 불안정한 정당정치 때문에 북한과 주변 이웃국가들에 대한 정책이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이러한 내부의 균열로 인해 외국의 개입전술에 쉽게 노출되고, 성과있게 운용되는 정권이라도 외교정책에서 자원할당의 주도권을 행사하기에 비효율적이며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대치적 정치상황이 정치적 지도력에 제한을 가하면서, 이념적 경쟁의 주변국가들에 대해 주도적 우위를 취하기보다는 주어진 법적 규정을 수동적으로 따르게 한다. 한국의 외교정책은 민주적 절차와 국가이익에 대한 전략적 사고를 갖추기 위해 투명성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북한과 평화경제를 추구하기 위해 일본과 결별한다는 정책적 오류(fantasy)를 피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그리고 인권상황, COVID-19 팬데믹의 위기극복, 미국 미사일시스템의 한국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 등에 대하여 일관된 정책이 요구된다.

미들-파워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한국은 워싱턴과 동맹을 강화하고 북경과 평양과의 관계를 조정해가는 가운데 제로-섬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의 방위비 분담 요구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면서 중국과 북한을 자극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동맹의 의무라며 국제적 질서유지에 기여하는 것보다, 패권국가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자유무역을 증진하고 기후변화를 완화시키는 소소한 분야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아시아 내에 새로운 협력기구를 창립하면서 이념과 역사의 갈등에서 외교정책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지역 내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합의에 의한 한반도 통일에도 다가갈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MIKTA(Mexco, Indonesia, S. Korea, Turkey & Australia) 협력기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운 남방정책에 있어서도 인도를 결합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또한 지역역량의 증대를 위해서 동반자 국가들인 호주와 아세안과 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미들-파워 외교를 통하여 한국의 위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강화할 수 있고 다른 국가들과 국제적인 협력의 가치를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EastAsiaForum, 2020-05-27.

Leif-Eric Easley

이화여자 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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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돌팔매

덕수궁 돌담길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1977년 10월 24일, 덕수궁 옆 서울지방법원 법정에서는 서울대·고대 유인물사건 재판의 결심이 열렸다. 서울대의 김창우(74학번)와 서익진(73학번), 고려대의 설훈(74학번), 이민구(75학번), 황인국(75학번) 등 수의를 입은 피고들이 법정에 들어오고 재판장이 들어와 앉자 곧바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장 허정훈 판사는 장영자 사건을 담당했던 사람으로 피고들에게 강압적으로 재판을 진행한다는 악평을 듣고 있는 인물이었다. 먼저 검찰의 구형이 있었다. 고려대 중심인물 설훈이 징역 5년, 서울대의 김창우가 징역 4년 등 유인물 사건치고는 꽤 높은 형량이었다. 이어서 이돈명, 황인철 변호사 등 변호인단의 긴 변론이 있고, 마지막으로 피고들의 최후진술 시간이 주어졌다. 박정희 유신독재의 감시 속에서 숨죽이면서 비밀리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며 저항의 칼을 갈아온 이들에게는 공개적으로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성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먼저 제일 연장인 고려대 설훈이 나서서 ‘독재자 박정희는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펴다가 예상대로 재판장의 제지를 받았다. 이어서 서울대 김창우가 나섰다. 김창우는 또렷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정희 독재의 반역사성과 민주화투쟁의 정당성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재판장이 돌연 나서서 말을 끊고 ‘네가 정당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고 힐난하듯이 물었다. 김창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30년 뒤에 박정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잘못된 정권인지 당신 앞에서 똑똑히 증명해 주겠다. 그리고 당신이 박정희에게 부역한 사실까지 자손 대대로 이야기 해주겠다.’ 오만한 재판장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일순 재판장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김창우가 잠깐 숨을 고르느라 말을 멈춘 사이에 “이것으로 이만 재판을 마치겠습니다.”라고 내뱉듯이 말하고 일어나서 퇴장해 버렸다. 변호인과 피고 뿐만 아니라 재판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골리앗을 겨냥한 다윗의 돌팔매처럼 시원하게 한방 먹인 통쾌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후과(後果)는 4일 뒤의 선고공판에서 바로 나타났다. 김창우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4년 자격정지 4년을 선고 받았다. 이른바 ‘들었다 놓은’ 것이다. 통상 검찰이 4년을 구형하면 징역 2년 정도 판결을 내는 것이 보통인데, 검찰의 구형 형량 그대로 선고한 것이다. 김창우의 최후진술이 영향이 있었을 걸로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성북서의 ‘횡재’ – 서울대·고려대 유인물사건

이 서울대·고려대 유인물사건은 당시 75년 긴급조치 9호 발령 이후 유신독재의 엄혹한 감시와 탄압 속에 학생운동이 각 대학별로 분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서울대와 고려대가 함께 엮인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 고리에 서익진이 있었다. 서익진은 김창우의 서클 1년 선배이면서 고려대 설훈에게는 마산고 1년 후배였다. 이 서익진이 마산고학우회장 시절 사용하던 등사기로 김창우와 설훈 두 사람의 유인물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먼저 꼬투리가 잡힌 것은 고려대 쪽이었다. 77년 4월 설훈과 이민구, 황인국이 고려대 학내에 뿌린 유인물이 악명 높은 성북서 정보과로 들어갔고, 성북서가 가능성 있는 인물을 한명씩 잡아다 악랄하게 조사하여 추적한 결과 설훈을 짚어냈고, 설훈을 잡아다가 ‘피똥을 쌀’ 정도로 고문하며 추궁해서 결국 서익진을 찾아 낸 것이다. 설훈도 서익진을 불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결정적 증거물인 등사기의 소재를 둘러댈 재간이 없었다. 서익진을 연행한 성북서 형사들은 덤으로 큰 횡재를 했다. 서익진의 자취방 빨래통에서 김창우가 서울대에서 뿌린 유인물 원본을 발견한 것이다. 서익진은 김창우의 부탁으로 자신의 등사기로 유인물을 인쇄해주고 그 원본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세탁물 속에서 수사관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고, 그 바람에 후배 김창우가 잡혀가 함께 법정에 서게 되었다.

김창우는 원래 그 전 해 1976년 ‘3우1승팀’(김창우, 김천우, 박찬우, 양춘승)의 일원으로 학내시위를 주동하려다가 리더 양춘승이 주동을 3인으로 줄이고 자신을 후속팀으로 남겨 놓아 학교에 남은 상태였다. 양춘승과 김천우, 박찬우 3명은 77년 3월 28일에 예정대로 시위주동을 하고 감옥으로 갔다. 김창우는 후속팀을 조직하기 위해 함께 주동할 사람들을 물색하는 한편 그 동안에 학내 유인물 작업을 하기로 했다. 그는 서클 ‘한사(한국사회연구회)’ 1년 선배이면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군 입대를 기다리던 서익진이 등사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그에게 부탁하여 유인물을 만들어 교내 강의실, 화장실 등에 뿌렸다.

77년 5월 말 모든 일이 완벽하게 잘 끝났다고 안심하고 있던 김창우는 ‘뜻밖에도’ 강의실로 들이닥친 성북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 성북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6월 11일 서울구치소로 송치되어 구속 수감되었다. 거기에서 먼저 와있던 양춘승, 박찬우, 김천우를 다시 만났다.

 

어린 시절 – 공부도 운동도 잘한 모범생

김창우는 1956년 1월 23일 제주시 삼도동에서 부친 김인희(金仁熙) 님과 모친 김규숙(金圭淑) 님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인희 님은 부산 건설국 산하 제주도 축항(築港)사무소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집안 대대로 제주도에서 살았던 제주도 사람은 아니었고, 증조부 때 뭔가 사연이 있어 육지에서 건너와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한다. 독자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일제 때 의사 일을 해서 가난한 제주도 안에서는 제법 풍족한 살림을 했고,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아버지 김인희 님은 그 중 넷째 아들이었다. 외가 쪽은 4.3사건 당시 학살 피해가 많았던 조천면에서 살았는데,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던 김명식 씨 등 저명한 언론인,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어머니 김규숙 님은 제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목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초등학교 선생으로 근무하다가 중매로 김인희 님과 결혼했다고 한다.

1962년 김창우는 제주북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창우가 태어난 삼도동은 바닷가에서 가까워 어려서부터 늘 바닷가에 나가 놀았고,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다에서 종일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김창우는 공부를 곧잘해서 항상 백점을 받아와 부모님을 기쁘게 했다. 그런 중에 축구도 잘 해 학교 대표선수로 뛸 정도였다.

1966년 김창우가 5학년 때 아버지는 공부 잘하고 똑똑한 큰아들을 큰물에서 키울 욕심으로 부산으로 전근을 신청했다. 신청이 받아들여져 일가족 모두 부산으로 이사했고 김창우는 부산 초량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전학 온 김창우는 첫 시험에서 백점을 받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놀라게 했다. 제주 촌놈이라고 얕잡아 봤던 아이들의 태도가 대번에 달라졌다.

1968년에는 명문 부산중학교에 시험을 쳐 입학했고, 1,2학년 내내 거의 전교 수석을 독차지했다. 2학년 때부터는 좋아하는 축구도 다시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졸업 때까지 선두권을 놓치지 않았다. 1971년 부산고 입학시험에서도 수석은 놓쳤지만 차석으로 합격했다.

 

‘한사’에서 사회현실에 눈뜨고 감옥가기로 결심하다

1974년 김창우는 아들이 법대에 가서 판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대 사회계열에 지원했다. 종암동에 있는 서울상대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1박2일 시험기간 동안 부산고 선배들이 고향에서 올라온 후배 수험생들을 자기 하숙집에 데려가 재워주고 돌봐주었다. 김창우를 돌봐준 선배들이 바로 이념서클 한국사회연구회(한사) 선배인 정종호(72학번), 박석운(73학번) 등이었는데, 결국 이 선배들의 권유로 김창우는 대학 입학하자마자 한사에 가입하게 된다.

입학하고 얼마 안되어 긴급조치 4호가 발령되고 민청학련사건이 터졌다. 그 바람에 김병곤 등 한사 선배들이 다수 잡혀가고 서클활동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종구(72학번, 성공회대 교수), 박석운(73학번, 법대) 등의 노력으로 차츰 안정을 찾아간다. 김창우는 선배들의 지도 하에 정의헌, 장기영, 김현준, 박태주 등 74학번 동기들과 함께 경제사, 경제학, 사회사상 등의 학습을 하면서 차츰 우리 민족과 사회의 현실에 대해 눈뜨게 되고, 유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선배들 중에서도 일찍이 노동운동을 꿈꾸고 보일러공으로 일하고 있던 김승호(68학번), 민청학련 사건의 맹장 김병곤(71학번), 박석운(73학번) 등이 특히 김창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면서 2학년 2학기 초 학과 선택을 할 때 좀더 사회운동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아버지 뜻을 어기고 처음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1976년 3학년이 되면서부터 한사의 회장을 맡게 된 김창우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2학기가 되자 자신 역시 선배들의 뒤를 따라 학생운동의 일선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반독재 데모를 주동하고 감방으로 가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지도하는 후배들의 영향이 컸다. 후배들에게 평소 했던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감옥살이를 마친 후에는 선배 김승호처럼 노동현장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3학년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권에는 준비론적 분위기가 강했다. 현장 준비를 위해 정치투쟁은 유보되거나 자제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창우의 문제의식은 반독재투쟁에 있어서 학생운동이 75년 이후의 침체된 분위기를 깨야하고, 다음 투쟁으로 이어주는 디딤돌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생운동은 학생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반독재투쟁을 해야 하고, 그를 통해 학생운동의 소시민적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위장취업할 수밖에 없는데 감옥에 가는 것이 현장 들어가는 것에 장애가 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자기 현실조건에 충실하게 역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76년 2학기 초 어느 날 그는 같은 과 동기이면서 연합서클인 향토개척단 단장을 맡고 있던 친구 양춘승에게 자신의 뜻을 내비춘다. 그 장면을 신동호는 『70년대 캠퍼스1』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교문 앞에서 그(김창우)의 ‘콜’을 받은 양춘승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를. 그 역시 지나가는 말처럼 되받았다.

“어디 할 놈이 있을까.”

김창우의 말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내가 좀 알아볼게.”

선문답 같지만 무서운 뜻이 담긴 대화였다.

이렇게 시작한 양춘승과의 데모 모의는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77년 5월 김창우를 감옥으로 인도했다.(자세한 과정은 신동호의 『70년대 캠퍼스1』 284쪽~293쪽 「관악산 유격대 ‘삼우일승’」을 보라)

서울구치소에서 양춘승을 다시 만났지만 오래 같이 있지는 못했다. 서울구치소에 수용된 시국사범이 늘어나면서 소내 정치투쟁이 가열화되었고, 이것이 사건화 되어 주동자들이 추가 기소가 되면서 교도소 측이 수용자들을 전국적으로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김창우는 한신대 김하범과 함께 장기수들을 수용하는 광주교도소 특사로 보내졌다. 광주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장기 징역을 살고 있는 이현배, 유인태, 김효순, 이강철 등이 먼저 와 자리잡고 있었고, 김창우가 간 뒤에 송기숙 선생 등 광주 팀들과 이영희 선생, 김병곤 등이 들어왔다.

광주교도소에서 김창우는 이강철, 김병곤 등 선배들과 함께 소내투쟁에 앞장섰고, 그 결과 운동시간을 재소자들이 자율 조정할 정도로 소내 처우가 현저히 개선되었다. 그러자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함께 수용된 장기수들과 함께 마찬가지로 대우해 달라는 차별철폐투쟁에 돌입했고, 결국 그 요구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교도소 측의 보복을 불러와 주동자들은 다른 교도소로 이감보내졌다. 이 때 이 일로 김병곤은 공주로 이감갔다.

서울구치소에서 소내투쟁으로 추가 기소된 김창우의 추가건 재판이 광주에서 열렸다. 김창우는 이 재판을 위해 공들여 항소이유서를 썼다. 한국사회의 성격과 민주화투쟁의 목적에 대한 과학적 규명을 위해 쓴 이 항소이유서는 소내 선배들에게 회람되어 호평을 받았다. 추가건 재판은 구형 2년에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징역생활이 길어지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노동운동과 6월항쟁

김창우는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사살되고 긴급조치9호가 해제되기 직전인 1979년 12월 5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광주교도소에서 얻은 신경쇠약증세는 석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바람에 석방 후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려던 계획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큰 아버지 농장에서 6개월 요양하다 직장생활 하면서 건강을 추스르기로 하고 1981년 6월 비교적 근무조건이 좋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입사했다.

83년 초 건강이 조금 회복되자 KOTRA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현장 취업 준비를 했다. 전기학원을 다니면서 전기기사와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 취득 후 전기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전기기술을 습득한 후 반월의 한 공장 변전실 전기관리공으로 들어갔다. 학력은 공고 중퇴로 위조했다. 신분이 탄로나 해고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활동했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 일이 터졌다. 86년 서노련의 영향 하에 조직된 지하 노동운동조직 안산노동자해방동맹 사건이 터져 수사기관의 일제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사태를 관찰하다가 자신의 집에까지 경찰의 손이 뻗치자 87년 초 김창우는 회사를 그만두고 정의헌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서 다시 공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중에 김창우는 역사적인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맞게 된다. 우선 취업은 유보하고 가두투쟁에 집중했다. 김창우는 밖에서 유인물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뿌렸다. 노동자대투쟁 때는 부산의 국제상사투쟁에 집중하고 현장에 있는 일꾼들과 연계하면서 지원투쟁을 조직했다. 6.29선언 이후 열린 대통령선거 국면에서는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활동은 하지 않고 부산노동자협의회라는 노동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노동자의 권익이나 이해를 선전 선동하는데 집중했다. 88년에는 단순한 노동상담 지원 단체에 지나지 않던 부산노동자협의회를 해체하고 87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올라온 선진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부산노동자연합을 조직했다. 현장활동가와 선진노동자들의 조직이면서도 현장에 조직적 기반을 가지는 조직체로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노운협 운동과 지역노동운동

지역 노동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김창우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서울의 전국노동운동협의회(노운협)를 구하라. 91년 민중당이 뜨면서 피디파 중심으로 노운협 활동가들이 대거 민중당으로 이동하자 노운협이 깨질 위기에 처했고, 이 노운협 유지를 위해 지방 활동가를 차출하기로 한 것이다. 김창우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조직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서울로 올라와 노운협 실무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2년간 노운협에서 일하면서 박창수 사건, 전국연합 건설 등 많은 일들을 치루어냈다. 밤낮 없이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김창우에게 간경화가 찾아왔다.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다시 부산에 내려왔다. 93년의 일이다.

부산에 내려온 김창우는 집에서 요양하면서 다음 활동을 모색했다.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전기기사 자격증을 활용해서 거제도와 부산 등에서 전기공사업체에 취직했다. 생활의 방편이면서 노동현장과 연결을 놓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비정규직과 일용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김창우는 이들의 역량을 묶어낼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생각하다가 이들을 지역 중심의 노동자조직으로 담아내기로 결심하여 가까운 노동운동가들과 협의하여 2000년 부산지역 일반노조를 창설한다. 이 지역일반노조는 지역 연대 및 투쟁 중심의 노조조직으로 대기업 기업별노조 중심의 산별연맹 또는 산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형태로 제기된 것이었다. 이 부산 일반노조의 활동은 초기에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민주노총 건설 이후 지역의 연대와 투쟁이 급격하게 소멸되면서 지역노동운동이 거의 무력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지역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조직형태로 주목받으면서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부산의 일반노조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가입 조합원 수가 1000명 가까이로 늘어나고 활동이 활발해지자 노동운동 정파들이 앞다투어 조직원으로 가입하여 정파들간에 조직 장악을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경쟁이 가열되다보니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 모략이 행해지면서 조직이 혼란에 빠졌다. 이를 보다 못한 김창우가 ‘교각살우(矯角殺牛) 우려가 있으니 서로 자제하자’고 충고하고 나섰다. 그러자 정파들은 ‘편드는 거냐’며 김창우까지 공격하고 나섰다. 정파들의 소모전에 넌덜머리가 난 김창우는 2003년 재충전을 이유로 노조 활동을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다.

 

인생 후반전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2004년 노동운동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절감한 김창우는 창원 노동대학원에 입학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여년 노동운동의 경험과정에서 가진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석사논문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2007년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으로 2008년 2월 16일 ‘제3회 김진균상’을 받았다.

 

이 논문은 한국노동운동이 광범한 기층 노동자들의 꿈과 희망과 투쟁에 기초하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던 운동에서, 상층을 중심으로 한 법과 제도와 정책과 교섭에 의존하는 권력지향의 합법 개량주의 운동으로 변화해버린 것에 대해, 1995년 전노협이 청산되고 민주노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김창우는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지역적, 전국적, 산업적 공동투쟁과 연대투쟁을 통해 중소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는 계급적 단결과 연대조직으로서의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보다는, 대기업노조 중심의 합법적인 기업별노조에 기초한 산별연맹의 과두적 지배체제로서의 민주노총이라는 조직형태를 채택했던 것이 문제의 근본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하층 조합원들의 연대투쟁과 조직역량이 중심이 아니라 상층 간부들에 의한 정치적 교섭과 정책을 중심으로 한 권력지향의 관료적인 조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현재 상태를 타개하는 길은 현재와 같은 무늬만 산별이지 실제적으로는 기업별노조에 기초한 산별연맹의 과두적 지배체제에 불과한 민주노총체제를 해체하고, 중소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주체 세력에 의해 공동투쟁과 연대투쟁을 통해 계급적 단결과 연대조직으로서의 진정한 산별노조 또는 전국단일노조체제를 새롭게 건설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잘못된 민주노총 건설의 역사를 바로잡고 첫단추를 새로 다시 꿰어야 비로소 한국노동운동이 본궤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석사학위를 받은 김창우는 석사논문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자신의 이론을 실증적으로 입증할 필요를 느꼈다. 즉 민주노총이 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정신과 전노협의 급진적인 사회변혁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청산’한 바탕 위에서 세워짐으로써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역사적 과정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2008년 그는 성남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 10년의 연구 끝에 2018년 ‘민주노총의 운동노선과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1996~1998’이라는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김창우는 민주노총 1기 집행부가 결국 상층중심, 교섭중심으로 가게 된 근본 이유는 기업별노조에 기초한 산별연맹들의 과두적 지배체제로서의 민주노총이라는 조직노선을 채택한 근본적 한계 때문이었고, 그 결과가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을 비롯한 민주노총의 거의 모든 투쟁과 활동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보고 있다.

김창우는 지금 의왕시 인덕원역 근처 작은 연립주택에서 살면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젊은 시절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어쩌다보니 혼기를 놓쳐 독신으로 살고 있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추구하면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에 후회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노동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도 결국 가까운 장래에 극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전노협으로 출발했던 변혁지향적인 노동운동은 사회개혁(개량)주의를 표방하는 민주노총과의 노선 투쟁에서 패배하여 현재까지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길은 계속 추구할 것이고, 새롭게 형성되는 새로운 주체세력에 의해 조만간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신은 첫 단추를 잘못 꿰어 잘못 흘러가고 있는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바로잡는 데 작은 기여나마 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어쩌면 그의 인생의 후반전은 이제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

공동선, 2019년 11-1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목, 2020/02/2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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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시장가치 평가액이 1천억 불이라는 우버는 2018년 현재 아직도 경상이익을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 신용과 투명성이 생명인 기존의 화폐시장에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가 등장하면서 신뢰는 사라지고 투기광풍이 휩쓸고 지나 갔다. e-Platfrom이 주는 공유재적 편익을 일방적으로 취해 FAANG로 상징되는 26명의 초거대부자들이 인류 절반인 36억 명의 몫보다 많은 재산을 모으고 있다. 분명히 잘못되었고, 이대로는 반드시 큰 재앙이 닥쳐온다.

다른백년은 기술혁신이 가져오는 긍정적 전망과 무서운 화근을 명명백백히 따지고 가릴 것을 제안한다. 미래의 ICT기술과 가상의 세계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악마의 손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보다 희망찬 자유의 영역으로 안내하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인가 국제적인 합의와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수십만 명의 운전 기사들의 생계를 협박하는 카카오 택시앱은 정당한 것인가? 아래의 글은 수 주전에 파이낸스타임즈(FT)에 실린 칼럼을 번역한 것이다.


우리는 신용 순환의 후기에 있으며, 현재 너무 많은 돈을 실제적으로 너무 적은 가치에 쏟아 붓고 있다.

몇 주전에 있었던 세계 경제 포럼과 현실세계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었다. 가장 주목받은 점은 많은 사람들이 기술적 낙관주의를 표명했단 점이다. 그러나 시장이 기술 분야에서 기대하고 있는 바는 확연히 다르다. 연발되고 있는 신규 상장은 특히나 더 불안해 보인다.

우버의 대표이사인 코스로샤히는 다보스 경제포럼의 유명인사였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신규 상장 이야기를 띄우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선 다급함의 조짐이 느껴졌다. 우버, 리프트와 더불어 슬랙과 에어비앤비 같은 대규모 비공개 기술기업들은 더 늦기 전에 주식을 공개상장 할 것으로 보인다. 변덕스러운 시장의 생리와 다가오는 경기 침체, 그리고 이 회사들이 민간자금에 의지하여 너무나 비대하게 성장한 까닭이다. 시장이 이들 회사의 거대한 가치액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들은 아직 반응이 좋을 때 빨리 현금을 확보하고 싶어한다. 현재의 상황은 21세기의 벽두를 장식했던 닷컴 버블과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당시 필자는 런던의 벤처 자금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LVMH 그룹의 지원을 받아 난립한 온라인 소매 업체들은 – 이들은 현재는 연기처럼 사라진 유럽의 펫츠 닷컴 같은 기업들이었다 – 수백만 달러를 그럴듯한 광고에 쓰고 있었고, 사업가 지망생들은 쉽게 투자를 유치해 보려고 퍼스트 투즈데이 같은 스타트업 포럼의 친목 행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행사에 가면 으레 보이던, 옷깃에 모두가 달고 있던 투자자용 빨간 뱃지와 창업가용 초록색 뱃지를 기억하는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도 우리는 신용 순환의 후기에 들어서 있었다. 당시에도 너무 많은 돈이 너무 적은 양의 가치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투자자들은 뜨거운 신규 상장이 빈발하던 시장을 믿고, 이미 누가 봐도 과열된 상태였던 시장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우리는 그 시절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고 있다, 그 끝에 서있던 북미와 유럽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도 함께.

필자는 그 당시의 기술 벤처 기업들이 만들어 낸 가치가 전무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닷컴 버블의 붕괴 당시 무너진 애완견 사료 소매업자 혹은 고급 티셔츠 공급자 하나 하나에 들어갔던 돈이 다른 곳에 쓰였다면, 예건데 오늘날 구글 같은 기업들이 자본화 하고 있는 브로드밴드 케이블 같은 인프라를 여러 곳에 준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시장은 공유경제와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가상 편익의 서비스가 장악하고 있다.

두 시대 간의 진정한 차이는 자본시장 그 자체에 있다. 2000년 이후 벤처 자본은 무너졌다가, 다시 회복했다가, 또 다시 금융위기 이후에 무너졌다가, 2014년 이후 기록적인 수준으로 다시 회복했다. 새로 개업한 스타트업의 숫자는 급증했다. 그렇지만 신규 상장 건수는 떨어졌다. 이는 업계의 모순에 의한 것이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창업비용은 저렴해졌으나 성공적인 경영을 위한 비용은 비싸졌기 때문이다. 이는 시가총액이 10억 달러를 상회하는, 또 다른 “유니콘(설립 10년 이내, 가치가 10억불 이상인 벤쳐)” 스타트업을 창업해내기 위한 마치 군비경쟁에 의해 일어나는 모순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학자들인 마틴 캐니와 존 지즈만은 “유니콘, 체셔 고양이, 그리고 기업 금융의 새로운 딜레마” 라는 제목으로 스타트업 펀딩 업계의 변화에 대한 연구논문을 집필하면서, “스타트업 기업들은 주체 못할 속도와 적자성장, 그리고 수익성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다시피 한 급속 확장을 통해 승자독식의 역학에 불을 지피려 한다”고 썼다.

지난 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벤처 자본의 지원을 받은 유니콘들의 숫자는 막대하게 늘어나왔다. 우버, 리프트, 스포티파이, 그리고 드럽박스 같은 회사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도 평가가치액은 계속해서 늘려나가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특징들은 새로운 사업 역학의 일부이다. 낮은 진입장벽은 많은 경쟁자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한 최대한의 지출로 이어진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순환구조 안에서 떠오른 비공개 기업들은 자연히 비대하게 팽창하게 되고, 벤처 펀드 스스로도 그렇게 비대해지고 있다. 과거엔 10억달러 규모의 벤처 펀드라는 말 자체가 없었지만, 지금 그 정도의 규모를 가진 벤처펀드는 즐비하다.

작년 한 해, 세퀘이아는 80억 달러 규모의 종자돈 펀드를 모금했고, 소프트뱅크는 1조 달러라는 경이로운 규모의 펀드를 모금해냈다. 이렇듯 큰 규모는 결국 더 큰 규모를 낳고 만다. 갈수록 더 많은 우량 벤처 자본들이 스타트업 기업들의 가치를 부풀려 버리면, 나머지는 따를 수밖에 없다. 오르거나 퇴출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공개 상장 시장의 새로운 거품이 끼었을 뿐만 아니라, 건실한 수익성을 확보하려는 수 많은 공개 기업들을 평가절하하는 결과가 돌아왔다. 전형적인 예가 택시 업계에 우버가 만들어 내는 교란, 혹은 숙박 업계에 에어비앤비가 끼치는 영향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니콘” 회사들의 부풀려진 가치를 이용해 더 많은 돈을 끌어 모으고 더 많은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일부 벤처 자본들에게는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행태가 전체적인 경제적 가치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수익성 없는 기업들이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부채금융을 동원하는 일은 몇몇 기업가와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돌려줄 수 있겠지만, 이는 자본과 노동시장을 왜곡시키는데다 반(反)경쟁적이기까지 하다.

투자자들이 성장을 가치의 척도로 삼는 한, 이러한 행태는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학자들이 이야기했듯, “유니콘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동물이다.” 이번 해는 “유니콘”들이 처한 재정적인 현실과 그들이 현재 취하고 있는 자금 조달 모델의 안정성이 매우 중요한 시험대에 오르는 한 해가 될 것이다. 과대평가된 회사들이 내놓는 새 성과물들은 결국 체셔 고양이가 되어 버리고, 버블이 붕괴하기 전 시장에서 빠져 나온 몇몇 이들의 웃음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릴 것이다.

 

파이낸스타임즈(FT) 칼럼

수, 2019/03/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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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면 전쟁으로 인한 사망보다 질병과 전염병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Clausewitz의 표현에 의하면, 인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해당사회가 치루어야 할 전투를 전략적 개념을 통해 수행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전쟁을 이기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연결망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다차원 속에서 타격을 가해오는 상대(질병)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난 3월11일 WHO가 COVID-19를 팬데믹으로 공식 선언하였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에 대비하지 못한 상태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부터 전문가들은 전염병이 수시로 발생할 것이며, 세계화와 인구 증가, 불평등과 기후위기 등으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게 될 것을 여러 차례 경고하여 왔다.

특히 세계화로 이루어진 전례가 없는 연결성 즉 대도시권의 대중교통수단, 빈번하게 이루어진 항공여행, 대규모의 크루즈 관광 등이 대양과 대륙을 정기적으로 연결하면서, 많은 국제 행사들이 이루어지고 산업계의 공급사슬구조가 형성되면서 팬데믹의 조건을 악화시켜 왔다. 그 결과로 각국 정부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제공해야 할 기본적 사회정책이 위축되었다.

COVID-19가 발발하자 각국 정부들은 지역봉쇄와 여행제한 그리고 국경차단을 통해, 연결고리를 통제하면서 대응해 왔다. 그러나 연결고리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는 해답이 아니다. 반대로 국제적인 지도자들간의 협력과 합동적인 과학적 연구가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데 핵심이다. 요점은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연결고리의 시스템이 주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COVID-19의 사태가 우리에게 시스템에 대한 조언을 주고 있는데, 이미 주지하듯이 세계화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금융센터처럼, 연결고리의 시스템이 파괴될 경우에 입는 피해가 연결성이 주는 혜택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는 점을 팬데믹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현재 위협이 던지는 근본적 도전은 연결성과 회복력 간의 거래인데, 후자 즉 회복력이란 사회가 시스템의 충격에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을 의미한다.

복잡계의 이론가들은 잘 짜여진 연결고리가 시스템적인 회복력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 단, 기존의 관계라는 요소가 변화된 이후에 가능하다. 이는 특히 수많은 상호연결 고리들이 사회시스템 전체를 매우 빠르게 뒤흔들고 의도하지 않았고 예측도 할 수 없는 재구성의 결과를 만들어 낼 때에 유효하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대체로 세계경제에 유익하다. 그러나 중국이 2003년 이래 세계에서 두 번째 규모로 성장한 이후 발생한 이번 COVID-19는, 지난 SARS와 견주어 볼 때, 중국과 세계를 묶는 연결고리의 기능과 승수적으로 결합하여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연결성과 회복력이 균형적으로 제자리를 잡게 하는 전략적 방침은 회복력을 극대화하는 영역에 국가적으로 시스템을 준비하고 환기시키는 것이다.

우선, 이는 전략수립의 결정과정에 큰 변화를 요구한다. 국가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왔던 전통적인 방식에서 탈피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초연결화된 시스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특히 작고 단순한 사건이 복잡한 사슬 속에 사방으로 파장을 야기시킬 수 있는 국제적 연계의 복잡성에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이러한 결정을 통하여, COVID-19와 같은 전염병의 전파성과 싸우는 국가단위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효과적인 방법들을 찾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팬데믹과 싸우는 최전방을 지원하기 위해, 부자국가들과 국제적인 보건기구들이 지역단위로 팬데믹을 통제하는 국제적인 시스템을 공동으로 갖추어야 한다.

팬데믹은 각국의 질병센터만 고립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 이러한 약한 고리가 붕괴되면 사방으로 확산되며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초기에 대응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약한 고리에는 이주민 수용캠프, 빈민촌, 공공보건이 취약한 빈곤한 나라들이 해당된다.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22억의 인구가 물부족을 겪고 있으며 42억 인구에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한 실정에 있다.

팬데믹은 경제사정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대응은 해당 국가가 회복력을 유지할 시스템을 갖추어야 가능하다. G20 국가 지도자들은 이번 전염병과 싸우는데 가능한 모든 국제적 금융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보호무역으로 국제간 협력을 방해하고 있으며, 이번에 발생한 시스템적 충격에 대응하는 다자간 무역기능을 신속히 복원시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경쟁력의 회복을 지원하는 환율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COVID-19의 전략적 정책으로 국가마다 사정에 따른 회복력을 승인해야 한다. 식량과 의료 그리고 기타 전략적 물품의 공급을 다양화하여, 공급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충격을 이겨낼 확실한 공급의 인프라가 요구된다.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진료에서 종합 병원에 이르기까지 의료시스템을 갖추어야 하며, 질병에 대한 전문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호주의 경우, 자체적으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식량 공급체계에 혼란이 발생하면 필요한 대륙에 즉시 식량수송이 가능할 만큼 비축량을 운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국가들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가운데 공공보건의 위협을 관리할 수 있는 탄력적 운용이 가능하도록 정치제도와 사회적 공헌을 개선해 나아가야 한다.

이번 팬데믹은 상황에 대응하는 각국의 역량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동시에 연결성과 회복력 간의 보다 견고한 균형을 찾도록 세계화를 재조정해야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방향으로 전략적인 방침을 바꾸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현재 겪고 있는 경제불황은 국가와 세계단위의 활동을 어쩔 수 없이 위축시키고 있지만, 이후 회복될 경제활동은 반드시 팬데믹 이전의 수준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지난 여름 호주가 격은 기후의 재난(산불)은 이미 현재 지구의 탄소화가 지닌 위험이 어떤 것이지 잘 보여주었다. 연결성과 관련하여 재난으로부터 회복력을 갖추기 위하여 우리 삶의 방식과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이 지속가능한 것인지, 우리는 이제 분별하고 성찰을 해야 할 시점이다.

 

출처 : 동아시아 포럼, 2020-05-10.

Evelyn Goh

호주 국립대학교내 전략과 안보분야 연구소 주임교수

Jochen Prantl

호주 국립대학교내 아시아-태평양 국제관계분야 담당교수

금, 2020/05/2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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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ICC 국제형사재판소는 유엔 결의와 국제사회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 민족학살을 방지하고 전쟁 중에 빈번한 반인권적 비인간적 범죄행위를 추적 조사하고 처벌하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발족된 국제 기구이다. 십 수년 전부터 미국의 아프칸 침공과정에 발생한 수많은 전쟁범죄 행위 중에 몇 명의 피해자가 고발해오면서 ICC는 수 년간 이를 추적 조사하였고 명백한 증거와 문건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볼턴은 작년부터 ICC에게 조사행위를 중단하도록 온갖 협박과 경고를 보내 왔으며, 급기야 지난 주 조사단이 미국의 가해자를 면담하려 입국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폼페이오는 이를 불허한다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중국과 북한 등을 민주주의 원칙과 인권의 이름으로 맹비난해온 미국 자신이 바로 반인권적 비인간적 전쟁범위를 옹호하면서 “미국과 동맹(이스라엘)의 주권과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국가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조폭스런 범죄국가 미국에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기대하는 일은 구걸행위와 다름이 없는 것 아닐까 ?


최악의 인권 유린자들이 자행하는 전체주의적 행태의 냄새가 풍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금요일의 언론 브리핑에서 새로운 비자 발급 제한에 대해 발표했다.(사진: U.S. State Department)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난 금요일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국과 주요 동맹국 인사의 전범행위를 조사하거나 해당 혐의로 기소하고자 하는 국제형사재판소(ICC) 인사의 비자를 철회하거나 발행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밝히자 인권 보호 운동가들은 분노를 표현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의뢰인을 괴롭히고 있고 문서자료 또한 충분한 전범 행위의 재판에 대한 국제적 책임을 우회하려는 전대미문의 시도입니다.” – 자밀다크와르, 미국 시민자유연맹.

금요일 아침 폼페이오가 기자들에게 확인한 이러한 움직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반인권적인 범죄들과 전쟁범죄 혐의를 밝히려는 국제형사재판소의 노력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움직임이었다.

미국 시민자유연맹 인권 프로그램의 감독자인 자밀다크와르는 해당 결정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미국 시민자유연맹은 2003년부터 2008년 까지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구금과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들인 칼레드 엘 마스리, 슐레이만 살림, 그리고 모하메드 빈 사우드를 대변하고 있다.

다크와르는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의뢰인을 괴롭히고 있고 문서자료 또한 충분한 전범 행위의 재판에 대한 국제적 책임을 우회하려는 전대미문의 시도입니다, 최악의 인권 유린자들이나 자행하는 전체주의적 행태의 냄새가 풍기며, 이는 또한 심각한 인권 유린을 심판할 정의를 원하는 사람들, 검사들, 그리고 판사들을 겁주고 보복하려는 뻔한 노력입니다.”라고 밝혔다.

휴먼라이프 워치의 국제 재판 담당자인 리차드 디커 또한 해당 결정을 “재판소를 괴롭히려는 터무니없는 행동이며 미국의 행위에 대한 정밀한 조사를 방해하려는 공작이다.” 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국제형사재판소의 회원국들에게 “공개적으로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호소했다.

국제 앰네스티 미국 지부장 다니엘 발슨은 그저 “인권 보호의 시계를 되돌리는 데에 혈안이 된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와 국제 기구에 가한 또 한 차례의 공격일 뿐이다”고 언급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비자 제한은 “가장 심각한 수준의 인권 유린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하는 강력한 도구” 이다.

하지만 국제 범죄자들을 겨누는 대신, 트럼프 행정부는 시선을 국제형사재판소로 돌렸다. 국제 형사재판소는 국제법에 의거하여 창설된 공정한 사법기구로서, 침략, 반인류적 범죄, 전쟁범죄, 학살 등을 증명하고 기소하여 국가적 책임을 확실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의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제법상 범죄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을 위한 정의마저 해치는 것입니다.” – 다니엘 발슨, 국제 앰네스티 미국지부.

발슨은 이번 비자 규제가 “인권 침해를 가볍게 여기는 [트럼프 행정부의] 문화를 보여주며, 국제 형사재판소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의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제법상 범죄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을 위한 정의마저 해치는 것.” 이라고 밝혔다.

폼페이오의 발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이자 오랫동안 국제형사재판기구를 비판해 왔던 존 볼턴의 재판소 인사에 대한 제재 위협 이후에 나왔다. 볼턴은 지난 9월 이후 국제형사재판소가 미국 민간인 혹은 군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계속 조사하는 형사재판기구 인사에 대한 제재를 언급한 바 있다.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볼턴의 맹비난에 이어서, 폼페이오는 지난 금요일 미국이 20년 이상, 공화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를 막론하고, 국제형사재판소의 회원국이 되기를 거부해 왔음을 밝히며, 그 이유로 “광대하고 무책임한 기소 권한이 미국의 자주권을 위협한다”는 점을 들었다.

폼페이오는 또한 “재판소가 종국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인을 고소하려고 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며,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동맹국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우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한 일에 대해 부당한 기소를 당할 공포 속에 살지 않도록 보호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고도 밝혔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러한 비자 제한 조치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이스라엘을 포함한 우리 동맹국의 인원을 쫓지 못 하게 하는데 쓰일 수도 있으며, 해당 정책의 시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고도 전했다.

 

Jessica Corbett

Common Dreams의 전속작가

화, 2019/03/1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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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서방 언론을 통하여 알려진 보도 내용보다 실제 ‘노란조끼’ 운동의 규모는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래의 성명은 코메르시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하여 파리 시위의 중심에 있는 그룹이 홍보체제를 갖추고 조직적 양상을 띠우면서 발표한 성명의 일환이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노란 조끼’에 대한 일방적 폄하 보도와 내용이 자못 다르다는 점에 유의한다.


차도의 로터리, 주차장, 광장에서 집회 및 다양한 시위를 하고 있는 우리 ‘노란조끼’는 코메르 시에서 활동하는 ‘노란조끼’ 동지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고 다수의 시위 대표단을 단결시키는 ‘대규모 집회’을 위해 2019년 1월 26일 27일에 모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선언 동영상).

우리는 11월 17일부터 가장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골에서 가장 큰 도시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폭력적이고, 부당하고, 더 이상 참기 힘든 사회에 맞서 싸워왔다. 우리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높은 생활비, 불안정 및 가난에 맞서는 저항의 깃발을 든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의 가족들 및 우리의 아이들이 존엄하게 살기를 원한다. 오늘 세계는 단 26명의 초(超)억만장자들이 인류의 부를 절반이나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제 가난이 아닌 부를 나눠 갖자! 사회적 불평등을 끝내자!

우리는 지금 즉시 우리 모두를 위한 급여와 복지 혜택, 수당 및 연금의 인상 및 주거, 건강, 교육, 무상 공공 서비스에 대한 무조건적인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매일 로터리를 점령하고, 행위와 시위를 준비하고, 우리가 모든 곳에서 논의하는 것은 모두 그러한 권리를 얻기 위함이다. 우리는 ‘노란조끼’를 입고 지난 세월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권리를 위해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일어설 것이다.

정부는 어떤 대응을 취하고 있나?

정부는 우리를 진압, 경멸 및 폄하하고, 우리를 불구로 만들고, 눈을 멀게 하고, 부상을 입히고,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총기류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망자와 수천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고 있다.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형벌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제정된 소위 이른바 반 훌리건 법은 단지 우리가 시위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우리는 법과 질서라는 이름의 위력 혹은 폭력단체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상관없이 시위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을 비난한다. 어떤 것도 우리의 행동을 억지로 막을 수 없다. 잘못된 것에 대한 항의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이다. 법과 질서의 위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면책특권을 없애야 한다. 탄압받고 있는 모든 희생자들을 대한 사면을 선포하라.

국가적 논의를 운위하는 것은 지저분한 속임수이며, 이는 사실상 우리가 토론하고 결정하고자 하는 의지를 착취하는 정부 홍보 캠페인이다. 우리는 TV 혹은 마크롱이 계획한 ’보여주기식’ 원형테이블이 아닌 다중 집회로 우리의 장소인 로터리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한다.

우리를 모욕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대우도 해주지 않는 것도 모자라 그는 이제 우리를 파시스트 및 외국인 혐오 폭도라고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언급과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 주의자, 동성애를 혐오하지도 않으며, 우리는 서로 협력하는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함께 해 나간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는 토론의 다양성에 대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개의 집합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자세히 설명하고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 및 재정 정의, 근무 조건, 환경 및 기후 정의 그리고 차별의 종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장 논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전략적 요구와 제안 사항 가운데, 우리는 모든 형태의 빈곤해결, 제도 변화(국민 투표, 선출된 공무원의 특권 제거 등), 생태학적 전환(연료 부족, 산업 공해 등),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평등 및 포용 (장애인, 남성과 여성 간 평등, 노동자 계층의 이웃들, 시골, 해외 영토들에 대한 방치 종결)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우리 ‘노란조끼’는 수단과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동지들에게 법률을 존중하고 이의 집행(경찰서에서의 경찰 폭력에 관한 법률 12, 13, 14 등)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로터리 점유, 경제 봉쇄, 대규모 파업을 2월 5일부터 계속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 작업장, 교육기관 및 그 외 모든 곳에서 위원회의 구성을 촉구하며, 이를 통해 파업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에 의해 매우 세부적인 사항들로부터 형성될 수 있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자!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행동하자!

민주적으로, 자율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조직하자. 대규모 집회는 우리의 요구와 우리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단계이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단결하자.

“마크롱은 사임해야 한다! 시민들의 힘은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지속될 것이다”.

이것이 코메르시에서 열린 동지들의 대규모 집회에서 제안된 요구이며 앞으로 지역에 위치한 입법기관을 통하여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킬 것이다.

 

William Mallinson교수의 불영번역

 

수, 2019/03/0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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