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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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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admin | 화, 2020/05/2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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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조시현 연구위원


이 글은 2019년 9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반일 종족주의>에는 역사도 없고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이영훈 등이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주류적 역사해석에 대한 도발, 상식의 해체, 단언적 서술 등을 통해 명쾌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그들이 약속한 실증이 아니라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과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겉으로는 전문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학술적 뒷받침이 없는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 결국 대중을 겨냥한 또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선동에 그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강제동원과 전시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부정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모두 거짓말로 등치시키고 예외에 속할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구술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이 책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용인하는 반역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은 “선진국”이라는 가치를 설정한 것 말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반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침략전쟁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정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책임의 부정은 법과 정의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여온 문명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강제동원에 관한 진실을 두고 “조총련계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낳은 “빨갱이” 망령과 냉전적 사고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절멸의 대상인 적으로 설정하면서 역사전쟁을 운운하고 있다.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Specters of Marx(마르크스의 유령들), xviii).

2.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범죄에 대한 은폐이자 역사범죄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무리한 주장의 기반이 어딘지도 주목된다. 이들의 주장은 특히 2012년에 나온 강제동원에 관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고 했던 사법적폐 세력의 주장과 판박이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일본의 가해기업인 신일본제철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으로서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즉각 이 판결에 반발하였고 한일 간의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반일 종족주의>란 책이 나왔고 대법원의 판단과는 동떨어진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협정에 위배된 것이라며 판결을 무력화하려는 일본정부의 주장과 닮아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저자들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자”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기득권을 지켜보고자 하는 세력의 매니페스토(manifesto)임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슬픈 인생에서 나온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 발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반일 종족주의>란 책을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역사부정 문제에 대하여 전 세계적인 대응노력이 주목된다. 유대인에게 자행된 홀로코스트나 나치범죄는 물론이고 아르메니아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나 반인도적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형사입법과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 식민지배 시기 동안 있었던 학살, 수탈 등 식민지범죄에 대한 관심과 탈식민주의 요구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오히려 커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각종 과거사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한계도 많이 보이고 있다.
대일 과거사문제 역시 단박에 청산되거나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가 적용되어 단죄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중대한 범죄자가 처벌되지 않는 이른바 불처벌(impunity) 문제에 대한 고민과 불처벌의 현실 속에서 확산되는 역사부정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3. <반일 종족주의>에는 민족이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이른바 주류적 역사서술과 피해자운동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가 무슨 말인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이 말은 물질주의와 거짓말을 토템으로 하는 샤머니즘에 사로잡힌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20-21쪽). 이 샤머니즘의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고 한다.
‘종족’(tribe 또는 ethnic group)이란 말을 현재와 “지난 60년간의 정신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하나의 분석개념으로서 갖추어야할 기초적인 엄밀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름붙이기를 통하여 분석 단위로서 ‘민족’이란 개념을 비하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이러한 호명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 역시 민족이란 집단 현상을 도외시한 원자론적 서사와 감상의 나열이 그치고 있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종족주의의 차이를 말하지도 못하는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은 일제 강점이전의 조선이 갖는 국가성과 근대지향을 부정하려는 기획을 드러낸다.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가지는 ‘네이션(nation)’으로서 조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현대 한국의 네이션을 종족으로 대체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통해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류적 역사인식을 뒤틀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도 서구에서 만들어진 보편적인 범주로서 네이션은 현실로서 있었고 이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며 부단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실증의 근거로 제시하는 문서나 수치들은 바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라는 틀 속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사료비판도 없다. 결국 이들은 문서작성자의 세계관에 동조한 나머지 일제의 식민지배는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곧 일제의 통치를 미화하려했던 식민사관의 후예라고 할 만하다.

4. <반일 종족주의>에는 일제의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없다

이 책은 또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비판이 없이 마치 강제동원과 ‘위안부’의 역사를 신화인양 부정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이라는 책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를 비판하며 인종주의와 결부된 “종족적 민족주의”를 말한 바 있다. 이들이 한국사회를 비판하며 제시한 종족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제국주의 일본의 민족주의 비판에 걸맞다. 반일 종족주의를 말하기에 앞서 일제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제에 의한 “주권강탈”(42쪽)을 말하긴 한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시스템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하여 일본의 일부, 즉 자기나라로 만들었지만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모순은 해명되지 않는다. 일제의 통치가 잘된 일이었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에 바쁘다. 명색은 한일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현실은 식민지배를 상징하는 총독에 의한 통치였다는 점, 조선총독은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
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칫하기까지 하
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 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
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


 

천황 이외에 어떠한 법적 통제를 받지 않았고 군대에 의해서만 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 식민지 조선에 실시한 법이라는 것은 천황제 아래 삼권을 가진 총독의 의사에 좌우되는 전제적인 것이었고, 그 마저도 일본 내지의 법과 별개의 이원적 체계로서 관료체제를 통제하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식민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종주국의 이익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법이었다는 점, 일제의 식민지배에 법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하기보다는 법은 통치술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점, 이러한 법 현실은 언제나 정의의 공백을 낳았고 오늘날까지 정의를 갈구하는 피해자들의 외침으로 현재화되고 있다는 점, 병합은 결국 영토의 통합 즉 일제의 영토 확장이었지 국민간의 통합이나 EU식 지역통합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조직적인 민족차별을 낳고 끝내 죽음의 강제동원으로 주민들을 내몰았다는 점, 병합과 식민통치 방식 사이의 모순은 결국 민족자결의 요구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해방’이라는 것은 민족과는 무관한 일이 되고 ‘독립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국권회복을 말할 여지가 없이 1948년에 건국했다는 스토리와 연결된다. 이는 바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보여주고 지금도 일본의 우익이 견지하고 있는 역사관, 즉 일제의 패전으로 한국이 분리독립하게 되었다는 역사서술의 한국판이다.

5. 청구권문제와 강제동원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한일 청구권문제와 관련하여 주익종은 특히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와 “한일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를 “팩트”라고 주장한다(115쪽). 그가 얘기하는 팩트라는 것이 사실 또는 진실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 주장들은 다 사실이 아니다. 먼저 “별로” 없었는지 있었는지는 어떤 판단 기준이 없이는 말할 수 없는 명제이다. 별로였는지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사실 여부 또는 진위문제가 아닌 판단과 의견의 문제이다. 진실은 청구할 것이 여러 가지 있었다는 것, 별로 없었는지 여부에 대해 정확한 산정을 거친 끝에 3억불 해당의 무상공여가 된 것도 아니라는 점, 그 가운데 ‘위안부’문제는 한일회담에서 거론조차 안 되었고 따라서 “별로”인지 알 수도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완전히” 끝난 것인지 여부 문제는 협정의 해석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규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끝났다’는 것도 팩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완전히 끝났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한일 정부가 입장 대립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이 어떻게 풀려갈지 지켜봐야 아는 문제이다. 현재진행형의 얘기를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지 잘 따져볼 문제다.
현재 판결을 받긴 하였지만 위자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관련한 이들의 입장도 주목된다. 청구권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또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이 언급하고 있는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에서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보상금”이 언급되긴 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보상금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이 포함되는지 여부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이 두 나라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 주장해야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2018년의 대법원 판결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강제동원문제에 관한 주요한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끝났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협정 규정에 대한 해석이고 규범적 주장이지 단순한 팩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해석에 상대방도 동의하거나 양쪽이 따라야하는 유권적인 해석이 나와야 정리될 문제인 것이다. ‘끝났다’는 논리는 피해자들에게 윽박지르며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한다는 주익종(또는 아베 식의)의 강박관념은 그로 하여금 “징용 노무자의 정신적 피해는 당초부터 청구하지 않기로 한 것”(126쪽)이라는 주장으로 이끈다.
그가 무엇으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책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의 하나 그의 주장대로 청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법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에서 권리의 포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권리를 포기한다면 명확하게 포기한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6. 식민배상문제도 남아있다

주익종은 또 “국제법, 국제관계에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한국이 배상 받으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126쪽)라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 식민배상은 없었다, 즉 사실에 관한 서술을 하며 현실론을 전개하고 있다. 쉽게 쓰려다 보니 배상의 선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선례가 없었다고 하여 그에 관한 “국제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사실문제 같아 보이지만 규범적 판단을 내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선례가 없었다고 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은 선례를 만들어 법을 확인하는 일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러한 맥락에서 규범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필자들이 일제하에서 재산권이 보장되었음의 근거로 드는 것이 조선민사령이다. 이는 일본의 민법을 총독의 명령에 의해 조선에 빌려 썼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현재 한국의 민법처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하였음이 팩트이다. 이러한 손해배상문제를 다루는 것이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하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상문제를 다룰 법적 여지는 식민체제하에서도 있었던 것이지만 실현될 수 없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일본의 패전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건 1965년 한일협정에서건 식민지배하에서의 배상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지금도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서는 것은 아니다.2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식민배상문제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청구권협정이 재산문제를 해결한 “최선의 합의”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일본과의 과거사가 청산되었고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127쪽). 그러나 오늘날 세계적인 조류는 오히려 식민지배와 식민지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말고도 이탈리아와 리비아, 영국과 케냐 및 인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일과 나미비아, 프랑스와 알제리, 스페인과 멕시코, 카리브해 국가들과 구 종주국들 사이에 식민 지배 아래 발생한 각종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요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성과도 나오고 있다. 특히 2019년 3월 26일에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유럽의회는 “유럽의 식민주의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자행된,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는 부정의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역사를 유럽연합 기관들과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통과 시키기도 했다. 청구권협정의 진실은 협정으로 전쟁배상도 식민배상도 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있다.


2 116쪽의 표에서는 대일 강화조약 제14조의 내용을 (a) 일본인 재산몰수와 연합국의 추가배상 협상에 관한 권리와 (b) 연합국과 그 국민의 청구권 포기로 요약하고 있는데 제14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즉 제14조는 첫머리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전쟁 중에 일본에 의해 야기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배상금(reparations)을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고 하여 명확하게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원칙을 확인하고 있다. 청구권협정에는 이와 유사한 어떤 표현도 쓰여 있지 않고 따라서 배상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


 

 

식민지하의 범죄와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로 초점이된 강제동원문제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해결되어야할 것이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
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7. 맺으며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강제동원과 ‘위안부’문제와 같이 오늘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에 있어서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하여 무엇이 팩트인가로 이슈를 단순화하면서 사실과 법의 문제를 뒤섞어놓고 그릇된 의견과 행동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주 현실참여적인 책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들은 한국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또 다른 최종심급 역할을 자임한다. 판례에 대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단정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법원리가 들어가 있으므로 그러한 법이해가 올바른지 검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와 법 또는 정의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묻게 된다. 법의 문제는 법이 어느 사건이나 시기에 작용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배제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팩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법도 역사속에서 같이 흐르며 힘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느 행위를 합법이라거나 불법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팩트이다. 과거에 어떤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법적 의미를 가지는 팩트이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필요에 따른 법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말을 다시 빌리면 언제나 이미 현재화될 가능성을 가진 법 또는 정의라는 유령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배회하고 있다. 과거의 법을 화석처럼 현재의 법과 단절된것으로 사유하지 않는 가운데 한일회담에서 그리고 청구권협정의 문구에서 배제된 이들의 희망을 쓰는 역사 서술을 기대해본다. (<월간 순국>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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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2018 상반기 시민강좌 ‘한 시대, 다른 삶’ 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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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은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과 연계하여 시민강좌를 개설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 이래 70년간의 일제 침략, 그 중에서도 식민지배 35년은 우리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나라와 민족이 위기를 맞은 그때, 어떤 이들은 목숨과 전 재산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으나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부와 출세를 위해 제 민족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번 강좌는 전시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과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일제강점기 서로 다른 길을 걸은 다양한 인물들을 대비하여 조명한다.
강좌는 총 7강으로 6월 12일(화)부터 28일(목)까지 매주 화, 목요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되며, 30일(토) 오전 10시 특별강좌와 전시 관람으로 마무리한다. 근현대사를 심도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일반 성인 40명을 모집하며 수강신청은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www.mhmh.or.kr)와 전화(02-903-7580)로 가능하고 무료로 진행한다. 이번 강좌는 수강을 원하는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고 지리적 접근성을 높이고자 2018년 6월에 새로 개관한 삼각산 시민청에서 이루어진다. 작년 9월에 개통한 우이신설경전철을 타고 솔밭공원역에서 내리면 바로 강의실까지 올 수 있다. 1강부터 6강까지 삼각산 시민청 강의실에서 진행되며, 7강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 후 전시를 관람한다.

제1강은 신효승 연구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이 3대에 걸친 석주 이상룡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도와 그래픽을 통해 설명하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의의를 살펴보았다. 2강에서 권시용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언론인과 문인으로 명성을 떨친 심천풍(우섭)과 심훈(대섭) 형제의 일생을 시기별로 상세히 다루고 심훈의 일기 등 사료를 통해 형제의 엇갈린 선택을 설명하였다. 3강은 홍명희 3대의 친일과 항일을 주제로 김덕영 연구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서민교 연구원(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조선인(4강)을 구체적인 사료와 함께 다루며, 이명숙 연구원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왕, 광산왕, 기부왕(5강)이라는 소재로 조선인 거부(巨富)들의 이면을 파헤친다.
제6강은 임헌영 소장이 강사로 나서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로 꼽힌 이광수와 최남선의 변절과 해방 후 반민특위특별재판에 회부된 상황까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제7강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의 전시 주제를 아우르는 박수현 연구실장의 강의 후 전시 관람으로 전체 강좌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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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이 지난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 86-1번지 설화산 일대에서 진행한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가 마무리되었다.
공동조사단은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4월 12일부터 23일까지 발굴된 희생자의 유해와 유품에 대해 아산시 공설봉안당에서 감식을 진행하였으며, 5월 14일 같은 장소에서 안치식을 치른 후 세종시에 위치한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추모관’에 봉안되었다. 조사단은 이 지역에서 최소 208명의 유해와 551점 이상이 유품이 발굴하였는데,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 당시에 희생된 부녀자와 어린이들로 밝혀졌다. 유해감식 결과 최소 208명 가운데 어른이 150명, 미성년의 어린이가 58명으로 확인되었다. 유품으로는 M1과 카빈 소총의 탄두와 탄피, 비녀, 귀이개, 단추류, 버클, 고무신,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 등과 함께 여성용 비녀가 최소 89점 발견되어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녀자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아산시의 예산 지원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보다 연구소 아산지회 회원들의 물심양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한편 5월 29일에는 아산시청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조사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은 유해발굴 및 감식결과 보고를 통해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국회 입법 필요성을 강조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월, 2018/07/0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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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연구소는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박혜영)와 함께 5월 31일 오후 1시 30분부터 덕성여대 대강의동 104호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는 한편, 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관장 한상권)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올해 심포지엄은 왜 ‘3·1운동’이 혁명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 노동자 등 새로이 조직화한 ‘3·1운동’ 참여 계층의 성격과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의 이념적 지평〉이란 기조발제에서 3·1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 민주혁명, 국제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곧 3·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으며 3·1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근대적 주체-청년, 여성, 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3·1혁명은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1910년 7월 6일자 ????신한민보????논설에서1919년4월제정된「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각종선언서의분석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사상적 흐름을 짚었다. 끝으로 3·1혁명이 좁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국제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 발표에서 여성사에 있어서 3·1운동이 갖는 의의로서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남녀평등을 천명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1920년 이후 전개된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 ‘독립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으로 장을 나누어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사 100년의 관점에서는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운동이자 페미니스트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라며 당시 여성운동이 갖은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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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청년〉 발표에서 조덕진, 박헌영, 장병준, 강석봉 등 개별 사례 분석을 통해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과 기억이 이후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로 만들고 조선사회를 실질적인 정치·문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바탕이 3·1운동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사회변동〉 발표에서 3·1운동이 “주체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선택한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 이후 조선인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과 지배자의 변화 모습을 고찰하였다.
종합토론은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주재하였고, 약정토론자로는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이태훈 연세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이자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서거 63주기 추도미사가 함세웅 신부의 주재하에 차미리사 선생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 편집부

월, 2018/07/0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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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운음

홍익미술대학 출신의 SNS 1인 미디어 만화가로서 고 노무현대통령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와 일러스트 등을 그리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다룬 웹툰 『노공이산』과 캐릭터 일러스트 모음집 『바보 노공화』가 있으며,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몸 바 이태준, 김필순, 박서양, 황에스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만화 <조국의 심장을 지켜라>를 펴냈다.

월, 2018/07/0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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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제11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제11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5월 18일 금요일 오후 6시 숙명여대 100주년기념관 7층 한상은라운지에서 각계인사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학자들의 도전적 탐구정신을 격려하고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2007년 제정되었다. 수여식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수령자 발표, 지원금 수여, 최덕수 고려대 교수,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축사, 수령자의 소감연설 순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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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심사대상은 2016년 8월과 2017년 2월에 수여된 17편의 한국근현대사 관련 박사학위논문으로 2월 20일 예비심사를 거쳐 4월 9일 심사위원회에서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미래인재양성사업단 연구교수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가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비롯하여 지수걸 공주대 교수, 최기영 서강대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조재곤 동국대 교수, 장영숙 상명대 교수, 한모니까 카톨릭대 교수, 김태우 외국어대 교수가 예비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수령자인 유바다 박사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는 그간의 국제법적 연구와 만국공법의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의 연구로서 한국사와 국제법 연구자들에게 주목받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국내외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그동안 등한시해 온 당대 유럽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까지 확보하여 분석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앞으로 개항 이후 조선의 국제법적인 지위에 관한 활발한 연구와 논쟁이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 김혜영 연구원

월, 2018/07/0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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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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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시가도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철도관사를 옮겨 지은 것을 1929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용산역 위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하천을 정비하여 직선화한 모습도 보이는데 2년 만에 이와 같이 변화된 지형도는 을축년 대홍수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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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 이촌동, 『매일신보』 1925. 7. 13.

 

용산역 근처에는 구획이 정리된 신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거대한 일제의 군사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조선의 중심부에 일제의 군대를 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는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상시적으로 주둔시켜 안정된 통치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도와 함께 대륙침략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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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가 걸려 있는 조선군사령부 정문, 사단대항연습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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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대항연습사진첩일본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관병식 장면 항공사진, 사단대항기념사진첩

 

이처럼 1929년판 “용산시가도”는 용산 주둔 일본군의 관계시설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민족사랑> 2014년 9월호에 실린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과 함께 보면 용산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 강동민 지료팀장

수, 2018/08/0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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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 • 이홍관 정리

현재 국제운송회사 로드 원(ROAD 1) 로지스틱스를 운영하고 있는 홍남화 아산지회장은 2000년 9월부터 연구소 회원에 가입했다. 2016년 5월에는 아산 둔포면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 공덕비를 제보하였고,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2017년 1월~5월)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우리에게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각인시킨 <나는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선생과사촌지간이다. 찾아간 날, 마침 홍남화 회원은 업무상 무언가 바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성의 있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는 아산의 신정호수 인근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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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의 회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답 : 저희가 80명 정도 되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천안아산지회였는데 분리하고 보니까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지회의 발전을 전망하면서 힘들더라도 각자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문 : 천안아산지회로 활동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답 :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임종국 선생님 추모사업을 했었죠.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니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에 임종국선생의 조형물을 세웠고 앞으로 지역의 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입니다.

 

문 : 아산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지요?

답 : 제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1997년 또는 1998년 무렵 수원 북문 부근에서 북한동포돕기 캠페인을 보고 그 단체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갔더니 연구소 경기남부지부와 관련되어 있더라구요. 그것이 연구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한동포돕기 성금으로 5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무렵 수원지역에서 열린 강연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수원역전의 경기서적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연에도 참가해 제가 “DJ와 YS는 둘 다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왜 차이가 납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 사람은 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은 철학이 없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노동은 교수님의 친일음악 강연도 참석했습니다. 노동은 교수님 강연은 화성시가 홍난파기념관 건립을 계획하자 반대운동 차원에서 연구소 경기남부지부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는데 현재 방학진 기획실장은 기억을 못하시네요. 그 후 오산으로 이사해서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 수원에서 오산으로 다시 천안에서 고향인 아산으로 계속 내려오셨네요?

답 : 제 회사 이름이 로드 원(ROAD 1)입니다. 1번 국도를 타고 대륙까지 오가자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사를 살펴보니 큰 집은 북한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에 쫓겨 인천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집안을 보면 수백 년간 한 곳에서 살다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는 천안, 아버지는 홍성, 저는 아산에서 태어납니다.
지난 100여 년의 격동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집안이 이리저리 내몰렸던 거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다보니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를 80% 정도는 복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가족사를 복원했던 것 같습니다.

 

문 : 아직 복원하지 못한 가족사의 20%는 무엇입니까?

답 :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의한 망각이 그 20%입니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 당시 희생될 뻔 하셨습니다. 아산 현충사 부근의 황골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남양 홍씨(홍남화 지회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집안이다) 집성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와중에 황골에서 우익에 의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50년 추석 무렵입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던 중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사촌이며 큰어머니가 모두 끌려간 후였습니다. 우익 청년들이 동네 사람들을 공회당에 가두어놓고, 좌익 혐의자에 대해 인민재판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운좋게도 친척 되시는 할머니가 두둔해주어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큰어머니를 비롯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빠리의택시운전사????에그 내용이 실려 있구요. 그 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해자들과 한평생 사셨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과 살림살이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부터 6·25 이야기를 알음알음 알아 오면서 자랐고, 숙명처럼 민간인 학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을까, 시골마을에 두레패가 왜 둘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었지요. 난리가 끝나고 마을 한켠을 지키던 왜가리떼도 사라지고 맙니다.

 

문 : 그래서 이번에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열심히 참여하셨군요?

답 : 네. 6·25전쟁기에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주체나 피해 유형이 다양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요시찰대상처럼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자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구실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산지역에서 보도연맹건으로 희생된 사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군 지배가 끝나가는 2~3일 전후 치안 공백기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차별 학살을 벌였고 이후 치안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찰이 좌익 혐의자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설화산 민간인 희생자 유골은 1951년 1월 평택까지 중공군이 내려오자 후퇴 직전의 경찰이 학살한 좌익 혐의자들의 유골인 거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기록에는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8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일부에서는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던 점을 들어서 1,3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천안의 경우 당시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이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산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 : 내년에 제2기 진화위가 출범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현재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조사관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 이번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에 진화위 당시 아산지역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경찰관이 휴가를 내고 조용히 찾아주었는데 본인도 당시 조사가 미흡했다고 말하더군요. 여하튼 2기 진화위에서는 1기와 달리 위원회뿐 아니라 아산시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예상되는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명확한 조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아산시장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 민간인 학살 실태 파악과 공청회 개최, 인권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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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는 이밖에도 친일파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운동도 열심히 벌이고 계시지요?

답 : 우선 새로 출범한 아산시의회와 충남도의회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고 표준영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표준영정 퇴출 서명운동에 함께 했던 아산지회 회원들 중에 각각 아산시의원(홍성표 회원)과 충남도의원(안장헌 회원)에 당선되어 아주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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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바다에 마을사람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산 구성리에서도 마을사람들을 좌우로 길게 세워서 바닷가로 나가게 하고, 물이 차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자 총을 쏴 살해해서 그대로 수장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희생되신 분의 딸이 노인이 되어 증언합니다. 엄마한테 동네 청년들이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묻자, 마당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됩니다.
현재 이 같은 증언을 할 분들은 찾기 어렵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6·25전쟁 때 학살된 유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고,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하면 가해자와 연결되지 않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며 어설프게 덮기보다는 민족사의 상혼을 드러내 근원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응어리진 아픔을 보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수, 2018/08/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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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헌법에 반대하다 간첩 누명을 썼던 임헌영 소장이 6월 2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수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로부터 불법적인 수사를 받으면서 작성된 진술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는 모두 그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무죄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은 1974년 문인들이 개헌 지지 성명 등을 발표하자 보안사가 임 소장을 비롯해 이호철·장병희·정을병·김우종 씨 등 문인 5명을 상대로 고문과 가혹행위 끝에 거짓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한양(漢陽)』에 글을 기고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했고, 법원은 임 소장을 비롯한 이호철·장병희·김우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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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이 사건을 재조사한 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던 보안사가 불법 수사했으므로 잘못된 판결”이라며 재심을 권고했다. 이후 이호철·장병희·김우종 씨 등은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검찰은 2017년 독재정권 시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 중 하나로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던 임 소장을 대신해 재심을 청구, 무죄를 구형한 바 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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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465개 독립·민주화운동 단체, 교육·학술단체 등이 활동하고 있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이하 국정화저지넷, 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는 6월 6일 오전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앞서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대구 교육감 후보로 출마한 강은희의 심판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반 헌법적이고 불법적인 국정농단 사건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인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비수를 꽂은 인물, 국정농단 세력을 비호한 인물, 강은희 후보에게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려달라”며 “2·28민주화운동 정신과 촛불정신으로 강은희 후보를 단죄해달라”고 대구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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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1일 대구시교육청 앞에서도 국정화저지넷과 대구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 대구네트워크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무너져 가는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대구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교육청의 수장이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강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역사의 산증인인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위안부합의 주동자인 인물이 내가 사는 대구에서 교육감 후보로 나온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각계의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6월 13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은희 후보는 40.7%의 득표율로 대구교육감에 당선됐다. 그러자 대구의 학생·청소년들이 강은희 대구교육감 당선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며 학생들 손으로 교육감을 뽑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강 교육감은 2015년 새누리당 의원 시절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간사로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지지 여론조성에 앞장섰다. 또 여성가족부 장관 재직 당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옹호하며,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일본 정부의 ‘위로금’을 받도록 회유하고 종용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2014년 국회 교문위 회의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 입학 등을 비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송민희 홍보팀장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

수, 2018/08/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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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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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85점 보내와
6월 1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7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보성문화>, <새전남>, <월간호남> 등 전라도 지역에서 발행한 잡지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기금전달식 후 자료 기증 잇달아
▪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7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지난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기금전달식에서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6월 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일본역사사진첩>(1914), <황족화보>(1930)등 총 5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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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카와 마사키(재한군인군속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씨가 2003년 재한군인군속 추가 제소에서 사용한 플래카드, 2009년 군군재판 도쿄고등법원 판결 후 지원하는 모임이 받은 플래카드 2점을 기증했다.

야마모토 나오요시(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계간전쟁책임연구>, 군인군속재판관련자료등책자와문서, 현수막을기증했다.

야스다 치세 씨가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사건소송>(1992)을기증했다.

평화교육연구위원회에서 <新潟県内における韓國·朝鮮人の足跡をたどる>(2010), <平和教育委員會資料シリーズ 第2集 新聞などに見る新潟県内韓國朝鮮人の足跡>(2006) 도서 3권을 기증했다.

야노 히데키(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활동했던 자료 모음인 플로피디스크, 카드, 명함 파일 등 다량의 자료와 지난 2018 남북정상회담 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 등을 기증했다.

히구치 유이치(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씨가 6월 18일 「용산시가도」(1929)를 기증했다. 이 지도는 용산 일본군기지와 용산역 및 주변의 철도기지 등이 표시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번 호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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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도시코 씨가 2014년 6월 27일 기증에 이어 <일본의 전사>등 강제동원관련도서31권과 ‘일본정부와 피해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라’에서 찍은 사진 등을 기증했다.

 

▪ 3월 24일 김삼웅 지도위원이 1962년 발행한 『동경재판』(전3권)을 기증했다. ‘동경재판’은 극동군사재판소가 제2차 세계대전 중 극동지역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였던 재판으로 정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다. 이 책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조일신문법정기자단에서 작성했다. 동경재판 당시 법정사진과 함께 재판의 모든 과정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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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이덕문 회원이 지난해에 이어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제13회숙명여자대학교졸업앨범>(1964)등 도서 3권이다.

▪ 6월 14일 호시카와 가즈에(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 씨가 아베 반대 표찰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수, 2018/08/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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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청년시대여행이 공동 주관하는 ‘일제 강제동원과 야스쿠니신사-촛불원정대 특강’이 7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민족문제연구소 강연장과 ‘청년협동조합 몽땅’의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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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강으로 구성된 이번 강좌는 올해 8월 도쿄에서 열리는 ‘야스쿠니의 어둠에 평화의 촛불을’ 공동행동 참가자를 대상으로 마련된 것으로, 현지 행사에 앞서 참가자들이 한일관계와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동북아 평화공존의 방안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준비되었다.
1강에서 김진영 선임연구원은 일제식민지배의 특징과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개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례와 한일 양국정부의 대응을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았다. 2강에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은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를 바탕으로 ‘천황제’와 야스쿠니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 그 허상과 야만성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현 일본사회의 사상적 근원, 우경화의 연원을 설명하여 강좌 참가자들과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7월 19일 3강에는 영화 ‘안녕사요나라’ 상영회와 주인공인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고, 7월 26일 4강에는 촛불행동 설명회와 참가자 전체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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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반민특위 설립 70주년을 맞아 6월 20일 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회원(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간담회에서 김정륙 회원은 당시 서울 충무로에 있던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로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와 김상덕 위원장을 회유한 이야기, 김상덕 위원장이 6·25 직후 납북된 과정과 그 후 비참했던 가정사 등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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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를 마친 후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인장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시절 그리고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 사용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김정륙 회원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마련된 2층 전시실에 인장을 직접 진열했다.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의 유품을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에 기증하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며 소중하게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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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물 1층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이 열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하 잇는 모임)이 건립기금 1억 345만 원을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에 전달했다. 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일본 시민과 단체로부터 모은 기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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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금전달식에는 잇는 모임에서 서승 공동대표, 안자코 유카 공동대표,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등 총 19명이 참석했고, 연구소 측에서는 이이화 시민역사관건립위원장,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이민우 운영위원장 등 약 60명이 참석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들도 함께 했다.
기금전달식에 이어 2층 전시실에서 자료기증식이 진행되었다. 잇는 모임은 그동안 기금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전후보상운동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모아왔는데, 이날은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 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후루카와 마사키 씨가 커다란 현수막을 기증했다. “야스쿠니 합사를 하지 마라!! 유골을 돌려 달라!!”라는 구호가 힘찬 글씨체로 적혀 있는 이 현수막은 2003년 군인군속재판 추가제소 당시 일본 법원 앞에서 피해자들과 일본 시민들이 함께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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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는 모임 참가자들은 기금전달식에 앞서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남산 권역을 답사했으며, 6·10민주항쟁 31주년이 되는 날에는 남영동 옛 대공분실을 견학했다. 그들은 일제와 국가폭력으로 짓밟힌 역사가 켜켜이 쌓인 용산과 남산 일대를 답사하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했다.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일본 시민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알리고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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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음)와 육군사관학교(교장 정진경 중장)가 공동주최한 이날 기념식은 처음으로 육사에서 열렸는데 이는 육사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학교라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육사는 지난 해 12월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특별 학술회의를 열었고, 올해 3월 1일에는 육사 교정에 독립전쟁 영웅 5인(이회영,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의 흉상을 제막하는 등 우리 국군의 뿌리 찾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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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임원, 유족, 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기념식에는 1,100여 명의 육사생도 전원이 연병장에 도열했다. 주동욱 경희민주동문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 준비위원장이 신흥무관학교 경과보고를 했고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기념사를 했다. 윤경로 상임대표는 기념사에서 “신흥무관학교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육사 생도들이 배우기를 원했는데 쉽지 않았지만 촛불시민들의 덕분으로 가능했다”면서 “앞으로도 매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 수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념식을 마친 후에는 육사 생도들의 분열식이 거행되었다. 이어서 독립전쟁 특별전시회를 관람 후 육사 생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을지강당에서 공연된 항일음악회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날 기념식에는 윤경로 상임대표를 비롯해 이항증 공동대표, 정철승 조직위원장, 김용호 행사위원장 등이 참석했고 독립운동가 유족으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선생 그리고 김순흥, 권위상, 김희원 운영위원 등이 함께 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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