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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언론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수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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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언론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수한 기자

admin | 수, 2020/04/22- 01:56

김수한 기자

3월 12일 오후 5시, 연구소 3층 회의실에서 헤럴드경제 기자인 김수한 후원회원을 인터뷰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1년부터 20년 가까이 연구소를 후원해 온 김수한 회원이 작년 8월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연구 주제가 이례적으로 김정일·김정은 정권하의 북한 언론 현황에 관련된 것이었다.몇 년 전부터 ‘기레기’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언론 개혁과 기자들의 자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현직 기자로서 여전히 금단의 영역이면서 조심스러운 북한문제, 그것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북한언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문 : 연구소는 언제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나요?

답 : 제가 95학번(고려대 노어노문학과)인데 2001년 2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상태에서 방학진 당시 사무국장 권유로 가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복학 후에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강좌나 소모임에 가끔 나갔었고, 2002년 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친일 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전시회 때 자원봉사도 했었죠. 그 무렵 누군가 고대 인촌(김성수) 동상에 페인트를 뿌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고려대 영자신문사 기자 출신으로서 ‘큰 사건’이라는 직감이 들어 방 국장께 전화해 사건을 알리기도 했었어요. 그때 방 국장이 전화통화 직후 즉시 고대로 와서 함께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었죠.ㅠ

문 : 1997년 창단된 한국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인 ‘붉은악마’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1997년 8월 고려대 영자신문사 편집국장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어요. 그때가 3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인데, 막상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오니 ‘은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체감이 좀 됐었어요. 신입생이던 1학년 1학기에 신문사 수습기자로 입사해 꼬박 2년 반의 기간을 기자로서 바쁘게 활동하며 학업도 병행한 셈인데 영어로 기사를 쓰랴, 전공 공부하랴 정말 바빴거든요.

근데 막상 ‘퇴임’하고 보니 별로 할 게 없는 거에요. 그동안 신문사 활동하면서 구멍 난 학점을 메꾼다거나, 자격증을 준비한다거나 이런 목표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표현으로 하면 ‘번아웃’(어떤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 왔는지, 아니면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암튼 좀 쉬고 싶었어요. 제가 일하던 신문사 편집국은 퇴임 후에도 여전히 집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그 무렵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혼자서 축구를 보러 경기장에 다녔어요.

제가 경북 포항 출신인데 당시 K-리그의 포항스틸러스를 응원하러 다닌 거죠. 그때 우리 프로축구계에는 ‘서포터’라는 개념의 유럽식 축구 응원 문화가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그 경기가 열리는 스타디움에서 12번째 선수로서 응원에 참여하는 거죠.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경기를 쫓아다니다보니 포항스틸러스 서포터들끼리 많이 돈독해졌어요. 우연히도 당시 포항스틸러스 서포터 회장이 고등학교 후배이자 이동국 선수(당시 포항스틸러스 소속)의 중학교 동창이었고, 그밖에도 포항공대에 다니던 축구 매니아 형님, 대구에서 포항팀 응원하러 포항 경기 때마다 포항으로 오시던 형님, 포항스틸러스 구단 프론트에서 일하던 박대리님 등과 팀웍이 잘 맞아서 정말 즐겁게 축구를 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그때까지 지금은 ‘붉은악마’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서포터가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당시 각 프로팀 서포터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PC통신 동호회에서 공지사항과 각종 의견을 주고받았는데요. 그때가 97년 8월 15일이었어요. 그날 나이키 초청 한국 : 브라질 친선경기가 잠실경기장에서 열렸는데, 그 경기를 앞두고 각 프로축구팀의 서포터들이 붉은 색의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맞춰 입고 힘을모아 대표팀을 응원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졌어요. 그리고 그 생각이 정말 실행으로 옮겨져서 각자 유니폼 비용을 계좌이체로 납부하고, 당일 경기장에 가서 물결 무늬의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배부받았어요.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K-리그 각 팀 서포터들이 사상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한 곳에 모여서 응원하는 역사적인 이벤트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때 기분은 그냥 뭐랄까, 정말 뭔가 엄청난 잠재력과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암튼 너무 뿌듯했고, 기뻤고, 떨리고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날 경기 내용도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한국이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맞아 전반전에 1대0으로 앞서 가다가 후반전에 2골을 먹고 2대1로 지긴 했지만, 정말 잘 싸웠어요.

그날의 흥분과 감동이 오늘날 붉은악마가 태동한 배경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97년 9월 28일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도쿄대첩’이 터집니다. 붉은악마 50여 명이 당시에 일본 도쿄 요요기 국립경기장으로 가서 응원전을 펼쳤는데, 저도 그 50여명 중 한 명으로 참가했습니다. 일본에게 1대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전 들어 서정원, 이민성이 동점골, 역전골을 넣어서 한국에서는 9시 뉴스에 ‘후지산이 무너졌다’, ‘도쿄대첩’ 등으로 난리가 났었지요.

1998년 새해를 맞아 고민 끝에 1학기를 휴학하기로 했어요. 그때도 고심했지만 지금 지나고나서 되돌아봐도 나름 인생의 큰 결단이었습니다. 1998년 6월에 프랑스 월드컵 본선이 열리는데, 제 어릴 때 꿈이 ‘1998년 월드컵 경기장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죠. 실제로 프랑스에 가든 안 가든 일단 월드컵이 열리니 오롯이 월드컵을 만끽하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닌다면 학점이 엉망일 것이고, 등록금을 낭비하게 될 것이고, 복학해서 학점을 올릴 기회도 없어지게 될 테니 나름의 합리적인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월드컵이 열리는 6월이 다가오면서 붉은악마 사무국에서 원정응원 명단을 짜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프랑스에 간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붉은악마는 예선 3경기를 다 보는 1진(14박 15일), 예선 2경기를 보는 2진(9박 10일), 예선 1경기를 보는 3진(4박 5일) 등 3개의 일정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2진으로 갈려고 했는데 제가 군 미필자에 휴학생이라 해외여행허가가 안 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게다가 2진 참가자가 내야 하는 경비가 200만원을 상회했는데 유럽 여행용 경비로서는 저렴한 편이었지만, 학생으로서 뾰족한 수도 없었어요.

저는 거의 반포기 상태가 되어 포항집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냥 ‘이제 좋은 추억으로 묻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붉은악마 회장(신인철씨)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너 꼭 갈거냐’고 묻길래 “꼭 가고 싶다”고 했더니 광화문으로 오라는 거에요. 그래서 서울로 다시 갔습니다. 가보니 군 미필자이면서 휴학생인데 프랑스 월드컵 본선 응원을 가겠다는 저 같은 동년배들이 6~7명 있었어요. 이들이 다 함께 모여 당시 광화문에 있던 문화체육관광부로 가서 공문서를 1장 받게 됩니다. 붉은악마 회장이 미리 요청해 장관 결제가 이뤄진 문서였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의 이 공문서에는 ‘이들이 프랑스로 월드컵 응원을 가고자하니 병무청장은 이들의 해외여행을 허락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문서를 받으러 정부청사를 방문한 우리들에게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라’며 환하게 웃던 공무원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문 : 어떻게 헤럴드경제에 입사했나요?

답 : 포항제철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지 ‘월계수’의 편집부장으로 활동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고려대 영자신문사 The Granite Tower에서 기자생활을 했어요. 1학년 때 수습기자를 거쳐 2학년 때 기자, 부장을 거쳤고 3학년 때는 편집국장을 했습니다. 고려대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남양주 광릉수목원 자락에 위치한 경희대 광릉캠퍼스 평화복지대학원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여기서는 영문 학술지 ‘피스포럼’의 편집장으로 활동했어요. 입학생 중 싱가포르, 벨기에, 필리핀 등 외국인 학생들이 있어 강의와 졸업논문을 영어로 써야 하는 특수한 환경이어서 영어 훈련에 도움이 많이 된 거 같아요.

대학원 졸업을 앞둔 2004년 말 언론사 시험을 보다가 막연히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 사설을 매일매일 읽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사설을 프린트하던 중 코리아헤럴드 수습기자 채용 공고를 보고 ‘혹시?’ 하는 생각에 지원을 했습니다. 대학교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했고, 영문 학술지 편집장도 했고, 영문 논문도 쓰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필기시험을 통과한 거 같아요. 영자신문 기자로 입사한 지 3년여 뒤에 같은 회사의 국문 경제지인 헤럴드경제로 옮겨왔습니다.

국문 경제지로 옮겨온 이유라면, 일단 영자신문 기자로서 평생 커리어를 쌓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요. 이런 고민을 지금은 작고하신 민영빈 YBM 회장님을 찾아가 털어놨더니 의외로 쉽게 ‘국문 매체로 가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그분의 조언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민 회장님은 재학 당시 고려대 영자신문을 창간한 장본인이셨고, 졸업 후 첫 직장이 코리아헤럴드였거든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제가 당시 회장 비서실에 문의하니 의외로 ‘몇날 몇시에 회장실로 오라’고 연락을 주셔서 2시간이 넘게 그분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제 인생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 초년병의 SOS 요청에 흔쾌히 시간을 내어주신 그분께 항상 빚을 지고 있는 기분입니다. 회장실에 찾아갔더니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으시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에게 첫 일성이 “너는 내 학교 후배에, 학교 신문사 후배에, 직장 후배이기도 하니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였습니다. 그날 주신 여러 조언에 대해 두고두고 감사하고 또 후배들에게 그분처럼 베풀고자 합니다.

헤럴드경제에서는 사회부, 연예부, 부동산팀 등을 거쳐 현재 정치부 외교안보팀 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문 :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언제였나요?

김수한 기자가 싸이월드에 올려놓은 ‘오세훈 불출마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기사를 캡쳐한 것

답 : 독자들로부터 좋은 기사를 썼다는 칭찬과 격려를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지금 돌아보니 특히 기억에 남는 기사로는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찬반 논란 관련 기사, 윤봉길의사의 사진 진위 논란 기사, 아파트 실명을 노출해 독자의 항의를 받은 부동산 기사가 떠오릅니다.

2010년 8월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무상급식안에 대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반발하면서 무상급식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오 시장은 주민투표 결과에 자신의 시장직 사퇴까지 결부시켰고, 결국 시장직을 사퇴하게 됩니다.

당시 이 사안의 전후 사정을 담담히 써내려 간 ‘오세훈 불출마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제하기사에 독자들의 폭발적인 성원이 답지했습니다. 비록 그 기사는 당시 서울시장 측의 문제 제기로 삭제됐지만, 그때 독자들이 보내주신 댓글은 지금도 잘 간직하고 가끔 읽어보고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사진 진위 논란 기사도 의미 있는 기사입니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10월 8일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뒤 체포된 윤봉길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에 대해 “진짜”라는 의견을 냅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윤봉길 의사의 연행 장면을 찍은 사진이 진짜라니, ‘그동안 가짜였나?’ 하는 의문이 들어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진위 논란이 일고 있는 윤봉길 의사 체포 당시 사진

그러다가 연구소의 방 국장으로부터 윤봉길 의사 사진 진위 논란을 처음 제기한 강효백 경희대 교수 이야기를 들었고, 강 교수로부터 윤 의사의 연행 사진은 가짜라는 의견을 다시 확인해 ‘사진 속 인물 윤봉길 아니다-강효백 교수 반론’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정부 기관은 ‘진짜’라고 했는데 논란을 제기한 주인공은 ‘가짜’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고 여전히 대립하는 이상한 사안이었습니다.

과거 상해 영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강 교수가 당시 사건 기록과 신문기사 등으로 재구성한 연행 정황은 사진과 많이 달랐습니다. 사진 속 남성은 일본 경찰로부터 신사적으로 연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윤봉길 의사는 실신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를 당해 달구지에 시체처럼 내동댕이쳐져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이 당시 신문기사 등에 생생히 남아 있었고, 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기존 연행 사진이 가짜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당시 김학준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이 호응하고 성형외과 등 전문가 그룹이 윤봉길의사 사진과 연행 장면 사진을 비교해 연행 장면의 남성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명박 정부 출범 얼마 후 국가보훈처가 그 사진에 대해 다시 “진짜”라는 의견을 내 논란이 된 것입니다.

이후 이 논란은 SBS 저녁 8시 뉴스와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등으로 다뤄져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2011년 3월 1일 SBS 저녁 8시 뉴스에서는 “윤봉길 의사 아니다..연행사진 조작가능성 커”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거사 직전 찍은 윤 의사의 사진을 3차원 영상으로 복원해 문제의 사진과 비교한 결과에서도 두 인물은 달랐다는 결론을 얻어냈다”며 “무참히 폭행당한 윤 의사의 모습이 공개될 경우 식민지 한국과 침략 중이던 중국 국민들을 크게 자극할 것을 우려해 일본군이 사진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또한 같은 날 3·1절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에서 해당의혹이 보다 심도 있게 다뤄졌습니다. 강 교수는 요즘도 가끔 저에게 “윤봉길 의사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종종 전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작성한 아파트 가격 하락 기사입니다. 당시 아파트 가격이 폭락한 상황을 기사화하면서 아파트 실명을 기사에 그대로 썼는데, 이 기사가 포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입니다. 급기야 그날 오후 해당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한 독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독자님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실명을 써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며 전화기 너머로 큰 소리로 흐느끼셨습니다. 경험이 적었던 기자 초년병 시절의 한 해프닝이었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일부 주민들게 큰 피해를 초래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과 함께 해당 아파트의 실명을 이니셜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주신 독자분께 사과의 말씀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독자분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기자 생활을 하는 내내 종종 불현듯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분은 “기자님, 독자의 항의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소신을 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라면서 본인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항상 자녀에게 “‘소신 있게살라’고 조언한다”고 하셨습니다. 언론인으로서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에 대해 보다 진지한 자세에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접근해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문 : 북한문제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답 : 제가 대학교에 입학한 1995년은 학생운동이 점차 사그러드는 시기였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막연히 가졌던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은 현실과 많이 달랐고, 학생운동은 점차 갈 길을 잃고 있었습니다. 입학 후 내내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화두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영부영 신입생 환영회 등의 통과의례를 모두 치르고, 온갖 술자리에 끼며 미래를 탐색하던 시절, 우연히 학교 신문사 수습기자 채용공고를 보고 신문사 입사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다행히도 합격을 하였고, 대학생 기자로서 학내 문제와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이슈와 국제 이슈를 보다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의 종언은 우리 세대가 맞이한 큰 사회적 흐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정신이 ‘독립’, 군사독재 시절 시대정신이 ‘민주화’였다면, 9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온 이른바 X세대들의 시대정신은 ‘통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점차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쩌면 사치스러운 바람이겠지만, 상황이 허락된다면 이 땅의 통일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싶다’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2006년 2월 석사 논문으로 한국과 미국의 탈북자 정책을 비교하는 내용을 주제로 삼았고, 2011년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19년 마무리한 박사 논문에서는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로동신문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주제로 했습니다. 석사논문 제목은 「The R.O.K. and U.S. Policies on North Korean Refugees(북한 탈북자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정책 연구)」(영문)이고, 박사논문은 ‘김정은 권력승계시기 로동신문의 변화 연구:편집국 인적 구성과 기사내용 특징을 중심으로’입니다.

문 : 박사학위논문에서 로동신문사의 편집국 인적 구성과 기사내용 특징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북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답 : 자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이 정해진 신분인증 절차에 따라 자료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만, 논문을 쓰기 위해 실제로 어려운 건 자료 분석입니다. 로동신문 수년 치 자료를 모아서 이를 다양한 분석 기법을 활용해 여러 면에서 분석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습니다. 저는 자료 분석에만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분석에 기나긴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때로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 같고, 아무 것도 안하면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박사논문을 쓰기 전에 방법적으로 서툴러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박사 논문을 시작하기 전에 로동신문을 주제로 한 소논문을 쓰기 위해 약 3개월치의 로동신문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요.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로동신문을 복사해 자료를 모으다 보니 약 3개월치 신문 자료 확보에 2달여를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문 :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가 김정일 사망부터 김정은의 권력 공고화 시기까지인데 이 기간에 로동신문의 변화 양상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답 : 제 박사 논문의 결론을 단순화하면 딱 2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로동신문 편집국의 규모가 축소됩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김정일 시대 로동신문 편집국에는 278명의 기자가 소속돼 있었는데, 김정은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자 수가 189명으로 급감합니다.

둘째 결론은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면서 로동신문의 내용이 크게 달라집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정치나 사상과 같은 주제가 신문의 메인 주제였다면 김정은 시대에 가장 중요시되는 주제는 ‘경제 발전’이나 ‘과학기술 강조’ 등입니다.

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이어지는 기간을 중대한 정치적 사건을 기점으로 총 5개 시기로 구분하여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로동신문 기명 기사 1만3252개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고, 5개 각각의 시기별로 약 3000여개의 기명 기사를 전부 수작업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자료를 기자별 기사 리스트로 재가공해보니 기자별 10~20개의 기사 목록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기자마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분야의 기사를 꾸준히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기자별 소속 부서를 유추할 수 있었고, 분석 기간 중 로동신문에 이름을 올린 기자의 소속 부서를 모두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결국 5개 시기별 로동신문 편집국 조직도를 추정적으로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5개 시기별 로동신문 편집국 조직도가 도출됨에 따라 5개 시기별 로동신문 기자들의 부서 이동 현황도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로동신문 기자들의 부서 이동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대남 및 대미 메시지를 내는 조국통일부와 국제부 소속 기자들의 부서 이동은 상당히 제한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시기별 분석의 기간을 얼마만큼으로 잡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실 일간지 기자의 면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주일치 기사만 분석해도 부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언론인 로동신문의 특성을 고려해 처음에는 5개 시기별 1개월치 기명 기사를 전수 분석하였는데, 왜냐하면 일간지 기자로서 1개월동안 기사를 1건도 쓰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공산주의 언론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 기간을 처음에는 2개월치로, 3개월치로 계속 늘려보다가 최종적으로 시기별로 6개월치의 기명 기사를 전수 분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주일치에서 1개월치, 2개월치로 늘렸다가 결국 6개월 동안 1건의 기사도 쓰지 않는 기자까지 잡아낼 수 있도록 연구 범위를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편집국 조직도가 구체적으로 파악된 후에는 신문의 내용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서구 신문방송학계에서 사용하는 내용 분석 기법을 차용하여 5개 시기별 로동신문 내용을 분석한 결과 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 초기까지 로동신문에서 가장 빈도수가 많았던 기사주제는 ‘사회주의 혁명사상 고취’였으나, 김정은의 후계 체제가 공고화된 5번째 시기부터 ‘경제발전’을 주제로 한 기사들이 가장 빈도수가 많은 기사로 올라서는 변화가 포착되었습니다. 또한 1~4 시기에 주로 중하위권에 있었던 ‘과학기술 강조’ 관련 기사가 빈도수 3위로 올라섭니다.

이러한 논문의 결론은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방만한 구조의 로동신문 편집국 구조를 효율화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을 한편에서 제기하며, 또 한편으로 김정은 집권 후 실시된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주장한 비핵화 수용 및 경제 발전 추구 기조가 하루아침에 나타난 정책적 기조가 아니라 김정은 집권 후 서서히 꾸준한 과정을 통해 ‘빌드업’된 기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문 : 북한언론 연구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후원회원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제가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연구소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내었고, 앞으로도 계속 큰 성과를 내실 거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역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들 수 있습니다. 연구소가 방대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완료함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친일반민족 인사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자체가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부 친일 인사들에 대한 논란 자체도 더 이상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논란 종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2년에 국방부에서 백선엽 장군에 대한 뮤지컬을 만든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언론 브리핑에서 그 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분인데 굳이 뮤지컬까지 만들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의가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뮤지컬 제작 계획 자체가 취소되었습니다. 그 취소의 배경에 친일인명사전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인사를 검증할 때 이런 식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이라는 검증요소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그만큼 연구소가 사회에 확고한 기준을 제공하는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소의 이런 긍정적인 측면도 물론 중요하지만, 일부 정치세력들이 연구소를 특정 정치이념에 편향된 집단으로 매도하고 비판하는 경우 또한 없지 않습니다. 이른바 ‘좌파’ 단체로 규정하고 연구소의 목소리에 색깔론을 씌우고 비판하는 것이죠.

저는 앞으로 연구소가 이러한 편견을 깨고 한 발 더 도약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어떠한 정치이념에 편향됐다는 비판에 휘말리지 않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연구를 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북이 진심으로 통일에 대해 논의하고,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는 시대가 곧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에 대비하여 우리 사회에서 향후 우리 사회 안의 친일문제에 대해 보다 더 활발한 논의가 진행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앞두고 나라를 한 번 고쳐 세우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이러한 논의를 위한 성숙된 이론적 기반과 자료 연구 및 조사가 밑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남북통일을 더욱 당당히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연구소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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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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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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