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경향신문] “역사를 모르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민족사 바로 세우고 ‘실천한 역사학자’

지역

[경향신문] “역사를 모르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민족사 바로 세우고 ‘실천한 역사학자’

admin | 수, 2020/04/22- 07:33

역사 지킴이 이이화

2018년 5월 서울 지하철 종각역 사거리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 앞에 선 이이화 선생. 이 선생은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으로 동상 제막을 주도했다. 이준헌 기자 [email protected]

출판인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담아내는 책을 기획해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것이 나에게 있다. 나는 1976년 출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름 우리 국가사회가 당면하는 문제를 ‘역사’라는 문제의식으로 풀어내는 책을 만들어왔다. 1979년에 시작해 1989년 전 6권으로 끝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의 일단이었다. 1986년에 시작해서 1994년 한꺼번에 펴내는 전 27권의 <한국사>는 한 출판인의 민족사에 대한 나름의 헌정이었다. 170여명의 연구자가 참여하는 한길사의 <한국사>는 근·현대사를 대폭 강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펴낸 <한국사>에 ‘관찬’이 아닌 ‘민찬한국사’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는 학술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서술됨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나는 ‘국민독본’ 같은 한국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국사> 출간 직후부터 했다. 1980년대의 치열한 민족·민주운동이 세계화시대를 맞으면서 ‘한국사’가 더 필요할 터였다.

나는 그 무렵 대형기획 ‘한길그레이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동서고금, 인류의 위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집대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지속되는 한길그레이트북스를 통해 인류 보편의 지혜와 사상을 우리 사회가 새롭게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동시에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독자들의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키던 ‘로마인 이야기 현상’에 대응하는 ‘한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가 이를 해낼 수 있을지 궁리했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교수나 연구자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논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 삶에 살아 있는 역사의 육성을 들려주는 저술가라야 한다. 어디에 귀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역사가’라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1994년 가을 ‘아치울의 결의’

연구자 170명 참여한 ‘한국사’
학술적이라 일반 독자에 부적합
호평 받은 ‘로마인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한국사’ 필요성 느껴

이이화(李離和·1937~2020)! 1994년 가을, 나는 아차산록의 아치울 마을로 이이화 선생을 방문해 ‘대중이 감동하면서 읽는 한국통사’를 써보자고 제의했다. 10년 정도 걸리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사회사·생활사·문화사를 총합해야 한다. <로마인 이야기>를 뛰어넘는 장대하고 아름다운 한국사! 나와 이이화 선생은 두 손을 잡고 ‘아치울의 결의’를 하는 것이었다.

이이화 선생과 나는 1980년대부터 호흡을 맞추어 왔다. 1987년에는 한길역사강좌의 일환으로 ‘한국사상사’를 7회에 걸쳐 강의했다. 1988년에는 ‘근대민중운동사’를 역시 7회에 걸쳐 강의했다. 이이화 선생은 ‘재야연구자’로 1970년대부터 주목할 논문을 발표해왔다.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1975),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1977) 등이 그것인데, 나는 선생의 논문집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을 1994년에 펴냈다. 이보다 앞서 1988년에는 전 5권의 <인물한국사>를 펴냈다.

역사가 이이화는 늘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1980년대에 나는 이이화 선생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선생은 1985년부터 진행된 한길역사기행에 가장 많이 참여한 현장강사이자 역사가이드였다. “역사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숨쉽니다.”

1986년 5월, 2박3일의 지리산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 국토, 우리 역사의 장엄을 새삼 확인했다. 나는 ‘지리산과 민족사’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구례 화엄사에서 피아골 계곡을 타고 노고단을 오르는 여정이었다.

이이화 선생은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를 발제했다. 지리산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긴 글이었다.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유몽인(柳夢寅)이 그의 책 <어우집>(於于集)에서, 금강산은 뼈다귀가 많으면서 고기가 적고, 지리산은 고기가 많으면서 뼈다귀가 적다고 한 기행문을 소개하며 “금강산이 지자(知者)와 이지(理智)의 산이라면, 지리산은 인자(仁者)와 덕성(德性)의 산”이라고 했다.

“이번에 화엄사 골짜기와 노고단, 피아골의 깊은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나에게 자양분을 날라다 주시던 우리 어머니. 다육소골(多肉少骨), 이렇게 먹을 것이 많고, 몸을 감싸주기에 지리산은 인간과 너무나 친밀한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덕성 속에 비극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천년만년 우리 겨레와 함께 숨쉬면서 안식처가 되기는 했지만,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비극의 역사를 이 지리산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1987년 5월, 3박4일의 지리산 역사기행을 다시 기획했다. 산청에서 천왕봉을 올랐다. 백무동으로 갔다. 제수(祭需)를 준비했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혼령들을 위해 일행이 함께 참례하는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이화 선생에게 제문(祭文)을 부탁했다. 200자 원고지 30장이 넘었다. 일행은 깊은 산속에서 구슬프게 읽어내리는 선생의 제문에 눈물을 글썽였다.

1986년 9월 이이화 선생과 함께 우리는 ‘동해안 의병의 근거지’를 찾았다. 임진왜란 때부터 구한말까지 의병 봉기의 고장이었던 영덕과 영해,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생가를 답사했다. 일행은 마을회관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이 시대의 의병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토론했다.

1987년 3월,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호남평야를 다시 갔다.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동학농민군 총관령 김개남(金開男·1853~1895) 장군의 집터를 찾았다. 나는 가로세로 10㎝, 길이 2m의 말목 두 개를 준비했다. 흰 페인트를 칠하고 이이화 선생에게 붓으로 ‘김개남 장군 고택 입구’와 ‘김개남 장군 고택 구지’를 쓰게 했다. 역사기행 일행은 이제는 밭이 되어 있는 이곳에 두 말목을 세웠다.

1995년 <한국사 이야기>를 집필하던 이이화 선생.

■ 10년 작업 <한국사이야기>는 ‘국민독본’

역사의 육성 들려주는 저술가로
이이화 선생에 제의 10년간 작업
국민독본 ‘한국사 이야기’ 22권
방대한 연구 성과 담아 세상에

이이화 선생은 <한국사 이야기> 집필을 지금은 폐교된 전북 장수군 천천면 연화분교에서 시작했다.

분교 옆으로 금강 상류가 흘렀다. 한때 한길사는 그 폐교를 빌려서 역사기행·국토순례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선생은 이곳에 칩거하면서 2년 반 동안 고대사 집필을 끝냈다. 다시 김제 월명암으로 옮겨 고려사를 끝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살펴보아야 할 자료가 방대해서, 아치울 자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1998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한국사 이야기>는 드디어 2004년 봄 전 22권이 완간되었다. 참으로 놀랍고도 힘찬 저술작업이었다. 우리의 응원과 편집작업도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세기말에 시작되어 새 세기의 벽두에 간행되는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를 나는 ‘21세기 국민독본’이라고 이름붙였다. 개인의 통사작업으로는 가장 방대하고, 지금까지의 한국사 연구성과를 총체적으로 수렴하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 장대한 작업을 해낸 이이화는 분명 ‘거인’이다. 오척이 될까 말까 한 그 체구가 뿜어내는 정신의 힘. 흔히 노작들에 대해 ‘주례사’ 같은 서평을 하지만,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에 대해서는 수많은 인사들이 경외와 찬사를 보냈다. 1986년 이이화 선생과 손잡고 역사문제연구소를 창립하는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는 “사마천과 같은 철저한 역사인식과 치열한 열정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이화 선생에게 한때 한문을 배운 바 있는 박완서 선생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쓰고 싶은 글은 안 쓴다. 실로 보배로운 이 시대의 기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 세계화시대에 더 필요한 ‘한국사 읽기’

역사를 가슴으로 느끼며 읽게 해
현실과 연결 생각하는 힘 길러줘

선생은 1991년 박완서 선생 등과 중국을 여행했다. 유람선이 신의주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강변의 북한 사람들과 지호지간이 됐을 때 그는 뱃전에 엎드려 흐느꼈다.

고향이 북한도 아닌 그의 깡마른 어깨가 북받치는 오열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이름 없는 백성들이 산지사방으로 찢기는 분단의 고통을 그는 견딜 수 없어 했다. 역사 하는 그의 자세였을 것이다.

“역사란 특정인이나 특정한 계층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역사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되 오늘 우리의 현실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관이 중요합니다. 21세기로 가고 있는 이 세계화시대에도 민족주의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만이 우수하고, 우리만이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국수적 민족주의 또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선생은 각 편의 집필이 끝나면 젊은 연구자들에게 읽게 하고 비평과 의견을 들었다. 재야학자이지만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그의 작업을 응원하고 돕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작업은 출판사로서는 하나의 사건이자 축제였다. 독자들의 역사 읽기에 편의를 도모하고자 용어와 인명을 뽑아 풀이했고 그림과 사진과 연표를 곁들였다. ‘완간기념기획’으로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다>를 기획했다.

“저술작업을 통해 시대정신을 구현해내는 저자, 그런 저자를 성원하는 깨어있는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이 나라 출판문화에 우뚝 서게 될 이이화 선생의 작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일단락짓게 되는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우리 출판인들은 존재한다. 10년에 걸치는 이 장구하고도 장대한 작업을 해낸 저자 이이화 선생의 그 정신과 헌신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1986년 5월 지리산 역사기행 때 이이화 선생이 매천 황현의 사당을 방문한 참가자 일행에게 황현의 역사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 잘못된 역사 바로잡는 역사가

이이화! 그는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를 저술하는 역사학자였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운동의 최일선에서 헌신하는 역사가였다.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는 새로운 역사운동으로서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앞장섰다.

젊은 역사연구자들과 함께 미답의 역사연구에 나서는 학술운동을 펼쳤다. 동학농민전쟁을 제대로 평가하는 연구·저술작업뿐 아니라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의 선봉장을 맡았다. 2004년 11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이 출범하면서 이사장에 취임했다.

2000년 9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4년 1월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해 고구려역사문화재단을 발족시키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1년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한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 함께했다. 2004년 1월에 전개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모금운동은 민중들의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모금 시작 열하루 만에 목표액 5억원을 넘어섰다.

“나는 장엄한 역사드라마를 보았다”고 선생은 회고록 <역사를 쓰다>(2011)에서 말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지도위원으로 나섰고, 2009년 8월 온갖 방해를 이겨내고 출간됐다.

2009년에 발족하는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2010년에 결성되는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지요.”

나는 예술마을 헤이리를 건설하면서 이이화 선생께 말씀드렸다. 여기 와서 ‘역사사랑방’ 같은 걸 해보시자고. 마을엔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할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선생은 2007년 아치울에서 헤이리로 입주했다. 그러나 선생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과제가 끊임없다보니 역사사랑방 개설은 계속 늦추어졌다.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선생이 남긴 역사정신은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저 역사의 현장을 앞장서서 걷던 역사가 이이화. 우렁찬 목소리로 역사와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던 이이화 선생.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2020-04-21> 경향신문 

☞기사원문: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9)“역사를 모르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민족사 바로 세우고 ‘실천한 역사학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목, 2021/06/24- 05:15
0
0

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0
0

일본 시민단체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 유족 모임’은 오늘(7일) 일본 방위성과 후생노동성을 찾아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서명 용지를 전달했습니다.

서명에는 일본 전역에서 1만 1천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유골이라도 돌아와 달라는 유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絲滿)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 등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대표는 최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그간 수습된 희생자 7백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7> KBS NEWS

☞기사원문: “조선인 등 묻힌 토사 채취 반대”…日시민단체, 1만여 명 서명 제출

※관련기사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한겨레: “희생자 유골 섞인 흙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인도적 행위”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연합뉴스: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목, 2021/07/08- 05:10
0
0

민족문제연구소 “세계유산위, ‘일본에 유감 표명’ 결정문 채택해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故) 서정우씨 등의 영상은 최초로 공개됐다. 2021.7.16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는가’ 혼잣말을 하면서 매일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너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군함도(하시마·端島) 강제동원 피해자 서정우 씨)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 산업시설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최근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다루는 자리가 마련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 주최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11월 7일까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연다고 16일 밝혔다.

전시 영상들은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열네 살에 하시마 탄광에 동원됐다가 이후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겪은 고(故) 서정우(1928∼2001) 씨의 영상이 국내에서 공개되는 건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사복형사에게 연행돼 다카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던 손용암(78)씨,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제련소로 강제동원된 류기동(79)·손성춘(76)·이영주(77)씨 영상은 올봄 촬영돼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다.

징용 경험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군수시설에서 탈출하려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잇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모습에선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가 가늠될 정도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보통 강제동원을 떠올리면 ‘배고프다’ ‘아프다’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처럼 단편적으로만 안다”며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과정으로 가게 됐는지, 현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언어 소통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느낄 수 있게 증언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시민단체가 제공한 영상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이 제공한 중국인 포로, POW연구회가 제공한 연합군 포로의 증언 영상을 함께 전시해 강제노동이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연구소 관계자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2021.7.16 [email protected]

한편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은 일본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 센터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 12일 공개했다. 지난해 6월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군함도 등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조사단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일본의 관점뿐 아니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등 피해자의 시각까지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조사를 토대로 일본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이르면 이달 21일 열리는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공식 채택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세계유산위원회가 공개한 권고를 지지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권고를 채택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7-16> 연합뉴스

☞ 기사원문: 피해자 육성 담은 ‘일제 강제동원’ 전시회 서울서 개막

※관련기사

☞뉴스토마토: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등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 증언 공개

☞이투데이: ‘군함도 강제노동의 역사’,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의 증언

금, 2021/07/16- 23:38
0
0

간토대지진 희생 조선인 추도 비문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폭동으로 희생된 조선인 6천여 명을 추도하는 도쿄도 위령당 내의 비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26일 성명을 내고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진행을 촉구했다.

이들은 “2023년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로 이제라도 일본 정부는 진상을 공개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와 국회도 나서 자료 보존과 공개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9월 1일을 국가 추모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에는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박만규 흥사단 이사장, 송인동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 시민모임 독립 이사장,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장, 지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원로 17명이 참여했다.

<2021-07-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사회 원로들 “日간토학살 진상규명·추모사업해야”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최소 6600여명의 학살… 일본 의원도 나섰는데 우리 의원은 왜 말이 없나

☞오마이뉴스: “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 예순 두군데나 찔린 조선인이 남긴 유언

화, 2021/07/27- 06:50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