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 3월에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왜 다시 진상규명법이 제정된 건가?
2. 최근에는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군인들에 의한 여성 성폭행 문제가 새롭게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오랜 시간 폭도로 매도당하면서 피해자 가족들이 입었던 2차 피해와 트라우마도 극심했죠?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를 인권문제 차원에서 좀 더 광범위하게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지고 있는데?
3. 이번 진상규명 과제 중 하나로 ‘5.11연구위원회’라는 게 나옵니다. 이게 무엇인가?
4. 5.18이 ‘민주화운동’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5. 최근 5.18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시아 곳곳에서 불리고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1~2부_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10일간의 기록_5월 22일~27일까지 광주시민들이 민주주의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 이야기합니다.
올해는 5·18이 일어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우린 광주의 정신을 계승한 투쟁을 통해 권좌에 올랐던 학살자들을 법정에서 내란죄로 처벌 했고, 518은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으며, 폭도로 몰렸던 항쟁의 주역들은 민주주의 지킨 국가유공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마치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전두환은 뻔뻔스럽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보수라고 일컫은 몇몇의 무리들은 광주를 폭동, 북한군의 개입이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일베나 보수유투버들은 희생자를 모욕하는 발언을 끊임없이 내뱉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방송은 40주년을 맞은 5.18을 맞아 광주의 정신은 무엇이며 특히 반역사적이고 반민주적인 시도가 일어나는 현실속에서 다시 광주 518의 역사적의미가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나 40년이 지난 지금 까막득한 옛날 사건 중 하나로만 알고 있은 젊은세대들에게 어떻게 그 의미를 전달할 것인지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함께 이야기기 나눌 노영기 교수는 5.18연구의 권위자로 ‘왜 국민의 군대가 국민들에게 총을 쏘았을까?’라는 질문을 안고서 한국현대사 공부를 시작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2007년까지 조사관으로 활동하며 12·12와 5·18과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검토하고 관련자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65)의 친일행적은 10여년 전부터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가 친일파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어떨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산 소고기 투쟁,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정치학자로서 개입해온 이해영(사진)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가 이번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의 전력’을 파고들었다.
이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삼인)는 지난 8년 남짓 직접 발굴한 최신 자료들을 종합해 그동안 알려진 일본명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친나치 활동까지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지난 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 연구’ 출간 8년간 독연방문서보관서 등 자료 수집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 등 2차 대전 2년반 ‘나치독일 행적’ 추적 “유럽첩보 총책 에하라의 특수공작원”
정부 나서 ‘안익태 파일’ 등 검증 필요 “국회에서 ‘새 국가 제정’ 공론화 계획”
▲ 1942년 2월3일 열릴 나치 정권의 전쟁 부상자와 가족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 연주회를 앞두고 안익태(오른쪽)가 지휘할 <일본 축전곡>에 대해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와 상의하는 모습. 촬영 일시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소, 삼인 제공
그 자신 안익태의 주 활동무대였던 독일에서 유학했고, 클래식 음악과 오디오 애호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논쟁적 정치학자답게 안익태 문제에 대한 기존 음악계의 학문적 접근보다 주장이 선명하다.
안익태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5년께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때만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익태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대로 귀국하게 되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오기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익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안익태는 1941~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는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약한 민족주의 성향마저 탈색되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전향했는데, 본래부터 음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안익태가 지휘한 여러 공연이 ‘독-일협회’의 주최와 기획으로 열렸다는 데 주목한다. 독일과 일본의 민간 친교·학술 교류단체였던 독-일협회는 나치의 제정 지원을 받는 당 외곽 조직이자 두 나라의 대외 선전도구 구실을 했다.
▲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페스티 비가도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이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있다. 삼인 제공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이 교수는 안익태를 에하라의 ‘특수공작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안익태는 미리 일본의 첩보를 입수한 듯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의 우방국이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기피 인물’로 지정된 안익태는 파리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친나치 활동을 방증한다.
그동안 직접 독일 연방문서보관서를 드나들며 ‘안익태 파일’ 등 자료를 복사해왔던 이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추가로 기록과 자료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안익태 행적 관련 사실관계가 70% 정도밖에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정부에서 정식으로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 있는 안익태 파일을 복사해오고, 영상 자료도 사본을 확보해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있는지도 조회를 요청하는 등 정부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 대표적인 프랑스의 나치 부역 신문인 <르 마탕> 1944년 4월 19일치에 실린 사진. 전날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에키타이 안(오른쪽)은 유명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왼쪽)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협연했다. 삼인 제공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국가 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했었다. 즉,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문제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필요성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60년 넘게 안익태의 유럽 행적이 은폐된 상황에서 그나마 친일 문제가 터진 것도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지금도 서점에선 여러 종의 ‘안익태 위인전’이 유통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 나치 부역만으로도 프랑스에서는 사형감이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등에서도 비열한 부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부르는 상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교수는 새로운 ‘국가’ 제정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해볼 계획이다. “국가는 가장 중요한 나라의 상징체계 가운데 하나로,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핵심적인 제의적 절차다. 그런데 비애국적인 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런 문제를 과연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애국가’ 같은 기본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제는 답변해야 한다.”
김지훈 기자 [email protected]
▲ 철거전김정태흉상 김정태 흉상 철거를 위해 사전에 경계석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 ⓒ 국가보훈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2019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전남교육청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다. 지난해로 9회째를 맞았다. 지난해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다. 도내 중·고교 70여 개 팀이 참가했다.
‘친일파’ 흉상이 있다는 사실 알게된 학생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다.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광주군수·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했다. 중추원 의원 시절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에 대해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 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됐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민원 제기 학생의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 제곱미터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2020년 4월 28일, 흉상 철거되다
▲ 김정태 흉상 제거 영상 김정태의 흉상이 기단부에서 분리되고 있다. ⓒ 국가보훈처
▲ 철거중흉상 김정태의 흉상이 철거되는 모습을 후손과 관계자가 바라보고 있다. ⓒ 임승관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다. 결국 후손들은 지난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됐지만, 필자는 그날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 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사례로 의미가 크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 성과를 이룬 보훈처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5.18민주광장에 ‘예술법정’ 개막 ….친일독재자.5.18가해자.망언자들 전시
‘법이 하지 못한 심판. 붓으로 심판하다’…민미협. 민문연 광주지부 주최
비엔날레 출품작 ‘일제를 빛낸사람들’ 좌우에 전두환 등 5.18학살자 추가
ⓒ예제하지난 16일 5.18민주광장 ‘문화예술법정’에 걸린 친일파 심판 그림으로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에 출품된 ‘일제를 빛낸사람들’과 5.18학살주범들의 얼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예제하이상호 화백이 16일 오후 자신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 걸린 문화예술법정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예제하ⓒ예제하왼쪽부터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사무국장, 이상호 화백. ⓒ예제하ⓒ예제하(사진 윗. 아래)16일 오후 5.18민주광장 ‘문화예술법정’ 앞에서 이상호 화백(왼쪽)과 주홍 화가가 상황극을 펼치고 있다. ⓒ예제하
지난 9일 폐막한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에 출품돼 국내외 문화예술계와 언론 등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던 이상호 화백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 5.18민주광장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제41주년 5.18민중항쟁행사위원회와 광주민미협(회장 박태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는 지난 16일 오후 5.18민주광장 민주의종 앞에 ‘문화예술법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상호 화백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 작품 좌우에 전두환 노태우 등 5.18학살주범 등 친일독재자와 5.18가해자 망언자들의 얼굴을 풍자한 기존 작품을 덧붙인 작품을 전시 중이다.
‘법이 하지 못한 심판, 붓으로 심판하다’라는 주제로 개막한 이번 제41주년 5.18민중항쟁 문화예술법정 작품은 악질 친일파 92명을 수갑과 포승줄로 묶은 ‘일제를 빛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군사독재로 이어진 굴곡진 역사를 그림으로 단죄한 작품이다.
전시 중인 작품은 ‘일제를 빛낸 사람들’ 좌우에는 친일파를 계승하여 1980년 5월 당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노태우 등 친일독재자이자 5.18학살주범들, 그리고 5.18정신을 노골적으로 왜곡하고 폄훼한 대표적인 정치인 등을 배치했다.
이번 전시작품은 이상호 화백의 그림원본을 천에 인쇄한 복사본이다. 특히 ‘일제를 빛낸 사람들’은 이번 5.18 전시를 마치고 민족문제연구소 부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영구 기증되어 전시될 예정이다.
근대 문화시설인 도서관을 선구적으로 이끈 이범승의 노력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범승의 공적과 별개로 일제가 경성도서관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의도’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식민 시대 일제의 도서관 정책을 고려하면, 일제가 이범승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도서관 건립과 운영을 지원했다고 보는 게 진상에 가깝지 않을까. 이용재 교수가 이범승의 경성도서관 건립 제안에 대해 평한 부분을 살펴보자.
“조국의 왕통(王統)이 일제의 상징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일제를 향하여 조선 땅에 ‘민중의 대학’을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애국계몽사상의 실천 중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하겠다.”
도서관 건립을 통해 ‘애국계몽사상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려 한 이범승이 일부러 일제의 비위를 맞추며 도서관을 ‘쟁취’했던 걸까. 경성도서관 이전과 이후 이범승의 행보가 애국계몽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있다면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범승은 그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삶을 이어간다.
이범승의 애국계몽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 1968년 사직공원에 재개관한 종로도서관 재개관 당시 종로도서관은 6만 권의 장서를 소장했고 하루 600여 명의 시민이 이용했다. 비슷한 시기인 1968년 8월 1일 종로도서관 근처에 사직 파라다이스 수영장이 문을 열었다. 사직 파라다이스 수영장은 1969년 개장한 장충 수영장과 함께 인기 있는 서울의 야외 수영장이었다.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하는 선남선녀를 훔쳐보고 싶어서였을까. 한때 종로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좌석은 야외 수영장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였다. ⓒ 백창민
이범승은 1887년 8월 29일 만석 갑부 이기하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 독법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에서 2년 동안 일했다. 이범승은 경성도서관 운영 시절인 1924년 4월부터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만든 친일 협력단체 ‘동민회’ 이사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당시 조선 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를 11회나 면담하기도 했다.
경성도서관을 5년 동안 운영한 후에는 1926년 9월부터 고등관 5등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1928년 11월에는 쇼와 천왕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조선박람회 사무위원,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황해도와 경상북도 산업과장을 지냈다. 1940년 9월부터는 경성에서 변호사를 개업해서 일했다. 친일 협력단체 동민회 활동과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 경력 때문에 이범승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경성도서관을 인수한 경성부는 이범승의 조카 이긍종을 분관장으로 임명한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 시대 첫 분관장을 맡은 이긍종은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긍종은 1926년 4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종로분관장을 맡았는데, 1929년까지는 촉탁, 1930년부터는 사서였다.
종로분관장을 그만둔 이긍종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친일 신문인 <조선상공신문> 사장 겸 주필로 활동했고 ‘조선춘추회’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도서관과 언론 분야에서 활약한 이긍종은 <친일인명사전>에 삼촌 이범승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경성도서관을 분관으로 편입한 후 일제가 친일 성향 인물을 임명해서 도서관을 경영했음을 알 수 있다.
경성부윤 이범승과 종로도서관
▲ 1960년대 종로도서관 열람실 풍경 1967년 7월 촬영한 이 사진은 종로도서관이 탑골공원에 머물던 시절 열람실 풍경이다. 지금처럼 열람실에 “칸막이”가 있지 않았는데, “정숙”과 함께 모자를 벗으라는 ‘탈모’ 안내가 벽에 부착돼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해방 후 이범승은 미군정 치하인 1945년 10월 25일부터 1946년 5월 9일까지 6개월 남짓 경성부윤을 맡기도 했다. 경성부윤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이범승이 ‘서울시장’이 아닌 ‘경성부윤’인 이유는 그가 재임할 때 서울은 ‘서울시’가 아닌 ‘경성부’였기 때문이다. 그의 후임인 김형민이 1946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 승격과 함께 ‘초대 서울시장’이 됐음을 생각할 때 이범승은 ‘마지막 경성부윤’으로 일한 셈이다.
경성부윤 시절 이범승은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을 ‘종로도서관’으로 승격시켰다(종로도서관 초대 관장은 송몽룡이다). 승격한 종로도서관은 동대문도서관이 문을 여는 1971년 3월까지 남대문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과 함께 수도 서울에 자리한 유이한 공공도서관으로 역할을 이어갔다.
도서관에 관심 많던 이범승이 경성부윤 또는 서울시장으로 오래 일했다면 해방 후 서울의 도서관 정책에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집이 세고 자기 스타일이 강한 그는 미군정 책임자 윌슨 중령과 갈등을 빚다가 반년 만에 사임했다. 이범승은 1952년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경성부윤 외에 이범승의 이채로운 경력은 1957년 성균관 유도회(儒道會) 총본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점이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심산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친일파 출신 유도회 집행부를 구성한다. 이명세, 윤우경과 함께 이승만이 앉힌 친일파 출신 집행부 중 한 사람이 이범승이다.
종로도서관이 사직공원으로 이전한 사연
▲ 종로도서관을 부수고 지은 “파고다 아케이드” “파고다 아케이드”가 지어진 탑골공원 서문 일대에는 경성도서관, 지금의 종로도서관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종로도서관을 철거하고 파고다 아케이드를 짓는다. 사진 오른편에 보이는 파고다 아케이드는 당시에도 “불법 건축물”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1921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탑골공원에 있던 종로도서관은 1967년 10월 2일 서울시 도시계획사업으로 철거된다. 종로도서관 철거 및 이전 과정은 황당하기까지 한데, 이전할 건물을 먼저 짓고 도서관을 철거한 게 아니라 건물을 짓기도 전에 철거부터 먼저 했다. 심지어 철거가 확정된 종로도서관은 수개월 동안 이전 부지조차 확정하지 못한 채 폐관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다행히 시민의 지원과 각계의 관심으로 1967년 10월부터 사직공원 근처에 신축 공사를 시작해서, 1968년 8월 20일 지금의 모습으로 개관하긴 하나 종로도서관은 종암동 서울시 자재창고에 장서와 비품을 보관한 채 10개월 동안 휴관해야만 했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공공도서관을 부수고 박정희 정권은 탑골공원 그 자리에 뭘 지었을까? 바로 ‘파고다 아케이드’라고 불린 상가를 만들었다. 탑골공원 구역을 따라 2층 높이 현대식 상가를 짓고 악기와 의류, 전자제품 매장을 들인 것이다.
종로도서관 철거뿐 아니라 유서 깊은 탑골공원을 상가 건물로 빙 둘러싼 것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이 많았다. 3.1 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하고 4.19 혁명 과정에서 이승만 동상을 쓰러뜨리는 등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진 이곳을 상가 건설을 통해 ‘용도 변경’했다는 의혹도 일었다.
한때 반도 조선 아케이드와 신신백화점과 함께 3대 아케이드형 상가로 꼽힌 파고다 아케이드는 결국 1983년 전두환 시대 철거된다. 하지만 종로도서관을 철거하고 상가 건물을 지은 이 사건은 박정희 시대 도서관의 처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64년과 1974년 소공동에 있던 남대문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이 남산으로 각각 이전한 것처럼, 박정희 시대 도서관은 도심에서 산으로, 외곽으로 밀려난다. 그나마 사직공원으로 옮긴 종로도서관은 종로구 관내로 옮겨 그 이름을 유지했지만, 남대문에서 남산으로 옮긴 남대문도서관은 이름을 ‘남산도서관’으로 바꿔야 했다.
이승만 시대 그나마 도심에 있던 주요 도서관이 박정희 시대 외곽으로 밀려 난 건 뭘 의미할까. 1963년 <도서관법>이 처음으로 마련되긴 하나 박정희 시대 도서관이 의미 있는 성장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근대화와 경제 성장 과정에서 도서관은 그 과실을 함께 나누지 못한 채 여전히 ‘변방’에 머물렀다.
도서관의 처지는 우리 시대라고 크게 다를까. 2015년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사직단 복원 계획에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이 포함되면서 철거 및 이전이 거론되기도 했다. “‘왕조 시대 유적’ 복원을 위해 ‘공화국 시대 유적’을 파괴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일며 문화재청이 물러서긴 했지만 말이다.
도서관 선구자의 친일 행적
▲ 종로도서관에서 <친일인명사전> 찾아보니 지난 7일 종로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 우연인지 몰라도 종로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은 전3권 중 윤익선과 이범승, 이긍종의 친일 행적이 수록된 제2권만 없었다. ⓒ 백창민
오랜 역사만큼 많은 고서(古書)를 소장하고 있는 종로도서관 앞뜰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종로도서관 전신, 경성도서관을 세운 건립자의 업적을 기리며 1971년 9월 17일 세운 이범승의 흉상이다. 반세기 가까이 된 이범승 동상은 도서관인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동상이며, 울주도서관이 2017년 세운 엄대섭 동상과 함께 국내에서 단 둘 뿐인 ‘도서관인 동상’이다.
윤익선과 이범승은 우리 도서관 분야에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후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9년 11월 8일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모두 등재됐다.
윤익선의 행적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1940년 4월부터 ‘대동일진회’ 산하기관인 ‘동학원’ 교장으로 활동한 것이다. 대동일진회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가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의 지원을 받아 만든 친일단체다. 대동일진회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기치로 내걸고 활동했다. 윤익선은 1939년부터 일진회보에 ‘황인종은 결속하자’는 글을 기고하고, 1941년 8월 삼천리사 주최 좌담회에서 황국신민으로 임전국책(臨戰國策)에 전력을 다해 협력하겠다고 결의했다.
윤익선은 해방 후인 1962년 3월 <조선독립신문> 발간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는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윤익선은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친일부역 행위가 드러나면서 윤익선은 2010년 서훈이 취소되고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이장(移葬)했다. 2010년 윤익선의 서훈 취소 때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국회부의장과 서울시장을 역임한 윤치영도 함께 서훈이 취소됐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민특위가 적용한 것과 거의 동일한 기준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 4776명을 선정해서 사전을 발간했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와해되지 않았다면 윤익선과 이범승은 오래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분받았을 것이다.
지난 7일 종로도서관을 직접 찾았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친일인명사전>(전3권) 중 윤익선과 이범승, 이긍종의 친일 행적이 수록된 제2권만 없었다. 도서관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참고도서여서 관외 대출도 불가능한 책이다. 한 직원에게 물어보니 “분실됐다”라고 했다.
종로도서관 홈페이지를 검색해 봐도 <친일인명사전>은 역시 2권만 빠져 있었다. 종로도서관이 2권이 없음을 인식하고 데이터베이스에 반영했다는 건데, 누락을 알고도 다시 책을 채우지 않은 것이다.
혹시 몰라 17일 오후에도 책을 검색해 봤지만 역시 2권만 없었다. 이유가 궁금해 이날 종로도서관 측에 해명을 요청한 결과 “확인해 보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8일 “찾아보니 서가에서 발견됐다. 이제 홈페이지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라고 알려왔다. 도서검색 결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건 단지 해프닝이었을까.
이범승 동상을 ‘철거’하라
▲ 종로도서관 앞뜰에 있는 이범승 동상 이범승 동상은 1971년 당시 서울시 교육감 하점생이 세우고 동상 아래 이범승 업적에 대한 글은 종로도서관 9대 관장 이홍구가 썼다. 도서관인 동상 중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동상이다. 이범승 동상 아래 그의 업적을 새긴 비문에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담겨 있지 않다. 반 세기 가까이 그의 동상은 “친일파”가 아닌 “도서관 선구자”로 종로도서관 입구를 지켰다. ⓒ 백창민
공공도서관 건립을 주도한 도서관 선구자가 모두 ‘친일파’로 전락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도서관 선구자로서 업적만큼 그 친일 행각도 제대로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도서관 분야 선구자가 아쉬운 상황이라 해도 ‘업적’만 칭송하고 친일파로서 ‘죄상’을 눈감는 건 문제 아닐까.
친일파 동상 철거와 친일파 이름을 딴 도로명을 변경하자는 의견이 한창 일었다. 이런 맥락에서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이범승 동상에 대해 반세기 동안 도서관계에서 어떤 의견도 나오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도서관과 문헌정보학 분야의 역사적 무관심 때문인가, 도서관 선구자의 부끄러운 친일 행각을 덮기 위함인가. 종로도서관 이범승 동상은 ‘철거’하거나, 최소한 동상 옆에 그의 친일 행각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적시’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인적 청산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틀이 놓인 우리 도서관 분야는 일제 식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한 걸까. 도서관 용어와 공간, 제도, 운영 면에서 우리는 일제 식민 시대를 얼마나 극복한 걸까. 식민 잔재라는 ‘칸막이 열람실'(일반 열람실)을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우리 도서관은 친일 청산의 ‘무풍지대’인가(관련기사 : “도서관의 칸막이 공부방은 식민지배 잔재”).
1985년 11월 9일 대한도서관연구회 엄대섭 회장이 마련한 ‘한일 공공도서관 관계자 간담회’에서 일본 도서관 관계자는 한국 공공도서관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도서관이 학생들에게 자리를 빌려주는 ‘대석업'(貸席業)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서구로부터 ‘번안한 도서관’을 이식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도서관을 ‘칸막이 열람실’ 위주로 운영하던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발 빠르게 도서관을 변화시켜 나갔다(일본 공공도서관에서 ‘칸막이 열람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해방 후 우리 역시 미국과 세계로부터 ‘도서관학'(문헌정보학)을 수입했다. 세계 도서관 변화를 직접 목도하고 그 흐름을 따라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일본이 번안해서 이식한 ‘식민지 도서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도서관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과거의 제도와 운영을 관성적으로 답습한다면 우리 도서관은 언제까지나 ‘식민지 도서관’에 머물 것이다. 34년 전 일본 도서관 관계자가 통렬히 지적한 ‘대석업’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종로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9길 15-14(사직동) – 이용시간 : 인문사회자연과학실 / 어문학실(평일 09:00 – 22:00, 주말 09:00 – 17:00), 자연과학정보실(평일 09:00 – 20:00, 주말 09:00 – 17:00), 인왕관(평일 09:00 – 18:00, 토요일 09:00 – 17:00), 자율학습실 / 노트북실(평일 07:00 – 23:00, 11월-2월 평일 08:00 – 23:00, 주말 07:00 – 22:00, 11월-2월 주말 08:00 – 22:00) – 휴관일 : 매주 둘째, 넷째 월요일, 법정공휴일 –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 소재 직장인 또는 학생. 무료 – 홈페이지 : http://jnlib.sen.go.kr/ – 전화 : 02-721-0707 – 운영기관 : 서울시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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