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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hore Mahbubani의 신작 “Has China Won?”의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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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hore Mahbubani의 신작 “Has China Won?”의 서평

admin | 일, 2020/05/03- 22:55

편집자 주:

2001-2002년 간에 유엔안보리(UNSC) 의장을 맡았고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외교인으로 국제사회에 잘 알려진 인물인 Kishore Mahbubani가 아래 사진의 신작을 발표하면서 코로나 이후 세계질서를 미국이 아닌 중국이 주도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서구사회가 깜작 놀랐다. 이에 대해 FT의 아시아판 책임자를 역임했고 현재 미래혁신분야의 편집을 지고 있는 John Thornhill이 아래와 같은 서평을 게재하였다.


국제사회의 회의 자리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구인들이 싫어하는 아시아인의 선호 발언을 직선적으로 해 왔던 Kishore Mahbubani가 자신의 소신을 책으로 출간했다. 제목으로 뽑은 “중국이 결국 승리했나?”라는 책자는 분명히 미국인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화까지 돋우겠지만, 이는 한편정당한 일이다.

우선적으로 이 책은 세계의 패권국으로 굴림해온 미국을 중국이 이번 세기에 강자에 자리에서 쫓아낸다는 애메한 가정을 미국 독자에 강요한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쓴 서적에서 Mahbubani는 미국의 지배계층들이 중국을 안이하게 냉전시대의 소비에트의 재판(결말은 모두가 아는)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간의 문제이고 정치적 중심의 주제이지만 자유를 사랑하고 시장의 전능한 힘이 주제넘게 살아남은 공산주의 지도력을 날려버릴 것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냉전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할이 뒤바꾸었다고 주장하는 그는 미국을 유연성을 상실하고 이념에 갇혀있으며 체제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수퍼-파워 국가로 묘사하는 반면에, 중국을 매우 유연하며 실제적이고 전략적으로 스마트한 경쟁자라고 비유한다. “미국이 예전의 소비에트와 같고, 중국이 예전의 미국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단순화시켰지만, 저자는 미국의 가장 예민한 부문들을 규명해 간다. 워싱턴에서 터져 나오는 많은 적대적 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굴기하는 중국을 제대로 다룰 일관된 전략을 개발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냉전시기의 초기였던 1946년 미외교관이었던 George Kennan에 의해 적용되었던 봉쇄전략이라는 특허와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저자는 미국의 현재 외교관들이 궁지에 몰려 있다고 지적한다: 전직 국방부 장관인 Robert Gates가 잘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전문적 외교관들보다 훨씬 많은 군부의 인물들이 국제외교 분야에서 설쳐 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외교관이었던 그는 미국의 국내정치는 단시안적 금력(plutocracy)의 탐욕에 사로 잡혀 왔으며, 해외에 근무하는 공직자의 뇌물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해외부패실행법안(Foreign Corrupt Practices Act)를 국내에 적용하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략적 사고의 부재로 인해 미국은 군부의 근육질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중동에서 ‘끝낼 수 없는 전쟁(perpetual war)’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전세계 방위비에 절반을 사용하고 있지만 소프트웨어의 시대에 군사적 물리력이 과연 얼마나 소용이 있을 것인가? 130억불을 들여서 건조한 미국의 항공모함은 수십만 불에 만들 수 있는 중국의 DF-26 미사일 한방에 쉽게 침몰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많은 지면을 할당하면서 미국의 사회경제적 모델은 운용의 성과를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지난 30여 년 동안 소득순위 50%이하의 시민들 소득이 감소되어온 유일한 국가이다. 같은 기간에 중국인민들은 중국 역사상 가장 괄목하게 생활의 수준을 향상시킨 경험을 체험했다”고 적고 있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증거하는 모든 사례를 최대로 활용하고 이에 반하는 사실들을 가능한 축소하는 것이 논객의 특징이듯이 저자 Mahbubani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미국의 실패에 대해서 난타를 가하는 반면에, 중국의 명백한 실책에 대해서 옹호하려고 한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으로 수천 만 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줄로 언급한다. 홍콩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요사태를 무주택자들과 부동산거부 간의 투쟁으로 간단히 치부한다.

저자는 중국의 지도자들을 칭찬하는 데는 열정이 넘쳐나면서도 미국의 지도자들에게는 저주를 던진다. 시진핑 주석이 임기제한(隔代指定)을 폐지한 것은 분파주의와 부패와 싸움을 위해 불가피한 조처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통치는 세계에 다음 세 가지의 공공선을 선사한다고 한다: 1) 중화민족주의를 적정하게 통제하고, 2) 기후위기에 신속히 대응하며, 3) 대국굴기의 중국은 혁명의 수출기지가 현상유지를 보장한다.

현자인 통치자에 의한 지배라는 자혜로운 정치(德治)를 시진핑 주석이 중국에 실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한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책의 제목에서 던진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하길 회피한다. 미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많은 강점을 나열한다: 개인주의적 문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대학들 세계의 영재들을 흡인하는 매력( 35만 명의 중국인을 포함하여): 비록 트럼프가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만 잘 정비된 제도들 등. 그는 “국제정치라는 무대에서 미국과 중국과 경합은 불가피하기도 하지만 서로 피할 수도 있다”며 글의 매듭을 짓는다.

그의 저서를 읽으면서 동의하지 못하면 자극이라도 받으시길 바란다 – John Thornhill, FT innovation editor.

# by Kishore Mahbubani, Public Affairs, RRP$28, 320 pages

 

John Thornhill

FT의 아시아판 책임자를 역임했고 현재 미래혁신분야 편집인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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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저술한 『진보의 미래』에서 “(자신이) 그냥 앉아서 관료에 포획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한편, 문재인 정부에서도 실패하고 있는 관료 문제에 대해 어느 교수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사람들)’들은 ‘늘공(늘 공무원인 사람들)’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실 현재의 5년 단임제는 ‘영원한 관료지배의 충분조건’일지도 모른다. 각 분야 관료개혁의 세부적인 각론 없이 허허벌판에서 총론만 들고 적폐청산을 외치다 보니,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관료들에게 각론을 의지하게 된다.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장·차관, 기관장 몇 명 바꾸고 새로운 정책을 편다 해도 관료사회는 꿈쩍하지 않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문재인 정부, 아직 임기 500여일이 남았다”, <오마이뉴스> 2021. 1. 10.)

우리 사회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대통령 한 사람이 홀로 우뚝 서서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채 온 나라를 좌지우지 통치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청와대 권력이란 단지 전체 공무원 조직에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관료들은 바뀌지 않은 채 언제나 강고하게 온존하면서 그 핵심적인 자리를 장악한다. 국민들이 이름을 아는 장관은 거의 없을 만큼 너무도 수시로 바뀐다. 그러니 행정부 부처의 실질적 주인은 필연적으로 관료일 수밖에 없다. 환경정책이나 노동정책도 대통령과 장관이 지휘하는 듯 보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불과 몇 가지 정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정책들을 관료들이 행사하고 있다.

국회 역시 겉으론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온갖 비난을 모두 들으면서 정치와 입법을 좌지우지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국회 입법관료들이 보이지 않은 실권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사실상 관료들이 지배하는 관치(官治), 관헌(官憲) 국가이다. 이 나라는 대표적인 행정 비대 국가다. 정책 하나하나마다 수백 수천 명의 이해가 걸려 있다. 공무원이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법제가 입헌군주 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강점기에 만들어졌고, 그 뒤에도 그것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우리 법제에는 관헌국가적 잔흔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을 하고자 하는 자는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행정청의 권한을 간접적으로 규율하는 방식이 그 예이다. 이는 국민을 행정권 발동의 단순한 수동적 존재로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官)주주의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법’과 ‘규정’이 사회를 일상적으로 지배하게 된 이른바 ’87체제 이후 ‘법치주의’의 이름하에 결국 이들 관료집단의 지배력이 갈수록 확고해져왔다. ‘시험 권력’이 ‘선출 권력’을 사실상 조종하고 지배하는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실종된 사회다.

 

행정사무그리고 규정만이 군림하다

원래 행정사무 업무란 보조적 업무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무 및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이 부합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전반적으로 행정사무 업무가 오히려 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그 대표적 사례다.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재판을 보조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인사관리와 기획조정 업무를 장악하면서 스스로 법관에 대한 감독기관으로 군림하였다. 국회사무처 역시 전형적 사례이다. 독재 권력이 국회를 하수인 혹은 거수기로 전락시키기 위하여 도모한 국회사무처 소속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기제는 국회 입법관료에게 과도하고 ‘위헌적인’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관료 조직은 대부분 행정사무 부서가 인사와 예산 그리고 각종 사무분담 업무에 의거해 원래 보조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객전도요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공공성과 가치와 철학은 사라지고, 대신 오직 사무와 규정이 군림하면서 상명하복과 형식주의만이 만연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국회를 비롯하여 감사원, 대법원, 정당 등등 국가의 공공 시스템과 기관 중 자기의 명칭에 부합하는 위상을 지니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국회 전문위원’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전문가’들이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모두가 국회에서 순환 근무한 국회 공무원들이다. 이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검토보고’라는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 국회 공무원이다. 미국 의회의 위원회에 근무하는 전문가 스태프 조직은 모두 정당에 소속되어 있다. 독일 의회에서 이들 정책 ‘전문위원’은 독일 사회의 각계 전문가 출신으로서 자부심이 높은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시 정당 소속이다.

미국 의회 소속기구인 법제실의 법제관은 변호사나 법학박사 등 모두 법제 전문가로 구성된다. 반면에 우리 국회의 경우, 모두 순환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또 미국 의회예산처의 처장은 주로 경제학을 전공한 인사가 임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주로 국회사무처 공무원인 수석 전문위원 출신이 임명된다. 부실하고 왜곡된 우리 입법지원 기구의 모습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엉망이 된 우리의 정치과 경제, 사회, 노동 그리고 환경문제의 저변에는 언제나 관료집단이 도사리고 있다. 관료집단은 본질적으로 현상 유지와 친(親)재벌 사고방식의 보수적이고 기득권 편향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변화와 개혁에 저항한다. 더구나 외부로부터의 진입이 철저히 차단된 독점구조에서 감시견제 기제가 부재한 채 책임감과 의식 부재가 더해져 스스로도 갈수록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관료집단은 일반 시민과의 접촉은 별로 없고(혹 만나더라도 부정적이거나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기업 측 인사들은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관료집단은 ‘시장 친화적’이며 시장경제 옹호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등등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이 고착화되고 보수화가 강화되며 한 치의 변화와 개선조차도 어려워지기만 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관료지배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심각하기 짝이 없는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의 문제에서도 관료집단은 아무 의식 없이 그저 규정과 관행만을 내세우고 모르쇠, 시간끌기로 일관할 뿐이다.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없다.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관료개혁 없이는 우리 사회의 어느 것 하나도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우리의 미래 역시 없다. 우리의 미래를 이들 낡은 관료조직에 맡길 수 없다.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시험에 의한 공무원 선발, 과연 공정한 것인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시험에 의하여 공무원을 선발하는 방식이 최고의 미덕으로 치부된다. 그렇지 않은 그 어떤 공무원 채용도 불공정성으로 매도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공무원 선발제도를 일률적으로 중앙인사기관이 독점하여 고스란히 관리하는 시험제도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는 없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각 부처별로 인력을 충원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에는 1993년 정부혁신처(NPR; National Performance Review)가 설치되면서 인사관리의 분권화와 권한 위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처에 채용권한을 위임하고 각 부처는 자체 실정에 맞게 채용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운영 형태가 각기 상이하다.

일본의 공무원제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우리의 경우 중앙인사위원회에서 일괄적으로 선발하여 각 기관에 배분하는 형식을 취하는 반면, 일본은 시험을 중앙 인사원에서 일괄적으로 실시하지만 각 기관별로 채용후보자 명부를 작성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바로 임용되지 않고, 우선 ‘채용후보자 명부’에 등록되어 명부 순으로 각 행정기관에 추천된다. 따라서 성적이 좋을수록 희망하는 기관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각 기관은 엄격한 면접과 심사로 임용을 다시 결정하기 때문에 어려운 관문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대통령 공공관리 인턴(PMI: Presidential Management Intern)’ 프로그램이라는 고급공무원 임명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공공정책 분야에 우수한 석․박사 인력을 충원하기 위하여 1977년 카터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의하여 도입된 제도이다.

매년 공공정책 프로그램의 분석 또는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약 200명 이상의 젊은 인재들이 미국 국민에게 연방정부 공무원이 되는 지름길로 인식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2년 동안 연방정부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들은 ‘순환 인턴십 기회’를 통하여 거의 모든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게 되며, 이 프로그램에 의하여 우수한 석․박사 인력들이 연방정부에 채용되고 있다.

프랑스는 유명한 국립행정학교, 즉 에나(ENA)를 통하여 고위공무원을 채용한다. 2003년의 경우 총 선발인원은 100명으로서 이 중 50명은 외부 경쟁시험, 41명은 내부 경쟁시험, 9명은 ‘제3의 시험’을 통하여 선발된다. 외부경쟁 시험은 28세 이하이고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 내부경쟁 시험은 현직 공무원에게만 지원 자격이 주어지고, 학력 제한 없이 5년 이상의 공공 부문 근무경력을 충족시킨 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실시한다.

‘제3의 시험’은 40세 미만이고 전문직 또는 지방자치단체 의원으로 8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자에게 응시자격을 준다. ‘제3의 시험’은 고위 공무원의 사회적, 지리적 배경을 다양화시켜 공무원 충원의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이다. 프랑스는 이렇게 하여 고급 공무원의 사회적 배경의 균형을 추구하고 전문가의 공직 진출 가능성을 제고시키기 노력하는 한편, 그밖에도 계급제의 단점인 충원 형태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하여 공개채용시험 외에 다양한 충원 형태를 운영하고 있다. 특별채용과 전체 공무원의 20%에 이르는 계약직 공무원 제도의 활성화로써 계급제 하에서 인력운영의 탄력성을 높이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한편 영국의 경우에는 속진(速進) 임용제를 적용하여 공무원 중 고위직 공무원 직위에 도달할 수 있을 우수 인재를 선발하여 별도의 훈련 및 능력개발기회와 조기승진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 영국 고위공무원단의 1/3에 가까운 인원이 속진 임용제를 통하여 선발된다.

 

고시 출신의 군림과 육두품 출신의 슬픔

공무원이 기피대상으로 되던 시기가 있었다. 공무원 임금이 너무 낮고 대우도 좋지 않아 일반 대졸자들이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5급 고시는 우수한 인력을 공무원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유인책’의 제도였다.

그러나 이제 공무원은 이 나라 모든 젊은이들의 꿈으로 되었다. 9급 공무원 시험도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이다. 가장 우수한 인력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려들고 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이 밀집해있는 노량진역 부근은 공시족으로 언제나 인산인해다. 몇 년 전부터 이제 5급 공채(고시)나 7급 시험이나 차이가 없다는 주변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 우수한 인력들을 공무원으로 선발해 잘 운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문제는 고시 출신, 고시족들이 전두환 시절의 군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처럼 공무원 사회를 장악하고 독점하는 데 있다. 모두 고시 몇 기 몇 기로 통하고, 이들끼리 모든 요직과 지휘계통을 장악한다. 고시 출신이 아닌 다른 공무원은 마치 신라 시대의 ‘육두품’처럼 들러리로 전락한다. 진골과 성골 그리고 육두품의 출신 성분은 너무도 명확하다. 서슬이 퍼런 이런 계급 사회에서 기상천외하게 아부하는 재주가 있지 않는 한, 육두품 출신이 요직에 오르기 어렵다. 비(非)고시 출신으로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여 요직에 오르게 될지라도 이미 비고시로서의 정체성은 상실된다. 아니 오히려 비고시 집단에 적대적으로 스스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고시족 집단에 대한 높은 충성심이 이미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을 위한 역동성이나 미래지향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국회사무처의 경우를 살펴봐도 수석 전문위원과 전문위원을 비롯한 요직과 국장급에서 5급 공채, 즉 ‘입법고시 출신’의 비율은 매우 높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강화된다. 최근에는 과장급까지 고시 출신의 독점 현상이 나타난다. 실제 국회사무처의 주요 보직 중 고시 대 비고시 출신 비율은 2006년 48: 52였는데, 2011년에는 58: 42였고 2016년에는 80: 20으로 그 독점 현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5급 공채로 관료사회에 진입하면 30대에 이미 3급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지나치게 빠른 승진이고, 국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 경험이 적은 본인에게도 불행이다. 최근 판사 임용도 최소 3년 내지 5년의 법조 경력이 요구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와 같이 5급 공채라는 ‘특급 대우’를 제도적으로 제공하는 나라는 없다.

다양한 나무 품종으로 이뤄진 숲이 가장 번성한 숲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시험이라는 한 가지 단일한 형태로만 공무원을 선발하는 현재의 방식은 “우리가 남이가”의 가족주의와 온정주의를 낳고 이는 결국 부패와 무능을 심화시키게 된다. 그것은 오직 특권과 독점의 상징으로 되었고, 상명하복으로 권력에 무조건 아부하고 줄서기와 승진에만 몰두해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국회 고위 공직자로 있던 어떤 후배는 필자에게 4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필자는 대부분의 4급 이상 공직자들에게 ‘승진’에만 필요한 비상한 능력을 보유하고 발휘한다는 점 이외에 그들에게 특별히 대단한 능력을 가졌거나 실행하는 모습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공무원 조직도 과거와 같은 일반 행정가로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 앞으로의 공무원은 ‘일반 행정가(generalist)’ 보다는 공직사회 내에서 특화된 전문 능력을 보유하면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종합적인 관리 능력을 보유한 ‘전문성을 지닌 행정가(specialized generalist)’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은 1940년대 이후 지역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가능한 ‘대표관료제(representative bureaucracy)’를 채택하고 있다. 대표관료제란 한 나라 전체의 인구 구성에서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집단별 인구비례에 따라 정부 공직이 배분되어야 한다는 인사 원칙이다. 미국에서는 이 대표관료제를 적용하여 고용평등조치, 차별철폐조치 그리고 적극적인 고용할당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인재의 지역할당제 역시 이러한 적극적인 인재할당 대표관료제의 일종으로서 인력충원에 지역이라는 변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일종의 ‘지역주권’의 신장을 추구한다. 대의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지역별 비례에 의하여 국가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선발된 인력이 국가 공직사회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과정에서 출신 지역과 관련된 이익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적 대표성(political representativeness)’, 혹은 ‘정치적 대의성’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시험만에 의한 공무원 선발, 현대 국가에 적합하지 않다

고시제도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각급 공무원 시험제도는 사실 과거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흔히 과거제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공평성의 측면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왔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과거제도는 본래 치국의 인재를 배양하고 선발할 수 없고 도리어 황제 전제정치의 필요에 충실하게 부응한 제도이기도 하였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 고염무는 팔고문(八股文: 과거 시험이 엄격하게 요구했던 여덟 가지 형식)의 폐해가 진시황의 분서(焚書)와 같으며 인재에 대한 파괴는 오히려 진시황의 갱유(坑儒)보다 더 심하다고 갈파하였다. 그리고 결국 중국은 크게 낙후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선진국들은 공무원을 직무별로 수시 채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직 암기식의 단일시험 제도를 통해 일시에 공무원을 선발한다. 그리고 연공서열에 의하여 결정되는 승진과 급여 체계 대신 이제 성과와 실적에 의하여 결정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시험만으로 우수하고 도덕적이며 유능한 공무원이 선출될 수는 없다. 시험으로만 선발되는 현 공무원 제도 그리고 연공서열에 의하여 모든 시스템이 운영되어서는 전문성과 창의성 그리고 역동성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수요에 결코 효과적으로 부합할 수 없다.

 

소준섭

화, 2021/03/0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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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회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가 바로 국정감사다. 그야말로 국회의 큰 ‘행사’다. 그런데 이 국정감사 제도가 세계적으로 우리 국회에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파이낸셜신문>

국정조사(국정감사가 아니라) 제도는 영국 의회에서 1689년 아일랜드 전쟁의 실패 원인을 조사하고 그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활동을 전개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정조사권은 인정되고 있지만 국정감사제도는 다른 나라 의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1948년에 제정된 우리 제헌헌법의 제43조는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기 위하여 필요한 서류를 제출케 하여 증인의 출석과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제정된 국회법에서도 국정감사와 관련된 내용을 규정하였다.

“국회는 의안 기타 국정에 관한 사항을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의원을 파견할 수 있다(제72조).”

“국회로부터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정부 기타의 기관에 대하여 필요한 보고 또는 기록의 제출을 요구할 때에는 이에 응하여야 한다(제73조).”

“국회는 의안 기타 국정에 관한 사항을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증인의 출석을 요구할 때에는 따로 정하는 규정에 의하여 여비와 일당을 지급한다(제74조).”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국회법에서는 헌법과 달리 ‘감사’ 대신 ‘심사’ 혹은 ‘조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정례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이나 감사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별도의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국정감사와 국정조사의 구분을 하지 않았다.【1】

국정감사는 유신헌법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1987년 이후 부활하였고 헌법 제61조에도 다시 명문화되었다. 국회의 힘을 강화하고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엄격히 말해, ‘감사’와 ‘감시’ 그리고 ‘조사’는 상이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정확하게 구별되어 사용해야 한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로서 행정부에 대한 감시와 통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 직접 감사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행정부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권력분립 원칙에 위배된다. 더구나 현행 헌법상으로도 행정부 감사는 원칙적으로 감사원이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국정감사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2】 그에 따르면, 국회의 정부 감시 기능은 상임위원회 활동을 활성화시켜 상시적으로 이뤄지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미국 의회처럼 의회 내에 회계감사원을 설치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연방정부의 예산 지출과 운영에 대한 감사를 임무로 하며, 연방 정부의 예산을 사용하는 모든 사업과 활동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회계감사원의 감사결과는 수시로 모든 상하원 의원과 행정부에 제출된다. 그러므로 미국 의원들은 우리처럼 매년 국정감사를 하지 않아도 이 감사보고를 통해 각 부처의 운영상황을 손금 보듯 파악할 수 있다.

 

국회의원은 연예인이 아니다

국정감사가 진행될 때면 장관이 수시로 불려 다니고 국회 복도까지 공무원들로 북새통, 아수라장이 되어 국정 마비 현상을 초래할 정도다. 미국에서는 엄격한 권력분립에 의해 원칙적으로 의회의 장관출석 요구권이 없다.

그 동안 사람들은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이 피감기관에 호통을 치고 엄청난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목격해왔다. 감사보다는 정쟁의 연속이고 건수 위주며 ‘특권 과시의 현장’이다. 몇 해 전 국감에서도 태권도복을 입고 나오거나 한복 경연을 시연하고 고양이를 특별증인으로 신청하는 등 어떻게든 튀어보려는 연기정치의 희화화된 공연장이었다. 그러니 졸속감사에 수박겉핥기식 감사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으며, 이는 결국 국회의원들의 이미지를 더욱 추락시키고 정치 불신을 더욱 가중시킨다. 국회의원은 연예인이 아니다.

또한 국감이라는 이 과정을 통하여 전문위원을 비롯해 행정부에 대한 ‘갑’으로서의 국회 관료들의 권한 역시 필연적으로 더욱 강화된다.

‘개념의 오해, 혹은 착각’으로 탄생된, 세계 어느 의회에도 없는 국정감사 제도, 이제 폐지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1】 이러한 ‘감사’와 ‘감시’ 그리고 ‘조사’ 용어 혼동과 관련하여, 제헌헌법 기초자인 유진오 박사는 국정감사와 조사를 혼용하여 설명하며 국정감사를 영국에서 기원한 것이라 하여 국정조사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제헌헌법 제43조 규정에 대하여 유진오 박사는 “국회가 국정을 감시하기 위하여 제반의 조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기능이라 할 것이며, 본조는 국회의 이 당연한 기능을 선명(宣明)하는 동시에 국회가 국정을 감사할 때의 증인을 소환하여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음을 명백하게 한 것이다. 국회의 국정감사기능은 처음 영국에서 시작되어 점차 각국에 보급된 것인데, 종래 각국에 있어서의 국정감사의 실제를 보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유 박사는 국정감사를 영국에서 기원하여 각국에서 인정하고 있는 국정조사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김효전, “입법부의 정책통제 기능; 국정감사권과 조사권을 중심으로”, 「대한변호사협회지」제150호, 1989.

【2】 이관희, “우리나라 국정감사ㆍ조사 제도의 개혁방안”, 「헌법학연구」제11권 제3호, 2005. 9.

 

소준섭

목, 2020/09/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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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붕괴에 대해 흔히 맥이 빠지는 기사 헤드라인 너머의 현실에서는 다행히 각국 정부들과 기업들이 세계무역기구(WTO)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 상소 기구의 기능 마비와 같은 부정적인 현안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지난 2년간의 발전이 이루어진 실제 분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들이 나서서 주도하는 한, 노력을 적절하게 이해함으로써 더 광범위하게 개혁하기 위한 건설적인 로드맵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는 위기 의식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생산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년 간, WTO 회원국 다수는 21세기에 무역 규범을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전자 상거래 협상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국가가 전자 상거래 협상에 참여하고 있고, 2019년 12월 10일에는 WTO 회원국들이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원칙(moratorium)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회원국들은 ‘규율화 된’ 수산업과 농업 보조금과 같이 전통적으로 다루기 힘든 쟁점에 대해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합의와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국내 및 국경을 넘어 투자와 서비스 제공을 촉진하고, 여성의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며 중소기업이 시장에 더 잘 진입하여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서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다고 해서 상황을 모른 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제력이 변화하고, 기후위기의 난제에 대처해야 하며, 기술 발전이 상업에 지장을 주고, 시민들이 점점 더 포괄적인 형태로 모두를 위할 수 있는 세계화를 요구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핵심 중 일부가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무역은 사람과 지구를 위해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전 세계 각국 정부는 이번 위기를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 현재 무역 분쟁이 ‘법의 지배’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상소 기구의 위기에서 야기한 시급한 과제를 넘어, 현재 정치의 역동성은 무역 시스템을 극적으로 개선할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

WTO를 향해 집중된 관심은 WTO 조직 구조와 책임 체제를 강화하여 시스템 내 신뢰를 구축하기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및 사업 단체의 참여 증진, WTO 과정 및 협상의 투명성 증대, ‘특별하지만 차등을 두는 방안’을 위한 증거 기반의 기준 확립은 시스템 신뢰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국의 정부는 현 시점에 기존의 WTO 규정들을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1990년대 초에 제정된 무역 규범은 갈수록 더 서비스 및 데이터의 흐름으로 특징되며 디지털 기술 및 글로벌 가치사슬로 가능해진 21세기 무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정부단위에서 기후위기, 지속가능성, 불평등과 같이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을 다룰 권한을 WTO에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독창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WTO가 세계화뿐 아니라 불만의 원인을 다루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만큼 WTO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특히 아시아 태평양의 몇 정부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나서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가 WTO의 세 기능(감시, 분쟁 해결, 협상)을 개혁하고 현대화하자고 제의했는데, 이는 정확히 국제상공회의소(International of Chamber of Commerce)가 요구해온 바이다. 호주의 복수국간 WTO 전자상거래 협상 촉진은 21세기 무역의 현실을 다루기 위해 규범 제정을 통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시이다. WTO 상소 기구의 교착 상태를 타파하기 위한 뉴질랜드의 핵심적인 중재 역할은 공로와 공감을 모두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2019년 12월 10일, WTO의 60 회원국이 규범에 근거한 다자간 무역 시스템에서 WTO의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역할을 재차 시인한 점은 고무적이다.

명백하게 정부 단위뿐 아니라 기업에서도 더 많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초소형 기업, 중소기업, 대기업을 포함한 기업체들은 지난 25년 동안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혜택을 누려왔다. 세계 무역 시스템의 주요 사용자이자 수혜자인 기업은 WTO의 지지자가 되어 개혁 과정에 건설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리더십은 무역이 일자리, 환경,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정당하게 불평하는 일이 보호무역주의와 후퇴를 요구하며 역효과를 낳는 방향으로 변모되지 않도록 요구한다. 대신에 정부, 기업, 시민 사회는 무역 시스템이 사람들과 이 세상을 위해 작용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WTO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시기가 도래했다.

 

John WH Denton AO

파리에서 국제 상공 회의소 (ICC)의 사무처장

Damien Bruckard

ICC의 (무역 및 투자 분야)부회장

금, 2020/01/1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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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년 6월 26일 개최된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춘계학술대회의 기획주제 세션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한국 지식사회에서 ‘개인화’는 흔히 신자유주의적 고립이나 공동체적 연대윤리의 상실 및 이기주의의 확대,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위험이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현상 등을 단편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구 근대부터 2차대전 이후까지 다소 선형적으로 발전해온 산업사회가 그 역사적 성공 이후 깊은 변동을 겪는 과정을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울리히 벡이 사용한 ‘개인화’ 개념에 기초하여 복지체계의 변화 필요성을 촉구하고자 한다. 현대의 복지체계가 산업사회의 규범에 기초하여 제도화한 ‘유기적 연대’의 형태라면, 위험사회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개인화 상황 속에서는 사회적 연대의 형태 역시 한층 개인화한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현대 복지체계의 규범적 출발점

현대 복지체계는 유럽에서 발전한 자본주의 및 그것이 초래한 계급 대립 속에서 형성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봉건적 신분제로부터 개인을 해방/고립시키는 이중의 과정을 불렀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과 달리 계급은 1차적 집단관계가 아니다. 계급은 개인들 간의 사회경제적 성취의 격차로부터 2차적으로 형성된 집단적 격차의 문제로 정의되는데, 개인적 성취 격차를 집단적 격차로 구조화하는 것은 자본의 소유관계이다. 이 소유관계로부터 집단적 분배 격차가 생겨나는데, 복지국가는 소유관계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인 분배 격차를 완화함으로써 사회갈등을 약화하려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소유관계는 핵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적 관계―‘사생활’로 축소된―를 통해서 상속되기 때문에, 계급은 사실상 1차 집단으로서의 성격과 2차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교차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계급 갈등 속에서 과거의 신분적, 가부장적 문화를 매개로 계급결속이 형성되면서, ‘계급’(마르크스) 개념은 ‘사회계급’(베버)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계급 격차는 계급집단 간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격차, 즉 가족생활 향유에서의 격차와 집단문화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복지의 문제 역시 그와 같은 ‘사회적 삶’을 보장하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복지체계가 소유관계 자체가 아니라 분배 격차를 문제 삼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향상이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본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 발달 또는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보고, 그 결과물을 보다 평등하게 분배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현대 복지체계에서 당연시하는 사회이론적 전제는 1)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한 경제 성장, 2) 사회경제적 불평등인 계급 격차의 완화, 3) 사회적 삶의 보편적 단위인 핵가족의 보호, 4) 핵가족 부양에서의 계급 간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이론적 전제들에 제대로 포괄되지 못하고 외부화한 문제들이 들어 있다. 각각의 문제를 이 사회이론적 전제들과 관련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문제

경제발전의 틀에서는 생산력 향상을 위한 투입 요소로 노동력과 자본만을 고려한다. 그러나 생산을 위해서는 원료나 토지, 기계 등의 형태로 자연 물질의 투입 역시 필요하다. 또 노동력의 투입을 위해서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자연 물질적 특성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의 상속 역시 자녀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인간의 몸이라는 물질적 특성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력 재생산과 자녀 출산, 양육 등에 동원되는 여성의 몸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는 그러한 ‘자연 물질’의 문제를 모두 외부화하여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복지체계 역시 생산관계가 초래하는 분배 정의의 문제만을 ‘사회문제’로 보고, 자연 물질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외부화했다. 이것은 자연과 사회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회문제의 영역에서 자연 물질의 문제를 개념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평등이란 지속가능성 문제를 배제한 절반의 ‘정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볼 때, 생태 파괴 및 인구 돌봄 문제로 인해서 성장모델 자체가 불가능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2) 사회경제적 불평등 = 자본주의 계급 격차

사회경제적 격차를 계급 격차로 보는 관점에는 위에서 보았듯이, 핵가족 생활공동체를 인간 삶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단위로 보는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이것의 배경은 19세기 이래 유럽에서 확산한 ‘기혼여성 지위(덮어씌위기, coverture)’의 제도화이다.【1】 기혼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어도 더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고 또한 더 이상 법정에서 발언할 수 없도록 혼인 제도가 변화했다. 기혼여성의 법적 권리가 남편의 법적 권리 속에 묻혀서, 남편이 가족을 대리하는 법적 대표자가 된 것을 말한다. 여성은 시민권의 출발점인 계약할 권리에서 배제되었다.

그와 함께 아동기가 발명되고, 아내와 자녀가 모두 아버지의 성을 취하는 ‘가족성(family name)’ 제도가 일반화하면서, 남성은 재산 소유에서는 내부적으로 격차를 보여도 ‘가장’으로서는 동질화하는 ‘보편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이러한 남성 가장들 사이의 계급 격차로 정의되었다. 반면 여성은 앞서 보았듯, ‘자연 물질’과 유사하게 취급되어 남성의 사생활 영역에 묻힌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여성은 정치경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3) ‘정상가족’의 규범

기혼여성 지위가 법적으로 차별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남성이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은 살림을 도맡는 ‘정상가족’의 규범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상성은 특히 생물학과 정신의학 등에 의해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면서, 근대적 성역할 규범을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규정―‘자연화’(푸코)―했다. 그리하여 이제 보편적 정상가족을 향유하는 권리의 문제가 ‘사회권’의 내용으로 등장했다. 남성에게는 가족 부양의 기준에 따라 임금이 지불되고, 남녀 간 임금격차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비정상적―임시적, 예외적, 보조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4) 계급 평등 = 가족 부양자 남성 간의 격차 완화

결국 복지는 모든 성인을 대상으로 한 분배 평등 또는 남녀를 불문한 가장들 간의 분배 평등이 아니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남성의 능력을 보장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성역할 규범과 연관된 엄격한 공/사 구분으로 인해서 ‘노동’의 원형은 ‘가장 남성’의 노동으로 정의되었다. 특히 공장제 산업사회의 형태로 조직화한 제조업 육체노동이 노동의 원형이 되었고, 여성의 직업으로 분류되는 저숙련 서비스직이나 가족 내 삶을 위한 노동은 ‘노동’ 개념으로부터 주변화 또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발전하고 또 탈제조업중심의 산업변화가 진행되면서, 이와 같은 평등 개념은 현실적 토대를 잃게 되었다. 우선 복지국가 발전의 역설적 결과로서, 평등이 계급집단 간의 갈등보다 개인이 국가에 청구하는 ‘사회권’ 개념으로 변화했다(‘제도화한 개인주의’ 또는 ‘고객주의’). 탈산업화로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증가하고 기혼여성의 경제활동이 증가하면서, 남성 노동 중심의 복지체계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그리고 여성의 교육수준 향상과 경제활동 증가, 직업 세계에서의 경쟁 격화, 이동성 증가 등으로 인해서 1인 가족이 증가하며, 노동의 목적이 ‘가족 부양’에서 ‘본인 부양’ 또는 ‘가족 공동부양’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나타났다(‘노동과 가족의 개인화’).

 

2. 개인화 및 그것이 복지체계에 던지는 과제들

울리히 벡은 앞서 본 바의, 산업사회가 외부화―즉 단순한 리스크로 처리―한 ‘자연 물질’ 관련 문제 중에서 생태적 위험과 관련된 ‘불확실성’이 정치적 공론화의 의제가 되는 과정을 ‘위험사회’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2】 그리고 위험사회의 노동과 삶의 측면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양상들, 즉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노동 및 가족 규범의 ‘탈정상화’를 ‘개인화’라고 표현했다. 노동 규범의 탈정상화는 정상노동모델의 약화를 의미하고, 가족 규범의 탈정상화는 탈핵가족화 또는 근대적 성역할 규범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새로운 불확실성’(생태위험)의 증가와 탈산업화로 인한 생애위험의 탈계급화뿐만 아니라,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 역시 크게 작용했다. 특히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으로 인해서 개인주의가 단순한 문화나 이념이 아니라 ‘법적 권리’로 제도화―‘제도화한 개인주의’―했기 때문에, 노동과 가족의 탈규범화는 단순한 아노미가 아니라 근대 이후 진행된 개인화가 한층 급진적 형태로 심화하는 것(‘2차 개인화’)이라고 보았다.【3】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공론화의 의제 및 사회적 저항의 조직방식이나 주체들에서 변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인 것’ 자체가 기존의 공/사 구분이나 사회/자연의 구분을 넘어서 혼종화하는 경향―‘새로운 사회운동’―이 나타났고, 이 역시 개인화와 함께 진행되는 정치변화라고 설명했다. 정치적 의제나 저항의 조직방식, 주체화 등이 개인별 위험 인식에 따라 유동적 네트워킹 방식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개인화의 이러한 양상들이 복지체계에 던지는 의미는 앞서 말한 복지의 사회이론적 전제들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1) 우선 평등 분배의 단위가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에서 모든 개인과 아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2) 제조업 육체노동자의 노동을 원형으로 삼아 발전한 계급모델과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제도에서 탈피해서 상품화한 모든 노동―불완전고용과 여성노동 포함―에 평등한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기혼여성의 경제활동 증가 및 1인 가족 증가로 야기되는 일·가족 양립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4】 4) 소득 분배에 의한 생존권 외에 ‘자연 물질’과 관련된 안전권―인간 돌봄, 생명 안전, 생태적 안전권 등―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돌봄과 관련된 문제

이러한 도전 중에서 여기서는 돌봄과 관련된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노동과 가족의 개인화 그리고 정치적 의제 및 주체의 개인화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돌봄 문제를 다룰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1) 우선 생존권 개념이 정상가족 단위의 생존이 아니라, 성인과 아동 개인 단위의 인권문제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경우에는 돌봄이 가족이라는 사적 공동체에서 근대적 성역할 규범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필요에 따라 수행되는 동시에 사회적 서비스의 형태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는 보편적 생계부양자-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에 기초하되,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개인이 두 가지 보편적 역할을 병행할 수 있도록 사회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5】 사회서비스로 제공될 경우 돌봄노동에 대한 가치평가나 돌봄노동자의 조직력 역시 향상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2) 노동위험이 불안정 노동으로 인한 개인별 생애위험으로 변화하므로, 이에 대한 안전보장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기본소득 대 전국민 고용보험’이라는 형태로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고용보험의 보편적 확대는 적용대상자에 대한 조사와 분류가 필요하여 시간 및 행정의 비용이 예상될 뿐만 아니라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사용으로 각종 서비스 단말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일상의 삶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 증가하며, 노동과 삶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경제적 가치 생산이 이처럼 단말기와 일반인의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사이보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민의 삶 속에서 수행되는 경제적 기여에 대한 보상이 포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6】 또한 (사회서비스 제공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에게 일정 정도 남겨질 수밖에 없는) 돌봄노동이 보편화한다고 해도, 그 역시 부불노동으로 남는다. 재정마련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과 함께, 역진성을 약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세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3) 복지제도에 의해 개인별 생존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에서, 노동과 돌봄이 통합된 형태로 연계될 수 있도록 노동조직의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로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아프면 쉬는’ 문화와 함께 ‘아픈 가족원을 돌볼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사업장 문화가 바뀐다면,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부담 역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예방책으로 가장 실현되기 어려운 조건이 ‘아프면 쉬는’ 문화라는 것이 여론조사의 결과였다. 또 인구 고령화와 함께 돌봄에 대한 수요가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돌봄을 사적 비용으로 또는 대면적 공동체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서 바뀌어야 할 것이다.

4) 생태적 지속가능성은 세대 간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돌봄은 생태에 대한 돌봄과 유리될 수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공장가동 중지로 미세먼지가 줄어든 것, 그리고 개인별 위생수칙의 철저한 수행으로 호흡기 질병이 줄어든 것 등을 볼 때, 생태적 지속가능성이 사회의 돌봄 비용을 전반적으로 낮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지속가능성 분야에서의 일자리 창출 및 생존권 보장을 통해서 일과 삶, 돌봄을 한층 유기적으로 통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새로운 틀은 돌봄을 사회서비스로 제공함으로써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을 제도화한 북유럽 모델을 기초로 하되, 돌봄의 보편성을 한층 강조하고 또 거기에 일상 속 노동을 소득으로 보상하는 기본소득을 더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스웨덴 모델에 대한 실망과 한국식 모델의 모색

한국에서 그간 복지국가 모델로 크게 주목받은 스웨덴이 코로나19로 집단면역 실험을 하면서 상당한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그간 스웨덴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컸다는 비판이 올라왔다. 또 코로나19를 계기로, 서구 복지국가에서 살거나 노동하는 외국인의 열악한 생활상이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노동유연화에 대한 대처에서 북유럽 모델이 스웨덴 모델과 덴마크 모델로 갈렸던 것처럼, 코로나19에 대한 대처에서도 스웨덴과 덴마크는 상이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들에 유념할 때, 북유럽 모델을 하나의 동질적인 모델로 이해하는 대신, 각 사회에서 고유하게 발전한 복지모델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적절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데에 참고하는 것이 한층 발전적일 것이다.

 

【1】 캐롤 페이트먼, 2001,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이충훈·유영근 옮김, 이후.

【2】 울리히 벡, 1997, 『위험사회』, 홍성태 옮김, 새물결.

【3】 울리히 벡, 2013, 『자기만의 신』, 홍찬숙 옮김, 길.

【4】 독일의 노동 4.0에서는 개인화가 복지체계에 주는 의미를 ‘시간 주권’의 문제, 즉 일·가족 양립의 문제로만 이해했다. 홍찬숙, 2018, “노동 4.0인가 제2의 노동세계인가? 노동 4.0의 산업사회 관점 및 그 한계,” 『경제와 사회』 119: 165-192 참조.

【5】 낸시 프레이저, 2017,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옮김, 돌베개.

【6】 기본소득의 노동 근거로서 필자는 울리히 벡의 ‘시민노동’이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부불노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이보그적 가치 생산에서 소비자 노동이 사실상 비가시화되며, 돌봄노동 역시 사회적 생산에 필수적인 노동으로 여겨져야 한다. 반면 벡은 위험사회에서 시민의 기여가 ‘노동’에서 ‘정치참여’로 바뀐다고 보며, 그것을 기본소득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울리히 벡, 1999,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 홍윤기 옮김, 생각의나무 참조.

월, 2020/07/06-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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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민주주의의 영향과 실행에 대해 경험을 기반으로 한 총체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사회-경제적 맥락과 역사-문화적 배경, 레퍼렌덤 권리의 발전 단계, 법적인 틀과 국가적으로 각 현실의 정치적 상황 등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이를 시행한 모든 체제에 적합한 어떤 단일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란 어렵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모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다양한 연구 기관에서 실시한 경험적 조사에서 나타나며, 꾸준히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효과들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들을 요약한다.

 

민주주의라는 근본적인 원칙에는 변화가 없다

직접 민주주의는 어떤 정치체제의 토대를 허물어 내는 수단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시민들은 정치적 권리들을 확장시키고 손질하기 위해 정치체제의 몇 가지 근본 요소들을 개선할 자유가 있다. 민주 사회에서 정치 참여는 기본권에 속하며, 정치법을 바꾸는 데 활용될 수도 있다. 국민 대다수가 바라는 레퍼렌덤 권리들은 사실상 민주주의의 정착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레퍼렌덤으로 엄청난 정치적 분열이 일어난 적은 없다.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체제에 새로운 국민의 권리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스위스에서 1900년대 후반 국가 권력 구조의 근본적인 개혁과 더 힘없는 계급들의 해방을 바란 좌파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 보수층은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면 개인 소유주들의 권리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을 두려워했고, 유산有産계급은 새로운 국민 권력을 일종의 위협으로 느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소수당에 불이익은 없다

직접 민주주의는 덩치에 따른 선거 제도를 만들려는 지배당의 시도에 대항하기 위한 피난처이다.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는 자유선거와 복수 정당제이다. 때로는 강한 정당들이 레퍼렌덤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법을 바꾸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이런 논란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런 정당들은 의회에서 다수당인 덕분에 어찌되었건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레퍼렌덤 권리는 이런 효과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다수당들을 통제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이 드러났다. 스위스에서 시민들은 레퍼렌덤 투표로 소수 정치 세력들에게 더 유리한 비례 제도를 적용했다. 반면 1990년대에 이탈리아에서는, 군소 정당들의 발안으로 완전 비례 제도가 폐지되고 정당 연합을 결성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주로 다수 편향적인 제도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때로는 야당들이 특정 정치 현안에 대해 집권 다수당을 좌절시키려는 과정에서 “레퍼렌덤이라는 방법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집권당 연합 또한 거의 플레시비트와 유사한 술책의 형태로서 유권자들에게 결정권을 맡김으로써 별로 반갑지 않은 결정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대개 모든 레퍼렌덤에서 각 정당은 공개적으로 찬반으로 편을 나누거나 투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호소했다. 요컨대 선거 제도의 입법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소수 정당들에게 피해를 주기보다는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을 볼 수 있다. 여러 나라에서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군소 정치 세력들이 종종 레퍼렌덤 도구를 활용하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며, 이탈리아의 급진당Partito Radicale은 1974년부터 2006년까지 20개 이상의 레퍼렌덤 사안을 추진했던 것도 사실이다.

 

국민발안과 연합주의Associationism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

직접 민주주의는 이익단체들이나 시민발안의 역할과 가능성을 강화시키는 한편 때때로 각 현안에 대한 정당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아무런 정치적 책임이 없고, 선거에 후보자를 내지 않으며 로비 활동처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조직적으로 일하지도 않는 단체나 어떤 운동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관심 있는 특정 현안에 영향을 미칠 기회가
있다.

직접 민주주의는 보통 레퍼렌덤 투표에서 선거 때 투표한 정당과 완전히 같을 필요가 많지 않아, 시민사회 및 연합주의 단체나 운동의 역할을 강화시키고, 대화와 타협에 나서도록 정당들을 압박한다. 레퍼렌덤 도구 덕분에 국민 대다수는 필요할 경우 비상 브레이크나 안전 잠금 장치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방제도: 직접 민주주의 가동에 유리한 조건

연방제도와 지방자치는 레퍼렌덤 권리의 발전에 유리한 기반을 제공한다. 지방(주, 현, 기초자치단체)에 더 큰 법적 권한이 더 부여될수록, 레퍼렌덤 권리를 가동할 수 있는 정치 부문이 더 확대된다. 이 권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훈련장”이다. 지방 정치에서 시민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레퍼렌덤 투표에 참여하려 하는데, 다루는 사안이 그들 자신과 밀접히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민들이 담당해야 할 정치적 책임이 더 클수록, 시민들은 레퍼렌덤 도구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레퍼렌덤 권리를 법적으로 잘 정비하여 미래의 지방법 개정을 위해 투표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포함시키면, 중앙에 비해 지방 정부들의 입지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실상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방의 책임을 기꺼이 중앙 정부에 양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연방제도 또한 강화시킨다. 곧 시민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의 참정 기회가 훨씬 큰 지방 정부급에 힘을 실어주려 할 것이다.

 

소수의 위험과 기회

직접 민주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소수자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의 관심을 명확히 밝히거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론상 레퍼렌덤 도구는 소수자들에게 불리하게 쓰일 수도 있다. 우선 두 부류의 소수자를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쪽은 “영속적인” 사회적 소수자들이 있다(예를 들어,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 소수 민족, 소수 종교인 단체, 이민자 등). 다른 쪽은 정치적 소수자나 가변적인, 다른 부류의 소수자들이다. 발안은 사회적 소수자에게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기회를 보다 많이 제공한다. 그러나 그들 혼자서 해낼 수는 없다. 정치적 다수가 그들의 관심사에 찬성해야 하기 때문에 더 광범위한 사회적 집단들과 협력해야 한다. 레퍼렌덤을 통해 소수자들도 새로운 연합에 들어가고 심지어 국회의 다수를 꺾을 가능성도 갖게 된다. 이런 권리의 존재만으로도 정당과 정부를 압박하여 더욱 진지하게 소수의 이익을 고려할 수 있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패배한 체계적이지 않은 소수자들 또한, 때로는 그들이 바라는 개혁을 위해서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깨닫고, 정치적이건 사회적이건 레퍼렌덤 투표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경우이건 소수자들과의 공개적이고 바람직한 대면은 그들의 사회적 통합을 촉진시킨다. 물론 그것을 목표로 소수자들에게 레퍼렌덤 권리를 완전히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 조달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어쨌건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의회에 도달하지 못하는 단체로서는 조직하기 어려운 사회적 빈민층이나 정치적 소수자들의 이익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점에 국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수의 입장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때로 사회적 소수자들은 직접 민주주의 절차의 틀 안에서 적대감과 뿌리 깊은 편견으로 똘똘 뭉친 집단들에게서 소외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공적인 토론은 그 자체로 역동성이 있으며, 매우 다각화된 우리 사회에서 그 어느 누구도 단 한 가지만 소수에 속하거나, 또 늘 소수자로 남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의회에서도 소수의 이익은 종종 다수당의 논리에 희생된다. 어쨌건 헌법과 국제 협약 및 인권 조약에서 마련된 기본권들로 구성되고, 거의 모든 나라에서 지방법 및 유럽연합 조약으로도 비준된 레퍼렌덤 권리들에는 한계가 있다.

 

정치적 엘리트의 확대

누가 정치적 엘리트에 속하는가? 정부, 국회, 행정부, 정당의 정치적 인물들과 정치적 성격을 지닌 거대 조직의 인물들이다. 엘리트, 혹은 적어도 이런 형태의 리더들의 집단은 대개 대의민주주의를 선호하며, 의사 소통 채널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직접 민주주의는 주로 그들에게 일반 국민들과 관계를 맺도록 독려함으로써 상황을 변화시킨다. 한편으로 각각의 레퍼렌덤 발안 또한 오로지 기꺼이 헌신하고, 어떤 대의를 위해 투쟁할 태세가 된 능동적인 시민들 덕분에 태어난다. 이들은 사회적 엘리트 층을 형성하지 않으며, 하나의 정치적 주제나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갈 역량을 지닌 소수자들이다. 제기한 사안과 관련하여 항상 이 시민들의 비중은 무시 못할 정도인데 특히 레퍼렌덤 권리가 얼마나 발전되었느냐에 따라 더욱 그렇다. 직접 민주주의는 그저 엘리트 층 사이에서 어떤 주제를 대면하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계급과 국회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그룹들 간의 토론도 자극한다. 정치적 절차가 그렇게 더욱 확대되고 풍요로워진다.

 

직접 민주주의는 적법성legitimacy을 더 부여한다

“적법성”이라 함은 어떤 결정이나 어떤 조직에 대한 정치적 평가 수준을 의미한다.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록 그 결과는 더 적법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의미에서 더 강력한 적법화의 형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온 국민이 참여하는 레퍼렌덤 투표, 혹은 선거의 경우 국가 원수나 지방 행정부 수장의 직접 선거이다.

만일 레퍼렌덤 도구를 통해 대의 기관의 심의에 반대하거나 행정부에서 바라는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집단들이 레퍼렌덤 투표에서 패배한다면, 그들이 제안한 주제의 유효성이 아니라 그들 반대의 적법성이 사라지게 된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한편 각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레퍼렌덤 투표에서 패배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전반적인 신임이나 총선을 통해 그들이 부여받은 위임의 적법상이 아니라, 단순히 국민과 의견을 달리하는 어떤 명확한 선택과 관련한 적법성을 잃는다.

 

진보주의의 온상도 보수주의의 온상도 아니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에서 정치인들이 제기하는 첫 번째 질문의 하나는, “이 도구는 어떤 방식으로 나의 정치에 도움이 될까?’ 이다. 보수 세력이건 자유주의 세력이건, 좌파건 진보 진영이건 국민은 직접 질문을 받고 그들 견해를 밝힐 것을 요청받는다. 과거에는 과연 직접 민주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옹호하거나 방해할 수 있을지 자문하는 것은 주로 좌파였다. 좌파들이 봉착한 딜레마는 직접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더 큰 결정권을 넘겨 주지만, 과거에도 현재도 이것이 꼭 진보적 해결책을 옹호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대개 국민발안은 단지 여러 사람들이 느끼는 긴급 현안들을 제기하여 정치인들을 포함한 모두가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 도구들은 시민 단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공적으로 표현하여 국회와 정부의 의도에는 어긋나는 것이더라도 그것을 다수의 결정으로 이끌어 낼 수 있게 해 준다. 만일 레퍼렌덤 절차가 대규모 토론과 함께 이루어진다면, 레퍼렌덤의 결과는 항상 열려 있다. 국민발안들 사이에서도 주요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 곧 보수적인 국민발안이 있고, 혁신적인 국민발안이 있다. 직접 민주주의가 사회의 진보적 입장과 세력을 희생하여 보수적 입장과 세력을 옹호하려 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히 전통적인 통로만으로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국민들에게 좀 더 목소리를 실어 주는 것이다.

 

정치 시스템 전반의 효율성 증진

어떻게 정치에서 “효율성”을 측정할까? 만일 어떤 정치적 승인에 도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측정 기준으로 잡는다면, 직접 민주주의는 확실히 결정 과정을 간소화시키지도 않고, 그 기간을 줄여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평균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이나 좀 더 보편적인 시각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실시는 정치체제의 안정을 증진시키며, 그러므로 그 효율성 또한 증진시킨다. 대개 효율성은 한 정치체제의 유익성과 비용 사이의 관계로 정의된다.

종종 정치인들은 레퍼렌덤 도구들이 정부의 통치 능력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레퍼렌덤 투표가 선출된 정치적 책임자들과 거대 조직 책임자들의 결정 범위를 지나치게 제한하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정보 전달과 공개 토론 비용 및 투표 자체의 실시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비용 증가와 정치적 절차가 어느 정도 지연되는 것이 다른 이점들, 곧 지속성과 안정, 적법성 및 레퍼렌덤 승인으로 채택된 해결책의 수용 등의 이점을 없애지는 않는다. 시민들은 종종 선거 중간에 개입할 수 있는 그 어떤 정치적 도구도 없이 법적으로 호소하거나 좀 더 급진적인 항의 형식에 의존하여 어쨌든 프로젝트들을 막아내곤 한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로 정치권은 미리 국민들의 동의를 구해야만 한다.

 

최고 수준의 정보 전달 덕분에 이루어지는 일반 교육

정치적 이익과 “정치적 성숙”을 위해서는 적절한 학습과 교육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모든 시민들은 참여 여부에 상관없이 레퍼렌덤에 즈음하여 생겨나는 공적 토론에 노출되게 된다. 직접 민주주의의 사회화 효과는 시민들과 정치인들 간에 직접 접촉으로 정치적 대면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더 크다. 이 효과는 시민들이 대개 그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지역적 차원에서 더 생생하다.

그들은 다양한 입장이 있다는 것과 모든 이들의 논점과 목소리가 모두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이 내린 결정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불특정의 시민은 한 번은 승리한 다수에 속하고, 또 다른 때는 패배한 소수에 속하게 된다. 레퍼렌덤 과정에서 다수를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세력도 더 이상 “국민”을 운운할 수 없다. 미국과 스위스에서 투표 참여는 늘5 0%를 넘지 않지만,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취로 여겨지는 레퍼렌덤 권리를 훼손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면 국민 저항이 매우 높다.

 

승인된 해결책의 수용율은 높고, 잠재적 갈등은 줄어든다

레퍼렌덤 투표에서는 특정 현안에 집중하며 그것을 전반적인 정치적, 사회적 갈등과 섞지 않는다. 레퍼렌덤 절차가 규정을 완전히 존중하여 시행된다면, 곧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모두가 받아들인다면 투표는 국민들과 의회 다수당, 정부 사이, 그리고 정치 세력들 간의 긴장을 명확히 설명하고 완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어떤 이는 직접 민주주의가 복잡한 현안들을 다룰 때 반듯이 필요한 타협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지만 대신 의회에서는 그런 타협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스위스에서는 레퍼렌덤의 예측 불가능함을 염두에 둔 세련된 기제가 존재한다. 자신들이 레퍼렌덤에 착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그룹들을 참여시켜 “예방 공간”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타협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직접 민주주의가 제도적 차원에서 진전이 없는 어떤 상황을 돌파할 수 있게 해 준다. 만일 의회가 타협점을 찾을수 없어 법을 정하지 않는다면 국민발안은 시민들에게 최후의 발언권을 준다. 스위스에서는 대개 국민 50% 이하가 레퍼렌덤에 참여하지만, 결과의 수용율은 높다. 각자 자신들이 원한다면 참여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제가 잘 알려져 있고, 단순하고, 토의를 거친 것일수록 레퍼렌덤에 더 적합하다

모든 정치 현안이 레퍼렌덤 절차로 쉽게 다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잘 알려져 있고, 논의를 거쳐서 정보 제공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에 대해 어떤 가부가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의제가 바람직하다. 원칙에 따른 정치적 차원에서 내린 모든 결정은 평균적인 시민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현대적 개념은 자유롭고 정보를 갖춘, 의식 있는 시민을 전제로 한다. 그 밖에도 상당한 서명을 모으는 일이 민주주의의 여과기 역할을 한다. 헌법 개정, 정부 형태 변경, 초국가적 기구에 주권의 양도 등 더욱 강력한 합법성을 요하는 의제들이 존재한다. 많은 유럽 국가에서 실시한 유럽연합 가입 관련 레퍼렌덤들이 이런 막중한 정치적 결정을 합법화하는 법적 구속력을 지녔다.

예를 들어, 연간 예산 관련법 같이 여러 차원에서 타협을 요하는 복잡한 현안들은 레퍼렌덤 절차에 놓이는 것이 그리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특정 세금 관련법의 경우는 다르다. 캘리포니아 또한 몇몇 정치적 사안을 직접 민주주의에서 배제시키지만, 스위스는 그렇지 않다. 스위스에서는 그 어떤 사안도 배제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공공 예산과 관련하여 “참여적 예산”이라는 흥미로운 경험이 존재한다(11장 참조).

대체적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긴 전통을 지닌 나라에서 실시한 선험적 조사에 따르면, 좋은 직접 민주주의에 따른 주요 효과는 다음과 같다(Gross 2007과 Kaufmann/Buchi/Braun 2009 참조).

▪ 직접 민주주의는 정치를 더욱 전달력 있게 만든다. 구체적인 정치적
현안에 관한 정치적 결정의 합법성에 대해 시민들 측에서 의문을 제
기할 수 있으며, 정치인들 측에서는 충분한 근거를 들어 이를 설명
해야 한다.
▪ 직접 민주주의는 모든 관계자들이 사실과 주제에 기반한 공개 토론
에 나서게끔 함으로써 정치적 대화를 더욱 진지하고 합리적인 것으
로 만들어 준다.
▪ 직접 민주주의는 수적으로 열세한 그룹이나 소수자들도─국회와
의회에 존재하지 않는─공개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준다.
▪ 직접 민주주의는 보다 공평하고 정확한 정치 권력 분배를 가능하게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정치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또는 국민 레퍼렌덤 투표에서 다수를 설득할 정도로 큰 특권을 주지
않는다.


편집자 주:

다른백년 출범 3주년을 기념하며 자축하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 제목으로 21세기 새로운 흐름인 직접민주주의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현재의 한국정치로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1%의 소수를 위한 정치에서 99%의 시민을 위한 정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비례성을 100% 강화하는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비판하고 결정하고 통제하는 민치 – 시민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책의 내용을 격주를 통하여 약 10개월 간 연재하고자 합니다.  직접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시중의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을 통하여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금, 2019/12/2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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