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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기념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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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기념엽서

admin | 화, 2020/05/26- 19:51

[소장자료 톺아보기•15]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식민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 기념엽서

남산에 위치한 구 조선총독부 청사

남산에 위치한 구 조선총독부 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은 형태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신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은 형태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신청사

 

경성의 명소로 소개하며 유통된 조선총독부 엽서들

경성의 명소로 소개하며 유통된 조선총독부 엽서들

 

경복궁 앞에 공사 중인 조선총독부 신청사, 조선총독부청사신영지, ⓒ 국립중앙도서관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식민통치 기관 설립을 위해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朝鮮総督府設置ニ関スル件)」을 공포, 최고 통치기구이자 수탈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입법·사법·행정기구는 모두 조선총독에 직속되었고, 1910년 9월 30일에 칙령 354호로 「조선총독부관제」가 공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중앙 조직이 1관방 5부제로 구성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이 새롭게 구성하게 되자 총독부와 중앙기관의 청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 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에 위치하였던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중앙기관의 청사는 기존의 중앙관아나 관찰부, 일본이사청 등의 건물을 사용하였다.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청사를 증축하였는데 ‘청사의 산재(散在)로 인한 집무 불편 및 노화’를 이유로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이 추진되어 1916년 6월 26일 지진제(地鎭祭)와 함께 신청사가 착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적인 건물이었기 때문에 조선 내 최고기관으로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입지 선정부터 심혈을 기울였다. 위압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의 중심부인 경복궁, 그것도 경복궁의 중심이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근정전 앞에 대규모의 건축물로 계획하여 영구적인 청사로 사용하고자 했다.
또한 도시의 중심축인 광화문 앞 육조거리를 건물의 중심축과 일치하도록 설계함으로써 도시의 중심에 신청사를 두고자 하였다. 내부공간의 구성은 정면의 주 출입구와 중앙 홀을 중심으로 하는 가로축과 양 측면의 부 출입구를 중심으로 한 세로축을 중심으로 엄격한 日자형의 대칭으로 구성하여 상징성을 극대화하였다.
기초공사는 1916년 7월에 착수하여 1917년 3월 말까지 진행되었는데 말뚝은 압록강 기슭에서 벌목한 나무 9,388그루가 사용되었다. 또한 건물에 사용된 콘크리트조의 총용량은 3,248 입평, 철근 중량은 1,220여 톤으로 매일 8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인력이 투입되었다.

1920년 7월 10일 정초식(定礎式)과 1923년 5월 17일 상량식(上梁式)을 거쳐 1926년 10월1일 시정기념일에 맞춰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함으로써 10년간의 긴 공사를 마무리하고 신청사가 준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5층 건물로 크기는 전면 약 131m, 측면 약 70m, 건평 2,219여 평, 연건평 9,471여 평에 달하는 건축물이었다. 건물 전체에 화강석을 두른 외관으로 높이는 정면 중앙부의 경우 약 23.3m, 첨탑 상부까지는 약 54.7m였다. 엄청난 크기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압도한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45년 8월 독립을 맞이할 때까지 19년 간 조선인들에게 공포와 억압, 수탈의 상징이 되었다.
광복 후 미국의 제24군단사령부로 사용되다가 1948년 8월 15일부터 대한민국 정부청사인 중앙청으로 사용되었다. 군사독재정권까지 계속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청사는 1986년 6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광복 50주년인 1995년 철거가 단행됐다.
조선총독부 철거 결정 당시에 ‘일제 침략의 상징인 건물을 완전히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과 ‘오히려 건물을 보존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충돌하였으나 결국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청사 중앙돔 첨탑철거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전체 건물을 완전히 해체했다. 청사를 철거한 부재(部材)들은 현재 독립기념관 야외공원에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불과 25년 전까지 민주혁명의 공간인 경복궁 앞 광화문에는 식민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 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 아닐까.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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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17]

조선의 통치자들은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 – 은뢰恩賴

 

조선신궁어진좌10주년기념 <은뢰> 표지

 

<은뢰>, 발음부터 어렵다. 뜻은 ‘천황’의 위엄한 자태 또는 존엄한 ‘천황’이 내려와 온 세상에 가득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목부터 이 책자의 편찬 방침이 ‘천황의 은혜’가 곳곳에 미쳐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시각적이고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은뢰>는 1937년 11월 조선신궁봉찬회에서 조선신궁 건립 1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사진첩이다. 따라서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하는 조선신궁의 모습을 중심으로 조선의 자연, 문명, 모성, 의례 등 350여 점의 사진 이미지 삽입, 총 338쪽으로 구성하였다. 책자의 크기는 가로 26cm, 세로 36.5cm
이며 재질이 좋은 종이를 사용하여 고급스러움을 추구했다. 비매품인데도 불구하고 발행년도를 달리하여 여러 쇄를 찍었는데 배포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조선을 통치하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증정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은뢰>의 소장처는 독립기념관과 연세대 등 몇몇 대학도서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데 인쇄 수량에 비해 발견된 것은 많지 않다. 연구소는 수집본과 기증본(즈시 미노루) 총 2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모두 1940년 판본이다.
<은뢰>는 총설편, 제1편~제5편,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설편에서는 신궁의 창립 유래와 진좌제 등 조선신궁을 개략적으로 소개한다.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내선융화’의 정서를 시각화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제1편~제5편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11년을 11개의 장, 5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각 장마다 해당 년에 일어난 사건과 각종 의례 등을 기록해 연보적 성격을 보여 주는데 각 지역의 신사와 명승고적 및 메이지 ‘천황’의 제사를 고르게 배치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실체는 사진첩에 나타내지 않고 있다. 대신 인간의 모습이 아닌 신성한 자연으로 표상된다. 나무, 해, 구름, 빛 등 자연의 모습을 신비로운 광경으로 이미지화하였다. 또 경성 전역의 야경 사진과 제신의 신체를 싣고 달리는 기차 등의 이미지를 통해 ‘천황’은 조선에 문명을 가져온 상징으로 표상되었다. 이러한 상징 기법은 “조선의 산천 가득히 생생한 발전모습이야말로 진실한 신광(神光)의 현현(顯現)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호도 ‘은뢰’ 즉 ‘천황의 은혜’”이며 “조선 전역 곳곳에 부는 신풍(神風)”과 함께 “내선동근(內鮮同根)의 사상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몽환적 분위기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은뢰>는 기념사진집의 성격과 함께 식민통치의 이념을 정서적 차원에 호소하는 선전물이다. 식민통치권력이 ‘사진’이라는 시각매체를 통해 식민통치의 역사를 기록하고 스스로 어떠한 판타지를 꿈꾸며 그것을 선전하려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강제병합을 하자마자 대한제국의 국가제례를 폐지하고 일본의 국가신도로 대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신궁 건립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메이지 ‘천황’과 일본 황실의 선조로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제신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조선신궁은 국가신도의 제사뿐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주요 시정과 행사를 알리는 의례 공간이 되었고 공식행사에는 반드시 이왕가를 참여시켰다. 또한 조선신궁은 조선 및 경성 관광 코스의 하나로 반드시 포함시켰으며 황국신민화정책이 전면화되면서 모든 학교와 단체의 공식적인 신사참배가 이뤄지는 내선일체의 공간으로 자리잡는다. 이들에 대한 참배는 결국 일본 황실의 조상을 섬기고 일제의 조선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었다. 신사 참배는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하려는 상징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 이후 민중이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이 바로 조선신궁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20/07/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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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16]

식민통치를 자화자찬하다 – 조선총독부 <施政25年史>

 

이제 우리 반도는 교육·문화·산업·경제·교통·토목·치안·위생 등 제반 시설을 모두 정비하여 완전히 지난날의 모습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불과 2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토록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대 사실이다.

<시정25년사> 표지
남면북양정책의 성공적인 성과물로 면양 교직포를 사용하였다. 부산시립 시민도서관 소장본(국립중앙도서관 원문이미지)은 면양교직포를 사용하지 않은 양장본인 것으로 보아 2종류의 표지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에서 식민지 통치 25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시정25년사> 서문의 일부다. ‘낡은 문명의 보잘 것 없던 조선’은 ‘선진 문명국 일본’의 통치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본서는 가로 19cm, 세로 26.5cm 크기에 매수가 무려 1,2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다. 표지는 조선산 면화와 양모로 방직된 면양교직포(綿羊交織布)를 사용하여 덧씌웠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값싼 조선인 노동력을 이용하여 일본에 필요한 면화를 충당할 목적으로 한반도의 남쪽은 목화 재배, 북쪽은 면양 사육을 강요하였다(南棉北羊정책). 이 과정에서 일본의 면방직 자본이 조선에 들어와 전국 각지에 직물공장을 세우고 조선인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식민정책의 결과로 완성된 면양교직포를 책 표지로 사용한 <시정25년사>는 조선발전의 찬란한 결과물로 둔갑되었다.
책장을 넘기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이마이다 키요노리(今井田淸德)의 서문이 쓰여 있다. 첫 머리에 “한국병합 당시의 조선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의 조선을 보고 그 진보의 발자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식민통치 ‘치적’을 들먹이기 위해 시동을 건다.
정무총감의 서문 다음에 목차가 구성되어 있고, 신·구 조선총독부 건물사진,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역대 통감과 총독(6명), 역대 정무총감(7명), 현재 총감과 정무총감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머리말(序說)을 통해 강제병합 전까지의 한일관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역대 통감과 조선총독
1대통감 이토부터 2대총독 하세가와까지 제복차림이었으나 3대총독 사이토부터 양복 차림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정책을 전환하면서 대외적인 이미지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식민지배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조선총독 역시 군 출신자로 문관이 임용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조선과 일본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중에 조선의 사정이 대내외적으로 동요가 있어 그 피해를 항상 일본이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청·일, 러·일전쟁도 조선의 영토 보전과 자국의 보호를 위해 국운을 걸고 감행했다는 것이다. 한일의정서를 맺음으로서 양국 동맹의 관계가 변화하여 한국의 내정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혁신되었으며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으로 한국의 폐정(弊政)을 이토 통감이 부임하여 개선시켜 나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일본의 성의를 이해하지 못한 ‘배일(排日) 무리’가 많은 단체를 만들어 불만을 나타내고 이토 의장이 하얼빈에서 암살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암살 위협에 놓여 있는 등 형세가 어지럽게 돌아가자 병합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병합을 이룬 후 25년에 걸쳐 반도의 통치에 전력을 다해 시련을 잘 극복하여 세계 여러 나라가 인정하는 통치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시정25년사>의 주 내용은 바로 이런 취지를 바탕으로 조선 통치의 특징과 변천 과정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제1기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으로 모든 시설들의 새롭게 만드는 단계로 제도를 만들고 조직을 새롭게 구성한 시기였고, 제2기 하세가와는 데라우치의 제도를 계승하고 정비하였으며, 제3기 사이토 시대에 산업, 교육, 지방자치 등의 발전을 이룩한 시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이출입누계비교표
조선총독부는 ‘병합’ 직후인 1910년부터 1932년까지 해마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무역액을 보여주며 식
민통치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제4기 야마나시는 앞선 정책들을 충실히 실행하여 그 성과를 거두었으며, 제5기 사이토는 지방자치제도의 완성으로 통치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비로소 제6기 우가키 시대에는 조선의 통치가 빛을 발해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여, 13쪽부터 986쪽까지 약 1,000쪽에 걸쳐 각 총독의 통
치를 모두 찬양일색으로 정리하였다.
다음으로 55쪽에 걸친 연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조인>을 시작으로 <1935년 8월 29일 시정25주년 기념사업으로 종합박물관 설치 발표, 30일 제령 제12호 식산계령을 공포>까지 구성하였다. 이후 조선총독, 정무총감, 식산국장, 법무국장, 경무국장 등 총독 부 본부 관료와 각 지방 법원장, 도지사, 학교장 등의 인사(人事)를 기입하였으며, 부표(附表)에서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 직제와 인구, 기상, 지방재정, 농축광산물, 금융, 철도, 도로, 통신, 교육 등 통계자료를 삽입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치적은 35쪽에 걸친 통계를 통해 알린다. 색상도표로 구성하여 식민통치 기간 중 조선의 ‘비약적 발전상’을 그래프로 보여준다.

 

 

발전하는 조선의 모습
정비된 도시와 발전하는 개항장, 쭉 뻗은 도로,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를 과거의 모습과 나란히 배치하여 조선의 ‘발전상’을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90쪽에 걸쳐 약 500점의 사진자료가 <시정25년사>의 압권이다. 경회루의 모습을 시작으로 조선신궁, 조선총독부, 각 지방 도청사와 같은 주요 시설물은 물론 도로망 확충, 농업생산력, 축산과 과수, 면업, 산림녹화, 금융 발전을 보여주는 사진, 교육, 예술, 보건, 생활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발전은 일본제국의 통치로 이룩되었다는 사실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시정25년사>는 식민통치의 주요 치적을 자랑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만든 식민통치 미화 홍보물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5년 후인 1940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따른 전시동원정책을 미화하기 위해 <시정30년사>를 편찬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20/06/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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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2]

나라를 팔아 특권을 누린 사람들 – <조선귀족열전>

 

<조선귀족열전>, 1910.12.13.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열전에 실린 백작 이완용

조선귀족 일본관광단朝鮮貴族の內地觀光團, <倂合記念朝鮮寫眞帖>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직후인 1910년 11월 3일, 도쿄를 방문하여 기념사진을 찍은 조선귀족 부부관광단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일본의 화족(華族) 제도를 모방해 조선에도 귀족제도를 실시했다. 화족이 옛 번주(藩主)와 명치유신의 주역으로 설정되었듯이 조선귀족도 일본의 정책에 순응한 사람을 기준으로 설정했다. 일본이 강제로 맺은 ‘합병조약’을 보면 ‘이왕가의 종친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예우를 하고(제4조), 훈공이 있는 한국인으로 특히 표창할 만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작위를 수여하고 은금을 하사한다(제5조).’고 명시했다. 이 두 조항과 함께 일본 황실령 제14호로 22개조의 「조선귀족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층을 포섭하기 위한 조선귀족을 선정하였다.
작위 범위는 「조선귀족령」 제2조, “이왕의 현존하는 혈족으로서 일본국 황족의 예우를 받지 아니한 자, 가문(門地) 또는 공로 있는 조선인에게 조선귀족을 수여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병합과정에 협력하거나 순응한 이왕가의 종친과 ‘보호정치시대부터 합병 전까지’ 정1품, 종1품 이상에 속하는 고위관료 총 76명에게 귀족 작위가 주어졌다. 특히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 자에게는 훈1등, 훈2등의 서훈을 추가했다. 그러나 작위 수여는 항구적인 친일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 충성하지 않거나 정책에 순응하지 않은 행위를 했을 때는 ‘반납’ 또는 ‘예우정지’, ‘세습불허’ 등을 규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조선귀족령」에 의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던 조선귀족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조선귀족열전>이다. 1910년 12월 13일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귀족열전>은 총 263쪽에 걸쳐 조선왕실과 조선귀족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목차는 ‘이왕가의 영광’과 「조선귀족령」 22개조,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이조선보(李朝璿譜)’, 대한제국 황실에서 일본의 왕공족으로 격하된 ‘창덕궁 이왕전하’ 순종을 비롯한 이왕가 5인과 함께 후작 6인, 백작 3인, 자작 22인, 남작 45인 등 총 81명의 조선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들의 경력과 인물평, 사진을 실었다.
특히 작위를 받은 귀족들의 인물평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완용의 경우, “한일합방의 대세가 바뀔 수 없는 것을 간파하고 정국의 추세에 순응, 합방조약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 8월 22일 데라우치 총독과 함께 조인하였다.”고 하며 “난관에 처해 있으면서도 책임을 완수한, 실로 식견이 탁월(卓絶)한 정치가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정부가 발표한 76명(왕공족 제외)의 귀족명단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의 대한정책에 순응한 자, 특히 강점에 기여한 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을사늑약의 성공적인 체결을 주도한 이지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정미조약에 앞장섰던 송병준, 정미칠적, 병합조약 체결로 ‘합방’을 완수한 이완용(李完用) 등 경술국적이 모두 조선귀족이 되었다. 특히 각 조약의 책임자인 이지용과 이완용은 등급이 높은 백작을 수여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에 큰 훈공이 있고 재상에 있던 자라 하더라도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을 옹호하는 자는 제외되었다.
일제는 귀족이라는 명예와 함께 막대한 부도 제공했다. 작위의 고하, 병합의 공로,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거액의 은사공채를 지급했는데 작위와 은사금은 당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속자에게 세습되었기에 매국적인 조선귀족들은 대를 이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나라를 팔아 얻은 부로 권세를 누리는 자들을 조선민중은 그냥 두지 않았다. 이들을 직접 암살하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졌다. 나인영, 오기호 등이 을사오적 암살을 실행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이근택은 기산도·이근철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으며, 이완용은 이재명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뜨거웠다. 그러나 작위를 받고 거액의 은사공채로 부를 축적한 조선귀족들은 대대손손 호의호식하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 강동민 자료팀장

목, 2020/02/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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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1 ]

전쟁포로가 된 식민지 조선인의 恨 – 시베리아 한恨의 노래

 

일본과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시베리아 억류기간중 미불임금 반환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인 故 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육필 원고

 

일제강점기 징병·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지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일대를 중심으로 집단 수용소 생활을 하며 수년간 가혹한 강제노동에 복역한 조선인들이 있다. 이들을 시베리아 억류자라고 한다.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자는 무려 1만여 명에 달했지만 현재 한국 내 생존자는 10여 명뿐이다. 1991년 한국 거주 생존자들이 ‘시베리아삭풍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피해보상운동을 전개했다. 2010년 일본국회는 ‘전후 강제억류자 특별조치법안’을 제정 했으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국적조항을 들어 보상에서 제외하였다. 끌고 갈 때는 일본인, 보상할 때는 한국인의 논리를 적용한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인 진주만에 폭탄이 쏟아졌다. 일본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을 단행한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만주를 침략한 이후 일본은 엄청난 양의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였지만 전쟁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특히 10여 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일본의 젊은이들이 수없이 죽어가자 일본의 눈은 조선의 젊은이들로 향했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은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평양전쟁 중 강제 징집되어 일본 관동군에 편입, 전쟁에 참가한 고 이규철의 육필 회고이다.
<시베리아 恨의 노래>로 원고제목을 붙인 이규철은 징집과정부터 부대배치, 자폭특공대 훈련, 시베리아 포로생활, 귀국과정 등을 총 237쪽에 걸쳐 수기로 작성하였다

<시베리아 恨의 노래> 표지

 

이규철은 1925년 1월 21일 경남 울산군 하상면에서 태어났다. 1941년 울산공립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주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 징집되어 일본 관동군에 편입되었다. 주요임무는 폭발물을 안고 소련 전차로 육탄 돌격하는 자폭특수대 역할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때 중국 동북부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은 대다수가 무차별 징집된 퇴역군인이나 초년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제 징집된 만주와 조선 청년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소련군 탱크로 폭탄을 들고 돌격하는 훈련을 받았다. 바로 이들 중 한 명이 이규철이었다.
일본군은 소련군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60여 만 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 중 1만여 명이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이규철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블라코베시첸스크에서 포로수송 화물차로 세레칸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48년 말까지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49년 2월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으나 조국은 분단되었고, 부친은 이미 고인이 되어 고향에는 모친과 형 둘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일찍 건빵으로 배를 채우고 전차격파 자폭대 훈련이 시작되었다. 길이 2m가량의 장대 끝에 원반 크기의 폭탄을 장치하고 그것을 들고 숲속에서 숨어 있다가 적의 전차에 뛰어들어 슬라이딩하는 식으로 전차 캐터필러 밑에 이것을 밀어넣어 전차를 폭파하는 일본 사무라이 전술이었다. 그 다음은 작은 귤만한 급조 폭뢰爆雷를 안고 전차를 파괴하는 훈련이다. 즉 급조폭뢰의 안전핀과 군복 가슴 단추를 짧은 끈으로 연결시켜 이것을 양손으로 껴안고 1인용 참호 속에 숨어 있다가 접근하는 적의 전차에 뛰어들어 전차 캐터필러 밑으로 이것을 밀어넣는 것이다. 그 순간 안전핀이 빠지는 동시에 급조폭뢰가 폭발한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하고 전차를 파괴하는 자폭특공대 임무를 한국인 초년병에게만 강요하였는데 불평불만이 통할 리가 없다.
8월 염천하의 고된 훈련으로 속옷은 땀으로 젖어 내의는 피부에 찰싹 붙어 걷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내 몸을, 내 목숨을 바치고 이런 싸움을 해야 하는가. 적함 굴뚝에 돌진한 신풍(가미카제) 특공대와 같은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 시베리아 억류당시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시베리아 한의 노래’ 육필 원고 중에서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20/01/21-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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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0]

한 뼘의 땅도 남김없이 철저히 파악하라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자료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공시 제9호, 54.2×38.8, 1915.8.10

고사告辭, 38.8×26.4, 1916.10

 

일제가 식민지 경영의 재정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벌인 첫 과제인 토지조사사업은 강제병합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12월 통감부 설치 이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한국의 토지제도와 토지소유관습 등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1910년 1월 그 결과물인 <한국토지조사계획서>를 대한제국 탁지부에 제출했다. 이 계획서는 토지조사국 설립과 토지조사 계획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10년 3월 14일 「토지조사국관제」(한국칙령 23호)가 공포되고 토지조사국이 설치되었다. 명의만 대한제국 기구였지 실제는 일제가 주도한 기구였다.
토지조사국에는 총재, 부총재, 부장, 서기관, 사무관, 기사, 주사, 기수 등을 두었으며 총재는 탁지부대신이 맡았다. 또 대구·평양·전주·함흥 4곳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1910년 8월 「토지조사법」을 제정하였다. 사업 실행을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될 무렵 강제병합이 일어나면서 토지조사사업은 자연스럽게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임시토지조사국은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관제」(칙령 361호, 10월 1일 시행)에 따라 설치되었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은 1918년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토지의 조사·측량 등 토지조사사업과 관련한 일체의 사무를 총괄했다.(임시토지조사국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통감부·조선총독부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과 경계를 조사하여 등기제도를 위한 장부를 제작하고 땅값을 조사하여 토지세를 부과하며 지형을 조사하여 전국 지형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각 지역별로 토지조사가 완료되면 이를 확인할 수 있게 공시한다.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공시문은 토지조사 완료를 마친 경상북도 지역의 자료이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은 경상북도 내 상주군, 선산군, 군위군, 청송군, 칠곡군, 울릉도 등 총 6개 지역의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지역 내 토지소유자와 그 경계의 사정査定을 완료했다고 1915년 8월 10일자로 공시한다(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공시 제9호). 이와 함께 임시조사국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와 지적도를 각 군청 소재지에서 열람하게 하여 토지 소유자가 확인하고 공시 기간 만료 후 60일 내로 이의신청을 받도록 하였다.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절차가 복잡하고 경상북도의 예와 같이 확인작업을 거쳐 짧은 기간에 이의신청을 해야 했다. 상당한 땅이 신고 누락이나 방법의 미숙지로 인하여 조선 내 최대 지주는 조선총독부가 되었으며 재정 수입 또한 크게 늘어났다. 조선총독부는 토지 일부를 일본인 지주들에게 헐값에 불하하거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기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측량작업을 완료한 직원에게 직무와 성적에 따라 퇴직상금, 재직상금, 사업종료특별상금 등 다양한 형태의 정부 하사금을 수여하였는데 심지어 이러한 개인포상금 사용에 대한 통제를 실시한다. 포상금을 받은 직원들에게 정부의 “은혜로운 상금”을 쓸데없는 물품을 구입하거나 유흥비로 탕진하거나 혹은 고향에 돌아가서 마을에 자랑하기 위해 치장하는데 낭비하지 말고 저축하라는 공지도 내린다(고사告辭, 1916년 10월).
토지조사사업은 1918년 말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토지조사국은 1918년 11월 4일 임시토지조사국관제가 폐지(칙령 375호)되면서 해산되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금, 2019/12/2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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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8]

 

해방이 아닌 침략 구호, ‘대동아공영권’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1년 일본에서 제작한 <대동아공영권지도大東亞共榮圈地圖>이다. 일본의 산업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가정의 빛(家の光)????이 창간한 지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록으로 발행한 지도다.
지도는 일본과 일본의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선과 항공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의 적이 본토를 폭격하는 가상도를 최상단에 배치하고 아래로 일제가 꿈꾸었던 대동아의 인구, 면적, 일본인 진출 수 등 각종 통계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직접적이고 전격적인 군사점령 대신 ‘함포외교(Gunship Diplomacy)’라는 우회 침략의 방식을 취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과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등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유혈 진압하면서 마침내 한반도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1910).
일본의 야욕은 이에 멈추지 않고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다. 쇼와(昭和)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군부는 ‘황군(皇軍)’을 자처하며 군국주의로 나아갔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몽고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주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여기에 대공황에 따른 정치·경제적 위기를 타개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결합하면서 군부의 모험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개전 두 달 만인 11월에 벌써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다음해인 1932년 3월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점령지역 철수를 권고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면서 노골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1937년 7월 일본은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군사충돌을 유발한 뒤, 중국본토를 침략했다. 순식간에 베이징, 톈진을 함락한 일본군은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의 인명을 살육하며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三光)작전’을 펼쳤다(난징대학살).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본은 전쟁물자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과 영국이 장제스 국민정부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경제 제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일본은 새로운 자원공급처가 절실하게 되었다. 결국 유럽 각국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빼앗기 위해 인도차이나(프랑스령) 침공했다. 이에 앞서 일본내각에서는 국책요강으로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결정하고 이를 전쟁확대의 명분이자 전쟁동원체제 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가 단결해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전쟁을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팔굉일우(세계를 ‘천황’ 아래에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정신을 바탕으로 각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
할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총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침략전쟁의 지속을 위한 인력충원과 물자 보충도 절실해져 갔다. 각종 전쟁물자를 양산하고 군사시설 등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군대의 경우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했으며 전투를 수행하는 현역 군인을 대신해 각종 군사 업무를 볼 민간인(군속)도 필요했다. 이러한 인력 수급문제는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젊은 여성의 징발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시체제 아래 조선 민중들은 오로지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을 위해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고 쥐꼬리만큼 떼어주는 배급품을 가지고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19/10/29-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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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화가가 그린 원태우 지사의 투석 장면이 묘사된 삽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 1905년 12월 8일자)

 

원태우 지사의 항거에 대한 삽화와 단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자)의 표지이다.

 

의거터 표석 자리에서 보이는 경부선 철길의 모습

 

안양 관악역 인접지(승강장 북단에서 25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의 모습이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4명의 범인이 포박되어 그 중에 2명이 자백했다는 급보가 날아들게 된다.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 (1905년 12월 8일 발행)에는 이날의 상황을 묘사한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의 삽화 하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민소(憫笑, 가엽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의 설명문에도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農民)으로, 대사(大使)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항거의 의미를 축소하는 어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잡지의 본문에 게재된 「대사(大使)의 조난(遭難)」이라는 짧은 글에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토 대사는 22일 하야시 공사 등과 더불어 수원부에 사냥을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부철도의 열차를 타고 오후 6시 안양정거장을 발차하자마자 이내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진자가 있어, 돌이 유리창을 깨고 후작(侯爵, 이토)의 얼굴을 덮쳤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협약(協約, 을사조약)에 불평하는 폭한(暴漢)의 소행일 거라는 말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한제(韓帝, 한국황제)는 이 사변에 대해 매우 심통(心痛)하여 23일 오전 2시 예식원경(禮式院卿) 이근택(李根澤, ‘이근상’의 오류)을 대사의 여관 대관정(大觀亭)에 보내 정중한 위문(慰問)을 겸해 사의(謝意)를 표하도록 했으나, 대사는 어제 저녁의 일은 본디 아희(兒戲, 어린아이 장난)와 같은 것이었고 또한 부상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일도 아니었기에 결코 깊이 존려(尊慮)를 기울여 주실 일은 아니라고 답주(答奏)하였다. 이 폭한은 그날 밤에 포박 되었는데, 과연 취한(醉漢)의 악희(惡戲, 고약한 장난)로 추호(秋毫)도 고의(故意)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이토 대사가 매우 대범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인물인 듯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예식원경 이근상의 사죄 방문에 이어 그날 아침이 되자 궁내부대신 이재극(宮內府大臣 李載克)이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사죄와 위문을 뜻을 전하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상황이 이어졌는데, 한껏 쇠잔해진 국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참으로 서글픈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처리 결과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에 수록된 「이토대사 탑승열차 위해범 원태근 조치 건」 제하의 문건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선고서(宣告書)
경기도 과천군 안양시장(安養市場) 22통 호 불상(不詳)
원태근(元泰根) 당 22년

피고는 명치 38년(1905년) 11월 22일 동 시장의 이만여(李萬汝) 외 2명과 함께 일가(日稼, 날품팔이)를 위해 영등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마신 결과 약간 술에 취하여 동일 오후 6시 17분 경 경부철도 안양역 서북방 약 8백 미터 안양 부근에서 북행열차가 진행하여 오는 것을 보고 마침 가지고 있던 작은 돌멩이를 선로 위에 놓아두는 것을 동행자인 이만여가 이를 제지하여 스스로 이를 치워버리자 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주먹 만한 크기의 화강석(花崗石)을 주워 객차를 향해 던졌기 때문에 차창이 파괴되어 당시 차 안에 있던 승객 한 명에게 미상(微傷)을 입히게 하였다.(중략)
이상 피고의 행위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 제4조 제9항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정상작량(情狀酌量)하는 것으로 함에 따라 군율위범심판규정(軍律違犯審判規定) 제6조에 의거하여 감금(監禁) 2개월, 태(笞) 1백에 처한다.

명치 38년(1905년) 11월 25일
한국주차헌병대장 오야마 미츠키(韓國駐箚憲兵隊長 小山三己)

 

<각사등록 근대편 자료>에 수록된 「조회(照會) 제25호(외부대신 발신, 의정부 참정대신 수신, 1905년 7월 10일)」에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의 세부사항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확인해보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4조 제9항은 “아군(我軍)의 징발(徵發)에 응(應)함을 거(拒)하고 우(又) 방해(妨害)한 자(者)”로 표시되어 있다. 달리는 열차에 돌멩이를 던진 사안과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으므로, 요컨대 선고서를 작성할 때 군율의 해당 항목을 잘못 인용 기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돌을 던진 한국인의 이름이 ‘원태근’으로 적혀 있지만 호적자료에는 그의 정체가 원태우(元泰祐, 1882~1950)로 기재된 것으로 확인된다. 원태우 지사는 이때 혹독한 구타로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면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한국전쟁 발발 시기에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행적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1990년에 이르러 겨우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그 결과 뒤늦게 ‘원태근’이라는 이름 아래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금, 2019/02/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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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46

01

류제갑의 해군병지원자훈련소 제2기생 수료증서(1944년 7월 31일 발급)

 

02

류제갑의 비봉공립보통학교 졸업증서(1938년 3월 25일 발급, 전북 전주군 소재)

 

조선인의 참정권 및 병역의무에 대하여는 당국자 간에 숙의한 결과로 약 10개년 간 후에 부여하기로 정하였는데 특히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인에게는 외무성의 주장으로 일본관민과 동일한 자격을 여(與)하기로 결(決)한 후 각국 정부에게 통첩하였다더라.

 

이것은 원래 <황성신문>이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제호 변경을 강요당한 <한성신문>1910년 9월 6일자에 수록된 「조선인 권리 의무」 제하의 기사 내용이다. 여길 보면 막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에 대해 병역의무의 부과를 10년간 유예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언어 차이로 지휘통솔이 쉽지 않은데다 함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사변(1931년)을 거쳐 중일전쟁(1937년)에 이르러 소모적인 침략전쟁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인 1938년 4월 3일에 맞춰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은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였다. 겉으로는 ‘내지인(內地人)’과 신분취급상 아무런 차별이 없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본질은 역시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에 따라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가 양주 공덕리에 이어 평양 신양정과 시흥 독산리에 잇따라 설치되었고 1944년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통해 배출된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입소자들은 현역병 또는 제1보충역의 신분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전선으로 끌려갔다. 이와 아울러 1943년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이 별도로 제정되어 해군병지원자훈련소(海軍兵志願者訓練所)가 경남 창원(진해)에 설치되었다. 육군에 이어 해군에까지 지원병제도가 확장된 것은 태평양전쟁(1941년)의 확전에 따라 해군병력의 조달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03

조선총독부 해군병지원자훈련소의 간판 모습(『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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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지원병제 발표 현장(해군무관부 앞, 서울 남산동 소재)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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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지원병 제2기생 모집규정이 수록된 매일신보 1943년 11월 27일자 기사

 

그러나 때마침 1942년 5월 9일에 공표된 징병제 실시계획이 1944년부터 시행됨에 따라 지원병훈련소는 불과 1년 남짓 만에 해체되었다.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실시에는 일시동인(一視同仁)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현하여 명실상부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도록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이 내세워졌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따라 제1기생 1,000명은 예정대로 6개월 훈련과정을 거쳤으나 제2기생은 4개월도 채우지 못한 채 조기 수료하기에 이르렀다.
존속기간도 짧고 배출인원도 상대적으로 적은 탓인지 해군병지원자훈련소에 관한 실물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편이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입소허가자 명단이 꼬박꼬박 게시되었던 육군병지원자훈련소와는 달리 해군병지원자훈련소의 모집합격자에 대해서는 군사보안상의 이유 때문인지 전혀 알려진 바 없었다. 따라서 여기에 소개하는 ‘해군병지원자훈련소 수료증서(1944년 7월 31일 발급)’는 그만큼 희소가치가 높고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겠다.
이 수료증의 주인으로 표시된 류제갑(柳濟甲)은 1926년 7월 15일생으로, 이것과 함께 입수된 ‘졸업증서’에 의해 전라북도 전주군 비봉면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 18세의 나이였던 그의 생사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인데, 그가 과연 이 광란의 전쟁터를 무사히 빠져나와 평온한 삶을 되찾았는지 그것이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9/0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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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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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회회장 경복궁 그림 共進會會場景福宮之圖, 54.2×79, 1915. 조선을 강점한 후 5년 동안 조선을 통치한 실적을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해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경복궁을 헐어내고 물산공진회장으로 개조한 전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몽매한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홍보영화나 가요, 라디오방송, 어용신문인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앞 다투어 홍보했는데, 박람회도 마찬가지로 조선의 발전상을 보여준다는 명목 아래 개최한 전시성 이벤트였다. 이러한 전시행사는 품평회, 물산회, 공진회, 박람회 등 다양한 명칭으로 수시로 개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1915), 조선부업품공진회(1923), 조선박람회(1929), 신흥만몽박람회(1932), 조선대박람회(1940)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최초의 공식 박람회로서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지 5년째 되는 해인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50일간 개최되었고, 전시장소는 조선왕조 통치의 핵심공간인 ‘경복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빌미로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 몇 군데만 남기고 무수한 건물들을 헐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게 되니 공진회장을 경복궁으로 선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각도의 물산품을 전시하여 시정 이래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목적과 아울러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조선을 일본에 홍보하여 일본 기업과 일본인들을 조선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이른바 ‘식민植民’의 선전장이었다. 주요 전시관은 제1진열관, 제2진열관, 미술관, 기계관, 근정전 회곽廻廓, 철도국 별관 등이며 전시물로는 각종 산업에 관한 물품을 망라하고 외국품도 조선의 산업상 필요하다 인정하는 물품을 출품하는데 각 부류를 통틀어 4,665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공진회장으로 사용하는 건물이 무려 5,226평이며 경회루에 매점과 음식점을 만들고 야간에도 개장하여 관람객의 입장을 자유롭게 하여 ‘경복궁’을 유흥 장소로 사용하였다. 더구나 경복궁 내에 가건물 축사를 지어 소, 닭, 돼지까지 전시하였으니 한 나라의 지엄한 공간이었던 경복궁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경복궁을 전시장으로 선택하여 훼손함으로써 조선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조선총독부는 심지어 공진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철거된 기존의 전각들을 민간에 불하해버려 왕궁의 건축물들이 돈 많은 부호들에게 넘겨지거나 혹은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밖에 총독부의 통제 아래 있던 여러 신문사와 관변단체를 동원하여 조선부업품공진회(1923, 조선농회), 조선가금공진회(1925, 조선축산협회), 조선박람회(1926, 조선신문사), 조선산업박람회(1927, 경성일일신문사), 조선산업박람회(1935, 조선신문사)를 잇달아 열었다. 만주사변 도발 이후 만주개척의 꿈을 조장한 신흥만몽박람회(1932, 경성일보사)와 중일전쟁 이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상을 심어주기 위한 조선대박람회(1940, 경성일보사)는 박람회의 목적이 점차 산업·경제적인 측면에서 정치·군사적인 곳을 향해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박람회는 일정한 배치방법에 따라 진열하고 그것들을 상호 비교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 우열을 가르게 하고, 시정의 성과를 각종 도표와 지도와 사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듯 각종 박람회는 조선총독부 시정의 무단성과 억압성을 배제한 채, 단지 성과만을 수치화·통계화하여 그들의 업적을 미화하는 선전장이자 조선 민중을 현혹하는 근대적 이벤트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18/05/2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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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신궁전경도, 77.6 X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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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신사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신사로 병합 이전에 이미 ‘관폐대사’로 승격운동이 일어날 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신사다. 1936년 8월 1일 ‘국폐사’로 격상되었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를 말한다.

 

“1678년 3월 왜관을 부산항에 설치할 때, 대마도 영주가 용두산에 평방 4척(尺)의 석조 소사(小祠)를 세워 한일 상선(商船)의 안전을 기리기 위해 금도비라(金刀比羅) 대신을 봉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금도비라 신사로 칭하다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했고, 1899년 그 규모를 확장해 사전의 면목을 일신하자 용두산신사로 개칭했다. 이 신사는 부산을 대표하고 경남을 압도하는 조선 최고의 신사이자 대륙진출의 수호신으로 그 신위를 온 나라에 혁혁히 떨치고 있다.”
<대륙신사대관>,1941

 

서울 남산공원, 부산 용두산공원, 대구 달성공원, 전주 다가공원, 진해 제황산공원.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원으로 모두 일제의 침략신사가 자리했다. 신사神社란 일본 신도神道 신앙의 종교시설로, 왕실의 조상이나 민간 고유의 신앙 대상을 모신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사당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집을 뜻하지만, 일본의 신사는 다양한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 수가 무려 800만에 달한다.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1876년 부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후 조성된 일본인 거류지에는 서양식 공원이나 호텔, 교회 등과 같은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강제병합 이전 공원이나 묘지 등은 세금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고, 신사 설립도 적극 추진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며 ‘천황’의 은혜로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천황’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시설로 ‘신사’를 이용했다.

 

03

대구 달성공원 내 황조요배전

04

전주 다가공원 내 전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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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제황산공원 내 진해신사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를 맞아 신사 관계 법규를 정비한 뒤인 1915년 8월 조선에서도 조선총독부령 「신사사원규칙」이 제정되었다. 신사와 사원은 희망자 30명 이상의 연서를 통해 설립을 허가받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사실상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사가 공인되었다. 또 1917년 3월에는 「신사에 관한 건」으로 작은 규모의 신사, 즉 신사神祠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였다.
산 입구부터 계단을 쌓아 신사로 올라가는 참배로를 만들고, 산 중턱에는 도리이鳥居를 세워 도시 어느 곳에서도 우러러 볼 수 있는 곳에 신사를 지었다. 신사가 조성된 공원 주변에는 관공서와 금융기관, 경찰서 등 일제 핵심 통치기구들이 밀집했다. 이렇게 신사는 도시 중심부에 ‘식민통치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일제 침략신사의 목적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신사는 ‘조선신궁’이다. 1912년부터 추진해 1920년 기공식을 가진 후, 1925년에 완공했다. 조선신궁이 들어선 남산은 조선시대 도성 사산四山의 하나이자, 금산禁山으로 엄격히 관리되었으며 국사당國師堂이 자리잡고 있는 등 한양의 수호산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건립하기 위해 산 정상의 국사당을 이전하고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의 서쪽 산허리를 완전히 깎아냈다. 조선 초기부터 신성시하여 오던 남산은 침략신사인 조선신궁이 자리 잡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18/03/2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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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9

01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교제관시보이던 하야시 부이치의 유고 사진집 <조선국진경> (1892)의 표지

 

02

1882년 재동에 설치된 ‘외아문’의 대문 모습. 대문 기둥에 걸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또렷하다.

03

‘기보포정사’라는 편액이 내걸린 경기감영 대문의 모습

 

04

서울 남산에 있던 일본공사관 구역 안에서 외아문 독판 민종묵(한복 차림)과 서울주재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청국주차조선총리 위안스카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선국진경>을 남긴 일본공사관원 하야시다.

 

돈의문(敦義門)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오른쪽에 이태호(怡泰號)의 각색점(各色店)이 있고 남쪽으로 붙어서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 씨의 우소(寓所)이며 이어서 법국이사관(法國理事官)의 공서(公署)가 된다. 왼쪽에 아라사와 미국 양국의 공사관이 있으며 또한 좌우로 미합중국 전도사 여러 사람의 거택, 부인병원(婦人病院), 여학교 및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이곳에 있는데, 모두 합중국 전도사의 감독에 관계된다. 독일상(獨逸商)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지점과 아울러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도 역시 이곳에 있다. 미공사관의 남린(南隣)은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이며, 그 안쪽에 영국총영사관이 있다. 거기에 상림원(上林苑)의 뒤편 작은 언덕에서 시가를 내려 보면 조망이 아름답다. 독일제국영사관은 왕성(王城)의 동방 안동(安洞)에 있으며 우리 공관(일본공사관을 말함)의 정북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1891년에 발행된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제 막 서양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정동 일대의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각국 공사관의 위치는 물론이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이나 근대식 공립학교의 효시로 일컫는 육영공원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남긴 이는 일본공사관의 관원이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로, 이 책 말고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사진첩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군소주계(海軍少主計, 경리장교) 출신으로 1888년 7월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로 서임되는 동시에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발령받아 그해 8월부터 1891년 10월까지 서울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 후 3년 만기 근무의 대가로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892년 1월에 재차 임시파견의 명을 받아 조선 각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던 차에 그가 승선한 이즈모마루(出雲丸)가 그해 4월 5일 전라남도 소안도 앞바다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에 일찍이 사진기술을 익힌 그가 평소 여가를 활용하여 담아낸 120여 장의 조선 관련 사진자료 가운데 이를 선별하여 그의 처 하야시 카메코(林龜子)가 유고 사진첩으로 묶어낸 것이 바로 ????조선국진경????이었다.
이 사진첩에 수록된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서울 도성의 각 성문을 비롯하여 경복궁 광화문과 창경궁 홍화문, 그리고 동묘 남묘 세검정 영은문 남한산성 등과 같은 여러 문화유적의 옛 모습이 담겨 있다. 대개 익숙한 풍경이긴 하지만, 그의 조선주재 시기에 비춰 촬영시점이 명확하게 파악되므로 이들 유적의 원형고증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정동 일대에 포진한 각국 공사관의 전경은 물론이고 용산과 마포 일대의 강변풍경과 부산, 인천, 강화 등지를 포함하여 저 멀리 거문도와 제주도의 풍광까지도 두루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남산 부엉바위약수터의 모습이라든가 초가집에 파묻힌 원각사탑(지금의 탑골공원 자리)과 조대비(익종비)의 장의행렬과 같은 이색적인 장면도 담고 있다.
또한 이 사진첩의 강점은 여느 사진자료에서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공간들의 모습을 다수 채록해두고 있다는 점인데, 예를 들어 훈련원 청사와 하도감의 전경, 그리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라든가 경기감영의 대문 사진 등이 그것이다.
흔히 ‘외아문(外衙門)’으로 불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개항기의 외교통상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882년 12월에 재동에 있는 민영익의 집터(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치한 중앙행정기구이다.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외무아문(外務衙門)’으로 고쳤다가 다시 1895년 7부 편제로 전환할 때 ‘외부(外部)’로 개칭되며, 그러다가 1896년 6월에 이르러 광화문 앞 옛 이조 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요컨대 ‘외아문’은 세계열강과의 교섭이 본격화하던 시기에 이들을 상대로 한 외교업무를 전담했던 주요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기관에 관한 사진자료는 퍼시벌 로웰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885)에 수록된 단 한 장의 사진을 빼고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바로 하야시가 남긴 이 사진첩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는 외아문의 대문 모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진의 희소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것 말고도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라고 새긴 편액이 달린 경기감영의 대문 모습도 크게 눈길을 끄는 사진자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보’는 경기도를 가리키며, ‘포정사’는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으뜸 관아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따지고 보면 ‘경교장’이라는 명칭의 어원도 바로 이곳 경기감영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이곳의 옛 모습은 대개 1902년 한성부 청사가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의 것만 더러 남아 있을 뿐 명실상부하게 경기감영 시절의 것은 제대로 구경해 보질 못했다.
일본공사관원이던 하야시가 짬짬이 채록한 이러한 사진자료들은 애당초 점차 자기네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되고 있는 ‘잠재적 식민지’ 조선에 대한 충실한 정보보고의 용도로 제작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우리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땅의 옛 모습을 사진자료로나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는 셈이다. 마치 일제가 문화침탈을 위해 제작 배포한 ????조선고적도보????가 오늘날 유적지 복원의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제작된 근대 사진첩의 양면성은 대개 그러한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1/2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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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6

01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1학년용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1915) 표지와 본문>

 

10월 9일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날, 바로 한글날이다. 올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세종 28년, 1446년) 지 571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국기’로, 그것도 ‘국어’의 지위를 빼앗긴 ‘한글’로 배우는 참담한 시대를 보여주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제1학년용 ????보통학교조선어와한문독본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교과서이다.교과서는한사회의교육이념을반영할뿐아니라그 사회의 구조 및 지식 발전 정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189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국민소학독본????으로알려져있다.이 시기한성사범학교령,소학교령을공포하고한성사범학교 규칙과 소학교 규칙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8년에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을 공포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이 담긴 교과서들을 판매 금지시키는 한편,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국어’라는 명칭 대신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하고, 대부분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기술하게 했다. 이로써 ‘조선어’와 ‘한문’ 과목 이외의 대부분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편찬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일제의 충성스러운 제국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은 바로 이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조선총독이 모든 사항을 관할했다. 1911년 9월부터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우리말이 ‘조선어’로 일본어가 ‘국어’로 바뀌었으며, 일장기를 ‘국기’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이른바 ‘교육칙어’를 근거로 식민화 교육을 본격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독본????과 ????국어[일어]독본????은 식민정책을 알리고 시행하는 교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철자, 어휘, 절과 문장 학습, 글 읽기’ 등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좀 더 체계적인 모습을 띠게 되나,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나 애국적인 내용은 모두 빠지게 된다. 그 대신에 주로 상식과 관련된 설명문, 우화 등의 이야기, 서간문, 속담, 노동, 수필, 문학 작품, 예절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총 120쪽에 84과(課)로 구성된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은 기본적인 한글체계인 모음을 제1과로 시작하여 자음과 단어 연습, 짧은 문장, 수와 관련된 글자를 ‘조선어’와 ‘한문’을 혼용하여 설명했다. 가족관계, 신체, 시계 등 간단한 단어를 시작으로 예절, 국기, ‘천황’ 등 ‘예절과 도덕’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식민치하의 특수한 상황에서 강요된 규율과 지침이었다. “황국 신민다운 자질과 품성을 구유(具有)케 해야 한다.”는 일제의 교육목표처럼, 도덕과 예절은 식민지민으로서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특히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병참기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대두된 ‘대동아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반영되었다. 따라서 일본을 중심으로 황국 신민화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소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의 단선 학제를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언어도 ‘국어’로 통일하여 조선어 말살정책을 실행하였다. ‘조선어 말살정책’은 1937년 이후 학교, 병영, 관공서, 사회 전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실행된 정책으로 이른바 ‘국어상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를 반영한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바꾸어 사실상 폐지하였다. 이로써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조선에서의 ‘나랏말’ 교육은 사라져 버렸다.

∷ 강동민 자료팀장

목, 2017/10/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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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5

 

“찌는 듯이 무더운 남방에서는 아귀 같은 미국과 영국을 쳐물리기 위한 싸움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더위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01

<애국반회보 뒷면>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3년 8월 1일, 국민 총력조선연맹에서 발간한 제32호 애국반 회보 다. 애국반 회보는 1941년 9월 인가를 받아 매 월 1일에 발행되던 간행물로 내용은 전시상황 에서 후방은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특히 32호는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에 발행한 것으로 주요 기사의 내용도 여름 철 후방의 전시준비태세에 관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더위에 지지 말고 몸 을 튼튼히 해서 근로보국에 힘씁시다’에서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 덥게 느껴지니 더위를 잊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며, 전투 중 인 병정들을 생각하면 덥다는 생각조차도 하 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몸이 약하면 더 위에 지게 되니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 으로 ‘신사나 절, 공원을 청소’, ‘개천이나 하수 도, 농촌이나 공장에 근로봉사’, ‘5리쯤 되는 데 는 걸어 다닐 것’ 등을 소개한다. ‘전시살림은 이러케!’에서는 전쟁은 제일선의 병사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 일터, 거리 등 싸움터가 아닌 곳이 없으며 특히 부엌에서 밥 지어 먹는 것도 ‘전쟁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생 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싸움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활전선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 어나고 지각과 결근하지 말라고 선동한다. 저금은 나라의 힘이며 시중에 돈이 돌지 않게 되면 물 건값도 올라가지 않고 살림살이도 안정되며 결국 이는 집안이 부자가 되는 것이고 곧 나라가 부 자가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각 가정에 강제저축을 독려했다. 또한 옷감을 만들기 위해 쓰는 양잿물을 화약으로 만들면 대포알 630만 발, 총알 17억 7천 8백 만 알이나 되니 각 가정에서는 헌 옷을 고쳐 쓰고, 애국반원끼리 돌려가며 나눠 쓰라고 강조한다.

02

<애국반회보 앞면>

특히 ‘언제나 전장에 나간 병사와 갓튼 생각으로’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지 말고 ‘미국과 영국식 옷차림을 좋아하는 자는 우리의 원수’라고 지칭하며 전시 물자절약을 ‘전쟁승리’와 ‘애국’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날은 왓다 징병준비는 다되엿슴니까’에서는 곧 실시될 징병제에 대해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감격’으로 칭하며 징병대상자는 호적을 정리하고 국어(일본어)를 배우며, 대상자가 아니더라도 만17세 이상의 남자는 지망하라고 독려하며 조선의 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다 읽으섯거든 뒷면에 있는 그림을 하나식 따로 오려서 눈에 잘 띄이는 곳에 부쳐 두십시요”라는 문구를 따라 회보의 뒷면을 보면 전시생활에서 지켜야 할 일들을 만화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으싸! 결전생활로’라는 구호 아래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음식을 남기지 말며, 무지각 무결근하고, 옷을 기워 입으며, 출장 갈 때는 각반을 준비해 비상시를 대비하고, 옷소매 폭을 줄여 옷감 낭비를 줄이고, 출정 군인 집이나 그 유가족의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애국반’은 전쟁동원을 선전·선동하고 민간인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목적으로 각종 관변기구와 친일단체를 흡수해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기구로 주민 통제와 조선총독부의 정책 홍보, 물자와 노동력동원 등에 활용되었다. ‘애국반 회보’는 바로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시책을 말단 주민조직까지 전달·관철시키는 수단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17/09/2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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