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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그는 왜 맨발로 남산성벽을 넘어야 했나? 고봉근 집터, 일본인 순사를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항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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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그는 왜 맨발로 남산성벽을 넘어야 했나? 고봉근 집터, 일본인 순사를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항거지

admin | 수, 2020/04/22- 02:19

[식민지비망록 57]

그해 겨울 그는 왜 맨발로 남산성벽을 넘어야 했나?
고봉근 집터, 일본인 순사를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항거지

이순우 책임연구원

서울 용산구에 있는 후암시장 삼거리에서 영락보린원(永樂保隣院, 후암동 370번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후암로 28길’을 따라 260미터 남짓 걷다보면 약간 언덕길을 이루는 지형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갈라지는 골목길(후암로 28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의 초입에는 한울연립주택이 서 있고, 이곳과 남쪽으로 등진 자리에 2층짜리 단독주택 한 채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김상옥 의사 항거 터’ 안내표지판은 이곳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자리는 ‘옛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304번지’에 해당하며, 고봉근(高奉根, 1896~1961)의 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 당시 돼지고기 행상을 했던 고봉근은 다름 아닌 1923년 정초에 서울은 물론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했던 의열투쟁의 주인공 김상옥(金相玉, 1890~1923) 의사와 처남 매제(妻男 妹弟)가 되는 사이였다.
지금은 이 일대가 온통 주택가 밀집지역으로 변한 통에 어떠한 주변 지형이 둘러싸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제강점기의 경성시가지도를 살펴보면 고봉근의 집은 조선은행 사택지(朝鮮銀行 舍宅地)가 넓게 포진한 지역의 외곽선에 간신히 터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곳은 삼판통 대로변에서 죽 이어지는 평지(平地)의 막바지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뒤쪽으로는 곧장 남산에서 흘러내린 비탈면이 높게 치솟아 있는 것이 지형상의 특징이었다.
일찍이 1920년 여름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이 경성을 방문하는 때에 맞춰 조선총독과 총독부 고관들을 처단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국 상해로 망명했던 김상옥 의사가 다시 빙판으로 변한 압록강을 도보로 건너 국내로 잠입한 것은 1922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국경선을 넘자마자 이내 경의선을 이용하여 일산역(一山驛)에 도착하였고, 그 이후 서울로 숨어 들어와서 각처에 며칠씩 유숙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당시 김상옥 의사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일본 국회에 참석하고자 조만간 일본으로 건너갈 것으로 알려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였다. 이를 위해 도쿄로 가는 출발지인 남대문정거장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려던 계획에 따라 김상옥 의사는 이 주변을 계속 살피는 한편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대기하던 도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에 종로경찰서 서편 급사실(給仕室) 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범인색출에 혈안이 된 일제 경찰에 의해 김상옥 의사가 고봉근(당시 28세)의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탐지되어 그해 1월 17일 새벽 5시에 경찰대가 이곳 삼판통 집을 포위하는 상황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일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김상옥 의사가 발사한 육혈포(六穴砲, 권총) 총탄에 맞아 일본인 순사부장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종로경찰서 형사부장)가 즉사하고, 이마세 킨타로(今瀨金太郞) 경부(종로경찰서 사법계 주임)와 우메다 신타로(梅田新太郞) 경부보(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도 중상을 입고 함께 쓰러졌다.

그러고 나서 곧장 집 뒤로 이어진 남산자락을 맨발로 박차고 올라 순식간에 남산 성벽을 타고 넘어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쪽으로 피신하였다. 김상옥 의사는 여기에서 다시 산줄기를 따라 왕십리 방면으로 나가다가 그 뒤쪽 무학봉(舞鶴峯) 안쪽 골짜기에 자리한 안정사(安靜寺, 일명 ‘청련사’)로 숨어들었다. 그 당시 서울 근교의 사찰들이 대개 그러했지만, 이곳 역시 기생들이 시중을 들며 술과 고기를 파는 음식점 영업이 성황을 이루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도망자의 몰골이 역력한지라 “노름을 하다가 경관에게 발각되어 여기까지 도망하여 왔으니 사람을 좀 살려 달라”고 짐짓 애걸하는 시늉으로 하룻밤 묵을 것을 허락받은 뒤에 그 다음날 저녁나절에 짚신 한 켤레와 목출모자(目出帽子, 털실로 짠 방한모)를 얻어 쓰고 그곳을 빠져나오게 된다.

 

김상옥 의사가 남산 성벽을 넘어 탈출할 때 하룻밤을 지새운 왕십리 ‘안정사’의 전경이다. 하지만 이 절은 지난 2009년 주택재개발 지역에 포함되면서 경기도 장흥으로 옮겨갔고, 그 바람에 지금은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진 상태이다.

 

이날에는 다시 왕십리 근처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마침내 1월 19일이 되어 동대문 밖 창신동(昌信洞)에 있는 본가를 찾아가 모친을 잠깐 뵌 후에 다시 효제동 73번지 이태성(李泰晟, 이혜수 동지의 부친)의 집을 은신처로 삼아 그곳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며 또 다른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상태에서 앞서 체포된 전우진(全宇鎭)의 자백으로 인하여 김상옥 의사의 소재지가 들통 나고, 이에 따라 1월 22일 새벽 3시에 경성 전역에서 동원된 수백 명의 경찰이 효제동 인근을 완전히 포위하며 체포를 시도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맞서 김상옥 의사는 옆집을 넘나들며 3시간 가까이 맹렬한 총격전으로 응전하다가 마침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무수한 총탄이 박힌 김상옥 의사의 유해는 가족에게 넘겨졌고, 그해 1월 26일 아침 장례절차를 거쳐 이문동공동묘지(里門洞共同墓地)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손에 꼽을만큼 강렬했던 의열투쟁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듬해에 다시 김상옥 의사의 자취를 상기시켜주는 또 하나의 기사가 신문지상에 등장하였다. 일찍이 그가 고봉근의 집을 벗어나 남산 쪽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서둘러 도망치다가 눈밭에 뒹구는 바람에 소지하고 있던 권총 한 자루를 분실한 적이 있었는데, 이 권총의 행방이 마침내 드러났다는 소식이었다.
<매일신보> 1924년 10월 9일자에 수록된 「전촌부장(田村部長)을 살해한 김상옥의 권총, 오랫동안 의문에 쌓였다가 지금에야 형체를 나타냈다」 제하의 기사는 그 내막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참 당시에 천하의 이목을 놀래이던 김상옥(金相玉)이 종로서의 전촌부장(田村部長, 타무라 순사부장)을 죽이던 육혈포(六穴砲)가 주인이 사라지기 전에 그 자취를 감추어 한 의문을 일으켰더니 주인이 죽은 후 해가 오래된 이제 와서 그 형적을 나타내었다.
시외 고양군 한지면 한강리(漢芝面 漢江里) 이만길(李萬吉, 27)은 작년 3월에 장충단(獎忠壇) 뒤 송림이 우거진 활터 근처 길가 눈 속에서 서슬이 시퍼렇고 탄알까지 박혀 있는 자동식 육혈포 한 자루를 얻어 가지고 한강리 근처 어떤 바위 밑에 감추어 놓은 후 작자만 나서면 팔아먹으려 하던 차 요사이에 이르러 들고 나서서 살 사람을 찾다가 동대문서원에게 발각되어 권총과 함께 체포되었다. 즉 이 권총이 김상옥의 사용하던 무서운 총인데 삼판통에서 전촌 부장을 죽인 김상옥은 남산을 타고 도망하여 장충단 근처에 이르렀을 즈음 얼음판에 미끄러지며 손에 쥐었던 권총을 놓치고 오랫동안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가 다른 사람을 놓아 이것을 찾고자 하였으되 이내 찾지를 못하였던바 이를 이혜수(李惠壽)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경찰에서도 그 근처를 모조리 헤매여 찾았으나 이내 찾아내지 못하였던 것으로 의외에 전기 이만길의 눈에 띄었던 것이었으며 이만길은 이 권총으로 인하여 처형되리라더라.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거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의열투쟁의 하나였던 김상옥 의사의 의거가 있고나서 그와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 8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에게 피신처를 제공했던 이들도 대개 범인장닉(犯人藏匿)의 죄로 일제의 추궁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당연히 김상옥 의사의 매제인 고봉근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에게는 증거불충분을 사유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동아일보』 1961년 11월 25일자에 수록된 김상옥 의사의 매제 고봉근 지사의 사망관련기사이다. 그의 집주소가 ‘후암동 369번지’로 되어 있는 걸로 보면, 평생 동안 그는 이 동네를 떠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약간의 세월이 흘러 불과 6개월여 뒤에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을 촉발한 뉴욕증권시장의 주가 대폭락 사태가 벌어지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던 1929년의 어느 봄날, 세상 사람들을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든 한건의 기사가 신문지상에 등장하였다. <동아일보> 1929년 3월 23일자에 수록된 「오개성상(五個星霜) 지난 금일(今日), 김상옥사건에 의운(疑雲), 일시 세상을 진동한 김상옥 사건에 종로서 폭탄범은 다른 사람이라고, 종로서 폭탄범(鍾路署 爆彈犯)은 타인(他人)?」 제하의 기사가 그것이었다.

일시 조선 천지를 놀래게 하던 김상옥 사건이라 하면 벌써 만 5주년 전의 일이지만 사건이 워낙 세상을 경동시켰을 만큼 아직도 일반의 기억에 새로운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하여 최근에 한 새로운 사실이 발각되어 시내 모 경찰에서는 방금 그 천명(闡明)에 활동중이라 한다.

『조선경찰관순직사』(1933)에 채록된 종로경찰서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경부의 공적내용이다. 그는 김상옥 의사를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의 범인으로 지목하여 검거활동을 펼친 공로로 ‘수훈자 표창’을 받았다.

 

김상옥이가 무덤에 들어간 지 5년 후인 오늘날에 새삼스럽게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은 김상옥이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진범인으로 지목받아 김상옥 사건에 유일한 공로자인 삼륜(三輪, 미와) 종로서 고등계 주임은 경관의 최고의 표창인 공로장(功勞章)까지 탔었는데 실상은 폭탄투척의 진범인은 김상옥이가 아니라는 것이 그 후에 우연히 발각되었으나 그 당시의 경찰부장이던 마야정일(馬野精一, 마노 세이이치) 씨는 공을 이룸에 급급하여 김상옥을 진범인 줄만 여기고 이때까지 지내왔으나 그 사실 진상이 차차 드러나자 필경은 모 경찰에서도 이 사건의 진상을 적발코저 방금 진범인을 수사 중이라더라.

 

비록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터지고 그 범인으로 쫓겨 김상옥 의사가 시내 여러 곳을 숨어 다니다 마침내 효제동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따로 있었다니 이건 무슨 얘기란 말인가?
그런데 이러한 지적은 알고 보면 1923년 사건 당시부터 이미 언급되어온 내용이었다. 실제로 <조선일보> 1923년 3월 16일자에 게재된 ‘김상옥 사건의 전말’에 관한 보도의 말미에 「신출귀몰(神出鬼沒)한 폭탄범인(爆彈犯人), 상금(尙今) 누가 함인지 막연부지(漠然不知), 전기의 사실 내용을 볼 것 같으면 김상옥은 정녕 폭탄범이 아니다」라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겨 있었다.

 

원래 이 사건이 일어나기는 종로서의 폭탄을 던진 것으로 인하여 삼판통 사건을 시작하여 효제동 사건 등 일월 이래로 시내에서 두 번이나 큰 사건 돌발하였는데 검사국에서 심문한 사건의 내용을 볼 것 같으면 김원봉에게서 보내인 폭탄은 안동현까지 와 가지고는 어찌되었는지 돌연히 자취를 잃게 되었으므로 김상옥에게 오지 아니한 것은 사실이 명백한 바이라. 그러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것은 정녕 김상옥의 소위가 아니오 다른 사람의 소위가 명백한 바이므로 경찰서에서는 지금까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야로 활동을 계속하여 혹은 북으로 서로 계속 탐지하는 중이라더라.

 

이러한 의구심만 잔뜩 던져놓고 여기에서 지목하는 진범에 대한 후속기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결론이 어떻게 맺어진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 당사자는 과연 누구라는 것일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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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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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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