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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역사’ 시즌 5 7화: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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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역사’ 시즌 5 7화: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admin | 금, 2020/05/22-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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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1부] [2부] [3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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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는 5개의 질문으로 5.18민주화의 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쟁점을 이야기 합니다.

1. 작년 3월에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왜 다시 진상규명법이 제정된 건가?
2. 
최근에는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군인들에 의한 여성 성폭행 문제가 새롭게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오랜 시간 폭도로 매도당하면서 피해자 가족들이 입었던 2차 피해와 트라우마도 극심했죠?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를 인권문제 차원에서 좀 더 광범위하게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지고 있는데?
3. 
이번 진상규명 과제 중 하나로 ‘5.11연구위원회’라는 게 나옵니다. 이게 무엇인가?
4. 
5.18이 ‘민주화운동’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5. 
최근 5.18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시아 곳곳에서 불리고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1~2부_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10일간의 기록_5월 22일~27일까지 광주시민들이 민주주의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 이야기합니다.

올해는 5·18이 일어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우린 광주의 정신을 계승한 투쟁을 통해 권좌에 올랐던 학살자들을 법정에서 내란죄로 처벌 했고, 518은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으며, 폭도로 몰렸던 항쟁의 주역들은 민주주의 지킨 국가유공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마치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전두환은 뻔뻔스럽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보수라고 일컫은 몇몇의 무리들은 광주를 폭동, 북한군의 개입이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일베나 보수유투버들은 희생자를 모욕하는 발언을 끊임없이 내뱉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방송은 40주년을 맞은 5.18을 맞아 광주의 정신은 무엇이며 특히 반역사적이고 반민주적인 시도가 일어나는 현실속에서 다시 광주 518의 역사적의미가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나 40년이 지난 지금 까막득한 옛날 사건 중 하나로만 알고 있은 젊은세대들에게 어떻게 그 의미를 전달할 것인지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함께 이야기기 나눌 노영기 교수는 5.18연구의 권위자로 ‘왜 국민의 군대가 국민들에게 총을 쏘았을까?’라는 질문을 안고서 한국현대사 공부를 시작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2007년까지 조사관으로 활동하며 12·12와 5·18과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검토하고 관련자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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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옥희 교육감 기자회견 열어 친일잔재 청산, 친일인명사전 배부 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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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뉴시스】박일호 기자 =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이 25일 오전 울산시 중구 울산시교육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발표하고 있다. 2019.02.25. (사진=울산시교육청 제공) [email protected]

【울산=뉴시스】박일호 기자 =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울산시교육청이 교육현장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찾는 동시에 친일잔재 청산에 나선다.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은 25일 시교육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발표했다.

노 교육감은 이날 “시교육청은 대한민국 건립의 뿌리인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울산교육 독립운동 찾기에 나선다”며 “학교를 중심으로 펼쳐진 독립운동과 아직까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교사, 학생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그 뜻을 바로 새기고 역사를 기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미래세대인 우리 아이들이 열어갈 새로운 100년이 바르게 기록된 역사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번영의 미래가 되길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노 교육감은 설명했다.

시교육청은 구체적인 사업으로 ▲항일독립운동 관련 학교와 학교터에 QR코드가 포함된 표지판 설치 ▲항일독립운동 교육자·학생독립운동가 추모 ▲사업 추진연구회 연구결과 알리기 ▲교육 분야 친일잔재 청산 ▲관내 중·고등학교에 친일 인명사전 배부 ▲울산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동참 등을 추진한다.

먼저 병영지역 3·1 만세운동이 시작됐던 병영초등학교(옛 일신학교)에서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을 통해 QR코드를 시연한다.

병영초 뿐만 아니라 시교육청과 울산초, 울산노동역사관, 보성학교터, 언양초 등에 표지판을 설치해 울산교육 독립운동 역사체험 지도를 만든다.

이를 통해 휴대전화로 손쉽게 연구자료와 영상, 사진 등 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학교 중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관내 학교에서 차례대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 현판 제막식을 연다.

항일독립운동 교육자·학생독립운동가 추모사업으로는 오는 5월 15일 스승의 날에 교육분야 독립운동가들을 ‘울산교육의 참스승’으로 선정해 기념식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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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뉴시스】배병수 기자 = 6일 울산시 중구 병영사거리 일원에서 울산광역시중구문화원(원장 박문태) 주관으로 열린 제99주년 울산 병영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에서 참가들이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2018.04.06. [email protected].

보성학교 설립자인 성세빈 선생과 서진문, 이효정, 이무종, 박상진, 최현배 선생 등을 울산교육의 참스승으로 선정한다.

공훈록과 신문잡지 자료, 학적부, 졸업대장, 재판기록 등을 일괄 조사해 알려지지 않은 학생독립운동가를 발굴해 기록하고 추모할 예정이다.

아울러 지난해 9월 발족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연구회의 연구결과를 심포지엄, 보고회, 전시회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알리고, 지역화교재에 울산의 독립운동을 담는다.

친일잔재 청산과 관련해서는 TF팀을 구성해 학계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전문가 자문을 거쳐 교육계에 남아있는 친일잔재 사례를 정리, 그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또 친일잔재 청산을 국어와 역사, 음악 교과학습에 연계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질 수 있는 학습활동을 권장한다.

친일잔재 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는 학교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친다.

아울러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인명사전을 관내 중·고등학교에 배부한다.

노 교육감은 “시교육청은 일회적 기념사업이 아니라 연간 지속사업으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에 나서겠다”며 “대한민국의 튼튼한 기초를 세웠으나 잊혀진 독립운동 교육자를 찾아내고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민주주의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은 오는 27일 오전 10시 울산시 중구 병영초등학교에서 열린다.

[email protected]

<2019-02-25> 뉴시스 

☞기사원문: 울산교육청,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발표…QR코드 표지판 설치 등

※관련기사

☞연합뉴스: QR코드로 알리는 학교 독립운동사..울산 3·1 운동 기념사업

☞노컷뉴스: ‘학교 친일잔재 청산’ 교육분야 항일독립운동 알린다

월, 2019/02/2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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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7월 청주상고 교사등 100여명 집단학살 매장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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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지난 2009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청주청원 합동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충북도는 올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으로 보은 내북면 아곡리를 선정했다. 아곡리는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선정한 도내 우선 발굴 대상지 6곳에 포함됐으며 충북도와 도내 유족회 간담회 때 최종 대상지로 선정됐다.

도내 민간인 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87곳이며 2007~2008년 청주 분터골과 지경골 2곳에 대한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이후 MB정부 출범이후 근거법 기간 만료돼 발굴사업이 중단됐다.

도는 올해 자체 사업으로 5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보조사업자 공고와 심의를 거쳐 ㈔민족문제연구소를 사업자로 선정했다. 아곡리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청주지역에서 소집된 150여 명으로 추정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3월초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해 수습된 유해는 보존 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이다. 충북도는 국회 계류 중인 과거사 관련법(7건) 제·개정이 이뤄지면 국가사업과 연계해 추진할 방침이다.

아곡리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는 이미 2014년 6월 청주·청원 보도연맹유족회, 충북역사문화연대가 일부 발굴작업을 진행했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외면하는 가운데 민간단체가 장비를 동원해 20여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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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청주청원유족회의 보은 내북면 아곡리 보도연맹 양민학살 매장지 자체 발굴작업 모습.

당시 발굴 현장에서 취재진을 만난 주민 신덕호씨는“그때 (1950년 7월10일께) 군인·경찰이 논밭에서 일하던 주민들을 전부 집에 들어가게 하고 산골짜기 쪽에서 총소리가 나구 비명이 들렸다. 트럭이 서너대 왔으니까 한 100명쯤 되는 것 같다. 총살 한 뒤에 마을 사람들 불러놓구 ‘빨갱이 잡아놨으니 장례 치르라’고 해서 우리가 가까운 야산 3곳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증언했다.

보은 아곡리 민간인 학살 피해 사실은 지난 1994년 <충청리뷰>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취재진을 만난 목격 주민 황성철씨는 “7월7일 오전 10시께 아곡리에 트럭 5~6대가 들어와 여기서 내린 사람들을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살시켰다. 마을주민들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지시를 받고 구덩이에 시신을 묻었다. 여자들도 몇명 보였다”고 진술했다.

또한 아곡리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 가운데 청주 가족들이 유일하게 시신을 수습한 경우도 확인됐다. 당시 청주상고 교사였던 고 강해규씨(당시 30세)는 청주경찰서 무덕관(강당)으로 소집된 뒤 몇일후 아곡리까지 끌려가 죽임을 당한 것. 강 교사의 경우 가족들이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고 현장 인근 산자락에 위령비를 세운 것이 확인됐다.

94년 취재진과 연락이 닿은 미망인 이숙용씨(당시 72세)의 기억은 생생했다. “전쟁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땐데. 전날 밤에 학교에 숙직하러 간 애들 아빠가 다음날 낮이 됐는데도 안오길래 걱정이 됐어요. 근데 친구분이 부리나케 찾아와서 경찰에 붙잡혀갔다고 그러더라구요. 얼른 경찰서로 가보라고 하길래 음식 준비할 새도없이 빵을 사가지고 달려갔어요”

이씨가 청주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군용트럭 4∼5대를 둘러싸고 가족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트럭안에는 젊은 나이의 보도연맹원들이 힘없이 앉아있었다. 남쪽으로 먼저 피난시켜 준다는 헌병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가족들은 이들에게 음식, 옷등이 담긴 보퉁이를 건네주며 안부를 빌었다. “가까스로 남편을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오느냐구 물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있던 우산을 건네줬더니 ‘당신 비맞으면 안된다’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이씨가 다시 남편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5일 뒤. 학살 소문을 들은 보은 친정집에서 전갈을 해주는 바람에 용케 아곡리까지 찾아나선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재회했고 어수선한 난리통에 경황도 없이 끔찍한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된 것.

권혁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28> 충북인뉴스 

☞기사원문: 69년만에 전쟁 원혼 풀리려나? 보은 아곡리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관련기사 

☞뉴시스: 충북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보은 내북면 아곡리 

☞아시아뉴스통신: 충북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추진 

☞중부매일: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3월부터 유해발굴 추진

목, 2019/02/2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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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임정 100주년 특집]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편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3월 7일 (목요일)
■ 대담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입니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오늘부터 매주 한 번씩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 역사를 되짚어 볼 건데요. 첫 시간에 해볼 얘기는 만세운동을 막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친일파 박중양과 ‘자제단’에 대해서 도움 말씀 주실 분,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하 권시용)> 네, 안녕하세요. 권시용입니다.◇ 이동형> 3.1절 특집을 시작하면서 예민할 수 있는 친일 문제를 먼저 꺼낸 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청산하지 못한 현재의 역사이기 때문이죠. 우리 흔히 그럽니다. 우리 민족은 민족반역자를 한 번도 처단해 본 역사가 없다. 동의하십니까?

◆ 권시용> 네, 불행하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제일 큰 이유는 반민특위의 실패겠죠?

◆ 권시용> 그렇죠. 첫 번째 기회였는데.

◇ 이동형>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아니었을까요?

◆ 권시용> 그래도 최근에 또 역사적인 처벌, 이런 것들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을 불가능할 거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이었으면 그때가 딱 한 번의 기회였는데, 그 기회가 좌절된 것도 역시 친일파들, 민족 반역자들의 방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권시용> 일차적으로는 미군정이 그들을 다시 등용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거죠. 그리고 거기에 부합해서 친일 반역자, 친일 협력자들이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서 또 노력을 많이 했던 것이죠.

◇ 이동형> 미군정이 그렇게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의 독립 역사를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 권시용>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고요. 한반도를 통치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에 충성하고,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도 협력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죠. 효율성을 따졌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우리 친일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는 친일파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민족반역자라고 해야 한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고유 명사는 친일파로 굳어졌으니까요.

◆ 권시용> 그 용어가 오랫동안 사용되었고요. 그 속에는 매국노, 매국적, 반역자, 일제 협력자, 반민족 행위자 등의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됐기 때문에 나름의 역사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 이동형>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처벌을 위해서 반민특위를 만들었고요. 2005년 노무현 시기에 만들어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또 민간단체에서 만든 친일 인명사전. 이 모든 게 친일파 처벌, 혹은 역사적 처벌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처벌할 것이냐.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어디까지를 우리가 친일이라고 할 것이냐, 이런 논쟁은 끊임없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그런데 이 시점에 와서 굳이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이런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할 때 거물급 친일파, 대표적인 친일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우리가 이들을 대한민국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역사적 평가만이 남아있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어떤 행적이 친일 반민족 행위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 거기에 대한 합의, 이런 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한 사람이 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넘어간 사람도 있고, 다양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사람은 박중양인데, 박중양이 어떤 사람인지 짧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권시용> 박중양은 일찍 일본 유학을 갔던 사람이에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기 전에 러일 전쟁에 참전해서 일본군을 위해서 복무했던 경력도 있고요. 그러고 나서 1906년 무렵부터 강제 병합되기까지 대구 군수를 지냈고, 평안북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이런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죠. 그 기간 동안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들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던 행적이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강제 병합되고 나서 그다음에는 도지사, 중추원 찬의, 중추원 부의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의원까지 탄탄대로 출셋길을 달렸던 인물입니다.

◇ 이동형> 협력의 대가로 그런 것을 받았겠죠.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런데 3.1운동도 비난하고,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그리고 4월 6일 자제단을 대구에서 처음 조직했다고 하는데, 이 자제단은 어떤 조직입니까?

◆ 권시용> 자제단은 말 그대로 당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던 3.1운동, 만세시위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서 조선인들로 조선인들을 막자, 이런 차원에서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만세시위를 탄압할 목적으로 만든 단체였던 것이죠.

◇ 이동형>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만에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거네요?

◆ 권시용> 네. 그때부터. 처음으로 대구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만들어진 거죠.

◇ 이동형> 박중양은 당연히도 반민특위가 결성되고 체포됐습니다. 그런데 체포당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요?

◆ 권시용> 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체포당할 때, 조사받을 때 당시 조사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다른 기회주의형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해요. 기록도 있고요. 체포당할 때도 나는 당당하게 심판받겠다, 할 테면 해봐라,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러면 여기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던 박중양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해서 박중양은 이렇게 강변했다고 합니다.

◆ 성우> 나는 시대의 변혁의 희생양으로 무능력한 조선 왕족보다야 문명국이었던 일본의 조선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였어. 한일 병합을 주도하는 이완용을 매국노라 비난하는데, 그는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을 당한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사람이요. 어차피 이완용이 없었다면,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책임졌을 뿐이오. 만국을 맞이하여 자살했던 순국자들의 의거는 사상계에는 자극을 줄 수 있었을망정, 부국제민의 방도로 보기에는 힘든 것 아니오?

◇ 이동형> 네, 순국자들의 의거까지 폄하하는 이런 일을 벌였는데, 이미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는 광복을 맞았고, 반민특위가 조직돼서 체포당하고, 조사받고, 재판받는데, 아직도 일제인 줄 알았을까요? 왜 이렇게 뻔뻔하죠?

◆ 권시용>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대한. 당시에 경험했던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의 근대화. 그런 것에 대한 좋은 기억? 그래서 해방 후에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인재를 배출하여 일본의 융성은 실로 불이 난 것 같았다. 드디어 삼대 강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중국, 한국이 백인의 식민 지배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일본 제국이 엄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그리고 본인 개인의 입장으로서는 그 시절이 가장 찬란했던 순간일 수도 있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무능력한 조선보다 일본의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고,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에서 백성을 구한 사람이다. 일종의 신념형 친일파,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 권시용> 저도 동의합니다.

◇ 이동형> 조금 더 설명해주시죠.

◆ 권시용>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에 유학하면서 일본이 이룩하고 있는 근대화에 압도당했고, 그래서 일본이 가는 길을 긍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연장선에서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동형> 어쨌든 이 사람도 반민특위가 실패함으로 해서 당연히 풀려날 수 있었고요. 그리고 59년에 사망했는데, 이때가 86세였어요. 천수를 다 누렸다.

◆ 권시용> 다 누렸죠.

◇ 이동형>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은 19세 때, 20대에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천수를 누리면서, 그것도 86세 때도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고, 한 번도 이분은 심판이랄까요?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네요?

◆ 권시용>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때 이 사람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신문 기사를 보면, 70이 다 된 일본인 아내가 찾아와서 우리 영감이 추운 데 떨고 있으니까 이불을 조금 넣어달라,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게 신문 기사에 실려 있거든요. 일본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건 맞는데,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이동형> 네, 박중양은 일기와 해방 후에는 ‘술회’라는 회고록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를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의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 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 시대의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

◇ 이동형> 그런데 최근 들어서도 박중양의 이런 주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일본 때문에 발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 권시용> 요즘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죠.

◇ 이동형> 참 안타깝네요.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런데 우리가 자제단 살짝 이야기했는데요. 1919년 4월 6일에 대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박중양이 앞장서서 만들었다. 그러면 이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이게 퍼졌겠네요?

◆ 권시용> 그렇죠. 전국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4월 6일에 대구 자제단이 만들어졌고, 그 뒤를 이어서 경북에서는 4월 10일에 안동, 11일에 성주, 16일에는 군위, 의성, 영일, 영천, 칠곡, 김천, 선산, 이렇게 곳곳에 자제단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다른 도, 평안북도에서는 4월 8일, 함경남도에서는 4월 10일, 그다음에 전라남도에서는 4월 11일, 강원도에서는 4월 13일, 경기도에서도 4월 13일, 충북에서는 4월 15일부터 전라북도에서는 4월 20일부터 자제단, 자성단, 자위단 등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곳곳에서 만들어졌고요. 작년에 발표된 논문이 하나 있어요. 이양희 선생님의 논문인데요. 거기 보면, 전국에 138개 군이 넘는 지역에서 자제단이 조직되었다는 연구를 하셨고요. 면 단위에서도 그런 자제단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러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 이동형> 조선인을 통해서 조선인을 감시하겠다, 이런 거잖습니까? 서글픈 일이었는데, 이런 자제단을 박중양이 만들었다, 그리고 다그치고 설득했다는 건데요. 특히 경북 지역을 누비면서.

◆ 권시용> 네, 아까 쭉 경북 지역에 만들어진 자제단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만드는 데 박중양의 역할이 컸어요. 먼저 대구 자제단을 만들고 나서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각 지역을 누비면서 설득, 다그치는 역할, 이런 역할들을 했거든요. 그 결과 이렇게 곳곳에서 자제단이 만들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만세운동도 하지 말고, 독립운동도 하지 마라.

◆ 권시용> 일본의 통치가 좋은 거다.

◇ 이동형> 방금 박중양이 경북 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자제단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상황을 보여주는 편지가 있습니다.

◆ 성우> 백작 데라우치 원수 각하. 소생은 지난 15일, 대구를 출발하여 김천, 개령, 선산, 칠곡, 각 군을 순회하며 잘 타일러 이르고, 어제 21일 대구로 돌아와서 도청에서 순회 상황을 진술했습니다. 현재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많은 병사가 곳곳에 산재하여 총칼로 다스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에도 계속 불량자들을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를 설득하여 양민을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불량자를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는 설득하겠다. 어떻게 보면 충성 편지처럼도 보이고요.

◆ 권시용> 충성 편지에요.

◇ 이동형> 자랑 편지인 것 같아요.

◆ 권시용> 네,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때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본에 있었어요. 거기에 편지를 보낸 거예요.

◇ 이동형>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도 했잖아요?

◆ 권시용> 맞아요.

◇ 이동형>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까 알아봐 달라?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래요. 불량자를 청소한다는 표현이 굉장히 무서운데, 결국은 3.1운동,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분들, 그리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말이잖아요?

◆ 권시용>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자제단은 만세시위를 억압, 탄압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했습니까?

◆ 권시용>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자제단 규칙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습니다. 도 단위에서는 경기도, 전라북도, 함경북도, 황해도 것이 남아 있고요. 군 단위에서도 남아 있는데, 지금 얘기하고 있는 대구 자제단 규약도 남아 있어요. 이 규칙, 규약을 통해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죠.

◇ 이동형> 결국은 이렇게 만들어서 서로서로 감시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그리고 만약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신고를 해라. 그러면 거기에 대한 포상이 있을 테고요.

◆ 권시용> 네, 밀고해라.

◇ 이동형> 일제의 잔인함이 엿보이는 것인데요. 이런 활동의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제단 서명에 날인하지 말라는 내용의 조선 독립신문 제26호 실린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세계는 인도와 정의로서 세계를 개조하고자 하고, 일본은 위력과 잔인함으로써 우리는 종속한다. 아! 우리가 적의 폭력 아래 노예의 치욕을 인내한 게 10년이라. 일본은 죄 없는 우리를 포살과 방화와 감금과 자치단 등 가지가기의 악계로서 해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소위 자제단이라 거짓으로 칭하여 강제적 위력적으로 협박 시행하여 날인을 받으나 날인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자에게 가당키나 할 것이냐.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여, 백절불굴의 용감함으로 분발하여 적의 압박에 굴복하지 말라. 일시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날인하면, 수십의 구속자가 장래에 화를 면할 수 없다. 일시의 평화는 영구의 화인 것을 자각하여 면면촌촌의 단천을 배척하는 것은 독립자의 합당한 행위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공화국 정부를 세계가 용인하였다. 대사업이 빨리 성취하지 않는 것을 낙담하지 말라. 고통은 즐거움의 씨앗임을 기억하라.

◇ 이동형> 네, 가슴 뭉클한 그런 내용인데요. 조선 독립신문은 어떤 신문이었죠?

◆ 권시용> 조선 독립신문은 지하 신문이에요. 요즘으로 치면 유인물 같은 거예요. 만세시위 열기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배포했던 것이죠.

◇ 이동형> 박중양을 처단해야 한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모였던 사람들도 있다고요?

◆ 권시용> 혜성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만세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던 그런 모임이었는데, 대구 지역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조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혜성단에서 자제단 설립에 앞장섰던 박중양에게 경고장을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이동형> 그때도 물론이고, 이렇게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과 또 레지스탕스 간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힘으로 해방이 안 됐다,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어쨌든 일본은 패망했으니까요. 아쉬운 게 45년에 일본이 패망하고, 지금 시간이 굉장히 많이 흘렀고,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100년이나 지난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이 남았다는 것은 많이 안타깝네요.

◆ 권시용> 그렇죠. 해방된 공간에서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기회를 잃었죠. 미군정 시기에 친일 관련한 경찰과 군인들을 등용했고, 첫 번째 기회였던 반민특위에서 실패를 맛보았고요. 그리고 이후에 독재 정권, 군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친일 청산이라는 것은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문재인 대통령도 100주년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뿌리 깊은 친일 청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할 것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하고, 그래서 그 결과를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요. 현실적으로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우리 사회에서 내릴 수 있도록 구속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를테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친일파가 서훈을 받는 일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각종 친일파에 대한 기념사업도 진행되고 있고요.

◇ 이동형> 동상도 서 있죠?

◆ 권시용> 네, 그렇죠. 다행히 김정수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조금씩 역사적인 청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죠.

◇ 이동형> 알겠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인 오늘은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과 함께 만세운동의 자제를 외친 친일단체, 자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저희가 자제단 이야기를 하면서 박중양 한 명만 얘기했는데, 인터넷 검색하면 나올 겁니다. 자제단에서 어떤 사람이 활동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는지요. 그것은 우리 청취자분들이 한 번 검색해서 살펴보시기 바라고요. 오늘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권시용> 네, 감사합니다.

<2019-03-07> YTN 

☞기사원문: “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금, 2019/03/0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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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3.1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5편 “김대우” –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하여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인물

☞ (3.0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2부

☞ (3.05)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 (2.27)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2부

☞ (2.2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1부

☞ (2.1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원형

☞ (2.12)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_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 (2.05)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3편 “오현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반민특위 법정에 선다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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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9/03/1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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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발자국] 54. 서울 명동 : 이승만에 의해 좌절된 친일 청산의 꿈

‘저승사자’. 김근태 의원을 고문을 해서 감옥살이를 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별명이다. 하지만 이근안 이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한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즉 ‘원조 저승사자’가 있다. 그것도 일제를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악독한 친일 고문경찰이 있으니, 그 이름은 노덕술이다.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쪽 죽여 버리지요.” 1930년대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시위에 참석했다가 고문당한 김재학의 조카의 증언이다. 김재학뿐만이 아니라 박일형, 김규직, 유진흥, 문재순, 추학, 차일명. 노덕술이 고문한 독립운동가들의 일부다.

그는 동래경찰서 재직 중인 1928년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박일형을 고문했고, 부산 제2상업학교 동맹휴교 배후를 캔다고 김규직, 유진흥을 고문해 김규직은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동래고등보통학교가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석방을 위한 동맹휴학을 벌이자 문재순, 추학, 차일명 등을 잡아다가 고문했다. 고문 덕으로 그는 조선인 경찰로는 최고위직에 올랐고 두 번이나 상을 받았다.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1948년 9월 7일 제헌국회는 역사적인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국회가 제정한 3번째 법이다. 친일경찰에 의존하고 있는 이승만은 이 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법안에 서명했다.

주목할 것은 제헌국회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중도좌파적인 여운형, 우파인 김구도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영속화한다는 이유로 선거에 참가하지 않아 ‘친일지주(친일경찰 정도의 친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들이 다수였던 한민당과 일부 소장파 의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조차도 친일 청산은 거부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라고 생각해 반민법을 제정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명동에 사무실을 얻고 활동에 들어갔다. 임정 문화부장 출신으로 국회의원이었던 김상덕이 위원장을 맡은 특위는 조사위원회 이외에도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특위는 일본국과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경찰과 군부대, 헌병대 등에서 첩자 등으로 활동한 자, 위안부와 학도병 강제징용을 권유하거나 찬양한 자 등으로 반민족행위를 정의하고 이에 해당되는 7000명을 파악하여 검거에 들어갔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만든 식민지박물관에는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에 관련된 자료, 반민특위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이천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반민특위 위원들 사진 ⓒ손호철

1949년 1월 8일, 제1호로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 해외로 도피하려다가 체포됐다. 이어 일본밀정이었던 이종형 대동신문 사장, 유명 문인 이광수와 최남선 등이 잡혀왔다. 이들은 자신이 민족지도자들이라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모두 황국신민이 됐을 것이다.” 이광수의 변명이다. 말이라도 못하면 덜 미울 텐데,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광수, 최남선 등 변절한 주요 친일 인사 사진 ⓒ손호철

반민특위는 여자 60명을 포함한 682명을 조사해 모두 305명을 체포했고, 자수 61명, 영장취소 30명, 193명은 도주 등으로 체포하지 못했다. 특히 문제는 악독한 친일경찰을 심판하는 일이었다. 친일경찰의 핵심인 노덕술 등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반민특위 핵심부와 정부 요인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를 위해 고용한 백인태가 자수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도주하던 노덕술은 결국 체포되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됐다. 자신의 손발이 잡히자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 투사이니 석방하라”고 요구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이승만은 내무부 차관 장경근을 통해 조작이라는 비판을 듣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터트리고 반민특위를 직접 공격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김약수 등 반민특위에 적극적이었던 소장파 ‘진보적’ 의원들이 남로당과 접촉하고 공산당에 협조했다고 구속한 사건이다.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끌려가는 친일파들(이천민주화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손호철

1949년 6월 6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날 중 하나다.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경찰 80명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조사 서류를 강탈해간 것이다. 이어 9000명의 경찰들이 사실상의 반민특위 해체를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국회는 반민특위의 원상복귀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반민특위 습격이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며 거부했다. 국회는 이같이 국회를 무시하는 대통령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의원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반민특위 문제에서 1952년 부산정치파동의 단초가 만들어진 것이다(‘손호철의 발자국’ 10. 부산정치파동 <프레시안>, 2021년 3월 29일자 참조).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이를 담당했던 대표적인 공안검사인 오제도 검사가 후에 “사실은 무죄였다”고 밝히는 등 논쟁이 많은 사건이다. 설사 국회 프락치 사건이 조작이 아니고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민특위를 해체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국민 다수가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바랐던 친일파 처벌이 북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나? 북한보다 더 강하게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이, 남한은 친일정부라는 오명을 벗고 북한과 정통성에서 떳떳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나?

이승만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교포들이 보내준 돈으로 ‘편안하게’ ‘호화생활’을 하며 외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만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친일파라고는 할 수 없는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사람이다(나중에 탄핵을 당했지만). 문제는 그런 그가 왜 여론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노덕술 같은 사람을 구해 중책에 맡겼느냐는 것이다.

그 답은 해방정국의 구조적 상황에 있다. 해방정국은 일제 강점기에 좌파가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77%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바라는 등 기본적으로 좌파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분위기여서, 그 같은 친일경찰이 아니면 그의 수족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모두 잘 아는 이야기지만, 이승만의 반민특위 공격 후 친일파는 해방 후 현대사의 승자로 승승장구해 왔다. 임종국의 선구적인 친일문학연구와 이를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노력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된 뒤 60년이 지난 2009년 뒤늦게 5207명(중복자 포함)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을 실은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정부 차원에서도 노무현 정부 들어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활동을 벌여 제1차 106명, 제2차 195명, 제3차 705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이 명단에는 일왕에서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육사로 입학해 일본군으로 근무한 박정희가 빠져 논란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너무 늦었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이들 중 노덕술 등 225명은 정부에서 훈장 등 서훈을 받았는데, 2019년 현재 25명에 대한 서훈이 취소됐고 노덕술 등 200명에 대한 서훈은 친일 판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고 있다.

친일 청산의 실패는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 정치의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 정치의 기본 프레임은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파는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리버럴)’ 세력을 ‘친북좌파’라고 공격하고, 자유주의 세력은 우파를 ‘친일’이라고 공격하는, ‘친북 대 친일’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일부 민주당지지 세력이 보수 우파에 대해 행하는 가장 쉬운 공격수단이 ‘토착왜구’라고 이름 붙이고 ‘죽창가’ 운운 하는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이 같은 시대착오적인 프레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반민특위의 실패로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자처벌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 명동에 가면 롯데백화점 건너편 쪽에 옛 KB국민은행 명동본점 건물이 있다. 반민특위가 있던 곳으로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쓴 이 같은 표시석을 만들어 1층 화단에 설치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곳에 가보니 표시석은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니, 잘 보이지 않도록 주차장 옆으로 옮긴 것이다. 표시석은 반민특위처럼 이렇게 찬밥 대접을 받았다.

표시석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건물이 팔려 호텔 건설이 시작되자 일본 관광객을 우려한 호텔 측은 표시석의 철거를 요구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결국 이 표시판을 철거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연구소가 새로 만든 식민지역사박물관(청파로 소재) 문 앞에 세워 놓았다.

▲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 반민특위 터에 설치했던 표시석. 최근 그 터에 호텔이 건설되면서 철거해 식민지박물관 입구에 설치했다. ⓒ손호철

이제는 일본 관광객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을 위한 고급 호텔 공사가 한창인 반민특위의 역사적 현장에 서자, 50년 전에 이승만의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 비극적으로 끝난 반민특위의 슬픈 운명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나아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결국 식민지역사박물관 문 앞에 세워진 표시판의 처량한 신세가 잘 보여주듯이, 이를 기억하기 위한 추모 사업 역시 반민특위의 역사만큼 고난에 가득차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명동에 있었던 반민특위 터는 몇 년 전 매각되어 고급 호텔을 짓고 있다. ⓒ손호철

<2021-07-12> 프레시안

☞ 기사원문: 수난의 반민특위, 표시석도 찬밥 신세

월, 2021/07/1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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